4. 그늘 속의 그림자 (2)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 찾아와 있었다. 그는 나른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였다. 흐릿하게 맺혀있던 세상이 눈동자 속에서 선명한 상을 맺었다. 그 상 안에서 하선우가 거의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강주한의 얼굴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 각이 져 한편으로는 수척한 느낌마저 드는 사내다운 얼굴, 그리고 감겨있는 눈꺼풀. 창가를 등진 그는 하선우를 향해 모로 누워 있었다.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헛숨을 삼키며 몸을 뒤로 주춤 물리던 하선우는 곧 깨달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침대와 침대와의 거리가 좁을 뿐이었다.
그는 기억을 띄엄띄엄 떠올렸다. 간밤의 소동 중에 강주한은 바람을 쐬러 나갔고 그사이 그는 불도 끄지 않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강주한이 언제 들어왔는지, 들어와서 무엇을 했는지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9시 반에 시작될 오늘의 일정에 비해 이른 시작이었다.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다 강주한을 깨우고 싶지 않아 다시 누웠다. 쓰린 배를 쓰다듬던 하선우의 시야에 침대 사이에 놓인 테이블이 들어왔다. 갈색 병의 음료가 놓여 있었다. 몰려오던 잠이 다시 확 깨서 하선우는 음료를 빤히 바라보았다. 소화제였다. 바람을 쐬러 갔다 온 사이 사온 모양이었다. 약국이 모두 문을 닫아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산 드링크류였다.
신기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 소화제를 응시하던 하선우는 손을 뻗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갈라지듯 깔깔했던 입안에 소화제를 털어 넣었다. 알싸한 맛이 시척지근한 속을 개운하게 했다.
예상 밖의 배려였지만 그의 마음이 누그러지지는 않았다. 그는 어젯밤의 일을 차마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묻던 강주한의 말에 극구 부인하다 참지 못하고 구토하던 어젯밤의 그는, 누가 보아도 지레 찔려 과민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일 터였다.
아예 게이라고 광고를 하지 그래. 여전히 어지러움이 남은 머리를 감싸며 하선우는 소리 죽인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직구를 던졌건 스트라이크존을 내줄 수는 없었다.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며 태연하게 구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침대에 푹 몸을 파묻고 하선우는 강주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겨있는 눈꺼풀 너머 검은 물이 차갑게 응고된 것 같던 까만 눈동자를 기억해냈다.
내 사람으로 두고 싶어 접근한 거잖습니까.
내 사람. 단어의 어감이 주는 달콤함을 믿어도 될지 그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엘텍은 수만에 이르는 직원을 두고 있었고, 하청업체만 해도 수백 곳이 넘었다.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NnG의 하선우를 고른 이유가 무얼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선우는 근거를 찾으려다 관두었다.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던 강주한의 말이 뒤따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하선우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재빨리 눈을 감았다. 잠이 깨 몸을 뒤척이던 사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진동 소리가 파삭파삭하게 마른 아침 공기 속으로 울려 퍼졌다.
예, 예.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강주한의 목소리가 꺼끌꺼끌하게 갈라졌다. 잠결에 간단하게 통화를 끝낸 강주한은 말했다.
“잘 잤습니까.”
모르는 척할지 말지를 고민하던 하선우는 결국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졸음이 남은 얼굴로 하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가늘게 하선우를 바라보던 강주한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머리가…….”
“머리가요?”
“…아닙니다.”
“전무님은 잘 주무셨습니까.”
“그럭저럭요.”
잠에 겨운 얼굴로 강주한은 하선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려니 어색함이 몰려왔다. 결국 하선우는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키려 침대를 짚었다.
“일어나봤자 할 것 없으니 더 주무십시오.”
자신의 팔로 팔베개를 한 강주한은 침대에 파고들며 말했다.
“아침은 8시 반쯤에 먹기로 하고. 자요.”
게으름을 부리듯 느른한 말투로 말한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엉거주춤 허리를 반쯤 일으켜 세웠던 하선우는 다시 잠을 청하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늑장을 부리는 모습이 의외였지만 강주한의 말대로 지금 두 사람은 할 일이 없었다. 낯선 타지, 그것도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장소에서 산책을 나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하선우는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분침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10분을 가리켰을 때 하선우는 허리를 일으켰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강주한을 흘끔 쳐다보다 발소리를 죽여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몰골을 본 하선우의 입술이 벌어졌다. 어젯밤 머리도 다 말리지 않은 상태에서 잠들어 직모의 머리카락이 까치집처럼 뻗쳐 있었다. 눈 밑의 다크써클 때문에 눈자위가 꺼져 보이고 몰골이 부스스했다. 칫솔도, 면도기도 없는 이곳에서 그나마 체모가 적은 편이라 수염이 거의 올라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미지근한 온수로 대강 씻고 밖으로 나오자 그사이 침대에서 일어난 강주한은 전화를 받고 있었다. 건조해 보이는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 잠결이 겨우 가신 목소리로 객실의 번호를 말하고 있었다.
“누가 오나 보죠.”
전화를 끊은 강주한에게 하선우는 물었다.
“비서가 올 겁니다. 거의 다 도착했다는군요.”
강주한은 테이블 위의 빈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셨어요? 일단 되는 대로 사왔는데.”
“잘 마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의점에서 산 거라 별 효과는 없을 겁니다. 안 마시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어깨를 으쓱인 강주한은 졸음이 가신 얼굴로 생수병을 찾아 물을 마셨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강주한의 수행비서인 안 비서가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몇 개의 종이봉투가 가득 들려 있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시장하시죠.”
마르고 긴 얼굴과 얇은 입술 때문에 미소를 띠어도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사내는 빠르게 방 안을 훑어본 뒤, 들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을 봉투 안에서 하나하나 꺼내던 그는 테이블이 작아 마땅히 둘 곳이 없자 침대에 백색의 테이블보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올렸다. 먼 길 와 상까지 차려주는 안 비서의 행동이 부담스럽고 송구해 같이 음식을 올리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이 죽을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들어요.”
“…예.”
그릇을 하나둘 올리다 보니 차려놓은 모양새가 성찬이었다.
“나머지 물건은 봉투 안에 들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한 안 비서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빈손으로 좁은 방 안을 나가려 했다.
“안 비서님. 같이 드시죠.”
“아닙니다. 맛있게 드세요. 저는 울산지부에 들러야 해서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 비서는 친절하지만,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미소를 지었다. 하선우는 더는 권유하지 못하고 비서를 보냈다. 시간은 8시 25분, 30분에 아침 식사를 하자고 했던 강주한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이 음식들은 서울에서 가져온 것으로 자정을 넘겨 조리했고, 안 비서는 새벽녘에 출발해 울산에 도착한 것이었다. 고작 아침 식사일 뿐이었지만 사용인으로서 강주한의 말은 모든 것이 지상명령이었다. 무엇보다 우선되는 먹고사니즘의 논리에 하선우는 씁쓸함을 느꼈다. 반면에 안 비서의 수고로움은 당연한 일이지, 늘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왔을 강주한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닫힌 문을 멀거니 쳐다보다 케이스의 비닐을 뜯어내는 소리에 하선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미지근하게 식었지만 음식은 그릇에 갓 담겨 나온 것처럼 제 형태를 띠고 있어 먹음직스러웠다. 무리를 했다간 어제처럼 탈이 날 거란 예감에 죽 그릇만 제 앞으로 당겨놓고 하선우는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속은 좀 어때요.”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밥 먹고 소화제 드십시오. 봉투 안에 들었을 겁니다.”
강주한은 눈으로 바닥에 내려놓은 봉투를 가리켰다. 종이봉투 안에는 소화제는 물론 면도기와 칫솔, 일회용 스킨과 같은 사소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쉬운 말 한 번 붙이지 못할 만큼 매섭게 생긴 그는 성정 역시도 꼼꼼한 편이었다. 비록 강주한의 수족처럼 부려지는 사람이지만, 남들보다 더 배웠고 차기 최고경영자의 수행비서로서 가진 권력이 작지 않았다.
“음식이 안 들어가나 보죠.”
붉은 고추를 저며 모양을 내 부친 전요리를 집으며 강주한은 물었다. 단순한 아침 식사에 불과했지만 임금의 수라상에 찬을 올리듯 전 하나하나가 공들인 모양새였다.
“탈날까 봐 자제하는 중입니다.”
“하긴, 차멀미라도 하면 곤란하죠.”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맥을 못 추는 호랑이처럼 느슨한 분위기의 그를 힐끔 쳐다보다 하선우는 곧 수긍했다. 아침형 인간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야행성인 듯했다. 아침의 그는 행동 하나하나가 구멍이 잔뜩 뚫린, 부드럽고도 성긴 스펀지 같았다.
부스스한 몰골로 아침을 챙겨 먹고 있자니, 하선우는 어젯밤 날을 세우게 만들었던 긴장과 공황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강주한과 하선우 사이에 손톱만 한 유대가 생겨나는 것 같기도 했다.
울산의 아침은 서울의 아침 못지않게 싸늘했다. 방금 시동을 건 차 안 역시 냉골이었다. 하선우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차창 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지난밤 어둠에 잠겨 어슷하기만 하던 연수원의 형체는 맑게 개어 있었다. 밝은 낮 연수원의 풍경은 어느 갑부의 호화로운 정원을 떠올리게 하던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에는 임원 전용 사택으로 가죠. 어제처럼 방이 좁아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다음에도 같이 엘텍의 연수원에 올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하선우는 일단 대답했다.
“예.”
먼 곳을 바라보던 하선우의 눈동자가 지척에 초점을 맞췄다. 차창에 비친 모습을 살펴보던 하선우는 잔뜩 구김이 간 양복을 손으로 쫙쫙 잡아당겼다. 그리고 곁눈으로 강 전무를 훔쳐보았다. 안 비서가 가져온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짧은 시간을 들여 머리 손질과 면도까지 마친 그는 언론에서 비치던 모습처럼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연수원을 벗어난 차는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좁은 이차선의 도로를 달리는 동안 하선우는 방파제를 낀 바닷가와 곳곳에 활어회를 파는 횟집, 드라이브하는 관광객을 위해 마련해둔 벤치를 보았다. 초겨울의 바닷가는 사람의 흔적 없이 텅 비어 있었고 하늘 또한 구름이 드물었다. 태양은 동쪽으로 낮게 떠올라 있었고, 일그러진 수면을 따라 희게 산란하는 빛을 뿜어냈다. 따듯한 미풍이 불 것 같은 날씨였다.
해안도로를 벗어나자 주변 풍경이 삭막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단 부지가 그들의 좌우로 넓게 펼쳐졌다. 원자재 생산에서 출고까지 모두 마무리될 90만 평의 엘택의 대규모 공장단지였다.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바리케이드가 끝나고 십 수 분을 더 달리자 공단이 드문드문 들어선 좁은 도로가 나타났다. 고만고만한 중소기업 제조단지가 모여 있는 주변 풍경은 밤에 보았던 것 이상으로 삭막했다. 불경기의 외풍에 추풍낙엽처럼 시들어 문을 닫고, 경매로 나온 땅을 안신그룹이 사들였다는 곳이었다. 그리고 강주한의 말에 의하면 이 땅은 곧 엘텍의 수중으로 넘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강 전무는 ‘성일금형’이 또렷하게 적힌 아크릴 간판을 지나쳐 목적지 부근에 차를 세웠다. 하선우는 대시보드에 표시된 밖의 온도를 보았다. 영하의 날씨였다. 코트까지 걸친 강주한과 달리 슈트 재킷만을 겉옷으로 입은 하선우는 몸을 바짝 긴장시킨 채 밖으로 나왔다.
성일금형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회사 문패가 먼저 반기는 철제문 앞에 섰다. 밤중에 보았던 공장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지만, 대낮의 성일금형은 휴일을 맞이한 공장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공장을 분할해 용도별로 나눠 조금의 보수공사만 마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장이 부도나 경매로 넘어간다면, 낮은 가격에 매입할 수 있는 조건 좋은 곳이었다.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볼 수 없었기에 하선우는 작게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대형 프레스와 각종 공정에 사용되는 모든 기계가 그대로 있었다. 가동을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였다. 전자제품의 외형 케이스를 만들었던 업체인지 바닥에는 가공이 되다 만 플라스틱 케이스가 쌓여 있었다.
NnG는 알루미늄 케이스를 만들었고, 성일금형이라는 회사는 플라스틱 외장 케이스를 만들었다. 부도난 회사는 크게 보면 NnG가 하는 일과 흡사한 일을 하고 있었다. 제조방식 차이도 크지 않았고 이동 동선도 흡사했다. 강주한의 말처럼 NnG가 입지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탁 트인 부지를 바라보는 하선우의 머릿속에는 구체적인 공장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조만간 입찰 진행되면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선우의 부푼 목소리에 웃은 강주한은 들고 있던 가방 안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그가 건넨 파일 안에는 공장부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토지면적과 건평, 기계의 종류와 가격대에 대한 설명을 읽어 내려가던 하선우의 눈에 이름이 들어왔다. 토지 소유주의 이름은 문범석이었다.
문범석.
이유 모를 기시감에 하선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는 이름 같았지만 기억을 끄집어내도 매치되는 얼굴이 없었다.
엘텍전자와 거래하던 하청업체인가. 엘텍과 거래하다 부도가 난 회사인지를 묻는 게 꺼림칙해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하선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엘텍의 담당자를 만나러 간 길에 명함을 주고받거나,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장소를 옮겼다. 물류창고 앞이었다. 트럭이 수없이 지나다닌 흙바닥은 콘크리트바닥처럼 단단했고,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넓게 트여 있었다. 정중앙의 출입구는 굳게 잠겨 있었지만 옆면으로 난 덧문은 열려 있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아 깜깜한 창고 안에는 뭔가가 높게 쌓여 있었다. 문을 활짝 열자 빛이 길게 늘어졌다. 창고에는 구형 핸드폰 케이스가 쌓여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폴더형 플라스틱 케이스와 재작년에 출시된 전자기기 모델들이었다. 부품을 집어 든 하선우는 성일금형이 엘텍전자와 거래하다 망했다는 오해를 바로잡았다. 케이스에는 전자 그룹 중 하나인 R&K그룹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대기업으로부터 고스란히 재고를 떠안고 부도가 난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온 하선우는 공장을 주욱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에 직원 기숙사만 지으면 완벽하겠는데요.”
“지은 지 오래된 곳이라 보수가 많이 필요하긴 할 겁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굉장히 양호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강주한은 손목의 시계를 살폈다. 한 시간에 걸친 시찰 끝에 그들은 공장부지를 벗어나려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해안도로를 달릴 때까지만 해도 부풀었던 마음 한켠이 답답해졌다. 좋은 조건의 공장부지를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은 마음 한편으로 씁쓸함이 몰려왔다. 부도가 난 제조업체를 볼 때마다 느끼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하선우는 엘텍전자의 구매 파트 과장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내내 상전처럼 굴던 사내는 갑자기 뭔가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이석과 하선우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엘텍의 직원들 사이에서는 엘텍의 협력업체 주식을 사는 것을 금칙처럼 여기고 있다는 말이었다. 거래처가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르기 때문에 하청업체의 주식을 투자목적으로 사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는 소리였다. 건실하게 내실을 쌓아가고 싶어도, 언제 휴지조각이 될지 모르는 잡주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선우는 백미러를 통해 멀어지는 공장을 돌아보았다. 돌출형 간판에는 고딕체의 성일금형이 눈에 띄게 새겨져 있었다. 성일금형. 그리고 성일금형의 사장 문범석. 대기업을 상대로 제조공장을 차려 이만큼이나 성장시켰다면 보통 사업수완이 아니었을 테지만 결국 사내는 수억, 혹은 수십억의 빚만 남겨놓고 고배를 마셨다.
하선우는 곧 성일 사장에게 이입하던 생각을 차단했다. 부도난 회사와 달리 NnG는 잭팟이 터진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말라가는 도랑에 엘텍의 물줄기가 차오른 지금, 미래에 초를 치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굳은 표정의 하선우를 룸미러를 통해 흘깃 살피며 강주한이 물었다.
“속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겠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고개를 젓자 강 전무는 더는 묻지 않았다. 룸미러를 통해 이따금 하선우를 지켜보던 강주한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차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는 대신, 울산 시청을 경유해 인터체인지로 진입했다. 시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 비서가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게 되면서 두 사람은 차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 목받침대가 없는 가운데 자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은 그들은 대구를 지날 때까지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음 일정을 보고하는 안 비서의 말을 묵묵히 듣던 강주한은 그로부터 건네받은 공문을 읽기 시작했다. 안 비서의 수고로 예상치 못하게 편하게 서울로 올라가게 된 하선우는 막힘없이 뚫린 차창 밖 고속도로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따듯한 차 안에서 클래식 채널로 맞춰둔 라디오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하선우는 조금씩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뇌리에 남은 이후의 기억들은 과하게 취한 다음 날의 기억처럼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잠에 취해 반편이 된 기억 속의 강주한은 비서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 전무와 안 비서가 함께 있는 차 안에서 꾸벅꾸벅 병든 병아리마냥 잠드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간이 부은 것 같아 도중에 하선우는 억지로 눈을 떴다. 그들은 안신그룹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유상렬 씨의 도움으로 차명계좌에 대한 자료 확보했습니다.”
“협조할 마음이 없던 것 같던데, 갑자기 생각이 바뀐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추천서에 마음이 열렸다고 하더군요.”
“강 본부장이 버지니아 장학생 출신이라고 했죠.”
“예. 마침 세무 공무원 딸이 버지니아 공대 목표로 진학 준비 중입니다. 아마 그 이유가 컸을 겁니다. 안신 비자금의 차명계좌 추적을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강 본부장 힘이 컸군요.”
가물거리는 눈을 뜬 하선우는 서서히 그들의 대화에 젖어들어갔다.
“국세청에서 추가 증거자료를 전달해준다고 했으니 이번 주 내로 9조 3,400억이 유산일지, 비금일지는 단락이 잡힐 겁니다.”
“전에 뽑아준 리스트에 소송대리인에 대한 자료가 불분명하던데요.”
“경력 외에 다른 게 필요하십니까.”
“전관한 판사의 사법 동기에 대한 분석이 빠졌더군요. 이번 주 내로 올리라고 지시하세요.”
끼어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하선우는 다시 꾸벅꾸벅 조는 흉내를 냈다. 엘텍은 안신그룹의 약점을 잡아 소송까지 불사하며 일반인인 하선우가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힐끔, 하선우는 곁눈으로 강주한의 옆얼굴을 살펴보았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안 비서의 말을 경청하던 그가 하선우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귀를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엿듣기라도 한 듯이 하선우는 뜨끔했다.
“대전을 지났으니 서울까지 두 시간이 좀 안 걸릴 겁니다.”
하선우는 하는 수 없이 눈을 떴다.
“예.”
“저와 안 비서는 천안에 볼일이 있어 도중에 내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강 전무의 침묵에 하선우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옆얼굴에 강주한의 눈길이 닿았다.
“오늘 저녁 함께하고 싶었는데 어쩌죠. 선약이 있어서 취소할 수가 없군요.”
“어쩔 수 없죠. 어제 오늘 시간 할애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했습니다.”
강주한의 대화 패턴대로라면 다음 주 토요일에 약속을 잡을 것 같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강주한은 다른 말을 꺼냈다.
“앞으로 업무제휴에 관한 사항은 임 부장에게 일임할 테니 모든 일을 임 부장과 함께 진행하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말했던 연수 문제 역시… 임 부장에게 말해두겠습니다. 원하지 않는데 무리해서 참석할 필요는 없으니 하 사장님 뜻대로 하시죠.”
강 전무는 더 이상 안 볼 사람처럼 얘기했다. 석연치 않은 이별의 투에 하선우는 물었다.
“어디 가시나 보죠.”
“그건 아니지만 울산 공장 완공일로 연말까지는 쉼 없이 바쁠 것 같군요. 한동안은 뵙기 어려울 겁니다.”
“언제 또 뵙게 될지 모르니 많이 아쉽습니다.”
“기회가 되면 만날 일이 있겠죠.”
지금껏 많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왔던 상대였지만 그는 70여 개에 달하는 계열사 사장들도 만나기 쉽지 않은 남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방통행만이 있을 뿐, 하선우가 원한다고 해서 차단된 길이 열리지 않았다. 강 전무가 멀어진다 생각하자 내도록 그를 거북해했으면서도, 간사하게도 마음 한편으로 불안함이 스며들었다. 마치 구원줄이었던 행운이 멀어지려는 것 같아 고민 끝에 하선우는 입을 열었다.
“매번 신세만 져서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다음에는 저희가 저녁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졌던 일로 경솔하게 행동했던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강주한은 말없이 하선우의 뒷말을 기다렸다.
“본의 아니게 언짢은 티를 냈던…….”
“아아. 욕실에서 말이죠.”
“예.”
운전을 하던 안 비서가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흘긋거렸다. 강 전무의 그늘진 시선이 안 비서의 목덜미 어디쯤으로 낮게 들어 올려졌다.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대를 힘주어 잡은 안 비서는 표정을 지워 관심을 차단한 얼굴을 했다.
“아닙니다. 쓸데없는 추측으로 하 사장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저였죠. 제가 오히려 더 미안합니다.”
“아뇨. 우연히 그런 상황이 겹쳐서 오해를 하셨던 거겠죠. 제가 그 친구와 워낙 친해서. …하하.”
강주한은 입술만을 당겨 웃었다. 금방이라도 휘발할 것 같은 미소였다. 어색한 웃음을 거두며 우물쭈물하던 하선우는 어렵게 입을 뗐다.
“전무님.”
“예.”
“실례가 아니라면 전화번호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눈을 마주친 채로 고민하던 강 전무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검색해 곧장 통화버튼을 누르자 하선우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이미 하선우의 번호를 저장해둔 상태였다. 전화를 끊은 강 전무는 하선우에게서 핸드폰을 가져와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지금 적어드리는 번호는 안 비서 번홉니다.”
번호를 저장한 강주한은 하선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용무가 있다면 우선 비서를 통해 전해주시죠.”
강주한의 분위기는 여전히 우호적이었지만,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 심리적인 거리감이 있었다.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고용인, 그 유령을 통해 걸러진 용건만을 전달받는 강주한. 그에게 접촉할 수 있는 열쇠를 주었지만 하선우는 마음대로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없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건 나 혼자뿐이었던 것 같아 씁쓸하군요.’
어젯밤 강주한은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식은 얼굴로 낮게 속삭이던 강주한의 얼굴을 떠올린 하선우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마치, 강주한의 말이 반대로 적용된 듯한 상황이었다.
하선우는 조금 마음이 이상해졌지만 곧 인정했다. 자신들에게 유용한 외부인만을 걸러내는 것은 그와 같은 사회적 계층이 즐겨 사용하는 배타적인 특권이었다. 강주한 역시 배타적인 특권을 익숙하게 사용해왔을 것이고, 상대방이 서운할 수도 있는 말을 그는 큰 의미 없이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까워지는 것도 강주한에 의한 것이고, 멀어지는 것 역시 강주한에 의한 것이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차는 고속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크리스털 벨리로 향했다. 엘텍의 천안 사업장에서 내린 그들은 곧장 대기하고 있던 차로 갈아탔다. 멀어지는 중후한 세단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선우는 배웅하려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마취된 듯한 피로 속에서 진지하게 따져 묻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했다. 얹힌 속처럼 마음에 갑갑함을 드리우던, 강주한이란 인간에 대한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을 떠올렸다.
그에게 다가가는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강의 수심을 재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귀중한 보물이 가라앉은 강은 보물을 어디쯤에 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고 하선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강에 발을 들여야 했다.
어딘가에 깊은 구덩이가 있을지 모르는 검은 강은 조금씩, 조금씩 허리를 향해 차올랐고, 수면을 따라 마음은 점점 더 위구심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지금, 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려 걸음을 멈추자 파랑이 잦아든 검은 수면에는 하나의 얼굴이 비추었다.
사늘하게 찰랑이는 검은 수면 속에는 하선우가 있었다. 그 심연 너머에는 믿어지지 않는 기회에 희열을 느끼면서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하선우가 있었다. 그리고 하선우는 원하는 보물을 건져낼 때까지 수심을 잴 수 없는 검은 심연을 망설임 속에서 나아가고 또 나아갈 것이었다.
* * *
“얼굴이 왜 그러냐.”
하선우의 피곤에 절은 얼굴을 본 이석이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대꾸 없이 이석을 밀며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TV 화면에는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이 일시정지 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신문지와 책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창문을 열고 허물처럼 벗어둔 이석의 양복을 치운 하선우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방 안 가득히 고여 있던 자욱한 담배 냄새가 빠져나간 뒤에야 하선우는 숨통이 트이는 얼굴을 했다.
“갈아입을 옷 좀 빌려줘라.”
옷장에서 꺼낸 추리닝을 하선우의 얼굴 위로 던지며 이석은 곧바로 물었다.
“강 전무가 말했던 울산 공장부지는? 어때, 괜찮아?”
“괜찮더라. 근데 나 딱 한 시간만 자고 나중에 물어보면 안 되나.”
“응. 미안하지만 궁금해서 안 되겠다.”
모르는 척 몸을 뒤집어 눕자 이석은 하선우의 어깨를 잡아 다시 정면을 보게 했다.
“무슨 땅이디? 어디에 있는 건데.”
대답하지 않으면 재우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목소리에 하선우는 결국 순순하게 대답했다.
“울주군에 있는 땅인데 바다에서 좀 먼 내륙 쪽이더라. 이번에 완공된다던 엘텍 공장단지 근처에 붙어 있는 공장이라서 위치는 좋아. 회사가 부도나서 조만간 입찰 나온다고 하고.”
“부도난 회사면 시설은 이미 갖춰져 있고? 기계까지 포함해서 매입하는 거냐?”
“글쎄. 그건 가서 알아봐야지. 공장부지만 돌아본 거라서 잘 몰라.”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대꾸한 하선우는 손등으로 얼굴을 덮으며 몸을 말았다. 이석은 자꾸만 잠을 청하려는 하선우를 붙잡고 밤사이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그사이 자고 싶던 의욕이 꺾여 결국 하선우는 이석의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들었다.
“둘이서 뭐했냐.”
맥주의 풀탭을 잡아당기며 하선우는 웃었다.
“말도 마. 나 새벽에 체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체해?”
“긴장했나 봐. 노력했는데도 편해지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얼굴이 이 모양이냐. 들어오는데 좀비인 줄 알았잖아.”
이석의 실없는 농담에 하선우는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피곤해.”
“왜. 강 전무님이 까다롭게 굴어?”
“그건 아닌데 살다 보면 태생적으로 안 맞는 사람들 있잖아. 강 전무가 나한테는 그런가 봐.”
“영업에 편한 상대가 어딨냐. 친구 되려고 강 전무 만나는 거 아니잖아. 불편해도 감수하고 덤벼들어야지.”
어깨동무를 한 이석은 시선을 낮춰 하선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 하 사장이 그간 사업적인 마인드가 부족하긴 했어?”
너그러운 웃음을 지었지만 뼈 있는 말이었다. 가볍게 꾸짖는 것임을 이해한 하선우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래. 그런 일로 체할 정도면 전혀 노력한 바가 없는 거지.”
순순하게 인정하자 이석은 하선우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힘주어 두드렸다.
“울산에 제2공장 짓고 나면 연구개발 부서에 인력도 늘릴 거니까, 너도 연구실에만 있지 말고 이제 슬슬 준비해라. 회사 규모가 커지면 점차 사업부제로 운영할 생각이거든. 이젠 필드로 나가야지.”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자 출신의 CEO가 겪는 어려움이 바로 이것이었다. 경영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현실과 맞부딪혀야 한다는 것. 이석은 말했다.
“기본적으로 경영자는 로비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 이석은 갑자기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멋진 말이야. 이석 님의 어록 받아 적어라. 우쭐한 얼굴로 그는 자신의 말을 음미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석은 부엌으로 걸어갔다. 라면을 끓이려 냄비에 물을 받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하선우는 노총각 냄새를 폴폴 풍기는 방 안을 돌아보았다. 허허벌판에 지어진 달랑 한 동의 원룸텔에 자리한 그의 전세방은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데다가 외풍이 심해 세입자들이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곳이었다. 관리되지 않은 야생의 운치가 살아 있는 동굴 같은 그의 집에는 경제신문과 책이 헌책방 못지않게 쌓여 있었다.
수재들이 모이는 성일 공과대학에서 자신이 범재밖에 안 되는 그릇임을 뼈아프게 깨달은 뒤로, 이석은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려 다독가가 되었다. 결론은 돈임을 일찌감치 깨우친 그는 수많은 CEO 성공신화에 도취되었고, 주식, 경매와 관련된 재테크에 눈을 떴다. 그의 벽 한 면을 온통 차지한 책장에는 경영, 경제, 사회문화, 재테크와 관련된 도서가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1,000만 원 주식 투자로 3년 안에 10억 만들기’
다소 무모해 보이는 제목을 바라보던 하선우의 얼굴에 희미한 변화가 스쳤다.
이석의 컴퓨터 전원을 켠 하선우는 부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검색 창을 켰다. 머뭇거리던 손가락은 곧바로 안신그룹을 검색했다. 최근 기사부터 과거 기사의 목록을 넘기다 눈에 띄는 제목의 기사를 발견했다.
‘안신EM, '이차전지 xEV'로 사업 확대. 엘텍과 경쟁구도’
안신EM(190,020원 ▼ 300 -0.01%)그룹이 리튬이온 이차전지 핵심소재에 이어 자동차용 전지 사업까지 확대를 추진하면서 이차전지 사업을 놓고 엘텍그룹과 대결구도가 만들어질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안신EM은 2월 배터리 제조업체인 다원IB의 지분을 31% 인수하였다. 안신EM은 이를 통해 향후 이차전지 xEV 분야의 기술과 생산시설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안신EM은 그동안 이차전지 소재 분야에 대한 투자에만 주력해왔다. 안신EM은 현재 대량 합성이 가능한 고밀도, 고용량의 xEV를 개발 중이다.
xEV는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전기자동차를 통칭한다.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로 디젤에서 동력을 얻는 내연기관이 배터리를 중심으로 한 전기 자동차로 본격화되고 있다. 자동차의 2차 혁명으로 불리는 xEV는 친환경과 고연비를 추구하는 하이브리드 트랜드에 부합하기 위해 자동차 업체가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인 9월의 기사였다. 기사를 다시 한 번 반복해 읽은 하선우는 밑줄을 긋듯 한 문장을 거듭해 읽었다.
안신EM은 현재 대량 합성이 가능한 고밀도, 고용량의 xEV를 개발 중이다.
“안신EM은 현재 대량 합성이 가능한 고밀도, 고용량의 xEV를 개발 중이다.”
소리 내어 한 번 더 중얼거린 하선우는 생각에 잠겼다. 안신그룹에서 개발 중인 고밀도 고용량의 배터리는 NnG에서 개발한 전극소재기술과 연계되어 있었고, 엘텍에서는 핵심이 되는 원천기술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사들이고 있었다. 즉, NnG와 엘텍 간의 특허 제휴는 안신그룹과 벌이는 경쟁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선우는 지난 토요일 엘튼 호텔의 최상층 바에서 보았던 국세청 자료와 강주한이 안 비서와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차명재산은 안신의 초대 회장이 지금의 회장에게 물려준 것이었고, 안 비서는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액수를 언급했었다. 9조 3,400억.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하선우는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했다. 안신의 초대 회장이 현재 회장에게 물려준 재산은 9조 3,400억이고, 차명계좌를 통해 불법적으로 관리되었다. 차명계좌를 이용했다는 것에서 불법으로 모은 비자금일 가능성이 컸다.
머리가 핑 도는 액수의 유산이었다. 그러나 안신그룹의 유산 문제를 조사하는 것은 국세청의 관할이지 엘텍과 같은 사기업이 소송까지 준비하며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엘텍은 안신의 비자금을 조사하고 있었다. 조만간 안신 그룹에 고비가 닥쳐온다면 엘텍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엘텍이 안신그룹의 유산 문제를 건드리려 하는 것인가. 신문기사의 내용처럼 안신이 이차전지 분야를 사업 확대하여 엘텍과 경쟁구도가 되었기 때문일까. 단정 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하선우는 복잡하게 얽힌 방정식을 풀듯 처음부터 천천히 생각을 되짚어보았다.
비자금, 안신의 초대 회장이 물려주었다는 유산, 차명계좌, 소송을 준비하는 엘텍. 퍼즐의 조각을 짜 맞추던 하선우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짰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엘텍에서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안신그룹의 가장 약점이 되는 부분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초대 회장으로 물려받은 차명계좌의 9조 3,400억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가능성은, 처음부터 차명계좌 안의 9조 3,400억은 초대회장이 물려준 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분식회계를 통해 안신그룹이 만들어낸 비자금이고, 국세청의 조사를 통해 비자금임이 밝혀지자 궁여지책으로 9조 3,400억의 출처를 유산으로 둘러댔을 가능성이 컸다. 9조 3,400억은 안신그룹의 비자금이 아니라, 초대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비공식 유산이었다고 거짓 증언했을 것이다.
초대 회장의 외손자인 강주한은 이 틈을 노려 소송을 걸려는 것이다. 선대 회장이 생전에 제삼자 명의로 신탁한 재산을, 지금의 회장인 임용우가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단독 명의로 변경했다는 이유로. 그러니 9조 3,400억 원 중에서 상속분에 맞게 각각의 형제들에게 배분하라는 것이었다. 안신그룹의 선대 회장은 슬하에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아들은 현재 안신그룹의 회장이었고, 딸은 강주한의 어머니인 임용화였다.
안신그룹은 비자금을 만들어낸 사실을 숨기려다, 도리어 새파랗게 젊은 외조카에게 그 돈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회계를 거짓으로 꾸며 비자금을 만들었다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엘텍과의 소송을 피할 수 없었다. 부모의 유산으로 인정할 수도, 비자금을 만들었음을 시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진 셈이었다. 두 번째 시나리오가 사실이라면 강주한은 안신의 비자금을 정당한 방법으로 취득하고, 동시에 안신을 곤경에 빠지게 할 수 있었다.
컴퓨터를 끈 뒤에 등받이가 아슬아슬하게 늘어나도록 의자에 기댄 하선우는 멍하니 창밖의 하늘을 응시했다.
무서운 놈.
거의 힘을 들이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라면 먹어라.”
푸짐하게 끓인 라면으로 상을 차린 이석은 뒤로 넘어갈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는 하선우를 불렀다. 어수선한 기분으로 비척비척 일어난 하선우는 이석의 맞은편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음식을 들지 않는 하선우를 힐끔거리며 살피던 이석이 말했다.
“소화 아직도 안 됐어? 말하지. 괜히 네 개 끓였잖아.”
“먹을게. 내버려둬.”
라면을 반쯤 비워갈 때쯤 하선우가 말했다.
“형. 안신 주식 사둔 것 많아?”
“어. 여기 전셋값은 될 거다. 요즘 안신 주식 한창 오르잖아. 어제 21만 원 찍었다. 근데 그건 왜?”
“빨리 정리해. 조만간 급락할 거니까.”
면을 씹던 그대로 이석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선우를 바라보며 그는 후루룩 급하게 음식을 삼켰다.
“왜. 강 전무님께 뭐 들은 거 있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비자금 문제 터질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공유해도 되는 비밀인지를 고민하던 하선우는 곧 지난 토요일부터 있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조금 전 컴퓨터로 검색한 기사에 대한 얘기까지 마친 하선우는 이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추측이 과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이가 없다. 9조 3,400억을 유산으로 물려받았건, 비자금으로 만들었건 씨발, 상상을 초월한다 진짜. 안신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겠네.”
입맛을 쩝쩝 다신 이석은 퉁퉁 불은 라면을 내버려두고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왔다. 하나를 하선우에게 던진 이석은 맥주의 풀탭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강주한 그렇게 안 보였는데 와… 이 새끼. 무서운 인간이었어.”
이석은 껄껄 웃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웃음이 잦아든 뒤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맞은편 벽을 바라보던 그가 하선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좀 전에 네가 봤다던 기사 때문에 생각해본 건데.”
조금 뜸을 들여 이석은 말을 이었다.
“안신에서 개발 중인 기술과 네가 개발했던 전극소재기술이 연계되어 있으니까, 굳이 엘텍과 사업제휴를 맺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텍과 안신 중에서 조금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과 사업제휴를 맺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지.”
“그건 지금 상황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왜 말이 안 돼? 기업이라는 건 상호책임 의식이 없는 거야. 더 좋은 조건이 있다면 계약은 깨지고 공급자는 떠나게 되어 있는 거라고. 하물며 지금은 계약도 안 맺은 상태잖아.”
묘연한 표정의 하선우를 보며 이석은 덧붙여 말했다.
“물론 엘텍 본사에서 기술발표까지 한 마당에 물리지는 않을 거야. 엘텍에서 우리에게 나쁜 조건을 제시했던 것도 아니니까 안 하겠다고 뺄 이유도 없는 거고. 우리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엘텍과 안신 사이가 틀어지건 말건 좋은 조건 찾아서 계약하면 그만인 거야. 에이씨, 소문 돌기 전에 빨리 팔아치워야겠다.”
자리를 털며 일어난 이석은 곧바로 컴퓨터를 켜 매수주문 창을 열었다. 안신EM 주식의 실시간 시세는 불과 몇 시간 전보다 소폭 상승해 있었다. 매매 버튼을 누르기 직전, 이석은 망설임이 가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너 그거 진짜 확실한 거지?”
“강 전무가 말한 거니까 확실한 거겠지. 어차피 지금 팔아도 손해 안 보잖아.”
염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무가치한 주식을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미심쩍은 얼굴로 하선우를 뜯어본 그는 결국 고민 끝에 매매 버튼을 눌렀다.
“앞으로 고급 정보 있으면 공유하는 거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말고, 우리도 어부지리로 돈 좀 얻어보자.”
이석의 은근한 눈빛을 뒤통수로 받으며 하선우는 라면을 하수구에 버렸다. 수챗구멍으로 붉은 국물이 빨려 들어가고 걸러진 퉁퉁 불은 면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타래처럼 엉킨 그것들은 하선우의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을 형용하는 이미지와 다를 바 없었다.
“좋지. 어부지리.”
마른 웃음을 흘린 하선우는 자문해보았다.
강주한이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를 원한다면, 자신은 아무런 계산 없이 강주한의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경영자는 로비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이석의 말을 적용하면 강주한은 로비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로비의 대상은 다행히도 하선우를, NnG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로비스트로서 하선우는 강주한이 진정한 친구를 원한다면 친구가 되어주고, 이용하려 한다면 마찬가지로 그를 이용해야 했다. 궁극적인 목적인 돈을 위해서.
복잡하던 생각을 단순하게 밀어버리자 하선우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담배를 태우며 곁으로 다가온 이석이 하선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설거지해주시려고 이렇게 개수대에서 죽치고 계신 겁니까.”
개수대에는 며칠째 묵은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었다. 거름망의 음식물 쓰레기에서 쉰 냄새가 시큼하게 풍겼다. 하선우는 이석의 능글거리는 웃음을 외면했다.
“그럴 리가요.”
“선우야. 나는 설거지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 아마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설거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나 봐.”
이석은 은근히 눙치며 팔꿈치로 하선우의 옆구리를 찔렀다.
“식기세척기 돌려.”
“아아… 식기세척기 돌리는 것도 귀찮아. 대신 넣어주면 안 돼?”
“나는 좀 형이 나와 내외하는 사이였으면 좋겠다.”
하선우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놓아준 이석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마라?”
3년 전 하선우가 목동으로 거취를 옮기기 전까지 두 사람은 함께 2년 동안 자취를 했었다. 일산의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낡은 빌라를 전세로 얻어 한마디로 ‘지질’한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의 만남은 꿈만 많은 철없는 아버지와 너무 일찍 현실을 깨달아버린 원숙한 아들의 궁합 같은 면이 있었다. 아버지의 개똥철학에 늘 설득당하는 것은 아들의 몫이었다. 이석은 옳든 그르든 한 가지를 밀고 나가는, 확고부동한 자세가 있었고 하선우는 이석의 말을 공식처럼 받아들이는 면이 있었다.
잘생긴 외모와 부유한 환경, 타고난 재능까지 갖춘 하선우는 열등감이라는 아린 감정을 잘 알지 못했고, 때문에 호전적인 야망이 부재되어 있었다. 돈을 벌고, 성공하고 싶어 부심하던 이석이 일찍이 하선우를 눈에 찍어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타고난 공돌이에 외모답지 않게 우직한 면까지 있어 사람을 기만할 성정이 아니었다.
상대방에게 결핍된 것을 보완하는 관계이다 보니 서로를 의지하는 것은, 이제 별스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물론 사소한 다툼도 있었다. 저지르는 것은 이석이었고, 수습하는 것은 하선우의 몫이었다. 청소할 거리조차 없도록 썰렁한 방 안을 유지하려는 하선우와 이것저것 잡다하게 쌓아놓고 자료로 삼는 이석의 습관은 갈등을 맺었고, 둘 중 하나가 참는 것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청소를 은근히 바라는 눈길을 외면한 하선우는 귀찮은 얼굴로 멀찌감치 떨어졌다. 몇 번 더 설거지하기 싫다 노래를 불렀지만, 하선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결국 포기를 받아들인 이석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앞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더 꺼냈다.
“냉정한 놈.”
하선우는 기가 찬 얼굴도 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높게 쌓인 개수대의 그릇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던 이석은 설거지를 저녁으로 미뤄두기로 결정하고 하선우의 곁으로 갔다.
“울산 언제 내려갈래.”
“사진 찍어 온 걸로는 부족한가? 많이 찍어왔어.”
“그래도 가봐야지. 이번 주 일요일 약속 없지?”
하선우는 잠시 고민하는 눈을 했다. 이석은 순간의 주저를 기민하게 읽어냈다.
“아… 너 만나는 여자 있었지.”
셔츠의 단추를 풀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정확히 여자도, 정식으로 만나는 상대도 아니었지만 한순간이라도 하선우가 진지하게 사귀어볼 것을 고려했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류주오와의 기억이 멀어져 있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 고작 3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만큼, 그간의 강렬한 일들이 그의 위로 덧칠되어 류주오의 인상이 흐릿해져 있었다.
어젯밤 류주오에게 전화하기로 한 뒤 죽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하선우는 바닥에 놓인 휴대폰을 오래도록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일요일 일찍 떠날까. 갈 거면 미리 기차 편 예약해둬야 할 텐데.”
“왜, 약속 없어?”
“응.”
“그 여자랑 안 맞나 봐?”
이석을 빤히 바라보던 하선우는 바닥에 놓인 티셔츠를 몸에 끼워 넣으며 물음을 회피했다. 평소에도 하선우는 연애에 대해 방어적이었고, 사귀는 사람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인색한 면이 있었다. 대학 시절 짧게 사귀었던 여대생을 제외하고 소개받은 일이 없어 하선우가 밖에서 누굴 만나는지, 무엇을 하는지 이석은 거의 알지 못했다. 대답하기 싫은 심경을 알아챈 그는 다른 주제의 질문을 던졌다.
“경매 나온다던 회사는 뭐하던 곳이었냐.”
“금형도 만들고, 플라스틱 케이스도 만들던 제조사였어.”
“사출업체(금속 또는 플라스틱 수지를 녹이고 틀(금형)에 주입하여 성형하는 기술을 가진 회사)?”
“응.”
“회사 이름이 뭔데.”
“성일금형.”
“성일금형?”
평소보다 반음 가까이 올라간 강한 목소리에 하선우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문제 있어?”
조심스럽게 하선우는 물었다.
“너 성일금형 모르냐.”
제조기업으로서는 풋내기에 불과한 그들이 알고 있어야 할 만큼 유명한 기업이었는가 싶어 하선우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유명한 회사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답답한 표정으로 이석은 말했다.
“도일이 아버지 회사잖아.”
신경질이 담긴 이석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선우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하선우는 뜻밖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헛숨을 삼켰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하선우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뭐…라고?”
“도일이 큰형 이름 따서 성일금형이라고 이름 지은 회사였잖아. 도일이 형 이름이 성일이었던 거 기억 안 나?”
“…….”
“도일이 결혼식에서 만났었잖아.”
하선우는 처음 듣는 얼굴을 했다. 도일의 결혼식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고 그날의 하선우는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몇몇의 생소한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결혼식에 얼굴만 비쳤을 뿐이었다. 위염으로 식사도 거르고 피로연도 가지 않아, 그곳의 모든 얼굴들은 하선우의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성일 형 외국 나가면서 도일이 녀석이 형 대신 물려받는다고 했던 회사였어. 도일이가 금형 기술자였잖아.”
“…그랬었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씨발, 그 새끼….”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 이석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성일금형과 섬일 금형의 사장 문범석, 그리고 문성일. 하선우는 기시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모두 그의 가족이었다. 하선우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행복을 가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하선우의 얼굴에 쓰디쓴 감정이 스쳤다.
문도일.
하선우는 기억 속에 번진 수채화처럼 남아 있는, 행복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