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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심(水深) (5/26)

5. 수심(水深)

1월 말이었다. 지난해를 떠올리며 더는 아쉬워하지도 않고, 서류에 연도를 잘못 적는 횟수가 줄어들며, 한껏 부풀었던 신년의 감흥이 조금씩 꺼져가는 시기였다. 바뀐 나이에 서서히 적응을 해가는 서른두 살의 하선우는 서른한 살의 하선우와 조금 달라진 분위기로 화환 앞에 서 있었다.

살이 빠져 예년에 비해 좀 더 첨예하게 날이 서 보이는 그는 짙은 색의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깊고 그윽한 눈길로 화환의 문구를 읽고 있었다. 선일대학교 공과대학 리더스클럽, 14기 金俊龍. 얼굴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읽던 하선우의 눈이 그 옆으로 늘어선 화환으로 향했다. 2층의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선일대학교 신년교례회를 축하하는 화환이 놓여 있었다. 화환을 보낸 곳은 동문이 속한 대기업부터 대학 각처의 이름, 유명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꽃으로 장식한 명함들이었다. 그리고 저 구석 어디쯤에 NnG의 화환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총동문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과 일류대를 졸업했다는 달콤한 긍지를 느끼며, 서로가 가진 연대를 재확인하고, 같은 상아탑을 나온 상대방에게 막연한 믿음을 걸어보는 자리였다. 동문회를 여는 장소는 호텔의 연회장이었다.

주변을 대충 눈으로 훑어보며 하선우는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넥타이부대가 월등한 비율로 높았고 역사가 오래된 학교이니만큼 노년부터 중장년층의 비율이 상당했다. 태반이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은 곧 아는 사이가 되었다. 한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시켜주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넌 왜 그렇게 연락하기 힘드냐.”

신년맞이 개회사가 시작된 후로, 하선우의 옆에 앉은 동훈이 소리를 죽여 말을 걸어왔다. 과거 총학생회 회장이었던 동훈은 같은 졸업 기수의 비상연락망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 송년회 할 때 왜 안 왔어?”

“바빠서 그랬지 뭐.”

“여기 안 바쁜 사람 없다. 총동문회 아니더라도 얼굴 좀 보자 야.”

옆구리를 찌르는 동훈의 행동에 미안한 얼굴로 얼버무린 하선우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너 3월에 결혼한다며.”

“…들었냐?”

“덕경이한테 들었다. 연정 선배 동생이라며. 어디 있냐, 연정 선배 오늘 왔어?”

“왜. 뭐 꼰지르게?”

“찔리는 거 있냐? 또 꼰지르게가 뭐냐. 서른 넘은 새끼가.”

의미 없이 꼬투리 잡는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다시 무대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개회사에 이어 어느새 신년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선일대 총장, 전 과학기술부 장관, 대기업 사장 등의 소위 성공 모델이라 불리는 인사들의 신년사 발표가 계속되었다.

“너 요즘 잘나간다며.”

동훈의 옆에 앉은 안경을 쓴 남자가 목소리를 낮춰 물어왔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거의 접점이 없던, 희미한 인상의 동창이었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이름을 겨우 떠올린 하선우가 부정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유완이 너만 하겠냐.”

“나야 뭐 만년 연구원이지. 언제 너처럼 사장 소리 한 번 듣겠냐.”

김유완의 말에 테이블의 모든 사람들이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누군가는 의문을, 어떤 이는 부러움을, 또 다른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설명을 원하는 그들의 시선에 대신 대답을 한 것은 동훈이었다.

“몰랐어? 얘 하선우 사장님이잖아.”

“무슨 업종인데.”

“핸드폰 배터리 제작하는 1차 벤더. 알루미늄 케이스 만들었다고 들었었는데.”

“대기업 하청이면 힘들지 않냐? 1차 벤더면 좀 낫나?”

“2차보단 낫겠지만 1차도 힘들어.”

“3차 벤더가 들으면 울겠네. 야, 그래도 너 정도면 인생 활짝 편 거지. 잘나가잖아.”

“잘나가긴. 그냥 남들 하는 만큼 해.”

“겸손도 적당히 떨어야지 밥맛없게 새끼가. 너희 회사 작년에 울산에도 공장 지었잖아. 특허로 엘텍에서 로열티도 받고. 얘 아주 잘나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하선우의 웃음에 동훈은 씩 웃었다.

“내가 괜히 졸업기수 연락망이냐. 너도 장가가려면 나한테 잘해. 그래야 하객 많이 데려간다.”

동훈의 너스레를 듣던 유완이 하선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쩐지 얼굴이 폈더라. 다른 애들은 아저씨 다 됐더만, 너 돈 벌어서 관리받냐? 돈도 잘 버는 새끼가 얼굴까지 잘생기니까 짜증나.”

유완을 비롯해 테이블에 앉아 있던 동기들의 하선우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들은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는, 풋내를 벗어던진 유망한 사업가를 보듯 하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선우는 계속되는 이야기가 달갑지 않아 딴소리를 했다.

“단상 봐라. 선배님 말씀하시잖냐.”

단상에서는 선일대 출신의 타 대학 총장이 총동문회 회장으로부터 축하패를 받고 있었다. 학교를 빛낸 자랑스러운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선우의 눈길이 천천히 옮겨졌다. 그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은 하선우가 앉아 있는 곳보다 단상을 향하여 조금 더 가까운 자리였다. 33기 졸업생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이었다.

그곳에는 눈에 익은 얼굴들이 가득했다. 대학 시절 함께 창업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선배들과 이석이 앉아 있었다. 그 틈을 하선우는 조금 더 샅샅이 살펴보았다.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는 다른 테이블을 헤집듯 하나하나 주의해서 보았다. 그러나 시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공로를 인정한 상장 수여와 격려사를 비롯해, 선일대 출신의 잘나가는 인사들을 질리도록 구경한 뒤에야 신년교례의 공식적인 행사가 막이 내렸다. 은은한 클래식이 라이브로 흐르기 시작하고 소위 잘나가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복작거리는 틈 속에서 일어난 하선우는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이석에게로 걸어갔다. 과거 창업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했던 선배들이 반가운 얼굴로 하선우를 맞았다. 그중에는 하선우를 아끼다 못해 흑심을 드러내던 여자 선배들도 끼어 있었다. 호들갑을 떠는 선배들에게 묵묵히 시달려준 하선우는 곧 이석을 끌고 아는 얼굴이 드문 장소로 옮겼다.

“최똘, …아니, 최 교수님은 찾아 뵀냐. 찾으시던데.”

“아직. 이제 가봐야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며 하선우는 넌지시 물었다.

“도일 형은 봤어?”

“안 온 것 같은데. 봤다는 애들도 없고.”

“연락처 아는 사람은 없나 봐.”

“저 혼자 졸업하자마자 울산 내려간 뒤로 연락 뜸했잖아. 결혼한 뒤로 더하더니 작년부터 계속 잠수타서 연락되는 사람이 없다더라.”

하선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래.”

힘을 들이지 않은 덤덤한 목소리에 이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하선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굳이 동문을 파고들고 여러 사람을 거치지 않아도, 문도일의 연락처를 알고자 한다면 찾지 못할 리 없었다. 다만 그들은 문도일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도일은 대학 시절 과대를 도맡아하고 교수들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외모가 흉흉한 것도 못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공과대학보다는 체대가 어울리는 인상 때문에 여자들로부터는 산적이라 불리었고, 남자들로부터는 남자다움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어떤 무리 속에서도, 수업 중인 교수조차도 그를 의식했다. 그가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할 때는 물론 입을 다물고 있을 때조차 그의 얼굴과 그의 제스처를 신경 썼다.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는 문도일의 반응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모두가 그에게 약간씩의 사랑을 느끼고, 약간씩의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하선우는 그 특유의 분위기에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누구도 섣불리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동창들 사이에는 도일의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암묵적으로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인지하고 있던 그의 부도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빛나던 친구의 추락을 전해 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앞날도 그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비관의 그늘을 드리웠다. 절친한 누군가가 암에 걸려 젊은 날에 요절했다는 소식처럼 삶의 무작위한 확률 앞에 허무함을 느끼게 했다.

이석과 하선우는 그들에 비해 조금 더 복잡한 기분을 느꼈는데 도일의 부도난 회사를 경매를 통해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작년 7월에 최종 부도처리 된 이후 몇 차례 입찰이 유찰되면서 경매가가 대폭 하락했고, NnG는 헐값에 공장 일대를 사들일 수 있었다. 공장부지를 사들이는 일로 이석과 하선우는 몇 번의 갈등을 맺었지만, 11월 중순 엘텍과 계약을 맺으면서 엘텍으로부터 31억의 무이자 대여를 받아 결국 일대의 땅을 입찰했다. 때문에 이석은 도일에게 감정적으로 빚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뭐…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무책임한 동시에 낙관적인 말로 분위기를 흐리며 이석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같은 주제로 더는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이석의 심기를 하선우는 알아채고 주저하다 화제를 돌렸다.

“최 교수님께 갈까. 어디 계신지 알아?”

“선배님과 얘기 나누는 중이시더라. 일단 가 있자.”

하선우가 재학하던 시절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최종완 교수는 학부의 학장이 되어 있었다. 고집스럽게 흰머리를 염색하던 교수였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는 반백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초로의 신사 같은 분위기의 그는 전 장관과의 대화로 긴 시간을 끈 뒤에야 같은 테이블로 이석과 하선우를 불러들였다.

“장관님. 이 친구들이 좀 전에 말씀드렸던 그 친구들입니다. 석아, 선우야, 인사드려라. 기수용 장관님이시다.”

고개를 살짝 쳐든 채, 눈만을 움직인 그는 현직 장관이 아닌 전 장관이었지만 최 교수는 꼬박꼬박 그에게 장관이란 말을 붙였다. 아버지뻘 되는 남자에게 두 사람은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인물들이 훤하구먼.”

“감사합니다.”

“앉지 그래.”

턱짓으로 자리를 가리킨 그는 하선우와 이석을 번갈아 보았다. 눈빛이 매섭고 콧볼에 살집이 많아 날카로움과 투박함이 공존하는 인상이었다.

“거… 그래. 제조업을 하고 있다고?”

“예. 이차전지 관련 업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원천특허도 냈다지? 소식은 안 그래도 학장님께 들었네. 젊은 친구들이 대단하구만.”

“감사합니다.”

고개를 한 번 더 예의 바르게 꾸벅인 두 사람에게 장관이 말했다.

“대기업 상대하는 일이라면 노동 대비 수입이 높지는 않을 텐데, 내 폐병 환자처럼 헐떡헐떡하는 사람들을 간간이 봐와서. 엘텍이면 더하지 않은가? 젊은 친구들이 헤쳐가긴 힘들 텐데.”

안 그래도 작은 눈을 좁게 뜨며 남자는 물었다. 암특하고도 은근한 그 물음에 이석은 웃으며 비교적 자세히 대답했다.

“사업제휴로 로열티를 받게 된 데다가 지명 입찰에서 낙찰을 받아서 엘텍과의 거래 물량이 많이 늘었습니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경사가 겹친 친구들이죠.”

최 교수가 거들었다.

“장관님. 젊은 친구들이지만 이래 봬도 강주한 전무와 연줄이 닿아 있습니다. 특히 이 친구, 강 전무에게 받는 신뢰가 대단하죠.”

최 교수의 두툼한 손이 하선우의 어깨를 어기차게 잡았다 놓았다. 최 교수의 허풍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하선우는 웃음을 유지했다.

“작년 겨울에 강주한 씨의 개인적인 부탁 때문에 삼청동 자택에 몇 번 초대된 일이 있었는데, 이 친구에 대한 전무의 관심이 참 대단하더군요.”

그때까지 느슨하게 듣고 있던 장관이 등받이에 의지하고 있던 허리를 세우며 관심을 보였다. 강 전무와의 친분 관계도 알음장 과시한 최 교수는 장관의 반응에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 이 친구들이 입찰에 낙찰된 것도, 사업제휴 맺은 것도 강주한 전무가 전적으로 밀어준 덕도 있다고 하더군요, 장관님.”

하선우는 두 사람을 돌아보는 남자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주한이란 이름의 즉각적인 위력이 새삼스럽게도 민망했지만 주어진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었다.

“감사하죠. 많이 의지가 되어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장관님. 저희 대학도 신세를 지고 있는 게 많습니다. 특히 강 전무 도움으로 작년부터 공사가 진행 중이죠.”

세 남자는 최 교수를 돌아보았다.

“캠퍼스 중앙 호수 뒤편으로 5층 건물이 들어서는데 도서관 못지않게 규모가 큰 학생관이죠. 종합 세미나실도 함께 있는데 엘텍 플러스 회관이라고, 신학기 시작할 무렵에는 완공될 예정입니다. 학생들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학장으로서 통감하고 있었는데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 도와주니 참 젊은 사람이 기특하죠. 과학기술의 진보에 공헌하는 바가 커요.”

대학의 심장부에 엘텍 이름이 새겨진 캠퍼스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관중을 의식한 후원이자 광고를 과학의 진보로 수렴한 최 교수는 호탕하게 웃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퉁치고 넘어가자는 분위기를 읽은 장관은 묘연한 웃음을 지었다.

“젊은 양반이 그런 일도 하는군요.”

“허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산학협력 센터에도 엘텍재단을 연계해서 기부도 해주니 고맙죠.”

“근데 강주한 씨가 최 교수님을 찾은 이유가 무얼까, 너무 개인사적인 이야기라 털어놓긴 그렇습니까?”

“사람 없는 자리에서 흉보는 건 금해도 미덕을 추어주는 건 좋은 일 아닙니까. 강주한 그 사람이 기획실에서 전자 분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전 분야마다 개론 공부를 하고 있더군요. 허, 참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제가 에너지 분야의 권위자라고 생각했는지 이차전지에 대해 개인적인 수업을 부탁하더군요. 수업받는 태도도 성실하고 젊은 양반이라 그런지 이해도 빠르지 뭡니까.”

소탈한 웃음을 흘리며 최 교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인공으로 조성한 늪지 위에 상용화 초반 단계의 유리창형 태양전지 자재로 지은 별실, 북한산에 걸친 그의 자택에서 본 서울의 야경, 수업 진행 분위기와 저녁 식사 시간에 강 전무가 농담으로 건넨 말들, 그리고 자신이 했던 대답, 그에 대한 강 전무의 반응, 함께 용인의 골프장으로 라운딩을 나갔던 이야기들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기억력을 훈련해온 사람답게 지나치게 자세했다.

“허허, 이거 참 너무 내 얘기만 했나.”

“아니라고는 못하겠어, 최 교수. 자랑만 하지 말고 저녁 자리 좀 마련해봐요, 이 사람아.”

껄껄 웃으며 맞받아친 전 장관은 강 전무가 어떤 골프채를 사용하는지에 대해 샅샅이 캐물었다. 골프채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골프장 회원권으로, 캐디의 미모에 대한 얘기로, 제주도와 필리핀, 베트남 등지의 골프장 수준을 논하는 담화로 퍼져 나갔다. 오고 가며 꽃 피우는 골프 얘기 속에 하선우와 이석은 서서히 병풍이 되어갔다. 골프 얘기로 세계일주를 하듯 미주까지 돌아갔다 국내 골프장으로 돌아온 뒤에, 대화의 귀추는 언제 한 번 모여서 식사나 하자는 방향으로 선회되었다.

테이블에 건설사 부사장이 합석을 하면서 하선우와 이석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해쓱해진 얼굴로 테이블을 벗어난 이석은 하선우에게 귓속말로 이번 주에 당장 골프 연습장에 등록하고 말겠다는 얘길 했다.

같은 졸업 기수 간의 모임 때문에 이석과 헤어진 하선우는 3차 술자리 직전에 무리에서 벗어났다. 대학 시절에는 염색체가 xy축으로 기울어져 보이던 여자 동기들의 외모 변화에 놀라워하고,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들의 번호를 따고, 구체적이지 않은 훗날의 저녁약속을 잡으며 10시가 가까워지도록 술잔을 기울였던 하선우는 텅 빈 앞좌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목동의 오피스텔에 도착했고, 대리운전사에게 2만 원의 돈을 건넸음이 뒤늦게 떠올랐다. 공회전으로 쓸데없이 기름만 낭비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비틀거리며 차 밖으로 나왔다.

“으… 추워.”

부들부들 떨며 방 안의 온도를 최대로 올린 그는 피곤으로 졸도할 것 같은 와중에도 TV를 켜고 옷을 갈아입었다. 드링크제를 들고 컴퓨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문서를 집어 들었다. 엘텍에서 보낸 신규 모델 설계도면 일부였다. 석 달 전 하선우의 손으로 시제품 테스트를 해 보고서까지 올렸던 PC 제품 완성본이었다. 얇고 넓은 화면의 경량 PC가 대세다 보니 그 안에 들어가는 배터리 역시 매우 얇으면서도 넓었다.

재촉하듯 일거리를 주고, 빠듯하게 마감기한을 주는 건 엘텍과 사업제휴를 맺고 나서도 여전했다. 내일까지 중간보고를 마쳐야 했기에 하선우는 앓는 소리를 내며 술을 깨려 드링크제를 마셨다.

NnG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대대적으로 새롭게 구축되고 조직이 개편된 지도 어느새 두 달이 지나 있었다. 공개 입찰이 진행되면서 기업 간에 혈투 아닌 혈투가 일어났고 예상대로 NnG와 염 사장의 회사는 아무런 출혈 없이 살아남았다.

최종 투자가 확정된 후로 모든 것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내부적으로는 기술이전과 신규 모델 제작이, 외부적으로는 정부 각처에서 날아오는 공문서로 하선우는 창사 이후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부대낄 가족도 맞이하는 사람도 없는 단출한 오피스텔 안에서 복잡함을 없애나가며 하선우는 마음껏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기술자가 설계한 상세 도면을 살펴보던 하선우는 흘깃 눈을 들어 벽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자정 무렵이었다.

뻐근한 목을 움직이며 하선우는 커피를 진하게 내렸다. TV에서 앵커가 파리 날개 비비는 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마감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익숙한 이름을 마주하게 된 하선우는 밑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자막을 멍하니 읽었다. 엘텍·안신, ‘소송 파문 확산’.

TV 속에는 강주한이 웃는 낯으로 소송대리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화면에서 강주한의 어머니인 임용화 여사가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쓴 채 세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 뒤를 따라 안신그룹의 회장인 임용우가 보디가드 틈 속에서 언뜻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또로록, 마지막까지 추출된 커피를 들고 하선우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화면을 응시했다.

엘텍과 안신과의 소송이 터져 나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갔다. 안신의 초대 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해온 9조 3,400억의 재산을 상속분에 맞게 각각 형제들에게 배분하라는 요지의 소송이었다. 돈의 액수가 국가의 정책을 운용하는 액수만큼 컸지만 결국에는 개인과 개인 간의, 유산 상속을 둘러싼 집안싸움이었다. 작년 겨울 신문 1면과 9시 뉴스, 각종 헤드라인으로 매체를 탄 뒤에도 지금까지 언론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유독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떠드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송은 임용화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안신그룹의 주가는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은 오래전 하선우가 했던 추측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세청의 조사를 통해 수십 개의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돼온 안신그룹의 9조 3,400억이 발견되었고 비자금을 만들어온 사실을 숨기려 안 회장은 돈의 출처를 선대 회장이 물려준 유산이라고 변론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첫째 딸인 임용화가 상속분에 맞는 자신의 지분을 배분할 것을 요구하며 남동생에게 소송을 걸었다. 그녀가 원하는 지분은 절반으로 4조 7,0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그들은 가족 간의 분쟁을 민망해하지도 않았고, 요구를 분명히 하는 데 익숙했다.

소송대리인들의 화려한 학력과 경력, 감히 와 닿지 않는 유산의 규모가 그럴싸했지만 세련된 위장을 벗겨내면 집안싸움일 뿐이었다. 혀가 마비될 것처럼 쓴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켠 하선우는 캑캑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하선우는 음소거를 해버렸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설계도면을 살펴보던 그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오늘 낮, 최 교수와 장관과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감사하죠. 많이 의지가 되어주십니다.’

하선우는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강주한이 의지가 되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말인 것도 아니었다. 함께 울산을 다녀온 이후 강주한과 하선우는 개인적으로도, 공적으로도 만난 적이 없었다. 강주한과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것은 3개월 전이었고, 굳이 그 사실을 최 교수에게 직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정확한 사실을 숨겼다.

“나도 속물 다 됐어.”

피식거리며 바람 많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일에 집중하려던 하선우는 결국 설계도면을 내려놓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후원금을 운운하며 강주한을 과학의 진보에 힘쓰는 위인으로 연결하던 최 교수의 발언을 생각해낸 하선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학생 때는 몰랐던 그의 속물적인 면을 보게 되자 입이 썼다. 교단의 그는 기백 넘치는 시선으로 학생들을 제압하던 호랑이었지만, 사석에서의 그는 보기 민망하리만치 세련되지 못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재롱부리는 곰 같았다. 한편으로는 단순한 제자에 불과했던 자신이 최 교수의 인맥관리 대상이 된 것이 묘했다. 아니면 세상이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지금껏 벽창호처럼 인간관계의 단순한 면만을 바라본 건가 싶었다.

하선우는 일을 미뤄두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드링크제와 카페인의 작용에 담배를 연달아 피운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모로 누운 하선우는 음소거된 TV 화면을 보았다. 마감뉴스가 끝난 방송에서는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걸러걸러 엘텍의 이름이 나왔다. 최근 대세로 떠오른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기용한 엘텍 텔레콤의 광고였다. 풍성하고도 탐스러운 긴 머리를 찰랑이는 그녀는 오래전 엘튼 호텔에서 강태한의 품에 안겨 있던 이설영이었다.

그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은 삶의 곳곳 어디에나 있었다. 화면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던 하선우는 핸드폰을 들어 강주한의 이름을 검색했다.

처음 한 달 동안 하선우는 대기상태였다. 혹시 모를 강주한과의 재회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었다. 예닐곱 번이나 쓰고 지우며 망설임 끝에 보낸 문자에 대한 답장은 간단했다. 한동안 시간이 나지 않으니, 후에 연락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며칠 뒤 강주한에게 전화를 걸어볼까도 싶었지만 모든 용건을 안 비서를 통해 전해 받길 원하는 사내에게 연락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임 부장을 중심으로 NnG를 전담하는 직원이 생기고, 임 부장과의 사이도 형식적으로 굳어지면서 강주한과의 접점도, 그에게 연락할 명분도 사라졌다.

그에게로 가는 복잡한 공식 같은 번호를 들여다보던 하선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전화기를 침대 저편으로 밀어버렸다.

* * *

“제가 할게요!”

등 뒤에서 기습처럼 들려온 씩씩한 목소리에 하선우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 놀라셨어요?”

곧바로 반응하는 주눅 든 목소리에 하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주방의 한가운데에 엉거주춤 앳된 얼굴의 여자가 서 있었다.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입사한, 스물네 살의 신입이었다.

“놀라긴요. 내가 너무 부스럭거려서 지애 씨 잠 깼나?”

두 손으로 손사래 치며 이지애는 말했다.

“아뇨.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일찍 일어났어요.”

“당번 정해서 하는 거니까 도와줄 필요 없는데요.”

“하지만 혼자 하시는데…….”

“뭐 사러 나갔으니까 곧 올 겁니다. 지애 씨는 더 자요.”

하선우의 부드러운 거절에 이지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어나 화장을 했는지 얼굴이 화장기로 보송보송했다.

“어… 저 잠 다 깼는데. 도와드려도 되는데.”

“레토르트 식품 데우는 건데요 뭐.”

단순한 거절임에도 신입사원은 의미를 부여해 주눅이 들었다. 결국 하선우는 신입의 친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저 냄비 물 좀 채워줄래요?”

“저기에요? 가득 채울게요.”

곧바로 환해지는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웃은 하선우는 다른 냄비 안에 조리되어 나온 북어국을 가위로 잘라 들이부었다. 북어국에는 건더기가 드물게 들어 있었다. 그것마저도 지나치게 푹 익어 흐물흐물했지만, 술에 절어 잠이 든 사원들을 위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지난밤 말술로 달렸던 김 부장이라면 필시 아침부터 해장을 부르짖을 것이다.

창립 이후 늘 연중행사로 치러온 동계 워크숍이지만, 분위기는 작년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으로 돈 걱정 없이 열린 워크숍인 데다가, 사세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얼굴들이 늘어나고 소기업에서 중기업으로 규모가 커져 위계질서도 전보다 분명해졌다. 울산의 생산부서를 제외하고 전 부서의 임직원이 참여한 이번 워크숍은 3일 걸쳐 빠듯하게 프로그램이 짜여 있었다.

친목 도모를 위해 지난밤 값비싼 경품을 놓고 각 조별로 요리경연대회를 열었고, 다들 밤새워 술로 달린 데다가, 이틀째인 오늘은 허브나라 관광 뒤 평창의 리조트로 옮겨 스키, 스파를 즐기기로 했다. 임원들을 비롯해 사원들의 연령대가 낮고, 신입사원들도 들어오니 하선우는 대학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여자는 하선우를 어려워하면서도 곁을 따라다니며 지시를 기다렸다. 갓 입학한 신입생을 가르치는 선배가 된 기분이었다.

“하선, 모자라다고 해서 사오긴 했는데 이거면 되나?”

아침 일찍 편의점을 다녀온 이사가 부스스한 얼굴로 주방으로 들어섰다.

“밥 짓는 중인데. 라면 너무 많이 사왔네.”

“콘도에서도 먹지 뭐.”

두툼하게 껴입었던 잠바를 벗으며 이사는 말했다.

“뭐야, 윤 팀장은 어쩌고 신입이 나와 있나?”

그때 방문이 열리며 윤 팀장이 어슬렁 걸어 나왔다.

“어이, 윤동학이. 신입이 당번도 아닌데 나와서 돕는 거 안 보이냐.”

“어제 너무 과음해서. 죄송합니다. 이사님.”

“어여 라면 20인분만 끓여.”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인 윤 팀장은 중간에서 황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입을 보곤 피식 웃었다. 이 사원을 대신해 물을 가득 담은 냄비를 낑낑거리며 가스레인지로 옮겼다.

“수습이라 군기가 바짝 들었네? 우리 회사 이런 걸로 안 자르는데 더 자지 그랬어.”

“예? …헤헤, 일찍 잠이 깨서요.”

“저거 라면 20인분 물 맞춘 거야? 네 눈에는 내가 저기서 목욕해도 될 것 같지 않냐? 라면국 끓일 일 있어? 물이 너무 많잖아.”

“제 눈에도 많은 것 같긴 한데, 물만 채우라고 하셔서 그랬던 건데. 20인분으로 물 맞출까요?”

“어. 함 해봐라.”

뭐가 됐든 예스우먼이 될 준비가 된 신입을 자연스럽게 갈구며 팀장은 아침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쌀밥과 북어국, 김치와 라면이 전부인 소박한 아침상이 차려진 뒤, 술로 떡이 된 사람들을 깨워 해장을 했다.

강원도의 목재 펜션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자리를 옮기는 동안 첫날의 긴장한 분위기는 많이 풀려 있었다. 허브나라에서 간단한 관광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음 장소로 옮길 때쯤에는 소외된 사람 없이 서로가 팀을 이루고 있었다.

2월 중순이었지만 4월 초까지 슬로프를 오픈하는 강원도의 스키장에는 인파가 가득했다.

“리프트 값만 200만 원 나왔다. 우와. 돈 많이 썼다.”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척하는 이석을 보며 하선우는 말했다.

“법인 할인 안 받았으면 기뻐 울 수도 있었겠어.”

“그러게. 진짜 아쉽네. 우와.”

검지만을 뻗어 건조한 눈가를 훔치는 이석에게서 영수증을 받아 들고 하선우는 눈매를 갸름하게 떴다. 수십 명의 오후 야간 리프트가 한 번에 뭉뚱그려진 가격을 낱개로 계산해 원금에서 몇 퍼센트 할인받았는지를 확인한 하선우는 영수증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법인카드로 40퍼센트나 할인되나?”

“몰라. 김 부장이 프로그램 짠 대로 콘도 정했던 거라, 거기까진 몰라.”

이석은 영수증 밑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을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계열사 할인인 것 같은데.”

“계열사?”

“파인스 파크 엘텍 거잖아.”

여기도 엘텍, 저기도 엘텍이었다. 하선우는 이마를 찌푸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우린 협력업체지 계열사는 아니잖아.”

“임 부장 생긴 건 그래도 되게 챙겨주잖아. 이번 설에 굴비 보낸 거 기억 안 나냐. 물론 우리가 배는 깨지긴 했어도 태어나서 하청업체 챙기는 엘텍 직원은 처음 봤다 진짜.”

이석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내내 그를 들볶고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이 정언한 목표인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들과 달리, 임 부장은 NnG에게 비교적 너그러웠다. 손톱을 숨기고 손등으로 토끼를 위한 당근을 툭툭 내미는 사자처럼 드물게 NnG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물론 NnG는 임 부장의 은혜에 보은을 하듯 지난 3개월 동안 죽을 둥 말 둥 토끼뜀을 뛰었었다.

“넌 안 타?”

“저녁에 타려고.”

“그러지 말고 지금부터 타자. 기다릴게 옷 갈아입고 와.”

“너무 피곤해서 그래. 저녁에 합류할 테니까, 이따 보자.”

슬로프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원들에게 리프트를 나누어준 하선우는 하얀 설경을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남기고 다시 콘도로 돌아왔다. 단출하게 기능 위주로 꾸며진 거실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자 구김 없는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가 그를 반겼다. 순백의 모습이 졸음을 부추겨 그는 지체 없이 침대 위로 엎어졌다.

원 없이 낮잠을 즐기던 그가 눈을 뜬 것은 해거름이 질 무렵이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의 긴 그림자 뒤로 짙어지는 밤의 흔적을 본 하선우는 둥글게 몸을 말며 하품을 했다. 오랜만의 숙면에 나른해진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며칠 전 내렸던 폭설은 여전히 온 세상을 눈으로 뒤덮고 있었다. 침대에서 허리만을 일으켜 세운 하선우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설경 위에는 남빛과 보랏빛, 자줏빛의 노을이 장대한 스펙트럼으로 경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개미만큼 작아진 사람들이 슬로프의 사면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응시하던 하선우의 눈이 산 고개 너머 민둥산으로 향했다. 슬로프를 확장 중인지 산 정상에서부터 사면이 깎여 있었다.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아홉 개의 슬로프가 있는 작은 스키장에 불과했었지만, 대기업에 인수된 뒤 스물아홉 개의 슬로프와 골프장, 스파가 추가로 건설되어 규모가 확장되었다. 강원도에 자리해 설질이 좋은 편인 데다가 최상급 코스가 국내에서 가장 길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그는 시즌권을 끊고 스키장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바쁜 일정 탓에 최근 스키장을 다니지 못했던 그는 눈 슬로프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쉴 만큼 쉬었다고 판단한 그는 직원 간의 저녁 식사 일정을 맞추려 서둘러 스키복으로 갈아입고 장비를 챙겨 콘도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스낵 코너에서 간단한 주전부리를 들고 테이블마다 흩어져 있었다. 칼바람 속에서 무리해가며 운동한 사람들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많이 배웠어요?”

“계속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중급 코스 도전해보려고요!”

“지선 씨 안 돼! 누구 죽이려고.”

깔깔거리며 서로의 어깨를 치면서 웃는 여사원들 틈에 껴서 대화를 나누던 하선우는 건너편에 몰려 있는 신입사원들을 발견했다. 신입들은 대부분 보드를 택해 스키부츠를 신고 로보캅처럼 걷는 사원들과 달리 움직임이 자유로워 보였다.

“탈 만해요?”

“예. 윤 팀장님이 많이 알려주셨어요.”

“윤 팀장이?”

“그런 반응은 뭡니까 사장님.”

“윤 팀장 이번이 두 번째로 타는 거잖아요.”

“아!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요. 한참 가오 잡았는데.”

“이거 완전 야매네.”

“타다 보면 느는 거죠. 이젠 중급에서도 제법 타거든요? 그런 사장님은 잘 타요?”

“나 스키 경력만 20년 넘었거든요?”

“그럼 우리 강습 좀 해줘요.”

“안 돼요. 초급에서 놀면 재미없단 말입니다.”

괜한 트집으로 실없는 농담을 하던 하선우는 주변 직원들에게 하나하나 말을 걸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직원들은 하선우의 그런 간섭을 달가워하는 분위기였다.

“잠은 좀 잤냐?”

“어… 미안.”

“뭘 또 미안하대. 어차피 팀 나눠져서 자기들끼리 타러 다니더라. 리프트는 끊었어?”

“응.”

“회사카드 나한테 있는데 네 돈으로 했냐?”

“그렇긴 한데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 스포츠 회원권 있어서 싸게 샀거든.”

“스포츠 회원권?”

“예전에 아버지가 파인스 가족 스포츠 회원권 분양받으셨거든.”

“아… 그랬지. 너희 집 로열패밀리였지.”

“로열패밀리는. 진짜 로열패밀리 들으면 코웃음 치겠다.”

하선우의 말에 이석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입술을 벙끗거리다, 한숨을 쉬었다. 침묵과 한숨 사이에 삼켜진 말들을 하선우는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서로가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부유함의 잣대가 다름으로 설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하선우는 대화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갈까? 설질 정리 다 끝난 것 같은데.”

다시 재가동하는 리프트를 보면서 하선우는 말했다.

실력에 맞춰 코스를 선택해 사람들이 흩어진 뒤, 하선우는 상급자 슬로프를 타려는 사원들과 팀을 꾸려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최상급자용 코스로 가려는 사람이 없어 하선우는 홀로 마지막까지 셔틀에 앉아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배웅했다.

파인스 파크 중에서 정상 지점이 가장 높은 최상급자 블랙코스는 2킬로에 달하는 슬로프를 갖고 있었다. 체감상 거의 절벽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게다가 산 정상에서 시작해 저변을 향해 내뻗은 비탈이 여러 면으로 갈라졌다 합류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위험한 지역이 곳곳에 있었다. 때문에 초급자의 이용이 금지되는 구역이었다. 그럼에도 하선우는 가끔씩 이곳에서 최상급자 코스를 도전하는 간 큰 초급자들을 만나 몸을 사려야 할 때가 있었다.

초·중급자 이용을 금지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는 비탈을 지나 매점에서 산 음료수병을 등가방에 넣고 플레이트에 스키부츠를 끼워 넣었다. 줄이 짧아 하선우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곤돌라에 탑승했다.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성긴 구름이 강원도의 산봉우리 자락 위로 엷게 펼쳐졌고, 짙은 남빛 하늘 아래 검은 수림은 능선 위에 피부처럼 밀착되어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압도적인 중량감의 봉우리들은 그가 강원도의 스키장을 찾는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거대한 조명등을 설치해 대낮처럼 밝은 슬로프와 대비되는 밤하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선우는 바인딩을 조절하며 스키 장비를 정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거리는 곤돌라의 진동이 그의 발밑에서 느껴졌다.

정상에 도착한 뒤 하선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밤안개처럼 축축한 구름이 뺨을 감쌌다, 칼바람에 흩어지길 되풀이했다. 얼음처럼 다져진 눈을 밟고 앞으로 나가던 하선우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비탈을 향해 미끄러졌다.

백광의 조명이 눈이 부시도록 반사되는 순백의 지면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지면을 긁듯 내려가는 보더들을 피해 커다랗게 비탈면을 향해 턴을 했다. 거의 절벽처럼 체감되는 슬로프를 활주하며 하선우는 스릴을 즐겼다. 허리를 낮추며 속도를 높이다,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턴을 반복하며 블랙코스의 가장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10여 분에 걸쳐 슬로프의 바닥까지 내려온 하선우는 플레이트를 벗고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오랜만의 운동에 무릎이 후들거렸다. 경사면을 향해 마주 앉은 채로 하선우는 음료로 마른 목을 축였다. 흥분의 여운에 심장이 뜀박질해댔다.

슬로프에는 스키어보다 스노우보더가 높은 비율로 많았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스키를 타는 사람이 월등히 많았지만, 젊은 층이 늘어나면서 요즘은 보드를 선호하는 추세인 듯했다. 폭이 좁게 움직이는 스키에 비해 좌우로 넓은 S자를 그리며 하강하는 보더를 살펴보던 하선우의 눈에 산의 허리쯤에서 활강하는 스키어가 들어왔다.

짙은 남청색의 스키복을 입은 사람이 좁은 S자를 그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상하체와 무릎을 좁게 움직이는 숏턴 방식이 오랫동안 자세를 교정받아온 사람처럼 전문적이었다. 20년 가까이 스키를 탔지만 나쁜 습관이 몸에 배어 고쳐지지 않는 하선우와 달리, 가볍게 리듬을 타는 품새가 우아했다.

좁은 포물선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선우의 시선이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특이하게 움직이는 작은 점이 보였다. 유려한 솜씨의 스키어와 달리, 정상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누군가가 아주 천천히 슬로프를 내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하선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겁도 없이 최상급자 코스에 도전했다가 어쩔 수 없이 보드를 들고 내려오는 초급자였다. 초급자는 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대신, 보드 장비를 짊어들고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비탈의 경계면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오는 초급자를 비웃듯 그의 지척에서 보더들이 속도를 붙여 활주했다.

객기를 부려 최상급자 코스에 도전했다가 겁에 질려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을 하선우는 스키장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하곤 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절벽처럼 느껴지는 경사각도에서 한 사람을 리드해 내려오는 것은 하선우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곤돌라를 기다리는 대열을 향해 걸어가던 하선우는 좀 전의 스키어를 보았다.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턴을 한 그는 곧바로 곤돌라 탑승구로 튕기듯, 미끄러져 나갔다. 그 동작이 유연하기 그지없어 대기줄의 사람들은 짙은 남청색의 스키복을 입은 인물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하선우보다 먼저 도착한 그는 남자인지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데다가 모자 밑으로 짧게 친 머리가 뒷덜미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남자가 사용하는 스키부츠와 폴, 플레이트 모두 선수용 제품이었다. 검은 모자와 야간용 고글, 그가 입고 있는 스키복은 대중적인 브랜드는 아닌지 상표가 보이지 않았다.

하선우는 평창과 무주 리조트 일대의 최상급자 코스에서 심심찮게 마주치던 선수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착용하던 장비를 남자의 것과 비교하던 하선우는 그가 카빙스키 선수 혹은 스키 선수에 준하는 관심을 가진 마니아일 것이라고 별로 진지하게 따져 묻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좀 전보다 길어진 대기 줄에 서서 하선우는 빠른 음악을 들었다. 심장의 박동수보다 빠르게 비트는 내달렸고, 자꾸만 몸은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했다. 슬로프를 활강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가벼운 전율에 차 있던 하선우의 눈에 또다시 남자의 뒤통수가 밟혔다. 대열 속에서 머리 하나 큰 차이로 불쑥 솟아 있었기에 눈에 띄었다. 남자는 장갑을 벗어 폴에 꽂아 넣고 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버튼을 꾹꾹 누르는 손가락이 찬 공기에 노출되어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전화를 걸던 남자는 고글과 모자가 거슬리는지 거칠게 벗어버리고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하선우는 두 눈을 의심했다. 땀에 젖어 앞머리가 눌리고, 칼바람에 뺨이 붉어진 남자의 청년 같은 분위기는 낯설었지만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강주한의 눈길이 하선우에게 닿은 순간 그는 미약한 헛숨을 들이쉬었다. 맥박이 빠르게 상승하고 얼굴에 압력이 올랐다. 남자의 시선은 하선우에게 잠시 머물다 곧 여과되어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선우는 자신이 고글을 쓰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워머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다행이다. 속으로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하선우는 다행스러움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서울을 벗어난 장소에서 사내와 희박한 확률로 조우하게 된 것은 더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를 반가워하는 마음 한편으로 하선우에게는 그에게서 한발 물러서게 되는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는 체를 할까.

늘 무방비 속에서 발견당하는 것은 하선우였고, 살그머니 다가와 어깨를 움켜쥐었던 것은 강주한이었다. 그늘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수상한 얼굴로 그는 늘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그 반대의 입장이 되어 있었지만 하선우는 입도, 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인파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강주한의 뒷모습 훔쳐보았다. 통화를 끝낸 강주한은 모자와 고글을 고쳐 쓰고 대열에 맞춰 앞으로 걸어갔다. 젊은 청년 같은 인상의 흐트러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운동으로 인해 내부에서 솟는 열기와 외부의 차갑게 언 공기가 마찰되는 피부를 발갛게 물들인 채 그는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줄은 계속 줄어들어 강주한은 하선우가 탄 곤돌라의 바로 전 곤돌라에 몸을 실었다. 2킬로미터가 넘는 케이블을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하선우는 접촉의 지점을 다시 재정립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강주한을 그대로 보내는 것보다는 눈도장이라도 찍는 게 낫다는 속물스러운 마음에 기대어 결심을 굳혔다.

정상에 도착한 강주한은 곧바로 슬로프를 향해 미끄러지는 대신 전망대 앞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스키 부츠에 엉겨 붙은 눈을 떼어낸 뒤, 1,400미터의 고도에서 어둠에 파묻힌 산맥의 날카로운 능선을 감상하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하선우는 편의점에서 따듯한 커피 두 개를 사들고 강주한에게로 슥슥 미끄러져 갔다.

“저… 강 전무님이십니까?”

어슴푸레한 산의 굴곡에서 눈을 뗀 강주한은 고개를 돌렸다. 가늘게 눈을 떠 상대방을 확인한 그는 아는 얼굴을 만나 놀랐다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요. 선우 씨.”

“이런 데서 전무님을 다 뵙네요. 닮은 분인가 해서 혹시나 싶었는데.”

웃으며 하선우는 말을 이었다.

“1,400미터 고지에서 보게 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네요. 혼자 오셨습니까?”

“예.”

“저는 워크샵 때문에 오게 됐습니다. 리조트 콘도에서 지금 묵고 있고요. 시설이 아주 잘되어 있더라고요.”

“…….”

“그러고 보니 법인카드로 리프트 할인까지 받았습니다. 협력업체에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아마 임 부장이 챙긴 걸 겁니다. 부장님을 통해 종종 NnG 소식 들었습니다.”

“강 전무님 많이 바쁘셨다고 전해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돼서 기쁘네요.”

“예.”

정적.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모든 게 원점으로 되돌아왔음을 깨달은 하선우의 마음속에도 침묵이 흘렀다. 가벼운 어지럼 같은 공황 속에서 하선우는 자신의 순발력이 모자란 건지, 강주한이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좀 전에 보니까 스키 잘 타시던데. 경력이 오래되셨나 보죠.”

“한 20년 됐죠.”

“저와 비슷하시네요. 저도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 따라 타러 다녔거든요. 뭐 지금은 워크샵을 온 것뿐이지만. 시설이 좋아 직원들이 만족하니 온 보람이 있네요.”

환하게 웃는 낯의 하선우를 강주한은 빤히 바라보았다. 횡설수설하는 가운데 가까스로 조금 전까지 강주한이 바라보고 있던 풍경을 기억해냈다. 조금 더 강주한에게로 가까이 걸어간 하선우는 그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밤 풍경을 보며 말했다.

“밤 풍경 멋지죠? 낮에 산맥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더 묘해집니다. 고도가 1,400미터 정도 되는 데다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야생의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말하면서도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데다가, 정상에서 부는 칼바람에 몸이 바짝 긴장한 하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애써 의연하게 짓는 웃음 너머의 감정들을 헤아리듯 강주한은 대답 없이 하선우의 얼굴을 감상했다.

“낮에 보면 경치가 더 좋습니다. 하긴, 저보다 강 전무님이 이곳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

마치 관심 없는 행인을 붙잡고 도를 아시냐고 묻는 사이비교 초신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투과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것 같았다. 강주한은 열을 앓는 것 같은 하선우의 얼굴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반응을 구걸하는 느낌에 그의 표정이 점차 굳어갈 찰나, 강주한이 입을 열었다.

“잘 알죠.”

“…….”

“맑게 갠 날에 백두대간 능선이 죄다 보인다는 것도.”

“그랬죠. 여기가 태백산맥 중간 자락이었죠?”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헛기침을 하자 강주한의 얼굴에 성긴 감정이 번졌다.

“하선우 씨는 여전하군요.”

벽을 허무는 웃음이 그의 목 아래에서부터 낮게 흘러나왔다. 그 웃음에 하선우는 멋쩍어졌다. 그의 말이 꼭 어수룩하다는 말의 동의어처럼 들렸다. 다가오지 못하도록 어렵게 만든 사람은 강주한이었으면서 도리어 놀리고 있었다. 하선우는 내심 화가 났지만, 곧바로 응수할 말이 없었다.

“이리 와 앉아요.”

하선우를 위아래로 살펴본 강주한은 상체를 앞으로 바짝 당기며 조금 전까지 거리를 두던 태도를 치워버렸다. 그리고 하선우의 물음에 단답으로 대답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나갔다.

“인연은 인연인가 보죠. 아무런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여기까지 왔는데 하선우 씨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워크샵이면 리조트에 머물다 가겠군요.”

“예.”

“잘됐네요. 저도 객실에서 머물 예정인데. 근데, 옷 취향이… 귀여운데요.”

“귀엽긴요. 스키장에서는 되도록 눈에 띄는 색을 입는 게 안전을 위해서도 좋으니까요.”

손을 뻗은 강주한은 하선우의 하늘색 스키복을 가만가만 만지작거렸다. 리프트가 들어있는 비닐 주머니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

“새벽까지 타나 보죠.”

“아뇨. 자정까지만 타려고 합니다. 내일 아침에 세미나 있거든요.”

“회사는 잘돼갑니까.”

“예. 전무님 덕분에 잘되고 있습니다.”

강주한은 한숨 쉬듯 웃었다. 갑작스럽게 친근해진 강 전무의 태도를 의식하며 하선우는 조금 더 깊게 웃었다.

“종합기술원에서 연수받고 있다면서요.”

오래전 엘텍의 종합기술원에서 연수를 받는 일을 두고 뻣뻣하게 굴던 자신의 태도가 떠올라 하선우는 객쩍은 얼굴로 말했다.

“예. 아시네요.”

“하선우 씨 사정은 임 부장이 매주 보고하고 있으니까….”

공손한 태도로 뒷말을 기다리던 하선우의 미묘하게 변화하는 표정을 주시하며 그는 말했다.

“일산 본사에 신규사원도 뽑았고, 울산의 공장에서 새로 뽑은 생산직원들 교육 중이고 CVX-1001모델 배터리 케이스 제작 중이라고 보고받았습니다.”

“예… 그랬죠.”

“아직까진 서로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더군요. 뭐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머리 아픈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짧게 말을 끊은 그는 벗어두었던 플레이트에 스키부츠를 고정했다. 그리고 기습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 커피 나 주려고 산 거죠?”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깨어졌던 하선우의 표정은 곧장 수습되었다.

“예. 예. 여기….”

주머니 속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는 병목을 잡아 강주한에게 내밀었다. 두툼한 장갑을 낀 손으로 병뚜껑을 돌리며 그는 말했다.

“좀 걸을까요.”

옷깃 사이로 스미는 칼바람을 맞으며 두 사람은 발왕산의 산봉우리를 깎아 만든 넓은 터를 걸었다. 1,400미터의 드높은 고도였지만, 슬로프의 정상에는 스낵코너와 카페, 전망대와 편의시설이 간단하게 갖춰져 있었다. 펜스에 등을 기댄 채 능선을 타고 올라온 거센 기세의 찬바람을 맞으며 두 사람은 어쩌다 나온 파인스 리조트의 회원권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다섯 장을 1,500만 원에 구입했으면, 그때 시세로도 저렴하게 분양받았던 편이군요.”

“예. 그랬던 편이죠. 지금은 그 회원권 한 장을 2,000만 원 주고도 못 사거든요. 물가도 오르고 엘텍에서 인수하면서 값이 많이 뛰었죠.”

“하선우 씨 거의 20년째 이용 중이라고 했죠?”

“예. 파인스 파크로 이름 바뀌기 전부터 이용했으니까요.”

“부모님이 스키에 관심이 많으셨나 보죠.”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즐기는 스포츠가 스키였거든요. 겨울에는 네 아들 데리고 리조트 오는 재미로 사셨죠.”

“나도 여길 10년 넘게 이용 중이니까 생각보다 자주 마주쳤을 수도 있겠군요.”

“하하…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같이 리프트를 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혹시 모를 가능성에 하선우는 스키장에서의 일들을 더듬어봤지만, 잠들어 있는 기억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주한 역시 별다른 의미를 갖고 한 말 같지는 않았다.

“보통 스키를 잘 타면 보드까지 손대던데, 보드도 타실 줄 알겠군요.”

“보드는 중급 코스까지만 떼고 포기했습니다. 판 하나에 두 발이 묶여 있는 게 불안하기도 하고 넘어지는 게 스키보다 아프더라고요.”

하선우의 말에 강주한은 공감하는 얼굴로 웃었다.

두 사람은 이후로 스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장비와 선수, 스킬, 하선우는 알지 못하는 세계 곳곳의 유명 스키장에 대한 소감으로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3개월간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두 사람 간에 유일하게 닮은 스키라는 취미였다. 희미한 유대감을 느끼며 하선우는 말했다.

“스키야 다 같이 배웠지만, 결국 지금까지 스키를 타는 건 저뿐이더라고요.”

“가족들은요?”

“학생일 때만 해도 아버지와 많이 타러 다녔지만, 무릎수술 받은 뒤로 좋아하던 스키를 안 타세요. 형들은 개업의가 아니라 월급받는 의사다 보니 바쁘기도 하고요.”

“그럴 땐 보통 애인들과 타러 다니지 않던가요.”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짧게 침묵했다. 남자를 좋아하냐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런 의미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를 파악하며 하선우는 말했다.

“가끔 애인들과 타러 다녔지만 별로 취미를 못 붙이더라고요. 일일이 초급부터 가르쳐야 하니까 저도 지치고, 상대방도 지치고… 매번 올 때마다 몇 십만 원씩 쓰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러다 보니 스키장 데이트는 꿈도 꾸지 않게 됐죠.”

“주로 하선우 씨가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나 보죠.”

중요한 관심사라도 되는 것처럼, 강주한의 순수한 의문 밑에서 은근한 공기를 읽어냈다.

“네… 뭐. 늘 그랬던 건 아니고.”

하선우는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버렸다.

“스키 타는 자세가 좋으시던데. 연습 많이 하셨겠습니다.”

“현직 선수의 지도로 스키를 배운 거라 아무래도 나쁜 습관이 남들보다 덜하죠.”

“부럽네요.”

“하선우 씨도 남부러워할 실력은 아닐 것 같은데요.”

“오래 탔어도 자세가 좋진 않아요. 프로 선수 동영상 강의 보면서 배운 게 전부라 최상급에서 타긴 해도 엉망이죠.”

“가르쳐드릴까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입에 담은 강주한은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어물쩍 웃음으로 넘기려던 하선우는 뜻밖에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사양하려다 멈칫하는 하선우의 표정을 보고 풀썩 웃은 강주한은 팔을 뻗었다. 흠칫하는 반응에 정지했던 손은 하선우의 정수리로 향했다. 머리에 걸쳤던 고글을 쭈욱 당겨 눈가에 씌워주고 넥워머를 코끝까지 올려준 뒤 팔을 잡아챘다.

“가죠.”

대답도 듣지 않고 팔짱을 껴 상체를 구속한 그가 설면을 죽죽 미끄러져 나갔다. 갑자기 의욕을 보이는 그에게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 끌려가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스키 플레이트와 스텝에 얽히지 않으려 애를 쓰며 간신히 그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중상급 레드코스와 최상급 블랙코스가 갈리는 갈림길에서 장비를 다시 재정비한 그는 말했다.

“먼저 조금 내려가 있을 테니, 뒤따라서 내려와요. 어떻게 타는지 자세 좀 보게.”

평평한 설면을 걸어가던 그는 레드코스로 꺾이는 경사면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자세를 낮췄다. 블랙코스에 비해 비교적 경사가 낮은 슬로프 위로 플레이트를 11자로 세워 빠르게 내려간 그는 200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몸을 급격하게 멈춰 세웠다. 그는 손을 까딱이며 내려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폴을 양손에 꽉 쥐고 자세를 바로잡은 하선우는 짧은 심호흡을 한 뒤에 설면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자세를 의식하려 애쓰며 내려온 하선우는 방향을 꺾어 강주한의 지척에서 멈춰 섰다. 하선우의 자세를 관찰한 강주한은 말했다.

“그런 대로 나쁘진 않지만, 무릎과 엉덩이 사용을 잘 못했어요. 리듬도 별로고.”

기다란 폴로 하선우의 무릎과 엉덩이 아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려 지적한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상체는 고정시키고 하체만 움직이면서 스키를 V자에서 점차 평행으로 만들어보시죠. 이번에 시범 보이면서 내려갈 테니, 잘 봐둬요.”

강주한은 100미터 남짓한 거리를 좁은 S자 곡선을 그리며 내려갔다. 동영상 강의에 나올법한 교본 자세였다. 그를 뒤따라 내려가며 하선우는 강주한의 자세를 머릿속에 그렸지만, 원하는 대로 숏턴 자세가 나오질 않았다. 비탈면과 플레이트의 각을 세워 하선우의 바로 옆으로 미끄러져 온 강주한은 허리를 굽혀 하선우의 무릎과 무릎의 뒤축을 잡았다.

“정강이로 무게 중심 옮겨봐요.”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강주한이 허벅지의 뒤쪽을 만졌다.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의 경계를 그의 넓게 펼친 손이 더듬었다. 움찔, 단단하게 긴장한 근육을 확인한 그가 눈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이 무게중심 기억해둬요.”

“예.”

“한 번 더 시범 보일 테니까 따라와요.”

강주한은 곧바로 몸을 돌려 비탈진 사면을 리드미컬하게 내려갔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조언을 기억하고 그가 정해준 자세대로 움직이려 했지만, 그가 오래도록 익혀온 습관적인 리듬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시범과 연습을 반복하며 산의 절반 가까이 내려왔지만 나아진 것이 없었다. 하선우는 갑갑함에 고글과 워머를 벗어버렸다.

“자꾸 지팡이에 의지해서 흐름이 깨지는 것 같으니까, 그 폴 쓰지 말고 나 줘요.”

순순히 강주한에게 폴을 건네주자 그가 말했다.

“내 손 잡아요.”

“예?”

“내 손 잡고 다리만 움직여요. 왈츠 추는 것처럼 천천히 내려가며 보조해줄 테니까, 천천히 내려와요.”

지팡이처럼 의지하고 있던 폴을 가져가 고리를 묶어 어깨에 걸치고 강주한은 정상을 마주 보고 섰다. 당장에 뒤로 미끄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자세였다. 평평한 지면도 아니고, 경사진 비탈면에 반대로 선 강주한은 하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꾸로 서 계시면 위험할 것 같은데요.”

“천천히 내려갈 거라 괜찮아요. 하선우 씨가 속도조절 못해서 덮치지만 않으면 안전합니다.”

강주한은 섣불리 내밀지 못하는 하선우의 손을 당겨 마주 잡았다. 두꺼운 장갑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옭아맨 그가 천천히 급경사진 비탈을 거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속도에 맞춰 조심스럽게 스키날을 세로로 세우던 하선우는 갑자기 빨라지는 속도에 비틀거렸다.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내려와요.”

“예, 노력하고는 있지… 만… 잘.”

“천천히. 그 속도 유지하면서. 무릎 구부려봐요. 예. 그렇게.”

하선우는 몸을 지지하는 폴 없이 강주한의 손을 잡고 있는 상황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마치 스케이트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아슬아슬한 날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상대방에게 의지하듯, 점점 맞잡은 손을 강하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다리에 잔뜩 힘을 줘도 속도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결국 허우적거리다 의지할 곳을 찾는다는 게 남자의 손을 강하게 당기고 말았다.

“팔에 힘 빼세요.”

“그러려고… 윽!”

그 순간 엉덩방아를 찧는 하선우의 위로 강주한이 엎어졌다. 거대한 돌덩이에 온몸이 부딪힌 것 같았다. 그의 아래에 깔린 채 비탈을 수십 미터 떠내려간 하선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등 뒤에 닿는 거친 설면과 강주한의 체중에 눌려 무의식중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뭔가가 머리를 강하게 압박했고,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눈 위를 데굴데굴 구른 두 사람이 멈춰 선 것은 출발 지점에서 한참을 내려온 뒤였다.

옷 속으로 눈이 잔뜩 들어와 차끈한 감각이 등 전체를 마비시켰다. 눈앞이 깜깜해서 고개를 움직이던 하선우는 이마에서 딱딱한 뭔가가 느껴져 움직임을 정지했다. 강주한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데다가, 그의 팔이 자신의 뒤통수를 감싸고 있었다.

“…….”

“덮치지 말랬잖습니까.”

거친 숨소리 속에서 묘한 웃음이 느껴졌다. 정수리에 닿는 숨결이 더워 하선우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마에 닿은 남자의 뺨이 당겨졌다. 마치 이 상황을 즐거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주한의 숨소리는 부풀어 있었다. 그 낯선 즐거움이 변명하려던 하선우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하선우의 긴 침묵에 강주한의 입술에서 서서히 웃음이 거두어졌다.

하선우는 오래전 울산에서 그의 속을 울렁이게 했던 그 눈빛을 보았다. 온기를 띠었지만, TV 너머 가상의 이미지 같던, 거북할 정도로 초연했던 눈빛이었다.

뒷머리를 감싸고 있던 강주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친 겁니까.”

“아뇨. 아닙니다. 일단 자세를…….”

다리 사이를 강주한의 허벅지가 무겁게 압박하고 있었다. 뒤엉킨 자세의 부자연스러움에 몸을 뒤로 빼자, 또다시 천천히 아래를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바닥까지 닿겠다 싶어 가속이 붙기 전에 발끝에 힘을 잔뜩 줘 하선우는 가까스로 버텼다. 살얼음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두 남자의 곁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속도를 줄여 살펴보다 스쳐 지나갔다.

손바닥과 무릎, 발끝, 마찰되는 면을 최대한 활용해 몸을 일으킨 강주한은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플레이트를 잡아챘다.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 뻗어 있는 하선우에게로 걸어왔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하선우는 눈만을 움직여 자신에게로 내밀어진 강주한의 손을 보았다.

“못 일어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선우는 또다시 아래로 미끄러질까 엉거주춤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런 그를 앞에서 안듯이 팔을 뻗어 등 뒤의 눈을 털어주며 강주한은 말했다.

“한 번 더 하죠.”

허리를 굽혀 강주한은 하선우의 발밑에 플레이트를 내려놓았다. 직접 스키를 신겨준 그는 자신의 장비를 챙겨 다시 스키를 탈 준비를 했다. 그의 눈빛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이채를 띠었다.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도록 제가 더 조심하겠습니다.”

하선우는 강주한이 느끼고 있는 즐거움의 정체가 뜬구름처럼 잡히지 않았다. 강주한은 이미 하선우가 남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은 상태였다. 그 역시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하선우에게 덮쳐진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건, 농담과 진담 사이를 위태롭게 저울질하는 도발이었다. 남자의 즐거움이 하선우 안의 뭔가를 건드렸다.

반응이 없자 강주한은 하선우의 손을 잡아당겼다. 의아할 정도로 의욕이 충만한 눈빛이었다. 스르륵, 경사진 슬로프에 거꾸로 멈춰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한 걸까 고민하던 하선우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슬로프의 바닥까지 내려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래된 습관을 고치려 무리하다 보니 무릎 아래와 골반이 뻐근했지만, 하선우의 숏턴 자세는 많이 나아져 있었다.

“익숙해진 것 같습니까.”

“예. 제가 워낙 뭐든 금방 배워서요.”

하선우의 장난스런 자만에 피식 웃은 강주한은 들고 있던 폴을 건네며 말했다.

“블랙코스에서 타도 그 실력이 나오나 볼까요. 가죠.”

두 사람은 곧 길게 늘어선 대기줄에 합류해 바람에 덜컹거리는, 외줄에 의지한 케이블 안에 붙어 앉았다. 부부로 보이는 커플과, 젊은 대학생들이 다닥다닥 욱여넣어진 8인승 곤돌라 안이었다. 각자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사람들은 슬로프를 거슬러 높이 올라갈수록, 비좁게 마주한 맞은편의 낯선 이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강주한을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자기 키만 한 보드를 든 대학생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리며 목소리를 줄였다. 말수가 적어진 강주한을 따라 자연스레 입을 다문 하선우는 멋쩍어하다 대낮 같은 슬로프 위로 둘 곳 없는 시선을 던졌다. 그중 가장 친근한 인상의 청년이 강주한에게 말을 걸어왔다.

“좀 전에 보니까 거꾸로도 잘 타시던데.”

창밖을 내려다보던 강주한은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중급 코스에서 그렇게 강습하는 강사는 봤어도 중상급 코스에선 처음 봐요.”

“…그저 천천히 내려온 것뿐입니다.”

청년이 말문을 트자 곁의 커플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합류했다.

“저희도 봤어요. 숏턴 연습하셨던 거죠? 스키 오래 탄 사람도 자세 바르게 내기 힘든 스킬인데. 잘 타시나 봐요.”

대답 대신 강주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되게 친절하시던데. 우리 남편도 좀 배웠으면 싶네요. 남편은 저 막 굴리면서 가르쳤거든요.”

혼자 깔깔거리며 웃던 여자는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친구분과 오셨어요?”

예. 짧게 대답하며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섞을 의지가 크게 없어 보이는 반응에도 사람들은 조금씩 수다를 거들었다. 높은 곳의 좁은 케이블 안에 고립되었다는 유대감 때문인지 붙임성 있게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곧 각자가 받았던 스키·보드 강습에 대한 얘길 나누었다. 스키장의 강사들에게 받았던 값비싼 강습에 대해 얘기하던 남자의 이야기는 점차 스키장에 대한 자질구레한 불만으로 뻗어 나갔다. 파인스 파크 리조트의 운영과 소유 지분, 계열사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지만 하선우는 리조트가 강주한과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주한을 앞에 두고 수도권의 스키장과 비교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강주한을 알아봐서 말을 붙였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강주한이 누구인지 몰랐다. 모자를 눌러쓰고 워머로 턱을 조금 가린 그를, 커다란 키의 말수 없는 미남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남의 이야기 듣듯 관심이 결여된 강주한의 태도와, 불만 많은 관광객 사이에서 하선우는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확인하며 침묵했다.

“저 사람 아직도 저기 있네.”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불만으로 웅성거리던 좁은 실내를 갈랐다.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 사람들은 여자가 가리키는 손끝의 방향을 쳐다보았다.

“30분 전에도 저러고 있더니.”

“난 한 시간 전에 본 것 같은데.”

“내려갈 자신이 없으면 처음부터 올라오지 말던가.”

혀를 차는 사람들에게서 가벼운 조소를 발견한 하선우는 그제야 창밖을 보았다. 가파른 슬로프를 보드를 들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산의 목 언저리에서 위로 올라가지도, 아래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보더였다. 그는 이제 겨우 산의 중턱을 내려오고 있었다.

“초급자가 최상급자 코스에는 왜 올라왔대요? 저러다 엄한 사람 다치게 하려고.”

“저 사람 보니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희 회사에 좀 사이코 한 명이 있거든요. 얼마 전에 스키를 처음 탔는데, 속도 줄이는 법조차 모르면서 다짜고짜 상급자 코스에…….”

산의 중턱을 지날 즘, 비좁은 실내의 갑갑함과 사람들의 수다가 지루한지 강주한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강주한을 위해 벽으로 몸을 더 붙이려는 순간, 그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이며 하선우의 머리에 옆얼굴을 기댔다. 힘이 실리는 접촉에 하선우의 몸이 움찔 떨렸다. 미량의 전극이 가해진 듯한 반응에 몸에 실은 체중을 거두던 강주한은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고개와 눈동자를 조금 움직여 하선우의 얼굴을 내려다본 그는 이윽고 다시 몸을 기대었다. 무릎에 강주한의 커다란 손이 힘없이 얹어지고, 나직한 숨소리가 살결을 스쳤다. 가타부타 말없이 진행된 접촉이 신경 쓰여 하선우는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고립되길 원한 남자가 오직 하선우에게만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하선우는 이 사실이 각별하기보다는 이상스러웠다. 자신을 둘러싼 대부분의 것들에 관심이 결여된 사내가 곁을 허락하는 방식이 피부와 피부를 닿게 하는 본능적인 접촉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선우는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에 유일하게 닻을 내릴 수 있는 사공이 된 기분을 느꼈다.

뻣뻣하게 힘을 준 하선우와 달리 강주한은 상체를 몇 번 뒤척이다 편안한 자세를 찾아냈다. 그의 턱이 하선우의 뺨 위로 가볍게 비벼졌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실렸던 체중이 거두어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두 사람은 얼음을 깎아 세운 것 같은 낭떠러지로 다시 뛰어내렸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며 활주하는 동안 곁에서 강주한이 같은 속도로 미끄러지며 하선우의 움직임을 곁눈질했다. 쉭, 쉭, 눈 쌓인 비탈면을 쓰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스키를 타는 강주한을 하선우 역시 곁눈질했다. 빠르게 미끄러져 내달리던 하선우는 슬로프를 500미터 남겨놓고 정지했다. 강주한이 돌연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속도가 빨라지니까 예전 습관 나오네요.”

하선우의 앞으로 미끄러져 온 그가 허리를 굽혀 손을 뻗었다. 발목과 정강이, 무릎의 움직임을 지적하던 그가 시범을 보이고 지척에서 멈춰 섰다.

“다시 해봐요.”

“예.”

상체와 하체를 가볍게 엇갈려 리듬을 타며 10여 미터를 내려온 하선우는 강주한의 반응을 보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강주한의 뒤로 거칠게 미끄러지는 흐릿한 인영을 보았다. 하선우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이상함을 느낀 강주한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빠른 속도로 덮쳐오는 사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강주한은 거뭇한 인영과 겹쳐 비탈의 모퉁이로 끌려갔다. 눈 쌓인 슬로프가 거대한 궤적을 그리며 깊게 파였고, 쇠와 쇠가 부딪히는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하선우의 눈앞으로 눈보라가 흩어졌다. 혼이 빠진 표정의 하선우가 발견한 것은 펜스에 처박혀 구겨진 두 남자의 모습이었다.

* * *

강주한은 정강이를 신중한 태도로 매만졌다. 왼쪽 다리 종아리뼈 중간의 골절로 그는 부목을 대고 두꺼운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동여맨 붕대 밑으로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낀 그는 건너편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내에게 눈길을 던졌다.

사내는 객기를 부려 최상급자에 도전했던 초급자 보더였다. 막상 타려니 겁이 나 정상에서부터 중반부까지 설설 기어 내려가다, 경사가 완만해지기 시작한 슬로프의 저변에서 보드를 탔던 것이 화근이었다. 스키장의 수칙을 준수하지 않은 것도 그였으며, 과실 역시 남자의 몫이었다. 부딪친 것이 하필이면 강주한이었고 단순골절인 강주한과 달리 그는 관절까지 파열돼 수술을 해야 했다. 곱절로 사고가 겹친 형태였다. 몸의 아픔을 뒷전으로 하게 하는 골치 아픈 상황에 잔뜩 주눅이 든 그는 안정제를 먹고 잠들어 있었다. 커튼이 쳐진 응급실 침대 위로 온기 없는 눈길을 보내던 강주한은 누그러지지 않은 태도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렇게 재수가 옴 붙을 수가 있나. 한순간의 객기 때문에 폭탄을 떠안은 사내의 처지를 한심해하고 동정하던 하선우는 조금 전의 급박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슬로프에서 사건이 발생한 직후 두 사람은 의무실로 옮겨졌다. 어떤 후유증이 잠복해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가속이 붙은 상태에서 부딪힌 것치고 강주한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사고를 낸 당사자는 몸이 고정된 상태로 들것에 실렸지만, 강주한은 제 발로 의무실에 걸어갔다.

그들은 곧바로 평창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강주한의 진단 결과는 하퇴부 정강이뼈에 금이 간 것이었다. 석고틀로 고정하거나 목발을 짚을 필요 없이, 부목을 대고 붕대를 단단하게 감은 상태를 두 달간 유지하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될 터였다. 하선우는 뻣뻣하게 긴장한 태도로 강주한의 상태를 말하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정 무렵에 응급실에서 당직을 설 군번으로 보이지 않는 중년의 의사였다.

강주한은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사건의 여파는 제곱의 수가 증가하는 형세로 퍼져 나갔다. 의무실에서 시작된 소란은 스키장의 간부들과 병원의 관계자들을 소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강주한의 일거수일투족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리조트의 간부들은 거대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핵심축이 고장난 것처럼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까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거추장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싶어, 강주한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소리가 제법 컸던지 몇몇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사내들 틈에서 형광 하늘색의 스키복 차림을 하고 있던-게다가 빌린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하선우의 차림새를 의아하게 쳐다보다 다시 강주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돌아오지 않는 하선우를 찾는 전화가 울려 밖으로 나와버렸다. 이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그는 강주한이 서울로 올라가는 것까지만 지켜보고 돌아간다는 대답으로 짧았던 통화를 끝냈다. 복도에는 강주한의 개인 비서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주한의 부상이 별거 아님으로 판단된 이후에도 서울로 올라가 정밀진단을 받을 스케줄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창밖에는 용케 강주한의 소식을 알아낸 몇몇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좁은 곤돌라 안과 달리, 강주한의 세상은 층층의 대리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고, 하선우에게 허락된 자리는 여기까지였다. 섭섭함도 아쉬움도 없이 사실을 받아들인 하선우는 복도의 의자에 털썩 걸터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좀 전의 사고를 목격한 이후 아닌 척했지만, 많이 놀랐던 듯했다. 가벼운 패닉이 피로감처럼 전신에 들러붙었다.

닫힌 문 너머 들리는 구둣발 소리에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강주한이 나왔다. 그는 외발의 목발을 짚고 있었다. 길이를 최대한 늘려도 그의 키에 비해 짧아 걸음이 불안했다. 그는 뭔가를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뭔가를 발견한 듯 하선우의 앞으로 걸어왔다.

“일이 번거롭게 됐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느끼곤 뜻하지 않은 겨를에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아, 아뇨. 전 괜찮습니다. 전무님이야말로 몸은 좀 어떠십니까.”

“진통제 처방받아서 죽을 것 같진 않아요.”

어깨를 으쓱여 웃던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피곤한데 돌아가죠.”

“…돌아가다뇨.”

“리조트로 가야죠.”

강주한의 말에 뒤따라오던 안 비서의 걸음이 멈칫했다. 하선우와 강주한을 번갈아 보던 그가 정밀검사에 대한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잠자코 듣고 있던 강주한도 안 비서에게 힘을 거의 들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하선우는 그의 입모양을 읽었다. 쉬고 싶습니다. 그는 별로 지치지 않은 눈을 들어 안 비서가 이후에 뱉어낼 말들에 자물쇠를 걸었다.

하선우는 오래전, 퍼스트 클래스 좌석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강주한의 차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낮은 조도로 실내를 밝힌 선루프의 조명이 아늑했지만 하선우는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안 비서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선우를 성가신 존재로 취급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눈빛이었다. 마치 강주한과 하선우의 거리를 재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강주한은 그 염탐의 기색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성가시게 들러붙는 관찰의 눈초리에 은근한 짜증을 느낀 하선우는 에라 모르겠다의 심정으로 그를 깨우려 입을 열었다.

“전무님.”

강주한은 눈을 감은 채로 대꾸했다.

“예.”

“정밀검사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키장 사고도 교통사고 못지않게 후유증이 남는다던데.”

강주한은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얼마 안 남은 휴식을 골치 아프게 병원에서 낭비하고 싶진 않아서요. 일단 오늘은 쉬고 받을 겁니다. 그런데.”

하선우에게 눈을 맞추며 강주한은 말했다.

“지금에서야 든 생각인데 사원들이 하선우 씨 찾지 않겠습니까.”

“아… 이사님께 자초지종 설명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사님도 많이 걱정하십니다.”

“별것 아니었다고 전해줘요.”

다시 눈을 감으려던 강주한은 안 비서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가족들에겐 얘기가 들어갔습니까.”

“예. 회장님 비서를 통해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임경호에겐?”

“좀 전에 병원 입구에서 윤동환 기자를 봤습니다. 아마 소식이 닿았을 겁니다.”

“음, 내일쯤이면 기사가 나겠군요.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는 극단적인 성향이 있는 후계자라고.”

강주한은 이를 조금 드러내며 웃었다.

임경호라는 이름은 하선우 역시 익히 알고 있던 이름이었다. 엘텍에 비해 언론에 노출이 덜한 편이지만 안신그룹 회장의 첫째아들인 그도 강주한과 같은 재벌 3세였다. 하선우는 점차적으로 단락 지어져가는 엘텍과 안신그룹의 소송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면과 인터넷을 통해 범람하던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을 기억해냈다. 그 흑색선전이 어디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있는지 그 근원을 추측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색달랐다.

“강 전무님.”

“예.”

“막내 도련님이 홍콩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강주한은 안 비서의 뒤통수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요.”

“시기에 대해서 정확한 언급은 하지 않으셨지만 늦어도 4월 내로 돌아오지 않으시겠습니까.”

미소를 유지한 채로 정지했던 강주한은 나지막이 웃음을 흘린다.

“구린 냄새를 맡았나 보죠. 생각보다 아주 바보는 아니었어.”

점차 웃음소리가 잦아든 뒤에도 그는 웃음의 여운이 남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에 비해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정적인 느낌이 드는 얼굴 안에 도사리고 있을 생각들을 짐작해보려다 관두었다.

콘도에 도착한 강주한은 그를 따라오려는 수행비서들을 모두 물리고 하선우의 도움만을 받아 로비로 들어섰다. 하선우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안 비서의 눈초리가 의미심장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이 들어온 건물은 NnG팀이 머무는 일반 콘도와 달리 호텔 콘셉트를 적용한 시설이었다. 이미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이었음에도 콘도의 로비에는 대낮처럼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프론트에는 표정이 뚜렷해 보이도록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자들이 인형처럼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텍그룹의 장자가 떴다는 얘기에 부랴부랴 소집되었을 직원들이 머릿수를 채우고 있었다. 비서까지 돌아간 마당에 왜 자신이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의아해하면서도 하선우는 강주한의 뒤에 고분고분하게 서 있었다.

강주한은 콘도의 드넓은 로비를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맞지 않는 목발은 애초에 차 안에 버려둔 상태였다.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보기 딱한 걸음에 제안을 했지만 그가 기대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하선우는 순순히 손을 뻗는 강주한의 행동에 내심 놀랐다. 체중을 실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아까도 느꼈겠지만 나 무거워요.”

하선우의 어깨 위로 체중이 조금 더 옮겨지고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뗐다. 엘리베이터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강주한은 다친 다리에 거의 힘을 주지 않고 외발로 움직이듯 하선우에게 의지했다. 엘리베이터 속 스테인리스 미러 안의 하선우는 어느새 강주한에게 안긴 것 같은 형상이 되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여 하선우의 등에 가슴을 기대고 정수리에 옆얼굴을 맞댄 그의 행동은 친근함 이상의 뉘앙스를 풍겼다.

카지노와 VIP 회원들이 찾는 고급 콘도의 복도는 은밀하게 검었다.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동물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게 닿는 카펫이 발밑에서 걸리적거렸다. 너무 부드러워 내장의 축축한 융털을 밟고 있는 듯했다. 로비에서부터 객실의 문 앞에 설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일체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하선우가 마음속의 더운 기류를 느낀 것은.

콘도라는 말이 무색하게 강주한이 머물 방은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하선우는 객실을 훑어보았다. 커다란 침대가 하나, 침구도 하나, 그러나 현관에 놓인 슬리퍼는 두 개였다. 꼭 두 사람이 한곳에 머물 것처럼 꾸며진 방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벨맨도 쓰지 않을 식상한 멘트에 대답하는 대신 강주한은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두툼한 방수 스키복 안에 껴입고 있던 옷은 브이넥의 검은 반팔 티셔츠가 전부였다. 강주한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청년 같은 분위기로 말했다.

“자고 가요.”

권유와, 부탁, 혹은 명령.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어조였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에 몸을 돌려 나가려던 하선우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강주한의 표정 역시 어느 곳으로 기울지 않은 모호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같은 침대가 아니더라도 강주한이 앉아 있는 커다란 소파가 있었고 머물라면 머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하선우는 조금 거리를 두는 태도로 말했다.

“옷을 다 두고 와서요. 돌아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옷을 굳이….”

끝말을 잇지 않은 채 그는 다친 다리를 침대 위로 들어 올렸다. 숨겨진 의미를 찾던 하선우는 완전히 강주한에게로 몸을 돌렸다.

“갈아입을 옷이 중요한 게 아니라면 모처럼 만났는데 같이 있죠. 나는 하선우 씨와 같이 있고 싶은데.”

하선우는 대꾸 없이 강주한을 내려다보았다. 거의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오래도록 침묵하던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맥주 사올까요.”

“냉장고 열면 있을 겁니다.”

하선우는 피부 위에 얇은 거미줄이 내려앉은 기분을 느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꺼낸 말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커다란 맥주캔 두 개를 꺼냈다. TV를 틀고 그는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두꺼운 스키복을 벗어버렸다. 강주한과 마찬가지로 얇은 티셔츠와 피부에 붙는 얇은 운동복만을 걸친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 강주한은 고전영화를 방영하는 TV 화면에 시선을 둔 채 맥주잔을 기울였다. 묵묵히 술을 비우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절반을 비울 즘 가벼운 전율이 살갗을 간질이고 나른함이 육체를 희롱하는, 알코올의 작용을 의식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제야 하선우는 술기운을 빌려 지금의 긴장이 어디서부터 길어져 오는 것인지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그는 한순간이나마 미친 상상을 해본 적 있었다. 곁으로 곁으로, 강주한의 지척의 거리로 다가가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때였다. 문득 그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그때만큼은 종교화에 나올 법한 우아하고도 음울한 얼굴이 바의 어두운 조명 때문에 관능적으로 보였었다.

최고경영자를 단 하나의 소비자로 본다면, 그 소비자의 욕구를 마케팅에 활용하라는 말이죠. 강주한은 혼잣말을 하듯 소리를 죽여 단순한 이론을 타전하듯 말했었다. 그때의 하선우는 강 전무의 욕구라는 단어가 유난히 도드라져 야한 느낌으로 다가와, 최고경영자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의 욕구. 스스로 생각해본 적 없던 문제들이 수혈된 남의 피처럼 혈관을 타고 돌았다. 그래서 하선우는 그로서는 할 수 없었을 어떤 미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호텔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밀착되었던 몸, 곤돌라 안에서 무릎에 얹어진 그의 커다란 손의 감촉, 살결을 스치던 나직한 숨소리, 사나웠던 하선우의 시선에 이채를 띠던 눈동자, 그리고 그 당시로선 이해할 수 없었던 강주한의 말. 실수할까 봐요. 눈빛과 체온, 미묘한 뉘앙스의 작은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늘어놓았던 단서들을 오독하지 않으려 신중함을 기울이던 하선우는 느리게 그것들을 매듭짓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것이 한 점으로 수렴되었다. 성적 암시였다.

싫으냐고? 자문해보던 하선우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한때이긴 하지만, 관능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를 어려워하는 것과 끌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였고, 거리를 두려던 행동은 본능적으로 거리가 좁혀진 뒤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선우는 작년과 올해, 마지막으로 만났던 남자들에 대해 떠올렸다. 그에게 욕망은 죄가 아니었고 그것에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밀고 싶지도 않았다. 타인과는 달리 성에 일찌감치 적응해, 유난한 자의식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강주한의 암시는 하선우를 망설이게 했다. 강주한은 그들과 달랐다. 그의 욕망은 실수였고 부주의한 것이었다.

강주한의 시선이 이마와 가는 잔머리 사이에 맺힌 땀에 머물렀다.

“덥습니까.”

땀에 젖은 앞머리를 개의치 않고 넘겨주며 그가 물었다. 진땀에 젖은 잔머리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와 눈을 맞춘 하선우는 입술을 당겨 조금 웃었다. 강주한은 이대로 간다면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덫을 놓고 하선우의 실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그의 검은 수심을 미처 재어보기도 전에 하선우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들어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자 매만지던 강주한의 손이 멈칫했다. 이런 빠른 충동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냉랭한 눈가가 흔들거렸다. 미처 생각할 겨를 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닫혀 있던 강주한의 입술이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수 초 뒤였다.

벌어진 잇새에서 젖은 감촉이 느껴진 순간 하선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닿지 않은 혀와 혀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머릿속에 공백이 흘렀다. 뒤늦게 이 미친 짓에 대해 정신을 차렸다. 그가 누군지, 어떤 인간이었는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자신의 충동에 하선우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입술을 떼고 난 후 찾아올 당황스러운 침묵에 주저하는 사이 하선우의 충동으로 시작된 입맞춤은 강주한에 의해 서서히 진도를 더해갔다.

하선우의 움푹 파인 혀 위로 그의 혀가 비벼지고, 벌어진 아랫입술을 깨물듯 빨며 머금은 입술은 깊어져 갔다. 숨소리가 급해지고 치열하게 엉겨갔다. 잔잔하던 수면 위로 급류가 쏟아졌다. 그의 입안에서 굴려지고 녹아버리는 사탕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헐떡이며 입술을 뗀 하선우는 침대에 반쯤 누워 강주한에게 밀착되어 있었다. 땀으로 끈적거리는 뒷목을 감싼 손이 목덜미를 매만지다 얼굴로 미끄러졌다. 턱을 잡아 하선우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고정한 강주한은 숨소리로 속삭이며 거짓말을 했다.

“…나쁘지 않은데요.”

마치 이럴 생각은 없었다는 듯이 그가 난처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자식. 하선우의 눈이 사나워지자 강주한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턱을 잡은 손안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엄지가 침으로 차게 젖은 아랫입술을 느리게 문질렀다.

그의 남은 손이 하선우의 손목을 잡아 침대로 눌렀다. 매트가 움푹 파이도록 힘을 준 팔에 강주한의 체중이 실렸다. 몸이 밀착되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강주한의 눈가 너머로 뭔가가 흔들거렸다. 검은 물이 응고된 것 같은 눈동자에 나약한 흰빛이 어른거렸다. 마치 그조차도 확신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듯이, 엄격한 검은 눈 위로 너울 같은 고민과 의심이 포개졌다.

“없던 일로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죠.”

마치 하선우와 그 스스로에게 다짐을 받아내듯 강주한은 물었다. 그 순간, 하선우는 기민하게 그의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 밤 실수해버릴까요.”

강주한은 처음부터 하선우와의 실수를 기다려왔구나.

흥분을 조절하는 바짝 당겨진 숨소리가 들렸다. 옷을 던져버리며 그가 미소 지을 때, 하선우는 작은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통증을 느꼈다.

마치, 자각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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