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밀실의 밤
벌써 나흘이 흘렀지만 손목의 멍이 가시지 않는다. 이로 긁은 자국이다.
잇자국을 가려보려 왼손에 차던 시계를 오른쪽으로 옮긴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강주한이 손목을 아프도록 씹었던 흔적에 자꾸만 생각이 얽매였기 때문이다. 손목시계의 체인을 살짝 들어 그 아래 여린 살을 만지작거리던 하선우는 탁상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며칠 전 충동적으로 구매한 거울은 책상의 끄트머리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게 싫어 일부러 모퉁이 안쪽에 밀어 넣었다. 평소 거울과 담을 쌓고 살아가던 그였지만 근래의 하선우는 잦은 횟수로 자신을 점검하곤 했다. 요즘 그는 거울을 보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내가 좀 괜찮은 편이긴 하지.
진지하게 거울 속의 남자를 살펴보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서서히 본색이 드러난다. 장난스럽게, 느린 속도로 입꼬리가 늘어난다. 그러나 웃는 얼굴은 동시에 곤혹스러운 감정을 품는다. 자신의 얼굴을 은밀하게 감상하는 태도가 낯부끄러워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질색하며 혀를 찬 하선우는 거울을 멀리 치워버렸다.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하선우는 벽면에 붙은 NnG의 연혁표와 수상내역을 흘긋 쳐다보았다. ‘경기도 유망 중소기업 선정’. 가장 윗줄을 차지한 것은 연말에 받았던 시상의 내용이다. 그 밑으로 울산 사업장 확장이라는 문구가 간략하게 적혀 있다. 모든 게 예년에 비해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다. 새로 리모델링해 깔끔해진 로비에는 NnG의 역사가 담긴 사진이 걸려 있다. 창업 당시의 NnG 건물과 확장 이후 사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울산의 사업장, 경기도청에서 수상 중인 이석의 사진 따위였다.
정 가운데에는 강주한과 하선우가 악수를 나누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에는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자리를 차지했다. 로비의 인테리어를 리모델링한 후, 두 달째 걸려 있는 사진을 의식하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하선우조차도 사진의 존재를 거의 망각하고 있었다. 나흘 전 일어난 사고만 아니었다면 벽면을 채운 흔한 장식품으로 여기고 말았을 사진이다.
“오늘따라 훤칠하시네.”
멍하니 서서 사진을 올려다보던 하선우에게 경비원이 말을 걸어왔다.
“정말요? 그런가요.”
“엘텍 가시나 보죠?”
“네. 제가 엘텍 갈 때마다 좀 티 나게 차려입긴 했나 봐요.”
로비에서 경비업무를 보던 사내의 반가운 인사에 민망한 낯으로 대꾸한 하선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출발하면 늦지 않게 도착할 것이다. 회사 정문을 벗어나기 직전, 그는 자신의 차림새를 한 번 더 점검했다. 평소에 입던 외출복인 패딩 재킷 대신 양복 위로 정장 코트를 껴입은 그는 가죽장갑을 끼고 회색의 캐시미어 목도리까지 두른 성장 차림이었다.
그는 매주 금요일, 엘텍 종합기술원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전자 계열사 중 전지사업부의 석·박사급 연구원이 모인 곳에서 연수를 받은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오늘은 특별히 전극소재기술에 대한 세미나를 하선우가 진행할 예정이었다. 일부러 옷차림을 신경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요즘은 회사 본업보다 대기업 연구소의 일로 더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시달릴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일본인 엔지니어들을 떠올린 하선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구름이 무겁게 드리운 하늘의 빛은 쇠약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처럼 어두운 하늘에서 을씨년스러움이 묻어나 하선우는 액셀을 밟아 속도를 높였다.
종합기술원은 엘텍전자가 위치한 을지로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중대형 전지 실용화를 연구하는 프로젝트 5팀에는 세부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내 대학 교수들과 박사급 인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선우를 비롯, 석사급 연구원은 몇 되지 않았다. 학벌로 어디서 모자라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던 그로서도 국내와 일본의 박사급 인원으로 가득한 엘텍의 프로젝트 팀원들 속에서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 나이대의 흔치 않은 실무경력과 연구실적 때문에 하선우는 테크니션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몇 주간 준비했던 간략한 세미나를 발표한 뒤 하선우는 소스가 바닥날 때까지 팀원들에게 시달렸다.
“일본 애들 재수 없지?”
강영광이 까칠하게 웃고 있었다. 프로젝트팀 중에서 흔치 않은 석사인 그는 하선우와 같은 대학 출신의 선배로 현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지쳤어?”
“…예.”
“원래 일본 놈들이 태클을 잘 걸어.”
“뭐, 전지 분야는 일본이 앞서니까요. 세이시로 덕분에 오류 수정하고 새로 빌드할 수 있….”
“야, 일 얘긴 그만하자. 밥 먹을 땐 일 얘긴 절대 안 하는 게 내 철칙이랬지. 쉬는 중에도 이런 얘길 들으면 자아고갈이 된다니까? 이럴 땐 포도당을 공급해야 하는데 왜 그러냐면…….”
강영광은 포도당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까칠하고 적당히 유머러스한 그의 단점이라면 너무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일 얘기보다 더 정신을 고갈하게 만드는 강영광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하선우는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접시에 담았다. 트레이에 한겨울에 보기도 힘든 홍시와 수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엘텍그룹 내에서도 종합기술원이 있는 을지로 센터는 가장 식사가 잘 나오는 사내식당이었다. 점심시간마다 음식냄새가 범람하는 NnG의 사무실을 떠올리자 따듯한 밥을 먹으면서도 기분이 씁쓸했다. 지금 짓고 있는 급식소의 완공날짜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며 강영광은 말했다.
“직원식당엔 웬일이래?”
강영광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선우는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넓은 홀 안을 가득 채운 직원들 외에는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뭐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
“강 전무.”
“강주한 전무님이요?”
뜨끔한 느낌에 뜸 들여 물었지만 강영광은 하선우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 저 끝에 있네. 안 보이나?”
“예. 시력이 나빠서 멀리는 안 보입니다.”
“식당 벽 쪽에 있잖아. 왼쪽 끄트머리.”
강영광은 턱으로 벽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그러나 하선우의 눈에는 수트 입은 사내들이 검게 뭉뚱그려진 채 보일 뿐이었다.
“전무님은 직원식당에서 식사를 안 하나 보죠?”
“이거 참 순진한 소리 하시네요. 보통은 본사 건물에서 식사하지.”
“오늘은 변덕이고요?”
“변덕까지는 아니야. CTCO부서랑 같이 식사하느라 직원식당 왔나 본데?”
“CTCO부서요?”
“이름 이상하지?”
요상한 콧소리를 내며 웃은 그는 여전히 하선우의 등 뒤를 주시하며 말했다.
“회장님 지시로 만들어진 건데 강주한이 전무로 발령나면서 생긴 신설부서야. 저 신설부서 덕분에 종합기술원이 천안으로 안 내려가고 여기서 버틸 수 있었지.”
잠자코 강영광의 말을 되짚던 하선우는 결국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전 여기 직원이 아니라서 팀장님 말씀이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아… 그런가? 별건 아니고 연구소의 대부분이 천안 사업장으로 옮겨졌거든. 우리 팀도 천안에 갈 예정이었는데 CTCO부서가 신설되면서 서울 본사에 남게 된 거야. 안 그랬으면 이 건물 부서 전체가 천안행이었지.”
“신설된 부서가 중요한 부서인가 보죠.”
“뭐… 그렇지. 치프 테크니션 앤드 치프 커스토머 오피서 약자라는데 장난 아니지?”
“탐나네요. 저희 회사도 신설부서 하나 만들까 봐요.”
“뭐로.”
“삼위일체 부서요. 경영의 아버지, 제품의 아들, 고객관리의 영.”
“너 그러다 망해.”
하선우는 시큰둥한 얼굴로 턱을 괬다.
“엘텍전자 기술총괄 부서와 고객들을 관리하는 부서가 합쳐진 건데 강 전무 산하조직이지. 강 회장이 강주한 전무 사장 만들어주려고 만든 부서니 힘이 얼마나 막강하겠어.”
“구체적으로 뭘 하는 부서기에 그렇게 힘을 실어준답니까.”
“강 회장이 주구장창 외치는 게 뭐냐. 미래 주도 경영 아니냐. 미래형 기술을 수익사업으로 바꾸고 외국기업 고객 관리하는… 음,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곳이라고는 하는데 뭐, 강주한 전무 개인을 위한 전위부대지. 요즘은 CTCO부서의 파워가 전략기획실 못지않다니까. 최근에는 그 뭐냐, 유럽 전기차 개발 컨소시엄 계약 체결 때문에 엄청 빡시게 돌아가잖아.”
“유럽 전기차 개발 컨소시엄이요? 진짜 전기차라도 개발한대요?”
“뭐… 정확히 말해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EV, HEV, PHEV에 탑재될 고성능 배터리를 개발하는 거니까.”
“유럽 단위로 투자가 들어갈 정도면 꽤 규모가 큰가 보죠.”
“유럽뿐이야? 절반을 유럽 에너지국에서 지원하고 나머지 절반을 다임러, BMW에서 부담하는 프로젝트야. 우선적으로 부품 공급계약을 체결할 수 있으니까 국내외 업체에서 완전 사활 걸었잖아. 꽤 오래전부터 시작한 걸로 알고 있는데 엘텍이랑 몇몇 업체가 거의 최종 단계까지 갔어.”
“그런 프로젝트는 누가 맡는데요?”
“당연히 윗대가리가 맡지. 얼마 전까지 임권혁 사장이 진두지휘했었어.”
“아… 임권혁 사장님이요.”
강영광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픽 웃었다.
“친인척 비리문제로 터졌었는데 생활가전부로 좌천되더니 얼마 전에 그만뒀어.”
하선우의 뇌리로 임권혁의 얼굴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지난겨울, 울산 공장에서 산원테크의 염 사장과 함께 강주한에게 발견되었던 그가 어떻게 쫓겨났을지 대강 짐작이 갔다.
“아무튼 우리도 계약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아. 이번에 핵심으로 밀고 있는 기술 중에 우리 5팀이 연구 중인 전극소재기술도 포함된 모양이더라.”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별생각 없이 듣고 있던 하선우는 눈을 깜빡거렸다. 하선우와 강영광이 포함된 5팀이 연구하는 전극소재기술은 바로 NnG와 엘텍이 계약을 맺었던 원천 특허 기술이었다. 좋은 성과를 낸다면 NnG는 엘텍으로부터 특허 사용료로 로열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선우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말했다.
“어느 정도나 영향을 끼치는데요?”
“뭐 어느 정도 보탬이 되는 수준이다 이거지. 일단, 엘텍이 가진 전기자동차 전지 특허만 1,300개가 넘어. 또 올해 자동차용 전지 원천특허 보유한 미국업체까지 인수했잖아. 계약이 체결되면 그 영향이 제일 클걸.”
“그래도 저희 팀 연구 성과가 결과에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네요.”
무신경하게 수저를 뜨던 강영광은 갑자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하선우의 의욕 넘치는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는 이 일이 재밌나 봐?”
“뭐… 그럭저럭요.”
“됐다. 회사 사장한테 물을 말이 아니지.”
어느 날 갑자기 협력업체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꽂혀 들어온 하선우는 팀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뜨내기인 동시에 반 고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그는 사내의 복잡한 권력에서 빗겨나 있었다. 성과에 대해 심각하게 압박을 받지도 않고, 협력업체 사장치고는 태도가 아쉬워 보이지도 않았으며 툭툭 던져놓는 말들이 힌트가 될 때가 많았다. 직장인이 아니라 호기심에 가득 찬 학생 같은 태도를 보이는 하선우를 두고 처음에는 말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서서히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근데 너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그의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하선우는 눈도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뭐가요?”
“너는 여기 직원도 아니잖아. 여기서 머리 쓰는 것보단 네 회사에서 연구 개발하는 게 낫지 않아?”
“갑자기 왜요. 무슨 말이 그래요?”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하긴 해도 어쨌든 종합기술원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거잖아. 그럴 거면 그냥 네 회사에서 연구개발 하는 게 낫지.”
“협력 프로그램으로 들어온 건데요 뭐. 손해 볼 것 없죠.”
강영광은 혀를 찼다.
“엘텍에서 특허 내봐야 직무발명 되는 거 아냐.”
“…그렇긴 하죠.”
하선우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특허는 권한에 따라 크게 직무발명과 자유발명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직무발명은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 발명을 할 경우 특허의 출원과 특허권의 권리를 회사가 가져가고, 자유발명은 특허의 권리를 개인이 갖는 것을 의미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긴 하지만 하선우는 엘텍에 출근하는 중이었으므로 직무와 관련된 발명을 할 경우에 권리가 엘텍에 넘어갔던 것이다.
강영광이 순진한 어린애를 보듯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아이디어를 엘텍에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지금 그들이 연구 중인 기술이 하선우가 낸 원천특허에서 착안해 개발 중인 기술임을 모르는 듯했다. 특허권의 보호법에 따라 하선우는 엘텍으로부터 꾸준한 로열티를 챙겨가지만, 엘텍 소속의 연구원일 뿐인 그는 월급과 약간의 성과금만 가져갈 터였다.
게다가 하선우는 엘텍에 특허를 넘기는 조건으로 수십억의 무이자 대출금과 2억의 선불금을 이미 지원받은 상태였다. 위화감. 오전 내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단어가 수면을 향하는 기포방울처럼 머릿속에 방울방울 떠올랐다. 사실을 말하면 강영광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이전과 달라질 거라는 예감이 들어 말을 돌렸다.
“그래도 월급 많이 받으시잖아요. 잘되면 성과급도 있고.”
강영광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가 보기에 쟤들은 어떤 것 같아?”
손가락으로 하선우의 뒤편을 가리키며 강영광이 말했다.
“CTCO부서면 성골 정도 되겠다.”
슬쩍 그들을 돌아보았다. 흐릿한 머리색이 여럿 섞인 걸 보아 다국적으로 구성된 듯 보였다. 그러나 정장을 입은 사내들의 윤곽만이 보일 뿐 CTCO 부서 속의 강주한은 알아볼 수 없었다.
“절반이 외국 애들이야. 천재 중에서 고르고 골라 데려왔다더라. 연봉도 내 두 배는 받을걸.”
강영광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선배님도 잘나가는 엔지니어잖아요.”
하선우의 딱딱한 타박에 강영광은 혀를 차며 말했다.
“뭐 그렇다 치자.”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그는 말했다.
“너는 좋겠어.”
“뭐가요.”
“자신의 존재 여부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지만 일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탁월한 일꾼이라서.”
“예?”
“생각 없이 사는데 일은 잘한다고.”
강영광의 말을 이해하려 하선우는 수 초간 침묵했다. 마침내 얼굴을 확 찌푸리며 그가 말했다.
“뭔 말을 그렇게 꼬아서 해요?”
“모르겠어? 칭찬인데.”
“그게 무슨 칭찬입니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딴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잖아.”
“뒤늦게 사춘기 왔어요?”
사춘기를 지나 오춘기에 접어드는 우울한 직장인을 위로할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선우는 허리 스트레칭을 하는 척 긴장한 몸의 근육을 풀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실은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것들로 포화상태였기에 우울한 직장인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넥타이부대 속에서 강주한을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다시 얼굴을 맞대는 것은 껄끄러우니까. 하선우는 검은 슈트를 입은 전위부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강영광의 표현대로 어마어마한 스펙을 가진 천재 전위부대를 군림하는 강주한이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사내가 맞는가. 나흘 전의 일들이 너무 꿈만 같았다. 반쯤 정신을 놓고 먼 곳을 응시하던 눈이 곤란한 빛을 띠며 찌푸려졌다.
들뜨긴 했지만, 설렘 같은 낯간지러운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하선우라는 인간이 그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도 더 매력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 자꾸만 들었다. 저 오만한 재벌 3세와 배 맞을 정도면 꽤 괜찮은가 보지. 살다 살다 이런 자뻑도 다해본다 싶어 하선우는 심심하게 웃었다.
“뭐 좋은 일 있어? 왜 쪼개?”
“아… 그냥 우스운 일이 생각나서요.”
“뭔데?”
하선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하선우의 반응을 살피던 강영광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선우야.”
“예.”
“강 전무님이랑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라는 소문 돌던데. 두 사람이 막역한 사이라면서?”
“왜 안 물어보나 했습니다. 저 여기서 그 질문 셀 수 없이 받았어요.”
“그래서 친하다는 거야?”
“뭐… 그런 격의 없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는 아니고 사업상 몇 번 도움받았습니다. 딱 그 정도 관계예요.”
“그럼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고?”
“강 전무님과 연락하고 지내면 좋겠지만 제가 전무님이랑 어떻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겠어요.”
이전의 하선우였다면 강주한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는 타이틀을 구태여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접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망한 중소기업 사장이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하선우가 젠 척하지도, 따로 긴 말을 보태지도 않은 이유는 강주한과 하선우 사이에 끼어든 은밀함 때문이었다. 그 은밀함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고 지레 찔려 거부하고 만 것이다.
맛있는 식사를 앞두고도 기계적인 저작만 반복하던 하선우는 찬물을 재빨리 들이켰다. 지난밤의 일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지도 않았는데, 그 언저리에 생각이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반응했다.
하선우의 밤 상대들은 일률적으로 평범한 편이었다. 어떤 경우라도 섹스를 두고 곱씹지 않았다. 하지만 강주한과의 관계는 아니었다. 강주한의 미세한 표정변화와 목소리, 어조, 높낮이 따위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치고 입에서 단내가 났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정신이 성적인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야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너는 배당금 안 받는다며?”
찬물 같은 목소리에 하선우는 젖어들던 기분도 잊고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예. 안 받아요.”
강영광은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듯 하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식 많이 올랐을 텐데? 차익도 많았을 거 아냐.”
“잡주 취급받던 때에 비하면 조금 오르긴 했죠.”
“다 돈 벌자고 하는 짓인데 아깝잖아?”
“그러게요. 근데 아직 회사에 빚이 많아요.”
구시렁거리는 강영광을 보며 하선우는 조금 웃었다. 하선우를 마주 보며 껄껄 웃던 강영광이 하선우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온다.”
강영광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보였다. CTCO 부서원들이 입구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진격하는 대대 같았다. 무리의 중앙에 키가 훌쩍 큰 그가 솟아 있었다. 이제 1, 2초 후면 하선우의 곁을 스쳐 지나갈 터였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선우는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인사를 하는 사람들처럼 하선우 역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는 뜻밖이라는 기색도 없이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슬며시 당겼다. 아주 사소한 움직임이었기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변화였다. 하선우의 곁을 스쳐 가는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시선을 교차했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을 짧은 찰나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계속 얽매였다.
고개를 움직이지 않아 거의 흘기듯이 하선우를 마지막으로 바라본 그는 검은 군중 속에 뒤섞여 입구로 사라졌다. 하선우는 귓속에서 비디오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끈적거리는 살갗을 마찰하던 그때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듯이.
하선우가 마지막으로 남자와 침대에서 뒹굴었던 건 지난해 초겨울의 일이었다. 스위스로 유학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이 끊긴, 대학 교수를 목표로 하는 박사였다. 흰 피부에 테 없는 은색 안경, 살짝 등이 굽어있는 그는 어딘가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몇 번인가 관계를 맺었지만 성욕이 강하지 않았던 그와는 단순히 손으로 사정을 하는 패팅 선에서 끝이 났다. 담백했던 그는 강주한처럼 성적인 매력을 풍기지도, 하선우를 뜨겁게 하지도 못했다. 하선우는 조금 전 동통 같던 심장의 따끔거림을 생각했다. 강주한이 불러일으킨 성적인 충동은 아찔함이 지나쳐 폭력적일 정도였다.
상의를 침대 저 어딘가로 던져버리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생각했다.
실수.
단단한 강주한의 상반신을 훑어보며 하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뜨거워진 피가 쉽게 추슬러지지 않았다. 아니, 이미 저질러버렸으니 추스를 이유조차 없지. 스스로를 내던지듯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속안에 똬리를 튼 의심이 그를 움켜잡았다.
“그럴까요?”
하선우는 입맞춤으로 근지러워진 아랫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떼어내며 말했다.
“한 번 뒹굴고 깔끔하게 털어낼까요. 실수라 치고?”
강주한은 하선우의 오른쪽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여전히 반신반의하며 저울질하는 하선우의 눈을 응시하며 그는 말했다.
“원하신다면 그러죠.”
법망을 피해가는 교묘한 진술 같은 대답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강주한을 올려다보던 하선우는 결국 작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상황에 이르도록 하선우를 유혹한 것은 강주한이었지만, 입맞춤 한 번으로 구실의 무게가 하선우에게 옮겨졌다. 분위기를 유도하고 고조시킨 강주한의 의도대로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지만 어쩐지 수세에 몰렸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강 전무님.”
하선우는 더디게 눈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남자 좋아하십니까?”
강주한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하선우의 말이 과거의 한때를 복제한 것임을 깨달은 강주한이 마침내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런 오해를 하는지 알 것 같긴 하지만, …아닙니다.”
그때의 하선우는 강주한을 노려보았지만 지금의 강주한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오만한 웃음을 보자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말과는 달리, 강주한은 안의 뭔가가 건드려져 하선우를 짓누르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긴 것과는 달리 성욕이 강한가 보지.
눈가가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시선을 피하며 하선우는 말했다.
“다리를 다치셨으니… 제가 위에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선우는 제안했다. 애써 능숙함을 꾸며냈지만, 마른침을 삼키느라 고스란히 드러난 긴장감 때문에 도리어 어수룩해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작게 코웃음 치며 강주한은 순순히 물러났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강주한은 한 손으로 뒷목을 주무르며 하선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긴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길게 뻗은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려 앉은 하선우는 얇은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하선우의 등 뒤로 손이 들어오며 옷이 당겨져 한 번에 벗겨졌다. 시큼한 땀 냄새가 훅 끼쳐왔다.
“샤워를 먼저 하는 게 더…….”
열 오른 얼굴로 말하는 하선우를 확인한 강주한은 고개를 숙였다. 하선우의 어깨에 입술을 붙여 목덜미를 향해 촘촘히 입술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어차피 앞으로도 잔뜩 흘리게 될 텐데요.”
체취를 들이마시며 강주한의 단단한 손이 하선우의 옆구리를 쓸어 올렸다. 어색하게 손을 놓고 있던 하선우도 손가락으로 움푹 파인 그의 등허리 중앙을 더듬었다. 뚜렷하게 갈라진 근육의 윤곽을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이 일순 움찔했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강주한의 더운 숨결에 단전 아래로 욱신거리는 가벼운 동통이 느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하선우는 맞닿은 아랫배를 은근히 비볐다. 강주한의 숨소리 사이로 웃음이 더해졌다. 양손으로 어깨를 잡아 맞닿은 상체를 떼어낸 그는 하선우의 벗은 상체를 살펴보다, 손바닥을 넓게 펼쳐 하선우의 양쪽 허리를 잡았다. 느리게 오르내리는 아랫배와 넓게 벌려 앉은 다리 사이로 움트듯 존재감을 드러낸 성기를 살피며 웃음기 섞인 말투로 품평했다.
“몸매가 나쁘진 않네요.”
귓가를 애무한 것만으로 발기한 것이 멋쩍어 하선우는 씩 웃어 보였다.
“제가 보기보다 근육이 있습니다. 근육양이 많아서 기초…대사량도 높은 편이고.”
높아지는 목소리와 빨라지는 말투가 초조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무님은 기대 이상인데요.”
엄지로 양쪽의 가슴을 둥글게 문질렀다. 피부 속이 근질거려 하선우는 그가 씹어버리거나 강하게 긁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유륜 주위를 맴돌며 분위기를 조금씩 고조시킬 뿐이었다.
거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접촉이 돌기에 닿았다. 나지막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검지와 엄지로 살꼭지를 집어 늘리자 절로 엉덩이가 뒤로 빠지고 허벅지 사이에 힘이 들어갔다. 하선우의 반응을 살피던 그는 고개를 숙여 살덩이를 크게 머금어 빨았다. 터지는 신음을 억지로 삼키며 하선우는 눈을 감았다. 평소 신음을 내지르는 데 거침이 없던 그였지만, 오늘따라 신음을 내뱉기가 어려웠다. 강주한의 능숙함에 솔직하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점막이 마찰할 때마다 젖은 소리가 음란하게 강주한의 잇새로 새어나왔다. 하선우는 결국 강주한의 뒷목을 감싸 뒤로 당겼다. 입술을 먹어버리듯 겹쳐 얽자 각도가 엇갈리고 입맞춤이 깊어졌다. 혀를 긁고 물고 빠는 조급한 입맞춤에 강주한의 목이 웃음으로 울렸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바지를 내리고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엉덩이를 감싸 잡아당겼다. 긴장으로 단단해진 엉덩이의 윤곽을 따라 손가락을 더듬어 쓰다듬으며 속옷을 내렸다. 발기한 성기에 걸려 속옷이 내려가지 않았다. 불룩 튀어나온 성기 끄트머리에 닿은 속옷이 젖어 있었다. 강주한은 젖은 속옷 부위를 검지로 매만졌다.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하선우 역시 강주한의 바지춤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안에 묵직하게 닿는 성기를 감싼 하선우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흥분의 와중에 미심쩍은 얼굴을 하던 그는 결국 강주한의 바지춤을 완전히 내렸다.
“…크네요.”
경직된 하선우의 반응에 강주한은 웃으며 하선우의 손을 자신의 성기 아래로 이끌었다.
“발기하면 이 손으로 다 잡을 수도 없을 겁니다.”
“이 정도면 거의… 관상용인 것 같은데요.”
거북한 얼굴로 되받아치는 하선우를 벌주듯 강주한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킥 웃었다.
“실전용입니다. 관상용으로 두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큰 건 싫습니까?”
놀아볼 만큼 놀아본 모양이지. 아마 그라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구애받지 않고 여러 여자들을 울렸을 것이다. 하선우의 뇌리로 그의 형이 얌전하지만은 않은 인물임을 암시하던 강태한의 말이 떠올랐다. 강주한은 분명 하선우를 성욕을 해소할 대상으로 점찍어두고, 진지하게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싫을 것도 좋을 것도 없죠.”
삽입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단순한 패팅에서 크기가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하지만 강주한의 말은 그 이상을 염두에 둔 물음 같았다.
강주한은 느리게 하선우의 성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건조한 손바닥의 마찰에 자꾸 목구멍이 좁아지고 타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바지도 채 다 내리지 못한 채로 두 사람은 서로의 것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숨이 거칠어졌다. 그의 것은 모양이 좋을 뿐만 아니라 휘지도, 물렁하지도 않았다. 귀두가 크고 단단한 탄성의 성기가 하선우의 것과 비벼질 때마다 크기가 비교되었다. 흥분의 와중에도 하선우는 신의 불공평함에 대해 생각했다. 재벌이라면 정력이 적어도 성불능자 정도는 되어야 공평하지 않은가 싶었다. 자신이 생각해놓고도 실없어 하선우는 결국 어깨를 떨며 웃었다. 강주한이 빤히 바라보았다.
“집중이 안 됩니까.”
은근한 목소리에 묻어나는 힐난에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벌을 주듯 커다란 손안에서 음낭이 진하게 주물렸다. 허리를 떨며 신음하자 강주한이 아랫입술을 끈적하게 빨았다. 하선우 역시 손바닥 가득 잡히는 탄력 있는 그의 음낭을 주물렀다. 정액이 질퍽하게 고여 있는 못 같았다. 음낭이 두둑하게 큰 걸 보니, 사정을 한다면 손바닥을 흠뻑 적시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의 정액이 쏟아져 나오겠구나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강주한은 분명 성적인 면으로 어필하는 면이 있었다. 그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면 그는 분명 성에 일찍이 눈을 떴을 것이다.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사내를 침실로 끌어들일 만큼 욕망에 솔직하고 자제심이 없을지도 모르고. 강주한은 하선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음탕한 데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차라리 쉬워졌다. 강주한이 상대를 성적인 도구로서 사용한다면, 하선우 역시 그를 그렇게 여기면 그만이었다.
가는 한숨을 토해내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하선우는 더 이상 신음을 참지 않았다.
“하아… 읏, 으으… 아!”
커다란 손바닥에 성기가 비벼질 때마다 전신의 피부가 오싹하게 일어났다. 자꾸만 허리가 들리고 혼자 절정에 달할 때와는 다른 고조가 피를 끓게 했다. 회사, 강 전무, 실수 따위의 생각이 텅 비고 쾌감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절정에 다다른 것은 하선우가 먼저였다. 어깨에 이마를 걸친 채로 헉헉거리던 그는 여전히 사정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강주한의 페니스를 보았다. 손바닥으로 감싸도 채 다 잡히지 않을 만큼 강주한의 성기는 컸다.
한 번의 사정으로 나른해진 하선우는 그의 것을 설렁설렁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흠뻑 젖은 강주한의 손이 하선우의 엉덩이까지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는 사정을 마친 페니스를, 남은 손으로는 회음부와 그 밑으로 갈라진 둔부 사이를 자극했다.
“헉, …으응… 전, 전무님. 천…천히.”
하선우는 혀 밑에 고이는 침을 힘들게 삼켰다. 고개를 쳐든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의심하고 저어하고 순간마다 판단하던 하선우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이미 진한 쾌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거북하지 않다면 입으로 서로 해주죠.”
하선우의 땀에 젖은 뺨에 입 맞추며 그가 말했다. 멍한 머릿속에 차차 생각이 차올랐다. 강주한의 제안을 뒤늦게 깨달은 하선우는 느리게 눈을 굴렸다. 하선우가 더 고민할 새도 없이 강주한은 하선우의 무릎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들어 올렸다.
걸리적거리던 바지를 벗겨내고 자신의 옷도 모조리 벗어버린 강주한은 침대 위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하선우는 지금껏 한밤중에, 조명을 끈 장소에서만 섹스를 했었다. 밝은 조명 아래서 이렇게 적나라한 체위로 뒹구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민도 잠시, 하선우는 결국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는 이미 사정한 하선우의 페니스를 입에 머금는 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음란한 행동도 주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따듯하게 머금어지는 느낌에 헐떡이며 하선우 역시 그의 것을 입에 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는 나무봉을 탄성이 강한 고무로 감싼 것처럼 단단했다. 모양 좋은 성기였지만, 기둥을 따라 혈관이 얼마간의 혐오감을 줄 정도로 겉으로 돋아나 있었다.
하선우는 입을 크게 벌려 귀두를 물었다. 강주한 역시 쾌감으로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더 깊게 목구멍까지 밀어 넣자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반절 이상 남은 성기를 젖은 손으로 문지르자 그가 하선우의 꼬리뼈 위를 빨았다.
“흐…으읍… 으, 으음.”
신음이 목구멍을 가득 메운 귀두에 가로막혀 무겁게 울렸다. 척추를 타고 치닫는 느낌이 저릿했다. 꼼질거리는 발가락 끝과 발바닥 안의 여린 살, 발목을 쓰다듬고 올라간 강주한의 손이 하선우의 엉덩이를 감쌌다. 배설의 구멍까지 더운 숨결이 닿았다. 허벅지와 무릎이 근질거렸다. 벗어나는 대신 하선우는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매달리듯 강주한의 페니스를 빨았다. 강주한은 사정의 기색이 짙어질수록 하선우의 것을 아프도록 압박했다. 성기 전체가 꿈틀거리고 따듯한 입술 안에 흡착되었다. 겉피부가 늘어지고 빨리고 깨물릴 때마다 허벅지 안의 근육이 사정없이 떨렸다. 강주한의 숨도 거칠어졌다. 전신이 홧홧해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정의 기운이 몰아쳐 전신이 경직되었다. 사정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예상대로 양이 많은 정액이 질퍽하게 쏟아져 나왔다. 몇 번에 걸쳐 터져 나온 정액이 하선우의 손바닥을 흠뻑 적시고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코끝에 감도는 음란한 냄새에 하선우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몸의 경직이 풀리며 전신에 탈력감이 몰려왔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위에서 내려와 옆으로 몸을 굴렸다. 모로 누워 진정되지 않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강주한이 상체를 일으켜 등 뒤로 가슴을 밀착해왔다. 한 팔로 하선우를 끌어안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그의 숨 역시도 거칠었다. 서로가 쏟아낸 땀과 애액에 젖은 육체가 맞붙자 끈적하게 살이 늘어졌다. 하선우는 눈을 감고 몸에 남은 잔여운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랬다. 남자란 짐승이 가장 현명해지는 순간은 사정을 한 뒤라고.
서로가 숨죽이는 영원 같은 한순간이 지속되길 바랐다. 그러나 침묵은 깨어지기 마련이고 열락의 빈자리를 메울 이성에 시간을 양보해야 할 때였다.
어쩌지.
눈을 감은 채로 눈알을 굴리며 하선우는 고민에 빠졌다.
거래처, 그것도 발주를 넣는 대기업의 오너-와 다름없는 사내-와 뒹굴었다. 현실의 각성이 하선우의 흥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얼마나 껄끄러운 사이가 될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하선우를 면담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런 얘기 하고 싶진 않지만… 눈알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립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하선우는 눈을 깜빡이며 허공을 쏘아보았다.
“그런 고민은 조금 뒤에 합시다. 밤은 기니까.”
강주한은 뒤통수에 꾹 입맞춤을 했다. 가슴을 둘러 안았던 손이 젖은 흔적을 남기며 피부 위를 미끄러졌다. 하선우가 배출한 정액이 스민 손은 뱀의 피부처럼 미끌거렸다. 평소보다 볼록 내밀린 젖꼭지를 잡아 비틀자 허리가 뒤틀렸다. 하선우는 등허리에 닿은 발기한 성기를 느끼고 좀 전보다 눈을 빠르게 끔뻑거렸다.
이후의 기억은 괴로운 것 투성이었다. 달콤하게 전신이 저며지는 쾌감 속에서 몇 번의 사정과 후희가 반복되었다. 계속된 패팅으로 성기가 아플 때까지 쥐어짜였다. 견디다 못한 하선우는 여전히 사타구니 사이에 머무는 손을 밀어냈다. 순순히 손을 거두던 강주한은 방향을 바꿔 하선우의 가슴을 매만졌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지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던 살덩이가 맥박 치듯 욱신거렸다. 미숙한 어린아이의 가슴처럼 유륜이 도드라져 있었다. 손가락을 살짝 가져만 대도 아파 하선우는 얼굴을 찡그리며 강주한의 손을 잡아챘다.
“전무님. 거기 나가떨어질 것 같거든요.”
불만을 가득 담은 목소리에 강주한이 입술만을 움직여 웃었다. 땀투성이가 되도록 밤사이 엉켜 있던 그에게 하선우는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남아 있지 않았건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하선우는 뺨을 감싼 강주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지금까지 괴롭혀놓고도 그는 여전히 부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기가 막혀 하선우는 웃었다.
“정력이… 대단하시네요.”
“만족했습니까?”
“예. 저는 더 못하겠습니다. 지쳤어요.”
피로한 얼굴로 하선우는 베개에 한쪽 뺨을 깊게 파묻었다. 장거리를 전력으로 질주한 이후처럼 입에서 단내가 나고 체력이 고갈되어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하선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은 이제 막 숫자 3을 지나가고 있었다.
거의 세 시간이나 뒹굴었다는 말이지. 자정을 지날 무렵부터 시작된 ‘실수’의 기억을 더듬던 하선우의 의식이 뺨을 쓰다듬는 강주한의 체온에 집중되었다. 그는 정력이 과하긴 했지만 밤을 같이 보내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아니, 단순한 패팅으로 이렇게까지 흥분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하선우를 향해 몸을 더욱 가까이 붙여왔다. 찬찬히 하선우의 얼굴을 살피며 젖은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하선우 씨 파트너는 좋았겠습니다.”
“왜요.”
“절정에 달할 때 짓는 표정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야하던걸요.”
“어… 그렇죠. 제가 잠자리에서 좀 야하긴 하죠. 근데 보통은 불 끄고 해서 보여줄 틈도 없죠.”
풀썩 웃으며 하선우는 부드럽게 감기는 베개에 뺨을 비볐다. 그는 쉽게 수긍하는 하선우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을 지켜보던 하선우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헝클어진 실타래 속에서 실마리를 집어 든 기분이었다. 일방적으로 유혹당한 노멀을 연기하던 강주한의 꼬리를 잡아챘다. 답안이 적혀 있는 시험처럼 쉬운 문제였다. 그러나 하선우는 여전히 움츠러든 태도를 지우지 못하고 물었다.
“이전에 제가 절정에 닿는 표정을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 보죠.”
“…예.”
강주한은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이전에 울산에서 그랬잖습니까. 하선우 씨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수할까 봐 자리를 피한다고.”
베개 위에 팔을 괴고 누워 자세를 높인 강주한은 하선우를 향해 고개를 가까이 숙였다.
“하선우 씨는 블로킹이란 영화 용어를 알고 있습니까.”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프레임 안에 인물과 사물을 배열해보는 일이죠. 배우가 프레임 안에서 어떻게 시각적으로 움직일지를 미리 검열해보는 작업인데…. 그 밤 내도록 하선우 씨를 머릿속에서 수십 번도 더 블로킹했습니다.”
치켜뜬 하선우의 눈과 시선을 맞추며 강주한은 소리를 죽였다.
“그러니까… 그날 밤 이미 나는 하선우 씨에게 발정했다는 말이죠.”
부러 음란한 단어를 택한 그는 하선우의 뒷목을 감싸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당신의 키스는 어떤 맛이 날까, 애무에 어떻게 반응할까, 사정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것들이 궁금했거든요.”
말의 말미에 강주한은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도록 웃었다. 사랑스럽지만 비열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강주한은 이미 자신의 매력을 블로킹해본 것일까.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웃음이 지나치게 인상적이어서 하선우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지은 미소가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매력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물론 무엇이 되었든 그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수룩하기만 했다. 강주한은 작정하고 상대방을 원한다면 얻지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머릿속에서 블로킹한 대로 지금 한 침대 위에서 하선우가 뒹굴고 있듯이.
“남자인 저를 상대로 그런 상상을 하셨다고요?”
“제가 성적으로 터부가 없는 탓이죠. 보기보다 가벼워요.”
강주한은 옆머리를 기대고 있던 팔을 뺐다. 하선우가 받치고 있던 베개 위로 손을 밀어 넣어 뒷목과 뒤통수를 감싸 자신에게로 당겼다. 이마를 맞대며 그는 말했다.
“그래서 오늘 하선우 씨가 덤벼들 줄은 몰랐지만,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준비된 실수였지만 강주한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하선우는 그저 준비된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 뿐이었다. 분명 먼저 입을 맞춘 것은 하선우였지만 계기를 만든 건 강주한이었다.
입맞춤이 다시 시작되었다. 급하게 고조되었던 전과 달리 강주한은 공을 들여 달뜬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시달리며 열에 들뜬 몇 마디 말을 지껄였던 것 같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머다랗기만 했다. 뒤엉킨 채 얕은 잠에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하선우의 몸에는 음란한 냄새가 잔뜩 배여 있었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오던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침대의 헤드에 기댄 잿빛 형체가 하선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잘 가라는 인사도, 즐거웠다는 얘기도 없이 강주한은 하선우와의 어정쩡한 이별을 방관했다. 섹스로 시작된 유대는 섹스가 끝이 나자 멀어졌고, 그 느슨한 끈은 완전히 절단되었다. 문자를 받기 전까지 하선우는 줄곧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늘에 빗금을 그으며 눈이 온다. 구름에는 여전히 눈이 가득 갇혀 있었다. 얼마간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함박눈이 내릴 것이다. 훈풍이 도는 실내에 속이 답답해졌다. 목적도 이유도 알 수 없는 약속을 앞둔 지금, 갈수록 불안의 진폭이 넓어졌다.
「6시까지 37층으로」
강주한이 하선우에게 처음으로 보낸 메시지였다.
“실수라더니.”
혀를 찬 하선우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피부 속이 근질거려 괜히 얼굴을 긁적이다 시간을 확인했다. 6시까지는 불과 한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강주한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제력을 잃고 엉겨들었던 순간의 실수를 누구도 발설하지 않고 조용히 묻어두는 것으로 끝낼 줄 알았다. 두 번째 약속을 잡지만, 약속의 목적을 밝히지 않은 문자는 얼마간의 생각을 더 요구했다. 다양한 형태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던 하선우는 가장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어떤 얼굴로 강주한을 봐야 하는지, 그리고 그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부딪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6시를 조금 넘겨 기술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회식하는 분위기였지만 약속을 핑계로 빠져나온 하선우는 고민 끝에 본사 건물로 들어서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전면의 스테인리스 미러로 얼굴을 꼼꼼히 살핀 하선우는 재킷을 당겨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CTCO 부서가 자리해 있다는 37층은 기타 부서에 비해 보안이 강화된 분위기였다. 정보를 유출할 수 있는 소지품은 일절 소지할 수 없는 방침 탓에 가방을 보안요원에게 맡긴 뒤에야 강주한의 사무실이 있는 복도 끝으로 향할 수 있었다.
엘텍전자에 위치한 그의 개인 집무실과 달리, 경호원이 대기 중인 사무실은 근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복도를 중심으로 사무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고, 그 끝에 강주한의 집무실이 있었다. 커다란 마호가니 나무가 은은한 조명에 붉게 되비치어 윤을 내는 그 문은 최종 목적지인 동시에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거대한 문이 은유하고 있는 세계에 위축되었던 하선우는 강주한으로부터 받았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 중심에 모습을 감춘 남자는 지금 그저 단순한 욕망으로 하선우를 호출했을 뿐이다. 결국엔 그 짓이었다. 하지만 작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선우 자신조차도 그가 즐길 준비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일의 원흉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밖에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전하셨습니다.”
더운 차를 내온 비서가 응접실 밖으로 사라지고 하선우는 찻잔을 손안에 든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CTCO 부서 내의 개인 사무실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엘텍그룹의 전략기획실을 거쳐 엘텍전자의 전무로, 동시에 엘텍전자의 기술과 국내외 거래기업의 CEO들을 관리하는 총책임자로 임명된 35세의 강주한.
어린놈이 좋은 건 제가 다 해먹네.
씁쓸하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턱을 쓸던 하선우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목발에 의지한 그가 문가에 서 있었다. 뜨끔해서 괜한 헛기침을 하던 하선우는 눈이 마주치자 일부러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뇨. 방금 도착했습니다.”
“자리에 앉아요.”
자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하선우의 맞은편에 앉은 그에게 다시 나타난 비서가 차를 따라주었다. 비서는 강주한의 눈빛 한 번에 비서가 자리를 비웠다. 하선우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보다시피 이럽니다. 거추장스럽게 됐죠.”
강주한은 소파에 기대 세운 목발을 가리켰다. 강주한의 표정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큰 사고를 당했다는 양 유난을 떨어댔다. 방송 3사의 9시 뉴스에만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유력 일간지는 지면을 할애해 그의 사고 소식을 전했다. 다음 날 아침 하선우는 워크숍 도중 휴대전화로 새벽에 뜬 속보기사들을 보았다. 강주한의 사고 소식을 전하는 속보가 뜨던 그 시간은 하선우와 강주한이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때였다. 단순 골절상임이 확인된 후에 잠잠해지긴 했지만, 그 여파 때문에 연예인 스캔들을 주로 다루던 인터넷 신문은 강주한의 사고 예후는 물론, 엘텍가 자제들의 취미생활을 보도하기까지 이르렀다.
“골절상이면 적어도 두 달은 깁스를 해야 하죠?”
“단순골절인 데다가 금이 간 것뿐이라고 하더군요. 깁스를 할 정도는 아니고 3주 정도면 회복될 겁니다. 그래도 당분간 무리는 하지 말아야죠.”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린 그는 조금 미간을 좁힌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 시선의 끝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하선우는 괜히 찻잔을 기울였다. 강주한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잘… 지냈습니까.”
하선우는 말 속에 매복된 또 다른 의미를 읽어냈다. 자연히 연상되는 기억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필시 붉어졌을 것이다.
“예.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고개를 돌린 강주한은 하선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붉어진 얼굴을 보는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워크숍은 어땠습니까.”
“저도 사원들도 모두 재밌게 놀다 가는 걸로 만족했습니다. 전무님은 잘 돌아가셨죠?”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날을 연상시키는 부적절했던 실수를 무시하며 그저 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종합기술원 일은 어떻습니까.”
“몸이야 힘들지만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언제 올까 싶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신규생산을 2/4분기 내로 진행하려면 더 바빠질 테고요. 기운 내야죠.”
이후로도 대화는 계속되었지만 그 밤의 근처까지 가지도, 그 주변을 맴돌지도 않았다. 강주한이 자신을 호출했던 이유를 함부로 짐작했던 하선우는 담백하기만 한 대화에 점차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그날 밤의 실수를 만회하려 사무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아니면 단순히 사업 얘기를 위해 자리를 마련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선우는 감정적 오차를 계산하는 데 재능이 없었지만, 대화가 지속되자 실수는 실수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강주한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하선우는 더 이상 그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게 되자 뻘쭘해졌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기대한 것도 없이 허탈했다. 한편으로 그가 재수 없어졌다. 그래서 평소 불편한 자리의 연장을 피했을 그였다면 하지 않았을 말을 꺼냈다.
“식사하셨습니까.”
한참 사업 얘기로 심각한 와중에 꺼낸 말에 강주한은 입을 다물었다. 별다른 기대가 있어서 대답을 유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이라면 함께 저녁을 들지 않겠느냐는 얘기 정도는 해볼 요량이었다.
“식사 전입니다. 하선우 씨는요.”
“저도 아직입니다. 선약 없으시면 저녁 접대하고 싶은데요.”
엄밀히 말해 유혹은 아니었지만, 관계를 일방적인 것에서 비틀어보겠다는 선언이었다. 강주한은 찻잔을 들어 올린 그대로 하선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선우는 그의 얼굴에 흐릿하게 비대칭의 미소가 어린다고 느꼈다. 분명히 표정은 없는데 무언가를 재미있어 하는 기분이었다.
“그럴까요.”
강주한은 잔을 내려놓았다.
“허기질 때가 되긴 했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는 말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그는 비서를 불렀다. 퇴근해도 좋다는 말에 강주한에게 외투를 가져다준 여 비서가 자리를 정리하고 응접실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목발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생각을 고쳐 하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손을 맞잡고 강주한을 일으켜 세운 하선우는 별안간 넥타이를 당기는 힘에 고개가 앞으로 쏠렸다. 뭉글하게 살덩이가 닿고, 건조한 접촉 뒤에 입술을 가르는 미끈거림이 느껴졌다. 넥타이를 잡아 쥔 그가 하선우의 표정변화를 살피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 이건 기분이 이상해.
하선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에게선 양치 직후의 치약맛이 느껴졌다. 부지런한 사람이라도 저녁 식사 전이라면 양치질을 꺼리기 마련이지만, 강주한의 입술에선 청량한 민트맛이 났다. 마찬가지로 강주한 역시 하선우에게서 양치 직후의 맛을 느꼈을 것이다. 적어도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의식했다는 얘기였다. 하선우는 쑥스러운 기색도 없이 입맞춤 뒤에 픽,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습니까.”
“별 이유 아닙니다.”
“나는 하 사장이 실없이 웃는 이유를 알아야겠는데요.”
“그냥… 제가 나쁘지 않은가 싶어서요. 강 전무님께서 이런… 관심도 가져주시고.”
이런에 힘을 주어 말한 하선우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긴장했던 모양이다. 목소리가 칼칼하게 떨렸다.
하선우는 넥타이를 잡은 강주한의 주먹 위에 손을 겹쳐 밑으로 당겼다. 강주한에게 기울어 있던 고개를 떼어내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주한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예. 하선우 씨 매력적이죠.”
웃음기 없이 하선우의 얼굴을 진지하게 살펴보던 그가 손을 뻗었다. 어깨에 팔을 둘러 상체를 의지한 그가 말했다.
“갈까요. 식사하러.”
“드시고 싶은 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간단하게 집밥 먹죠. 누가 뭐래도 집밥이 최고니까.”
“집에 먹을 만한 게 없을 텐…….”
“저희 집 가죠.”
하선우의 편견 속에서 그는 가족이란 이름 뒤에 뒤따르는 눅진눅진한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 임용화가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을 위해 저녁 식사를 차리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어머니가 아닌, 고용인이 준비해주는 반상에 길들여졌을 강주한이 집밥을 운운하니 이상했다.
거의 안기듯 등으로 그를 받치고 응접실을 빠져나가던 하선우는 지금 이것이 초대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연애를 하자는 것도, 그 비슷한 짓거리를 해보자는 것도 아니었지만 한 줌의 낭비도 없이 바로 강주한의 집으로 직행을 하는 일은 실수치고는 너무 거창하고 본격적이었다.
걸음이 더뎌지는 하선우를 강주한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옆얼굴로 닿는 시선을 의식하던 하선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정보다도 돈으로 쌓아올린 성채 속 폐쇄적인 재벌의 사생활이 궁금했다. 가슴속에서 불거지는 관음증 때문이었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은 하선우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북촌로를 지나는 방향이었다. 작년 가을 잠시 만났다 헤어졌던 사내가 운영했던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북촌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엘튼 호텔이 있었다.
하선우는 엘튼 호텔에서 강주한과 류주오, 자신이 삼자대면했던 끔찍한 상황을 떠올렸다. 강주한은 이미 모든 단서를 조합해 하선우는 동성애자라는 결론을 낸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니 남자를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던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한옥마을과 카페거리를 관통한 길은 북한산을 향하고 있었다. 상가와 미술관이 줄어들면서 노변을 따라 단독주택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진짜 부자들은 이 일대에 산다던 김 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표현대로 이 일대는 아방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엘텍의 아방궁이 있었다.
그곳은 국유지와 사유지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땅이었다. 길의 끝에 북한산이 솟아 있고 구불구불 우원하게 이어진 도로는 산허리 밑까지 닿아 있었다. 허가 없이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서울 하늘 아래 외따로 격리되어 있었다.
골프클럽의 드라이브 코스처럼 꾸민 도로변의 분위기는 고즈넉했다. 값비싼 조경수와 조각상이 늘어서 있고 건축미학을 마음껏 뽐낸 건물이 곳곳에 즐비했다. 대부분이 어두운 조명이 켜진 상태였고 건물마다 강박이 느껴지는 완벽한 정원이 딸려 있었다. 실거주자로 단 몇 사람만이 주소지로 기재했을 이곳에 왜 이렇게 많은 건축물이 필요할까, 하선우는 사소한 의문을 느꼈다. 이곳은 단순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하고도 살풍경했다. 이런 규모의 집을 가진 사람은 하선우가 아는 사람 내에선 없었다. 비교 대상조차 없었다.
평소 하선우는 자신이 돈에 대한 욕망과 결핍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회사의 규모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 자신이 부유해지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는 느끼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돈을 벌어 쓰는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살고 있는 그의 원룸은 이석과의 동거생활을 끝내면서 얻은 전셋집이었다. 10평대의 오피스텔은 전세가 1억 중반대였고 그마저도 분당에 있는 부모님의 신세를 져 얻은 집이었다. 소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보지 않았던 하선우는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양 차창 밖 세계를 보았다. 질투와 충격과 아니꼬움과 씁쓸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그 속을 수선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선우의 옆에 앉아 그의 소유물을 감흥 없이 바라보는 남자로 인해, 가슴 안에 까슬하게 일어나는 불편함을 내색할 수 없었다. 그는 전화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단답을 하던 그는 하선우를 곁눈으로 돌아본 뒤에 다시 무감한 얼굴로 돌아갔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언덕에 둘러싸인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3층짜리 저택은 지금껏 보아온 건물 중에서도 평범한 축에 속했다. 별다른 모양 없이 경제적으로 지은 저택 안으로 들어선 하선우는 조금 전의 생각을 수정했다.
건물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저택처럼 천장이 3층 높이까지 뚫려 있었고, 층마다 복도가 에워싸고 있는 형식이었다. 그 현란한 과시는 재벌에 대해 막연한 상상을 하던 이방인의 관음을 만족하게 하는 규모였다. 예술작품이 브로치처럼 실크벽지를 장식하고 생화가 콘솔 위의 고급스러운 화병에 풍성하게 꽃을 피운, 매 순간 긴장한 고용인들의 철저한 손길 속에서 관리된 집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피상적으로 성기게 들러붙은 집 속으로 걸어가던 강주한은 걸음이 느려진 하선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녁 준비됐을 겁니다. 조금 더 서두르죠.”
그는 맞은편 벽의 중앙에 있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걸어갔다. 숨죽여 저택을 둘러보던 하선우는 그를 놓칠세라 서둘러 걸음을 뗐다.
저택은 여러 개의 건물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구조였다. 정원을 관통한 저택의 본관을 지나치자 흡사 갤러리 같은 복도가 나왔다. 그 중간지점, 널찍한 유리문 앞에서 강주한은 걸음을 멈췄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실내 화원이 둘러싼 식당이었다. 한겨울에는 자라기 힘든, 온도와 습도에 예민한 관엽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던 하선우는 멈칫했다. 테이블의 끄트머리에 캐주얼한 차림의 사내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뿔테 안경을 쓴 사내를 본 하선우는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연구소에서 흔히 마주치는 유의 영특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는 사람이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던 하선우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물끄러미 하선우를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강주한에게로 비껴갔다.
“단둘이 보길 원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그랬었나? 도통 기억이 없어서.”
어깨를 가볍게 추어올린 강주한은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에게 벗은 외투를 맡겼다.
“사람이 더 늘었습니다. 저녁 같이 준비해줘요.”
강주한의 말에 그녀는 하선우에게서도 외투를 받아 들고 벽 한 면의 옷장에 옷의 각을 살려 걸어두었다. 사내의 입가가 잔경련을 일으켰다. 멀대같이 큰 키에 안경을 쓴 마른 사내. 핏기 없는 얼굴과 신경질이 깃든 눈매를 본 하선우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엘텍가의 자제들에 비해 비교적 언론에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안신그룹 회장의 첫째아들인 임경호였다.
인사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색하게 의자를 끌어 앉아야 하는지 고민하던 하선우는 강주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테이블의 끝에 앉은 임경호와 멀찍이 떨어져 앉은 강주한은 자신의 맞은편을 손으로 가리켰다.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앉으….”
“낄 자리 아닌 건 알겠지. 나가.”
강주한의 말을 자른 임경호가 낮게 뇌까렸다. 화를 내는 투도 협박하는 투도 아니었지만 차갑고 오만했다. 심상치 않은 임경호의 분위기를 살핀 하선우는 다시 강주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태연하게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강주한은 임경호의 말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앉으시죠. 하 사장님.”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선우는 의자를 끌어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엉거주춤 앉았다. 대놓고 무시하는 강주한의 행동에 임경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듯 강주한은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뒤에서 대기 중이던 여자가 강주한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도청 의혹은.”
“없습니다.”
“몸수색은.”
여자는 머뭇거리며 강주한의 귀에 손을 세웠다.
“마쳤습니다.”
여자는 작게 속삭였지만, 대화의 내용을 모두 감추기엔 거리가 가까웠다. 임경호의 입술에 건조한 웃음이 걸렸다.
음식은 기다리는 시간도 없이 곧바로 나왔다. 강주한의 기준에서 간단한 백반은 하선우의 기준에서는 호텔의 한식 요리였다. 그러나 식욕을 자극하는 색감과 냄새에도 불구하고 하선우는 쉽사리 수저를 들지 못했다. 두 사람 주변으로 번지는, 공기마저 희박한 살풍경 때문이었다.
한동안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대화도 없이 묵묵히 수저를 뜨던 임경호가 툭 말을 던졌다.
“고모님은 잘 계시나.”
임경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강주한은 대답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늘 잘 지내시지.”
“영국에 계시다며.”
“그래.”
“요즘 아주 재미가 좋으시겠어.”
강주한은 대답 대신 수저에 밥을 단정하게 담아 입으로 가져가 묵묵히 씹을 뿐이었다. 강주한을 빤히 응시하던 임경호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간 우리 소통이 없었지. 그래서 쓸데없는 오해도 사고 서로에게 불필요한 간섭을 했던 것 같은데.”
“그랬던가? 난 별로 불편한 걸 몰라서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웃음 띤 얼굴로 오래도록 강주한을 바라보던 임경호의 표정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뭘.”
“소송 얘길 하는 거다.”
“소송은 어머니와 외숙부 사이에서 진행되는 얘기 아니었나.”
“그래.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쳐. 사실은 아니잖아?”
“나는 관여하지 않았대도 그러네.”
마른 웃음을 흘리며 강주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럽 가서 미술작품이나 사들이는 분이 소송에 대해 뭘 알겠어.”
“사는 게 따분한 분이니 취미 삼아 공부하셨나 보지.”
메아리 같은 말을 반복하기 지겹다는 듯 강주한을 노려본 임경호가 테이블을 향해 몸을 당겨 앉았다.
“고모가 엘텍의 장식품처럼 살아온 분이란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 멋모르는 양반이 고작 따분해서 그런 일을 벌이셨다고?”
“글쎄. 보기보다 대범한 성미시라… 어머니의 심중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강주한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임경호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푹 꺼졌다. 강주한을 노려보던 그는 흥분을 자제하려 애쓰며 찬물을 들이켰다. 임경호의 반응을 전혀 개의치 않은 강주한은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들에게 술을 주문했다. 하선우는 여직원이 정중하게 따라준 맑은 약주를 잔에 받으며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는 강주한과 임경호와의 사이에 불가피하게 끼어 있지만 그들에게 자신이 그림자 혹은 투명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하선우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불이익을 감수하고 이곳의 대화를 누설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소송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하선우는 흐리마리한 기억을 더듬어 엘텍과 안신의 소송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지난해 늦가을 호텔에서 우연히 강주한을 마주쳤던 날, 그는 국세청 자료를 스치듯 본 적이 있었다. 안신그룹의 창립자이자 강주한의 외조부인 초대 회장 임천관이 남긴 9조 3,400억 원대의 지분에 대해 국세청 감사가 들어갈 예정이라는 공문이었다. 이후의 소식은 뉴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강주한의 어머니인 임용화와 임경호의 아버지인 임용우, 재벌 2세 간의 유산상속 다툼에 대한 보도였다.
언론의 포커스가 맞춰진 것은 9조 3,400억 원의 출처와 엘텍그룹의 안주인인 임용화가 왜 수면 위로 올라왔는가에 대한 점이었다.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차명계좌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불법으로 모은 안신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컸고, 이 비자금 사건은 안신그룹을 공중분해할 정도로 중대한 금융사기였다. 비자금을 만든 사실을 검찰에서 추궁해오자 임용우는 법망을 피해 이미 고인이 된 초대 회장이 물려준 유산이라고 진술을 한 것이다.
이를 놓치지 않고 안신그룹의 첫째 딸인 임용화는 동생의 거짓 진술을 걸고 넘어져 소송을 걸었다. 그녀의 노림수는 노골적이었다. 선대 회장이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재산을 그의 남동생인 임용우가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단독 명의로 변경했으니, 상속분에 맞게 자신에게도 배분하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요구한 지분은 절반으로 4조 7,000억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임용화가 소송에서 승리해 5조 원에 달하는 지분을 소유하게 될 경우, 안신그룹에 대한 임용우의 지배구조가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즉, 임용화를 위시한 강주한이 안신그룹의 최대주주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는 뜻이었다.
안신그룹의 소유와 지배를 공고하게 하려고 조성한 비자금이 오히려 발목을 잡아 그룹을 그의 외사촌인 강주한의 손에 곱게 넘겨주게 된 셈이었다. 강주한을 향한 임경호의 증오가 느껴져 일부러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두지 않고 하선우는 소리 없이 음식을 비워나갔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억누른 목소리로 묻는 임경호의 말에 강주한은 미간을 좁혔다.
“외숙부께서 처음부터 상속 과정에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상속?”
“그래.”
“그게 어떤 지분인 줄 알면서 그따위로 지껄여?”
“어머니 걸 어머니가 갖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나랑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냐!”
소리 지른 임경호와 시선을 맞춘 강주한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릇의 테두리를 검지로 가만가만 쓸어내리던 그가 이윽고 말했다.
“형은 내가 말장난으로 시간 낭비할 사람으로 보이나.”
분위기를 달리한 그는 성가신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한 그는 비어있는 잔에 술을 첨잔했다. 임경호의 눈가가 잘게 경련했다.
“물고 늘어져 봐야 피차 다르지 않을걸. 너희도 검찰조사 들어가면 유산이든 뭐든, 둘러대기 급급할 텐데.”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어. 이머전트 캐피탈은 악명이 자자한 곳이잖아. 대통령 돈도 떼먹은 곳인데 무슨 배짱이야. 생각할수록 우습지 않나. 미국 연방에서 주시하는 곳에 돈을 신탁하다니. 그러니까 애초부터 잘 생각을 했어야지. 알려진 비자금만 10조라니, 외삼촌이 너무 해드셨어.”
차갑고도 초연하게 말한 그는 고개를 어깨를 향해 기울이며 목을 죄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점점 사나워지는 임경호에게 시선도 두지 않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 일로 회사가 공중분해될 정도면 안신을 너무 부실하게 키운 게 아닐까. 그런 자책은 안 해보나.”
그는 설전이 지겨운 듯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임경호는 흥분하지 않으려 입매를 단단하게 굳혔다. 속에서 내솟는 감정을 짓누르느라 그의 목울대가 이물질을 넘기듯 꿈틀거렸다. 하선우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남은 음식을 비워나갔다. 1억을 500원처럼 쓰는 사내들의 위험한 대화에 무심함을 가장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성해온 비자금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임경호와 그의 부친은 억울할 테지만, 주식 상장으로 인해 발생한 배당금조차 받고 있지 않은 하선우로서는 그들의 욕심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밝혀진 규모만 10조 대에 달하는 비자금으로 지분을 만들어놓고 수사가 좁혀져오자 법망을 피해 초대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고 거짓을 고백한 안신이나, 때를 노려 먹잇감을 가로채려는 엘텍이나 하선우에게는 모두 도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약탈해온 도둑의 재화를 또 다른 도둑이 손쉽게 삼키려는 점이었다. 대도 위에 더 큰 대도가 있을 뿐이었다.
10조 대에 달하는 지분은 하선우로서는 평생 닿지 못할 규모의 부였고 신문기사 속에나 존재하는 돈이었다. 그 이상의 부를 움켜쥐고 있는 강주한이 강탈하면서까지 이루려는 게 무엇인지, 하선우는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오래전 홍콩에서의 마지막 밤, 김 부장에게 흘려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하선우가 아는 인물 중에서 가장 정직하고도 솔직하게 돈을 밝히는 그녀가 석사 논문으로 제출했다던 재벌의 소유구조에 대한 논문이었다. 모회사인 엘텍그룹을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엘텍과 달리, 안신그룹은 지배구조가 거미줄과 같은 순환출자 형태였기에 계열사 중 한곳에 적대적인 세력이 침입해올 경우 그룹 지배에 혼란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엘텍의 소송은 수 조대의 외부 자금을 투입해 적대적인 인수합병을 진행하는 외국계 금융 자본과는 성격이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안신그룹을 쥐고 흔들어보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였다.
재벌 3세 간의 대화를 언론에 고발하는 투사가 될 만큼 하선우는 사회정의를 실현해보려는 용기도, 의욕도 없었다. 그런 하선우의 본성을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었기에 강주한은 이 자리에서 태연하게 저런 수위 높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귀를 열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왔다. 먹먹한 둔통이 명치를 짓눌렀다. 그들의 관심 밖에서 무게감 없이 움직이고 숨 쉬고 저작을 반복하던 하선우는 잔에 가득 따른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섹스고 뭐고 기진했다.
몇 잔의 술을 비워내는 사이에도 위태롭고 삭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차명주식과 주주명부, 공동상속권리에 대해 골치 아프게 떠들어대던 대화를 절단한 것은 임경호였다.
날카롭게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흠칫 놀란 하선우는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으로 에워싸인 화단 위로 값비싸 보이는 야생초가 짓뭉개져 있었다. 벽을 향해 던진 술병이 파열되어 화단을 뒤엎은 것이었다. 하선우는 흘끗 임경호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분노를 억누른 그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천히, 잿빛으로 타들어가는 담뱃진처럼 남자가 지글지글 끓는 착시를 느꼈다.
초점 없이 화단 어딘가를 응시하던 강주한의 시선이 임경호에게로 돌아왔다. 깊어진 미간의 주름 아래, 또렷해진 눈매가 반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태도를 분명히 밝혀. 구걸이든 설득이든 투정을 부리든 한 가지만 하란 말이야.”
“내가 네게? 구걸을? 투정을?”
시리게 웃으며 임경호는 냅킨으로 술에 젖은 손을 닦아냈다. 쓰레기를 구기며 그는 강주한의 얼굴을 뚫어버릴 듯 쏘아보았다.
“네게 경고하러 온 거다.”
“경고?”
“날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글쎄. 그렇게 과신할 만큼 대단치도 않던데.”
강주한을 쳐다보는 임경호의 충혈된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수 초간의 침묵 뒤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맞닿은 얇은 선이 비뚜름하게 휘어졌다. 불길한 웃음은 하선우가 이곳에서 임경호를 본 뒤로 그에게서 처음으로 발견한 미소였다.
“네가 정말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해?”
주름졌던 미간을 더 모은 강주한은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잠시 막연한 눈을 했던 그는 조금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얻는 게 많아서 상관없어.”
두 사람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번갈아 쳐다보던 하선우는 그들에게서 어렴풋하게 느끼던 유사성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촌지간인 두 사람은 외모 외에도 분위기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인간미 없는 첫인상과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사람을 하대하는 방식이 특히 닮아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멸시하고, 상대방에게 날을 세우며 칼금을 남기는 태도가.
오랜 침묵 끝에 임경호가 입을 열었다.
“네게서 뭘 앗아가든 상관없단 말이지.”
시간의 흐름이 차단된 것 같은 정적이 이어졌다.
술맛이 뚝 떨어졌다. 아랫입술을 짓이겨 물며 하선우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컸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술에 취해 얼근하게 열기가 어린 눈으로 하선우는 고요한 주변을 더듬더듬 훔쳐보았다. 강주한에게 닿아 있던 임경호의 시선이 하선우에게로 옮겨졌다.
술이 넘쳐흐른 잔을 쥔 하선우의 손끝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그가 눈동자를 위로 움직였다. 상반을 훑은 그가 그제야 하선우의 존재를 인정하기라도 하는 양 새로운 관심을 두었다.
“뭐하는 놈이지.”
좀 전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어, 여전히 냉소가 남은 입술로 물었다. 하선우에게 던진 질문이 아닌 강주한에게 한 말이었다.
“말이 심한데. 놈이 아니고 전도유망한 기업가시지.”
“아, 기업가 양반.”
더 이상의 정보는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강주한은 입을 다물었다. 일견 무심해 보이는 하선우의 외모 속에 숨어 있는 생각들을 직관으로 풀어헤쳐 보려는 듯, 임경호는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재밌게 생겼군.”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짓눌러 물고 있던 치아가 느리게 떨어졌다. 서서히 벌어지는 입술을 다시 꾹 다물며 하선우는 불편한 감정을 감췄다.
“자네 이름이 뭐지?”
“하선우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초대를 받은 걸 보면 강주한에게 제법 귀염 좀 받나 봐.”
“…….”
“자네는 어느 쪽에 가깝나. 강주한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야 아니면 악어새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는 한참 하선우를 응시했다. 그저 시선을 맞출 뿐이었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하선우는 두 남자 사이에서 존재감을 잃고 저 멀리 떠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엘텍에 NnG가 기생하는 건 아니니 악어새 비슷한 것쯤은 될걸요.’ 맹랑하게 여기서 대꾸했다간 존재감이야 빛나겠지만, 그 존재감이 임경호에게 눈엣가시가 될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해해. 당사자 앞이라 쑥스러워서 말을 못하는 거겠지. 근데 내가 들어본 대답 중에서 가장 기가 막힌 대답이 뭐였는지 알아?”
“……. …뭐였습니까.”
“오줌 지리며 배 뒤집는 개.”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툭 내뱉은 그는 말을 이었다.
“지린다는 표현은… 흠, 별로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니 누가 했던 말이었더라….”
임경호는 기억이 났다는 듯 돌연 강주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아, 생각났어. 임권혁이가 했던 말이었지.”
강주한이 처음으로 임경호에게 반응했다. 그는 눈썹을 치뜨며 물었다.
“임 사장이?”
“그래.”
고개를 작은 각도로 까닥이며 임경호는 손안의 구겨진 냅킨을 던져버렸다.
“그런 말을 할 인물은 아닌 걸로 아는데.”
“왜. 아주 명견이던데.”
강주한은 굳은 얼굴로 낮은 실소를 흘렸다. 감흥 없이 임경호는 말했다.
“그러게 회장님은 왜 그 좋은 명견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셨을까. 그러니 주인을 물고 새 주인을 찾아 떠돌이 개가 됐잖아.”
“담 넘어 돈냄새 흘리고 간 누구 덕분이겠지.”
하선우는 그들의 대화로 어렵지 않게 그간의 사정을 추측할 수 있었다. 엘텍의 전지사업부 사장인 임권혁과 임경호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듯했다. 게다가 오늘 종합기술원의 연구원에게 들었던 얘기도 있어, 하선우는 어렵지 않게 인과관계를 유추할 수 있었다. 엘텍 내에서 좌천되다시피 사업부가 옮겨진 임권혁 사장이 엘텍에서 안신으로 적을 옮긴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만 하겠어?”
비딱하게 입술을 휘며 임경호가 말했다.
“강주한 너처럼 돈냄새는 누구보다 귀신같이 맡는 새끼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돈냄새 나는 곳마다 영역 표시하고 다니는 새끼가 어디서 성을 내.”
임경호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네 취미가 소송인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는데 임권혁은 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희 쪽에서 비경쟁 조항 어긴 게 한두 가지도 아니고. 줄줄이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 내버려둬라. 뭐, 이 구역의 원조 개장수는 네 아버지 아니었냐.”
속사포로 바쁘게 말을 뱉어낸 그는 할 말만 마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지,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직원을 돌아보며 외투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따끔거리는 가슴의 감정을 외면하려 하선우는 엉망이 된 화단을 보았다. 그러나 어수선한 화단처럼 그의 마음도 어수선함이 가시질 않았다.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흥분되는 감각이었다. 참을 수가 없어서 하선우는 저도 모르는 새 불만 가득한 한숨을 푸욱 길게 내쉬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외투를 걸치던 임경호가 하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내게 할 말 있는 거 아니었나?”
“더워서 그렇습니다.”
“그런 것치곤 사연 있어 보이는 표정인데. 말해봐.”
입을 열기 전 하선우는 조금 머뭇거렸다.
“사람을 개 취급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그의 한쪽 겉눈썹이 슬쩍 걸렸다. 그의 정지한 시선이 오래도록 하선우에게 머물렀다.
“예의……. 예의라.”
“…….”
“그 자신이 스스로를 개라고 표현한 상황이란 걸 들었잖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진짜 개가 될 수는 없죠.”
임경호는 가늘게 입을 다물었다. 화색이 없는 피부와 동그란 안경을 써도 감출 수 없는 날카로운 눈매, 무표정을 유지하는 얼굴이 귀신 같다고 하선우는 생각했다.
“아니. 누구나 개가 될 수 있어. 자존심을 버리면 개보다 더한 것도 될 수 있지.”
이놈의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해.
하선우는 감전된 기분을 느꼈다.
임경호는 여전히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외투의 단추를 잠갔다. 여남은 걸음을 사이에 두고 그는 강주한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정적만이 남았다.
“대신 무례를 사과하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하선우는 남은 잔을 마저 비워냈다. 얼마간 말이 없던 강주한은 이미 오래전에 비웠던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상황이 재미있기라도 한가,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하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물었다.
“하선우 씨는 나 같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강주한은 음을 낮춰 신중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그는 채근하지 않고 하선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타인의 생각을 괘념치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물음의 구체적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재벌에 대한 소시민의 입장을 묻는 건가 아니면 인간 대 인간으로 받은 인상을 묻는 건가. 무엇이 되었든 이런 취급을 받아놓고 그들에 대한 하선우의 생각이 긍정적일 리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리던 강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전의 적막을 개의치 않는단 얼굴로 그는 말했다.
“갈까요.”
“예.”
그는 절룩거리며 앞서 나갔다.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죄책감도, 그에 대한 어떤 반작용도 느끼는 것 없어 보이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에 대해 불거지는 위구심으로 인해 강주한을 더더욱 알 수 없어져버렸다.
복도를 지나 붉은 칠을 한 거대한 핏빛 원목 문 안으로 들어서자 사면이 트인 방이 드러났다. 불 꺼진 그곳으로 발을 디뎠을 때, 하선우가 처음 느낀 것은 늪 위 허공에 붕 떠 있다는 느낌이었다. 너무도 낯설어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공간에 발을 들인 듯했다. 산 아래, 그들이 차를 타고 올라왔던 이차선의 도로 아래로 북촌과 경복궁의 풍경이 보이고 가물한 시야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과도 굴절도 없이 고스란히 보이는 풍경이 이상스러워 멈칫한 하선우는 야외의 소음과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 뒤에서 강주한이 스위치를 켜자 하선우의 눈앞이 밝아졌다. 여태껏 일부러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멋지네요.”
유리바닥 아래로 늪이 조성되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무성한 억새풀에서 눈을 뗀 하선우는 유리벽으로 다가가 벽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억새풀이 핀 늪 밖으로는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내린 눈이 굳어 희끗희끗한 얼음덩이가 쉼터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싸늘한 풍경이었지만 날 좋은 계절에는 가끔 가든파티를 여는지 곳곳에 야외 테이블이 보였다. 옅은 밤안개에 싸인 억새풀과 산 아래 흩어진 야경의 풍경이 아스라했다.
“건물을 유리창형 태양전지로 만들었나 봐요.”
“아시는군요.”
“전에 킨텍스 전시관에서 봤습니다. 전지박람회였는데 가격이…….”
하선우는 그의 부에 대해 감탄을 하는 것이 갑자기 부질없이 느껴져 말을 줄였다. 강주한은 찬장에서 술을 꺼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말수가 적어진 하선우를 강주한이 힐끗 쳐다보았다. 인생을 다 산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고분고분해진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의문했다.
“몸이 안 좋습니까?”
두 손으로 강주한이 건넨 술잔을 받아 든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술기운도 있고 좀… 기운도 빠져서.”
“기운이 왜 빠지는 데요.”
잠시 고민하던 하선우는 대답했다.
“사실 좀 전에 기분이 좋진 않았습니다. …굴욕감을 느끼면 원래 사람은 그래요. 화가 나거나 기운이 빠지거나.”
하선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술을 입안에 가득 머금고 천천히 삼킨 하선우는 괜한 말을 했다 싶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다고 제가 전무님께 화가 났다는 건 아니지만요.”
“미안합니다. 내가 변명할 말이 없군요.”
“아뇨. 전무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그분도 뭐….”
다시 한 번 더 어깨를 으쓱하는 하선우를 강주한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하선우 씨는…….”
뜸을 들인 그가 말했다.
“눈치 보면서도 할 말 다하는군요.”
가늘게 떠 게슴츠레하던 눈가에 웃음기가 깃들었다. 미소 띤 아랫입술을 질겅이듯 조금 씹으며 그가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하선우를 귀여워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웃는 강주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니꼬운 한편, 화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한편으로는 강주한에게는 이 정도 서운함도 토로하는 사람이 없는가 싶어 씁쓸했다.
하선우는 시선을 코끝으로 내렸다. 저를 귀여워하는 강주한의 시선이 당황스러웠다.
“여기가 전무님 방인가 보죠?”
어색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을 고스란히 들여다본 강주한이 피식 웃었다.
“방은 맞지만 주거 공간은 아닙니다. 그저 개인 집무실이죠.”
별채는 긴 컨테이너박스 같은 구조였다. 투명한 유리벽으로 공간을 나누어 집무실과 휴게실, 서재로 용도를 각각 달리해 사용하고 있었다. 휴게실의 가운데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7시 반. 침대로 직행하기까지 일정을 추가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시간이었다. 그리고 강주한은 에두른 행동으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여기 밖에서 안 보입니다.”
“예에…….”
뜸 들이는 대답에 강주한은 코로 웃었다. 넥타이를 푸르고 그는 안에 껴입었던 베스트를 풀었다. 스윽스윽 옷을 벗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빈틈없는 적막 속에서 강주한은 의식적으로 탈선을 시작했다. 눈으로는 테이블에 놓인 화병을 보면서 귀로는 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하던 하선우는 잔에 남은 독한 스카치를 천천히 머금어 모두 삼켜버렸다.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강주한은 손을 내밀었다. 하선우는 뒤늦게 손을 마주 잡았다. 조금 망설였던 이유는 강주한과의 성관계가 두 번째이지만, 여전히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휴게실은 가구의 포근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동식물의 조직을 배양하는 연구실처럼 느껴졌고, 조명은 표백 과정을 거친 것처럼 창백하게 방 안을 비췄다. 손때 하나 묻지 않은 투명한 유리로 여과 없이 보이는 야외는 누군가 숨어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는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동시에 폐쇄된, 관음과 노출의 공상 무대였다.
알코올의 작용을 의식하며 비틀거리지 않으려 하선우는 다리에 힘을 줬다. 강주한은 목발에 몸 한쪽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손을 뻗어 하선우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하선우 역시 손을 뻗어 그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상의를 풀어헤치고 허리춤의 버클을 끌러낸 그가 더디게 움직이는 하선우를 대신해 자신의 셔츠를 모두 벗어버렸다. 맨살이 맞닿도록 껴안으며 강주한은 엉덩이를 감싼 속옷 위로 손바닥을 펼쳤다. 양쪽 엉덩이를 꽉 잡아 작은 손놀림으로 더듬어 만지작거리며 그는 단단하게 경직한 하선우의 어깨 근육 위로 입술을 묻었다. 쪽쪽, 쪼는 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향해 미끄러져 오던 입술이 귓불을 깨물었다. 잔뜩 움츠러든 하선우에게 그가 속삭였다.
“좋네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터질 듯한 디자인, 안정적인 그립감이 말입니다.”
웃음기 없는 농담에 하선우는 지금까지의 긴장도 잊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재미없어요.”
스마트폰도 아니고 그립감을 운운하는 강주한의 진지한 농담이 일전의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성욕이 강하고, 외모를 배신하는 음란한 구석이 있었다.
“전무님 생각보다 저질이신 것 같습니다.”
“아뇨.”
귓덜미에 입술을 붙인 채로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하선우 씨의 생각보다도 아주… 훨씬 더 저질이고 변태적이죠. 오늘은 어디까지 보여드릴까요.”
평소의 목소리보다도 더 낮게 은근한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한 그가 조물거리던 손을 조금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다분히 즐거움이 가득한 그 눈을 보며 하선우는 망설이다 툭 내뱉었다.
“17금 수준으로 하죠.”
말이 끝나자마자 강주한은 입술을 부딪쳐왔다. 아랫입술을 빨고, 혀를 깨물고 타액에서 진동하는 알코올의 맛을 머금으며 조금 더 본격적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강주한의 얼굴에는 이미 주저함이 없었다. 긴장으로 수축한 동그란 어깨근육에 입을 맞추며 그는 하체를 맞비벼왔다. 아랫배 위로 문질러지는 강주한의 페니스는 반쯤 단단해져 있었다. 이게 어디가 17금 수준인가 싶어 입을 맞추면서도 하선우는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두툼한 끄트머리를 잡아 문지르던 하선우에게 그가 말했다.
“하선우 씨는 별로 자의식을 느끼질 않네요.”
어색함이나 후회, 어떤 교감이 끼어들 틈이 없도록 묵묵히 섹스를 진행하는 것을 강주한은 태연함으로 오해했다. 칼칼해진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애써 감춘 하선우는 말했다.
“나이 서른둘에 부끄러워서 몸을 배배 꼬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건 그렇죠.”
“전무님이야말로 수줍음을 느끼긴… 하십니까.”
수줍음이란 단어가 강주한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았다. 이마를 맞댄 채 그가 가볍게 웃음을 매단 눈을 맞췄다.
“아뇨. 그런 거 없어요.”
손바닥에서 끈적하게 페니스가 떨어졌다. 그는 가까운 거리에 있던 침대 맡에 다리를 벌려 앉았다. 그가 원하고 의도하는 바는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하선우는 채 삼키지 못하고 있던 혀 밑에 고인 침을 힘들게 삼켰다.
다리를 벌려 앉은 강주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하선우는 견고하게 팽창해 혈관의 모양까지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하선우는 자신이 술에 취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서른둘에 부끄러워서 몸을 배배 꼬는 게 더 이상하다는 말로 만용을 부렸지만 하선우는 그를 너무나도 의식하고 있었다. 뒤통수에 손이 얹어졌다. 커다란 남자의 손은 뒤통수를 모두 감싸고도 남아 귓덜미에 닿았다.
도드라진 귀두가 입천장과 혓바닥을 긁으며 목구멍 가까이 들락거리는 동안 강주한에게선 숨소리도, 신음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츱츱 페니스를 빠는 젖은 소리와 꼴깍거리며 침을 넘기는 적나라한 소리뿐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침엽수림이 우거진 산, 정원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선우는 눈을 감았다.
성애인지 아니면 일방적인 착취인지 그 경계가 아리송해질 무렵 강주한이 페니스를 빼냈다. 그의 얼굴 역시 잔뜩 열이 오른 채였다.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느껴질 정도로 입을 맞추던 그가 별안간 하선우를 일으켜 세웠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하선우를 다리를 벌려 앉힌 그가 등을 껴안으며 다시 입술을 겹쳤다.
쪼듯이 달래듯이, 마치 감정을 교감하듯 부드러웠다. 대화 같은 키스였다. 달콤함. 둘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 때문에 사소한 반응을 보이길 주저하던 하선우는 결국 생각을 탁 놓아버렸다.
그의 페니스가 단단하게 부풀었다. 성기가 축축해진 손안에 감기듯 들러붙었다. 아랫배가 맞닿도록 몸을 가까이 밀착한 채로 두 사람은 서로의 것을 더듬었다. 하선우의 것을 잡아 흔드는 그의 손바닥 안에도 진땀이 끈적끈적하게 배어 나왔다. 엉덩이와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사정 직전에 이른 하선우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강주한은 손등의 혈관이 도드라지도록 꽉 쥐어흔들었다.
“허억…! …아, 하아, 아!… 읏, 흐응…….”
얼굴을 찡그러트린 하선우는 강주한의 손 위로 쏟아진 멍울진 정액을 보았다. 강주한은 하선우가 사정한 뒤에도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미끌미끌한 애액이 하선우의 페니스에 펴 발라졌다. 손아귀의 힘이 지나치게 강했다. 따듯한 점막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재게 오르내리던 하선우의 가슴팍이 크게 튀었다. 쾌감의 난도질에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더 과민해지는 하선우를 그는 진지하게 감상하기 시작했다. 하선우는 그의 두 눈 안에 묽게 스며든 가학적인 욕구를 읽었다. 강주한의 가슴이 점차 조급하게 오르내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흐읏! …잠깐! 잠깐만 쉬었…….”
애액으로 잔뜩 범벅이 된 손이 하선우의 아래턱을 잡았다. 그는 전보다 훨씬 더 거칠게 입을 맞췄다. 키스를 할수록 침이 자꾸만 입안에 고였다. 레몬을 씹은 것처럼 시게 고이는 타액을 빨다, 침대에 하선우를 밀쳐 다리를 넓게 벌렸다. 무릎으로 지탱해 앉은 강주한은 다리의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하선우를 놓지 않았다.
마치 정상위를 연상하게 하는 체위였다. 막연한 거부감에 강주한을 밀치려던 생각을 고쳐 자신의 아랫배 위에서 꺼덕이는 그의 페니스를 잡았다. 단단한 부피를 쉼 없이 매만지자 그가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윗입술과 인중을 짓씹고 깨물어 빨다, 엉덩이를 힘주어 잡아 벌리고 등을 매만졌다. 고조되는 막막한 쾌감에 끙끙거리던 하선우는 단순한 패팅을 하는 중임에도 몸속까지 헤쳐진 기분을 느꼈다. 체위 때문인지 삽입으로 범해진 느낌이었다.
하선우의 배 위에 질퍽하게 정액을 쏟아낸 강주한은 하선우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가 호흡을 고를 때마다 귓바퀴로 더운 숨이 흩어졌다. 간지러워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몸을 얽은 채로 숨을 가다듬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페니스가 넓게 벌린 다리 사이에 놓여 있었다. 섹스를 의식하게 하는 위치였다. 강주한의 체중에 깔려 꼼짝하지도, 회음부를 자극하는 페니스를 무시하지도 못하고 하선우는 눈을 감았다. 어깨에 닿은 강주한의 턱의 각이 틀어졌다. 상체를 조금 세운 그는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애널섹스 해봤습니까.”
허리를 조금 움직여 그는 회음부 아래를 자극했다.
그는 이제 게이인지, 아닌지도 묻지 않았다. 벌어지는 입술을 다문 하선우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땠습니까.”
“…좋을 때도 있고 그저 그럴 때도 있고… 그래 봤자 섹스일 뿐이죠.”
더듬거리며 대답한 하선우는 조금 뜸을 들인 뒤에 말을 이었다.
“늘 안겼던 것도 아니고 안을 때도 많았습니다. …부담스러울 때는 대부분 패팅으로 끝냈고요.”
긴 설명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하선우는 꼬박꼬박 대꾸했다.
“선우 씨를 안고 싶은데요.”
놀란 눈을 한 하선우를 강주한은 빤히 바라보았다.
“아하…하……. …거절하겠습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는데도 어렵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간절히, 라는 표현에 하선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눈에서는 욕망을 읽을 수 없었다. 혹은 욕망과 겹쳐지기 마련인 간절함도 없었다.
그냥 던진 말인가.
이상히 여기며 하선우는 대답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전무님은 너무 크시기도 하고, 전 몸에 부담 가는 섹스는 안 하자는 주의라. 게다가 지금은 준비도 안 됐…….”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하선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습니까. 끄는 한숨을 내쉰 강주한이 찌푸린 표정의 하선우를 보았다. 섹스를 흥정하는 대화는 에로틱하지도 않았고 권력과 강제력이 끼어들어 지저분해지지도 않았다. 사무용품 하나 빌려달라는 요구처럼 건조하기까지 했다.
들어 올렸던 상체에 힘을 뺀 강주한은 다시 하선우의 입술을 머금었다. 겹쳐진 그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웃음이 새어나왔다. 별다른 대꾸 없이 그는 다시 애무를 시작했다. 애널 섹스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한번 던져본 말인, 해프닝으로 끝났다.
일전에 비하면 산뜻한 섹스였다. 벗어 던졌던 옷을 다시 껴입으며 하선우는 옆방의 집무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강주한을 흘깃거렸다. 바지를 입고 셔츠를 대충 걸친 차림이었다. 그는 책상에 허리를 기대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나머지 손으로는 담배를 들고 통화를 했다.
담배를 태우는 폼이 익숙했지만, 그에게서는 애연가들이 그러하듯 정수리나 손끝에서 담배의 잔향이 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담배냄새를 맡지 못했기에 그가 흡연을 한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그는 담배를 든 왼손으로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방음 처리된 유리문 너머 그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옷을 모두 껴입은 하선우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이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시 강주한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 때맞춰 그 역시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그가 전화를 끊었다.
한 손으로는 목발을 짚고 남은 한 손으로 셔츠를 힘들게 잠그며 그는 어깨로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왔다. 유리벽에 등을 느슨하게 기댄 채 그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하선우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방 안에 나울거렸던 성적 긴장이 거세되어 담백해진 공기가 둘 사이를 채웠다. 다시 강 전무와 하 사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도망치듯 벗어났던 나흘 전과 달리 오늘은 비교적 멀쩡한 상황으로 정신을 모두 수습한 상태였다.
“회사에 있던 하선우 씨 차는 일산 자택으로 보냈습니다. 오늘은 댁으로 모셔드리죠. 건물 밖에 차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예.”
강주한은 한숨을 쉬며 하선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섹스가 어땠는지 감상을 듣고 싶은 표정이었다. 보통의 경우 어렵지 않게 꺼내던 말이었는데 하선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선우는 어려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덕분에 오늘 즐거웠습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곧바로 대답을 반사한 강주한은 소리 없이 웃으며 하선우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해사한 느낌의 미소였다. 강주한이 아닌 보통의 사내였다면 필시 풋풋한 기대감 때문에 지은 웃음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매단 얼굴로 고개를 숙여 남은 단추를 끼웠다. 하선우는 어쩐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단추를 잠근 그가 다시 찬찬히 눈을 들었다.
“할 말 있습니까?”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말인지 감탄사인지, 아니면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적당한 형용사를 머릿속에서 굴리던 하선우는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급히 떠오르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밤에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아요?”
“글쎄요. 전 귀신 같은 건 안 믿어서.”
고개를 가볍게 저은 그는 투명한 유리바닥 아래, 흰 파도처럼 힘없이 찰싹거리는 억새풀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는 애초에 건물이 들어설 부지는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억새풀 정원으로 꾸며놓았던 곳이죠. 지금의 별채를 짓기 전에는 오래된 정자 하나가 있었어요.”
억새가 핀 늪에는 정자가 보이지 않았다. 별채를 지으면서 철거한 듯했다.
“운치가 대단했겠어요.”
“그래서 유임이가 좋아했었죠.”
발밑에서부터 억새 늪의 경계가 끝나는 곳까지 긴 시선을 주었던 강주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선우의 발치에 시선을 늘어트린 채로 그는 말했다.
“나가죠.”
두 사람은 함께 별채를 나섰다. 거대한 적색 원목 문을 빠져나와 등 뒤로 문을 닫은 하선우는 그의 뒤꿈치로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껏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는 결혼을 했던 사내였다. 강주한이 서유임의 이름을 말하기 전까지 하선우는 그가 사고로 아내를 잃은 사내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내가 좋아했던 정원 위로 별채를 지었던 강주한은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려 다른 사내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일까? 하선우는 그것에 대해 물을 자격도 물을 이유도 없었고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앞으로도 이런 관계가 지속된다면 도처에 널린 그의 과거가 신경 쓰일 것만 같았다.
하선우는 발치를 뒤덮은 강주한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수심 같은 그에게 발을 담근 것은 하선우가 먼저였지만 그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특별한 변화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어렴풋한 확신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강주한의 입에서 흘러나온 서유임의 이름이 신경 쓰였다. 서유임을 추억하던 그의 어조와 표정을 자꾸만 떠올리게 됐다.
“다음번은 하선우 씨 자택에서 만나죠.”
“그럴까요?”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성급하게 대답한 데다가 음까지 나가버렸다. 하선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강주한은 풀썩, 웃으며 다시 앞서 걸었다.
복도를 벗어난 그들은 로비로 빠져나왔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로비는 당장에라도 수녀 마리아와 그녀의 일곱 제자들이 도레미송을 부르며 튀어나올 것 같은 구조였다. 실제로 어린아이가 여자의 손을 잡고 계단의 끄트머리를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의 키에 맞춰 허리를 낮춘 여자는 낯이 익었다. 일전에 엘튼 호텔에서 울며 떼를 쓰던 강주한의 딸을 어르던 보모였다. 생선구이의 간을 신경 써달라고 호텔의 조리장까지 불러 주의를 주고 유명한 도예가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 달라는 사소한 주문까지 전달하던 그녀는 이곳에 완전히 상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듯했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윤기 나는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곱게 화장까지 한 상태였다.
가정교사의 완벽한 교본 같은 여자의 손을 잡은 아이는 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아이는 두 발을 계단에 모두 내려놓고 나서야 한 발을 뗄 수 있을 만큼 키가 작았다. 첫눈에 누구인지 알아볼 정도로 아이의 유전자는 근원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아버지!”
강주한을 발견하자 아이의 걸음을 떼는 속도가 빨라졌다. 열심히 야무진 걸음으로 강주한의 앞으로 달려온 아이가 두 팔을 벌려 그의 성한 무릎을 안았다. 얼굴을 비비던 아이가 고개를 꺾어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나쁜 일 있으셨어요?”
“아니.”
“나쁜 때 담배 핀다고 했잖아요.”
“그랬었나. 오늘은 나쁜 일이 없었는데.”
“다리 안 아파요?”
“응.”
“그럼 나, 나 안아주세요.”
기대감은 잔뜩 품은 눈으로 강주한을 쳐다본 아이가 두 팔을 벌리며 겅중 뛰었다. 목발을 짚지 않은 한 손만으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린 그가 정수리에 입술을 묻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만으로 세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가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것이 재미있어 하선우는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 녀석입니다. 희원아, 인사드려.”
멀뚱히 하선우를 쳐다보던 아이는 큰 눈을 껌뻑거렸다. 다시 아버지를 돌아본 아이가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하선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쌍둥이 동생과는 달리 낯을 많이 가리는지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고개만을 까딱였다.
“반가워, 희원아. 하선우 아저씨라고 한다.”
하선우는 손을 내밀었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이목구비가 강주한과 닮아 어린 시절의 그와 마주 보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미간을 모았다. 희원이 갑자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잡을래요.”
아이는 서둘러 소매를 잡아 늘여 주먹 안에 쥐었다.
“싫어요.”
“왜.”
“장갑 안 낀 손은 만지기 싫어요.”
하선우는 조금 기가 막혔지만 손을 감춘 아이를 보면서도 어른으로서 훈계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타인을 모욕해도 용납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는 것을,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어… 그래? 아하하.”
내밀었던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는데 하, 바람 빠지는 웃음이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흥미로운 눈으로 강주한은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선우는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예리하게 갈린 칼날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희민 씨. 희민 씨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뒤에서 자리를 지키던 여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공손히 손을 모았다. 머뭇거리는 표정을 고개를 살짝 조아려 감추며 여자는 대답했다.
“예.”
입가에 깃들었던 웃음이 사라졌다.
“아이를 보육하는 사람이 아이를 결벽증 환자로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차분하지만 온기 없는 어조였다. 단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음에도 하선우는 얼굴 위로 유성 연고제를 퍼부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보다도 더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운이 얼굴에 일었다. 강주한은 아들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입술을 샐쭉거리다 아이는 손바닥에 꼭 쥐었던 소매를 놓고 손을 내밀었다. 마디마다 살집이 볼록한 자그마한 손을 맞잡아 흔들자 강주한의 굳었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배웅하고 올 테니 선생님과 함께 기다리고 있어.”
그는 포동포동한 볼에 스치듯 입술을 묻으며 아이를 보모에게 넘겼다. 면구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안아 든 그녀를 뒤로하고 강주한은 앞서 걸었다. 상황이 민망하기도 하고 할 말도 없어 숨죽여 뒤를 따르던 하선우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고 말했다.
“아드님이 전무님을 많이 닮았네요.”
“그런 편이죠. 성격은 아내도 저도 닮지 않았지만.”
“……당찬 구석이 있던데요.”
“그런가요. 그게 당찬 겁니까.”
나지막이 한숨을 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칭찬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자식 사랑에 앞뒤 못 가리는 팔불출은 아니라서요.”
미간을 좁히며 그는 말했다.
“아이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로 나를 실망시킬지 걱정이 되는군요.”
川 자로 깊어진 주름은 한동안 풀어질 줄 몰랐다. 하선우는 성장하는 아이들로부터 얻을 행복을 두고, 실망이라는 전제를 까는 강주한의 말이 공감 가지 않았다. 하선우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가 곁눈으로 돌아보았다.
“보기보다 비관적이죠?”
아무런 연고가 없는 타인의 비밀을 타전하듯 건조한 어조였다. 미온한 웃음을 지은 그는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었다. 도로와 이어지는 계단 앞이었다. 좁은 아스팔트 길 위에는 세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강주한은 목발을 짚고 계단을 힘들게 내려가는 대신 층계참에 서서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하선우 씨.”
“…저도 즐거웠습니다. 추운데 들어가세요.”
“그러죠.”
대답을 하고서도 그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칼바람에 그의 콧잔등이 붉어졌다. 이 추위에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배웅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하선우는 묻고 싶어졌다.
우리는 왜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겁니까.
비로소 이제야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타인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가 왜 위험부담을 안고 동성과 섹스를 하는지, 그 이유가 하선우를 향한 특별함 호감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욕구불만 때문인지. 왜 이 만남은 계속되는 건지, 강주한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하선우는 입 밖으로 물음을 던져 답을 구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리고 그가 대답을 하는 순간 관계가 경박해지거나, 지나치게 무거워질 것 같았다. 결국 어느 곳에도 쏠리지 않은 중심의 아늑함을 도피처로 삼기로 한 하선우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들어가보겠습니다.”
“잘 들어가요.”
“예.”
차에 올라탄 하선우를 확인한 기사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그가 서 있던 층계참이 거대한 상록수에 가려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기사는 이런 유의 방문객을 집으로 모시는 데 익숙해 보였다. 늦은 밤의 방문객에 대한 어떤 호기심도 품지 않았고 어색한 침묵을 지울 사람 좋아 보이는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몇 마디 말을 붙여보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하선우는 승차감이 좋은 좌석의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술기운이 거의 가셨다. 낭비가 심하고 세속적인 건물들이 구불구불한 도로를 타고 내려갈수록 하나둘씩 줄어갔다. 산의 하부로 내려가자 건물은 사라지고 우거진 정원수와 이차선의 도로, 가로등 불빛만이 남았다. 차는 계속 달렸다. 마침내 엘텍가의 저택이 검게 뭉개진 윤곽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선우는 차창을 내렸다. 뺨을 때리는 차가운 밤공기가 현실을 깨웠다. 도로변의 밤은 인적으로 어수선했다. 하선우는 문득 그 부산스러움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듯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재잘거리며 떠드는 친구의 옆모습 같은 도시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