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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악당에 대하여 (1) (7/26)

7. 악당에 대하여 (1)

봄이다.

그늘진 거리마다 얼어붙은 눈이 쌓였고 앙상한 가지는 메마른 채였지만 그럼에도 겨울의 빈틈으로 봄은 찾아왔다.

한해살이 검불이 누렇게 엉긴 그늘진 화단에는 자그마한 냉이가 바큇살 모양으로 잎을 내뻗고 있었다. 폭격 같은 추위를 밀쳐내고 웅크렸던 몸을 젖힌 싹이 푸릇했다. 화단을 내려다보던 하선우는 불쑥 입을 열었다.

“봄이 오긴 오는구나.”

뺨이 홀쭉해지도록 담배를 빨던 이석이 겉눈썹을 배뚤 찡그렸다.

“너 봄 타냐?”

“아니. 그냥. 새싹이 움트는 게 신기해서.”

“너 딴생각하느라 내 말 못 들었지?”

“딴생각을 조금 하긴 했는데 형 말은 다 들었어. 샘플 얘기하고 있었잖아.”

엄지손톱만 한 새싹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 놀리냐. 얼굴에 글자를 박아놓은 것 같은 표정의 이석을 본 하선우는 씩 웃었다.

“아니, 그냥 나는… 이번 겨울이 유독 길었던 것 같아서. 뭘 또 그런 표정을 지어.”

“너 뭔 일 있는 거냐?”

대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하선우는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조금 머금었다.

“요즘 아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살던데, 뭐 있는 거 아니야? 나 몰래 여자나부랭이 만나기라도 한 거야?”

“여자는 무슨.”

한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하선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봄바람 불면 뭐해. 봄바람 느낄 시간도 없는데.”

억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쉰 하선우는 남은 커피를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었다.

2월 초, 새로운 모델 출시가 결정되었다. 스마트폰 디자인은 모두 4종이었다. 모델에 따른 배터리의 모양도 제각각이었기에 휴대폰 신모델이 정해지면 금형을 만들어 양산에 들어가야 했다. 알루미늄판이 밀려 올라가는 틀인 금형(金型)을 만드는 데 최소 20일. 그 기간 중 절반은 잠자는 시간 빼고 개발실에서 죽을 치고 있어야 했다. 오늘은 그 결실을 본 날로 엘텍의 전지사업장에 납품할 샘플의 테스트를 마친 날이었다.

이석의 손에는 시생산한 2종의 샘플이 들려 있었다. 경쟁업체 중에서 NnG는 가장 먼저 샘플을 생산해냈다. 하선우는 졸린 표정으로 말했다.

“연애고 뭐고 그냥… 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

잠을 떠올리자 절로 하품이 나왔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하선우는 눈가에 글썽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어우 조올려. 이버 샘프 퇴짜 마즈면 나 딘짜…….”

연이은 하품에 죄 뭉개진 발음으로 툴툴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뚜둑거리며 관절이 어긋나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이러다 골병들어 죽지. 노인네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던 하선우는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드는 이석을 보며 결리는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쳐댔다.

“근데 요즘 분위기가 수상하지 않아?”

“무슨 분위기?”

“신규 수주량이 엄청 급증했잖아. 이 정도면 상반기 매출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늘 것 같은데.”

“그럼 좋지 뭐가 수상해.”

“그러니까 내 말은 산원테크로 가야 할 주문량이 우리한테 온 게 아닌가 싶어서.”

하선우의 말에 찌푸린 표정으로 담배를 몇 모금 빤 이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게 뭐.”

“임권혁 씨가 안신EM으로 옮기면서 산원테크에 수주량이 줄어들었나 했지. 괜히 엘텍에 밉보여서 망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씁쓸한 표정으로 하선우는 말했다. 그는 산원테크의 사장인 염 사장의 군턱 진 넓적한 얼굴과 작고 처진 눈매를 떠올렸다.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인물이자, 한때 산업체 군복무 중에 그의 고3 아들을 무료 과외해준 인연이 있다 보니 아무리 얄밉다 해도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걱정돼?”

가만히 듣고 있던 이석이 눈을 갸름하게 뜬 채로 흘기듯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삐딱한 입술 사이로 연기를 길게 뱉어낸 그는 말했다.

“이야. 하선우 걱정거리가 없어서 염동균을 걱정하냐.”

기가 막힌 얼굴로 조금 언성을 높이며 이석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주문 많이 받은 이유는 NnG가 염 사장 회사보다 제품단가를 더 낮추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으니 더 들어오는 거야. 그리고 염 사장은 걱정해줄 필요가 없어. 얼마 전에 산원테크가 안신으로 흡수된 거 몰랐냐?”

“뭐?”

“너 진짜 귀 닫고 사냐? 얼마 전까지 안신에서 산원테크 주식 공개 매수했잖아. 상장 폐지되고 안신 자회사 된 지가 언젠데.”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쉰 이석은 말했다.

“지금 우리 코가 석 자거든?”

대체 무슨 꿈을 꾸냐는 눈으로 하선우를 쳐다보며 이석은 혀를 찼다. 이석의 말에 하선우는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작년 겨울, 강주한과 밤늦게 겨울의 찬바람을 맞아가며 울산의 공장부지를 돌아볼 때, 그곳에서 우연히 염 사장과 임권혁을 보았었다. 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필연에 가까운 만남이었었다. NnG는 엘텍을 대상으로, 산원테크는 안신을 대상으로 하는 부품을 납품하기 위해 제조시설을 확장해야 하는 처지였고 때마침 부도난 회사를 저렴하게 매입할 기회가 찾아왔다.

결국 NnG가 낙찰되는 것으로 결정되긴 했지만 염 사장이 임권혁이라는 든든한 동아줄이 없었다면 요즘 같은 불경기에 공장부지를 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턱을 무릎에 괸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하선우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상장 폐지면… 산원테크가 안신 계열사에 합병됐단 말이야? 그건 회사 정체성을 잃는 게 아닌가.”

“참나.”

넌 아직 멀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석은 말했다.

“회사 정체성이 무슨 상관이야. 상장 폐지한 다음에 고배당으로 주주들끼리 서로 이익 다 나눠 가질 텐데. 임 사장 엄청 남겨먹었을 거다.”

“형은 그래도 돼?”

“뭐?”

“억만금 받으면 NnG가 엘텍에 흡수돼도 상관없어?”

이석은 할 말을 잃고 눈을 깜빡거렸다. 곧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을 굴리던 그는 입을 열었다.

“경영권만 보장받으면… 뭐가 됐든 조건이 좋으면 거절할 이유 없지.”

그거야 합병을 해주겠다는 대상이 엘텍일 때 얘기고. 뺨을 긁적이며 그는 말을 돌렸다.

“암튼 임권혁이 안신으로 넘어가면서 얼마 받았을 것 같냐?”

하선우는 눈을 굴려보았지만 쉬이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한… 50억?”

이석은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고통이 날카롭게 스친 얼굴로 하선우를 바라보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무안해진 하선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왜? 물어봐서 대답한 건데.”

하수구에 침을 뱉은 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

“엘텍 사장급 연봉이 평균 30, 40억이다. 고작 50억 받고 임권혁이 미쳤다고 엘텍에서 안신으로 옮겨 갔겠냐? 아직도 이렇게 세상물정을 몰라요. 게다가 이번에 임권혁만 옮겨가는 게 아니라 그 밑에 핵심 인사들도 데리고 가는 거라며.”

이석은 화단 둑에 등을 대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사장 직급으로 스카우트하는 비용으로 최소 100억. 거기다 플러스알파는 기본이었을 테고 옵션으로 안신EM의 사내이사라는 자리가 붙었잖냐. 사장급이 사내이사로 선임되면 이사 보수 한도 적용받아서 연봉이 훨씬 뛰거든요? 그럼 연봉만 기본 60억이 넘어요. 그러니까… 올해만 거의 200억 가까이 챙겨 가겠네. 거기다가 실적 좋으면 나중에 상여금도 챙겨 받을 거고. 돈에… 권력에… 아! 다 가진 거지 뭐.”

입맛을 다신 그는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안신에서 임 사장을 그 조건으로 데려간 걸 보면 판돈을 크게 건 이유가 있을 텐데. 종합기술원에서 쓸 만한 소식 못 들었냐? 임 사장 옮기는 문제로 말 없어?”

“금요일에 한 번 엘텍 들르는 거라 별로 들리는 소식은 없는데.”

그나마 연구원 중 절반은 외국인이었고, 하선우는 외국인보다도 그들의 사정에 어두운 외부 인사였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은 퍼져 나가서 곤란할 얘기가 아니라면 대부분 이석에게 털어놓는 편이었기에 둘 사이에 새로울 것도 없었다.

“엘텍이 이차전지 분야에서 안신보다 앞서 나가니까 그거 따라잡으려고 스카웃하는 거겠지.”

“선우야, 됐다. 그 정도 추측은 나도 한다.”

이석은 김빠진 얼굴로 웃었다. 번번이 무안을 주는 이석 때문에 슬슬 분이 오르던 하선우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주머니를 뒤졌다.

“아니,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할 게 아니라니까. 작년에 내가 보여줬던 기사 생각나?”

핸드폰을 꺼내 북마크해두었던 기사를 이석의 눈앞에 보이며 말했다.

“이거. 형이 이 기사 보고 엘텍과 안신 중에서 조금 더 좋은 조건 제시하는 회사와 사업제휴 맺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했었잖아.”

“안신EM. 이차전지 xEV로 사업 확대. 엘텍과 경쟁구도? 뭐야. 내가 이런 걸 봤었나?”

아리송한 표정으로 하선우의 핸드폰을 받아든 이석은 소리 내어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안신EM그룹이 리튬이온 이차전지 핵심소재에 이어 자동차용 전지사업까지 확대를 추진하면서 이차전지 사업을 놓고 엘텍그룹과 대결구도가 만들어질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음…, 9일 금융감독원은 2월 배터리 제조업체인 다윈IB의 지분을 31% 인수하였다. 지금 이거 보여준 게 임권혁 사장을 빼내온 이유가 배터리 제작 회사를 인수한 이유와 같다는 거지?”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네가 전에 얘기했던 유럽 전기차 개발 컨소시엄인가 뭔가 하는 거. 그거 입찰 결과에 따라 첫 번째로 승패가 갈리겠네.”

“아마 그렇겠지.”

“근데 안신으로 임권택만 옮긴 게 아니라며. 소프트웨어를 고대로 뺏어간 거나 다름없는데 엘텍은 신기하게 가만히 있네. 제소 안 한데?”

“글쎄. 안 하는 것 같던데.”

“뭐야.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보지? 아니면 구린 구석이 있는 건가?”

담배를 바닥에 비벼 꺼트린 이석은 마지막 남은 돛대를 입술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눈앞을 흐리는 연기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석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몸을 일으켜며 말했다.

“벌써 네 개비째 줄담배야.”

“나도 아니까 담배나 좀 사다 줘라.”

하선우는 한숨을 쉬며 연이은 야근에 이석의 부르튼 입술과 수분감 없는 꺼끌꺼끌한 피부, 눈가의 다크써클, 그리고 이마에 가로로 패이기 시작한 여트막한 주름살을 차례대로 보았다. 쪼그려 앉음으로 궁상맞음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 모습을 보자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졌다. 담배를 피우는 그 누군가는 연기 속에 세상의 시름을 덜어 실어내는 그윽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석은 세상살이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세월의 역풍을 고스란히 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같은 담배를 피우는데 분위기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하선우는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우리 형 정말 많이 늙었다.”

“뭐?”

난데없이 뺨 맞은 얼굴을 한 이석의 표정을 본 하선우의 얼굴에서 안타까움이 지워졌다. 위기를 감지한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뒤늦게 분노한 이석의 외침에 후회하며 도망친 곳은 공장 뒤편의 터였다.

괜히 그 성질을 긁은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떨어질 불똥이 걱정이 되기도 해서 그는 담배 한 갑이라도 사다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뒷주머니를 뒤적거려 구겨진 5,000원짜리를 찾아낸 하선우는 불현듯이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에워싼 적막이 낯선 탓이었다.

프레스 기계로 알루미늄을 압착하는 소리로 늘 시끄러웠던 일대가 썰렁했다. 주말을 맞아 모처럼 공장의 라인 가동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샘플로 보낸 제품이 승인되고, 생산물량을 배정받아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면 24시간 교대근무 체재로 돌아갈 테지만 오늘만큼은 고요했다.

하선우는 공장의 입구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보았다. ‘믿음을 주는 NnG, 전자배터리 산업 부문 리더기업으로 도약하겠습니다’ 고딕체의 힘 있는 글씨와 회색의 공장건물은 이미 너무도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암흑색 외벽판을 붙인 조립식 패널 건물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프레스 기계를 더 들여놓고, 배수시설을 정리했다. 게다가 공장 옆으로 주변의 논밭을 임대해 사원식당을 짓고 있었다. 50평 규모의 터는 기초배관을 마치고 콘크리트를 수평으로 메워둔 상태였다. 완성만 되면 더 이상 점심시간마다 사무실에 음식 냄새가 범람할 일도 없었다.

간단한 식당건물을 짓는 데 드는 예산 1억 5천, 울산 공장의 매입에 31억, 울산에 사저를 짓는 데만 2억, 직원교육에 들어가는 돈 2억, 그 외에도 오래전에 은행에서 발행했던 어음을 포함해 증발하는 수준으로 돈이 소비되고 있었다.

작년 한 해 매출이 17억, 영업이익이 2억 원대, 순이익은 그보다 더 적었던 NnG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금액이었다. 엘텍으로부터 수주받은 물량을 소화하기만 한다면 2년간의 상환 계획을 통해 대출금을 모두 변제할 수 있을 터였다.

하선우는 일부러 콘크리트를 메워둔 사원식당 터를 빙 둘러 슈퍼로 걸어갔다. 새 집을 짓는 것만큼이나 뿌듯해 괜히 뒷짐을 진 채 걸었다.

모든 게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신년에는 새 사업까지 펼칠 기회를 얻었다.

알루미늄캔을 생산하는 기존사업도 승승장구하고 전기자동차와 선박 등, 대용량 에너지 저장장치 시장에도 진출하게 됐다. 자연스레 부서도 나뉘어 연구팀이 증설됐다. 신입사원과 고임금을 요구하는 고급 기술인력까지 모집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새내기들에게 들어가는 월급까지, 직원들의 임금을 총합하면 그 역시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건 하선우 자신뿐인 듯했다. 자그마한 도마뱀에서 공룡으로 성장해가는 속도가 두렵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그는 최근 들어 잦은 소화불량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자신이 그에 걸맞은 그릇인지 하선우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들 담배를 피우는지도 모르겠다.

하선우는 필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커피와 담배, 쓴 것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처럼 그는 산업체에서 근무하던 시절 제법 오랜 기간 동안 담배를 피웠었다. 하지만 중독되지는 않았는데 코끝의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는 것에만 매달려 차분해지기는커녕 마음이 들썽거릴 뿐이었다. 오랜만에 피운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들숨 날숨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텁텁한 냄새는 고약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슈퍼 앞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벼를 베어낸 논에 까치가 즐비했다. 추수 끝난 황량한 논에서 까치는 볍씨를 먹고 있었다. 겨울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봄을 맞는 들판을 그는 멍하니 응시했다.

강주한은 바로 맞은편 자리에서 하선우를 기다렸다.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초라한 슈퍼 앞에 우뚝 서서. 물집과 상처로 엉망이 된 발뒤꿈치에 일회용 밴드를 붙이는 하선우를 기다리며.

원래 기다림에 익숙합니다. 끌리는 사람에 한해.

강주한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되뇌던 하선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처음부터 오해의 여지를 남기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하선우가 먼저 선을 넘기를 기다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하선우는 그와 배를 맞댄 뒤에도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밤 이후로 몇 주가 흘렀다. 엘텍전자 안에서도 하선우는 그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전화도 문자도 없지만 하선우는 막연히 그와 연락이 닿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언질했듯 다음 약속의 장소는 자신의 자택일 터였다. 그 기약 없는 약속 때문에 하선우는 피곤한 와중에도 걸레로 바닥을 훔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조막만 한 기대감을 불쾌해하면서도.

오랜만의 니코틴에 머리가 술을 마신 것처럼 멍했다. 다시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꽁초를 버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깊게 담배를 빨았다.

흩어지는 연기 속에 담배를 태우던 강주한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토해낸 날숨만큼 가슴이 허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 * *

오래간만이었다. 물품 보관실에서 비닐에 싸인 접이식 침대를 찾아낸 하선우는 한동안 잊고 있던 절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한때는 출퇴근 시간조차 아까워 집에서 자는 시간보다 이 라꾸라꾸에서 잠자는 시간이 더 많던 때가 있었지만, 불규칙한 식사로 잔병치레가 잦아지면서 멀어진 침대였다.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라꾸라꾸를 내려다보던 하선우는 그것을 탕비실로 옮겨놓았다. 낡아빠진 접이식 침대를 보고 있자니 창업지원센터의 귀퉁이를 얻어 회사를 차렸던 창업 당시가 떠올랐다. 기술에 대한 맹신만으로 업계에 뛰어들었던 그는 연구개발의 즐거움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래서 제조업의 그늘진 면을 보지 못했고, 상황의 명암도 의식하지 않던 멍청이였다.

비닐을 벗기고 땀 냄새가 밴 이불 한 장을 깐 그는 털썩 그 위에 드러누웠다. 요철이 튀어나온 불편한 침대에 눕자 추위 속에서 파카 하나 입고 웅크려 자던, 구질구질한 낭만이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밖은 어둑했고 실내를 밝힌 빛은 전기난로의 온기가 깃든 노란 불빛과 스탠드의 불이 전부였다. 신제품이 본격 양산된 이후로 올해 들어 처음으로 토요일을 주말답게 보내게 됐지만, 만나자는 사람도 잡힌 스케줄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선우는 소박한 행복을 느꼈다. 어린아이가 동화책을 펼치듯 연구자료를 펼쳤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이나, 주관의 영역인 인문학에는 관심이 없는 그는 어릴 적부터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거나 과학잡지를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10년도 더 된 자료들을 접이식 침대 옆에 잔뜩 쌓아놓고 그는 아늑한 도피처로 빠져들었다.

전기난로의 열기가 뜨거워 몸을 요리조리 굴리며 하선우는 비교적 최근에 프린트한 파일을 집었다. 남색 벨벳으로 감싼 파일 안에 담긴 자료를 본 하선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응용화학 국제판 잡지에 게재된 논문에는 영문으로 전극소재의 원천기술이 자세히 실려 있었다. 작년 여름 하선우는 국내와 해외에 특허를 출원한 뒤에 논문을 발표했었다. 이차전지 소재 분야의 파급효과를 인정받아 독일의 화학잡지에 하선우의 논문이 등재된 것이었다.

그것은 짧지 않은 인생 중에서 하선우 스스로 가장 자부심을 갖는 연구성과였다. 뿐만이 아니라 원천기술을 개발한 덕분에 엘텍전자로부터 대대적인 지원도 받게 되고, 회사의 운명도 바꿀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잘 풀릴 거라고 생각이나 했던가. 전극소재를 개발한 것은 여러모로 하선우 인생의 주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영문판 잡지의 낱장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핥듯이 살펴보던 하선우는 뒷주머니를 더듬거렸다. 지난 1월, 총동문회 이후로 연락이 없던 동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성동훈. 과거 총학생회 회장이자 같은 졸업 기수의 동창회를 주관하는 연락망이었다.

“여보세…….”

-어디냐?

“어? 일산.”

-나와라? 술이나 마시자.

전화 건너편이 시끌벅적했다. 같은 기수끼리 오랜만에 모여 술자리라도 가진 모양이었다. 지층처럼 두껍게 쌓여있는 연구자료를 바라보던 하선우는 술과 휴식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일부러 지친 목소리를 냈다.

“바빠서 어려운데. 나 아직 회사라.”

-주말인데? 퇴근 안 해?

“응. 오늘 집에도 못 들어갈 것 같다. 안 그래도 계속 야근이라 죽겠다.”

-에효, 잘나가는 친구한테 밥이나 얻어먹을까 했더니.

야, 하선우 못 나온단다. 통화감이 멀어지고 건너편에서 단체로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다음 주는 되냐? 빼지 말고 밥 좀 사라.

“듣다 보니 웃기네. 너희들도 벌 만큼 버는데 내가 왜 밥을 사냐?”

-이것 봐라? 너희 회사 엘텍에 투자받았다며. 동기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데 이 자식 이거 안되겠네.

“야, 말은 바로 해라. 투자받은 게 아니라 대출받은 거거든? 다 갚아야 하는 돈이라고.”

-그게 그거지. 너 기억 안 나? 너 창업동아리 회장할 때 시청에서 받았던 창업지원금 500만 원 어쨌냐. 그거 홀랑 회식비로 써먹었던 거 기억 안 나? 부패한 회장님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등 따습고 배불렀던지. 네 덕분에 그 시절 행복했었다.

“너 작가로 입봉했냐? 왜 없는 말을 지어내. 그리고 그거랑 이거랑 같아?”

-야야, 쓰면 얼마나 쓴다고 좀스럽게. 어차피 네 회산데 감사라도 할 거야? 네가 사장인데?

성동훈의 성격이라면 밥을 사겠다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물고 늘어질 터였다. 이대로 계속 쪼이느니 월급을 쓰고 말자 싶어 못마땅한 얼굴로 하선우는 대답했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새끼들 그만 야유하라고 그래. 다 들린다고.”

-결국 살 거면서 왜 튕기고 그래. 진작 그랬으면 우리가 고맙다고 하선우 보살느님 찬양했지.

“됐거든.”

끌끌거리며 웃는 동훈에게 하선우는 말했다.

“시간 봐서 이번 달 안에 내가 먼저 연락할게. 토요일은 어렵고 일요일은 가능할 것 같다.”

성가신 표정을 지으며 하선우는 쩝,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바쁘니까 끊고 다음에 통화하자.”

-끊긴 뭘 끊어. 할 말은 따로 있는데.

장난스런 목소리를 지우고 별안간 분위기를 바꾼 동훈이 잠깐만, 말미를 두고 침묵했다. 철 지난 유행가와 일행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서서히 음소거되었다. 장소를 옮긴 듯했다.

-하선우.

“응.”

-일전에 총동문회에서 네가 계속 궁금해해서 따로 알아본 건데.

“응.”

-정확한 건 아니고, 나도 건너 들은 거다. 울산에 사는 선배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했고.

“뭔데 그렇게 답답하게 뜸을 들여.”

-도일 형 소식이다.

하선우의 미간에 패였던 주름이 서서히 풀어졌다. 반대로 성기게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행방불명이긴 한데 울산에서 지내다가 빚쟁이들 피해서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더라. 형수님하고는 연락을 하는 듯하고. 간간이 생활비 보내는 걸로 봐서는 막노동이라도 하는 모양이야.

하선우는 허리를 세워 앉았다. 긴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얼마 안 된 모양이야. 작년 가을쯤? 그 전까지는 계속 법정 공방이니 뭐니 정신이 없었다고 하고.

“그럼 연락처는 아예 모르는 건가?”

-형수님이야 연락처는 알겠지만 직접적으로 물을 만큼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고, 솔직히 개인사정까지 속속히 알려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우리가 도울 수도 없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하선우는 들고 있는 휴대전화를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그를 잊고 지낸 지 오래되었지만, 문도일이란 이름은 여전히 심장 근처에 작은 아픔을 일으켰다. 있는지도 몰랐던 몸 안의 근육기관에 작은 가시가 박힌 듯 자근거렸다.

잘 살았으면 했다.

그의 삶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 그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는 귀동냥을 얻어 들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바람을 갖던 기억조차 너무 오래되어 청승맞은 추억이 되었지만 문도일의 행복을 막연하게나마 빌었다.

어두워진 휴대전화 화면을 피곤한 눈길로 바라보던 하선우에게서 긴 한숨이 흩어져 나왔다.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사람을 고용한다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문도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선우는 문도일에게 손길을 내밀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모르는 척 외면해온 시간을 연장해도 나무랄 사람 하나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몰락한 문도일의 삶을 방관해도 되는지 고민스러웠다. 애정은 빛바래졌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연민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석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고민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발신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원버튼을 눌렀다. 고민을 나누는 데 걸림돌이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문도일을 챙겨야 하는지, 그 명분을 놓고 할 말이 없었다.

한때, 하선우에게 그는 속앓이의 또 다른 이름이자 불가항력의 열병이었다. 요란하게 내색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어 스무 살의 하선우는 쿨한 척 냉소도 해보고, 부정도 해봤었다. 뒤늦게 인정했지만 하선우에게 문도일은 첫사랑이었다. 젊은 시절 앓았던 그 짝사랑을 위해 변명할 말이 하선우는 없었다. 무엇보다 한때의 짝사랑이었던 문도일을 위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 만큼 하선우는 어리지 않았다.

열정을 긁어모아본들 그것은 채 한 줌도 되지 않을 것이다. 체념이 심장을 차갑게 했다. 그는 결국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 * *

가로등조차 흔치 않은 어두운 이차선의 도로 위에는 로드킬당한 개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 때문에 피하지 못하고 죽은 개를 넘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 개의 피는 응고되지 않고 따듯하게 바닥에 고여 있었다. 특별히 눈여겨볼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쳤지만 터져나간 내장과 넓게 퍼진 핏자국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어둠 속에서 점멸했다. 그는 눈꺼풀 안을 할퀴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피곤한 눈가를 비볐다. 그러자 죽은 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러나 숨을 들이쉴 때마다 들숨에 개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했다.

남자의 아내는 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개들과 함께 살아왔다. 그녀는 직접 수제 간식을 만들고, 애견미용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유기견 보호소로 봉사활동을 다녔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자는 노인과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연약한 존재들에게 가없는 인내와 관심을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여자는 남자로서는 불가해하게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녀에게도 인내할 수 없었던 유일한 대상이 있었다. 단 한 번도 여자에게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모든 것을 거의 완벽하게 제공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폭력 없이 그녀를 침식시켰고 결국에는 서서히 마비된 불구로 만들어갔다.

로드킬당한 개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내의 환영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환영을 지우려 라디오를 틀었다. 한미일 세계 정상회담과 개성공단의 임금협상 뉴스가 차례대로 흘러나온 뒤 야당의 원내대표 결선에 대한 방송이 보도되었다.

서동현 국회의원이 국권당 원내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5선 서동현 국회의원이 국권당 원내대표 경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서 의원은 국민의 질책을 통렬한 마음으로 반성했고 국권당을 다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원내대표에 출마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선명한 정책과 주도면밀한 전략, 정국을 주도하는 협상력으로 당의 변화를…….

공교롭게도 남자는 서 의원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깊숙한 주름 곳곳마다 교활함이 밴 눈가와 목석 같은 입술을 가진, 감정이 얼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남자였다. 그와는 석 달 만에 만남을 가졌다. 단순한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지만 그 이면에는 원내대표 경선 출마를 위한 자금지원 약속이라는 속내가 숨어 있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서 의원은 남자의 장인어른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그저 죽은 아내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들의 관계는 여느 정치인과 기업가가 그렇듯, 단순히 득과 실의 논리에 지배되는 조력관계가 되어 있었다. 서 의원은 남자를 무시하고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필요로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딸의 그림자를 찾듯 아쉬워했다.

그는 도로 표지판을 확인했다. 어느새 목적지의 근방이었다.

차가 멈춘 곳은 황폐한 논두렁이 드넓게 펼쳐진 농지 일대였다. 그 위로 삭막하게 우뚝 솟은 암흑색 건물 앞에 차를 대고 강주한은 밖으로 나왔다. 옷깃 안으로 스며드는 써늘한 추위에 그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찬찬하게 동여맸다. 휴대전화의 버튼을 누른 그는 통화목록을 살펴보았다. 수신인의 이름 옆에는 부재중 통화가 여덟 번 찍혀 있었다. 하선우. 석 자를 지켜보던 그는 이름 옆의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긴 통화 연결음이 끝날 때까지 전화기 건너편의 사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간 사이에 진 주름이 깊어졌다.

가슴팍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낸 그는 얇은 담배필터를 입에 물었다. 여전히 뜨끈한 열이 남은 보닛에 기대 담배를 태우며 그는 둘 곳 없는 시선을 어두운 하늘로 던졌다. 구름 뒤로 몸을 숨긴 별빛에서 빛이 번져 나왔다. 뭉개진 빛무리를 향한 그의 찌푸려진 얼굴이 담배 한 대를 태우는 동안 얼마간 누그러졌다.

그는 목동의 오피스텔촌에 다녀온 길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하선우의 행방을 생각하던 그는 고민 없이 목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오피스텔의 차가운 정적이었다. 강주한은 결국 이곳 일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에도 없다면.

그는 기분이 바닥에 닿을 듯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연기를 뱉어내며 그는 거칠게 담뱃재를 털어낸 꽁초를 하수구 어디쯤엔가 던져 버렸다.

화단을 지날 즈음 경비실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든 경비원을 지나쳐 로비 앞에 섰다. 문은 열려 있었다. 썰렁했던 로비는 이전에 비해 조금 더 다채로워져 있었다. 그는 벽면에 붙은 NnG의 연혁표와 수상내역 옆에 고정된 사진을 발견했다. 벽의 가장 가운데 위치한 액자에는 강주한과 하선우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때 하선우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 사진이었다. 이제는 NnG의 자랑이 된 사진을 훑어본 그는 불 꺼진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폭이 좁은 복도의 좌우로 작은 사무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의 랜턴을 켜고 오른편의 사무실 문부터 열어보았다. 대부분이 잠겨 있었다. 탕비실 앞에 선 강주한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고리가 슬며시 돌아가고 그 틈으로 불면 꺼질 듯 가물가물한 미광이 새어나왔다.

꽃샘추위로 싸늘했던 여느 장소와 달리 방 안에는 훈기가 돌았다. 강주한은 잠이 든 하선우를 발견했다. 전기난로 앞, 조잡한 소파침대에 웅크려 잠든 하선우를 말없이 쳐다보던 강주한은 풀썩 웃음을 흘렸다. 그의 옆에는 전문자료가 높이 쌓여 있었다. 복사한 논문을 보다 잠들었는지 하선우는 종이를 쥐고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를 주시한 채로 전화를 걸었다. 어디선가 빛이 반짝였다. 침대 아래로 떨어진 핸드폰에서 반짝이는 빛이었다.

전화를 끊고 그는 한동안 하선우를 쳐다보기만 했다. 온기를 향해 몸을 웅크린 남자는 평온 아니, 행복해 보였다. 얼굴이 재밌게 생겼다는 임경호의 말이 틀리지만은 않았다. 허리를 숙여 그의 근처로 고개를 낮춘 강주한은 음영 진 하선우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하선우는 잘생겼지만 동시에 개성이 강한 얼굴이었다. 인중과 턱이 짧아 동안인 한편, 콧대가 평균보다 조금 더 길고 높았다. 쌍꺼풀 없는 위로 솟은 큰 눈은 섬세하고 정직한 인상을 남겼고 대부분 일자로 다물려 있는, 미소가 어색한 입술에는 요령이라고는 모르는 고집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강주한은 흔하지 않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선우가 강주한을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의 일이었다. 강주한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수없이 많은 사람 중에서도 하선우를 특별히 기억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강주한의 짧지 않은 인생 중 어느 순간을 소설 속의 삽화처럼 채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소년의 뺨을 갈겼다. 그는 두꺼운 방수장갑에 둘러싸인 손가락으로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뺨을 가만가만 매만져보았다. 피부가 마취된 것마냥 감각이 둔하다. 마치 죽은 고깃덩어리를 툭툭 건드리는 기분이다. 조금만 더 춥다면 살이 잘려나가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날씨가 좋았다. 아니, 조금 더 폭력적인 추위가 세상을 쓸어가버렸으면 했다.

폭설을 퍼붓고 난 후의 하늘과 그 아래의 광막한 설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쨍하게 깨끗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번쩍번쩍 빛나는 광원으로 변해 있었다. 맨눈으로 오래도록 설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알이 타버릴 것 같은 통각이 몰려오고 흰 설원이 사라졌으며 오히려 강렬한 암흑이 찾아왔다. 그는 설원을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다시 쳐다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이 멀 것 같은 기분이다.

흰 설원에 반사된 태양빛이 시신경을 사정없이 쑤시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자기학대가 문득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는 설원을 고글 없이 바라보는 것을 관두었다. 이마에 얹었던 고글을 고쳐 쓰고도 한참이나 눈앞에서 빛무리가 춤을 춰댔다.

IMF 여파 탓에 스키장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특히나 최정상 코스로 가는 곤돌라 승강장은 텅텅 비다시피 했다. 그는 슬로프를 올라가려 승강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키의 장점은 혼자서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스키를 탄다는 건 그로서는 거의 겪을 수 없는 추락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비탈이 지고 속도가 빠를수록 추락은 아찔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에게 안전한 추락사처럼 느껴졌다. 가속을 붙여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면 뜨겁게 부풀었던 화가 한 꺼풀씩 가시는 것이다. 추락하기 위해 정상을 향한다는 건 참 멍청한 짓이다. 그러나 그는 대체할 만한 쾌락을 찾지 못했다. 그는 질척거리며 들러붙는 소녀들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의리를 가장해 자신에게서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소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현주의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취미를 장려했던 부모는 강주한으로 하여금 그림을 멀리하게 했다. 해체적이고, 고깃덩어리를 그려놓은 듯한 해부학적인 화풍에 학을 뗀 것이다. 소년은 고상한 체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나마 말이 통하던 몇 살 터울의 사촌 형은 해외로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수능을 실패한 그는 서울대를 입학할 실력이 되지 않자 더 큰 배움의 핑계를 대고 해외로 도피하듯 유학을 떠났다.

소년은 외사촌 형이 그가 모의고사 시험을 볼 때마다 성적을 개인 강사를 통해 훔쳐 듣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버려두었다. 소년을 가르치고 훈계하고 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임경호의 몫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의 외사촌은 사사건건 소년을 의식하고 견제했으며 자신보다 더 사리에 밝은 인간이 될까 비교하며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기업 규모는 엘텍이 훨씬 더 우량하긴 하였으나, 국내외에서 비슷한 종목으로 시장을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각자 기업의 대를 이을 예정이었으니 임경호는 일찍이 그를 경쟁자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정했던 외사촌이 등을 돌렸을 때 소년은 씁쓸하지도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인간은 이윤을 좇아 움직이는 본능이 있고 오히려 임경호는 그 본능을 늦게 깨우친 편이었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자본주의라는 것은 암의 진행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세포의 재생산과 확대가 맹목적으로 진행되는 암처럼 자본 역시 끝을 모르는 허기를 느낀다는 것이다.(프레시안, <삼성 왕국의 게릴라들>, 프레시안북, 275p, 2008)

우습게도 임경호는 입속으로는 꾸역꾸역 돈을 처넣으면서 그런 태도에는 수치심을 느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는 시인처럼 살을 찌우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만 막상 욕심은 끝이 없었다. 소년은 그의 이중적인 태도가 가소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탐욕을 운명으로 타고난 사람들 간의 어쩔 수 없는 유대감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같은 유전자를 타고났지만 사회적으로는 다른 유전자를 가진 재벌이었다.

텅 빈 승강장 대기줄을 지나친 소년은 안전요원의 안내에 따라 곤돌라 안으로 들어섰다. 곤돌라 리프트는 8인승이었지만 이용객이 드물어 인원수를 모두 채우지 않고 출발했다. 승객은 소년과 한 가족, 총 여섯 명이 전부였다.

최정상 코스로 향하는 곤돌라 안에서 소년은 네 형제와 그들의 아버지를 아주 가끔 마주치곤 했다. 첫째부터 셋째는 모두가 뿌리를 한데 둔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자는 훤하게 생긴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민숭민숭한 작은 눈과 두툼한 코, 두툼한 입술과 튀어나온 광대로 이뤄진 얼굴은 딱할 만큼 못생겼고 세련된 느낌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강주한의 눈길을 끈 것은 끄트머리에 돌출된 못처럼 붙어 있는 준수한 외모의 소년이었다.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소년은 꼬박꼬박 남자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붙였다.

‘선범이 네 친구들은 어떻게 한다던?’

아버지는 아들과 대학진학 관련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둘째아들은 얼마 전 재수를 끝내고, 수능을 다시 치렀으며, 대학 선택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최근 정부는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발생할 국가부도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IMF 구제금융을 수용했다.

경제위기의 여파는 대학진학의 풍토까지 바꾸어 전문직종과 관련한 학과의 인기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남자의 아들은 수능을 만족스럽게 보았는지 의대 진학에 자신감을 보였고 은연중에 맞은편에 앉은 강주한을 의식하며 제 똑똑함을 자랑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진현이는 물리학과 입학했던 거 후회하던데요? 반수 하고 다시 의대 들어갈까 고민하더라고요. 재수할 때 쓰던 문제집 다 자기 달래요.’

둘째아들의 말에 나이 지긋한 아버지는 직장인보다는 직업인이 뜨는 추세긴 하나 보다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히려 열을 올리는 것은 첫째였다. 일반 대학에 진학한 자신의 친구들은 정리해고의 칼바람 속에서 취업의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가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며, 구조조정에 대한 열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로 유추해보건대 그들의 집안에는 의사, 그것도 외과와 관련된 의료계 종사자들이 많았고 정치는 보수적 성향이거나 아예 관심이 없었으며 정직하고 분명한 노동, 그리고 그들의 지적인 두뇌만을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지능이 허락하는 한 의사가 되어야 했으며, 까다롭고 오만했지만 인격적이었고 탐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적당히 세속적이어서 안정적인 수입, 사람들의 인정, 그리고 어느 정도의 사명감 같은 것들이 그들의 근원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라서 얼마나 다행이냐. 그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었다.

강주한은 끄트머리에 혹처럼 붙어 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도, 둘째도, 셋째도 모두 첫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지만 소년은 멍하니 곤돌라 밖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 끝에는 활대에 걸린 현처럼 검은 레일이 공중에서 휘청휘청거리고 있었다. 조금도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야, 하선우, 너 내 말 듣냐?’

소년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초점이 첫째 형에게로 돌아갔다.

‘뭐하냐?’ ‘생각.’ ‘무슨 생각?’ 막내는 ‘어….’ 자신 없는 태도로 뜸을 들였다. 첫째가 허락하는 눈빛을 보내자 술술 털어놓았다.

‘영도네 아버지가.’ ‘영도?’ ‘학원 친구.’ ‘어. 그래서?’ 소년은 말했다.

‘영도네 아버지가 건축과 구조역학 교수님이거든. 이번에 집에 놀러 갔는데 케이블 구조역학 실험장치가 있더라고. 우리가 타고 있는 케이블이랑 모양은 다른데 원리는 비슷해. 구조물이 하중에 대해서… 어…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버틸 수 있는지. 뭐 그런 걸 실험하는 거였는데 이게 재료에 따라서 방적식이 달라져서 공식이 엄청 복잡하더라고. 나도 구조역학에 대해서는 기본개념을 처음 배우는 거라 거의 이해는 안 갔는데…….’ 소년은 끝도 없이 떠들었고 좁은 곤돌라 안에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케이블 레일이 끼익끼익거리는 불길한 소음이 배경처럼 울려 퍼졌다.

‘하선우.’ ‘어?’ ‘형이 진짜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딴생각하지.’ 네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소년을 향하자 그는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었다. ‘너.’ 첫째는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영도라는 애가 과학고 간다고 하는 애지.’ 소년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의대 진학하려면 일반고 진학하는 게 낫다고 했냐 안 했냐.’ ‘했어.’ ‘과학고 가서 의대 갈 자신 있어?’ ‘있어?’ ‘형이 말하는데 형 얘긴 집중해서 들어야지.’ ‘하선우.’ ‘선우야.’ 형제들끼리 번갈아 소년을 다그쳤다.

형제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빈약하고 짧은 생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의대에 진학하는 것이 인생 선택의 전부인 것마냥 호들갑을 떨며 젠체했다. 하다못해 고등학생 티를 벗어나지 못한 둘째까지도 그의 막내를 가르치려 했다. 물론 강주한은 그들의 개똥철학을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주관은 그들 나름대로 진지하게 쌓아올린 인생관을 바탕으로 했으며 강주한은 그것에 기웃댈 만큼 형제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는 조금 전부터 화가 치밀고 있었다.

소년은 유인원과 함께 울타리 안에 갇혀 공격을 받는, 수세에 몰린 약자 같았으며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반복적인 병치는 어딘가 혐오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안경을 쓴 네 쌍의 눈동자와 두꺼운 입술, 바글바글한 치아가 소년을 향하는 모습은 비위를 자극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이상의 시를 읽는 기분으로 강주한은 형제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심장의 펌프질이 빨라지고 숨이 차오르는 것을 그는 조금 전부터 견디는 중이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소음에서 벗어나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형제의 입을 찢어버리거나, 아니면 더 큰 악을 써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물론 정상이 아닌 것은 자신 쪽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창밖을 노려보았다. 그때 형제 중 첫째가 그런 말을 했다.

‘원래 너의 쓸모가 너의 행복보다도 중요한 법인 거야.’

그는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고 덧붙여 말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소년이 의사가 되는 것만이 가장 큰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 같았다. 강주한은 창밖을 노려보던 눈길을 돌려 청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첫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첫째는 분통이 터질 만큼 거드름을 피워댔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정작 의미에 대해선 무지하면서 그저 멋들어진 표현을 어디선가 베껴와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강주한에게 잊을 수 없는 한마디가 되었다. 평소라면 판에 박힌 시시한 격언쯤으로 여겼겠지만 남자의 말은 그를 환기하게 만들었다. 강주한은 그 나이까지 사랑이나 행복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거세해온 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대신 그 안을 채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오늘 그는 몇 십 번째인지 모를 모의고사를 봤다. 그는 겨우 고1이었지만 정해진 학과 과정 이외의 수업을 개인적으로 수강했기에 고등학교 교과 과정은 이미 건너뛴 지 오래였다. 그는 당연히 국내 최고의 대학에 들어가야 했고 큰 변고가 없다면 그 일을 무리 없이 해낼 터였다. 그러나 그는 가끔 수능을 망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시험지에 수능 감독의 크로키를 우스꽝스럽게 그린다든가, 역겨운 곤충의 눈을 그린다든가, OMR카드를 백지로 낸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시험지를 찢어버린다든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번쯤은 아버지의 얼굴이 실망과 분노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고 싶었다. 물론 그는 수능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가 두려워서는 아니었고 용기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이 그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섯 살부터 홀로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것도, 초등학교를 일본에서 다니며 따돌림을 견뎠던 것도,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기를 포기했던 것도 모두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회의가 고개를 들고 일어날 때면 차분히 멀리서 그것을 관조하며 고통을 다스렸다. 그러나 그의 안에서는 해소되지 않는 울혈이 덩치를 키워나갔다.

고통은 길들일 수 있었지만 분노는 다스릴 수 없었다. 소년은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하선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잠결에 뒤척이며 하선우는 건조한 얼굴에 핀 버짐을 긁적였다. 오랫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몰골의 얼굴에는 파르란 수염이 다문다문 나 있었다. 너의 쓸모는 너의 행복보다도 중요하다. 강주한은 격언이라 생각했던 말이 존 어빙의 소설 속에 나오는 한 구절임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연히 그의 아내가 메모해두었던 수첩 속의 글귀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나름의 결의를 다져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온 남자는 초췌했지만 그럼에도 행복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소년기의 잊고 있던, 그 다글거리던 분노가 떠올랐다. 마른버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강주한은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하선우의 눈시울이 너붓거렸다. 흠칫, 몸이 떨렸다. 펄쩍 허리를 세운 하선우는 눈을 부릅떴다.

“……어?”

흰자위가 보일 만큼 크게 뜨인 눈이 빠르게 껌뻑였다.

“어어…….”

“…….”

“어, 어, 어쩐 일로 여길…….”

뺨을 향해 손마디를 뻗으려던 강주한은 둘 데 없어진 손을 천천히 거두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

“예?”

잠기운을 거두지 못한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충혈된 눈이 또다시 빠르게 껌뻑거렸다. 눈언저리에 미세한 경련이 일고, 입가가 일그러졌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핵을 꿰뚫듯 진심을 파헤치는 표정이었다. 강주한은 시선을 느긋하게 내렸다.

“왜 내 호감이 무서운 것 같은 얼굴이지. 내 기분 탓입니까.”

손목을 매만져 시간을 확인하며 강주한은 혼잣말하듯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전화해도 안 받아서… 사실 집에도 찾아갔는데 없더군요. 회사에는 있을 것 같아 여기로 왔습니다.”

“아… 예. …그, 그러셨군요.”

하선우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급하게 부스스한 앞머리를 넘기고 입가를 닦아내며 매무새를 정리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두운 사무실의 불을 켜고도 계속해서 차림새를 정돈했다. 그는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몰라 버둥거리다 주먹으로 입술을 가려 헛기침했다.

“전화가, 전화가 어디 있지.”

“침대 밑에 있더군요.”

“아아, 그…랬나.”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비비던 그는 뒤늦게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됐습니다.”

“여긴 어쩐 일로…… 아니, 아닙니다.”

좀 전에 그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를 깊게 생각할 여력이 없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렸다. 방황하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말했다.

“저녁은 먹었습니까.”

“아뇨, 아직.”

“초밥 좋아합니까.”

헤매던 하선우의 시선이 다시 강주한에게로 돌아왔다. 강주한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예에. …특별히 가리지 않습니다.”

“잘됐군요.”

내리깐 눈으로 지저분한 탕비실 안을 둘러보던 강주한은 이윽고 하선우와 눈을 맞추었다.

“하선우 씨 자택에서 저녁 먹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일 남았습니까?”

“아뇨. 그냥 시간이 모처럼 남아서… 자료 좀 본다고 잠깐 있던 겁니다.”

“그럼 선우 씨 집으로 가죠.”

* * *

얼결에 이전의 약속을 이행하게 된 하선우는 여전히 경황이 없었다. 각자의 차를 끌고 목동의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서도 하선우는 귀신의 장난에 홀린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보고 싶어서.

제법 진심인 것 같은 말투였지만, 하선우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강주한이 진심을 말했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시에 던진 공격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 말이 불쾌하게 느껴졌던가? 하선우는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의 결을 더듬었지만,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하선우 자신을 불쾌하게 느꼈던 것 같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하선우는 자신의 옆에 말없이 서 있는 남자를 흘끗거렸다. 그는 조금 권태로워 보였다.

14. 승강기의 버튼을 누르고 하선우는 스티커가 잔뜩 붙어 지저분한 모퉁이에 섰다. 땀이 밴 손으로 느릿하게 팔을 쓰다듬으며 하선우는 초조하게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학원에 가는 중고등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교복 입은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좁은 승강기 안이 왕왕 울렸다. 그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 커다란 강주한은 눈에 띄었지만, 다행히도 그를 알아보는 학생은 없었다.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두 사람만이 엘리베이터에 휑하게 남겨졌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뒤따라오는 강주한을 확인하며 하선우는 조금 빠르게 걸음을 뗐다.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초조한 탓이었다. 1424호. 사흘 만에 돌아오게 된 집문 앞에는 중국집과 치킨집, 피자가게 등 전단지가 지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강주한으로서는 이례적일 풍경이었다.

“오피스텔이라…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집을 오래 비우면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더라고요.”

서민 체험쯤 되려나. 웃음을 어색하게 지으며 하선우는 빠르게 전단지를 떼어내고 문을 열었다.

“집이 좀 추워요. 못 들어온 지 오래라.”

오랫동안 난방을 하지 않아 훈기가 거의 없어 하선우는 서둘러 온풍기를 틀었다.

어머니가 가져다놓은 여성용 슬리퍼에 발을 구겨 넣은 하선우는 허리를 숙여 강주한의 앞에 자신이 신던 슬리퍼를 내려놓았다. 반들반들한 그의 구두를 쳐다보던 하선우는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다리 다 나으셨나 봐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날 이후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강주한에게 하선우는 예의상 물었다.

“집이 좀 좁죠?”

평소에는 단 한 번도 혼자 살기에 좁다고 생각한 적 없는 집이었지만, 하선우는 예의를 차리듯 말했다. 강주한은 긍정도 부정도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여맸던 목도리를 풀어내며 강주한은 손을 내밀었다.

“하선우 씨 일단 이거 받죠.”

그가 건넨 봉투 안에는 종이 도시락과 포장도 풀지 않은 술병이 든 박스, 그리고 마른안주가 들어 있었다. 수분기 없는 꺼끌한 피부를 매만지며 하선우는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커피테이블에 포장된 도시락을 꺼냈다. 그가 가져온 초밥의 포장지에는 엘튼 호텔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윤기 나는 도톰한 생선살이 올려진 초밥은 입안에서 싸하게 녹듯이 사라졌다. 이전보다 긴장의 강도가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편치 않은 강주한의 앞에서도 초밥은 꿀떡꿀떡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맛있게 먹었던 탓인지 강주한은 몇 점 집지도 않은 자신의 도시락을 하선우에게 내밀었다. 방 안을 둘러보며 강주한은 잔에 스카치를 따라 입가심하듯 술을 몇 번 머금었다.

“배고팠나 보군요.”

“예. 아침에 컵라면 먹었던 게 다라서.”

민망한 얼굴로 하선우는 입안에서 돌아다니는 밥 알갱이를 꾹꾹 눌러 씹었다.

“싱싱해서 그런지 맛있네요. 근데 이거… 제가 다 먹어도 괜찮나요? 강 전무님은 거의 안 드셔서 민망하네요.”

“다른 걸로 허기 채울 테니 전 괜찮습니다.”

밥알을 씹던 하선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하선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되다 만 절반의 웃음이 걸려 있었다. 입안에서 겉도는 알갱이를 다시 느리게 씹으며 그는 강주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방에 가구가 거의 없군요.”

“오피스텔이 복층 구조라서 대부분 저 위에 올려뒀습니다. 잠도, 작업도 복층에서 해결해서요.”

하선우는 계단으로 이어진 천장이 낮은 복층을 가리켰다. 복층에서 생활의 대부분을 해결하는 탓에 텅 빈 1층과 달리 복층은 공간의 낭비 없이 복잡했다.

혼자만이 잠들 수 있는 침대에 혼자만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오늘 밤 그와 하선우가 침대에서 뒹군다면 필시 천장이 낮은 곳에 놓인 침대 때문에 불편할 터였다. 그 역시 생각이 같은 데 닿았는지 조금 오래도록 침대를 쳐다보았다.

“선우 씨는.”

쉼표를 찍듯 말에 사이를 둔 그는 하선우의 빈 잔에도 술을 채웠다. 넘실거리기 직전까지 채운 술잔을 하선우의 앞으로 내밀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내일도 출근 예정입니까?”

“아니요. 모처럼 바쁜 일도 없으니 집에서 쉬려고요.”

“그럼 여기서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하선우는 술을 크게 한 모금 머금었다. 비좁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던 탓에 하선우의 등에 그의 가슴팍이 가만히 닿아 있었다. 계속해서 이런 관계를 맺어도 되는 것인지 회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존재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뭐… 주무시고 가고 싶으면요.”

이번에는 내가 한 유혹 아니다 뭐, 글씨를 매직으로 써놓은 것 같은 얼굴로 하선우는 강주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심함을 요령껏 감추지도 못하는 그 표정에 강주한은 피식 웃으며 조금 더 가까이 하선우에게 몸을 밀착했다.

어깨에 닿는 단단한 가슴의 감촉에 하선우는 감각이 곤두섰다. 감지 못한 머리와 푸석한 얼굴, 건조한 피부상태 때문에 못생겨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신경 쓰였다. 까칠하게 자란 수염을 만지작거리다 하선우는 독한 스카치를 반 잔 넘게 비워냈다. 맨정신으로는 강주한의 지긋한 시선을 받기가 민망스러웠다.

“같이 씻을까요.”

강주한의 은근해진 목소리에 하선우는 딴청하듯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아뇨. 오피스텔이라 욕실이 정말로 많이 좁습니다. 전무님 먼저 씻으세요.”

전화기 부스만 한 크기의 좁은 욕실로 그가 들어간 뒤에 하선우는 잔에 남아있는 술을 모조리 들이켰다.

같은 남자였기에 하선우는 직감적으로 강주한이 무엇을 어디까지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속이 바짝 타고 몸이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오늘 일을 치를 것 같았다. 무릎 사이에 이마를 기댄 채로 하선우는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하선우 역시 고조되긴 하지만 차마 거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강주한이라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이름의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밑에서 삽입을 당하며 끙끙거리는 자신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머릿속에 가득한 난잡한 이미지를 털어내려 하선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겨우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취기가 도는지 머리가 무거웠다. 하선우는 그제야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스코틀랜드산 스카치 블루 30년산이었다. 알코올 도수가 40이나 되는 걸 유리컵에 따라 마셨으니 급하게 취하는 게 당연했다. 몸이 금세 더워지고 심장박동 수가 빠르게 올랐다. 일부러 찬물을 잔에 가득 따라 마시고 하선우는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 밖으로 나온 강주한은 가운을 여민 채였다. 취기로 얼근하게 붉어진 얼굴로 하선우는 강주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역시도 더운 샤워를 했는지 광대뼈 언저리에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미디엄 사이즈인 가운은 그에게 많이 작았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 가운이 살짝 들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음낭이 언뜻 드러났다.

혀끝에 타액이 고여 천천히 침을 삼키며 강주한에게서 시선을 돌린 하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지 않으려 발끝에 힘을 주고 욕실로 들어간 그는 취기로 감각이 둔해진 얼굴을 아프도록 꼬집었다.

“미치겠네….”

너무 대놓고 쳐다본 것이 부끄러워 푸흐, 웃었다.

그냥 한번 확 할까 싶다가도, 뒤따를지 모를 후회가 발목을 잡았다. 무엇보다 하선우는 몸에 무리를 주면서까지 섹스를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강주한의 페니스 크기를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질겅이던 하선우는 옷을 빠르게 벗어버리고 물을 틀었다.

거품 낸 타월로 구석구석 몸을 닦아내고 면도까지 마친 하선우는 고민에 빠졌다. 수건을 넣어놓는 수납장 가장 아래, 검은 비닐 속에 숨겨놓았던 관장도구를 세면대에 올려두었다. 알코올에 함락된 정신은 무엇이든 지나치게 낙관하고, 때론 지나치게 비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가급적 술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헌데 지금은 이미 신경이 취기에 무뎌져 모든 상황이 뜬구름처럼 느껴졌다.

“이러다 진짜… 일치겠네.”

길고 가느다란 주황색 튜브를 만지작거리며 더운 물을 채웠다 빼길 반복하던 하선우는 튜브의 동그란 주머니를 터트리듯 꽉 짰다.

샤워를 마친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강주한은 창가에 서 있었다.

“야경이 멋진데요.”

“예. 여기서 방송국과 하천, 오목교 일대까지 다 보입니다.”

“저기가 하선우 씨 운동하는 곳인가 보군요.”

하천의 좌우로 조성된 운동로를 눈여겨보며 그는 물었다.

“예.”

가까이 다가온 하선우에게 뒤돌아선 그가 술잔을 건넸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 눈을 한 그가 샤워를 마친 하선우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다, 젖은 앞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음에 드는데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아진 목소리가 갈라졌다.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귓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숨소리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 것 같은 눈이네.”

따듯한 물을 채운 주황색의 카테터를 몸 안으로 밀어 넣던 이미지가 고장난 전구의 깜빡임처럼 빠르게 흐려졌다 밝아졌다. 눈이 충혈된 것은 배 속의 압박감을 오래도록 참느라 아랫배가 아팠던 탓이었다. 무드의 문제도 있었지만, 강주한과 애널섹스를 할 준비를 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내부에서 갈등 중인 섹스를 기정사실화하고 싶지 않았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선우는 들고 있던 술을 입에 머금었다. 식도에 뜨거운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홧홧했다.

“그게…….”

말을 끄는 하선우를 심문하듯 빤히 내려다보던 그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대로 끌듯이 계단을 올라가 침대 위로 몸을 얽은 채로 쓰러졌다. 그는 곧바로 덤벼들지 않았다. 어둠을 뒤집어쓴 실루엣이 천천히 하선우의 위로 엉겨 붙었다. 헉, 하선우는 강주한의 입안에서 신음을 토해냈다. 상의와 바지가 서둘러 벗겨지고 다리 사이로 손바닥이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성급한 애무에 굳어 있자 강주한은 입 맞추던 입술을 떼어냈다. 그대로 허리를 숙여 성기를 입에 물었다. 속옷을 벗기지도 않은 채였다.

“헛, 으…읍…….”

속옷 위로 혀의 움직임이 질척하게 느껴졌다. 어깨를 들썩이던 하선우는 질끈 눈을 감고 그의 애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막대사탕을 핥고 빨듯 애를 태우다, 치아로 성기를 자근거렸다.

“앗! 아ㅍ….”

얇은 천 아래 감춰진 성기가 그의 잇새에서 짓씹혔다. 까끌한 섬유가 그의 타액에 척척하게 젖어 성기를 마찰할 때마다 숨이 가빠졌다. 드로즈의 고무밴드 위로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걸쳐졌다. 볼록 튀어나온 귀두가 그의 입술로 빨려 들어갔다. 쪽쪽 소리가 나도록 힘을 주어 입속으로 당겨 빨며 그는 속옷을 천천히 벗겨버렸다.

그는 무릎을 잡아 하선우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사타구니를 향해 길게 튀어나온 골격근 위로 넓게 펼쳐진 혀가 미끄러졌다. 살갗을 쓰는 느릿한 전진에 허벅지 안의 근육이 바르르 떨며 긴장했다. 혀는 계속해서 샅을 향해 매끄러졌다. 점점 더 아슬아슬하게 우묵 파인 곳으로 다가오던 그가 회음부를 깨물었을 때, 하선우는 더는 참지 못하고 강주한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끈덕지기도 했다. 허벅지를 끌어안고 아프게 빠는 그를 저지하려 손바닥에 힘을 주어 밀어냈다.

“흐으, 으… 응…….”

한참 동안 힘을 겨루다, 애널의 주름에 그의 혀끝이 닿은 순간이었다. 튀어 오르듯 하선우는 허리를 세웠다. 그가 오늘 밤 무엇을 하려는지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의미를 자각시키는 애무였다.

흥분으로 붉어진 눈으로 하선우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반들반들한 침이 그의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젖은 아랫입술을 혀로 쓸며 그는 어둠 속에서 검붉어진 하선우의 얼굴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가운을 여몄던 허리끈을 풀며 그는 무릎을 움직여 하선우의 다리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이미 막다른 곳이었다. 허리를 숙이며 그는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듯 입술을 벌렸다. 촉촉하고도 뜨거운 입술이 가슴에 닿았다. 그의 치아가 유륜을 아릿하게 씹을 때마다 하선우의 폐에서부터 신음이 쏟아졌다.

“으으… 흐으….”

젖꼭지를 치열로 짓씹다, 그는 잇새로 튀어나온 살덩이를 혀끝으로 빙글 돌렸다. 허리와 엉덩이가 들썩이며 잘게 떨렸다. 자극이 지나쳤다. 그는 부풀기 시작한 유두에 편집증적인 애무를 퍼부었다. 아직 초반에 불과한데 과열된 감이 있었다. 하선우는 알코올과 쾌감의 작용에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무릎 뒤로 강주한의 손이 들어왔다. 가슴을 향해 무릎을 밀어내려는 힘에 맞서 하선우는 강주한의 손목을 잡았다. 몇 번이고 거듭되는 하선우의 제지에 강주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강제로 욕망을 저지당한 산짐승처럼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점점 강주한의 숨소리가 귀에 거슬릴 만큼 커져 하선우는 그를 침대 위로 밀쳤다. 사정을 하고 나면 누구나 한순간이나마 현자가 되기 마련이니, 일단 한 번 사정을 끝내고 흥분을 가라앉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 끝을 머금자 하선우의 뒷머리를 강하게 쥐었던 그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손바닥으로 밑둘레를 잡고 흔들며 입술로 성기를 빨자, 그의 커다란 손이 하선우의 뒤통수를 순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손은 천천히 뒷목을 타고 견갑골과 땀이 고인 움푹한 등허리로 미끄러졌다. 아슬아슬하게 엉덩이에 걸쳐진 손이 둔부를 잡아 벌리고 땀으로 말랑말랑하게 젖은 항문 위에 머물렀다. 미처 저지할 새도 없이 푹,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선우는 급하게 입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잠, 잠깐…!”

저항하는 하선우를 들쳐 안으며 어깨에 입술을 묻은 그는 손가락을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하선우의 몸이 튀었다.

“잠, 잔깐…만요. 큿… 으윽…….”

근질거리는 감촉에 허리를 비틀며 하선우는 강주한을 밀쳐냈다.

“하고 싶지 않다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한 저지에 강주한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애, 애널… 섹스…… 하고 싶지 않다고요.”

쇳소리 섞인 딱딱한 목소리가 좁은 침대 위로 울렸다. 정말 정색했다고 느낄까 하선우는 가까스로 웃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시간의 틈을 메웠다. 가라앉은 분위기로 그가 입을 열었다.

“왜요. 관장도 했으면서.”

그의 검지는 살짝 이완되어 있는 내벽에서 묻어난 물기로 젖어 있었다. 하선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물기를 검지와 엄지로 비벼 만지작거리며 그는 정중한 어투로 다시 물었다.

“왜 말입니까.”

그야 이건 제 몸이니까요. 그 당연한 대답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 강주한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하선우는 몰아붙여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본격적인 건 거북했다. 여태까지 하선우의 섹스는 누구를 안든, 누구에게 안기든 그 행동의 목적은 다분히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쾌락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떤 변화의 경계를 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싫은 이유가 있습니까.”

강주한이 재차 물었지만 하선우는 섬세한 감정들을 설명할 만한 말재주가 없었다. 침묵하는 사이 강주한은 다시 몸을 밀착시켰다.

“너무 커서요.”

입술을 벌려 가슴팍을 물려던 강주한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저는 …즐기고 싶지, 몸에 무리를 주면서까지 하고 싶진 않습니다. 전무님은 너무 크잖습니까.”

강주한에게 사내로서의 자존심을 챙겨주고, 자신도 빠져나갈 길을 마련하려던 하선우는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전 선호하는 사이즈가 있어서요.”

강주한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선호하는 사이즈라고요?”

그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급하게 둘러댄 핑계의 근거가 지나치게 모자랐나. 아니면 서로 생각의 방향이 어긋난 걸까. 미묘한 엇갈림에 당혹한 하선우는 서둘러 변명했다.

“13센티 전후면 충분하더라고요. 전립선 위치도 위치지만 그 이상은 몸에 부담이 가서……. 차라리 전무님과 제가 역할을 바꿔서 하는 거면 모를까.”

강주한은 웃음기도 없이 하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격을 당한 얼굴이었다.

“그게!”

당황한 하선우의 말이 점차 빨라졌다.

“저, 저도 안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전무님을 안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

강주한은 숨죽였다. 한 번도 삽입당하는 입장은 고려해본 적 없는지, 물러설지 말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더디게 시선을 내리깐 그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하선우는 조급해진 마음에 쓸데없는 말을 자꾸만 늘어놓았다.

“전 그냥 가벼운 패팅 선에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하다 보면 더… 들어갈 수도 있고 자로 재서 표시할 수도 없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분명히 다음 날 괴로울 테니까.”

얼마나 더 원초적이고 우습지도 않은 얘기를 해야 할까. 이 이상의 변명이 필요한가. 얼굴은 화끈거리고 머릿속은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자신에 대한 짜증으로 들끓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강주한의 침묵이 거슬렸다. 하선우의 숨소리가 점차 커지던 무렵이었다.

“재미있는 변명이군요.”

목덜미에 닿아 있던 강주한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까지 둘러댈 필요는 없습니다. 내 태도가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으로 느껴졌다면 사과하죠.”

그는 식은 눈빛으로 하선우를 내려다보다 허리를 세웠다. 어깨에 걸쳤던 옷을 다시 여민 그는 하선우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더는 가벼운 패팅이나 성적으로 즐길 만한 여흥의 여지도 두지 않고 그는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강주한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복층의 난간으로 보이는 강주한의 뒷모습을 하선우는 조금 아연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흥분의 여운을 절단당한 자리에 싸늘한 적막만이 남았다.

그는 외투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거세게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손을 모아 바람 앞에서 불을 붙였다. 나쁜 때 담배를 피우잖아요. 이전에 강주한의 아들에게서 스치듯 들었던 말이 떠올라 하선우는 가슴이 선득해졌다. 창가 앞에 선 그의 옆얼굴에는 언짢거나 아쉬워하는 감정이 조금도 드리워 있지 않았다. 정작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감정 없는 얼굴을 보자 하선우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음에도 죄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하선우는 바지만 대충 꿰어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주한의 앞으로 걸어와 하선우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무님.”

하선우를 내리뜬 눈으로 쳐다보며 강주한은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옮겼다. 연기를 창가를 향해 짧게 내뱉고 그는 뒤늦게 대답했다.

“예.”

하선우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사과를 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강주한에게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 성기가 큰 건 둘째치고, 섹스를 하고 나면 정말 강주한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든 의식할 것 같다는 말이라도 하란 말인가. 뭐라고 말해야 이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나. 젖은 앞머리만 애꿎게 쓸어내리는 하선우를 지켜보며 강주한은 다시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

하선우는 느리게 침을 삼켰다. 작위적인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이내 힘을 잃고 사라졌다. 그 다양한 표정을 바라보며 강주한은 창가에 몸을 살짝 기댔다.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고, 화난 듯 보였다가 이내 풀어지고, 스스로 감정을 종잡지 못하는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지켜보았다. 하선우는 곧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무님 말이 성관계를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이유를 애써 만들어서 둘러댈 만큼 전무님이 싫다는 건 아니었고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먹으로 헛기침하는 입술을 가린 하선우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저도 자고 싶긴 합니다. 그 대상이 전무님이라서 부담스러워 그렇죠.”

붉어진 얼굴로 하선우는 쩔쩔매면서도 할 말을 했다. 방은 여전히 추웠다. 살갗에 오소소 돋은 소름에 상박을 느리게 쓸며 하선우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나누었다.

한참 뒤에 강주한은 관찰하는 시선을 거두었다. 맵싸한 연기에 내리깐 눈매를 찌푸리며 입에 물었던 담배를 메탈케이스 위에 비벼 껐다. 꽁초를 쓰레기통에 툭 던져버리고 검게 얼룩진 담뱃진을 툭툭 털어냈다.

“나도 쉽게 생각 안 합니다. 하선우 씨 쉬운 사람 아니잖아요.”

그는 메탈케이스를 열었다. 가지런하게 놓인 새하얀 담배 밑으로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손톱으로 상자의 모서리를 들어 올린 강주한은 케이스 안에서 은색의 자그마한 정사각 비닐을 집었다. 하나, 둘, 셋… 그 밑으로 비닐이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근데…….”

콘돔이었다.

“그래서 하선우 씨를 안고 싶은걸요.”

자조하며 그는 이로 비닐을 찢어 콘돔을 꺼냈다. 하선우는 잠시 숨을 쉬는 것도 잊고 강주한의 손가락에 걸린 콘돔을 쳐다보았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연출인지, 그의 진의를 긁어내고 싶었지만 하선우는 울컥 내솟은 성적인 압박감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선을 마주칠 수도 없어 그저 혀끝에 고인 침을 힘들게 삼키는 것이 다였다. 다시 가까이 다가온 강주한이 하선우의 등을 껴안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정말 싫으면 말하십시오.”

귓덜미에 입술을 붙여 속삭인 그가 귓가에 더운 혀를 댔다. 느리게 껌뻑이던 하선우의 눈매가 간지러움에 가늘게 찌푸려졌다. 귓바퀴를 따라 기는 그의 젖은 혀는 더운 숨결을 머금고 있어 맞닿은 부위부터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느린 움직임을 따라가듯 하선우의 눈동자도 움직였다. 아직 하겠다는 말은 안 했는데.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이 그의 치아가 귓바퀴를 질척하게 깨문 순간 흩어져버렸다.

“하아…아…… 읏.”

하선우는 반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늘 급하기만 했던 지금까지의 관계와 달리 강주한은 천천히 성욕을 고조시켰다. 몸이 점차 뒤로 밀려 뒷걸음질 치던 하선우는 발치에 뭔가 닿아 간신히 뒤를 돌아보았다. 딱딱한 2인용 소파였다. 의자와 등받이 사이에 하선우를 걸쳐 눕힌 강주한이 바지를 벗기고 자신의 가운도 모조리 벗어버렸다.

추위 속에서도 땀이 솟았다. 강주한이 올라탔다. 숨결과 체취에서 담배향이 느껴졌다. 키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더한 것도 빨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혀를 얽으며 하선우는 크게 입술을 벌리고 그에게서 쏟아지는 것들을 머금기를 반복했다. 애무의 진도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딘데도 여느 때보다 더 고열 같은 성욕이 아랫배에 고여 있었다. 더듬고 비비며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매만지던 강주한이 허리를 낮췄다. 끈적하게 땀이 스민 뺨을 깨물고, 목덜미와 쇄골, 가슴 사이와 아랫배로 혀를 미끄러트린 그가 음모를 치아로 살짝 깨물어 당겼다.

으윽.

따끔한 아픔에 목 안으로 잠겨드는 신음이 흘렀다. 저지하려 허리를 들어 올리던 하선우는 다시 몸을 경직시켰다. 강주한이 하선우의 무릎 뒤로 손을 집어넣어 다리를 넓게 벌린 탓이었다. 회음부에 타액이 잔뜩 스민 입술이 닿았다. 치아를 쓰지 않고 점막만으로 연한 살을 우물거리던 입술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으, 거, 거긴.”

하선우의 손이 강주한의 어깨를 밀었다. 제지당한 강주한이 눈만을 들어 올렸다. 각도 때문에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 시선에 차마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질 않아 어깨를 밀어내던 손으로 하선우는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흐…으…….”

애널에 닿은 혀끝에 하선우는 몸서리쳤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생명체 같았다. 주름 하나하나에 밀착하듯 들러붙은 혓바닥이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여 촉촉하게 미끄러졌다. 그는 땀을 핥거나 애널을 더듬거나, 애액이 묻은 살덩이를 빨더라도 쾌감을 취할 수 있다면 어떤 더러움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사소한 더러움을 쾌감의 일부로 치부해버리는 듯했다. 하선우는 욕망을 거세한 것 같은 그의 강직한 외모 아래로 육체를 모조리 먹어치울 것 같은 어두운 욕정과 게걸스러움을 느꼈다.

흡, 짧게 신음한 하선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애널 위를 겉돌던 혀가 잔뜩 움츠린 주름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안으로 끈덕지게 진입한 혀가 내벽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난잡하고 농탕한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강주한의 자극에 욕설을 입모양만으로 씨근거리며 진저리치던 하선우의 얼굴이 흐려졌다. 꼼틀대며 촉수가 몸 안을 잘게 뭉개는 것 같았다. 흐윽흐윽, 거친 숨을 몰아쉬던 하선우는 허리를 비틀었다. 무릎 뒤를 잡은 강주한의 손바닥에 더 힘이 들어가고 다리가 넓게 벌려졌다. 빠져나가고 들어가고 얕은 출입을 반복하고 입술이 약한 압력으로 살덩이를 빨았다. 사정 직전에야 해방된 하선우는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바짝 기대고 몸을 웅크렸다. 민망함은 둘째치고 강주한의 방탕함에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으윽!”

예고도 없이 손가락이 푹 꽂혀 들어와 하선우는 몸을 떨었다. 손가락이 곧바로 곱아들며 내벽을 긁었다. 소파 밑바닥에 앉은 강주한은 한 손으로는 애널을 쑤시고, 다른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콘돔을 성기에 씌웠다.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배설감도 늘어났다. 거의 몇 달 만의 출입이었고, 여느 때보다 신경이 살아나 이질감이 심했다. 배출의 기관을 거스르며 드나드는 손가락을 이완되지 않은 근육이 꽉꽉 조여댔다. 세 개의 손가락을 항문 안으로 힘주어 욱여넣던 강주한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술병을 잡았다.

“긴장했나 본데… 마셔야겠습니다.”

먼저 스카치를 몇 모금 마신 그는 술을 가득 머금고 술병을 떼어냈다. 입술을 꼭 붙이고 열린 틈새로 술을 넘겨주었다. 몇 번을 더 스카치를 받아 마신 하선우는 식도가 타들어가는 느낌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자극에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게다가 그의 가운데 손가락이 조금 전부터 전립선 위를 더듬고 있었다. 살짝살짝 약 올리듯 둥글려지는 움직임은 해방감을 주기엔 부족했고 무시하기엔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눈을 감고 그 감각을 느끼던 하선우는 갈증에 더는 삼킬 것도 없는 마른침을 몇 번이나 넘겼다. 벌린 다리 사이로 강주한의 맨살이 닿았다. 하선우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기대감으로 가빠지는 숨을 다스렸다. 민감한 고간 사이에서 콘돔에 싸인 더운 페니스를 느꼈다. 그는 눈을 떠서 강주한의 성기를 보았다.

“…….”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하선우는 눈을 들었다. 퇴로를 찾는 군인의 심정으로 강주한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도리어 달래듯 하선우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다리가 당겨지고 등이 소파의 의자바닥에 닿았다. 그의 양쪽 어깨에 다리가 걸쳐지고 무릎이 가슴을 향해 눌렸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모든 퇴로를 차단해버렸다. 강주한의 묵직한 중심은 이미 움츠러든 애널에 맞춰져 있었다. 크기에 비례해 물렁거리기는커녕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강주한은 침으로 미지근하게 젖은 애널에 성기를 넣었다. 하지만 벽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화살처럼 잔뜩 긴장한 구멍을 파고들지 못하고 몇 번이나 비껴났다. 엉덩이 밑으로 미끄러진 성기가 등허리쯤에 닿은 것 같아 하선우의 입술이 떨렸다. 그의 페니스가 몸 안을 어디까지 쑤시고 어떻게 헤집어댈지 상상조차 가질 않았다.

힘을 빼는 게 좋을 겁니다.

숨소리 많은 목소리로 속삭인 그가 하선우의 귀를 부드럽고 정성스럽게 씹었다. 흠칫거리며 몸이 경직과 이완을 반복하는 틈을 노려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둘, 셋, 그리고 네 개가 될 때까지 끈덕지게 속살을 파고들었다. 마침내 항복하듯 벌려진 붉은 구멍을 확인한 그가 페니스를 다시 맞추었다.

“으……!”

예상보다도 수월하게 귀두가 들어왔지만, 거기까지였다.

“잠…깐, 잠깐만…요.”

아슬아슬하던 결합이 점차 깊어졌다. 충분히 젖지 않은 내벽에 페니스가 마찰하는 곳마다 습한 점막이 콘돔에 들러붙어 안으로 딸려갔다.

“헉, 으응…….”

힘을 빼고 감각을 견디려던 하선우는 결국 손바닥으로 강주한의 아랫배를 밀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사이로 강주한의 손가락이 들어와 깍지를 꼈다. 옭아맨 손을 소파에 짓누르며 강주한은 허리를 숙였다.

삽입이 깊어졌다. 귀두 끄트머리로 맞닿아 있던 내벽이 찐득하게 벌어지며 페니스를 뒤덮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좁은 몸속으로 길을 내며 페니스를 반쯤 밀어 넣은 강주한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배출구를 거스르며 들어오는 성기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감에 내벽이 굼뜨게 조여들며 밀어내려 했다. 끈적한 허벅지살로 강주한의 허리를 비비던 하선우는 갑자기 깊어진 삽입에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으으! 깊…어요.”

“그런 말 하면 더 흥분하는 거 모르고 말하는 겁니까.”

말하는 도중 깊게 밀어 넣자 고개를 저으며 하선우는 진저리쳤다.

“깊은 걸 어…쩌라고요. 아프다니까요?”

하선우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강주한은 웃었다.

“13센티 좀 넘은 것 같습니까? 사인펜으로 줄을 안 그어서 모르겠는데 어쩌죠.”

몸에 잔뜩 힘을 주느라 머리로 압력이 몰려 눈앞이 절로 축축해졌다. 강주한의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되질 않아 빤히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다른 남자들은 이쯤 들어갔습니까. 여기 드나들던 13센티 좆들이 어땠는지 궁금한데.”

주욱, 안으로 페니스를 집어넣으며 강주한은 손가락으로 연결된 부위를 쓰다듬었다. 하선우의 넓적다리 안이 자르르 경련했다. 하선우의 눈길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그…,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흐읏…, 제… 몸에 눈금이라도 달렸어요?”

“제 좆에도 눈금은 안 달렸거든요.”

웃음이 밴 목소리로 속삭인 강주한이 허리를 숙였다. 가슴에 가슴을 맞대며 강주한은 하선우의 등을 껴안았다. 웃음으로 그의 가슴팍이 들썩거렸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씨근거리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웃음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

“하여간 재밌는 사람이에요, 하선우 씨.”

페니스를 빠듯한 내벽 속으로 밀어 넣으며 강주한은 앞머리를 쓸어주던 손으로 하선우의 뒷머리를 매만졌다. 머리카락 속에서도 진땀이 흘러나왔다. 꾸준하게 깊어지는 삽입에 무기력하게 벌어졌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애널에서 뭉개지는 음낭과 거친 음모가 느껴졌다. 허윽, 입술을 뻐끔하고 벌렸다 오므리며 헛숨을 삼킨 하선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배 속에 주먹을 쥔 팔뚝 하나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빠듯하게 벌어진 애널에 힘주어 더 밀어 넣을 것 없는 성기를 쑤시던 강주한이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온몸이 함께 딸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빠듯한 압박이 줄어드는 것을 견디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말했다.

“힘 빼는 게 좋을 겁니다.”

완전히 페니스를 뽑아낸 강주한은 끙끙거리는 하선우를 껴안았다. 겨드랑이 사이에 양손을 집어넣고 어깨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한 뒤 귀두를 젖은 밀부 속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매끄러운 콘돔에 싸여 유선의 형체를 하고 있었음에도, 유독 불거진 귀두가 속살을 할퀴는 듯했다. 힘 빼요. 강주한은 성기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하아아! …아, 윽…으으…….”

몸이 갈라지는 선뜩한 감각에 허리를 띄우며 어깨를 밀어냈지만, 강주한은 들러붙은 허리를 떼지 않았다. 페니스의 모양 그대로 넓게 벌어져 뿌리 끝까지 받아냈다. 강주한이 한 번 더 허리를 들썩였을 때 하선우는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배 속이 욱신거리고 토할 것같이 아팠다. 배 속 전체를 뜨거운 불기둥이 헤집는 것 같아 괴로움에 가늘게 떨던 하선우는 갑자기 몰려온 텅 빈 느낌에 탁한 쇳소리를 토해냈다. 그가 페니스를 모조리 뽑아버린 것이었다. 힘을 빼는 게 좋다니까…. 끄는 속삭임을 하선우의 귓전에 속삭인 강주한은 다시 뻐끔거리며 빠르게 개폐하는 입구에 귀두를 맞추었다.

주욱, 반 가까이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힘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성기를 문 내장이 쫀득하게 오그라들어 강주한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귀두까지 빼낸 성기를 한 번에 힘주어 밀어 넣기를 반복하는 동안 하선우는 애걸하기 시작했다.

잔뜩 수축한 내부에 성기를 욱여넣고 빼기를 반복할 때마다 온몸이 저릿거렸다. 지릴 것 같아서, 하체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무기력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크윽!”

단번에 밀어 넣은 성기가 둥글게 굴려졌다. 배 속에 돌덩어리를 추대는 듯한 고통에 눈가에서 눈물이 팟 터져 나왔다. 천천히, 천천히, 강주한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하선우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반쯤 페니스를 빼낸 강주한은 귀두의 테두리로 전립선을 갉듯이 문질러댔다. 그 순간 몸살에 걸린 듯 오한이 치밀었다. 전신이 쏟아지는 진땀으로 축축해졌다. 하아, 하아, 몇 번이고 밭은 숨을 몰아쉬던 하선우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힘…, 읏…, 힘들어요…….”

귀두까지 뽑아낸 페니스를 주저 없이 집어넣었다. 날카로운 쾌감이 배 속을 난자했다. 구멍이 개폐를 반복할 때마다 닿는 면의 저항이 하선우에게로 반사됐다. 힘을 줄수록 존재감이 뚜렷해지며 고통도 쾌락도 배가 됐다.

“얼굴… 보여요.”

낮게 뇌까린 그가 하선우의 뒷머리를 잡아채어 당겼다. 팍, 아프도록 욱여넣었다. 울음이 잇새에서 샜다. 들린 고개 탓에 시선이 갸름해진 하선우와 눈을 맞추며 다시 한 번 더 허리를 쳐올렸다. 눈앞에 물막이 고였다.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한 채 강주한은 허리를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아악…! 윽! 읍! 으응, 흡!”

찔꺽찔꺽, 구멍에서는 성기가 드나드는 마찰음이 울리고, 소파에서는 인조가죽에 땀이 고여 살이 밀릴 때마다 삐드득 소리가 났다. 하선우는 바닥으로 자꾸만 몸이 가라앉는 느낌에 매몰되었다. 동시에 몸 위로 천장이 거세게 부딪치는 것만 같았다. 통증과 쾌감이 흙탕물처럼 뒤섞여 사정감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하선우의 몸이 갑자기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맞닿은 아랫배가 질척하게 젖었다. 뿌리 끝까지 격하게 밀어 넣은 강주한의 허리짓이 갑자기 멈추었다. 강주한의 어깨에 땀으로 끈적이는 이마를 비비던 하선우는 부들부들 떨며 그의 등을 강하게 껴안았다. 그 역시 살갗을 누르면 과육처럼 땀이 배어 나오는 하선우의 등을 강하게 껴안으며 귓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앞을 만지지도 않았는데 사정했네요.”

귓불을 잘근거리는 강주한의 입술이 휘었다. 내리깐 목소리에 묻어나는 웃음기에 사정의 여운에 빠져 있던 하선우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강주한이 상체를 너무 강하게 껴안아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거야 계속… 자극 읏, …하시니까.”

강주한은 끈끈하게 겹쳐 있던 몸을 떼어냈다. 사정을 마치고 다시 말랑말랑해지는 하선우의 성기를 검지와 엄지로 잡아 흔들었다. 하선우의 아랫배가 쑥 아래로 꺼지며 강주한의 것을 강하게 물었다.

강주한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소파의 등받이에 걸쳐놓았던 가운을 바닥으로 던진 그가 하선우의 등을 들어 올렸다. 구겨진 가운 위로 하선우를 눕히고 페니스를 뽑아냈다.

콘돔이 귀두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그것을 확 벗겨버린 그는 새로운 콘돔을 뜯어내고 페니스 위로 다시 씌웠다. 일련의 과정을 지친 눈으로 바라보던 하선우는 다시 자세를 잡는 강주한을 보며 피곤한 눈을 감았다. 저항 없이 벌어진 다리가 강주한의 어깨 위에 얹어지고 그 사이로 탄력 있으면서도 단단한 귀두 끝이 닿았다. 주저 없이 주욱 파고든 페니스가 전립선 위를 직격하고 더 깊은 곳을 열었다.

“하악, 아… 아아…!”

허리를 뒤틀며 괴로워하자, 확 빠져나갔다. 내장까지 딸려가는 듯한 허탈함에 하선우의 눈이 부릅떠지고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 이후로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희열과 통증, 갑갑함, 고통, 쾌감, 온몸이 다져지는 듯한 아찔함, 다른 모양새를 한 모든 감각들이 혼선되어 하선우의 육체를 지긋지긋하게 몰아갔다. 오랜 시간 동안 시달린 끝에 강주한이 사정했을 때, 하선우에게서 숨소리를 닮은 흐느낌이 불안하게 터져 나왔다. 그의 사정에 맞춘 하선우의 두 번째 사정이었다. 후유증이 남을 것만 같은 오르가즘이었다.

“으윽….”

페니스를 빼낸 강주한은 벌써 콘돔을 벗겨냈다. 희게 젖은 페니스를 가운으로 대충 훔쳐낸 그는 바닥에서 동글게 몸을 말고 아랫배를 껴안은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사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몸을 떨고 있었다.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기운 없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하선우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건… 거의 성고문이잖아요.”

“…….”

“배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고 몸은 결리고… 힘들다고요.”

목소리는 탁하게 쉬어 있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하선우의 아랫배를 살살 매만지며 강주한은 말했다.

“그래서 오늘 더는 하기 싫다는 겁니까.”

정액으로 미끌거리는 아랫배를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매만졌다. 사과를 하지도 그렇다고 보채지도 않는 그는 그저 하선우의 몸을 쓰다듬으며 기다릴 뿐이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하선우는 강주한을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뇨.”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강주한의 입술이 조금 휘어졌다. 그것이 얄미워 하선우는 얼른 덧붙여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제 페니스 쥐어짜지 마세요. 사정했는데 계속 비비면 아프다고요.”

“그리고 또?”

정말로 조건을 댈 줄은 몰랐다는 듯 피식거리며 웃은 강주한이 세 번째 콘돔을 꺼내 들었다. 입술로 비닐을 찢어 조각을 툿 뱉어낸 그가 조금도 단단함이 줄어들지 않은 페니스에 콘돔을 씌웠다. 차마 얼굴을 보고는 말이 나오지 않아 하선우는 고개를 숙인 채로 헛기침을 했다.

“부드럽게 좀… 가자고요.”

고개를 끄덕인 강주한은 하선우의 입술을 찾았다. 하선우의 입술을 머금는 강주한의 잇새에서 웃음이 샜다. 가슴께까지 새빨개진 하선우를 껴안으며 그의 다리를 벌린 강주한은 비죽 열려 붉은 속살을 내보이는 구멍에 귀두를 맞추었다. 부드러운 진입에도 불구하고 과민해진 속살이 격하게 반응했다. 사전적 의미로만 존재했던 복상사가 오늘 자신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선우는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렸다.

가물가물한 눈시울 아래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눈을 뜨려던 하선우는 추를 매단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손끝으로 더듬거렸다. 눈가에 소금기가 느껴지고 짓물러 있었다. 내가 울었던가. 하선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간밤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더불어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하반신의 무지근한 통증도 의식 속에 새로이 들러붙었다. 소리 없이 하선우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부드럽게 해달라고 했지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해달라고 했나. 한숨을 내쉬며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머릿속으로 굴렸다.

이대로 다 모르는 척 외면하고 푹신한 침구 속에서 모자랐던 숙면이나 취하고 싶었다. 샴푸 냄새가 배어있는 베개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편안한 자세를 찾던 하선우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맞은편에는 강주한이 일어난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강주한의 형상을 한 빈자리를 지켜보는 동안, 가슴은 문득 허전한 기미를 느꼈다.

해소되지 않는 이름 모를 감정을 한참이나 게으르게 관조하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층과 달리 복층은 창문이 없어 한낮에도 늘 어둑하게 그늘져 있었다. 그래서 알람을 켜두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늦잠을 자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미쳤지.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린 하선우는 허리를 일으켰다.

숙취와 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무거운 통증, 잠이 가시지 않는 머리 때문에 정신과 육체가 곤죽처럼 질퍽질퍽했다. 게다가 머리는 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둔하게 머리를 쪼아대는 느낌에 찬 손바닥으로 이마를 더듬던 하선우는 계단을 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바닥을 향한 시야 안으로 강주한의 다리가 들어왔다.

“아직 안 가셨네요.”

물잔을 하선우의 앞으로 쑥 내밀며 강주한은 물었다.

“갔으면 했습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여서 슬쩍 웃음 지으며 잔으로 입술을 가렸다.

“글쎄요.”

따끔하게 갈라진 목을 따듯하게 적시며 물을 마시는 하선우를 지켜보던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침대 발치로 다가와 곁에 앉은 그가 하선우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고개를 숙였다. 앞머리에 가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손가락으로 하선우의 머리카락을 무게감 없이 거둬 귓등에 걸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민망함에 맥없이 웃자 강주한 역시 뒤늦게 웃었다.

“눈가가 분홍색이라.”

“간밤에 누가 하도 울려서 그래요.”

어깨를 한 번 추켜올리며 하선우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이것 봐라, 강주한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의 눈길이 은근해졌다. 하선우는 그와 자신이 간지러운 공기를 공유할 만한 사이인가 싶으면서도 싫지가 않았다. 귓등에 건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많이 길었다. 이발할 시간도 없었지. 마감기한까지 맞추려면….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방법으로 낯간지러운 분위기에서 도망가려 했지만 강주한의 눈길이 끈질겼다.

“왜 그렇게 분위기 잡으세요.”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묻자 빤히 바라보던 강주한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선우 씨 연애 많이 안 해봤군요?”

“적당히 해봤는데요.”

하선우는 발끈해서 대답했다.

“20대 중반까지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은 사귀었고, 사귀던 기간의 평균값은….”

“아아, 그렇습니까.”

별로 신뢰하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는 하선우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남은 물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잔을 침대 옆 협탁에 소리나게 내려놓은 그가 다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왜 저한테 그런 걸 묻는 겁니까. 강주한이 한 말의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그 의미심장함에 선뜻 다가갈 수 없어 하선우는 화제를 돌렸다.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두 시간 전쯤.”

그사이 강주한은 옷까지 모두 갖춰 입은 상태였다. 조금 전에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물기로 젖어 고르게 가닥가닥 뭉쳐 있었고,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은 깔끔했다. 짙은 눈썹의 결까지도 가지런했다. 밤의 강주한과 달리 오전의 강주한은 차분하고도 정적이었다.

“하선우 씨 뒤척이지도 않고 잘 자던데요.”

흰자가 맑고 눈동자가 새까만, 곧바른 강주한의 눈을 바라보던 하선우는 뒤늦게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시장하시죠?”

자리에서 일어나려 엉덩이를 떼는 하선우를 다시 눌러 앉히며 강주한은 말했다.

“딱히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느지막이 점심 먹는 걸로 하고 우리.”

말을 도중에 멈춘 강주한은 하선우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어 슬며시 누르며 침대에 눕혔다. 그의 서늘한 셔츠가 벌거벗은 상박에 닿았다. 팔을 접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댄 채로 그는 똑바로 누운 하선우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좀 더 이러고 있죠.”

남은 손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하선우의 가슴팍을 매만지며 그는 말했다.

“여기가 심내막염 수술 자국이군요.”

“예.”

“이것 때문에 성격이 달라졌다고 했죠? 피해 안 끼치는 선에서 되는 대로 살게 됐다고.”

“제가 그런 말까지 했어요?”

우둘투둘한 흉터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며 강주한은 조금 웃었다.

“하선우 씨와 관련된 건 다 기억해요.”

하선우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억력이 좋거든요.”

수술대에 올라 죽다 살아난 뒤로 주변 세계에 무심해지고 스스로에만 관심하며 살았다는, 그날의 대화로 강주한은 조금은 젠체하며 세상을 관조하는 하선우의 태도를 알아차렸다.

하선우는 생각이 많고 의심 역시 많았지만 비현실적인 면 또한 강했다. 세상을 다 살아본 노인마냥 원숙한 체하지만 어수룩한 도사 같아서 세상이, 사회가 원래 그런 거라고 그러려니 하고 수긍해버리는 면이 있었다.

그 수긍에는 번민도, 이해도, 파헤치려는 의지도 없었다. 설령 그것이 부조리라 할지라도 깊은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비겁함이었다. 그래서 강주한은 조금 의외였다. 뭔가를 강렬하게 염원해본 적 있느냐는 물음에 순순히 대답하던 하선우의 모습이. 그 대상이 사람을 향한 집착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강주한은 하선우에게서 어렴풋이 감정의 과잉을 읽었었다.

“흉터가 보기에 좀 흉하죠?”

강주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끝으로 오돌토돌 상처가 아문 자취를 따라 움직이다 조금 더 왼쪽으로 미끄러졌다. 잇자국이 남아 핏기가 엷게 멍울진 젖꼭지를 살짝 건드리자 허리가 들떴다. 저지하려 어깨를 미는 하선우의 손을 잡아 침대 위로 누르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혀끝으로 심이 솟은 유륜을 지그시 눌러 핥았다.

“으으… 그만하세요.”

혓바닥으로 더 넓게 유륜을 핥고 입술로 빨아올리자 하선우가 허리를 비틀었다. 감각은 여전히 과민했고 어젯밤의 성고문과 다를 바 없던 섹스 때문에 묵직한 통증이 하반신을 지배했다. 몸을 비틀자 손목을 옭아맨 강주한의 손힘이 풀어졌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체취를 깊게 들이쉬던 그는 불현듯 무언가가 떠오른 듯 웃음을 흘렸다.

“왜 웃으세요?”

“선호하는 사이즈가 왜 13센티미터입니까.”

“……예?”

“선호하는 사이즈 있다면서요. 보통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 안 하지 않나?”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눈빛만은 진지했다. 하선우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인류의 평균적인 페니스 크기라서.”

“인류의 평균 크기라서요? 그건 또 어떻게 그리 구체적으로 잘 압니까.”

홍당무가 된 하선우를 보는 강주한의 얼굴은 깨어지듯 웃음이 깊어졌다. 되는 대로 내뱉었지만,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게 웃기실지 몰라도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과학동아에서 읽었던 내용이라고요! 어, 어릴 때 봤던 거긴 하지만… 어쨌든, 동양인이 0에서 12센티미터, 백인이 12에서 14센티미터, 흑인이 14센티미터 이상인…데…….”

말을 하면 할수록 바보가 되는 기분에 하선우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웃으면서도 경청하는 강주한의 짓궂은 태도가 거슬려 하선우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제 말이 우스워요?”

불만이 깃든 하선우의 말투에 결국 강주한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하선우는 조금 전까지의 불만도 잊고 소리 내어 웃고 있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그의 환한 웃음 위로 스키장에서 몸을 겹쳐 넘어졌을 때 즐거워하던 강주한의 얼굴이 포개졌다.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술과 휘어지는 눈매는 여전히 낯설었지만 그 낯섦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행동을 일순간이나마 정지하게 만들었다. 엄격한 무늬의 검은 카드를 뒤집어 반짝이는 찬란한 면을 드러내는 것처럼 시선을 끌었다. 강주한에게 이런 면도 있구나, 그 사소한 깨달음이 왠지 각별해서 그가 단순히 놀리는 것뿐이라고 해도 너그럽게 이해하고 만다. 그 사실이 하선우는 이상스러웠다.

“하여간. 하선우 씨…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거듭 잔웃음을 터트리던 그가 하선우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여전히 미소가 깃든 채였다. 뭐 재미있다니 된 거겠지. 하선우는 얼결에 그를 보며 마주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가 하선우의 미소 속에 뭔가가 어른거리기라도 하는 양 바라보았다. 그 유구한 시선의 끝에서 하선우는 어떤 직감 같은 것을 느꼈다. 웃음이 깃들어 있음에도 거슬렸다. 마치 화려한 포장을 벗겨버린 날것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바닥에서부터 길어 올린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은 강주한이란 인물을 이루는 야만의 근거 같았다.

그는 오래도록 침묵한 뒤에 다물린 입술을 떼어냈다.

“우리 연애하죠.”

하선우의 입술에 걸린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표정이 증발하는 얼굴과는 반대로 몸 안에서 출혈 같은 뜨거움이 내솟았다. 더디게 눈을 깜빡이던 하선우는 바닥을 짚어 허리를 세웠다.

“괴물이 사귀자고 해도 그런 표정은 안 짓겠네.”

강주한의 입술이 비스듬히, 아주 조금 비틀렸다. 나지막이 한숨을 쉰 그는 침대의 헤드에 뒷머리를 기댔다. 하선우는 말했다.

“절 좋아하셨어요?”

의심을 채 숨기지 못하고 추궁하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강주한은 조금 뜸 들여 대답했다.

“누굴 꼭 열렬하게 사랑해야지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럼 왜.”

“호감 정도라고 해두죠.”

호감 혹은 관심. 미지근한 마음을 포장하기 좋은 말이었다. 몸속을 베여 출혈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뜨거웠던 하선우의 피가 서서히 식었다.

“하선우 씨야말로 그때 관심도 없으면서 키스했던 겁니까. 나에게 호감도 없으면서?”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분위기를 유도했던 것은 강주한이었다. 억울해서 하선우는 눈을 부릅떴다 곧바로 내리깔았다.

물론 강주한의 말에 조금이라도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단 한 번도 강주한을 연애의 대상으로 본 적 없었고 그런 기대조차 품지 않았음에도 급격하게 흥분했다. 그러나 하선우는 동시에 그가 연애라는 단어를 꺼낸 순간 끝이 뻔히 보이는 파국을 떠올리고 있었다. 강주한을 둘러싼 세계와 강주한이란 인간 자체가 거느린 높은 벽이 처음부터 한계를 알게 했던 탓이었다.

“더는 실수가 아니게 되잖습니까.”

“우리 관계가 실수를 운운할 때는 한참 전에 지난 것 같은데요.”

하선우의 말에 묻어나오는 기막힘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강주한은 태연했다.

“전무님은 연애하던 사람들과는 어떻게 끝났습니까.”

“그러는 하선우 씨는 어떻게 끝났습니까.”

“나쁘게도 헤어져봤고 좋게도 헤어져봤죠.”

“보통 사람들의 연애와 같지는 않았겠지만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헤어짐부터 묻습니까. 왜요, 헤어질 때마다 변심한 연인을 야산에 묻었을까 봐?”

강주한은 오히려 새로운 흥미가 더해지는 시선으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하선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왠지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였으려고. 하선우는 괴기스러운 풍경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어서요. 누구나 다 그러잖습니까. 좋은 면만 보고 시작하기엔 더 이상 어리지 않으니까요.”

“멀리 보지 말고 현실부터 생각하죠.”

하선우는 강주한이 말한 ‘연애’와 지나간 자신의 연애에 대해 생각을 집중했다. 전화하고 문자하고, 만남을 위해 상대방의 집 앞과 회사로 찾아가고, 취향과 취미 시간을 공유하고, 무엇보다 서로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것이 하선우의 연애였다. 물론 술에 물 탄 듯 밍밍한 감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쨌든 그도 평범한 연애를 했다.

하선우와 강주한이 그런 짓을 하는 건 하선우의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 밖에 있었다. 상박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손으로 느리게 맨살을 쓸며 하선우는 말했다.

“보통 사람들 연애하듯이 보고 싶으면 보고, 뭐 그런 게 가능하긴 한 겁니까?”

“그렇죠. 하선우 씨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그저… 강 전무님과 제가 그런 일을 하는 건 상상이 안 가서요. 그래서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그럼 이렇게 계속 섹스 파트너로 남는 건 긍정적이고요?”

상박을 잡은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단어의 어감이 주는 적나라하고 추한 느낌에 하선우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조금 낮추자 강주한이 말했다.

“하 사장.”

하선우는 대답을 하는 대신 눈만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호칭부터 바꾸죠. 선우 씨.”

하선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더듬거렸다.

“주, 주한 씨?”

태연한 강주한과 달리 놀림을 당한 소년처럼 하선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선우는 상황을 모면하려 어색하게 헛기침을 해댔다.

하선우는 마치 논리로 강주한에게 설득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연애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지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님에도 강주한의 말 한마디에 하선우에게서 무기력한 진술이 이어졌다. 대한민국에서 우스갯소리로 그의 집안을 강씨 왕조라 부른다 하더라도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승은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그의 요구에 따를 이유가 없었다.

“연애라니, 어쨌든 내키지 않습니다.”

강주한의 앞에서 말도 잘 못하던 때에 비해 지금의 대답은 지나치게 건방졌던 것 같았다. 하선우는 조금 더 우회적인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강주한의 시선이 조여졌다.

“보통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랫입술 안의 점막을 앞니로 꽉 눌러 씹으며 하선우는 눈만을 들어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단칼에 거절할 만큼 나에게 호감이 없어서 그럽니까. 그래서 연애의 대상으로 도저히 여겨지지가 않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강주한은 잠자코 하선우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하선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선우는 그가 속한 세계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싶지도, 만날 때마다 중압감에 짓눌리는 사람과 연애하며 위축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강주한을 좋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를 향해 마음이 기울어지고, 그 이상으로 감정을 발전시키는 것은 하선우가 원하지 않는 결말이었다. 좋아지는 마음을 거부하며 감정적인 오차를 키우는 게 무슨 연애란 말인가. 하선우는 말했다.

“자신 없습니다.”

그는 하선우의 말을 단순한 의미가 아닌, 얼마간의 생각을 더 요구하는 다양한 형태의 대답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침묵의 장력으로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침내 그는 어떤 결론을 내렸다. 하선우를 향해 상체를 기울며 손을 뻗어 뒤통수를 감쌌다.

“저도 하선우 씨와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에 한해서 그 사람을 존중하고요. 내가 말한 연애란 하선우 씨와 몸만이 아닌, 그 이상의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제안인 겁니다.”

그의 건조한 손바닥이 땀으로 끈적거리는 뒷목으로 미끄러졌다. 방 안의 공기는 싸늘했지만 하선우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긴장을 죄 들켜버렸다. 하선우의 뒷목을 감싸 고정한 채로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딘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듯한 눈에 하선우는 점차 무기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의 연애가 꺼려지는,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 강주한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본 하선우는 그 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잘 웃고 다정하지만 하선우는 가끔 그 웃음이 컴컴한 웃음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미소 속에는 정말로 웃고 있지 않은 초연함이 있었다. 그것은 온기 없는 인공광 같은 불빛이었다. 그 불길한 면이 날카로운 칼날을 손에 쥔 것처럼 때때로 심장을 서늘하게 했다.

그 순간 벨소리가 울렸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풍부한 화음의 오르간 음악이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한 강주한은 미간을 좁혔다. 중요한 전화인지 받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전화기를 뒤집어 벨소리를 음소거해버렸다.

뒷목을 잡았던 손을 거두며 강주한은 여의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중요한 일이 있어 가봐야겠군요.”

“예.”

몸을 일으키려던 하선우는 벌거벗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줍기 위해 일어나려 하자 강주한이 어깨를 잡았다.

“하선우 씨, 내 제안에 아직 대답 안 했습니다.”

그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어깨를 잡았던 손바닥으로 성기게 주먹을 쥐고 무게감 없이 다시 어깨 위로 얹었다.

그는 섹스를 원할 때와 달리 정말로 싫으면 말해요, 라고 발을 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기다리려는 듯 말이 없었다. 하선우는 자신이 먼저 물러날 수 있는 시점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강주한의 지긋한 기다림에 갈등을 불러일으키던 의심이 소진되고 생각이 띄엄띄엄 느려졌다.

우리 연애하죠.

그의 제안에 대한 가장 솔직한 대답. 수많은 곁가지를 떼어내고 그 핵심만을 보자면 하선우는 궁금했다. 손가락 한 마디 깊이의 속도 들여다볼 수 없는 검은 수심 같은 그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끝이 어떠하든 강주한이란 인간 자체를, 그 너머를 알고 싶었다.

자신은 그를 알고 싶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뭐… 나쁘지 않겠는데요.”

자각하지 못했지만, 하선우는 자신의 키스에 난처하게 웃던 강주한에게 감정이 쌓여 있던 듯했다. 나쁘지 않은데요. 마치 키스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던 그의 말을 다시 들먹일 만큼.

강주한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나지막한 강주한의 한숨이 들리고 눈앞이 암전되었다. 어깨 위에 있던 강주한의 손이 하선우의 눈앞으로 포개진 것이었다. 다시 눈앞이 환해지고 볼이 따끔거렸다. 그가 찌푸린 얼굴로 엄지와 검지로 하선우의 볼을 꼬집어 당겼다.

“연애 많이 안 해봤느냐는 말 취소하죠.”

그대로 몇 번 잡아 벌을 주듯 가볍게 흔든 강주한이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떨어진 입술 위에 비스듬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벌써부터 들었다 놨다 하는 게.”

강주한은 다시 엄지와 검지로 하선우의 턱을 꼬집듯 잡았다. 그가 해사한 느낌의 웃음을 지었다.

“내 애인 아무래도 보통이 아닌 것 같네요.”

* * *

그리하여 빚에 허덕이던 하 사장은 강씨 왕조의 왕자님을 만나 살림이 펴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오색찬란한 무지개 깃발이 꽂힌 왕국의 탑신에서 왕자님의 가슴팍에 기댄 채로 하하하하 하선우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현실이 가능할 리 없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몸서리치는 하선우를 김주안 부장이 흘끗거렸다. 민망함에 괜히 헛기침을 한 하선우는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감기 걸리셨어요?”

“아니요.”

“방이 좀 싸늘하긴 하네요.”

하선우의 앞으로 파일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추우면 난방 트세요.”

난방비를 아끼려 궁상을 떨고 있다고 여긴 김주안 부장이 친절히 열풍기를 틀어주었다.

“그리고 이건 시생산 기간 동안 들어간 개발비 재무처리 보고서예요. 여태까지는 일반 판관비로 처리했는데 앞으로는 원칙대로 가려고 자산 처리했어요.”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김 부장이 놓고 간 파일을 열어 살짝 눈으로만 훑은 하선우는 서류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컴퓨터 모니터 왼편에 파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심사를 통과한 시생산 제품의 양산화로 울산 공장으로 내려간 이사의 몫을 포함해 당장 이번 주까지 처리해야 하는 서류였다. 그것들을 흰 눈으로 쳐다보던 하선우는 저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한숨을 내쉬었다. 등을 의자에 묻을 듯 깊게 기대자 의자가 아슬아슬한 각도까지 기울어졌다. 로비를 리모델링하면서 대대적으로 회사의 잡다한 집기들도 바꾸었는데, 하선우가 앉은 것은 대기업의 중역들이 사용한다는 일명 사장님 의자였다.

탈진한 사람처럼 온몸을 축 늘어트린 하선우는 멍하니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보통 월요병은 점심식사로 당을 확보한 뒤에 나아지곤 했는데, 오늘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오는 지금까지 줄곧 이 상태였다. 갑자기 낯이 확 붉어졌다가 아랫배가 콕콕 쑤시듯 간지러웠다가 넋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강주한과. 사귄다고?”

어절을 하나하나 끊어 중얼거리던 하선우의 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숨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흔들의자처럼 등에 힘을 주어 몸을 느릿하게 흔들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연애.

새하얀 천장에 강주한과의 연애에 대한 창작물을 쓰는 기분으로 하선우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러자 마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용지에 연애에 대한 시를 쓰라는 과제를 받은 것처럼 막막해졌다. 결국 하선우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바꾸었다. 좀 더 논리적으로 따져보기로 했다. 과연, 연애질이란 무엇인가.

아침저녁으로 달콤한 문자를 주고받고 영화나 연극 따위의 문화생활을 주말에 같이 하고, 가끔 여행 가고, 취미와 취향을 함께하거나 서로를 그리워하는 게 하선우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연애질이었다.

지금껏 하선우와 강주한 사이에 공유되어온 것은 섹스밖에 없었고 그 외의 것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기에 더 이상 생각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연애를 처음 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온갖 종류의 일을 미리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주한과 사귀려면 서류와 인감을 준비하고, 여러 가지 계약을 체결해야 할 것 같은 정신적인 중압감이 그를 압박했다.

이제 와 물릴 수나 있는 계약일까. 웃돈 없이 땡처리로 정신없이 팔려간 제품이 된 기분에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 둘째 형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얼굴 보기 힘든 동생님.

“왜 시작부터 빈정거리십니까.”

-어째 넌 장가간 우리보다 집에 더 안 들르는 것 같다. 결혼도 안 한 새끼가 아주 집 나가서 살맛났지.

“형이 너무 자주 가는 거잖아.”

-한 달에 두 번이 많은 거냐?

“엄마가 형 집으로 한 달에 너덧 번은 가니 문제지. 형수 별로 안 좋아해. 요즘은 시댁 너무 자주 가는 것도 이혼사유야. 적당히 해.”

-아냐, 어머니랑 여보랑 둘이 사이 좋아.

어머니 성격에 며느리와 참으로 잘 지내겠다 싶어 하선우는 코웃음 쳤다.

-시간 나면 우리 집에 놀러 오고 그래라. 영미가 삼촌 보고 싶대.

마찬가지로 형수가 질색할 일이었다.

“그래, 뭐… 봐서. 근데 왜 전화했어.”

-왜냐니. 짐작 안 가냐?

요점을 잡을 수 없는 뜬금없는 물음을 하선우는 좋아하지 않았다. 설핏 인상을 쓰며 선범에게 답을 물으려다 달력을 보았다. 사흘 뒤가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어머니 생신이네.”

-그래. 어머니 생신이다. 형님이랑 선열이, 형수, 조카들도 다 모이니까 이번에는 너도 꼭 와라. 이번에는 형수가 임신하기도 했고 식구도 많아서 외식하기로 했다.

하선우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설과 추석, 집안에 각종 연례행사가 있을 때마다 도피처로 삼던 회사일을 들먹일 생각을 하니 급작스러운 두통이 몰려왔다.

“봐서. 이번 주에는 도무지…….”

-지금 뭐라고 했냐.

별안간 뒤바뀐 분위기에 하선우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했지.

“……이번 주에 상황 봐서 가…겠다고.”

-이 새끼가 건방지게!

매섭게 호통 치는 목소리에 하선우는 선범에게 얻어터지던 초중고 시절이 떠올랐다. 이 새끼가 건방지게. 건방지다는 말은 몽둥이를 들고 셋째와 넷째를 훈육하는 그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반작용처럼,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위압감에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있을 때 잘 모시자. 두말 않게 해라.

“…….”

-어?

“어. …알았어. 형.”

순한 양처럼 얌전히 대답한 하선우는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한참 동안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다. 하선우는 형들의 권위적인 면을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어머니를 제외한 집안 구성원이 모두 남자이다 보니 위계질서가 굳건하게 잡혀 있었다. 한동안 사장님 소리만 듣다 이 새끼, 이 자식, 다소 격한 호칭을 듣게 되니 떨떠름했다. 사금파리로 박박 심장께를 긁힌 것처럼 자존심이 다쳐 얼얼했다.

그가 스스로 부모님에게 동성애자임을 밝힌 뒤로 집안의 연례행사로부터 멀어져 지낸 지도 3년이 다 되어간다. 회사일이라는 핑계를 둘러대기가 여의치 않을 때를 제외하고 하선우는 가능한 가족들 간의 모임을 회피해왔다.

형수들 간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과 그것을 무신경하게 방관하는 형제들, 어머니의 잔소리 속에서 공공연하게 하선우의 결혼 문제가 거론되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평생에 걸쳐 이룩해온 성공적인 삶이 바닥에서부터 부서지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움과 은연중에 드러나는 혐오, 자신을 부정해서라도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볼 때마다 하선우는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졌다.

“아우씨, 열받아.”

건조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른 하선우는 씨근거리며 창틀에서 몸을 뗐다.

“스카프, 상품권, 현금, …가전제품.”

예순여덟 번째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어떤 선물을 할지 곰곰이 생각하던 하선우는 탁상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어느새 6시를 향하고 있었다. 창가에서 뭉그적거리던 그는 결국 책상 위에 한가득인 서류 한 뭉치를 박스에 담아 들고 코트를 걸쳐 입고 사장실을 나섰다. 건너편 사무실로 들어간 하선우는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김 부장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퇴근하시게요?”

“재택근무.”

한마디로 일축한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던 김 부장은 말했다.

“전 그냥 여기서 야근하고 말래요. 집에 가져가서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 그래. 그냥 간다고 말하려고 들른 겁니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한 하선우는 파티션에 턱을 얹었다.

“사흘 뒤에 어머니 생신이에요. 작년에는 바빠서 못 챙겼어. 재작년에는 현금을 선물로 드렸는데 많이는 못 챙겼거든?”

친구로서 말하는 건지, 아니면 부하직원을 대하듯 말하는 건지 김주안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존대와 반말을 섞어 말하는 사장을 헷갈리는 눈으로 쳐다보던 김 부장은 뒤편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직원들을 흘긋거린 뒤에 다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올해는 제대로 챙겨드려야겠네요.”

“그렇지. 뭘 하는 게 좋을까.”

“어머니 성격이라면…….”

하선우와 같은 중학교를 다니며 어머니의 치맛바람을 지겹도록 보아온 김주안이었다. 그녀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요즘도 모임 잦으세요? 아파트 통장 하신다고 했나?”

“아마도 그럴걸.”

“그럼 아들 자랑 좀 하고 싶으시겠네. 생색내기 좋게 명품가방 어때요? 그것도 가격 센 걸로. 샤넬? 그 정도면 되겠다.”

“……아.”

하선우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정도 하는데?”

“음, 손바닥만 한 게 500만 원밖에 안 해요.”

미련 없이 파티션에서 몸을 떼어낸 하선우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서류가 든 박스를 들었다.

“에이, 하 사장님 부잣집 도련님이시잖아요.”

“우리 집 그렇게 부자 아니거덩?”

“참나, 하 사장님이 부자가 아니면 누가 부잔데요?”

김 부장에게 일별도 던지지 않고 하선우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손바닥만 한 걸 500만 원이나 주고 사다니. 기막힌 얼굴로 하선우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상표가 있는 옷을 걸치고, 돈에 구애받지 않는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금전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학금을 받았던 하선우를 제외한 3형제 모두 성인이 되어서도 1인당 1억에 가까운 학비가 들었다. 생활비와 자녀들의 용돈을 제외하고 남은 돈은 대부분 분양받은 아파트나 구입한 상가의 대출금을 갚는 데 사용해서 부동산과 같은 부동자산은 늘어났지만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은 늘 빠듯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도 여느 가정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게 자신을 위한 소비에 인색한 편이었다.

그나마 어머니의 소비습관 덕분에 부친이 주식투자로 아파트 한 채를 날렸을 때에도 분당에 아파트 하나를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는 하선우 사업의 대출 문제로 3억 가까이 근저당 잡혀있는 상태였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강남의 백화점으로 설정하려던 하선우는 고민에 빠졌다. 남의 돈 끌어다 쓰는 형편이지만 과거와 달리 어머니에게 명품백을 사드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고작 손바닥만 한 가방 하나가 500만 원에 달하는 가치를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천만 원의 반에 해당하는 돈이 아쉽기도 했고, 차라리 100만 원권 상품권을 드리고 권정옥 여사가 백화점에서 원하는 것을 직접 사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가족들 앞에서 의식주에 대한 아쉬운 소리를 한 적 없었다.

“그래. 돈이 최고지.”

돈으로 효자 노릇하는 게 제일 낫다는 결론을 내린 하선우는 내비게이션의 전원을 꺼버렸다. 히터의 기운으로 싸늘한 차 안이 후텁지근해지는 동안에도 그는 쉽사리 기어에 손을 얹지 못했다.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장 먼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캔의 풀탑을 젖혀 얼음처럼 차디찬 맥주를 마셨지만 체증 같은 답답함은 가시질 않았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회사일, 가족모임, 어머니와 아버지.

그는 식도 아래를 꽉 틀어막은 갑갑함의 원인을 헤아리며 슬리퍼를 꿰어 신고 한 손에는 맥주캔을 들고 원룸 안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세탁물을 모아놓은 바구니에 닿았을 때, 하선우는 비로소 체증을 불러일으킨 덩어리의 정체를 알아채게 됐다. 그곳에는 강주한이 입었던 가운이 놓여 있었다.

애써 차분하게 가운을 들어 올린 하선우는 가운에 묻은 말라비틀어진 정액의 흔적을 발견했다. 안 그래도 복잡하게 어질러진 삶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남자의 흔적이었다.

그가 입었던 가운 위에 차례대로 걸치고 있던 옷을 벗은 하선우는 켜켜이 쌓은 빨랫감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그것들을 모조리 뒤섞어 빨아버리고 샤워를 했다. 기분이 좀 나아진 상태로 서류가 든 박스를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기획서, 데이터표, 평가표, 계획서, 신고서 등 온갖 종류의 보고서가 한가득이었다. 신입에서부터 부장까지, 단계별로 결재를 거쳐 최종적으로 하선우의 책상 앞에 오른 서류들이었다. 보는 순간부터 한숨이 나왔지만 하선우는 애써 단순한 일거리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담긴 결정체라고 자꾸만 생각을 환기했다. 그는 늘 서류에 결재 사인을 할 때마다 최종결정을 내리는 사장이라는 직책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일은 쌓여 있고 정작 시급을 다투는 중요한 일은 야근으로 해치우고, 그러다 보면 개인 시간은 사라지고 자정까지 쫓긴 채로 하루를 넘겼다. 언제쯤 이 모든 일들과 시간이 몸에 밴 것처럼 익숙해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각 공장 라인별 업적 평가표를 확인하던 그는 별 의미 없이 뒤집어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발신인은 강주한이었다.

“선우 씨 퇴근했습니까.”

하선우는 그가 보낸 문자를 따라 읽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루 하고도 한나절 만에 닿은 연락이었다. 바쁜 탓에 하루 종일 잊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가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연인이라는 이름의 끈이었다. 그래서 그의 연락이 반가운 한편 마음의 짐이 되었다.

아직 회사라고 할까. 아니면 문자 답변을 조금 늦게 보낼까 고민하다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재택근무 중입니다’. 또박또박 마침표를 붙여 메시지를 쓰고 그 뒤에 ‘전무님’을 덧붙이던 하선우는 호칭을 지우고 새로 썼다. ‘주한 씨는요?’, 낯선 호칭에 하선우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곧바로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선우 씨.

“예.”

-오늘 잘 지냈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이상해. 속으로 중얼거리며 하선우는 애꿎은 스웨터 자락을 잡아당겼다.

“예. 전 잘 지냈습니다. ……잘 지내셨죠?”

하선우가 일부러 호칭을 붙이지 않는 걸 눈치챈 그가 웃었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지금 집입니까?

“예.”

-잘됐군요. 저도 목동입니다.

하선우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창가를 향해 고개를 뺐다. 오피스텔 앞 분수대 부근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동은… 왜.”

-일이 있어서요. 지금 엘튼 백화점 목동점 부근인데 만나죠. 바쁘면 일거리 들고 와도 괜찮습니다. 저도 재택근무할 생각이니까.

“엘튼 백화점에서 재택근무를요?”

-자세한 건 백화점 앞에 선우 씨가 도착하면 말하겠습니다. 일단 만나죠. 편하게 입고 와도 상관없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하선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8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백화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첫 만남부터 부담스럽게 선물을 사주려고 그러나 싶었지만, 일거리를 챙겨 오라는 그의 말을 떠올리고 하선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 그를 생각해 하선우는 결국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 * *

목동 번화가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백화점은 오피스텔로부터 20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평일 저녁, 겨울의 잔추위가 남은 거리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번화가와 주택가, 고층 빌딩이 각각 분리된 강남과 을지로 일대와 달리, 이곳은 모든 것이 버무려진 이상한 거리였다. 방송국과 신문사, 각종 금융 계열사, 멀티플렉스가 고급 아파트단지와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그 중심에 자리를 차지한 엘튼 백화점 앞에서 하선우는 재킷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걸음을 멈추었다. 폐점시간이 가까워져 거대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백화점 내부는 한산하기만 했다. 강주한이나 강주한이 수족처럼 부리는 비서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백화점 너머를 응시하던 하선우는 여의찮단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켰다. 강주한 전무님. 여전히 저장된 호칭이 그대로인 번호를 누르며 옆구리 사이에 끼워둔 파일들을 손으로 옮겨 꽉 잡았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선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예요. 방금 도착했습니다.”

-밑이겠군요.

밑이라는 말에 하선우는 자연스럽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뒤로 바짝 꺾어야 간신히 끝이 보이는 아득한 고층 아파트를 쳐다보았다. 내가 보이나? 눈을 가늘게 뜨고 위쪽을 바라보았지만 당연히 강주한이 보일 리 없었다.

“저 지금 백화점 입구에 서 있는데 어디로 갈까요?”

-백화점 뒤편으로 걸어오면 아이테르 1단지로 들어오는 입구가 보일 겁니다.

“아이테르요?”

치켜뜬 눈으로 하선우는 엘튼 백화점 위로 드높게 솟은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부릅뜬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던 하선우는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여기는 왜…….”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죠. 1단지로 와서 호수 6701번 호출하면 출입문 열릴 겁니다. 도착하면 전화 줘요.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하선우는 백화점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목동의 중심가에 자리한 백화점은 주상복합 건물이었다. 백화점 위로 지은 아이테르는 강남의 타워펠리스와 비견되는 서남부 유일의 랜드마크 타워이자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새삼스레 잊고 있던 사실 하나. 백화점은 엘텍의 계열사 중 하나였고, 이 주상복합 건물의 시공사는 엘텍 건설이었다. 언제쯤 강주한이 가진 부에 대해 무뎌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걸음을 옮겼다.

1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를 호출하고,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 더 강주한과 연결하는 복잡한 절차를 치른 뒤에야 하선우는 67층 복도로 첫발을 뗄 수 있었다. 중앙의 엘리베이터는 모두 네 대였고, 네 개의 문이 각각의 엘리베이터를 마주하고 있는 형식이었다. 6701호는 왼쪽 가장자리에 자리한 문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강주한이 기대어 서 있었다.

“금방 왔군요.”

그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긴장한 눈치의 하선우에게 손을 뻗은 그가 손목을 잡았다.

“저녁은?”

“먹었습니다. 전무님은요?”

“먹었습니다.”

눈살을 찌푸리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전무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레 찔려 주춤거리는 하선우의 손을 잡아끌며 복도를 걷던 강주한이 손목의 살 안에 입술을 묻었다. 움찔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강주한이 말했다.

“67층에 우리만 있습니다. 분양 당시부터 일부러 비워둔 곳이라 우리가 첫 입주자죠.”

“우리가 첫 입주자라뇨?”

“데이트를 외부에서 하기엔 어려움이 있고 또 난 외출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렇다고 하선우 씨 오피스텔에서 만나기에는 무리가 있고. 마침 선우 씨 집 근처에 남의 이목에서 자유롭고 보안도 철저한 적당한 장소가 있어서 살림 차렸어요.”

강주한은 느긋하게 말을 쏟아냈다. 하선우는 그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그를 뒷받침하는 재력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본격적인 것 같은데. 사귀기로 한 지 하루 만에 살림을 차리는 그가 부담스러워 가만히 쳐다보자 강주한이 손목 안의 여린 살에 입술을 가볍게 비볐다.

아무리 배부터 맞춘 사이라지만 사귀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거침이 없나 싶었다. 복도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그를 하선우는 부담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손을 잡은 채로 문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131313이니 기억해두십시오.”

그를 뒤따라 들어가던 하선우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현관으로 들어서던 강주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얼굴로 말문이 막힌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과감할 뿐만이 아니라 짓궂었다.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비밀번호를 설정한 강주한에게 하선우는 울컥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 번호로 했는데요?”

“하선우 씨가 선호하는 숫자 같아서요.”

“아니, 그런 거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어 목이 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하선우를 쳐다보던 강주한은 다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억울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하선우는 들으란 듯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현관 너머의 아파트 실내는 집이라기보다는 호텔의 로비 같았다. 베란다 없이 발코니가 확장된 거실은 농구코트처럼 장애물 없이 드넓게 확 트여 있어, 서울의 서남부 지역이 한눈에 보였다. 그래서 하선우는 강주한이 짓궂게 설정한 비밀번호로 화가 났던 것도 잊고 그가 뭔가를 내밀 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

낮은 조도로 거실을 밝힌 실내 밖으로 안양천이 흐르고, 저 멀리 한강과 월드컵경기장도 보였다. 하선우는 목동의 백화점을 들를 때마다 이 드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이 어떤 모습일지 늘 궁금했었다. 찬란한 인공광들의 향연. 엘튼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와 삼청동의 자택, 그리고 이곳까지. 돈으로 쌓아올린 첨탑이라면 어디든 높은 곳을 선호하는 강주한의 개인적인 취향을 하선우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다. 도시의 야경은 자연의 풍경과는 달랐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세상은 악취와 소음, 더러움의 모든 악다구니들로부터 멀어져 오히려 서정적인 모습을 띠었다. 오색찬란한 스카이라인은 고요한 목가와 모습만 다를 뿐, 그 성격은 다르지 않았다.

세상 참 아름다워 보이겠다, 생각하는 그에게 강주한이 손을 내밀었다.

“출입 카드입니다.”

강주한이 은색 바탕에 ‘AETHER’ 알파벳 글씨를 금박으로 입힌 카드를 내밀었다. 강주한의 연인으로 이곳에 드나들 자격을 주었다.

받아 든 카드를 조금 뚱한 표정으로 살펴보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말했다.

“건물을 출입하고 승강기를 탈 때 카드가 필요합니다. 정해진 층수에서만 내릴 수 있거든요.”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마시겠습니까.”

“예.”

“시럽 넣습니까.”

“아뇨. 안 넣습니다.”

“커피 내리는 동안 방 둘러보고 있어요.”

손끝으로 닫힌 문을 가리킨 그가 부엌으로 걸어갔다. 거실보다 어두운, 조명이 빗겨간 부엌으로 사라진 그는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붉은색에 가까운 얇은 카디건을 걸친 상체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길쭉한 다리만이 빛 아래로 드러났다. 곧게 뻗은 다리 아래 살짝 드러난 맨발까지 훑어본 하선우는 몸을 돌렸다.

현관과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방은 드레스룸이었다. 현대적인 느낌의 은색 실크벽지가 발려 있었고, 가구는 색이 어두워 빛을 흡수했다. 가까이 다가가 실버스틸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소리도 없이 수납장이 미끄러지듯 딸려 나왔다. 소재와 색상, 종류별로 허리띠와 넥타이가 곱게 개어져 진열되어 있었다. 사용감 없는 넥타이에서 새 물건 특유의 섬유 냄새가 났다. 다른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마찬가지였다. 새것이 분명한 와이셔츠와 슈트, 평상복, 그리고 손목시계와 넥타이 클립, 구두와 선글라스 따위가 섹션별로 나뉘어 있었다. 백화점 속 작은 명품매장이었다. 그 규모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방을 빠져나온 하선우는 옆방의 문고리를 돌렸다. 트레이닝룸이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운동할 수 있도록 두 대의 러닝머신이 통유리를 향해 놓여 있었고 헬스클럽에서 볼 법한 각종 운동기구들이 역시 사용한 흔적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다음 방은 비어 있는 방이었고, 그 옆방은 침실이었다.

방 안은 텅스텐 라이트 빛의 부분 조명만으로 밝혀져 있었다. 어둠이 감미롭게 감도는 분위기의 방이었다. 고풍스럽고 무게감 있는 브라운톤의 소파 옆으로 앤티크한 디자인의 트렁크 와인바가 있었다. 와인 하나 몰래 가져가도 티도 안 날 만큼 값비싼 와인병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엷게 금빛으로 채색된 로코코 양식의 콘솔에 놓인 도자기와 유리장식품, 복잡한 소용돌이 속에 당초무늬가 새겨진 앤티크 가구 하나하나가 고전 미술품에 가까웠다.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신혼부부에게나 어울릴 법한 관능적인 침대가 놓여 있었다. 새하얗고 풍성한 침구와 나란히 놓인 금수를 놓은 베개, 흰색 프릴이 달린 침대 시트를 본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귓덜미까지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강주한의 성격으로 보건대 침실에 대해 사소한 주문을 넣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죽고 못 사는 신혼부부도 아니고 방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야릇했다.

연애하자는 말을 수락했으니 무르기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이 본격적인 신혼생활은 삼키기도, 그렇다고 뱉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다. 집까지 완벽하게 꾸려놓은 상태이니 더더욱 발을 빼기가 불가능해졌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을 때도 여전히 하선우의 얼굴은 새빨갰다. 한숨을 푸욱 쉬며 밖으로 나온 그는 마지막 방문을 열었다. 마주 보는 두 벽면에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서재였다. 최신 컴퓨터가 놓인 적색의 커다란 원목책상 두 개가 서로 붙어 있어, 간단한 집무를 보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가 나온 방의 맞은편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 봤습니까?”

욕실은 비록 보지 못했지만 안 봐도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숙연해진 분위기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음에 들어요? 급하게 짐을 옮기느라 아쉬운 부분이 있던데.”

도대체 어디가 아쉬운데요. 그는 고개를 얼른 저었다.

“아뇨. 집이 굉장히… 멋지던데요.”

“마음에 들면 여기서 지내는 건 어때요? 매번 오고 가기 번거로울 텐데. 오피스텔 정리하고 여기서 지내겠습니까.”

그의 말처럼 이곳에서 저 아래세상을 굽어보며 살아보고 싶었지만 불편한 마음이 하선우를 가로막았다. 여기가 난공불락의 긴장 가득한 성채라면 저 아래 자신의 오피스텔은 그에게 쉼터였다. 무엇보다 단지 연인관계라고 해서 강주한의 것들을 자유롭게 누릴 권리는 자신에게 없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집이 더 편하니까요.”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어딘지 고고하게 느껴지는 쳐든 얼굴을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앉아서 커피 마셔요.”

“예.”

들고 있던 두툼한 서류더미를 내려놓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전무님은 여기서 지내시려고요?”

무의식중에 호칭을 전무님이라고 한 것을 깨달은 하선우가 괜히 강주한의 눈치를 살피며 잔을 받아 들었다.

“보통 일주일의 반은 삼청동 자택에서 재택근무하고 나머지는 회사로 출근합니다. 여기는 선우 씨 만날 때만 올 겁니다.”

한 손으로 뜨거운 머그잔을 쥔 채로 하선우는 서재를 둘러보았다. 서재를 포함해 여태까지 둘러본 방 하나하나가 모두 하선우의 오피스텔보다 큰 규모였다. 6701호, 이곳은 100평이 넘거나 그 근사치에 가까운 평수로 보였다. 관리비만 해도 1년에 천만 원이 훌쩍 넘을 터였다. 게다가 그의 말에 따르면 아이테르의 67층 전체가 분양 당시부터 비워져 있다 했다.

비자금. 세 글자가 하선우의 머리를 차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첫 데이트부터 재택근무라니, 참 낭만 없군요.”

데스크톱의 전원 버튼을 누르며 그가 말했다. 비자금이니, 검은돈이니, 하선우로서는 알 바 아니었다. 애써 석연치 않은 기분을 거두었다.

“그러게요.”

“지금이 8시 20분이니까 우리 10시까지만 일할까요.”

공식적인 연인으로서 맞이하는 첫날의 어색함을 일로 대신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10시까지 가져온 일을 모두 끝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한이 모니터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보며 하선우는 서류를 펼쳤다.

대부분이 오전 회의에서 보고받았던 내용들이었다. 최종결정을 기다리는 현안이 여섯 가지, 생산과 관련된 자잘한 일일보고가 수십 건이었다. 실무라인이 올린 서류 중에서 하선우의 판단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내용은 일단 보류하고 자금결제와 같은 간단한 서류부터 결재를 했다. 미숙한 판단으로 최종결정할 수 없는 서류를 일단 보류하고 또 보류하는 동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마셔요.”

어느새 등 뒤로 강주한이 다가와 있었다. 빈 잔에 커피를 채운 그가 하선우가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다 혼자 처리합니까?”

“아뇨. 제 선에서 처리하는 서류도 많지만 이사님이 울산에 내려가 계셔서 제가 대신 결재하는 것도 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강주한이 하선우가 보고 있던 파일을 잡았다.

“봐도 되겠습니까.”

대부분이 사소한 결재서류였지만, 수주를 넣는 회사에 노출되기엔 거북한 서류도 있었다. 감사받는 기분에 주저하다 하선우는 중요한 자료만 빼고 강주한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서류를 넘겨보며 강주한이 파일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말단 직원부터 이사까지 결재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 으음, 자재구매의 경우요.”

“좀 복잡한 편입니다.”

“어떻게 복잡한데요.”

낱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강주한은 한 번 더 물었다. 강주한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어서 하선우는 절로 긴장이 되었다. 신입사원이 상사에게 결재를 기다리는 심정이 이러할까 싶었다.

“보통 사원이 문서작성을 하면 대리, 과장, 회계팀 과장, 부장, 공장장, 그 다음에 사장순으로 결재합니다.”

쑥스러운 얼굴로 하선우는 덧붙여 말했다.

“좀 복잡하긴 하죠.”

“이런 것도 말이죠?”

강주한이 가리킨 서류는 울산 시내의 백반집에서 사용한 100만 원대의 점심식대 대금 지출결의서였다.

“……예.”

“엉망이군요.”

주눅 든 표정으로 하선우는 강주한의 손에 들린 서류를 쳐다보았다.

“더는 소기업 아니지 않습니까. 선우 씨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하다간 머지않아 과로사할걸요.”

강주한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혀를 차며 허리를 숙였다. 하선우의 등 뒤를 전부 다 감싸며 몸을 기울인 그가 가두듯 양 손을 책상에 댔다.

“특정 분야에 월등한 능력을 발휘해도 경영시스템 운영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CEO들이 많죠. 구멍가게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기 때문인데.”

조금 뜸을 들인 그가 하선우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말했다.

“선우 씨가 지금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하면….”

“전결규정을 정해둬야죠.”

지나치게 가까운 접촉에 어깨를 움츠린 하선우는 고개를 강주한을 향해 살짝 돌렸다. 뺨이 맞닿았다.

“선우 씨 회사의 경우 대부분의 결정을 최고결정자가 하고 있거든요. 분업화가 전혀 안 되어 있어요. 모든 것들을 사장이 다 확인하고 다 챙겨볼 수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이런 점심식대 관련 서류까지 확인해야 한다니.”

건조한 웃음을 흘리며 강주한은 손안에 든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하선우는 민망해할 새도 없었다.

강주한은 빈 종이를 꺼내 글자를 갈기듯 써내려갔다. 생산일보, 제안서, 영업목표, 실적분석, 사업계획서 등 각종 결재서류의 내용에 따라 차등을 두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각 분야마다 연동되는 전자결재 프로그램에 대해 조언했다.

하선우는 조직시스템의 사소한 사항까지 모두 알고 있는 그에게 내심 감탄했다. 하선우의 머릿속에서 엘텍의 자제들은 풍요로운 환경 탓에 치열함과 치밀함이 빈곤하리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접해본 중소기업은 대부분 이런 시스템적인 부분이 허술했습니다. 그에 반해 대기업의 시스템은 표준화되어 있죠. 관료적이라는 비판은 들어도 배울 건 배워야죠.”

강주한은 빼곡하게 들어찬 종이의 귀퉁이에 standardize를 빠르게 휘갈겼다.

“왜 이런 조직이 필요한지 선우 씨는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하선우의 눈길이 종이의 가장 가운데에 적힌 SYSTEM에 닿았다. 깊게 생각해본 적 없던 문제였기에 대답은 더디게 나왔다.

“일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강주한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어깨에 기댔던 턱을 떼어내고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테이블 위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그가 하선우를 마주 보았다.

“선우 씨의 대답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정답의 근사치는 아닙니다. 답은 안정적인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죠.”

그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하선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선우를 지그시 응시하던 강주한이 이윽고 말을 이었다.

“선우 씨의 회사에는 매뉴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두 CEO가 이 모든 걸 떠안고 있다고 봅니다. 하선우와 이석 두 사람 중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 회사도 사라지게 되는 거죠. 반면에 표준화된 시스템이 있으면 그 일을 누가 하더라도 결과물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 일을 하선우 씨가 하든, 선우 씨 자리를 대신한 다른 이가 하든, 매뉴얼을 따라 진행하면 누군가는 계속 조직을 생존시킬 겁니다. 조직 안의 사람들은 가치를 매기고 판단할 필요가 없어요. 모든 가치의 우선은 회사의 생존이니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요구되는 행동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할 필요도 없죠. 조직 안의 인간들은 그저 회사가 요구하는 일을 할 뿐이죠.”

하선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독려하듯 말을 이었다.

“안정적인 회사가 되려면, 구성원이 문제를 일으켜 그를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칠 경우 다른 이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조직과 매뉴얼이 필요한 겁니다.”

간신히 짓고 있던 웃음이 조금 가신 하선우를 보며 그가 말했다.

“예를 들어 하선우 씨가 NnG를 그만두고 엘텍전자로 옮겨 가거나.”

강주한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선우 씨가 NnG에서 버려진다 하더라도.”

얼굴이 가까워졌다.

“회사는 돌아가야 한다는 거죠.”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눈빛이 달라지는 하선우를 확인하고는 몸을 뒤로 젖혔다. 한쪽 어깨로 머리가 기울어 가늘어진 눈으로 하선우를 응시했다.

하선우의 얼굴에선 어느새 웃음이 완전히 가셔 있었다. 그가 든 예시가 이상하기도 하거니와 그의 말이 지독히도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구성원의 쓸 만한 가치가 사라지면 언제든 다른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논리.

조직은 언제든 인간을 버릴 수 있다. 대체물이 넘쳐나므로. 온기 없는 그의 말은 일견 진심인 듯 보였지만 모호했다. 신중하게 살펴보는 그의 숨죽인 시선이 마치 하선우의 사상을 떠보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던져 하선우의 진심을 엿보려는 듯이.

“그런 조직 속에서라면 강 전무님도 마찬가지겠죠.”

칼부림 한 번에 우수수 떨어져나가는 수만 개의 팔다리를 보고도 신경 쓰지 않을 그 역시도 버려지고,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수명이 다 된 건전지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듯.

말을 뱉은 직후 하선우는 후회했다. 바보 같은 말대답이었다. 대한민국 땅에서 그의 자리를 다른 이가 차지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렇겠죠.”

하선우의 말을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이 강주한의 입술에 희미하게 걸렸던 웃음이 깊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 서글프죠. 평생을 헌신한 조직에 배신당한 기분이 들 테니까.”

그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다란 머그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희미한 미소가 걸린 입술을 감추며 느릿하게 침을 삼켰다. 그의 갑작스러운 물러섬에 하선우는 감정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사실 CTCO 부서에 하선우 씨를 스카우트하는 생각 자주해요. 언제 한 번 진지하게 꺼내고 싶은 얘기기도 하고. 사내에서 야한 짓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그 이유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딘가 무구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웃던 강주한은 되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잔을 내려놓고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진담으로 한 말인데 왜 반응이 없습니까?”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빙글거리는 생각을 정리해 겸연쩍은 투로 말했다.

“제가 사장인데 어떻게 옮겨요.”

하하, 소리 내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이었다. 곤란한 빛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보며 강주한은 알겠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렇죠. 생각해보라는 거였습니다. 강요하려던 건 아니고.”

그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하선우의 얼굴을 보며 담박하게 말했다. 손을 뻗은 그는 하선우의 뒷덜미를 지나 귓불 부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사내권력을 초월한다던 CTCO 부서는 근사한 집단이었다. 강주한의 제안이 매력적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하선우는 그 제안을 수용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하선우의 뇌리로 고등학교 시절 보았던 대부의 유명한 대사가 스쳐 지나갔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그의 제의가 권위에 대한 반문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코를레오네식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인지, 가볍게 넘길 만한 투정인지 분별이 되지 않았다. 아니면 자신이 강주한을 너무 속을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이미지화한 나머지 쓸데없이 깊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작 당사자는 더는 그 화제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별안간 다른 얘기를 꺼냈다.

“선우 씨, 영어회화 가능합니까?”

“원어민 수준은 아니지만 가능합니다. 근데 왜…….”

“엘텍 계열사 경영컨설팅을 맡고 있는 해외업체를 소개해줄까 해서요.”

하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선우 씨와 이 이사의 노력만으로 개선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아서 말이죠.”

“저야 좋죠.”

지금까지 언짢았던 기분도 잊고 얼른 대답한 하선우는 자신의 답변이 지나치게 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탕을 든 어른에게 달려드는 어린아이처럼 신중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일까 지레 찔렸다.

“그럼 다음 주에 미팅 약속 잡겠습니까.”

“근데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일부러 뜸을 들인 하선우는 목소리를 낮추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이사님과 상의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결정은 미루기로 하고 이 얘긴 그만하죠. 이제 일 얘기 지겨워지려고 그러니.”

어깨를 으쓱 들먹인 그가 돌연 하선우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는 여전히 책상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채였다. 뭔가가 떠올랐는지 웃는 낯이 되었다. 갓 내린 커피에 맺힌 거품 같은 그윽한 미소였다.

“보통 첫 데이트엔 뭘 했습니까.”

“대개 저녁을 같이 먹고 술 마신 뒤에 헤어졌죠. 안 헤어질 때도 있긴 했지만.”

조금 망설이다 하선우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이렇게 본격적인 신혼살림을 차리진 않았습니다.”

“신혼살림?”

하선우는 눈을 굴려 방 전체를 쳐다보았다. 이게 다 신혼살림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무언의 대답을 했다.

“특히 침대가 아주…….”

“아주?”

“너무 대놓고…….”

“대놓고?”

말을 따라하는 강주한의 반응에 하선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강주한의 볼이 웃음으로 당겨졌다. 하선우는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자극적이던데요.”

가볍게 멱살이 잡히고 당겨졌다. 입맞춤이 깊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뒷머리 속으로 손이 파고들어 바짝 옥조이고 혀뿌리부터 얽혀들었다. 질척하게 입 맞추던 입술이 떨어진 후 강주한이 하선우의 귓불을 깨물었다. 말캉거리는 혀와 점막, 숨결 가득한 호흡이 귓바퀴를 애무할 때마다 강주한의 허벅지에 올려뒀던 하선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도 일 치겠구나.

머릿속의 경고등이 깜빡거렸다. 그가 하선우가 입고 있던 니트를 밑에서부터 벗기려 했다. 밋밋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옷을 가슴께로 올리는 강주한의 손을 잡았다.

“저, 저기.”

“예.”

“몸이 안 좋아서.”

귓불을 잘근거리던 강주한이 입술을 뗐다. 하선우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몸이 어떻게 안 좋은데요.”

“토요일에 너무 무리해서 그런지 좀… 상태가 오래가네요. 하하.”

“느낌이 남았습니까.”

“무슨… 느낌이요.”

“벌려진 느낌.”

확 붉어졌다.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한테 왜 이래요,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강주한을 쳐다보며 하선우는 말했다.

“되게 짓궂으십니다.”

“선우 씨야말로 놀리는 재미가 있는 거 압니까.”

하선우는 그에게 당황스러운 기분을 표현할 적당한 수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강주한이 뺨을 가볍게 꼬집어 당겼다.

정말 놀리는 건가, 아니면 나름의 애정표현인가 고민하는 사이 그가 책상에서 내려왔다.

“계속 일할 게 아니라면 일어날까요.”

하선우는 그를 따라 일어섰다. 침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중앙의 침대를 지나쳐 트렁크 바 앞에 섰다. 빽빽하게 꽂힌 와인 중 하나를 꺼냈다. 그가 코르크 마개를 따고, 와인잔을 흰 면수건으로 닦아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선우는 침대 맡에 앉았다. 뒷짐을 져 허리를 지탱하던 하선우는 손바닥 안에 감기는 침구의 느낌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실크 침대였다.

피부에 감기는 느낌은 좋지만, 관리하기가 힘들여 여간해선 일반 가정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종류의 침구였다. 하선우 역시 호텔에서 딱 한 번 이용해본 적 있었는데 맨살을 부빌 때의 감촉이 남달라 유독 느꼈던 기억이 있었다. 만날 그 짓만 하고 싶겠다 싶어, 하선우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까부터 왜 자꾸 한숨 쉽니까.”

침대가 너무 야하다고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아직도 이 상황이 안 믿겨서 그런가 봐요.”

하선우의 말에 작게 코웃음을 흘린 그는 맞은편 벽의 문을 열었다. 욕실문이었다. 와인을 따른 잔을 손안에 들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욕조의 주변에 와인잔을 내려놓은 뒤에 카디건을 벗었다. 그는 곧바로 허리춤의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늘씬하게 뻗은 허리와 나비 모양의 등 근육에 하선우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강주한은 상반신을 탈의한 채로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같이 씻죠.”

하선우는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압도하고 때로는 의지를 벗어나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강주한이 가진 권력인가, 분위기인가, 아니면 준수한 그의 외모인가. 빗뜬 눈으로 쳐다보는 강주한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하선우는 자신도 모르는 새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이렇게 수동적인 기분이 드는 연애는 처음이었지만 결국엔 사귀는 동안 강주한은 자신의 것이었다.

내 것.

하선우는 내 것이라는 문장의 어감이 주는 간질간질함에 작게 조소했다. 그를 좋아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강주한이 자신의 애인이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결국 그를 따라 옷을 훌렁 벗어버리고 욕실로 들어간 하선우는 이미 욕조에 들어가 있는 강주한과 마주 앉았다. 그가 건넨 잔을 받아 들고 커다란 자쿠지 욕조에 조심스럽게 등을 기댔다.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 아래로 허리를 말아 좀 더 깊게 들어가자 턱 아래에서 물이 찰랑거렸다. 자쿠지를 틀어 공기방울이 탄산처럼 피부에 들러붙었다 터졌다. 절로 노곤하게 피곤이 풀어졌다.

“선우 씨는.”

강주한은 와인을 조금 들이켜고 잔을 욕조의 테두리에 올려놓았다. 곧이어 말을 이었다.

“왜 아직도 전무님이라고 부릅니까.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으로 불렸으면 하는데.”

잔을 기울이며 찔끔한 얼굴로 강주한을 쳐다본 하선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까진 호칭이 어색해서요. 어쩐지 전무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도 같고.”

“선우 씨 은근히 낯가리네요. 뭐, 그런 구석도 조금 귀엽긴 하지만.”

“다들 안달난다고 하면서 제게 서서히 빠져들더라고요.”

하선우는 제가 한 말이 웃겨 흐, 웃는 소리를 냈다. 점점 더 웃음이 깊어지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몸을 더 낮췄다. 풍성한 거품에 입술이 가려 코 윗부분만 수면 위로 보였다. 다시 잔을 찾아 손바닥 안에 얇은 와인잔의 목을 감으며 강주한이 말했다.

“나에게 묻고 싶은 거 없습니까. 보통은 사적인 부분을 많이 궁금해하던데.”

그가 자쿠지를 끄려 손을 뻗었다. 길게 뻗은 팔을 가로지르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윤기나게 젖은 피부 위로 느릿하게 거품이 흘러내렸다. 팔꿈치 아래부터 팔목, 손등으로 이어지는 도드라진 혈관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강주한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선우 씨가 궁금하다면 뭐든 대답해줄 테니까.”

자쿠지의 전원이 꺼지고 물의 와류가 멈췄다. 갑작스럽게 고요가 찾아왔다.

부풀어 오른 입욕제의 거품 때문에 보이지 않던 그의 다리가 굽혀 앉은 하선우의 정강이에 닿았다. 천천히 미끄러진 발끝이 발목에 닿고 살을 매끄럽게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사적인 질문. 강주한에 대한 질문. 기분 좋은 온도의 물속에서 몸을 노곤고곤하게 덥히고 있자니, 생각의 회전이 느려졌다. 발목에 닿은 그의 발가락에 신경이 분산되어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반복하던 하선우는 강주한에 대한 정보를 주섬주섬 거두기 시작했다. 서주나. 익숙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김 부장이 증권가 찌라시에서 떠도는 이야기라며 재벌과 연예인의 스캔들에 대해 떠들었던 얘기였다.

뭐든 대답해준다고 했지만 이런 걸 물어봐도 될까. 하선우는 생각했다. 젖어 있는 그는 어딘지 너그러워 보여 조금 경솔하게 굴더라도 봐줄 것 같았다.

“서주나랑 만났다는 소문이 있던데.”

첫 질문이 대놓고 세속적이라 하선우는 말하면서도 민망스러웠다. 강주한은 콧등을 찡그렸다.

“그런 질문은 반칙인데.”

말의 뉘앙스와는 달리 여유롭게 어깨를 들먹인 그가 말했다.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와전됐는지 모르겠지만 서주나 씨와 만났던 건 다른 사람일 겁니다. 엘텍 광고모델이긴 했어도 실제 얼굴도 본 적 없는 걸. 음, 내 취향은 마르고 키 큰 모델 쪽에 가까워서. 누굴 만났는지 묻는다면 할 말 없지만.”

더는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는 비밀스럽게 웃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묻죠. 하선우 씨 취향은 뭡니까.”

“……저도 대답해야 하는 거였습니까?”

강주한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강주한을 빤히 바라보던 하선우는 그대로 눈을 굴려 천장을 쳐다본 뒤, 다시 강주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스스로도 자신의 취향을 확신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좀 덩치 있고 우직한 사람에게 눈…길이 가더라고요.”

“우직?”

“예. 밭 가는 소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강주한도 하선우도 상대방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서로 밑지는 질문이었다.

음, 입안에서 끄는 소리를 내며 욕조의 테두리를 뽀드득 문지르던 강주한이 욕조에 기댔던 자세를 틀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는 듯 하선우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다음 질문.”

“사소한 일로 울어본 적 있으십니까.”

“질문이 왜 하나같이 다…….”

난감한 얼굴로 말하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 역시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흥미가 생겼다.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로요. 영화 보다가 울었다든지, 게임에서 져서 울었다든지.”

강주한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거품으로 미끌거리는 손으로 턱을 괴고 미간을 모으며 하선우를 보았다. 그는 웃지 않았지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선을 긋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분히 장난스러웠던 질문의 의도를 알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일본에 사는 3년 동안 이지메를 당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친구가 없었고. 키웠던 개가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부당하게 차별을 받아서 서러움에 베개 좀 적셨던 것 같군요. 어렸을 때라 너무 물렀었죠. 하선우 씨. 이건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말하는 중간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심각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누그러진 투여서 하선우는 나무라는 그의 말을 넌지시 넘겨버렸다.

“중학교 이후로는 어떤 학생이었어요?”

“그저 조용한 학생이었습니다.”

“주변에서 그렇게 안 뒀을 것 같은데요.”

어찌 된 까닭인지 하선우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강주한의 시간들이 궁금해졌다. 하선우의 수사적 태도에 그는 거들먹거리는 태도 없이, 어린아이에게 얘기하듯 아주 천천히 말했다.

“중학교 이후로는 다들 알아서… 음,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고 할까. 성적이 제법 상위권에서 머물던 학생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배경 때문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마 후자겠죠.”

더 이상의 부언 없이 그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묻죠.”

잔을 입가로 가져가 와인을 마시려던 그가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한참 동안 하선우를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그렇게 재수 없었습니까.”

그의 말이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던 하선우는 처음이라는 말을 단서 삼아 최초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잊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홍콩, NnG President Seon Woo, Ha, 명찰, 북적거리는 컨벤션 홀의 후터분한 공기가 플래시백됐다.

재수 없다.

그것이 강주한에 대한 하선우의 최초의 인상이었다. 총수의 아들이라고 해봤자 아버지 잘 만난 일개 인간일 뿐이라고, 돈냄새 나는 그를 멸시하듯 씹어 뱉었던 중얼거림이었다.

입에 본드칠을 한 것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멍청하게 강주한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가까스로 말했다.

“그때 제가…….”

“…….”

“실언을 했던 것 같은데 아마 별생각 없었을 겁니다. 그때 한참 회사도 어렵고, 홍콩까지 와서도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세상 모든 게 다 원망스러울 때라.”

미안함에 변명을 궁색하게 갖다 붙이는 하선우가 무색하도록 그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강주한은 처음부터 진지하게 던진 질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변명을 늘어놓는 하선우를 질문의 의도에서 벗어난다는 듯 쳐다보았다.

“장난으로 던진 질문인데 내게 온갖 변명을 공들여 늘어놓을 만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숨을 쉰 그가 말을 이었다.

“명색이 애인인데 그런 걸로 매번 거래처 사장님 대하듯 소심하게 굴면 쓰나.”

앓는 소리를 내며 그가 욕조에 몸을 기댔다. 다그치는 것조차 부드러운 어조여서 하선우는 긴장했던 자신이 도리어 한심하게 느껴졌다. 뒷목을 의미 없이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하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근데 들으라고 대놓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들으셨구나. 어쩐지…….”

소심하게 덧붙인 말에 강주한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지만, 하선우는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하선우 자신이 질문할 차례였다. 늘 그를 궁금해왔으면서도 막상 기회가 손안에 쥐어지자 강주한이란 인물을 쪼개놓은 수만 개의 파편 덩어리 속에서 무엇을 주워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어진다. 어려운 선택이다.

고개를 들어 명상을 하듯 그를 쳐다보던 하선우의 뇌리로 생각이 스쳤다. 피식거리는 웃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뻔하고 한심한 질문이었지만, 그럼에도 꼭 한 번쯤은 넘겨짚고 가고 싶었다.

“길에서 떡볶이 드셔보셨습니까?”

조금 달아오른 목소리로 물었다. 한동안 하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강주한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그런 게 궁금해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하선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학창 시절에 노점에서 친구들과 먹어볼 기회가 있어 두어 번가량 먹긴 했지만 선호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 계속 나올 것 같아서 미리 말하지만 원래 인스턴트 음식과 사람 많고 혼잡한 장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적도 없고요. 이젠 제 차례군요.”

빠른 어조로 말하던 강주한이 돌연 멈칫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로서도 해도 될지 확신에 이르지 못한 이야기인 듯했다. 조금 뜸 들인 끝에 그는 석연치 않게 품고 있던 의문을 꺼냈다.

“일전에 했던 말이라 선우 씨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

“뭔가를 강렬하게 염원해본 적 있다는 말, …그 대상이 사람이었습니까.”

이따금씩 말에 휴지기를 두며 그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물었다.

‘하선우 씨는 뭔가를 강렬하게 염원해본 적 있습니까.’

강렬과 염원이란 단어의 조합이 낯간지러워 하선우 역시 기억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이 궁극적으로 애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때문에 무조건적인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과 달리, 자신에게 관심도 두지 않던 누군가의 무심함을 각별하게 간직하던 과거를 떠올렸었다.

“아아. 그 얘기요.”

무릎을 가슴으로 당겨 안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강렬한 염원이란 말이 좀 낯간지럽긴 한데 그 대상이 사람인 건 맞아요.”

쑥스러움을 감추려 어깨를 으쓱했다.

“대학 다닐 때 짝사랑했던 선배 얘기예요. 각별하기야 했지만 뭐… 다 지난 얘기죠.”

“덩치 있고 우직한, 밭 가는 소 같은 느낌의 선배였나 보죠.”

그의 말이 어딘가 희미하게 빈정거리는 듯했기 때문에, 보통의 연인들이 그러하듯 시샘하는 듯 느껴져 하선우는 풀썩 웃었다. 망설이는 기색으로, 하지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듯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우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강주한은 잔을 기울였다.

“요즘도 연락하고 지냅니까?”

“졸업하고 선배 결혼한 뒤로는 연락 끊겼습니다.”

하선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 선배 주변사람과 연락이 닿았는데 회사가 부도났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소재불명 돼서 어디서 지내는지 알 길도, 도울 길도 없고요.”

“그것참 안됐군요.”

하선우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강주한이 대답했다. 과거의 기억에 잠시 심취해 있던 하선우는 마뜩찮게 다가온 강주한의 동정을 왜곡하지 않으려 조금 웃어 보였다.

“예. 안됐죠.”

하선우는 세운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그리고 불쑥, 말을 꺼냈다.

“첫사랑은 어떤 사람이에요?”

“이런 얘기 안 하는 게 좋을 텐데요.”

“제가 설마 트집 잡겠어요? 그리고 먼저 물었던 건 주…한 씨였잖습니까.”

더듬더듬 불린 이름에 그가 웃음 지었다. 만면으로 퍼져가는 웃음을 말없이 지켜보던 하선우는 잠시 후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첫사랑이 누군데요.”

“글쎄. 난 선우 씨와 달리 누군가를 강렬하게 염원해본 적 없어서.”

그가 빈정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긴 했지만 그는 그 자신에 대해 해줄 수 있는 얘기를 해주었다. 고등학생 시절 만났던 그녀는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기업의 계열사 사장 딸이었다고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자 스스로 떨어져 나갔고 강주한의 표현대로 지금으로썬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여자들과 심심한 연애를 몇 번 반복한 끝에 하선우를 만나게 됐다고 했다. 그 중간 과정 속에 사별한 아내 서유임이 있었지만 하선우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림 속 탐스러운 과일처럼 단순한 정물에 불과했던 그를 조금 더 다면적으로 알아가고, 서로 간의 낙차의 폭을 재고, 차이점을 하나하나 꼽았다. 그도 하선우처럼 때로는 삶의 어려움 속에서 분투했고, 돌파구를 찾아왔다.

의문이 해소되는 사이 온수는 미지근하게 식어갔고 욕조의 거품은 꺼져 서로의 맨몸이 드러났다. 그리고 발견하게 되는 의외의 구석들. 이 순간만큼은 그를 수식해온 돈, 악당, 재벌과 같은 단어들이 한낱 잉여물로 느껴진다.

하선우는 그의 그윽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 대해 품어온 오해들을 떠올렸다. 그는 개인이 아니었고, 지구적인 거미줄의 중심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지만 총수의 아들이라는 필터를 빼내면 하선우와 같은 욕조에 앉아 있는 조금 독특한 사내일 뿐이었다. 이편과 저편으로 세상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매도당한,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는 남자.

춥죠. 나갈까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미지근하게 식은 물속에서도 그의 섬세하고도 커다란 손은 따듯했다.

내민 손을 맞잡으며 하선우는 생각했다.

의외로 다정한 구석이 있는 그는, 어쩌면 정말로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 * *

남자는 긴 시간 동안 그를 엿본 이후로 가장 만족스러운 얘기를 전해 들었다. 실용적이고 신랄한 데다가 성적인 상상력의 여지까지 주는 아슬아슬한 이야기였다.

“잠깐. 좀 더 설명해봐.”

갑자기 구미가 당긴 남자는 전화 건너편 상대방의 뒷말을 종용했다. 그러면서도 다리 사이에서 열심히 봉사 중인 여자와 눈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짓을 오랫동안 반복해오다 보니 그는 오럴을 하며 눈을 맞추는 것을 어색해하는 그녀의 눈빛만으로도 여자의 성격은 물론 그녀의 성장과정과 꿈꾸는 미래의 톤까지도 꿰뚫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데뷔와 동시에 운 좋게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연이은 작품의 실패로 하락세를 탄 여배우의 지루한 사연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살림을 차리셨다.”

그의 눈은 인상을 썼지만 그의 입술은 못내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웃고 있었다.

“그것참 흥미로운데.”

그는 잔뜩 주름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목을 울려 끌끌 웃었다. 피부 위를 간질이는 서투른 자극을 음미하며 남자는 전화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급 아파트의 전 층을 비워 두 사람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값비싼 선물을 안겨주는 것까지는 지극히 그의 형다운 연애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상대가 좆 달린 사내, 그것도 한 기업체의 오너인 적은 없었다. 그는 건너편에서 몇 초의 시간차를 두고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강주한의 연애상대는 배터리 매니지먼트를 운영하는 기업인으로 듣기만 해도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작은 회사의 오너였다. 그리고 남자는 오너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하선우. 하선우.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몇 번이고 이름을 곱씹던 그는 분명한 기시감을 느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건공중을 응시하던 강태한의 시선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여전히 오럴 중인 여자에게로 옮겨졌다.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듯 그는 검지와 엄지를 비벼 딱,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때도 이렇게 여자와 오입질을 하려고 호텔을 찾았었다.

엘튼 호텔의 최상층에 위치한 어두컴컴한 라운지에서 여자를 끼고 술잔을 기울이던 그때, 불청객처럼 그의 형제가 쳐들어왔고 뒤이어 뻣뻣한 자세로 하선우가 들이닥쳤다.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내색을 숨기지도 못하는 요령 없는 표정을 보며 그는 하선우를 연예인이거나 연예인 지망생이라고 오해했었다.

그의 형제들은 오랜 시간 동안 기억력과 관찰력을 예리하게 단련해온 사람들이었기에 강태한은 어렴풋하게나마 그날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 떠올리기 시작하자 뒤는 순조로웠다. 하선우는 엘텍전자의 본사에서 기술시연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회사에 투자를 유치하는 데 힘을 실어주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본인이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빨아주는 규모가 남다르다 싶더니, 제법 오래 하선우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강주한이 일탈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일탈이 아니었다. 그는 늘 조심성 있게 행동했고 일탈행위조차 늘 목적의 방향과 일치하는 편이었다. 당시에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순간, 드러난 결과를 놓고 과거의 행적들을 더듬어보면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도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전개도가 있을 터였다. 통화를 끝낸 뒤 넋을 놓은 표정으로 붉은 입술 속으로 사라졌다 드러나길 반복하는 자신의 성기를 바라보던 강태한은 어깨를 향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아…씹. 빼.”

턱관절이 아리도록 강태한의 성기를 물고 있던 여자는 그 말에 주춤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부릅뜬 눈으로 강태한을 보기만 할 뿐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어깨를 발로 밀어낸 강태한은 여자의 턱을 발끝으로 들어 올렸다.

“순진한 척하느라 계속 이로 긁는 거야, 아님 입보지 쓸 줄 모르는 거야.”

수치심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여자를 바라보며 강태한은 말했다.

“응? 대답 좀 해봐.”

발끝으로 턱을 위아래로 잡아 흔들었다. 여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강태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진한 척하는 겁니다. 입보지를 쓸 줄 모르는 겁니다. 시발, 둘 중 하나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여자의 눈가가 경련으로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강태한은 말했다.

“멍청하긴. 나가.”

강태한은 웃음기를 보태 말했다. 결국 정성껏 화장한 여자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수습할 새도 없이 가운을 챙겨 방 밖으로 달아나듯 나갔다. 사실 그는 불쾌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여자를 함부로 대한 것에 불과했다. 그는 지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신경은 이미 다른 데 닿아 있었다.

차갑게 식은 몸 위로 가운을 헐겁게 걸친 그는 핸드폰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몇 분 뒤 문밖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사라졌다. 곧이어 방으로 들어온 사내의 손에는 테블릿PC가 들려 있었다.

“여자는 돌려보냈어요?”

“네.”

“몇 장?”

몇 장으로 입막음을 했느냐는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비서과장의 얼굴을 본 강태한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가져온 거나 줘요.”

“네.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그가 가져온 태블릿 안에는 엘튼 호텔의 자회사 설립에 관한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엘피어스 종합 리조트 사업기획이란 보고서로 명명된 파일을 휙휙 넘겨 읽으며 강태한은 테이블 위에서 담배를 꺼냈다. 강태한이 필터를 입에 물자마자 과장의 곁에 서 있던 실장이 허리를 숙여 담배의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사전 심사제로 법령이 개정되긴 했지만, 주무부처에서 반대한다고 합니다.”

파일을 빠르게 읽어 내리며 강태한이 물었다.

“주무부처면… 문화체육관광부?”

“예.”

아, 그놈의 꼰대들. 혀를 찬 강태한은 뺨이 홀쭉해지도록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복합 리조트 허가를 신청했던 외국업체에 대해 모두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제주 도지사는 뭐래. 반발하고 있고?”

“예. 문화체육관광부의 결정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입장에서 보자면 주무부처의 반대가 다행이긴 합니다. 이번에 외국업체에 복합 리조트 건설을 허가했다면 엘튼의 신사업 확장에 방해가 됐을 겁니다.”

강태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시작부터 가로채이는 건… 폼이 안 살지. 스타트는 내가 끊고 싶었거든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그는 곧바로 표정을 심각하게 바꾸어 물었다.

“주무부처에서 반대한 이유가 뭐래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황상으로 보면 사행산업이란 특성 때문에 허가 절차를 엄격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리조트 건설이면 허가를 내줬을 걸, 카지노 중심 복합 리조트 건설이라는 이유로 계속 부적합 판정을 내리고 있단 말이네.”

강태한은 소리 내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고 지금 역시 대답을 요하는 말투는 아니어서 실장은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지난해 도입된 카지노 사전 심사제를 통해 제주도의 서귀포시에 올 초 두 개의 외국업체에서 카지노 중심 복합 리조트 건설 허가를 신청했다. 카지노 사전 심사제는 미화 5,000만 달러, 한화로 600억가량을 내면 수시로 카지노 허가를 신청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나 사행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염려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탓에 지금껏 카지노 중심의 복합 리조트 건설을 허가받은 기업은 없었다.

재떨이에 담뱃재를 아무렇게나 털어내는 강태한은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순히 경쟁업체가 리조트 건설 허가를 받지 못해 만족했다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강태한의 미소는 도색적인 것에 가까웠다. 아마도 조금 전 여배우와의 잠자리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겠지. 실장은 지금껏 호텔 룸을 거쳐 간 여자들을 생각했다.

강태한은 홍콩에 머무는 지난 2년여간 홍콩과 마카오의 카지노를 들락거리며 수없이 도색과 도박을 즐겼다. 경영수업이라는 명목으로 홍콩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강태한은 엘텍가에서 떨어져나간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강태한의 생활은 방탕하기 그지없었고 상사의 일상을 보좌해야 했던 장 실장은 홍콩에서의 삶을 좌천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일어난 변화를 시작으로 장 실장은 강태한을 보좌하는 일을 단순한 좌천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가 강태한을 바라보는 도색한이란 시선에 또 다른 관점을 추가하게 된 건, 강태한이 그에게 내린 비밀스러운 지령 때문이었다. 올 초부터 그는 한국을 오가며 관광사업과 관련한 정부 주무부서의 인물들을 매우 은밀하게 포섭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태한은 보고서를 소리나게 덮으며 장 실장에게 물었다. 눈이 개구리처럼 쏟아져 나올 듯 커다랗고 눈 밑의 꺼풀이 축 처진 사내였다. 유난히 입술이 보랏빛이라 안색이 퀭해 보이는 그를 향해 강태한은 물었다.

“로비 정황은 알아보는 중이죠?”

“예.”

“돈은 받았대요?”

“네. 서울고법 민사부 부장판사가 3억 원가량의 현금을 받은 사실이 포착되긴 했지만, 소유권자 명의가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어 직접증거는 없습니다. 게다가 엘텍으로부터 받은 근거가 없어 자금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어쨌든 엘텍에서 댄 돈이라는 거죠.”

“네. 하지만 여러 사람을 거쳐 원소유권자를 알 수 없는 돈입니다.”

“어디서 세탁된 돈인지 확실히 알아와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파면 원소유권자를 알 수 있으니 잘된 일이군요.”

원소유권자라고 해봐야, 강태한의 가족일 게 뻔한 일인데도 축하를 하는 비서과장의 눈치가 딱했다. 그러나 지금 강태한은 업무능력에 비해 눈치가 없는 비서과장의 멍청함도 너그럽게 넘길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예.”

재떨이에 담뱃불을 비벼 끄며 강태한은 말했다.

“잘된 일이죠.”

한참 뒤 강태한은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허리를 숙이며 장 실장은 서둘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장 실장님.”

“예.”

“여기 정리해줘.”

실장의 눈에 드러난 의문의 빛에 강태한은 입술을 늘려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짓도 지겨워서 못해먹겠어.”

“정리하신다는 건 한국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거리며 강태한은 실실 웃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어.”

슬슬 홍콩에서의 생활이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때마침 사내자식의 후장에 관심을 갖게 된 강주한에 대한 재밌는 소식도 전해 들어 다양한 형태의 물음이 치밀어 올랐다. 강주한이 그 사내를 어떤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곁에 두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홍콩에서 썩고 있는 동안 엘텍그룹의 알맹이를 홀랑 잡아드신, 점잖은 형님의 얼굴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던 참이었다.

* * *

오전 회의를 마치자마자 하선우는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 수출 관리 회사와 약속이 잡혀 있었다. 보풀제거기와 애완용 미용기 제품에 배터리를 납품하는 중소기업이었다. 거래가 성사된 것도 아니고 엘텍전자와의 거래에 비하면 미비하긴 하지만, 일본시장 개척이라는 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정 대리는 하선우보다 한 살 위의 유부남이자, 삼 개월 전에 입사한 해외업무 담당 직원이었다. 그가 차를 몰고 서울로 향하는 사이 하선우는 사원들이 새로 개발한 판촉물을 꺼내 보았다.

해외업무는 작년까지만 해도 이사와 김 부장이 담당하던 일이었지만 하선우가 제법 이런 일에 익숙해지면서 그의 업무가 되었다. 그리고 해외업무 부서가 신설되면 이 일도 머지않아 부서에 일임될 것이었다. 여러 가지 산발적인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어쨌든 NnG는 원만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돈이 불어나는 건 순식간이고, 또 돈이 돈을 모은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었다.

차창에 옆머리를 기대고 엘텍전자에 납품하는 제품 샘플이 근사하게 촬영된 판촉물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는 안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늘도 우리 집에서 같이 근무할까요? 가능하다면 답장 줘요.」

한 시간 전에 강주한이 보낸 문자였다. 그리고 하선우는 별다른 고민 없이 출발 전에 전화드리겠다는 답장을 곧바로 보냈었다. 마침표까지 단정하게 찍어 보낸 문자를 보던 하선우의 눈길이 우리 집이란 글자에 멈췄다. 미세한 간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우리라는 단어. 세상과 격리된 둘만의 공간을 강주한은 우리 집이라 말했다.

“무슨 문자기에 그렇게 웃으세요?”

운전하는 틈틈이 하선우를 흘깃거리던 정 대리가 물었다. 하선우 자신도 모르게 조금 웃고 있던 듯했다.

“그런 게 있어요. 내가 너무 대놓고 웃었나?”

겸연쩍은 얼굴로 웃으며 하선우는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룸미러로 하선우를 다시 흘끔거리는 그는 할 말을 찾는 듯했다. 라디오도, 음악도 틀어놓지 않은 조용한 차 안에서 그보다 나이 어린 상사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 모양이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 있으신가 봐요.”

하선우는 차창 밖의 단조로운 고속도로 풍경을 쳐다보았다. 침묵이 길어져 불편해지기 직전에서야 대답했다.

“…예. 있어요.”

“아아, 아깝네. 제 여동생 소개시켜드리고 저 팔자 좀 고쳐보려고 했는데.”

진지한 얘기는 아니었기에 두 사람 모두 조금 웃고 말았다.

“근데 연애할 시간 있으세요? 맨날 회사에서 사시던데 여자는 어떻게 만나셨대요.”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됐습니다.”

“만나시는 분 잘하면 사모님 되시겠어요.”

아하하,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 대리가 물었다.

“뭐하는 분이에요?”

“회사원이에요.”

말이야 바른 대답이었지만 지레 찔려 하선우는 한 번 더 웃고 말았다.

“회사원이면… 같은 직종에 계신 분인가?”

“아뇨. 소개로 만난 친구라 직종은 달라요. 요즘 그냥 간 보는 단계라고나 할까.”

두루뭉술하게 대답한 하선우는 조금 전, 만나는 사람이 있냐는 정 대리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이 조금 경솔했나 싶었다. 캐묻는 사람들을 피해 앞으로 계속해서 거짓말을 꾸며내게 될 터였다. 그는 이제 와 주변에 자신이 게이임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게이인 자신과 엘텍그룹 총수의 아들이 사귄다고 의심할 사람도 없고, 그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지만 강주한과의 만남이 하선우 개인이 조심스러워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선우는 그저 자신의 연애가 추한 스캔들로 변질될 것이 우려스러웠다.

사소한 불안이 미쳤던 오전의 초조함은 오후에 이르자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감정과 충돌됐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대시보드에 카드를 가져다 대자 숫자 67에 불이 들어왔다. 하선우는 왼손에 든 아이테르 출입 카드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당당하게 입성한 주민인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67층에는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강주한을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10분가량 앞서 있었다. 가벼운 긴장감이 마음을 간질였다.

대시보드 속에서 하얗게 발광하는 숫자를 망연히 응시하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시를 정리한 그는 6701호 앞에 섰다. 131313.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이 내키지 않아 가만히 디지털도어락을 내려다보던 하선우는 찌푸린 얼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조금 오글거리기는 해도 기념일 같은 것이 나았다. 가령 강주한이 ‘연애’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던 날짜나 서로의 생일을 조합한 숫자 말이다.

기념일을 떠올리자 뭔가가 어렴풋하게 하선우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뭔가를 잊고 있는 기분이었다. 곧 다른 곳으로 신경이 흩어졌다. 그가 일러준 비밀번호의 절반을 눌렀을까, 안에서부터 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 놀라 한 발 물러서자 문이 열렸다. 막 밖으로 나오던 안 비서와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뜻밖의 얼굴이었다. 꽁꽁 언 머리를 장도리로 두들겨 맞은 얼굴로 하선우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안 비서님.”

주춤 뒤로 물러서자 그 틈 사이로 안 비서가 빠져나왔다. 표정 없는 가면 같은 얼굴로 하선우를 빠르게 훑어본 그가 자리를 내어주며 말했다.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예, 예.”

고개를 조아리며 머리를 끄덕이자 곁눈으로 하선우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감정을 높은 담벼락으로 감춰놓은 얼굴의 그는 곧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깍듯한 인사를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몇 마디 되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인사를 나눈 뒤 안 비서는 초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뗐다. 안 비서가 사라진 뒤 하선우는 내상을 입은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뒤늦게 얼굴이 불타올랐다.

“거기서 뭐합니까.”

문고리를 잡은 채로 하선우는 고개만을 들었다. 문밖으로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인 강주한이 하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도, 설명도 없이 굳은 하선우를 바라보는 강주한의 검은 눈동자가 갈피를 잡았다.

“왜요. 아픕니까.”

손부터 뻗은 그가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강주한의 손목을 잡아 슬며시 떼며 하선우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퇴근 후 바로 목동으로 들른 듯 그 역시도 정장을 입고 있었다. 셔츠 차림의 그가 여전히 문밖에 서 있는 하선우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곤란한 일 있습니까.”

하선우의 심각한 표정에 강주한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그게….”

자못 중대한 문제를 꺼내듯 하선우는 말을 이었다.

“안 비서님 마주쳤거든요. 제가 여기 들르는 걸 안… 비서님이 알고 있는 듯하던데요.”

“알 수밖에요.”

싱거운 대답을 들은 듯 강주한의 표정이 풀어졌다.

“사귄다고 말했으니까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한 그는 한 걸음 더 뒷걸음쳐 현관을 벗어났다.

“이미 수행인들 몇몇은 알고 있습니다. 이곳이 여러 사람 손을 타야 관리되는 집이라서요.”

하선우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강주한은 말했다.

“그렇게 조심스러워야 할 일입니까. 어차피 알게 될 일인데.”

“그야 그렇지만.”

하선우 역시도 측근이야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하선우 자신처럼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졌으면 했다. 자랑할 일도 아니었고, 강주한과의 소문이 불거진다면 힘겨운 일은 고스란히 하선우의 몫으로 남을 것이기에.

“괜한 걱정입니다.”

그런 하선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하선우의 짐을 가져가며 강주한이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냐고 묻는 눈을 한 하선우에게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스캔들은 무궁무진하지만 매번 언론보도가 되진 않습니다. 언론사의 생존은 광고와 직결되어 있고 그런 내용을 보도한다는 건 역린을 건드릴 각오를 하고 있는 꼴일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그는 허리를 숙여 하선우와 키를 맞추었다. 하선우의 코트 단추를 천천히 풀고, 그 안의 정장 단추까지 끌러냈다. 그의 손에 비해 너무도 작아 보이는 단추에 시선을 두고 있던 하선우는 눈을 들었다. 눈앞의 사내와 닮은 강태한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론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대중에게 각인된 그는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한량의 대표격 인물이었다.

간혹 연예중계 프로그램에서 강태한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채로 방송되곤 했다. 그의 주변에는 유명 연예인들과의 온갖 저속한 소문이 식지 않고 들끓었다. 그중에는 스폰설로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가수와 스캔들 뒤에도 강태한과의 관계를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이돌 출신 배우도 있었다.

총수 일가가 언론의 비호를 받는다는 강주한의 자신감은 강태한과 엮여 고스란히 역풍을 맞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용해 보였다. 하선우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강태한 씨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던데요.”

고개를 숙여 옷을 벗기는 데 열중하던 그가 눈만을 들었다. 왜 이제 와 굳이 그런 군말을 덧붙이는지 그 의도를 알고 싶어 하는 시선이었다.

“그렇군요. 예외인 사람이 있다는 걸 잊었군요.”

하선우는 오래전 강 전무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호텔의 라운지에 들어섰던 밤을 기억해냈다. 아버지가 서서히 마음 돌리게 만든 게 누구였더라. 나를 능력 없는 인간으로 매도한 게 누군데. 연예인과 총수의 자녀들이 모인 은밀한 룸 안에서 강태한이 그의 형에게 했던 말이었다. 강주한은 자신의 핏줄의 어두운 측면까지 까발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태한이의 스캔들은 누군가 일부러 흘린 얘기일 테니 우리와는 경우가 다르겠죠.”

그는 옷깃을 펼쳐 하선우의 어깨에 걸린 코트와 정장의 겉옷을 빼냈다. 왼쪽 손에 겉옷을 반으로 접어 걸친 그는 이번에는 하선우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선우 씨.”

“예.”

“굳이 불온한 가정사 찌르면서까지 들춰내지 말죠. 나도 찔리면 아픈 사람인데.”

엄지로 볼을 부드럽게 꼬집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아닌 경고였다. 공연히 열없어진 하선우는 민망한 웃음을 짓다가 애매한 어조로 예, 대답했다. 대꾸 없이 지켜보던 그가 하선우의 뺨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툭툭, 친 후 드레스룸으로 사라졌다.

솔직히 말해 자신의 핏줄도 양심의 가책 없이 이용하는 강주한을 비꼬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며 거실 한복판에 서 있던 하선우는 뒤늦게 조금 철렁한 기분이 들었다. 쫄지 않을 만큼 굵은 깡도 없으면서 덤벼든 것은 계산착오였다.

거실로 나온 강주한은 거실의 한복판에서 서류를 들고 서 있는 하선우에게로 다가왔다. 서류박스를 한 손으로 빼앗아 든 그는 남은 손으로 하선우의 어깨를 감아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선우 씨는 집에서도 이럽니까.”

얼결에 그에게 안긴 하선우는 뒷목을 꾹 누르는 입술의 기척을 느끼며 대답했다.

“집에서도 이러다뇨.”

“집에서도 방 한가운데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서 있냐고 묻는 겁니다.”

그의 말투는 좀 전의 언짢음은 잊은 것처럼 평소보다 높은 어조를 띠었다. 풀어주려는 의도가 보여 하선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어디라도 편하게 앉아 있어요. 이제 여기 우리 집이잖습니까.”

부엌으로 잡아끄는 강주한에게 끌려가며 하선우는 드넓은 거실을 돌아보았다. 활짝 트인 공간 속에는 몸을 기대고 싶은 귀퉁이도 마음을 끄는 구석도 없어 적응할 때까지 이곳이 ‘우리의 공간’이 되리라는 생각은 들진 않을 것 같았다. 넉살과 뻔뻔함이 부족한 성격이었기에 신경 쓰이는 상대 앞에서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하선우였다. 하지만 이제 막 전학 온 소녀처럼 샐쭉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실은 노력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준비한 것들도 있었다.

하선우는 급히 최근에 보았던 책, 형제들과 함께 떠났던 유럽여행 등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화제를 되짚어보았다. 회사에서 차를 몰고 목동으로 오는 동안 거칠게나마 이야기의 좌표를 찍어놓았다. 대화를 하는 동안 침묵하거나 헤매지 않도록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한 재료를 몇 가지 챙겨왔다. 강주한과 연애를 하는 동안 기왕이면 매력적이고 만만찮은 인간으로 비쳤으면 하는 살뜰한 포부가 있었던 것이다.

테이블 가득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하선우가 도착하기 직전에 차려졌는지 음식의 온기가 그대로인 상차림이었다.

“배고팠죠?”

“예.”

강주한의 맞은편에 앉은 하선우는 테이블 가득 차려진 저녁상을 보며 생각했다. 모시는 상사의 호모 애인 저녁밥까지 신경 써야 하는 처지라니, 세상 더럽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안 비서의 곱지만은 않았던 시선을 떠올린 하선우는 싱겁게 웃었다.

“저 동태찌개 진짜 좋아하는데. 어떻게 아시고.”

“그래요?”

조금 웃는 얼굴의 강주한을 흘끔거리며 하선우는 국자를 들었다.

“살점이 엄청 두껍네요. 동태찌개 전문점에 가도 이렇게 잘 여문 생선은 드물던데.”

자글자글하게 끓고 있는 전골 그릇 속에서 국물과 동태를 덜어낸 그는 국그릇을 강주한의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원래 예전에는 엄청 애들 입맛이었는데 혼자 살다 보니 이런 한식이 좋아지더라고요. 특히 혼자 살면 절대 안 먹게 되는 생선 요리.”

“비슷하군요. 저도 해외 출장이 잦아서 집에 있을 때는 주로 백반 찾습니다.”

“어, 우리 공통점 찾았네요. 한식 좋아하는 거.”

한국 사람이니 당연히 한식을 좋아하겠지만 굳이 공통점이라고 우기자 강주한이 피식 웃었다.

“시원한 게 진짜 맛있네요.”

“입에 맞나 보군요.”

“예. 아, 진짜 맛있다. 제주도에서 먹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태 먹었던 것 중에서 상위권?”

도톰한 살점을 얹어 국물을 한 수저를 떴다.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손이 비교적 자주 갔던 반찬을 하선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러면 하선우는 괜히 또 맛있다는 말의 연속이었다. 묵묵히 식사하는 강주한과 달리 맛있다고 연발하는 자신이 경박스럽게 느껴져, 하선우는 애써 변명하듯 말했다.

“제가 뭘 먹을 때 맛있다는 말을 좀 달고 식사를 하는 편이라. 어머니가 집안 남자들에게 세뇌를 시키셔서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하게 수긍하는 강주한의 안색을 살피며 하선우는 말했다.

“또 맛있다고 말할 때마다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해서.”

“그런 말을 하면 행복해진다고요?”

“예.”

어젯밤의 대화로 전과 같은 반감은 덜할지라도 여전히 낯선 강주한이었다. 그래서 하선우는 리액션에 반응하는 배우처럼 기민하게 그의 반응을 잡아챘다. 왜인지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있었다. 강주한이 편해지기 전까지, 그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라도 얼마간 그런 노력은 계속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하선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오늘은 평소 자신의 캐릭터와 다른 각을 세운 기분이었다. 평상시보다 수다스럽고 빨라진 목소리가 하선우 스스로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귀기로 한 지 겨우 3일째, 어색한 공백이 틈을 벌리지 않도록 하선우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강주한 역시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점잖게 받아쳤다. 그 속에서 고양되는 감흥 같은 것이 있었다. 서로가 낯선 상대방을 위해 조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조심스러움이 따듯한 파랑이 되어 가슴께에서 찰랑이는 듯한 간지러움을 남겼다.

“차 한잔하겠습니까.”

“제가 탈게요.”

“됐습니다. 선우 씨는 앉아 있어요. 찻잎 우려내기가 번거롭습니다.”

엉덩이를 떼려는 하선우를 다시 앉힌 그가 선반에 놓인 다구를 꺼냈다. 번거롭다는 그의 말처럼 찻물을 우려내는 과정은 복잡하게만 보였다. ㄷ자형 구조의 카운터 안에 선 그는 뜨겁게 데운 물을 다기에 넣어 그릇을 예열하고, 물을 동그란 숙우 안에 따랐다.

“원래 그렇게 다정하신가 봐요.”

등을 보인 그가 어깨를 조금 떨며 웃었다.

“아뇨. 주로 누군가 타준 차를 마시죠.”

그는 다관에 찻잎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선우 씨한테 점수 따려고 하는 겁니다.”

재밌게 대꾸하고 싶은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해서 하선우는 잠시 복잡한 눈으로 강주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순발력이 이렇게나 없었던가. 목이 탔다. 결국 뜸을 들이다 슬쩍 다른 것을 물었다.

“무슨 차예요?”

“우전차.”

“우전?”

“4월에 채다한 녹차입니다. 5월 중에 채다한 세작보다 부드럽죠.”

“다도는 처음이라. 과정이 복잡하네요.”

“그나마 간추려서 하는 겁니다. 정식으로 하면 한도 끝도 없어서.”

다구와 다과를 트레이에 담아 온 그가 하선우의 앞에 빈 잔을 내려놓았다. 찻잎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하선우는 손바닥 안에서 온기를 느꼈다. 뜨거운 물로 한 번 헹궈 잔을 데운 것이었다. 동그란 유백색의 덮개에는 음각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도 그릇을 포함해 식기의 디자인에 통일성이 있었다.

강주한이 냄비 하나에 라면을 끓여 반찬통 그대로 김치를 꺼내 먹는 청승맞은 저녁 식사를 해본 적이나 있을까 싶었다. 회백색을 띠는 찻잔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잔을 뒤집어보았다. 음각으로 낙관이 새겨져 있었다. 李像調. 이상조.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하선우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를 기억해냈다.

순박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이름을 가졌던 류주오의 얼굴과 조리복을 입은 중년 사내, 호텔 한식당의 풍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난 가을 엘튼 호텔의 한식당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을 가던 길이었다. 출입이 제한된 조리실 문과 복도 사이에서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고압적인 분위기의 중년의 여성이 호텔 조리장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었다. 여자는 ‘그분’이 이상조 선생님께서 제작한 그릇에 담긴 요리를 드시고 싶다고 특별히 지시하셨다는 말을 했었다. 아마도 높은 분으로 추정되는 ‘그분’의 유난한 취향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었다.

“이 그릇 좋아하시나 봐요.”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르던 강주한은 눈만을 들어 올렸다. 하선우는 말했다.

“이상조 선생님 그릇이요.”

강주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 씨도 이상조 선생님의 그릇에 관심 있습니까.”

“아뇨. 그냥 스치듯 들었던 도예가 이름이라서. 도예 쪽은 잘 모릅니다.”

호텔에서 조리장에게 까다로운 주문을 하던 여자의 얘길 굳이 꺼낼 필요가 없어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유명한 분인가 보죠?”

“저도 그쪽에 조예가 깊은 게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전통 백자 만들던 방식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도예가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재료를 직접 만드는 데다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뜨리는 통에 작품 수도 극히 드문 편이고.”

하선우의 잔을 가져가며 그는 말을 이었다.

“이듬해부터는 청와대에도 납품한다고 하더군요.”

그는 입가로 찻잔을 가져가 입술을 가렸다. 하선우는 그 속에서 희미한 껄끄러움을 읽었다. 자신의 취향에 다른 이의 관심을 섞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그게 설령 국가 원수라 해도. 강주한을 만나기 위해서 얼마간은 그의 오만함도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위축되었지만 이야기는 다시 약간의 명랑이 가미된 분위기로 돌아갔다. 형제들과의 여행 에피소드를 늘어놓던 하선우는 떡고물이 묻은 절편을 단정하게 먹으려 애쓰며 말했다.

“집안에 남자들뿐이라 섬세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어요. 형이 그 두꺼운 여행 책으로 뒤통수를 때리는데 창피한 건 둘째치고 괜히… 서럽더라고요.”

이야기의 줄기는 어느새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뻗어 가 있었다. 눈앞의 강주한을 의식하면서도 머릿속은 유럽의 구석구석을, 방랑하던 여행자의 기억으로 어수선했다. 그날은 유럽에 도착한 뒤로 9일이 지난 날이었다.

형들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고 하선우는 홀로 파리의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관광객의 눈은 거주자의 눈과 달라서 그들로서는 별로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 대상을 눈여겨보고 뇌리에 담아두고 찍는다. 프랑스인들에게는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찍어대는 느린 걸음의 동양인 청년은 누가 봐도 여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파리의 골목골목을 헤매다 하루의 반나절이 지나 형들과 합류했을 무렵이었다. 여권과 현금 뭉치, 사진이 담긴 메모리 카드가 든 가방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몽마르트 언덕 하면 형들에게 맞은 기억밖에 없어요. 정말 사정 안 봐주고 때리는데 그땐 진짜 형들이랑 평생 안 보고 살겠다고 다짐했다니까요.”

갑자기 울컥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 하선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잖습니까. 형들이 꽉 막혀서 관용이라는 게 없어요. 그 탓에 프랑스 여행 내내 기분이 틀어졌었죠.”

“선우 씨가 누군가에게 맞고 자랐다니 언짢은데요. 괴롭혔다던 형제들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혼내주시게요?”

하선우는 소리 없이 싱겁게 웃었다. 강주한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얼마간 더 침묵한 뒤에 대답했다.

“원한다면.”

침묵의 그 긴 박자 때문에 그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별할 수가 없어 절편을 씹던 하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 그래도 형제간에 사이는 좋은 편이에요.”

어물쩍 웃으며 하선우는 절편을 꿀꺽 삼켰다. 장난 참 진지하게 한다 생각하며 차를 벌컥 들이켜고 마지막 남은 절편을 입에 털어 넣었다. 찐득하게 단맛이 배어 나오는 떡을 꾹꾹 눌러 씹으며 입가에 묻은 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맛있습니까.”

“맛있어요. 뭐, 이런 게 행복이죠.”

“난 선우 씨가 그래서 좋아요.”

하선우는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신경질적인 느낌이 없어서. 내숭 안 떠는 것도 마음에 들고.”

“남자가 새 모이만큼 먹으면서 내숭 떠는 건 좀 징그럽잖습니까.”

“며칠 전에 섹스할 땐 내숭 떨던데요.”

방향을 바꾼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도수 높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별안간 몸에 열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조급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조금이라도 무게 있는 척해보려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다다를 곳은 정해져 있었다. 목이 좁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하선우는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처음의 용기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나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정작 하선우 씨는 눈도 못 마주치고.”

하선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들어 올려 강주한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내가 하선우 씨 몸 안에 들어가는 게 이상합니까.”

“음…….”

할 말이 막연히 떠오르지 않아 더듬거리던 그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게 당연…하진 않죠. 그게 왜 당연해야 합니까.”

“무립니까? 나는 하선우 씨가 자연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굵게 마디진 기다란 손가락이 하선우의 턱을 잡았다. 한 번 더 흠칫하자 별안간 무엇에 반응한 건지 그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그의 더운 숨보다도 더 더운 욕망이 느껴졌다.

하선우는 몸을 틀었지만 그보다 먼저 아래턱을 잡은 그가 고개를 숙였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 부근의 피부를 핥았다. 칫솔질을 안 했는데, 녹차로 입가심해서 괜찮은가, 온갖 생각이 들어 집중하지 못하던 하선우는 결국 입술을 열었다. 그가 천천히 입천장을 쓸었다. 야릇한 느낌에 목구멍에 고여 있던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소리에 입술을 늘려 웃은 그가 하선우의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사귀기로 한 지 겨우 3일째였기에 하선우는 점잔을 허울 삼아 뻣뻣하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강주한에게 솔직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어려웠다. 그가 둘만을 위한 성채를 짓고 온갖 공세를 퍼부어도 여전히 그는 하선우에게 강주한보다는 강 전무에 가까웠다.

그 순간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잊은 것이 무언지를 생각하는 동안, 왜 그런 허전함이 드는가를 생각하는 사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강주한이 하선우의 목을 깨물어대기 시작했다.

“아…….”

깨달음으로 부릅떴던 눈은 곧 질척한 간지러움에 찌푸려졌다. 어깨를 움츠리며 강주한에게 잡힌 몸을 빼내자 상박이 잡혔다. 다시 당겨져 귓바퀴가 입술로 덮였다. 상체를 비틀어 빼내자 거부를 당했다고 느꼈는지 말없이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아니고.”

“…….”

“내일 어머니 생신인데 선물을 못 산 게 생각나서요.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하선우의 얘기를 잠잠히 듣던 그는 귓바퀴를 살짝 깨문 후에 뒤로 물러났다. 따끔한 아픔에 귀를 만지작거리며 하선우는 냉큼 강주한과 거리를 벌렸다. 손목의 시계를 재빠르게 확인했다. 8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백화점 내려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입가의 침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헛기침을 한 하선우는 말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강주한은 눈을 감은 채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생각해둔 선물은 있습니까?”

“생각해둔 건 아니지만… 상품권 정도면 괜찮겠죠.”

단추를 다시 여미며 하선우는 강주한을 흘긋거렸다. 그의 낯이 온통 붉었다. 그는 젖은 입술을 닦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흥분의 여운을 다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눈을 뜬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머니 생신인데 상품권보다는 선물이 낫지 않을까요.”

“어머니 취향도 잘 모르고 선물 고를 시간이 없어서요. 이제 백화점 문 닫을 시간이라.”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예?”

“대기하라고 전할 테니 서두를 필요 없다고요.”

마지막 단추를 잠그던 하선우는 고개를 들어 빤히 강주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선우는 곧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벽에 시계가 걸려 있음에도 굳이 하선우의 손을 잡아당겨 시간을 확인한 그가 손바닥을 마주 잡아 쥐며 웃었다.

“아직도 하선우 씨가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 실감 안 납니까.”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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