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악당에 대하여 (2)
아파트와 백화점이 연결된 복도까지 내려오자 두 여자가 그들을 반겼다. 그중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얼결에 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하선우는 그녀보다 조금 더디게 허리를 세웠다. 두 손을 맞잡고 예의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백화점 업무에 관한 모든 것을 감독하는 책임자이자, 퍼스널 쇼퍼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수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늦은 시간에 오히려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선우는 진심으로 미안해서 한 말이었지만, 여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방문해주셔서 영광인걸요. 반갑습니다. 강주한 전무님, 하선우 사장님.”
쇼퍼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는지 아나운서처럼 성대에 자그마한 알이 박힌 목소리를 냈다. 경쾌한 목소리로 여자는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물건은 백화점 들어가서 보면….”
“네. 일단 올라가시죠.”
부드럽게 웃은 여자는 중간마다 솜씨 좋게 뒤를 돌아보면서도 실수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자는 압구정 본점에서 목동 지점으로 지원 온 책임자 중 하나로, 강주한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공무적인 선 안에서 공손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 뒤 에스컬레이터로 곧장 그들을 안내했다.
“생신 선물로 눈여겨보신 상품은 있으신가요?”
하선우의 뇌리를 스친 것은 김 부장이 추천한, 손바닥만 한 것 하나에 500만 원이라던 샤넬백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평소에 들고 다니는 것은 버버리 짝퉁처럼 생긴 안신모직에서 나온 황색 체크가죽 가방이었다. 하선우의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가방 안이 미어터지도록 잡동사니를 집어넣고 다니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값비싸고 실용적이지 않은 가방은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여자의 입술 곡선이 조금 더 휘어졌다. 그녀의 웃음은 움직임이 많이 없는 몸짓과 다른, 층위로 분리된 기름처럼 겉도는 느낌의 웃음이었다. 왜 자꾸 여자의 웃음이 거슬리는지를 생각하던 그는 곧 깨달았다. 쇼퍼의 웃음은 마치 팸플릿, 혹은 사진을 보고 억지로 연습한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럼 권해드리는 제품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어딘가 불길한 느낌의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선물로 가방이나 패션잡화를 염두에 두고 계시다고 하셨죠?”
“예.”
“하선우 사장님의 빠른 쇼핑을 도울 수 있도록 지난주 부산명품관에서 열렸던 봄맞이 기획전 중 반응이 가장 좋았던 상품으로 구성된 제품과 보그코리아의 에디터가 추천한 디자이너 한정판 상품, 그리고 다음 달 아케이드 매장에 들어올 신상 제품으로 추려보았습니다. 제품의 퀄리티는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하선우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백화점 영업시간을 연장해주는 통 큰 애인을 둔 게 낭만적인 일인지, 아니면 연장 근무를 요구하며 백화점 직원들의 인권을 침해한 재벌 3세의 횡포가 사회적인 이슈가 될 만한 일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장씩이나 되어서 개인카드 한도를 진즉 400만 원에서 더 높여놓지 않은 것이 큰일인지, 지갑에 돌려 긁을 수 있는 카드가 몇 개나 들어 있는지, 어떤 것에 가장 무게를 둬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이마에 잔주름이 지도록 힘주어 눈을 뜬 채로 무심히 여자를 쳐다보던 하선우는 한참 후에 대답했다.
“준비를… 많이 하셨네요.”
“시간이 긴박하긴 했지만 전무님께서 부탁하셔서 각별히 준비해보았습니다.”
여자는 부끄러워하며 미소 지었다. 센스가 넘치는 여자는 어필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강주한은 저만치 앞서 가 젊은 보좌원과 함께 한 층을 먼저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하선우가 대신 전해주어야 할 듯싶었다.
목구멍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굵게 삼키며 하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 쇼핑을 하는데 사람을 대기시키는지 의아했던 하선우였다. 퍼스널 쇼퍼라는 의미를 뒤늦게 이해하고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발을 빼기엔 늦어버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내려다본 각층의 매장마다 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매장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일반매장과 명품매장을 모두 지나쳤다. 식당가와 문화행사장을 지난 에스컬레이터는 최상층에 다다랐다. 이럴 거라면 왜 전 직원이 대기하고 있을까 싶어 하선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한 걸음 앞서 가던 여자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라운지로 가고 있습니다.”
“아래…….”
아래층을 향해 훤하게 뚫린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하선우는 말했다.
“아래… 직원들 대기 중이던데. 매장 돌아다니면서 보는 거 아닌가요.”
“라운지에 쇼룸을 따로 마련해두었으니 그곳에서 상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직원들 대기 중이던데. 저 때문에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요?”
자리에 멈춰 선 여자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미소를 띤 채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곰곰이 하선우의 말을 곱씹던 여자는 뒤늦게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우 사장님께서는 영업시간 외에 엘튼 백화점을 이용하시는 게 처음이십니까?”
추궁하는 말투도 아니었고,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까지 짓고 있었지만 하선우는 왜인지 민망했다.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는 기분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엘튼 백화점의 VIP회원이신가요?”
“아뇨.”
“아니면 기타 이용하시는 백화점의…….”
“아닙니다.”
그제야 수긍한 듯이 여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난감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부담감 없이 쇼핑하셔도 돼요. 중요한 고객이 오실 경우 영업시간을 연장하곤 하니까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하선우의 반응에 여자는 라운지 방향으로 반쯤 걸쳐 있던 몸을 완전히 돌리고 말했다.
“강주한 전무님은 보통 카탈로그를 보시고 자택에서 전화로 주문 넣으시지만 강예진 사장님께서는 직접 매장을 방문하셨거든요. 염려하시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지만 간혹 회원분들만을 위해 휴점일에도 직원들이 근무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렇게 갑자기 영업시간을 연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지만.”
여자는 수수한 미소를 지었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선우 사장님, 직원들 걱정도 해주시고 자상하시네요.”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격이라 괜히 민망해서 하선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세크리드 클럽 라운지. 신성(神聖)을 의미하는 오만한 이름의 라운지 안으로 들어서자 커피와 값비싼 다과가 접시에 담겨 나왔고 트레이를 끌고 온 남자 직원이 허리 숙인 공손한 인사를 한 뒤에 물러났다.
하선우의 앞에는 쇼핑 헬퍼가 직접 선택한 다양한 브랜드 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목동 지점에 입점이 안 된, 희소성 있는 브랜드의 제품들로 본점인 압구정의 명품관과 아케이드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녀는 하선우의 눈길이 닿는 제품마다 간략하지만 청산유수로 제품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하선우는 조금 전부터 계속 실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 그가 내려다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조금 훔쳐볼 수 있었다. 쇼퍼가 건넨 가방을 보며 하선우는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경제 수준이 새삼 실감이 났다.
새하얀 장갑을 낀 쇼핑 헬퍼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가방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였다.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가방을 들어 올린 그녀는 하선우가 가방을 만져볼 수 있도록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고급 송아지가죽으로 만든 가방은 앞주머니를 타조가죽으로 마무리해 포인트를 주었으며, 내부와 외부의 손잡이에 방수와 보풀 방지 기능을 더해 완벽하게 실용성을 더한 제품이다, 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선우는 넌지시 곁눈으로 가격택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제품은 가격택이 붙어 있지 않았지만, 몇몇 제품에는 택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하선우의 눈길이 향한 가방은 지금까지 그녀가 권해준 제품에 비해 저렴한 편이었다. 동급 브랜드 제품에 비해 저렴한 2,900만 원대의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가 타고 다니는 차보다 500만 원 가까이 더 나가는 가방이었다.
샤넬은 싼 것이었구나.
여자가 권하는 것들은 앞자리가 기본 3으로 시작했다. 아무리 고급 가죽으로 만들었다고는 하나 그 가격이면 양과 타조를 수십 마리는 더 사겠다 싶었다.
“이것도 어머니의 취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선우는 쇼핑 헬퍼를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그였지만 앞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어 위엄은 쥐젖만큼도 없었고, 어떻게 봐도 돈 없어서 못 산다는 얘기로밖에 안 들렸다.
기본 3,000만 원으로 시작하는 가방을 선물로 드리느니 차라리 김 부장이 권했던 샤넬 따위가 낫겠다 싶어 목이 탔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강주한은 하선우를 내버려둔 채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카탈로그 책자를 천천히 넘겨보고 있었다.
여자가 새로운 가방을 가지러 뒤돌아선 사이 하선우는 소매를 당겨 서둘러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냈다.
문 닫은 백화점 구경이나 시켜주지.
하선우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어차피 은밀한 허영을 만족시켜줄 것이라면, 백화점의 매장을 돌아다니며 값싼 허영심을 채워주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시간은 어느덧 9시를 지나 20분을 훌쩍 넘고 있었고 하선우는 트레이에 놓인 소금맛 마카롱만 축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눈앞에 놓인 비현실적인 가격의 가방이 신경에 들어오는 대신 한도가 한참이나 낮은 카드와 백화점 전 층, 전 매장에서 대기 중인 직원들에게 지급할 연장 근무 수당과 건물의 전기세가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전 층을 통틀어 고객이라곤 한 사람뿐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오로지 하선우 자신만을 위한 낭비였다. 강주한의 체면을 생각해 뭐라도 사야겠지만 가방 하나에 자동차 한 대값이 왔다 갔다 했다.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을 쓰다 피박도 함께 쓰게 생겼다.
“로에메 메이백의 역사와 함께한 저명한 바레니아 가죽으로 만든 제품이라 오래 사용할수록 빈티지한 느낌이 나는 제품이죠. 탈부착식 숄더끈이 가능해서 원하시는 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데, 부착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느낌이 아주 달라요. 이렇게 떼어내면 우아한 느낌으로 연출할 수 있고 떼어내면 젊은 분위기를 낼 수 있죠.”
여자는 직접 숄더끈을 떼어냈다 붙이며 가방을 하선우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보통의 가방과 달라 색다른 느낌이긴 했다. 스페인 왕실에 113년 전부터 납품했다는 제품으로 스페인의 공방에서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공들여 수작업한 가방이었다. 스페인 왕실이라니, 덜컥 불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하선우가 손님으로서 맹탕인 것은 계속되는 대화로 충분히 알았을 쇼퍼였지만 강주한의 앞이기 때문인지 인내심을 가지고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쇼퍼의 인내심. 그것이 문제였다. 그는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눈동자를 굴려보았다. 한화로 3,200만 원가량이었다.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일단 긁고 나중에 생각해보고 싶어도 카드 한도가 부족했다. 무의식중에 손톱 끝을 깨물 뻔한 하선우는 헛기침을 했다.
“스카프 같은 건 없습니까. 스카프를 좀 보고 싶은데요.”
뭉치면 한 줌도 안 될 스카프의 가격택에는 2,300달러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280만 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창립 75주년을 맞이해 이벤트를 진행 중인 제품입니다. 구매하신다면 방한 중인 차석 디자이너 마리아 산탄젤로가 스카프에 이니셜을 손바느질로 아름답게 수놓아드릴 겁니다. 행커칩에 수놓은 샘플이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
하선우는 쇠약해진 기분을 느끼며 기계처럼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녀는 사각의 작은 행커치프를 가져왔다. 손수건보다 조금 작은 행커치프의 끄트머리에는 Lyk라는 이니셜이 남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물끄러미 수를 바라보던 하선우는 의기소침하다 못해 화가 난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선택에 만족하실 겁니다. 사모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권 정자 옥자요. 이니셜은 KJY로 새겨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은 여자는 말을 이었다.
“마리아 디자이너께서 제주도의 엘튼 호텔에 머무르고 계시는 중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스카프를 내일 오후까지 항공편으로 가져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네, 알겠습니다. 다른 제품도 보여드릴까요?”
뻔히 안 사고 싶은 걸 알면서도 또 묻는 걸 보니 고문을 즐기는 성격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하선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쪽팔린 건 한순간이면 끝이고 그녀는 다시 볼 일이 없었다. 때마침 하선우와 그녀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혼자 조용히 카탈로그 책자를 보며 제품을 골랐던 강주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쇼퍼에게 카탈로그 책자를 들고 주문을 하려던 그는 월급날 눈뜨고 도둑질 당한 회사원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하선우를 보고 멈칫했다. 체크한 제품을 주문하면서도 계속 눈만을 움직여 하선우의 반응을 흘깃거렸다. 그는 조금 전 여자가 장광설을 늘어놓았던 스페인 왕실에 납품하는 어려운 이름의 브랜드 가방, 기타 브랜드의 남성용 지갑과 명함지갑, 키홀더, 구두와 패션잡화를 주문했다.
희소성 있다는 그녀의 말대로 목동 지점에는 없는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주문한 제품이 모두 얼마일지 따져보던 하선우는 1억을 500원, 또는 그보다 적은 가치로 사용하는 사람이 강주한이라는 생각에 모든 게 무가치하게 느껴져 계산하기를 포기했다. 30분 내로 압구정의 본점에서 직원들이 물건을 가져올 것이라고 전한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강주한이 하선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선우 씨 주문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아서 먼저 골랐습니다. 괜찮죠?”
본인의 쇼핑을 본인이 하겠다는데 양해를 구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하선우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맥을 못 추는 하선우를 숨죽여 쳐다보던 그가 반쯤 먹어치운 마카롱이 들린 손을 낚아채 입가로 가져갔다. 마카롱을 빼앗고도 강주한은 여전히 하선우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자신의 빈손을 쳐다보며 하선우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되게 맛있네요.”
마카롱 얘기를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선우는 딱히 나눌 만한 얘기가 없었다. 당신 참 부자군요. 감탄하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사람들의 정중한 대우와 방만한 가격의 사치품들이 그에게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 무엇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가 자신을 압도하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직원들 퇴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30분 전에 지시 내렸습니다. 매장 직원들은 퇴근했겠죠.”
“그렇군요.”
“왜 그렇게 우울한 눈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몰라서 묻나 싶었다. 하선우는 똑바로 강주한을 보았다.
“여기 있는 물건들 다 비싸서요.”
“…….”
“저에게는 비싸도 너무 비싼 물건입니다.”
강주한은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바닥에 턱을 괸 채로 하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반응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공감을 하는 건지, 아니면 관찰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하선우 역시 강주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 초의 시간이 흐른 뒤 강주한은 물었다.
“선우 씨가 계산할 겁니까?”
“예?”
“……. …아닙니다.”
가볍게 한숨을 쉰 강주한은 물었다.
“비싸서 삐진 겁니까.”
“삐졌다고 하긴 좀….”
하선우는 내키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저를 촌스럽게 여기셔도 할 말 없긴 한데.”
갑자기 얼굴을 확 붉히며 하선우는 헛기침을 했다.
“문 닫은 백화점 돌아다닌다고 해서 들뜨기도 했고 쇼핑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고 해서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럴 줄은 몰랐죠.”
아랫입술을 조금 물어 당겨 튕겨낸 하선우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패키지 상품으로 홍콩 여행 갔는데 여행 내내 관광지 대신 라텍스 숍이랑 건강식품관 돌아다닌 기분입니다.”
강주한은 이해가 가지 않는단 눈으로 쳐다보았다.
“강매당한… 기분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아, 나지막이 반응한 그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랬습니까.”
강주한이 마치 투정을 듣는 듯이 바라보았기에 하선우는 자신이 느낀 짜증이 유치하고 치사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닌 것 같은데. 억울한 기분이 들어 하선우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예… 그랬어요.”
강주한의 상체가 가까워졌다. 게다가 그가 돌연 손을 뻗어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기 때문에 하선우는 더는 2,300달러짜리 스카프에 대해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몸을 사리는 사이 두 사람의 쇼핑을 도왔던 여자가 되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
“일어나죠.”
백화점 안으로 들어설 때처럼 그녀는 두 사람과 함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백화점과 아이테르가 연결된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 나온 여자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공손히 강주한에게 건넸다. 몇몇 제품들은 제주도 호텔의 아케이드에서 항공편을 통해 내일 중으로 배송을 하겠다고 말한 그녀는 엘리베이터 상승 버튼을 눌렀다.
“저기 제 스카프 계산은…….”
타이밍을 놓쳐 결국 그는 애매한 순간에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선우의 뒤편에 선 강주한을 곁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곧 깨달은 얼굴로 활짝 웃은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전무님께서 계산 마치셨습니다.”
“…….”
“그럼.”
다시 고개를 꾸벅인 그녀는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강주한과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하선우는 결국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뒤따라 들어갔다. 문이 닫힌 후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제 건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사주실 필요 없어요.”
67층에 도착해 복도로 발을 내디딘 뒤에야 하선우는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쇼핑백을 한 손 가득히 들고 나머지 손으로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던 강주한은 뒤를 흘긋 돌아본 뒤에 말했다.
“그게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요.”
하선우는 나머지 번호를 눌러 문을 여는 강주한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 문제에 그가 가벼운 허탈함마저 느끼려는 찰나 강주한이 말을 이었다.
“발 사이즈 255 맞습니까.”
허리를 숙여 신발을 벗던 하선우는 고개만을 들어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남자치고 작은 발 사이즈라고 했으니까. 밴드 붙여줄 때 만져보니까 60 아니면 그 정도 크기인 것 같던데.”
“…예.”
“딱 맞는 사이즈인 겁니까.”
“네. 55는 딱 맞고 60은 헐렁거려요.”
강주한은 현관에 나란히 놓인 자신의 구두와 하선우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두 신발을 오래도록 번갈아 보던 그는 하선우의 구두에 눈길을 둔 채로 말했다.
“키에 비해 발이 많이 작군요.”
가지런히 놓여 있어 구두의 크기 차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하선우는 발과 키가 그보다 더 작다는 이유만으로 괜히 그에게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현관 통로에 붙어 있는 통유리를 통해 앞뒤로 선 두 사람의 신장의 차이가 유난히 부각되었다.
“그런 편이긴 하죠.”
“발볼도 얇고.”
강주한의 시선은 여전히 하선우의 구두에 붙들려 있었다. 다른 생각에 사로잡힌 것처럼, 신발을 쳐다보던 눈길이 하선우의 발로 옮겨지고 천천히 떨어져 나가 다시 하선우의 얼굴로 돌아왔다. 만족스러운 듯 한쪽 입술이 야릇하게 휘어졌다.
“근데 제 발 사이즈는 왜…….”
“구두 주문했습니다.”
“제 구두를요?”
“예.”
그는 현관 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슬리퍼로 갈아 신고 거실의 테이블 위에 쇼핑백들을 내려놓았다. 그를 뒤따라 들어간 하선우는 나란히 놓인 쇼핑백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작게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주문 들어갔으니 2주 후면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이건 선우 씨 선물입니다.”
몸을 돌린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쇼핑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우 씨 주문이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먼저 골랐습니다.”
그는 하선우에게 등을 보인 채로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풀고 겉옷을 벗어 거실 의자 위에 걸쳐두었다. 그리고 거실의 한가운데로 걸어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쪼르륵, 찬물이 잔 안에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한 거실을 울렸다.
하선우는 조금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다. 퍼스널 쇼퍼가 권하는 패션잡화의 가격대와 그가 카탈로그지에서 주문한 패션잡화의 내용을 들을 때부터 강주한이 계산을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그는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선우는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거절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가진 건 돈뿐인 사내가 무심하게 베푸는 온정에 대해 사내의 연인들이 보여왔을 다양한 반응에 대해 떠올렸다. 강주한은 아마 숱하게 겪어왔을 상황일 테고, 하선우가 어떤 짓을 해도 신선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즐거운 기분을 훼방 놓는 자존심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하선우는 찜찜함을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저 괜찮습니다.”
머그잔에 찬물을 따르던 강주한은 하선우를 곁눈으로 살핀 뒤 다시 물을 마저 따랐다.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그는 말했다.
“피부가 흰 편이니 데님 셔츠가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겁니다. 물론 보렐리는 나도 좋아하는 옷이기도 하고.”
“…….”
“그런 것도 부담스럽습니까.”
하선우는 조금 뜸을 들인 뒤에 대답했다.
“예.”
“선물을 받으면 하선우 씨 자존심이 다치는 겁니까. 난 그런 걸 원했던 게 아닙니다.”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대화가 확대되어 하선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난 하선우 씨에게 별로 과시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구실을 만들려고 선물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하선우의 반응이 없자 강주한은 물 한 모금을 천천히 마셨다. 높낮이 없는 어조로 그는 말을 이었다.
“설마 가진 건 돈뿐인 사내가 금은보화로 마음을 사려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런 거 많잖습니까. 영화나 드라마에.”
말투는 고조됨 없이 차분했지만 내용은 하선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하선우는 테이블 위의 쇼핑백들을 가리켰다.
“상식적으로… 과하잖습니까.”
강주한은 쇼핑백에 두었던 시선을 하선우에게 던진 후 다시 쇼핑백으로 눈길을 돌렸다.
“통념과 내 상식 사이에 좀 차이가 있긴 하죠.”
한숨을 쉰 강주한은 정지했다.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미간을 좁혔다.
“난 그런 것들에 대해 별 감흥이 없어서요. 지금 이 물처럼. 그게 얼마든 한 잔의 물의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 상식을 강요해서 내가 이기적으로 느껴졌다면 미안합니다.”
“아뇨, 전무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고…….”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는 하선우를 보며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물론 선우 씨가 가격에 대해서는 의미를 두지 않고 받아줬으면 더 좋겠지만.”
“사실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도 사귀…기로 하고 나서 겨우 3일째에 이런 선물을 주고받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더 못 받겠습니다.”
연애 초반의 무차별적인 선물 공세는 뭔가 조급하게 매달리는 사람 특유의 행동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강주한은 그런 경우와는 달랐다. 연애에 서툰 것도, 하선우에게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강주한이 가진 그 상식의 선을 하선우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3일이 아니라 3개월 뒤엔 받을 겁니까? 아니면 이런 선물을 주려면 3년은 걸려야 됩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은 특별한 날만 서로 주고받는 선에서 끝내죠. 그것도 이렇게 과하게는 안 해요. 강 전무님식 연애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제 연애는 그랬습니다.”
강주한의 정지된 시선이 오래도록 하선우의 얼굴에 매달렸다. 주변이 희미해지고 강주한의 검은 눈동자만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 듯, 하선우의 온 신경의 초점이 그의 시선으로 향했다.
“내가… 공연한 짓을 했군요.”
띄엄띄엄 말한 강주한은 으음, 목을 울렸다.
하선우는 계속해서 상식을 운운하며 거절한다면 강주한과 자신 사이의 서먹함을 재확인하는 일이라고 못을 박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자신이 강주한을 이기적이고 즉물적인 인간으로 매도하는 느낌이었다. 선물이 부담스러운 것과 강주한이 즉물적인 것은 멀고 먼 차이가 있었지만 이야기가 점점 궁극적인 화제에서 멀어졌다.
본질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선우는 자신이 괜히 자존심 세우는 게 아닌지, 뻣뻣하게 굴어 강주한의 자존심을 긁는 게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결국 하선우는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려 불편한 내색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대답했다.
“선물로 주시는 거니까, 소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강주한은 다시 머그컵을 입가에서 떼어내며 유심히 하선우를 보았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는 말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죄책감이 느껴지죠.”
“기분 탓이십니다.”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은데.”
강주한은 입술만을 움직여 웃었다.
그는 마치 심순애에게 다이아몬드를 준 김중배가 된 기분을 느낀 듯했다. 할 말이 없어 침묵 속으로 운신하기를 택한 하선우는 그저 주섬주섬 선물을 챙겼다. 하선우는 뒤통수로 강주한의 시선이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쇼핑백의 손잡이를 잡기 좋게 모아 벽 한 면에 모아둔 뒤 허리를 세워 일어났다. 하선우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로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여자와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이 없긴 합니다. 그래서 한 번도 소위 말하는 명품가방 같은 걸 줘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어요.”
“…….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의 가슴이 눈에 띄지 않게 부풀었다.
“이런 질문 정말 예의 없다는 걸 알지만 하겠습니다. 알아야 하겠어서요.”
이 자리에 여자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 손톱크기만 한 다이아몬드를 주었을 것이다. 고작 데이트 두 번 만에 수천만 원, 혹은 그 이상의 선물을 안기는 강주한을 보며 여자는 활짝 웃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전무님의 선물을 순수하게 받았습니까?”
어떤 여자들은 순수하게 감명받았을 것이고, 어떤 여자들은 부담감에 거절을, 또 다른 여자들은 로맨틱한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꺼림칙한 의심을 지우고 강주한의 선물을 손에 받아 들었을 것이다. 잠자리 한 번에 아파트 한 채값을 뿌리고 다닌다던 강태한까지는 아닐지라도, 연애 스케일 한번 화끈하신 전무님은 데이트 상대에게 인색함이 없으셨다.
하선우는 자신이 유별나게 구는 건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도 강주한에게 받은 선물이 베갯머리송사의 대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강주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가 들은 말을 의심하는 것처럼, 혹은 잘못 듣길 바란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하선우를 응시했다. 오랜 정적이 지난 후 강주한은 느리고도 또렷하게 말했다.
“하선우 씨가 날 더 이상 예전처럼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지만,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허리를 완전히 폈다. 표정을 지우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인지 난… 그 의도를 알 것 같은데.”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얼굴 속에서 하선우는 읽을 수 있었다. 강주한은 화가 나 있었다.
* * *
황량하게 훌쩍거리는 가을풍경 위로 흑암색 공장 하나가 서 있었다. ㈜NnG이었다. ㈜NnG의 간판 밑으로는 테두리를 고정하는 네 개의 끈 중 하나가 끊어진 현수막이 바람에 방정맞게 펄럭이고 있었다. ‘믿음을 주는 NnG, 전자배터리 산업 부문 리더기업으로 도약하겠습니다’ 끈이 떨어져 나가 기댈 곳을 잃어 흐느적거리는, 청운의 꿈을 품은 중소기업의 소망이 가엾었다.
하선우는 초가삼간처럼 초라하던 풍경을 강주한과 함께 처음 바라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하선우는 자신들의 처지가 창피했지만 그의 도움을 간절히 원할 만큼 절박하기도 했다. 기적처럼 그가 동아줄을 내밀었고 생명유지장치 연결로 간신히 살아가던 환자가 갑자기 뛰어다니게 된 꼴로 회사가 성장하게 되었다.
하선우는 순탄치 않았던 NnG의 연혁을 떠올렸다. 강주한이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의 회사는 과거보다 더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었다. 강주한이 하선우에게 단순한 개인이 아니듯이, 하선우 역시 자신을 단순한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NnG와 NnG의 사원들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하청업체 사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연애의 근거를 ‘돈’에 두고 강주한과의 연애놀음에까지 종속되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섹스의 대가로 선물을 주곤 했는지 묻고 싶은 겁니까.”
직설적인 물음에 하선우는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강주한의 몸이 하선우를 향해 기울었다. 압력을 받는 것처럼 하선우는 꼿꼿하게 서 있던 몸이 뒤로 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하선우의 어깨를 잡아 짓누르며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갈라지고 있었다.
“지금껏 사람을 돈으로 사왔냐고 묻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내가 오해한 겁니까.”
하선우는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그의 선물에는 순수하지 못한 대가가 필요한 것이냐는 물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꾸가 없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표정 없는 얼굴 너머로 그의 몸속에서 신경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새까만 감정에 하선우는 발밑이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대꾸할 가치가 없는 것 같아서 대답 안 한 겁니다.”
하선우는 얼음가시가 목에 걸린 심정으로 말했다. 타이밍이 지나치게 늦어 맥락 없이 뚝 떼어다 놓은 것 같은 하선우의 말에 강주한의 눈꺼풀이 조금 들렸다.
“그렇게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하선우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무슨 말을 하건 망쳐버린 분위기를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강주한에게 잘못했다 말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강주한에게 사과할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하지 않았다.
강주한은 현관 귀퉁이에 가지런히 놓인 쇼핑백더미에 비껴간 시선을 주었다. 오래도록 그 주변을 예리하게 맴돌던 눈길은 하선우의 발치를 석연치 않은 여운을 남기고 스쳤다.
“선물은 단지 하선우 씨에게 주고 싶어서 샀던 겁니다.”
“예. 그러셨겠죠.”
“…….”
“죄송하지만 제가 강 전무님의 선물을 받을 만한 그릇이 아닌가 보네요.”
그는 자신의 기분이 자율신경과 함께 강파르게 곤두박질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어하지 못한 입을 반쯤 일부러 뒤늦게 다문 하선우는 강주한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숨을 불어넣은 조형물처럼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눈을, 그는 차마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고개를 기울인 그는 좀 전의 말을 변명하듯 말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죠.”
“…….”
대꾸 없는 강주한의 발치를 쳐다보던 하선우는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머리가 아프네요.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대답 없이 버티고 선 강주한의 곁을 스치며 그는 곧바로 현관을 벗어나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서야 하선우는 뒤늦게 귓가에 자신의 맥박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 * *
온몸에서 갈비 냄새가 진동했다. 약간의 멀미를 유도하는 고기 냄새에 하선우는 결국 차창을 손톱만큼 열어놓았다. 1년 만에 만난 조카들을 보고도 기분이 가라앉기만 했다.
게다가 차량 스피커에서는 그의 취향과는 백만 광년 동떨어진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하선우는 다른 대안을 선택하는 대신 가만히 그 고역 같은 음악을 듣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자매들은 조금 전부터 음량을 키운 스피커처럼 커다랗게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번 3집 정규앨범이 어땠다느니, 직접 쓴 가사가 시적이라느니, 신곡이 음원차트의 지붕을 뚫었다는 둥, 아이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소녀는 지금 막 아이돌 멤버가 말한 이상형과 자신이 한참이나 동떨어져 절망하던 와중이었다. 폭격 같은 수다에 반쯤 신경을 놓고 있던 하선우는 자동차 핸들을 꺾으며 물었다.
“그 오빠들이 그렇게 좋아?”
갑자기 끼어든 하선우의 말에 두 자매의 수다가 뚝 끊겼다. 놀란 눈으로 앞좌석에 앉은 하선우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첫째가 배시시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 좋아.”
“아, 뭐야.”
“왜!”
“언제는 삼촌이 제일 좋다며. 이젠 현수인가? 원수인가 뭔가로 갈아탔는가, 조카?”
인생 다 산 노인처럼 한탄하자 자매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하선우가 앉은 의자에 몸을 바싹 붙이며 민영이 말했다.
“당연하지! 그리고 현수 아니라 연수거든?”
관심도 없는 아이돌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을 기세여서 하선우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너희는 핸드폰에 아이돌 사진밖에 없지? 내 사진 한 장이라도 저장돼 있냐? 삼촌은 아직도 너희들 사진 이렇게 가지고 다니는데.”
내비게이션 아래에 고정된 자매의 사진을 가리키며 훈계조로 말하자 민영이 혀를 내둘렀다.
“으으, 아저씨 사진 찍어서 뭐해.”
“뭐? 삼촌이 아저씨라고?”
“당연하지. 삼촌 나이가 몇인데. 늙어서 한물간 아저씨 맞지!”
“언제는 세상에서 삼촌이 제일 멋있다며.”
“그거야 우리 오빠만큼은 아니고. 어쩌겠어, 삼촌. 세월 앞에 장사 없대.”
짓궂게 놀리는 자매에게 대항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돌의 노래를 꺼버리겠다고 협박하자 아이들은 곧바로 입을 조개처럼 다물어버렸다. 아이돌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우스운 한편 딱 제 나이다운 순진함이 귀여워 하선우는 구시렁거리기 시작한 조카들을 룸미러로 살피며 피식거렸다.
첫째 형의 딸인 민영과 지영은 조카들 중에서 유난히 하선우를 좋아했다. 미혼인 데다가 다른 삼촌들처럼 권위적인 면이 없고, 친인척을 통틀어 가장 외모가 준수했기 때문이었다. 심술궂은 말만 골라하지만 실은 삼촌을 자랑스러워하는 자매였다.
앞좌석의 등받이에 바짝 붙어서 지영은 하선우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삼촌은 할머니 선물 뭐 준비했어?”
“스카프.”
뭘 그런 걸 선물하냐는 듯 저희들끼리 눈을 맞춘 자매는 다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스카프?”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스카프가 아니야.”
“그럼 뭔데.”
“삼촌이 산 스카프는 명품 중의 명품이야. 게다가 차석 디자이너가 직접 스카프에 할머니 이니셜을 수놓은 스카프라고.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사는 스카프야.”
“우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감탄하던 민영이 갑자기 좌석에서 엉덩이를 띄우며 하선우가 기댄 등받이에 턱을 얹었다.
“삼촌 부자 됐다던데 진짠가 보다.”
“누가 그래.”
“엄마가 그러던데? 삼촌 엄청 부자 됐다고.”
민영의 기대 어린 시선에 형수가 도대체 무슨 말을 조카에게 전해준 것인지, 자신이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상황인지를 생각하던 하선우는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야.”
이제 막 날개를 펴기 시작했기에 모아놓은 돈은 보잘것없었고, 한동안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그치겠지만 적어도 부자가 될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하지만 하선우는 그 사실이 조금 이상스럽고 어색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야망으로 업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적성을 찾아 먹고사는 방편으로 취업을 하듯 하선우도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분당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을 때 주차장에는 이미 형제들의 차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가장자리에 놓인 차는 둘째 형이 새로 산 것으로, 중대형급의 2,000cc대 후반의 배기량을 가진 차였다.
풀옵션으로 샀다고 했으니 3,000만 원 중반대 정도 하려나.
그는 3,500만 원짜리 국내차를 현금으로 구매한 형의 경제수준이 괜히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젯밤 백화점 VIP룸에서 겪었던 충격이 컸던 탓이었다. 너무 비현실적인 체험을 해서인지 이젠 무엇을 봐도 값싸게 느껴졌다.
집은 넓은 거실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복작거렸다.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열일곱이라는 대인원이 모인 거실의 한가운데에는 이미 상이 펼쳐져 있었다. 2단으로 된 떡 케이크와 각종 다과가 가득 차려진 상의 좌우로 조카들과 이모님들, 형제들과 형수님이 앉아 있었고 가장 상석에는 하선우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왜 이리 늦게 왔어. 다들 기다리잖아.”
타박하는 할머니에게 애교를 부리며 민영이 말했다.
“제가 편의점 좀 들르자고 했어요. 할머니.”
조카들을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서며 하선우는 현관을 둘러보았다. 아파트 입구까지 종종 어머니를 모시러 분당에 들르곤 했지만,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은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익숙한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현관을 벗어나 거실로 발을 들였다.
TV를 벽걸이형으로 바꾼 것 외엔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3년 전에 촬영했던 가족사진이 걸린 벽에는 과시용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이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권정옥 여사의 남편과 아들들의 업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대학졸업장과 각종 수료증을 전시해놓은 것이었다. 신을 벗던 하선우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가족사진과 형제들의 전문의 수료증 위에 사진 하나가 추가되어 있었다. 지난여름 홍콩의 컨벤션 홀에서 찍혔던 사진이었다. 회사 로비에 그치지 않고, 강주한의 사진은 부모님의 집 안에서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사진을 걸어놓은 의도가 빤히 보여 하선우는 한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강주한이라는 단맛에 기댄 부모님의 얄팍한 과시가 하선우 자신과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갑자기 서글픈 짜증이 몰려왔다.
“어머니는 왜 저런 걸 걸어놔요.”
“응?”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당히 하세요. 사람 민망하잖아요.”
하선우는 조카들의 곁에 털썩 앉아 한숨을 쉬었다. 벙벙한 얼굴로 나무라는 아들의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의 눈길이 액자로 향했다. 타박하는 의미로 꺼낸 말이었지만 어머니는 하선우가 얘길 잘 꺼냈다 싶었는지 표정이 뒤늦게 환해졌다. 계기를 기다렸다는 듯 엘텍과 관련한 얘기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강주한이가 우리 선우를 좋게 봤는지 요즘 승승장구잖아. 선우야.”
“예.”
“엘텍에서 투자받았다고 했지? 그 얘기 좀 자세히 해봐라.”
“여기서 무슨 그런 얘길 해요.”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서 관둘 생각이 없다는 듯 아들을 다시 한 번 더 보챘다. 하는 수 없이 하선우는 주변을 시큰둥한 눈길로 돌아본 뒤에 입을 열었다.
“제가 어쩌다가 힘세고 오래가는 전지를 개발을 했는데 그게 대기업 나으리들 눈에 들었어요. 그래서 좀 투자를 받게 됐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첫째 형이 더 자세히 얘기해보라고 끼어들었다.
“특허를 팔게 되면 그 대가를 세 가지로 나누어 받을 수가 있어요. 일시불, 선불금, 그 다음에 통상 로열티라 말하는 경상기술료. 저는 좀 애매한데… 회사 투자받는 조건으로 특허를 엘텍에 넘기게 돼서 결과적으로는 제 주머니에는 들어온 게 없어요.”
“뭐?”
“아, 없다는 게 아니고, 챙길 건 똑똑하게 다 챙겼지. 무이자 대출을 51억 받았지? 선불금으로 2억 챙겼지? 로열티로 1.03%씩 받기로 했지? 한마디로 회사 규모를 키웠다 이거죠.”
둘째 형 선범이 물었다.
“선불금으로 2억을 받았다고? 그게 많이 받은 거야? 적은 것 같은데?”
“2억이면 애매한 액수긴 하지만, 로열티를 지급받기로 했으니까 나쁘지 않지.”
“2억은 뭐했는데.”
“울산 공장 확장했으니까 채울 기계 샀지.”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중한 얼굴로 한참 동안 셈하던 셋째 형 선열이 차마 부정하고 싶은 얼굴로 말했다.
“한마디로 빚더미에 앉았다는 거네?”
“형. 그건 아니지.”
“그래, 선열아. 그게 말이 되니? 이래서 만날 손톱만 한 것만 들여다보는 인간들이랑은 대화가 안 돼.”
어머니는 심장에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가슴께를 마구 두드리며 말했다.
“덕분에 지금 울산에도 제2공장 확장시켰잖아. 나는 얘가 이렇게까지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어. 의대 안 간다고 고집 피울 때는 속만 썩이는 줄 알았는데 보란 듯이 성공한 거 봐. 외할아버지는 공무원이셔 할아버지는 학교 선생이셔. 사업이 뭐야? 친가 외가 통틀어 장사꾼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이런 피는 누구한테 물려받아서 세계를 상대하는 거상이 되었나 몰라.”
여자는 신나서 홍역처럼 한바탕 치르고 간 지난 사건들을 다시 되짚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가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수상한 내역과 의대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갈등을 빚던 이야기, 창업동아리 회장을 지내던 시절 서울시에서 지원금을 받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길어지는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서 의미심장한 눈빛이 교환되었다. 형제들이 의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그들이 겪은 힘든 과정은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느낌이 들어 하선우는 괜히 민망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30대 초반의 젊은 CEO의 성공담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모두들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 간의 모임에 뜸했던 하선우로서는 별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자랑이 비교적 낯선 이야기지만, 다른 이들은 한두 번 들은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결국 귀에 딱지가 얹겠다며 타박하는 이모님의 성화에 구구절절했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케이크를 자르고 사진을 촬영한 뒤에는 각자가 꾸려온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희생한 만큼 대가를 요구하는 편이었고, 보란 듯이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기에 언젠가부터 이맘때가 오면 어렴풋한 긴장감에 주변의 공기가 옥죄는 기분이 들곤 했다. 형제들이 결혼으로 분가를 하고 형수들 간에 미묘한 알력이 생기게 되면서 눈치를 보게 된 것이었다. 첫째 형 내외가 현금과 꽃, 둘째인 선범이 건강식품을, 셋째인 선열이 마찬가지로 건강식품을 꺼내놓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하선우는 어머니의 눈길이 자신에게 닿자 등 뒤에서 주섬주섬 선물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어머, 이건 뭐니?”
“스카프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포장을 조심스럽게 벗겨내자 사각 케이스가 드러났다. 케이스 위에 적힌 브랜드명을 본 어머니의 표정은 이게 뭐냐는 듯 찌푸려졌지만, 둘째 형수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탈리아 브랜드라는데 고급스러운 거라고 하더라고요.”
“뭘 이런 걸 샀어. 엄마 스카프 잘 안 하는데.”
말과는 달리 꼼꼼하게 스카프를 살펴보던 어머니는 끄트머리에 은색으로 수놓인 자신의 이니셜을 보고는 눈이 커졌다.
“이니셜? 이런 걸 새겨줘?”
“창립 75주년이라 이니셜을 손바느질해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더라고요. 거기 차석 디자이너라는 사람이 직접 해준 거예요.”
형제들과 형수들의 눈치를 보며 하선우는 주섬주섬 등 뒤에서 종이백을 꺼내 들었다.
“이건 지갑이고요.”
새하얀 융으로 된 천에 싸인 짙은 남색의 지갑을 꺼내 들었다. 한눈에 알아볼 만한 브랜드 로고가 없는 단순한 지갑이었다. 미간을 찌푸려 지갑의 외피를 자세히 살펴보던 여자가 시선을 치켜 올렸다. 막내아들이 가져온 선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거 가방이니? 아니면 지갑이니. 뭐 이리 애매한 크기로 샀어.”
“왜요.”
“내가 몇 번을 얘기해, 넌 패션 센스가 없으니까 이런 거 사오지 말라고. 차라리 돈으로 달랬지. 안 그래도 가방 복잡한데 이렇게 큰 걸 어떻게 집어넣고 다녀. 너는 모난 구석 없이 다 잘났는데 섬세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왜 꼭 매번 선물 주고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그러니?”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 앞에서 열일곱 소년처럼 타박 맞는 기분에 하선우는 굳은 얼굴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둘째 형수가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어머니, 이거 너무 고급스럽게 예쁜데요? 도련님, 센스 있게 잘 사오셨어요. 클러치라고 하는 건데요, 이 정도 크기면 지갑으로도 쓸 수 있긴 하지만 가방으로 사용하셔도 무난해요. 통장 모임처럼 중요한 모임 나가실 때 이거 하나만 들고 가시면 되겠다. 근데… 어머, 이거 브랜드가…… 에르메…스네요?”
정적이 찾아왔다. 형수들이 비밀스럽게 눈빛을 교환했다.
감응 없이 지갑을 훑던 어머니는 주변의 심상치 않은 침묵에 눈을 들었다. 주변을 돌아본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던 자신의 돋보기를 찾았다. 안경을 쓴 눈을 게슴츠레 내리깔아 가방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삼촌. 그게 뭔데? 명품이야?”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한 지영이 어른들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걸.”
“짝퉁 아니야?”
“아니야.”
“비싼 거야?”
“그럴걸.”
“그럴걸 이라뇨, 도련님! 악어가죽이잖아요!”
조금 전부터 유독 안절부절못하던 셋째 형수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못해도 3,000만 원이에요! 초조한 그녀의 말에 어머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머니가 안경을 손가락으로 다시 추어올리는 수 초 동안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표정이 놀라움에서 경악, 비난으로 바뀌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결국 하선우는 형제들 간의 위화감을 우려해 국내에서 더는 구할 수도 없는 제품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정말 요 쬐그만 한 게 그렇게 비싸다고?”
“아니에요. 그렇게 안 비싸요.”
“아니긴요, 지갑도 아니고 클러친데. 적어도 이…….”
당장이라도 항의하려는 셋째 형수의 팔을 선범이 잽싸게 잡아채 막았다.
“아니, 그래도 고작 지갑 하나를 뭘 그렇게 비싸게 주고 샀니?”
하선우의 예상대로 어머니는 좋아하기는커녕 어이없어했다. 기가 막히다는 듯 불통거리며 첫째 형이 어머니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선우야. 그건 좀 과했다.”
“환불해라, 얘. 엄만 이런 지갑 못 든다.”
“저렴하게 구입할 기회가 돼서 산 거니까 그냥 들고 다니세요.”
“저렴하게?”
“얼마 전에 설이었잖아요. 그때 엘튼 호텔 아케이드에 초대받아서 선물받은 거예요. 제 돈 안 들었어요.”
“네가 엘텍 공장장한테 설 선물을 준 게 아니라 받은 거라고?”
어머니는 안경을 코끝을 향해 내리며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공장장한테 받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전자사업부 임원이 좋게 봐주셔서 얻었어요.”
“전자사업부 임원? 임원까지도 너 알고 지내니?”
“어머, 도련님이 성공하니까 이런 선물도 들어오나 봐요.”
“이거 뇌물 아냐? 뇌물?”
지갑을 구경하려 손을 내미는 선범을 손을 뻗어 가로막은 여자는 하선우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리며 물었다.
“아니, 전자사업부 임원이 왜?”
“개인적으로 도움드린 게 좀 있어서요. 회사일이라 얘기하기 좀 복잡해요.”
“믿어도 되는 거야?”
“그렇다니까요. 제가 왜 거짓말하겠어요.”
“진짜지?”
“예. 정말로요.”
“그 임원이라는 사람한테 전화해봐도 되니?”
이번에는 하선우의 형제들이 어머니를 말리려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마시던 물을 급하게 삼키며 하선우는 급하게 말했다.
“회사가 유치원이에요? 그냥 좀…! 들고 다니세요.”
“아니, 얘는 왜 또 화를 내고 그래.”
화들짝 놀란 여자가 손으로 가슴을 내리눌러 진정시킨 뒤에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점잖게 헛기침을 한 그녀는 클러치를 등 뒤로 옮겨놓고는 조심스럽게 찻물을 들이켰다. 하선우를 향한 타박은 그저 엄살 같은 나무람이었는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눈매에서 못내 감추지 못한 흥분이 읽혔다.
할 말이 많은 눈으로 클러치를 쳐다보는 형수들과 동생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내심 부러워하며 말을 아끼던 형제들은 곧 새로운 일상의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그들은 병원생활과 환자들, 가족과 아이들, 부부간의 관계, 하선우가 한 번도 가져보려 하지 않던 목록을 하나하나 꼽아댔다. 그들이 느끼는 공통된 정서에서 조금 비껴나 방관할라 치면 여지없이 하선우에게로 질문이 쏟아졌다. 참한 여자가 있으니 만나보라는 권유였다.
어머니의 불편한 웃음과 아버지의 외면하는 눈길을 흘깃거리며 하선우는 침묵을 고수하는 대신 이것저것 핑계 거리를 늘어놓았다. 시간 되면 언제 한번 만나보겠다는 말로 그 언젠가를 늘 그랬듯 연장했다. 그러는 사이 밤이 깊었고 하선우는 조금 진이 빠진 기분을 느끼며 부모님의 집을 벗어났다.
어머니의 선물은 오늘 오후 항공우편으로 그의 회사에 도착했다. 양복을 입은 멀끔한 외모의 젊은 배달원이 직접 쇼핑백을 들고 사장실로 가져온 선물이었다. 그가 어젯밤 백화점에서 산 2,300달러짜리 스카프와 장미로 된 생생한 생화다발, 그리고 카탈로그지에서 스치듯 보았던 클러치백이 들어 있었다.
동상에 걸린 피부조직이 차가움 대신 오히려 뜨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그는 마음이 차갑게 덴 기분이 들었다. 화해의 선물인지, 아니면 신랄하고도 정중한 모욕인지, 강주한의 의미심장한 마음을 읽으려 했다. 돌려줄 엄두도 받을 엄두 역시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거절이 거듭된다면 강주한과는 한 번 더 멀어질 것이다. 출발하기로 예정한 시간에 이르도록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자신 안의 불안함을 바라만 보고 있던 그는 결국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누구에게 빼앗길세라 다시 클러치백을 꽁꽁 싸매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넘치는 허영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주한이 준 골치 아픈 짐을 어머니에게 떠넘겨버린 기분에 하선우는 속이 온통 쓰렸다. 결론적으로 명품가방은 하선우의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이 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밑천이 되었다. 그 사실이 하선우를 자랑스럽게도 비굴하게도 만들었다.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 않고 침대에 모로 누운 하선우는 반나절이 넘도록 존재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던 핸드폰을 가방 안에서 꺼내 들었다. 스팸문자와 회사에서 받은 연락을 건성으로 체크하던 그는 피식거리며 자조했다. 지금까지 그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강주한을 화나게도 만들고 하선우 많이 컸다.
마지막 스팸문자를 삭제한 하선우의 얼굴은 무표정해졌다. 화면에 어제 마지막으로 보관했던 메시지가 떴다.
「오늘도 우리 집에서 같이 근무 할까요? 가능하다면 답장 줘요.」
그 이후로 만 하루 하고도 반나절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다. 하선우 역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으니 피차일반이었다. 그에게 연락할 구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선물에 대한 감사인사를 시작으로, 안부문자, 하다못해 회사 얘기라도 할 수 있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인물이라고 믿었지만 만의 하나의 경우라도 그들의 냉전이 계속된다면 회사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0분. 강주한이 잠들었을 수도, 아직 잠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문자를 보내려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를 바라보던 강주한의 눈빛에 기억이 머무른 순간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진전되지 않았다.
강주한의 몸이 자신을 향해 기울고, 단단한 손바닥이 어깨를 굽어 잡았다. 그 새까만 감정에 몸 전체로 압력을 받는 듯 파편으로 해체되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 더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하선우는 강주한의 눈빛에 조금이나마 그에게 내밀었던 마음이 잘린 통증을 느꼈다. 정작 분노에 급급해서 그 자리에서 도망친 것은 자신이었지만.
한동안 정지된 시선으로 화면을 응시하던 그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뒤집어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캔맥주의 뚜껑을 당겨 단숨에 비워낸 그는 모로 눕힌 몸으로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생각에 지쳤다. 셀 수 없는 뒤척임 끝에 움직임이 멈추었고 긴 잠에 빠진 그는 비로소 편안해질 수 있었다.
* * *
다음 날도 기분은 다르지 않았다. 생각에 줏대라고는 없어 흡사 무골충이 된 느낌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는 기분이 변했다. 마냥 마음이 평온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평소 스위치로 작동되는 기계 같은 면이 있는 하선우였지만 좀처럼 기분이 원하는 대로 전환되지 않았다. 이런 심경들은 금요일 저녁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무렵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판단력까지 둔탁해지는 지경에 이른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에 자그맣게 딸린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애써 기분을 내보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싸늘한 냉기가 가득한 탕비실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전화가 울린 것은 그의 뒷머리가 채 마르지도 않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스탠드 하나만을 켜놓고 라꾸라꾸에 모로 누워 서류를 읽고 있던 그는 손을 뒤로 뻗어 허리춤을 더듬거리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 뜬 ‘오피스텔 관리인’이라는 글자를 본 하선우는 허리를 일으켰다. 철 지난 유행가 후렴이 절반이 지나도록 화면을 쳐다보며 전화기의 테두리를 느릿하게 문지르던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받고 나서도 쉬이 입이 열리지 않아 침묵했다.
-선우 씨.
“예.”
절로 딱딱한 목소리가 나와 건너편에서도 잠시 말이 없었다.
-지금 뭐합니까.
“일하고 있었습니다.”
커피테이블 위에 쌓인 서류를 흘깃거리며 하선우는 말했다.
“후처리 테스트 보고서 확인하는 중입니다.”
-많이 바쁜가 보죠?
“예. 일이 좀 밀렸습니다.”
-얼굴이나 볼까 했죠.
하선우는 무심결에 이마 언저리를 비비적거렸다. 이마를 짚은 채 눈만 들어 벽시계를 확인했다. 자정까지 한 시간 조금 안 남은 시간이었다.
“지금 회사라서요.”
그렇군요. 건너편에서 강주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자신의 말이 딱딱한 거절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선우는 덧붙였다.
“늦었는데 안 주무십니까?”
-자야죠.
대화를 조금 더 발전시키려 꺼낸 말이었지만, 늦었으니 전화 끊고 자라는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일전의 일도 있고 아직 쌓였던 감정이 풀어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선우가 진땀이 인 손바닥을 티셔츠를 당겨 닦아내는 사이 건너편에서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실은 선우 씨 회사 앞입니다.
하선우의 눈가에 잔경련이 일었다. 놀라서 창가를 쳐다보았지만 불 꺼진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회사 앞이시라고요?”
-차 안에 있습니다. 방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전화기를 뺨에서 멀리 떨어뜨린 하선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쩐 일로…… 아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나가겠습니다.”
강주한은 화단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어둠이 암막처럼 그를 가려 하선우는 조금 헤맨 뒤에야 그를 찾을 수 있었다. 경비실은 비어 있었고 200여 미터 밖의 공장부지에서 손전등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당장은 경비원과 마주칠 걱정이 없어 안심하며 하선우는 강주한의 앞에 섰다. 회사에서 퇴근해 집에 들렀다 온 것인지 옷차림은 편안했지만, 평소에도 이렇게 근사하게 입는 것은 그의 습관인 듯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강주한의 모든 것을 눈에 넣으며 하선우는 지친 감정을 감췄다.
“오셨습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주한은 한 손을 내밀었다.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배고프죠. 야식 사왔습니다.”
“뭘 이런 걸.”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먹을 것으로 길들이려는 심산인지 만날 때마다 뭘 사왔다. 봉투를 받아 든 하선우는 안을 열어보았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 그가 눈을 가늘게 뜨자 강주한이 말했다.
“가볍게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샐러드로 가져왔습니다.”
“출출하던 차였는데 잘됐네요. 잘 먹겠습니다.”
봉투 끈을 손목에 건 하선우는 강주한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나 계속 여기 서 있어야 합니까. 시간이 지체되면 강주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분명히 그 자리에 움직임 없이 서 있음에도 미적거리며 서성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를 탕비실로 안내하기는 망설여졌다. 잠시 후면 경비원이 먼 공장부지를 돌아 회사 복도를 순찰할 터였다.
“저 회사에 있는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느낌이 그랬습니다.”
하선우는 멀뚱히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텅 빈 경비실에 눈길을 주며 그가 말했다.
“하 사장님 퇴근했는지 경비실에 전화해서 물었죠.”
아, 나지막한 감탄으로 수긍한 하선우는 흐릿하게 멀어진 경비원의 손전등 빛을 곁눈질했다. 자정을 한 시간 남짓 남긴 지금, 경비원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강주한을 해명할 말이 궁색하기만 했다. 이석에게조차 지난겨울 이후 강주한과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를 안으로 들일지, 말지를 고민하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말했다.
“늦게까지 일하는군요.”
“예.”
“일이 많이 밀렸나 보죠.”
“어쩌다 보니…. 월요일에 이사님 울산에서 돌아오시거든요. 그 전에 처리해놔야 하는 일이라.”
“그렇군요.”
“예.”
일상적인 얘기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섣부른 행동을 아끼고 있던 하선우는 목의 중간에 걸린 사탕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삼킬 수도, 그렇다고 쉽게 뱉어지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어머니 선물 잘 받았습니다.”
닫힌 입술에 힘이 들어가 굳게 다물렸다. 강주한의 입술에 하선우의 눈길이 붙들렸다. 그의 입술 안에서 틀어막힌 소리가 무엇이었을지 하선우는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덕분에 어머니께서 좋아하셨습니다.”
“…다행이군요.”
“강 전무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은 못 드렸습니다. 기절하실까 봐요.”
하선우의 우스갯말에 강주한은 입술만을 조금 움직여 웃었다. 하선우는 억지로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있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강주한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또 정적이었다.
하선우는 지난 이틀 동안 출발점을 지나쳐 그보다 더 후퇴한, 예전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된 기분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넘어갈지 아니면 모르는 척 뭉뚱그려 넘어갈지 기로에 서 있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 연결된 끈을 잡고 있지만 누구도 먼저 줄을 놓지도 당기지도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강주한이었다.
“생각보다도 더 하선우 씨를 상대로 연애하는 게 쉽지 않군요.”
강주한의 말 속에 담긴 회의적인 결을 하선우는 본능적으로 더듬어 찾았다. 지금쯤 연애하자고 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겠지. 강주한과 연락이 닿지 않는 이틀 동안 홀로 추측을 하면서 하선우 역시 자문했다. 이대로 헤어지기를 원하는지를. 강주한과 하선우 사이에 싹튼 감정이 최소단위에 지나지 않을 테니 이대로 물린다고 해도 서로 아쉬울 것 없는 이 시점에서.
“우리 둘 다 자존심이 참… 강하군요.”
되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강주한은 재미없는 농담을 한 것처럼 홀로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웃음 끝의 적막을 잘라내듯 그는 말했다.
“내가 전화를 안 했다면 하선우 씨는 전화를 안 했겠죠.”
하선우의 침묵에 강주한은 물었다.
“이대로 헤어졌으면 했습니까?”
하선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주한은 대답으로 듣겠다는 듯 침묵했다.
“아니요.”
불쑥 덧붙여 말했다.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하선우의 말에 강주한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선우는 되물었다.
“전무님은요.”
“헤어지길 원했다면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그렇죠.”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하선우는 쥐고 있는 종이가방의 끈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헤어지길 원하지 않는 연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미 마음의 간극은 움직이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형식적이나마 예의가 생겨났다. 정리되지 않은 사건들과 감정만이 남았다. 강주한은 우울하고 지친 기색을 딱딱한 껍질로 감추고 있는 하선우를 눈에 담았다. 어깨는 긴장으로 뻣뻣했지만 축 늘어진 손은 땀으로 축축했고 눈은 강주한의 얼굴 위를 배회했다. 하선우의 시선이 닿은 곳곳마다 진땀이 묻어날 것 같았다. 강주한의 예상보다도 하선우는 훨씬 더 꼿꼿하고 생각까지도 진력을 다하는 면이 있었다. 자신의 준수한 외모와 재능을 음미하고 그것을 근거로 유연하게 휘어지는 사교성도 없는, 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알기 쉬운 남자였다.
강주한은 자신의 진심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신의 진실함을 무기로, 진심을 받아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보다 배타적이고 냉소적인 세상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백화점에서의 다툼을 떠올렸다. 투명한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여과 없이 드러나던 하선우의 의심을 보았다. 진정성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던 자신이, 선물을 주는 자신의 호의를 재단하는 하선우의 태도에는 쉽게 분노했다. 강주한은 그 시간을 돌이켜 떠올릴 때마다 생각이 냉랭해졌다. 한편으로는 하선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불신. 이보다 그 자신을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는 것을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가오는 강주한의 얼굴에 하선우의 표정이 침침해졌다.
“사과하려고 온 겁니다.”
그는 중간 휴지 없이 곧바로 얘기했다.
“그날 선우 씨에게 배려 없이 행동했던 것도 차갑게 굴었던 것도 모두 미안합니다.”
긴 정적이 이어졌다. 하선우는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레가 들린 것처럼 급하게 숨을 들이쉰 그는 재채기가 나와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고 자잘한 기침이 가라앉을 때까지 콜록거렸다. 한 손으로 입술을 압박해 가린 채 콜록거리며 강주한을 올려다보던 하선우의 눈이 압력으로 온통 붉어졌다.
“괜찮습니까.”
잠자코 기침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강주한이 물었다.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날 생각… 사레… 들렸나 봐요.”
하선우는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한참 동안 잔기침을 한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어 기침과 함께 마른 웃음을 흘렸다. 잔기침으로 들썩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에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하선우는 진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약간 정신도 없어 보였다.
사소한 해프닝으로 강주한의 사과가 모두 무용으로 되돌아간 기분에 하선우는 멋쩍어졌다. 강주한은 개의치 않고 되풀이해 말했다.
“화내서 미안했습니다.”
이번에는 하선우는 가만히 있었다. 강주한의 사과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다. 강주한의 가슴께에 초점을 둔 채로 숨을 들이쉰 그는 말했다.
“화가 난 전무님.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하선우는 그 일이 자신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듯 씁쓸하게 웃었다. 시선을 피하며 하선우는 말을 이었다.
“전무님을 그렇게 화나게 할 정도면 제가 많이 유별나게 굴긴 했던 거죠.”
“내 행동이 비열했죠.”
“아뇨. 제가 먼저 전무님을 화나게 한 거니까요.”
숨을 모아 한숨을 크게 쉰 하선우는 말했다.
“괜히 의심부터 해서 죄송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
“…그대로 나와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잡지 않았으니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주한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럽게 고요가 찾아왔다.
서로를 면죄한 안도감에 지금껏 가슴에 무겁게 얹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침을 느리게 삼킨 하선우는 마른 아랫입술을 윗입술로 조금 축였다.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전무님과의 연애… 어렵네요.”
한쪽 입술만을 비스듬히 움직인 강주한은 숨소리만으로 웃었다.
동감합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한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돌아가라고 말하지도,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하지도 않는 태도에 강주한은 하선우를 끈기 있게 내려다보았다. 화단을 스친 바람이 정적을 메우며 두 사람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으스스한 찬기에 하선우는 가만히 상박을 쓸어내렸다. 저 멀리서 점점 가까워지는 손전등의 불빛과 주말의 야근, 강주한의 침묵 사이에서 갈등하던 하선우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만 퇴근해야겠네요.”
“이제 그만 우리 집으로 돌아가죠.”
우리 집. 그 말이 이상하게 하선우를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낮게 한숨을 쉰 하선우는 괜히 강주한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감정적으로 굴지 않으려 애쓰며 그는 말했다.
“가죠 뭐.”
“토요일까지 같이 있을까요.”
“토요일이요?”
“내일도 같이 있는 건 무리입니까.”
“그러죠. 뭐.”
하선우는 주말 출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까지 급한 일은 아니고 또 저는 일요일에 출근해도 되니까.”
“다행이군요. 사실 나도 선우 씨 보려고 토요일 약속까지 제쳐놓고 왔던 거라서.”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눈길을 옮겼다. 한 박자 느리게 덧붙여 물었다.
“절 보러요.”
“예. 하선우 씨 보러요.”
하선우는 고개를 설렁설렁 몇 번이나 끄덕인 뒤에 말했다.
“외투 걸치고 나오겠습니다. 추운데 차 안에서 기다리십쇼.”
서둘러 회사 안으로 뛰어 들어간 하선우는 모퉁이에 서서 몸을 숨겼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조금 뒤 가슴이 푹 꺼지도록 호흡을 내뱉었다. 허연 입김이 흩어진 복도 위로 헛웃음이 쏟아졌다.
강주한의 세계는 하선우에게 여전히 삼인칭의 세계였고, 그의 세계가 우리라는 일인칭이 되기에는 얼마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강주한의 우리 집이란 말을 못 견디겠으면서도 싫지가 않았다. 조금 전까지도 서먹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비집고 들어온 다정한 그의 한마디는 약을 탄 물 같았다. 현실을 다시 비현실로 끌어갔다. 하지만 이전의 사건 때문인지 감정의 단위를 최소단위로만 진행시키고 싶었다. 여전히 강주한을 좋아하고 싶은지는 미지수였다.
땀이 식어 차가워진 손바닥으로 질끈 주먹을 쥐고 하선우는 서둘러 회사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 안은 시트러스 계열의 방향제를 삼킨 공기로 후덥지근했다. 싸늘한 냉기를 품고 차 안으로 들어왔던 하선우는 금세 으스스한 기운을 떨쳐버렸다.
부드럽게 출발한 차는 곧 톨게이트로 향하는 사차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루하도록 같은 풍경을 반복하는 텅 빈 도로 위로 겹쳐진, 차창 이면의 강주한을 보았다. 어두운 차창은 거울처럼 그를 푸르스름한 빛으로 반사시키고 있었다. 자정의 정물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며칠 동안 하선우의 마음에 칼금을 긋던 돈에 대한 고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선우는 그냥 운전하는 강주한의 옆모습을 흘깃거렸다. 퇴근 후 집에 들렀는지 남색의 라운드넥 니트와 베이지색의 면바지, 날카로운 구석 없이 풀어헤쳐진 그의 차림이 편안했다. 강주한의 경계 안에 들어가 그의 방심한 면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에게 날을 세우고 스스로를 검열하던 모든 고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실은 더 이상의 고민이 귀찮고 피곤했다.
하선우는 하품을 하며 시계를 보았다. 11시 27분이었다. 연달아 하품을 하며 몸을 비틀자 강주한이 물었다.
“졸려요?”
“너므 조려요.”
하품이 나오는 입을 억지로 다물며 말하자 강주한이 웃었다.
“자요.”
“아뇨, 괘안아요. 곧 도차칼 테데.”
말하는 도중 또 하품이 나왔다.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자 그가 오른손을 뻗어 하선우의 허벅지를 더듬거렸다. 그 옆의 버튼을 누르자 좌석이 자동으로 뒤로 움직였다.
“앞으로 30분 더 가야 합니다. 자두시죠.”
히터는 적당히 따듯했고 온열 시트는 포근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로운 클래식 음악은 몰려오는 졸음에 적당한 핑곗거리가 돼주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졸음을 버티던 하선우는 결국 격류로 떠밀려오는 수마에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하선우는 낯선 주변의 환경에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차가운 백열등이 수직으로 뻗어 있는 잿빛의 공간이었다. 주차장이었다. 눈을 손등으로 비비적거리며 그는 좌석을 세웠다.
“잘 잤습니까.”
테블릿PC의 케이스를 소리나게 덮으며 강주한이 물었다.
“예.”
운전하는 강주한을 두고 태평하게 잠든 스스로를 속으로 나무라며 그는 침이라도 흘렸을까 봐 손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잠이 덜 깬 눈을 게슴츠레 뜬 하선우는 말했다.
“깨우지 그러셨습니까.”
“지금 좀 자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강주한의 눈길이 하선우의 옆얼굴에 닿았다. 하선우는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 좀 자두는 게 나을 거라는 그의 말에는 밤에 재우지 않을 거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머쓱한 얼굴로 웃는 하선우의 표정을 일부러 시간을 들여 확인한 그는 먼저 차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자신의 토요일까지 욕심내고 싶다던 그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실감이 났다.
두 사람은 67층에 도착하고 복도를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갑자기 술 한잔 걸친 사람처럼 몸이 더워졌다.
강주한이 찬장에서 술을 고르는 동안 하선우는 얌전히 거실의 소파 위에 앉아 둘 곳 없는 시선을 전원이 꺼진 TV화면에 두고 있었다. 거울처럼 미끈한 LCD 화면 속에 비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도 오래전 그의 첫 연애가 떠올랐다. 그때는 사랑 자체가 두려웠고 연인과 눈을 마주치는 것과 전화를 하는 것이 모두 어색하기만 했었다. 검은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이 마치 그때의 숙맥 같았다. 연애 초보자 티를 팍팍 내며 맹물처럼 굴던 그 시절에 비해 지금 한 가지 나은 점이 있다면 그나마 강주한이 능숙하게 이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능숙하게.
싸움 뒤에 화해와 섹스. 연애의 정석이지.
애써 쿨하게 생각하려 애쓰며 하선우는 강주한을 눈으로 쫓았다.
그는 와인과 빈 잔을 트레이에 담아 왔다. 샐러드가 든 도시락 포장을 뜯은 하선우는 강주한과 자신의 앞에 포크를 나란히 놓았다. 자정을 훌쩍 넘겼지만 정신은 멀쩡하다 못해 쨍했고 허기로 속이 허전했다.
샐러드는 끼니가 될 만큼 푸짐한 양이었다. 와인을 곁들인 늦은 저녁으로 배를 채운 하선우는 혈중에 돌기 시작한 알코올의 기운을 의식했다. 마취주사를 맞은 것처럼 둔한 감각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문지르던 하선우는 커피테이블 위로 더디게 눈길을 돌렸다. 마침 적당한 이야깃거리가 눈에 띄었다.
“상반기에 새로 출시되는 모델인가 보죠?”
널찍한 커피테이블 가장자리에 신형 핸드폰과 노트북, 테블릿PC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강주한은 대답했다.
“핸드폰은 시장 반응을 봐서 10월 출시 예정이지만 나머지는 잠정 보류입니다. 정식으로 출시될지는 아직까지는 미지수죠, 올 초에 출시한 제품보다 스펙이 다운된 편이라.”
“신기하네요.”
“뭐가요.”
“시장에 나오지도 않은 시제품이잖습니까. 봐도 됩니까?”
장난감을 발견한 소년처럼 눈을 빛내는 하선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주한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 버튼을 눌러 태블릿을 살펴보기 시작한 하선우는 곁에 강주한이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화면을 터치했다. 프로그래밍을 확인하고 터치의 감압을 파악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이었다.
“이번에도 시제품 보고서 작성할 겁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맞은편 스툴에 앉아 턱을 괸 채로 물었다. 단번에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하선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제품 보고서라뇨.”
강주한은 대답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수수께끼 같은 그의 말을 곱씹던 하선우는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엘텍과 업무제휴를 맺으려 어떻게든 강주한의 눈에 들려고 발버둥 치던 기억이었다. 그때의 하선우는 강주한이 별 의미 없이 건넸던 태블릿PC의 사용기를 거의 책 한 권 분량으로 제출했었다.
“아뇨.”
“왜요. 한 번 더 하라면 못하겠습니까.”
“…그때는 어떻게든 강 전무님 마음에 들려고 애쓰던 때니까.”
어물쩍 말을 흐리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잡아놓은 물고기라 더는 애쓸 필요가 없다 이겁니까.”
잡아놓은 물고기라는 그의 말이 묘하게도 하선우에게 보상의 느낌을 줘서 웃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테블릿PC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길어지는 침묵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애인인데 정말 보고서 작성을 해야 하나 싶어 더디게 눈을 떴다.
“그냥 조금 인상적이었습니다. 목차만 3페이지에 달하는 시제품 보고서를 거래처 사장에게 받아본 건 처음이라. 사활을 걸었다고 말하는 하선우 씨의 절실한 눈빛이 참 …가련하던데요.”
“가련해 보였다니 결과적으로는 참 다행입니다.”
은근하게 묻어나는 비아냥에 강주한은 어깨를 한 번 들먹이며 웃었다. 턱을 괸 그의 분위기가 여유로웠다. 그에게는 이 사람을 가지고 놀 수 없다는 난공불락의 느낌이 있었다. 하선우는 희미하게 웃음으로 당겨진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어떤 기류를 탄 것처럼 생각을 멈춘 사이에 그저 그를 보게 되었다. 수 초의 시간이 흐른 뒤 하선우는 그에게서 더디게 시선을 떼며 허리를 세웠다.
“그건…….”
목소리가 잠겨 헛기침을 한 하선우는 덧붙여 말했다.
“작년에 나온 모델이랑 디자인이 많이 다른 것 같네요. 기능도 많이 다르겠죠?”
“사실 크게 다르진 않아요. 일단 기존 모델보다 크기를 키워서 패블릿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하드웨어가 업그레이드되는 건 당연한 거고.”
그는 휴대전화를 카메라 모드로 변경시켜 커피테이블을 찍었다.
“NnG와 엘텍이 공동 개발했던 배터리가 들어갔습니다. 지금껏 나왔던 휴대전화 전지 중에서 가장 셀이 많고 전압이 높은 배터리라 거의 혁신이죠. 그리고 접사 시 초점을 0.1초 안에 잡아주는데 거의 시간이 지체되는 걸 느끼지 못하는 수준인 거죠.”
그는 돌연 휴대전화를 하선우의 얼굴 가까이로 들어 올렸다. 바로 귀 옆에서 카메라의 셔터음이 들려왔다. 경직된 하선우에게 그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잘 나왔죠?”
얼결에 휴대폰을 건네받은 하선우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화면 가득히 지도의 등고선처럼 유선으로 굴곡진 구불구불한 귓바퀴가 초점 하나 흐려지지 않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피부는 연분홍에 가까웠다. 강주한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해 귓불을 보여줬다. 솜털 하나까지 또렷하게 보이는 확대된 살갗을 본 하선우는 본능적인 혐오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화소가 높네요.”
고개를 끄덕인 강주한은 화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귓불의 흉터를 보고 있었다. 귓불의 끄트머리에서 5밀리미터 떨어진 분홍의 흉은 상처가 난 좌표 때문에 아주 작은 귀걸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의 눈여겨보는 시선에 하선우는 오래전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상기되었다.
“어렸을 적 멋모르고 귀를 뚫었다고 했죠.”
“기억하시네요.”
“부모님이 싫어해서 결국 막아버렸다면서요. 흉터가 크긴 하군요.”
가만히 턱을 괴고 하선우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강주한이 고개를 들었다. 신중하게 하선우의 옆얼굴을 살펴보던 그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귓등 위로 걸고 귓불을 검지와 엄지로 가볍게 잡았다. 몽글몽글한 흉터가 만져졌다.
“뚫을 때 얼마나 아팠습니까.”
이상한 질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선우는 강주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워낙 순식간에 뚫어서 처음엔 안 아팠어요.”
“그래도 나중에는 아팠겠죠.”
몸이 가까워졌다. 가볍게 오르내리는 그의 숨이 옆얼굴에 닿았다. 강주한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숨결은 솜털보다도 가벼웠지만 하선우는 어딘가 조금 성적으로 몰아붙여지는 느낌을 받았다.
“예.”
“어떻게 아팠습니까.”
“뜨겁고 피부가 근질거리는 게 화상 입은 거랑 비슷하던데요.”
간지러움에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얇은 귓불을 압력을 가해 누르던 그가 손을 거두어갔다. 그는 이제 눈길과 몸을 기울여 하선우를 굽어보고 있었다.
“집에는 밝혔습니까.”
그는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말은 생각의 파편을 뚝 떼어다 최소한의 표현만을 던져놓은 암호 같았다. 하선우는 머릿속으로 생략된 단어를 나열해보았다. 곧 그 말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했다.
“예.”
“힘들었겠군요.”
“거의 전쟁이었죠.”
풀썩 웃은 하선우는 짧은 고민 끝에 덧붙여 말했다.
“아버지 성격이 군인 같거든요. 절대 용납 안 하셨죠.”
“지금은?”
“지금은 뭐, 소원해졌죠. 귀신도 믿지 않는 분이었는데 지금은 아들을 거의 귀신취급 하시는걸요.”
한때는 상처가 됐지만, 이젠 그 상처를 용납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게 된 일들이었다. 아들의 성정체성 문제를 알게 됐던 초창기 어머니는 협박과 회유를 거듭하며 아들을 달래보았다. 그러다 혈육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적의를 드러냈고, 투쟁이 시작됐다.
그는 이런 얘기를 강주한에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강주한은 뒷말을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하선우는 더 깊게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무거운 얘기는 서로 부분적으로만 공유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어쩌겠습니까. 나를 바꿀 수도 없는 문젠데.”
하선우는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전무님은 자랑스러운 아들이겠어요.”
손바닥으로 턱을 쓸어가며 진지하게 고민하던 강주한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하선우의 입에서 나올지도 모를 입에 발린 말을 차단하려는 듯 강주한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보다는 상속의 의미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라… 자녀들에 대한 편견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분이죠.”
삭막한 강주한의 말에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설마 그러겠습니까. 그런 말을 던지려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무감한 표정에 다른 말을 했다.
“무서운 분인가 봐요.”
강주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순한 양이죠.”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는 하선우에게 뭔가를 증명해 보이려던 강주한은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그래도 형제들 중에서 상속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전무님이라고들 하던데요. 회장님께서 제일 믿는 게 전무님인가 보죠.”
“그야.”
조금 뜸을 들인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부친의 기준에서 어긋나지 않으려 노력했으니까요. 아버지의 눈으로 나를 점검해가며 해야 할 말과 행동을 고르고 골랐죠.”
이유를 묻는 하선우의 눈에 강주한은 대답했다.
“나는 욕심이 많으니까.”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살아왔다는 말이었지만, 강주한은 그 사실에 대해 조금의 서글픔도 느끼지 않아 보였다. 그 역시 필요를 위해 부친을 이용했다는 듯이.
하선우는 불현듯 지난 늦겨울 삼청동의 저택에서 그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자녀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로 자신을 실망시킬지. 비관의 전제를 깔며 짓던 건조한 웃음이 아른거렸다. 무심코 드러나는 그의 써늘한 성격은 강주한의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임을 알 것 같았다.
하선우가 성격의 원류를 떠올리는 동안 눈앞의 그는 다른 데 생각이 닿아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턱을 괸 자세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던 그가 아래로 기울어졌던 고개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불쑥 말했다.
“그래도 자제가 안 되는 순간이 있긴 했습니다.”
“어떤 순간이요?”
그는 하선우의 시선을 오래도록 받으면서도 덧붙여 말하지 않았다. 절묘한 침묵에 하선우는 구부정했던 등을 펴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게 뭔데요.”
고개를 숙인 그가 눈만을 조금 들어 시선을 맞췄다.
“본능적인 거죠. 그런 일은 순간을 통제하기가 어려우니까.”
답지 않게 여의치 않은 눈빛을 하는 강주한의 얼굴에 하선우는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할 말이 입안에 맴도는 것처럼 입을 열고도 한참 동안 말문을 트지 않던 그가 곧 미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땐 발기된 성기가 바지 겉으로 표시 나지는 않을까 늘 두려웠습니다.”
“…….”
하선우는 이목구비의 위치가 바뀐 사람을 보는 심정으로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하선우의 표정을 확인한 강주한은 스스로도 한심한 농담을 한 것처럼 코웃음을 흘렸다.
“우습죠.”
“아뇨. 뭐…, …음, …그럴 수도 있죠.”
뒤늦게 어금니를 꽉 깨물어 표정관리를 하려 애썼지만 꿈틀거리는 입술까지 감출 수 없었다. 입술을 주먹으로 가려 헛기침하며 하선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데요.”
“글쎄요. 이유야 나도 잘 모르겠지만… 고상한 척하는 고압적인 분위기를 내심 모욕하고 망쳐버리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전혀 수긍하지 못하는 얼굴의 하선우를 한 번 더 흘깃거린 강주한은 턱을 괸 채로 어깨만 들썩였다.
“주로 내가 주인공인 자리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별안간… 정신을 차려보면 그런 터부에 골몰하고 있었어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외려 집착하게 되니까.”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문 그는 턱을 괴었던 팔을 떼어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나중에 그에 대한 메데코포비아라는 심리학 용어가 따로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왜 그러는지 잘 몰랐어요.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죠.”
강주한의 고백하는 어조가 침착했기 때문에 하선우는 그가 지금도 충분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선우 씨 페티시는 뭡니까.”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입술을 헤 벌렸던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아아, 믿지 않는 투로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이다 곧바로 말했다.
“없을 리 없어.”
단정적인 말에 하선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없을 리가… 있죠.”
“정도의 차이겠지만 터부 되는 상상 하나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여자들처럼 근육으로 잘 짜인 등을 보면 흥분한다든가, 아니면 남자들이 여자의 목덜미에 반응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페티시즘이 정리된 심리학서가 원서로 있는데 읽어보겠습니까.”
제법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길어지는 침묵 끝에 하선우는 말했다.
“그런 책을 보신다고요?”
“보면 안 됩니까.”
강주한은 외려 문제 있냐는 듯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가끔 아무런 대꾸도 못하게 만드는 직설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뇨. 그건… 아닌데.”
보통 그런 걸 찾아보진 않잖습니까. 뒷말을 삼키느라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보다 볼 만한 책입니다. 성적 정신병질에 관한 임상심리서죠. 세상엔 별의별 페티시즘이 다 있다는 걸 알게 되죠. 적혀 있는 사례에 비하면 난 평범한 축일 겁니다.”
“그걸로 자기 위안 삼으셨습니까.”
강주한의 약점거리 하나 찾았다는 생각에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왔다. 빈정거리는 투가 거슬렸는지 그의 미간이 모였다. 하선우를 집중해서 바라보던 강주한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긴 목에 눈길이 절로 가서 하선우는 침을 삼키느라 도드라진 강주한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건공중을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내렸다.
“자극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그 책을 읽는다고 단순하게 매도당할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럼 하선우 씨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섹스는 뭡니까.”
성정체성을 제외하고 자신의 섹스가 지극히 보편적이라고 믿긴 했지만, 하선우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섹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나 상대방에게 말 못하는 기벽을 갖고 있어요. 상대방이 나에게 실망할까 봐, 머릿속으로 꽁꽁 감춰놓는 그런 망상 같은 거 말입니다.”
“…….”
“난 내가 변태 성욕자라고 해도 죄를 짓지 않는 한 부끄러워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나쁜 건 아니잖습니까.”
“근데 저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잖습니까.”
얌전히 듣고 있던 하선우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하선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강주한은 이마를 조금 찌푸렸다.
“강 전…, 아니 주한 씨가 성욕을 혼자 풀면 상관없지만 어쩌면 제게…….”
“…….”
“……저에게 …해소할 때도 있을 테고.”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선우는 불현듯 왜 얘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 무덤을 내가 판 것 같기도 하고.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치아로 조금 당겨 물었다. 말문이 막힌 듯 한참을 침묵하던 강주한이 말했다.
“원치 않는 사람에게 해소할 생각 없습니다.”
섹스에 대한 얘기를 단조로운 하나의 표정으로 일관하며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아껴주고 싶지 선우 씨를 울리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당당한 구석이 있는 강주한과 달리 상대적으로 면역력이 약한 하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거실 한 바퀴를 횡단하는 대신 붉어진 얼굴로 하선우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강제할 생각이 없다는 강주한의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목이 탔다. 적어도 강주한은 어떤 상황을 머릿속에서 염두에 둔 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찬물을 들이켠 하선우는 테두리에 맺힌 물방울까지 핥고 나서야 흥분이 가라앉았다.
생각해보면 신체 부위나, 어떤 상황을 통해서 더 높은 성적 만족을 얻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선우 역시도 모든 섹스가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한구석, 모두 달구지 못한 미온한 부분이 남아 있을 때가 태반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슬며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전무님은 어떤 페티시가 있는데요?”
그가 앞서 한 이야기들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당연한 얘기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얼굴을 붉히면 이상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 일부러 더 건조하게 하선우는 물었다.
팔짱을 푼 강주한은 천천히 눈동자만을 움직였다. 테이블 너머 맞은편에 앉은 하선우의 발치에 시선이 닿았다. 여기저기 표류하던 그의 눈길이 하선우의 얼굴에 정박했다.
“거친 성향이 있긴 합니다.”
“…뭐, 어때요. …부드럽기만 하면 감질나긴 하죠.”
애를 쓴 티가 역력한, 하선우의 덤덤한 수긍에 강주한은 의외라는 눈을 했다.
“그렇습니까.”
물음이 되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하선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라이필리아. …불행기호증입니다.”
이름부터 뭔가 음험한 느낌이었다. 깨어지는 하선우를 응시하며 강주한은 말했다.
“눈물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증후군 같은 거죠. 고백하자면 가학적인 취향입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선우 씨에게 해소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선우 씨의 오르가즘을 컨트롤하는 상상을 해보긴 했지만.”
점점 커지는 하선우의 눈을 확인한 강주한은 물었다.
“선우 씨의 취향은 아닙니까?”
입이 붙은 사람처럼 말이 없던 하선우는 더듬더듬 말했다.
“뭐… 그건……. 아프지 않고, 적당히 수용할 수 있다면 괜찮지만 그게 과한 건…….”
“싫지는 않다는 거군요.”
눈살을 찌푸린 강주한은 근질거리는 것처럼 목덜미를 천천히 긁적거렸다.
“나는 선우 씨가 거부할 거라 생각했는데.”
“호불호가 딱히 있는 건 아닙니다. 누가 그러던데 남다른 섹스를 하는 커플 간에는 음….”
“…….”
“예사롭지 않은 유대감이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누가 그러던가요.”
“예전에 알고 지냈던 형이요.”
목덜미를 긁는 소리만이 적막 속에 사각거리며 울려 퍼졌다. 살갗이 긁힌 자리 위로 살이 부풀었다. 맨살을 매만지며 강주한이 박약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선우 씨를 회유하던가요?”
“예?”
“오래전에 알고 지냈다던 형이 말입니다.”
“아… 하하.”
애매하게 웃기만 할 뿐 하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짐작이 맞았음을 눈치챈 그가 잔을 들었다.
“어떤 유대감을 형성했습니까.”
하선우를 주시한 채로 고개를 숙여 잔을 기울이느라 강주한의 이마에 주름이 가로로 생겼다. 진실과 거짓을 채취하는 집요한 시선에 침을 꿀꺽 삼킨 하선우는 결국 들켰다는 생각에 멋쩍은 얼굴로 소탈하게 웃었다.
강주한의 말에 왜 이렇게 순순히 고민하고 있나 싶으면서도 하선우는 곰곰이 과거의 기억들을 더듬어보았다. 모텔, 집, 아니면 호텔, 대부분이 침대를 떠나지 않는 평범한 기억뿐이었다. 콘돔을 빠트린 적도 없었고 하루 동안 두 번 이상의 사정을 하지도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독특한 경험이라면 멋모르는 20대 초반 회유에 넘어가 얼결에 저질렀던 단 한 번의 섹스였다.
“그걸 알고 싶으세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는 묻어두는 게 나을 텐데요.”
“나는 하선우 씨의 과거와도 남다른 유대감을 갖고 싶거든요.”
“저는 강 전무님 경험담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하선우의 반박에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이다, 짧은 휴지기를 둔 뒤 말했다.
“내 페티시를 알았으니 하선우 씨도 알려줘야죠. 터부를 하나씩 알려주는 걸로 끝내죠.”
항변을 봉쇄하듯 강주한은 살짝 인상을 썼다. 어렴풋한 응석이 어린 눈매에 하선우는 멈칫했다.
위악을 떨고 싶지도, 섹스의 경험담을 자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하선우였다. 무엇을 위한 허심탄회한 대화인가, 이러다 너무 쉬운 취급 받는 건 아닐까 고민하며 하선우는 인상을 썼다.
“상황극 비슷한 거였습니다.”
순간적으로 삐끗 잔을 놓쳤지만, 와인잔의 얇은 목이 강주한의 손가락 사이의 틈에 걸렸다. 넘실거리기 직전의 와인을 발견하지 못한 채로 하선우는 말을 이었다.
“평생의 판타지라고, 계속 졸라서 어쩌다 한 번 한 겁니다. 그냥 오글거리기만 하던데요.”
“상황 설정이요?”
말문을 열다 하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강주한의 기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하선우에게는 가볍게 말할 수만은 없는 비정상적인 경험이었다. 괜히 말했다 싶어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애인의 바람을 제가 목격한…, …음, 그런 상황이요.”
잠자코 하선우의 말을 듣던 강주한은 어깨를 향해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연극이라도 했습니까.”
“……. …방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뜯다시피 벗겨주고, …거칠게 해달라고 해서 해줬죠.”
“그리고.”
“그 이상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독특한 섹스 경험은 멋모르는 20대 초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형의 회유에 넘어가 얼결에 저질렀던 단 한 번의 섹스였다. 강주한의 기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하선우에게는 가볍게 말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경험이었다. 한없이 어색했고, 흥분도 느껴지지 않아 도중에 때려치워버렸다. 강주한의 물음에 떠올린 경험이긴 하지만 하선우에게는 거북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를 괴롭혀가며 만족을 얻는 것은 그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어느새 잔을 내려놓은 강주한은 한쪽 어깨를 소파의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대고 있었다. 몸의 각진 모서리를 소파의 포근한 부피에 짓눌러 감춰버린 그는 말했다.
“알고 지냈다던 형과 남다른 유대감이 생길 만한데요.”
단조로운 강주한의 목소리에 하선우는 도리어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물어보셔서 대답한 거잖습니까.”
“다그치는 말로 들렸습니까.”
“예.”
“상관없습니다. 우리도 예사롭지 않은 관계가 되면 되니까.”
하선우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준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빤히, 오래도록 하선우의 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그의 생각들을 짐작하려 애쓰다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괜히 잔에 물을 채웠다. 강주한은 등받이에 기댔던 허리를 떼어냈다. 하선우는 그의 생각들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분명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그가 원하는 것 역시도. 표정은 없었지만 흥분의 고조가 분명한 상기된 얼굴로 강주한은 침을 삼키느라 도드라지는 하선우의 목울대를 쳐다보았다.
“지금 날 자극하는 페티시는 하선우 씨 옷을 모조리 찢듯이 벗겨버리고 전신을 핥고, 깨물고, 애무하는 겁니다.”
꿈틀하고 몸 안이 반응했다. 심장이 갑자기 지끈거려 하선우는 가냘픈 숨소리를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애무…해주시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전혀요.”
찬물을 홀짝여 입안에 끈적거리는 침을 감춘 하선우는 긴장으로 인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요.”
“모르겠습니다.”
강주한은 상체를 일으켰다. 하선우는 그의 몸이 자신을 덮을 듯 기우는 것을 느꼈다. 턱의 근육이 질기게 당겨지는 모습을 보았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눈자위와 시선이 맞닿았다. 당혹감에 고개를 숙이자 두 손이 하선우의 목덜미를 감아쥐었다. 혼잣말하듯 허기진 얼굴로 그는 중얼거렸다.
“그냥 그런 충동이 생겼어.”
갑자기 그가 중량이 늘어난 사람처럼 느껴져 하선우는 숨을 멈춘 채로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그늘을 보았다. 엄지로 하선우의 고개를 들어 올려 고정한 강주한은 상체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겹쳤다.
단번에 입안으로 질척한 혓바닥이 미끄러졌다. 혀 천장을 핥아 올리고, 빨아 먹듯 압력을 가해 하선우의 혀끝을 빨았다. 순간적으로 성욕이 아랫배의 감각을 날카롭게 베었다. 하선우는 일거에 산소를 모두 빼앗긴 사람처럼 숨이 급해지는 함께 무기력증을 느꼈다.
“…하, …….”
헛숨을 들이켜다 다시 숨을 멈추었다. 목을 가볍게 조인 손바닥이 뒤통수로 파고들어 머리채를 잡아챘다. 고개가 입맞춤을 위한 각도로, 빈틈없이 맞물리기 위한 질척한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혀끝에 고인 타액을 맹렬하게 모두 앗아갔다가 자신의 타액을 내어주고 아랫입술을 당겨 아프도록 짓씹어 빨았다. 혀끝이 일어서고 아랫입술이 부푸는 촉감이 아파 하선우는 끄는 신음을 흘리며 강주한의 손을 잡았다. 손등에는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옥죈 손아귀의 힘은 가벼웠다. 하선우는 욕망을 조율하는 힘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떼어낸 뒤 하선우는 참았던 숨을 불안하게 몰아쉬며 어떤 말로 급작스럽게 폭발한 분위기를 식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애써 평정한 눈으로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추저분한 모든 행동을 서슴지 않을 듯한 눈으로 하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선우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팽팽하게 아랫배를 당기는 기갈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얼굴을 보자 충동에 저항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아무렴 어때.
순식간에 지펴진 욕망은 해갈을 바라고 있었고 어차피 긴 밤, 어쩌면 내일까지도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엉켜 있을 예정이었다.
하선우는 강주한과 눈을 맞춘 채로 부자연스럽게 목구멍을 넘어가는 침을 힘겹게 삼켰다. 강주한의 양손을 잡아 옷 아래로 이끌었다.
“벗, 벗겨줘요.”
그의 눈빛이 갸름해졌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하선우의 옆얼굴로 얼굴을 묻었다. 코끝이 귓가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치며 더운 숨을 쉬었다. 혀가 간질간질한 귓바퀴의 고랑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 열기를 품은 공기와 습기가 척척하게 예민한 피부를 뒤덮었다.
아릿한 감각에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느새 강주한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랫배를 지나 갈비뼈와 옆구리를 넓게 쓸어 올린 손바닥이 가슴팍에 닿았다. 손바닥의 고랑 가운데로 자그마한 살덩이가 눌렸다. 흥분으로 도드라진 윤곽을 살짝 비벼 올리자 하선우의 입술에서 야트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귓가로 흩어지는 더운 숨과 말캉거리는 혀, 젖꼭지를 비트는 감각이 아주 가느다랗고, 생생하게 그의 몸 안으로 직진해 들어왔다. 느슨하게 소파에 기대 풀어지려는 그를 몰아치듯 강주한은 하선우의 상의를 밑에서부터 끌어 올려 단번에 벗겨버렸다.
“으…….”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혀로 적셨다. 젖꼭지를 씹는 치아의 느낌이 적나라했다. 짓이기고 부드럽게 핥아 올리는 곡예를 반복하던 강주한이 입술을 모아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빨았다. 절로 무릎에 힘이 들어가고 허벅지 안의 근육이 바르르 떨렸다. 피부 밑으로 벌레가 기어 들어가 근질이는 기분이었다.
눈을 들어 올린 강주한은 하선우의 긴장한 턱 끝을 보았다. 작게 솟아 오른 붉게 충혈된 유두의 심만을 치아로 깨물고 그 사이로 혀를 내밀어 빨았다. 하선우의 목울대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축축한 입술을 더 크게 벌려 가슴을 녹이듯 머금고, 치아로는 유륜 전체를 깨물어 자근거렸다.
“흐응, 흐으으….”
하선우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선우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했지만, 강주한은 서두르지 않고 손목을 잡았다. 바지춤으로 양손을 잡아 이끌며 그는 가슴에서 야트막하게 입술을 떼었다. 젖어서 번들거리는 붉은 유륜에 눈길을 주며 그는 속삭였다.
바지 스스로 벗어요.
한 번 더 퉁퉁 부어 오른 유두를 혀 전체로 매끄럽게 핥아 내렸다. 발작처럼 허리가 튀어 오르는 하선우를 가볍게 둘러 안은 그는 다시 땀으로 윤기가 돌기 시작한 목덜미를 향해 아래에서 위로 혀를 미끄러트렸다.
팔 안의 여린 살과 옆구리의 살을 치아로 긁고 때론 입을 크게 벌려 축축한 입술 속으로 빨아 올렸다.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며 눈시울을 떨었다. 애무에 집중하다가도 강주한은 한 번씩 하선우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 때문에 이마에 주름이 파이면, 그는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한 번에 먹어치우지 못해 여러 번 공을 들여 나누어 먹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유감이라는 듯이.
강주한의 무릎이 하선우의 다리 사이를 벌려 아랫도리를 대놓고 문질렀다. 하선우는 그제야 간신히 그의 주문을 떠올렸다. 버클을 풀고 엉덩이를 가볍게 띄우자 기다렸다는 듯 한 번에 속옷과 함께 바지가 벗겨졌다.
성기는 이미 완전히 발기되어 있었다. 양말을 벗겨주면서도 강주한은 꼿꼿하게 서서 꺼떡거리는 하선우의 성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귀두 끄트머리에 맺힌 쿠퍼액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성기를 감아쥔 하선우는 애액이 묻어나는 귀두를 손바닥으로 감추듯 애무하며 기대와 난색이 뒤섞인 눈으로 강주한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하면 사정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선우는 들뜬 숨을 몰아쉬며 손을 뻗어 강주한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그러나 강주한의 제지가 더 빨랐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강주한이 말했다.
“엎드려요.”
“펠라치오할까요.”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주한 씨 거 빨고 싶어요.”
일방적으로 봉사받기가 미안해 한 말이었지만, 뱉어놓고 보니 적나라한 느낌의 표현이었다. 뒤늦게 얼굴이 붉어지는 하선우를 지그시 바라보던 강주한은 일부러 간격을 두어 떨어지며 말했다.
“과감해졌는데요.”
“전무님과 유대감을 만들려면 이 정도는 소화해야죠.”
과감한 말과는 달리 하선우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불타올랐다. 가만히 하선우를 쳐다보던 강주한은 침으로 잔뜩 젖어있는 아랫입술을 빨았다. 하선우에게 몸을 기울이며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애무해줄 필요 없습니다. 지금부터 선우 씨가 감당할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제가 감당할 게 뭔데요.”
뚫어지도록 하선우를 바라보던 강주한은 갑자기 하선우의 무릎 뒤에 손을 집어넣었다. 경직된 몸을 안아 올려 뒤집었다. 얼결에 소파에 무릎을 벌리고 엎드리게 된 하선우의 몸이 움찔 떨렸다. 회음부 위로 미끄러진 혀가 뾰족하게 모아져 항문 주위를 날름 핥았기 때문이다. 놀란 숨을 삼키며 몸을 굳히자 감각이 더 선연해졌다. 질감과 양감이 더더욱 분명해졌다. 부피를 늘리며 젖은 살덩이가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거칠게 들숨을 삼키며 하선우는 발가락을 휘었다. 미치도록 간지러워 가쁘게 숨을 쉬며 반응했다.
허억, 숨을 삼키며 허릴 비틀자 강주한의 양손이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고 주름을 늘려 더욱더 개방시켰다. 애무의 구접스러움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쾌감의 충격이 하선우의 몸을 경직시켰다. 그의 혀가 내벽 안에 착 달라붙어서 얕고 깊은 삽입을 반복하다, 샅샅이 입구의 주름을 핥고 표피를 척척하게 적셔왔다. 메스꺼운 쾌감이었다.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 뒤늦게 강주한의 뭉뚱그려진 말을 깨달았다. 강주한의 어깨를 밀쳐내려던 손은 망설이다 결국 소파의 등받이를 쥐어짰다.
엉덩이를 잡아 벌리던 왼손이 하선우의 페니스를 뒤쪽으로 최대한 잡아당겼다. 주름을 빨던 입술이 회음부를 핥으며 올라가 페니스를 입안에 천천히 머금었다. 어금니로 귀두 언저리를 가볍게 씹었다가 혀로 핥아내고, 탐닉하듯 기둥을 빨았다. 타액을 잔뜩 묻힌 엄지손가락을 구멍 속에 깊게 찔러 넣자 소리도 없이 하선우의 허리가 갑자기 튀었다. 엄지를 직장 속에서 휘어 비비듯 누르자 애원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입으로는 페니스를, 손가락으로는 흥건하게 침으로 적셔진 내벽 속을 동시에 쑤시는 감각에 하선우의 잇새에서 가늘게 우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끈끈한 찰기로 오므라든 좁은 내벽 속에서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하선우의 허리가 아래로 낮아졌다 위로 솟아오르고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멍을 벌렸던 세 개의 손가락을 굽히며 빠르게 삽입시키자 들숨이 거칠어졌다. 내장과 생식기를 동시에 자극하는 압력에 해방감은 무력할 정도로 진저리치게 찾아왔다.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채 몸을 떨며 사정을 마친 하선우는 뻐근함에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강주한은 입속에 머금었던 정액을 하선우의 엉덩이 사이의 움푹 파인 경계에 주르륵 뱉어냈다. 애액이 엉덩이의 골을 따라 소리 없이 흘러내리다 여전히 추삽질을 거칠게 반복하고 있는 손가락 사이에 걸려 안으로, 안으로 하얗게 파고들었다.
“…아, 아아… 흐, …흐응.”
푹푹 쑤셔대는 손가락이 닿는 점막마다 미끌거리다 못해 뜨겁게 녹는 것 같았다. 등받이에 옆얼굴을 기댄 채로 신음하며 하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엉덩이골 사이로 정액 섞인 흰 침을 모아 뱉은 강주한은 한 손으로는 하선우의 엉덩이를 쑤시면서 남은 한 손으로는 바지의 버크를 풀고 있었다. 눈을 마주쳤다. 강주한은 욕망을 듬뿍 쏟아내기 직전의 눈빛으로 하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하선우는 그가 이미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바지춤을 조금 내려 브리프 속에서 페니스를 꺼냈다. 성기는 완전히 단단하게 발기해 있었다. 몸속을 찌걱이며 들락거리는 손가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였다. 혈관이 도드라져 빳빳해 보이는 강주한의 성기로 시선을 준 하선우의 눈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왜요.”
몸을 반쯤 일으켜 하선우에게로 상체를 기울인 강주한이 물었다.
“무섭습니까.”
전처럼 농담을 운운할 분위기도, 기분도 아니었다. 하선우는 어째서인지 페니스의 크기를 핑계 삼아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애가 타도록 원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강주한에게로 시선을 올린 하선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콱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으읏!”
몸속을 들락거리던 손가락이 잔뜩 굽어져 일부러 강하게 자극을 주고 빠져나갔다. 여실한 반응에 강주한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손가락이 빠져나간 뒤에도 여전히 개폐를 반복하는 희게 젖은 구멍 밖으로 귀두를 맞추었다. 힘을 뺀 항문 입구가 말랑거렸다. 양손으로 아랫배를 당긴 그는 하선우와 눈을 맞춘 채로 좁은 길이 열려 있는 몸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순간마다 변하는 하선우의 표정을 바라보는 강주한의 눈이 온통 붉어져 있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입만을 크게 벌리던 하선우는 더듬거리며 강주한의 손을 찾아 쥐어짜듯 잡았다.
배 속을 가르듯 허리를 좀 더 밀어 넣었다. 순간적으로 연동운동을 하며 들어오는 성기를 밀어내려 내벽이 와락 좁아졌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더 깊이 집어넣었다. 하선우의 등에서 진땀이 쏟아졌다.
“……하아.”
뿌리까지 모조리 들어온 후, 하선우는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숨을 몰아쉰 하선우는 괴로운 얼굴로 텅 빈 벽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몸을 웅크리듯 등받이에 이마를 묻었다. 함부로 움직이면 몸 안의 모든 것이 엉망이 돼버릴 것 같았다. 아랫배를 감싸 안았던 강주한의 손이 발갛게 씹어놓았던 유두로 움직였다. 애원하는 단발의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흑! 하지 마요.”
양쪽 유두를 동시에 함부로 비틀고 잡아당기기를 반복하며 강주한은 하선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씹기 시작했다.
“콘돔 안… 한 것 같은데.”
“문제 될 거 있습니까.”
그가 허리를 바짝 추켜올렸다. 헉, 헛숨을 삼키며 하선우는 고개를 꺾었다.
강주한은 감질나는 속도로 하선우의 몸속에서 천천히 성기를 빼내기 시작했다. 거의 움직임이 없었지만 몸 안에서 느껴지는 변화는 분명했다. 오히려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보다도 더 생생하고도 지독했다. 성기에 비해 턱없이 좁은 내벽, 부족한 물기, 도드라진 귀두와 혈관의 윤곽, 살갗의 모든 것이 그의 점막을 자극했다.
“하아, 하아아….”
“더 생생하지 않습니까.”
“…흐읏, …아….”
“여길 정액으로 가득 적실 겁니다.”
음탕한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대꾸 없이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좋고 싫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수치심이 느껴지고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귀두까지 걸쳤던 성기를 그는 또다시 느리게 진입시켰다. 흐으으, 흐으으, 일정한 속도로 끊어지는 신음을 흘리며 하선우는 이를 악물었다. 끈기 있게 페니스에 바짝 들러붙었던 점막이 점점 더 깊어지는 삽입에 아슬아슬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찐득거리는 생생한 감각이 괴로웠다. 콘돔, 하다못해 오일이라도 사용하면 한결 수월하련만 점막이 마른 살과 비벼지는 자극이 지나치게 강했다. 천천히 길을 들이려는 듯, 여유로운 삽입을 몇 십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강주한은 페니스를 모조리 뽑아냈다.
이완되었던 구멍이 붉은 속살을 숨기며 틈을 오므리는 것을 기다렸다, 단번에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하선우의 허리를 다시 안아 올려 강하게 찔렀다. 헛숨을 삼켰다. 소파의 등받침을 내려치다 손톱으로 긁으며 계속되는 빠른 삽입을 버텼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엉덩이 근육이 조여지고 허벅지의 근육이 빳빳해져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너무 딱딱…해…요. 흐, 흐응… 조, 좋아….”
엉덩이에 힘을 빼려 노력했지만 의지를 배반한 몸 안쪽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질긴 탄성에 강주한의 잇새로 탁한 숨이 흘러나왔다. 땀에 젖은 등골과 목덜미에 쪼는 입맞춤을 하며 그는 유연하게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추삽질의 속도를 높이자 하선우는 이를 악물고 코로 숨을 쉬었다. 비음이 깔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성기가 전립선을 자극하기 쉬운 체위라는 점에서 평소 후배위를 선호하는 하선우였지만 같은 체위로 삽입을 10여 분 반복하자 미칠 것 같았다. 전립선을 겨냥한 페니스가 계속해서 구멍 속을 짓찧었다. 한 가지 극점만을 짓눌러 몰고 가는 감각에 애걸하듯 하선우는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손가락으로 수도 없이 직격했던 전립선 부위는 쾌감의 발화점이 낮아져 있었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몸이 과민하게 반응했다. 좋았고, 그 이상으로 괴로웠다. 커다란 페니스로 인한 압박감과 통증이 쾌감과 뒤섞여 그 자체로 고통이 되었다.
바닥으로 주저앉지도, 실신하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벌벌 떨던 하선우는 결국 뒤로 손을 뻗어 바짝 밀착한 강주한의 아랫배를 밀어냈다.
“체, 체위라도… 바꿔… 으, 으읏, …아!”
몸이 강제로 일으켜지고 배가 뒤로 당겨졌다. 땅에 발을 딛게 된 하선우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는 삽입에 휘청이다 소파의 팔걸이를 잡고 엎드려 섰다.
강주한이 위로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키 차이 때문에 하선우는 발끝으로 서서 버텨야 했다. 팽팽하게 긴장한 허벅지가 잘게 경련했다. 강하게 찔러 넣자 허리가 뒤로 꺾였다. 강주한은 팽팽하게 근육이 돋아난 하선우의 다리를 잡았다. 왼쪽 무릎 뒤로 손을 집어넣어 허공을 향해 띄우자 구멍에 삽입하기 쉬운 각도로 다리가 넓게 벌어졌다. 그대로 페니스를 끝까지 쳐올렸다.
“아아…, 흐읏, …으응! …으, …흐악!”
갑자기 뿌리째 뽑아내듯 강주한은 성기를 빼냈다. 그에게 몸의 무게 대부분을 의지하고 있던 하선우는 휘청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쉴 틈은 잠시였을 뿐, 곧바로 몸 안으로 길고 두꺼운 페니스가 내리꽂히고 등 뒤가 온통 강주한의 가슴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이번의 그는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제발, 천, …천천히.”
귀 전체를 입안에 머금으며 강주한은 속삭였다.
“움직여요.”
왼손과 오른손으로 양쪽의 유두를 야릇하게 비틀자 하선우의 잇새에서 신음이 높게 새어 나왔다. 하선우는 따듯한 물속에서 느릿하게 자맥질을 반복하는 기분을 느꼈다.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하선우가 그를 느끼고 싶은 만큼, 닿고 싶은 방향으로 강주한의 페니스를 이끌면 그가 허리를 더 깊게 밀어 넣어 쳐올렸다. 비벼지는 곳곳마다 고도로 집중된 열기가 끓어올랐다.
하선우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나머지 한 손으로 페니스를 쥐어 비벼댔다. 옆구리를 잡은 강주한이 허리를 짧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하선우 역시 반동을 주어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였지만, 결합이 무수히 반복될수록 터질 것 같은 흥분에 박자를 놓치고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사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체를 지탱하던 팔에 힘이 풀려 하선우는 바닥에 고꾸라진 채 한쪽 뺨을 기댔다. 해방이 절실했다. 땀에 끈적하게 쓸리는 뺨을 찬 바닥에 비비며 페니스를 자위하던 하선우의 몸이 굳는 순간이었다.
“하앗, …아악!”
잔뜩 수축된 몸 안을 페니스가 격렬하게 뚫고 들어왔다. 온몸으로 전율이 흘렀다. 극점을 억세게 짓찧을 때마다 허벅지 안 근육이 경련하며 정액이 뚝뚝 쏟아졌다. 경직된 몸을 가눌 길이 없었다. 몸이 꿰뚫리는 대로 흔들거리며 지리하게 사정을 마친 하선우는 강주한이 움직임을 멈춘 뒤에야 간신히 습한 숨을 토해냈다.
그는 지친 눈으로 무릎 꿇은 다리 사이로 비치는 강주한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옷을 갖춰 입은 채였다. 그에 반해 나체인 자신은 이미 두 번의 사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것도 강주한의 물건을 엉덩이에 꽂은 채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대면서. 열기가 가라앉고서야 그는 홀로 벗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되었다.
축축한 혀끝이 귓바퀴로 미끄러졌다. 커다란 손가락이 하선우의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 들어 올리고 머리카락과 귓가의 경계를 입술로 핥아왔다. 체취를 취하려는 듯 하선우의 숨결을 깊게 들이쉰 강주한이 힘주어 머리카락을 당겼다. 턱, 고개가 뒤로 꺾였다. 혀를 길게 낸 강주한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하선우의 목덜미를 핥아 올리고 천천히 허리를 내빼기 시작했다.
하선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귀두까지 빼낸 강주한이 조금 더 빠르게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내벽이 성기에 빠듯하게 들러붙었다. 규칙적으로 호흡을 토해내려 애쓰던 하선우의 숨소리가 다르게 튄다. 아아, 절로 애걸하는 소리가 났다. 어느 틈엔가 지펴진 것인지 강주한은 자극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하선우의 팔목을 낚아채 뒤로 당겨 광폭하게 움직였다.
“하아… 아아아, 그, 그만.”
배 속이 아찔할 만큼 저릿했다. 이전보다 내벽의 마찰은 더 심해졌고, 살갗이 비벼질 때마다 열감이 발생했다. 무너지지 않으려 무릎에 힘을 주던 하선우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허리를 기듯이 앞으로 당겨 페니스를 뽑아냈다.
“흐으으, …처, 천천히.”
“…….”
하선우를 내려다보는 강주한의 눈빛이 탁하게 젖어 있었다. 그 자체로 음란함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하선우는 타액으로 흥건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강주한은 그 자리에서 거추장스러웠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 번에 셔츠를 아래에서 위로 끌어 올려 던져버리고 브리프와 함께 바지도 벗어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선우는 시간을 벌고 싶은 마음과 어서 빨리 몸을 겹치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에 진력이 났다.
허리를 굽힌 그가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하선우를 일으켜 세웠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은 채로 그대로 벽으로 밀쳐졌다. 입술을 벌린 그가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키스를 할 거라는 하선우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젖은 입술로 부풀어 오른 유두를 입안 가득 담아 조심스럽게 빨았다.
당장이라도 피가 배어나올 것 같은 따끔한 쾌감에 쇳소리가 나는 거친 숨을 토하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정수리에 쪼는 듯한 거친 키스를 퍼붓자 강주한의 혀끝이 핏발이 선 젖꼭지의 둘레를 따라 매끄럽게 움직였다. 치아로 부푼 몽우리를 잡아당겼다, 녹이듯 혀 전체로 살을 감싸 빨아올리자 감미로운 쾌감에 하선우의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헉, 으응, 좋아요. 나지막이 헐떡거리는 하선우에게 시선을 맞춘 그는 왼쪽 무릎 밑으로 팔을 집어넣어 벽에 등을 기대게 했다. 자신의 허리를 감게 하고 벌려진 다리 사이로 곧바로 파고들었다. 낯선 각도로 배 속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페니스에 숨을 몰아쉬던 하선우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는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이유를 묻는 눈으로 쳐다보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강주한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허리 흔들어요.”
침을 부자연스럽게 삼키며 하선우는 달뜨게 물었다.
“이…렇게…요?”
엉덩이를 아래쪽으로 은근히 내리받았다. 강주한은 무릎 뒤에 넣은 오른손을 조금 더 위로 끌어 올리며 삽입을 깊게 했다. 더 빠르게 움직여요. 허덕이며 하선우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엉덩이를 몇 번이나 더 들먹거렸다. 오래도록 지근거리며 몸속을 들쑤시는 감각과 서로의 배 사이에서 비벼지는 페니스의 감질나는 감각에 절로 목이 탔다.
팔을 뻗어 강주한의 목덜미를 둘러 안은 그는 혀를 내밀어 남자의 짭조름한 결후와 쇄골을 핥고 귓바퀴를 약하게 씹어대기 시작했다. 습하고 더운 공기가 안개처럼 두 사람 주위를 자욱하게 둘러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질퍽하게 섹스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강주한에게 매달려서 그의 몸을 잘근거리는 데 열중하고 있는 자신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무 움직임 없이 기다려주던 강주한이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하선우의 나머지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려 팔뚝에 걸쳤다. 순간적으로 기댈 곳을 잃은 하선우의 몸이 아래를 향해 크게 떨어졌다. 쇳소리를 지르며 강주한의 목을 꽉 껴안자마자 엉덩이가 강제로 다시 띄워졌다. 힘에 겨워 경직된 고개를 기계적으로 젓던 하선우는 참다 참다 몸을 떼어내려 했지만 허리를 결박한 손의 힘이 강했다.
침실로 가죠. 잠긴 목소리로 강주한이 말했다. 강주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삽입이 깊어지고 얕아지기를 반복했다. 애걸조의 숨소리를 속으로 죽이며 하선우는 돌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강주한의 어깨근육에 젖은 이마를 비벼댔다. 맞닿은 두 사람의 가슴 사이로 땀이 뜨겁게 흘러내렸다. 온통 밝았던 거실과 달리 침실의 빛은 거실에서 새어 들어오는 형광등의 불빛이 전부였다.
방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제법 오래 걸음을 뗀 뒤에 하선우는 침대 끄트머리에 등허리를 걸쳐 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어둠에 적응할 새도 없이 곧바로 벌어진 다리가 가슴을 향해 접히고 이미 반쯤 걸쳐져 있던 강주한의 페니스가 더 깊게, 음모가 비벼질 정도로 빈틈없이 들어찼다.
“하아…!”
다급하게 숨을 달싹이며 강주한의 아랫배를 밀어냈지만, 소용없었다. 페니스를 다시 모조리 빼낸 강주한은 수직을 향해 깊게 찔러 넣었다. 오므라진 몸속이 뜨겁게 벌려지는 압박감에 하선우의 아랫배가 잘게 떨렸다.
“안 쪽… 너무… 아, 안!”
페니스에 차지게 달라붙는 점막의 끈끈함에 강주한은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하선우의 몸속은 끊임없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뜨겁고 격렬한 탄성 속에 몸을 파묻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뜨거운 내벽 안에서 페니스를 느릿하게 뽑아낸 그는 하선우의 다리를 넓게 벌리고 끝까지 꽂아 넣었다.
하선우는 꼬리뼈 방향을 향해 곧바로 내리찍는 감각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귀두가 척추에 곧장 닿을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아래쪽으로 허리를 추어 내리던 강주한이 상체를 숙였다. 들쑤시는 속도를 높이자 숨소리가 심상치 않아졌다. 하선우의 입술 속으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자 끊어지는 듯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긴 눈매가 이지러지고 척척하게 젖어들어 갔다. 자꾸만 뒤틀리는 등허리를 공중을 향해 들썩거렸다. 시트를 잡아 뜯어 비틀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나운 기세로 몸속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압박감에 하선우는 온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강주한은 고개를 돌려버리는 하선우의 턱을 억세게 잡아 자신에게로 고정했다. 하선우는 몸속에 번져나가는 감각을 이기지 못해 울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제발…, 흐흑…, 으으응, 흑, 하아! 제, …제발!”
무엇을 원하는지 목적도 모르는 채 무작정 애원하고 있었다. 하선우의 흠뻑 젖은 눈에 눈길을 뜨겁게 고정한 채로 강주한은 자신의 몸을 세차게 부딪쳤다. 흥분으로 죄 풀어졌다, 조금의 전진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듯하게 조여오기를 반복하던 내벽이 흠뻑 젖어들어 갔다. 물꼬가 터져 나온 것처럼 여러 번에 걸쳐 사정이 계속되었다. 젖을 대로 젖어 질퍽거리는 구멍 속의 열기가 뜨거웠다. 잇새로 거칠게 신음하며 강주한은 하선우의 아랫배를 보았다. 하선우의 페니스에서도 쏟아지다 그치는 모양새로 탁한 정액이 질금 떨어지고 있었다.
사정을 완전히 끝내지 못해 여전히 긴장 중인 하선우의 몸속에서 빠져나온 그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욕망이 덜 해소되었지만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얼굴로 하선우는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몸을 침대 중앙으로 끌어당긴 강주한은 하선우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하선우의 엉덩이 사이에서 새하얀 정액이 꾸역꾸역 속 안에서 게워지듯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가운데손가락을 집어넣자 벌름거리는 구멍이 좁아지며 손가락 전체를 축축하게 감싸왔다. 열기로 뜨거운 내부를 즐기듯 그는 손가락의 개수를 하나 더 늘려 점막을 매만졌다. 부드럽게 눌렀다 갉듯이 밖으로 빼내자 왈칵,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작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하선우의 입술에서 기운 없이 새어나왔다.
내벽을 무디게 긁어내리며 전립선을 피해 오래도록 지근거리자, 하선우가 앞과 뒤로 정액을 질금질금 쏟아내기 시작했다. 강주한은 느릿느릿 오르가즘을 맞이하고 있는 하선우의 성기를 입안에 머금었다. 천천히 귀두까지 빨아낸 그는 희묽게 젖은 입술을 혀로 핥아내며 시선을 맞췄다. 하선우의 얼굴을 살피며 강주한은 말했다.
“하선우 씨는 품위라고는 없는 남자였군요.”
흠칫 몸을 떨었다.
“이렇게 음란하게 앞뒤로 줄줄 흘리기나 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하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몸속을 집요하게 짓누르자 헤벌어진 입구가 그의 손가락을 질퍽하게 옥죄였다. 하선우의 눈시울이 다시 뜨겁게 젖어들어 갔다.
“다시 더럽혀줬으면 합니까.”
데일 것 같은, 격렬한 시선으로 강주한은 물었다. 그 음란함에 하선우는 치가 떨렸다. 몸속이 날카롭게 쑤시는 느낌에 긴 숨을 토해내자 강주한이 앉은 자세를 바꾸었다.
그 역시도 몸 안에서 들끓는 욕망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말없이 강주한을 응시하던 하선우는 그의 뒷머리 속으로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세게 당기자 그가 하선우의 어깨 옆으로 손바닥을 짚으며 그대로 끌려와주었다.
강주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하선우는 울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이러면… 좋아서 이런 건지 괴로워서… 그런 건지 구분이 안 가잖습니까.”
또 한 번의 사정을 마친 직후에도 몸속의 긴장은 풀어질 줄 몰랐다. 엷은 숨을 토해내는 하선우의 아랫입술에 입술을 살짝 맞댄 채로 강주한은 속삭였다. 선우 씨 안, 뜨겁고 미끌거려요. 상체를 세운 강주한은 하선우의 왼쪽 발목에 입을 맞췄다. 발목을 손아귀로 잡아 활짝 벌린 그가 하선우의 엉덩이에 올라탔다. 단단하게 직립한 성기가 음낭이 뭉개지도록 강하게 꽂혔다 빠져나갔을 때, 한참을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던 하선우는 모아두었던 숨을 토해냈다. 숨의 끝에는 간헐적인 흐느낌이 뒤섞여 있었다.
도무지 버텨낼 재간이 없어 고문이 되다가도, 견딜 수 없이 좋기만 했다. 질리도록 계속되는 관성에 크림처럼 덩어리지고, 뭉개지고 녹아내리는 것은 아닐까. 더디게 시선을 움직인 하선우는 격렬하게 성기가 들락거리는 구멍을 보았다. 정액과 애액이 뒤섞여 하얀 포말이 들러붙은 구멍은 물러졌다 질겨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키스하려 허리를 숙이는 강주한을 강하게 결박하며 하선우는 부들부들 떨었다. 좋아요. 좋아서 죽을 것 같아요. 잔뜩 집어넣어 흔들자 좀 전과 달리 허리를 뒤틀며 등을 긁어댔다. 제발, 천천히, 그만해요, 애원하는 토막 난 숨소리의 발음이 죄 풀려 있었다.
하선우는 몸 안의 여린 조직이 타락해간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의 몸은 다시 한 번 더 극점에 가 닿았다. 강주한은 매번 쾌감의 혈을 짚었다. 실패도, 엇나가는 것도 없이 신경을 감당할 수 없는 지평 너머로 자꾸만 이끌었다. 그곳에서 미아가 된 것 같았다. 하선우는 쩔쩔매고 있었다.
땀이 고인 목덜미와 결후를 지나 턱관절을 깨문 강주한은 귓바퀴로 혀를 미끄러트렸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심상치 않은 상태를 느꼈다. 피부가 맞닿아 있는 것처럼 하선우의 감정이 곧바로 자신에게로 곧바로 전이되는 기분을 느꼈다. 암전된 세상 속에서 유백색으로 번들거리는, 눈물과 땀에 젖은 하선우의 얼굴만이 보였다. 고혈을 간직한 몸처럼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반응하는 몸이었다. 그 몸이 쾌감에 익숙해지고 고통까지도 모조리 받아들여 그 모든 감각 앞에서 생생하게 무너지길 원했다.
강주한은 문득,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고통스럽다고 느꼈다.
낮게 떠오른 아침 해가 침대 언저리를 기웃거렸다. 블라인드의 날에 부서진 빛이 그림자와 병렬로 교차되어 바닥에 횡단보도를 닮은 무늬를 남기고 있었다. 발 끄트머리에 살짝 닿아 있는 빛무리를 바라보던 그는 눈을 들어 올렸다. 창밖의 세상은 블라인드에 가려 토막난 채 이어져 있었다. 약한 스모그가 허물처럼 태양의 맨몸을 가린 아침. 아니, 아침과 정오의 중간 시간이었다. 하선우는 시간에 쫓기듯 일어나 새벽같이 떠나야 했던 침대 위에서 잠이 깨고 난 후에도 한참을 가만히 누워 시간의 흐름을 게으르게 방관했다.
그는 여행을 마친 직후의 여행자처럼 여독에 시달리는 몸의 감각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직도 가만히 있으면 몸이 물처럼 유동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굴곡진 지형을 따라 격렬하게 쏟아지던 지류는 고요한 검은 호수를 만나 고여들었다. 환상과 무질서를 경험한 뒤에, 여백이 가득한 몸으로 다시 회생한 느낌이었다.
“늘… 그런 섹스를 하셨습니까.”
어깨를 성기게 쥐었던 손을 펼쳐 하선우의 뒷머리를 뒤덮은 강주한은 시선을 내렸다. 수 초간 시선을 맞추던 그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섹스하진 않습니다.”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하선우의 표정을 살핀 강주한은 솔직하게 말했다. 반사적으로 치미는 간지러운 만족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선우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제는 왜 그렇게 열중하신 건데요.”
그러나 강주한은 쉽게 잡혀주지 않는다. 글쎄. 끄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한 그는 느른한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글쎄요. 그의 손바닥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으로 머릿고랑을 간질일 뿐, 그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빳빳하게 고개를 옆으로 든 채로 강주한의 표정을 살펴보던 하선우는 목에 주던 힘을 풀고 베개에 옆얼굴을 묻었다.
“대답하기 쑥스러우세요?”
강주한은 팔베개를 하고 있던 손으로 하선우의 머리통을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팍, 당겨 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코뼈가 눌려 아픈 소리를 내자 조금 느슨하게 팔의 힘을 풀어준 강주한은 하선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노골적으로 듣고 싶습니까?”
“……아뇨.”
“왜요.”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들을 것 같은데요.”
하선우는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느리게 귓불이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주한은 풀썩 웃었다. 간밤의 노골적인 성욕과 관계를 묘사하던 대화들이 여전한 충격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모든 충격이 고스란히 하선우의 몫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하선우의 눈물은 뇌관이었다. 머리 뒤쪽이 아찔하게 당겨올 정도로 홧홧하게 터져나가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연소한 기분으로 간밤의 생생한 기억을 떠올린 그는 숨을 죽이고 하선우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숨과 고동의 유유한 리듬이 느껴졌다.
한숨을 쉰 하선우는 강주한의 가슴팍에 기댔던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주저하는 얼굴로 하선우는 말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죄를 지은 것 같죠.”
따지고 들면 변태행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 관계였지만,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위험한 불장난을 저지른 아이가 된 것처럼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나무라는 사람도, 나무람을 받을 이유도 없었지만 자위를 들킨 소년처럼 자꾸만 남부끄러운 면이 까발려진 것 같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잠시 말이 없던 강주한은 말했다.
“나는 만족스러웠는데, 선우 씨는 부끄러웠습니까.”
“그야… 계속 이상한 말을 하셨잖습니까.”
“어떤 말이 가장 부끄러웠는데요.”
하선우는 턱 막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가 하선우가 누운 방향으로 모로 몸을 돌렸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강주한의 입술 아래로 시선을 옮긴 그는 괜히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전부 다요.”
줄곧 무표정을 유지했던 강주한은 엷은 입 바람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었다. 뒤통수를 감싼 손이 머리카락 속을 가만가만 문질렀다.
“원래 침대에서 그렇게 심하게 노골적이십니까?”
얼굴을 숙여 이마를 맞댄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간밤에 좀 유별나게 굴었죠.”
“조금 정도가 아니었거든요?”
피식 웃은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하선우를 보지 않고 뜸 들여 물었다.
“그래서 내가 싫어졌습니까.”
“……. 아뇨.”
하선우는 그의 매력에 무의식적인 반발을 느끼며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강주한은 물었다.
“원래 그렇게 잘 웁니까.”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눈가를 손가락으로 더듬어본 하선우는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대를 꺾은 엉겅퀴처럼 진물이 묻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짓 하다 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전무님이 억지로 자꾸 몰아붙이시니까… 그래서 울었던 거죠. 언제는 아껴주고 싶지 울리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니.”
뜨끔하라고 일부러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쉰 하선우는 아무 대답이 없는 강주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딱히 내놓을 만한 말이 없는지 그는 시선을 내렸다.
“쥐어짜여서 기운도 없습니다. 사정 너무 많이 하는 것도 남자에겐 안 좋다는 거 아시죠?”
“그럼 다음번엔 요도구를 막아줄까요.”
“……진담 아니죠?”
“강제로 참으면 조루가 되는 부작용이 있다고들 하지만… 억지로 사정하는 것보단 낫겠죠.”
하선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린 강주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하선우와 눈길을 맞추었다. 점점 여유로워지는 강주한과 반대로 그의 변화를 주시하는 하선우는 점차 딱딱해져만 갔다. 아, 진짜. 가슴이 들썩이도록 한숨을 몰아쉰 하선우는 겹치고 있던 몸을 반대로 돌려 누워버렸다. 하지만 멀어지려는 몸을 구속하려 강주한은 곧바로 하선우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 뒷덜미에 강주한의 입술이 꼭 맞닿았다. 입술을 비집고 불거져 나온 더운 숨결에 오싹함을 느꼈지만 하선우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몸을 비틀자 앞가슴을 구속한 손바닥의 압력이 단단해졌다.
“침대 맞은편에 전면거울 설치하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공사하는 사람이 분명 변태라고 생각할걸요. 아…, 변태 맞으셨지.”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로 하선우는 애써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도가 지나쳤나 싶어 숨죽여 강주한의 반응을 살피던 하선우가 힐끔 뒤를 돌아보려 할 때였다.
“그렇게 계속 북돋아주니 없던 용기까지 생기는군요. 다음번엔 색다른 걸 시도해보도록 할까요.”
하선우는 참담한 사고를 목격한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거기서 뭘 더하시려고요.”
“넥타이로 묶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선우는 말했다.
“전무님.”
목덜미에 묻은 입술 사이로 시침 뗀 웃음이 흘러나왔다. 울컥한 얼굴로 일어나려 하자 결박하듯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몸부림칠수록 몸을 옥죈 힘이 단단해져 가슴이 꺼져라 한숨을 쉰 하선우는 몸에 주었던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가슴을 안은 강주한의 팔이 보듬듯 가벼워졌다. 그대로 한참이나 흐르는 시간을 방관하던 하선우는 희부연 너울 같은 빛이 눈이 부셔 눈을 감아버렸다. 낮게 어른거리던 햇살이 기울어져 하선우의 오른쪽 눈가에 닿아 있었다. 어느새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
“화요일부터 8일간 독일에 체류할 겁니다.”
조금 전부터 등허리를 찌르는 반쯤 발기한 성기의 감촉에 꼼짝도 않고 있던 하선우는 목 잠긴 소리를 냈다.
“예.”
일부러 허리를 움직여 페니스를 하선우의 등허리에 마찰하며 그는 말했다.
“그 전에 듬뿍 싸드리죠.”
그는 하선우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무릎을 꿇어 앉았다. 하선우의 붉어진 얼굴을 감상하려 양어깨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그는 허리를 숙였다. 시선만으로 전신을 주물럭거리는 기분이 들어 하선우는 침을 삼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강주한의 벌거벗은 상체에는 자신이 씹어놓은 잇자국과 짧은 손톱으로 긁어놓은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은밀한 섹스를 할수록 연인 간에 유대감이 짙어진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선우는 조수처럼 자신 안에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달을 거스르지 못하는 바다처럼, 감정의 인력이 마치 자신을 강주한에게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 * *
휴대전화기의 화면 속에는 축축하게 젖은 살갗이 가득했다. 환한 대낮의 자연광 속에서 촬영된 사진에는 서로 얽혀 있는 손바닥이 담겨 있었다. 스팸 문자도 잘못 전송된 문자도 아니었다. 메시지의 발신지는 오피스텔 관리인이었다.
하선우는 처음에는 이 사진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상상의 여지를 줘서, 오히려 노골적이기보다는 모호하기까지 한 스냅샷이었다. 침대 시트 위에 짓눌린 손바닥과 그 손바닥 위로 겹쳐진 또 다른 커다란 손바닥은 언뜻 보기에 스틸컷처럼 감각적이기까지 한 사진이었다. 섹스 중에 찍은 사진이었다. 한 손으로 하선우의 손을 침대에 짓누르고, 남은 한 손으로 찍은 스냅샷이었다. 하선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진과 함께 첨부된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돌아올 때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떠올리라고 보내는 겁니다」
돌아올 때까지. 그가 독일에서 돌아오는 날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날을 떠올리라는 그 말이 기억의 복구를 도왔다.
빤히 문자를 내려다보던 하선우는 가슴을 들썩이며 코웃음을 흘렸다. 침대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자 몸에 고스란히 남은 열감의 기억에 눈앞이 뜨거워졌다. 사진에서 애써 시선을 거두며 하선우는 중얼거렸다.
“취향 한번… 별나네.”
입술을 안으로 당겨 물며 건공중을 오래도록 쳐다보던 그는 긴 한숨을 내쉰 뒤에 어두워진 화면을 다시 켰다. 미간에 내천 자를 새겨가며 그는 답장을 썼다.
「업무에 막대한 지장 주시는 겁니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에도 그는 화면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답장은 곧바로 왔다.
「나 혼자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자니 억울해서 말입니다」
누가 지켜보고 있지도 않은데 하선우는 웃지 않기 위해 안면의 근육에 잔뜩 힘을 주었다.
「계속 제 생각 하고 있었어요?」
문자를 보낸 후 10여 분이 지나도록 메시지가 오지 않아 답장을 기다리던 하선우는 핸드폰의 화면을 끄고 책상 위에 뒤집어버렸다. 갑자기 증가한 책임 보험료와 관련한 수정사항을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은 자신인데, 정작 그는 문자 하나에 정신이 팔려 반시간 전에 놓고 간 보고서를 검토하지도 않고 있었다. 목이 타는 기분에 애꿎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횟수는 잦지 않았지만, 무시할 만한 횟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드문 텀으로 인해 그는 연소되지 못한 무언가가 마음 안쪽에 앙금처럼 들러붙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다시 일에 몰입하던 그가 재차 서류를 내려놓은 것은 채 10분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몰입의 상태로 들어가 잡다한 상념을 비워냈지만 누군가 뒷목을 잡아채 질질 끌고 나가는 것마냥 다시 아득해졌다. 몇 번 더 서류를 들여다보려던 그는 결국 머리를 식히려 눈을 꽉 감아버렸다.
내 생각 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바빠서 답장이 없는 건가?
“사람 미치게 만드네…….”
생각이 조금만 움직이기만 해도 강주한이라는 상비된 존재가 튀어나왔다. 어이가 없어 하선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주한의 손바닥에 올려져 휘둘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신을 떠올리라고 했지만 이러다간 하루에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씩 그를 떠올리게 생겼다. 흡연의 욕구와도 비슷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이런 게 연애다 싶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고작 이런 일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표정 없이 서류철 속 종이뭉치를 바라보던 하선우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사이 오전이 지났다. 점심때를 맞춰 돌아오겠다던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이석이 도착했다. 2주 만의 귀환이었다.
“별문제 없었지?”
하선우를 보자마자 이석은 대뜸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이석은 살집이 후덕하게 올라 있었다. 울산의 현장인력 팀원들과의 결집을 위해 잦은 술자리를 갖느라 오른 술살일 터였다. 하선우는 대답 대신 그의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건 뭐야?”
“대표이사님이 2주간 자리 비운 사이 쌓인 서류.”
“뭐가 이렇게 많아! 너 공람할 것까지 다 챙겨왔지!”
“아닌데요.”
푸석한 얼굴의 이석을 보며 하선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울산에서는 어땠어.”
소파에 늘어져 있던 이석은 할 말이 쌓인 눈으로 하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어떻게 각색해 가장 고생스러운 경험담으로 들려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다들 말술이야. 아주 주량이 무량하셔서 집에를 안 가.”
“살 좀 올랐다 싶더니 그게 다 술살이었군.”
“그런가.”
싱겁게 웃으며 이석은 자신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소화불량 걸린 것처럼 계속해서 아랫배를 매만지던 그는 꾸룩 텅 빈 트림을 뱉어냈다.
“아직 사람들이랑 관계가 낯설어서 그런가 본사 의견도 곧바로 전달도 안 되고 불량률도 높고 아… 골치 아프다. 갑자기 덩치를 키워놓으니 내 능력 밖인 것도 같고.”
“배부른 소리 한다.”
그는 갑자기 씰룩 웃었다.
“하, 진짜.”
“왜.”
“아니 좀…, 낯 뜨거운 소문을 들어가지고.”
달달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하선우는 눈만을 움직여 이석을 바라보았다.
“울산에… 그… 무선사업부에서 너 두고 묘한 말 돌더라.”
“묘한 말?”
빤히 이석을 응시하는 하선우의 시선에 이석은 은근한 눈길을 했다. 수상스러운 침묵에 하선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데 뜸 들여.”
“H/W 3팀 선임연구원 있잖아.”
“선임연구원 누구.”
“그 노처녀.”
“…윤 선임?”
“어. 윤주미 선임. 너한테 관심 있다고 하데?”
달리 반응할 말이 없어 하선우는 입술을 조금 벌린 채로 이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기껏 털어놓은 놀라운 소식에도 불구하고 하선우가 심심한 반응을 보이자 이석은 김빠진 얼굴을 했다. H/W 3팀은 얼굴 마주칠 일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기구개발과 관련한 사항은 대부분 엘텍의 무선사업부 내에서 처리되는 사안이었고, H/W팀은 하도급 업체인 NnG와 연락이 닿을 일이 많지 않은 팀이었다. 다만 3팀은 배터리 검증 담당이었기에 오래전부터 NnG와의 간간이 교류가 있어왔다. 무분별하게 걸러지지 않고 퍼져나가는 범속한 이야기들을 믿을 수가 없어 하선우는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누가 그래?”
“윤 선임이 직접 그러던데.”
단순한 소문 정도로 생각했던 하선우는 이번에야말로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윤 선임이 그런 말을 형 앞에서 했다고?”
“사람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오해한 거겠지. 난 그런 느낌 평소에 못 받았는데.”
“오해는 무슨. 이번에 너 울산에 안 내려왔다고 완전 대놓고 서운해했잖아.”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이석은 말했다.
“전에는 구매부 사원이 너 신입사원인 줄 알고 홀딱 반해서 쫓아다니더니. 아, 맞다. 세무서 여직원이 정문에서 기다린 적도 있었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들먹여.”
“윤 선임이 뭐라는 줄 아냐? 하선우 씨 보고 싶었는데, 하선우 씨 요즘 잘 지내시냐고, 하선우 씨 선우 씨 하다가 나중에는 완제품 가지고 계속 태클 거는데 내가 공장장한테 체면이 안 서가지고. 아직도 우리가 예전의 구멍가게인 줄 아나. 아, 이 자식 생긴 거 빼곤 진짜 뭐 없는데.”
하선우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다음에도 그러면 나 만나는 사람 생겼다고 말해.”
“됐어. 일부러 둘러대는 게 더 이상해.”
“아니. 정말로.”
그는 이 말을 해야 하는지 그 스스로도 자신하지 못한 투로 말했다.
“생기긴 했어.”
이석은 어휘력을 상실한 사람처럼 입을 벙끗거리다 얼굴을 괴상하게 구겼다.
“뭐?”
“작년부터 몇 번 만났던 사람인데… 음…, 사귀기로 했어.”
이석은 뚱하게 눈을 굴렸다. 작년 연말을 전후로 하선우가 만나는 사람이 몇 명인가 있었던 것은 그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 만남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나 울산에서 시꺼먼 놈들이랑 씨름하는 동안 너 연애질 시작했다 이거냐.”
“어쩌다 보니.”
“예쁘냐?”
“미인은 아냐.”
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석은 하선우의 맥 놓은 한숨을 달콤한 것으로 느껴, 괜한 엄살을 부리는 것으로 오해했다. 엉덩이를 들썩여 한 대 쥐어박으려 손을 뻗다 달래듯 웃는 하선우를 보곤 손을 다시 말아 쥐었다.
“그렇긴 한데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핑크빛 기류 이런 건 없다.”
“왜.”
“결혼까지 갈 만한 사람은 아니라.”
이석은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뭐하는 여자냐.”
“…회사원.”
“어려?”
“아니. 서른 넘었어.”
“여자 나이도 있는데 결혼 안 보채?”
“그런 얘긴 안 꺼내던데.”
이석은 다시 하선우를 흘끗 쳐다보았다. 수상한 눈빛을 보냈다.
이석은 하선우의 연애 패턴을 잘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잘 모르기도 했다. 만난다는 얘기는 몇 번인가 들었지만 그 대상을 실물로든 사진으로든 직간접적으로 본 적은 없었다. 과부족 없이 연애를 하는 사람에게 품을 만한 의문은 아니지만, 이석은 아주 가끔 하선우의 성적 취향이 무성애자, 혹은 그 반대처럼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진지하게 오래 사귀는 사람이 없고 열정적이지도 않은 연애를 반복하는 그의 이상한 연애를 지켜보며 자세한 내막을 파고들고 싶기도 했다.
이석은 은근히 떠보듯 물었다.
“즐기자 이거냐?”
하선우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불만스러운 듯 한쪽 눈썹이 바짝 솟았다.
“연애를 꼭 그런 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나. 반드시 좋아 죽을 만큼 사랑해서 사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하선우는 놀리듯 웃으며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다. 시침이 3을 가리키고 있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형 기다리느라 점심 굶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자리를 옮긴 곳은 근처 뼈해장국집이었다. 요 근래 계속 얼큰한 것이 먹고 싶어 택한 메뉴였는데 주차를 하고 가게 문을 연 뒤에 아차 싶었다. 모두가 좌식 테이블이었다. 방석을 일부러 두툼하게 깔고 앉아도 짜르르, 엉덩이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둔한 불편한 통증이 올라왔다.
“울산에서는 별일 없었고?”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엉거주춤 기울이며 물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쌓여 있는 일간신문을 잔뜩 가져온 이석은 빈자리에 신문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별일이야 많았지.”
좀 전에는 술판을 벌이느라 괴로웠다는 얘기로 일축했던 울산에서의 이야기를 좀 더 판을 벌려 늘어놓았다. 대부분이 하선우가 예상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일산 본사의 사람들과 울산 현장의 사람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이석은 곳곳에 포진해 있는 구멍들을 발견하고 급한 대로 땜질해서 임시로 틈을 메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매번 두 사람이 번갈아 울산 현장을 방문할 수 없었고 각 현황을 모두 관리하고 점검할 수도 없었다.
“현장 소장과 안 부장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더라. 안 부장은 지방 파견된 걸로 또 나름 불만이 쌓여 있었고. 어쨌든 완제품 품질 보증될 때까지 공동작업이 계속돼야 할 텐데 관계가 초장부터 나빠지는 걸 두고 볼 수도 없고… 아, 파견나간 것들이 알아서 하면 좀 좋아.”
“그래서 술로 해결 본 거?”
“소장이 술자리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술자리에서 연일 치켜세웠지. 일단 지금은 기구개발에 빠삭한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니까. 자기도 그 나이에 소장급으로 옮기는 거 쉽지 않은 일이잖아. 본인도 계속 뻗대봤자 좋을 거 없지.”
“어쨌든 해결된 건가.”
이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 미적거리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왜 표정이 안 좋아?”
“좀 믿을 만한 프로세스 책임자가 있었으면 싶다.”
뚝배기에서 등뼈를 건져 올려 앞접시에 덜어내며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을 외부에서 뽑기는 그렇고 내부에서 관리자로 교육시키기엔 아직 우리 체계도 잡혀 있지 않은 편이고. 일단 무엇보다 다들 울산 근무는 할 생각 없다고 하고.”
살을 발라낸 등뼈 조각을 입안에 넣어 쪽 빨며 이석은 말했다. 절로 잇새에서 혀 차는 소리가 났다. 이석의 긴 얘기를 요약해보자면 울산 현장과 본사를 연결하고 관리할 믿을 만한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 있었지만 그 이름을 혀 위에 올릴 확신은 서지 않았다. 한때 울산 공장의 주인이었던 문도일이란 사내를 이석 역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도난 도일의 회사를 헐값에 경매로 넘겨받았다는 기억을 떨쳐내듯 고개를 저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그 외에는 없었고?”
“시스템 다시 구축해야겠더라. 뭐 이렇게 엉망인 게 많은지.”
자재관리부터 출역관리까지 운영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며 금연 장소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담배를 빼어 물었을 듯 그는 입맛을 다셨다. 이석의 말에 하선우는 불현듯 강주한의 말을 떠올렸다. 중소기업 규모의 제조회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소기업 형태의 벤처회사 골조를 갖고 있다며 외국계 경영 컨설턴트를 소개해주겠다던 말을 말이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할 말 있었어.”
“뭔데.”
“엘텍 계열사의 경영컨설팅을 맡고 있는 해외 업체를 소개해준다는 제의를 받았어. 구체적으로 전달받은 건 아니고.”
국에 밥을 말던 이석은 눈만을 들어 올렸다. 그는 밥알을 말던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 아주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도대체 왜?”
“…임 부장님이 제안해주셔서.”
“아직도 임 부장님과 연락이 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전에… 엘텍전자에서 뵌 적이 있어. 그때 어쩌다 나온 얘기라.”
“자세히 좀 얘기해봐.”
이석은 테이블을 향해 자세를 바짝 기울여 앉았다.
“자세히 할 만한 얘기가 딱히… 이사님과 상의한 뒤에 말씀드리겠다고 얘기를 물려서 더는 진행된 게 없는데.”
“아니, 그런 거 말고. 그 얘기가 나오게 된 상황 같은 거 있잖아.”
“상황?”
“복도에서 오가다가 뜬금없이 널 붙잡고 컨설턴트 소개해준다고 한 건 아닐 거 아냐.”
임 부장을 엘텍전자의 복도에서 우연히 만나 컨설턴트 제의를 받았다는 단순한 설정만을 세워두었던 하선우는 흥분으로 벌게진 이석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입술을 벙끗거리며 할 말을 찾았지만 임 부장과의 박약한 끈을 의존해서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이쯤 되니 거짓말을 부풀려도 되는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하… 진짜 별거 없었는데.”
눈을 빛내는 이석을 슬쩍 보며 하선우는 찬물을 들이켰다.
“엘텍 종합기술원에 갔다가 로비에서 임 부장님 뵀었거든. 회사 잘되냐고 물으셔서 이런저런 안부 묻다가, 경영진단 받아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해주셨던 얘기야. 길었던 것도 아니고. 5분이나 됐었나?”
짧은 안부인사였다는 얘기에 이석은 여전히 갈증이 풀어지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엘텍에서 정말 우리를 좋게 보긴 하나 봐?”
“…그런가…?”
“그러니까 임 부장이 관심 보이는 거겠지. 그런 사람이 괜히 시간 남아돌아서 우리한테 관심 보이겠어?”
잔뜩 상기된 그는 수저를 완전히 놓아버렸다. 반죽을 주물럭거리듯 산만하게 주먹을 쥐었다 편 그는 옆에 잔뜩 쌓아놓았던 신문뭉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뭐 찾는데?”
“토요일 신문기사. 안 그래도 너한테 보여줄 게 있었어.”
쌓여 있던 일간신문 중에서 지난 신문을 찾아낸 이석은 신문지의 낱장을 마구 넘겨 경제면을 펼쳤다.
“토요일에 전화했었는데 계속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잊고 있었어. 얼른 읽어봐.”
초조한 표정으로 말을 보태는 이석의 얼굴을 흘끗 쳐다본 하선우는 그의 손이 가리키는 페이지를 보았다.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 개발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엘텍, 유럽 차세대 EV용 배터리 개발 참여.”
신문의 표제를 소리 내 읽은 하선우는 이석을 다시 한 번 쳐다본 뒤에 집중해서 본문을 읽어내려 갔다.
엘텍전자는 자회사인 엘시스와 유럽 전기차 개발 컨소시엄인 EUABC를 통해 차세대 전기자동차(EV)용 배터리를 개발한다고 21일 밝혔다.
EUABC는 유럽 에너지국과 다임러, BMW, 엘텍 자동차 3社가 고성능 배터리를 개발하기 위해 구성한 컨소시엄이다. 엘시스는 개발비의 50%인 840만 달러를 EUABC로부터 지원받는다.
개발 목표에는 고용량의 배터리 팩 개발과 합리적인 가격의 전기차 배터리를 제작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엘시스 김정연 사장은 “이번 과제를 통해 합리적인 가격의 전기차 생산과 전기차의 주행거리 연장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사는 꽤 많은 지면을 빌어 엘시스가 개발할 차세대 자동차 배터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기사의 말미에는 지금껏 엘텍 에너지가 각국의 업체들과 맺은 협력관계를 연혁별로 나열하고 있었다.
신문을 본 뒤에야 하선우는 강주한이 왜 독일 출장을 가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EUABC와 엘텍이 공동으로 전기자동차용 배터리를 개발하게 되었다고 했으니, 아마 합동연구 계약체결을 위해 독일로 간 것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큰 건 했네.”
“기사 읽고 난 감상이 겨우 그거?”
“안신에서 열 좀 받겠네. 임권혁 사장 눈칫밥 좀 먹겠는데?”
“그거 말고.”
“김정연 부사장, 사장으로 승진했고.”
“더 없어?”
“뭘… 더 느껴야 하나?”
이석의 눈매가 비딱해졌다.
“우리가 여기에 공헌했다는 생각은 안 들어?”
“공헌?”
이석은 당당하게 오이를 씹으며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엘텍이 EUABC와 합동연구 계약체결을 맺고 다임러, BMW, 엘텍 자동차에 하이브리드용, 전기차용 배터리를 납품하게 된 게 우리 덕분이라고?”
“영향이 아주 없다고 보진 않는 거지.”
“엘텍이 가진 특허가 얼마나 많은데. 공헌까지 했겠어?”
이석은 금세 울상을 지었다.
“아, 뭐야. 그럼 우린 로열티 같은 거 안 받아? 준다고 할 땐 언제고 물 건너간 거야?”
“그거야 모르지. 제품을 팔아야 로열티를 주든가 하겠지.”
“넌 금요일마다 엘텍 가서 뭐하냐? 거기선 별 얘기 없어?”
“별 얘기 없던데.”
이석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더는 이 주제로 진지하게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하선우는 이석의 눈치를 봐가며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새로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움찔거리는 입매를 힘주어 다물며 그는 문자를 확인했다. 강주한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예」
그가 보낸 짧은 문자의 뜻이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앞뒤 맥락을 이해하려 하선우는 그와 주고받은 문자를 다시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돌아올 때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떠올리라고 보내는 겁니다」
「업무에 막대한 지장 주시는 겁니다.」
「나 혼자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자니 억울해서 말입니다」
「계속 내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죠?」
하선우는 저도 모르는 새 입술을 혀로 느리게 핥고 있었다.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아래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숨을 짧게 내쉬었다.
「달아오르길 원해요? 나 갑자기 흥분했습니다.」
입안의 점막을 치아로 잘근거리며 최대한 표정 없이 메시지를 찍어 보냈다. 곧바로 전화 벨소리가 울려 숨을 훅 집어삼키며, 이석을 보았다. 그는 신문을 보며 남은 해장국을 먹고 있었다.
-그런 문자를 보내면 내가 많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가 재빠르게 쏟아졌다. 화가 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분명 즐거운 기색이 희미하게 숨어 있었다.
“어떻게 곤란하신데요.”
-계속 더 충동질하면 난감한 상태가 되겠죠.
하선우는 욕구를 느끼면서도 자제하는 강주한의 검은 눈빛이 절로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를 충동질하고 단단한 가슴팍을 만지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하선우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쪽 상황이 긴급한 건 알겠지만, 저야말로 지금은 긴 전화를 받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시치미 떼는 걸 보니 다른 사람과 같이 있군요.
“예.”
태연하게 음성 볼륨을 낮추었다.
-하선우 씨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달아오르길 원해요, 나 갑자기 흥분했습니다. 이런 문자 보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랬나 봐요. 마음 같아선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선우 씨. 다시 만나서 나한테 얼마나 험한 꼴 당하려고…….
“그런 말씀 하시면 기대하게 되잖습니까.”
이상한 뉘앙스로 비치지 않도록 덤덤하게 말하며 하선우는 이석을 곁눈질했다. 그는 무신경하게 국을 뜨는 중간중간 오늘자 신문을 읽고 있었다.
건너편의 강주한이 기가 찬 듯 웃었다. 몸의 열기가 점차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하선우는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하, 기대가 된다고?
재차 묻는 강주한의 물음에 하선우는 숨소리만으로 웃었다.
“예.”
-안달나게 하려고… 날 갖고 노는군요.
“아뇨. 전 진지합니다.”
-정말로 날 갖고 놀고 있어.
점점 더 저음으로 갈라지는 목소리의 끄트머리는 거의 속삭임이었지만 강주한 역시 싫지 않은 느낌이라는 걸 알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머무는 것 같아 절로 온몸이 빳빳하게 긴장했다.
-벌 하나 달아놓은 겁니다.
짐짓 단호하게 말하면서 그는 피식 짧은 숨을 내쉬었다. 하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날의 체취가 묻어나오는 듯한 대화에 잊고 있었지만 여긴 식당이었다. 그 사실을 가까스로 힘겹게 기억해낸 하선우는 괜히 씩 웃으며 넥타이를 잡아 좌우로 흔들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저녁에 다시 전화하죠.
“알겠습니다.”
간결했던 전화를 끊은 뒤에도 욱신거리는 열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단순히 욕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간질거림이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필시 얼굴이 잔뜩 붉어졌을 것이었다. 반쯤 발기한 페니스가 겉으로 티 나지 않기를 바라며 하선우는 엉거주춤 일어나 커피를 뽑아왔다. 그사이 붉어진 얼굴과 하체에 몰린 열기가 간신히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자 경제면 기사를 읽던 이석은 눈만을 들어 올려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전화?”
“오피스텔 관리사무소.”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 전화가 그러냐?”
“왜? 뭐가.”
이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쳐다보았다. 설명할 단어를 골라내기가 마땅치 않아 그는 입을 달싹이다 성가신지 곧 관심을 거두어버렸다. 그의 의심이 가신 뒤에도 하선우는 이석을 향해 애써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뒤늦게 입가의 웃음이 깊어졌다. 하선우라는 형틀 안에 이런 과감한 도발을 즐길 수 있는 충동이 숨겨져 있었는지, 지금 막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어이가 없었다.
“암튼 하선우 내 얘기 좀 집중해봐.”
수저로 국그릇을 두드리며 이석은 주의를 환기시켰다.
“나 울산에 있을 때 장문혁 실장한테 연락을 받았어. 특허제휴 맺어야 하니 수요일에 나오라고.”
“특허? 어떤 특허?”
“엘텍전자와 맺은 실시권 특허. 그거.”
하선우는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엘텍전자와 계약 맺었잖아.”
“그래. 안 그래도 장 실장이 그러더라. 엘텍전자 자회사에서 우리 특허가 필요하대. 근데 우린 이미 엘텍전자와 독점 계약한 상황이잖아. 계약 맺으려는 회사가 엘텍그룹의 계열사긴 하지만, 엘텍전자와는 완전히 분리된 계열사라 엘텍전자에 특허 관련 실시권을 요청할 수가 없대. 이번에 EUABC 계약 체결에 소재기술 연구를 함께 진행하기로 했는데… 그 과정에 집중적으로 네 특허기술이 필요하대. 뭐, 엘텍전자 자동차 엔진 사업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그룹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한 일이라던데?”
하선우는 듣기만 해도 골치가 아픈 느낌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왜… 법적으로… 아니, 뭐 그래. 그래서 회사 이름이 뭐라고?”
“엘벡스. 음극 소재 회사인데 비상장 기업이긴 하더라. 정말 최근에 만들어졌고.”
“이중계약 아니야?”
“단순히 서류상의 문제라서 현실적으로는 문제 될 건 없더라. 특허사용료로 1억 5,000만원을 지급하기도 하고. 아, 대신 로열티는 없어. 그리고 우리가 엘텍전자와 계약 맺으면서 특약 넣었잖아. 특허권자인 우리도 계약을 실시할 수 있는 조건을 넣었으니 상관없지.”
하선우는 아리송한 기분에 이마를 긁적였다.
“뭐, 그래. 형이 잘 알겠지.”
“장 실장이 NnG에 특허 실시권 요청 문서 팩스로 보냈다고 하니까 있다가 확인해봐. 아, 미리 법인인감 위임장이나 만들어둬.”
“위임장?”
“발명자도, 특허출원자 이름도 다 네 이름으로 돼 있잖아.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내가 대신 처리할 테니까 미리미리 몇 개 만들어둬.”
하선우는 잔을 가만히 쥐고 이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연치 않은 느낌에 그는 물었다.
“장 실장이 누군데.”
“엘텍그룹 IP센터 장문혁이라고 하던데. 특허센터 실장이라고 명함 주더라.”
이석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보였다. 명함 속에는 엘텍그룹의 로고와 Intellectual Property CENTER라는 조직명이 새겨져 있었다. 엘텍의 종합기술원 산하에 있는 특허 관련 조직이었다.
“알았어. 몇 부 만들어놓을게.”
의심을 지운 얼굴로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신경이 다른 데 흩어져 있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할 말을 한마디의 요점으로 축약해서 쪽지로 건네주거나, 이석이 모든 일을 자기 대신 알아서 해준다면 고맙겠다는 생각을 내심 하고 있던 차였다.
강주한과 다시 전화를 하게 된 건 저녁 무렵이 한참 지나서였다. 불량제품의 드로잉 개선 문제로 개발팀 직원들과 함께 늦도록 야근을 하던 하선우는 사원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전화 오는 것 같은데요?”
고개를 번쩍 든 하선우는 벗어둔 재킷 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멈칫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에 엉거주춤 허리를 세우던 그는 애써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며 전화를 받았다.
“하선우입니다. 전화받았습니다.”
-아직도 회사인가 보죠.
“예.”
형광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복도로 걸어 나가 등 뒤로 개발실의 문을 닫으며 하선우는 대답했다.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자정 전에는 들어갈 수 있습니까.
“글쎄요. 공정이 추가돼서… 시험 재드로잉까지 마칠 예정이라.”
긴 한숨을 쉬며 하선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다들 퇴근하고 몇 명만 남았어요. 잠시만요.”
사장실로 들어간 하선우는 문을 잠근 뒤에 어두운 실내의 불을 켰다.
-그럼 오늘도 사장실에서 자는 겁니까.
“라꾸라꾸요?”
피식 웃으며 하선우는 문에 등을 기댔다.
“아뇨. 오늘은 이사님 원룸에서 자기로 했어요. 바로 회사 앞이거든요.”
-한 방에서 둘이 자는 겁니까.
문에 뒤통수를 비스듬히 대던 하선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강주한의 말을 돌이켜 생각했다.
“예?”
-같이 자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저 의심하신 겁니까.”
-하선우 씨가 매력적이니 내가 불안해서 그렇죠.
불안해서 그렇다는 언질로 하선우의 가시를 가볍게 뽑아버렸지만, 하선우는 강주한의 다정함이 오히려 짓궂은 수로 느껴졌다. 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가볍게 충동질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하선우는 입바람을 흘리며 웃다, 이를 갈며 말했다.
“제가 게이이긴 해도 모든 남자가 성적인 대상인 건 아닙니다.”
-하긴 밭 가는 소 같은 우직한 사람이 취향이랬지. 이 이사는 그런 느낌은 아니니까.
“전무님.”
한껏 감정을 담아 목소리를 낮추자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전화기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음이 귓전을 때렸다. 하선우는 강주한 주변의 풍경이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했다. 그는 폐쇄적이면서도 트여 있는, 드넓은 홀의 어디쯤에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합니다.
“뭐가요.”
-하선우 씨는… 가끔 게이 같지가 않아요. 무성애자 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퀴어한 면이 없다고 해야 하나.
“퀴어요?”
하선우는 강주한이 했던 말을 한 번 더 집어주며 웃었다.
“뭐야… 게이면 꼭 그런 류의 감수성이 필요합니까? 강 전무님 입에서 그런 말 들으니까 진짜 기분 이상하네요.”
눈살을 찌푸리며 하선우는 문에 기댔던 등을 뗐다. 사무실의 한가운데로 걸어간 그는 전화기를 반대편으로 옮기며 기분 상한 투로 말했다.
“게이면 다 끼 부리는 줄 아셨죠? 편견인데요.”
일부러 얇은 목소리를 내며 비꼬듯 말하자 강주한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건 아니지만… 특유의 느낌이라는 게 있을 것 같았지.
“근데요?”
-담백해요.
“엉덩이가 뚫린 속옷이라도 입을 줄 아셨습니까?”
-사실 그런 쪽의 기대는 했죠.
하선우는 기가 찬웃음을 흘렸다.
“그거 아세요? 전무님이야말로 노멀과는 거리가 먼… 말 그대로 퀴어한 느낌인 거.”
-게이 같단 말입니까.
“뭐,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하선우는 생각에 잠겼다. 강주한이 가진 그 독특한 느낌을 표현할 말이 쉽게 정리되지 않아 그만을 표현할 고유한 형용사가 있었으면 싶었다. 그는 분명 남자답지만 거슬리도록 선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음…, 천부적으로 갖고 있는 유혹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천부적으로……. 왜. 내가 끼 부리던가요.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습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치켜떴다 웃음을 터트렸다. 강주한은 우습다는 듯 바삭거리는 숨소리를 흘렸다.
“뭐, 비슷해요.”
강주한은 기막히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매번 제가 유혹에 지는 기분이 들어서요. 자꾸 여지를 준 건 주한 씨잖아요.”
-여지?
“주한 씨는 내가 끌릴 걸 알면서도 계속 흘렸어요. 그렇죠?”
강주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맞으면서….”
-……끌렸습니까?
깊고 둔중하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하선우의 귓가에 은근하게 들러붙었다.
“이거 봐요. 진짜…….”
선수라니까요. 뒷말은 차마 뱉을 수 없어 하선우가 한숨을 깊게 쉬자, 건너편에서 숨을 느릿하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하선우는 가벼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끌렸습니다. 남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실감하기는 처음이거든요. 내가 게이인 걸 자각하는 문제와 남자의 성적 매력을 실감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음, 보통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인간적인 면에 끌렸거든요. 사실… 이렇게까지 성적인 매력에 끌려본 건 처음이라서… 이상합니다. 그런 면에 집착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고. 강 전무님 때문에 나까지 뒤틀리잖아요. 오전에 그런 사진 안 보내셨으면 저도 전무님 충동질하는 문자 안 보냈습니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하선우는 강주한의 숨결에서 희미한 웃음의 기미를 느꼈다. 귓전을 감도는 침묵이 길어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아뇨. 하선우 씨야말로 내 안의 도착적인 면을 자극하는 겁니다. 나는 굉장히 노멀한 사람이니까. 하선우 씨야말로 자각 없이 날 뒤틀리게 한다는 걸 압니까. 날 더럽게 만든다니까요.
강주한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단조롭게 흘러나왔지만 하선우는 그가 분명 눈을 느슨하게 내리깐 채로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입술을 핥는 강주한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속으로 혀를 차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다음 말에 갑자기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얘길 출국 수속 준비하며 나누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에게 가 닿기를 기대하는 자신의 흥분을 잘라내려 하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출국 수속이요?”
-예정보다 출국 일정이 앞당겨져서 공항에 왔습니다. 밤 비행기 타고 가게 됐어요. 대신 한국에는 일찍 돌아올 겁니다.
“아… 독일 가시는 건가 봐요.”
-기사 봤군요.
“예. 축하드려요.”
건너편에서 소리 없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콧잔등을 가만히 긁어내리며 하선우는 강주한의 말을 기다렸다.
-덕분입니다.
“예? 하하…, 제가 뭘 했다고……. 흠, 언제 돌아오십니까.”
-일주일 후에 올 겁니다. 같이 골프 치러 가죠.
“저 골프 칠 줄 모르는데. 쳐본 적 없어요.”
한 번도? 되묻는 말에는 조금 놀란 기색이 묻어 있었지만 그는 곧바로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물놀이라도 할까요.
“4월에 수영장을 가요?”
-스파하자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라운딩을 하는 동안 안에서 피곤이나 풀죠.
“다른 사람들이라면… 단둘이 만나는 게 아닌가 보죠.”
-선우 씨만 괜찮다면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하선우의 한쪽 눈썹이 비쭉 올라갔다.
스파나 골프를 한군데서 즐기려면 분명 리조트일 터였다. 멀지 않은 수도권의 회원제 리조트와 강주한과 친분을 쌓을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식이 목적인 리조트겠지만,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을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한다면 어떤 목적일지 하선우는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슨 자린데요.”
-클럽 같은 겁니다. 과감하게 선우 씨를 애인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자리긴 하지만 그건 좀 아니고…….
“전무님. 저도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급하게 가로막는 하선우의 말에 강주한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모임인데요?”
-단순한 모임입니다. 한향시립교향악단 교육프로그램 후원회라고 줄여서 HLC라고 하죠. 애초 목적은 전문직 종사자들의 음악을 통한 사회봉사로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현이 목적이라고 누군가 말했었지만…… 흠.
강주한은 짧게 웃었다. 웃음의 톤에는 껄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는 않은 모임입니다.
강주한의 얘기를 심각하게 듣던 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전 그 모임에는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가 전부고 그것도 아주 조금밖에 못 칩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예전에는 연주회를 갖긴 했지만 목적은 오래전에 변질됐고 지금은 단순한 사교모임이 됐으니까요. 모임의 주축이 30대라 부담 없을 겁니다. 생각 있습니까.
강주한은 이전보다 말을 재빠르게 쏟아냈다. 길게 통화하기가 여의치 않아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선우는 모임에 강주한이 참석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모임에 속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일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난 같이 나갔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선우의 고민을 짐작한 듯 그는 넌지시 틈을 두어가며 물었다.
물질적인 뭔가를 받는 게 아니라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변화를 주도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하선우는 그 변화라는 가능성에 끌렸다. 무엇보다 전화 건너편의 부산스러운 상황이 고민의 시간을 길게 끌 수 없게 만들었다.
“초대해주신다면 나가겠습니다.”
-그럼 일정에 대해서는 다시 전화로 알려주겠습니다.
전화는 급하게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통화를 끊은 뒤 그는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처럼 초조해졌다. 다이아몬드를 받는 것은 속물이고, 그의 주변 사람과 인맥을 쌓는 것은 속물이 아닌지 그 경계가 애매했지만 뭔가 제대로 일이 풀리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선우는 관두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지를 자문했다.
자신의 본래 성격을 거스르는 행동이었지만 언제까지 좁은 세상에 살 필요는 없었다. 강주한과 엮이고 나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일이 틀어진 적이 있던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강주한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일 테고 알아둬서 나쁠 리 없는 아니, 좋은 것 이상의 사람들일 터였다.
그의 두 눈동자가 명민하게 빛났다. 그는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안에 있는지도 몰랐고 차마 야심이라 표현하기엔 무안한 무언가가 식식거리는 소리를 내며 달아오르고 있었다.
* * *
“그러게 잠 좀 자두라고 했잖아요.”
피곤으로 얼룩진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아내의 얼굴이 퍽 신경질적이었다. 남자는 아내의 신경질에 뒤섞인 염려의 기색을 읽고 지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월례회 발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니까요.”
“그래도 다음 날 중요한 스케줄이 있으면 정도껏 했어야죠. 밤새놓고 그렇게 골골거리면 누가 알아준대요? 피곤하다고 툴툴거리지나 말든가.”
아내의 흘기는 눈에 우진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뭔가가 마음에 안 들면 불만을 가진 그 무언가를 내도록 곱씹으며 꿍해 있곤 했다. 연애 시절이나, 결혼 후나 변한 게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가 꽁해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지난 새벽까지 잠들지 않고 서재에 틀어박혀있던 진헌이 계속해서 피곤에 못 이겨 연신 하품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틀 뒤인 일요일 저녁에 ‘지적재산권의 제문제’를 대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이었다. 심포지엄에서는 논문을 다섯 편 발표할 계획이었는데, 진헌은 다섯 명의 발표자 중 하나였다.
법조계 주요인물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강연을 한다는 부담감에 그는 며칠간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지난 새벽에는 불안증이 도져 발표하기로 한 논문을 한바탕 수정한 차였다. 아내가 보채지 않았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진헌의 곁에 바짝 붙어 앉으며 목소리를 줄였다.
“봤어요? 한중 씨 온 거.”
“한중? 김한중?”
고개를 끄덕인 아내는 우진헌과 시선을 맞춘 채로 어깨너머를 턱으로 가리켰다.
“당신 뒤쪽에 있어요. 그렇다고 뒤돌아보진 말고요. 눈 마주치면 우리가 꼭 뒷말하는 것 같잖아.”
양손에 쥔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를 썰며 아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근데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닌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아내는 말을 이었다.
“몇 달간 모임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왜요. 김한중이 말고도 몇 달 만에 보는 얼굴 많은데.”
“그러니까요. 경호 오빠 마주칠까 봐 껄끄러워서 안 올 땐 언제고 주한 씨 온다고 다들 참석한 거 봐.”
그녀는 갑자기 늘어난 사람들이 퍽 민망하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엘텍과 안신그룹 일가의 유산배분 문제로 몇 달간 모임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법원행정 차장의 삼남도 있었고 안신그룹의 이사회에 소속된 아버지를 둔 인물, 그리고 안신의 대주주 중의 하나인 임경호의 외가 사람도 있었다.
우진헌은 우아한 태도 뒤에 주렁주렁 매달린 각자의 동기를 읽었다. 사실 그들은 오랜만에 HLC모임을 찾은 강주한과의 친목을 기대하기보다는, 임경호와 강주한의 팽팽한 기싸움을 관음하고자 했다. 그들은 속물로 보일지 모른다는 민망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두 사람의 대면에서 어떤 말이 오갈지, 누가 승자의 분위기를 풍기는지 관계를 조망하고자 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마다 모임에 성실하게 참석해온 우진헌 역시 두 사람의 대면이 은근히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작년 여름 서울고법에 안신그룹의 첫째 딸인 임용화가 남동생을 상대로 주식인도 등 청구소송을 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공식적으로는 유산이지만 누가 봐도 안신의 비자금인 돈을 임용화, 그것도 안신과 경쟁관계에 있는 엘텍가의 인물이 탐을 내는 것은 재벌 간에 금기되는 행위였기에 소문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소문이 실제가 되자 HLC 모임 내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우진헌은 소송의 주축에 강주한 혹은 엘텍가의 총수가 있을 것이라는 지배적 의견에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는 재벌가 사이에서 인도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말이 되는 소송의 진짜 이유가 못내 궁금할 뿐이었다. 그가 아는 강주한은 단순히 돈 때문에 세간의 이목을 끌며 파란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한 씨 오면 되게 민망해하겠다. 그죠.”
우진헌이 접시를 거의 비워갈 즘에도 아내의 불만은 끝나지 않았다. 동의를 구하듯 묻는 말에는 다른 사람들만큼 우리 부부가 속물이 아니라는 은근한 속내가 숨어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인간미는 우진헌과 강주한이 우정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물론 아내의 믿음대로 우진헌은 사람들에게 전방위적으로 공유되는 인물인 강주한에게 남들보다 훨씬 더 친밀하게 대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져오고 있었다.
법원의 주요보직에 있는 우진헌과 재계의 핵심 중 하나로 거론되는 강주한이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우로 지낸 것은, 물론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재직 중이었던 부친과 서울고법의 수석부장판사를 지낸 외숙부, 총수 일가의 인물들이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같은 학년, 같은 학급, 잦은 파티에서 마주치기를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친분이 얽힌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울타리 안에서 피어난 우정이 마냥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 강주한이 이렇게 발을 걸친 모임이 몇 개던가. 법원 내에서도 핵심부서인 소년등과와 법원행정처를 비롯해, 민사판례 연구원까지 대학동기인 자신을 동원해 쌓아둔 친분이 상당한 편이었다. 우진헌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는 강주한의 법조계 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온 셈이다.
프라이빗 룸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 사이로 친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프웨어로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멘 정장차림의 강주한은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차분한 눈인사로 응대한 뒤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좁게 열려 있던 문틈이 넓어지고 그 틈으로 젊은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그 역시 정장차림이었다.
“그 옷 입고 골프치려고?”
“갈아입어야지. 공항에서 바로 왔거든. 관람만 할 거라 골프 칠 생각 없어. 티오프가 몇 시랬지?”
“선 선배 팀은 2시 반. 점심은?”
“기내식으로. 하선우 씨도 회사에서 해결했다고 하고.”
진헌의 시선이 낯선 사내에게로 향하자 강주한이 정장의 소매를 매만지며 말없이 웃었다. 고개를 반쯤 뒤로 돌린 강주한은 곁에 서 있는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소개할게. 이쪽은 하선우 씨. 그리고 이쪽은 내 오랜 친구인 우진헌.”
“반갑습니다. 하선우라고 합니다.”
“어쩌지? 난 명함이 없는데. 주한이 친구 우진헌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고요.”
“안녕하세요. 유미란이라고 해요.”
“아내는 지금 기획재정부에서 일하고 있고요.”
“…좋은 곳에서 일하시네요.”
악수를 한 진헌은 받아든 명함을 살펴보았다. 배터리 매니지먼트 시스템 전문기업 NnG. 대표 하선우. 고딕체로 적힌 단순한 디자인의 명함이었다.
좋은 곳에서 일하시네요. 애매한 대답에 재미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웃은 아내가 하선우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렇죠? 다 내 실력으로 들어간 건데 모피아 출신 아버지 덕이라고 처음에 말이 많았다니까.”
간략하게 덧붙인 짓궂은 장난에 하선우의 얼굴 위로 분명하지 않은 미소가 그려졌다. 미란은 남자의 한 박자 느린 웃음에서 모피아란 단어가 하선우의 머릿속에서 어떠한 연상작용도 일으키지 않음을 발견했다. 강주한을 곁눈으로 살폈다. 미란의 뻔한 속셈을 읽고도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선우 씨는 무슨 악기 다루세요? 저희 연말에 정기적으로 콘서트하는 거 아시죠?”
“클래식은 입문 단계라 잘 다루는 악기는 아직 없습니다.”
“정기적으로 하긴.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해?”
가만히 듣고 있던 강주한이 비식 웃으며 나무라듯 말했다.
“왜 그래요. 올해는 내가 부회장 맡은 만큼 그냥 넘기지 않을 거라고요. 벌금도 매길 거야.”
과연. 대꾸한 강주한은 곁에 앉은 진헌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람들에게 하선우를 소개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곳으로 걸어가자 미란은 진헌의 팔등에 손을 얹으며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진헌은 어려움 없이 아내의 상상 속에서 자라나는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비틀렸건 동경이건 자신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했다. 주변인들은 관료 출신인 미란의 부친 얘기에 반응하는 편이었다. 모피아는 과거 재경부 관료 출신들이 국내의 경제부처를 마피아처럼 장악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말을 빗대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었고, 미란은 하선우의 반응을 보려 짓궂은 농담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선우는 모피아에 관한 통상적 의미조차 모르는 듯했고 그 무지가 아내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한향시립교향악단 교육프로그램 후원회, 줄여서 HLC은 회원이 채 80명이 안 되었고 기존회원의 추천으로 신규회원 충당을 하는 모임이었다. 다소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 가입할 수 있지만 가끔은 예외적으로 심사를 거치지 않기도 했다. 추천을 받은 회원이 누구나 인정하는 재원이거나 추천하는 인물이 HLC의 중심인이 될 경우였다. 그중에는 강주한이 초대한 주한 중국대사와 해외에서 활동하는 유명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그러나 하선우처럼 자산규모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기업인은 처음이었다. 처음 새로운 회원을 뽑는다는 소문이 돈 이후로 지금 막 그들의 세계를 노크한 남자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은밀히 뻗어 나간 시선들이 남자의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선우는 20대 중반에서 기껏해야 2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아마 동안인 까닭일 것이다. 그의 옷차림은 딱히 흠잡을 데 없었지만 막막함을 애써 감추는 태도로 보아 이런 모임은 낯선 듯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에다가 사교적인 인간은 아니군. 모피아를 모르는 걸로 보아 다방면에 상식이 풍부해 보이지도 않았다. 우진헌은 뺨을 살살 긁으며 생각했다.
주한이 그간 이차전지 사업에 기울였던 관심을 기억해낸 진헌은 다시 남자가 건넸던 명함을 살폈다. 배터리 전문 매니지먼트 시스템. 몇 음절의 단어들을 곱씹고 있자니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와 친분의 흐름이 읽혔다. 물론 강주한의 호감을 산 데는 남자의 준수한 외모가 분명 지렛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창백한 피부 탓에 심약한 인상을 줄 법하지만 짙은 겉눈썹과 눈꼬리가 올라간 큰 눈, 밝은 색의 눈동자와 약간 작은 동공 때문에 날카롭고 명민한 인상이 덧씌워졌다. 중키의 남자는 허리를 곧바르게 세우는 습관은 갖지 못했는지 자세가 조금 굽어져 있었다. 게다가 시력이 좋지 않은 듯 반사된 부신 빛을 바라보듯 희미하게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단번에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은 타입이었다. 강주한을 끌어당긴 하선우의 인력이 무엇이었을지 우진헌은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다.
부부가 식사를 모두 마칠 무렵에야 강주한과 하선우는 그들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사교적인 성격의 아내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교모임이라니 좀 촌스럽죠?”
따분한 표정을 지어보인 유미란은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늘 이렇게 골프만 치러 다니는 건 아니에요. 원래는 연주나 감상이 주목적인데 수석지휘자가 유럽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가게 되서 잠시 재정비 중이에요. 이정한 지휘자가 모임의 주축이었거든요.”
다음 내정자가 중국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중국국립교향악단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남편과 한동안 말을 주고받던 미란이 다시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 어떻게 알게 됐어요?”
흘끗 강주한을 쳐다보면서도 질문은 하선우에게 던진 미란은 덧붙여 말했다.
“이사회에 검증도 안 받고 들어오는 케이스는 아주 드물거든요.”
“그랬습니까. 따로 절차가 필요한가 보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제멋대로인 절차죠. 한숨을 내쉬었다.
“회원수가 늘어나면 감당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가려 받을 수밖에 없어서요. 나이가 어려 보이시는데 회사대표이신 걸 보면 창업을 일찍 시작하셨거나… 빨리 물려받으셨나 봐요.”
“회사는 5년 전에 창업했고 나이에 비해 동안이란 말을 듣긴 하지만 서른 초반입니다.”
“어머, 그렇게 안 보여요. 근데 서른 초반이라는 말은 좀 막연한데?”
“그런가요. 서른둘입니다.”
미란은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공과대 졸업하셨겠죠? 서울대? 선일대 아니면 해외출신?”
“선일 과학기술대학 졸업했습니다.”
“아, 그래요? 저 백마상 근처 선명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반색하는 유미란을 보며 하선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공과대 출신이신인가 보죠.”
“아뇨오. 지금은 관두셨지만 외삼촌이 오래전에 선일대에 재직하셨거든요. 어릴 적에는 서대문구에서 살기도 했고. 그래서 자주 찾아갔어요.”
“외삼촌께서 교수로 재직하셨나 보죠? 선명관 근처면 물리천문학부 담당이셨는지…….”
“아니, 그건 아니고.”
민망한 듯 씩 웃은 미란은 말했다.
“사무국장으로 계셨어요.”
일반 교수직을 생각했던 모양인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직급이 언뜻 와 닿지 않는 듯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대학과 관련된 얘기를 주고받았다.
관심 있는 분야 외에는 말을 아끼는 남편과 달리 진헌의 아내는 다양한 방면에 발을 넓게 걸치고 있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그는 가끔 청탁이나 은근한 압력을 받곤 했는데 아내 덕분에 불편한 상황을 유하게 넘기곤 했다.
익숙한 주제가 나와 편했는지 하선우의 얼굴에서 긴장이 한결 가셨다. 그러는 사이 테이블에 사람이 추가되었다.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문 하선우를 대신해 간단한 소개를 한 강주한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강주한은 하선우를 향해 몸을 틀고 눈을 크게 뜬 채로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퍽 재미있는 듯했다. 하선우는 표정 없이 강주한을 마주 볼 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진헌은 강주한의 미소가 조금 짓궂다고 느꼈다. 그러는 사이 테이블에 새로운 사람이 추가되었다.
“최종완 교수 밑에서 석사과정 배웠다고?”
“예.”
“그래? 반가운데. 최종완 교수는 아니지만 나도 같은 대학에서 박사과정 밟았거든.”
안영대는 손을 건넸다. 두껍고 단단한 손으로 손을 꽈악 마주 잡은 채 흔든 그는 활짝 웃으며 ‘이야, 이렇게 또 인연이 생기네. 내 후배네, 후배.’ 과장되게 중얼거렸다.
안신 계열사 중 하나인 안신EM의 상무인 그는 드물게 이공계 출신의 CEO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고 뉴욕대에서 MBA를, 선일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은 수재였다. 다양한 대학을 졸업한 덕에 학연이 겹치는 사람이 많아 그는 자연히 넓은 인맥을 자랑하고 있었다.
키가 작고 땅땅한 체구의 그는 불혹을 훌쩍 넘었음에도 상당히 젊은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목소리가 크고 말하는 투가 극화체였기에 어디서든 주목을 끌었다.
“최종완이 지도교수였으면 엄청 고생했겠어?”
“최 교수님을 아시나 보죠.”
“그야 전해 들은 거지 뭐. 논문 다작해서 제자들이 고생하기로 유명했잖아. 하나만 얻어걸려라. 그런 타입이 제일 피곤하잖아? 하하하.”
씁쓸한 웃음을 짓는 하선우를 보며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린 그는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최 교수가 네 얘기 하고 다닌다던데.”
찻잔을 기울이며 안영대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강주한은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개인적으로 친분 있다며. 자기가 강주한도 가르쳤다던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최 교수님께 과외받았거든요.”
“과외?”
흐흐흐, 네가? 웃은 그는 뭘 배웠는데? 물었다.
“제가 호기심을 가진 분야가 돈벌이가 될지 그 가능성에 대해 배웠죠.”
“그것 참 자네다운 대답인데.”
희미한 냉소를 지어 보인 안영대는 빤히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침묵 속에서 눈빛이 교환되었다. 안영대는 돌연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뒤 화제를 바꿨다.
“독일 출장 다녀왔다며. 김정연이랑 같이 신문에 실린 거 봤어. 경쟁업체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계약 따내고 부럽네. 덕분에 우리는 초상집 분위기인데. 자리가 사람 만든다고는 해도 김정연이 그 친구가 능력이 참 좋아. 임경호가 거품 물 만해.”
“능력이 워낙 출중하신 분이었어야죠.”
“그보다 일류를 알아본 자네가 능력이 좋았던 거지. 솔직히 임원 중에서 인재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 그중에서 일류를 알아보는 게 진짜 초일류인 거지. 아무튼 안신 분위기가 얼마나 흉흉한지 알아? 임권혁이 때문에 지금 얼마나 분위기 죽 쑤고 있는데.”
“그래요? 난 전말을 다 듣고 나니 임권혁 사장님이 오히려 안됐던데.”
간식으로 나온 셔벗을 스푼으로 뜨며 유미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됐기는… 그 양반 행실이 깔끔하지 못했던 거지.”
“사실 임 사장님은 엘텍과 안신 양쪽에서 이용만 당한 거 아니에요.”
우진헌은 피식 마른 웃음을 흘렸다. 강주한을 앞에 두고 태연히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지극히 아내다웠다.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는 강주한의 얼굴을 대놓고 살펴보았다. 강주한의 얼굴 위로 초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 사장 직급에 사내이사로 옮겨간 임 사장이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 그것보다 너 같은 철밥통이 남 걱정하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왜요? 철밥통은 남 걱정하면 안 돼요?”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어. 흥미로울 뿐이지.”
낮은 한숨을 쉰 강주한은 턱을 한동안 매만지다 미란을 향해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하긴, 남 걱정은 우리 같은 사람에겐 좋은 미덕이지. 노블리스 오블리주 외치고 다니더니, 아주 바람직한 성장과정을 거치셨어.”
비딱하게 기울어진 미소를 지으며 강주한이 말했다. 미란이 코웃음 치며 그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스푼을 접시에 소리나게 내려놓은 그녀는 말했다.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클러치를 챙겨 일어난 그녀는 홀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우진헌은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잠자코 듣기만 하는 하선우를 흘긋 쳐다보았다. 대화에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지만 완전한 숙맥까지는 아닌지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완벽한 미형은 아니지만 볼수록 신경이 쓰이는 게 어디 가서 꽤나 인물값 할 법한 얼굴이었다. 우진헌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거뒀다. 내내 머리를 무겁게 만들었던 피곤에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하품했다.
“잠을 못 잤나 봐?”
“내일 월례회 발표라. 법원행정처장님까지 오실 예정이라 신경 쓰여서.”
“주제가 뭔데.”
말해도 못 알아들을 텐데?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던 우진헌은 이내 깨달은 얼굴로 말했다.
“하긴, 네가 관심 있던 분야였지. 엘텍 컨벤션 홀에서 열리는데 올래? 주제가 지적재산권의 제문제인데 내가 맡은 건 지적재산권의 남용을 긍정한 판례분석이고. 외부인들도 참석 가능해.”
강주한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흥미야 있지만 바빠서 못 가. 처장님과 부장님께 대신 내 안부 전해줘라.”
“직접 하든지.”
“지금은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 소송 중에 판사와 사진이라도 같이 찍혀봐. 곤란해져.”
“날 만나는 건 괜찮고?”
우진헌이 팔짱을 끼며 냉소를 짓자 강주한은 대꾸도 없이 푸스스 웃었다. 곧은 정자세로 앉아 있던 강주한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팔걸이 뒤로 긴팔을 뻗어 하선우의 어깨에 손바닥을 얹었다. 느슨하게 앉는 모양새가 오만해 보였다. 그 모습에 말을 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얼굴로 안영대가 입을 열었다.
“자네 진짜 악취미야.”
눈을 빛내는 안영대를 강주한은 돌아보았다.
“뭐가 말입니까.”
“이 자리가 곤란한 사람이 한둘이냔 말이야.”
“그런 것 치곤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늘어난 것 같은데요.”
“임경호 라운딩 중이잖아. 마주치면 어쩌려고?”
“모두가 바라는 바겠죠.”
“바라긴. 마주쳐봐야 내 입장만 난감해지거든?”
“난감하신 분이 그렇게 재미있어 하십니까.”
미동도 없이 강주한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애매한 거 싫으니 빨리 내 편 들라고 종용하는 겁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누가 봐도 엄살이 분명한 앓는 소리를 내며 안영대는 혀를 찼다. 안영대와 강주한을 제외한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며 그들의 대화를 방관하는 척했다. 강주한의 독일 체류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지만 좀 전 대화의 여운이 여전히 그들에게 남아 있었다.
“만나는 사람은 있는가?”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질문에 하선우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예. 만나는 사람은 있습니다.”
“결혼 생각은 있고?”
하선우는 크게 떴던 눈을 조금 더 크게 떠야 했다. 사귀는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런 물음에 대답을 하려니 난감했다.
“아직 그런 구체적인 얘기까진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하긴 서른둘이면 요즘 같은 시대엔 아직 즐길 만한 나이지.”
이어 내조만 잘해도 인생이 잘 풀린다는, 조카나 먼 친척을 소개하고 싶다는 흔하디흔한 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안영대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던 하선우는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사귀는 동안은 충실하자는 주의라서요.”
“순정파인가 봐? 의왼데.”
우진헌이 툭 말을 던졌다.
“그것보단 ……뒷감당 안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
“쥐여사나? 애인이 무섭나 보네.”
우진헌의 말투는 여전히 무심하고도 건조한 구석이 있었지만 신경을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다. 옆에 앉은 강주한을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아 하선우는 우진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 들먹였다.
“사귄 지 얼마 안 되서요.”
“그래? 한참 좋을 때네.”
건조한 입바람을 불며 웃은 우진헌은 강주한을 돌아보았다. 긴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 끄트머리를 피아노 치듯 두드리고 있었다. 표정을 지웠지만 웃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는 얼굴이었다. 과하게 익은 과일처럼 물러 보이는 강주한에게 우진헌은 말했다.
“넌? 안 외로워?”
테이블을 툭툭 건드리던 강주한이 손가락 끝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응. 전혀 외로울 틈이 없지.”
“그 나이면 한창일 때라 욕구불만 생길 텐데.”
대화에 끼어든 안영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욕구불만은 틈틈이 풀고 있습니다.”
“어디 좋은 데라도 뚫었는가?”
강주한의 한쪽 겉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잠시 후, 곧바로 나머지 겉눈썹도 올라갔다. 강주한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성의 없는 말투로 흘리듯 중얼거렸다.
“예. 좋은 데 뚫었죠.”
하선우는 눈을 끔뻑거렸다. 약한 입바람이 귓바퀴를 건드렸다. 건성인 태도를 취하지만 분명 노골적으로 하선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좋은 데를 뚫었다는 말이 꼭 중의적인 뉘앙스로 느껴졌다. 하선우는 강주한을 흘긋 쳐다보았다.
“뭐야? 어딘데?”
마른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조금 들썩거린 강주한은 다시 안영대를 돌아보았다.
“농담입니다. 만나는 사람 있습니다.”
“하긴 연애를 쉰 적은 거의 없었지. 오래 못 가서 그렇지.”
관심 없는 태도로 우진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침묵이 테이블 주변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안영대는 연애상대가 누군지 알고 싶은 눈으로 강주한을 쳐다보고 있었고 하선우는 다문 입술을 위로 당겨 애매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신경 거슬리도록 테이블을 두드리던 강주한의 손이 거두어졌다. 그때 골프웨어로 옷을 갈아입은 진헌의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30분 전인데 옷 안 갈아입어요?”
그 옷 입고 돌 순 없잖아요. 강주한과 하선우를 옷차림을 보며 미란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어느덧 시침은 2시를 향해 있었고 옷을 갈아입고 필드로 나가기엔 빠듯한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준비해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클럽하우스를 빠져나왔다. 해질녘이 되도록 게임이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의 기대처럼 강주한과 임경호는 필드에서 재회하지 않았다.
으스레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용객은 많았다. 단순히 선수들을 따라 움직이며 라운딩을 관람했을 뿐이지만 필드를 걷는 내내 주변은 빈자리 없이 채워졌다. 그들 틈에서 하선우는 조금 지친 기분을 느꼈다. 겉도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정면을 마주했지만 사람들이 하선우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예상 가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측 불가능했다.
그 사이에서 재주껏 자신을 조율해보지만 하선우는 그 조율이 적절했는지 확신할 수 없어 조금은 불안했다. 분명 그들과 하선우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고 그 벽에 그는 때때로 위축되기까지 했다. 그 벽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를 쥐여 준 강주한을 위해서라도 그는 거리끼는 느낌을 애써 지워냈지만 그들의 세상에 소속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자신의 바람은 사회적 성공에 비하면 하찮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클럽하우스에 마련된 만찬모임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적막한 복도 위를 나란히 걸었다. 겨우 단둘이 남을 수 있게 된 뒤에도 그들은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하선우의 옆모습을 줄곧 지켜보던 강주한은 입을 열었다.
“괜히 나 때문에 오기 싫은 자리 온 거 아닙니까.”
하선우의 미간이 설핏 찡그려졌다. 하선우는 강주한을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좀 긴장돼서 그렇지 즐거웠는데요.”
이 상황을 수용하기는 부담스럽지만, 어떻게든 소화시켜보려고 노력하는 감정이 하선우의 얼굴에는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하선우를 말없이 오래도록 내려다보던 강주한은 손을 뻗었다. 단정하게 이발한 머리 위에 붙은 마른 잔디를 떼어내주는 손길에는 어딘가 간들간들한 데가 있었다. 하선우의 긴장한 태도를 지켜보던 강주한이 말했다.
“열흘 못 봤더니 또 내가 낯설어졌습니까.”
“……예?”
“하긴 사귄다고 곧바로 10년 같이 산 부부처럼 편해질 순 없는 거죠. 하선우 씨가 수다스러운 타입도 아니니.”
표정 없이 하선우를 지켜보던 강주한은 허리를 조금 숙여 눈높이를 낮추었다.
“근데 그거 압니까.”
“뭐가요?”
“이렇게 거리감이 느껴질 때는 보고 싶었어요, 라는 말이 효과가 있다던데.”
시선을 하선우의 콧잔등 어딘가에 둔 채로 강주한은 미소 지었다. 마치 하선우가 먼저 그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듯 몸을 기대며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연인 간에 별것도 아닌 말인데 멍석을 깔아주니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간질거렸다.
이 나이에 소꿉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하선우는 쑥스러움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떼어내며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말씀대로 확실히 거리감이 좁혀진 것 같긴 하네요.”
아하하, 괜히 좀 민망하네요.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착착 소리나게 두들기며 하선우는 공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음, 근데 살 좀 빠지신 것 같아요.”
“확인해보겠습니까.”
“예?”
당황하는 하선우를 보며 강주한은 입술만을 슬그머니 움직여 웃었다. 기댔던 몸을 떼어낸 그가 앞서 가며 씻자고요, 말했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21층에 마련된 스파 시설이었다. 각개의 룸으로 구성되어 있어 정확한 규모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갤러리처럼 복도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토요일 저녁임에도 이용하는 회원이 없는지 실내는 조용하기만 했다.
코끝에 감도는 찻내를 맡으며 아늑한 룸에서 옷을 갈아입은 하선우는 가운을 입고 스파 장소로 걸어 나왔다. 돈이 많다는 건 역시 좋은 거야. 취할 것 같은 창밖의 운치를 바라보며 그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욕조의 테두리를 꽃으로 장식한 거대한 자쿠지 안으로 두툼한 린넨 주머니를 집어넣었다. 주머니에 담긴 찻잎이 수면에 몸을 사부작 부비는 소리가 들렸다. 꼭 거대한 찻잔에 차를 우려내는 것 같았다. 하선우는 종일 누적된 피곤에 지친 몸을 욕조에 누이듯 기댔다. 절로 피로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피부 위로 오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하선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30분 뒤에는 마사지도 받는다고 하니, 첫 스파의 경험부터 이러니 눈만 높아지겠다 싶어 웃자 강주한이 궁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웬 호사인가 싶어서요. 막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선우의 행동을 지켜보던 강주한이 손을 뻗었다. 젖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고 하선우의 속눈썹을 엄지로 가만히 쓸어보던 그가 대칭에서 어긋난 웃음을 지었다.
“이러면 새침한 여자 같아지는군요.”
“여자 같다고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양 뺨에 붙여 힘주어 누른 채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쪽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 되게 남자다운데.”
“그냥 예쁘다는 겁니다.”
하선우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딱하다는 투로 한숨을 쉬며 하선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예쁘다는 말이 싫은 거면 아름답다고 말해줬으면 합니까.”
적응 못하겠다는 듯 질색하며 하선우는 뺨을 가린 손바닥으로 얼굴을 엉망으로 구겼다.
“애처럼 자꾸 이럴 겁니까.”
손목을 아래로 잡아당기며 그는 눈을 맞췄다. 하선우를 팔 안에 가두며 강주한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하선우의 얼굴은 물론 목덜미와 귓가가 온통 붉었다.
“오늘 갑자기 왜 그럽니까. 문자로는 그렇게 요망하게 굴더니.”
강주한의 단어 선택에 작은 충격을 받은 하선우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굳어졌다. 문자와 전화로 나누었던 더티토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요망이라니.
하선우는 강주한의 말에 발끈하면서도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안 보이니 괜히 과감해져서는. 내가 미쳤었나보다, 싶었다. 하선우의 불그레한 얼굴을 빤히 살펴보며 강주한이 물었다.
“함부로 대해줬으면 좋겠다면서요.”
“……. 제가요? 언제요?”
“문자 보여줄까요. 막상 얼굴 보니까 위기감이 느껴집니까.”
“제가 좀 실전에서는 뻔뻔하지가 못해서요.”
“어쩌지. 나는 실전에 강해서 하나씩 다 실천해볼 생각인데.”
강주한은 더없이 진지한 눈이었다.
“……. …그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했던 말이었죠.”
“험한 꼴 당하는 걸 기대한다는 말을요?”
하선우는 시뻘게진 얼굴로 건공중을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 뒤 헛기침을 한 그는 너무 당황한 티가 나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그런 의미로 사용한 말은 아니었거든요?”
“그럼 어떤 의밉니까.”
하선우는 말문이 막혔다. 단지 떠밀리듯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지만 어떤 의미를 두고 했던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냥 떨어져 있던 시간과 꼴리… 아니, 충동을 고려하면 할 수도 있는 말이었죠.”
“그런 말을요.”
“예.”
하선우는 뱃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강주한이 고개를 숙여 하선우의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얼굴이 뜨거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자 옆얼굴로 숨결이 닿았다.
“하지만 실제로 하긴 좀…….”
“좀?”
어깨에 올린 강주한의 손을 몸을 틀어 빼내며 하선우는 중얼거렸다.
“창피해서 그러죠.”
“창피만 한 겁니까. 아니면 싫은 겁니까.”
섹스가 뭐라고. 이게 뭐하는 건가 싶어 피식 웃음을 흘리던 하선우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금껏 다른 사람 성적인 관계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거의 없었다.
하선우는 그런 면에 대해 적극적인 편이었고 곧잘 즐겨왔었다. 문제는 그간의 섹스가 지극히 평범했고, 강주한과의 연애는 조금 다르다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금 연애 초반이고 성적인 합을 맞추는 실험적인 단계에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의 섹스로 살펴보건대 그는 노골적이다 못해 음침하고 음험한 편이었다. 물론 하선우는 강주한이 자신을 다루는 조금 비상식적인 방식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흥분은 불행히도 조금 복잡한 면이 있었다.
홍수에 쓸려나가듯이 스스로를 잃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하선우를 조금 두렵게 만들었다. 얼굴을 보지 않는 상태에서는 현실감이 없어 과감한 더티토크도 나누면서 막상 강주한을 보자 또다시 몸을 사리고 있었다.
싫으냐고? 아니, 오히려 배 속이 꼬이듯이 흥분돼서 기가 막혔다. 하선우는 자신을 향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창피해서 그렇지 싫진 않습니다.”
강주한의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며 하선우는 말했다. 강주한이 말했다.
“수치심이 꼭 나쁘지만은 않죠.”
눈물에 반응을 보인다는, 이름도 어려운 강주한의 페티시를 기억해낸 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전무님은 제가 느끼는 수치심을 좋아하는 거잖아요. 전 좀 억울하거든요?”
“억울해도 어쩔 수 없죠.”
강주한은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일축했다.
“호출할 때까진 사람 안 와요.”
하선우가 벽을 세우기 전에 선수를 친 그가 입을 맞췄다. 물컹하고 맞물리는 입술을 빨던 그가 하선우의 아랫입술을 당겨 문 채로 웃었다. 억울하기보다는 짜릿할걸요. 마치 강주한의 뒷말에는 그런 뜻이 숨어 있는 듯했다.
여전히 눈을 뜬 채로 그를 지켜보던 하선우는 그냥, 갑자기 강주한을 만지고 더듬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라왔다. 배 속이 근질근질한 느낌에 그를 둘러 안았다. 가까이 붙어서 쪼는 버드키스를 시도하자 강주한이 입을 벌렸다. 다시 뒤로 물러나자 이번에는 그가 다가왔다.
장난스럽게 몸을 뒤로 물리자 그가 하선우의 뒤통수를 잡아 입술을 꾹 눌렀다. 점점 깊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거칠어졌다. 하선우는 젖은 그의 아랫입술에 시선을 둔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선우는 벽모서리 너머로 이어지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서둘러 강주한과 거리를 벌리느라 급하게 뒤로 기어가던 하선우는 물속에서 발을 헛디뎠다. 흠뻑 얼굴을 적신 물을 닦아내며 수면으로 떠오른 그는 헛기침을 했다. 호출도 없었는데 급작스럽게 들어온 직원에게 주의를 주려던 강주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경을 벗은 창백한 낯빛의 임경호가 고개를 숙인 채 들어오고 있었다.
자욱한 증기가 서린 실내로 모습을 드러낸 뒤에도 임경호는 김이 서린 안경을 닦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안경을 고쳐 쓴 그는 조금 뒤늦게 하선우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강주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안경을 써도 가려지지 않는 서늘한 눈빛이었다.
“샤워하고 입욕한 거겠지?”
허리춤에 감긴 타월에 손을 뻗으며 임경호가 물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강주한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미 예약한 룸이야. 딴 데 알아봐.”
“먼저 보자고 한 건 네 쪽 아니었나.”
“지금은 좀 피곤해. 저녁 이후에 보지.”
“아니. 난 지금이 딱 좋겠어. 샤워했나?”
하선우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임경호는 물었다. 머리를 타고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훔쳐내던 그는 주춤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바로 입욕했습니다.”
임경호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타인의 땀과 체취가 뒤섞인 물속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아 보였다. 그는 넓은 욕조 앞으로 걸음을 옮긴 뒤에 멈춰 섰다.
그는 흰 부말이 꺼졌다 떠오르는 수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탕 안에 들어온 임경호는 반듯한 자세로 강주한의 맞은편에 앉았다. 둥근 안경 위로 흰 물감을 덧칠한 듯 자꾸만 증기가 서렸다.
그가 안경을 벗어버리자 희극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찢어진 긴 눈꼬리가 드러났다. 또렷하게 탐색하는 기색에 말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강주한이 하선우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일어나죠.”
“왜. 관객이 필요한 것 같더니. 한 명쯤은 지켜보는 게 좋지 않아?”
고개를 돌린 강주한이 여전히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임경호를 노려보았다. 강주한은 빨간 혀로 몇 번이나 아랫입술을 축였다. 불현듯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지켜본다고?”
“왜 웃지. 가소롭다 이건가?”
임경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면 한 명은 성에 안 차나. 좀 전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야 상대할 맛이 나서 그래?”
거친 숨을 가까스로 정리한 강주한이 임경호를 힘주어 바라보았다. 하선우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점차 느슨해졌다.
“형은 어떤데?”
“우리 둘이 재회하길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난 별로 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진 않아서. 물론 너에게도 마찬가지고.”
임경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그의 이목구비는 어딘가 뒤틀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갑자기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흠뻑 젖은 상기된 얼굴과 강주한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손을 보았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그는 말했다.
“어째 자주 보는군.”
예의상 반갑다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그는 그저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남자 역시 하선우를 상대할 생각은 없었는지 향했던 눈길을 거두었다. 임경호는 물었다.
“독일 출장은 다녀올 만했나? 여섯 개 계열사 임원들과 다임러 본사 방문해서 기술 소개했다던데. 반응은 어땠어?”
강주한은 말없이 임경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기술시연 내용도, 협력하기로 한 분야도 밝힐 수 없어?”
“그것도 그렇고, 다른 것도 마음에 걸려서.”
“다른 건 뭔데.”
“아무래도 한 사람의 반응이 걱정스러워서.”
“내 걱정이라면 됐어. 난 네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할 생각이었으니까.”
“진심인가?”
“그래. 어차피 전기차용 배터리 분야는 진입장벽이 높아서 처음부터 안신과 EUABC 간의 계약이 성사될 거란 기대를 하진 않았어. 산요와 엘텍, 어차피 둘 중에 하나일 거라고 짐작했지.”
“답지 않게 겸손이 지나친데.”
“아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어. 안신이 EUABC 입찰 후보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꽤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임권혁 사장이 안신으로 옮긴 이후에야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니까. 너야 임권혁 사장을 백색가전으로 옮기니 뭐니 하며 폐기처분하려고 했지만, 안신의 입장은 다르지. 자동차 xEV는 우리 같은 후발주자가 임 사장을 재활용해서라도 진입해야 하는… 그런 가치가 있는 시장이잖아, 주한아.”
임경호의 긴 이야기 뒤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강주한은 수긍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그 큰돈 주고 데려갔겠지.”
은근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태도로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지난달에 임 사장 지시로 VC사업본부와 EC사업부를 통합했다는 소식 전해 들었어. 또 부품모듈 연구소 캠퍼스를 이천에 완공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음… 이것 외에도 전해 들은 소식이 꽤 여럿이었는데.”
기억을 떠올려보려 눈을 가늘게 떠 수면을 바라보던 강주한은 고개를 들어 어정쩡한 기억을 잘라냈다. 나지막이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강주한은 입술을 뗐다.
“그 정도면 임 사장을 재활용한 게 아닌데? 그 정도면 효율등급이 세계 최고 수준이잖아. 이러다가 안신이 엘텍을 금방 따라잡겠어.”
강주한은 손바닥으로 턱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물렀는지도 모르겠어. 소송까지는 가지 말자는 형의 말에 너무 고분고분하게 굴었나 봐. 엘텍 입장에서는 그런 인재를 놓쳤으니 손해가 막심하지.”
무심하고도 건조한 어조였지만 강주한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짙은 숙취 같은 불온함이 들러붙어 있었다. 임경호의 입술이 점차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웃음을 짓고 있던 그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었다.
“주한아. 네가 진짜 날 갖고 노는구나.”
구부정했던 허리를 편 강주한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선우는 그 행동이 다분히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갖고 놀다니.”
“네가 엊그제 보낸 서류 잘 확인했다.”
강주한은 손을 뻗어 자쿠지의 버튼을 눌러 껐다. 시끄럽게 와류하던 수면의 거품이 잔잔해지며 스파룸 안이 고요해졌다.
“IK 전담반. 우리나라에서 제일 일 잘하는 놈들은 거기 다 모여 있더라.”
임경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물기 없이 거칠어져갔다. 못 박힌 듯 강주한을 노려보며 그가 입을 떼려던 순간 강주한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얘긴 지금 하고 싶지 않은데.”
“뭐?”
“장소가 장소다 보니까 욕조 안에 오래 있긴 무리인 것 같아. 두통이 올 지경이거든.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말고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사안인 것 같은데.”
강주한의 웃음 띤 말투에 팽팽하게 임경호의 가슴께가 당겨졌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차가워진 눈으로 강주한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나도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 먼저 일어나지.”
욕조에 걸쳐두었던 수건을 찾아 허리춤에 걸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하선우라고 했었지.”
임경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하선우의 얼굴에 놀라움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머뭇거리던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하선우라고 합니다.”
“혹시 마음 바뀌어서 강주한 사생활 폭로하고 싶어지면 나한테 와.”
수건을 허리춤에 여미며 그는 말했다.
“음성이나 사진보다는 화질 좋은 섹스 동영상 증거가 더 좋아. 크게 몇 장, 아니 몇 십 장 챙겨줄 테니. 생각 있으면 연락해. 한국 뜰 각오쯤 되어 있다면 신분증과 살 집도 구해줄 수 있어. 반반한 얼굴 덧없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야. 강주한 변덕이 오죽해야지. 영악한 놈이라 평판이 좋아 그렇지 상대 안 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미친놈이거든.”
대답할 여지도 주지 않고 바쁘게 말을 퍼부은 그는 욕조에 얹어두었던 안경을 썼다. 그제야 계속 찌푸리고 있던 눈을 편안하게 뜬 그는 하선우와의 협상 가능성을 가늠하듯 미동 없이 한참이나 응시했다.
얼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던 하선우는 점점 커지는 맥박 소리가 귀를 뒤덮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처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임경호의 앞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팔목이 강하게 잡아채였다.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강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지어 그는 하선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그와 임경호를 번갈아 쏘아보던 하선우는 결국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심한 모욕을 받은 느낌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되도록 평범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하선우는 말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추측들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
“…….”
“본인이 그렇게 부정한다면야 그러지. 괜히 나중에 쓸데없는 기대로 상처받지나 말라고.”
임경호는 낯을 찌푸리며 웃었다. 하선우는 여전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그의 태도가 불쾌했다. 골 안에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것 같았다. 그가 스파룸을 빠져나간 뒤에 물속에 철썩 주저앉은 하선우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화가 난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 만날 때마다 사람 기분 바닥까지 끌어내리시네요.”
“미안합니다.”
하선우는 눈만을 들어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잔뜩 주름이 진 채였다. 열받은 본심이 훤히 들여다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강주한과 임경호의 고래 싸움에 증권가 찌라시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강주한은 반감이 뒤섞인 하선우의 눈빛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강주한이 말했다.
“미안해요.”
“…….”
“나 때문에 별일 다 겪는군요.”
강주한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결국 서서히 하선우의 감정은 풀어지고 그 자리에는 민망함과 새로운 걱정거리가 무럭무럭 자라나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함부로… 추측하시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선우 씨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겁니다.”
동성 간의 스캔들에 대해 그가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말했기 때문에 하선우는 점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임경호는 정말 싱거운 의도로 하선우와 강주한 두 사람의 사이를 들춘 것일까. 잔뜩 마음속이 헤집어진 기분이 들었지만 더는 신뢰를 운운하며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행이고요. 뜨거운 물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요. 머리 아픕니다.”
강주한이 마사지 일정은 취소할지에 대해 물었다.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남자의 턱 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언가가 아프게 앞이마를 누르고 있었다.
“피곤이 쌓였나 봐요.”
남자가 가져다준 두통약을 삼킨 하선우는 입술의 물기를 훔치며 말했다. 단 두 사람만이 주말 동안 머물 예정이었지만 거실과 방의 개수, 규모로 보아 안 실장은 가족 단위가 머무는 콘도를 예약해둔 듯했다.
시계가 걸린 벽은 등나무를 꼬아 만든 라탄 조명으로 촘촘히 장식되어 있었다. 따듯하고 감성적인 분위기의 객실이었다. 시침은 숫자 ‘7’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잠을 자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지만 눈 좀 붙이지 않겠냐는 강주한의 권유를 하선우는 특별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얇은 거위털이불 속에 몸을 말고 누웠다. 방 안의 조도를 어둡게 낮추며 강주한이 잠시 밖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했다. 하선우는 그가 외출하려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강주한은 임경호를 다시 만나려는 것이다.
조곤조곤. 결코 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는데 날카롭게 칼날처럼 꽂히는 임경호의 말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자 임경호의 다른 말들이 떠올랐다. 이미 과거에 한 번씩 그의 속을 긁어놓았던 것들이었다.
‘자네는 어느 쪽에 가깝나. 강주한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인가 악어새인가.’
강주한의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되고 싶지도 않지만, 그는 악어새이고 싶지도 않았다. 기생하든 공생하든, 그를 이익이 되는 장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찝찝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선우는 연애를 시작한 뒤로 오히려 일과 연애의 선을 뚜렷하게 긋게 되었다. 그 경계를 의식하는 이유가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왜 연애를 하자고 했던 강주한의 말에 예라고 대답했었지?
부드러운 감촉의 베개에 뺨을 부비며 하선우는 희미한 기억을 되찾으려 집중했다.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자 곧바로 의문이 해소되었다. 자신은 강주한이 알고 싶었다. 강주한이란 인간 자체를, 그 너머를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의 면면을 낱낱이 끌어모으면 부분적이나마 강주한이라는 풍경이 되었다. 이편과 저편으로 세상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매도당한,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는 남자. 어쨌든 하선우가 마주하는 일면 속의 그는 그랬다.
하선우가 알지 못하는 배면에 위치한 그의 또 다른 얼굴이 있을 테지만 그 불투명한 영역을 환히 밝히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강주한을 알고 싶지만 그의 전부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건 강주한이 임경호와의 관계를 하선우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어쩌면 피스가 비어 있는 퍼즐처럼, 조각을 비워둬야 하는 면이 강주한과 자신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선우는 완성되지 못한 퍼즐을 쳐다보듯 고요히 열린 문 사이의 틈을 바라보았다.
* * *
사냥을 나서는 발걸음은 단조로웠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남자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복도 끝의 벽에 시선을 두고 과녁을 조준하는 상상을 하는 중이었다. 총알처럼 장전된 개념들을 머릿속에 차분하게 굴려가면서.
임경호의 숨줄과 연결된 실마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노출되어 있었다. 3년 전, 필리핀에서 살인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조영만이라는 50대 사업가가 신원미상의 20대 2인조 남성들에게 납치되었다. 깊은 자상을 입은 상태로 간신히 도망을 친 그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그 길로 한국으로 급히 귀국을 했다.
그는 자신을 살인청부를 한 배후의 인물로 서형덕이란 인물을 지목했는데, 서 씨는 여의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사채업자였다. 조영만은 사채업자에게 230억에 달하는 돈을 사업자금으로 빌렸고, 이를 갚지 못할 처지에 이르자 필리핀으로 도피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서형덕이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살인청부를 했다는 것이다.
안신그룹과는 전혀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는 살인청부 사건이 그들의 숨줄을 죄는 단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경찰수사를 통해 서 씨의 장부가 입수되면서부터였다.
장부에는 이니셜 B로 기록된 브로커를 통해 입금된 돈의 금액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모 단체의 자금관리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브로커 B를 통해 서 씨가 관리하는 금액은 600억에 달했다. 경찰은 브로커 B가 폭력조직과 연관된 인물일 것으로 추측, 사건을 검찰로 넘겼고 수사 끝에 B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폭력조직의 브로커가 아니라 안신그룹의 전 기획부서 본부장을 맡았던 류 씨였다. 그러나 그가 5년 전에 안신에서 퇴사를 했다는 것과,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600억과 안신과의 연계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수사는 서 씨의 살인청부 의뢰 선에서 수사 종결되었다.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한 사건이었지만 모두가 감시의 눈길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소식은 곧바로 강주한의 귀에도 들어갔다. 증거불충분의 이유가 무색하리만치 브로커 B, 류 씨의 신상을 조금만 파고들자 그의 정체가 곧바로 밝혀졌다.
그는 안신의 차명계좌를 관리하는 브로커 중 한사람이었다. 류 씨의 정체를 밝혀낸 후, 그를 매수한 강주한은 안신의 은닉재산 규모를 추적하는 전담반을 조직했다. 이후 안신의 실무라인에 있던 퇴직 직원과 서울지방 국세청 조사4국, 홍콩의 페이퍼컴퍼니를 중심으로 안신과 접촉이 있던 브로커들을 추려냈고 차명재산의 규모를 밝혀냈다. 언론에는 9조 3,400억으로 밝혀졌지만 이 외에도 6조 원대에 달하는 재산이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조세도피처 등지에 은닉되어 있었다. 은닉된 재산 중 일부가 외국인 투자로 가장되어 안신의 국내 계열사에 재투자되고 있었다.
만약 재투자된 돈이 일시에 빠져나간다면 이미 여러 가지 위험을 떠안고 있던 안신으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될 터였다. 그는 외상을 입고 분노에 치를 떠는 임경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안신의 약점이 적나라하게 적힌 서류를 받아 든 그는 지금이 굴복해야 하는 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어쩌면 먼 훗날의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복수. 복수라.
강주한은 숨소리만으로 그 단어를 몇 번이나 뇌까려보았다. 곧바로 어떤 이미지가 그의 머릿속으로 진입한다. 서재에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그것은 강주한의 머리 한편에 눌어붙어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 중에서 그가 가장 자주 대면하는 모습이었다. 독서는 부친의 몇 안 되는 한가로운 취미 중 하나였다. 그는 주로 실용도서를 읽었지만, 가끔은 추리소설의 고전들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읽기도 했다. 전 세계의 희귀한 장서들을 보관하는 서재에는 유명 추리소설 작가의 영문 초판을 모아두는 섹션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청소년기의 강주한은 가끔 늦은 밤 서재에 들어가 아버지가 흰 장갑을 끼고 읽던 부서지기 직전의 책들을 맨손으로 조심성 없이 읽곤 했다. 어디선가 들었던, 균형 회복은 모든 추리 소설의 주제라는 말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복수, 인과, 정의 세 가지 방법을 통해 균형을 회복시켰다. 피해를 당한 자는 복수를 통해 균형을 회복하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으며, 부패한 불의는 진리를 통해 정의를 되찾는다. 냉소적이었던 청소년기의 남자는 그의 부친이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부친은 그 모든 균형 회복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그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에게 인과의 법칙을 따질 수 있는 이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자도 없었다. 그의 부친은 세상을 제멋대로 기울였지만 사회는 관용을 베풀었다.
열네 살 무렵 남자는 아버지에게 균형의 회복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머릿속에서 떡반죽처럼 덩어리져 나온 원론적인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곤, 실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아버지는 복수, 인과, 정의 따위의 추리소설에나 나올 법한 개념을 현실로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다. 이유를 묻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현실은 우승열패이기 때문이지.’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며, 여전히 불안한 예감을 지우지 못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단 한마디의 말로 일축하며 안심시켰다.
그는 문 앞에 섰다. 과녁은 문 너머에 있었다.
문을 열자 무균처리된 병실 속의 환자 같은 창백한 옆얼굴이 보였다. 강주한의 등장에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든 임경호는 그의 사촌을 딱딱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강주한은 임경호의 앞으로 서류철을 내밀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안 비서가 커피를 내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임경호는 강주한이 잔을 반 가까이 비운 뒤에야 서류철을 소리나게 덮었다.
“임경호 전담반이라……. 꽤 오랫동안 내사를 해온 모양이야.”
강주한의 앞으로 서류철을 던진 임경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박수를 쳤다.
“걔들 능력 있더라. 숨겨둔 돈이 얼만지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아.”
날카로운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다. 한참 뒤 임경호는 입을 열었다.
“특히 그 말이 압권이었어. 임경호와 살인청부 사건과의 연관관계. 조금만 파고들면 사실 여부와 전혀 관계없다는 걸 알 텐데. 사람들이 그걸 믿으리라고 생각하나?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는데 주한아.”
같잖은 얘기를 들었다는 듯 임경호는 말했다. 노려보는 눈을 거두지 않는 임경호와 달리, 강주한은 단조로운 느낌이 들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눈을 내리깔며 그는 말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둘 중에 먼저 뭘 듣겠어?”
“강주한.”
“아무래도 비보를 먼저 전하는 게 낫겠지. 지금 이 상황에서 좋은 소식이라고 전해봐야 전혀 기뻐할 것 같지가 않으니.”
가벼운 웃음을 흘린 강주한은 조용히 말했다.
“밥(Bob)이 마피아와 관련이 있는가.”
고개를 숙여 식은 커피의 냄새를 의미 없이 맡은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밥이 마피아와 관련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거나 같은 제목의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밥과 마피아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이지. 우스운 건, 밥은 마피아와 관련이 없다는 기사조차 그를 마피아의 영향권에 속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갖게 만든다는 거야. 불리한 암시라는 건 그렇더군.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특정 사건과 거명된 사람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인식하게 만들어. 형의 경우는 어떨까. 안신그룹은 사채업자 서 씨의 살인청부 사건과 관련이 있는가? 그런 질문이면 될까.”
눈을 조금 들어 올린 그는 강고하게 힘을 준 임경호의 턱 끝에 시선을 두었다.
“돈의 출처를 파고들지 못하도록 검찰에 압박을 넣은 정황까지 알려지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겠어.”
“흑색여론 정도야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마련이지.”
“글쎄. 이미 기사가 나간 뒤엔 너무 늦을 것 같은데. 재벌의 청부살인 같은 기사는 관심을 끌겠지만 과연 중립적인 뉴스를 찾아볼까? 사람들이 굳이 그런 에너지를 소비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여론일 뿐이지. 살인청부 사건과 안신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쯤은 금방 드러나게 돼 있어.”
“하지만 비자금은 아니겠지. 그걸 덮으려고 압박을 넣은 것 아니었어?”
불쾌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임경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너희야말로 떳떳하다고 할 수 있어?”
강주한은 몸을 소파의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대며 말했다.
“글쎄.”
손을 들어 엄지손톱의 거스러미를 신중하게 살펴보며 그는 말했다.
“안신의 16조에 비하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지. 어머니도 인정하셨지만… 아버지께서 그런 면에는 소박하셨거든. 게다가 우린 이미 오래전에 진통을 겪었던 일이잖아. 20년 전쯤에 죗값을 치른 일이지. 홀가분하게도.”
“죗값?”
크게 치뜬 눈이 일그러진 눈썹에 눌렸다. 순간 말문이 막혔던 그가 입을 떼려던 순간 손톱의 거스러미를 쳐다보던 강주한이 눈을 들었다.
“핵심은 그게 아니지. 중요한 건 형의 처지와 지주회사인 엘텍을 함부로 비교하면 안 된다는 거야.”
“뭐?”
“우린 경영권만큼은 요지부동이거든. 하지만 안신은 어때. 고작 주식의 3퍼센트로 안신 전체를 지배하려다 보니… 곳곳의 계열사에 수혈하기가 어려웠겠지. 출자를 복잡하게 걸치다 보니 다양하게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혔을 테고 이번 소송에서 질 경우, 아니 어머니가 외조부의 차명주식을 일부분 상속받게 돼도 경영권 상속이 불투명해지겠지.”
임경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송에서 지게 될 경우엔 안신 비자금에 대한 자료를 검찰에 넘기기로 했어.”
강주한은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렇게 된다면 경영권뿐만이 아니라 재산권 상속에도 상당한 장애가 생기게 되겠지. 어쩌면 실형까지도 살게 될지도 모르고. 자료를 넘기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이런 방대한 자료라면 검찰에서도 모른 척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땐… 외부 주주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 뿐, 임경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강주한의 무심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임경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휘몰아쳤다. 그는 마주한 위험 속에서 사소한 문제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되어온 돈 중 일부는 자사주를 구입하고 외국인 투자자로 가장하여 재투자하는 데 사용되었다. 임용화가 승소하여 재산의 일부분이 상속분에 맞게 형제에게 돌아간다면 어렵게 안정화한 안신의 경영권이 휘청거리게 될 터였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엘텍 내부에서 안신 내부의 비자금을 쫓는 내사를 진행해왔는데, 그들이 밝혀낸 비자금의 규모는 소송을 건 차명계좌의 금액뿐만이 아니었다. 임경호 자신도 상세히 알지 못하던, 페이퍼컴퍼니의 존재와 조세도피처와 국내외 곳곳에 숨겨놓았던 비자금이 낱낱이 밝혀졌다.
강주한은 지금 그의 어머니가 소송에서 질 경우, 검찰에 자료를 넘기고 수사를 진행하도록 압박을 넣겠다는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경영권과 재산권 상속을 걸고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피고인으로 검찰조사를 받게 한다는 말이었다. 결국 모든 것을 잃기 전에 굴복하라는 협박이었다.
임경호는 좁은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욱여넣듯 삼켰다. 그는 잔뜩 굵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선례 만드는 거다.”
“선례라.”
“소송에서 고모가 이기면? 그래, 네가 원하는 것 얻게 되겠지. 그런데 생각을 해봐. 일이 여기서 끝날 것 같아? 우리 선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나 같아도 경영 따위 때려치우고 남의 구린 구석 뒷조사해서 협박하고 빼앗고 말겠어. 너 그 사람들에게 눈엣가시 되는 거다. 검찰이 네 편을 들어줄 것 같으냐?”
말의 말미에 임경호의 몸은 분노로 움찔 떨리기까지 했다. 강주한은 맹렬한 냉기를 뿜어내는 임경호의 눈을 오래도록 응시하며 담배를 필터 가까이 피웠다. 해소되는 기분 같은 건 없었다. 텁텁함만 남는 담뱃진 냄새가 넌더리가 나 재떨이에 함부로 담배를 비벼 끄며 강주한은 피식 웃었다.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어. 정의구현에.”
“뭐라고?”
“그보다 좀 전에 하던 얘길 마저 하지. 나쁜 소식을 전했으니 좋은 소식을 전해볼까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강주한은 앞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불을 붙이며 한 모금 빨아들인 그는 담배를 쥐지 않은 남은 손가락으로 눈가를 짚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곧 입을 열었다.
“피차간에 구린내를 풍기는 건 마찬가지니 상도덕을 지키자는 형의 말.”
약지와 중지로 눈꼬리를 부드럽게 비벼 누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선례를 만들지 말라는 그 말. 나 역시 동감이야. 오늘 내가 남의 것을 빼앗았다고 해서 훗날에 내가 빼앗기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난 형이 경영권 승계받고 재산권도 지켰으면 좋겠어.”
도무지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앞뒤 다른 말에 임경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참 뒤에 그는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헷갈리게 질질 끌지 말고 요점만 말해.”
손가락 끝으로 당겨 한쪽 눈꼬리가 비딱하게 올라온 눈으로 강주한은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아주 소박해. 안신안신전자 주식 유상증자해. 2조 5천억 규모로.”
임경호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증자한 신주를 모두 제3자에게 배정 처리하는 방식으로 일을 마무리했으면 해.”
“네가 말하는 제3자가 누군데.”
힌트를 줄 테니 생각을 하라는 듯 강주한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렸다. 임경호의 눈가가 비틀렸다. 썩은 내를 찾듯 숨을 깊게 들이쉰 임경호는 입술을 뒤틀며 말했다.
“강주한 너?”
강주한은 한 모금 빨아낸 연기를 어깨 너머로 뱉어냈다. 눈가를 짚었던 손을 떼어내며 그는 찌푸린 임경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래.”
임경호의 눈빛이 냉기로 얼어붙었다.
“아, 너는 결국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안신전자를 갖고 싶다 이거구나.”
“왜? 이전의 조건에 비하면 덜 치명적인 것 같은데. 공짜로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게 네가 말하는 희소식이라는 거냐. 덜 치명적이라고? 지금 네 말은 지금껏 안신이 20년간 투자해온 사업에 기생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기생보다는 협력관계라고 표현했으면 싶은데. 엘텍은 신주에 대한 대금을 내고, 안신전자는 주식거래 대금으로 회사운영 자금을 마련하고. 이거야말로 선순환이지.”
“너는 안신전자의 대주주로 올라서고?”
강주한은 필터 가까이 타들어 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빨아들였다.
“내가 외숙부를 존경하는 이유가 다른 전 계열사를 희생하면서까지 안신전자 지분을 지금까지 지켜내셨다는 거야. 생명이니, 카드니, 텔레콤이니, 유통이니… 다른 계열사의 출자지분이 거미줄처럼 복잡한 것에 비하면 단순하기 그지없더군.”
“그러니까, 안신전자의 대주주 자리를 넘기든가 다른 계열사의 주주총회 자리에서 사사건건 훼방 놓는 걸 지켜보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하라 이거지.”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모양이군.”
풀썩 웃으며 강주한은 담배를 짓눌러 비벼 껐다.
“형도 경영권과 재산권의 상속을 걸고 도박을 하느니 협력관계가 되는 게 나을 거야.”
“네가 진짜 나를 쥐고 흔들려고 그러는구나. 조건이라는 게 강제 합병과 다를 바가 없는데 누가 순순히 허락한다고 했어?”
“지금 처지를 잊고 있나 본데 권유가 아니야. 굴복하라는 소리지.”
그는 묘한 눈길로 임경호를 바라보았다. 임경호는 심장이 짓눌리기라도 하는 양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지. 구체적인 진행사항은 김정연 사장을 통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바른 자세로 못 박힌 듯 앉아 강주한을 올려다보던 임경호에게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는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외상을 입은 사람처럼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며 임경호는 소리쳤다.
“내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생각을 모조리 포획하려는 듯 임경호의 시선이 강주한에게 강렬하게 고정되었다. 문고리를 잡은 채로 뒤를 돌아보던 그는 얼마간 임경호의 물음을 곱씹는 듯 침묵했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임경호의 눈빛을 모른 척하며 강주한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문고리를 돌렸다. 그는 문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 * *
잠든 사이 누가 다녀간 것이 틀림없었다. 어두운 거실의 소파 너머에 뭔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하선우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거실의 불을 켰다. 같은 크기의 검은 종이백 여러 개가 장식장에 기대어 있었다. 그 안의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어 인상을 쓴 그는 천천히 젖은 머리를 쓸며 허리를 숙였다.
그때 문 밖에서 카드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가방을 열어보려던 하선우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주한을 발견하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아무런 표정이 담겨 있지 않던 그의 눈이 하선우를 담은 순간 조금 크게 열렸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자다 깼는데 잠이 안 와서 그냥 좀 씻었어요.”
하선우는 시계를 보았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간 뒤로 고작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하선우는 TV 장식장 아래의 종이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조금 전에 이런 건 없었는데. 뭐예요?”
“이번 출장길에 가져온 겁니다. 선우 씨 주려고요.”
둥글게 뜬 눈으로 하선우는 종이가방과 강주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마디로 유럽에서 선물을 사왔다는 말이었다. 불과 얼마 전,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겪었던 그와의 갈등이 떠올랐다. 뭔가를 말하려던 하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강주한에게 조금 더 걸어간 그는 어깨에 젖은 수건을 걸치며 입술만을 인위적으로 늘려 웃었다.
“전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는데.”
양손으로 수건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며 웃은 그는 허리를 숙였다. 중간 크기의 종이백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이건 뭐예요?”
“구두요.”
종이백을 펼쳐 그 안에서 상자를 꺼낸 강주한이 말했다.
“기성화로 고른 신발입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마요.”
상자의 커버를 열자 금장의 로고가 박혀있는 두 개의 벨벳 주머니가 보였다.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짙은 갈색으로 태닝된 가죽구두였다. 앞코가 얄팍하게 빠졌으면서도 구두의 저부가 둥그런 형태의 신발이었다.
“클래식슈즈 중에서 디자인별로 갖추고 있으면 좋은… 기본 아이템들로 구매했습니다. 이건 윙팁 타입의 구두고요.”
강주한은 신발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신어보죠.”
강주한은 하선우를 소파에 앉혔다. 슬리퍼를 벗긴 그는 하선우의 맞은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발바닥의 오목한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잡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손가락으로 발 안의 여린 살을 살살 매만지고는 신발을 신겨주었다. 매듭을 신중하게 조인 강주한이 나머지 신발의 끈을 풀어내며 말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정말로 여자 발 같아요.”
“남자치고는 좀 작죠.”
“그렇기도 하지만 발모양 자체가 예쁘다는 말입니다.”
여자를 대하는 듯한, 그의 지나친 매너에 하선우는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꼈다. 그가 나머지 발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옴폭 파인 발바닥을 의도적으로 만지작거리는 감촉에 발끝을 오므리자 그가 입술을 조금 움직거렸다. 하선우는 희미하게 매달린 그의 미소에 괜히 마음이 들썽거렸다.
“신발 사주면 그 신발을 신고 도망간다던데.”
강주한은 눈도 맞추지 않고 목을 울리며 웃었다.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는 가벼운 도발로 느낀 모양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가 눈을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도망을요?”
하선우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그는 조금 더 먼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배부른 맹수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그가 되물은 말에 하선우는 말문이 막혔다. 하선우는 입술을 헤 벌리며 웃었다.
“속설이죠 속설.”
“그렇죠.”
신발을 신겨주며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끈을 매듭지어준 강주한은 몸을 일으켰다. 하선우는 자신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워준 그를 따라 전신거울 앞에 섰다.
잠옷 차림과 값비싼 명품구두는 전혀 어울리는 모양새가 아니었지만, 구두만 놓고 본다면 값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물론 그 값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가죽도 부드럽고 가볍네요. 칼발이라 늘 발이 안에서 겉돌았는데 그런 것도 별로 없고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완전 마음에 들어요.”
하선우의 발이 아닌 거울 속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강주한이 풀썩 웃었다. 하선우의 처진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허리에 손을 감아 자신에게로 바짝 잡아당겼다.
“반응이 뭐랄까. 너무 내 눈치를 보니까 귀엽기도 하지만… 안쓰럽기도 하고.”
푸흐흐 귓바퀴에 웃음을 흘리며 그는 말을 이었다.
“왜요. 또 싸울까 봐 그럽니까. 마음에 안 들면 말해요. 안 잡아먹으니까.”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상기시키는 게 못마땅한 한편, 그의 단어 선택이 거슬려 하선우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안 잡아먹는다니. 마치 남자들 간에 서열정리를 하는 표현 같았다. 일부러 저를 자극하고 위축시키는 게 틀림없어 한숨을 크게 쉰 그는 몸을 돌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숨을 조심스럽게 쉬며 하선우는 강주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건 주한 씨가 포식자고 제가 초식동물이라는 전제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좀 이상하거든요?”
“왜? 잡아먹는다는 표현이 싫습니까.”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진 듯한 습한 목소리가 귀를 축축하게 적셨다. 목소리의 톤을 바꾸는 그 때문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뭐…… 때에 따라 달라요.”
“불에 가까운 상황은 짐작이 가지만 호에 가까운 상황은 잘 모르겠는데. 잡아먹는다는 표현이 반가운 상황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겠습니까.”
“…….”
“…….”
“우리 그냥 진도를 나갈 순 없을까요.”
도통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는 얼굴로 하선우는 쥐어짜는 목소리를 냈다. 강주한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하선우를 지켜보다 젖은 뒷머리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혀를 내민 그가 하선우의 아랫입술을 덧그렸다. 서로 두 눈을 뜬 채였다.
첫 키스도 아닌데 하선우는 얼굴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뭘까,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걸까. 딴 데 신경을 돌리려 했지만 흥분으로 붉어진 강주한의 눈가를 보자 생각이 증발해버렸다.
정직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그의 눈빛에 눈을 감은 하선우는 숨만 색색 몰아쉬었다.
정적 속으로 입을 맞추는 소리만 간간이 울려 퍼졌다. 호흡을 멈춘 채로 키스를 하던 하선우는 길어지는 입맞춤에 천천히 코로 숨을 몰아쉬었다. 고무줄로 된 허리춤 안으로 강주한의 서늘한 손이 들어와 속옷과 함께 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끌어내렸다.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아 벌리는 노골적인 애무에 숨을 들이켰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걸리적거리는 허리띠와 바지의 버클을 풀고 속옷을 끌러내려 성기를 쥐자 강주한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서로의 옷을 벗겨낸 두 사람이 침대에 한데 엉켰다.
강주한은 침착하게 하선우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선우의 무릎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 천천히 다리를 넓게 벌렸다. 다리가 넓은 각도로 벌어지며 구멍의 틈새가 열렸다. 그는 붉은 구멍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다리를 오므리려 하기에 힘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자 상반신을 들어 올리려 허리를 버둥거리다, 이내 그마저도 마음대로 안 되는지 얌전해졌다. 숨만 얌전히 새액새액 몰아쉬며 천장을 올려다보는 하선우의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무릎 안을 짓누른 손에 더 힘을 줘 침대를 향해 밀자 허리가 붕 들렸다. 허리 밑에 자신의 허벅지를 댄 강주한은 무릎과 허벅지 사이의 여린 살부터 차근차근 빨아 올라갔다. 일정하던 하선우의 호흡은 중심을 향해 가는 움직임에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새 주위를 살살 핥아 올리던 혀가 속살을 슬쩍 파고들었다.
민감한 감각을 헤집을수록 여유가 사라져갔다. 무릎을 잡았던 손은 어느새 엉덩이 위로 옮겨져 있었다. 손자국이 살 위에 남을 만큼 엉덩이를 강하게 잡아 벌리고 혀를 넣자 허벅지가 강하게 경련했다. 허리가 조금 더 공중으로 높게 들려 하선우는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민망함 속에서도 구멍이 움찔하는 것을 느껴,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윤활제를 잔뜩 짠 중지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깊숙하게 구멍 속을 메웠을 때, 여유가 모조리 증발해버렸다. 신음을 참던 하선우의 입술 사이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가락은 금세 숫자를 늘어갔다. 미처 탄성을 회복할 새도 없이 개수가 늘어나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꾸역꾸역 파고드는 손가락이 각자 제멋대로 몸속을 휘저을수록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한껏 찡그려졌다. 강주한 나름의 배려였겠지만 루브를 치덕치덕 바른 손가락이 구멍 속을 거침없이 긁고 빠져나갈 때마다 흥분으로 애액을 흘리는 여자처럼 밑이 흥건하게 젖어갔다. 참을 수 없는 이질감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축축하고 끈적한 틈새 사이로 따듯한 페니스의 머리가 닿았다.
그 순간 하선우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귀두를 젖은 구멍에 조준한 그는 장난을 치듯 하선우의 반응을 지켜보며 몇 번이나 단단한 성기를 위아래로 둥글게 굴렸다. 하선우는 자신의 구멍이 받아먹기를 바라는 것처럼 오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아, 흣…….”
배 속이 꼬이는 기분에 잔뜩 인상을 쓰고 강주한을 향해 손을 뻗던 하선우는 갑작스러운 삽입에 주먹을 꽉 쥐었다. 겨우 머리만을 삽입했을 뿐인데도 이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지금껏 풀어주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구멍이 페니스의 머리를 쥐고 꽉 다물렸다.
찰싹! 갑자기 화끈거리는 통증이 아래로부터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것이 뭔지 몰라 하선우는 눈을 둥글게 뜬 채로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찰싹이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두 번째는 분명히 알았다. 강주한의 손바닥이 엉덩이를 때린 것이었다. 미처 그를 밀어낼 새도 없이 쑤욱 페니스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뭐… 뭡니까. 흣…, …스팽킹?”
고개를 끄덕인 강주한은 조금 전 아프게 때렸던 엉덩이를 강하게 잡아 양옆으로 벌리며 더더욱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길을 내는 느낌이 어느 때보다도 적나라했다. 페니스가 반쯤 걸렸을 때 압박감에 힘을 다시 주자 그의 손이 반대편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하, 하지 마요.”
“왜. 함부로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할 말이 없어서 입만 벌리고 있자 손바닥이 찰싹, 엉덩이를 소리나게 때렸다. 이완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그의 몸속으로 페니스가 푸욱 깊게 파고들었다.
“흐잇!”
하선우는 우스운 신음을 내뱉은 입술을 손으로 꼭 틀어막았다. 아픔이 교묘하게 쾌감과 뒤섞였다. 긴장한 엉덩이 근육이 탄탄하게 올라붙었다. 몸이 수축한 탓에 오히려 내장이 넓게 벌어진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적나라한 감각이 솔직히 싫지만은 않아 그는 자신의 취향과 배덕감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다. 안달난 하선우의 애처로운 얼굴을 마주 보며 강주한은 허리를 쾅, 처박았다.
삽입의 충만함 때문에 하선우는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배 속에 마치 불덩이라도 품은 것 같았다. 페니스를 조금만 만지작거리면 사정할지도 몰랐다. 맞은 엉덩이가 화끈거렸고, 어느 때보다도 민감해진 몸은 하선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벽 속을 채운 따듯한 성기를 애무하듯 움찔움찔거렸다.
이마를 흠뻑 땀으로 적신 하선우를 빤히 지켜보던 강주한이 귀엽다는 듯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선우는 어딘가 넋을 놓은 표정으로 웃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막상 그가 허리짓을 시작하자 멍하던 하선우의 눈빛이 벌겋게 변해갔다.
시작부터 이상했다. 마치 찝찝한 잔뇨가 방광 안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하선우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 곧 깨닫게 되었다.
“왜 이렇게 질질 흘리는 겁니까.”
그가 하선우의 귀두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가 스팟을 자극할 때마다 희뿌연 애액이 귀두의 입구에서 뚜욱뚜욱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 더 잘 보이게 하려 강주한은 하선우의 손을 끌어다가 페니스를 쥐게 했다. 그리고는 하선우의 허벅지를 침대를 향해 눌러 단단히 고정하고 자신의 성기를 잔뜩 밀어 넣으며 말했다.
“벌써부터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요.”
하선우는 숨이 끊어지는 소리를 내며 쿠퍼액을 줄줄 흘리는 자신의 귀두 끝을 만지작거렸다. 사정감도 아니고, 잔뇨감과 닮은 쌀 것 같은 감각이 계속해서 몰아쳤다. 그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왼쪽으로 또렷하게 불거진 힘줄과 두꺼운 귀두, 곧은 모양을 가진 단단한 페니스가 몸 안을 가득 채울 때마다 선명하게 마치 본이라도 뜨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팟뿐만이 아니라 느끼는 모든 부분이 성기에 짓눌렸다. 언제나 첫 삽입의 순간은 고통이었고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은 좀 달랐다. 저 큰 게 들락거리는데도 단번에 느끼기 시작한 스스로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는 희뿌연 애액이 묻은 손을 뻗어 좆을 무느라 빠듯하게 벌어진 접합부를 만지작거렸다. 미끌미끌한 살기둥이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내길 반복했다. 직접 눈으로 들여다보자 배 속이 괴로울 만큼 간질거렸다. 믿을 수 없는 굵기의 페니스가 몸속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하선우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흐으…, 깊…어요. 하아, 깊어.”
“좋아요?”
“하아…, 좋아요. 너무… 깊어. 흐, 으, 으으….”
고개를 끄덕이자 강주한이 조금 속도를 늦추며 속삭였다.
“헐거워질까 봐… 겁납니까.”
시뻘겋게 달아오른 하선우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주한이 재촉하듯 허리를 쳐올렸다. 결국 하선우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럼 헐거워지지 않게 힘 줘봐요.”
힘을 주자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성기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침을 몇 번이나 삼킨 하선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간신히 속삭였다.
“너무… 두꺼워요.”
별것 아닌 말에도 그는 흥분한 듯 보였다. 강주한이 갑자기 조급한 표정으로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하아… 흐, 흐응! …흐으으, 아…, 아…, 하아….”
새된 소리가 입안에서 높게 터져 나왔다. 눈앞이 번쩍였다. 배 위로 희뿌연 정액이 질금질금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잔뇨감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울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시트를 정신없이 쥐어뜯던 그는 강주한을 붙들려 절박하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강주한이 하선우의 손을 자신의 목을 감게 만들었다. 하선우의 상체를 꽉 껴안아 조금 더 가속을 붙여 박아 넣자 짧은 신음이 악다물린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하선우에게선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거칠게 갈라진 숨소리만이 폐에서 곧바로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하선우는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절정에 도달한 그가 사정을 하고 있었다. 난폭하게 숨을 몰아쉬며 사정을 마치기를 기다려준 강주한은 하선우의 몸 안에서 성기를 쑥 빼냈다.
그대로 몸을 뒤집고 벌려진 구멍에 귀두의 끄트머리를 맞추었다. 하선우에게서 흥분에 차오른 신음이 진하게 터져 나왔다. 삽입으로 사정까지 이르렀어도 체위를 바꾸고 다시 섹스를 시작하려니 새로운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등 뒤로 뻗은 팔로 강주한의 단단한 팔을 붙잡은 하선우는 얼마간 허리를 세운 자세를 유지했지만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결국 침대에 고개를 처박고 말았다.
흐음, 흐음, 흐으음, 억눌린 신음을 쏟아내던 그의 입술은 강주한이 꽉꽉 밀어 넣은 페니스를 둥글게 돌린 순간 크게 벌어졌다. 체위 탓에 성기가 전립선에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닿았다. 다시 지펴지는 감각이 섬뜩하고 미칠 것 같았다. 목청껏 신음을 쏟아내며 하선우는 시트를 쥐었다가 침대 헤드를 잡았다가 허리를 일으키기를 반복했다. 절절매며 항복하듯 손바닥으로 침대를 탁탁 쳤지만, 단번에 꿰뚫은 페니스가 스팟을 정확하게 찔러와 그마저도 할 수 없어졌다.
“너무…! 그만, 그! 그…만! 너무… 세요!”
자지러졌다. 들썩이며 간절한 투로 애원해봐도 여유가 없기는 강주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쳐올리는 힘에 몸이 앞으로 밀려나가지만 매번 골반을 강하게 잡은 손이 뒤로 몸을 잡아당겼다. 매번 가장 느끼는 부위를 짓찧는 페니스는 너무 뜨거웠고 철벅거리는 접합부의 쾌감은 마찰로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이제 설설 앞으로 기어가려는 노력도 포기한 체념의 상태로 간간이 토막 난 숨소리만 토할 뿐이었다. 한참 동안 치덕이는 살소리와 짐승 같은 숨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 퍼진 끝에 하선우의 몸이 경직되었다. 성기를 문 구멍이 화악 오그라들었다. 이번에도 강주한보다 빠른 절정을 맞이한 하선우의 호흡에 울음기가 섞였다. 사정을 하는 내내 빠듯하게 오그라든 구멍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숨 막히는 쾌감에 강주한은 난폭한 신음을 쏟아냈다.
하선우의 골반에 손자국이 남을 만큼 꽉 고정해 잡고 비좁은 몸속을 가르며 퍽퍽 소리가 나도록 찔러 넣었다. 오랜 시간 뒤에 절정을 맞아 뜨겁게 쏟아낸 그는, 배 속을 달군 정액이 밖으로 빠져나와 거품이 일어날 때까지도 정신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마지막으로 강하게 찔러 넣었던 허리짓이 멈추었다. 하선우는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음에도 여전히 몸속을 빠르게 들락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혹은 여전히 자신이 질금질금 싸고 있거나. 죽을 것 같은 탈력감에 시체처럼 누워 숨을 고르던 하선우의 고개가 억지로 돌려졌다. 강주한이 그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거워요.”
등 뒤의 무게에 숨이 차 눌린 소리를 냈지만 그는 여전히 자세를 유지한 채로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맞닿은 가슴과 등, 아직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살덩이도 모두 끈적거렸다. 간신히 팔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는데 갑자기 거리를 좁혀 가까이 다가왔다. 피로가 겹쳐 달큰한 숨을 토해내는 하선우의 입술을 덮었다. 입을 맞추는 그는 포만감을 느끼려면 멀었다는 듯이 생기가 넘쳐 보였다.
“바로 못해요. 쉬었다 할 겁니다.”
끈적거리는 입술을 떼어내자마자 그는 선수를 쳤다. 지친 하선우 표정에 강주한의 다문 입술 끄트머리가 슬쩍 휘었다. 손을 뻗어 젖은 하선우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남자가 픽 웃었다. 안 한다는 말은 안 하네. 여전히 뜨거운 눈빛으로 그가 쳐다보았다. 그 묘하게 울렁이는 눈빛에 하선우는 섹스 중에 정신없이 주고받았던 낯 뜨거운 말들을 기억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면거울 설치나 넥타이로 손목을 묶는다든가 하는, 그가 장난스럽게 말한 색다른 관계가 더는 예사말이 아닌 것 같았다. 천장을 마주 보고 눈을 감은 하선우는 뒤늦게 몰려오는 타격에 꾸물꾸물 몸을 돌려 강주한에게서 벗어났다.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에게서 여전한 시선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뜬 하선우는 강주한에게로 몸을 돌렸다.
“왜 자꾸 관찰하십니까.”
“무슨 생각 하는지 가늠하느라 봤습니다.”
“본다고 생각이 보여요?”
“그건 아니지만… 하선우 씨가 지금 하는 생각은 다 읽히는데.”
한쪽 팔을 얼굴 옆으로 괸 강주한은 본격적으로 하선우를 들여다보는 자세를 잡았다.
“오늘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 지은 기분이 들었습니까?”
표정의 변화만으로 심경을 알아차린 강주한에게서 푸스스 흩어지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섹스하는 동안 주고받은 말이나, 상황 따위를 조미료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 버무려지면 어떻습니까. 그거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더 감칠맛나잖습니까. 살을 덧붙여 말한 그는 맨들맨들한 하선우의 어깨 위에 입술을 묻으며 눈을 맞췄다.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는 말이라, 섹스 중에 더티토크 조금 했다고 배덕감에 잠기는 자신이 유난 떠는 것도 같았다. 순진한 반응도 정도껏이지 숫총각처럼 굴기엔 어린 나이도, 경험이 적은 편도 아니었다. 하선우는 그의 잠자리 취향이 이렇게 개발되기까지, 연애를 수도 없이 해봤을 것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쓴물을 삼켰다.
“또 뭐 좋아하십니까.”
“…….”
“마음의 준비라도 해놓게요.”
“하선우 씨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만큼 내가 이상한 취향을 가졌습니까?”
“그… 뭐였지. 다크라이필리아라는 페티시를 갖고 있다면서요. 가학적인 페티시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실제 경험이 그렇게 극단적이진 않았는데.”
그럼 나와는 그런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뭔가. 울리고 싶다면서. 하선우가 강주한에게 일탈 같은 존재라서? 아니면 특별한 존재라서? 그는 의문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난 그저 선우 씨가 말한 유대감 같은 게 있었으면 하는 겁니다. 이왕이면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하선우 씨 머릿속에서 도대체 난 어떤 사람인 겁니까. 꽤 부정적인 이미지인 것 같은데.”
젖은 하선우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감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던 강주한은 얼마 뒤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를 하는 이유가 결혼의 전 과정이기도 하지만 정서적 안정 때문이기도 하다는데.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안정의 기본조건은 신뢰 아닌가. 여전히 날 못 믿는 이유가 뭐죠.”
묘하게도 정곡을 찌른 말에 하선우의 오른쪽 눈 밑이 꿈틀했다.
“못 믿는 게 아니라… 믿기지가 않아서.”
강주한은 그 차이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 동안 할 말을 찾던 하선우는 입을 열었다.
“왜 이런 걸 다 해주시는 겁니까.”
단번에 그 의미를 파악한 강주한의 눈동자가 명료하게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 할 분위기 아니라는 건 알지만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분에 넘치는 행운은 의심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게 여태 마음에 걸렸나 봐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떼어낸 하선우는 여의치 않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럽니다.”
굵은 침을 삼킨 그는 살을 덧붙여 말했다.
“다음 주에 컨설턴트 팀 파견 오기로 했어요. 안 비서님이 말씀 전해주셨습니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이라고 하는데 처음엔 믿기질 않아서….”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은 주로 국내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 및 정부기관을 상대로 하는 세계적 기업이었고, NnG로서는 경영진단을 받을 엄두가 안 나는 규모의 회사였다.
“오늘 모임에 초대받은 것도 그렇고… 다들 보통 분들 아니던데요.”
라운딩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틈틈이 휴대전화로 하선우는 악수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검색했었다. 우진헌, 유미란, 안영대. 그 외 많은 사람들은 예상했던 대로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우진헌은 판사였고 재정경제부 소속인 유미란은 부친이 저명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 한국은행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강주한이 지원하는 것들은 물질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빤히 하선우를 바라보던 강주한이 오히려 되물었다.
“왜일 것 같습니까.”
“제가 그런 사람들을 알아두면 좋을 테니까. …아니면 성공했으면 좋겠어서? 아니면 다른 걸 바라서일 수도 있겠죠.”
권력과 성공, 돈, 욕망이 증폭될수록 안전거리에서 멀어지는 느낌에 그는 어쩔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과포화 상태였다. 그래서 그저, 강주한의 의도를 알 것 같으면서도 확인받고픈 마음에 하선우는 물었다. 한마디로 그답지 않은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강주한은 말했다.
“맞아요. 나는 선우 씨가 잘되면 좋겠습니다.”
확인받은 느낌이 진하게 실린 눈동자가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입을 꾹 다문 하선우는 얼마 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런 말 하면 진심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음, 고지식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사업하는데 강주한 씨를 이용하는 기분이 들어서 좀 찝찝하거든요.”
감상에 빠진 기분이 들어 하선우는 자조했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일단은 사귀는 사이니까 선을 구분해야 할….”
“그렇게 따지면 나도 하선우 씨를 이용하는 겁니다.”
하선우의 말을 끊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선우 씨가 계속 부담을 갖기에 해주는 말인데 난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습니다.”
강주한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계속 궁금해할 것 같아 대답해주지만 선우 씨에게 지금껏 많은 걸 베푼 이유의 우선순위를 놓고 보자면 내 편의 때문에 그럽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지금 선택한 단어가 하선우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듯한 예감을 느꼈다.
“음, 단어 선택이 좀 잘못됐는데 뭐랄까. 선우 씨가 내 생활방식에 거부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수준 좀 맞췄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런 말은 너무 과격한 표현인데…….”
강주한은 인상을 쓰며 조금 웃었다.
“그런 걸 의도했던 것도 아니고.”
“그럼요?”
그는 의심과 불안, 어렴풋한 기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하선우의 젊은 얼굴을 보았다.
가끔씩은 은근히 드러나지 않은 강도로 자신을 암조직과 같은 병의 증상쯤으로 바라보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들은 냉담한 시선을 던지던 자들을 미소 짓게 만들 만큼 전염성이 강했다. 하물며 하선우는 아무것도 아닌, 불안하게 꿈틀거리며 형태를 잡아가는 잠재태에 불과했다.
그는 아직 아무것으로도 분하지 않은 하선우의 세계에 강주한이란 존재를 지배적으로 새겼으면 했다.
“물들이려고요.”
자신의 정도正道를 벗어난 추한 면을 상대방이 발견할 때, 그 얼굴에 균열이 일어나는 걸 지켜보는 것은 강주한, 그로서는 조금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었다.
“나라는 사람한테 물들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는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모든 게 다 설명이 된 것 같지만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었기에 하선우는 여전히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강주한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머리에 물음표 좀 그만 띄우면 안 될까요.”
하하, 마른 웃음을 흘린 그는 어딘가 나약하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하선우를 응시했다. 그는 얼마 뒤에 뜸 들여 말했다.
“나를 그냥 좀… 이대로 받아줘요.”
하선우는 강주한의 얼굴에서 피로를 발견했다. 그는 더는 입을 열고 싶지도 변명을 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찰나긴 했지만 그의 얼굴이 세상의 언어를 모두 끌어모아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삭막한 풍경 그 자체로 느껴졌다. 뭔가를 묻고 싶었던 것 같은데 길을 잃었다. 그런 의문은 더는 중요하지 않은 듯 느껴졌다.
힘주어 강주한을 바라보던 하선우는 그의 등 뒤에 손을 둘렀다. 미안해요. 지금껏 믿지 못했어서. 하선우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대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따듯한 숨결이 그에게서 쏟아졌다. 이제야말로 이런 복잡한 의심은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