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수괴水塊의 경계
하선우가 미묘하게 벽을 세우는 태도를 보일 때마다 이석은 가끔 섭섭함을 느끼곤 했다. 주로 임 부장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였다. 반년 만에 급격한 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엘텍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임 부장이 있었다. 임 부장과 하선우의 친분에 대해 물으면 하선우는 그로부터 일방적으로 연락이 왔다는 식의 추상적인 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이석은 내심 하선우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이제 자신은 더는 제법이네, 라는 말로 하선우를 귀여워하며 가르칠 군번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빠르게 성장하는 동업자에게 빌붙어가는 느낌이었다. 질투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석은 열등감을 다스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또 외모와 재능은 물론 기회까지 운 좋게 모두 다 타고났으면서도 그 모든 것에 고개를 갸우뚱한 태도를 보이는 상대를 질투하는 건 좀 김빠지는 짓이기도 했다.
“제출한 계획서를 보시면 알겠지만….”
김 부장은 하선우에게 시선을 맞춰 눈도장 찍으며 말했다. 하선우의 시선은 다소 김주안을 비켜나 있었다.
“컨설팅 대상에 채무감축도 포함할 계획이에요.”
“……”
“하 사장님?”
“예. 듣고 있어요.”
“이번 컨설팅을 회계법인이랑 공동으로 진행하는 건 어떨까요? 저는 필요하다고 보는데.”
“회계법인이요?”
“예.”
“투자받은 원금은 꼬박꼬박 갚아나가고 있잖아요.”
“은행권에 상환할 부채도 생각하셔야죠.”
“……회계법인이랑 컨설팅 공동으로 진행한다는 건의 찬성할게요.”
대화와는 무관한 의미 모를 표정을 짓는 것이 딴생각을 했던 게 분명했으나 다른 사람들도 있고, 상사를 다그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 부장의 가슴팍이 천천히 부풀었다. 결국 그녀는 하선우에게 뻗었던 의심을 별수 없이 거두었다. 김 부장의 눈초리를 흘긋 보며 하선우는 딴생각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순하게 회의에 집중하기로 했다. 조직개편 때문에 야근과 잔업에 지쳐 날카로워진 그녀를 위해서라도.
두 시간에 걸친 회의를 마친 그녀는 업무를 시작하기 전 커피를 머그에 담으려 탕비실에 들렀다. 회사 근처에 무너져가는 슈퍼 외에는 커피숍도 없던 터라 얼마 전 자동 커피머신을 들여놓았는데 중고가의 원두를 사용해 맛이 상당히 괜찮았다. 탕비실의 문을 열던 김주안은 문 사이에서 멈칫했다. 하선우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라면 드세요? 그거 드실 거면 근처 매운탕집 가시지. 오전에는 백반 팔던데.”
하선우는 컵라면의 뚜껑을 테두리에 맞춰 꼼꼼하게 접은 뒤 말했다.
“그냥 이거 먹어도 돼요.”
머그를 추출구에 가져다 대고 버튼을 누른 김주안은 생각했다. 돈을 아무리 벌면 뭐하나, 궁상맞게 아침부터 라면이나 먹는데. 추출구로부터 뜨거운 김과 함께 진한 커피가 쏟아져 나왔다. 머그를 들어 코끝으로 가져가 향기를 맡던 그녀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허공을 향해 정지해 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하선우에게로 향했다.
뭔가 미묘하게 변한 것 같은데.
김주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곁눈으로 하선우를 살폈다. 그녀는 조금 전의 생각을 정정했다. 고작 단무지를 종이컵에 옮겨 담고 있을 뿐이지만 그 모습은 궁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원래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귀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분명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하선우를 아래에서부터 훑어 올라갔다.
옷차림은 묘하게 맵시 있었다. 신발은 앞코에 무광의 가죽을 덧댄 세련된 디자인의 검은 윙팁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위로는 골반이 좁은 체형에 어울리는 11자 직선 형태의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허벅지는 붙는 반면 종아리는 보기 좋을 만큼 품에 여유가 있어 너무 말라 보이지도 않고 실제보다 다리가 더 길고 곧게 보였다. 게다가 바짓단이 발꿈치를 살짝 밑도는 부분에 재단된 완벽한 길이의 바지였다. 검은 비즈니스 재킷은 길이가 짧아 밑단이 허리선 바로 아래를 감싸는 형태의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마치 기성복이 아니라 몸에 맞춘 듯한 핏이었다.
소재도 독특했다. 혼방 소재인지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눈여겨보니 은은하게 광택이 돌았다. 암회색의 격자무늬 네로우 타이까지 매의 눈으로 스캔한 김주안은 입안에 머금었던 커피를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여직원들의 눈길이 하선우에게 한참 머물다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었다. 하선우와 그 주변의 변화는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패션잡지 구독하세요?”
멍하니 벽을 쳐다보며 면발이 익기를 기다리던 하선우가 젓가락 끄트머리를 입에 문 채로 돌아봤다. 젓가락을 문 얼굴이 어쩐지 말갛게 느껴졌다.
“음?”
“패션잡지 구독하시냐고요.”
나무젓가락을 입술에서 빼낸 그는 콧등을 조금 찌푸리며 웃었다.
“아니요. 안 보는데.”
젓가락을 반으로 가르며 하선우는 되물었다.
“왜요?”
“…….”
“왜요, 김 부장님.”
이상하다. 절대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심지어 피부까지 맨질맨질해 보였다. 하얀 건 원래 그랬다 쳐도 관리받는 사람처럼 잡티 하나 없이 탱탱했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는데요.”
“……아니에요.”
하선우는 싱겁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뜨거운 면을 후후 불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미심쩍은 감정을 채 숨기지 못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탕비실을 나섰다. 단무지를 씹으며 그는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감상했다.
너무 신경 쓰고 나왔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자면 하선우가 신경 쓴 옷차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신경 쓴 차림을 그대로 베껴 입은 것에 불과했다. 다만 그 옷을 챙겨준 사람이 조금 특별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 그는 강주한과 함께 머무는 고급 아파트에서 출근을 했다. 커다란 드레스룸의 옷장은 마법의 문 같아서, 하선우도 모르는 사이에 늘 신상이 채워지곤 했다. 강주한의 고용인이 고용주의 옷을 주문하면서 자신의 것도 함께 챙겨둔 것이었다. 그의 고용인은 강주한이 옷을 고르는 시간마저 아껴주려는 듯, 미리 스타일을 세팅해두었는데 하선우도 그 혜택을 받고 있었다. 강주한의 고용인은 그의 몸치수와 골격의 형태를 하선우 본인보다도 빠삭하게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입었던 옷들은 70, 80년대 첩보원을 연상시키는 딱딱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전문 스타일리스트가 완벽하게 구성해낸 스타일은 하선우에게 트렌디하고도 댄디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트렌디와 댄디라는, 패션 상술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는 여전히 낯간지러웠지만 옷을 신경 써 차려입는 행동 자체는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따듯하고 젊어 보이는 인상을 풍기도록 특별히 옷차림에 주의를 기울일 이유가 있었다. 그의 자녀들을 만나는 자리에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 * *
나의 역사를 표현해보아요.
하선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축이며 생각했다. 초등학교 1, 2학년짜리 꼬맹이들에게 역사라고 부를 만한 게 있나? 그는 팸플릿 속의 문구를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8, 9세 저학년 아동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멀리서 참관하는 중이었다. 각종 매체를 탐색하고 만들면서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미술 프로그램이었다. 단체 프로그램인 듯싶었지만 교육을 받는 아이는 겨우 둘뿐이었다. 그것도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그야말로 역사랄 것도 없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내가 저 나이에 뭘 하고 살았더라. 기억이 거의 없는 걸 보면 정말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교육에 극성인 어머니를 둔 탓에 영어 선생님과 하루에 15분씩 전화통화를 하고 덧셈뺄셈을 하는 학습지를 붙들고 있었지만 그는 유리문 너머의 아이들처럼 성인이 보기에도 난해한 현대미술을 감상하고 미술관 관장이 직접 그림 설명을 해주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40대 후반의 미술관 관장은 큐레이터를 대신해 직접 강주한의 아들딸을 교육하고 있었다. 처음 하선우가 이곳에 들렀을 때 그는 미술관 관장의 처지를 굴욕적으로 느꼈었지만, 관점을 바꿔보니 관장으로서는 별로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어린 재벌 후계자들과 인연을 맺고, 미술관 소유주에게 인정도 받으며 처세만 잘하면 미래까지 보장받을 수 있었다. 처세. 요즘처럼 그 단어가 그의 가슴에 와 닿는 때도 없었다. 하선우는 다시 팸플릿에 눈길을 주었다.
3차시 클래스: 나의 역사를 표현해보아요.
- 뉴욕의 현대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나의 아카이브를 만들기
- 적용 연령 : 8, 9세 아동
교육 내용: 여러 작가의 작품을 감상해 과거를 새롭게 보는 시각을 배우고 우리의 삶이 녹아든 시대와 공간을 비교하며 시대를 앞서 간 예술가들의 전위정신을 이해하도록 합니다.
하선우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도 난해하게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일찍부터 좋은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저 어린애들이 뭘 알까 싶었다. 게다가 용어도 생소했다. 아카이브를 데이터베이스와 관련된 IT용어로만 이해했던 그는 예술에서 사용하는 아카이브라는 개념이 전혀 와 닿지 않았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강주한에게 눈길을 돌렸다. 남자는 미술관에서 구매한 영문판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마크 로코스의 작품과 설명이 첨부된 화집이었다. 그 안에는 조금 전 두 사람이 뉴욕의 유명 갤러리에서 내한한 외국인 큐레이터와 함께 2층의 전시실을 돌며 실물로 감상한 그림들이 담겨 있었다.
초기작품은 그나마 회화로 느껴졌지만 작가의 후기작품은 그에게 그저 색을 입힌 한지를 붙여놓은 걸로 보였다. 복잡한 사고의 단순한 표현이라고 하지만 하선우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사고의 단순한 표현으로 보였다. 하선우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루해 죽을 것 같았다. 2주 전에 보았던 조선시대 후기 미술은 역사공부도 하는 기분이어서 좀 볼 만했는데 마크 로코스의 작품은 보고 있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그림을 강주한은 마치 소설이라도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반응한 그가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어디 갑니까? 하선우를 따라 움직이는 그의 눈이 마치 그렇게 묻는 듯했다.
“지루해서 주한 씨 옆에 앉으려고요.”
하선우가 어디 가나 촉을 세웠던 그가 약간 웃었다. 차양 아래의 그늘을 벗어나 햇볕이 든 강주한의 곁에 앉았다. 보고 있던 화보집에서 눈을 뗀 그가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지루합니까?”
하선우는 약간 풀이 죽은 얼굴로 강주한을 올려다봤다.
“예.”
빤히 하선우를 응시하던 강주한이 그럼 다음부터는 여기 오지 말까요? 물었다. 그 말엔 또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하선우는 말했다.
“사실 저 미술사 공부 시작했습니다.”
“미술사를요?”
“한 달 전부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책 사서 보는 정도예요. 시간 나면 해외 다큐멘터리도 다운받아 보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니까들. 나도 뭐 좀 보일까 싶어서요.”
“뭐가 좀 보입니까.”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강주한이 물었다. 하선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뇨.”
민망한 얼굴로 하선우는 덧붙여 말했다.
“그런 공식적인 용어 없나? 그림 감상할 줄 모르는 까막눈에 대한 단어. 글자 모르는 사람을 두고 문맹이라고 하는 것처럼… 화맹? 저 완전 화맹인 것 같아요.”
제가 말해놓고도 신소리 한다 싶어 소리 없이 피식 자조한 하선우는 말했다.
“그래서 화맹 좀 벗어나보려고요. 미술사 공부는 이번 주 내로 현대사까지 마칠 겁니다.”
“기특한데?”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강주한이 말했다. 잠시 하선우에게 머물러 있던 그의 눈길은 다시 화집을 향했다.
그는 화집에 집중한 채로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럴 때의 강주한은 그가 보고 있는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하선우는 약간 웃었다.
관람 시간을 지나 실외도, 실내도 모두 조용하기만 했다. 해가 길어 7시를 지났지만 야외 데크에는 여전히 볕이 들었다. 그는 햇볕에 데워진 따끈따끈한 벤치에 앉아 아름답게 조경된 정원과 석조물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강주한이 화집의 낱장을 넘길 때마다 팔꿈치가 상박에 스쳤다. 그 느낌을 의식하며 조각품을 쳐다보는데 그가 말했다.
“다음 주 목요일 저녁에 시간 비워둬요.”
“목요일 저녁은 왜….”
주로 주말에 만나곤 했던 두 사람이었기에 하선우는 설명이 필요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집에서 모임 있을 예정이거든요.”
“교향악단후원 모임은 2주 전에 했잖아요.”
“후원회 모임 아닙니다. 승소 기념으로 갖는 파티예요.”
책을 소리나게 덮은 그가 하선우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리며 웃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론 외숙부는 항소를 하겠지만요.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
하선우는 그와 소송에 관한 얘기를 따로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뉴스나 기사를 통해 진행과정을 챙겨보곤 했었다. 대외적으로는 정당한 소송을 통해 그의 어머니인 임용화가 친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게 된 것이니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시름 놓으셨네요. 그런데 파티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연미복 같은 걸 입습니까. …그런 데는 처음이라.”
“격식 있는 모임이 아니라 연미복 차림이면 오히려 튈 겁니다. 파티에 입고 갈 옷은 따로 준비해두라고 하죠.”
머릿속에서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꼭 옷을 사달라고 한 것 같아 하선우는 조금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교향악단후원회의 사람들과는 제법 친분이 쌓여 어색함이 없었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의 뜻을 따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강주한의 다른 가족들을 보게 될지도 모르고.
하선우는 유리벽 너머 그의 자녀들을 보았다. 그의 자녀들은 하선우를 ‘아버지가 만나는 사람’으로 알았다. 적어도 거래처 직원보다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는 표현이어서 하선우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주한 씨도 어릴 적에 배웠어요? 지금 자녀분들 배우는 아동미술 같은 거요.”
“또래 몇 명과 같이 배웠습니다. 사실 배웠다고는 하는데 기억은 하나도 안 나요.”
그는 벤치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며 하선우에게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기억도 못하는 거 왜 배우나 싶겠지.”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학을 배우기 위해서죠. 보는 안목을 키우려고.”
“그 말 나 좀 우쭐해도 되는 말인 것 같은데.”
강주한은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기대하는 하선우의 눈을 마주 보며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겠어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강주한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하선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웃는 눈빛을 보니 강주한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고집을 피우던 하선우는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오기로 버티다 결국 입을 열었다.
“주한 씨와 사귀는 걸 보면 저 좀 미학적으로 완벽한가 봐요.”
“그건 아닌데.”
여기도, 여기도 이상한데. 흠, 여긴 정말 못생겼고. 얼굴의 이곳저곳을 짚어주며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결점에도 이 정도 생겼으면 진짜 준수한 거죠.”
“아니라니까요.”
“저 괜찮게 생긴 거 맞아요. 저 엘텍전자 구매부서 방문할 때마다 여직원들한테 얼마나 환영받는데요.”
“직원교육을 잘했나 보죠.”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흠…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칩니까. 내 기준이 얼마나 높은데. 정말 본인이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하선우는 강주한을 억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반쯤 장난으로, 반쯤은 강주한으로부터 애정표현이 듣고 싶어 시작한 말이었다.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왜요. 더 이상 안 우길 겁니까.”
“이런 걸로 언쟁하기 싫어서 그러는 겁니다.”
서른두 살 먹은 아저씨가 이런 일로 화내는 것도 우습고 이미 충분히 나이답지 않게 행동한 것 같아 민망해지던 차였다. 울컥한 속을 들키기 싫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 하선우는 뒷목을 살살 긁적거렸다. 물끄러미 하선우를 지켜보던 강주한은 입술을 얇게 다문 채 웃었다. 끝까지 잘생겼다는 말은 안 해주는 강주한에게 화가 났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여희가 여자아이라 그런가. 확실히 잘생긴 사람에게 마음을 빨리 여네요.”
자리를 옮겨 아이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된 레스토랑에서 하선우는 앙금이 남아 일부러 들으란 듯 말했다.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강주한은 자신의 딸을 쳐다보았다.
“여희 눈 높습니다.”
“눈 높은 게 뭐예요?”
아이는 강주한과 하선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 말에 여희의 곁에 있던 강주한의 아들이 끼어들며 간섭을 했다.
“쉽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거야.”
강주한과 하선우의 눈길이 희원에게로 향했다.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한 아이는 단호한 얼굴로 쌍둥이 여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쉽게 좋아하면 눈이 낮은 거야?”
여희는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가를 짚었다가 저 발치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안 좋은 거네?”
“응. 안 좋은 거야.”
희원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첫인상에도 느꼈던 거였지만, 남자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성격이었다. 오빠의 말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여희가 심각한 눈으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저씨 좋은데요?”
눈이 낮기는 싫고, 아버지가 여희의 눈은 높다고 그랬고. 복잡한 마음이 잔뜩 묻어난 아이의 얼굴에 하선우는 말했다.
“우리 여러 번 봤잖아요. 그럼 아저씨 쉽게 좋아하는 거 아니지.”
눈을 둥글게 뜨고 온순한 표정을 만들어 보이자 아이는 어딘지 안심한 얼굴을 했다.
“또 아저씨는 잘생겼으니까 괜찮아요.”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아이도 헤헤거리며 마주 웃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희원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여희보다 눈 엄청 높은데.”
여동생이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리는 게 마음에는 안 들지만, 버릇없이 굴면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말은 못하고 딴지를 거는 게 하선우의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다. 고작 여섯 살일 뿐인 녀석이 성격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들은 척하고 싶었지만, 희원이 물어보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내기에 하는 수 없이 하선우는 입을 열었다.
“희원이는 어떤 사람이 제일 멋진데요.”
희원이 힘준 눈으로 하선우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키웠다.
“아저씨보다 우리 아버지가 훨씬 백배는 멋있어요.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그래. 아저씨는 못생긴 편이고 너희 아버지는 아주아주아주… 잘생기셨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희원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천진하게 웃어댔다. 아저씨가 자기 못생겼대. 못생긴 아저씨. 덩달아 희원에게 휩쓸려 여희까지 시시덕거렸다. 갑자기 웃음이 터진 남매는 별것도 아닌 얘기로 우스운 목소리로 변조까지 해가며 장난을 쳐댔다. 못생긴 아저씨가 낼 법한 이상한 목소리인가 보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하선우는 강주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아이들을 혼내야 하는지 고민스러운 한편 도통 하선우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상황이 우스운 것 같았다. 결국 강주한에게 한 소리 들은 아이가 사과를 하면서 마무리되었지만 하선우는 눈앞의 부자에게 농락당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가 이렇게 섬세하고 조심스러울 게 많은지. 나이는 어렸지만 고용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남자 애인이라니. 윤리적으로 거치적거리는 기분이라 그들을 만나는 자리가 하선우는 내심 부담스러웠다. 처음의 걱정에 비하면 이렇게 장난이라도 걸어주는 게 어딘가 싶어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들이 다 그렇죠.”
의기소침해진 희원을 보며 하선우는 말했다. 또래다운 구석은 적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나이가 어려 순진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게다가 이목구비가 강주한과 닮아 어릴 때의 그가 저랬을까 싶었다. 붙임성 있고 애교가 많은 여희보다도 왠지 모르게 시선이 한 번이라도 더 갔다.
아이는 강주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어린이 전용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든 채로 고기를 자그맣게 썰고 있었다. 힘준 손으로 꿋꿋하게 고기를 써느라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늘색 물감이 물들어 있는 질린 손끝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입을 열었다. 오늘의 미술 주제가 ‘나의 역사를 표현해보아요.’였다는 걸 생각해낸 그는 여섯 살의 인생이 궁금해져 물어보았다.
“오늘 미술시간에 재미있었어요?”
“예.”
“저는요?”
“응?”
“오빠 말구 저도 물어봐주세요.”
“재미있었어요?”
“네. 재미있었어요.”
“뭐했는데요?”
“살면서 제일 좋았던 일이랑 사진들을 한 개 두 개 스케치북에 그렸어요. 저는요, 봄에 고모랑 디즈니랜드 다녀온 거 그렸어요. 오빠는 거기서 미키마우스랑 껴안은 사진 안 찍어줘서 되게 화내고 되게 울었어요. 고모가 울보라고 놀리니까… 그리고요…….”
관심을 갖고 들어주는 게 즐거운 듯 여희는 계속해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오빠가 울었던 일부터 사소한 것까지 일러바친 그녀의 말이 끝난 뒤 하선우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둘이 성격이 완전 반대네요.”
“희원이가 여희보다 예민한 편이죠.”
“주한 씨도 어렸을 때 잘 울었어요?”
강주한은 피식 웃었다.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기억하는 한 어릴 때부터 난 늘 이런 성격이었습니다.”
내리깐 시선을 접시 언저리에 둔 강주한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던, 아무런 감상이 섞이지 않았던 그의 무덤덤한 말을 기억해냈다.
“주한 씨 자신이 느끼는 본인의 성격은 어떤 건데요.”
고기를 느리게 썰며 강주한은 하선우의 가슴팍 언저리에 시선을 두었다가 곧바로 접시로 눈길을 거두었다. 강주한과 몇 달 동안 연애를 하면서 알게 된 그의 습관이었다. 본심을 숨길지 말지를 고민할 때 언뜻 드러나는 찰나의 행동이었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좋게 포장되지.”
짧게 한숨을 쉰 그는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허물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딱히 이렇다 말할 만한 특이한 면은 없는 것 같은데. 음,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민망하다는 듯 씩 웃어 보인 그가 살을 붙여 말했다.
“침착한 것 같아요.”
“하긴, 매사에 계획적이시잖아요.”
여희에게 시선을 둔 그는 아이의 테이블 위로 뚝뚝 흘러내린 소스를 거슬린다는 듯 쳐다보았다. 쉽게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로 그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계획적이라고 느꼈습니까.”
하선우는 대답 대신 웃는 얼굴로 입안의 스테이크를 질겅거렸다. 잘게 부서진 고깃덩어리를 목구멍으로 밀어 넘긴 그는 물었다.
“또 다른 건요?”
“글쎄, 소유욕도 강한 편인 듯하고. 이런 걸 내 입으로 말하려니 고문인데.”
그가 하선우를 향해 자세를 틀었다. 이제 이 주제에 흥미가 좀 생긴 듯했다.
“선우 씨야말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선우 씨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입니까.”
강주한의 곁에 오래 머무르다 보니 하선우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늘어났다. 본래의 하선우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신경 쓰이는 대상이 생기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사소한 습관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포획해두는 면이 있었다. 그의 말처럼 강주한은 침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래 지켜보며 느끼게 된 건 그의 침착함이 앞뒤 다른 가면처럼 보일 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소유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과 달리 연애를 하는 동안 하선우는 강주한이 자신에게 집착하는, 그런 달콤한 느낌을 받아본 적 없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한 한 달간은 느끼지 못했지만 연애를 시작한 이후 두 달째 접어들면서 하선우는 어렴풋이 불안한 울림의 정체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기분이 착각인가, 아니면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했다. 그건 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신발 안의 작은 알갱이처럼 신경 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의식하게 되는 그런 거슬림이었다.
“아뇨. 뭐, 제가 느꼈던 게 주한 씨가 말한 것 그대로예요.”
어깨를 으쓱인 하선우는 뺨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뭔가를 숨긴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눈이 한동안 하선우에게 머물렀다. 그러나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고용인에게 맡기고 그는 직접 차를 운전해 하선우를 서울역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선우는 역에서 기차를 타고 곧바로 울산으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하선우를 향해 몸을 튼 그가 허리를 잔뜩 숙였다. 차 안의 어둠이 강주한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그림자는 하선우의 얼굴까지도 뒤덮었다.
“울산 잘 다녀와요.”
다녀오라는 말을 한 뒤에도 그는 등 뒤에 두른 팔을 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한동안 쳐다보던 하선우는 그의 등 뒤로 손을 둘렀다. 그의 뒷목을 쓸어 넘기고 입술을 겹쳤다. 숨결이 간지러울까 숨을 참고 혀를 섞었다. 멈춘 호흡과 질척이는 키스 때문에 천천히 열이 올랐다.
긴 입맞춤 뒤에 강주한은 하선우의 아랫입술을 가만가만 핥아댔다. 혀의 감촉이 매끄러웠다. 다정한 농담 같은 애무였다.
“요즘이 아무리 자기 피알 세대라지만.”
하선우의 아랫입술을 치아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떼어낸 강주한이 말을 이었다.
“오늘 하선우 씨가 잘생겼다는 걸 너무 세뇌하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좀 괜찮은 편이란 걸 주한 씨는 주입식으로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거든요.”
“왜요.”
강주한은 무표정을 유지하는 하선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색이 더 짙어지는 귓불과 뺨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남자 중에서 내가 제일 낫다고 생각하게 해야 승산이 있죠.”
“승산?”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게 있어요.”
하선우는 안전벨트의 잠금을 눌렀다.
승산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유의 이야기들을 제 입으로 뱉고 있자니 하선우는 조금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꼭 자신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순진한 연애 초짜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며 매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구태여 확신을 달라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벨트를 풀고 가방을 챙기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강주한이 하선우의 손목을 잡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만 나는 장님이었어도 선우 씨와 사귀었을걸요.”
강주한이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미학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도 안 믿긴다는 듯 하선우는 작게 입바람을 냈지만 그의 말에 아무런 딴죽을 걸지 않았다. 강주한은 사귀는 동안 아주 드물게 애정표현을 하는 편이었고 하선우는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달콤한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이런 독려까지 듣게 되다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쳐진 기분을 드러낸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하선우는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강주한을 껴안았다. 등을 손바닥으로 더듬으며 어깨에 턱을 댔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며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강주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한참을 정지해있던 그는 몸을 떼어내며 말했다.
“아무튼 가보겠습니다. 기차 시간이 다 돼서.”
힘이 풀어지는 강주한의 손아귀에서 슬그머니 손을 빼낸 하선우는 문을 열었다. 도착하면 전화하겠다는 의미로 새끼손가락과 엄지만을 펴 귀에 가져다 댔다. 강주한이 도로를 빠져나갈 때까지 길 위에 서 있던 그는 뒤돌아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울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한 그는 오래도록 창밖의 어두운 풍경을 응시했다.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듯 심각한 표정을 지은 그는 가끔씩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 있기를 한참, 그는 옆에 앉은 사람이 흘깃거릴 만큼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판기에서 뽑았던 캔 음료를 뜯은 그는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난주에 비해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초여름이 시작되었고 머지않아 올해의 절반이 지나갈 터였다. 강주한과 만난 지도 어느덧 석 달째가 되었음을 그는 새삼 깨달았다.
손안의 모래가 빠져나가듯 감정이 가슴 안에서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빈 공간만큼 허무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강주한과의 만남 뒤에 종종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 하선우는 자신의 연애방법이 잘못된 것일까 그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차 거슬리는 감정의 이유를 깨달아갔다. 그건 하선우의 연애방식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바로 연인의 곁에 있는 사람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될 때 겪는 감정소모였다.
그에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 아님을 깨달을 때, 관계의 무게가 일방적으로 기울어 있을 때 느끼는 허탈함 같은 것이었다. 그의 수많은 연애대상 중에서 성별 하나 바뀐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늘 언저리에 있었다.
그래, 나라고 뭐 특별한 게 있겠어. 강주한과의 연애는 그런 생각을 품게 만드는 쓴 연애였다.
하선우는 알 것 같았다. 그의 연애가 보통 어떻게 끝이 났을지. 강주한의 관심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그가 본심을 숨긴 채 사랑을 의무로 대하기 시작하면 애정에 굶주렸던 여자들은 너덜거리는 자존심을 부여잡고 나가 떨어졌거나 상처가 곪는 것을 참으며 오기를 부렸을 것이다. 그중의 후자는 조금 더 오래 버텼을 것이다. 강주한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그저 본능적으로 타인의 불안을 파고드는 부류의 인간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심장 같은 불안을 손바닥 안에 쥐고 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희망을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장님이었어도 선우 씨와 사귀었을걸요.’
그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하선우는 창틀에 팔꿈치를 얹은 자세로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연애의 고단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입술을 얇게 다물었다. 그의 고집스러운 얼굴은 오래도록 어둠이 눌어붙은 도시의 풍경을 향해 있었다.
* * *
고속 더비 기계가 알루미늄판을 찍어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양계장에서 닭이 모이를 쪼듯 프레스가 정신없이 합금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그룹장과 함께 하선우는 공장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본사의 기술자들이 금형을 설계하면 울산의 공장에서 가공과 조립, 제조를 마쳐 검수를 끝내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본사가 있는 일산에만 머물 수는 없었기에 하선우는 업무조정을 위해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울산에 내려오곤 했다. 이번 방문은 정기 검토에 상반기의 업무성과 점검이 더해져 평상시보다도 오래 울산에서 지내고 있었다.
가공과 조립, 제조에 필요한 설비의 추가구입 여부를 보고받으며 하선우는 검수실로 자리를 옮겼다.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 검수실에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불량제품들을 검수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룹장 곁에서 조립 불량과 손상된 부품들을 살펴보던 하선우는 말했다.
“가동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렇다 쳐도 불량률이 너무 높은데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안 이랬잖아요.”
“그기…… 아무래도… 신입이 많다 보니까는.”
“신입직원은 석 달 전에 뽑았잖습니까.”
그룹장이 난감한 얼굴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단순작업 위주로 재설계해야겠네요. 본사에서 사람 충원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머뭇거리며 그룹장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사장님.”
“예. 말씀하세요.”
“그라믄 공장장님은 복귀할 가능성 없으시지요?”
생산품 검사보고서를 확인하는 하선우를 고민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룹장이 말했다.
3주 전, 울산 공장이 가동되면서부터 함께했던 공장장이 갑작스럽게 퇴사 신청을 했다. 이래저래 짐작 가는 이유야 많았지만, 공장장이 밝힌 바로는 단순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경쟁업체인 산원테크로 옮겨 간 것 같아 하선우와 이석은 울산 공장의 직원들에게 체면이 서질 않았다.
일산 공장에서도 기술자 몇이 퇴사하면서 경력직원을 모집하는 중인 데다가, 공장장의 부재와 불량률이 늘어나는 것이 무관하지 않아 고민이 많던 차였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니 사람이 말썽이었다. 산 넘어 산을 넘는 기분에 한숨을 거듭 쉬던 하선우는 표정을 바꾸어 애써 밝은 얼굴을 했다.
“사람을 늘리든, 시스템을 고치든 곧 조치를 할게요. 임시로 공장장 맡으시는 게 힘드시겠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예.”
늘어나는 불량률은 그에게도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준비도 없이 공장장의 역할까지 떠안게 된 그룹장 역시 애써 웃음을 지었다.
모처럼 공장의 가동을 이르게 마치고 조장에서부터 그룹장까지, 울산 공장의 운영을 맡은 직원들과 회식을 했다. 밤늦도록 계속된 술자리가 파한 건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3차를 횟집에서 달린 뒤 하선우 역시 얼근하게 술기운이 올라 있었다.
잠기운도 슬슬 몰려오고 있었지만 파트장과 그룹장은 여전히 술자리를 이어가길 원했다. 괜히 대리를 불러 집에 가는 대신 그들은 공장 부근의 기숙사에서 자겠다고 했다. 그 말인즉, 4차까지 달리겠다는 얘기였다.
불콰하게 취한 직원들을 택시 태워 보내고 돌아온 파트장은 기숙사 근처 편의점 테이블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하선우를 발견했다. 어깨를 흔들자 죽는 소리를 내며 하선우가 허리를 세웠다.
“그룹잔님이랑 파트잔니믄 왜… 이렇게 쌩쌩하세요.”
“사장님이야말로 젊은 사람이 와 그리 맥을 못 추는데요.”
“이사님은 술 잘하드만, 사장님은 술 몬하네?”
“어우… 제가 오늘 얼마나 마션는데여. 다들 말수리라… 티도 안 나서… 그러치.”
혀를 무언가로 칭칭 동여맨 것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꾸만 발음이 새어 나갔다. 더부룩한 배를 어루만지며 하선우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파트장이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캔을 테이블에 하나둘씩 올려놓는 것을 보며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다들 마시고 죽자는 기세여서 말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사님이 울산 가따 올… 때마다 살쪄 와서 왜 그런가 해떠니 으흐흐…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하선우는 파트장이 건네는 캔을 받아 들었다. 대용량 맥주캔이었다.
“하…… 이건 뭐예요. 진짜. 저 마시다… 주거요.”
푸르르르, 입방귀를 뀌며 하선우는 꼬이는 발음을 풀려 애를 썼다. 그런 하선우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그룹장이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죽기는. 사장님이 젤루 안 마시드만, 뭘.”
“아니에요!”
“허허.”
“저 엄청 마셔써요. 내가 젤루 마니 마션는데!”
“맞나. 니 사장님 마시는 거 봤나. 맞나.”
“저 쏘주 세 병! 세 병 마셔꺼든요?”
억울해서 바락 소리치자 파트장과 그룹장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평소 울산 공장에 짧으면 하루, 길어야 이틀 머물다 가는 하선우였다. 게다가 묘하게 낯을 가리는 인상에 울산의 직원들과는 공적으로만 관계해오던 차였다. 하지만 벌써 나흘째 머물다 보니 서로가 전보다 친근해진 상태였다.
외모와 옷맵시가 지나치게 깔끔해 서울 샌님이라고 생각했던 하선우였지만, 알고 지내다 보니 어딘가 막냇동생 같은 느낌이 있었다. 실제로도 막내라는 얘기를 듣고 보니 묘하게 챙겨주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새우깡 하나를 두고 세 사람은 부지런히 맥주캔을 비워 나갔다. 하선우는 두 번째로 딴 맥주를 야금야금 마셔댔다. 취기와 뒤섞이는 졸음을 간신히 버티는 하선우를 두고 파트장과 그룹장은 계속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하선우가 깜빡 졸음에 빠졌다 깨어나는 동안 대화의 주제는 확확 바뀌어 있었다.
…일이가. 다 털리고 흩어졌지 않았나. 금마가 맘고생 심했제. 그라도 여는 거래처가 엘텍이니까 쪼매 상황이 낫지 않겠나. 거의 계열사 아이가. 엘텍 계열사.
아 쫌. 아무리 그라도 하청은 하청이지, 계열사는 무슨 노무 계열사? 존심 세우지 마이소.
하긴, 여라고 뭐 다르겠나.
하선우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무의식을 뒤흔들어놓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 꿈이라도 꿨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편의점 앞 테이블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리다 파트장과 눈이 마주쳤다. 민망한 얼굴로 파트장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제 말 들은교.”
“예?”
눈을 크게 뜬 하선우가 되묻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파트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입니다.”
“뭐가 아니에요?”
“몬 들었음 됐심다. 별말 아니에요.”
눈을 뜬 채로 빤히 파트장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조금 전 스치듯이 들었던 그들의 대화를 기억해냈다. 감각이 둔해진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주물거리며 하선우는 웃었다.
“아… 마자요. 하청업체죠.”
“그게 나쁜 의미가 아이라…….”
“알져어. 사실을 말하셨을 뿌닌데요 머. 그래도 조만간 우리도 신제품 개발해서 내노을 건데. 하도급만 받는 업체는 아니라고요.”
새우깡을 집어 아그작 씹으며 하선우는 웃었다.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 켜며 그는 하품을 했다.
“그런데 흠… 뭔 일 있써써요? 누가 마음고생이 심해요?”
잠결에 어렴풋이 들었던 대화에 끼어들려 하선우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가 흥미를 보이자 그룹장이 묘한 얼굴을 했다. 사장에게 말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낌새였다.
“곤란한 얘기면 흐… 하지 마요.”
한발 물러서자 그가 빤히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실은 내 여 공장 사장을 알고 지내는 사이였거든. 전에 여 공장 주인이었던 사장이요.”
그룹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하선우는 무심코 머릿속에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갑자기 술이 확 깼다. 쥐고 있던 맥주캔을 우그러트려 맥주가 무릎 위로 흘렀지만 하선우는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전 사장이요?”
꽉 눌린 목소리로 하선우는 물었다. 금방이라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것 같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룹장이 눈만 깜빡였다.
“예. 전 사장이요. 여도 금형 제작하고 사출하는 공장이었잖아요. 근데 와요.”
“도일 형을 아세요?”
“…알죠. 금마가 여기 사장 아니었는교. 성일금형. 문도일이.”
그 자세 그대로 하선우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눈앞에 피가 몰리는 것처럼 갑자기 암암해졌다.
“와요, 도일이랑 아는 사인교.”
“…예.”
이번에는 그룹장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에 그는 입을 열었다.
“도일이는 우찌 아는데요.”
“대학 선배였습니다.”
그룹장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선배의 회사를 거의 헐값에 입찰한 후배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민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
“맞다. 선일대학교 나오셨지요.”
“예.”
“도일이도 그 대학 나왔고. 맞다. 내 정신이 이런다.”
“잘 아시나 봐요.”
“내 울산 토박이잖아요. 금마가 같은 동네 살았으니 도일이를 당연히 알지. 대학 갔을 때 현수막 걸렸거든, 온 천지에.”
“예.”
“머… 딴 넘한테 넘기는 것보단 후배한테 넘기니 잘됐지 뭐 갸도.”
그룹장은 찔끔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아, 사장님은 넘이 아닙니다.”
“요즘도 연락하세요?”
“머. 인제는 연락 끊겨서 잘 모르겠지마는 힘들게 지낸다 카데. 참 성실하고 괘안은 놈인데. 맞나 안 맞나.”
“갸 사는 동네가 어데고? 울산 겁나 넓은데 울산 살면 다 아는 거가?”
“아, 성일금형 사장이라잖아.”
“울산 빽가리에 쌔빠진 게 금형회산데 우찌 아는교. 형님 난 문도일인지 뭔지 잘 모른다 아인입니꺼.”
파트장은 턱을 긁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파트장을 곁눈질하던 그룹장이 헛기침을 했다. 점잖은 얼굴로 그는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요즘은 서울서 지낸다 카드만요.”
“서울에서요?”
“예.”
“어디서 지내는지 아세요?”
“와요, 제수 씨 통해서 연락해보라칼까요? 제수씨 어무이랑 내 어무이랑 고등학교 동문 아인교. 몇 다리 걸치믄 닿을 것도 같구만.”
“그래 주실래요?”
“근데 만다고 연락할라고 합니꺼. 연락해서 우짤라고요.”
“예?”
“피차 면구스러울 낀데.”
“그래도 만나보는 게…….”
“갸가 잘나가믄 모를까. 금마 성격에 보기 싫다 할낀데. 뭐가 반갑겠습니까.”
하선우는 이번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룹장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도리가 아닌 것도 같았다. 결국 그는 그룹장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되겠네. 우리 술 한잔해야 쓰겄다.”
그룹장과 사장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파트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술을 더 사오겠다고 말하는 그를 하선우는 말리지 않았다. 손바닥을 적신 우그러진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룹장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냈다.
“피울랍니까.”
담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하선우는 결국 담배를 받아 들었다. 불을 붙인 담배를 한 모금 빤 하선우는 연기를 어깨 너머로 뱉어냈다.
“친했는 갑네요.”
하선우는 적절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뇨. 저 혼자 따르던 선배였어요.”
불식간에 그의 입에서 쏟아진 말이었지만 그것은 정확한 진실이었다. 그들은 사적인 감정을 털어놓을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선우는 기실 그와 다시 재회해 나눌 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변한 하선우의 모습에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문도일을 짝사랑했기에 하선우 혼자 그를 가깝게 느꼈을 뿐이지 실제로 그들의 거리가 가까운 적이 없었다.
뭘 어떻게 해볼 여지도 없던, 착각할 기회도 주지 않던 도일의 멋없던 말투가 떠올랐다. 우그러진 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며 하선우는 쓰게 웃었다. 문도일이란 이름이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제게 그늘을 드리웠나 싶어 미심쩍은 제 감정을 더듬어봤다. 하선우는 다시 풀썩 웃었다. 그 이름을 하도 오랜만에 들어 흥분했던 모양이다. 다시 만나면 오히려 껄끄러울 그가 하선우는 그렇게 그립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 * *
수많은 사람의 인생과 교차된 인물일수록 그 자체로 연대기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면에서 강주한 역시 한 시대의 연대기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셀 수 없는 삶과 거미줄처럼 얽혀 있기에 그는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킬 수도, 멀어질 수도 없었다. 그가 스스로 거머쥔 것들을 내려놓기 전까지는.
그는 지금 막 외사촌의 삶 속으로 집어넣어 휘둘렀던 손을 빼낸 참이었다. 축축하고 약한 내장의 조직을 휘감았던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다. 그의 외사촌 역시 수많은 삶과 교차된 인생을 사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강주한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강한 자는 번성하고 약한 자는 쇠멸하는 세상에서 그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소송의 이유를 두고 혈육 간의 증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이 서로를 증오하게 된 까닭을 함부로 추정하고 싶어 하지만 강주한에게 증오와 같은 극적인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진실은 단순했다. 그는 그의 사촌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는 그저 그것이 조금 그릇된 방식이라 해도 자신의 회사를 성장시키고 싶었다. 그에게는 이윤을 좇아 움직이는 본능이 조금 남다른 면이 있었고, 증오를 받는 일은 두렵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태를 유지하고 머무르길 원하지만, 기업에게 성장 없는 유지의 상태는 도태를 의미할 뿐이었다. 그는 도태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이제 그만 재혼해야지.”
강주한의 얼굴에서 죽은 아내의 그늘이 걷혔다고 생각한 남자가 말했다. 그는 안신전자와 안신EM의 외부 주주 중 한 명이었다.
“재혼은 제겐 이른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아직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모호한 뉘앙스의 말이었고 하선우는 테이블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야외를 대낮처럼 밝힌 강렬한 조명을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눈이 멀 것 같았다.
“그래도 아이들 생각하면 어머니가 있는 게 나을 텐데. 아이들이 한참 어리잖아요.”
몸에 밀착되어 라인을 드러내면서도 우아한 셔링이 달린 랩원피스를 입은 미녀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외부 주주의 첫째 딸이었다.
“그건 그래. 좀 뻔한 말이긴 해도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에겐 어머니가 필요하지.”
옆에서 살을 덧붙인 이는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의 유력후보 진영에 속한, 전 장관 출신의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소개해주고 그런 말이나 해야지. 어때요, 내가 괜찮은 아가씨로 자리 좀 마련해볼까?”
“글쎄요. 뭐…….”
말을 흐리며 강주한은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었다. 쑥스러움에 말끝을 흐린다고 생각한 전 장관이 구체적으로 계획을 잡아보겠다는 말을 했다. 사람들 틈에 둘러싸인 강주한은 그저 얇은 샴페인 잔의 목을 쥐고 입술을 다문 채 웃어 보였다.
“능글맞죠?”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건지 유미란이 하선우의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속삭임에 하선우는 움찔했다.
“어머, 뭐야. 선우 씨 너무 놀라니까 내가 다 무안해지네.”
여전히 목소리를 죽여 말하며 유미란은 살짝 눈을 흘겼다. 속삭임 때문에 간지러웠던 귀를 만지작거리며 하선우는 물었다.
“지금 오셨나 봐요.”
“아뇨. 30분 전에 도착했어요. 사람들이랑 인사 나누느라 정신없었다니까요.”
그 역시도 인사를 질릴 만큼 했던 차였다. 하선우는 공감의 미소를 진하게 지어 보였다.
“진헌 씨는 안 보이네요.”
그녀의 곁에 늘 붙어 있는 남편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며 묻자 유미란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하긴.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단순히 지인들을 초대해 친목을 마련하는 자리지만 실상은 소송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판사인 그녀의 남편이 올 파티가 아니었다.
“난 이런 자리 불편해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왔다는 의미로 아랫입술을 비쭉 내밀며 유미란은 하선우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녀는 조명 근처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하선우도 들고 있던 샴페인을 바꾸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강주한을 둘러싼 사람들 틈에서 떨어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샴페인을 축냈다.
“시무룩해 보여요.”
“제가요?”
잔을 바꿔 들며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 보셨어요.”
“아닌데? 이런 자리 별로 오고 싶지 않다고 얼굴에 쓰여 있는데요? 우리 남편이 이런 데 끌려올 때마다 짓는 표정이랑 완전 똑같은데요, 뭘.”
하선우는 모임에 갈 때마다 마주치던 떨떠름한 표정의 우진헌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 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인다는 듯이 하선우를 쳐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볼수록 느끼는 건데 하선우 씨는 야망에 불타는 타입이 아니야. 이런 데 오는 거 피곤하죠?”
“아뇨. 재미있습니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남은 손으로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을 아끼는 하선우가 재미없어 그녀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주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각자의 본심이 다른 장년의 사내들과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제 또래의 여자들 틈에는 섞이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하선우의 곁에 남기로 했다.
“내 생각이지만 주한 오빠는 전혀 서유임 씨가 그립지 않을 거예요. 재혼이 이르다는 말은 괜히 하는 말일걸요?”
자그마한 까나페의 끄트머리를 깨작거리며 그녀는 물었다.
“곁에 있으면서 느끼는 거 없어요?”
“뭐가요.”
“주한 오빠 보기보다 진짜 능글맞죠? 예전부터 한결같았어요.”
흘긋 자신을 돌아보는 하선우의 시선을 느끼며 유미란은 말했다.
“흐음… 아닌가? 저런 건 능글맞다는 표현이 안 어울리나? 속을 알 수 없다고 해야 하는 건가.”
흐흠, 웃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욕은 안 먹어요.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만요. 원하는 걸 다 해주니까 쉽게 반발할 수도 없거든요. 그게 선물이든 애정표현이든 너그럽게 구니 진심이 아닌 걸 알면서도 여자들은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죠.”
유미란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하선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얘기를 왜 내게 하느냐고 묻는 눈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했나 싶어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굴렸다. 하선우의 여전한 응시에 유미란은 속이 조금 불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난 우리 남편이 그래서 좋다니까. 숨길 줄 모르고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것도 그렇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고요.”
그래도 하선우에게서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자 유미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맞아요. 나도 사실 어렸을 땐 주한 씨 살짝 좋아했는데 얼른 정신 차렸어요.”
지레 찔려 고백해놓고 나서도 찝찝함이 남아 여자는 살을 붙여 말했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예요. 고등학교 때.”
“저 여태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민망한 기색을 감추려 허공을 쏘아보던 여자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튼 하선우 씨는 자기가 잘난 거 알고 있다고 해도 주한 씨한테 저런 거 배우지 말라고요.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한테나 잘해요.”
“그렇게 보입니까?”
“뭐가요.”
“제가 사람 마음 가지고 놀 것처럼 보이냐고요.”
유미란의 구겨지는 얼굴을 보며 하선우는 싱거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제가 좀 잘났죠.”
고개까지 끄덕이며 결론을 내린 하선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유미란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부담스럽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섰다. 대답을 듣겠다는 듯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의 손목을 따듯한 무언가가 감아쥐었다.
“둘이 뭐해?”
힘이 실린 손아귀가 하선우를 뒤로 천천히 잡아끌었다. 손목을 잡았던 손을 떼 하선우의 어깨에 얹은 강주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사이는 무슨 사이예요.”
유미란은 엄한 얼굴로 정색했다.
“그래? 선남선녀가 이러고 있으니 눈에 띄잖아.”
나지막이 목을 울려 웃은 그는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동의를 구하듯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하선우는 그의 다른 본심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게이인 자신이 해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선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제가 유부녀인 거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 주한 씨야말로 너무 받아주는 거 아니에요?”
“뭘.”
“세한일보 첫째 딸이랑 김 사장님 딸이요.”
“단지 인사만 하는 사이일 뿐인데 의미 부여하지 마라.”
엄한 말투와는 달리 입에 걸린 부드러운 웃음을 풀지 않은 채로 강주한은 말했다. 하선우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반쯤 남은 샴페인을 모조리 삼킨 그는 곁을 지나는 직원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이 장관님이 네 남편 안부 궁금해하시더라.”
“진헌 씨 안부를 왜 오빠한테 물어요.”
“몰라. 네가 안 온 줄 알고 그랬나 보지.”
“뭐 부탁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럼 나 보기 불편한데.”
“부탁이야 너만 듣고 진헌이한테 안 전해주면 되잖아. 그래도 왔으니 인사드리러 가봐.”
유미란은 한숨을 쉬었다. 인파 속을 헤매던 그녀의 시선이 체격이 자그마한 중년의 사내를 찾아냈다. 손바닥에 들러붙은 과자부스러기를 손을 비벼 털어낸 그녀는 침울한 얼굴로 야외 정원의 중앙으로 사라졌다.
“미란이가 유명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뭐가요.”
“금세 사랑에 빠지기로.”
“어차피 전 ……게이잖아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괜한 오해를 했나 보네. 내가 볼 때는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하선우는 조금 전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던 기억을 떠올렸다. 물러서던 그녀와 벌어진 거리만큼 다시 다가서던 자신도. 그래서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강주한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는 조금 전 그가 속해 있던 무리를 돌아보았다. 분명한 의도를 갖고 접근했던 여자들은 강주한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서 흩어지고 없었다.
“미란 씨와는 주한 씨 험담하고 있었어요.”
“험담? 무슨 험담.”
“주한 씨가 여자 여럿 울렸다고요.”
“미란이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하선우는 침을 천천히 꿀꺽 삼켰다. 의도한 느낌이 나기는커녕 고자질을 한 기분이 들어 그는 덧붙여 말했다.
“예. 인기 많았다고 하던데요.”
“그랬다고 한들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나간 추억이고 이름조차 기억 안 나는데.”
그는 덤덤하게 말하며 어깨에 올려두었던 손으로 하선우의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가닥가닥 쓸어 올려주었다.
“지금은 아시다시피 연애 중이잖아요.”
값을 가늠하기도 어려운 슈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말끔하게 넘긴 그는 오늘 이곳의 누구보다도 번듯한 모습이었다. 강주한을 반년 가까이 지켜보는 동안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이렇게 준수하게 꾸며진 모습에는 하선우는 아직 내성이 없었다. 괜히 가슴이 바짝 조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집무실로 올라가 있겠습니까. 조금 있다가 뒤따라갈게요.”
또 누군가가 강주한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하선우는 그의 곁을 벗어났다. 샴페인을 거듭 마시다 보니 정신이 어렴풋할 정도로 취기가 올라 있었다.
정원을 벗어난 그는 출입구의 문을 열었다. 인적이 드물게 있는 복도와 홀을 지난 그는 강주한의 개인집무실이 있는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벌써 몇 번째 방문이지만 이곳에 발을 들일 때마다 새삼스럽게 감탄이 나왔다. 화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화폭을 벽에 입혀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공중으로 띄워진 별채 건물의 주변부에는 바람에 꺾인 억새풀이 요동하고 있었다. 여느 때완 달리 그의 조용한 공간이 어수선하게 들끓고 있었다. 밤은 깊어갔지만 사람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기만 했다.
“강상원 의원, 윤영학 제주 도지사 정책자문보좌관…, 김만덕 보건복지부 규제개혁법무…….”
틈틈이 휴대전화에 적어두었던 이름들이었다. 직책과 이름, 얼굴을 잊지 않으려 한 번씩 비교하며 곱씹어보던 그는 무거운 숨을 쉬었다. 억지로 암기하면 기억할 수 있겠지만 하등 쓸모없는 수학공식을 외우는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그의 인생에 제주 도지사 정책자문보좌관과 보건복지부의 규제개혁법무팀 인물이 끼어들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창가에 스툴을 끌고 가 앉은 그는 뜨뜻이 열 오른 이마를 차가운 유리벽에 기댔다. 그는 이미 약간 취했고 잠시 후 돌아오겠다던 강주한의 예고에 취기를 핑계로 성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게다가 오늘 뒤까지 비우고 온 참이었기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부유한 이들만을 체에 걸러 담아놓은 듯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바깥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서는 외부가 보이는 유리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강주한과 섹스를 하게 될 경우 눈을 어디다 두는 게 좋을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원에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느낄 배덕감을 상상하던 그는 갑자기 귓가에 닿는 끈적한 감촉에 몸을 굳혔다. 곧 얼굴을 푹 숙이며 웃었다. 하선우의 반응에 멈칫했던 그는 조금 더 과감하게 귓바퀴를 따라 혀끝을 움직거렸다.
윽, 목을 울리며 아랫입술을 깨문 하선우는 근질근질한 감촉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고개를 들어 창가를 빳빳하게 힘주어 바라보았다. 환하게 밝힌 뜰의 풍경이 보였다.
“밖에 사람들 있는데 이러는 거 좀 이상해요.”
하선우의 말에 웃음기가 가득한 숨소리가 귓바퀴로 따듯하게 퍼져나갔다.
손가락으로 유리벽을 괜히 만지작거리던 하선우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있는 풍경을 손톱 끝으로 긁적거렸다. 강주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귓불을 깨무는 애무가 여느 때보다 이상하리만치 야살스러웠다.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초점을 천천히 옮겼다. 유리벽에 이중 노출된 카메라처럼 정원의 풍경과 하선우와 등 뒤의 남자, 두 개의 상이 맺혔다. 등 뒤의 얼굴은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왜. 사람들이 고상하게 즐기고 있을 때 우리끼리 추잡하게 즐기는 게 뭐 어때서?”
강태한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 순간 하선우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유리벽과 강태한의 사이에 갇혀 일시정지 상태에 빠져 있던 그는 비로소 몸을 비틀었다.
“안, 안녕하십니까.”
강태한은 인사를 받는 대신 유리벽에 어깨를 비스듬히 기댄 자세 그대로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왜 하다 말아. 나랑 하려는 거 아니었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나 말고 누구랑 하려고 했어?”
“무슨 말씀이신지 잘…….”
“설마 우리 형?”
붉어졌다 새하얗게 질렸다, 순식간에 얼굴색이 변하는 하선우를 즐거운 눈길로 바라보던 강태한이 유리벽에서 몸을 뗐다. 양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왜? 나랑은 씹질하기 싫어?”
허리를 살짝 숙여 하선우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웃었다. 그는 단번에 구겨지는 하선우의 표정 속에서 감정의 파고를 보았다. 속 안에서 흘러넘쳐 게워낼 뻔한 감정을 몇 번이고 삼키던 남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제가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나가보겠습니다.”
“불청객이라 실망했나 봐.”
“오해하신 것 같은데 강 전무님과 뵙기로 한 게 아닙니다. 약속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뒤돌아 나가려고 하는 하선우를 저지하며 비딱하게 허리를 휜 그대로 강태한이 두 팔을 뻗었다. 하선우의 어깨에 두 손을 뻗은 그는 손아귀에 강하게 힘을 주어 상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뭘 그렇게 빼고 그래. 형 개인집무실에 형 외에 또 누가 들어올 수 있다고.”
“제가… 그러니까 방을 잘못 들어와서…….”
“씨발년이! 내가 병신으로 보여?”
험악하게 표정을 구기며 강태한은 손아귀에 힘을 더욱 실어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조심스러웠던 하선우의 눈빛이 굳었다.
“쪼니까 귀엽네.”
하선우의 입술이 토끼굴처럼 벌어졌다. 강태한은 실실 웃으며 그의 얼굴 이곳저곳을 뜯어보았다.
“우리 전에 한 번 본 적 있지?”
“…….”
“대답.”
“…….”
“대답해.”
하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강태한은 제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추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선우의 반응을 살피는 시선이었다. 어쩌면 즐기는 시선일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강태한의 나이를 떠올렸고, 조금 전에 들은 욕설과 자신이 받은 취급을 차례로 기억해냈다. 강태한의 말처럼 실제로 그의 욕설에 쫄았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워 놀란 가슴이 통증을 느끼듯 따가웠다. 정말이지 시발스러웠다. 하선우는 분노와 두려움이 곤죽처럼 뒤섞였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뇨.”
“아닐 리가.”
“뵌 적 없습니다.”
“그래? 내 기억엔 분명 NnG의 하선우 사장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은데.”
심각하게 허공을 쏘아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갈등하던 하선우가 결국 포기하고 다시 제대로 인사를 하려고 몸을 비틀어 손을 내밀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배터리 전문기업 주식회사 NnG의 하선우입니다.”
“그래. 난 강태한.”
악수를 하려 내민 손을 마주 잡는 대신 강태한은 어깨동무를 했다. 여자에게 하듯 코끝을 하선우의 목덜미에 가져다 댄 강태한은 깊게 숨을 들이쉬어 냄새를 맡으며 그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형이 잘해주나?”
“예. 잘해주십니다. 강 전무님께서 NnG의 가능성을 알아봐주신 덕분…….”
“왜 이래. 그런 고리타분한 얘기가 아니잖아.”
“……그럼….”
“만족시켜줘?”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가 미간을 모으며 대답했다.
“네. 충분히 NnG로서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선우. 군인이야?”
“예?”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눈치가 없는 거야 눈치 없는 척하는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배 맞출 때 만족스러워?”
“……무슨 말씀이신지.”
“형이 부드럽게 해줘? 내 기억엔 존나 컸던 것 같은데.”
크큭거리며 웃은 강태한은 여전히 웃음을 매단 얼굴로 말했다.
“내 생각에는 네가 깔릴 것 같은데.”
“……강태한 씨.”
“애는 안 생겨서 다행이야.”
하선우의 몸이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남자에게 자궁이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뭐라고?”
“못 알아들었어? 너 보지 안 달려서 다행이라고.”
“이봐요. 지금 말 다 했어?”
“강주한이랑 살림 차렸다며.”
하선우의 흥분한 기세가 순식간에 꺾였다. 여전히 혐오스러운 눈으로 강태한을 쳐다보면서도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런 하선우의 모습을 강태한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예리하게 불안의 흔적을 더듬는 결을 느끼며 하선우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목을 감싸고 있는 강태한의 팔을 뿌리쳐 떼어낸 그는 몸까지 돌려버렸다.
하선우는 먼지를 털어내듯 상박을 거칠게 털어냈다. 공교롭게도 임경호의 말이 머릿속에 가득 떠올랐다. 반반한 얼굴 덧없기는 남자도 마찬가지라며 사생활을 폭로하고 싶으면 자신에게 오라고, 싸구려 남창 취급당했던 기억이었다.
음성이나 사진보다는 화질 좋은 섹스 동영상 증거가 더 좋다고 했던가? 그냥 연애 좀 하는 것 가지고 강주한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매도당하는 상황이 억울했다. 자신이 강주한에게 열렬하게 사랑받는다면 덜 억울하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도매급도 아니고 제품에 하자가 있어 원가보다 싸게 후려쳐 파는 떨이상품이 된 기분이었다.
나보다 어린 새끼가 하는 말이 씨발년? 쫄기는? 보지? 생각할수록 그는 적대감을 느꼈다.
진짜 기분 거지 같네. 작게 중얼거리며 무거운 한숨을 내쉰 하선우는 목을 답답하게 죄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강태한을 노려보았다.
“살림 차렸는데 뭐.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주변에 악어 떼만 가득해 보였다.
“당신 말대로 애 낳고 살 것도 아니고 평생 들러붙어서 질척거릴 생각 없습니다. 아쉬울 거 없는데 자꾸 아쉬운 사람 취급하면 진짜 기분… 더러워지는 거 뭐, 그쪽들은 모르겠지. 적어도 상식인이면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네가 남자고 강주한도 남자인 거 잊었어?”
그는 강태한의 지나친 폭언에 잠시 마비되었던 사고가 제대로 돌아오는 걸 느꼈다. 강주한의 애인이라서 겪는 수모가 아니라, 강주한의 애인이 ‘남자’이기 때문에 겪는 수모였음을 새삼 자각한 하선우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회적으로도 동성애인의 가족이 헤어짐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는 것은 어느 정도 용인되는 편이었다. 강태한이 그걸 무기 삼아 한 방 먹인다면 하선우는 보기 좋게 맞아줘야 하는 것이다.
“형이 걱정돼서 그런 거라면… 미안하지만 할 말 없습니다.”
강태한의 짙은 눈썹이 비틀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진 하선우의 진의를 파악하려 한참을 살펴보던 그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우리 형제의 우애를 오해했나 본데 난 형 걱정 안 해. 그러니까 두 사람 관계를 훼방 놓을 생각이 없어.”
불신의 눈으로 강태한을 노려보았다.
“나한테 했던 폭언 잊었습니까. 별로 설득력 없는데.”
“난 그저 둘이 헤어질 때까지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할 거야.”
“무슨 말이 그럽니까.”
“아까는 애 낳고 살 것도 아니고 평생 들러붙어서 질척거릴 생각 없다며. 그럼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강태한은 입술을 늘여 웃었다.
이렇게 보니 강태한은 묘한 입매를 갖고 있었다. 입꼬리가 길어 표정이 잘 드러났다. 비스듬히 입술을 위로 당길 때 그 효과는 배로 드러났다. 웃을 때는 시원해 보이고 화를 낼 때는 더더욱 매서워 보였다. 하선우는 강태한의 얼굴을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미형인 강태한은 강주한에 비해 근엄하고 남자다운 분위기는 덜하지만, 두 형제는 골격 자체가 다르긴 해도 이목구비만 따지자면 흡사한 편이었다. 그러나 하선우는 이목구비가 비슷한 강주한에게서 강태한과 같은 다채로운 감정표현을 읽어낸 적이 없었다.
강태한의 가는 입꼬리에 머물렀던 시선을 옮기며 하선우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손 놓고 연애를 지켜보기만 할 거라고 한 사람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뭡니까.”
강태한은 잠시 뜸을 들였다.
“난 강주한이 왜 너를 만나는지 이유를 알 것 같거든.”
하선우의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강태한의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비위가 상하는 말이었다.
“그게 뭔데요.”
“글쎄. 난 그걸 말할 생각은 없는데…?”
강태한은 말을 하는 도중 하선우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럼 뭘 말하려고 온 겁니까.”
하선우는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화가 나서 굳어가고 있었다. 강태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린아이처럼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늙은이처럼 지쳐 보이기도 하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불쌍한 놈이라는 걸 알려주려고 온 거야.”
다시금 표정이 풍부한 얼굴이 그가 하는 말의 뜻을 배반하며 웃음을 보였다.
“참 안타까운 사람들이야. 형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강태한이 방 안을 나간 뒤에도 하선우는 시선을 뺏긴 사람처럼 닫힌 문을 보며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분명 어떤 목적이 있어 이 방으로 기어든 것이다. 강태한은 자신에게서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누구도 이런 얘기를 시답잖은 흥미 때문에 끄집어내지 않는다. 그것도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든, 불길한 예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말들을. 강주한을 정말 믿지 말라는 친절한 경고일 수도 있지만 불신을 키워 신뢰를 무너트리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그의 즐거움을 위해 하선우를 심란함 속에 방치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불쾌했다.
하선우는 귓속에 암세포 따위를 이식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몸 안에 괴어 있는 불길함과 싸우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유리파티션으로 격리된 서재 너머로 액자 하나를 보았다. 서유임. 사별한 아내의 사진이었다. 어린 두 아이를 껴안고 있는 사진 속에서 그녀는 따듯하게 웃고 있지만 그녀를 제외한 집무실의 풍경은 참으로 삭막했다. 그 순간 묘한 반전이 떠올랐다. 그것은 하선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강주한의 책상 위에 유일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서유임처럼 자신이 그에게 가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몸 안 뻐근하게 차오르는, 어처구니없다 못해 낯 뜨거운 어린아이 같은 허영심이었다. 강태한은 그 뿌듯함까지는 계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선우에게 그가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확신을 준 셈이었다.
지난 석 달간 하선우는 강주한을 만나며 느낀 것이 있었다. 강주한은 무성의하지도 차갑지도 않았지만, 그를 하선우의 방식으로 개조한다는 것은 어딘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하선우는 이 상태가 불안하거나 화가 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연애를 습관으로 여기던 사람 중 하나였고 이 나이에 불타는 연애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을 인정하자면 조금은 허망하기도 했다. 그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그의 마음이 강주한을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폐한 서재를 유일하게 장식하고 있는 액자 속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렸다. 낮아지는 자존감과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낙천주의가 낯 뜨거워 하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어두컴컴한 새벽, 하선우는 전화 벨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억지로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진 그는 짜증스럽게 눈을 찡그렸다. 소리의 근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쯤 열린 눈꺼풀 틈으로 화면의 빛이 덤벼들었다. 오피스텔 관리인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였다. 오피스텔 관리인. 순식간에 잠에서 깬 눈이 번쩍 뜨였다.
“여…보세요.”
수면 위로 내던져진 정신과 달리 몸은 여전히 잠에 반쯤 취해 있었다. 목소리가 바싹 마른 건초처럼 거칠었다.
-자는데 깨워서 미안합니다.
그는 하품을 억지로 막으며 물었다.
“므슨 일 …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건너편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작았다. 강주한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이 유도하는 긴장에 조금씩 불안을 느낀 하선우는 전화기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대며 허리를 세웠다.
그가 불안을 느낄 근거는 충분했다. 벌써 이틀 전의 일이지만 파티가 있었던 목요일 저녁 그는 강주한과 약간의 갈등을 빚었다. 개인집무실을 몰래 빠져나가던 하선우는 복도에서 강주한을 마주쳤고 두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대며 집에 가겠다고 했다. 주치의를 불러줄 테니 쉬고 가라는 남자의 호의를 한사코 거부한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마찰이라고 말하기엔 모호하고, 무시하기엔 미묘하게 감정을 긁는 하선우를 보며 강주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그대로 그날의 일을 모르는 척 이틀이 지난 토요일 새벽까지 묻어두었다. 전화 대신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았고 그나마 주고받는 연락의 횟수마저도 평소보다 드물었다.
“…이 새벽에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잠이 완전히 다 깼다.
-잠깐 내려올 수 있겠습니까.
하선우는 희미하게 인상을 굳혔다. 짧은 침묵 뒤에 긴장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목동 오셨어요?”
-예. 얼굴 좀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가 기대하고 걱정했던 유의 대답이 아니었기에 하선우는 도리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왜… 올라오지 않으시고요.”
-올라가 봐야 틀림없이 엄한 짓 할 것 같아서요.
엄한 짓. 멍하니 강주한의 말을 따라 하던 하선우는 마른세수를 했다.
-시간 걸려도 좋으니까 편한 옷 입고 내려오겠습니까?
강주한은 덧붙여 말했다.
-운동화 신고 와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하선우는 거대한 새우처럼 웅크리고 앉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일어난 그는 관자놀이를 긁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다소 뚱해 보이는 표정으로 세수와 양치를 마친 뒤에 스킨로션까지 바르고 평상복을 걸쳐 입었다. 문 밖을 나설 때 초조해 보였던 그는 엘리베이터의 대시보드를 누르는 순간부터 점차 기분이 가라앉더니 강주한의 차를 발견하고 한결 침착해졌다. 차창을 손등으로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어둡게 선팅된 차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그가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려 할 때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일찍 내려왔네요.”
등 뒤에 강주한이 서 있었다. 그답지 않게 머리는 약간 헝클어진 채였는데, 검은 반팔 티셔츠와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흰색과 검은색과 파란색이 적절하게 섞인 런닝화를 신고 있었다. 얇은 옷을 입은 그는 날쌘 권투선수처럼 몸의 각진 느낌이 도드라져 보였다.
“잠깐 편의점에 좀 들렸습니다. 지금 많이 졸려요?”
“아뇨. 잠 깼어요.”
그는 고개를 숙여 하선우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잠이 매달렸는지 확인하듯 엄지로 눈두덩을 비벼주었다. 얌전히 있는 하선우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드린 그는 말했다.
“그럼 산책이나 할까요?”
“…이 시간에요?”
“피곤하면 다음으로 미루고요. 어차피 잠깐 얼굴 보려고 들른 거니까.”
하선우의 시선이 강주한의 왼손에 들린 파란 야구모자와 양어깨에 걸린 등가방을 발견했다.
“잠깐 제 얼굴만 보려고 여길 오신 것 같진 않은데요.”
강주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음만 짓더니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넘기고 모자를 썼다.
“맞아요. 오피스텔에서 안양 하천길 따라 올라가서 한강시민공원 근처까지 찍고 다시 내려올까 생각 중입니다.”
제법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아주 무리라고는 할 수 없는 코스였다.
“아침 해 뜨는 것까지 보고 오죠.”
두 사람은 지하주차장을 벗어나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 산책길로 들어섰다. 새벽 3시를 겨우 지난 무렵이었기에 하천의 산책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서로를 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닿지도,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하선우는 강주한과 탁 트인 밤길을 어슬렁거리는 상황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산책을 하자고 했는지, 목요일에 있었던 일로 여전히 속이 심란했던 그는 강주한을 곁눈으로 슬쩍슬쩍 살펴보았다. 그러나 모자에 가려 그늘진 옆얼굴은 도무지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벌어졌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바람에 하천 쪽으로 방향을 옮기던 하선우는 손바닥을 감아오는 부드러운 감촉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 하천에 빠지겠네.”
약간 머뭇거리던 하선우는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잡은 손을 내버려두었다. 조금 더 걷다 강주한은 손을 떼어내고 다시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워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 우리 손잡고 걷는 거죠?”
하선우는 물었다. 물어놓고 나서도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게 겸연쩍다는 얼굴을 했다.
“손잡고 걷는 중이죠.”
강주한은 웃었다. 무표정하면 무서워 보이는 인상의 그는 반대로 웃으면 다정하리만치 분위기가 풀어졌다. 신경줄이 가늘게 당겨지는 느낌에 하선우는 남은 손으로 뒷목을 쓸었다. 하선우는 꾸역꾸역 밀고 올라오는 기분을 그냥 솔직히 말해버렸다.
“사실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 기분 저조했어요.”
“왜요.”
“몸이 좀 안 좋았거든요.”
“몸만 안 좋았던 겁니까.”
하선우는 이유까지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강주한은 믿어주기로 했다는 듯 남은 손으로 하선우의 이마를 짚었다.
“열 있는데요. 집에 돌아가서 차 가져올까요.”
“드라이브가 좀 지긋지긋해지던 차였는데 잘됐죠 뭐, 그냥 계속 걸어요.”
평소에는 자전거를 타고 운동 삼아 강변을 달렸던 하선우였기에 그는 주변 풍경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하늘은 검푸르다 못해 심해의 한가운데처럼 깊고 어두웠고 방향 없이 부는 바람에 들풀이 분주하게 서로의 몸을 비벼댔다. 며칠 전 비가 크게 내려 하천의 물이 불어난 상태였다.
물비린내가 가신 무취에 가까운 개운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들은 안양천으로 넘어와 영등포의 뚝방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오목교 쪽을 바라보며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밤이 대낮의 열을 식힌 데다가 하천이 주변의 온도까지 낮추어 날이 꽤 서늘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산책하는 건 처음이에요.”
물끄러미 하천 너머를 바라보던 하선우가 이윽고 말했다.
“여기서 저희 집 보여요. 저 녹색 증권사 간판이 붙어 있는 오른쪽이 제 오피스텔 건물이고, 저쪽에 아이테르 보이죠? 아직도 안 자는 사람 수두룩하네.”
“저 사람들 지금 안 자고 뭐하고 있을까요.”
“그러게요.”
서로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은 두 사람은 다시 하천 너머 야경을 바라보았다.
“야경 멋있네요.”
눈앞에 펼쳐진 지평선은 탁 트여 시야가 넓었다. 사막의 선인장처럼 우뚝 솟은 건물에는 불빛이 드물게 켜져 있었다. 사라지기 직전의 별빛 같은 안타까운 빛무리를 응시하던 강주한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하선우를 곁눈으로 돌아보았다. 어느새 하선우의 얼굴에는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웃음이 담겨 있었다.
한참 동안 하선우는 조용했다. 그의 눈은 전방을 향해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야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강주한은 그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심각해졌다 입매를 굳혔다 안타까워했다가 표정이 다채로웠다. 생각에 따라 그대로 감정이 빚어지는 얼굴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물리용어 중에 한계속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 뜸을 들이다 하선우는 바로 말을 이었다.
“어떤 구조물을 회전시킬 경우에 그 회전속도를 초과하면 재료가 파괴되는 극한의 속도를 의미하는 물리용어인데 저한테는 좀 특이한 의미입니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한참을 머뭇거리던 하선우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주한 씨는 가끔 쟤가 왜 저러나 싶을 때 있죠?”
천천히 눈을 굴려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그는 표정이 없었다. 그의 무표정에 연연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웃었다.
“특히 엊그제처럼 제가 속을 알 수 없게 굴 때요.”
덧붙인 말이 적었지만 강주한은 하선우가 한계속도를 설명한 이유를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오락가락하는 행동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것이다.
하선우에게는 미안하지만 강주한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변명에 대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가끔 오기를 부리듯 방어적으로 굴다가도, 관계가 틀어질 새라 유난히 밝게 행동할 때가 있었다. 강주한은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동물적인 면이 있었고 하선우는 생각을 숨기는 데 재능이 없었다. 그런 면이 귀엽긴 하지만, 신비한 부분이 없다는 건 그로서는 조금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주한은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살면서 깨달은 건데 사람 마음에도 한계속도라는 게 존재하더라고요. 꼭 물리적인 건 아니더라도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다치는 건 마찬가지고요.”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요. 하선우는 말을 이었다.
“마음이 다칠까 봐 두려운가 봐요. 주한 씨가 좋아지다가도 그게 못마땅해서 제동을 걸게 돼요. 아저씨가 돼서 처음 연애하는 어린애처럼 이러니….”
강주한은 우습다는 듯 끌끌거리며 말소리를 줄이는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한계속도라니. 다분히 그다운 표현법이었다. 마음에 제동을 거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두려움의 전제에는 상처받기 싫다는 속내가 깔려 있었다. 확신이 없어 늘 연애에서 한발 뺄 궁리를 하고 있는 게 그의 눈에는 보였다. 강주한은 넌지시 하선우의 정곡을 찔렀다.
“내가 좋아지는 게 싫어요? 왜 제동을 겁니까.”
하선우는 입이 바싹 마르는지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감당 못할까 봐요.”
하선우는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강주한이 좋은 사람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연인관계이긴 하지만 축은 한쪽으로 너무도 확실하게 쏠려 있었고 이별의 순간은 더디든 이르든 찾아오게 될 것이었다. 불공평한 연애였기에 하선우는 실연의 쓰라림을 생각하면 마음이 몸집을 불리는 게 썩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노파심에 아주 가끔 강주한에게 방어적으로 굴 때가 있었다. 그러다 감정적인 골이 생길세라, 평소의 성격보다 더 밝게 행동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놓인 돌이 된 것 같았다. 새벽의 냉기와 한낮의 열기에 갇혀 차고 뜨거워지기를 반복하며 잘게 부수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모래가 되고 존재감이 사라지다 못해 티끌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어제 새벽, 잠들기 직전까지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제가 좀 짝사랑에 내성이 없어요.”
강주한은 처음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하선우는 조금 말하기가 벅찬 것처럼 뜸을 들이며 무겁게 입을 뗐다.
“오래전에 짝사랑을 심하게 했거든요. 뭐, 지금이야 생각도 안 나지만 그때는 거의 몇 년간 날마다 기분이 바닥을 쳤었어요. 비참하기도 했고 서러워서 찔끔거리기도 했고. 가끔 주한 씨와 있다 보면 그때 기분이 떠오를 때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굴었나 봐요. 주책이죠.”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피식 웃었다.
“뭐… 주한 씨가 좋아지는 것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투쟁이었던 거죠.”
무거운 분위기를 떨쳐내듯 헤헤 웃은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음, …그러니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말했다.
“오늘 주한 씨와 산책을 해서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나 봐요. 약한 부분이 건드려진 느낌이라 저도 모르게 괜한 얘길 한 것 같은데 결론만 말하자면 전부 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미안해요.”
“뭐가요.”
“괜히 혼자 주한 씨에 대해서 나쁜 생각만 했던 것 같아서요.”
모자의 그늘 속에 가려진 눈이 잠깐 찌푸려진다 싶더니 쓰고 있던 모자를 벗은 그가 앞머리를 털었다. 한밤중이라 그런가. 제가 별 얘길 다 하네요. 자꾸만 말을 덧붙이는 하선우를 숨죽여 쳐다보던 그는 말했다.
“선우 씨 말이 맞아요.”
“예?”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확신을 안 줬다는 거잖아요.”
하선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긍정도 부정도 없이 입을 다문 하선우를 향해 그는 손을 뻗었다. 뻣뻣하게 긴장한 뒷목을 감싸며 그는 말했다.
“그럴 땐 혼자 끙끙거리면서 추측하지 말고 그냥 내 마음이 어떤지 솔직히 물어봐요. 애인을 짝사랑하는 기분이 들었다면 나 같아도 엄청 우울했을 것 같은데.”
하선우를 빤히 쳐다보며 그는 말했다.
“미안해요. 남자친구로서 너무 부적격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하선우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얼굴이었다. 남자친구라니. 담백하지만 유치한 표현이었기에 그에게는 오히려 지나치게 자극적인 말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눈을 맞추고 있는 강주한을 향해 하선우는 손가락을 꿈질꿈질 움직였다. 모자에 눌려 우스꽝스러워진 강주한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그는 꾹 깨물었던 입술을 떼어내며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면 앞으로는… 잘해요.”
한강공원의 잔디밭에서 풀어놓은 강주한의 가방에는 엉뚱하게도 번들로 구매한 캔맥주가 들어 있었다. 그가 안주로 사온 과자의 종류는 다양했다. 하선우가 좋아하는 감자칩과 견과류, 나초칩부터 절대 손도 대지 않는 오징어맛 땅콩도 섞여 있었다. 각자 한 캔씩 비워낸 뒤부터는 취하는 속도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몸살 기운이 남아 있던 하선우는 평소보다 빠르게 술기운이 올랐다. 세모난 나초의 모서리를 야금야금 뜯어먹는 그는 손끝과 볼, 귀끝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세 번째 캔을 뜯을 때까지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산책에 대한 주제로 시작된 이야기는 건강으로 옮겨갔고 의사인 형제들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는가 싶더니 조카들과 강주한의 자녀들에 대한 화제로 바뀌었다.
“어린애가 솔직히 한 성격 하던데요. 눈 높은 게 뭐냐는 말에 쉽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거라니.”
하선우는 꼬장꼬장한 아이의 흉내를 냈다. 아저씨보다 우리 아버지가 훨씬 백배는 멋있어요. 아주아주아주아주. 하선우의 띠꺼운 얼굴에 강주한은 애써 변호했다.
“그래도 아이 딴에는 선우 씨에게 호감 표시하는 겁니다.”
“예? 그럴 리 없어요.”
“관심 없으면 말도 안 거는 녀석이에요.”
“절 싫어하는 게 아니고요?”
“아직 어려서 말을 서슴없이 하긴 해도 이유 없이 싫어하진 않죠. 오히려 관심을 끌고 싶어서 뜬금없는 소릴 하면 모를까.”
자신을 향한 아이의 호감은 잘 모르겠어서 하선우는 그저 맥주를 길게 들이켤 뿐이었다.
“아버지를 거의 숭배하던데요.”
강주한은 잠깐 조용했다. 그리곤 풀썩 웃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니까요. 대상이 나밖에 없기도 하고.”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은 원치 않는지 그는 덧붙여 말했다.
“요령 있는 건 여희 쪽이죠.”
“아직 여섯 살인데요 뭐. 요령이야 얼마든지 배울 시간이 있겠죠.”
힐끔 강주한을 쳐다보며 하선우는 중얼중얼 말했다.
“또 희원이는 주한 씨 닮아서 잘생겼잖아요.”
“외모가 뭐 중요한가요. 그런 게 사업을 이끌어주진 않잖습니까.”
“그래도 잘생기면 좋죠.”
“뭐… 부정하진 않을게요. 겉모습이 삶의 질을 높여주긴 하죠.”
뺨에 손을 괴고 있는 그는 픽 웃었다.
“그래도 난 아들이 얼굴값 하며 사는 건 싫습니다.”
강주한은 마지막 하나 남은 맥주캔을 뜯었다. 하선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다물렸다.
“할 말 있으면 해요. 나도 얼굴값 하며 살았냐고 묻는 것만 빼고.”
하선우는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안주를 뒤적거렸다. 얼마 뒤 의연한 표정을 회복한 그는 적당한 안주를 골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강주한은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래도 여희가 예쁘게 생긴 건 좋죠?”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딸을 보는 건 잘생긴 아들을 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죠.”
하선우는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맥주캔을 잔뜩 기울였다. 사실 자녀들에 대한 얘기가 나온 시점부터 그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었다. 남자의 아내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진 와중에도 생각은 근처를 서성일 뿐 대담하게 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희는 아내분 닮은 것 같더라고요. 미인이셨잖아요.”
분명 정신줄을 붙잡으려 애를 썼던 것 같은데 스르르 나사가 풀렸다. 저도 모르게 입에 담은 이름에 심장이 뛰었지만, 태연한 척 하선우는 고개를 숙이며 안주를 주워 먹었다.
“그렇죠. 빼다 닮았죠.”
“아내분은 어땠어요?”
그의 마음속에서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편으로는 이대로 밀고 가라는 목소리 또한 들려왔다. 하선우의 우려와는 달리 강주한은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이런 말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성격이 없는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주한은 그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맥주캔을 낮게 기울여 연이어 몇 모금 마신 그는 캔을 내려놓으려다 멈추었다. 어느새 새벽 미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그는 희부연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선우는 성격이 없는 사람의 성격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강주한의 얼굴에 어린 표정의 공백을 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평소 그의 분위기에서 탈선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강주한의 마음을 짓누르는 느낌인 것만은 확실했다. 하긴 당연한 얘기였다. 그녀만큼 강주한에게 유의미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와 유일하게 결혼까지 간 여자인 데다가 한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았고 그의 아이를 낳은 특별한 존재였다. 더욱이 그녀는 사고로 짧은 생을 달리하기까지 했다.
말이 없어진 남자를 보며 하선우는 새삼스럽게 그에게 드리워진 죽은 사람의 그림자를 느꼈다. 하선우는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구차하게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는 얼굴을 보자 더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직도 그립냐고. 술기운을 빌어서도 차마 그렇게까지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많이 사랑했죠?”
묻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하선우는 이건 좀 아닌데 하고 속으로 한숨지었다.
“죽은 아내와의 관계가 궁금합니까?”
그의 말투는 잔잔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 화제를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이 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두 분이 잘 어울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선우 씨.”
“예.”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죠.”
“상관은 없지만… 그냥…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미안하지만 난 일부러 들춰내고 싶은 주제가 아닌데.”
그는 침묵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기분을 살폈다. 눈을 내리깔고 맥주를 묵묵히 들이켜는 강주한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막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분위기에 취해 너무 나갔던 건지도 몰랐다.
강주한의 모든 걸 공유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의 전 아내에 대해 캐묻고 그가 가진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낱낱이 확인하려 드는 것은 너무 지질한 행동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못난 놈. 하선우는 속으로 열 번은 더 한숨을 쉬었다.
맥주를 모두 들이켠 강주한은 의기소침해진 하선우를 풀어주려는 듯 넌지시 말했다.
“궁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억 자체가 나에게는 떠올리고 싶은 추억이 아니라 그럽니다.”
말미에 강주한은 입 끝을 애써 부드럽게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하선우는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깨달았다. 알았으니 됐다. 그는 강주한과 자신 사이에 불편하게 고인 서먹함을 무시해버리기로 했다.
“해도 뜨는데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일부러 밝게 목소리를 높인 하선우는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자리를 정리해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묵묵히 걸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은 거울처럼 도시와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 빼곡하게 들어찬 빌딩은 드문드문 불이 밝혀져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분주한 일상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넋을 놓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있었다.
밝아오는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 강주한의 옆모습을 흘깃거리며 그는 머릿속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나둘씩 지워버렸다. 강주한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강변으로 방향을 틀며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손을 까딱였다.
“이리 와요.”
핸드폰의 카메라 앱을 실행시키고 그는 셀프카메라 모드로 변경했다. 팔을 길게 뻗어 화면 속의 자신을 확인하며 아무렇게나 쓱쓱 앞머리를 정리한 그는 하선우의 어깨에 팔을 둘러 바짝 당겼다. 하선우는 화면 속 강주한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내가 괴롭힌 것처럼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잖습니까. 기왕이면 좀 웃어주지.”
강주한과 하선우의 커플 셀카라니.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그는 지금의 일이 꼭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어쨌거나 사진은 연애의 증거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강주한은 찍은 사진을 하선우에게 전송했다. 전송받은 파일을 확인한 그는 뒤늦게 웃었다. 사진 속의 자신이 너무 얼빵했다.
“마음에 들어요?”
“뭐가요.”
“사진 보면서 웃길래.”
“너무 못생기게 나와서요.”
“난 모르겠는데. 엄살이 심하네.”
“나만 못 나왔잖아요.”
“선우 씨 눈에는 본인이 여기서 몇 배는 잘생겨 보인다 이거죠.”
강주한은 비죽 웃었다. 재밌어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약이 올라 하선우는 빈정거렸다.
“예. 그러니까 좀 예뻐해주시죠?”
“예. 선우 씨 예뻐요.”
강주한은 고개를 기울여 하선우를 빈틈없이 바라보았다. 숨죽인 강주한의 숨결이 옆얼굴을 간지럽혔다. 하선우는 자신이 꼭 짓궂은 소년에게 놀림을 당한 여자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참. 덤덤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표정의 틈으로 자꾸만 웃음이 파고들었다. 간질간질함이 묻어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하나도 안 와 닿아요.
* * *
문도일에 대한 하선우의 첫인상은 그가 키스를 잘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렸던 하선우가 알고 있는 키스와는 완전히 딴판인, 가장 아름답게 뒤죽박죽 섞인 입맞춤이었다. 그는 상대의 뜨겁게 달아오른 볼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맞춘 채로 오랫동안 시간을 공유하다가 서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수줍게 벌어진 입술 위로 입술을 묻고 자유로운 압박과 풀어짐 속에서 헐떡였다. 상대가 무엇을 할지 몰라 굳어 있으면 부드럽게 웃으며 뒷목을 보듬어주었다. 젖은 입술을 떼어낸 그는 이마를 맞대고 우렁우렁한,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이대로 돌아가기 아쉽다고 말했다. 돌려보낼 거가? 남자의 말투에는 장난스러운 칭얼거림과 은은한 사투리가 배어 있었다.
어떻게 집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하선우는 망연히 남자의 커다란 손과 젖은 입술, 높은 콧대 따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선우는 대학입학으로 학교 근처에 급하게 오피스텔을 얻은 참이었다. 내일 있을 입학식을 앞두고 간신히 짐을 모두 옮긴 그는 산책을 나왔다 집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키스를 나누는 연인을 보았고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그늘에 서 있다 보니 나갈 타이밍을 놓쳤다.
그들이 오피스텔의 입구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애정표현의 농도가 부담스러웠다. 끝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 괜히 훔쳐본 꼴만 된 것이다. 다행히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두 사람은 헤어지는 대신 같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확실히 대학생은 다르구나.
뻘쭘하게 서 있던 하선우는 애처로울 정도로 사춘기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발랑 까진 대학생은 다음 날 만나게 되었다. 과에서 술집 하나를 빌려 신입생 환영회를 열었는데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원래부터 돋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첫인상의 기억이 지나치게 강렬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하선우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어젯밤의 다정하던 분위기는 과묵한 침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는 같은 과는 아니었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고, 그의 곁에는 시꺼먼 사내들만 가득했다. 그중에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뻑뻑 담배를 피워대며 술만 퍼마시는 이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밤, 선배들의 입을 통해 하선우는 그의 이름이 문도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하선우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아주 오랜 시일이 지난 뒤였다.
오피스텔이 코앞이었다. 출발한 시간으로부터 세 시간 남짓 지나 있었다. 날은 밝았지만 여전히 새벽에 걸쳐진 시간이었기에 주변은 적막했다. 연애경험이 적지 않았으나 동성과 만나온 환경 탓에 걸어서 누군가가 집 앞까지 데려다준 경험은 흔치 않았다. 손을 잡고 걷는 낭만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키스를 잘하던 선배는 그날 이후 종종 마주쳤다. 학교와 오피스텔 앞에서, 심지어는 오피스텔 복도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뿐이었다. 학교와 학교 밖에서의 모습이 다른 선배에 대한 호기심은 금방 덩치를 키워 어느 순간부터 불길한 예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불길한 예감은 슬프게도 틀리는 법 없이 시꺼먼 근심으로 형태를 탈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저항할 도리 없이 온 마음으로 앓고 있었다. 순애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게 포장될 마음은 아니었지만, 딴에는 고생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흐르자 잊혀졌다. 뻥 뚫렸던 마음은 어느새 꾸역꾸역 잡다스러운 것들로 메워져 있었다.
과거를 회상해도 구체적인 기억만 있을 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은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죽을힘을 써도 안 되더니 이제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아물어 있었다.
오피스텔의 입구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지하주차장에 들어갔다. 강주한은 곧바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바로 돌아갈까 싶었기에 하선우의 얼굴 위로 아쉬움이 내비쳤다.
“7시 30분 비행기 타려면 준비해야 하거든요.”
“비행기요?”
“출장 갑니다.”
하선우는 눈을 크게 떴다.
“출장이요?”
“좀 갑작스럽죠?”
“늦은 거 아니에요? 아니… 그보다 산책은 다음에 해도 괜찮았을 텐데.”
왜 굳이 오늘 무리를 해가며 만났느냐는 물음이 하선우의 얼굴 가득 쓰여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를 빤히 쳐다보며 자동차의 창틀에 팔을 얹은 채로 턱을 괴었다. 올려다보는 시선 탓에 그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그는 대뜸 손을 뻗었다.
“핸드폰 줘봐요.”
전화를 건네받은 그는 뭔가를 재빠르게 설치하더니 키패드를 가볍게 터치했다. 홈 화면에 연두색의 작은 위젯이 깔렸다. 하선우가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확인할 새도 없이 그는 연락처 화면을 터치했다. 자신의 번호를 누른 그는 ‘오피스텔 관리인’이란 이름을 본 뒤에 눈을 들었다.
“그게… 이해하죠?”
“뭘 말입니까.”
“뭐겠…어요.”
언제라도 제3자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을 수 있는 관계였기에 애인이나, 강주한이라고 입력하는 것은 모두 거리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강주한은 하선우의 함언을 이해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안절부절못하는 하선우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죄책감을 음미한 그는 버튼을 눌렀다.
“나만 하선우 씨에게 관심이 지대한 느낌인데.”
딴죽을 걸려던 하선우는 오피스텔 관리인으로 강주한을 저장했던 바가 있어 말을 삼켰다. 하선우는 두 눈을 의심했다. 화면에는 ‘오피스텔 관리인’이 지워지고 ‘하선우 관리인’이라고 새로 입력되어 있었다. 자신의 핸드폰을 꺼낸 그는 하선우의 번호를 입력했다. 예상을 깨고 정직하게 ‘애인’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편집란으로 들어가 글자를 지운 그는 하선우를 ‘강주한 관리인’으로 저장했다.
“아이디어 제공 고마워요.”
하선우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의 행동이 너무 별나게 느껴져 오히려 적응이 안 됐다. 별수 없이 그는 가슴 한편을 답답하게 하던 숙제 같은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강주한은 별말 없이 핸드폰을 건넸다. 하선우는 화면을 보았다. 그가 조금 전에 홈 화면에 깔아둔 연두색의 위젯에는 D-100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의미까지 설명해줘야 하는 건 아니겠죠.”
하선우의 미간이 바짝 모였다. 그와 100일을 맞았다는 것보다는 자신도 몰랐던 기념일을 그가 신경 썼다는 사실이 수상쩍었다. 소화불량에 걸린 배 속에 달콤한 케이크를 들이붓는 기분이었다.
“웃거나 찌푸리거나 한 가지만 해요.”
“아.”
“그렇다고 찌푸릴 것까진 없는데.”
씁쓸한 표정을 짓던 강주한은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고 턱을 괸 채로 빤히 하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나름대로 애쓴 겁니다.”
“그런 것 같아요.”
“이런 얘기 하면 이상하게 볼지는 몰라도 이 나이에 서울 살면서 한강변 처음 걸어봐요.”
“……심하게 이상하진 않아요.”
강주한은 피식 웃었다.
“여태까지 내 방식대로 만났던 게 하선우 씨를 불편하게 했던 것 같아서요. 이런 데이트 선우 씨와 해보고 싶었어요.”
하선우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기대감과 그 안에 어렴풋한 자신 없음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 얼굴을 보자 하선우는 괜히 짓궂게 굴고 싶어졌다.
“그럼 우리 1년째 되는 날에는 놀이공원 가요?”
“……무지 힘들겠지만 노력은 해보죠.”
떨떠름한 얼굴로 기대하지 말란 눈빛을 보내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실제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주 만약에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 가게 된다면 거의 외계인 취급을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장 준비하려면 빠듯할 텐데 늦기 전에 들어가세요.”
“가야죠.”
시동을 거는 대신 강주한은 여전히 창틀에 팔을 괸 채로 하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바라는 게 있는 기색이었다. 헤어질 때 나누는 입맞춤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평범한 연인들이 나누는 일상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지를 읽고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바싹 마르는 입술을 열고 남자가 들어왔다. 입맞춤을 나누던 하선우는 불현듯 깨달았다.
강주한이란 인물은 계획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고, 한밤중에 보고 싶다고 약속 없이 찾아온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산책을 다녀오는 세 시간이면 지금껏 그래 왔듯이 섹스를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엄한 짓 하고 싶지 않으니 편한 옷을 입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전화를 걸었던 강주한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섹스로 소비하는 시간 대신, 손을 잡고 산책하고 전화번호부에 애칭으로 서로의 이름을 저장하고 사진을 찍는 시시한 일상 따위를 선물한 것이다. 여태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해 하선우를 불편하게 한 것 같아 나름대로 애쓴 거라던 그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집 앞에서 헤어지며 나누는 입맞춤으로 시시한 연애질의 종지부를 찍으며 하선우는 땀이 솟는 손바닥을 바지에 몇 번이나 닦아냈다. 오래전에 누군가의 입맞춤을 지켜보며 시작되었던 첫사랑의 기억 위로 새로운 추억이 덧입혀지고 있었다. 그 추억을 누구도 아닌 강주한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그는 뿌듯한 동시에 이상했다. 어쩌면 이 영리한 남자는 경계를 서는 보초라고는 아무도 없는, 하선우의 심장으로 곧바로 진격하는 가장 연약하고도 말랑말랑한 입구를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 * *
쳐다본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마주 닿기도 전에 눈길이 사라진다. 마치 술래잡기 놀이처럼 술래가 딴청을 부릴 때는 대놓고 감상하지만, 고개를 움직이면 시선이 맞잡힐 새라 요리조리 피해 도망가버린다. 몇 주 전부터 느껴지던 김 부장의 눈길을 하선우는 최근 들어 더욱더 노골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무엇이 그녀의 주의를 끄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녀의 관심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요즘 싱글벙글하시네요?”
사장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김주안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김 부장이 제출한 결산서를 넘겨보던 하선우는 눈만을 들어 올렸다. 내내 한 소리 할 듯이 주변을 맴돌며 뜸 들이더니 드디어 뭔가를 물어보려고 운을 떼는구나 싶었다.
“그래 보여요? 요즈음 그런 소리 많이 듣네.”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김 부장이 입술을 슬그머니 벌리며 한마디 할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뭐….”
하선우는 김 부장이 가져온 월말 결산서를 검지로 툭툭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이 잘 풀리는데 기분 좋죠, 당연히.”
“아니면 연애가 잘 풀리시나 봐요?”
그녀의 말대로 연애는 고기압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럭저럭요.”
“요즘 손에서 핸드폰을 못 놓으신다면서요. 이사님이 한탄하시던데.”
“못 놓긴.”
질색하듯 웃은 하선우는 괜히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결산서만 받고 나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엘텍전자로 출근도장을 찍을 예정이었다.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고 돌아가라는 지시를 했음에도 김 부장은 자리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버티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하선우의 연애에 대해 묻고 싶은 듯했지만 그는 해줄 말이 없었다. 이럴 때만큼은 그녀가 친구인 점이 불편했다. 하선우는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밖에서 퇴근하니까 내일 봐요.”
아. 종합기술원 가는 날이셨죠. 김 부장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옷을 챙겨 입는 하선우를 유심히 살펴보며 그녀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엘텍에서 여직원들이 쳐다보겠어요?”
슈트 깃을 털어 옷매무새를 매만진 그는 씩 웃었다.
“그럴 것 같아요?”
“럭셔리 잡지에 나와도 되겠어요. 스타일 정말 좋아지셨네요.”
칭찬에 인색한 그녀답지 않게 비위를 맞추는 투라, 하선우는 민망함을 감추려 손목시계와 소매 끝을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요. 제임스 본드 같습니까?”
“제임스 본드보다는…….”
김 부장은 말끝을 흐렸다. 잠시 후 그녀는 결심한 듯이 말했다.
“본드한 애 같아.”
소매 단추를 잠그던 하선우는 정지했다.
자신이 들은 말에 확신이 없어 그는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만 굴렸다. 그사이 김주안은 확신에 찬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하선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우시장의 소를 품평하는 상인마냥, 꼼꼼히 품질을 따지는 시선이었다.
“지금 뭐ㄹ…….”
“공금 횡령하니?”
하선우는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모양이었다. 끊어진 생각을 간신히 이은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너 말고 여기 누가 있어.”
“뭔 소리야. 공금횡령이라니.”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거친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김주안의 눈빛이 불을 뿜을 기세로 뜨거워졌다. 한 걸음 하선우의 앞으로 바짝 다가오며 그녀가 말했다.
“내가 계속 지켜봤거든? 네가 걸치고 다니는 게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 아니 너무 좀 지나쳐 보여서 네가 뭘 입고 다니는지 찾아봤어.”
긴장을 고조하려 휴지기를 갖는 그녀의 침묵에 하선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너 나한테 얘기했지. 어머니 생신선물로 샤넬 가방 사드리라고 할 때 뭐랬어. 나보고 미쳤냐고 했지. 그게 불과 석 달 전이야. 근데 지금 네가 든 그 가방 샤넬보다도 몇 배는 비싸. 아냐?”
“아냐. 네가 잘 못 본 거겠….”
말끝을 흐리며 우물거리자 김주안이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시계도 내가 본 것만 세 개였는데 그 세 개 다 내 자동차 풀옵션 넣은 것보다도 비싼 브랜드였거든? 옷이며 구두며 넥타이며… 네가 짝퉁 쫓아다니는 그런 인간이었어? 그럼 이거 설명해봐. 리조트, 호텔, 아케이드 쇼핑관에서 네 이름 앞으로 오는 우편물들은 또 뭔데. 물론 사실 네가 명품을 입든 거적때기를 입든 상관없어. 근데 그 돈의 출처는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잖아? 무슨 돈으로 그렇게 물 쓰듯 돈을 써대? 못해도 2억은 넘은 것 같은데 너 정말 공금 횡령해?”
한번 찔러보고 말 생각이 아니었다는 듯 그녀는 폭풍우처럼 말을 쏟아냈다. 억수 같은 그녀의 말은 한 번 더 하선우의 머릿속에서 생각을 씻어가버렸다. 긴 공백 뒤에 하선우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공금횡령이라니 왜 생사람 잡아.”
“그럼?”
“예전부터 모아둔 걸로 산 거야.”
그 자신이 생각해도 형편없는 대답이었다. 역시나 김주안의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식도 좀 처분했어.”
“말이 되는 소릴! 사장할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거야? 차라리 다른 회사 사장들처럼 배당금을 받아서 사용하지 그랬어? 지금 번다고 다 네 돈 같니? 빚으로 사업하고 있는 형편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하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김주안이 너무 빠르게 몰아붙여 순발력이 고개도 내밀지 못하고 다져져버렸다. 억측에 불과한 그녀의 추궁을 듣고 있자니 그는 슬슬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해봐. 너 혼자 한 일인지 아니면 회계팀 직원과 같이 저지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수습할 수 있는 단계잖아. 아직 말 안 했거든?”
“말하다니.”
“이사님한테.”
하선우는 눈을 부릅떴다.
“횡령한 수준이 수습할 수 있는 선이면 이사님께 말 안 할 생각이야.”
그녀의 말투는 이제 제법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간의 방종한 씀씀이에 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하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었다. 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하선우는 거칠게 한숨을 내쉬고 딴에는 유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주안. 내가 키운 회사를 내가 왜 말아먹어. 진짜 내가 공금 횡령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래도 설명하라고 할 거냐?”
“그건 그거대로 문제지. 명품 사는 데 전 재산을 다 말아먹겠다는데 어떻게 안 말려. 난 네가 이렇게 현실감각 없는 사람인 줄 몰랐다. 네가 무슨 재벌도 아니고 씀씀이가 지나치잖아.”
“짝퉁이다. 짝퉁.”
“아케이드 명품관은 중국에서 물건 떼다 판다니?”
그녀의 형형한 눈빛에 하선우는 얼굴을 굳혔다. 환장하겠군. 얘는 또 왜 이렇게 간섭이야. 속이 끓어올라 그는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쉬어댔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는 김주안을 멀뚱히 쳐다보다 툭 내뱉었다.
“선물받았어.”
미간을 좁히는 그녀를 보며 하선우는 덧붙여 말했다.
“왜. 이것도 거짓말 같으냐?”
“아니야?”
“아니야. 요즘 만난다는 사람이 줬어.”
“그 아가씨는 재벌이라도 된대?”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하선우의 말에 무조건 반박하려던 김주안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람이랑 만난다고?”
“그냥 좀 돈이 많을 뿐이야. 왜. 나는 그런 사람 만나면 안 돼?”
하선우의 말을 빈말로 여기려던 그녀는 그의 진지함에 점차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의심 많은 성격의 그녀답게 여전히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선우는 침묵했다. 강주한과의 연애를 통해 배운 요령이 있다면 침묵만큼 생각이 많아지게 만드는 건 없다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생각에 확신이 없어진 그녀는 결국 점점 더 하선우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이라면 미안하지만….”
“사실이야.”
“…….”
“다른 데 얘기 안 하는 걸로 해줘. 그냥 자세히는 묻지 마.”
하선우는 잇새로 혀를 찼다. 미지근한 의심이 남아 있는 얼굴을 한 그녀를 뒤로한 채 그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걸치고 있는 옷과 가방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게 그렇게 위화감을 느낄 만한 것이었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하선우는 방종한 씀씀이 없이 현실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강주한이 제공하는 것들을 받아 걸칠 뿐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멋져 보인다는 사실에 으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홀릴 만큼 빠져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은 변한 그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조금 겸연쩍었다. 물론 그렇다고 타인을 의식해 옷장에 처박아둔 옛날 옷들을 걸칠 생각은 없었다. 하선우는 하선우였다. 조금 값나가는 가방을 들고 시계를 찬다고 그의 중심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지금처럼.
“억울하지 않아?”
투과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샘플을 컴퓨터에 기록하던 하선우는 눈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뭐가요.”
“죽어라 대가리 굴려봐야 결국엔 회사 좋은 일 하는 게.”
먹고살려고 어쩔 수 없이 일을 합니다. 강영광은 늘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자신을 착취하는 회사에 대한 냉소를 아끼지 않는 남자에게 적당히 받아칠 만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하선우는 고개를 애매하게 끄덕였다.
사실 그는 엘텍에 오는 것이 좋았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연구만을 할 수 있었다. 엘텍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모듈 테스트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하선우는 비교적 현실적 제한 없이 분방하게 연구개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경영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되니 나름의 도피처였다.
그의 미지근한 반응에 강영광은 아랫배를 장갑 낀 손으로 어루만지며 물었다.
“참나. 일하는 게 재밌다 이거지?”
만년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남자답게 오늘도 잿빛인 얼굴을 보며 하선우는 슬그머니 웃었다.
“방금 그 웃음 재수 없었어.”
“왜요.”
“동창놈 생각났어.”
“동창이 뭘 어쨌는데요.”
“심심하다고 수학과 본고사 문제 풀던 놈이었거든.”
하선우는 1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린 세계 7대 수학난제를 풀어보겠답시고 깝치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하선우를 수상하단 듯 쳐다보던 강영광은 흘러내린 보호경을 콧잔등에 걸치며 피식 웃었다.
“너도 그런 사람이었구나. 실망이야.”
“설치긴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그렇게 좋지도 않았고.”
“됐다. 난 이미 너한테 정 떨어졌다.”
하선우는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다시 일에 집중하려던 강영광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4월 미국 모터쇼에 출품했던 시스템 파워팩 소식은 들었어?”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있던 하선우는 획 고개를 돌렸다.
“그게 왜요?”
“그게 GM 신차에 탑재될 예정이라고 하더라?”
하선우는 심장이 크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신음을 토할 뻔한 것을 간신히 삼킨 그는 별로 감동받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느라 약간 씨근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응. 전력 수준에 간신히 맞췄던 게 결과가 좋았나 봐.”
지난 4월, 미국의 모터쇼에 출품할 50V 시스템 파워팩을 제작했었다. 모터쇼 당시에 호응이 상당했던 편이라고 전해 들은 뒤로 두 달 만에 들은 소식이었다.
“그럼 엘시스에서 공급하는 거랍니까? 어떤 자동차 모델에 장착한대요?”
“엘시스에서 공급하는 건 맞지만 어떤 자동차 모델에 장착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GM 사장도 아니고.”
“그럼 북미 시장에는 언제부터 판매될 예정인지 아시고요?”
하선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강영광은 눈살을 찌푸리며 건성으로 손을 휘저었다.
“왜 그런 게 궁금하냐.”
“그냥요.”
“싱겁긴.”
하선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회사 매출의 증가는 나의 월급의 증가와 무관하다. 낙숫물 효과를 불신하는 강영광은 엘텍의 자회사인 엘시스와 GM사社간의 계약에 대해 무덤덤해 보였다. 그러나 하선우는 무덤덤할 수 없었다. 엘시스가 GM에 공급할 시스템 파워팩의 구성품 중에는 배터리팩이 포함되어 있었고, 바로 그 배터리팩은 그의 원천특허 기술을 기본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개량과 발전을 거듭한 덕분에 처음에 그가 선보였던 기술보다 훨씬 더 진보된 형태로 바뀌었지만 하선우가 최초로 고안한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로열티.
그는 그 달콤한 단어를 소리 없이 속삭여보았다. 실제로 혀끝에서 단맛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자 통증이 느껴졌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기분이었고 거의 경외감에 가까운 흥분에 도취되어 있었다.
머릿속은 현실의 옹벽을 무너트리고 원대하고 환상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저돌적으로 통장을 향해 행군해 들어오는 로열티와 새하얀 파랑이 모래사장을 만나 부서지는 바닷가의 별장, 거친 굉음을 내며 달려 나가는 스포츠카의 모습들이 눈앞에서 금빛 분수처럼 솟아났다.
“이것 좀 분석해줘.”
갑자기 흥분을 가르고 들어온 목소리에 그의 도취는 정지되었다. 나사 빠진 사람 같은 하선우를 비뚜름히 쳐다보며 강영광은 물었다.
“뭔 일 있어? 아까부터 왜 그래?”
하선우는 조용히 강영광을 쳐다보았다. 애초부터 숨길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 사실을 말할까 싶었지만, 신경의 가닥을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로열티에 대한 얘기를 꺼내려니 강영광과 적당히 유지해오던 거리가 훼손될 것 같았다.
“좀 피곤한가 봐요.”
뒷목을 긁적거리며 가볍게 웃은 그는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성공을 마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도 언제나 함께 어울리던 사람의 성공이라면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발붙이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가장 뼈저리게 깨닫게 하는 대상이 되므로.
하선우는 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퍽 이상스러웠다. 그는 성공의 문을 여는 열쇠를 받은 사람들은 과연 갑작스러운 신변의 변화를 즐거워했을지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 그 역시 현실의 수없는 제한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부류 중 하나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떤 흐름에 의해 덫에서 저 멀리로 건져 올려져 있었다.
그 분기점은 어느 시점이었을까. 오래전, 특허를 출원했을 때? 아니면 강주한이라는 튼튼한 줄을 붙잡았을 때?
생각이 강주한에 닿은 순간 하선우는 우스운 기분을 느꼈다.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에 지껄였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홍콩의 컨벤션 홀에서 그를 마주친 순간 몰래 중얼거렸던 말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재수 없다는 그 말은 꼭 지금의 저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위화감의 또 다른 이름은 질투일 테니까.
* * *
13131……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던 하선우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넋을 놓고 있으면 가끔 이렇게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하곤 했다. 튀어나오는 광대를 손바닥으로 더듬더듬 감싸며 웃었다. 강주한의 아파트를 제집처럼 드나들긴 해도 착각할 게 따로 있지. 참나. 131313이라는 숫자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떠올려보면 속없이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다.
488231.
비밀번호를 꾹꾹 눌러 문을 열고 오피스텔로 들어간 그는 목을 조이던 넥타이만 대충 풀어 의자에 걸어두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컴퓨터를 켰다. 내내 머리 한켠에 머물러 일을 방해하던 생각을 확인해야만 했다.
특허청 홈페이지 주소를 주소창에 입력하려던 하선우는 잠시 행동을 멈칫하고는 조급증이 이는 마음을 타이를 방법을 초조하게 궁리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냈다. 풀럽을 따 맥주 한 모금을 마신 그는 입가에 고이는 쓴침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번호가 뭐였지, 뭐였더라.
혼잣말을 거듭하며 떡반죽처럼 흐물흐물해진 머리로 생각을 거듭했다. 한숨을 쉬고 손가락을 피아노를 치듯 허공 위에서 몇 번 움직여준 뒤에 특허청 홈페이지에 출원번호를 입력했다.
‘나노튜브 이용한 급속충방전과 그 제조방법’이란 제목의 글이 검색되었다. 제목을 클릭하자 특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펼쳐졌다. 공개번호와 공고번호일자, 등록번호를 세세하게 훑어본 그는 출원인과 특허 발명자에 입력된 이름을 보았다.
하선우는 ‘하선우’라는 글자를 숨죽여 바라보았다.
마우스 위로 포갠 손가락을 움직여 흰 글자 위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한번 의미 없이 긁어보았다. 부담스러운 감상에 젖어들지 않으려 괜히 비뚤게 웃어보았다. 글을 클릭하여 8페이지에 달하는 PDF 파일을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살펴본 그는 상세 항목별 검색 페이지에서 자신의 회사를 검색했다.
6년 동안 그의 회사는 국내에 79개의 특허를 등록해두었다. 천천히 특허의 제목을 훑어볼 때마다 추억이 과거를 향해 소급해 들어갔다. 어느 것 하나 고생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 회사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고생담을 나누고 싶다는 감상이 그의 마음 안에서 얼쩡거렸다.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 이석에게 전화를 걸어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볼까. 휴대전화를 꺼내 이석의 단축번호를 누르려던 하선우는 생각을 고쳐 새 인터넷 창을 열었다. 엘텍과 시스템 파워팩을 검색했지만 4월달 미국에서 열린 모터쇼와 관련된 기사만 뜰 뿐 GM과의 계약에 대한 최신 뉴스는 찾을 수 없었다. 계약 단계에 이르렀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거나 계약의 협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져 언론보도가 금지된 것 중 하나일 테다.
소문의 근거는 확실하지만 이석에게 알려주는 것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리는 것 같았다. 확실해지면 얘기하자. 그는 애써 부푸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다시 상세항목별 검색 페이지를 열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는 출원인에 엘텍을 적고 전체 검색을 하려다 그 기간이 너무 방대한 것을 깨닫고 설정기간을 근 1년간으로 좁혀 검색했다. 그는 검색 결과에 헛웃음을 흘렸다.
Total 6,121 Articles (1 / 205 Pages)
엘텍 전체 계열사에서 엘텍의 이름으로 출원된 특허가 근 1년간 6,121개였다.
아무리 봐도 믿어지지가 않아 그는 망연하게 마우스 휠을 굴렸다. 엘시스, 엘튼과 같은 이름이 다른 자회사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특허가 등록되어 있을 터였다. 6년 동안 79개의 특허를 냈던 NnG는 자랑할 입지를 다지지 못하고 민망한 구석으로 푹 꺼져버렸다.
1년 동안 6,121개와 6년 동안 79개의 특허를 나란히 떠올린 하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비교하는 건 곤란했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특허는 얼마든지 돈으로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엘텍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당장 엘텍의 종합기술원만 보더라도 수많은 산학기관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지 않던가.
그는 검색의 범위를 좁혔다. 특허 출원인을 엘텍전자의 자회사인 엘시스로 줄이고 연도를 올 한 해로 설정하자 68개의 결과가 검색되었다. 공개된 몇몇 특허는 익숙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몇몇 특허는 하선우가 협력업체로 소속된 팀에서 출원한 것이 분명한 특허였다. 특허 발명자는 로베르트 프란코이스, 하일 홀거, 야마다 켄, 전영섭, 김광일… 등, 선임과 팀장급 직책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는 세상이 멈춘 듯이 앉아 열세 개의 공개된 특허를 읽었다. 모두 읽고 난 뒤 그는 몇 가지는 인정했다. 연구진들이 개발한 배터리는 최초로 착안한 원리보다도 훨씬 진보되었다. 그러나 휴대폰이 음성신호의 전기적인 변환이라는 알렉산더 벨의 전화기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듯, 엘텍의 연구진들이 낸 특허 역시 그가 처음으로 출원했던 ‘나노튜브 이용한 급속충방전과 그 제조방법’의 원리를 배제할 수 없는 특허들이었다.
하선우는 제 아이디어가 남의 태를 빌리긴 했지만, 고꾸라져 죽지 않고 안정적으로 세를 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로열티보다 좋은 건 이쪽인지도 모른다. 연구를 사랑에 비교하자면 성과 없는 연구로 짝사랑만 하고 가는 공학도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사랑에 보답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연구가 필요한 곳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참 운이 좋은 편이라는 생각을 했다. 몸의 긴장을 푼 그는 깍지 낀 손을 가슴께에 올려두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듯 의자가 허공에 반쯤 걸려 아슬아슬하게 까딱거렸다. 한참 동안 정신적인 포만감에 젖어 있던 그는 눈을 떴다.
잠시 갈등하던 그는 출원인의 이름에 문도일을 적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께름칙했지만 더 이상 그와 관련된 일에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빈 페이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피곤이 몰려왔다.
어깨를 주무르며 컴퓨터를 끄려 했지만 그의 뇌리로 석연치 않은 이름들이 연이어 파고들었다. 성일금형, 문범석. 문도일의 부친이자 성일금형의 사장의 이름들이었다.
하선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쩌자고 쫄딱 망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손은 이미 반갑지 않은 이름들을 입력하고 있었다. 총 33건의 특허 결과가 검색되었다.
“어디 보자.”
하선우는 일부러 낭랑하게 중얼거렸다.
대부분이 플라스틱과 관련한 금형제작과 사출에 대한 기술특허였다.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던 하선우의 눈이 별안간 크게 뜨였다. 특허에 대한 특허청의 행정처분이 눈에 띄었다.
거절 [1] 사출압축성형법및사출압축성형장치
출원인: 성일금형, 발명자: 문범석, 문성일, 강상후, 문도일
무효 [2] 플라스틱 플레이트 및 플라스틱 플레이트 조립체
무효 [5] 플라스틱 사출 금형용 인서트
....
포기 [15] 휴대폰 몸체(Mobile phone case)
출원인: 성일금형, 발명자: 문범석, 안정호, 문도일
끝없이 이어지는 거절의 행렬을 하선우는 미동도 않고 살펴보았다. 가장 최근에 행정처리된 특허는 3년 전의 것으로 무효 처분된 플라스틱 플레이트 스팀몰드 공법이었다. 전의, 플라스틱 플레이트 스팀몰드 공법에 대한 것으로 무효 처분되었다.
35건의 결과 중에서 행정처리가 거절, 소멸되고, 무효 처리되거나 취하, 포기된 특허가 19건에 달했다. 절반이 넘는 개수였다.
하선우는 숨을 낮게 헐떡거렸다. 마치 끔찍하게 곪아 터진 누군가의 외사랑을 목격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