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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시생태보고서 (1) (10/26)

10. 도시생태보고서 (1)

그는 오전 회의 중간중간 민망한 낯을 한 김 부장과 눈을 마주쳤다. 데면데면 오가는 시선 속에서 하선우는 그녀로부터 더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이해를 느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지난주 금요일, 그녀의 추궁에 차갑게 굴었던 자신의 태도가 무척 무례하게 느껴졌다. 상관하지 말라는 식으로 굴었더니 김 부장은 정말 하선우에게 뻗어 나가던 자신의 관심을 깔끔하게 잘라내버렸다. 어쨌건 사적인 면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어색할 것이 분명했다. 그게 잘된 일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그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었다.

시생산한 단자 탭의 불량률이 15%나 되어 비상이 걸렸다. 엘텍에 납품 승낙을 받기가 어려운 수준이라 일산의 기술임원까지 울산에 소환되었다. 불량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이사가 울산에 내려가 있기로 했다. 회사 내부의 상황은 비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하선우의 머릿속은 꽃밭을 헤맸다.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를 꺼낸 하선우는 복잡하게 설정해둔 패턴을 드래그해 잠금을 풀었다. 메시지 앱을 터치한 그는 괜히 뺨을 긁적거리며 문이 닫혔는지 확인했다. 채팅앱을 실행한 그는 과거의 대화를 읽어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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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과학자처럼 집요하게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내려 가던 하선우는 웃을 듯 말 듯 얼굴의 근육을 움찔거렸다. 중간중간 강주한의 오타까지 귀엽게 느껴지는 데다가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아니, 부르다 못해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강주한과의 점심 약속을 위해 하선우는 재킷을 집어 들었다.

차를 을지로 부근의 한정식 레스토랑으로 끌고 간 하선우는 시동을 껐다. 대지를 점유한 빌딩숲 사이에 쉼표처럼 자리 잡은 건물은 3층짜리 단독주택을 개조해 만든 레스토랑이었다.

추녀마루 아래에는 현판 모양으로 새긴 레스토랑의 상호명이 적혀 있었다. 帝之珍味, 임금의 특별한 식사를 의미하는 한자를 화려한 필적으로 휘갈겨놓았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주차장 안으로 사무직 노동자들이 꾸역꾸역 들어서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출입구를 지나 카운터에 얼굴을 비추자 하선우를 알아본 점장이 그를 별채로 안내했다. 몇몇 중요한 고객만을 위해 개방하는 별채는 본관과 달리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과 뜰이 조성되어 있고 주변에 자그마한 전각 형태의 건물이 드물게 들어서 있었다. 푸른 정원 위로 부는, 도시의 냄새를 머금은 더운 바람을 맞으며 그는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장지문을 연 하선우는 강주한과 눈을 마주쳤다.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조용히 닫은 하선우는 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멀리 오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아뇨. 저도 여기 음식 좋아해요.”

“한식 먹고 싶었어요. 독일 음식은 너무 느끼해서 속만 더부룩했거든요.”

강주한은 넌지시 하선우의 손등을 쳐다보았다.

“다른 것도 먹고 싶었고.”

하선우는 왠지 웃음이 나 코를 만지는 척 입가를 가렸다.

그날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는 강주한이었지만 늘 옆에 있었던 것처럼 그가 편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함께 유치한 짓거리를 하는 사이였다.

하선우 관리인, 강주한 관리인.

서로의 휴대전화에 저장해둔 이름을 떠올린 그는 간질거리는 마음을 대신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씩 웃었다. 하선우의 얼굴에 담긴 짓궂은 미소를 본 강주한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왜 웃죠?”

“그냥요. 그냥 웃고 싶어서요.”

머쓱하게 대꾸한 하선우는 몸을 상 앞으로 바싹 붙여 앉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에게 응석을 부리는 기분이 되었다. 애도 아니고. 속으로 혀를 차던 하선우는 생각을 돌이켰다. 애 같으면 어떻단 말인가.

장지문이 열리고 트레이를 끌고 온 직원이 정갈하게 담긴 음식을 상 위로 옮겨놓았다. 문이 닫힌 뒤 하선우는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어요.”

강주한은 하선우의 달아오른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보고 싶었다는 멘트를 꼭 하고 말리라. 두고두고 결심한 기색이 역력한 상기된 얼굴을 보며 강주한은 말했다.

“이젠 계속 좋아하기로 마음 정한 겁니까.”

“그건 주한 씨 하는 거 봐서 정한다고 했잖습니까.”

강주한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내며 겉눈썹을 치켜떴다.

“나를 좋아하고 말고는 선우 씨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텐데요.”

들뜨는 마음을 공연히 감춰보려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강주한의 눈은 말하는 듯했다. 야유 대신 하선우는 큭, 웃고 말았다. 그냥 가감 없이 좋아해볼까. 밀당이니 뭐니, 머리 굴리지 말고? 순간 하선우는 서툰 청춘들이나 빠져들 법한 불타는 연애를 상상했다. 물론 그런 생각은 금방 사그라졌다. 달리 생각하면 이편이 진짜배기 연애 같아서 더 들뜨긴 했다. 강주한과의 밀고 당기기라니. 옛날 옛적에 소멸하여 흔적기관으로만 남아있던 연애세포가 싱싱하게 팔딱거리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어땠어요?”

“한국에서 같이 출장 간 직원들이 하나같이 신기할 정도로 정상적인 구석이 없는 사람들이라 고생 좀 했죠. …왜 웃습니까?”

“직원들도 전무님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고요?”

“그렇겠죠. 전반적으로 CTCO 부서 사람들이 이상하긴 해요.”

밥을 먹는 중간중간 강주한은 독일 출장 중에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를 얘기해주었다. 하늘과 땅 위에서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에 대해 투덜거리는 강주한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비행기에서 시간 보내는 것만 빼면 괜찮았습니다. 빌어먹을 자동차 이동시간도 견딜 만했고.”

지난 주말이 강주한에게도 영향을 미친 건지 분위기가 풀어져 있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꽤 수다스럽기까지 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폴란드의 베아토프 공장을 다녀왔는데 하필이면 통역하던 폴란드인의 자녀가 수족구병에 걸렸으며, 걸핏하면 그에게 썰렁한 농담을 하는 벨기에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였다. 또 지난 금요일 EUABC 직원들과 독일의 족발요리를 먹으며 무지하게 맥주를 마셔댔다는 시시한 얘기도 꺼냈다.

“선우 씨는요. 별일 없었습니까?”

강주한은 손바닥으로 천천히 턱을 매만지다 시원한 김이 오르는 냉차를 머금었다.

별일. 하선우의 지난 한 주는 별일투성이였다. 상상 속에서 천국을 다녀왔다. 실은 하선우는 로열티 문제로 강주한에게 GM과의 계약 건에 대해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고 미국에 본사가 있는 GM과의 거래 건은 그의 소관 밖인 듯했다. 물론 그런 이유는 표면적인 것이고 밥 먹으면서까지 사업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그를 멈춰 세웠다. 어쩐지 하선우는 강주한과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은 껄끄럽게 느껴졌다. 갑과 을의 관계를 연애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 확대할 필요는 없지만 그저 기분상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의 현실은 뒷발에 채는 일투성이였다. 15%나 되는 단자 탭의 불량률을 5% 내로 줄이지 않으면 엘텍전자의 납품승낙을 받을 수 없었고, 김 부장과의 관계는 껄끄러워졌다. 별스러운 근심거리는 도처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마음 한구석에는 문도일이란 이름의, 쓰라린 암종이 존재했다.

이전에 그를 짝사랑이란 이름으로 아파했다면 주말을 겪으면서 그 통증의 이름표가 바뀌었다. 하선우는 문도일이 불쌍했다. 그러나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껄끄러웠다. 그의 실패는 부조리해 보였고 그로 인한 고통은 공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실패가 어느 정도는 그의 무능력에서 기인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집중하면 안 될까요.”

눈앞에서 손이 흔들렸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 무안해 하선우는 애매하게 웃었다.

“무슨 생각합니까.”

“아뇨. 그냥 별다른 생각…… 무슨 얘기 중이었죠?”

“별일 없었냐고 물었습니다.”

“……주한 씨 없는 일상이야 뭐 시시하죠.”

강주한은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너무 대놓고 잘 보이려는 말을 하는 기분이 들어 하선우는 괜히 덧붙여 말했다.

“외롭기도 했고요.”

잔을 소리 없이 상 위에 내려놓은 강주한은 조금 더 진지하게 웃는 낯으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외로웠는데요.”

하선우의 가슴팍이 느린 속도로 크게 오르내렸다.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두 사람 모두 금욕한 지 열흘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민하게 하선우를 관찰하던 남자의 눈빛이 점차 가라앉았다. 강주한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속의 감정은 다른 빛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오후에 바쁩니까?”

“…시간 낼 수 있어요.”

“그럼 목동 들르죠.”

칼칼한 강주한의 목소리에 아랫도리가 갑자기 뻐근해졌다. 그 묵직한 느낌을 들키기 싫어 하선우는 점잖은 척을 하며 강주한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선우의 차로 목동으로 향하던 두 사람은 곧 이동의 방향을 틀어야 했다. 강주한의 회사에서 급한 호출이 있던 탓이었다.

“흥분 식었어요?”

하선우는 운전대를 만지작거렸다.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금방 빠져나올 테니 기분 돋우고 있어요.”

하선우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떻게 돋우는 건데요.”

“상상을 하는 거죠. 가령 우리가 사내커플이었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런 취향이에요?”

“글쎄. 상황극은 선우 씨 전문 아닌가.”

상황극이 왜 자신의 전문이냐고 말을 받아치려던 하선우는 떠오르는 기억에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 상황극이니, 남다른 유대감이니 하는 것들로 물고 늘어지려는 건지. 하선우는 엘텍의 문턱을 넘어 강주한과 사내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생각을 했다.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주며 비밀스러운 눈빛을 교환하고, 남모르는 은근한 스킨십을 즐기며 그의 개인집무실로 소환되는 상상 같은 것들이었다.

시청 삼거리를 지나 을지로 방향으로 직진한 차는 청계천 일대의 고층 빌딩 사이로 달려 나갔다. 종합기술원 외에는 엘텍그룹의 건물에 출입이 불가능한 하선우였기에 을지로의 본사는 그 역시도 아주 오랜만에 들르는 것이었다. 마침 도로 위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무교로를 탄 차는 막힘이 없었다. 빌딩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위압적인 높이의 엘텍 본사가 저 멀리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부서진 큐브를 수십 개 겹쳐놓은 듯한 모양의 거대한 빌딩을 보며 그는 일대를 지나는 사람 중에 저 건물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기다릴까요. 아니면 주차장?”

“시간이 조금은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주차장으로 내려가주겠습니까.”

강주한은 눈을 맞추며 부탁했다. 뒷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강주한의 손길이 기분 좋아 피식 웃으며 하선우는 다시 액셀을 밟았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게이트 앞에서 핸들을 꺾던 하선우는 자극적인 색상의 피켓이 화단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본사 앞에 고급스럽게 조성된 화단과 신경을 자극하는 피켓이 진저리나도록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며 중앙에 선 인물을 보았다.

그는 그을린 얼굴을 푹 눌러쓴 모자로 반쯤 가리고 있었다. 주차장 게이트로 들어섬과 동시에 그의 자취는 은하수를 품은 형태의 청동 조각상에 가려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하 1층의 임원 전용 공간에 차를 주차하자 강주한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금방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뒷머리에 손을 얹고 눈을 맞추며 웃어 보인 그는 재빨리 차를 빠져나갔다. 강주한의 말대로 기분이나 돋우고 있을까 고민하던 하선우는 대신 좌석을 뒤로 당겼다. 눈을 붙여 휴식을 취하던 하선우는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이미지에 다시 끔뻑거리며 눈을 떴다.

조금 전 화단에서 본 인물이 신경을 갉죽거렸다. 푸우우-, 입바람을 불며 멍하니 차창 너머 창백한 형광등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형광등의 침침한 빛을 쳐다보던 그는 피곤한 눈을 감아버렸다. 돌연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밝은 빛을 바라보다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풀 안에 붉은빛이 잔류하듯 그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상象이 있었다.

한 남자가 적갈색의 우비를 입고 엘텍의 본사 앞에 서 있었다. 붉은 글자를 휘갈겨 쓴 피켓을 든 1인 시위자였다. 비에 온도가 내려간 가을 날씨와 축축한 비내음까지 소소하게 모두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의 기억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날이 바로 하선우가 엘텍그룹의 투자심의회 임원들 앞에서 기술시연을 선보여 NnG의 운명이 바뀐 날이기 때문이었다.

고용 문제든 보상에 관한 문제든, 사회와 많은 연대를 맺은 기업이다 보니 엘텍은 분명 여러 가지로 갈등을 빚는 면이 있을 터였다. 그 역시 기업의 오너로 있으면서 많은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할 즘 복리후생과 급여에 관해 직원들에게 희망찬 비전을 강조하며 떠들어댔지만 지금까지 지켜진 것은 많지 않았고 간혹 승진을 놓고 실망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허심탄회하게 강주한과 이런 주제를 놓고 얘기해보고 싶은 한편,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선우는 눈을 떴다.

“내가 운전할게요. 나와봐요.”

“아뇨. 짬 나서 눈만 감고 있었던 거예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하선우는 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일어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차 밖에 선 채로 강주한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내가 운전할게요.”

강주한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는 할 수 없이 차 밖으로 나와 보조석에 올라탔다. 차에 탄 강주한은 하선우에게 작은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받아요.”

하선우는 종이가방을 빤히 쳐다보다 눈을 들어 강주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가방을 받아 든 그는 그 안에 포장된 기다랗고 작은 상자를 꺼냈다.

“뭔데요?”

강주한은 대답 대신 열어보란 눈을 했다.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던 하선우는 손바닥만 한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상자의 크기 때문에 넥타이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 안에 든 건 만년필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몸체는 잘빠진 유선형이었고 중간중간 메탈 소재의 링이 끼워져 있었다. 몸체와 달리 만년필의 뚜껑은 온통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단의 링과 캡의 상단에는 정교하게 몽블랑 로고가 세공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선물이면 가격을 의식하지 않겠지만 선물을 준 사람이 강주한이었다. 캡과 펜촉의 소재가 귀금속일 게 분명했다. 그는 만년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서류를 결재하는 것 외에는 자필로 뭔가를 적는 일이 드물었고, 컴퓨터가 보편화된 후에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기엔 너무나도 느린 손글씨로 편지를 써본 기억도 없었다.

“잘 쓸게요.”

“연애편지 많이 써줘요.”

“저 공대 출신인 거 아시죠?”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선우는 케이스 겉면에 금박으로 새겨진 로고를 보았다. 몽블랑이면 너무 비싼 만년필 아니냐고, 그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지만 선물을 받을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 하선우 역시 좀 지겨운 일이었다.

“근데 주한 씨.”

“예.”

“저 공금 횡령하냐는 소리까지 들었어요.”

강주한은 미간을 좁혔다.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하니까 주변에서 적응을 못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 옷장 좀 그만 채우면 안 될까요. 제가 너무 잘생겨서 부담스럽다고 막….”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요.”

하선우는 큭큭 웃었다.

“왠지 그 말 좀 설레는데요.”

강주한은 아랫입술을 깨문 하선우를 흘긋 쳐다보곤 주차한 차를 뒤로 슬슬 빼냈다.

“전무님은 까칠할 때 섹시한 것 같아요.”

“또 반했습니까?”

강주한은 싱겁다는 듯 웃었다. 양쪽으로 주차된 차 사이에서 차를 빼낸 그는 꺾인 핸들을 풀며 주차장 입구로 자동차를 몰았다. 하선우는 실외와 가까워질수록 빛을 받아 환해지는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러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피곤으로 가스러진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비비적거리다 은근슬쩍 그 안의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입구 밖으로 나오자 빛이 쏟아졌다. 빛에 적응하려 눈을 찌푸리던 하선우의 시야에 화단이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화단 안에서 엘텍 본사를 향해 서 있는 시위자의 피켓이었다. 강주한이 옆에 있기도 하고, 어쩐지 조금 민망한 기분에 그를 봐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눈길을 거두던 하선우는 미심쩍은 느낌에 몸을 틀었다. 차는 점점 더 속도를 더해 달려 나가는데 눈앞의 장면은 마치 슬로모션 같았다. 실제보다 더디게 현실의 시간이 재생되는 기분에 하선우는 눈을 깜빡거렸다.

“저기 잠…깐만요.”

강주한의 반응이 더디자 하선우는 좀 전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시만 멈춰주세요.”

강주한은 하선우의 얼굴을 보았다.

하선우의 얼굴은 포성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눈앞에 둔 군인처럼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으려던 강주한은 질문 대신 하선우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시 하선우에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 하선우의 얼굴은 비딱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켠 뒤에 벨트를 풀었다. 강주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을 뻗어 하선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무슨 일입니까.”

“잠깐만요. 확인할 게 있어서요.”

하선우는 커다란 방해를 받은 듯이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성급함이 그대로 묻어난 목소리에 강주한은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 하선우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을 뿐이지만, 어쩐지 그의 뒷모습은 강주한에게 캔버스 화폭을 찢어버리는 듯한 격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선우는 얼마간 휘청거리더니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마주 섰다. 하선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주한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를 꽉 잡고 선 그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감정을 빚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아주 가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타고난 기질은 불의라는 동력을 먹고 자라 발전하며 고요한 내면의 벽을 부서트리고 세상 밖으로 폭풍처럼 뻗어 나간다. 강주한의 부친은 그들을 두고 선동가라는 표현을 썼는데, 서동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서동현에게 세상은 명도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엔 흑과 백, 이분법으로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모순을 혐오한 그에게 흑색지대에 서 있는 사람들은 탐욕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들이며, 세력을 가진 집단으로 존재했다. 그는 옳고 그름의 흐릿한 인상 비평으로 어느 세력에 속했는지를 판단하고, 인간유형을 흑과 백으로 축소하는 일관된 청렴함으로 자신을 단련해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선동가의 딸로 태어난 여자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달리 세상을 갖가지 빛깔의 색실을 엮어 만든 태피스트리 같은 것으로 보았다. 선한 사람 역시 악인과 마찬가지로 모순된 존재였다. 선인이 될지, 아니면 악인이 될지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가 나아가는 방향에 의해 정해진다고 여겼다.

여자는 상징을 의심하고 인간 존재의 불안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돈과 권력이라는 강주한의 상징성에 의문을 품었고 그가 가진 인간적인 면에 자신의 기대를 걸었다. 여자의 눈에 강주한은 흑진주를 갈아 분을 입힌 주단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빛깔을 지녔지만 흰빛과 광택이 감도는 흑진주의 이중성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듯, 그녀는 남자에게 빠져들었고 자진하여 회색분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20대 초반에 미국에서 만났다. 그들이 다니던 대학과 대학원 동문과 재학생이 모이는 자리에서였다. 처음에는 정치와 경제적인 입장 차이로 거리를 두었지만, 붙임성 좋은 서유임의 성격 덕분에 그들은 사소한 부분부터 접점을 만들어갔다.

강주한이 아내 서유임과 처음으로 본 영화는 록키였다. 미국의 보스턴에 위치한 그녀의 아파트에서 두 사람만을 위한 시간을 갖던 중, 여자가 눈을 빛내며 DVD를 가져왔다. 로맨스 장르의 영화일 거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젊은 사내들이나 좋아할 법한 마초 같으면서도 순정적인 영화를 골랐다.

‘넌 훌륭한 선수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런데도 넌 고리대금 깡패의 똘마니 노릇이나 하고 있지.’

남자는 무명의 복서로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처지이지만, 그는 나름대로 치열한 인생을 살아왔다. 다만 링 위에서 승리의 대가로 그에게 허락된 건 공허와 변변찮은 금액의 상금뿐이다.

구겨진 종잇장처럼 살았던 그에게 당대 최고의 선수인 챔피언 아폴론과 결전을 치를 기회가 주어진다. 남자는 시합을 받아들이지만, 그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남자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목표는 시합에서의 승리가 아니다. 그저 15회 마지막 라운드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가 실패자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어 꾸었던 소박한 꿈이었다. 그리고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마지막 15라운드를 버텨낸다.

서유임은 한 인간이 어두운 시대를 벗어나 빛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15회를 버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록키와 달리 그녀는 결혼생활을 버티지 못했다. 그녀의 바람과 달리 결혼생활은 서로에게 무엇을 증명하지도, 감동을 주지도 못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강주한은 모든 것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그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배우자로서, 연인으로서, 친구로서의 의무를 다하지만, 그 속에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가혹한 면이 숨어 있다고도 했다. 여자는 반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실이라고 여겼던 얼굴이 실제로는 최면에 불과했으며, 그 진실을 깨달은 뒤론 매일 마주하는 얼굴 너머로 어떤 생각들이 떠다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심지어 아내는 강주한의 모든 행동에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지레짐작하곤 했다.

그는 오랜만에 담배를 물었다. 죽은 아내의 그림자 위로 하선우의 모습이 겹쳤다. 차 문을 열고 서둘러 달려가던 하선우는 절박해 보였다. 낯선 남자는 지나치게 피로해 보였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팔목을 잡아당긴 하선우를 일별한 그의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던 강주한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자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이쪽을 향했다. 차창 너머의 강주한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눈동자에서 펄럭이는 감정의 파고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은 영화의 스틸컷처럼 한참 동안 정지해 있었다.

애써 흥분을 감춘 목소리로 다음으로 약속을 미루자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인지는 충분히 파악했다. 100% 확신할 수는 없어도 단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강주한은 그저 두 사람의 해후를 방해하는 이물질에 불과하다는 것.

그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연락처 목록에는 연결되지 않은 일곱 통의 전화가 기록되어 있었다. 점심시간 이후로 지금까지 강주한이 하선우에게 시도한 통화내역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타고 남은 재가 허벅지 위로 떨어져 있었다. 필터와 근접하게 타오르는 불씨를 쳐다보던 그는 펜을 돌리듯 불씨를 품은 담배를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아슬아슬한 열기가 손가락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길 반복하며 뭉글뭉글한 기체를 피워 올렸다. 그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온 안 비서의 손에는 파일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보고를 위해 입을 떼려던 안 비서의 눈이 강주한의 손가락 사이에서 위태롭게 움직이는 불씨에 닿았다. 안 비서는 잠시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지시하신 관련 서류 가져왔습니다.”

파일 케이스를 건네며 안 비서는 덧붙여 말했다.

“R&K의 1차 협력업체 사장이었습니다. 이름은 문도일입니다.”

강주한은 그제야 재떨이에 불씨를 짓이겼다.

“하선우 사장의 대학 선배라고 합니다.”

비스듬히 뜬 눈으로 안 비서를 쳐다보던 강주한은 담배 케이스에서 한 개비를 더 꺼냈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세요. 조용히 대꾸한 그는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며 천천히 보고서를 넘겼다.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찬찬히 뱉어내자, 매운 연기가 눈앞을 어른거려 눈살을 가붓이 찌푸렸다. 그는 문도일의 생년월일, 졸업한 학교와 같은 기본 신상정보는 물론, 그가 엘텍의 하위 계열사를 대상으로 걸었던 소송내역을 꼼꼼히 확인했다.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부모님과 함께하기로 한 저녁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별관은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강주한은 건물 밖으로 나온 뒤 대기하고 있던 전동카트에 올라탔다. 1차선의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따라 더디게 달린 카트는 현성당 앞에서 멈춰 섰다.

유년 시절의 그는 건물마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줄 알았지만, 나이가 든 뒤에 주거지마다 이름을 지을 만큼 사람들은 많은 건물을 소유하지 못했으며 10여 채의 건물을 단순히 주거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상주하는 고용인들도 그에게는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여서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 집에 발을 들인 아내는 곳곳마다 눈에 띄는 고용인들을 보며 숨이 막힌다고 했다. 그녀의 말 때문인지, 강주한도 어느 순간부터 고용인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다. 아내가 죽은 뒤로 그녀를 연상하게 하는 물건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음에도 가끔 그는 고용인들의 얼굴에서 아내를 발견하곤 했다.

허리를 숙이는 직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강주한은 넓은 로비와 연결된 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간소하게 꾸며놓은 갤러리와 이어진 야외 테라스에는 이미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형 왔어?”

손을 흔들며 강주한을 반기는 강태한의 얼굴에는 실룩거리는 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래. 단답으로 대답한 강주한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어머니, 아버지와 눈을 마주했다. 숱이 많은 회색 겉눈썹을 들어 올린 그의 부친이 말했다.

“독일에 다녀왔다고.”

“예. 바로 전화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일이 남았으면 그럴 수도 있지.”

사람 좋게 웃으며 강주한의 부친 강제한은 뒤에서 대기하던 직원에게 손짓했다. 여기 상 좀 차려줘요. 그는 먹기 좋게 발라낸 생선구이를 집으며 외국 경쟁사의 이야기를 곁들어 폴란드에 세운 공장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창업주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강제한은 열네 살, 사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나이부터 아버지의 명령으로 늘 이사회나 사장단 회의가 소집될 때 부친의 곁에 앉아 회의를 참관하곤 했다. 그는 일흔을 목전에 둔 지금에도, 사업 외의 다른 곳으로는 발을 헛디딘 적이 없었고, 덕분에 몸에 밴 권력을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휘두르는 사람이 되었다. 강제한은 늘 부드럽게 말했지만, 팽팽하게 당긴 시위에 걸린 활처럼 목소리에는 긴장을 조성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김 사장에게 보고받았다. 엘시스 브랜드를 개편한다고 했다고.”

“예. CI 전면 개편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전지사업이 아무리 네 입지를 다지기 위한 일이라고는 해도 엘시스가 엘텍 브랜드에 진 빚을 생각하면 내 생각엔 전면 개편의 필요성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문제도 중하지만 연초에 정기 임원 인사발표에 잡음이 끼지 않도록 해라. 네 경영권 확장이 걸린 문제니까.”

수저를 들기 전 강주한은 국을 뜨는 부친을 응시하며 잠시 침묵했다. 그사이 강제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진이한테 온 연락은 없었나?”

“유통 해외 법인 문제로 연락이 왔습니다. 비업무 토지 매각해서 자금난 해소에 도움 좀 달라 하더군요.”

강제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곁에 있던 그의 아내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요즘에서야 경영공부 하는 애가 뭘 알겠어요. 일은 김 서방이 다 하죠. 사위라고 하나 있는 녀석이 그리 천치인지 누가 알았겠어요.”

“그 천치를 고른 게 우리 딸이지.”

강제한의 한마디에 그의 아내는 입을 다물었다.

“제 오빠한테 졸라댄 걸 보면 차마 내게 연락은 못하겠는 모양이지.”

희끗한 눈썹을 찌푸려 못마땅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두고 평강공주와 온달이라고 하지. 금수저 물고 태어난 여자가 근본도 없는 놈을 이곳으로 끌어들였으니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보다.”

코웃음을 친 강제한은 말했다.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 하지만 온달은 바보가 아니었을 거다. 궁궐 밖의 소문이 평원왕의 귀에 들어갈 정도면 온달의 행동거지가 보통이 아니었을 거란 얘기지. 평강공주 역시 세상물정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공주는 패물로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서 노비와 집, 땅과 세간을 사고 온달이 타고 달릴 말을 샀지만, 예진이는 제가 가진 것으로 김 서방이 달릴 말을 사줄 생각이 없어. 제가 가진 것을 다 잃고도 여전히 제가 궁궐 안의 공주인 줄 알고 궐 안의 세간을 내다 팔아 저를 달라 징징거릴 뿐이지. 두 사람 다 평강공주도 바보 온달도 아닌 주제에 욕심만 가득하단 말이다.”

강제한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세게 찼다.

“주한아. 예진이에게 대신 말 좀 전해라. 일주일 내로 구조조정단 구성하라고 할 거라고. 인원은 사내 전문가에서 충원하라 하고 예진이에게 김 서방의 고용 승계는 보장 못한다고 해라. 아랫사람이 대신 옷을 벗는 데도 한계가 있어. 몇 년 더 공부하면 알게 될 거다.”

어머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얼굴로 그녀는 묵묵히 잔을 기울였다. 침묵이 감도는 식탁 위에는 음식을 씹는 소리와 국을 뜨는 소리만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여태 말없이 수저만을 뜨던 강태한은 눈을 들었다.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강주한과 속상한 내색을 여과 없이 내보이는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닌 척하긴 해도 강주한 역시 아버지라는 이름 앞에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으나, 자식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부성애와는 별개로, 늘 마음 한편으로 회사의 자산가치를 재듯, 자질에 관한 점수를 매기고 있음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전을 집던 강제한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은 듯이 말했다.

“서 의원님 이번 주에 찾아 봬라.”

눈을 들어 올린 강주한은 아버지의 입술 근처를 쳐다보았다.

“유임이가 그렇게 갔어도 서 의원에겐 네가 아직 사위지. 네게 도움이 될 어른이니 서운하게 굴지는 마라.”

“예.”

“술 좋아하는 양반이니 선물도 적당히 드리고. 그럼 의원들한테 저게 강주한한테 받은 거라고 드러내고 말할 거다. 아직도 엘텍과 우호적이라는 소문도 자연스레 여기저기 흘러들어갈 테고.”

“알겠습니다.”

여지를 남기는 짧은 적막이 흘렀다. 대답하는 강주한의 목소리가 낮았다. 껄끄러운 침묵이 남기는 어떤 여파 속에서 가만히 아들의 안색을 살피던 강제한이 물었다.

“왜. 그런 게 아직도 거북하던?”

“아닙니다.”

심중을 훤히 들여다보듯 아들을 바라보던 강제한은 시선을 거두고 태연히 수저를 움직였다.

“네 나이 열아홉에 뭐라고 했었지? 네가 다 가질 거라고 했었나 안 했었나. 근데 사장 자리 준다 하니 지금 다 가진 것 같드나.”

아들의 표정은 묘했다. 그는 느긋한 태도로 식사를 하며 아들의 모호한 시선을 받았다. 반찬을 집어 꼭꼭 씹어 삼킨 뒤, 물로 한 번 가볍게 입가심을 한 뒤에 그는 입을 열었다.

“넌 아무것도 가져본 적이 없다. 네가 가진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조금 더디게 흘러나온 아들의 대답에 눈을 살짝 찌푸린 그가 다시 수저를 들어 올렸다.

짧은 시간이 지난 뒤 강주한은 그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있던 어머니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여행은 즐거우셨죠?”

“아들 덕분에 잘 다녀왔지. 네 외숙부한테 시달린 것 빼곤.”

그녀는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하고 그간의 사정을 대신하듯 지친 웃음으로 대신했다. 지금껏 말없이 가족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강태한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외삼촌이? 외삼촌이 전화해서 뭐라고 해요?”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겠지.”

“중풍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서 오늘내일 한다더니 기운 좋으시네. 아직 팔팔한 게 살 만하신가 봐?”

“태한아.”

“왜요.”

엄정한 여자의 말에 쾌활하게 웃는 낯으로 강태한은 대꾸했다.

“삼촌은 할아버지 유산 좀 나눠 갖자는데 왜 그런대요. 그걸 다 삼촌이 꿀꺽하려고 하는 거 좀 우습지 않아? 비자금도 아니고 유산 좀 나눠 갖자는 건데. 하여간 가진 사람들이 더 지독하다는 말이 맞아요. 참 욕심도 많아.”

은연중에 자신을 비꼬는 것임을 알아차린 강주한이 무의식중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강태한은 입술을 실그러트리며 웃었다. 재빠르게 여자를 돌아보며 그는 말했다.

“대법원에서 소송 이기면 나눠 주실 거죠? 어머니?”

여자는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불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송은 그녀의 명의로 유산을 분배받고자 벌인 일이었으나 처음부터 여자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세간의 관심을 끌고 싶지는 않아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녀에게 허락된 일은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묵묵히 식사를 할 뿐, 여자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강태한은 재촉하듯 말했다.

“왜요. 어머니 재산이잖아요. 누가 뭐라고 지껄이건 간에 공식적으로는.”

강조하듯 뒷말에 힘을 준 강태한은 여자가 입을 꾹 다문 채 대꾸하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실룩거렸다.

“왜요. 형이 이번에도 나눠 갖기 싫대요?”

“아들.”

“형은 좋겠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형 편이라서.”

말없이 듣고 있던 강제한이 수저를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알아요. 저 못 믿으시는 거. 아니, 솔직히 말하면 주는 게 아까운 거겠죠. 형에게는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데 막내라고 낳아놓은 녀석이 걸리적거리니까 피곤한 거죠. 그래도요, 아버지.”

한숨을 쉰 강태한은 피곤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저 사고 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너. 지금까지 친 사고로는 부족한 거냐.”

“그러게요. 그런데요, 아버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사고도 칠 수 있어요.”

“호텔, 광고, 캐피탈까지 다 네 앞으로 넘겼다. 뭐가 불만이냐!”

“예. 주셨죠. 저한테는 쭉정이만 넘기고 형한테는 알맹이만 주셨죠. 전자, 중화학, 자동차, 생명, 건설. 저 홍콩으로 쫓아 보낸 사이에 다 형 앞으로 넘기셨잖아요!”

“네놈한테는 쭉정이도 과분해!”

순간적으로 강태한은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예민하게 눈꺼풀을 깜빡거리던 그는 탈선하던 격렬한 감정을 곧바로 바로잡았다.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마카오에 카지노 하나만 세워주세요. 하나 더 얹어준다 생각하시고 제주도에 터 닦아주셔도 좋고요.”

적막 속에서 긴 대치가 이어졌다. 형형하게 뜬 강제한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던 강태한은 천천히 이를 앙다물었다. 턱 근육이 우묵 패도록 힘을 줘 입매를 굳히던 그는 감정을 싹 잘라내곤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그럴 리가 없으시죠. 여태 그랬듯이 신소리로 취급하세요. 아니면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시든가요. 잘하시던 거잖아요.”

“태한아!”

점점 노성을 띠어가는 강제한의 목소리에도 강태한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자존심의 칼을 서로에게 겨눈 채, 그 누구도 먼저 칼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강태한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장을 갖췄다는 사실만큼은 감추지 않았다.

“아들로서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서 죄송해요. 제가 철없이 굴었다는 걸 저도 모르는 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기업 이미지를 생각하고 사업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제가 과했던 부분도 없잖아 있었어요. 그런데요, 아버지. 형도 마냥 순진하진 않았어요.”

강제한에서 강주한으로 시선을 옮기며 그는 느슨하게 늘어트린 말투로 말했다.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요즘 형 사내놈 하나 끼고 살잖아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강태한은 강주한의 눈을 마주했다. 한쪽 눈꺼풀을 가늘게 뜨고 표정의 변화가 없는 강주한을 지켜보던 그는 언제 상대방을 도발했냐는 듯 웃음을 지우고 눈을 내리깔았다. 태연자약하게 잔을 찾아 손을 뻗은 강태한은 빈 잔에 차를 채우고 호로록 소리 내어 찻물을 머금었다.

찬물을 뿌린 분위기 속에서 강태한은 손끝으로 살살 찻잔의 받침을 쓰다듬는 강주한의 기다란 손가락을 흘끔거렸다. 검지로 살살 테두리를 문질러대는 손길에는 성난 기색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어머니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를 들으며 강태한은 웃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밥상머리에서 할 만한 얘기가 아닌 것 같구나.”

버릇없이 구는 막내아들을 나무란 여자는 잠시 떨리는 숨을 정리했다. 우두커니 장남을 쏘아보는 자신의 남편을 숨죽여 흘끗거린 그녀는 불씨가 커질세라 남편이 입술을 떼기 전 서둘러 물었다.

“태한이 말 정말이니?”

난감하다는 듯 내리깐 눈을 느리게 깜빡인 강주한은 곧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입니다.”

강주한은 놀란 여자에게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태한이가 돈을 쥐여 주며 만나던 여자들처럼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엘텍의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으로 부심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오히려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착실하게 사는 정숙한 인물이죠. 원하신다면 언제 한번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여자의 가슴팍이 눈에 띄게 오르내렸다.

“그만해라. 말도 안 되는 소릴.”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는 강주한이 더는 말을 잇지 못하도록 싹을 잘랐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불씨를 끌 생각이 없었다.

“네가 원래 그런 쪽의 사람들을 좋아했던 거냐.”

“여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를 높이는 아내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강제한은 말했다.

“그런 거냐?

“글쎄요……. 그걸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 뭐냐.”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구태여 변명할 만큼 그 사내놈이랑 진지한 거냐.”

“아버지.”

“…….”

“아시다시피 저는 늘 진지하게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만 누구처럼 정신을 흐릴 정도로 아둔하게 굴지 않았을 뿐이죠.”

강주한은 강태한의 가슴께로 비슥한 시선을 보냈다가 눈길을 돌려 아버지를 또렷이 응시했다. 거북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강제한은 입술을 씰그러트리며 말했다.

“역겨운 소문나서 좋을 거 없다. 탈나지 않게 적당한 때에 정리해라.”

아버지와 말없이 시선만 교환하던 강주한은 조금 건성으로 느껴지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쯤은 얼마든지 예상했다는 듯이 무심하게 반응하는 아들에게 한 소리 하려던 여자는 아들과 남편을 번갈아 볼 때마다 빚어지는 감정의 혼선에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과묵하게 제 몫의 식사를 마치고 찻잔의 차까지 모조리 비워낸 강주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네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강주한은 그를 뒤따라오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테라스를 벗어났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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