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L] 도둑들 4-11. 도시생태보고서 (2) (11/26)

11. 도시생태보고서 (2)

“어묵탕 나왔습니다.”

종업원은 테이블의 적당한 빈자리에 전골 그릇을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탕 안에는 꼬치에 꽂힌 어묵과 각종 야채가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하선우는 문도일이 술자리마다 안주로 꼭 어묵탕을 시켰던 것을 떠올렸다. 1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와 관련한 것들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스운 한편 씁쓸했다.

담배를 사오겠다며 자리를 뜬 문도일의 빈자리를 하선우는 오도카니 지켜보다, 관자놀이에 맺힌 땀을 휴지로 닦아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스르르 땀이 솟는 여름이었다. 하선우는 문도일의 새까맣게 탄 얼굴을 보며 불사르는 땡볕 더위에 허덕였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앉았던 의자 옆에는 우드락으로 만든 피켓이 벽에 가지런히 기대어져 있었다.

‘엘텍전자의 벤처기업 길들이기 백태를 지탄한다!’, ‘중소기업 죽이고 엘텍전자 편드는 산업통상자원부와 사법부, 특허청을 고발한다!’ 같은 과격한 문구가 적힌 피켓이었다.

조금 전, 엘텍그룹의 건물 앞에서 재회했을 때만 해도 서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내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인지 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어색해지고 말았다. 그 순간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하선우는 이대로 문도일과 서먹한 작별인사만 나눈 채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그의 처지를 연민해서가 아니었다. 뜨거운 물을 확 끼얹은 것 같은 울컥거리는 느낌이 치달아 올라 하선우는 붙잡은 문도일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순간 강주한이 차에서 내려 하선우에게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는 무언의 재촉을 했다면, 상황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잡은 문도일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문도일이 뭔가를 그에게 부탁하지도, 반갑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식사하셨어요? 전 아직인데.’

하선우는 직전에 강주한과 근사한 한정식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온 길이었지만, 땡볕이 내리쬐는 엘텍의 본사 건물 앞 도로는 회포를 풀기에 적당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기 집에 앉아 삼겹살을 구웠다가, 허름한 외관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엘텍전자의 본사 건물까지 그가 밀고 들어온 사연이 궁금하면서도, 하선우는 섣불리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강주한과 함께 있던 직전의 상황과 부도난 문도일의 회사에 주식회사 NnG의 간판이 걸려 있는 현실 때문에 어떤 위로의 말도 가식적으로 비칠 게 분명했다. 그러나 하선우의 우려와 달리 문도일은 그가 떠밀려온 세월에 대해 일부러 숨기진 않았다.

‘해묵은 일들이야.’

하선우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문도일은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가 노심하여 만든 웃음은 어딘가 힘겨워 보였다.

문도일의 말처럼 그는 지금 해묵은 특허 시비를 벌이는 중이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완전히 끝났지만 어쨌든 문도일은 홀로 엘텍을 상대로 지질한 투쟁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7년 전 엘텍하이스코에서 성일금형이 등록한 금형 제작과 사출에 대한 기술특허를 없애달라는 심판을 특허 심판원에 청구했다. 그 당시 성일금형은 국내 유수의 휴대폰 제조업체인 R&K와의 거래에서 떠안은 재고 문제로 자금난을 겪다가 가까스로 은행에 진 빚을 갚고 간신히 고비를 넘긴 상황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갑자기 공문이 쌓이기 시작했지. 나는 물론이고 채무불이행과 재고 걱정에 빠져 있던 아버지까지도 경험한 적이 없는 종류의 일이었어.’

엘텍하이스코에서 특허 심판원에 성일금형의 특허등록 무효심판을 청구한 데는 성일금형의 인맥과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문도일의 부친을 비롯한 기술진은 90년대 R&K에서 한솥밥을 먹던 관계였다. 도일의 부친은 R&K에서 상무를 지내다 90년대 말 회사를 나와 울산에 성일금형이라는 회사를 창립했다. R&K에서 한솥밥을 먹던 팀장이 성일금형의 부장에게 접근해 특허등록을 한 시제품의 개발사양을 살펴보고, 참관하기도 했다.

문제는 R&K의 팀장이 엘텍전자의 자회사인 엘텍하이스코의 보안팀장으로 이직을 하면서 발생했다. 보안팀장이 성일금형에서 습득한 개발사양을 바탕으로 엘텍하이스코에서 부품을 생산해 R&K에 납품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일금형의 거래량은 줄었고, 생산해둔 재고 역시 약정상의 문제로 떠안아야 했다.

결국 문도일과 그의 부친은 특허 법원에 엘텍하이스코를 상대로 기술 관련 특허 침해 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성일금형의 특허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해외에 있던 기술을 들여와 국내에 등록한 것이기 때문에 특허 침해 유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냐, 돛대인데.’

‘아뇨. 저 안 피워요. 괜찮아요.’

그는 하선우와 가슴팍에서 꺼낸 담뱃갑을 번갈아 쳐다보곤 느리게 마지막 남은 담배를 입가에 가져다 물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그 손을 관자놀이에 얹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말을 이었다.

‘엘텍하이스코에서 4년 전엔가? 플라스틱 사출 압축 성형법 및 사출 압축 성형 장치라는 명칭의 특허를 출원하려고 하더라고. 특허청에서 기존 특허와 충돌한다면서 등록을 해주지 않으니까 모두 뜯어고쳐서 다시 냈어. 거의 대부분의 특허청구 항목을 삭제하고 일부 내용을 분할해서 따로따로 쪼개서 특허를 출원하는데, 이건 답이 없더라. 국내 특허는 물론이고 해외 특허까지 전부 다 그런 식이었어. 그리고 1년 뒤에는…… 성일금형의 기술특허가 이미 해외에 출원된 기술과 유사하다는 점을 입증해서 국내 특허를 무력화시켰어.’

지금까지 홀로 독백을 하듯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그의 가슴이 얕게 들썩였다.

‘빼앗지 못한다면 말소시켜버리겠다는 거지.’

허리를 웅크린 채로 그는 담배를 태우며 쓰라린 기운이 스민 시선으로 아무것도 없는 회색 바닥 어딘가를 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하선우를 보았다. 조금 헐떡거리며 숨을 가다듬은 문도일은 입술을 뗐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버텨보다 재작년 7월에 최종부도 처리가 됐어. 그게 끝이다.’

필터 가까이 태운 담배를 종이컵에 비벼 끈 그는 담배가 더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도일은 안주로 시킨 탕이 적당히 식을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숨을 가다듬던 문도일이 하선우는 영 마음에 걸렸다.

문도일은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안주 드세요. 속 쓰리실까 봐 어묵탕 추가했어요.”

“고맙다.”

“아니에요. 형 좋은 데 모시고 싶었는데.”

그는 씩 웃었다. 수저를 드는 대신 그는 반쯤 채워진 잔에 술을 첨잔했다.

“됐다. 노가리 천 냥에 파는 술집도 지금 나한테는 과하다. 너야말로 좋은 옷에 냄새 배겠어.”

하선우는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술잔을 비우자 문도일이 하선우의 빈 잔을 다시 채웠다.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는 그를 하선우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햇볕에 까맣게 그을리고 뿌리째 뽑혀 나온 나무처럼 메마른 피부, 추레하게 늘어난 티셔츠와 구김이 잔뜩 진 반팔 셔츠. 메이커는 있지만 오래 신었는지 잔뜩 닳은 운동화와 색이 빠진 진청의 청바지를 천천히 눈에 담았다.

형은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오랜만에 만난 벗에게 가장 흔하게 건네는 물음을 혀끝에 올려놓고도 하선우는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실의 강퍅함을 문도일이 토로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설령 문도일을 위로한다 하더라도 그에겐 진실이 결여된 위선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몇 번이나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하선우는 술기운을 빌려 말을 꺼냈다.

“형.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땅땅하게 뭉친 어깨를 주물거리며 문도일은 말했다.

“시위하고 먹고살려고 일도 해. 쉴 때는 피켓 들고 나와 저게 엘텍 사장이려니 하고 엘텍 건물 노려보고. 사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분풀이하는 거다.”

그는 웃었다. 대단한 거 하나도 없다는 듯이.

“근데 간사하지. 예전에는 분풀이만 하느라 주변이 안 보였는데 주머니가 무거우면 마음이 가볍고, 주머니가 가벼우면 반대로 무거워지는 게 사람 마음이더라. 물건 떼서 지하철에서 장사하고 저녁에는 배달일 해. 주말에는 대리운전하고. 막상 찾아보니 먹고살 길 많더라고.”

하선우는 망설이다 물었다.

“힘들진 않으시고요?”

이내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후회했지만 문도일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젠 일이 두렵지는 않다.”

힘드냐는 물음에 두렵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고생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말로 들렸지만 그 말을 곱씹을수록 하선우는 그런 의미로 대답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일이 두렵지 않다는 말은 예전에는 일이 두려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건 일이 힘들지 않다는 말과는 전혀 맥락이 달랐다.

“처음 몇 달간은 세상과 나 사이에 담을 치고 살았고, 그다음에는 분풀이하려 서울에 와서 시위도 해보고 사방으로 방법도 알아봤는데 통하는 게 없더라. 결국 입에 풀칠하려고 생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물건 팔고, 술 취해 주정 부리는 사람들 운전해줬어. 좋은 대학씩이나 나와서 이런 일 하며 사는 게 수치스러웠지만, 이제는 그 수치라는 것 때문에 나를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까지 내 존재를 증명하며 살 필요는 없더라. 내가 나를 인정하기로 한 거지. 아마 초월했나 봐.”

하선우는 건조하게 웃는 문도일을 잠잠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심장을 날카로운 바늘로 쿡쿡 찌른 것처럼 아파와 하선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형은 뭔가.”

“뭔가라니. 뭐?”

하선우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갉작거리다 조금 뜸을 들여 말했다.

“여전히 빛나시네요. 여전히 무적인 것 같고.”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진지한 하선우를 보고는 놀림을 당한 사람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적은 무슨. 그는 그저 소주를 따르며 쓰게 웃고 말 뿐이었다. 건성으로 자신의 접시에 놓인 안주를 뒤적거리던 그는 눈을 들어 하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야말로 사과 속살 같다.”

“……예, 예?”

“예전이나 지금이나 피부가 허예서 샌님 같은 게 그대로라고.”

하선우는 빠르게 눈을 끔뻑거렸다. 괜히 속이 뜨거워서 그는 침을 몇 번이나 천천히 삼키고 또 삼켜야 했다. 뭉게뭉게 마음속을 뒤채는 생각들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꾹꾹 견고하게 짓눌렀다.

“다시 일해보실 생각 없으세요?”

문도일은 고개를 저었다. 말이 없는 그에게 괜히 조바심이 일어 하선우는 몇 마디 말을 더 덧붙였다.

“그래도 사업하시던 가닥이 있는데 아쉽잖아요. 얼마든지 재기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쎄.”

문도일은 풀썩 웃었다.

“빚이라는 게 내가 가진 욕심만큼 불어나더라. 가족, 친구 돈 끌어다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내 욕심으로 다른 사람 괴롭히는 거 할 짓도 아니고.”

그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너는 빚 없이 잘하고 있고?”

“빚 없이 사업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더라고요. 그래도 이자 비용을 감안한 수익성을 따지면 좋은 편이에요.”

문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얘기나 좀 해봐라.”

특유의 낮은 저음으로 문도일은 툭 던지듯 말했다.

“내 꿉꿉한 얘기 더 들어서 뭐해. 너야말로 어떻게 지내?”

“저야 뭐…….”

하선우는 말을 흐렸다. 문도일은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의자를 당겨 앉아 하선우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하선우가 말이 없자, 그는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석이랑 동업한다는 소식은 들었다.”

“예. 휴대폰 배터리 부품 만들어요.”

“잘나간다 하더니만 사실이었네. 신수도 훤해지고.”

“회사 차린 지는 좀 됐어요. 철없을 때 석이 형한테 낚인 거죠.”

피실피실 문도일은 웃었다.

“초반엔 좀 힘들었었는데 작년부터 좀 사정이 나아졌어요. 일산의 공장이 과부하라 어쩌다 부동산 경매 입찰을 하게 됐는데 그게 형 회사였더라고요. ……서운하시죠?”

“서운하기는. 임자가 있으면 가져가는 거지.”

그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누가 가져가도 마찬가지였어. 땅이나 건물이 사람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고.”

저음 탓에 그의 목소리가 다소 갈라졌다.

“내가 이러는 건 미련 같은 거지.”

픽 바람 새는 웃음을 흘린 그는 비스듬히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을 비웠다. 그의 눈은 빼앗긴 과거의 행복과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우고 들어온 존재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하선우는 문도일이 강주한의 이름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할 법한데도 그는 굳이 묻지 않았다. 속을 파헤쳐 진실을 알아야 할 만큼 하선우를 온전히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닌 하선우를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과거의 부산물 정도로 여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선우 역시 문도일에게 강주한을 입에 올려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문도일만큼은 오늘만 보고 말 과거의 지나간 인연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술잔을 내려놓은 하선우는 거의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서울에 연고는 있으시고요?”

새로 소주를 주문하던 문도일이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지내세요?”

“적당히 지낸다.”

주문받은 소주병을 딴 그는 비어 있는 하선우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각각 따랐다. 애매한 말로 이쯤에서 끝내려는 듯했지만 하선우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저 오피스텔에 거의 안 들어가는데, 거기서 지내시는 건 어떠세요?”

말을 꺼낸 후에야 하선우는 자신이 심사숙고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말을 뱉었음을 깨달았지만, 결정을 번복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고개를 저으며 그는 됐다라고 했다.

“아뇨. 진짜 괜찮아요. 저 따로 머무는 곳 있어요. 그러니까 불편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선우는 문도일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움켜잡는 듯한 시선에 문도일이 처음으로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다. 하선우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자신도 확신의 근거를 찾지 못해 스스로를 의심하면서도 말했다.

“제 오피스텔에 계세요.”

* * *

소파에 드러누운 강태한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바닥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 눈꺼풀 안의 어둠에만 익숙했던 눈 위로 빛이 날카롭게 쏟아져 내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떠 새하얀 광원이 어른거리는 샹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기대했던 결과와는 달랐다. 형이 남자와 붙어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불같이 분노할 거라고 확신했었다. 다이너마이트일 줄 알았던 폭탄이 불발탄일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늘 진지하게 사람을 만났습니다. 다만 누구처럼 정신을 흐릴 정도로 아둔하게 굴지 않았을 뿐이죠.’ 강태한 역시 강주한이 그 사내놈에게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미꾸라지처럼 그물을 빠져나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물을 자신에게 던져버린 형에 대한 분노를 강태한은 차근차근 곱씹었다. 어떻게든 엿을 먹이고 싶었다. 눈꺼풀로 빛에 쏘여 얼얼한 눈동자를 덮은 뒤 손끝으로 그 위를 문지른 그는 자신의 발꿈치 근처에 서 있는 장 실장에게 말했다.

“노도현 주도로 로비가 진행됐다는 말이죠.”

“네. 전직 서울중앙지법 출신 판사입니다.”

“노도현이라면 지금 어머니가 관리하는 엘튼 장학회 고문변호사로 있는 양반 아닌가?”

“맞습니다. 사모님의 최측근 인사죠. 그뿐만이 아니라 노도현과 관련된 법조계 인물 대다수가 이 일에 연관된 걸로 보입니다.”

소파에 누워 눈가를 문지르던 강태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형이 아니라 어머니 쪽 인물이 부장판사에게 3억을 건넨 사실이 언론에 발표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상속분쟁이 사모님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이라고 집중 보도되겠죠. 검찰 쪽에서도 엘튼 장학회의 배임, 횡령 혐의를 조사할 테고요.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건 사모님이 될 겁니다.”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를 갉작거리던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관없어요.”

“사모님의 입장이 난처해지실 텐데요.”

그들을 대신해 아랫사람이 더러운 걸 닦아주는 일이야 허다하지만, 재판부 로비에 어머니의 최측근 인사들을 이용할 줄은 몰랐다. 이미 1심 재판에 이어 항소심 선고 공판까지도 재판부는 어머니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머니의 측근 인사들이 재판부에 로비를 시도한 사실이 밝혀지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다. 어머니는 재판부를 상대로 로비한 혐의로 인해, 엘튼 장학회까지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탈탈 털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엘튼 장학회의 이사장을 역임 중인 어머니는 아무리 측근의 꼬리를 잘라낸다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의 측근을 이용해 그림자 뒤로 숨어버린 강주한에 대한 분노가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을 달궜다.

강태한은 양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치며 비스듬히 장 실장을 올려다보았다.

“상관없다고요.”

당황한 얼굴의 장 실장을 말없이 바라보던 강태한은 말했다.

“어머니는 감옥에 가지 않을 거야.”

강태한은 피식 웃었다.

“어머니가 다치면 형이 포기할 거야. 어머니를 감옥에 보낼 순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형은 상속분쟁에서 손을 떼겠지. 안신과의 유산상속 소송을 포기한다고 하면 검찰에서도 깊게 수사하진 않을 테니까. 몇몇 사람이야 옷을 벗게 되겠죠. 하지만 감옥에 가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재판부에서 파면된 사람들은 엘텍으로 데려오면 되고. 그러니까 상관없어요.”

강태한은 두 손을 모아 세운 손을 입가로 가져왔다. 보기 드물게 강태한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그때쯤 되면 형은 꽤 절박해져 있을 겁니다. 소송을 포기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 만큼.”

* * *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에 몸을 적응시키는 동안 시간은 삼단 멀리뛰기를 하는 것처럼 훌쩍훌쩍 건너뛰었다. 취기는 마술 같은 것이어서 데면데면한 선후배 사이었던 두 사람의 해후에 끈끈한 동지애라는 최면을 걸어주었다. 하선우는 문도일을 과거 3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지금처럼 가깝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들을 태운 차는 짙은 어둠이 깔린 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렸다. 하선우는 조금 전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문도일은 회사가 부도나던 시점에 서류상으로 아내와 이혼을 한 뒤 그녀와 아이를 형제가 있는 미국으로 보냈으며 생활비 명목으로 모자에게 돈을 보내는 기러기 아빠가 됐다고 했다. 그는 고역의 순간을 직면하고 있었고 시련 앞에 못 박힌 듯 묵묵히 버티고 서 있었다. 전쟁 같은 시련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인간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마음을 아프게 건드렸기 때문일까, 하선우는 그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듣고 싶었다. 그의 힘든 노정에 귀 기울여주는 벗이 되고도 싶었고 그가 잠깐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되고도 싶었다. 극적인 만남 이후 듣게 된 그의 딱한 사정이 마음을 녹인 탓에 부리는 일시적인 변덕일 수도 있었다. 하선우는 스스로의 호의를 의심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굳이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사과 속살 같다.’

5년 전에 문도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짧은 문장 속에 숨은 뜻을 찾기 위해 애쓰다가, 종국에는 달콤한 희망에 헛된 기대를 걸까 두려워 부러 스스로를 고문했을 것이다.

문도일은 누가 보아도 이성애자였기에 과거의 하선우는 굳이 그와 접점을 만들려는 시도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말을 섞게 될 때도 얼굴이 붉어지거나 말을 더듬을까 봐 최대한 자연스러운 단답으로 대답했다. 문도일은 하선우에게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20대 초반의 하선우는 눈앞의 남자로 인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희망을 걸었다가 절망하기를 반복하던 어리석은 청년이었다.

“뭘 그렇게 봐?”

“아…….”

문도일이 의아하게 느낄 만큼 노골적으로 그를 바라본 모양이었다. 하선우는 문도일의 말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리다 민망한 낯으로 얘기했다.

“오랜만이라 신기해서요.”

“신기하긴 뭐가.”

문도일은 픽 웃었다. 손바닥으로 턱 부근을 쓰다듬으며 하선우는 그를 따라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하선우는 숙였던 허리를 젖히며 말했다.

“내일 출근한다고 하셨죠?”

문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내일 출근할 때 태워드릴게요.”

“됐다.”

“부근 지리 모르시잖아요.”

“지하철 타면 다 거기가 거기지.”

본인이 지하철을 타겠다고 고집하는데 더는 끼어들 구석이 없어 하선우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문도일은 주중에는 속칭 기아바이라는 지하철 장사꾼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유통회사에 맡겨둔 물건을 받은 후, 1호선 금정역에서 1호선을 타고 돌다가 4시쯤 퇴근한 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야간 반점의 배달일을 한다고 했다. 주말에는 부족한 잠을 몰아 자다 저녁에는 대리운전을 하는 일상을 거의 2년째 반복하고 있었다.

계좌 입금이 아닌 현금으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을 골라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며 말하는 문도일에게 차마 왜 기술을 썩히고 있냐는 말을 할 수가 없어 하선우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런데 불현듯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숙련된 금형 설계 기술자였다. 알루미늄과 플라스틱은 금형을 제작하는 방법도, 사출하는 방법도 다르긴 하지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시일이 조금 걸릴 뿐 재취업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공장이 돌아가는 사정에 빠삭한 기술자 출신 경영인이었기에 회사의 요구와 현장의 요구를 조율할 능력도 있을 터였다.

하선우의 머리 한구석으로 얼마 전 공석이 된 울산 공장의 공장장 자리가 떠올랐다. 한번 생각이 미치자 마치 그 자리의 주인이 문도일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문도일을 이석이 반가워하겠느냐는 것과 자신의 호의가 과연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하선우는 자꾸만 자신의 감정을 훑어가며 검증하려는 스스로가 싫어졌다. 그건 꼭 상대방에게 미련이 남은 사람이 하는 자기검열 같았다.

결국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상태로, 어느새 차는 목동의 오피스텔촌으로 진입했다. 이제부터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대리운전 비용을 서로가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 먼저 기사의 손에 돈을 쥐여 주고 밖으로 빠져나온 하선우가 저만치 차와 거리를 벌리며 문도일에게 손짓했다.

“엘리베이터 여기 있어요.”

지폐를 손에 쥔 문도일은 허탈하게 웃음을 지었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거리를 좁혀 다가온 그는 하선우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두드렸다.

“하루만 신세 질게.”

계속 지내도 괜찮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반 10년 가까이 연락 없이 지냈던 선배에게 갑자기 오피스텔을 내주는 것도, 계속되는 거절을 거부하는 것도 이상해 하선우는 편히 지내시라는 말만 입 밖으로 냈다.

“여기 1424호고요, 비밀번호는 별표, 488231, 우물정자예요.”

문 앞에 붙은 중국집 전단지를 떼어내며 하선우는 말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문도일이 바람이 새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너 자꾸 이러다 내가 뭐 훔쳐 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앞으로 계속 여기 계실지도 아닐지도 모르는데요, 뭘. 어차피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훔쳐 갈 것도 없어요.”

너스레를 떨며 하선우는 도어 록의 케이스를 위로 올렸다. 번호를 하나하나 힘주어 누르자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로 울려 퍼졌다.

“외우기 쉽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하선우는 문도일의 이어지는 말에 멈칫했다.

“예전에 쓰던 휴대폰 뒷자리가 4882였거든.”

“아……, 그래요?”

망했다! 4882이 문도일이 예전에 쓰던 휴대폰의 뒷자리인 것도 모자라 31이 그의 생일인 3월 1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소리를 지른 그의 눈앞에 환상처럼 적색경보가 깜빡거렸다. 비밀번호로 쓰던 것이 습관이 되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잊은 지가 오래였던 하선우는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좁은 현관으로 들어가 허리 숙여 구두를 벗었다.

“신기한 우연이네요.”

문도일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 보일까? 당연히 이상하게 보이겠지. 미치겠네. 이를 갈며 그는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 숙인 허리를 펴는 대신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정갈하게 정리했다.

오피스텔의 비밀번호와 문도일이 사용하던 번호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문도일은 묻지 않았다. 우연이라는 궁색한 핑계를 댔으니, 이제는 태연히 행동하는 게 그나마 어색해진 분위기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현관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온 하선우는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냉수를 잔에 가득 따랐다. 먼저 자신이 마신 뒤에 물을 한 잔 더 따라 문도일에게 건넸다.

“덥죠?”

문도일은 별다른 대답 없이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하선우에게 잔을 건네받았다.

“조금 후덥지근한 것 같긴 하네.”

“에어컨 틀어서 온도 낮출게요.”

“안색이 창백한데.”

입으로는 덥다면서 실상, 하선우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불시에 이마를 문도일의 손에 맡기게 된 하선우는 허둥거리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미지근한 이마를 더듬으며 한 번 더 온도를 잰 문도일이 열은 없는데,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리해서 술 마신 건 아니고?”

“아뇨, 별로……. 그 정도는 아니에요.”

고개를 끄덕거린 문도일은 하선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잔을 비웠다. 문도일의 눈빛이 꼭 마음속에서 뭔가를 캐는 것처럼 느껴져 하선우는 성급히 말을 덧붙였다.

“제가 원래 술 마시면 얼굴이 허옇게 질려요. 하하, 방 구경 먼저 하고 계실래요?”

“구경까지야.”

“하긴 원룸인데 구경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죠. 그래도 복층이 있어서 방 구조가 좀 특이해요. 이따 복층에 있는 침대에서 주무시면 돼요.”

제자리에 서서 방 안을 둘러보던 문도일의 눈길이 다시 하선우에게로 돌아왔다.

“소파에서 잘게.”

“아뇨. 괜찮아요. 저 손님 오면 원래 소파에서 자거든요. 방 구경 안 하실 거면 먼저 씻으실래요? 속옷……, 새것도 있는데. 갈아입으실 옷도 챙겨드릴게요.”

“하루만 신세 질 건데 속옷까지 챙겨줄 필요 없어. 혹시 소파 지저분해질까 봐 그러는 거면 바닥에서 자도 되고.”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너야말로 먼저 씻고 나와서 쉬어라.”

문도일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흰 이마에 질척하게 들러붙은 검은 머리를 쳐다보았다.

“너 계속 땀 흘리더라.”

“덥나 봐요. 아하하……, 제가 더위를 좀 잘 타요. 그럼 저 먼저 씻을게요.”

목을 죄던 넥타이를 푸르고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선반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낸 그는 비좁은 욕실에서 옷을 벗을지, 아니면 문도일이 있는 방에서 모두 벗고 속옷만 입고 들어갈지를 놓고 고민하다 정장의 재킷만 벗어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 정면에 부착된 거울을 보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흠뻑 젖은 이마에 정신없이 달라붙은 앞머리, 게다가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 병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정작 당사자는 비밀번호에 담긴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도 않은데, 저 혼자만 노파심에 어색하게 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그는 벗은 옷을 보관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아 선반 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다.

뜨거운 물로 몸을 익히다시피 샤워를 하자, 술기운이 다시 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척거리며 욕실 밖으로 나온 하선우는 소파에 앉아 있는 문도일을 보았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영문판 화학잡지를 보고 있었다. 맥주캔을 양손에 들고 문도일에게 다가간 하선우는 그가 보는 잡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극소재 특허등록을 하면서 논문도 냈었는데, 거기에 실어주더라고요.”

“독일 잡지?”

“예. 독일에서 출판된 영문판 화학잡지예요.”

“자랑스러웠겠네.”

시원한 캔을 뺨으로 가져가며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장 한 장 느릿하게 잡지를 넘기는 커다란 손과 불거진 힘줄, 단단하고 탄력 있어 보이는 팔목, 남성적인 선을 가진 얼굴과 겉눈썹 아래의 도드라진 뼈의 형태를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문도일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선우는 평정을 가장하며 일부러 무심한 척 맥주를 건넸다.

“너 샤워하는 동안 잡지 밑에 깔린 파일 궁금해서 좀 봤다.”

받은 맥주를 바로 따지 않고 테이블 위에 두며 문도일은 말했다. 잡지 밑에 깔려 있던 파일이란 하선우가 지난주에 회사에서 집으로 가져왔던 서류들이었다. 회사 기밀사항까지는 아니었지만, 문도일이 회사 문서를 봤다는 게 당황스러워 하선우는 뺨을 긁적였다.

“회사 유지비 꽤 들겠더라.”

“유지비요?”

문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데요?”

“그건…….”

문도일은 긴 숨을 내쉬었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하선우는 한 번 더 물었다.

“그건 뭐요?”

“지금 네가 경영하는 회사 복지비용이 과하게 지출되는 것 같아서. 아직 네 회사 규모가 복지를 논할 단계는 아닌 것 같거든.”

하선우는 눈을 끔뻑거렸다.

“갑자기 왜…… 그런.”

“술자리에서 나눴던 이야기 말이다. 안정적으로 물건을 납품하는 환경이라니 다행이다만, 빚 낸 돈으로 복지와 시설을 늘리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시설을 확충해놔야 생산을 하고 안정적으로 납품을 하죠.”

“네 말이 틀리다는 건 아니야.”

약간의 텀을 두고 문도일은 입을 열었다.

“10의 이익을 낸다면 부채가 3이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이익이 절반이 되면 그때부터 부채 압박이 오겠지. 돈을 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빚을 어떻게 상환하느냐에 있어. 안정적인 거래처가 있다지만 경기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어. 그래서 기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자금의 유동성이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그의 얘기를 듣던 하선우는 수건을 목에 걸었다.

“글쎄요.”

하선우는 겸연쩍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전 지금은 투자할 때라고 생각해서요.”

그 와중에도 하선우는 문도일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상환 계획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

문도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우가 생각하기에 따라 오지랖 넓게 참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씁쓸하게 웃은 문도일은 손으로 하선우의 무릎에 놓인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옷 입으면 되는 거냐?”

“예. 수건은 안에 새 걸로 걸어놨어요.”

“그래.”

옷을 챙겨 들고 문 앞에 선 그는 옷가지를 바닥에 두고 벗은 옷 역시 문 옆에 가지런히 개어 올려두었다.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하선우는 욕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한숨을 쉬며 시선을 거두었다.

문도일을 향한 인간적인 연민 외에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마음이 뒤숭숭한 걸까. 마치 풀기 어려운 문제를 눈앞에 둔 아이 같은 얼굴로 그는 무릎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있기를 한참, 벨이 울리는 소리에 하선우는 고개를 들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10분.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누굴까, 고민하던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지금껏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가던 그는 욕실에서 들리는 샤워 소리에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집에 없는 척할까. 러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문도일의 옷을 내려다보며 망설이던 하선우는 주차장에 둔 자동차를 떠올렸다. 심장이 뜀박질을 해댔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 앞에는 강주한이 서 있었다. 그는 헤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푸르스름하게 올라온 까슬까슬한 수염 자국과 왁스로 넘겼던 앞머리가 힘을 잃고 흘러내린 걸 제외하면 변한 건 없어 보였다.

“이 시간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

하선우는 두근반, 세근반 하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그를 맞이했다. 그를 가만한 눈길로 내려다보던 강주한은 연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밤도 늦었는데…….”

어색하게 웃으며 하선우는 문가에 몸을 바짝 붙였다. 안을 가로막듯 서서 밖으로 나오려는 하선우를 보곤 강주한은 문을 활짝 열었다. 하선우의 가슴팍에 올린 손을 느리게 밀며 안으로 들어온 그는 신발을 벗으려 허리를 숙이다 비좁은 현관에 놓인 낯선 운동화를 발견했다. 그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 씨 신발치고는 많이 크군요.”

“그게……, 손님이 오셔서요.”

현관 바로 옆에 욕실이 붙어 있었기에 샤워하는 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강주한은 바닥에 가지런하게 놓인 옷가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벗으려던 구두를 다시 고쳐 신었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하선우의 젖은 머리카락과 목에 걸린 수건을 차례로 훑었다.

“손님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입니까?”

“아실 것 같지는 않네요. 대학 선배예요, 선배.”

“그럼 내가 불청객인가?”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손님도 있고 여기서 얘기하기는 좀…….”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하선우는 당황한 얼굴로 웃었다. 그 순간 물소리가 그쳤다. 두 사람이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조급해진 하선우는 강주한의 팔을 잡았다.

“제가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차에서 얘기…….”

“손님 왔어?”

욕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하선우는 작게 숨을 집어 삼켰다.

“예! 형, 잠시만요.”

“난 괜찮으니까 상관하지 마라.”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수건을 뒤집어쓴 문도일이 욕실 밖으로 허리를 빼냈다. 더듬거리며 러그 옆에 놓인 옷가지를 집은 그가 흘끗 현관을 쳐다보다 강주한을 발견했다.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속옷 차림으로 천천히 허리를 세워 일어난 그가 부릅뜬 눈으로 강주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문도일에게 시선을 붙박은 채 말이 없던 강주한이 이해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못 받을 만한 일이 있었군요.”

“예?”

“전화를 꽤 많이 했거든요.”

하선우는 표정을 굳혔다.

“미안합니다. 가방에 휴대폰을 두고 있어서 몰랐나 봐요.”

“그렇군요.”

정적 속에서 기이한 대치상태가 계속됐다. 비좁은 현관에 서서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있으려니 하선우는 눈앞이 암담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인데 서로 잘 아는 사인가 봐.”

문도일이 물었다. 지독히도 무감한 목소리였다. 욕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그를 도무지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하선우는 몸을 돌렸다.

“예. 제가 전무님께 도움을 좀 받았어요. 방금 전에 보셨던 잡지에 실린 논문 있죠. 그 특허 문제로 몇 번 뵌 적 있어요. 음, 이쪽은 제 학교 선배인 문도일 씨고, 여긴 강주한 전무님입니다.”

속으로는 뻔뻔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선우는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시켰다. 그러나 소개시킨 게 무색하게도 상대방을 말없이 쳐다만 볼 뿐, 서로 짧은 인사말 하나 건네지 않았다. 강주한이 말했다.

“가죠.”

“예?”

“집으로 갑시다.”

하선우의 목에 걸린 수건을 빼앗아 바닥에 던진 강주한은 그의 손목을 감아쥐었다. 주춤,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아랫입술을 꾹꾹 눌러 씹으며 하선우는 문도일을 흘끔거렸다. 그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강주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껄끄러운 침묵이 계속되는 와중에 하선우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손님이 오셨고 또 피곤하기도 해서……. 일 얘기는 다음에 하시는 게 어떨까요?”

손목을 슬쩍 빼내려 하자 강주한이 말했다.

“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습니다. 같이 있으려고요.”

열렬하기는커녕 간절함조차 눈곱만큼도 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그럼에도 노파심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말에 하선우는 제발 그만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곤란하십니까? 하선우 씨와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이번에는 문도일을 쳐다보며 강주한은 말했다. 정중하지만 선을 긋는 태도에 내내 무표정하던 문도일의 눈동자에 사나운 기세가 스치고 지나갔다. 불안해진 하선우는 닫힌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형, 저 잠시만 다녀올게요. 쉬고 계세요.”

강주한을 잡아끌어 밖으로 나온 하선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삼선 슬리퍼에 펑퍼짐한 반바지, 흐물거리는 브이넥 티셔츠를 입은 허름한 옷차림을 신경 쓸 새도 없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앞머리를 거칠게 넘긴 그는 그때까지도 강주한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억지로 빼내었다. 하지만 강주한은 또다시 팔을 잡아끌었다. 내려가자는 듯이 채근하는 그의 행동에도, 하선우는 문에 등을 기댄 채 고집스럽게 서 있었다.

“연락 못한 건 미안해요. 사정이 있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하선우를 강주한은 찬찬히 뜯어보았다. 샤워코롱 향기 속으로 스민 술 냄새와 발갛게 젖은 얼굴. 방 안에 소중한 것을 숨겨놓은 채, 멀리 떠나는 어린아이처럼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 강주한은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그는 하선우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며 불쾌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변명도 안 합니까?”

“변명이요? 무슨 변명을 해요.”

하선우는 문 너머로 소리가 들릴세라 숨죽여 얘기했다. 강주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굳었다.

“지금 내가 봤던 거, 딱 오해하기 좋은 광경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라는 듯 강주한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가슴을 세차게 후비는 시선에 하선우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마지못해 몇 가지를 곱씹어보았다. 거의 온종일 통화가 안 된 데다가, 집에 찾아왔더니 샤워를 마친 애인이 한참 만에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지금 막 샤워를 끝낸 속옷 차림의 남자가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온통 뜨끔한 상황뿐이었다.

“아, 아닙니다!”

하선우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 절 오해하시는 겁니까?”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 아닙니까?”

하선우는 눈을 부릅뜨며 강주한을 보았다. 의심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화가 나서 억지를 부리는 게 분명했다.

“아는 형이에요. 주한 씨. 제가 남자 좋아한다고 다 일반화시키시면 안 되죠.”

“남녀의 상황으로 바꾸면 당신도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순 없을 겁니다. 샤워를 마친 내 여자와 함께 있는 낯선 남자를 목격했을 때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마지막 말을 느릿하게 속삭이는 강주한을 보면서 하선우는 할 말을 찾기 위해 숨을 골랐다. 기분 정말 나쁘겠죠. 강주한이 유도한 뻔한 대답이 목구멍에 걸렸지만, 하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화를 내는 것도 냉랭한 말투도 아니었지만, 하선우는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오히려 불안했다. 그러나 얼굴을 감싸는 두 손과 벌어진 입술을 파고든 강주한의 입술에 다음 말은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가 아플 만큼 쇠문에 힘주어 고정하더니 입술을 겹쳤다. 억세게 감싼 손길에 비해 키스는 부드럽기 그지없어, 하선우는 화가 나기보다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어깨를 밀자 고분고분한 태도로 얼굴을 떼어냈다. 기겁한 하선우가 눈을 재빠르게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주한이 눈을 마주한 채로 입술만 가볍게 내밀었다. 젖은 입술 위로 찰기 있게 입술이 들러붙었다. 다시 키스를 시도하는 그를 힘주어 밀어내며 하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러십니까. 하지 마세요.”

강주한은 그를 따라 고개를 숙이며 젖은 입술을 찾아 더듬거렸다. 더 깊이 고개를 숙이자 이번에는 입술이 귓불과 목덜미를 깨물듯이 애무했다. 팔을 버둥거리며 밀어내던 하선우는 결국 숨죽여 소리쳤다.

“차에, 차에 가요.”

순순히 뒤로 물러난 강주한은 그제야 얼굴을 감싼 손을 떼었다. 하도 힘주어 누른 탓에 뺨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원망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손가락으로 하선우의 뺨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리며 강주한은 말했다.

“내가 좀 질투가 많아요.”

응석인지 경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없이 올려다보자 그가 손목을 잡으며 몸을 돌렸다. 긴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들어선 그는 지하 3층 버튼을 눌렀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하선우는 보란 듯이 거칠게 입술을 닦았다. 그런 하선우를 강주한은 못 본 척하지 않았다. 하선우를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모조리 지켜보았다.

차에 올라탄 하선우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강주한과 싸울 생각은 없지만, 그와 눈을 마주할 기분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과 문도일의 사이를 진짜로 오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하선우를 단속할 수를 찾아내고, 그것을 추궁하는 게 목적이었다. 차에 시동을 거는 강주한의 손을 잡으며 하선우는 급하게 말했다.

“어디 가요?”

“집에 갑니다.”

“저 안 갑니다.”

“…….”

“안 간다고요.”

버튼에서 손을 떼자 곧바로 시동이 걸렸다. 여전히 강주한과 손을 겹친 채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가까스로 부아를 참으며 말했다.

“집에 손님 두고 어떻게 갑니까? 아니, 이런 기분으로 못 갑니다.”

이내 입술을 꽉 다물고 강주한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고집스럽게 정면을 응시하던 강주한은 그제야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온종일 연락이 닿질 않아 찾아온 내 기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내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 겁니까?”

강주한은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듯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수 초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는 말했다.

“문도일 씨라고 했죠.”

그는 한참을 침묵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함께 있으면서 위로해주려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게 있는 겁니까?”

생각은 물론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강주한은 하선우를 응시했다. 하선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하선우 씨는 내가 착해서 만납니까?”

강주한이 돌연 물었다.

“아니죠. 내가 착해서 나를 만나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선우 씨가 착해서 마음에 들어요.”

작게 끌어 올려 웃는 입술과는 달리 그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한참 뒤 어둠 속에 반쯤 잠긴 얼굴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운전대를 잡는 강주한을 보면서도 하선우는 집에 있겠다고 더는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자동차는 지하주차장을 벗어나 지상을 향하기 시작했고 곧 텅 빈 도로면으로 접근했다. 차는 몇 분 만에 백화점과 근접한 도로에 들어섰다. 불 꺼진 건물 위로 트리의 별처럼 엘튼 백화점의 간판이 반짝거렸다. 지상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에도 하선우는 내내 말이 없었다. 강주한은 착하게 행동하라는 듯이 무섭게 굴고 있었다. 그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선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마음이 쑤시고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왜 그래요?”

시동을 끄고 안전벨트를 푼 뒤에도 미동 없던 강주한은 하선우의 화난 목소리에 반응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는 꾹 다문 하선우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구겨진 자존심을 보상받겠다는 듯 하선우의 표정은 비장했다. 고집스럽게 닫은 붉은 입술 아래로 호두알처럼 불거진 턱 끝을 바라보던 강주한은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는 하선우의 눈을 깔아보며 말했다.

“나도 오늘 왜 이렇게 못되게 구는지 모르겠군요.”

미간을 좁히며 그는 하선우의 긴장으로 단단해진 허벅지께와 꽉 쥔 주먹을 차례대로 보았다. 강주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체를 빙 돌아 하선우가 앉은 좌석의 문을 열고는 허리를 숙여 안전벨트를 풀고 손목을 잡았다. 차 안에서 이대로 버틸까 고민하던 하선우는 결국 그를 따라 일어났지만, 여전히 굳은 얼굴은 풀지 않은 채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집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손목을 잡은 손을 풀지 않은 채 강주한은 남은 손을 하선우의 뺨에 얹었다.

여전히 악다물린 입술 때문에 팽팽해진 턱 근육을 엄지로 쓸고 체온이 올라 붉어진 뺨을 매만졌다. 긍정의 반응도 부정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 하선우와 마주 선 채 한참을 그러고 있던 강주한은 고개를 숙였다. 하선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느라 굽어진 그의 상체가 시든 풀줄기처럼 늘어졌다. 지금껏 알던 강주한과는 달리 잔뜩 물러진 모습에 하선우는 그의 단정한 옆머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갑작스러울 만큼 그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이에게 지금까지 품었던 분한 감정이 공연할 정도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강주한은 하선우의 허리 뒤로 손을 둘러 가만히 껴안았다. 아뇨. 중얼거리며 그는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는 말했다.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돼서 조금 화가 났습니다.”

“정말 연락 안 돼서 그런 것 맞아요?”

“…어떻게 혼을 내야 하나 고민 좀 했죠.”

그는 하선우를 안은 채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하선우는 무게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의 등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혼내긴요. 왜 그런 식으로 얘기하십니까?”

불안한 와중에도 욱하는 기분에 하선우는 얼굴을 굳혔다. 강주한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으니 하선우는 그의 머릿속에 굴러가는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초조하고 억울한 그의 감정을 죄 들여다보던 강주한이 허리에 둘렀던 손을 떼며 갑자기 피식 웃었다.

“어릴 적 생각이 나는군요.”

“무슨 생각이요?”

“어릴 적에 개를 키웠는데 훈련이 아주 잘된 개였습니다. 크기가 한 이만큼 됐었나.”

이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래, 이 정도. 그는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려 크기를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평소에 말썽 한 번 안 부리는 착한 녀석이었는데, 아주 가끔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었습니다. 새로 바꾼 침구에 실례를 한다든가 방 안을 죄 어지럽히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제가 뭔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으니 방구석에 숨어 있다가 내가 나타나면 꼬리를 안으로 말고 순한 눈으로 올려다봤죠. 마치 내 눈치를 보듯 말이죠. 그럴 때면 충분히 혼을 낸 뒤에도 한참을 더 혼냈습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낙천적인 녀석의 눈망울에 애처롭게 눈물이 지는데 그걸 좀 더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인간본성에 그런 가학적인 면이 숨어 있다는 게 참 이상한 일이지만.”

나긋나긋한 설명조의 투로 긴 말을 뱉은 강주한이 하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지만,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하선우는 물었다.

“그런 말을 왜 하시는 건데요.”

하선우의 티셔츠 하단을 잡아 맨살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그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지 말라는 겁니다.”

강주한의 뜨거운 눈빛에 하선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랫배와 골반 사이를 매만지던 손이 티셔츠 자락을 잡아 천천히 위로 끌어 올렸다. 옷을 벗느라 엉망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강주한이 손을 뻗었다. 아이를 다루는 듯한 부드러운 태도와 달리 그는 어딘가 뒤틀려 보였다. 그의 묘한 분위기에 하선우는 나를 개와 비교한 거냐는 말을 삼켰다. 그 말은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치 허방을 짚은 듯한 발언 같아서였다. 대신 그는 강주한의 눈치를 살피며 다른 말을 했다.

“왜요. 어떻게 하고 싶어집니까?”

강주한은 양손으로 하선우의 눈가를 잡고 엄지로 광대 언저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예. 아주 엉망으로 만들고 싶어져요.”

숨을 집어삼키며 하선우는 눈을 깜빡거렸다. 다물린 하선우의 입술을 가볍게 입술로 잡아당긴 그는 혀를 내어 그 안을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쭙쭙거리며 쪼듯이 키스하던 강주한이 입술을 더 크게 벌려 뺨을 빨고 목울대를 깨물며 손으로는 자신의 넥타이를 풀었다. 넥타이를 한 손에 쥔 채로 하선우의 추리닝 바지를 훌렁 벗겨낸 그가 브리프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축 처진 성기와 말랑말랑한 고환을 손안에서 굴리자 하선우가 움찔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하지 말라고 밀어내려던 하선우는 결국 씩씩거리는 기세로 손을 뻗어 강주한의 바지춤을 잡고 버클을 풀어냈다. 지퍼를 내리고 속옷에 손을 댄 그는 멈칫거리다 다시 속옷을 벗겼다. 반쯤 발기한 페니스를 손으로 감싸자 강주한이 낮게 목을 울렸다. 상의를 모조리 벗어버린 그는 하선우에게 재차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깨물다 그 안으로 들어와 치열과 입술 사이의 얕은 구역을 핥던 그는 하선우의 손을 뒤로 당겼다.

양손이 자신의 허리 뒤로 당겨지는 느낌에 하선우는 슬며시 눈을 떴다. 강주한이 왼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로 손목을 감았다. 하선우는 놀라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그러나 강주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을 넥타이로 둘둘 감아 가볍게 매듭을 지었다.

“뭐, 뭐하는 겁니까.”

“정말 하기 싫으면 말해요. 억지로 할 생각까진 없으니까.”

하선우는 부릅뜬 눈을 깜빡거리며 한참 동안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입술을 어물거리며 할 말을 찾던 그는 기침을 토하듯 말했다.

“이, 이런 건…… 좀 이상합니다. 진짜 벌받는 것 같잖아요.”

“벌받는 거 맞아요. 이상하죠, 하선우 씨를 볼 때마다 자꾸 이런 충동에 시달리는 나도 그렇고, 이상하다고 하면서도 싫다고는 하지 않는 선우 씨도 그렇고.”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주먹에 힘을 주자 손목을 묶은 매듭이 말의 고삐처럼 팔을 당겨왔다. 강주한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던 밤처럼 작은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하선우는 수혈된 남의 피처럼 욕망이 혈관을 타고 돌던 그날의 충동을 떠올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부정보다 충동이 더 강하게 그를 지배했던 날의 밤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 잘못 휩쓸리면 영영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싶은 불안만이 입 끝에 매달려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를 이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굴욕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통제하려는 그를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과 끝까지 가버려도 좋다는 충동이 마음을 들썩이게 할 리가 없었다.

“저는 허락한 적 없는데요.”

“그럼 관뒀으면 좋겠습니까?”

확실히 해두겠다는 듯 강주한은 물었다. 여기서 그만하자면 멈추겠다는 여지를 주는 얼굴이었다. 구속당한 손목 아래 주먹을 슬며시 쥐어보았다. 관두길 원하느냐고? 하선우는 그의 말처럼 이번에야말로 제 마음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지금껏 강주한과 수도 없이 몸을 섞었지만, 이토록 수동적인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심각한 얼굴로 강주한을 올려다보던 그는 말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어쩌면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지나치게 당황해서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건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는 하선우의 눈을 직시하며 강주한은 말했다.

“모르겠다면 착하게 굴어요. 벌을 주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허리를 감싸며 강주한이 고개를 숙였다. 뺨과 눈가, 콧방울을 지나 입술로 다가오는 그를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하선우는 꼿꼿하게 서서 가만히 있었다. 엉거주춤 강주한의 애무를 받던 하선우는 이 상황을 결국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희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게의 축이 강주한에게 기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목에 스스로 목줄을 채워 그에게 쥐여 주는 기분까지 들었다. 가학적으로 구는 그는 분명히 이상했지만 거기에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강주한의 눈은 하선우를 낱낱이 해부하려는 듯이 집요했으며 들러붙듯 질척했다.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말은 어느새 성적인 긴장으로 바뀌었고, 두려운 만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희열이 되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강주한이 허리를 감싼 손에 돌연 힘을 주어 하선우를 훌쩍 들어 올렸다.

뒤로 묶인 손 탓에 강주한을 안을 수도 밀칠 수도 없어 버둥거리던 하선우는 결국 반쯤 체념하며 다리로 강주한의 허벅지를 감싸면서 조였다. 안정적인 자세가 되자 강주한은 곧바로 거실을 지나쳐 침대 위로 하선우를 내려놓았다. 허벅지에 헐렁하게 걸쳐 있던 속옷을 벗긴 그는 하선우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정신없이 키스를 퍼부으며 긴장으로 바짝 솟은 유륜을 집요하게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젖꼭지를 둥글게 굴렸다가 아플 만큼 잡아 늘리는 손길에 윽윽 신음이 절로 새어 나갔다. 매만지고 비벼댈수록 점점 더 예민해지는 몸에 하선우는 사지를 뻣뻣하게 굳힌 채로 신음했다. 강주한을 말리거나 그를 거세게 껴안거나 둘 중에 하나라도 하고 싶었지만 묶인 손목 탓에 주먹을 꽉 쥐며 감각을 견디는 것이 전부였다.

강주한의 손이 떨어지고 한숨 돌리는가 싶었지만 곧장 겨드랑이에 손이 끼워져 상체가 들렸다. 침대 헤드에 등이 기대어지고 뒤통수가 벽에 닿았다. 정신없는 입맞춤 뒤에 간신히 숨만 달싹이던 하선우는 눈을 들었다. 반쯤 발기해 물렁거리지만 형태를 거의 갖춘 성기가 얼굴 위에서 꺼덕였다.

한 손으로 하선우의 뒷머리를 잡아채고 나머지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강주한은 허리를 숙였다. 입안에 더 잘 집어넣기 위해서.

귀두가 혀끝에 닿고 점점 깊게 입안으로 파고들며 순식간에 경도를 키운 성기가 하선우의 목구멍 끄트머리에 닿았다. 평소 예사롭게 빨던 페니스였지만, 상황이 변해서인지 긴장으로 숨이 찼다. 속도를 맞추는 데 급급한 탓에 오심을 견디지 못하고 몇 번이나 억억거렸다. 결국 견디다 못한 하선우가 고개를 빼자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이와 이가 부딪히고 때각거리는 소리가 성급하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단단하게 발기한 강주한의 성기가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곧바로 몸 안으로 파고들까 봐 서둘러 고개를 떼어낸 하선우가 헉, 하고 몸을 떨자 강주한은 자신의 손가락을 침을 묻혀 빨았다. 그리고 눈을 마주한 채로 보란 듯이 손가락을 안으로 천천히 꽂아 넣었다.

손가락 마디가 구멍 입구에 걸리는 듯한 느낌에 하선우는 눈살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끝까지 몸 안으로 들어온 검지의 이물감에 적응할 새도 없이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절로 입술이 벌어지며 얕은 숨이 새어 나갔다.

축축한 점막의 감촉을 느끼며 그는 안으로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빼냈다. 움찔거리는 점막과 허벅지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는 하선우의 반응을 모조리 핥아 먹을 듯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쾌함과 쾌감을 오가는 손길에 가는 신음을 안으로 삼키던 하선우는 삽입이 길어질수록 배 속에서 감질나게 일어나는 감각에 이를 사려 물었다. 손가락의 개수를 네 개까지 늘려 점막에 닿는 면적을 늘린 그가 모조리 집어넣은 손가락을 아랫배 방향으로 굽히며 비비자, 하선우는 아찔함을 견디지 못하고 한 조각의 한숨을 토해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모조리 빠져나가고 젖은 그의 손이 왼쪽 무릎 아래로 들어왔다. 활짝 벌린 왼쪽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그 사이로 귀두를 맞춘 강주한이 살짝 다물린 구멍 안으로 성기를 쑥 밀어 넣었다. 손가락으로 풀어주었다고 해도 몇 주 만의 삽입이었기에 몸에서 힘이 빠지질 않았다. 반쯤 구겨진 자세로 힘겨운 삽입을 견디던 하선우는 도리질 치며 말했다.

“못……해요.”

“왜요?”

몸 안에 칼이 꽂힌 것처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배 속이 헤집어질 것이다. 하다못해 강주한의 팔이라도 잡을 수 있었으면 싶었다. 아니, 시트라도 구겨 쥐었으면 했다. 몸속이 넓어지는 감각을 설명할 수가 없어 하선우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흣, ……그만해요.”

“언제는 함부로 해달라면서요.”

어깨에 올린 왼쪽 다리가 덜덜 떨렸다. 긴장으로 단단해진 허벅지의 근육을 쓰다듬으며 강주한은 허리를 더 밀어 넣었다. 귀두만큼이나 두꺼운 성기의 중간 부위가 갑자기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애원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허윽, 모, 못…….”

“해요.”

“…….”

“할 겁니다.”

그는 상체를 하선우를 향해 기울이며 눈을 맞췄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동시에 강압적이었다. 하선우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리며 덜덜 떨었다. 성기가 모조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 등에서 식은땀이 찐득하게 솟아났다. 들어온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이전보다 더 빠르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진입을 거부하듯 잔뜩 조여든 구멍을 아랑곳 않고 그는 속도를 높였다. 뜨겁고 단단한 살갗의 질감이 지나치게 신경을 자극해 하선우는 울고 싶었다. 매번 깊게 파고들던 성기가 여느 때보다도 강하게 삽입된 순간, 하선우는 흐느끼듯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쾅쾅 박아 넣자 입술이 일그러졌다. 묶인 손으로 침대 헤드를 짚어 상체를 간신히 들어 올린 하선우는 강주한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숨을 헐떡거렸다. 한참을 비벼대다 못하겠다고 속삭이며 이번에는 어깨로 이마를 찧었다.

강주한은 등을 감쌌던 손으로 하선우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바람에 하선우의 눈이 강주한과 맞부딪쳤다. 그의 눈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하선우를 모조리 눈에 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강주한의 눈빛이 어두웠다. 자신 안에 치닫는 조급증을 깨닫자마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선우를 아프게 하는 것도 자신이었고, 쾌감에 젖게 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안을 쑤실 때마다 움찔거리며 정신없이 반응하는 모습에 머릿속이 지글지글 끓었다.

점막 속에서 빠듯하게 쓸리는 살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삽입을 견디지 못하고 신음하는 하선우의 반응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프다는 말에도, 천천히 하라는 말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뜨겁고도 끈적끈적한 독한 기운이 뒷목을 따라 흘러 온몸을 적셨다. 팍, 터지듯 새어 나온 눈물이 하선우의 눈가에 맺혔다. 눈물을 핥으려 강렬하게 몰아치던 움직임을 멈춘 강주한은 순간적으로 하선우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검열했다. 누군가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해소를 위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자신의 태도가 너무 낯설었다.

섹스의 경험이 적진 않았지만, 그의 경험은 다분히 관행적이었다. 가끔 자신 안에서 부글거리는 욕망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억누르고 숨길 수 있었다. 아니, 평소의 그는 다스릴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세상에는 섹스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널려 있었고, 섹스는 스포츠처럼 이색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아버지의 말처럼 실제로 거머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벌이라는 이유로 외부세계에서 쏟아지는 증오의 세례를 받는 재벌 3세에 불과했다. 물론 그는 외부의 차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만했고 그가 가진 특권들을 즐겼으며 아버지의 것들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사명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이런 결심에 세상의 권태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의 길지 않은 생은 눈앞의 허상을 실체로 만들기 위한 행동으로 채워져 있었다. 때로는 차별 속에서, 이따금씩 선망 속에서 해외를 부랑하며 공부를 했고 친구를 사귀었으며 아내를 만났다.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에 보잘것없는 목적을 갖고 감정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가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인생을 하찮게 여긴 건 아니었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권력과 돈의 마스코트라는 낙인을 얻었고, 보잘것없는 마스코트로 살아가며 보잘것없는 타인의 꿈을 이용할 뿐이었다. 사람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은 그의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렇다면 하선우는 단순히 욕망해소를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하선우를 해소하기 위해 내 욕망을 불사르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그 아리송한 경계에서 주춤거리던 강주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욕망이 바닥에, 그것도 몹시 불결한 곳에 닿아 있다는 것을.

땀으로 흠뻑 젖은 앞머리가 하선우의 흰 이마에 어지럽게 들러붙었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그는 손바닥으로 하선우의 턱을 감쌌다.

고개를 숙이며 혀를 길게 내어 눈가의 짭조름한 눈물을 핥아 먹었다. 몸이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배 속이 거북한지, 감당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모습이 애처롭게 우는 소년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달짝지근한 사탕을 떠올리게 했다. 흔적도 없이 깨부숴버리고 싶다가도 굴리고 핥고 아껴 먹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그를 지배했다.

더는 움직이지 않고 아끼는 공예품을 감상하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주한을 하선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선이 따라왔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시선에 하선우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눈길을 피하다가 결국엔 헤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봐요?”

웃을 때마다 몸 안에 꾸역꾸역 들어찬 성기가 울려 더부룩해지자, 하선우는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이내 일그러졌다. 강주한이 하선우의 등허리를 손으로 안아 들고 자세를 바꿨다. 몸을 빙글 돌린 그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졸지에 강주한과 가슴을 마주 대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된 하선우는 갑작스럽게 깊어진 삽입에 앓는 소리를 냈다.

“헉……. 윽, 엄청…… 큰 꼬치에 꿰인 것 같아요.”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이 가관이라 강주한은 손아귀로 하선우의 턱을 아프게 잡아 함부로 흔들었다.

“왜요. 머리까지 뚫고 나올 것 같습니까?”

흣, 속삭이듯 신음한 하선우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이다 곧 다물었다. 턱을 잡은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속눈썹이 처지고, 눈살이 은근하게 찌푸려졌다.

“……예.”

“어떤 느낌인데요.”

몸 안에 가득 찬 느낌을 설명하라는 그의 말에 하선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핥았다가 마른침을 넘길 뿐이었다.

“내가 너무 심하게 굽니까?”

반쯤 박혀 있던 것을 천천히 위로 밀어 넣자, 흣, 절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하선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조금 전의 섹스를 떠올리며 하선우는 강주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미심쩍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턱을 잡은 강주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하선우의 고개를 자신에게로 잡아당기며 그는 말했다.

“다리, 활짝 벌리고 앉아요.”

강주한은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냈다. 자신의 아랫입술 안의 점막을 앞니로 잘근거리며 그의 눈을 응시하던 하선우는 결국 다리를 벌려 꿇었던 무릎을 세웠다. 바닥을 짚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엉거주춤하며 앉은 그는 예고도 없이 습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엉덩이를 강하게 잡히자마자 강주한이 푹 파고들었다. 거침없이 시작된 섹스에 하선우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움직임은 급격하게 거칠어졌다.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바짝 오므라드는 항문을 강주한은 매번 강제로 열어젖혔다. 넓게 벌렸던 허벅지가 후들거려 다리를 좁히려 하자,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허리를 쳐올렸다. 두 손으로 꽉 잡아 벌린 엉덩이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다. 어쩌면 강주한의 손바닥에서 솟은 땀일 수도 있었다. 미끄러져 나가는 살덩어리를 힘차게 박아 넣자, 후들대던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찰싹하며 아프게 치니, 간신히 버티던 하선우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윽……, 아아……. 흐으… 힉! 으, 으응……!”

빠르게 들락거리는 성기는 하선우가 느끼는 부분마다 온통 닿았다. 자제할 수 없는 신음이 폐에서부터 쏟아졌다. 울긋불긋 달아오른 목덜미에 핏대가 솟더니 벌벌 떨리던 그의 몸이 일순간 정지했다. 한참 동안 그의 성기에서 점성이 강한 정액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사정을 마치자, 간신히 버텼던 허벅지에서 힘이 빠졌다. 주저앉는 동시에 깊어지는 삽입에 흡, 코로 우는 소리를 내며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다시 엉덩이가 들리고 사정을 앞둬 딴딴해진 성기가 빠르게 점막 속을 찍어 올렸다. 허벅지에 힘을 줘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던 하선우는 자신의 성기에서 연한 애액이 끈적끈적하게 솟는 것을 보았다. 정액도 모자라 전립선 액이 강주한의 핏줄 선 아랫배 위로 뚝뚝 떨어졌다. 강주한 역시도 실금처럼 떨어지는 애액을 확인했다.

자신의 쾌감에 패닉을 느끼는 하선우를 보자, 사정감이 강렬하게 아랫배를 난도질했다. 신음을 내는 법을 잊은 이처럼 하선우에게선 이따금씩 힉힉거리는,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마저도 빠르게 쳐올리자 자지러지는 울음으로 바뀌었다. 강주한은 오랫동안 참았던 만큼 길고도 긴 사정을 했다. 그러나 장벽을 가득 채운 따뜻한 이물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하선우는 해일 같은 절정에 시달려야 했다.

감각의 여진에 움찔거리며 떠는 하선우의 뒤로 강주한은 그의 성기를 다시 가져다 댔다. 반쯤 열린 구멍은 개폐를 반복하며 안에 잔뜩 싸 놓은 것들을 꾸물꾸물 게워냈다가, 삼키기를 되풀이했다.

그 음란한 광경을 지켜보던 강주한은 귀두를 슬쩍 집어넣었다. 반사적으로 꽉 다물렸던 입구가 쾌감에 반응하며 곧바로 힘을 풀었다. 강주한은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노골적으로 하선우가 느끼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때리는 중이었다. 하선우는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헛숨을 삼켰다가 토하듯이 소리 질렀다.

“그만……! 그만……. 아흐으……, 그으……만.”

더는 한계였다. 생생한 촉각이 몸속을 헤집는 동안 아무것도 나오지 않던 성기 끝에서 점성이 거의 없는 애액이 방울방울 흘러나왔다. 짐승이 흘레붙듯 하선우의 등에 가슴을 붙이고 쾅쾅 박아 넣던 강주한이 이를 꽉 악물었다. 머릿속이 시뻘겋게 타올랐다가 이내 새하얗게 변했다. 앞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하선우의 골반을 강하게 틀어쥐며 마지막으로 퍽 쳐올린 강주한은 몸을 굳혔다. 수없이 사정했는데도 정액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맞닿은 부분마다 발진이 돋은 것처럼 작열했다.

하선우의 내벽은 여전히 맥동하듯이 조이고 풀기를 반복했다. 그는 악물었던 이를 떼어내고 하선우의 몸 위로 체중을 실어 엎드렸다. 하선우의 체취를 모조리 들이마시려 목덜미에 코를 비볐다. 이미 목덜미와 어깨, 온몸이 울긋불긋했지만, 여전히 허기를 달랠 수 없어 귀를 깨물고 뒷목을 짓씹었다. 그는 씻고 싶지도, 하선우의 몸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지독할 정도로 서로의 체액에 흠뻑 젖어 있었다.

침대 위에 기절하듯 널브러진 하선우는 감각이 남긴 파동에 한참이나 부들부들 떨어댔다. 간헐적으로 흐느끼며, 하선우는 뒤로 당겨졌던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이젠 무리였다. 피곤해 죽을 지경인데도 육체가 쾌감을 기억한다는 건 끔찍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다가 깬 사람처럼,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은 자꾸만 움찔댔다. 하선우는 옆구리를 감아 쥔 강주한의 손을 꽉 잡았다.

“씻고 싶어요.”

목소리가 끔찍했다. 그때까지 하선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강주한이 고개를 들었다.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하선우는 온몸에서 힘을 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제야 강주한은 천천히 몸을 떼었다. 육체와 육체가 분리되는 와중에도 흠칫거리며 떨던 하선우는 성기가 모조리 빠져나가자 침대에 완전히 엎드렸다. 하선우의 양옆으로 팔을 뻗어 상체를 지탱하던 강주한은 고개를 숙여 땀에 전 체취를 다시 한 번 들이마셨다.

“일어날까요?”

하선우는 간신히 꾸물거리며 허리를 세워 앉았다. 몸을 돌려 강주한과 마주 앉은 하선우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욕조에서 다리 주물러주겠습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잡아 자신에게로 이끈 강주한이 소리 내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린 하선우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노인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얼마 안 가 벽을 짚고 멈춰 섰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노파처럼 나약해진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걷고 멈추기를 반복하던 하선우는 팔 사이를 파고드는 단단한 팔 근육에 흠칫 놀랐다. 강주한이 자신을 부축하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몸을 맡겨버렸다.

따듯한 물이 서서히 차오르는 욕조에 기댄 하선우는 눈을 감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반신으로만 세상을 산다는 게 이런 걸까. 밖에서 눈과 비바람이 휘몰아쳐도 몸의 상태 외에는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고달프게 한 문도일이란 이름도 덮개로 가려버린 물건처럼 저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꼽 아래까지 차오른 물속으로 들어온 강주한은 하선우의 옆에 앉아 힘없이 축 늘어진 그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눈을 뜬 그는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온몸을 맡긴 채 강주한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만 움직였다.

강주한이 벌린 다리 사이로 들어와 손을 뻗었다. 엉덩이 사이를 더듬는 손길에 움찔대며 뒤로 물러나려던 하선우는 아까까지 벌였던 온갖 음란한 짓들이 떠오르자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따듯한 물과 함께 몸속에 손가락이 들락거리는 감각에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강주한이 손을 거둘 때까지 질 좋은 나무로 마감된 욕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선우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주한 씨.”

“예.”

“제가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말인데요. 섹스를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좀 했습니다.”

말을 할 때마다 목이 쩍쩍 갈라지고 기침이 나왔다. 하선우는 잔기침을 진정시키려 잠시 입을 닫았다. 그는 얼마 후 끊어졌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에 페티시에 대한 대화를 했을 때요. 그 다크라이필리아였나. 불행기호증 같은 충동을 느낀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걸 내가 너무 예사롭게 생각했나 봐요.”

눈을 떴을 때 강주한은 잠자코 뒷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강주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하선우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가죽 채찍으로 나를 때리거나 이상한 데 피어싱을 뚫고 싶은 건 아니죠?”

완벽하던 강주한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 건 갑자기 왜 묻습니까?”

“저를 어떻게 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처럼 보여서요.”

강주한은 미간을 찌푸린 그대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할 말을 잃은 표정에 하선우는 확신했다.

“저를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라서 화난 것 같아요.”

정적이 흘렀다. 강주한이 물었다.

“그래서 이런 내가 무섭습니까?”

이번에는 더 긴 침묵이 흘렀다. 하선우의 얼굴 위로 혼란이 스쳤다. 대답 없는 질문들만 주르륵 병치된 대화는 꼭 아귀가 맞지 않아 헛도는 태엽을 보는 듯했다. 돌이켜 보니 그는 대답으로 질문을 되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정해진 답은 숨긴 채, 대답자 스스로가 해답을 찾아서 납득하길 바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숨긴 대답을 추측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무섭다는 대답을 듣고 싶은지, 아니면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던 하선우는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이면 백이면 백 도망갔을걸요?”

호불호 대신 간신히 꺼내놓은 답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을 가져왔다. 하선우는 일부러 모르는 척 젖은 손으로 부은 눈두덩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아 강주한의 눈길을 차단했다.

“다른 사람한테도 그랬어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강주한은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저한테는 왜 그러십니까?”

이번에는 전보다 더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한선우는 고개를 들어 그는 강주한을 응시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말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보였다.

“모릅니다.”

강주한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런 감정에 논리와 이성이 있을 리 없죠.”

하선우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감정을 간신히 수습하고 농담조로 말을 받았다.

“어떤 감정인데요? 저 듣기 좋은 얘기 말고 진짜 속내를 말해줘요.”

강주한은 하선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진지했지만, 그가 진지할수록 강주한의 침묵은 길어지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강주한은 흘러넘치기 직전까지 차오른 욕조의 물을 잠갔다. 자쿠지의 급수전에 시선을 묶은 채, 강주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화가 납니다.”

하선우의 긴 침묵에 강주한은 눈길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하선우는 의식의 흐름대로 붓질을 한 추상화 앞에 선 어린 관람객처럼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 표정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달라면서요.”

“그야…… 그렇긴 한데.”

하선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벌렸다. 목소리가 떨려왔다.

“화가 난다고요? 왜요?”

왜라니. 자신은 전부 다 말했는데.

강주한은 물리적인 통증까지 동반한 화를 느끼고 있었다.

강주한은 이유를 모르는 하선우가 오히려 낯설었다. 강주한은 여전히 굽이굽이 굽은 험로 같은 하선우의 내장 속으로 들어가 부드러운 밀도를 가진 속살을 파헤치고 그 안에 엉겨 붙어 살고 싶은 욕망과 고통을 느끼는데.

“상대방이 너무 좋을 때 가끔 화가 나는…… 그 비슷한 기분인 거죠?”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운 하선우는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려 했다.

강주한은 생각했다. 하선우가 단 한번이라도 승자 독식, 약육강식, 우승열패 같은 개념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을까. 눈앞의 젊은이에게 그의 부모는 오로지 비폭력적이고 평화롭고 지루한 세계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그와 그의 부모, 더 나아가 그의 조상들은 포식자가 아닌 초식동물에 가까운 유형의 인간들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함부로 할 수 없어 화가 나고, 잡아먹고 싶은 먹이를 눈앞에 두고 허기를 참아야 하는 짜증스러움을 알 리가 없었다.

안타까운 동시에 실망스럽고 그 순진함에 화가 났다. 하선우를 볼 때, 그는 육감이 모두 소멸된 초식동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세상의 좁은 각도밖에 보지 못하는, 진짜 추저분한 세상을 모르는 초식동물.

“맞아요.”

하선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강주한은 이전보다 누그러진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강주한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기분이에요.”

뇌가 간지러우면 꼭 이런 느낌일까. 언뜻언뜻 떠오르는 가려움은 견딜 수 있는 정도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간지럼증을 앓는 기분이었다.

구체적으로 짚을 수 없는 애매한 부위가 애간장을 타게 해, 하선우는 머리를 열 수만 있다면 뇌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벅벅 긁고 싶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은 생각을 끄집어내면 가려움에서 해방될 것만 같았다. 아리송하게 어렴풋한 형체만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강주한에 대한 것들이었다.

“먹죠.”

그를 주의 깊게 살펴보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성격파악’으로 흐르는 생각의 전류를 차단해버렸다. 그가 트레이에 담아 온 접시 위에는 상아색의 치아바타 빵과 치즈, 베이컨, 계란, 소스를 뿌린 샐러드와 발사믹 소스, 자몽 주스가 놓여 있었다. 몇 번이나 도와줄 거 없냐고 묻는 하선우를 물리며 그가 차린 것들이었다.

“꼭 서양식 같아요.”

“서양식 같은 게 아니라 서양식이죠.”

하선우는 클클 웃으며 자몽 주스를 마셨다. 시고 쓴맛에 본능적으로 인상을 쓰면서도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아렴풋한 웃음이 남아 있었다. 빵을 뜯어 소스에 찍던 강주한이 눈을 들었다.

“왜요?”

“예?”

“지금 웃고 있잖습니까.”

“……살면서 애인에게 아침상 받아본 게 처음인데, 그게 주한 씨인 게 신기하거든요.”

강주한은 하선우와 눈을 맞춘 채로 헤헤 웃으며 빵을 우물거렸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듯이 보였지만, 끝내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다문 입술을 달싹이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몸은 어때요?”

“안 좋아요.”

“얼마나?”

“제 거기도 내구도라는 게 있거든요. 어제부로 다 닳은 것 같은데요.”

포크를 내려놓으며 강주한은 턱을 괴었다.

“제 거기의 인장 강도는 이미 소성 변형을 일으켰거든요.”

싱거운 말을 들었다는 듯 그의 입술이 웃었다.

“시그마를 넘어섰다는 말이죠?”

“예.”

“그럼 내구도가 닳았는지 확실하게 테스트를 해볼까요?”

정말 궁금하듯이 구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못 들을 얘기를 들었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강주한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하선우는 그 속에 숨은 짓궂은 장난기를 엿보았다. 내가 내 무덤 팠군요. 툴툴거리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화의 주제는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빵 속에 든 검은 올리브에 대해 얘기하다, 동남부 유럽 부근에서 본 올리브 나무에 대한 일화로 옮겨갔다. 하선우는 지중해 연안에서 형들을 잃어버렸던 에피소드를 화제에 올렸다. 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세 형제 모두 복대를 찼는데, 그 덕분에 식당에 갈 때마다 가슴께까지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는 허풍 섞인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어젯밤에 비해 두 사람 사이에는 느긋한 여유가 생겼다. 간밤에 비하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기진맥진했던 지난밤을 떠올리던 하선우는 자연스럽게 강주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출근을 앞둔 바쁜 아침 시간인데도 강주한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하게 식사하는 중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샐러드를 포크로 한데 모아 긁으며 그는 말했다.

“내 차 가지고 출근해요.”

“아뇨, 괜찮아요. 집에 들러서 가져가면 돼요.”

“번거롭잖습니까. 주차된 차 중에 마음에 드는 걸로 타고 가요.”

강주한은 배려하듯이 말했지만, 그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다소 달랐다. 하선우는 그의 차를 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한 번 더 거절했다.

“괜찮아요. 오피스텔이 여기서 먼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변명으로 들릴 것 같지만,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차 바뀌었다고 추궁할까 봐 좀 그래요. 어제 말했잖아요. 공금 횡령했냐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강주한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우는 강주한에게서 머물러 있는 미적지근한 분위기를 읽었다. 그때 아열대의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사고의 수풀 속에서 이름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지금껏 잊고 있었던 문도일이었다.

그에게 미안하게도, 강주한과 함께 있는 내내 그를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었다. 하선우는 목 안으로 잠긴 신음을 흘리며 다문 입술을 꿈질거렸다. 그 소리에 강주한이 눈을 들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강주한이 대답을 기다리며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하선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왜 그런 표정 짓습니까?”

강주한은 한 번 더 물었다.

“예?”

“나한테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예. 있긴 한데.”

“해봐요.”

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은 나오지 않고 안에서만 맴돌았다. 목구멍과 입술 사이 텅 빈 공간에 걸린 문장들이 단순히 타인에 관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기침처럼 뱉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선우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선우와 문도일 사이에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미련과 죄책감이 있었고 강주한과 문도일의 사이에는 재 같은 부조리가 쌓여 있었다.

“어제 제 오피스텔에 있던 남자 기억하시죠? 아실지 모르겠는데 성일금형의 문도일 씨라고, 지금은 제가 인수한 울산 공장의 사장이에요.”

장벽을 넘는 높이뛰기 선수처럼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려웠지, 일단 혀끝으로 밀어내니 그 다음은 술술 터져 나왔다. 하선우는 대학 시절에 ‘조금 알고 지내던 형’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경매로 낙찰받은 공장의 오너였다며 그에 대해 구구한 설명을 곁들어 얘기했다.

하선우는 일단 말이라도 건네보자는, 처음의 가벼운 결심과 달리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졌다. 한때 지겹도록 응답받지 못한 감정의 대상에 대한 연민과 자책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그에 대한 감정이 자꾸만 뒤엉켰다. 게다가 문도일이 겪는 불의는 엘텍과 맞닿아 있었고 엘텍이 밀어낸 자리를 차지한 하선우는 강주한이 건넨 혜택에 빚을 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강주한과 사귀는 사이였다. 문도일과 강주한, 두 사람 모두와 연결된 자신이 꼭 비논리로 점철된 모순 덩어리 같아, 입이 썼다.

“얘기를 듣다 보니 안됐더라고요.”

빵을 으적일 때마다 불룩해지는 강주한의 볼을 흘긋거리며 하선우는 말했다.

“엘텍하이스코가 엘텍의 작은 계열사 중 하나라서 주한 씨가 이 일에 관해서는 모르겠지만. 사정이 딱하잖아요.”

집중하는 강주한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마친 하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강주한에게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하선우는 고백을 하고 차이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불안해져 강주한의 표정을 낱낱이 살폈다. 강주한은 하선우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강주한의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는 모습이 꼭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사회지도층으로서.”

운을 뗀 그는 뒷말을 잇기 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적합한 표현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티가 역력했다.

“사회지도층이 부와 권력과 명성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면, 나 역시 그런 사람인 거겠죠.”

그가 빵을 덥석 베어 먹는 사이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강주한은 천천히 빵을 씹어 넘긴 뒤, 입가심으로 차를 마셨다. 모두 먹어치워 텅 빈 그릇을 테이블 저편으로 치우며 그는 말했다.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도덕성이 요구되는 자리지만 가끔은 내가 천칭 위에 금을 올려놨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시장이라는 저울의 한쪽에 금을 올렸을 때, 금과 등가교환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도 말이죠. 가끔은 직원들이 인센티브를 얻으려고 저지르는 도덕적 실수조차 모르고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변명 같겠지만 솔직히 모두 신경 쓸 여유는 없거든요.”

얘기를 하는 내내 똑바로 눈을 마주하던 그는 하선우의 턱 어디 즈음으로 시선을 낮추었다.

“엘텍하이스코 사장님께 내사 요청은 하겠습니다.”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눈을 크게 떴다. 반쯤은 미리 부정적인 결론을 내려놓았기에 강주한이 오히려 쉽게 수긍을 해주니 얼떨떨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접시를 포개던 그가 하선우를 일별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하선우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접시를 모조리 챙겨 간 강주한이 개수대 안에 그릇을 집어넣었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겸연쩍은 기분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실 기대 안 하고 말한 거라 들어주실 줄 몰랐거든요.”

강주한이 멈칫했다. 개수대를 마주 보느라 하선우에게 등을 보인 채로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웃으세요?”

“내가 진짜 나쁜 놈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하선우는 그의 웃음 띤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을 갉죽거리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제가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서 그래요. 하선우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인 강주한의 뒤통수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 * *

휴대폰이라도 챙겨 나올걸.

하선우는 미처 휴대폰을 챙길 정신도 없이 강주한의 차에 올라탔던 게 떠올랐다. 아마 문도일은 갑자기 사라진 후배의 전화를 기다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14층을 누르고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는 것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하선우는 자신의 후회가 의미 없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는 문도일의 연락처를 몰랐다. 휴대폰을 가져갔다고 해도 그와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선배는 아직 있을까.

간곡하게 애원하며 집으로 초대해놓고 정작 집주인이 잠수를 타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하선우는 어떤 뻔뻔한 낯짝을 하고 문도일을 봐야 하나 근심스러웠다. 어젯밤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하선우의 번민은 문을 연 순간 무색해졌다. 원룸은 텅 비어 있었다. 어젯밤 현관문을 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지금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반, 문도일이 떠나버려 섭섭한 마음이 반이었다.

소파 위에는 그가 입었던 옷이 개켜 있었다. 침대를 사용하라는 하선우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소파에서 잤는지 옷 옆에는 반듯하게 갠 이불이 포개어져 있었다.

하선우는 그 자리에 서서 그가 남긴 흔적들을 아까운 듯 쳐다보았다. 뒷머리를 벅벅 긁던 하선우는 소파테이블 위에 놓인 샛노란 메모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덕분에 편히 쉬다 간다.

혹여 연락할 일 있거든 02-****-****로 전화번호 남겨다오.

글자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 지극히 문도일다운 문체에 하선우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실없는 웃음을 감추려 괜히 소리 내어 한숨을 쉰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헛기침으로 목청을 몇 번이나 가다듬은 뒤에도 하선우는 선뜻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도일이 어젯밤 일에 대해 물을 경우 대답할 말이 여전히 궁색했다. 신통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그는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그를 맞이한 목소리는 문도일의 것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노인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귓가에 휴대폰을 바짝 붙이고 하선우는 말했다.

“문도일 씨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문도일 씨요? 그게 누군데?

하선우는 도일이 남긴 메모 속의 전화번호와 자신이 누른 번호를 비교했다. 같은 번호였다.

“거기가 어딥니까?”

-고시원이오. 햇살 고시원.

하선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문도일 씨가 거기 머물고 계신 것 같은데, 전화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고시원에 입실 중인데.”

-에……, 잠시 기다려봐.

노인은 코가 막혔는지 쉭쉭거리며 숨을 쉬었다. 휴대폰 너머로 종이가 팔락팔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뒤에 노인이 말했다.

-411호에 입실한 양반이네.

“그분하고 통화를 하고 싶은데 연결 좀 해주십시오.”

-잠깐 기다려요.

의자 끄는 소음과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돌아온 노인이 말했다.

-방문 잠겼어. 나간 모양이네.

“411호에 입실하신 남자 분, 보통 몇 시에 돌아오시나요.”

건너편에서 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했다. 하선우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또 다른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노인은 언성을 높였다.

-여기 한두 사람 사는 것도 아니고. 이봐요. 그걸 내가 알겠어요? 예? 아침댓바람부터 사람 짜증나게.

그는 그르렁거리는 가래 낀 목소리로 한참 투덜투덜 불평을 내씹었다. 그는 고시원 주인이 겪는 삶의 수모와 개념 없는 입실객들의 천인공노할 행동에 대해 털어놓았다.

방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새벽에 몰래 도망간 원생은 죽을 때까지 이런 욕을 얻어먹겠구나, 난데없는 간접경험을 한 하선우는 노인이 숨을 집어삼키며 다음 말을 준비하려는 찰나를 노려 말했다.

“예. 고생 많으십니다.”

고시원 주인이 뒷말을 꺼내는 속도보다 빠르게 하선우는 뒷말을 이었다.

“그럼 제 휴대폰 번호 좀 메모해서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양반은 휴대폰 없어?

있으면 이런 전화도 걸지 않았겠죠. 쏘아붙이고픈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고 짐짓 상냥히 말했다.

“예. 전화번호 메모 전달 좀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끝낸 뒤 휴대폰 화면이 고시원 주인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그러고도 울컥하는 마음이 쉽게 가시질 않아 한참을 심사가 뒤틀린 상태로 있었다. 그 와중에도 괴팍한 노인이 주인으로 있는 고시원에서 지내는 문도일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미꾸라지가 진탕 친 것처럼 들썩거렸다. 그러나 고시원 전화번호를 남긴 걸 보면 그는 자신의 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자신의 가난을 무심한 태도로 순순히 인정하는 사람을 알량한 안타까움으로 동정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 * *

일산으로 가는 출근길에 하선우는 문도일을 떠올렸다. 어젯밤에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과 제 삶의 여로가 겹쳤던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을 들쑤시는 자학을 하고, 그가 간밤에 털어놓은 사연들을 되씹기도 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를 달렸다.

문도일과 재회한 게 어제건만 벌써 해묵은 과거의 일 같았다. 그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치 기승전결이 뚜렷한 한 편의 영화를 찍은 기분이었다. 문도일과 하선우의 우연한 재회로 시작된 이야기는 강주한의 오해를 사고, 위기를 지나 해피엔딩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문도일과 엘텍하이스코 간의 해묵은 갈등은 강주한의 말 한마디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는 정치인이 내세우는 공허한 공약처럼 약속을 남발하는 이가 아니었다. 씁쓸하긴 하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덕분에 문도일에게 지닌 자책의 감정이 조금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정체 구간을 지나며 그는 대시보드에 꽂아둔 USB를 실행시켰다.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하던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인문학에까지 영역을 넓힌 덕에 듣기 시작한 오디오북이었다. ‘상징’에 대한 내용을 담은 오디오북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핵심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마침 오디오북에서 다루고 있는 챕터는 화폐의 상징성에 대한 것이었다.

자연 화폐부터 점차 추상적인 신용 화폐로 탈바꿈한 돈의 가치에 대해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강주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생활방식에 적응한 뒤에도 하선우는 여전히 한계를 알 수 없는 강주한의 부유함에 위화감을 느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줄 알았건만, 한동안 단절됐다고 믿었던 위화감이 천천히 발효되어 그의 마음에서 부풀어 오른 반죽처럼 일어났다.

“사회지도층.”

그는 한 번 더 소리 내어 말했다.

“사회, 지도, 층.”

세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문자의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계급적인 의미를 지닌 복합어였다. 정체 구간을 지나면서 시작된 위화감을 향한 고민은 톨게이트를 빠져나감과 동시에 생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일이었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맞이한 현실은 머릿속에서 애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감상적인 고민을 앗아가버렸다.

이석이 굳은 얼굴로 하선우의 앞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화면에는 3분기에 납품할 제품의 시간별 생산량과 불량률이 기록된 그래프와 각종 데이터가 담겨 있었다.

“갈수록 큰일이네.”

공장 1라인에서 추출한 불량률의 표본수치를 눈으로 훑은 하선우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어째 불량률이 더 나오네. 단순작업 위주로 재설계해서 보낸 거 맞지?”

“그래.”

“안 그래도 원자재값이 지난주부터 폭등해서 단가 맞추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공장장 채용공고 올렸으니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 자재값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테고.”

신설 공장인 탓에 숙련공의 비율이 현저히 낮았고, 울산 공장이 가동되면서부터 함께한 공장장이 갑작스럽게 퇴사를 하면서 결원이 생긴 상태였다. 그룹장이 공장장의 역할을 임시로 맡고 있지만, 여전히 생산성과 불량률의 추이가 들쑥날쑥 불안정했다. 담배를 찾으려 앞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이석에게 하선우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열었다.

“있잖아, 형.”

“왜?”

“나 어제 도일 형 만났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던 이석이 망연히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얼마쯤 지난 뒤에야 하선우의 말을 이해했는지 그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되물었다.

“문도일?”

“응.”

“그래?”

이놈의 라이터는 어디 간 거야. 하선우를 흘깃거리며 주머니를 뒤적거린 그는 마침내 라이터를 찾아냈다. 라이터의 플리트 휠을 몇 번이나 굴린 끝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 그가 첫 모금에 딸려 나온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지내디?”

“서울에서 혼자 지낸대. 가족들은 첫째 형 있는 미국으로 보냈고. 고생 많이 한 것 같더라.”

이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선우는 그가 석연찮은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절묘한 순간에 문도일을 입에 올렸으니까. 전문인력 충원, 공장장 부재와 같은 소재가 난무하는 와중에 난입한 문도일이 달가울 리 없었다.

“서울에서 뭐하는데?”

“그냥 여러 가지 일 하나 봐. 정규직으로 일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가족생활비 버는 것만도 빠듯해 보이긴 하더라.”

“그래?”

연신 담배를 빨던 이석은 복잡한 얼굴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하선우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파고들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는 결국 물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냐?”

“그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야.”

“도일이 공장장으로 채용하자는 말?”

하선우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이석이었다. 자신이 너무 앞서 갔다고 투덜대며 그는 재떨이에 담배 불씨를 비벼 껐다.

“그럼 뭐, 뭐? 무슨 말 하려고 했는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뭐?”

“그냥 도일 형이랑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어.”

이석은 심각한 표정으로 하선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는 말했다.

“걔는 플라스틱 사출 기술이 있는 거지 알루미늄 금형 기술자가 아냐. 분야가 달라.”

“분야가 아주 다른 것도 아니고 초보라고 할 수도 없잖아. 전에 도일 형이 하던 일이 최고경영자와 다를 게 뭐가 있어. 게다가 생산계획 수립, 생산관리 업무, 제품생산 및 공장 운영 및 관리, 이게 바로 공장장이 하는 일이잖아.”

재빠르게 쏟아내는 하선우의 말에 이석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또 울산에 연고도 있고.”

“연고가 있다는 게 문제잖아.”

“그게 왜.”

“너 자꾸 모르는 척할래? 우리가 낙찰받은 공장이 누구 거였냐. 바로 도일이 거잖아. 도일이를 공장장으로 들여서 뭘 어쩌자고. 나는 너랑 동업하는 거지 문도일이랑 동업하는 게 아냐.”

“채용하자는 거지 동업하자고 했어?”

“그게 말처럼 쉬워?”

“어제 만나서 다 얘기했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다고. 형은 개의치 않는다고 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석이 하선우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말만 그렇게 한 거지, 속마음은 다를 거다.”

“그래. 마음 아프겠지. 그렇다고 우리가 도와주지 못할 건 또 뭐야? 둘이 친하게 지냈잖아. 미안해서 그런 거면 그만큼 우리가 도와주면 돼.”

“나는 좀 그래!”

버럭 소리를 지른 이석은 자신의 성난 목소리에 도리어 놀랐는지 움찔댔다. 붉어진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킨 뒤,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도일이 보기가 좀 그렇다고.”

이석은 입을 꾹 다물고 하선우를 보았다. 이석의 안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던 무엇인가가 허물어졌다. 화를 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몇 년 전에 딱 한 번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어.”

“뭘?”

“변호사 선임 비용 좀 빌려달라고.”

이석은 마저 말을 잇기가 어려운 듯 머뭇거렸다.

“140만 원인가, 솔직히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었는데 어렵다고 거절했어. 특허 때문에 대기업이랑 소송 중이었는데 솔직히 승산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그 얘기 왜 나한테 안 했어?”

“우리가 그런 일 신경 쓸 여유나 있었어? 회사사정 나아진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옛날 일을 잊어?”

“그 말이 아니라, 소송 얘기. 언제는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다며!”

이석은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엘텍을 대상으로 소송하는데, 너한테 말하면 뭐가 달라져?”

이번에는 하선우가 할 말이 없었다.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소송은 변호사를 구하기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어렵사리 변호사를 구한다 하더라도 승소할 가능성이 낮았다. 이석 대신 하선우가 변호사 선임을 도왔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업하는 사람에게 140만 원은 애매한 금액이었다.

그 돈을 빌려야 하는 현실 자체가 충분히 군색했다. 그런 구차함을 감수하고 전화를 걸었을 문도일을 생각하자,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도일 형이 엘텍이랑 특허소송 벌였다는 것도 나는 최근에 알았어.”

“알면 뭐? 도움이 됐겠어? 나는 뭐 자세히 알았게?”

“그래도 친구인데 사정 좀 알아보고 도와줄 수는 있었잖아. 아니면 나한테라도 말을 하지 그랬어.”

“발 벗고 나서봐야 달라지는 게 있었겠어? 괜히 속만 상하지. 몰랐어도 돼.”

하선우는 이석을 노려보며 씨근거렸지만, 결국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선우가 알았어도 고작 변호사 선임 비용을 일부 돕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소송을 연장한다 하더라도 결과가 지금과 달라지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도일의 부도는 NnG에 우연히 얻어 걸린 행운과도 같았다.

“그럼 셋이 얼굴이라도 보자.”

표정을 확 구기는 이석을 보며 하선우는 달래듯 말했다.

“미안해서 그런 거면 다시 만나서 풀면 되고.”

“아니, 나는 도일이 만나기 불편하다니까?”

“불편하니까 남자들끼리 술 한잔 마시면서 풀자고.”

“풀 오해가 어디 있다고. 나 너 망할 거 같아서 도와주기가 좀 그랬다. 이렇게 말하리?”

“자리 마련한다? 약속 잡는다?”

“아! 저 똥고집.”

명치를 주먹으로 쾅쾅 치며 그는 미안한 얼굴로 웃는 하선우를 쏘아보았다. 한참 뒤 이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 짜증 가득한 표정을 감추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이 새끼야.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상처 입힌 상대를 대면하기 두려워하는 진심이 얼룩처럼 묻어 있었다.

* * *

노량진 정류장의 푯대 앞에 선 하선우는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땡볕이 내리쬐는 도로변에는 땀을 식혀줄 미풍도 불지 않았다. 6시를 넘긴 저녁임에도 태양볕은 세상을 탈색시킬 기세로 눈이 시리게 쏟아졌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햇살 고시원으로 가는 지도가 도보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그의 머릿속으로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으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제목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그는 문도일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도로는 번잡스럽고 날씨는 푹푹 쪘지만 목적지 부근에 이르자 마음이 소풍을 가는 유치원생마냥 들떴다. 술집과 먹자골목이 즐비한 도로를 지나 일방통행로로 들어서자 생필품을 파는 할인마트와 분식점, 자그만 커피숍이 바듯하게 들어찬 길가가 나왔다.

햇살 고시원의 간판은 분식집 빌딩의 3층에 걸려 있었다. 벽돌만 한 크기의 반질반질한 잿빛 타일로 외벽을 장식한 건물은 구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빌딩이었다. 2층에 당구장과 PC방이 자리한 탓에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의 바닥은 온갖 검은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폭이 좁고 높은 비탈진 계단을 올라 4층 층계참에 선 그는 고시원 입구의 문을 열었다. 양팔이 아니라 한쪽 팔을 다 펼치지도 못할 만큼 좁은 복도 옆으로 인간 수납을 위해 지어졌을 법한 작은 방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햇살 고시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빛이 들어오는 곳이라곤 좁은 복도의 끄트머리에 있는 창문이 전부였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버려진 목욕탕에 들어온 것처럼 퀴퀴하고 눅눅한 습기가 코를 찔렀다. 고시원이라는 주거형태가 만들어지던 태곳적에 지어졌을 법한 건축물은 세월의 신비를 간직한 동시에 심각하게 낡아빠져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4층 초입에는 총무실이 있었다. 모텔의 카운터처럼 유리벽 일부만 보이는 구조로, 격리된 벽 너머에는 평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서 한 노인이 잠을 자고 있었다. 바로 어제 하선우에게 온갖 불평을 쏟아냈던 문제의 인물인 듯했다. 하선우는 유리벽 너머에 서서 별 뜻 없이 노인을 지그시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문도일이 머문다는 411호의 적갈색 나무문 앞에 선 하선우는 주먹을 헐겁게 쥐고 톡톡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소리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더 힘을 줘 문을 두드렸지만 응답은 없었다. 그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당연히 문은 잠겨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고민에 빠진 하선우의 등 뒤에서 소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학생? 직장인? 방 보러 왔어?”

가래 낀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제 아침 문도일의 부재에 대해 통화했던 노인이었다.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탓에 화들짝 놀란 하선우는 노인의 얼굴을 보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시원의 총무답게 노인은 발소리를 죽여 걷는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한 모양이었다.

“아뇨. 만날 사람이 있어서.”

비교적 온화했던 원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좀도둑을 구별하는 감별사처럼 하선우를 위아래로 훑어본 그는 하선우의 차림새가 궁색과는 거리가 먼 것을 확인하고는 의심을 거두었다.

“411호?”

“예.”

원장의 입에서 음, 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침음이 흘러나왔다. 어제 아침 자신의 복장을 긁었던 문제의 인물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전화번호 전해줬어.”

“예.”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한 하선우는 괜히 고시원을 둘러보았다. 하선우의 왼손에는 마침 비타민 음료가 한 박스 들려 있었다. 박스 속에서 비타민 음료 한 병을 꺼내 원장에게 건네며 그는 슬그머니 물었다.

“선생님. 여기 입실 요금이 얼마나 하죠?”

“그건 왜. 살라고?”

“예……. 좀 알아보려고.”

“창문 없는 방은 18만 원부터 있고 창문 있는 방은 30만 원부터 있어. 여기가 서울서 젤로 싸.”

“여기는 어때요?”

411호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가 원장의 마음을 거스른 모양이었다. 눈썹을 치켜세운 채, 한참 하선우를 쳐다보던 원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30만 원. 거긴 입실 완료됐다니까. 다른 방 보여줘?”

“아뇨. 이제 그만 볼게요.”

방 볼 것도 아니었으면서. 원장은 툴툴거리며 음료수의 병뚜껑을 돌려 땄다. 총무실로 돌아가는 원장의 왜소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선우는 복도에서 잠시 서성거리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고시원과 이어진 입구가 바로 보이는 맞은편에 위치한 카페였다. 문도일이 언제 돌아올지는 몰라도, 건물의 출입구를 겨누어 보며 하선우는 언제까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연락처를 남겼지만 문도일은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기다리느니 직접 이곳에서 만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선우는 카페의 통창 너머로 거리 위로 저녁노을의 노란 빛이 번지는 것과 어스레한 어둠이 깔리는 것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비슷비슷한 디자인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린 여자들, 짐이 가득 든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고시생들, 저녁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직장인 무리에 때때로 시선을 빼앗기면서도 사람이 거의 오가지 않는 입구를 주시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하선우는 예상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입에 맞지도 않는 쿠키와 느끼하고 단 케이크 쪼가리를 먹으며 시간을 때우다가, 결국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복잡한 패턴의 암호를 풀고 인터넷 뉴스를 몇 가지 열람하다, 사진 보관함을 열어 지금껏 찍었던 사진을 죽 훑어보았다. 그곳에는 제 눈에만 귀여워 보이는 조카들의 셀프 샷과 회사 건물이 증축되는 과정이 담긴 사진들을 담겨 있었다.

가장 최근에 저장한 파일은 회식 중간에 회사 직원들의 야유를 받으며 찍었던 셀카 사진이었다. 술기운에 강주한에게 사진을 보내놓고 후회했던 게 떠올라 하선우는 히죽 웃었다. 물론 사진을 감상하는 틈틈이 고시원의 출입구를 흘끗거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출입구 앞에서는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고시원으로 들어간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곧 출입구 밖으로 나온 여자친구와 팔짱을 끼고 하선우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하선우는 스무 살 무렵의 기억이 떠올렸다. 오피스텔의 입구, 또는 오피스텔의 복도에서 가끔 마주치던 문도일의 젊은 얼굴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다.

당시 문도일의 여자친구는 하선우와 같은 오피스텔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덕에 하선우는 본의 아니게 그들의 소박한 데이트를 목격할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하선우에게 아무 관심도 없던 문도일이었지만, 하선우가 같은 과 후배인 것을 안 뒤로는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럴 때면 문도일을 향해 자라나는 제 마음의 크기를 확인하고 우울에 빠지곤 했다.

하선우가 문도일과 처음 제대로 나누었던 대화도 여자친구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 여자친구가 너 잘생겼다더라.’

생활관 밖에서 캔 커피를 뽑아 마시던 하선우의 뒤에서 문도일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예? 보나마나 멍청한 표정을 짓고 되묻는 그에게 문도일은 말했다. 같은 오피스텔 건물에 잘생긴 학생이 입주했다는데, 아무래도 그게 너인 것 같아서. 그러니까 너 흑심 품지 마라. 그는 하선우와 같은 커피를 뽑아 따듯한 캔을 볼에 굴리며 씩 웃었다.

그는 제 여자친구에게 관심 갖지 말라며 장난삼아 경고했지만, 하선우가 진짜 마음에 둔 사람은 문도일이었다. 하선우는 따끔거리는 아픔과 양심이 찔리는 뜨끔한 기분을 동시에 느끼며 움츠러들었다.

그 당시의 하선우는 문도일과 마주하는 일 자체가 매번 충격이 큰 일이었다. 그 때문에 문도일을 열렬히 갈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선우는 새삼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한 자신이 신기했다. 시간 속에 헹궈낸 감정이 씁쓸하긴 하지만 이전의 자극적인 맛은 잃은 지 오래였다. 감정이라는 게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그 시절 알았더라면, 그토록 가슴앓이를 하진 않았을 텐데.

제 안에 자라난 초연함을 들여다보던 하선우는 건너편에서 익숙한 옆모습을 발견했다.

“선배!”

문도일은 처음에는 ‘선배’라는 단어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듯 하선우를 쳐다보지 않았다.

자신의 허벅지 근처에 오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출입구의 계단을 올라가던 그는 등 뒤로 다가온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하선우임을 알아차리자 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여긴 어쩐 일이냐?”

하선우는 흥분으로 떨리는 감정에 휩싸인 채 말문을 열었다.

“선배 만나러 왔죠. 이거 방에 가져다 놓으려는 거죠?”

“그러긴 한데……. 나 찾아온 거냐?”

“예. 그거 저 주세요. 제가 들겠습니다.”

입술을 씩 벌려 웃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뭐가 들었는데 이렇게 무겁대요?”

“그냥 좀……. 팔다 남은 거.”

여전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문도일은 띄엄띄엄 말했다. 하선우가 캐리어를 들고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걸 바라보다가 문도일은 곧바로 캐리어의 뒤축을 들어 무게를 나누었다.

“전화번호로 검색해서 찾아온 거냐.”

“예.”

그래.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이 문도일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하선우의 뒤를 따랐다. 3층의 계단 끝 층계참에 서서 하선우는 고시텔의 철문을 잡고 말했다.

“411호죠?”

“알아봤구나.”

“사실 집에 계신가 하고 문 두드렸었어요.”

문도일의 시선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일부러 눈치 없는 척, 씩씩하게 대답한 하선우는 가방의 무게가 자신 쪽으로 더 쏠리도록 가방의 고리를 조금 치켜들었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고인 계단을 지나 복도로 들어선 두 사람은 음식냄새가 진동하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누가 저녁 만드나 보다. 공용 부엌이라 가끔 냄새가 복도로 새더라.”

시큼한 음식냄새의 정체에 대해 변명한 그는 잠긴 문을 열었다. 가로로 좁고 세로로 긴 구조의 방에서 가구라고 할 만한 것은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책상 옆에는 플라스틱 리빙 박스 몇 개가 놓여 있고, 그 위로 행거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책상은 사용하지 않는지 의자가 있어야 할 곳에는 커다란 비닐봉투가, 책상 위에도 종이박스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하선우의 예상보다 방은 넓었으나, 창문이 없어 환기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짐이 좀 많지?”

하선우가 방 안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보고는 문도일이 설명했다.

“예. 근데 깔끔하네요. 혼자 지내신다고 해서 홀아비 냄새 폴폴 날 줄 알았는데.”

짐짓 짓궂은 척 명랑하게 웃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홀아비 냄새라니.”

코를 찡긋거리며 문도일은 소리 없이 웃었다.

“행상할 때 파는 재고 때문에 좀 넒은 방 얻었어. 그런데도 많이 비좁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 문 앞에 세우자 현관에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만한 자리가 남았다. 하선우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책상 한쪽 구석에 비타민음료 박스를 내려놓았다. 문도일은 잘 마시겠다는 인사치레와 함께 재빨리 제 방 구석구석을 훑었다.

“아무래도 여기 방음이 안 돼서 나가는 게 좋겠다. 좁기도 하고. 저녁은 먹었고?”

“아뇨. 아직.”

“다행이네 나도 아직인데. 어젠 내가 얻어먹었으니 오늘 저녁은 내가 사마.”

“그것도 좋긴 한데요. 그보다 술 한잔하실래요?”

문도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술국 괜찮으면 근처에 술국 파는 데 있는데, 거기로 갈까?”

“예. 근데 선배.”

“응?”

“석이 형도 부를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석이 형은 괜찮다는데.”

대화가 멎었다. 문도일은 고민에 빠진 눈으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생각에 깊이 빠질 때마다 대답을 신중히 들려줄 대상을 몇 초간 지그시 바라보는 건 문도일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때마다 그의 꾹 다물린 입술이 슬쩍 들리곤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습관은 그대로였다.

“언젠가부터 사람 만나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하더라. 배터리가 방전되는 것처럼 닳는 느낌이 들어.”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하선우의 어깨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듯 쓰다듬었다.

“내가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하선우는 섭섭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가 선을 긋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선우도 과거의 인연과 재회한 것만으로도 여간 힘이 달리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끝이 좋지 않았던 상대방과의 재회라니, 반가울 리 없었다. 어쩌면 하선우도 문도일에게는 피로만 쌓이게 하는 과거 사람일지 몰랐다. 기실, 그의 삶에 갑자기 끼어들어 활개를 치려는 자신이 하선우도 의아할 지경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단둘이 있는 경우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고, 문도일과 유별난 우정을 나눈 것도 아니었으니 이런 자신의 행동이 갑작스러운 관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문도일과 자신 사이의 감정적 오차를 간과한 채 덤벼들었던 하선우는 선뜻 뒷말을 잇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밥만 먹을까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예?”

“안 간다고는 안 했다.”

하선우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며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네 얼굴, 시무룩한 게 꼭 꾸중 듣는 강아지 같다.”

비슷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도 들었던 적이 있다. 하선우는 대꾸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뭇댔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물었다.

“형, 무슨 말이 그래요?”

문도일은 어깨를 매만지던 손을 들어 하선우의 머리를 덮었다. 강아지를 쓰다듬듯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나이가 들어도 애 같은 건 여전하다고.”

저녁시간을 넘겼지만 순댓국밥집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붐볐다. 순댓국보다는 술국을 주문한 테이블이 많은 것으로 보아 저렴하게 음주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인 듯했다.

“요즘도 술국이 8,000원인 데가 있네요. 예전에 저 대학 다닐 때도 이 가격은 보기 어려웠는데.”

“찾아보면 은근히 많아.”

문도일은 하선우의 빈 그릇에 국을 수북이 담으며 말했다.

“이런 거 잘 안 먹게 생겨서는.”

“저 원래 남의 내장을 남의 살보다도 더 좋아해요.”

머릿고기와 내장, 순대가 가득 든 국을 수저로 뜨며 하선우는 웃었다.

“이런 거 정말 오랜만에 먹어봐요.”

입안 가득 퍼지는 육수의 맛에 하선우는 주먹을 꽉 쥐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돼지고기의 부산물로 가득한 이런 음식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애인이 이런 거 싫어하나 봐.”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질색할걸요.”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젯밤 문도일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던 중 애인이 있냐는 그의 질문에 애매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애인이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하선우는 애인이 화제에 오를수록 거짓말만 느는 셈이라 일부러 말을 아끼던 참이었다.

게다가 하선우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중이었다. 문도일이 하선우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순간부터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툭툭 불거졌다. 끓어오르는 술국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하선우는 제 정수리를 살살 긁다가 이내 손을 내려 양손을 마주 잡고 꿈지럭댔다.

“겹치는 취향이 별로 없나 봐.”

“예. 그게 또 매력이긴 해요.”

문도일의 말처럼 하선우와 강주한 사이에는 공통된 취향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취향이 곧 하선우의 취향이 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하선우의 취향이 강주한의 취향이 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곱창과 막창을 굽는 강주한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보기엔 야무져 보이는데.”

하선우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문도일은 말했다.

“선우 너는 은근 허당이라서 상대방에게 휘둘릴 것 같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닌데요. 상대방 성격에 따라 달라요. 주도적으로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이번에는 아닌 모양이지.”

하선우는 대답 대신 어깨를 가볍게 추슬렀다. 그와 연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강주한의 모습이 얇은 가름막 너머로 어렴풋이 얼비칠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러나 문도일은 평범한 다른 사내들처럼 남자를 연애대상으로 여길 수 없는 인간이었다. 감각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는 보통의 남자 문도일에게 ‘동성연애’는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문화권에서나 존재하는 별난 사람들의 이야기일 터였다.

대학 시절, 그의 지나친 반듯함 때문에 하선우는 그가 호모포비아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무턱대고 고백했다간 혐오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는 문도일을 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우려로 문도일에게 향하던 마음을 다잡았던 하선우였다. 그가 아는 문도일이라면 엘텍의 강주한과 NnG의 하선우의 관계를 의심할 리 없었다. 차라리 하선우가 복권 1등에 연달아 당첨됐다는 말을 믿을 남자였다.

도일이 담배를 사러 간 사이, 이석에게 30분 후에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전화를 끊고 ‘하선우 관리인’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었다. ‘퇴근했습니까 선우 씨 저녓ㄱ은 먹었습니까’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문자는 그가 20분 전에 보낸 것이었다. 행동할 때는 빈틈이 없는 사람이 문자 메시지 따위에 오타를 내는 게 귀여워 하선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출입구를 흘깃 쳐다본 뒤 탁탁, 답 문자를 두드렸다. 지금 먹는 중입니다. 식사하셨어요? 메시지를 보낸 뒤에도 한동안 읽음 표시는 뜨지 않았다. 다른 말을 더 적어서 보낼까? 고민하는 하선우의 뒤로 문도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보는데 그렇게 진지해?”

문가에 선 문도일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냥 메시지요.”

하선우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문도일은 더는 메시지에 대해 묻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담배를 피우고 왔는지 그에게서 담배 냄새가 심심하게 떠돌았다. 씁쓰레하면서도 코끝을 시리게 하는 추억의 향기와 몹시 닮아 있었다.

눈에 콩깍지가 있다면 코에도 비슷한 것을 끼울 수 있구나, 한때 자신을 감탄하게 했던 문도일의 냄새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또다시 죄책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바퀴벌레처럼 어찌나 생명력이 끈질긴지, 아무것도 모르는 문도일의 얼굴을 보며 하선우는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박멸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술이 한 병에서 두 병, 세 병으로 늘어가는 동안 그들은 일상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지난밤에 비해 한결 가벼운, 세상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선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십 몇 분 뒤엔 이석이 도착할 터였다. 문도일은 얘기하지 않으면 굳이 묻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앞으로도 그의 입에서 강주한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겠지만, 이젠 정말 얘기해야 할 때였다. 하선우는 두 사람 모두 의식하고 있지만, 암묵적으로 서로 간에 발설하지 않는 인물에 대한 화제를 슬그머니 꺼냈다.

“그저께 일은 죄송했습니다.”

술병을 잔에 기울다 말고 문도일은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문도일은 입술에 걸리다 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말 안 하나 싶었다.”

조금 더 하선우를 지켜보던 그는 시선을 내렸다. 잔에 술을 채우며 그는 말했다.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안 물었다. 말하기 곤란한 일인가 싶었거든.”

그는 하선우의 표정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는 듯 술을 털어놓고, 안주를 먹었다. 대화의 키는 다시 하선우에게 돌아왔다. 그는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아니었다면 강주한과의 관계를 꽁꽁 숨겨놓고 계속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그러나 계속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데 도일 형, 저 할 말 있습니다.”

“뭔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 그래.”

“제가 강주한 전무님과 알고 지낸다는 건 석 형이 몰랐으면 해요.”

처음에 그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미간을 찌푸렸고 곧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특허 관련한 일인 거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요.”

“…내가 무슨 생각 할 것 같은데.”

굵고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하선우는 중압감을 느꼈다. 그의 입술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아마도… 제가 석 형 몰래 엘텍과 특허와 관련한 이익을 얻으려 한다. 이런 거겠죠?”

하선우를 유심히 지켜보던 문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일이 생각하는 ‘강주한과 하선우 관계의 연결점’은 진실과는 영 다른 곳에 좌표가 찍혀 있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계약체결하면서 개인적인 친분을 조금 쌓았는데 강주한 씨가 모임에 초대해줘서 몇 번인가 나갔거든요. 형이 알면 좀 섭섭해할 것 같아서요. 석이 형 성격 아시죠?”

“석이 성격이라면 섭섭한 것보다는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사실… 그 이유도 없잖아 있어요.”

말을 흐리자 문도일은 그 속의 함의를 파악한 듯 침묵했다. 자신이 신경을 쓰거나 훈수를 둘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더는 파묻지 않았다. 하선우는 그의 침묵이 신경 쓰였다. 그가 자신을 속물처럼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변명을 덧붙일까 싶었지만,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이석에게 온 전화였다.

“석이 형 노량진역에 도착했답니다. 가게로 오는 중이래요.”

그래? 덤덤하게 되물은 문도일은 테이블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쌓여 있는 술병을 구석으로 치우고, 술잔과 수저를 내려놓은 그는 안주와 소주 두 병을 더 주문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이석이 들어왔다.

이석이 두리번거리며 빼곡하게 손님이 들어찬 가게를 휘 둘러보다 하선우와 문도일을 발견했다. 약간 굳은 듯싶던 이석은 성큼성큼 다가와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문도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서울에 올라온 지는 얼마나 됐냐.”

“1년 조금 넘었다.”

“재수 씨는?”

“미국 가 있어. 큰 형이 잡아놓은 터가 있어서 부탁했어.”

“미국생활 적응했다고 하던?”

“그런 것 같아. 힘들어도 얘기는 안 했겠지만.”

“애는 올해 몇 살이더라.”

“여섯 살 됐지.”

“너는 계속 여기서 지냈고?”

“아니.”

“그럼?”

“여기저기 떠돌았어.”

이석은 고개를 약하게 주억거렸다. 짧게 이어지던 대화가 멈추자 그 사이를 껄끄러운 정적이 차지했다. 문도일의 가슴께로 내려간 이석의 시선은 꽤 오랫동안 정지해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는 이전보다 더 겸연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그래. 오랜만에 본다.”

하선우는 괜히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물로 마른 목을 축였다.

“선우야.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줘라.”

하선우는 잔을 든 채로 이석을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하선우에게 돌렸지만, 시선은 여전히 문도일을 향한 상태였다. 하선우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지금?”

“응. 요 근처에 PC방이나 카페라도 가 있어.”

하선우는 이석과 문도일을 번갈아 보았다. 문도일은 묵묵히 술을 비워냈다. 두 사람의 경직된 분위기를 읽은 하선우는 그들 사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게 회한이든 회포이든 그들 사이의 실타래를 푸는 것은 두 사람의 몫이었다. 하선우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제3자의 거리감을 느꼈다. 그는 문도일이 진짜 속마음을 보일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이석이었음을 깨닫고 살그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에라도 가 있어라.”

문도일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방에서 쉬고 있어.”

숨을 죽이고 문도일이 건넨 열쇠를 쳐다보던 하선우는 손을 뻗어 그것을 가만히 받아 쥐었다.

덥다.

미지근한 바닥에 드러누워 하선우는 생각했다. 더웠다.

복도에서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문을 마음대로 열어놓을 수가 없어 하선우는 더위를 맥없이 견디고만 있었다. 그가 견디는 것은 더위뿐만이 아니었다. 문도일이란 추억에 자꾸만 기웃대는 짜증나는 제 마음과 문도일과 이석 사이에서 제3자로 전락해버린 열패감도 함께였다. 더위 속에서 몸도 마음도 모두 천천히 부식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누렇게 변색된 벽지가 발린 낮은 천장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조금 전 문도일과 함께 있을 때 미처 세세히 보지 못한 것들을 살펴보았다.

문도일은 수납 가능한 모든 공간을 활용해 재고를 채워 넣었다. 쿨 토시와 간이 돋보기, 스포츠 수건 등 생활잡화가 대부분이었다. 요즘 지하철에서는 이런 게 팔리는 모양이었다. 퇴근 시간 전까지 지하철 안에서 승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문도일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문도일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경 쓰는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뭇사람들에게 문도일 역시 잡상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게 분명했다. 하선우도 지금까진 기아바이를 잡상인으로만 여겼다. 그들이 지하철에서 목이 터져라 떠드는 말은 별 영양가 없는 소음에 불과했다.

책상과 리빙 박스 사이의 공간에는 우드락으로 만든 피켓이 세워져 있었다. 하선우는 피켓을 꺼내 안의 내용을 읽다, 반쯤 열린 리빙 박스로 시선을 옮겼다.

박스 안에는 서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무심코 그중에 하나를 꺼내 읽던 하선우는 이내 서류의 정체를 파악했다. 엘텍하이스코와 성일금형 간의 특허침해 소송과 특허무효 항변에 관한 자료였다. 하선우는 비좁은 고시원 공간을 차지한 박스의 숫자를 셌다. 그의 가슴께 높이까지 5개의 박스가 쌓여 있었다. 손잡이 부근의 뚫린 구멍 너머로 보이는 것은 모두 흰 종이였다.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소송에 관한 자료를 모은 문도일의 노력에 하선우는 가슴이 뻐근해질 때까지 숨을 들이쉬었다가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아야 했다.

이 좁은 세계가 길고 긴 소송 끝에 남은 문도일의 전부였다. 젊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피상적인 낙관에 희망을 걸기엔 너무 늦어 보였다. 그는 이미 10억이 넘는 빚을 졌고, 사업을 시작할 의지도, 그럴 만한 여건도 갖추지 못했다.

하선우는 강주한과 문도일의 나이가 같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들은 비슷한 세월을 살았지만 이렇게나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는 강주한이 말했던 사회지도층이란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모두를 신경 쓸 여유는 없다던 그의 변명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텍하이스코는 엘텍의 수많은 계열사 중 하나일 뿐이고, 강주한은 계열사의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과업에서 벗어나려 기업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시스템을 입은 기업은 덩치를 끝없이 부풀리고서도 독수리처럼 비상했다. 하늘을 지배하는 그들에게 희생자는 공기 중을 표표히 떠도는 먼지입자만큼이나 작은 존재일 뿐이었다.

하선우는 시스템이니, 기업이니 하는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단어를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들은 하선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쉬우면서도 그 이상으로 어려운 개념들이었다.

다 모르는 척하고 살고 싶다.

솔직한 마음으로 하선우는 그랬다. 다 모르는 척하고 살고 싶었다. 사회, 지도, 층과 같은 계층에 대한 고민이나, 빈부와 사회정의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선우는 그저 강주한을 한 인간으로서만 알고 싶었다. 그를 사회적인 잣대로 판단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문도일이 아니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바닥에 철퍼덕 앉은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어쨌든 강주한은 계열사 사장에게 내사를 요청한다고 했다. 하선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갑자기 강주한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휴대폰을 꺼내 그와 함께 찍었던 사진 파일을 열었다. 웃고 있는 강주한과 그 옆에서 경직된 얼굴의 자신을 꼼꼼히 되새겼다. 사진 속의 강주한과 자신 사이에는 놓인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돌아오라는 호출을 받고 그는 다시 술집을 찾아갔다. 술국은 거의 그대로였고 테이블 주변으로 소주병만 잔뜩 쌓여 있었다. 하선우와 문도일이 세 병을 비웠으니 이석과 문도일이 다섯 병을 비운 셈이었다. 그러나 다들 마신 것에 비해 별로 취하지도 않았고 얼굴도 멀쩡해 보였다. 술병을 세는 하선우에게 손짓하며 이석이 말했다.

“앉아봐라. 정신 사납다.”

딸깍딸깍 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인 이석이 고개를 모로 숙여 연기를 뱉어냈다.

“너 집이랑 노량진 가깝지?”

“응.”

“내일 출근할 때 도일이 좀 데려와라.”

테이블을 향해 의자를 끌어 앉던 하선우가 멈칫했다. 그의 정지된 시선이 이석에게 한참을 머물렀다. 이석은 명료하게 하선우의 의문을 해소했다.

“도일이 일산 공장에서 일 배우기로 했어. 일단 작업환경이 어떤지 알아야 울산에서 일을 시키든지 말든지 하지.”

하선우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석을 대신해 문도일이 입을 열었다.

“염치없지만 그렇게 됐다.”

하선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염치없긴 뭐가 염치없어. 네가 그걸 따질 여력이나 있냐?”

이석은 예사로운 투로 타박했지만 그 속에는 내색하지 않은 애정 같은 것이 엿보였다.

없지. 그런 여력. 덤덤히 한숨을 쉰 문도일은 빈 술잔에 시선을 둔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한숨에는 이석에 향한 고마움과 미안한 감정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고개를 든 그는 하선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선우야, 나 술 좀 채워줘라.”

“……예.”

마른침을 꿀꺽 삼킨 하선우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빈 잔에 적당히 술을 채운 그는 이석에게 부연설명을 해달라는 눈치를 보냈다. 잠깐 눈을 마주쳤지만 이석은 멋쩍은 얼굴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그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 없으나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아마 하선우로서는 짐작도 못할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다. 도와주는 것을 내색하기 싫어 일부러 툴툴거리는 이석을 보고 있자니, 그가 문도일을 돕자는 하선우의 말을 듣고 어젯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쪼개듯 웃으며 딴청 부리는 이석을 일별한 하선우는 다시 문도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 잘 부탁드려요.”

“오래 일을 쉬어서 부족한 것투성일 거다.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

하선우에게 잔을 받으며 문도일은 어렴풋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석은 마신 술의 양에 비해 제법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리를 옮긴 곳에서는 긴장이 풀렸는지 불콰하게 취해버렸다. 주량을 한참 넘어섰는데도 술잔을 놓지 않았던 탓이었다. 반면에 문도일은 바짓단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천천히 술에 젖어드는 중이었다. 그들 중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 이는 맛만 보는 정도로 술에 혀만 담갔던 하선우뿐이었다.

“3차는 네 집에서 하자.”

두 사람이 술을 비우는 동안 마른안주를 축내던 하선우는 이석의 말에 씹고 있던 오징어를 잠시 내려놓았다. 3차까지 가자고?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킨 이유는 이석의 잔에 술을 따르는 문도일 때문이었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어진 그는 이석이 내뱉는 농담에 반응하듯이 간간히 웃었다.

“도일 형도 가요?”

응? 문도일은 하선우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부드럽게 되물었다. 하선우는 이석을 곁눈질했다. 이석은 아랫배를 조금만 눌러도 다 토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도일 형도 오실 거냐고요.”

“그럴까?”

“뭔 허락을 맡아. 당연히 가야지. 선우야, 대리 불러라. 대리.”

대리기사는 정확히 20분 뒤에 도착했다. 그는 말이 없는 편이었고 아주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배경처럼 조용히 스며든 남자 덕분에 하선우는 보조석에 앉아 두 남자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룸미러를 통해 하선우는 뒷자리에 앉은 그들을 훔쳐보았다. 룸미러의 각도 때문에 이석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문도일의 얼굴 반쪽만이 거울 안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는 결혼할 만한 적당한 여자가 안 나타난다는 이석의 투정을 전부 들어주고 있었다. 뒷좌석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하선우는 차창을 조금 내렸다.

서울의 밤공기가 시원하게 가슴을 채웠다. 그는 고개를 들어 빛무리 하나 없는 검은 하늘과 석회질로 무수하게 쌓아올린 빌딩을 통해 가물거리는 빛을 내뿜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도로의 차는 점차 줄어들어 목동의 일방통행로에 이르자 사람은커녕 차조차도 뜨문뜨문 지나갔다. 차창을 올리며 그는 물었다.

“내일 해장은 뭐로 할까요?”

하선우의 질문은 두 사람의 침묵에 무색해졌다. 그가 차창 밖을 바라보는 몇 분 사이에 그들은 고단함을 참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하선우는 피식거렸다. 3차까지 달리기는 무슨. 내일 아침 숙취를 감당할 체력도 없는 아저씨들이 어림없는 객기를 부린 것이었다. 보나마나 내일이면 골골대며 배를 부여잡을 것이었다.

가엾은 두 육신을 돌아본 하선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아침상으로 올릴 해장국 생각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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