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누군가의 암종(癌腫) (12/26)

12. 누군가의 암종(癌腫)

이석은 일주일에 한두 번 퇴근 전에 회사 곳곳을 순례하며 직원들이 퇴근을 했는지, 문단속은 했는지 불은 잘 꺼졌는지를 경비원처럼 살펴보곤 했다.

외근을 나가 현장에서 퇴근을 할 때면, 회사에 남아 있는 하선우에게 자신의 과업을 맡기곤 했는데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회사 곳곳을 돌며 직원들에게 자신감 가득한 CEO의 얼굴을 한번 쓰윽 비춰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사무실과 개발실 처처를 어슬렁거리며 하루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회사상태가 어떤지 파악하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하선우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럽지만, 공기가 바싹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선우는 김 부장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녀의 자리는 창가를 등진 곳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파티션에 팔을 걸치고 턱을 얹은 하선우는 모니터 화면에 코를 박을 듯이 몰두하고 있는 김주안의 옆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사장이 들어왔는데도 돌아볼 생각을 안 했다.

일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모니터를 함께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신문기사나 읽는 중이었다. 이 시간에 일은 하기 싫고, 야근수당은 받아야겠고, 저녁도 먹어야 하고, 퇴근은 8시 즈음에 해야겠고……. 직원들의 의식을 따라가던 하선우는 생각을 중단하고 그녀가 읽는 기사로 관심을 돌렸다.

유상증자 루머에 몸살 앓는 안신, 하루 만에 시총 800억 증발

최근 안신전자가 기업어음(CP)을 발행한 것을 두고 유동성 확보를 위한 유상증자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기업어음을 발행한 것은 단순히 단기자금을 마련하려는 목적이라는 안신전자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장내 마감에 시총 800억이 증발했다. 그밖에 안신EM은 1.31%, 안신유텍이 2.12% 하락하는 등 안신그룹 관련 주들이 전체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했다.

김 부장은 스크롤을 확확 내리며 비슷비슷한 제목의 기사를 연달아 클릭했다. ‘상승가도를 달리던 안신그룹 주 대내외 악재에 몸살 앓아’, ‘안신전자, "유상증자 루머 사실무근"’, ‘전문가들, "안신그룹주 저가 매수할 기회"’, ‘안신그룹의 주가 회복 당분간 불투명’ 관련 기사들을 빠르게 훑은 그녀는 가장 하단에 있는 몇 주 전 기사를 클릭했다.

안신家의 상속 분쟁, 재점화 시작됐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는 7월 초순부터 진행된 안신家의 상속분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엘텍의 안주인인 임용화가 그녀의 남동생 임용우를 상대로 벌였던 소송에서 법원은 임용우에게 부친이 남긴 차명재산의 일부를 임용화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안신생명의 이익배당금 212억, 안신생명의 주식 96만 1211주, 안신건설의 53만 907주, 그 외 CS Telecom 90만 118주 등 안신 계열사 전 범위에 걸쳐 차명재산 2조 6천억 원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9조 3,400억 원 중에서 임용화가 자신의 지분으로 요구한 4조 7,000억 원에는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이었지만, 안신의 입장에서는 임용화에게 안신의 주주총회에 결정권을 행사할 만한 영향력을 안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임용우 회장이 병원에 들락거리는 기사가 일간지와 9시 뉴스를 장식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임 회장에게는 이 모든 게 불행이었지만, 하선우는 임 회장의 차명재산 중에 안신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안신전자의 주식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력 계열사의 주주총회에 엘텍의 안방마님이 치맛자락을 휘두르며 나타나는 모습을 본다면 임 회장은 병원이 아니라 관 속에 드러누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예 면보다 이런 기사가 더 재밌어요?”

“엄마!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그녀는 공중으로 반쯤 뛰어올랐다. 그녀를 뚱하게 쳐다보던 하선우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 퇴근합니다. 김 부장도 적당히 하고 퇴근해요. 이런 건 집에서 보고.”

보통 때라면 한마디라도 더 말을 붙였을 그녀가 웬일로 말이 없었다. 말을 잘못했나 싶어 소심해진 하선우는 나가다 말고 비스듬히 몸을 돌려 말했다.

“모처럼 일 없을 때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요.”

하선우는 문간을 두드렸다. 제법 큰 소리가 났을 텐데도 문도일은 하선우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엇을 그리 집중하고 보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선우는 소리 없이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모델 가공 자료를 보고 있었다.

“퇴근 안 하세요?”

바로 등 뒤에서 소리를 내자 문도일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선우는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퇴근 시간인데.”

그는 하선우의 손가락을 따라 정각 6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았다.

“언제 우리가 6시에 퇴근한 적 있었습니까. 지금 퇴근하십니까?”

“예.”

“일찍 가시는 걸 보니 약속 있으신가 보죠.”

하선우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7시 반까지 서울 올라가야 해서요.”

“먼저 들어가시죠.”

“오늘도요?”

“집에 가는 차편이 없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노량진까지 환승 여러 번 해야 하잖아요.”

문도일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습니다. 정 늦으면 사장님 소파 좀 빌리죠, 뭐.”

사장과 직원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하선우는 민망한 낯으로 웃었다.

금속 가공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갖고 있던 문도일이었기에 공장의 표준화된 공정 시스템에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그는 겨우 2주 출근했을 뿐이지만 이미 일반적인 경력직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는 하선우의 차로 출퇴근을 하면서도 손에서 자료를 놓지 않았고, 하선우는 성실한 그의 태도에 내심 감탄했다. 게다가 그는 호칭 문제가 불거지기도 전에 스스로 후배를 사장으로 예우하고 있었다.

“형.”

“응?”

하선우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탕비실에는 없는 거예요. 혼자 드세요.”

그가 책상에 둔 것은 봉지과자에 비해 비교적 값이 나가는 상자에 들어 있는 크래커였다. 천연 발효종이니 뭐니, 몸에 좋은 것들로만 만들었다는 유럽식 과자는 조막만 한 주제에 가격이 겁 없이 비쌌다.

“사장이 이렇게 직원 차별해도 돼?”

“여기서는 돼요. 다른 거 필요한 건 없으시고요?”

“필요한 거 없다. 신경 써줘서 고맙다.”

같은 사내가 살갑게 구는 게 영 어색한지 그에게서 무뚝뚝함이 뚝뚝 떨어졌다. 군것질거리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그는 포장지를 벗겼다. 커다란 그의 손에 들린 과자가 지나칠 정도로 작아 보였다. 텁, 입안에 과자를 집어넣은 그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달콤함에 진저리 쳤다.

“솔직히 맛있는 건 모르겠다.”

“비흡연자는 가끔 단 게 당겨요. 담배 대신 뭐라도 물고 있어야죠.”

“군것질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아뇨.”

“그런데 뭐하러 일부러 이런 걸 샀어.”

“눈에 띄기에 집어는 왔는데……. 그러게요.”

말끝을 흐린 하선우는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형, 저 먼저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잠깐, 선우야.”

자리에서 일어난 문도일이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하선우에게 내밀었다.

“점심시간에 석이가 휴대폰을 개통해 왔더라. 자기 명의로 내 걸 대신 만들었대.”

하선우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도일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제 번호 여기에 입력하면 되죠?”

문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를 입력하며 하선우는 물었다.

“석이 형 엄청 생색냈죠?”

“뭐, 그렇지. 근데 석이가 생색을 안 내면 그건 그것대로 어색하더라.”

문도일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하선우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호를 저장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낸 하선우는 화면에 뜬 숫자를 보고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예전에 쓰던 번호 비슷하게 개통했더라. 익숙하지?”

선뜻 입을 열지 못하던 하선우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게요. 형 전화번호 잊어버릴 일은 없겠네요.”

번호를 ‘문도일’이란 이름으로 입력한 뒤 하선우는 다시 인사를 했다.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온 하선우는 문을 닫은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이었으면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렸을 텐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하선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현재의 마음과 과거의 마음을 놓고 비교질하는 것 자체가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러게 그때 왜 비밀번호를 입 밖으로 꺼내선. 다행히 그는 비밀번호와 개인신상이 맺은 연관성에 대해 개의치 않는 듯했지만, 찔리는 게 있는 하선우로서는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바꿀 때가 온 모양이었다.

차를 운전해 간 곳은 광화문 한가운데 자리한 엘튼아트센터였다. 오늘은 한향시향후원회를 위한 한향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하선우는 한향시향을 위해 후원금 백 원도 낸 적이 없지만, HLC모임의 소속 회원이었기에 공연에 초대를 받았다.

8시 공연에 앞서 회원들은 모두 저녁 식사를 위해 아트센터의 연회장에 모여 있었다. 유럽의 대성당을 옮겨놓은 듯이 웅장하게 지어진 건물에선 연회와 전시, 결혼식이 주로 치러졌고, 한향교향악단 후원회의 정기모임도 열렸다.

몇 개월 사이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에서 벗어난 하선우는 사람들과 제법 잘 어울리게 되었고, HLC의 모임도 ‘기분전환’의 수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부담스럽고 불편하지만, 모임을 다녀온 뒤에는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지고 활력까지 샘솟았다.

그럼에도 그는 늘 문을 열기 직전, 들어가고 싶다와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감정 사이에서 수 초간 고민에 빠지곤 했다. 하선우가 그 양가감정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을 때였다.

“뭐해, 문 잠겼어?”

등 뒤에서 기습처럼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 하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선우를 지나쳐 주저하지 않고 문을 찰칵찰칵 돌려댔다.

“뭐야. 열리잖아.”

강태한은 하선우를 나무라듯 코웃음 치고는 안으로 쏙 사라졌다.

하선우는 한동안 넋 나간 표정으로 문만 바라보다 가까스로 생각을 갈무리했다. 몸살에 걸리는 약 같은 건 약국에서 안 파나?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아프면 몸살을 핑계로 집으로 갈 수 있을 텐데. 결론을 내리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고 설명은 나중에 해야겠다, 결심한 그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거기서 뭐해요?”

명랑하게 웃고 있는 유미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곁에는 여자의 남편인 우진헌과 강주한이 함께 서 있었다. 하선우는 과로로 쓰러지는 젊은 CEO를 연기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겐 그런 재능이 없기에 애써 웃으며 그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오셨습니까?”

“밖에 나가는 거예요?”

“잠깐 차에 다녀오려고요.”

“뭐 두고 왔어요?”

“네. 그래서 가지러 가려고 했는데…… 괜찮겠네요.”

“뭐예요. 싱겁게.”

은색의 클러치로 하선우의 어깨를 가볍게 통통 두드리며 유미란은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벌써 3주가 지났네?”

생기 넘치는 여자의 말에 대꾸하듯 미소를 흘린 하선우는 그녀의 뒤를 따르던 우진헌과 강주한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지내셨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강주한은 슬며시 웃으며 하선우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하선우 씨, 들어가죠.”

“저……, 주한 씨, 잠시.”

“왜 그렇게 꾸물거려요?”

눈을 크게 뜨며 끼어드는 유미란 때문에 하선우는 결국 슬쩍 돌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야죠. 아, 조금 전에 봤는데 강주한 씨 동생분이 오셨더라고요.”

“어머! 태한이 왔어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선우는 강주한을 흘끔거렸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그 안에서 모호한 동요가 느껴졌다.

“주한이 네가 초대한 거냐?”

우진헌의 물음에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초대한 적 없어.”

“그래? 클래식 공연은 질색하는 애가 여긴 무슨 일이래?”

“나이 앞자리 바뀌면서 취향도 변했나 보죠.”

들어가요. 남편인 우진헌을 내버려두고 강주한과 하선우의 팔짱을 낀 유미란이 턱 끝으로 문을 가리키며 열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결국 하선우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유미란의 손에 끌려 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하선우는 곁눈으로 강주한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동생의 등장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선우는 강태한을 만난 날, 그가 제게 부린 행패에 대해 강주한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강태한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선우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줄행랑치리라 다짐했다.

홀 안에는 가지런히 정렬한 사각의 테이블과 테이블을 에워싸고 무대를 바라보도록 배치된 의자들이 있었다. 흰색 린넨과 보랏빛 스타티스로 장식한 테이블 위에는 벌써 식기가 세팅된 상태였다.

식사는 뷔페였기에 샴페인 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하선우는 오랜만에 만난 회원들과 인사를 마친 뒤에, 간단한 먹을거리를 들고 무대와 너무 멀지 않은 구석진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우진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모임보다 저녁 식사가 더 중요했는지, 그의 앞에 놓인 여러 개의 접시에는 그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 담뿍 쌓여 있었다.

“인사 나누셨습니까?”

“아니. 하선우 씨는?”

“전 거의 나눴습니다.”

“일찍 빠져나왔네?”

“배가 고파서요. 오늘 바빠서 점심을 걸렀거든요.”

들고 있던 접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내리며 하선우는 변명처럼 말했다. 우진헌은 당신이야말로 모임에 오자마자 식사부터 하냐고 묻는 하선우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내가 잘하니까.”

그는 한마디를 덧붙여 말했다.

“잔망 떠는 건 직장에서 상사들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직장에서도 전혀 안 그러실 것 같은데요.”

그는 자신의 기분을 속이면서까지 타인에게 동조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냉소적인 데다 정 없이 행동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선우는 강주한의 주변인 중에서 우진헌이 유일하게 편했다. 우진헌은 검지 끄트머리로 안경을 약간 추켜올리곤 하선우를 조용히 응시했다.

“외향적이질 않아서 그렇지, 사교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그는 흐음, 끄는 소리를 냈다.

“하선우 씨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묵묵히 웃는 하선우를 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아내 때문에 여길 오지만, 선우 씨는 주한이 때문에 온 거지? 표면적으로야 다른 사람들과 인맥을 쌓으려고 왔겠지만, 실제로는 별로 관심도 없고.”

“꼭…… 그렇지는 않은데요.”

“나는 하선우 씨를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해.”

“예?”

“주한이 주변에서 자네 같은 타입을 본 적이 있어야지.”

“저 같은 타입이 뭔데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인맥관리도 하나의 스펙이자 힘인데, 자네는 주한이 옆에서 줄이나 대려고 개기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단 말이지.”

안경 너머로 하선우를 차분히 응시하던 그는 무심하게 물었다.

“주한이를 좋아하나 봐?”

그의 질문에 입술이 달싹거리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 꾹 다물렸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우진헌의 무심한 어조를 떠올렸다.

“예. 전무님 좋아하죠. 좋은 분이잖아요.”

“그래? 내 친구지만 좋은 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요? 하선우는 웃으며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맞잡았다. 다행이었다. 그가 걱정하는 의도로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심장이 정지하면서 피의 순환이 멈춘 것마냥 온몸이 저릿해 그는 손을 연신 주물대야 했다.

“둘이 닮았지?”

우진헌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하선우는 강태한을 발견했다. 그는 한향시립악단에 새로운 지휘자로 내정된 수석지휘자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는지 무릎을 짚고 어깨까지 떨며 웃어대고 있었다.

우진헌의 말에 따라 하선우는 자연히 강주한을 찾아 홀을 두리번거렸다. 강주한은 그의 동생과 정반대 방향에 있었다. 그는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나머지 한 손은 샴페인을 든, 그린 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지헌의 말처럼 두 사람은 상반된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목구비가 닮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말씀처럼 많이 닮았군요.”

“여기에 경호 형까지 오면 분위기가 아주 끝내줄 거야. 상속분쟁 1심, 2심 모두 패소해서 이번에 대법원 상고심을 마지막으로 진행 중인데……. 참, 이 얘긴 없던 일로 하지.”

그는 실없이 웃다가 이내 무표정하게 얼굴을 바꾸었다.

“어쨌든 세 사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거든. 닮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다들 발끈하긴 해도 닮은 건 닮은 거지. 안 그래?”

늘 과묵하던 그답지 않게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모두를 배척하며 거리를 두는 남자도 심심할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 같네요. 강태한 씨 정말 이목을 끌긴 끄는군요.”

그는 샴페인을 모조리 비워내고는 수석지휘자의 접시에 놓인 디저트를 보란 듯이 슬쩍해 입으로 가져갔다. 볼록해진 뺨으로 실실 웃으며 그는 무어라 지껄여 댔다. 불과 반 시간 만에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절친이 된 모양이었다.

그의 형이 배후에 가려졌다면 그는 전면에 나서는 타입이었다. 강태한은 강주한이 말하던 사회지도층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미덕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를 규격대로 재단하려는 사람들 틈에서 제멋대로 뛰쳐나와 난장을 피우는 악동 같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원색적인 생기는 그를 선망하게도, 반대로 그를 경멸하게도 만들었다. 하선우는 그를 경멸하는 쪽이었다.

음악회를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 착석했다. 강주한과 유미란은 거의 비슷하게 각각 하선우와 우진헌의 옆에 앉았다.

구석진 자리를 맡아놨다고 타박하는 아내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진헌은 물었다.

“동생 안 데려와? 공연은 따로 관람하는 거야?”

강주한은 우진헌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 가끔 얄밉게 구는 거 알지?”

“내가 뭘.”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한 우진헌은 아내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들 사이에서 강주한과 강태한의 반목은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농담의 대상이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웃는 사람은 없었다.

무대 아래의 가장자리로 찾아온 강태한은 하선우의 뒤에서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옆으로 조금만 자리를 옮겨 주겠어?”

강태한은 웨이터에게 의자를 가지고 오라고 말한 뒤, 접시 위의 디저트 조각을 날름 집어먹었다. 강태한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강주한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다른 데 가서 앉아. 다섯이 앉기엔 좁아.”

“아니 왜? 이 사람이 조금만 옆으로 옮기면 되겠구먼.”

하선우는 꿈쩍도 안 할 생각이었지만, 강태한이 지시한 곳에 의자를 놓은 웨이터 때문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강태한은 막무가내로 하선우를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형이라는 사람이 어? 동생이 모처럼 모임에 왔는데 어떻게 한 번도 아는 척을 안 하냐? 누가 보면 형이 날 싫어하는 줄 알겠어.”

몇몇 특정 단어를 힘주어 말한 그는 강주한에게 야속한 눈빛을 보냈다. 곁에서 지켜보던 유미란이 불쑥 끼어들었다.

“전에는 지루해서 안 나온다더니? 앞으로는 나올 거야?”

“누나가 나한테 하는 거 봐서 결정하려고.”

“참나, 내 핑계 댄다.”

실실 웃는 낯으로 우진헌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강태한은 엄지손가락만 한 쿠키를 입안에 집어넣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하선우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눈을 화등잔처럼 뜨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아, 이분이 바로 소문의…….”

양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펼친 그는 주위를 산만하게 돌아보다 극적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하선우는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에 몰린 사람처럼 강태한을 보았다.

“하선우 사장?”

구면의 남자는 초면의 낯으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하선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하선우라고 합니다.”

“아아…, 당신이 그 유명한 하 사장? 강주한의 남자라던?”

모두가 말없이 강태한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감탄조로 이어갔다.

“이렇게 말하니까 꼭 왕의 남자 같다. 그치, 누나?”

유미란이 대답하지 않자, 이번에는 강주한을 돌아보았다.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얼굴에 시선을 못 박고는 입을 열었다.

“영화 결말이 그거 아닌가? 왕은 쫓겨나고 왕의 남자는 칼 맞아 뒈지고. 아니야? 영화에 죽는 장면은 안 나왔었나?”

뭐가 그리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으며 위악을 떨던 그는 주위를 에워싼 침묵에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이 반응은?”

유미란이 말했다.

“너 성격 나쁜 건 그대로구나?”

“아니, 내가 뭘? 사람들이 유머를 몰라.”

강태한이 코웃음 치자 유미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치료 좀 받아봐라, 얘.”

강태한은 싱거운 말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조금 으쓱였다. 내내 말없이 있던 하선우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성격장애잖습니까. 성격장애는 치료하기 어렵다고 하던데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에 내뱉어놓고 아차 싶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오기에 불을 붙인 건 강태한이었다. 강태한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성질을 건드렸으니 하선우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건 동일했다. 심지어 강태한마저도.

“아니 왜. 내 성격이 뭐가 어때서?”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푸스스 웃었지만 곧 분위기를 바꾸어 하선우에게 흥미를 보였다. 강태한의 말에 발끈한 게 강태한의 호승한 성격을 자극한 탓이었다. 여태껏 말없이 지켜보던 강주한은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는 더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태한.”

“왜?”

“불편하게 굴지 말고 다른 사람들 찾아가. 여기 네가 편한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강태한의 얼굴 위로 번뜩이는 무언가가 지나갔으나 그는 예상 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련하시겠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아쉬운 눈길로 하선우를 내려다보고는 몸을 돌려 홀의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하선우는 애써 강태한의 시선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속을 긁어대는, 까불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선우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강주한의 시선을 등으로 받으며 연회장을 벗어난 그는 문이 닫히자마자 폐에서 가득 끌어모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고도 속이 풀리지 않아 무거운 한숨을 연거푸 뱉어내고는 연회장 밖 응접실을 서성이다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칸의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참담함을 애써 감추는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난 만남으로도 모자라 사람들 앞에서 속을 살살 긁어대는 꼴이 저열하기 그지없었다.

적반하장, 비열함, 버릇없음, 교활함, 미친놈. 강태한은 세상의 모든 돼먹지 않은 단어의 총화 같은 놈이었다. 강태한과 얼굴을 마주치는 즉시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화장실 칸막이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하선우는 자신의 결심을 잊고 죽은 듯 기척을 숨겼다.

“욕도 할 줄 알아?”

이야, 감탄조로 웃으며 강태한이 다시 한 번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이왕이면 면전에서 해주지. 얼굴 보고 하면 실감나서 화도 더 잘 풀릴 텐데.”

하선우는 손바닥에 얼굴을 더욱 힘주어 파묻으며 강태한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문 밖에 선 강태한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칸막이를 가볍게 두들겨댔다.

“거기 숨지 말고 나와. 난 하선우 씨 보려고 일부러 시간 내서 여기까지 왔어.”

강태한이 사라질 수 없다면 자신이 사라지는 게 나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하선우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겁이 나 숨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사소한 자극에는 반응하지 말자고 결심하며 문을 열고 나간 그는 도전하듯이 강태한과 눈을 마주했다. 그가 자신보다 키가 더 크다는 사실도 심히 거슬렸다.

“제가 만만합니까?”

“질문이 잘못됐어.”

하선우의 어깨 위에 올라붙은 짧고 가는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그는 말했다.

“내가 얕잡아보지 않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거든. 당연히 하 사장 정도는 만만하지.”

“예. 그러시군요.”

“형이 잘 안 해줘? 얼굴이 수척해졌네. 근심이 많아 보여.”

그의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만큼 하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선우의 어깨에 손을 얹어 부드럽게 쓸며 그는 말했다.

“사람이 즐겁게 살아야지.”

“그러게요. 그쪽은 충분히 즐거워 보이네요.”

“내가 즐겁게 해줄….”

“아뇨.”

곧바로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강태한의 눈이 일순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하선우를 내려다보던 그는 벌어진 입술을 다물고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크게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예.”

“나는 하 사장 연애컨설팅 해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이번에는 하선우의 눈이 황당함에 젖어들었다. 오랫동안 숨을 멈추고 있던 그는 기가 찬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강태한이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그러나 강태한의 다음 말은 하선우의 발을 족쇄처럼 잡아두었다.

“월요일마다 전자 건물 앞에서 피켓 드는 놈이 있는데 말이야.”

하선우가 걸음을 멈추자, 강태한은 거 보란 듯이 말을 이었다.

“엘텍전자의 벤처기업 길들이기 백태를 지탄한다나 뭐라나. 뭐 대충 그런 걸 적은 피켓을 들고 있는 남잔데, 영 번지수를 잘못 찾았더라고. 엘텍하이스코 가서 따질 일을 전자 건물에 와서 따지니 눈여겨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근데 얼마 전에 형이 내사 요청을 했더라고. 거의 1년을 꿈쩍도 않더니, 아니 누가 시위를 하는지 관심도 없었을 텐데 갑자기 착한 척을 하더라. 베갯머리송사에 넘어갔나 봐.”

꿈쩍도 않던 하선우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강태한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내사 요청을 하니 하이스코에는 비상이 걸렸지. 근데 알려줘? 아무것도 안 변해. 엘텍하이스코는 아버지가 고모부 딱해서 던져준 방계 회사거든. 그게 주 수입원인데 걔네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니야. 어젯밤에 와서 우는 소리 하는 걸 아버지가 겨우 달래서 돌려보냈어. 어땠을 것 같아?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형을 조졌을 것 같아?”

하선우의 반응을 눈에 모조리 담으며 그는 말했다.

“아니,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는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었다. 하선우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는 한 수 가르치듯 어깨를 도닥거렸다.

“아버지는 아들을 족치는 대신 내 아들이 왜 갑자기 저런 마음을 먹었을까, 원인을 조사하지. 조직을 샅샅이 뒤져서 종양 덩어리를 찾아내는데, 또 그걸 수술로 잘라내는 분은 아니야. 양성종양일까, 악성종양일까를 두고 일단은 지켜보지. 악성으로 변할 조짐을 보이면 잘라내고, 아니면 내버려두셔. 손재주가 좋은 분이라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고 믿으시거든. 아마 경영을 안 했으면 솜씨 좋은 외과의로 이름을 날렸을 거야. 그러니 네가 암덩어리로 변해야겠어, 아니면 그대로 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겠어?”

하선우는 그에게 주문에 걸린 것처럼 가만히 숨만 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을 비정한 눈빛으로 강태한은 하선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봐.”

강태한은 일견 자상해 보이는 미소를 띠었다.

“네가 충격받기 전에 미리 말해주는 건데, 형도 널 종양처럼 생각하긴 매한가지야. 몸 안에 떡하니 자리 잡아도 상관없는 양성종양쯤으로. 좀 어이없긴 하지만 형이 그 양성종양을 애지중지해. 그러니 위험해지지 말라고.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 숙주가 죽으면 암도 결국에는 죽는 거잖아.”

하선우는 강태한의 어깨 어디쯤을 노려보았다.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는 강태한의 말이 기운을 소진시켜 사고를 느리게 만들었다. 그는 무심중에 문을 향해 뒷걸음쳤지만 이내 강태한에게 손목이 잡혔다. 손을 뿌리치자 그가 하선우의 뒤로 성큼 걸어와 문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나 다 말 안 끝났어. 사람이 하는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무슨 말인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하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강태한과 하선우의 사이로 망설임 없이 걸어온 강주한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 말 나한테 해.”

“형은 끼어들지 마.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나한테 해.”

“…….”

“말해.”

강태한에게 머문 시선을 한 치도 떼지 않고 강주한은 대답을 종용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단념하지 않는 시선이 강태한의 심기를 거슬렸다.

“숨만 쉬고 살기 지루하면 나한테 오라고. 내가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고 말하려고 했어.”

강주한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건공중을 쏘아보며 불쾌한 감정을 삭이던 그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얼굴로 강태한을 바라보다, 뒷머리를 잡아채 벽에 힘껏 찍어버렸다.

“영 쓸모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너도 재능은 있구나. 그 유일한 재능이라는 게 사람 속을 긁는 거라서 그렇지.”

강태한은 순간적으로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강주한은 동생의 머리를 더욱 힘주어 잡고 벽에 한 번 더 짓찧었다.

눈을 가득 메운 맹목적인 분노의 원형질을 그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강주한은 강태한의 뒤통수를 잡은 손을 떼지 않고 박살을 낼 기세로 짓눌렀다.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충돌음이 심상치 않았다. 이러다 사람 죽겠다 싶어 크게 오르내리는 강주한의 어깨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강주한의 눈에 어린 격렬한 혐오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강태한은 벽에 코를 처박은 채로 웅얼거렸다.

“나 뇌진탕인 것 같아. 형…… 이거 거의 살인미수야. 남자 때문에 치정싸움 하다 형한테 얻어맞을 줄이야.”

코에서 피가 흐르는지 강태한은 푸르르 투레질하는 소리를 내며 꺽꺽 웃었다. 하선우는 강태한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결국 강태한은 강주한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거칠게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들어선 하선우는 씩씩거리며 자신의 차를 찾았다. 시동이 걸리자마자 액셀을 밟으려는데, 보조석의 문이 별안간 열리는 바람에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아야 했다. 그사이 보조석으로 들어온 강주한이 몸을 틀어 하선우의 운전대를 잡았다.

“어디 갑니까?”

“집에요. 이런 기분으로는 공연이고 뭐고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올 것 같아서요.”

“울었습니까?”

“안 웁니다.”

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눈이 충혈되고 코끝이 습해지긴 했지만 운 건 아니었다. 이를 꽉 깨문 채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울잖아요.”

“안 운다니까요!”

하지만 말이 무색하게 매운 내를 맡은 것처럼 코끝과 눈이 싸하게 젖어들어 갔다. 눈가에서 찔끔하고 흘러나오는 것이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예. 웁니다. 그래서요? 저 우는 거 좋아하잖습니까.”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하선우는 눈을 부릅떴다.

“녀석이 하는 말은 무시해요.”

강주한은 자동차의 시동을 끄며 말했다. 강태한의 폭력적인 말에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지만, 강주한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무시요?”

하선우는 눈물을 훔쳐내며 다시 말했다.

“무시하라는 말씀입니까?”

강주한을 똑바로 바라보는 동안 그의 눈가에 어룽졌던 눈물은 증발하고 말았다.

“주한 씨는 가능할지 몰라도 저는 안 돼요. 저는 좋은 말만 듣고 자라서 종양이니, 암덩어리니, 죽은 듯 숨만 쉬고 살라는 그런 말이 무시가 안 됩니다. 얼마나 오만하면 사람을 몸에 기생하는 종양에 비교한답니까? 저 보고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는 악성종양이라잖아요!”

강주한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하선우는 자신이 느끼는 이 더러운 기분을 어떻게든 형용해보려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가 지금까지 간과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에 생각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쇳소리를 내며 물었다.

“부모님이 알고 계십니까?”

자신이 뱉은 말이 부메랑이 되어 하선우를 공격했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하선우는 재차 물었다.

“아시냐고요?”

“알고 계십니다.”

하선우의 오그라든 목청 안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 어떻게요?”

“얼마 전에 남동생이 얘길 꺼냈습니다.”

하선우는 두통이 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분노는 오간 데 없고 무기력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럼 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변이 없는 한 간섭할 분들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차분한 강주한이 어이없어 하선우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 이변이라는 게 몸에 있는 양성종양이 악성종양으로 변하는 걸 말하는 겁니까?”

강주한은 한쪽 눈썹을 천천히 치켜세웠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이었다.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갑자기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그의 부모가 자신들의 관계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건만, 이어진 내용들은 그를 더 충격에 빠뜨렸다. 눈을 굼뜨게 끔뻑거린 하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떼어냈다. 그런 뒤에도 망설이는 듯이 떨리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을 골랐다.

“그 말 무슨 의미입니까?”

붉게 충혈된 눈으로 강주한을 쏘아보았다.

“왜 그렇게 말…….”

갑자기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하선우는 속사포처럼 말했다.

“왜 그런 식으로 얘기하십니까. 여기서 빠지라는 겁니까? 아니면 쥐죽은 듯 고분고분하게 굴라는 겁니까. 넙죽 엎드리라는 말이에요?”

홧홧한 열기가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속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그 모든 것을 침착하게 지켜보던 강주한은 입을 열었다.

“의도 같은 건 없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장애가 있으면 치워버리면 된다는 사고를 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왔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태한이가 그렇듯,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예요.”

“주한 씨 생각은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그는 말했다.

“나는 상관없어요.”

그는 한 번 더 말했다.

“선우 씨가 나와 함께하는 한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강주한은 의심에 젖은 하선우의 얼굴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처음부터 난 선우 씨에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라는 사람에게 물들었으면 좋겠다고. 아무런 물음표도 띄우지 않고, 나를 이대로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건 선우 씨가 알지 못하는 나의 이런 부분까지도 모두 인정해달란 뜻이었습니다.”

그는 감정을 수식하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하선우는 숨을 죽였다.

“선우 씨가 나를 증오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손가락질하지 않는 한 상관없습니다.”

강주한은 물었다.

“하선우 씨에게 오히려 되묻고 싶군요. 나를 사랑합니까?”

하선우는 사랑이란 단어에 말문이 막혔다. 연인들이 쉽게 주고받는 전형적인 단어였지만, 강주한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하선우에게 너무도 낯설었다.

그는 두 사람의 사이가 작동하긴 하지만, 부품 한두 개가 모자라 조금은 삐걱거리는 소음을 내는 기계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사귀는 사이고 거의 매주 만났어도, 마음 한편으로는 강주한이 자신을 은밀한 취미생활의 일부분으로 취급한다고 믿었다. 하선우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겼다. 강주한은 때로 감촉을 느낄 수 없는 그림자 같아서, 금방이라도 휘발할 것 같은 육체를 껴안고 있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강주한의 대답을 듣지 않고 하선우는 곧바로 말했다.

“가끔 주한 씨의 여러 가지 버전 중에서 한 가지 버전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가 다시 힘겹게 입술을 뗐다.

“저는 어쩌면 그 한 가지 버전을 사랑하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하선우는 소리를 죽여 외쳤다.

“되게 낯설게 느껴진다고요.”

하선우는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왜 이런 기분을 느낀다고 생각해요? 저는 심지어 주한 씨가 어떤 의도가 있어서 나를 만나는 게 아닐까 싶은 의심도 든다고요!”

말로 내뱉은 뒤에야 비로소 복잡하게 흐트러졌던 사고가 바로잡아지는 기분이었다. 긴 침묵 끝에 강주한은 말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도를 가지고 서로를 만납니다.”

하선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상대방에게 원하는 게 있어요. 그걸 얻기 위해 다들 지점을 설정하고 기다리다가 결국엔 상대로부터 얻어내죠.”

하선우는 불현듯 깨달았다. 하선우가 참을 수 없는 점은 강주한이 자신을 다루는 방식 중 하나로 권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는, 연애론에나 나올 법한 권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섹스 도중에 가학자와 피학자를 가르는 잣대였고, 하선우로 하여금 해야 할 이야기를 함묵하게 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대놓고 드러내는 방식은 아니어서, 하선우가 강주한의 취향을 따라가고 그의 기분을 배려하는 건 모두 연인이기 때문이라 착각하게 했다. 그 교묘한 방식을 가장 확실히 반증하는 것이 강주한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하선우를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뇨. 목적을 정해놓고 계획대로 상대방을 휘두르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럴 때 쓰는 말은 조종이죠.”

“내가 하선우 씨를 조종한다는 말입니까?”

하선우는 텅 빈 무언가를 응시하듯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칠게 말했다.

“예. 여태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 같네요.”

강주한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선우는 마치 그의 입술에 모든 감각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강주한은 처음으로 나지막이 웃었다.

“그럼 문도일 씨의 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하선우는 눈을 부릅떴다.

“도일 형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옵니까?”

“누구나 상대방에게 원하는 게 있다고 했죠. 그걸 얻어내려고 다들 지점을 설정하고 기다리고 상대방으로부터 얻어낸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빛은 하선우의 마음에 꺼림칙한 불안을 낳았다.

“문도일이란 사내에게 지고지순한 순정을 바친 하선우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하선우는 그의 연인이 가장 물렁물렁해질 때를 기다려 문도일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흘립니다. 문도일이 걸어온 실패와 시련의 이유가 연인이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심어주면서 말이죠. 이야기를 듣는 연인은 한편으로 생각합니다. 하선우에게 문도일이란 남자는 과연 어떤 가치를 지녔을까. 과거에 남다른 유대감을 가졌다는 그 사람일까, 아니면 하선우를 방어적으로 만들었다던 오랜 짝사랑의 대상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랑일까.”

처음에는 그 특유의 차분한 톤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흥분으로 푹 잠겨들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지도, 표정 하나 바꾸지도 않았지만 그르렁거리는 짐승처럼 이를 드러냈다. 하선우는 마음 깊은 곳에서 차갑고 뜨거운 조류가 동시에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선우는 숨을 참았다가 이내 소리를 낮추어 거세게 경고하듯 말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문도일의 개인신상과 관련된 숫자로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설정할 만큼의 지고지순함.”

하선우는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라는 무언의 요구를 강주한은 기꺼이 들어주었다.

“울산에 함께 내려갔던 날 밤에 선우 씨가 어머니와 통화하며 비밀번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선일 금형과 엘텍하이스코의 자료를 살펴보다가 문도일의 개인신상까지 알게 됐고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강주한은 하선우를 이해시켜주겠다는 듯이 자상히 말을 이었다.

“문도일은 3.1절이란 뜻 깊은 날 태어났더군요. 휴대전화의 뒷번호로 줄곧 4882를 사용했고. 불행히도 내겐 그런 사적인 부분까지 생각해준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죠. 우리 집 비밀번호가 131313이라는 걸 생각하니 자기학대 같은 추담처럼 느껴지더군요.”

“건수 잡았다는 듯이 얘기하지 마요.”

강주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하선우는 갑자기 강주한의 눈앞에서 몰아치는 감정의 변화에 위화감을 느꼈다. 단순한 울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온갖 감정들이 밀생해 노도처럼 덮치는 듯한 감정이었다. 지금껏 강주한에게서 보지 못한 표정이었고, 때문에 하선우는 그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금 내가 하찮은 구실 하나로 비겁하게 굴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느껴진다면요?”

“내가 그 일을 구실 삼아 야비하게 굴려는 것 같아요?”

“그건 아니지만……, 젠장! 지금도 저를 당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려고 하잖아요!”

먼저 소리쳐놓고도 하선우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대화는 순서를 밟지 않고 비약적인 오해로 치닫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강주한은 침묵했다. 먼저 돌이킨 것은 강주한이었다.

“맞아요.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화가 났으니까. 하선우 씨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면 했습니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차마 혀끝에 올리기도 싫은 얘기라는 듯이 그는 말했다.

“아직도 문도일이란 사람에게 마음이 쓰입니까?”

하선우는 이번에야말로 강주한에게로 완전히 몸을 틀어 앉았다.

“그게 무슨?”

그는 한참 뒤에 턱 막힌 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강주한은 말없이 하선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응시에 흔들리던 하선우의 시선은 이내 돌처럼 단단해졌다.

“도일 형과는 그런 식으로 얽힌 적도 없고 얽힐 일도 없습니다. 왜냐면…… 형은 제가 동성애자인 것도 모르니까요.”

하선우는 이를 꾹 깨물었다. 거친 한숨을 내쉬고는 완고히 말했다.

“그래요. 사실 예전에 좋아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해명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정말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으니까요.”

강주한은 여전히 침묵했다. 한참 뒤에야 미약하게나마 입술을 달싹였지만, 다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수학공식으로 빚어낸 듯한, 오차 범위를 벗어나지도 예상을 뛰어넘지도 않는 하선우라는 단순한 인물이 언제부터 복잡다단한 세계의 틈을 벌리고, 그 사이로 쐐기를 박아 밀어 넣고 있었다.

거대한 의문부호와, 강렬한 느낌표의 뒤를 이을 마침표가 무엇일지 강주한은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 하선우가 지었던 표정은 강주한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하선우가 쓰라린 표정을 지었던 건 문도일을 생각해서였다. 강주한의 물음에 하선우는 나름의 진실한 대답을 했다. 문도일은 하선우에게 통증 같은 존재였다.

강주한은 누군가와 이렇게 다투었던 적이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그는 늘 마음 한구석에 화를 품고 있었지만, 그것은 온기 없는 돌사막처럼 황폐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각별하리만치 뜨거운 화를 버텨내고 있었다.

강주한의 단단한 침묵을 결코 밖에서는 깨트릴 수 없을 테고, 그렇다고 하선우가 닫힌 문 너머로 들리지도 않을 변명을 할 리도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강주한은 스스로 침묵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래요. 이제 그만 다투죠. 이 얘긴 그만하고 싶군요.”

아슬한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얼굴을 보고는 모든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그러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소년 같았다. 주먹을 오므려 쥔 채 다른 곳을 응시하는 부아가 치민 소년.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도 모르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 낯선 얼굴을 보니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오히려 그를 향한 미움 대신, 먹먹한 무언가가 가슴을 꽉 틀어막았다.

“예. 저도 다투고 싶지 않아요.”

하선우는 저도 모르게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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