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조응(調應) (1) (13/26)

13. 조응(調應) (1)

하선우는 새로 발급받은 여권을 들여다보았다. 윤기로 반짝거리는 여권은 풀을 먹인 쇠가죽처럼 단단하고 뻣뻣했다. 10년 기한의 복수여권에는 이변이 없는 한 홍콩의 입국허가 도장이 첫 번째로 찍힐 것이다.

하선우는 서울의 도심이 한가하게 느껴질 정도로 복잡하던 홍콩의 거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밀폐된 건조한 공기와 지끈거리는 두통, 한숨을 압축해놓은 것 같은 답답한 가슴을 안고 우연히 만났던 재수 없는 남자. 그 남자와 홍콩을 다시 찾기로 한 것이다.

하선우는 여권의 첫 페이지를 펼쳐 이마를 훤히 드러낸 사진 속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사가 웃으라고 해서 미소를 짓긴 했는데 표정이 영 어색했다. 실제 감정과는 다른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는 건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요 며칠 기분이 영 꿀꿀했다. 미소조차 쉽게 지을 수 없을 만큼. 그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더웠다. 나날이 뜨거워졌다. 공기 속 온도를 한계까지 끌어 올린 느낌이었다. 공기 중에 여백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숨이 턱 끝까지 찼다. 차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온 하선우에게 문도일이 찬물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잘 나왔어?”

“여권이 잘 나오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뭐.”

“하긴. 이제 어디 들를 데 없지?”

“예. 회사로 돌아가요. 선배.”

“그럽시다, 사장님.”

문도일은 씩 웃으며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하선우는 차가 출발한 뒤에도 오래도록 손에서 수통을 놓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열 오른 뺨에 수통을 문질러댔다.

“왜 자꾸 한숨이야?”

“제가 계속 한숨 쉬었어요?”

“수십 번은 쉰 것 같은데.”

하선우는 객쩍은 웃음을 흘리며 답답해서요. 중얼거렸다. 그들은 오전 중에 변호사 사무실에 다녀온 길이었다. 몇 달 전, 일산 공장에서 퇴직한 금형 설계 기술자들이 경쟁사로 전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던 탓이었다.

그들은 각각 3~4개월 전에 건강 등의 이유를 들어 퇴사를 요구한 희망퇴직자들이었다. 그 시기가 울산의 공장장이 퇴사하기 전이라, 세 사람이 서로 공모하여 퇴직했다고 의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NnG의 경쟁사인 산원테크로 전직을 한 상태였고, 내후년을 목표로 신설하는 공장 라인의 책임자로 근무한다고 했다.

“솔직히 배신감 느껴서요. 이런 일 전에도 겪었는데……, 회사 규모를 키워놔도 어쩔 수 없구나 싶네요.”

문도일은 해줄 말이 없다는 듯 쓰게 웃고 말았다.

“솔직히 소송까지 가고 싶진 않은데 어쩔 수가 없어요. 손 놓고 있기엔 억울하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왜 우리는 고용계약서에 전직금지 특약을 넣지 않았을까요? 미쳤지, 진짜.”

하선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열을 식히려는 듯이 연거푸 한숨을 푹푹 내쉬는 하선우를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문도일이 나지막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땐 사람을 너무 믿었던 거지.”

“예…….”

“무식했어. 안전장치를 만들 생각도 안 하고, 막무가내인 데다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최면을 걸고, 게다가 그 최면이 진짜일 거라고 믿어버리고…….”

끝말을 흐린 그는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다 내 얘기라고. 너희에게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근로계약 시 전직금지 특약’은 근로자가 퇴직한 후에 일정 기간 동안 사용자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회사에는 취업하지 않는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의 약정을 말한다.

울산의 공장장과 일산 공장의 금형 설계자가 작성했던 고용계약서에는 전직금지 특약이 없거나 애매한 문구로만 표현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세 사람을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핵심인재의 유출과 영업비밀의 보호, 근로자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놓고 퇴사한 사원이 영업비밀을 침해했는지 여부를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였다.

결국 NnG는 세 사람을 고소하는 대신, 기술자들을 유출한 산원테크를 대상으로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문제는 산원테크가 대기업인 안신의 자회사라는 점이었다. 작년 산원테크의 주식이 공개 매수된 뒤 상장 폐지되면서 안신의 자회사로 흡수되었는데, 산원테크를 대상으로 영업비밀 침해 금지 소송을 건다는 건 집단 전직의 책임은 묻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안 된다고 단정 짓는 건, 그들부터가 대기업을 대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홀로 고군분투하는 문도일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극을 받았는지 이석은 소송을 하겠다고 전에 없이 난리를 피워댔다. 물론 가장 큰 동기는 기술자를 빼앗겼다는 데 있었다. 하선우는 이석을 대신하여 문도일과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다녀온 길이었다. 문도일은 운전에 집중하며 라디오를 틀었다.

“피곤할 텐데 좀 자라.”

몇 번 눈을 깜빡거리던 하선우는 문도일의 옆모습을 흘깃거리다 눈을 감아버렸다. 클래식에 특화된 1FM 채널에서 드뷔시의 ‘달빛’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아주 성기게 잔, 공기처럼 가벼운 흰빛의 면사가 얼굴 위로 가볍게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묘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눈을 뜨니 여전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하선우는 가붓가붓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았던 짧은 사이 꿈을 꾸었다. 그가 몇 년 전에 보냈던 어려운 시절이 꿈에 나타났다.

꿈속에서 그는 홀로 탕비실에 앉아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를 펼쳐놓고 머릿속에 펼쳐진 것을 캐기 위해, 그는 오롯이 스스로에게만 집중했다.

평소 그는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연구를 해나가곤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사방에 진공을 두른 것 같은 적막 속에서 끊임없이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몰입과 고독 사이의 어디쯤에 자신을 몰아넣을 때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극도의 긴장은 그를 행복한 도취상태에 머물게 했다. 마치 어떤 초월의 경지에 이른 성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잠에서 깬 뒤에도 꿈의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눈앞에서 원소기호가 돌아다니고 탄소동소체와 복합체의 이미지가 떠다녔다. 20대 중후반, 한참 연구개발에 몰두하던 시절에는 밥을 먹을 때에도, 화장실을 갈 때에도, 잠을 자기 직전과 깬 후에도 늘 이런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출구 없는 백색 지옥에 빠져 살던 시기였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의 자신 사이에는 결코 추억으로도 되짚을 수 없는 거대한 강이 놓여 있었다. 꿈으로나마 과거의 열정을 맛본 것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요즘의 그는 바보가 된 듯한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현재 그는 너무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너무 많은 책임을 맡고 있어 예전처럼 연구개발에 매달릴 시간이 없었다. 사업 초기로 돌아간다는 건, 고독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홀로 있을 때에도 고독을 느낄지언정 자신만의 시간을 갖진 못했다. 혼자일 때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강주한이 수시로 떠올랐다. 하선우는 이제 완벽하게 텅 빈 상태에 이를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어?”

하선우는 고개를 돌렸다.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쳐다보는 문도일과 눈이 마주쳤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를 보니 자신을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문도일이나 강주한 모두 희로애락의 표현 너비가 지나칠 정도로 좁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감정 표현이 드문 사람이 취향인 모양이었다.

“왜요?”

“회사일 외적으로 안 좋은 일 있나 싶어서.”

하선우는 도로를 빤히 쳐다보다 얼마 뒤 고개를 저었다.

“별일 없어요. 회사 때문에 골치 아파서 그렇죠, 뭐.”

곁눈으로 하선우를 보던 그는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듯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원래 고난은 한 번에 찾아오더라. 여태 잘 넘겼으니 이번에도 잘 넘길 거다.”

* * *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선우는 인상을 쓰고 편두통으로 지끈거리는 왼쪽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눌렀다. 통증이 몰려올 때마다 두근거리는 맥이 함께 짚어졌다. 고난은 한 번에 찾아오는 거라던 문도일의 말을 떠올렸다. 올해로 NnG 창업 6주년이었다. 창업 이래 굽이굽이 우원한 길만 걸어왔으니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전에 우선 아스피린 좀 먹고.

알약과 물을 동시에 목구멍 안에 털어 넣은 하선우는 이석과 김주안이 나누는 대화를 멀찍이 떨어져 앉아 듣고 있었다. 3년 전에 은행에 발급받았던 어음의 만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14억에 달하는 당좌계좌를 계설했었고 3여 년 동안 제법 자유롭게 당좌대출을 이용하며 금리대출에 따른 이자를 은행에 납부해왔다. 그리고 현재 11억의 부채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엘텍으로부터 지원받은 돈으로는 어음을 갚는 조건이 없었기에 NnG로서는 이번에도 남은 11억에 관한 대출만기연장 신청을 해야만 했다. 11억이라는 큰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리가 없었고, 심사가 통과될 가능성이 99%라고 해도 심리적 부담감은 여전하기만 했다.

“심사는 무리 없이 통과될걸요.”

믹스커피를 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김주안은 긍정적으로 덧붙여 말했다.

“우리 회사채 등급 정도면 BB는 받을 거예요. 빚 못 갚는다고 판단할 정도도 아니고, 지금까지 원리금 포함해서 계속 갚아왔잖아요. 일시적으로 자금 유동성이 부족하긴 해도 우리가 부도날 정도면 대한민국 회사의 절반은 쓰러질 거예요.”

이석과 하선우에게 커피를 건넨 그녀는 자신의 앞에도 커피를 내려놓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때 빚을 일부라도 상환을 하는 게 좋았을 텐데요. 사옥 짓느라 1억 3,000만 원인가 들었죠? 차라리 특허계약 맺으면서 받은 선불금 2억처럼 기계 들이는 데 썼어야 해요. 엘벡스에서 입금받은 1억 5,000으로는 남은 기계대금 댔죠? 그뿐인가? 빚이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엘텍전자 자금지원 프로그램에서 받은 무이자 대출금이 51억이에요. 그동안 꾸준히 갚았다고는 해도 현재 남은 빚이 47억이죠.”

이석은 말없이 턱을 긁다 변명하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3년이면 털 수 있어. 최근에는 만기 어음도 갚았잖아.”

“이사님은…… 빚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나 봐요. 지금이야 괜찮다지만 경기불황에 휩쓸리면 우리도 원리금 지급 능력이 불투명할 수 있어요. 저희 회사채 등급이 BB라는 거 잊지 마세요.”

“김 부장님.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참 고마운데, 우리 그 돈 울산 공장 부지 매입하고 기계 사고 직원 교육하는 데 착실하게 썼어. 세상에 무이자로 돈 빌리는 기업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세상 모든 사장한테 물어봐. 이건 축복이지, 축복. 그러니까 11억 만기 연장할 수 있나, 없나만 생각해줘요, 네?”

“알았어요.”

코끝을 살짝 날카롭게 찡그렸던 그녀는 금세 표정을 풀고는 본론에 들어갔다.

“은행 방문은 내일 오전 11시로 잡아놓을 게요.”

“응, 그래. 같이 가요.”

“예.”

하선우는 뜨거운 커피를 식혀 마시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지겹도록 붙어 다녔던 두 사람이 아직도 눈이 안 맞은 게 신기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가소롭게 여기는 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닭살 행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일에 대한 모든 의욕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구청엔 다녀오셨어요?”

소파에 불량하게 기대어 두 사람을 구경하던 하선우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예.”

“사진 잘 나왔어요?”

하선우는 앞주머니를 뒤적거려 여권을 건넸다. 첫 장을 펼쳐 사진을 확인한 김 부장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진만 찍으면 얼어요.”

어디 나 좀 보자.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된다는 듯 다가와 하선우의 여권 사진을 구경하던 이석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힘껏 주무르며 말했다.

“선물은 뭐로 할까? 홍콩에 오래 있었으면 한국이 그리울 텐데.”

“뭐?”

“홍콩에 있는 한국 직원이 몇 명이나 돼?”

하선우는 얼른 당황한 표정을 수습하고 이석에게서 여권을 빼앗았다.

“그거야 잘 모르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기는? 회사 차원에서 해야지. 법인카드 팍팍 써도 뭐라 안 할 테니까 선물 사 가. 잘 보이면 좋잖아.”

“잘 보일 필요가 뭐 있어요.”

“따라갈까? 나도 사비로 다녀오면 안 될까?”

“그건 어려울 것 같던데. 전화해보니까 비즈니스호텔 1인실 예약 다 찼더라고요.”

하선우는 달래듯 말했다.

“내가 머릿속에 사진처럼 박아올게, 이사님.”

하선우는 어깨를 주무르는 이석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툭툭 치며 위로했다. 하선우를 옆에서 지켜보던 김 부장이 한마디 보탰다.

“좋겠다. 홍콩에도 들른다면서요?”

“선우가 놀러 가? 일하러 가지.”

“혹시 또 알아요? 명품 보러 다닐지.”

“명품은 무슨 명품이야?”

이석의 타박에 김 부장은 웃으며 하선우를 보았고 하선우는 괜히 넥타이를 고쳐 메며 딴청을 부렸다.

이석과 김 부장은 하선우가 엘텍의 초청을 받아 출장을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선우는 엘텍 종합기술원의 제5팀 소속 연구원 자격으로 울산에 있는 엘시스와 GM 간의 시스템 파워팩 양산 공장 착공식을 방문한 뒤, 엘텍의 홍콩 현지 법인에 들르는 일정으로 짰다.

일개 연구원이,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연구소에 방문하는 외부인력인 협력업체 사장이 엘텍과 GM 간의 거래에 끼어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불가능이 가능하도록 입김을 불어넣은 것은 강주한이었다. 그 노골적인 편애에 하선우는 홀로 전전긍긍하는 중이었지만, 사내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사정을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추측하고 있었다. 지난 가을, 엘텍과 NnG의 기술이전 계약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 덕분이었다.

엘텍을 대상으로 기술이전 계약을 맺던 당시, NnG는 권리금조로 선불금을 받긴 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로열티를 단 한 푼도 지급받지 못했다. 제품을 시장에 내놓은 적도, 매출을 올린 적도 없으니 그에 따른 로열티를 지불할 이유도 없던 셈이었다.

그러나 올해 가을부터 엘텍과 GM 간의 합작으로 GM의 신차에 들어가는 ‘시스템 파워팩’이 울산의 엘텍 전지사업장 공단에서 생산될 예정이었고, 그것은 앞으로 NnG가 로열티를 받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선우가 홍콩까지 가야 할 이유는 여전히 설득력이 부족했지만, 이석과 김 부장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김 부장은 말했다.

“기억나요? 작년에 좋았었는데. 박람회 브로슈어 준비하랴, 샘플 준비하랴, 부스 꾸미랴…….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다 했었잖아요. 아! 몽콕 야시장에서 노천 술집 갔던 것도 좋았고. 홍콩의 야경 보면서, 신세 한탄하면서, 강 전무 까면서,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에요.”

“사람 앞날은 참 알 수가 없어, 그지?”

“그러게요. 강 전무한테 잘 보인 덕에 이렇게 풀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은 같이 오나 봐요.”

작년 여름 끝 무렵 홍콩 전자박람회를 준비하며 겪었던 온갖 고생스러운 경험을 추억하는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하선우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이사의 사무실을 벗어나 문을 닫고 난 후에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새로 주문이 들어온 노트북의 배터리 설계가 까다로워 몇 번이나 수정보고를 받고 보니 퇴근 시간이 훌쩍 넘었다. 퇴근 전의 일정 순례야 언제나 고만고만했다.

사무실 한 번 둘러보고, 직원들에게 얼굴 한 번 더 비춰주고. 금형 설계실로 들어간 하선우는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거대한 설계도구의 절반을 가리는 널찍한 문도일의 등을 보고 놀란 하선우는 들고 있던 샘플 꾸러미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습해보시는 거예요?”

“예.”

문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우는 문도일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보는 것을 같이 들여다보았다.

“할 만해요? 플라스틱 물성이랑은 어때요?”

“비교할 수가 없죠. 아예 다르니까.”

문도일은 화면을 클릭했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 가네요. 그는 손가락 끝으로 모서리 부분을 가리켰다. 하선우는 화면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건 변수 세팅하는 버튼이에요. 구조를 해석하시려면 3페이지를 여시고, D베이스카드 안에 있는 커브를 열어 입력하시면 되고요. 아, 저는 3자유도가 편해서 LS-Dyna 쓰는데, 1자유도 보는 게 편하면 앤시스 사용하세요.”

“예. 일단 하나라도 완벽하게 사용법 익히고 나면 나머지도 배워보죠.”

문도일은 머리가 복잡한 얼굴로 NnG의 데이터 자료를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분야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은 눈치였다.

“지금이야 복잡해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좀 어려운 계산기예요. 나 대신 어려운 연산을 대신 해주는 계산기.”

익숙해지면 괜찮다는 말을 신뢰하긴 어려워도,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하선우의 마음이 고마워 문도일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하선우는 서른이 넘었어도 10대처럼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눈빛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배우셨습니까?”

“그러게요. 기계공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제가 이걸 하고 있네요.”

하선우는 데이터를 커브 안에 입력하며 웃었다. 그의 뒤편에 선 문도일이 진지하게 화면 안의 수식들을 바라보며 노트에 메모를 했다. 강주한과의 다툼 이후, 하선우는 의식적으로 과거의 기억과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흘러간 시간 속에서 짝사랑은 빛을 바랬지만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강제로 기억과 추억을 지우는 건 불가능했다. 바로 곁에 있는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하선우가 할 수 있는 건 거리를 두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그는 그날의 다툼 이후로 더없이 친절히 구는 강주한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웃는 얼굴 뒤로, 묘하게도 내상을 숨기는 짐승의 환상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동굴로 숨어들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본심마저도 꽁꽁 감춰버린 짐승.

“……폰해 줄 곳을…… 했나 봅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문도일이 하는 말을 대부분 놓쳤던 하선우는 멍한 얼굴로 문도일을 올려다보았다.

“아내가 영주권 스폰해줄 고용회사를 찾은 모양이더군요.”

“아……, 그래요?”

“하나도 안 들으셨네.”

하선우의 넋 나간 표정을 따라하던 문도일이 풀썩 웃음을 흘리고는 불량하게 코끝을 찡긋거렸다.

“큰형이 다니는 회사의 거래처인데, 아내의 경력을 듣더니 취업을 알선해주려고 한대요. 이변이 없는 한 영주권 취득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축하할 일인가요?”

작게 혼잣말을 한다는 것이 하선우의 입에서 여과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쏟아졌다. 하선우는 곧바로 아차, 싶었다. 문도일이 피식 웃으며 왜, 하고 이유를 물었다.

“아들하고 아내가 미국에 있잖아요. 선배는 어쩌고요?”

“기러기 아빠 하죠, 뭐.”

문도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 뒤, 각종 그래프로 분할된 어지러운 화면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한국 와봐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서류상이긴 하지만 아내와 나는 갈라선 상태고, 내 앞으로 빚만 10억이 넘으니까요.”

“…….”

“이게 우리에겐 최선이거든요. 둘 다 너무 고생했으니까. 아내는 한국이 질려서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나한테도 그곳으로 오라지만 여기서 해결해야 할 일도 있고 아직은 이곳이 좋습니다. 서로 완전히 갈라선 것도 아니고, 부부관계가 유지되는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지만……. 어제 서로 통화하면서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더는 상처 주지 말고 격려하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NnG에 뼈를 묻겠다는 건 허풍이 될 테니 장담은 못하겠지만,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도, 쉽게 회사를 관두는 일도 없을 거고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죠. 선배 결혼생활…… 아니 형 인생이 더 중요하죠.”

문도일은 동화로 세상을 배운 어린아이를 대하듯 허리를 숙여 하선우와 눈을 맞추었다.

“사장이 물러터지긴, 그런 식으로 남을 배려하면서 섣불리 결론 내리지 마라. 네 잇속부터 챙기는 버릇 좀 들여.”

“…….”

“네가 물렁해 보일 때가 있어서 하는 말이야. 가끔 그렇다고.”

심각하게 하선우를 바라보던 문도일은 갑자기 시치미를 뚝 떼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노트를 내밀었다. 나는 이게 이해가 안 되는데요, 사장님. 적어둔 메모를 보여주며 하선우가 말한 자유도 해석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하선우는 자신의 어깨에 거의 걸쳐지다시피 한 문도일의 팔을 내려다보다,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를 두려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며 하선우는 말했다.

“저 커피 사러 슈퍼 갈 건데, 가는 김에 담배 사다 드려요?”

“사장님을 부려먹을 순 없죠. 같이 갑시다.”

1년 동안 회사의 사정은 급변했지만, 주변의 풍경은 여전히 별로 변한 게 없다. 통행량이 적은 이차선 도로와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초라한 슈퍼, 빌라 몇 채를 배경으로 펼쳐진 무성한 풀밭까지. 저마다의 사정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겉보기는 그랬다.

건너편 회사에서 무엇을 만드는지 관심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는 슈퍼 노인이 무뚝뚝하게 거스름돈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캔커피의 뚜껑을 딴 하선우는 슈퍼 밖의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하선우의 맞은편에 앉은 문도일은 밋밋하게 조경된 일산 공장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석 개인에 대한 인물탐구에서 김 부장과 이석의 관계로, 두 사람이 사귈 가능성에 대해 점치는 것으로 이어졌다. NnG의 기술자들이 경쟁사로 전직하면서 사내에는 안신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나 반대급부로 엘텍에 호의를 가진 이도 늘어났다. 문도일이 여전히 엘텍하이스코를 상대로 외로운 특허소송을 진행 중이었기에, 이석이든 하선우든 그의 앞에서는 의식적으로 특허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 배려와 침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감청색 땅거미가 내려앉은 대지를 밝히는 빛은 제조공장으로부터 비춰왔다. 24시간 생산 라인이 돌아가는 제조공장 부근은 대낮처럼 환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밀링 소리와 출고할 생산품을 트럭 안으로 옮기는 직원들 외침, 삼교대 출근을 위해 버스에서 하차하는 직원들의 수다로 고요하던 주변 일대가 북적거렸다.

하선우는 오늘 낮, 쪽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하선우는 텅 빈 연구실 안에서 홀로 무아에 이르러 몰입 중이었다. 머릿속에서 수시로 번뜩이는 이미지와 사고를 잡기 위해 홀로 집중하던, 나름대로는 달콤하고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방에서 그를 방해하여, 홀로 무언가에 몰입한다는 건 꿈에서만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일정거리를 두고 회사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조금 전까지 그 속에서 아득바득 골머리를 썩던 시간들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늘 직원들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결부 짓지 않고 한 발자국 물러서 있으려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회사는 그에게 천 근 같은 짐이었고, 때로는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가시방석이었다. 그러나 해 저문 저녁 무렵, 소란을 떨며 출근하는 야간 근무자들의 법석을 보고 있으려니, 하선우는 묘하게 수긍이 되었다.

그 사람들과의 연결이,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현실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오히려 그들이 하선우를 설득시키는 것 같았다. 하선우는 캔커피를 아슬아슬하게 든 채, 출퇴근하는 직원들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고, 그런 하선우를 온기 띤 눈으로 바라보던 문도일은 슬쩍 웃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유난히 카랑카랑하게 울려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옆 주머니의 지퍼를 내려 전화기를 꺼낸 문도일은 화면에 뜬 번호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모았다.

“왜요?”

“모르는 번호라.”

“스팸 전화예요?”

“글쎄.”

그는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이석의 명의로 개통한 휴대폰인 데다가 문도일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들 모두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는 못내 미심쩍어하면서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휴대폰을 든 그는 잠잠히 상대방의 말을 기다렸다. 문도일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들렸다.

“네. 제가 문도일입니다. 누구시죠?”

덩달아 호기심을 느낀 하선우는 문도일의 통화에 신경을 집중했다.

“누구시라고요?”

영 처음 듣는 이름인지 문도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은행? 채권자? 덩달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대화를 엿듣던 하선우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강태……한? 강태한이 누굽니까?”

전화를 낚아챌 뻔한 하선우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문도일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문도일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불가항력의 덫에 걸린 여린 짐승처럼 숨조차 쉬지 않고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불길한 예감에 하선우는 문도일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그가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하선우를 밀어냈다.

하선우는 초조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문도일이 곁눈질하며 쳐다보긴 했으나, 이내 통화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이윽고 문도일의 입에서 건조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솔직히 많이 놀랍군요. 믿기지도 않고.”

하선우는 그를 붙잡고 강태한이 무슨 말을 떠들어대는지 캐묻고 싶었지만, 문도일에겐 하선우를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장소에서 만나죠.”

“선배, 어디 가요?”

문도일이 고개를 돌렸다.

“응.”

“강태한? 좀 전에 말했던 강태한 만나세요?”

본래 성격이라면 불편한 자리는 피하고도 남았을 하선우가 끈질기게 붙어 통화를 엿듣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입안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영 개운치가 않았다. 마뜩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하선우가 말했다.

“같이 가요, 선배. 저도 같이 가요.”

웃고 있지만 하선우의 눈빛에는 매달리는 듯한 절박함이 묻어나 있었다.

* * *

이번에는 또 어떤 벌집을 들쑤시려는 걸까. 하선우는 강태한의 반질반질한 낯짝을 보며 벌집의 단면을 떠올렸다.

과학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구조이자, 최소의 재료로 최적의 공간을 만들 때 활용하는 것이 정육각형이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힘을 배분하여 규형에 맞춘 집을 짓는 벌의 지혜에 감탄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선우는 흐트러지는 정신줄을 다시 한 번 붙잡았다.

강태한은 시종일관 그늘진 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성일금형과 엘텍하이스코 간의 특허소송 문제를 제법 상세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엘텍그룹 일가의 마지막 양심으로서 피해를 입은 기업의 오너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문도일과 하선우는 수수한 차림으로 약속 장소로 나온 강태한의 맞은편에 앉아 공정사회를 꿈꾸는 젊은 오너의 담담한 고백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하선우는 강태한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얘기들을 늘어놓는지 몰라 처음에는 불안했다. 점차 이야기가 길어지자 기분이 떨떠름해졌고, 이야기가 끝이 없이 이어지자 적의를 잊지 않으려고 강태한에게 받았던 취급들을 되새겼다.

“왜 하필 접니까?”

강태한의 말을 자르며 문도일이 물었다. 진지하게 들어주던 것과는 별개로 그가 진심이라고 말하던 헛소리는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저도 들은 얘깁니다. 형이 얘기를 안 해줬다면……. 엘텍하이스코와 성일금형 간의 특허소송 문제는 끝까지 몰랐을 겁니다. 관심도 기울이지 못했을 테고요.”

겸연쩍은 표정으로 강태한은 하선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선우 형이 술자리에서 속상하다고 해줬던 얘긴데……. 저까지 너무 마음이 무거워서요.”

하선우는 숨을 조용히 집어삼켰다.

“사실 몇 주 전에 고민하다가 엘텍하이스코 사장님께 내사 요청을 했었어요. 일이라는 게 그렇잖습니까. 실적 올리는 데 급급하다 보니 가치가 전도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그런 일을 엘텍이 앞장 서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 회의를 느낍니다. 아, 이런. 한탄이나 하려고 여길 온 건 아닌데.”

강태한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매만지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자 하선우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쇳소리를 내며 물었다.

“내사 요청?”

“전에 말했었잖아요. 내사 요청했다고. 근데…….”

그는 문도일을 쳐다본 뒤, 다시 하선우를 바라보며 상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위에서 압력이 들어오는 바람에 무산됐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엘텍하이스코는 고모부가 운영하는 방계 회사거든요.”

“……그렇죠.”

문도일의 시선이 살짝 옆으로 비껴갔다. 그 안에서 모질게 넘실거리는 감정을 감추려는 듯이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상하네. 나는 왜 거짓말 같지. 여자 연예인들과 스캔들 일으키는 데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랬지. 그래서 형이 많이 혼냈잖습니까? 인간 좀 되라고.”

하선우는 촌극을 관람하는 기분으로 강태한을 쳐다보았다.

“형이 아직도 날 가벼운 애로만 여겨서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과거에 내가 하고 다닌 일이 있는데.”

절로 이죽거리는 입술을 힘주어 억누르며 하선우는 문도일을 흘긋거리곤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은 언제 알게 됐습니까?”

“그게 아무래도 궁금하시겠죠.”

하선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태한은 문도일과 하선우를 번갈아 보았다. 강태한을 자극했다간 저 독사 같은 자식이 어떤 말을 할지 몰라 하선우는 그의 눈치만을 살폈다.

“솔직히 첫인상은 기억이 안 나지만요.”

흐린 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만남부터 기억나요. 주한이 형 집무실에서 선우 형을 봤었죠. 뭐에 그렇게 정신이 팔렸는지 창가에 붙어서 넋을 놓고 있더라고요. 바짝 다가가도 모를 정도로 방심하고 있어서 제가 장난을 친다고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잠깐 나 좀 보죠.”

자리에서 일어난 하선우는 강태한의 팔을 낚아챘다. 하선우는 부러 위압적으로 말했다.

“잠깐 밖에서 나 좀 보자고.”

여유롭게 고개를 들어 올린 강태한은 하선우와 눈을 맞추었다.

“뭔가를 그렇게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고 있더라고요. 탄소인지 전지인지 하는 특허자료더라고요. 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솔직히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았고요.”

그는 힘을 주어 하선우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냈다. 오히려 자신의 옆에 하선우를 앉히며 물었다.

“그때가 언제였지? 그날이 한향시립교향악단 후원회 모임이 있던 날이었……나?”

말끝을 흐리며 그는 무구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랬나? 흑심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강태한과 하선우가 재회한 날은 사실 한향시립교향악단의 후원회 모임과는 무관했다. 강태한의 어머니인 임용화가 그의 남동생을 상대로 벌인 상속분쟁에서 승소한 기념으로 강주한이 열었던 파티였다.

그러나 하선우는 그것을 일일이 상세히 설명할 상태도 기분도 아니었다. 미친 척하고 이 자리로 강주한을 부를까 싶다가도, 그와 자신의 관계가 폭로될까 섣부르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 강태한이 자신을 손아귀 안에서 가지고 놀고 있는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만이 하선우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암덩어리로 변해야겠어, 아니면 그대로 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겠어?’

하선우는 강태한이 했던 말을 떠올릴 때마다 눈앞이 어둡게 젖어드는 것을 보았다. 제법 오랫동안 강태한의 말은 하선우의 머릿속에 저열한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자리 잡았다. 그의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분노와 불안을 자극했다. 심장을 날카롭게 긁는 듯한 말투와 특유의 표정은 사람을 단순한 조롱거리로만 여기는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얌전히, 이대로 죽은 듯 가만히 살고 싶은 하선우를 자극하는 것은 오히려 강태한이었다.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재미는 없어도 그런 면이 좋더라고요. 고지식한 게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그날도 형의 집무실에 외톨이처럼 갇혀 있던 걸 제가 구해줬다고 봐야죠. 그 이후로 자주 마주쳤어요. 그러다 사석에서도 보게 됐고요. 인생 선배로 삼아 저 혼자 의지하게 됐죠.”

콧등을 쓱 훔쳐낸 강태한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하선우를 보았다. 하선우라는 사람을 아낀다는 것을 내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사실 형은 신경도 안 쓰는데 저 혼자 계속 따라다니는 거예요.”

강태한의 굽죄이는 눈빛에 하선우는 침을 삼키는 것도 잊었다. 문도일은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에 손을 대는 대신 물 잔을 비우며 말했다.

“나는 선우가 강태한 씨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습니다.”

“형이 그런 걸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조금 전에 말했듯이 저 혼자 매달리는 거라니까요. 제가 좀 애정결핍이거든요. 그래서 한번 찍은 사람한테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강태한은 이마에 주름이 지도록 눈을 부릅뜨면서 곤란하다는 듯이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태연한 낯짝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하선우는 다시 한 번 조용히 윽박질렀다.

“그래서요. 불러낸 이유가 뭡니까?”

강태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문도일 씨를 도와주고 싶다면서요. 아니에요?”

하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문도일을 한 번 일별하고는 경고한다는 듯이 목소리를 억눌렀다.

“내가 언제요?”

“그래요? 하긴 나한테 직접 말한 건 아니었죠.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였으니까요.”

강태한은 폐부 속에서 긷는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문도일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

“제게 일을 바로잡을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믿지 않으시겠지만 결국에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하지만 아버지도, 형도, 그 누구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사죄를 할 생각은 없죠. 저는…… 그런 제 가족이 부끄럽습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강태한의 얼굴은 일견 진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는 벌거벗은 창녀처럼 애써 치욕을 견디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도일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선 시선으로 강태한을 응시했다.

“나는 아직도 강태한 씨가 왜 이런 호의를 보이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저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건 제가 더 잘 압니다. 실제로도 방탕하게 살았으니까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부러 참는 듯한 눈빛으로 그는 문도일을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유약한 척하는 얼굴에 속이 뒤틀릴 정도였다.

“하지만 저도 지긋지긋한 차별 속에서 외롭게 자랐어요. 배부른 투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전 그런 구역질나는 삶을 원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짙은 어둠이 그의 얼굴 위로 내리자 강태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선우는 강태한의 눈동자에서 한순간이나마 진실이 깃든 공허를 엿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연출된 거짓에 속지 않는다.

“제가 지난 2년 동안 외국을 전전하며 살았던 이유는 형을 피해서였습니다.”

강태한의 시선이 문도일에게서 비켜나 옆자리에 앉은 하선우에게 슬그머니 닿았다. 그러나 그는 우회하지 않고 하선우의 마음속에 직진하여 밀고 들어왔다.

“친구 같았던 형수가 죽은 뒤로 그 끔찍한 지옥을 도저히 버틸 수 없었거든요.”

* * *

불과 몇 십 분 전까지만 해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원장은 공용으로 사용하는 부엌의 밥솥 안에 밥을 지어놓고, 싱크대를 청소하고, 원생들이 더럽게 사용한 화장실을 닦기 위해 물 한 바가지와 함께, 욕 한 바가지도 함께 퍼부었다.

청소를 마치고 구시렁거리며 비좁은 복도를 나와 총무실로 되돌아가던 그의 눈앞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그는 섬멸하는 빛을 물리치듯 손을 휘저었다. 이내 시력은 되찾았지만, TV 화면에서나 보던 커다란 카메라와 그 뒤를 따르는 사내들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처음에 원장은 고시원을 상대로 민원을 넣으려는 불순한 세력쯤으로 남자들을 오해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고시원은 몇 년 전에 용도를 변경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다짜고짜 삿대질을 하며 카메라를 뺏으려던 원장을 제지한 이는 묘하게 낯이 익은, 돈냄새를 폴폴 풍기는 젊은 남자였다. 소란을 부려서 죄송하다며 그는 자신을 엘튼 호텔의 사장인 강태한이라고 소개했다.

84년, 다중이용업소라는 업종으로 구청에 영업신청을 했던 햇살 고시원의 원장은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지난 30여 년 동안 겪은 적이 없는, 아니 앞으로 햇살 고시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도 경험하지 못할 일이었다.

원장을 멀리서 지켜보던 하선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저놈이 언제 또 이런 곳을 와보겠나 하는 삐딱한 심정이었다.

하선우와 강태한은 411호의 문밖에 서서 문도일이 소송자료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진기자는 창문 없는 좁은 고시원과 문도일이 지하철 행상을 하며 팔았던 잡화와 재고,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는 리빙 박스, 그 안의 소송자료들을 꼼꼼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하선우는 그 풍경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지한 원생들이 복도로 구경을 나왔다. 언제 슈퍼는 다녀왔는지 원장이 원생들을 헤치고 나와 하선우와 강태한, 방 안의 남자들에게 각각 음료수를 건넸다. 강태한에게 말을 붙이지는 못하면서도 영 참견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노인이 안달 내는 모습은 강주한과 하선우가 악수하는 사진을 집 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취재 중인 411호 안의 모습을 보는 것도, 강태한을 구경하는 원장을 곁에서 훔쳐보는 것도 왠지 힘이 들어, 하선우는 슬쩍 고시원에서 빠져나왔다.

한 시간 전쯤, 신문기자가 약속이라도 잡아놨다는 듯 문도일을 찾아왔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강태한이 주도한 것이었다. 40대 중반의 사내는 자신을 세원일보의 윤동환 기자라고 소개했다. 세원일보는 국내의 메이저 언론사이자 몇몇 종합편성 채널의 주축이 되는 신문사이기도 했다. 문도일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신문고 노릇을 자처한 강태한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게 얼떨떨한 한편, 알 수 없는 불안이 그를 심란하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하선우의 가슴을 꽉 막고 있었다. 하선우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계단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하려는 염도 없이 건너편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그의 주변은 변화를 파악하기도 전에 비틀리는 큐브처럼 휙휙 뒤바뀌고 있었다.

“내가 정말 기자를 부를 거라곤 생각 안 했겠지.”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그를 뒤따라왔는지 강태한이 분식집 세로 간판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느라 고개를 들자 뒷목이 뻣뻣해졌다.

“보도가 되긴 합니까?”

강태한은 바지 주머니 안에 손을 밀어 넣은 채 고개를 쳐들고 껄껄 웃었다. 뭐가 그리 우스울까, 강태한의 심중을 헤아려보려다가 하선우는 이내 때려치웠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성격 이상하다는 말 많이 듣죠? 이게 우스운 말입니까?”

강태한을 미치기 직전의 사람처럼 대하며 하선우는 딱하다는 투로 물었다.

“그럼 웃기지.”

눈높이를 맞춰주겠다는 듯 바지춤을 넉넉하게 잡아당기고 하선우의 앞에 쪼그려 앉은 그는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웃음으로 흐트러진 호흡과 얼굴의 근육 중에서 유일하게 그의 눈만이 제자리를 유지했다. 그 눈으로 하선우를 직시하며 강태한은 말했다.

“세원일보가 원래 안신 계열사에서 분리된 언론사잖아. 안신그룹 초대 회장이 창간하고 독자 법인화해서 떨어져나간 신문사. 근데 그것도 몰랐어? 하 사장은?”

강태한은 피식 웃었다.

“세상 공부 좀 하셔야겠네.”

하선우는 남자에게 제 기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안신과 엘텍이고, 문도일은 그저 한 번 쓰고 버릴 소모적인 전쟁용품인 모양이었다.

“그러네요. 안신과 엘텍의 고래 싸움에 도일 형만 놀아나겠네요. 세상 공부 더해야겠군요.”

“그래. 공부 더해야지. 그렇다고 오버는 하지 마. 물론 경호 형이야 엘텍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나간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하겠지. 그런데 그건 알아? 세원일보가 보수언론 중에서 가장 중도보수적인 성향의 신문이라는 거.”

빤히 하선우를 쳐다보던 강태한은 몇 초 뒤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시원 원장이 건넸던 음료수의 뚜껑을 따며 그가 비웃었다.

“하긴 책을 읽는 편도 아니요, 신문을 읽는 것도 아니니 무식한 놈이 알 리가 있나.”

저도 모르게 욱하는 마음에 쏘아붙이려던 하선우는 강태한을 노려보다, 시위에 걸린 활을 내리듯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떨군 시야 안으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고단한 발걸음이 들어왔다. 이윽고 그의 귓바퀴 속으로 각자의 행로를 따라 움직이는 구둣발 소리가 파고들었다. 전단지로 뒤덮인 지저분한 거리를 더운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먼지를 마신 코끝이 간질거렸고,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땀이 턱 끝에 고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선우는 조금 전, 기자가 찾아와 세 사람과 대면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자네가 이렇게 나를 오라 가라 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고단한 사람이야.’

기자의 말처럼 그의 얼굴은 누적된 피로로 가득했다. 일단 담배부터 피우고 봐야겠다는 듯 그는 물었다.

‘특종이라는 게 뭔데?’

불을 붙인 그는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한쪽 눈을 찌푸렸고 그 모습에서 일견 불량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선우는 어째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자가 강태한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강태한은 문도일을 대신해 엘텍하이스코와 성일금형 간의 특허 갈등에 대해 털어놓았고 남자는 묵묵히 담배를 태우며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여 몇 모금 빨던 그는 입맛을 다시며 재떨이에 침을 퉤 뱉고 그 위에 담배를 짓눌러 꺼버렸다. 그리고는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양팔을 걸쳤다.

‘말은 바로 해야지. 솔직히 강태한이 고모부의 회사를 고발해달라고 자리를 마련한 게 특종이지. 이런 건 수습기자들 울산으로 보내서 공단 하루만 이 잡듯이 뒤지면 비슷한 사연으로 백 장은 뽑아 와.’

그는 손바닥으로 푸석해 보이는 얼굴을 감싸고 마치 살려달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그는 문도일을 흘끗거렸다. 문도일 역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 나온 것이 그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듯이. 기웃거리고 연연하는 대신 그는 지금껏 참았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한 발을 빼고,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안신 따까리짓 하는 기자는 나도 필요 없어.’

담배를 빠는 문도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모두를 적막 속에 방기한 채로 그는 입구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남자에게서 기가 찬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날 상대로 이념 검사해?’

문도일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은 그는 허허 웃으며 담뱃진으로 범벅이 된 재떨이에 불씨를 짓눌렀다.

‘나 공영방송 피디 출신이야. 그것도 황성록 로비 사건 취재하다가 표적 징계받고 권고사직 당한.’

“정 찝찝하면 윤 기자가 쓴 기사를 읽어보든가.”

강태한은 하선우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음료를 홀짝거리며 안주머니에서 꺼내 든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해 하선우의 앞에 내밀었다. 검색창에는 ‘윤동환’이라는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인물정보란 옆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그와는 사뭇 다른 인상의 말쑥한 남자가 흑백사진 속에서 날카롭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50대 초반의 나이로, 세원일보의 선임 기자였다.

“인기 글쟁이야. 세원일보 차기 주필 후보고. 아마 이 사람이 승진하면 세원일보의 언론관이 확 바뀔걸?”

하선우는 그가 가장 최근에 쓴 기사를 클릭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쓴 글은 강예진의 남편이 부사장으로 진급했던 화장품 회사인 엔젤러스에 대한 기사였다. ‘매출 늘었는데 400억 적자’, ‘엔젤러스 발표의 진실’. 기사의 방향은 엘텍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상속세와 증여세 제도가 없는 인도를 곪게 하는 재벌 문제, 신용정보 유출에 대한 연속 기사 등 다양한 내용을 취재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특정 기사를 연재 중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최저 생계비로 한 달 살아보기, 대한민국에서 폐지 줍는 노인으로 산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모은다는 것 등 ‘대한민국 시리즈’를 꾸준히 연재 중이었다. 젊은 층에게 유독 사랑받을 것 같은 반골 언론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황성록 로비 사건이라면 하선우도 들어본 적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워낙 어릴 때 일이라, 황성록이라는 사람이 정계와 언론, 검찰을 대상으로 로비를 주도했다는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는 사건이었다. 황성록 이름 석 자에 엘텍이 얽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어릴 적의 일이라 자세히 생각나진 않았다.

하선우는 기사의 제목을 훑어보다 강태한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는 하선우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그로서는 해줄 말이 없었다. 문도일의 쪽방에서는 인터뷰가 한창인지 오랫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쯤 되니 강태한의 말이 마냥 거짓은 아니었다는 것을 하선우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순조롭다는 게 꺼림칙했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지만, 강태한의 의도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훼방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설령, 그가 문도일을 선전용도로 사용하고 폐기처분한다고 할지라도.

“너는?”

하선우는 강태한에게 물었다.

“너는 뭘 얻는데. 조금 전에 기자가 했던 말, 내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네가 고모부 회사를 고발해서 얻는 게 뭐가 있지? 암덩어리 운운하면서 도발했던 게 너였던 거 잊었어? 진짜 신문고 노릇을 하려는 건 아니잖아?”

강태한은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바닥 안에 턱을 괴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여 흥미로운 장난감을 보듯이 비스듬히 쳐다보던 그는 잡상인을 물리치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이번에 제대로 신문고 노릇을 할 예정인데? 문도일 선에서 끝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윤 기자에게 넘길 진짜 특종은 따로 있어. 왜, 강주한한테 일러바치게?”

“…….”

“그럴 배짱 없으면 내 잇속까지 걱정하지 마. 그건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그는 경고하듯 으르렁거린 뒤에 거리로 시선을 옮겼다. 거리를 응시하는 강태한의 얼굴은 초점이 흐린 카메라로 본 세상처럼 하선우가 보기에도 도화지마냥 깨끗했다.

하선우는 그 청결한 얼굴이 숨긴 허구에는 절대로 홀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해사한 얼굴을 하고 그가 지껄인 소리는 매번 마음을 연연하게 했다. 특히 조금 전에 들었던 강주한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강태한은 하선우가 본능적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물론, 종국에는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닫아버린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는 하선우의 머릿속에 뜨겁게 상승하는 기류를 불어넣고 표표히 도망가버렸고, 하선우의 머릿속에선 그의 말들이 순식간에 모여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하선우가 생각의 단자를 뽑아내는 스위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강태한이 돌연 마른 코웃음을 흘렸다.

“너 근데 말 놓는다?”

“내가 너보다 나이 많잖아.”

“나이 많으면 나한테 말 놔도 된다고 누가 가르쳐줬어? 사회가 그랬을 리는 없고….”

가슴이 단단하게 부풀 정도로 들숨을 삼킨 하선우는 숨을 멈추고 강태한을 보았다. 하아아~, 길게 한숨을 뱉어낸 하선우는 강태한을 차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강태한 씨와 말 놓을 필요 없지. 더 볼 사이도 아닌데.”

강태한은 하선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캔을 높게 쳐들었다. 그리고 모조리 비워낸 음료 캔을 바닥에 거칠게 던져버렸다.

“가만히 보면 하 사장은 지금 이 상황을 굉장히 좆같이 여기는 것 같아.”

하선우는 더러운 기분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썼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문도일이 겪은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리겠다는데, 내내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잖아. 씨발, 기분 잡치네. 문도일한테 얘기할까? 하 사장이 아무래도 당신 사건을 묻어두는 게 좋겠다고 징징댄다고. 재벌과 몰락한 중소기업의 사장, 소신 있는 기자가 화합하는 이 마당에 진영을 따져 묻는 철새 같은 놈이 분위기를 조지고 있다고? 엉?”

짜증과 조소의 경계를 제멋대로 오가며 하선우를 압박하던 강태한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갑자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텍에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이런 판에 끼고 싶지 않아? 아니면 주한이 형이 피해라도 입을까 봐? 정체가 뭐야. 강주한의 이중간첩?”

“강주한 씨는 상관없어요. 엘텍하이스코와 성일금형 사이의 일입니다.”

“아, 그새 몸정 들었다고 편드는 거야?”

하선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릅뜬 눈으로 강태한을 노려보며 억 하는 신음을 토했다. 타인의 비위를 건드리는 짓을 서슴지 않는 놈이었다. 그것을 잠시 잊을 뻔했다. 간신히 분노를 짓이긴 하선우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이 일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약속도 없이 문도일과 같이 나타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빼시겠다?”

“말조심하시죠.”

“왜? 지금 네가 누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봐 내빼는 거 아냐?”

“성일금형의 특허분쟁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제가 누구를 편들고 판단할 입장은 아니죠.”

“그 말 문도일 씨에게도 해봐.”

계속되는 도발에 화를 내려던 하선우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몸을 굳혔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그는 강태한에게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본능적으로 감정을 살피려 문도일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담담히 스민 것은 실망도 체념도 아니었다. 하선우는 변명하려 입술을 뗐지만, 그보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문도일이었다.

“괜찮아.”

“…….”

“지금까지 충분히 애썼어.”

“형. 저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는 나도 알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때까지 벌어진 어정쩡한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 문도일은 하선우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한 줌의 변명을 더 얹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는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너는 너무 물러빠진 게 흠이라고.”

* * *

임경호는 초점이 흐린 눈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노려보며 안경을 공들여 닦았다. 유리알을 작은 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은 그는 바다거북의 등껍질로 만들었다던 백색의 귀갑 테를 쓰고 눈앞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돈을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안신의 법무팀 김 대표를 서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대표는 임경호의 곱절만큼 인생을 살았지만, 긴장으로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대형 재산분할 소송인 만큼 소송비용만 100억 원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1심, 2심에 이어 대법원 심리 중인 지금까지 임경호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임용화가 요구한 4조 7,000억 중에서 법원이 2조 6,000억 원의 지급 명령을 내렸으니 절반의 승리를 거둔 게 아니냐며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침묵과 용서를 비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허락되지 않았다.

임경호는 아버지와 조부의 해외 비자금을 지금까지 조성, 운용해온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안신의 최측근 중 하나인, 안신물산 사장 류진근이었다. 이 모든 사달이 어찌 보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류진근은 안신의 차명계좌와 페이퍼컴퍼니를 브로커들을 통해 관리했는데, 그중 600억을 관리하던 브로커를 강주한 측에서 매수했던 것이었다. 그 계좌가 단초가 되면서 차명계좌 추적이 급물살을 탔고, 임경호도 모르는 사이에 국내외 해외자금이 낱낱이 밝혀지고 말았다.

9조 3,400억 외에도 강주한이 파악한 안신의 비자금은 모두 18조였다. 임경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주한의 말처럼 자신의 아버지와 조부는 30년 동안 해먹어도 너무 해먹었다.

“비자금 내역과 이동 현황이 적힌 게 수만 페이지 분량이라……, 증거를 모두 인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투자기록이 남은 이체 증거와 서류가 상당 부분 엘텍 측에 넘어간 것으로 파악되어…….”

“검찰에 넘긴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최악의 경우로 말해주십시오.”

임경호는 남자의 말을 자르고 김 변호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널따란 테이블 밑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꿈지럭거리던 그는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체념한 투로 말했다.

“경영권은 물론이고, 재산 상속권까지 잃으실 겁니다. 최악의 경우라면 임 회장님이 징역을 살게 되는 거겠죠.”

임경호는 비식 웃음을 지었다.

그의 아버지는 두 달 전 경미한 뇌졸중을 일으켰고 예후를 지켜보던 중 발작을 일으켜 곧바로 수술해야 했다. 수술은 성공했지만 경과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는 요즘 유독 지금 자신이 앉은 자리의 무게를 실감하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홀로 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경쟁자가 되어버린 형제들이 필요했다.

머릿속은 공몽한 안개가 내린 새벽녘처럼 자욱하기만 했다. 창문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연기를 피운 것마냥 전혀 환기가 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강주한. 강제한. 임용화. 그 세 사람은 묵직한 안개 너머에서 정체를 감추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껏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무너지기 직전의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이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그의 심리가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임경호에게 강주한이 내민 선택지는 단 두 가지였다. 안신그룹의 주력 기업인 안신전자의 대주주 자리를 강주한에게 넘기거나, 임용화에게 안신전자를 제외한 안신 전 계열사의 주주총회 참여 자격을 부여하거나. 무엇을 선택하건 간에 임경호에게는 치명적이고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좋아요.”

그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듯 말했다.

“강주한이 소송에서 안신이 일을 꾸밀 경우, 비자금에 대한 자료를 검찰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사건은 특검수사로 넘어갈 테고, 그쪽에선 입맛대로 마음껏 안신을 뜯어먹겠죠. 김 변호사님 말씀처럼 경영권은 물론이고, 재산 상속권까지 잃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라면 아버지도 징역을 살고요.”

임경호는 고소를 흘렸다.

“하지만 어차피 거미줄처럼 모두가 얽혀 있는 세상이죠. 받아 처먹은 검사와 법관, 정치인. 공모자들은 공모자들 나름의 의리가 있는 법입니다. 류 사장님.”

“예.”

“그 수를 헤아리기가 쉽겠냐마는, 안신 돈받은 놈들 목록 작성해주세요. 배부르게 먹은 놈들부터 제가 만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임경호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황성록 사장이 몇 년 살다 나왔습니까?”

류 사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징역 1년 반에 집행유예 3년이었습니다.”

“그래요?”

임경호는 수긍하듯 저 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황성록 사장보다 더 적게 살게 나오게 한다고 확신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류 사장님 아들인 류 전무, 앞으로 안신생명의 지분과 사장 자리는 책임지겠습니다. 아니, 그 전에 제가 이 소송을 끝낼 명분을 먼저 만들겠습니다.”

얼굴을 굳힌 채 대답이 없는 류 사장을 보며 임경호는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받은 비서에게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임제상 장관과 3일 저녁 약속 잡아요.”

뉴욕에 있는 별장, 장관 부인의 사치스러운 취향에 맞춘 귀금속, 그가 그룹 고문으로 지내면서 챙긴 돈, 그리고 여자들. 목록을 작성해 그들의 코앞으로 들이밀면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안신과 엘텍의 싸움판에 끼어들어 새우등 터지는 일만은 사양할 테지. 그는 결코 혼자 자멸하진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생각의 초점을 엘텍에 맞췄다. 대법원 재판 심리가 앞으로 길게는 겨울까지, 몇 개월은 더 진행될 테니 시간은 충분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엘텍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아야 했다. 이미 견고하게 세워진 강주한의 지배구조는 건드리진 못해도, 강주한과 강제한을 구속시킬 만한 건 뭐라도 움켜쥐어야 했다.

그가 기억하는 엘텍과 관련된 가장 큰 스캔들은 두 가지였다. 모두 그가 중학생 시절에 겪은 일이었다. 가장 큰 사건은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에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활동과 권력유지를 위해 쓰고 남겨둔 사실이 드러난 LW비자금 사건이었다.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기업체로부터 3,500억 원가량의 지원금과 1,000억 원의 당첨 축하금을 받았고, 추징금으로 3,000억과 징역 15년 형이 선고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재벌 총수 11명을 비롯 기업인 60여 명이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으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와 무죄선고로 풀려났다. 또한 몇 년 뒤 전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맞아 사면, 복권되었다.

고작 중학생에 불과했던 임경호였지만 그 역시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 감돌던 흉흉한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TV, 라디오, 신문 어느 매체에서나 비자금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그러나 스캔들 수사가 석 달째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회의와 염증으로 바뀌어 갔다.

황성록 스캔들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황성록은 그 당시 엘텍 회장의 오른팔이었던 인물로, 기획조정실을 그의 컨트롤타워로 삼았다. 이 머리가 대단히 비상했던 인물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한 남자가 있었다.

윤동환 기자, 현재 세원일보의 선임 기자인 그가 황성록의 비망록을 발견하면서 ‘황성록 천하’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휩쓸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끈 떨어진 전직 대통령을 그들의 방패막이로 삼을 만큼 엘텍이 거대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황성록 스캔들은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의 주범인 황성록은 징역 1년 반,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며, 엘텍의 총수는 대국민 사과 및 추징금 3,000억이라는 아주 저렴한 죗값을 치르고 스캔들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정경유착, 언경유착, 법경유착의 끈끈한 울타리를 만들어낸 황성록은 모든 비밀을 안은 채, 오래전에 숙환으로 타계했다.

안신과 엘텍의 차이점은 20년 전에 꼬리를 잘라냈느냐, 그러지 않았느냐에 있었다. 황성록은 자진하여 꼬리가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도마뱀의 등에 날개를 달아 대한민국을 뒤덮는 천룡으로 만들었다. 반면, 안신은 꼬리에 온갖 금은보화를 주렁주렁 매달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4년 전 그는 강주한이 국무총리상을 수여받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엘텍은 오랫동안 회사 분할을 통한 지주회사로 거듭날 준비를 했고, 4년 전부터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강주한이 부친을 대신해 상을 받은 이유는 지배구조 우수기업이라는 대내외적인 이미지 덕분이었다.

임경호는 쓴웃음을 흘렸다.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온갖 허물은 이미 20년 전에 치른 값싼 죗값으로 씻겨 나갔고, 비밀을 품은 사내만이 무덤에 편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차를 머금었다. 아랫사람이 내온 다과가 마들렌과 홍차였다. 아마도 남편의 다과, 식음료까지 간섭하는 유난스러운 아내의 취향이 반영된 간식일 터였다.

마들렌과 홍차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은 프랑스어를 전공한 그의 아내가 읽어보기를 강권한 소설이었다. 주인공이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는 신은 가장 유명한 장면 중에 하나였다. 감각이 자극을 유발하고, 연상작용을 일으키고, 예상하지 못한 내면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소설 속 주인공은 차와 과자의 맛을 통해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휴가를 보냈던 시골마을, 어머니, 할머니,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여자들과 그를 보필하던 충직한 하인들……. 한가하기 그지없던 산책길.

임경호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들렌을 홍차에 적셨다. 어떠한 낭만도 없이 그것을 먹으며, 일부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가 큰 배움을 목적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대학입시 실패로 도피하듯 외국 유학길에 올랐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이미 강주한과의 사이가 막 삐걱거리는 마찰음을 내던 때였다. 이듬해에 고3이 될 강주한은 방학 중 미국을 방문했고, 뉴욕에 있는 임경호의 집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다.

그들은 일주일 동안 뉴욕 곳곳을 돌아다녔다. 장소는 갤러리, 도서관, 서점으로 한정되었다. 강주한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화집과 관련 자료들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작은 방은 이내 창고가 되었고, 그는 그곳에 열렬히 끌어모은 방대한 자료를 수납하기 시작했다. 강주한은 한동안 창고 안에 틀어박혀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임경호는 반쯤 미친 듯한 동거인의 존재가 신경 쓰였지만, 차츰 외사촌에게 무뎌졌다. 그림에 빠진 나머지 후계자의 길을 스스로 벗어나도 좋았고,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사촌이 들여다보는, 어딘지 비위 상하는 느낌의 그림들은 임경호의 취향과는 억만 광년 동떨어져 있었다.

미국에서 머문 한 달 동안 강주한은 그를 사로잡은 화가의 그림을 복습하느라 온 시간을 투자했으면서, 정작 한국에는 빈손으로 가겠다고 했다. 무례한 사촌동생 때문에, 임경호를 돌보는 직원들은 창고의 자료들을 폐기하느라 애를 먹을 것이 뻔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임경호는 강주한의 무례함을 되갚아줄 방법을 고민하다, 마침내 그를 날카롭게 헤집을 방법을 찾아냈다. 임경호는 제법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좋으면 그림이나 그리지?’

임경호의 심술이 무색하게도 강주한은 아주 오래도록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누가 그러던데. 너의 쓸모는 너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그것이 정언 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임경호를 똑바로 바라본 그는 이어 말했다.

‘실제로 나는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고, 미술에 대한 재능이 있지도 않아. 아니, 내게 그 어떤 예술적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은 살을 찌우는 거지. 나는 푸줏간에 매달린 돼지지만, 현실은 털 코트 입은 하이에나야.’

빈손으로 돌아갈 거라던 강주한의 말과 달리, 그는 화집 하나를 가져갔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화집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우연히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다시 접할 일이 있었다. 그의 미국인 친구가 편집장으로 있는 예술잡지에 실린 기사에서였다. 최근 익명의 아시아 미술 애호가에게 경매사상 최고가를 갱신하며 낙찰된 영국 표현주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조명하는 특집기사에는 그의 생애와 대표작, 생전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 ‘풀밭 위의 두 형상’, ‘페인팅’ 등 각종 그의 기괴한 그림을 넘겨보던 그의 눈길이 인터뷰에 멈추었다.

……인간이 털 코트 입은 하이에나들에 의해 푸줏간에 걸리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인간은 쇠고리에 발이 꿴 채 케밥이나 스튜의 재료로 잘려지는 것이다…….

인간이 한낱 고깃덩어리로 전락하는 상상을 했다던, 베이컨의 인터뷰를 그는 아주 오래도록 천천히 읽었다. 하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불길한 느낌의 정체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안신 계열사의 주가가 일제히 하락세였다. 임 회장의 수술이 성공적이고 회복 역시 빠르다는 소식에 반짝 상승세를 탔지만, 상속분쟁으로 인한 비자금 의혹이 터져 나오기 전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하향세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안신전자 주였다. 유상증자 루머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래로 시가총액 8,000억이 증발했다. 유상증자와 관련된 찌라시는 꽤 구체적이었다. 증자의 규모가 2조 원대이며, 경영난을 해소하기 위해 제3자를 대상으로 불가피하게 유증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무방비하게 바람을 맨몸으로 맞고 있을 남자를 떠올리며 강주한은 손톱의 거스러미를 떼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날려버리려 입바람을 후, 불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대고 유리벽 너머로 해 저무는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 서울을 다 가진다 해도 그는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아무리 밥을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공복이 찾아오듯이 그가 거머쥐는 것 역시 허기를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세포증식과도 비슷했다. 종양세포가 목적도 없이 자율적으로 증식하듯이, 기업이란 곳곳에 복제되고 분열하며 증가되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에 무슨 감상이 필요하겠는가.

그는 행복을 생각할 만큼 감상적이지도 않았고, 자기 확신 없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하선우와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가 뇌리를 맴돌아 마음이 불안했다.

오래전, 강주한과 하선우는 전결규정을 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안정적인 회사가 되려면, 구성원이 문제를 일으켜 그를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칠 경우 다른 이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조직과 매뉴얼이 필요한 겁니다. 예를 들어 하선우 씨가 NnG를 그만두고 엘텍전자로 옮기거나, 하선우 씨가 NnG에서 버려진다 하더라도 회사는 돌아가야 한다는 거죠.’

그 말에 하선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하선우가 NnG에서 엘텍으로 이직할 가능성을 두고 한 말이었지만, 하선우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울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조직에서라면 강 전무님도 마찬가지겠죠.’

분한 감정이 확 치밀어 오른 하선우를 보며 그는 태연하게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말을 지껄였다. 단순히 하선우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서글프죠. 평생을 헌신한 조직에 배신당한 기분이 들 테니까.’

그가 엘텍전자의 전무로 취임한 뒤 강 회장의 지시로 1여 년 동안 간부의 10%가 해고되거나 좌천되었다. 미국의 잭 웰치가 그러했듯, 한동안 그의 뒤로 중성자탄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건물은 멀쩡하게 놔둔 채 사람만 조용히 죽이는 중성자탄에 빗댄 별명이었다.

그에게 있어 기업이라는 체제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개념이었다. 강제한은 자신을 기업을 뛰어넘는 존재로 여겼지만, 반대로 강주한은 그 자신도 기업의 부품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다만 다른 부품과 차이가 있다면, 강주한이 권력의 부품을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도 가끔 자기 확신에 자신이 없을 때가 있었다.

“월요일 조간신문으로 나올 예정이며, 이미 두 곳의 종합편성 채널에서 엘텍하이테크에 취재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뉴스로도 방영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윤동환 기자라고 했죠.”

“네.”

“지난 1년 동안 눈길 한 번 안 주던 일에 왜 갑자기 관심을 기울이는 겁니까?”

“저도 특허 문제까지 관심을 가지는 게 미심쩍어 따로 조사를 지시했었습니다. 26일에 강태한 사장님과 윤 기자의 행적이 겹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강주한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뭇거리며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안 비서를 쳐다보며 강주한은 계속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 자리에 성일금형의 사장 문도일 씨와 NnG의 하선우 사장님도 계셨습니다.”

강주한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그대로 한참을 정지한 채 태블릿PC 속의 스케줄 화면을 응시했다. 그 속에는 잠시 후에 있을 하선우와의 약속이 표시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보세요.”

자기 확신이 사라지고 그가 발을 디딘 바닥이 모조리 흔들리는 느낌. 한때 그런 불안에 시달렸었다. 소년기의 강주한은 발밑이 무겁게 가라앉을 때면 그의 안에 해소되지 않는 울혈의 덩치를 키워, 그것을 근원 삼아 달려 나갔었다. 당시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분노였다.

하선우는 멀미처럼 어지럽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토템 중 하나였다. 모든 걸 망쳐버리고 싶은 울화가 노도처럼 밀려오는, 그러나 동시에 꼼짝 못하게 억눌러버리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으로 초조하던 시기였다. 어쩌면 자신은 그 시절을 가장 강렬하게 뼈에 새긴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분노가 많았던 소년이 그 분노마저 죽이고 단세포의 괴물로 변태變態하기 전에 남기고 온 과거의 허물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성체가 되지 못한 그는 떨치고 싶지만 떨쳐낼 수 없고,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허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잘라버릴까? 제 약점이 될 것을 알고도 너덜하게 매달린 것을 홀린 듯 쳐다보는 제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싹둑 잘라내버릴까? 하지만 너무 아까웠다. 아니, 아깝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이제 와서 잘라낸다고 홀가분하진 않을 것이다. 어느 게 제 살이고 남의 살인지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하게 엉킨 살의 타래를 절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연인 간의 밀고 당기기, 즐거웠다. 눈치를 볼 때도, 무람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할 때도, 하선우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강주한의 테두리 안에서 그가 얼마나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 그 안의 탄성을 확인해볼 수 있는지 만용을 부려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목동이 아닌 삼청동 저택에서 그와의 저녁 약속이 있었다.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곳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어디 가요?”

“집으로 갑니다.”

“집이요?”

하선우는 갈림길 앞에서 어리둥절한 눈으로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강주한이 카트를 태울 때부터 이상하단 느낌을 받았던 그는 거의 확신에 차 물었다.

“집은…… 저 유리로 된 건물 아니었습니까?”

“저긴 별채죠. 가족들은 저 아래 건물에서 지냅니다.”

숨 막히는 표정을 짓는 하선우를 일별한 강주한은 말했다.

“부모님은 여동생 때문에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아이들도 함께 데려가셨죠.”

“아…… 그래요?”

강주한은 하선우가 삼청동의 저택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나. 분명 저택에서 파티를 연 날부터였다. 마치 하선우는 사방에 그를 감시하는 눈과 귀가 깔린 것처럼 눈치를 보았다. 하선우는 침을 삼킨 뒤 말했다.

“그래도 분명 귀에 들어갈 텐데요.”

“고분고분하게 기었으니 연애는 마음껏 하게 해주시겠죠. 이 나이에 사춘기로 방황하는 건 아버지도 저도 난감한 일이잖습니까.”

희미하게 웃은 강주한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하선우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입을 다물었지만, 기분이 찜찜했다. 자꾸만 그와 자신 사이에 연애 외적인 것이 끼어들어 헤살을 놓는 듯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강주한이 주로 지내는 별채가 기술문명의 혜택을 고스란히 입었다면, 그의 가족이 지내는 곳은 아주 오래된 수도원 건물을 연상시켰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려오고 야트막한 뒷산 너머로 새가 날아다닐 듯한 풍경이었다. 건물의 뒤편으로는 이 지대의 높이에서는 자라기 힘들었을 거대한 활엽수 두 그루가 저택을 각각 반씩 나누어 뒤덮고 있었다. 짙은 녹색의 담쟁이넝쿨이 이끼 낀 석조 기둥을 돌돌 감싸고 인공으로 조성된 샘가에는 갖가지 화려한 꽃이 피어 있었다.

어디에서나 풀내음을 맡을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유독 꽃향기가 짙게 풍겨왔다. 그의 가족이 머문다는 이곳은 정중한 동시에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될 정도로 평온했다. 하선우는 풍경의 포로가 되어 긴장했던 것도 잊고 말했다.

“꽤 오래전에 지은 건물인가 봐요.”

“160년 조금 안 됐습니다. 여기로 옮긴 지는 30년쯤 됐죠.”

“160년이요?”

“유럽에 있는 휴식처 중에서 조부께서 가장 아꼈던 별장이었죠. 지대가 높다 보니 건물을 통째로 옮기는 건 불가능해서 건물의 일부분만 이곳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듣기로는 그 과정 자체가 거의 집착의 끝이었다더군요.”

질린 얼굴로 혀를 아랫입술에 날름 붙였다 떼어내며 하선우는 말했다.

“대단하시네요.”

“이 집 남자들이 그런 면이 있습니다. 각자 집착하는 게 한 가지씩 있죠.”

하선우는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강주한은 문을 안으로 밀며 말했다.

“아버지는 초판 책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 집 지하실에 사람들은 금괴나 다이아몬드 같은 비자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건 없고 부서지기 직전의 책만 잔뜩 있습니다. 물론 책 한 권이 금괴만큼이나 비싸긴 하지만요.”

건물의 오래된 외관을 닮아 내부 역시 드문드문 낡아 있었다. 유럽에서 분할하여 가져왔다는 그의 말처럼 건물은 깨진 도자기를 이어 붙인 듯이 감쪽같긴 하지만 곳곳에 기워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차라리 새로 짓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한 씨는요?”

“글쎄요.”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그는 말했다.

“그림을 좋아하긴 하지만 갖고 싶은 그림은 대부분 미술관 소장이라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작으로 만족 중이죠.”

“솔직히 좀 의외네요.”

“모작으로 만족하는 게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강주한은 말했다.

“실은 만족 못합니다. 모작으로는 진품의 감동을 느낄 수 없더군요. 그런 걸 보면 가짜가 진품의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닙니다. 공산품에 불과하니 불태우거나 찢어버려도 아깝지 않고요.”

입술을 당겨 웃으며 하선우는 손가락 끝으로 살살 턱을 긁었다. 그러나 적당히 유쾌해진 그의 기분은 강주한의 눈을 본 뒤로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하실로 가죠. 강주한은 시선을 낮추며 말했다.

부호의 집치고는 내부장식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강주한이 머무는 집무실과 이어진 별관이 훨씬 더 호화로울 정도였다. 적막한 복도로 낙일이 은은하게 비쳐들었다. 창밖으로 풍성한 가지를 늘어트린 나무의 잎사귀가 미풍에 한들한들 나부낄 때마다, 건물 안으로 스며든 나무의 그림자도 함께 흔들거렸다.

그들은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지하는 지상과 달리 아홉 개의 룸이 넓은 홀을 둥글게 에워싸고, 여러 개의 기둥이 지상을 떠받친 구조였다. 1층과 실외의 온화한 분위기는 그저 눈가림에 불과할 정도로 지하실에는 독특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홉 개의 룸마다 문의 형태가 조금씩 달랐다. 균질하지 않은, 각기 다른 기괴한 개성이 있었다. 마치 총수 일가의 비밀을 목격했지만, 결코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받은 증인들 같았다. 강주한이 문을 연 곳은 우측 세 번째 방이었다.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창고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잘 안 쓰는 방인가 봐요.”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가구 특유의 탁한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좀 넘었죠.”

“여기가 주한 씨 방이었어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벽 옆에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 근처에 하선우를 앉히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하선우는 그의 방이 왜 창고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지 알 것 같았다. 벽은 암회색이었으며, 창문이 없어 인공광에 의지해야 했다. 아무리 방향제를 뿌리고 환기를 시켜도 큼큼한 지하의 냄새를 덮진 못했다. 한쪽 벽면은 도서관처럼 서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을 인간미 없는 곳으로 변질시킨 원인 중 하나는 창문 대신 벽을 장악한 그림들이었다. 원본이 대부분 미술관 소장이라 모작으로 만족한다던 화가의 작품인 모양이었다. 하선우는 기이하고도 악랄하기까지 한, 기형적인 인체의 묘사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림들은 잔인하고, 파괴적인 동시에 믿을 수 없게도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다.

강주한은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그들의 앞으로 바퀴가 달린 이동 트레이를 끌고 나타났다. 하선우는 그제야 그림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한쪽에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술을 내려놓고 사라지는 직원들의 뒷모습이 걸렸다. 이곳에 온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 그림들이 갖고 싶다고 했던 작품의 모작인가 보죠?”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살된 육체 같은 그림을 보고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아 하선우는 시선을 테이블에 놓고는 다시 말했다.

“그림이…… 보통이 아니네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우의 눈길이 연속된 세 개의 그림에 가 닿았다. 흰 의자에 앉아 있는, 그나마 사람의 형체로 보이는 회화였다.

“무슨 그림이에요? 표현주의?”

화맹을 벗어났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하선우는 말했다.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검은 3부작입니다. 죽은 연인을 위한 헌정 작품이죠.”

“애틋하네요.”

풀썩 웃은 강주한이 물었다.

“어디 아픕니까?”

“예? 아뇨.”

“왜 자꾸 땀을 흘립니까.”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하선우는 이마의 진땀을 티슈로 닦아내며 웃었다.

“근데 우리 저녁 대신 술 마셔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선우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른 그는 평이하게 물었다.

“하선우 씨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겁니까?”

결코 따지는 어조는 아니었지만,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질문 자체가 이상스러웠다.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하선우의 본능적인 감은 이미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노란 경고등을 깜빡거렸다. 강주한은 뜸들이지 않고 말했다.

“월요일에 세원일보에서 기사가 나간다는군요.”

술을 희석해 마시려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던 하선우가 멈칫대는 것을 보며, 강주한은 입안으로 위스키를 털어 넣었다. 한 번 더 채우고 이번에는 천천히 비워냈다.

“성일금형 사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다고 들었습니다. 대략적인 기사 방향 또한 전해 들었습니다. 저녁에는 종합편성 채널 두 곳에서 뉴스로 방영되고요.”

하선우는 얼음을 집던 집게를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 갔던 건…….”

“가긴 갔군요.”

“네.”

하선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퇴근하기 전에 도일 선배와 같이 있는데 강태한 씨에게 전화가 왔어요. 도일 형 전화로요. 강태한 씨가 도일 형에게 엉뚱한 소리를 할까 싶어서 따라갔던 거예요. 신문기자가 와 있는 건 몰랐습니다. 여기서 제가 뭘 더 해명해야 합니까?”

당황스러운 한편, 이 상황이 우습기까지 했다.

“그 상황을 만든 건 주한 씨 동생이지 제가 아닙니다. 추궁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요. 저는…… 그 상황에 오히려 휩쓸린 거지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선우는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얼음을 잔뜩 쏟아 넣었는데도 강하게 쏘는 알코올의 맛을 누르진 못했다.

“그날 일에 대해 얘기 안 한 건…… 저도 머리가 복잡해서 그랬어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간에 나왔어요. 그 자리에선 누구의 편도 안 들었다고요.”

“편을 들고는 싶었다는 얘기군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떼어 내며 하선우는 말했다.

“예. 솔직히 말해서 그랬어요. 왜냐고요? 도일 형에게는 그게 전부였거든요. 그거 하나 편들어주지 못하는 내가 참 비겁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주한 씨한테도 실망했습니다. 주한 씨는 사회지도층 운운하면서 정작 해결할 의지가 하나도 없었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강주한은 허리를 폈다. 사각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던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멀어졌다. 강주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하선우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피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반듯한 인격과 높은 지능을 기반으로 한 순수한 오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하선우가 자신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하선우는 현상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만 대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호하고 부조리한 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독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강주한은 그에게 어쩔 수 없는 불의도 있음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해야 하는 일을 의무감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강주한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성일금형과 엘텍하이스코 간의 특허 시비는 이미 오래전에 종결된 사건임을 하선우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엘텍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특허청과 법원에 외압을 넣은 일이 없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한쪽 세력이 지나치게 약하면 오히려 이분법적 편견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하선우는 이미 문도일을 절대 악에 맞서 패배한 피해자로 여기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강주한에겐 하선우를 안심시키기 위해 문도일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마음도 없었다.

“내사 요청을 한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말이 더……, 더 이해가 안 돼요.”

더는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하선우는 이를 으득 깨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빠르게 오르내리는 하선우의 가슴팍을 바라보며 강주한은 생각에 빠졌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하선우. 뒤늦게 하이에나 떼들의 기척을 느끼지만 달아나기에는 늦어버렸다.

그는 결국 세상풍파의 해일에 노예처럼 끌려 다니다, 털 코트 입은 호색한 하이에나의 손아귀에 매달려 꼭두각시놀음을 한다. 하선우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자신을 경계하는 그에게 성욕이 일었다. 술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고 싶어 손끝이 떨려왔다. 그는 하선우를 뚫어버릴 듯 직시했다.

“선우 씨.”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말했다.

“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절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들의 진심을 모두 헤아려야 한다면 길을 잃고 말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수많은 진심 속에서 회사의 이익을 고려해 취사선택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게 비정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게 나니까.”

하선우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것을 빼앗을 권리는 없어요.”

“어차피 월요일이 되면 대한민국의 온갖 증오가 내게 퍼부어질 겁니다. 거기에 하선우 씨도 보태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하선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자신을 보는 강주한의 눈빛에는 자신을 믿어달라는 부탁이나, 신뢰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강주한은 냉랭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겁니다. 선우 씨가 내게 아무런 물음표도 띄우지 않고, 나를 이대로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주한 씨.”

하선우는 잔을 꽉 쥐었다. 강주한은 두 눈을 빛냈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가 궁금합니다. 그런데 자꾸 감추면 호기심이 의심이 되는 거라고요. 이제 보니…….”

숨을 씨근거리던 하선우는 긴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주한 씨가 왜 자꾸 우회하고 감추려 했는지 알 것 같네요. 차라리 강태한은 솔직하기라도 했죠.”

하선우의 말에 강주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요. 나는 비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나 역시 하선우 씨 같은 사람들에게 차별받는, 외부로부터 오해받고 낙인찍힌 인간이라는 걸.”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을 마친 그는 가슴팍을 뒤적거려 담배를 찾았다. 불을 붙여 고요한 분노의 숨을 몇 번이고 뱉어낸다. 그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자, 갈라져 터진 허물 사이로 원색적인 감정이 드러난다. 하선우는 그 속에서 지글지글거리는 핏덩이 같은 분노를 발견했다. 그는 빠르게 담배를 피운 뒤 테이블에 비벼 껐다.

“왜 이렇게 서로 각을 세우며 복잡한 연애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야기가 나온 거 솔직한 게 낫겠군요. 나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웃었다.

“선우 씨가 내게 따듯한 면을 기대했다면 유감이지만 미안합니다. 솔직하게 나는 극단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를 능가하는 그런 나쁜 놈이 될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여기는 고독하고 외로워서…… 내 편은 아무도 없습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하선우를 쳐다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우 씨가 내 허물을 좀 눈감아줬으면 했나 보죠. 내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비겁하게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강주한은 비식 웃었다. 단단한 껍질 안에 몸을 숨기는 갑충벌레처럼 등을 굽히며 그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우리 계속 싸우기만 하겠어요. 내 인간성을 의심하고 싶다면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가 줘요. 내 쓰레기 같은 인간성을 회의하며 ……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들어보게. 이런 식이면 미리 적응해둬야 할 것 같으니까.”

강주한은 그답지 않게 비굴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감정을 감추고 딱딱한 무표정의 외피를 뒤집어쓴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이것 또한 의도를 숨긴 채 그가 자신에게 내민 카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제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그에게 화가 치미는 동시에 애틋한 심정이 되었다.

“왜 그런 식으로 얘기하십니까?”

강주한은 말없이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는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내 옆을 떠나지 말라는 겁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런 말을 하는 강주한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 * *

하선우는 생각했다. 강주한은 확실히 교활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이중인격도 아니었고 카드를 뒤집듯 다른 성격을 연기하는 유형도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그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진짜 진실은 강주한이 거짓말한 적은 없다는 데 있었다. 그는 그저 하선우가 자신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면을 ‘발견’하게 했을 뿐이다.

그는 사령부의 지휘관처럼 강인하고, 시선을 사로잡으며, 자로 잰 듯 매사에 정확하여 때로는 오만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빛 속의 사내였다. 그러나 하선우가 모르고 있던 반쪽짜리 진실은 빛 너머 그늘진 곳에서 늘 공존했다.

조응調應.

조응은 눈이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에 차차 적응하는 기능을 뜻한다. 밝은 곳에서 그의 좋은 면만 보았던 눈이 어둠이 찾아오자 그 속에 웅크려 있던 강주한을 조응하게 된 셈이다. 손가락 한 마디 깊이의 속도 들여다볼 수 없는 검은 수심 너머로. 어쩌면 강주한은 항상 자신을 발견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때, 그날처럼.

거슬리는 통증이 하반신을 욱신욱신 조였다. 그는 증기처럼 열이 잔뜩 묻어 나오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출근 시간은 이미 훌쩍 넘었고 휴대폰의 배터리는 모조리 방전되어 있었다. 그는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지만 간신히 충전단자를 휴대폰과 연결했다.

새벽녘부터 눈앞에 열이 몰리고 몸이 축축 늘어진다 싶더니, 차를 몰고 서울을 빠져나올 때쯤 되자 컨디션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눈앞에서 끈적거리는 거대한 실타래가 비비적거리며 제 몸을 꼬아댔다. 어릴 적, 크게 몸살을 앓았을 때와 심장질환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중에 보았던 혐오스러운 이미지였다. 무의식이 어떤 기저에서 그 따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죽기 직전까지 아플 때면 늘 눈앞에서 어른대던 환상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몇 번이나 차를 멈춰 세우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요금소를 지날 즘에는 귀에서 피이- 이명이 들리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국도로 접어든 뒤에야 하선우는 차를 세우고 인적이 드문 도로변에서 몇 번이나 속을 게워냈다. 가다 세우고 가다 세우기를 반복한 끝에 그는 결국 마지막으로 속을 비운 도로변 공터에서 쉬었다 가기로 결심했다.

원심 분리기에서 몸이 끝없이 돌려지는 느낌이었다. 회전의 속도에는 한계가 없고 자신은 그 속에서 끝없이 고통받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분리된 육체가 성분의 비중에 따라 여러 물질로 나누어지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하선우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이 나이에 아파서 엉엉 우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워 킬킬대기도 했다. 이 모든 게 다 강주한 때문이었다.

금, 토, 일……. 그리고 오늘 새벽녘까지도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진 것처럼 섹스를 해댔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게걸스럽게 몰아붙이는 짐승 같은 섹스였다. 아니, 어떤 짐승도 그렇게 추저분하게 흘레붙지는 않을 것이다. 하선우는 욕설을 짓씹으며 흠뻑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가, 이내 손을 내려뜨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힘이 없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쇠약한 노파가 된 심정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몽롱한 시야에 어룽진 휴대폰 배터리의 충전 정도는 1% 남짓. 그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전화가 울렸다. 문도일이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그는 다짜고짜 윽박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한결 조심스러워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일 있어?

“가는 중이에요.”

-너 어딘데. 목소리가 왜 그래?

순식간에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염려 가득한 문도일의 목소리에 지글거리던 머리의 열이 한순간 사라진 것만 같았다. 하선우는 잔뜩 찢어진 입술을 혀로 축였다.

-몸살 났어? 어디 안 좋아? 많이 아픈 목소리인데.

“…….”

-지금 어디야?

“……회사 근처요.”

하선우는 그제야 끔찍하게 갈라진 제 목소리를 인식했다.

-아파서 쉬다 오려고 차 세운 거?

괜히 서러운 마음에 입술을 씰룩거리다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릴 리 없는 대답을 멋대로 해석한 문도일이 물었다.

-그래서 어딘데?

“해장국집…… 옆에 공터요.”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하선우는 차마 괜찮다는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라붙은 혀를 가까스로 놀리며 말을 이어 나가기엔 그의 상태가 최악이었다. 전화가 끊어지는 것을 어렴풋이 들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은 그는 열에 들뜬 긴 숨을 내쉬었다.

진땀에 전 몸에 시트가 들러붙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어깨를 잘근거렸다. 성기 주위로 끈기 있게 달라붙은 장벽을 자근거리며 그는 감질나게 추어올렸다. 하선우는 허겁지겁 엉덩이에 힘을 주어 되밀었다. 그러자 남자가 엉덩이의 양 볼기를 벌리며 단박에 깊게 쑤셔 넣었다. 하필이면 박혀 든 부위가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스팟이었다.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하선우는 숨을 멈추었다. 경직된 몸에서 성기를 반쯤 뽑아낸 남자가 다시 한 번 끝까지 찔러 넣었다. 하선우는 시트를 힘주어 구겨 잡은 채, 숨죽여 흐느끼며 몸을 벌벌 떨었다.

벌써 사흘째였다. 한바탕 퍼부었던 금요일을 넘고 소강상태였던 토요일을 지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일요일을 맞이했다. 강주한은 몇 번이나 하선우의 몸을 찾았고 진력내는 육체를 탐하고 또 탐했다.

하선우를 일으킨 뒤, 다리를 활짝 벌려 무릎을 세우게 한 그가 다물린 구멍에 귀두를 맞추었다. 나슨하게 죄는 입구에 귀두를 맞비비는 것만으로도 등에서 땀이 샘솟았다. 학학거리며 단내 나는 숨을 쏟던 하선우의 입에서 교성이 터져 나왔다. 미처 의식할 새도 없이 파고든 성기가 곧바로 전립선에 가 닿자,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강주한의 커다란 손바닥이 소름으로 까슬하게 일어난 하선우의 살갗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단순한 손길에도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하선우는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하, 아……, 으흣, 주, 주한……씨, 그, 그만……!”

그대로 깊게, 더 안쪽으로, 구불거리는 내벽을 곧게 밀어젖히며 한계까지 파고들었다. 구멍 안에 잔뜩 짜 넣은 윤활제와 강주한의 뜨거운 성기, 온갖 애액이 한데 뒤섞여 짓찧어지는 감각이 적나라하고도 섬뜩했다.

하선우의 옆구리를 억세게 움켜쥔 강주한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허리를 추어올리기 시작했다. 주름 하나 없을 만큼 팽팽히 확장된 구멍 속으로 기둥을 욱여넣으면 몸속 깊은 곳에서 뛰는 맥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맥동을 따라 구멍을 조이며, 쾌감을 쫓아 하선우는 정신없이 신음했다.

“조… 좋아. 죽, 죽을… 하아, ……아.”

과민하게 개발된 전립선을 귀두가 파고들 때마다 아랫배가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혈관이 돋아난 기둥이 장벽을 헤치고 들어올 때마다 배 속이 지져지는 느낌이었다. 문지르듯 마찰하던 강주한은 점점 더 거칠어져 우악스러워졌다. 하선우의 몸을 아래로 잡아당기며 매섭게 허리를 쳐올리자,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애걸조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귀두가 내벽을 세게 긁고 지나갈 때마다 하선우의 성기 끄트머리에서 불투명한 애액이 뚜욱뚜욱 떨어져 내렸다. 난폭하게 맞비벼지는 바람에 구멍에서 고통스러운 열감이 피어올랐다. 괴로워 견딜 수가 없는데도, 강하게 박혀 들어오는 끔찍한 느낌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정을 끝낸 뒤 힘을 잃고 허물어진 하선우는 자신의 허리를 세우고 다리의 각도를 한계에 이를 때까지 벌리는 강주한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인상을 쓰며 무릎을 좁혔지만 강주한은 또다시 다리를 수평이 될 때까지 벌렸다. 그리고 빠듯하게 움츠러든 구멍 속으로 좆을 수직으로 끼워 넣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내벽이 온통 질크러지는 감각에 하선우의 허벅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 하, 읏, ……윽!”

옆구리와 허리를 잡은 손아귀가 악착스러워지자, 하선우는 고정된 자세 그대로 강주한을 일방적으로 받아내야 했다. 사정 후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단전에 고이는 쾌감에 반쯤 발기한 성기 끝에서 투명한 전립선액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내장 깊숙한 곳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강주한이 민감한 그곳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용암처럼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목이 메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하선우가 울부짖으며 강주한을 껴안은 순간, 그 역시 절정에 도달했다. 오랜 사정 뒤에 강주한은 하선우의 몸속에서 자신의 성기를 빼냈다. 뜨겁던 체액이 빠져나가자, 배 속의 열기를 일순 빼앗겨버린 기묘한 상실감이 엄습했다. 울컥거리며 쏟아지는 체액이 양수, 또는 처녀 혈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배덕감이었다.

허벅지를 잔뜩 적신 애액은 침구와 강주한의 아랫배 위로도 떨어졌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욕망에 또다시 휩쓸려버린 강주한은 하선우를 침대에 바로 눕혔다. 침대는 이미 그들이 흘린 땀과 정액, 애액, 그리고 타액으로 젖어 있었다. 흠뻑 젖은 강주한의 손바닥이 엉덩이 사이를 더듬자 발름거리는 구멍은 손가락을 받아먹었다. 속을 헤집는 그의 두툼한 손가락 마디에 하선우는 금세 흥분에 젖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가 느끼는 쾌감은 어지럼증으로 변했다. 뱃멀미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미세한 진동만으로도 울렁거렸다. 명치는 갑갑했고, 머리는 열로 뜨거웠으며 몸살을 앓는 환자처럼 전신이 오한으로 달달 떨렸다. 차라리 쾌감을 주는 섹스보다 온몸을 섬세하게 핥아주고 입 맞춰주는 다정함이 그리울 정도였다. 그러자 강주한이 머리카락 사이로 긴 손가락을 집어넣어, 한 올, 한 올 정답게 입 맞추기 시작했다. 달콤한 맛이 감도는 그의 애틋한 키스가 마치 꿈만 같아, 하선우는 결코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그 소원을 빈 순간, 꿈에서 빠져나오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마가 묵직했다. 그리고 축축했다. 하선우는 손을 더듬더듬 뻗어 얼굴의 반을 뒤덮은 미지근한 물수건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희미한 빛이 감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는 지금이 한밤중이며, 자신이 꽤 아팠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일산으로 출근하던 중 도로변에서 문도일과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후의 기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데리러 갈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한숨을 쉰 그는 간신히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스탠드를 켜자 포장이 벗겨진 해열제와 몸살 감기약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에는 없지만 누군가 약을 챙겨 먹인 모양이었다. 하선우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약의 영향인지 아니면 지금껏 이마를 덮고 있던 물수건 덕분인지 고열은 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어지럼증과 몸살 기운은 여전했지만, 눈앞을 아뜩하게 한 끈적거리는 실타래의 환상 같은 건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넥타이와 재킷만 간신히 벗어 근처 책상 위에 걸쳐놓았을 뿐, 출근길에 입었던 복장 그대로였다. 땀에 전 그대로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의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약을 먹인 누군가가 왜 휴대폰을 협탁 위에 챙겨놓는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는지, 그는 살짝 야속한 마음마저 들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지만 그때처럼 온종일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로 강주한이 불쑥 집에 찾아오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앓아누운 데는 강주한의 고문이 많은 부분 일조했다. 휴대전화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과 이대로 더 쉬고 싶다는 본능 속에서, 혼자만의 치열한 전쟁을 치르다 결국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에 푹 절여진 온몸이 끈적거려 씻고 싶었다.

잔뜩 허리를 숙인 채 복층의 좁은 계단을 내려오던 하선우는 난간을 붙잡고 멈추어 섰다. 1인용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문도일이 고개를 숙인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하선우의 머릿속으로 살색의 이미지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기습적으로, 선명하게.

셔츠 단추를 배꼽까지 풀어 헤치던 하선우는 순간적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꿈은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했고, 사실적이었으며 감각적이었다. 어쩌면 정말 꿈을 꾸면서 들뜬 소리를 내뱉고 강주한의 이름을 불렀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하선우는 뒷골이 서늘해졌다. 문도일과 한 집에 머물면서 도색적인 꿈을 꾼 이 현실이 차라리 또 다른 꿈이었으면 싶었다. 불행히도 문도일은 깊게 잠이 든 것 같지 않았다. 작은 인기척을 느낀 그는 가붓이 눈을 들어 올렸다.

“몸은 좀 어때?”

조금의 잠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하선우는 내심 당황하여 되물었다.

“형?”

“몸은 좀 괜찮아?”

하선우는 흐리마리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몸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네 집 비밀번호 알고 있어서 들어왔어. 낮에 네 형님께 전화드리려고 하다가…….”

중간까지 말한 문도일은 말을 흐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움츠리고 선 하선우를 위아래로 살펴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말을 멈춘 것도, 인상을 찡그리는 것도 왠지 불길해 하선우는 문도일의 눈치만 가만히 보았다. 그는 하선우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쟀다.

“여전히 뜨겁네.”

다행스러워하는 말투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흡사 취조할 이를 대하는 듯이 딱딱했다. 하선우는 그가 표정을 굳힌 이유를 속 시원히 말해줬으면 싶다가도, 영원히 아무 말도 말았으면 하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에 시달렸다. 아니, 아직도 많이 아파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생각이 머리에 들어찰 여유가 없었다. 화제를 돌리려 하선우는 물었다.

“지금 몇 시예요?”

목이 쩍쩍 갈라지며 통증을 호소했다. 그 모습을 본 문도일은 물을 컵에 따라 하선우에게 내밀었다.

“9시 43분.”

그의 예상보다는 이른 시간이었다. 하선우는 멍하니 문도일의 얼굴을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고 그가 내민 물을 받았다. 천천히 잔을 기울여 들이켠 뒤, 그는 방 안을 둘러보며 휴대폰을 찾았다.

“오늘은 불청객 없지?”

하선우는 고개를 반쯤 들어 문도일의 가슴께로 시선을 두었다. 그가 말하는 불청객의 대상이 너무도 분명했다. 마치 피부 껍질 아래로 세차게 뛰는 심장의 맥동을 문도일이 모조리 지켜보는 것 같았다. 긴 침묵 뒤,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는 과부하에 걸려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기억해냈다. 이변이 없었다면 월요일인 오늘 세원일보에서 윤동환 기자의 기사가 나갔을 것이다.

힘들게 목을 좁혀 침을 삼킨 그는 기사가 나왔는지를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만큼 몸과 마음의 상태가 여의치 않았다.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하선우는 힘들게 고개를 가로젓다, 내도록 찾았던 휴대폰을 발견했다. 휴대폰은 얌전히 뒤집어져 있었다. 문도일이 그 위에 올려둔 모양이었다.

부재중 통화는 모두 열두 통.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가 세 통, 이석이 건 전화가 두 통, 문도일로부터 두 통, 그리고 하선우 관리인으로부터 온 부재중 통화가 5통.

피곤해서 자느라 전화 못했어요. 답장을 찍어 보낸 하선우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버렸다.

문도일이 휴대폰 화면 속에 뜬 강주한의 애칭을 보았을까? 하선우의 뇌리로 아찔한 생각이 스쳤지만, 그는 그 가능성을 이내 지워버렸다. 통화연결이 된 내역도 없었고, 문도일이 강주한과 전화를 하지 않은 이상, 휴대폰 속의 ‘하선우 관리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럼에도 석연치 않은 의문은 미적지근하게 명치를 짓누르며 하선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문도일이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진짜 진실에 다가갔을지도 모른다는, 그것이 성애와 관련된 것이라는 생각들이 하선우를 지치게 했다. 그런 생각들은 하선우가 배꼽 가까이 단추를 풀어헤친 셔츠를 내려다보았을 때 더욱 확실해졌다. 그는 아랫입술 안의 점막을 아프도록 짓씹었다.

미등으로 어둡게 밝힌 실내의 빛 속에서도 몸의 상태가 확연히 드러났다. 특히 가슴팍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얼룩덜룩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입술과 치아, 손가락의 마찰이 남긴 상처는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오히려 쾌락을 위해 끈질기게 상피조직을 물고, 빨고, 흡착하고 애무한 음란한 낙서의 흔적이었다. 하선우는 미동 없이 서 있다, 한숨을 내쉬고 땀에 찌들어 역한 냄새를 풍기는 셔츠의 단추를 느리게 꿰었다.

“일단 너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몸살만은 아닌 것 같아서 네 형님께 전화드리려고 하다가.”

잠시 말을 끊은 문도일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내버려뒀다.”

문도일은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는 하선우를 마주 보고야 말겠다는 듯 걸음을 뗐다. 어깨에 손을 올린 그는 힘을 주어 하선우의 몸을 돌렸다. 하선우의 고개를 들게 한 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이마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심문하듯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내가 알면 안 되는…… 그런 일인 거냐.”

견디기 어려운 말을 꺼내는 것처럼 띄엄띄엄 물음을 던진 그는 입을 꾹 다문 하선우를 쳐다보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가 어떤 사고의 과정을 거쳐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하선우는 그의 추측을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뭐가요.”

“나쁜 꿈을 꾸는 것 같던데.”

“꿈이요?”

하선우는 문도일을 힘주어 바라보다, 벌거벗기 직전의 수치심이 엄습하자 눈을 내리깔았다.

“기억 안 나요, 형. 몸살이 심했나 보죠.”

“그래. 말하기 싫으면……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나도 아파 죽겠는 사람 붙잡고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다.”

어깨를 툭툭 두드린 그는 더는 하선우의 몸에 남은 자국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했다.

“뭐 좀 먹을 수 있겠어?”

문도일이 사근사근히 물었다. 다시 부드러워진 문도일의 얼굴에 하선우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약 한 번 더 먹고 자야 할 것 같은데. 낮에 사온 미음 있는데 데워줄게. 앉아서 기다려.”

하선우는 문도일이 죽을 데우고 자신을 위해 그것을 그릇에 담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현실 같지 않았다. 화면을 커다랗게 키운 스크린 속의 연속된 숏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스무 살 무렵의 하선우가 여자친구의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문도일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빌었던 소원을 영상으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하선우의 소원을 들어준 이가 있다면 분명 그는, 아주 짓궂고 비열한 성격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그는 미음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죽을 씹는 것도, 퉁퉁 부은 목구멍 속으로 미음을 욱여넣는 사소한 움직임에도 진력이 나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굼뜨게 죽 절반을 비워낸 그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가 가져다준 몇 가지 약을 서둘러 넘긴 하선우는 문도일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차게 솟은 땀으로 옷이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미끈거리는 해조류 속에 온몸이 갇힌 것처럼 불쾌했다. 그에게 옷을 갈아입을 만한 정신은 남아 있지 않았다.

심한 두통이 다시 몰려와 안압이 높아지고 안구에서 진물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하선우는 질금질금 눈물을 짜내고 있었다. 이마에 닿는 차가운 물수건이 유일하게 그의 숨을 트이게 했다. 하선우는 간신히 눈을 떠 문도일을 쳐다보았다. 그는 기묘한 얼굴로 하선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끈질기게 기어오르는 의혹과 애틋한 염려,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하선우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의 막이 거두어진 뒤, 맑은 시야 너머의 문도일은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자.”

“왜 그렇게…… 봐요.”

“그냥. 화가 나서 그런다.”

“……뭐가요?”

문도일은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는 듯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하선우의 눈 위로 차가운 손가락을 가져와 직접 눈을 감겨주며 말했다.

“자라.”

“…….”

“자는 거 보고 갈 테니. ……자.”

가벼운 한숨이 들려왔다. 돌개바람 같은 어지럼증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느 순간 하선우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도, 문도일이 곁에 있다는 사실도, 그를 의식하게 한 모든 사실들도 잊고 까만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운전대를 타인에게 맡기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편안하지가 않다. 그것도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연장자이고, 대학교 선배라면 그를 고용한 고용주로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게다가 두 사람은 요 며칠 동안 공적인 대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의식하면서도 발설할 수는 없는 진짜 핵심이 있었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운을 떼지도, 간을 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주 사적인 이야기였고 자칫하다간 선을 넘는 무례일 수도 있었으며, 함부로 건드렸다간 뇌관이 타올라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하선우는 불편했다. 아무 말이라도 지껄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리는 시간이 곤혹스러웠다. 그들의 침묵 속에 거추장스러운 혹이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런 기분은 하선우 혼자 일방적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감출 것이 있는 사람은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으려 최소한으로만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라디오에서는 9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가요가 흘러나왔다. 겨울 바다에 대한 노래였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8월 날씨를 생각하면 유별난 선곡이었다. 낮게 포복하듯 떠오른 태양이 눈을 아리게 하는 광채를 도로 위로 위협적으로 뿌려댔고, 선우는 맨눈으로 그것을 견디고 있었다. 알알한 복사열은 얼굴을 지지고 시큰한 햇볕에 눈은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철 지난 90년대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문득 겨울 바다의 황량한 싸늘함이 그리워졌다.

노래가 끝나고 광고가 줄곧 이어지더니 시사정보 프로그램의 3부가 이어졌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동안 방송되는 프로그램의 3부는 최근 사회 각 분야의 논쟁이 되는 다양한 현안을 당사자 인터뷰와 취재기자의 브리핑을 통해 전달하는 코너였다.

성일금형 논쟁으로 보는 특허분쟁.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한 건강한 특허제도 실현은 불가능한가? 코너의 주제를 듣는 순간 하선우는 가만히 문도일의 눈치를 살폈다.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그는 성일금형이라는 단어에 거북한 낯을 했다가, 결국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엘텍하이테크와 성일금형 간의 특허 시비 문제가 대기업의 중소기업 특허 잠식 논란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단체에서는 특허청이 중소기업의 기술관리 및 피해현황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방관만 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한편에서는 자본력을 동원한 대기업의 압력의 결과라는 횡포론도 나오고 있습니다. 김완례 기업상생 협회의 회장부터 만나보겠습니다.

인터뷰는 진행자의 질문과 인터뷰이의 주고받는 대답으로 3분가량 이어진 뒤, 취재기자의 현장 브리핑, 그리고 특허청의 공무원과의 인터뷰로 이어졌다. 그리고 엘텍의 지적재산을 관리하는 IP센터의 직원과 3분 남짓한 인터뷰로 마무리되었다. 하선우는 공무원과 IP센터 직원의 인터뷰를 들으며 생각했다. 화려한 수식을 줄이면 인터뷰의 내용은 3분이 아니라 5초면 충분할 것 같았다. 요지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코너를 마무리하는 진행자의 멘트는 날카로웠다.

특허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히 허락한다는 의미라고 하죠. 발명자의 노력으로 고안된 특허가 어느 순간부터 대기업에게만 특별히 허락된 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미명하에 전 산업을 무차별적으로 독식해온 대기업과 특허청의 침묵이 중소기업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들의 반성을 촉구해봅니다.

방송을 듣는 내내 암운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는 표정을 짓던 문도일이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최근 몇몇 미디어에서 성일금형과 엘텍하이스코 간의 특허분쟁 문제를 제법 심도 있게 다루었고, 대기업에 피해를 입었던 기타 중소기업 사건과도 연루되어 신문과 인터넷, 종합편성 채널 매체를 타고 자료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세원일보의 기사는 단순히 성일금형과 엘텍 간의 특허소송을 다룬 것이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특허분쟁을 재조명하는 도화선이 된 격이었다.

그럼에도 문도일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이렇게 방송이 나왔는데도, 이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 건 그답지 않았다. 하선우는 그의 그늘진 표정을 의식하며 말했다.

“어제도 방송에 나오던데요? 인터넷으로 봤습니다.”

“그래?”

문도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 뒤 그는 말했다.

“방송을 의식한 거겠지만 관계자가 만나자고 하더라. 근데 이런 일은 전에도 겪어봐서.”

그는 피식 웃었다. 엘텍하이스코의 상무 측에서 성일금형과의 협상을 위해 조속히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선우 역시 인터넷 기사로 그 글을 접했다. 그러나 단순히 여론을 의식해 내보낸 기사라는 걸 그들도, 문도일도, 하선우도 모두 알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하지. 소송비용을 도와주겠다는 기업가도 있었고, 상고를 고려해보라는 조언도 있었고. 근데 막상 눈앞이 닥치니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가볍게 혀를 찬 그는 주저하듯 미소를 지었다.

“사실 엘텍전자 앞에서 피켓을 들었던 지난 1년 동안, 난 반쯤은 단순 노무자가 된 심정으로 살았거든. 이제 와 다시 긴 싸움을 하려니 지쳐.”

정면을 응시하는 문도일의 얼굴을 보며 하선우는 형은 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다. 어깨에 수많은 짐을 지고 만 리 길을 걸어야 하는 문도일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것이 그에겐 몹시 부끄러운 위선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비정함을 인정하라는 강주한의 말을 듣고 보니, 이 재판이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했다.

“윤 기자의 기사가 영향력이 크긴 크네요.”

“아니면 다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

하선우는 고개를 돌려 문도일을 쳐다보았다.

“이런 해묵은 문제가 왜 갑자기 주목을 받겠어? 분위기를 조장해서 판을 만들어보겠다는 거지. 특허 시시비비는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거야. 싸움도 호각지세를 이뤄야 버틸 수가 있는 법이고, 나는 그 판에서 언제 떨어져 나와도 상관없어. 애초에 기대도 없었고. 하지만 너는? 너는 괜찮은 거냐.”

돌연 자신을 겨누는 질문에 하선우는 방심하여 되물었다.

“예?”

“듣기로는 특종기사를 준다고 하던데.”

“예……?”

“윤동환 기자가 성일금형의 특허 문제를 기사로 다룬 건 그 사람이 특별히 이 사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더라. 어째선지 관심이 과하게 모이긴 했지만 그것도 애초에 윤 기자가 크게 염두에 둔 부분은 아니었을 거야.”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를 바라보던 그가 룸미러를 통해 하선우의 표정을 흘긋 확인한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강태한이 윤 기자에게 넘길 특종이 있다고 하던데.”

하선우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요?”

문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선우의 의식 속에서 기억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튀어나왔다. 문도일과 함께 강태한을 만났던 밤이었다.

하선우를 암덩어리 운운하며 도발하던 강태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수상해서, 신문고 노릇을 하는 이유를 따져 물었었다.

그때 그가 했던 말이 무엇이던가. 그는 문도일 선에서 일을 끝낼 생각이 없으며, 윤 기자에게 넘길 진짜 특종은 따로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강주한에게 고자질할 배짱이 없으면 자신의 잇속을 걱정하지 말라던 퉁명스럽던 그의 말이 뒤늦게 하선우의 귓속에 염증 같은 간지러움을 남겼다.

“그래? 난 네가 알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뭘 알아요.”

“강태한이 순수한 의도로 접근했을 리가 없잖아.”

문도일은 지금 주변에 일어나는 들불이 하선우의 무엇을 태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선우에게 주었던 짧은 시선을 도로 위로 돌리며 그는 말했다.

“두 사람 친한 거 아니지?”

“…….”

“강태한이 인생 선배로 너를 의지하게 됐다는 말도 꾸며낸 거고.”

마지막 말은 거의 단정하는 투였다. 하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스스로 결론을 내린 문도일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날 분위기가 이상해서 눈치챘어. 너는 뭔가를 감추고 있었고, 강태한은 그걸 조롱했지. 내 말이 틀리냐.”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문도일은 가슴 깊은 곳에서 거칠게 긁어낸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는 완강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주한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거냐?”

문도일은 하선우가 최소한의 반응을 보일 때까지 꿈쩍 않고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가 하선우로부터 발견한 반응은 그가 예상한 오차범위 밖에 있었다. 하선우는 도리어 문도일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약점이라뇨.”

문도일은 숨을 몰아쉬었다.

“너를.”

“…….”

문도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선우의 얼굴에서 단서가 될 만한 흔적을 찾지만, 이내 그의 얼굴에도 하선우와 같은 혼란이 떠오른다. 이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를 마찰시키는 기분이 든 탓이었다. 하선우는 눈을 부릅뜨며 문도일을 직시했다. 그는 더는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다는 듯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선우는 그가 말하는 ‘약점’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 것 같았다.

강주한과 하선우가 성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에는 어느 정도 다가갔지만, 결론만 보면 그의 추측은 완전히 왜곡되어 있었다. 문도일은 강주한과 하선우가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자발이 아닌 강압적으로 이루어졌으리라 믿었다.

거북한 눈빛, 염려 가득한 표정, 언뜻언뜻 그의 얼굴 위로 피어오르는 적개심을 통해 하선우는 알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강주한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사납게 변하는 그의 표정이 하선우의 추측을 부연했다. 하선우가 강주한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자신이 동성애자일 거라는 생각은 못할 만큼 문도일의 사고는 한 방향으로만 열려 있었다.

하선우는 오래도록 문도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 좋아해요.”

사고의 회로가 툭 끊겼다. 말을 내뱉은 순간, 마비가 온 것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선우의 변명 아닌 변명은, 상황에 어긋맞은 것 같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 전말을 아우르는 핵심이었다. 문도일은 하선우의 오피스텔에서 강주한과 마주쳤을 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을 떠올렸다. 하선우를 강압적으로 다루던 강주한의 행동, 문 너머 들려오던 의미심장한 버둥거림, 그리고 며칠 전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히려다 보게 된 거친 애무의 흔적들. 하선우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려 했고, 강태한은 그것을 비웃었다. 아니,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하선우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색해졌다. 결국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반응을 내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선우는 두 사람 사이로 고이는 무거운 분위기를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문도일에게 이런 식으로 커밍아웃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만회할 수 없는 실수였다.

* * *

하선우는 화면을 아래로 움직이며 기사를 끝까지 읽어 내렸다. 윤동환 기자를 닮아 격렬하고 도발적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기사의 논조는 차분하고 친절한 편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지난 7년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특허 소송을 당한 회사는 엘텍전자였으며, 세 번째로 많은 소송을 건 회사 또한 엘텍전자였다고 한다.

특허 소송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따르지만, 소송에서 패소한다면 더더욱 문제가 되는데 한 번 패소를 당하면 관련 소송에서도 패소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소송비용 부담은 물론이고 해당 제품을 판매할 수 없는 극단적인 짐을 지게 될 수도 있다. (일례로 블랙베리 스마트폰을 개발한 리서치 인 모션은(RIM) 10년간 해당 제품을 판매할 수 없다는 판결로 인해 6억 달러가 넘는 배상금을 지급한 뒤에야 특허소송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경우를 대비해 엘텍그룹에서는 8년 전 설립한 IP센터를 통해 국내외의 특허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 강주한 전무의 취임 후로는 그런 움직임이 더욱더 본격화되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었다.

문제는 해외에서는 특허 분쟁에 시달리며 피해자임을 호소하는 엘텍이, 국내에서는 특허청의 묵인하에 중소기업을 상대로 특허 약탈자 노릇을 하며 갑질을 한다는 것이다.

기사는 중소기업인 성일금형이 대기업인 엘텍하이스코와 벌인 지루한 법정 공방에 대한 사례를 자세히 전했다. 사회면의 5페이지, 그것도 컬러로 인쇄될 만큼 주목도가 높은 지면에 할당된 장문의 기사였다.

하선우는 대문짝만 하게 실린 표제 밑으로 줄줄이 이어진 소제목들을 한 번 더 훑어보았다. ‘특허 괴물에 시달리던 엘텍, 국내에선 중소기업 특허 사냥’, ‘대기업의 계열사 확장은 중소기업의 사업영토 갉아먹기로’, ‘엘텍하이스코의 최대 주주? 강주한과 강제란’, ‘보고도 모른 척하는 특허청에 벙어리 냉가슴 앓는 중소기업’. 기사의 한 줄 한 줄이 대한민국의 공분을 살 만한 내용이었다.

월요일에 기사가 나온 뒤 벌써 나흘이 흘렀지만, 하선우는 일부러 기사를 찾아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판단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유보이자 체념이었는데, 정작 하선우에게 기사를 읽어보라고 보낸 사람은 당사자인 강주한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을 미화해서 보여줄 마음이 없는지 직접 기사를 링크로 걸어 문자로 보내기까지 했다.

메시지를 전한 그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이런 주제의 통화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속에서 내분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질 새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석의 호출에 대표이사실의 문을 열었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하선우를 발견한 그가 테이블 앞의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그의 통화를 들어보니 특허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 그렇죠. 아직 울산 전지 공장 가동도 안 됐는데 로열티 산출방식 얘기를 꺼내는 건 좀……. 하하, 제가 좀 속 보였죠. 시스템 파워팩에 저희 NnG 기술이 들어간다니 자랑스럽기도 하고 거는 기대가 워낙 커서. 하하하.”

환한 웃음과는 달리 씁쓸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아부조의 통화를 이어 나가던 그가 마침내 전화를 끊었다. 이석을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철제 의자에 앉아 하선우는 그의 명함첩 속에 든 명함 한 장을 보았다. IP센터 관리자인 장문혁 실장이었다. 엘텍그룹 내 특허관리를 통솔하는 부서였다.

“특허관리 부서? 어떻게 알았어?”

“계약서 쓸 때 만났잖아.”

“계약서?”

“엘벡스랑 특허제휴 맺었잖아. 그때 주도했던 게 장문혁 실장이었거든.”

“아… 그 이중계약?”

“야, 말은 바로 해라. 이중계약은 아니지. 엘텍전자 외 엘텍의 다른 계열사에게도 특허 실시권 사용을 허가한다는 특별조항을 넣은 거지.”

단순히 서류 차원이라지만, 엘텍의 기업 두 곳을 대상으로 특허 실시권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엘텍전자와 엘벡스, 두 기업은 모두 엘텍그룹에 속하지만, 계열 분리가 된 완전히 다른 회사라서 특허의 원소유자인 하선우의 허락하에 서류상으로 이중으로 계약했었다.

“근데 개인적으로 연락도 해?”

“야……. 내가 뭐하러. 그건 아니고 명함이 있으니까 한번 전화해본 거지.”

이석은 찔끔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엘텍전자 덕분에 좀 승승장구했대도 대기업은 대기업인 것 같아서. 도일이 일도 있고 다시 확인이나 해보자 싶었지.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 로열티를 너무 적게 받았어. 고작 로열티가 1.03%가 말이 되냐?”

“계약할 때 2억 받았잖아.”

“지금 권리금이 문제야? 로열티를 한 2%대로 올렸어야 했는데. 그때 내가 너무 저자세로 나갔어.”

팔짱을 낀 그가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운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하선우는 이석의 배부른 투정을 보며 올챙이 시절의 추억을 회고했다. 그 당시의 특허는 창고에 쌓이는 재고처럼 한번 잠들면 언제 깰지 모르는 허울뿐인 명예였다. 지금 조건의 절반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누군가 NnG에 특허권 양도를 요구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은 기꺼이 특허를 넘겼을 터였다.

“몸은 좀 어때? 그 컨디션으로 홍콩 다녀올 수 있겠어?”

“일찍도 물어본다.”

“선우야, 그래도 내가 너 아팠던 동안 어음 만기며, 결제며 일단 다 해결해뒀어. 신경 쓰지 말고 홍콩 다녀와.”

“이사님이 고생하는 거야 내가 제일 잘 알지.”

“넌 절반밖에 모른다. 나도 가끔은 내 위에 상사가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철제 의자가 삐걱댈 정도로 힘주어 등받이에 기댄 하선우는 그의 말에 공감하며 웃음을 흘렸다.

“도일이도 부도나고 마음 놓은 게 유일하게 그거 하나라더라. 이제는 밑에서 올라오는 서류 결재 안 해도 되는 거.”

한숨을 내쉬던 그는 돌연 생각났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너 도일이랑 싸웠어?”

“아니? ……그건 갑자기 왜.”

“근데 요즘 왜 그래? 너 요즘 도일이 피해 다니는 것 같던데.”

이석의 장점은 문제점을 발견하면 우회하는 법 없이 그 자리에서 직구를 날린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직구의 대상이 되면 그의 장점은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단점이 된다. 사리에는 밝으나 호기심이 과한 나머지, 눈치 없이 굴기도 했다.

“피해 다니는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출퇴근길 카풀하다 보니 선배와 신경전이 있었어. 우리 둘 사이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마.”

이석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거리를 카풀 문제로 일어난 조잔한 신경전 정도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좁은 차 안에서 일어나는 은근한 알력 다툼에는 끼고 싶지 않은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선우에게 현실은 출퇴근길 카풀이라는 알량한 혐의를 뒤집어씌울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그는 한 시간 남짓 밀폐된 차 안에서 문도일과 어둠 속을 달려야 했다. 한낮의 태양보다도 한밤의 어둠이 자신을 훨씬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암막 같은 밤이 내리자 자동차 안은 마치 고해성사를 위한 고해소의 분위기를 풍겼다. 문도일은 묵묵히 운전할 뿐이었지만, 하선우의 눈에는 그가 어둠 속에서 몸집을 불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요금소를 지날 때쯤 문도일이 말을 꺼냈다.

“내일은 회사 안 나오지?”

“예. 내일은 울산 가요. 시스템 파워팩 양산 공장 착공식 참관이라 울산에는 하루만 있어요.”

“월요일에 홍콩 출국이랬지? 한참 뒤에나 얼굴 보겠네.”

“그렇겠죠.”

그는 인천공항을 통해 토요일에 출국할 예정이지만, 회사에는 월요일에 출국한다고 거짓말했다. 대화의 주제가 홍콩 출장 근처를 배회하자, 하선우는 마음 한편이 들썽거렸다. 엘시스-GM 시스템 파워팩 양산 공장 착공식 참관과 홍콩 일정에 강주한 전무가 함께한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하선우는 문도일의 옆모습을 흘끗거렸다. 그는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선우는 아침처럼 제멋대로 혀가 굴러가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참이었다. 문도일은 강주한과 하선우의 관계를 확신했지만, 어디까지나 심증뿐이었다. 그가 강주한에 대해 묻는다면 하선우는 엘텍에 대한 유감을 자신과 강주한에 대한 억측으로 끌어들이지 말라는, 다소 무례한 말까지 동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문도일은 하선우가 미처 대비하지 방향으로 급소를 찔렀다.

“내가 미웠겠네.”

그는 무뚝뚝하게 툭 내뱉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다만 대답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과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하선우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문도일을 쳐다보았다.

과거의 마음을 어떻게 들여다보았을까. 하선우는 허술한 범죄소설의 범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곳에 단서를 흘리고 다녔다. 긴장을 유발하는 재주라고는 찾아보려도 찾아볼 수가 없는 범죄자. 오피스텔의 비밀번호, 그리고 유난히 문도일에게만 살갑던 태도. 그래도, 아무리 오래전에 끝난 짝사랑이라지만 이제 와 들쑤셔지는 건 달갑지 않았다.

“뭘 또 미워요. 제가 선배한테 대단한 감정 품었는지 아세요?”

무안하라고 하선우는 일부러 타박을 놓았다.

“아니었으면 다행이고.”

덤덤히 대꾸한 문도일은 룸미러로 하선우의 표정을 확인했다.

자신을 신경 쓰는 문도일의 눈빛이 미지근하게 마음에 남아 투레질하듯 입바람을 불며 그는 괜히 앞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었으면 다행이고. 그가 덧붙인 말이 은근한 세기로 하선우의 마음을 때렸다.

한때나마 그는 문도일에게 아주 대단한 감정을 품었고 희망과 자포자기로 괴로운 밤을 지새우던 시절을 보냈다.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홀로 사랑을 앓아낸 탓에 마음엔 흉까지 남았지만, 그 과거가 지워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자신의 입으로 각별했던 그때의 마음을 부정하니 입맛이 영 씁쓸했다. 그러나 이제 와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옛사랑을 홀로 쓸쓸히 꺼내어보는 것이 추억에 대한 애도의 전부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쪽팔리게 들킬 줄은 몰랐다. 하선우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했으며 문도일이 알아챈 것이 고맙고도 싫었다. 자꾸만 엄살을 부리는 제 마음을 털어버리려 하선우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손톱만큼 있던 마음도 접은 지 오래됐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문도일은 대답 대신 슬핏 웃고 말았다.

문도일은 의도치 않게 하선우의 허를 찔러 그의 마음에 부스러기처럼 남았던 미련을 탈탈 털어주었다. 마음에 답하지 못한 자신이 미웠을 거라는 남자의 말 자체가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따듯한 거절이었다.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상처를 받기보다 도리어 어수선하기만 했던 옛사랑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차는 퇴근 시간을 한참 지나 한산해진 도로 위를 내달렸고,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끊어졌다. 그러나 이전처럼 서로의 침묵을 의식하지 않은 채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적막의 빗장을 연 것은 이번에도 문도일이었다.

“강주한 만나는 거냐.”

하선우는 조용히 숨을 집어삼키며 문도일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조금 알고 지내는 사이긴 하지만 형이 오해하는 그런 건 아니에요.”

다시 단단하게 벽을 세우는 하선우를 보며 문도일은 말했다.

“두 사람 사이 놀랍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 네가 거북할 테니 두 사람 무슨 사이인지 판단하지도, 묻지도 않으마. 엘텍과 성일금형 간의 소송에 네가 끼어들 필요가 없듯이, 강주한과 너 사이에 엘텍에 대한 내 사감을 끼워 넣지는 않을게.”

“저는 형이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당황스러워요. 도일 형이 관여할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엘텍에 대한 선배의 유감은 알지만…….”

“들어봐. 실패한 사업가가 아니라, 널 아끼는 형으로서 하는 얘기다.”

하선우의 말을 자르며 문도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강주한을 편들고 있지만, 강태한은 제 형에게 유감이 있는 걸로 보여. 그날 강태한이 죽은 형수 얘기를 꺼낸 게 사실은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려고 그랬던 것 같단 말이다. 강주한이 서유임을 이용했다는 얘기도 그렇고, 제 형이 얼마나 위악적이고 수치스러운 인물인지 난생처음 보는 나에게 까발릴 이유가 없잖아. 강태한은 내가 아니라 너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문도일은 찰나의 망설임 끝에 차분하고도 강직하게 말을 이었다.

“괜한 우려라고 해도……, 내가 본 강주한에게선 어떤 인간미도 안 느껴졌어. 네가 왜 그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하선우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서.

“다치기 전에 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 * *

무겁게 울렁거리는 대기의 흐름이 눈앞에 보였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은 아스팔트를 달구었고, 90%에 육박하는 습도가 코끝을 틀어막았으며, 40도를 웃도는 온도는 온몸에서 땀을 쥐어짰다. 빌딩으로 우거진 정글 같은 도시는 공기의 밀도까지 빽빽했다. 하선우는 병든 닭처럼 골골거리며 도로 맞은편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더웠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그는 이 도시의 강박적인 촘촘함이 더욱 열을 돋우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조망권 따윈 집어 던진 도시의 빌딩들은 하나같이 성냥갑을 연상시켰다. 어디를 봐도 고층 빌딩뿐이고, 빌딩에 끼운 유리는 반짝반짝 빛을 내뿜고, 빛은 열을 만들어내고…….

나는 한갓진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자연주의자가 아닌데. 하선우는 병뚜껑을 열어 물을 마시며 턱 끝에 고인 땀을 닦아냈다.

그는 조금 전 첵랍콕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요금소를 지나 침사추이 역에서 내렸다. 강주한은 스케줄이 5시 무렵에야 끝난다고 했고 하선우는 호텔에 체크인하는 대신 기착지를 여러 군데 두어, 5시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며 여행자의 기분을 내기로 했다. NnG의 직원들이 알면 분노할 일이지만 출장의 정체는 강주한과의 여행이었고, 어제 단 하루, 울산에서의 착공식 참여가 그나마 출장의 명분을 살리는 ‘일’이었다. 얼마 전에는 병가를 냈고 지금은 휴가 삼아 여행까지 왔으니 이석이 알았다면 홍콩까지 찾아오고도 남았다.

그러나 정작 스릴 만점인 여행을 즐겨야 할 그는 울산 출장, 두 시간 동안의 기차 여행, 세 시간의 비행, 그리고 홍콩의 폭염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여독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직원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과 부탁받은 물건을 잔뜩 구매해 화물로 자신의 오피스텔에 부치고 돌아오자, 강주한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세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허유산, 비첸향, 홍콩식 프렌치토스트. 작년 홍콩에 왔을 때 김 부장이 이끄는 대로 남자 두 사람이 멋없이 끌려 다니며 입에 물고 살았던 것들이었다. 김 부장의 여행 루트를 그대로 답습하며 하선우는 침사추이와 하버시티 거리를 캐리어를 끌고 어슬렁거렸다. 그때 김 부장은 침사추이와 하버시티에 줄지어 선 거대한 명품매장들은 쳐다보지도 않더니, 짝퉁 쇼핑의 부푼 꿈을 안고 몽콕의 야시장을 찾았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쪽팔림에 시름시름 앓다 술로 쓰린 마음을 달래었다.

불과 1년 전의 일이었지만, 선우는 주변에 줄줄이 늘어선 명품매장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들을 소유하고 싶은데 갖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박탈감은 이제 그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이 거대한 상가와 땅을 소유하고,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제품을 찍어내고, 노동자들을 부품처럼 갈아 끼우고, 돈을 빨아들이며 거대한 시스템을 움직이는, 베일에 싸인 정체 모를 얼굴들이 궁금할 뿐이었다. 평화로운 세상을 거대한 자본의 밀림으로 만드는 사람들. 드높이 밀생한 빌딩숲 속에 모습을 감추고 지금 막 등을 보인 포식자의 목을 물어뜯으려 기척을 죽이는 흐릿한 얼굴들. 하선우도 그들 중 하나는 알고 있었다.

강주한이 말한 호텔은 침사추이 한복판에 자리해 있었다. 홍콩을 오가며 관광버스를 타고 지나칠 때마다 김 부장과 이석, 하선우 세 사람이 넋을 잃고 올려다보던 페닌슐라 호텔이었다. ‘ㄷ’자 형태로 지어진 호텔 위로 30층이 증축되어 독특한 외관을 갖게 된 호텔이었다. 거울처럼 빛을 차갑게 반사하는 흰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지나며 하선우는 자신이 옷차림을 점검해보았다. 로비 옆 레스토랑에서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한껏 차려입은 데 비해, 망고주스와 각종 쓰레기가 잔뜩 든 비닐봉투, 반바지와 브이넥의 후줄근한 면티, 더위에 지친 늙은 개 같은 몰골을 한 이는 자신뿐이었다. 체크인을 한 하선우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투숙객과 관광객이 뒤섞여 북적거리던 로비와 달리 복도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타는 갈증을 망고주스로 달래며 하선우는 문을 열었다. 은은하게 불을 밝힌 거실의 중앙등, 짙게 우려낸 홍차 같은 색감의 벽지와 회백색의 카펫이 깔린 바닥, 거대한 스튜디오를 연상시키는 거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선우는 거실을 천천히 가로질러 벽 한쪽에 끌고 다니던 캐리어를 내려놓았다. 엘텍전자의 대형 벽걸이 TV가 놓인 선반과 그 위에 공예품처럼 놓인 포푸리, 생화가 흐드러지게 꽂힌 화병, 객실을 컨트롤하는 패드, 오디오 시스템과 냉장고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메이드가 이미 다녀갔는지 테이블에는 파란색의 수국과 연분홍의 스프레이 카네이션으로 장식한 소담한 화병이 있고, 그 옆으로 수제 초콜릿과 주스, 그리고 각종 열대과일이 세팅되어 있었다. 소파에 앉아 상자의 포장을 벗겨낸 하선우는 동그란 초콜릿을 입안에 넣어 천천히 혀로 굴려 녹여 먹었다. 너무 달았다.

샤워를 할까. 한낮에 흘린 땀을 떠올린 그는 제 몸에서 나는 냄새를 의식하며 셔츠를 당겨 코를 댔다. 약간 시큼한 냄새가 묻어났지만 악취는 아니었다. 그는 한가하게 테이블을 소복이 장식한 꽃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만 닿아도 짓무를 것 같은 가냘픈 꽃잎을 지닌 연분홍색 카네이션을 뽑아 그 풍성한 결속에 코끝을 파묻었다. 쌉싸래한 풀냄새가 났다.

“마음에 들어요?”

하선우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등받이에 뒷머리를 거의 파묻으며 고개를 꺾었다. 강주한이 거꾸로 보였다. 그는 보우 타이를 고쳐 메다 허리를 숙였다. 하선우의 얼굴 절반을 덮은 꽃을 치워버리는 대신 그는 질척하게 입을 벌려 살짝 드러난 아랫입술만을 간질이듯 빨았다. 가벼웠던 입맞춤은 점점 더 농밀해져 강주한은 덧그리듯 혀끝을 움직여 더운 숨을 내쉬는 하선우의 입술 속으로 잔뜩 밀어 넣고 서로의 혀를 얽었다. 굶주린 사람처럼 하선우는 강주한의 뒷목을 둘러 안아 자신에게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난 뒤에 꽃잎이 온통 짓뭉개져 있었다.

하선우는 가슴을 들썩이며 입술에 들러붙은 쓰디쓴 꽃잎을 떼어냈다. 열렬했던 키스의 여운이 머릿속을 탁하게 흐려놓았다. 강주한은 입가에 들러붙은 꽃잎을 치아로 긁어모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삼켰다. 그는 하선우의 얼굴을 손아귀로 잡아 고정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윈 흔적의 유무를 날카롭게 살펴보았다.

“아팠다더니.”

“덕분에요.”

“나도 잘 지냈습니다. 덕분에.”

하선우는 강직하게 턱을 굳히며 저를 거꾸로 내려다보는 강주한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시비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난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시비를 그대로 받아주겠다는 듯이 진지하게 수긍하면서도, 만용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입술에 꾹 입맞춤을 한 뒤 떨어져 나갔다.

그는 하선우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보우 타이를 다시 메는 강주한의 눈빛은 조금도 친절하지 않았다. 하선우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 내리던 시선이 다시 얼굴을 향했다.

“하선우 씨는 내가 많이 편해졌군요.”

그는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건조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각이 선 검은 슈트 차림에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손목에는 검은 메탈 시계를 차고 있었다. 긴 다리를 꼰 분위기는 어딘가 권태롭기까지 했다. 그에 비해 하선우는 아이보리색 면 반바지와 브이넥의 티셔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언제는 예뻐해달라더니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가 봅니다. 가만 보면 아양 떠는 건 오로지 내 몫인 것만 같단 말이죠. 사람 서운하게.”

강주한은 조금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는 몸을 일으켜 하선우에게 다가왔다.

“아니면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니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나.”

여전히 대꾸를 않는 하선우에게 화가 난 얼굴로 그는 말했다.

“키스할 때는 아귀 들린 것처럼 매달리더니 이제 와서 사람 마음 헷갈리게 시침 떼는 이유가 뭡니까.”

“시침 떼는 거 아닙니다.”

하선우는 그제야 굳게 닫혔던 입술을 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조금…… 화가 났기도 하고.”

긴 한숨을 내쉰 하선우는 이윽고 말했다.

“그래도 싸우려고 홍콩까지 찾아온 건 아니니까 그러지 마요.”

부드럽게 속을 헤젓는 덤덤한 어조의 목소리에 강주한은 눈을 맞춘 채로 신중한 숨을 내쉬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이 마음속의 목록에서 무언가를 하나 지워내는 모습을 상상하며 말했다.

“배고파요. 밥 먹으러 가요.”

“…알겠습니다. 우선.”

강주한은 하선우의 가슴께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옷부터 갈아입죠. 레스토랑 예약해뒀습니다.”

“우리 일주일 동안 일정이 어떻게 돼요?”

강주한은 시선을 올려 하선우의 눈을 쳐다보았다.

“계속 비싼 데 머물고 레스토랑 찾아다니면서 쉬는 게 전부면 오늘만큼은 시내 관광해요.”

치아로 아랫입술을 조금 긁으며 강주한은 낮게 웃었다.

“오늘 주말이라 어딜 가든 사람 많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요.”

“뭘 하고 싶은데요. 시내 관광? 페리 타고 바다 건너고 기차 타고 산 정상 올라가서 홍콩 야경이라도 보자는 겁니까?”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반응이 없어 하선우는 네, 하고 대답을 했다. 두 사람 간의 대치는 얼마간 이어졌다. 다문 입술을 느리게 잘근거리던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쯧, 혀를 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나 하고 싶은 거 할 겁니다.”

“알았어요.”

“뭡니까.”

“가만히 있어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길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강주한은 보우 타이를 잡아당기는 하선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단번에 당긴 타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그는 강주한의 슈트 재킷과 그 안에 입은 베스트의 여밈을 풀어냈다. 하선우는 셔츠의 단추를 푸는 데 집중하느라 아랫입술을 위로 힘주어 끌어당겼다. 뚱하고, 심술이 나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본인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강주한은 고집스럽게 뾰족해진 턱 끝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하선우는 몸을 돌렸다. 거실을 성큼성큼 걸어 캐리어를 바닥에 거칠게 눕힌 후, 단번에 지퍼를 잡아당겨 캐리어를 열었다. 그 안에서 캐리어의 가장자리에 접혀 있던 종이가방을 꺼냈다. 그는 가방을 들고 다시 강주한의 앞으로 돌아와 테이블 위로 안의 것을 쏟아냈다. 안경 케이스와 얇은 재질의 티셔츠였다.

“밖에 돌아다니려면 더워요. 벗고 이거 입어요.”

강주한은 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로 하선우가 내민 옷을 내려다보다 결국 어중간하게 걸치고 있던 슈트와 베스트, 셔츠를 하나씩 벗어 상체를 완전히 탈의했다. 그는 하선우의 손에 들린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내키지 않는 듯 팔을 뻗어 티셔츠를 입었다.

숯처럼 어두운 차콜 그레이색의 티셔츠는 딥 브이넥의 디자인이었다.

“유행하는 디자인이랍니다. 배 나온 것도 아니고 운동도 했으니까 그냥 입으세요.”

어색한 표정으로 깊게 파인 브이넥을 내려다보는 강주한의 얼굴 위로 하선우는 안경을 씌워주었다.

“도수 없어요.”

고개를 숙인 채 눈만을 들어 올린 강주한은 기가 막혀하면서도 얌전히 얼굴을 내어주고 있었다. 하선우는 몇 걸음 물러나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모델 같네요.”

감정 없는 칭찬에 강주한은 미간을 좁혔다.

“애 취급합니까?”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

하선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거실과 복도로 분리된 독특한 구조의 침실로 들어갔다. 바다를 향해 난 창가 소파에 강주한의 서류 가방이 놓여 있었다. 코발트빛 하늘에는 덩치를 키운 적운이 첩첩이 떠다녔고 그 아래로 초고층의 빌딩이 늘어서 있었다. 홍콩 섬이 보이는 뷰에 잠시 홀려 있던 하선우는 곧바로 강주한의 지갑만을 챙겨 들고 침실을 나섰다. 하선우는 챙겨온 지갑을 강주한의 정장 바지춤 안주머니 속에 비집어 넣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요.”

야만적인 더위와 습기, 거리를 빠듯하게 채운 인간의 밀도. 불구덩이를 걷는 기분이었다.

하선우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강조하려, 일부러 의연하게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하선우의 뒤로는 관광객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었는데, 대부분이 중국인들이었다. 한국인, 일본인, 백인도 뒤섞여 있었지만 드문 비율이었다. 페리를 탑승하는 데 필요한 코인을 구입한 하선우는 강주한을 찾았다. 그는 철제 펜스에 기대어 하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인이요. 이거 넣고 들어가면 돼요.”

그는 비스듬히 기대었던 머리를 떼고 팔짱을 풀어 코인을 받아 들었다. 무덤덤한, 조금도 흥미가 동하지 않는 얼굴로 코인을 위아래로 살펴보다 앞서 나가는 하선우의 뒤를 따랐다. 개표구를 지나 대기실의 조악한 나무 의자에 앉아 바다 비린내를 맡고 있는 강주한의 모습을 맞은편 의자에 앉아 훔쳐보며 하선우는 커피를 쪼옥 빨았다.

“왜요, 자존심 상해요?”

하선우는 일부러 그의 심기를 툭 자극했다. 강주한이 등받이 너머로 팔을 걸치며 하선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존심 상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해외에 나갈 때마다 전세기를 타고, 헬기 타고 이동하시는 분이잖아요. 강주한 씨.”

“시간절약을 위해서죠. 단순편의, 필요에 따라서는 과시.”

그는 불량하게 웃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불만스러워서 투정을 하는 걸로 보인다면 지금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일정이 갑자기 틀어져서 기분이 언짢았던 것뿐이니까. 나를 무슨…….”

하선우는 가만히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인상을 쓰며 그는 찬 어조로 말했다.

“금 마차만 타고 다니는 황태자쯤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냉랭함이 묻어나는 얼굴에 하선우는 그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을 무릅쓰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다. 하선우의 웃음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린 강주한은 그 안의 조소까지도 깜찍한 것으로 참고 넘어가주기로 했다.

40도를 웃도는 더위와 수많은 인파 속에 둘러싸인 그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은 이미 부동의 사실이었다. 강주한은 잘잘못을 가르는 소모전과 조롱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뇌 안쪽에서 연약한 두통 같은 목소리가 하선우와 싸우고 싶지 않다고 그에게 자꾸만 까불거렸다.

페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다를 향해 출항한다. 후덥지근한 해류가 뱃머리 아래로 부서지며 더운 바람을 일으켰다. 하선우는 헝클어지는 머리를 정리하려 열심히 머리를 이마 뒤로 넘기다 포기하고는, 강주한의 옆으로 가 바람을 마주하고 앉았다. 조금 전부터 무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기에 내버려두었더니 혼자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늘 일정이 페리를 타고 홍콩 섬으로 건너가 트램을 타고 빅토리아 피크 전망대를 올라가고…… 다시 페리를 타고 구룡반도로 건너와 밤늦게까지 관광을 하자는 거죠? 가려는 곳이 침사추이, 하버시티, 몽콕…….”

“예.”

하선우가 생각하기에도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인터넷으로 후기를 찾아본 강주한은 별말이 없었다.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나도 일정이 뭔지는 알아둬야죠.”

그러나 한국이 아닌 홍콩, 그것도 바다 한복판에서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하는 일이 만만할 리가 없었다. 뱃머리가 선착장에 닿을 때쯤 강주한은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단념의 한숨을 내쉬는 그를 힐끔거리며 하선우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스콜이 쏟아진 뒤 뒤끓던 여름의 폭염이 가라앉은 거리는 한결 선선하다. 빗물이 얕은 고랑을 이룬 도로 위를 달리는 트램의 2층, 맨 앞자리를 어렵게 쟁취한 하선우는 관광객의 본분을 다해 고개를 비죽 내밀고 열심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착소한 도로에는 사람과 자동차, 자전거, 오토바이, 트램, 움직이는 온갖 것들이 뒤섞였고 길가에는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기 광고판 봤어요? 오면서 벌써 엘텍 광고 몇 개 봤는데.”

하선우는 손가락을 쭈욱 뻗으며 엘텍 로고가 새겨진 냉장고를 가리켰다.

“마카오의 카지노 재벌과 염문을 뿌린 톱모델이라고 하더군요.”

강주한은 덤덤한 투로 말을 이었다.

“광고는 현지 법인에서 해결하는 일이라, 음. 그 외에도 지사장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꽤 많죠. 중국 지사장……, 어제 만나니 몇 달 만에 거의 10킬로는 빠졌던데.”

뒷목을 긁적이던 강주한은 풀썩 웃었다.

“내가 오는 게 싫은 눈치더라고요. 속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조질 줄만 안다고 생각하겠죠. 그래도 꾹 참는 걸 보면 야망 있는 사람입니다. 중국에서의 실적 평가에 따라 엘텍전자 부사장 진급의 가능성이 열려 있거든요.”

팔짱을 낀 채로 그는 하선우가 바라보던 창밖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인구밀집이 높은 도시답게 골목길 너비의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천루가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주욱 내밀어도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도시를 눈에 담는 그의 모습이 묘하게 생기가 넘쳤다.

그러나 이제 좀 관광객의 기분을 내나 싶었던 그들의 설렘은 트램에서 하차하는 순간 다시 지루한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홍콩 섬에서 가장 높은 섬인 태평산의 정상으로 오르는 피크 트램을 타는 대기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기 때문이었다. 하선우는 가만히 강주한의 눈치를 살피다 대기줄이 없는 옵션이 붙은 상품 표를 구매했지만, 실내로 들어서자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은 줄 서야겠는데요. 그냥 택시 타고 올라갈까요?”

티켓을 받아 든 강주한은 영수증을 자세히 살펴보다 눈을 움직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선우의 얼굴 위로 뒤숭숭한 그림자가 언뜻 드러났다. 가끔씩 하선우의 얼굴 위에서 감질나게 발견하곤 하던, 그가 익히 알고 있던 표정이었다. 강주한은 물었다.

“내가 화낼까 봐 불안합니까?”

하선우의 눈이 조금 더 크게 뜨였다. 그는 티켓의 모서리로 입술을 툭툭 친다.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 안 내서 더 불안한 성격이죠. ……사람 눈치 보게 만드는 불편한 성격이잖아요. 별로 안 좋은 성격인데, 그거.”

입술 안으로 살짝 말려 들어가 구겨진 티켓을 다시 반듯하게 편 하선우는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미간을 좁혀 팔자를 그리는 눈썹, 새부리처럼 힘주어 튀어나온 윗입술에는 강주한에 대한 유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동시에 악의는 없다고 서툴게 달래는 느낌 또한 가득했다. 강주한 역시 그 자신의 성격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별다른 부정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싫습니까?”

어째서 대답이 이렇게 귀결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하선우는 자포자기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뇨.”

하선우의 대답이 미더운 듯 그는 만족한 얼굴로 무방비한 얼굴을 향해 말했다.

“전에 이미 했던 얘기지만 하선우 씨는 눈치 보면서 할 말은 다 합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얼굴에 기분이 다 드러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싫어요?”

하선우는 말해놓고 제가 먼저 멋쩍게 웃었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강주한은 손을 뻗어 하선우의 뺨을 가볍게 잡아당겨 흔들었다. 그저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집중하게 만드는 깊은 눈매를 맞추며 그는 말했다.

“아뇨. 좋아해요. 아주 좋아하죠.”

하선우는 얼굴이 늘어난 채로 한참을 쿨럭거렸다. 반응을 유도했기에 반쯤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지만 허를 찔린 기분이 드는 것은 강주한이 말끝에 아주 조금 다정하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애정표현에 굶주렸으면 이렇게 간략하고 꾸밈없는, 티끌만 한 감정표현에 당황할까 싶었다. 그러나 붉어진 얼굴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선우 역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빈약하기 그지없어 그를 나무랄 것이 없었다.

“가죠. 줄 더 길어지기 전에.”

그는 하선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인파의 흐름 속에 휩쓸린 그들이 피크트램을 타게 된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반 남짓 시간이 흐른 뒤였다. 중국인 관광객으로 만원인 트램에 문이 닫히기 직전에 겨우 들어간 두 사람은 창가로 붙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실외로 빠져나오자 일몰이 지고 있었다.

가파른 산의 궤도를 따라 트램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경사각도 때문에 기우는 몸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등으로 밀어내느라 강주한은 창밖의 경치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강주한은 중국인들에게 밀려나 점점 더 가장자리로 떠밀렸고 하선우는 벽과 강주한 사이에 갇혀 찌부러지고 있었다. 하선우는 자신과 마주 서서 나름의 공간을 확보하려 애를 쓰는 강주한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전에 왔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선우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가 조금도 즐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하선우 씨가 가이드를 업으로 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주한의 얼굴 근육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표정의 사이사이, 그 틈 속에는 하선우를 자극하는 짓궂은 무언가가 있었다.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떼어냈다.

“미안해하고 있잖아요. 아까부터 계속, 내내.”

한번만 더 자극하면 이번엔 제가 먼저 화를 내겠다고, 정직하게 불거지는 하선우의 감정들은 겁도 없이 노란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고요히 숨을 몰아쉬는 하선우를 지켜보던 강주한은 바지춤에서 남색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하선우의 턱 끝에 맺혀 대롱거리는 땀을 닦아준 그는 번들거리는 이마와 목덜미의 물기를 훔쳐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가 나한테 신경질을 내는 건 드문 일이라 귀여워서 그랬습니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손수건을 슬쩍 빼앗아 쥐며 하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이 붉었다.

“왜 만날 병 주고 약 주십니까?”

“미안합니다.”

숙인 고개 너머로 웃음을 베어 무는 강주한의 입술이 보였다. 여전히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경고등을 깜빡거리는 하선우에게로 강주한이 덤벼들었다.

“나 좀 지탱해줘요. 뒤의 사람 거의 눕다시피 나에게 기대고 있어서 무거워요.”

거리를 바짝 좁히며 다가온 그가 하선우의 정수리에 이마를 기대었다. 하선우는 머리에서 나는 냄새와 땀으로 끈적거리는 팔뚝살의 찰기가 신경 쓰였지만 강주한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더 깊이 파고들어 허리를 둘러 안았다. 그러나 무겁다는 그의 말과 달리 하선우에게 강주한의 체중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상투적이죠?”

강주한은 조금 웃으며 물었다.

“예. 저도 어디서 좀 본 상황 같네요.”

피식 웃으며 대꾸했지만, 강주한과의 접촉에는 결코 무던해질 수 없었다. 차라리 섹스와 같은 노골적인 접촉이 편할 때가 있었다. 서서히 서로에게 가 닿는 느낌이 하선우에겐 더 자극적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이 동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선우는 창가 밖으로 펼쳐진 가파른 높이의 빌딩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시간 반 남짓 기다려 트램을 탄 보람도 없이 그들의 오른편으로 펼쳐진 홍콩의 야경은 전차를 가득 채운 관광객들의 머리에 가려 반토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강주한은 그런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이국의 비좁은 트램 속에서 단둘이 몸을 맞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는 세상의 풍경 자체에는 무관심했다.

어떻게 이 날씨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선우의 상박을 둘러 안은 강주한의 팔뚝 안쪽 살은 건조하고도 보드라웠고 그의 품안에서는 기분 좋은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숨을 가볍게 들이쉬어 그의 체취를 맡자, 강주한이 부스럭거리며 하선우를 더 세게 껴안았다.

그사이 피크트램은 빅토리아 피크 정상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트램 밖으로 쏟아지는 사람들 속에 뒤섞여 유료 전망대에 올랐다. 스카이테라스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를 어렵게 파고든 두 사람은 투명한 유리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홍콩 섬과 구룡반도가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하선우는 번다한 생각들을 잠시 지워버렸다.

낙조에 젖어드는 밀림 같은 도시,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항구와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선박의 풍경이 고적했다. 땅이 개방된 이후 무수히 부수어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한 끝에 완성된 홍콩의 풍경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개발의 극치에 다다라 있었다. 어느새 태양은 수평선 저 너머로 잠겨들었고, 어둠이 깊어질수록 도시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강주한은 안경을 벗고 티셔츠를 훌렁 들춰 뿌옇게 묻어난 지문을 닦아냈다. 그러면서도 끝없는 수직의 행렬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한시도 떼지 않았다. 무심결의 행동이었지만 주변의 뭇시선을 끄는 그의 행동에 하선우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져 말했다.

“알아보는 사람 없겠죠?”

“우리 주변에 한국사람 없습니다. 백인들, 그리고 깃발 든 사람 중심으로 일본인 다섯 명 빼고는 다 중국인입니다.”

깨끗하게 닦은 안경을 고쳐 쓰며 강주한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지만, 하선우는 의심의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카이테라스 주위에는 깃발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바글바글 떼 지어 모여 있었고 자유관광을 온 백인들과 일본인들이 섬처럼 흩어져 있었다.

“알아본다고 해도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

태평하게 대답한 강주한은 스카이테라스에 팔짱을 낀 팔꿈치를 올리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뿔테 안경을 쓰고 가슴이 넓게 팬 브이넥의 티셔츠를 입은 그에게서 싱싱한 수컷의 냄새가 요동했다.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애처로운 야망과 두려움 속에서 부심하는 한 남자의 베일이 하선우의 눈앞에서 나부꼈다. 하선우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강주한은 세상 아래를 그저 못 박힌 듯 내려다볼 뿐이었다.

“홍콩 좋아하시나 봐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후 덧붙여 말했다.

“태한이가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 와서 살고 싶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곳만큼 즐거운 유배지가 없죠. 그런데 마카오에서 도박질이나 하고.”

피식거리며 강주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는 입술을 조금 움직여 비스듬히 웃음을 지었다.

“나란 존재가 티끌만큼 작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주여행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강주한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런 의미로 말했다기보다는.”

뻣뻣한 어깨를 손아귀로 주무르며 그는 말했다.

“인간은 이윤을 좇아 움직이는 본능이 있고 세상에는 이들의 집단인 수많은 기업이 있죠. 시장의 논리 속에서 어떤 기업은 쇠락의 길을 걷고 또 어떤 기업은 군림을 하게 되죠. 그런데 홍콩에 오면 기분이 이상해지더군요. 미국이나 유럽의 발전한 도시를 다닐 때와는 느낌이 달라요.”

“뭐가요?”

“훔치고 싶은데 가질 수 없어서 가슴이 철렁하고 차라리 쇠락의 길을 걸었으면 하지만 결국에는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런 기분이죠. 하지만 성장하는 중국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한계를 초월하는 기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기업 속에서 아직도 엘텍은 한없이 작기만 하죠.”

그는 난간을 향해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멀리 있는 도시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이 손을 뻗은 그는 가지런히 펼친 손가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눈을 감고 만끽했다. 묘하게 생기가 도는 그의 옆얼굴을 지켜보며 하선우는 머릿속의 생각을 닫아버리듯 입을 함께 다물었다가, 한참 뒤에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야경 보면서 삭막한 생각 하시네요.”

강주한은 어깨를 떨며 조금 웃었다. 그리고 팔꿈치를 댄 자세로 하선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삭막한 생각만 한 건 아니고 다른 생각도 했습니다.”

“무슨 생각이요?”

“겨울 휴양지로 이곳에 아파트를 얻는 건 어떨까.”

“…….”

“홍콩이 답답하면 리펄스베이도 좋겠다, 아니 이곳뿐만이 아니라 맨해튼이나 런던도 괜찮고. 굳이 한가한 목동의 아파트가 아니어도 마음만 먹으면 우리가 앞으로도 함께할 곳이 많겠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하선우를 향해 몸을 완전히 돌렸다. 어느새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었나 싶을 만큼 하선우의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가 길었다. 그것들을 이마 뒤로 빗어 살살 정리해 주고,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붓끝처럼 모인 귀밑머리를 바짝 모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상하게도 하선우에게는 홍콩, 뉴욕, 런던에 그들의 집을 얻자는 말보다 귀밑머리를 넘겨주는 강주한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몸속에 여진을 남겼다. 그가 움직인 것도 아닌데 몸 안으로 천천히 강주한이 뒤섞여 들어오는 듯한 어릿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의 따듯한 손가락이 귓바퀴를 부드럽게 애무하고 손바닥이 턱을 매만지며 얼굴의 절반을 감쌌다.

하선우는 숨을 죽이고 애써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키스하기에 최고의 장소인데 아쉽죠?”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 대신이라는 듯 몰랑한 아랫입술의 주름 위로 엄지를 더디게 미끄러뜨렸다. 뭇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잡아끄는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하선우 역시 키스를 하는 것처럼 숨을 쉬지 않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시간과 감촉을 충분히 공들여 만끽했을 때 그는 꿈에서 갓 깨어난 사람처럼 말했다.

“내려가죠. 사람들 몰려서 혼잡해지기 전에.”

* * *

“운동은 나와 침대에서 하는 섹스가 전부죠?”

주스를 뿜을 뻔한 하선우는 간신히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사레에 들려 숨이 진정될 때까지 그는 한참 동안 요란한 기침을 해야만 했다. 손바닥에 묻은 주스를 손수건에 닦아낸 하선우는 앞서 나가는 강주한의 태연한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성큼성큼 걸어가 거리를 좁힌 그는 강주한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그렇게 땀을 쏟나 싶어서 그럽니다.”

“땀 흘리는 건 제가 더위를 타서 그런 거지, 체력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또 병 주고 약 주게요?”

“빅토리아 파크 올라갈 때도 느꼈지만 그 나이치고 체력이 엉망인 건 사실이잖습니까.”

강주한은 손을 뻗어 하선우의 아랫배를 잡아당겼다. 얄팍하게 잡힌 밋밋한 살덩이를 함부로 비틀며 그는 나무라듯 말했다.

“오늘 밤에 확인 좀 해봐야겠어.”

“못합니다.”

들은 척도 안 하는 강주한을 나무라며 팔을 치운 하선우는 말했다.

“이렇게 걷고 어떻게 또 합니까?”

그러나 하선우의 말은 요령 없이 무뚝뚝하게 잘라 붙인 엄살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강주한은 밀쳐진 팔을 가만히 쓸어 올리며 그저 쓱 웃고 말 뿐이다.

걷고 또 걷고, 온종일 거리를 걸은 하선우는 발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홧홧해 죽을 지경이었다. 다리에 코를 대면 퀴퀴한 냄새가 아니라 탄내가 날 게 분명했다. 그들은 지하철을 타고 이제 막 밖으로 나와 몽콕의 야시장을 향하는 중이었다.

예상했지만 거리는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파에 이미 무던해졌다고 생각했던 하선우였지만 무의식중에 숨을 집어삼켰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뻗어 있는 가로 간판의 영향이 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높이에 매달린 간판이 복잡하게 교차하며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네온사인으로 이루어진 어지러운 한자 간판은 초점이 흐려진 뒤에도 오래도록 눈 안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들은 전통 장신구를 판매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선우는 홍콩에 가면 꼭 옥 반지를 사다 달라던 어머니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조악한 플라스틱 반지부터 값비싸 보이는 천연 비취까지, 가게 안에는 형형색색의 장신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보석가게와는 달리 디스플레이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아 다소 남루하긴 했지만, 주로 젊고 가난한 관광객들에게 저렴한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것으로 수입을 유지하는지 값비싼 보석 위에는 오히려 먼지가 얕게 쌓여 있었다. 그들은 손님이 없는 안쪽으로 들어가 가락지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어머니는 호박 반지나 천연 비취 반지 중 하나를 갖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즉, 둘 다 사다 달라는 뜻이었다.

그는 은과 함께 호박을 정교하게 수공예로 제작한 반지를 하나 꺼내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약간 헐렁한 것이 어머니의 손에 꼭 맞을 것 같았다. 그는 상인에게 반지의 가격을 물었다. 피로한 얼굴의 상인은 천연 호박으로 만든 가락지이며, 6,000달러라는 짧은 대답을 성의 없이 툭 내뱉었다. 깎아달라는 말에 열의 없이 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손님이 요구하는 바를 묵묵히 해치웠다.

비취 반지 하나를 놓고 여러 개의 후보 중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강주한이 하선우의 눈앞으로 가락지를 집어 들어 올렸다.

“이건 어떻습니까?”

그가 내민 것은 천연 비취로 만든 쌍가락지였다. 은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붉은 산호로 조각한 나비를 고정한 반지로, 초록색과 붉은색이 대비되어 산뜻한 느낌을 자아냈지만, 나이 든 여자가 하기에는 일견 가벼운 느낌도 없지 않았다.

“어머니가 끼기엔 좀 젊은 것 같은데요.”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놓는 강주한을 보다가 하선우는 웃으며 물었다.

“사줄까요?”

반지를 제자리에 끼워놓던 강주한이 고개만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눈썹을 치켜뜨던 그가 이윽고 몸을 돌려 하선우에게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얼결에 쌍가락지 중 하나를 받아 든 하선우는 건너편 상가에서 비치는 붉은 네온사인 빛에 푸른 가락지를 비추어보았다. 부연 보랏빛이 각도에 따라 부수어지다,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그것을 위아래로 굴려보던 하선우는 반지, 그것도 옥 반지의 무용함을 깨닫고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강주한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아 자신의 것과 함께 나란히 제자리에 집어넣으며 하선우는 웃었다.

“이제 장난 그만하죠. 어머니 거는 이거로 하려고 하는데, 괜찮죠?”

강주한의 눈길이 하선우의 손에 들린 황옥색의 옥가락지로 향했다. 국화꽃 조각을 새긴 황옥을 유화 처리하여 유난히 광택이 도는 반지였다.

“확실히…… 그게 낫군요.”

옥가락지에 두었던 시선을 조금 전의 쌍가락지로 옮긴 강주한은 무심히 중얼거렸다.

계산을 마친 그들은 호텔로 돌아가는 대신 야시장을 돌며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맥주와 고추씨가 들어간 새우튀김, 숙주와 쇠고기가 들어간 플랫누들 따위를 잔뜩 주문한 그들은 불태워버린 칼로리를 보상하듯 한동안 먹어치우는 데에만 열중했다.

만둣국과 탕 종류에는 하선우가 싫어하는 향신료가 잔뜩 들어 있어 손도 대지 않았지만, 정작 까다로울 것 같던 강주한은 향이 강한 음식도 곧잘 먹었다. 하선우는 그가 잦은 출장으로 외국생활에 익숙한 사람이며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미국에서 유학하다가 만났다는 것도. 하선우는 천천히 맥주를 삼켰다.

“유학 시절은 어땠어요?”

“유학 얘기라면 따돌림당한 얘기밖에 해줄 게 없는데.”

접시에 새우의 양념을 털어내며 강주한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대답했다.

“그 말 할 때마다 안 믿깁니다.”

“그런 얘기를 뭐하러 농담처럼 하겠습니까.”

새우를 입안에 집어넣은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하선우를 응시했다. 입으로는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티슈를 뽑아 손에 묻은 양념을 꼼꼼히 닦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본에서 따돌림을 당했죠. 아홉 살부터 열두 살까지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마냥 순진할 것 같은 나이지만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생각보다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죠. 못된 애들… 많죠. 일반 가정집에서 학교를 다닌 건 아니었죠?”

“이제 막 일본에 엘텍의 현지 법인이 들어서던 시점이라 주재원의 가정집에 같이 있었습니다. 사저로 대저택을 임대해주고 지사장직을 제안하긴 했지만, 혹처럼 내가 들러붙어서 많이 곤란했을 겁니다. 그 집에는 지사장의 수행원보다 내 개인 수행원이 훨씬 더 많았거든요.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어린 자존심에 학교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죠. 나중에는 그마저도 무뎌져 저절로 해결이 되긴 했지만.”

“한국에서라면 왕따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텐데. 부모 등쌀에 애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을 텐데 말이죠.”

“진헌이가 그렇게 친해진 친구죠.”

“대대로 법조계랬죠?”

“선우 씨 가족이 의사인 것처럼 진헌이도 그렇죠.”

하선우는 맥주를 마시며 고지식한 우진헌을 떠올렸다. 물론 자동으로 유쾌발랄한 그의 아내가 생각났다. 의식의 흐름이 ‘아내’에 닿자, 지금은 부재중인 누군가의 자리가 불현듯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도 미국 유학은 즐거웠겠어요. 선택해서 떠난 거니까.”

“사정은 좀 나았지만 집안에서 조기 졸업을 원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죠.”

“그래도 아내분을 만났잖아요.”

“그 얘긴 갑자기 왜 꺼냅니까.”

“그냥요, 그냥……. 알고 싶어서.”

그는 턱을 괴고 이전보다 더 본격적으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 그는 물었다.

“아내 이야기가 궁금한 거군요.”

정곡을 찔린 하선우는 말없이 강주한의 눈치만 보았다.

“그 얘기라면 해줄 게 없는데.”

“…….”

“선우 씨도 알겠지만 결말이 유쾌하지 않거든요.”

강주한은 접시에 덜은 쇠고기를 뒤적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는 음식을 되작이지만 입술을 꾹 다문 채였고 시선을 고기에 두었지만 정작 식욕은 없어 보였다. 음식을 몇 번이나 집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던 그는 마침내 손에서 수저를 떼었다.

그는 20대 초반, 그가 다녔던 대학과 대학원의 동문과 재학생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지역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던 재미교포 동문의 화랑을 빌려 열린 파티였다. 파티는 한국인들과 교포, 그들의 초대를 받고 찾아온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 공기 중에는 담배와 대마초 냄새가 진동을 했고 밤이 깊어지면서 공기는 점점 더 탁해져만 갔다.

맑은 공기가 쐬고 싶어 잠시 밖에 다녀온 그는 함께 어울리던 무리 속으로 뒤섞이는 대신 내부를 장식한 그림을 구경했다. 한 점 한 점 모두가 화랑 주인의 작품이었다. 개방적인 집주인처럼 그림은 따듯하고 쾌활하며 변화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그림을 따라 올라가던 그는 공개된 화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무풍지대 같은 안온한 화가의 화실 한가운데에 작업이 되다 만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그의 집 안을 가득 채운 그림들과는 분위기가 다른 그림이다. 담뱃진처럼 지저분한 회색의 물감과 불처럼 뜨거운 붉은 물감이 회오리쳐 뒤엉켜 있는, 그러나 동시에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그림이었다. 불길한 한편의 서사극이 화폭 위에 덩그러니 담겨져 있었다.

그때 그녀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람에게 오죽 질렸으면 이런 재미없는 그림이나 상대하고 있느냐고.

남자가 뒤를 돌았을 때 소녀처럼 비쩍 마른 까무잡잡한 여자가 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남자가 불쌍해 보여 말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그녀 역시 남자에게 지겨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가능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무구한 활력이 여자에게는 있었다.

결국 파티가 끝날 때까지 남자와 여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비좁은 화랑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여자는 유명한 정치인의 딸이었으며, 남자는 유명 기업 총수의 아들이었지만 누구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어대다 연락처를 교환하고는 그대로 서로의 존재를 잊었다.

두 달 뒤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 미국의 보스턴에 위치한 그녀의 아파트에서 영화를 보자는 것이었다. 남자는 이것을 명백한 유혹으로 받아들였지만 여자는 남자의 오해를 보기 좋게 깨부수어버렸다. 그녀가 선택한 영화는 권투 영화인 ‘록키’였다. 그러나 여자의 순진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날 오후 첫 키스를 나누었으며,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반사적으로 결혼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신을 더없이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가엾게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 당시 그와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 모두 정치와 경제적인 입장 차이를 갖고 있던 두 남녀가 그렇게 쉽게 서로의 앞에 놓인 장애물을 치워버리고 서로의 손을 마주잡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했다. 사귀는 동안, 그리고 결혼생활을 하는 내내 그녀는 변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여자는 허술했고, 자유분방했으며 사방으로 뻗은 호기심의 더듬이를 늘 부주의하게 이곳저곳에 부딪히고 다녔다. 그렇게 자신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파고들고 나서야 스스로를 멈춰 세우는 그녀는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화를 내야 직성이 풀리고, 우울하면 우울함을 끝까지 파고들고 나서야 다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성격이었으면 저처럼 소심한 반항은 안 했겠네요.”

흰 윤기가 떠도는 먹음직한 완자를 국자로 떠 그릇에 담았다. 국물을 입안에 조금 흘려보내던 하선우는 향신료 맛이 적응이 되지 않아, 아쉬운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강주한은 말했다.

“수리공처럼 내 태도를 늘 고치려 하고 늘 문제 삼았죠. 한참 싸울 때는 내 속을 뒤집어대기도 했고.”

하선우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화를 참지 못해 길길이 날뛰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강주한의 얼굴은 어떤 것일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소멸된 감정의 흔적을 찾아내려 강주한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당연하게도 그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강주한은 하선우가 거의 건드리지 못하는 음식을 대신 묵묵히 먹어치우며 말했다.

“그렇게 싸웠던 기억도 까마득하군요.”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그의 아내가 사고사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냈다. 괜한 추억을 자극했음을 깨닫고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어쩔 수 없는 통증이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여자는 사라졌지만, 자연스런 풍화가 아니었고 갑작스러운 상실이었다. 그러나 강주한은 조금 다른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안타까움이라기보다는, 허무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내는 내게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거든요.”

“…왜요?”

“화를 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죠.”

매정하게 말을 맺은 그는 반만 미소 지었다.

한참 뒤, 무미한 고무를 씹듯 조용히 음식을 먹어치우던 그가 하선우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부조로 새겨진 감정의 결을 더듬듯 하선우의 얼굴 위에 못을 박았다. 마치 근심의 싹을 찾아내듯이, 미처 제거하지 못한 의심의 뿌리를 가려내듯이 두 사람 사이에 매복된 분란거리를 살펴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피곤하군요.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고개를 돌릴 때, 바싹 건조된 그의 눈빛에는 습도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하선우는 그가 겁을 집어먹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가게를 벗어난 직후부터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혼잡한 도로에서 그들은 간신히 택시에 올라탔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손을 잡아당겼다. 하선우의 손바닥의 얕게 파인 살구덩이를 강주한의 건조한 엄지손가락이 매번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그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뒤에서 둘러 안듯이 하선우를 껴안았다. 땀으로 끈적거리는 뒷목에 입술을 묻은 채로 그는 아랫배 위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천 자락이 손가락에 걸려 서걱거리며 밀려나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온 손바닥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땀으로 끈끈하게 들러붙는 살덩이를 간질이며 그는 자꾸만 맛을 보듯 목덜미를 할짝거렸다. 룸미러로 뒤를 흘긋거리는 택시기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낯선 도시에서 그런 시선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이방인의 방종이 하선우에게 그를 내버려두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호텔 방에 이르러 땀에 젖은 아랫배 위로 강주한의 혀가 미끄러졌을 때 하선우는 그를 밀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하선우의 몸속에 자신을 담그고 싶은 욕망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강주한은 낮게 신음했다.

“잠, 잠시만요. 씻겠습니다.”

강주한은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가슴께와 쇄골에 진득한 애무를 퍼부었다.

“같이 씻죠.”

“그게 아니라.”

“…….”

“준비 좀 하겠습니다.”

강주한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하선우는 뒷걸음질 쳤다. 멋쩍음을 숨길 수가 없어 강주한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뒤에도 그는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주한 씨는 침실 옆에 있는 욕실에서 씻고 있어요. 다 씻고 가겠습니다.”

하선우는 붉어진 얼굴로 낯가림을 하듯 중얼거렸다.

욕실로 도망치듯 사라졌던 그가 다시 강주한의 앞에 나타났을 때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베스가운을 걸치고 들어오는 하선우는 여전히 머쓱한 낯을 하고 있었다. 발가벗고 덤벼들기 직전의 불안이 그를 괴롭혀 하선우는 차라리 강주한과 얼른 엉켜들었으면 했다.

“기다리다 미칠 뻔했습니다.”

긴 기다림에 대한 타박을 주지만 강주한의 얼굴에는 어떤 광기의 기운도 서려 있지 않다. 대신 빈털터리의 표정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하선우를 욕조로 잡아당긴 그는 허리를 꽉 부둥켜안았다. 체온을 먼저 느낀 후에야 강주한은 목덜미를 조곤조곤 입술로 물었고, 베스가운이 물에 완전히 젖어든 뒤에야 매듭을 풀어헤쳤다. 따듯하게 와류하는 물속에서 어지럽게 들러붙는 가운을 모조리 벗겨내 바닥에 던져버린 그가 곧바로 하선우의 머리통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입을 맞추기 전 그는 하선우의 얼굴을 보았다. 명료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면서도 희미한 여백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얼굴을 바라본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는 입을 맞추려 입술을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하며 붉은 혀를 내보이고 있었다.

강주한은 슬쩍 하선우의 혀 위로 자신의 혀를 미끄러트렸다. 청량한 민트맛이 느껴지고 더 강한 단 숨결이 느껴진다. 살덩이가 엉키는 감각은 집요하고도 야릇했다. 코끝을 마주 비비고 아랫입술을 치아로 잡아당기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아래턱을 잡아 고정했다. 엄지손가락을 혀 아래로 집어넣어 아무렇게나 짓누르고 입술로는 간신히 내민 하선우의 혀를 힘주어 빨았다.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하선우는 강주한의 머리를 더 강하게 감싸 안았다.

키스를 하며 두 사람은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부푼 하체를 맞비벼 댔다. 손을 밑으로 뻗어 강주한의 성기를 만지작거리자 맞닿은 그의 아랫배가 단단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물속에서 매끄럽게 느껴지는 그의 것을 힘을 거의 주지 않은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 올리며 하선우는 맞닿은 입술을 떼어냈다. 숨을 쏟아내며 강주한은 하선우의 얼굴을 뜨겁게 응시하고 있었다. 쏟아내기 직전의 뜨거운 것을 품고 있는 것처럼, 자꾸만 마른침을 삼키며 그는 하선우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욕조는 유리벽과 곧바로 붙어 있는 구조였고 약간의 턱이 있어 엉덩이를 걸치고 앉을 수 있었다. 하선우는 등 뒤로 닿는 유리창의 차끈함에 움찔했다. 예고도 없이 강주한이 그의 몸을 들어 올렸고, 엉덩이를 욕조의 턱에 간신히 걸치게 된 것이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무릎 뒤에 손바닥을 밀어 넣어 유리벽에 찍어 누르듯 양옆으로 넓게 벌렸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어둡게 탄식했다.

“얼마나 박히고 싶었으면 이렇게 구멍이 헐렁해질 때까지 뒷물을 합니까.”

까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하선우의 몸이 파득 움츠러들었다. 강주한의 말에 자신이 더욱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온통 시뻘게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뒷물……이라뇨. 무슨 말을…….”

“틀린 말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그는 곧 미안한 투로 덧붙였다.

“살갗이 부르텄습니다.”

후, 다리 사이로 입바람을 불었다. 구멍이 옴칠 조여들자 그가 말랑한 입술을 묻었다 떼어냈다.

“무릎 잡아요.”

강주한은 하선우의 손을 이끌었다. 하선우는 짙은 숨을 몰아쉬며 조금 전 강주한이 그랬듯이 무릎을 잡아 다리를 벌린 자세를 유지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하선우와 달리, 다리 사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강주한에게선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려는 순간 질척한 혀가 민감한 곳에 닿았다.

“흑!”

막지 못한 튀는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흐읏! ……앗! 잠…… 아아…… 잠, 잠…… 아으!”

발갛게 쓸린 구멍 주위를 꼿꼿하게 힘주어 세운 혀가 꾸욱꾸욱 눌러댈 때마다 그는 미처 신음을 막지 못하고 자꾸만 연달아 허덕임을 쏟아냈다. 강주한의 손바닥이 둔부를 잡아당기고, 손가락이 분홍 속살이 드러나도록 힘주어 구멍을 잔뜩 벌렸다. 그 사이로 그의 혀끝이 마치 삽입을 하듯 얕게 파고들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하선우의 의지를 벗어난 근육은 제멋대로 벌어지고 우므러지길 반복했고, 강주한은 거의 변태적으로 느껴질 만큼 내벽을 핥고, 구멍의 얇은 피막을 치아로 잘근거리고, 회음부의 얇은 살덩이를 입술로 빨아댔다. 양손의 엄지로 구멍을 잡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어 항문의 조임근을 휘저었을 땐, 하선우의 아랫배가 쾌감으로 펄떡거렸다. 점막 안을 휘젓는 믿을 수 없는 음란한 감촉에 다리가 속절없이 떨려와 결국 무릎을 안은 손을 놓친 하선우는 욕조의 난간과 유리벽을 더듬어댔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다리 사이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어느새 다시 무릎을 모으는 하선우의 다리를 강제로 벌려 그 안으로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에 듬뿍 침을 묻히고 중지와 검지를 밀어 넣자 하선우의 아랫배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하, 하아아…….”

절절매며 벽을 긁어대는 하선우에게 보란 듯이 손가락을 더 밀어 넣었다. 잔득거리며 들러붙는 내벽의 점성을 가르며 그는 일부러 하선우가 가장 느끼는 부위만을 꾹꾹 짓눌렀다. 발가락 끝부터 온몸이 달달 꼬이는 듯한, 견딜 수 없이 몸이 닳는 느낌이 하선우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 끝이 내부를 함부로 긁고 지나가고, 단단한 마디 끝이 오밀조밀하게 힘을 준 괄약근을 헤집고 지나갈 때면, 몸속에서 지나친 쾌감을 거부하듯 자꾸만 그의 손을 몰아내려 움찔거렸다.

“여기가 좋습니까?”

그는 하선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몸속에 집어넣은 네 개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전립선 부위를 문지르고 쓰다듬고 힘주어 눌러대는 움직임에 눈앞으로 흰 빛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선우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멋쩍은 웃음은 곧 흐느끼는 신음이 되었다. 하선우는 이를 악물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엄지손가락이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피막을 간질거렸다. 점막과 피부의 경계를 손톱으로 갉작이고, 매끄러운 내벽 속에서는 마치 유영을 하듯 손바닥을 넓게 펼쳐 살을 짓누르며 쓸어 올렸다. 손가락 각자가 매끄럽게 움직이며 문질러댈 때마다 끔찍하게 황홀한 감각이 몰려왔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거기 더……. 세게, ……아, ……더, 더, 더 세게!”

점점 더 욕망으로 어두워지는 강주한의 눈을 마주보면서 하선우는 얼굴을 온통 일그러트렸다. 힘주어 짓누르자 엉덩이를 잘게 조이며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극상의 쾌감에 움츠러드는 몸 안을 사정없이 강하게 긁어내리는 손길에 하선우는 배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강주한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겹친 그는 강주한의 손목을 잡아 뽑아냈다. 강주한을 욕조 끝으로 밀어내고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하선우는 흐물하게 녹아 덥석 물어버릴 준비가 된 구멍 속으로 선단의 끄트머리를 조금 밀어 넣었다.

헉, 절로 달아오르는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얼굴을 찡그리며 그는 선단을 조금 집어삼킨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집어넣은 길이에 비해 남은 강주한의 성기가 지나치게 기다랗게 느껴졌다. 자신 있게 덤벼들었던 처음과 달리 밀어 넣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는 얼마간의 주저 끝에 다리를 더 넓게 벌리며 엉덩이를 천천히 내렸다. 좁은 내부가 무리하게 확장되고, 스치는 것만으로도 하선우를 자지러지게 만드는 익숙한 그곳으로 선단이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물기가 부족한 점막을 뚫고, 끝도 없이 파고들었다.

“헉, 악…… 아응, 핫……!”

장골 위에 손을 얹고 강주한은 허리를 한 번 더 쳐올렸다. 아득한 얼굴을 하는 하선우의 얼굴에 시선을 붙박은 채로 한 번 더 쾅, 박아 넣었다. 집어넣을 때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질깃하게 자꾸 씹어대지만, 마냥 밀어 넣는 대로 좁은 길을 내어주는 몸속이 제 주인을 고대로 빼어 닮았다고 강주한은 생각했다. 그러니 벌써부터 울고 싶어 하는 눈을 하면 곤란했다.

하선우의 몸속으로 모조리 성기를 밀어 넣은 그는 적응할 시간을 주듯 허리를 뭉근하게 비벼 올렸다. 배 속에 가득 박힌 성기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가 느끼는 곳을 자극해, 하선우는 그 충격에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강주한은 움푹 파인 하선우의 엉덩이 근육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 있었다. 소름은 둔부와 허리, 등허리를 타고 어깨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둘투둘했던 살결은 강주한이 허리를 내빼자 사라지고, 다시 거세게 찔러 넣자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는 점차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번 추어올렸을 뿐인데도 하선우에게선 간신히 숨을 조절하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잘금잘금, 귀두의 선단에서 정액이 점점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번씩 박아 넣을 때마다 점성이 진한 정액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불투명한 애액을 꿀럭꿀럭 흘리는 그것을 소중히 쥐고 강주한은 엄지로 귀두의 선단을 매만졌다. 균열을 갈라내듯 요도의 사이를 엄지로 긁자 파득, 허리가 튀었다.

“벌써 사정했습니까.”

아랫배와 성기 주위로 흘러내린 정액을 긁어모아 손바닥에 담은 강주한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끈적거리는 점성을 신기한 듯이 살펴보았다. 혀를 길게 내어 정액의 맛을 음미한 그는 하선우의 몸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갑작스러운 상실감에 당황할 새도 없이 몸이 뒤집혔다. 유리벽과 붙은 욕조의 턱에 두툼하게 수건을 깔고 그 위에 하선우를 무릎 꿇린 강주한이 뒤에서 정액을 자신의 페니스에 펴 바르는 것이 느껴졌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까마득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추락의 느낌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강주한이 몸속으로 짓치고 들어왔다.

“아!”

내장을 단번에 채우고도 모자라다는 듯이 허리를 쾅! 쳐올렸다. 무릎이 붕 뜨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유리벽을 짚으며 하선우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안 돼! ……안, 안 돼……!”

전립선을 정확하게 찍어 누르며 거세게 삽입하자 격심한 오르가즘을 느낀 하선우가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등 뒤에 선 강주한이 하선우의 몸을 계속해서 유리벽으로 밀어붙였고, 하선우는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유리벽에 가슴과 얼굴을 기댄 채로 격렬하게 쑤시고 들어오는 쾌감을 버텨내야 했다. 하선우의 정액과 강주한의 애액으로 접합부에서는 찔걱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멋대로 몸속을 헤집는 뱀 같은 성기로부터 전해지는 맥박과 자신의 배 속에서 불덩이처럼 튀어 오르는 맥박이 뒤섞였다.

둔통 같은 쾌감이 단전에 고였고, 하선우는 그것을 쥐어짜 없애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더 거칠게 해주었으면, 자신의 구멍 속에서 그것을 긁어 없애주길 바라지만 자신이 직접 해낼 수는 없었다. 그 욕망에 가 닿는 방식은 여전히 두려워서 강주한이 필요했다. 그 순간 강주한의 허리짓이 거칠어졌다.

찰나의 경직 이후 몸속으로 뜨거운 물이 퍼부어졌다. 배 속이 출렁거릴 만큼 잔뜩 정액이 쏟아지는 느낌에 하선우는 두 눈을 꽈악 감았다. 섹스를 할 때마다 느끼는 감각임에도 남자의 정액을 배 속에 품는 감각은 늘 낯설기만 했다. 항문이 생식기가 되고 괄약근이 질구로 뒤바뀐 듯한 그 느낌은 하선우에게 기묘한 수치를 안겨주었다. 마치 온몸이 성기가 된 것처럼 욱신거렸다. 머리가 차가울 때도, 뜨거울 때도 그들의 욕망에는 한 치 거짓이 없었다.

성기가 젖은 내부를 살짝 빠져나갔다, 다시 가르고 들어왔다. 하선우는 도리질을 쳐야 할지 고개를 끄덕이며 더 거칠게 쑤셔달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신음할 뿐이었다. 음낭이 뭉개지도록 바짝 밀어 넣은 성기를 그는 아주 천천히 뽑아내기 시작했다. 끈끈하게 점착된 점막과 성기가 떨어져 나가며 주는 환희에 오금이 저려오고 발가락 끝이 곱아들었다.

“하아…… 아으응, 하, 아……, 하아, ……앗!”

몸 안을 헤치고 들어오는 살덩어리의 윤곽이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율동하는 내부를 성기가 찍어 누를 때마다 시야가 까마득해졌다. 애액으로 잔뜩 젖은 강주한의 성기는 마치 뱀처럼 혐오스러웠고, 섬뜩하고도 매끄럽게 감각세포를 자극했다. 내벽과 살덩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뒤죽박죽으로 뒤엉키는 느낌에 집중하다 눈을 뜨면, 까마득한 도시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쾌락과 추락의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하선우를 등 뒤의 강주한이 결박하듯 껴안았다.

사정 이후 힘을 잃었던 것도 잠시, 강주한 스스로 고통을 느낄 정도로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흐물흐물해진 구멍 속에 강하게 박아 넣었다. 전립선을 겨냥한 움직임이 반복될수록 수용할 수 있는 열락의 한계치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그는 미지근해진 유리벽에 뺨을 기댄 채 강주한의 두 팔에 꽉 안겨 내벽을 밀고 들어오는 뜨겁고 흉포한 성기를 가만히 느끼기만 했다.

벽의 이곳저곳을 더듬느라 투명했던 벽은 애액과 지문으로 엉망이 되었고, 뜨거웠던 욕조의 물 역시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비명처럼 내지르던 신음 대신 그의 입술에선 간간이 희미한 숨소리가 터져 나올 뿐이었다. 벽을 긁으며 몸을 떨던 하선우는 어느 순간 자신을 놓아버리듯 긴장을 탁 풀어버렸다.

성기는 아무런 방해 없이 힘을 죄 푼 엉덩이 속을 무자비하게 넘나들었다. 헤벌어진 내막은 밀어젖히는 대로 무리 없이 커다란 좆을 꾸역꾸역 받아먹었고, 완전히 열린 접촉부 사이로 하얗게 젖은 좆이 드나들 때마다 애액이 질금질금 거품을 일으키며 새어 나왔다. 강주한은 일부러 주름이 완전히 펴진 피막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동그란 띠를 이룬 애액을 구멍 주위로 펴 발랐다.

완전무결한 쾌감 속에서 머리가 텅 비워지고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달콤해서 하선우는 무력하기까지 한 여운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정신을 잃고 실신할 것만 같았다. 간신히 내벽에 힘을 주어 그를 밀어내지만, 그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 닿았다.

몰아내려 힘을 주는 몸속을 거슬러 파고든 성기가 가장 느끼는 곳을 짓누르고 더 깊은 곳을 열어젖혔다. 하선우는 온몸에 힘을 주며 그를 되밀어냈다. 그러나 파고드는 힘은 더 거칠어지기만 했다. 하선우는 결국 애걸조로 속삭이며 강주한의 팔을 잡아챘다.

“그, 그으……만, 그만…… 아……, 하앙, 더는…… 흑, 핫…….”

힘을 주어 끊어내려 할수록, 맞닿는 성기를 통해 반사적으로 쾌감이 느껴졌다. 하선우는 흐느끼며 도리질을 쳤다. 꿰뚫고 들어오는 속도를 견디지 못한 엉덩이가 자꾸만 경련을 일으키며 무너지자 허벅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강주한이 자세를 고정했다. 성기를 더욱 깊게 박아 넣으며 진땀을 흘리는 하선우의 뒷목에 입술을 묻었다.

하선우는 죽음에서 도망치는 사람처럼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고통과 흐느낌, 울부짖음과 체념을 오가는 긴 섹스 끝에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사정을 마쳤다. 그런데도 강주한의 몸은 여전히 둔부 사이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하선우는 막 나락에서 살아나온 사람처럼, 손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 등을 그의 가슴에 기댄 채로 호흡을 다스리고 있었다.

“씹어… 먹히는 기분입니다.”

혹사당한 구멍은 하선우의 의지를 벗어나 자꾸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연동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그 감각에도 괴로워 진저리를 쳤다.

“흑, 아아, 그런…… 그런 소리하지 마요.”

“무슨 소리요.”

“그런 변태 같은…… 헉…… 아아…….”

강주한이 하선우의 정액으로 하얗게 젖어 있는 유리벽을 손바닥으로 쓸며 말했다. 그들의 발아래로 아득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고, 이국의 도시를 품은 유리벽 위로 얼비치는 두 사람의 얼굴은 땀으로, 서로의 애액으로 형편없이 젖어 있었다.

“나는 정말…… 이 감각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

그는 낮게 웃었다.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짭쪼롬한 뒷목을 핥으며 하선우의 아랫배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선우 씨의 내장 속에 들러붙어 살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무슨 말이 흐…… 으…… 그럽니까.”

쉰 목소리로 강주한은 속삭였다.

“가끔은 하선우 씨 안에서 웅크리고 살고 싶습니다.”

그는 하선우를 가만히 껴안았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통로 속에 머무는 성기를 내벽이 꿈틀꿈틀 연동하며 감질나게 옥죄었다. 그는 살덩어리의 단단함을, 그가 빠져나간 뒤의 상실감을 잊지 말라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심한 상처가 난 곳에서 뜨거운 맥동을 느끼는 것처럼 하선우는 성기를 품은 배 속이 또다시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손을 뒤로 내뻗은 하선우는 강주한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구멍 속에 깊숙이 박혀 있던 물건이 내부를 넓게 벌리고 빠져나갔다. 한계까지 벌어졌던 구멍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아, 애액이 느슨하게 열린 구멍 사이로 왈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강주한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하선우의 다리를 벌리고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눈동자를 하선우의 얼굴에 못 박은 채로, 몇 번 긁적이는 것으로 그 속의 것들을 게워낸 그는 욕실 벽에 걸린 커다란 수건으로 서로의 몸에 묻은 물기를 훔쳐내고 하선우를 어두운 침실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하선우를 가져야겠다는 듯 그 품속으로 덤벼들었다.

* * *

일주일의 절반이 흘렀다.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것이 강주한의 계획이었다면 그의 일정은 완벽하게 지켜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곧게 일자로 뻗은 정강이와 대퇴골, 힘을 주지 않아도 팽팽하게 갈라지는 허벅지 근육, 단단한 엉덩이를 매만지고, 곱실거리는 음모가 자라난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새로울 것 없는 서로의 몸을 재발견하고, 밤사이 일어난 변화와 사정 직후에 일어난 미세한 차이점들을 탐색해나갔다.

기운이 떨어지면 그들은 호텔 밖으로 나가 후끈한 홍콩의 밤거리를 걸었다. 하선우는 발길이 닿는 대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후미진 거리와 고급스러운 소호는 물론, 노점의 음식부터 다락 같은 레스토랑을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 하선우의 곁에는 늘 강주한이 함께했다. 휴대전화를 끈 그들을 애써 힘들여 찾아오는 사람들은 없었고, 두 사람은 한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었다.

어젯밤 길거리에서 사온 만두는 식어서 겉이 딱딱해져 있었다. 하선우는 아무런 불만 없이 만두를 먹어치우는 강주한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평소 까다로운 성미의 강주한이었지만 며칠째 그는 허기를 느끼면 느끼는 대로, 묵묵히 자신 앞에 주어지는 그릇을 비워냈다. 그렇다고 강주한이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었다. 하선우는 이것이 여행이라는 마법이 부린, 어떤 주술적인 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현실과 연애라는 욕망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들이 활로를 찾은 것은 여행이라는 특별함이었다. 그러나 여행은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고, 두 사람이 활보했던 공간 역시 추억 속에나 남게 될 터였다. 뿔테안경을 쓰고 헐렁한 반바지만 입고 침대에 앉아 일회용 종이그릇에 담긴 만두를 먹어치우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자신이 충만함을 느끼는지, 아니면 곧 빼앗길 무언가로 인한 결핍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왜 그렇게 봅니까?”

자유분방하게 끼니를 때우는 그를 신기하게 보지 않으려 했는데, 아주 대놓고 쳐다본 모양이었다. 하선우는 무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맛있어요?”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식어서 딱딱하고 맛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만두를 먹어치운 그는 물로 가볍게 입가심을 한 뒤에 침대에서 내려와 하선우의 옆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오늘도 해치우고 싶은 일 있습니까?”

하선우는 강주한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옆구리로 손을 뻗어 살살 매만지자 간지럼을 느끼는 표정으로 강주한이 말했다.

“섹스 말고.”

색마가 된 기분에 하하 웃으며 하선우는 강주한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하체를 딱 붙이고 그를 내려다보자 강주한이 하선우의 티셔츠 춤으로 손을 집어넣어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건조하고도 따듯한, 마디가 도드라진 남자다운 손가락이 피부 위를 쓸어 올렸다. 하선우는 맞닿은 하체를 뭉그적 비비며 속삭였다.

“한 번만 하죠.”

“미안하지만…… 별생각 없는데.”

그러나 코끝을 마주 댄 채로 몇 번 단숨을 교환하는 사이 강주한의 것은 어느새 반쯤 부풀어 있었다.

“해요.”

여전히 여유로운 눈으로 하선우를 올려다보며 그는 말했다.

“왜 하자는 겁니까. 몇 시간 전에는 싫다더니?”

“주지육림에서는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마음이 동하는 법이거든요.”

“갑자기 뭐에 동했습니까.”

“바지 안에서 움직이는 실루엣이요.”

그는 계속된 섹스로 속옷 없이 얇은 면 반바지 하나만 걸치고 있었고, 가끔씩 움직일 때마다 성기의 실루엣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하선우의 머릿속에서 강주한의 성기는 남성기의 상징으로 또렷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매혹적이면서도 음란했고 동시에 내밀한 애정을 줄 만큼 친숙한 것이었다. 마치 이제 막 성에 관심을 갖게 된 소년이 여자의 알몸을 만져보며 느껴볼 법한 특별한 발견 같은 것이었다. 손바닥 안에 가득 잡히는 강주한의 남근이 마치 제 것 같았다. 외설의 모든 경계에 선 난잡한 행동들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선우는 큭큭거리며 참았던 웃음을 조금씩 쏟아냈지만 정작 말랑하게 열린 구멍 속으로 강주한의 물기 없는 성기가 밀려 들어왔을 때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삽입이 깊어짐에 따라 저도 모르게 몸이 위로 자꾸만 치솟았다. 약간의 찰기를 띠는 내벽 속을 주저 없이 파고들며 강주한은 하선우의 어깨를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빠듯하게 벌어진 항문 주위로 미지근한 음낭과 거친 음모가 닿았다. 성기와 함께 딸려 올라간 내벽이 제자리를 잡기를 기다리며 하선우는 강주한의 머리카락 속으로 양손을 집어넣었다.

뒤로 그의 머리카락을 당기자 고개를 쳐든 자세가 된 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대로 그의 입술을 머금으며 하선우는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무지 싫증이 나지 않는 감각, 날것에 날것이 짓눌리고 베이는 느낌에 하선우는 몸을 떨었다.

강주한은 가만히 앉아 하선우가 퍼붓는 키스를 받으며 찐득찐득한 삽입을 즐겼다. 그들은 여전히 옷을 입고 있었고 섹스를 위한 최소한의 부위만을 노출한 채였다. 건조하던 살결은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로 척척 달라붙었고 숨죽인 숨소리는 어느새 절박한 신음으로 바뀌었다.

척추를 타고 가느다랗게 머리까지 치닫는 쾌감에 절절하게 떨던 하선우가 움직임을 멈춘 사이 강주한이 몸을 들어 올렸다. 소파의 바닥에 등이 기대어지고, 등받이에 다리가 짓눌린 채로 단번에 몸이 쪼개어졌다.

“아!”

매번 느끼는 곳을 후려치는 감각에 절로 눈앞이 아득해지고 먹먹한 습기가 어렸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맞닿은 살 속에서 음란하게 퍼져 나와 귓가를 심란하게 어지럽혔다. 자꾸만 튀어 오르려는 몸에 힘을 주며 하선우는 눈물막이 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혈관이 불거진, 색이 짙은 성기가 매끄럽게 구멍 속을 들락거리는 모습이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무리하게 벌려지는 제 몸에 대한 걱정과 그 큰 걸 받아먹으면서도 극심한 쾌감에 절어 있는 스스로에 대한 배덕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음란함에 자꾸만 갈급증이 치미는 것이다.

“뭘 그렇게 봅니까?”

“좆 드나드는 게… 흐으… 너무 야한…… 느낌이라.”

하선우는 확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리다 쿡쿡 웃었다. 그러자 강주한이 어깨를 떨며 따라 웃었다. 그 작은 진동만으로도 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뒤를 조이자 강주한이 체위를 바꾸었다. 소파 위로 올라온 그가 하선우의 다리를 거의 수평이 되도록 벌리고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꽂아 넣기 시작했다.

“엉덩이 잡아서 벌려요. 더 깊이 쑤셔줄 테니까.”

“아!”

“벌려요.”

“잠, 잠깐! 으응! ……윽!”

지나치게 야한 느낌에 발발 떨던 그는 깊어지는 삽입을 견디다 못해 강주한의 아랫배를 밀어냈다. 그러나 여전히 강주한은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하선우는 결국 조금 주저하다 애꿎은 소파만 쥐어뜯던 손을 들어 둔부에 올렸다. 구멍이 더 넓어지도록 좌우로 팽팽하게 잡아당기자, 엉덩이에 비해 크게 느껴지는 성기가 들락거리는 모습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혀로 가볍게 훔쳐내며 그 모습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정액으로 희게 젖은 살기둥을 삼키는 자신의 구멍은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아침, 내벽에 듬뿍 퍼부었다 미처 긁어내지 못한 정액이 살기둥을 타고 질금질금 새어 나와 피막에 맺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깊은 곳을 찍어 누를수록 욕정은 배가 되었다. 몸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나타나길 반복하는 젖은 성기를 보며 하선우는 마치 강주한과 자신의 몸의 경계면이 사라지고 뒤섞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더 강한 자극과 빠른 속도로 휘몰아쳐 서로의 경계가 아주 뭉개져버렸으면 했다. 서로의 몸을 열렬하게 탐닉하는 두 사람만이 세상에 남겨졌으면 하고 바랄 지경에 이르렀다.

강주한과 섹스를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하선우라는 사람은 그 자신이 기대해온 모습보다도 더 원초적이었고 강박적으로 그 짓만 생각하는 10대 소년처럼 굴었으며 외설을 서슴지 않았다. 강주한의 괴벽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너그럽다가도, 갑자기 초연해지고, 어떤 때는 그보다도 더 원하게 되었다.

“너무, 너무! 깊, 흐으…… 아, 아아, 깊어…… 하아!”

핏발 선 하선우의 눈에 시선을 못 박은 채로 발목을 강하게 잡아당긴 그는 비좁은 내벽을 다시 열어 강하게 박아 넣었다. 하선우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강주한을 강하게 껴안았다. 하선우가 묽은 정액을 쏟아낸 뒤에도 거센 삽입은 오래도록 반복되었다. 마침내 그의 허리짓이 끊어지듯 짧아지고 절정을 맞은 몸이 멈추었다.

두 사람은 가슴을 맞댄 채 달아오른 체온이 식고, 서로의 호흡이 고른 소리를 낼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여운 속에서 먼저 깬 사람은 강주한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더 깊은 여운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는 듯 그는 젖은 몸에서 빠져나와 하선우의 옷을 벗기고 엎드리게 했다. 격렬함 없이, 서로의 몸에 서로를 묻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잘박거리는 얕은 삽입을 반복하며 긴 탐닉에 빠져들어 갔다.

늦은 오후, 늘어지도록 잠을 자고 일어난 그들은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와 입을 맞추었다. 그들의 의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즐기는 섹스와 낮잠은 방종과 향략의 끝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하선우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선우를 향한 NnG의 기대에 자신이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 대신 무엇을 얻어 가고 있는지.

“오늘 저녁은 요트에서 먹죠.”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하선우에게 강주한이 말했다.

“요트요?”

“동생이 홍콩에 머물면서 사둔 요트가 있습니다. 지금은 뭐… 처치 곤란한 물건이 됐지만.”

강주한의 입에 담긴 ‘동생’이라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던 하선우는 이윽고 감정을 추스르고 물었다.

“그 처치 곤란인 요트에서 저녁을 먹자고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일요일에 요트를 타려고 했는데…….”

그는 엉망인 침대를 흘긋거리곤 말했다.

“일정이 많이 바뀌어서 오늘 저녁으로 미뤄뒀습니다. 이제부터 준비하고 나가면 될 겁니다.”

강주한은 방금 내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하선우에게 내밀었다.

* * *

홍콩섬의 요트 정박장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진하게 드리운 수면의 물결은 잔잔했고 바다에서는 한숨 같은 훈풍이 불어왔다. 정박지는 그가 홍콩에 들렀을 때 미처 들러보지 못한 홍콩 섬의 남쪽, 바다를 면한 휴양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도시는 산의 곳곳마다 고급 주택단지와 아파트, 휴양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고요하고도 차분한 느낌이 서늘하게 배어 있어 여유 있는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가 된 지역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강태한의 요트는 리조트 호텔의 뒤편에 자리한 요트관리협회의 정박지에 보관되어 있었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백여 척에 달하는 요트가 가지런히 부두에 머무르고 있었고, 강태한 소유의 요트는 부두의 중간쯤에 묶여 있었다.

단순히 정박지에 배를 보관하는 것만으로 매달 2천만 원에 가까운 정박료를 요트클럽에 납부해야 했는데, 강주한이 요트를 두고 처치 곤란이라고 말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콩을 찾는 외국인 부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그 정도의 관리비용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고, 기실 정박비용을 다달이 납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지 오래였다.

한때 항공 구조에 관심이 있었던 하선우는 선박의 구조에도 얄팍하게나마 지식이 있었다. 강주한의 동생들이 공동으로 소유했다던 요트는 먼 바다로의 장기 항해가 가능하도록 설계된, 물방울 모양의 크루저 요트였다. 강태한이 이 요트를 타고 먼 바다를 향해 외양 항해를 떠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하선우는 그런 생각은 머리 한편으로 고이 접어두었다.

선장은 마리나 요트클럽 소속의 네덜란드인이었다. 그는 강태한처럼 1년에 한두 번 요트를 이용하는 부호 몇 명에게 고용된 사람이었다. 나머지 두 명의 승무원 역시 마리나 요트클럽의 직원으로 홍콩인들이었다. 선장과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실내로 들어선 하선우는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아 새것처럼 반짝거리는 실내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내부는 외부에서 볼 때보다도 훨씬 넓었는데, 팝아트 갤러리에 들어온 것처럼 원색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파노라마형 전방 해치는 독특한 재질과 색으로 마감되어 있었고, 살롱에는 장난감 블록 같은 소파가 벽면을 따라 둥글게 배열되어 있었다. 갤리는 따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아일랜드형 트윈 싱크대와 수납공간이 고급 아파트의 주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뱃머리에는 조종석과 슈퍼싱글 사이즈의 침대가 놓인 선실이 하나 있고 선미에는 싱글 룸 두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 조각으로 멋들어진 함선을 조립하듯, 자신이 펼치고 싶은 꿈을 모두 현실로 옮겨놓은 공간이었다. 강태한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을 것 같은 요트였다. 단순성과는 거리가 먼 인테리어였지만 시선을 빼앗길 만큼 매혹적이라 처음의 마음과는 달리 요트의 곳곳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그들은 난간으로 에워싸인 계단을 올라 요트의 2층으로 올라섰다. 선루프가 하늘을 반쯤 가린 갑판 위에는 선베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2인용 월풀 욕조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면과 바닥을 제외하고 옆면을 푸른색의 유리로 마감해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누군가의 눈요기가 되겠다 싶은 욕조였다. 요트 위에서 수많은 여자들과 난잡하게 놀아났을 강태한을 생각하던 하선우는 저도 모르게 승무원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는 갑판을 가로질러 선실의 문을 열었다. 5성급 호텔의 객실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너용 침실이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선체가 흔들려도 피해가 없도록 가구와 가전제품은 벽에 단단히 내장되어 있었고 욕실에는 간단한 샤워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퀸 사이즈의 침대에는 관능적인 레오파드 패턴의 침구가 깔려 있었다.

문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하선우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침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한 씨 동생 취향 알겠네요.”

침실에 들어가 가구의 수납공간을 이곳저곳 열어보던 강주한은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 한 번 으쓱거렸다. 가운과 수건이 차곡차곡 깔끔하게 채워진 것을 제외하고는 수납공간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개인적 물건은 미처 챙겨가지 못한 여자의 수영복과 속옷 무더기, 원피스 몇 벌이 전부였다.

침대 옆의 협탁에는 콘돔이 잔뜩 들어 있어 그것을 열어보던 강주한이 비식 웃으며 다시 수납함을 밀어 넣었다. 하선우는 강태한이 수많은 여자들과 뒹굴었을 침대 위에서 절대로 강주한과 엄한 짓을 벌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피를 나눈 형제답게 그들은 섹스를 탐닉했고 음란하게 즐기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강주한은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하선우는 그들이 형제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행의 일정은 1박2일로 짜여 있었다. 리펄스베이의 정박지를 출발해 센트럴에서 펼쳐지는 레이저 쇼를 감상한 뒤, 이틀째 되는 날 라마 섬에서 해수욕을 하고 다시 정박지로 복귀하는 일정이었다. 그들은 갑판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수평선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포말을 부서트리며 빠르게 나아가는 요트 위로 미지근한 해풍이 사납게 몰아쳐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바다의 표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승무원의 말에 그들은 선실로 들어섰다. 그들이 자리에 앉은 뒤 곧바로 테이블에 식전 빵과 스프가 차려졌다.

“우리 한국 가면 한정식 집 가죠.”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던 강주한이 고개를 들었다가 하선우의 표정을 살펴본 뒤 비식 웃음을 흘렸다.

“질립니까?”

“꼭 그런 건 아닌데…… 계속 기름진 것만 먹었더니 매운 게 당겨서요.”

빵의 테두리를 뜯어 먹으며 하선우는 씩 웃었다. 다시 휴대폰에 시선을 두며 강주한은 말했다.

“돌아가기 전에 한식당 들르죠.”

그의 말에 하선우는 그와의 여행이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사흘은커녕 모두 합쳐 채 48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오늘은 고작 다섯 시간 남짓 남아 있었으며, 수요일을 보내고 목요일이 되면 오후 4시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이제 슬슬 여행이라는 주술이 부려놓은 도취를 의식해야 할 때였으며, 우주선에서 지구를 한 번쯤은 바라봐주듯, 일상으로의 복귀를 염두에 둘 때이기도 했다.

하선우가 스프를 모두 비우고, 빈 그릇을 대신해 샐러드가 세팅되는 동안에도 강주한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보죠?”

강주한은 멈칫한 상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눈을 들었다. 화면을 어둡게 끄고 테이블 위에 전화기를 엎어둔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국에서의 소식이야…… 뻔하죠.”

그는 절반의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스푼을 들었다. 바쁘시군요. 하선우는 강주한의 뻔하다는 말을 의식하지 않으려 함께 미소 지었다. 면 요리와 해산물 요리, 스테이크가 차례대로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배가 불러 그것들을 조금씩 남겨두고 선실 밖으로 나섰다. 그들은 갑판의 후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트는 어느새 홍콩의 중심지 부근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선루프를 거두어 하늘을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좌우로 드높이 솟아오른 도시를 두 눈에 모두 담을 수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자 낮에는 보이지 않던 요트들이 홍콩 수역의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두 빅토리아 항구의 고층 건물 사이로 펼쳐지는 홍콩의 레이저 불빛 쇼를 관람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라는, 홍콩을 유명한 야경의 도시로 만든 관광 콘텐츠였다. 안내방송이 나오는 주파수에 맞춰 라디오를 틀고,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 본격적으로 관람할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요트의 2층 갑판에 다리를 뻗고 앉아 첨탑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요란한 안내 방송과 함께 레이저 쇼가 시작된다. 명랑한 경음악이 흘러나오고 몇 가닥의 가느다란 레이저가 하늘을 뚫으며 뻗어 나간다. 빌딩마다 음악에 맞추어 외벽을 통해 갖가지 색의 조명과 네온사인 빛을 쏟아내고 화려한 빛무리는 또다시 밤바다를 물들인다.

도시의 거대한 부피에 비해 깜빡이는 레이저는 깜부기숯처럼 연약했고, 외벽을 밝힌 조명은 거대한 광고 전광판을 보듯 익숙하기만 했다. 명성에 비해 맥 빠지는 축제였지만 그럼에도 그 빈약한 구성이 이 도시에 갖는 거북스러운 경외감을 들쑤시지는 못했다. 조금 부럽다는 생각을 하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물었다.

“재미없죠?”

하선우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바다에서 보는 건 조금 다르긴 하네요. 건축물로 이런 쇼를 만드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바다를 마주 본 도시의 첨탑 속에 수백 개에 이르는 기업의 이름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안신이나 R&K 같은 한국 기업의 간판들도 뒤섞여 있었고, 엘텍의 로고도 있었다. 홍콩의 유명 건축물에 사선으로 조명을 걸어 엘텍의 로고가 새하얀 빛무리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를 알알이 박아놓은 듯한 화려한 홍콩의 야경 속에서 그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아 조금 헤매야 했다.

하선우는 문득 자신의 존재가 티끌만큼 작아진 것 같다던 강주한의 말을 떠올렸다. 그 한마디로 하선우는 알 것 같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인지를. 비뚤어진 계시와 의무에 묶인 사람처럼 강주한이 고집스럽게 행동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유를 안다고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정다감한 그였지만, 하선우는 이제 보였다. 모든 한계를 초월하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누군가의 고혈을 짜내는 것을 서슴지 않는 그의 강경한 면들이 보였다. 그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논리가 그러하다면, 그는 변치 않고 묵시록에 나오는 비정한 집행자처럼 굴 것이다. 하선우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일면조차도 받아들이고, 꼭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과 만날 필요는 없다고 현실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요트는 방향을 돌려 아주 천천히 회항하기 시작했다. 하선우는 그대로 강주한의 다리를 베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마치 흔들리는 요람 위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반도와 섬 사이, 요트 위에 누워 있는 이 기분은 풍광이 아름답고 한적한 관광지를 여행하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죽은 물이 부유하는 포구는 적막으로 가득했고 하늘은 희붐하게 빛이 번졌으나 도시의 야경에 가려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밤이 돼도 덥네요. 여기서 잘까요?”

“밤바다 춥습니다.”

“그럼 한동안만 이러고 있죠.”

하선우는 마천루의 빛무리로부터 몸을 돌려 강주한의 허리를 껴안았다. 강주한의 따듯한 손이 부드럽게 하선우의 머리카락과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땀으로 끈적거리는 하선우와는 달리 그의 살결은 건조하고도 보송하기만 했다.

“우울한 일 있습니까.”

하선우의 음울한 기색을 읽은 강주한이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물었다. 하선우는 가만히 숨만 쉬다가 얼굴을 돌렸다. 검은 먹물을 잔뜩 찍어 붓질해놓은 것 같은 눈동자가 하선우를 다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 강주한에게서 어떠한 인간미도 느끼지 못했다던 문도일의 말이 거짓말 같았다. 다치기 전에 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오라고 했던 문도일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했을까. 하선우는 그 말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무기력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하선우는 조금 기운 없이 입을 뗐다.

“제가 대범한 성격은 아니지만 솔직한 면은 있거든요. 또 그게 장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요?”

“사실…… 계속 주한 씨한테 듣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습니다.”

강주한의 눈에 희미한 흥미가 어렸다.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으면 아무래도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우리 사이에 장애를 남기는 것보다는 미리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꺼내는 얘기예요.”

“무슨 얘기인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습니까.”

그는 짐짓 불안한 척 웃었다. 하선우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 허리를 세워 앉았다.

“서유임 씨 이야기요.”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입가의 호선을 좀 더 깊게 그리며 그는 말했다.

“그 얘기는 토요일에 했잖습니까.”

“그 얘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부부생활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 알고 싶은 겁니까? 질투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이건 거의 해명하라는 분위기인데.”

강주한은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따듯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하선우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해명을 원하는 건 아니고.”

짧은 침묵 뒤 무표정한 얼굴로 그는 말했다.

“당신 동생에게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유임 씨가 죽기 얼마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요. 별거를 요구하게 된 이유…… 아니,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이유가 철저하게 당신이 서유임 씨를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동생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강주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말을 이었다.

“금산분리 완화, 출총제 폐지, 파생상품 확대 같은……, 재벌 위주의 법 개정을 위해서 아내를 이용했다고 하던데요. 두 사람의 결혼이라기보다는 야당의 최고의원인 서동현과 엘텍과의 결합이라고 했어요. 그 속에서 서유임 씨는 그저 말없이 웃고 있어야 하는 인형이었고 부부관계라는 것도……. 그러니까 두 사람 간의 잠자리 같은 문제도…….”

“섹스리스 부부이긴 했습니다.”

그는 하선우의 말을 잘랐다.

“태한이가 말을 잘못 전했군요. 아내는 내게 별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별거 중인 상태였죠. 그리고 죽기 며칠 전에 요구한 건 별거가 아니라 이혼이었습니다. 나라면 아내가 그런 사소한 얘길 털어놓을 만큼 동생과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을 것 같은데.”

조금 놀란 눈을 한 하선우를 강주한은 명료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두 사람이 부정을 저지른 건 아닙니다. 동생이 형의 아내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갖긴 했지만 녀석이 아내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척했을 뿐이죠. 녀석은 재미있는 일을 지나치지 못하니까요. 20년 가까이 녀석을 곁에서 지켜봤으니 강태한의 본성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압니다. 그리고 나는 변명할 생각이 없습니다.”

“뭘요.”

“아내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는 텅 비워낸 맥주캔을 와삭 구겼다.

“선우 씨 입장에서는 강태한이 아니라 내 입에서 직접 듣고 싶은 이야기였으니 이런 말을 꺼낸 거겠죠. 내가 접근한 의도 자체를 처음부터 되짚어보고 싶은 의심도 있었을 테고.”

하선우는 조용히 앉아 대답을 해야 할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구겨진 맥주캔의 테두리를 엄지로 가만히 문질러대며 강주한은 말했다.

“동생이 한 말 중에 이런 말도 있었겠죠. 결혼으로 고용된 아내라는 말.”

하선우는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뺨을 긁적였다.

“서유임 씨가 별거를 요구할 때 당신에게 했던 말이라면서요?”

“그래서 지금 하선우 씨가 제일 묻고 싶은 이야기도…, 나 역시도 애인으로 고용했냐는 말이겠군요.”

하선우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긴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계속….”

강주한은 여전히 구겨진 맥주캔의 모서리를 엄지로 힘주어 느리게 문질러대고 있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강박적인 움직임을 보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주워 담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선우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랑에 가슴을 태우는 10대 소년은 아니더라도, 20대 초반의 순진한 청춘처럼 적어도 상대방이 서로의 약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얄궂게도 그의 이야기는 나를 사랑해서 만난 게 아니냐는, 철없고 상투적인 투정으로 들릴 법한 말이었다.

강주한은 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아내에게 실수를 저질렀고, 그 일을 후회하고 있으며 하선우 씨는 그 일과는 별개의 감정으로 만난다고 말한다면 나를 믿을 겁니까?”

고개를 끄덕였던 하선우는 얼마 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강주한은 표정 없는 얼굴로 하선우를 바라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지난한… 결혼생활을 다 말로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적도 도의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 두 사람은 서서히 메말라갔던 것뿐입니다. 문제를 알고 있지만 안일한 태도로 버텼죠. 고쳐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서서히 멀어지고… 아내가 죽은 뒤로는 아예 바로잡을 기회가 없어져버린 거죠.”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결혼의 막바지에 이르자 그녀는 남편을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고 남자 역시도 그 상태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내버려뒀습니다. 아내에게 모든 것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 남편이었던 거죠. 선우 씨가 내게 아내를 고용한 혐의를 인정하느냐고 묻는다면…….”

강주한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죠.”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한 뒤 말했다.

“하지만 진짜 유죄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가 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걸 방관했다는 거죠. 그녀는 내가 아무것도 바꾸려는 의욕이 없다고, 사랑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적의마저 갖고 있다고 생각했더군요. 아내가 이혼을 입에 올린 뒤에야 우리의 결혼생활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되돌릴 기회도 없었죠. 죄책감을 느끼느냐고 묻는다면.”

강주한은 쓰게 웃었다.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아내를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하선우를 보았다.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분명했던 그의 눈빛은 조금 흐릿해져 있었고 하선우는 그가 자신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수몰된 과거를 마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그 이야긴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어조가 없는 밋밋한 목소리로 말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선우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맥주를 들고 자리로 나타났다. 캔 뚜껑을 당기자 풍성한 거품이 입구를 빠져나와 손가락 사이사이로 고인 뒤 손목을 타고 질질 흘렀다. 거품이 발목을 적시고 갑판 위로 흘러내렸지만 강주한은 닦아낼 생각조차 않고 그것을 내버려두었다.

그는 맥주를 마셨다. 몇 모금 맥주를 천천히 비워낸 그는 갈증을 해소한 개운한 얼굴로, 그러나 또한 염원하던 것을 해결한 사람 특유의 힘없는 눈으로 하선우를 응시했다.

“아직도 나는 과거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도 모르죠. 인간의 쓸모는 인간의 행복보다도 중요하다고 여전히 믿고 있으니까.”

하선우는 그의 눈이 잿더미를 뒤적거려 불씨를 찾아내듯 자신을 살펴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큰형이 자주 하던 말이네요.”

“…그랬습니까?”

“저는 그 말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큰형이야 수학과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의대를 갔으니 그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살았다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큰 의미부여를 하면서 살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제가 쓸모 있어 보여서 눈에 들어왔던 건 맞는 거네요.”

“실망했습니까?”

“실망은 이미 오래전에 했습니다. 다행인 건 제 이상형이 간디나 예수, 부처 같은…… 그런 성인군자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고 이해를 한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주한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겁니다.”

“그럼 왜 웃습니까.”

“인간의 쓸모는 인간의 행복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 측은하게 들려서요. 좀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저는 쓸모 있고 행복하기도 한 인간이라고 나름 자부하면서 살거든요. 어쨌든 밥값 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중이니까요. 물론 주한 씨 입장에서는 속 편한 소리로 들리겠지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하선우 씨가 치열하게 사는 건 잘 압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 역시도 잘 알고요. 그리고 나를 버리지 못할 것도 압니다.”

그는 맥주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은 취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듯 캔을 기울일수록 맑아져갔고 눈빛은 점점 더 직선적으로 변해갔다.

“…무슨 말을.”

“이미 나를 사랑하잖습니까.”

하선우는 허를 찔린 기분으로 강주한의 차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리 없이 하선우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갑자기 고요하던 하선우의 내면에 어떤 부글거리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강주한을 마구 할퀴어버리고 싶은 사나운 감정에 시선을 내린 하선우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야…… 우리는 사귀는 사이니까 당연한 얘기죠.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선우 씨 입에서 사랑 비슷한 표현 한 번 들어본 적 없지만 하선우 씨가 내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도요.”

“그래서요. 그게 뭐가 새롭습니까.”

“나도 사랑합니다.”

하선우는 힘주어 끌어 올렸던 입술의 긴장을 서서히 허물어트렸다. 오래도록 침묵했던 그는 우물 속에 빠져 있다 나온 사람처럼 깊은 들숨을 삼켰다가 아주 작고 느리게 긴 숨을 내쉬었다. 마치 모작으로 의심되는 작품을 판별하듯, 그는 석연치 않은 무언가를 찾아내려 기민하게 강주한의 감정의 결을 더듬고 있었다. 마침내 차분히 눈을 맞춰주던 강주한이 입을 열었다.

“왜 툭 하면 그런 얼굴을 합니까.”

“……무슨 얼굴이요.”

“왜 내 사랑이 무서운 것 같은 얼굴이죠. 이번에도 내 기분 탓입니까.”

하선우는 말문이 막혔다. 억누르듯 씨근거리는 숨을 몰아쉬던 그는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그럽니까.”

“그러게요. 애정표현이 박한 분이라 아사 직전이었나 보죠.”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을 감추려 하선우는 아무것도 아닌 척 알싸한 코끝을 찡긋거렸다.

“오래 굶다 갑자기 입에 뭐 들어오면 체하는 것처럼 적응 안 돼서 더부룩하네요.”

딱딱하게 말을 내뱉으면서도 하선우는 강주한의 눈치를 보듯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의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부끄러움과 흥분을 느끼기를 주저하는 눈빛을 들여다보던 강주한이 손을 뻗어 느슨하게 하선우의 정수리를 쓸었다. 그 역시도 와 닿기를 망설이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한숨처럼 그가 하선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매번 달아날 준비를 하는 겁니까.”

긴장증 환자처럼 몸을 딱딱하게 굳히는 하선우를 감싸 안은 그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한 번 더 속삭였다.

“그렇게 애걸하는 얼굴을 할 거면서.”

* * *

어렴풋이 선잠에 들었다 깬 하선우는 옆자리가 비어 있음을 느꼈다. 손을 뻗어 침대를 더듬거리던 그는 체온이 식어 미지근해진 시트를 잠에 겨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잠결에 휴대폰 진동을 희미하게 느꼈던 것도 같았다. 강주한은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졸음과 붓기, 어둠이 들러붙은 무거운 눈을 힘겹게 깜빡거리며 잠을 떨쳐내던 그는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꼈다. 침대가 중심을 잃은 듯이 뒤숭숭하게 흔들거렸다. 그는 곧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요트 위이고 남중국해 연안을 항해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요트의 엔진음과 선체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고래의 배 속에서 들리는 울리는 진동 같았고 그를 검은 수면 아래로 깊이, 아주 깊이 가라앉게 만드는 듯하였다. 다시 반짝 잠에 빠지려던 그는 간밤에 보았던 홍콩의 화려한 야경을 기억해냈다. 수면에 비치던 빛무리, 낭랑한 음악, 그리고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차례로 떠올린 그는 잠이 완전히 달아남을 느꼈다.

‘이미 나를 사랑하잖습니까.’

‘나도 사랑합니다.’

하선우는 어젯밤 강주한이 그에게 했던 말들을 시의 구절을 외듯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 되새겨보았다. 그들은 반년을 만났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의식했지만, 우연을 빌어 미끄러지듯 한두 번 혀 위에 그 단어를 건져 올렸을 뿐 서로를 향한 직접적인 고백을 하지 않았다. 문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불문율처럼 연인이기 때문에 사랑할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로 서로의 마음을 암묵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기대해왔었다. 그러나 어젯밤 강주한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림으로써 불문율은 성문법이 되었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공고히 공포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여전히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내뱉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우스갯소리나 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랑을 구걸하는 얼굴을 할 거면서 도망치지 말라는 강주한의 말에 자칫 잘못하였더라면 그는 잘못 본 거 아니냐는 말을 할 뻔했다.

그에게는 심각한 상황이 오면 진짜 문제를 회피하려는 습관이 있었다. 대개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고 아주 가끔은 재미없는 농담을 던질 때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의 농담은 그 자신의 유연하지 못한 면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곤 했다.

목 끝까지 올라왔던 그 말을 내뱉어버렸다면 지금쯤 강주한과 한 침대에 잠들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선우는 아찔하여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창밖의 달이 환했다. 도시의 빛으로부터 멀어져 암흑뿐인 바다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별은 유난히도 총총히 빛났다. 어느새 어둠에 적응한 하선우의 눈빛도 초롱초롱해진 상태였다. 그는 선실 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찾았다. 11시 07분이었다. 한 시간이 더 빠른 한국은 지금 막 자정을 지나 수요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선우는 수요일의 의례적인 일과를 떠올려보았다. 아침 조회 후 현장점검, 생산 전반 관련 업무를 파악 지시, 밀려드는 서류를 결재한 뒤에 설계 및 직원 교육. 그 외의 온갖 변칙적인 상황들을 떠올리던 그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침대 밑의 의자에 던져둔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그는 전원을 눌렀다. 한국에서의 연락을 아주 외면할 수는 없어 하루에 한두 번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 수신된 연락을 확인하고는 했다. 이석에게서 온 메시지와 결혼 소식을 알리는 중학교 동창의 문자와 부재중 통화, 2차 벤더에서 날아온 전화 및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이자를 잔뜩 얹은 부채를 진 것처럼 그는 마음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체 문자로 해외출장 중이며 목요일에 돌아가 전화를 드리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급한 일이라면 이미 NnG의 다른 책임자와 통화를 했을 테니 늦은 시간 구태여 전화를 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요트가 떠 있는 라만 섬과 홍콩 섬 사이의 남동해안은 로밍지역이 아니었다.

하선우는 고민하다 이석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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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냐는 문자부터, 현지 법인의 분위기를 묻는 문자, 강주한 전무에 대한 사소한 질문을 포함해 이석은 월요일에 많은 메시지를 하선우에게 보냈다.

답장이 느리자 화요일에는 메시지의 전송이 뜸해졌다. 시스템 파워팩의 로열티 산출방식이 어떻게 예상되는지 기술료 요율을 알아올 수 있느냐는 질문과 강주한 전무와 친하게 지내라는 간단한 응원, 지금 뭐하냐는 질문이 전부였다. 셋째 날인 어젯밤에는 그마저도 줄어 두 개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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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음’으로 표시가 떴으리라는 생각에 답장을 해야 하는가 고민을 했지만 이석에게 곧바로 전화가 걸려올 것 같아 하선우는 메시지 앱을 종료해버렸다. 그가 지난 금요일부터 찍은 사진이라곤 울산의 엘텍 전지사업 공단과 홍콩에 있는 엘텍전자의 현지 법인이 있는 회사 외관 건물, 음식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사소한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왔고 그는 이미 둘러댄 속임수만으로도 허덕거리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거짓 증언을 증명할 근거를 꿰어 맞출 사실관계를 생각해내야 했다. 그는 강주한의 사진 한 장이라도 남겨가 이석에게 내밀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기엔 어떤 한 사람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금요일 오전 KTX에 몸을 싣고 출장을 떠나던 길에 하선우는 몸 조심히 다녀오라는 문도일의 문자를 받았다. 잘 다녀오겠다는 답문을 보낸 이후로 두 사람은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는 한국을 떠나오면서 성일금형과 엘텍하이스코 간의 특허 시비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았다. 여행을 불과 이틀 남짓 남긴 지금, 그는 한국의 소식, 특히 문도일과 관련된 동정이 단절된 느낌을 받았다. 이런 느낌을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지 확실히 태도를 정하지도 못했다. 하선우의 생각 속에는 많은 불순물이 뒤섞여 있었고 타오를 만큼 발화점이 높지 못했다. 문도일의 문제는 문도일의 문제였고, 강주한의 문제는 강주한의 문제였다. 그는 그렇게 상황을 놓아버리기로 결정했다.

넓은 선실을 지나 그는 갑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강주한은 그곳에도 없었다. 배의 후미로 가보았지만 난간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바다를 가를 때마다 남겨지는 으스스한 항적만이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었다.

계단의 난간을 짚고 그는 1층으로 내려갔다. 살롱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는데 그 사이로 희미한 빛과 함께 낮은 강주한의 목소리가 함께 새어 나오고 있었다.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문을 밀어 젖히려던 하선우는 서늘하게 쏟아지는 강주한의 목소리에 문고리를 향해 내밀던 손을 멈추었다.

“하선우 씨와 내 문제를 걸고넘어지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듣던 중 가장 재밌는 소리군요.”

그는 웃음을 흘렸다. 마치 마른 검불이 비벼지는 듯한, 파편 같은 건조한 웃음이었다.

“그래요. 평범한 연애가 아니라 가십난을 한동안 뜨겁게 달굴 거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녀석이 가진 리스트는 내게도 있습니다. 오히려 태한이 쪽이 더 발을 구를 상황이죠. 기혼녀 낙태 문제까지 얽혀 있으니 그 문제를 건드리진 않을 겁니다.”

하선우는 숨을 죽였다. 강주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좁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어둑하기만 했고 강주한은 문을 등지고 테이블에 기대 서 있어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윤 기자에게 넘기려는 특종은 가십이 아닐 테니까. 흥밋거리가 아니라 공분을 살 이야기를 전해주겠죠. 누군가를 감옥에 보낼…… 그런 이야기를 특종으로 전할 겁니다.”

강주한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다. 하선우는 일시정지 상태로 오련한 강주한의 검은 형태를 바라보았다. 그는 테이블에 기댔던 몸을 떼어내 요트의 후미에 붙은 갤리로 걸어갔다. 바닥에 붙은 와인 저장고에서 미니 샴페인을 꺼낸 그는 휴대폰을 어깨와 턱 사이에 받치고 병의 뚜껑을 비틀어 땄다. 다시 살롱으로 걸어온 그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 앉고는 미니 샴페인을 병째 마시며 통화를 계속했다.

“태한이는 상속분쟁에 영향을 줄 증거를 갖고 있을 겁니다. 임경호와 나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겠죠. 앞으로 대법원 상고 과정을 지켜보면서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겁니다. 음, 관광사업 주무부서 인물들을 관리했다는 말씀대로라면 리조트 계열사를 확장할 계획인가 보군요.”

강주한은 턱을 느리게 쓸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자료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놨을 겁니다. 그게 뭔지 알아내세요. 빨아서 없앨 수 있는 얼룩이면 미리 지워놔야겠습니다.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이번 일은 성일금형처럼 쉽게 털어낼 수 있는 먼지가 아닙니다.”

강주한은 병을 기울이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어렴풋한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하선우는 그의 전화를 엿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못 박힌 듯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장외, 장내 주식, 이사회, 우호 지분, 엘튼 호텔과 리조트를 매각, 또는 전문경영인을 앉히는 등의 복잡한 이야기들이 강주한에게서 덤덤히 흘러나왔다.

그는 계속 술병을 기울이다 술병이 비자 이제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는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손목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는 엄습하는 피로에 겨워하면서도 차분히 머리를 굴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나직한 강주한의 목소리를 좁은 문틈 사이로 훔쳐 듣던 하선우는 발소리를 죽여 뒷걸음질 쳤다. 바다의 파도 소리보다도 작게, 선체의 흔들림보다도 조심스럽게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간 하선우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는 이불에 가로막혀 되돌아오는 자신의 한숨이 칠흑 같은 바다처럼 어두운 한기를 닮아 있다고 느꼈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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