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L] 도둑들 5-14. 조응(調應) (2) (14/26)

14. 조응(調應) (2)

보트 너머로 뻗은 다리가 대롱거렸다. 미지근한 바닷물이 그의 발바닥을 적시며 파랗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미지근한 손바닥에 볼을 기대고 에메랄드빛의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의 시야 속으로 매끄러운 인영이 헤엄쳐 들어왔다. 자유형으로 유연하게 선체에 들러붙은 남자는 하선우를 향해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뙤약볕에 반만 눈을 떠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강주한은 말했다.

“수영 더 안 합니까?”

하선우는 손안에 뺨을 기대느라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즘 쉬그요.”

강주한은 발로 선체를 밀쳐 스프링처럼 탄력을 얻고, 요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멀리 사라져 갔다. 해풍에서는 희미한 소금기와 비린내가 났고 햇살은 따사롭다 못해 바늘처럼 쨍하게 내리쬈으며 수면은 빛을 산란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해변이 가까운 자리를 찾아서 선장은 배를 정박했고 그들은 라마 섬 인근에서 여유롭게 해수욕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들은 자그마한 2인용 콤비 보트를 타고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와 있었다. 이곳의 물은 염분이 낮았고 수심이 3미터를 훌쩍 넘길 만큼 깊었기에 수영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 없던 하선우는 구명조끼를 챙겨 입어야 했다.

그는 보트 주위를 빙빙 돌며 헤엄치는 강주한을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강주한은 수영을 잘했다. 반나신으로 물속을 유영하는 그의 맨몸은 물고기의 비늘이 돋아난 것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가만히 둥둥 떠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파도는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바다로 그를 조금씩 밀어냈고 그는 점점 더 선체로부터 멀어져갔다. 보트에 홀로 남겨진 하선우는 강주한이 멀어질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치밀었지만 보트 안에는 그의 걱정을 불식시키듯 구명조끼와 밧줄, 튜브 및 휴대폰, 요트의 선장과 수신이 가능한 무전기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늘이 없어 얼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뜨거운 햇볕에 발갛게 익은 팔뚝의 살을 가만히 문지르던 하선우는 별안간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강주한의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전화 오는데요!”

두 손을 모아 크게 소리치자 강주한이 자유형으로 재빨리 헤엄쳐 보트의 선체를 잡았다. 담을 뛰어넘듯 몸의 반동을 이용해 훌쩍 올라탄 그가 당황한 얼굴로 물에 빠지는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보트에 올라타는 강주한과 반대로 선체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하선우는 물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기도로 넘어가는 짠물을 뱉어내며 하선우는 얼굴을 죄 찡그렸다.

“됐어요. 그냥 물에 있을게요.”

손을 내미는 강주한의 모습이 역광에 비쳐 온통 검게 보였다. 고개를 저어 손길을 거부한 하선우는 발로 물을 마구 걷어차며 뒤로 헤엄쳐 보트로부터 멀어져갔다.

강주한은 오늘 아침부터 잦은 전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홍콩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일부러 전화기를 꺼둔 하선우와 달리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좀 김이 새긴 했지만, 아니, 김새는 것 이상의 심란한 무언가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지만 그의 짧은 전화통화까지 걸고넘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선우가 그에 대한 간섭을 접어버린 이유는 간밤 그의 통화를 엿들은 까닭이 컸다.

햇볕이 따가워 물속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그는 팔다리를 천천히 흐느적거렸다. 육체를 밀도 있게 건드리는 바닷물의 유속을 느끼며 그는 몸을 움직이던 근육의 긴장을 모두 놓아버렸다. 물속으로 잠겨들 때의 먹먹한 소음과 수면 밖의 쏴한 해조음이 번갈아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눈을 감고 어렴풋하게나마 어딘가 간지럼을 일으키는 그 감각에 취해 물속을 부유하던 그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나 눈을 떴다. 그러나 여전히 선체와 10여 미터 떨어졌을까 싶은 거리였다.

낚시나 하자고 할까. 요트에 있는 낚싯대를 떠올린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도로 꾹 다물어버렸다. 전화통화를 하는 그의 표정이 묘했다. 정확히는 하선우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그랬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범주의 표정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아득한 경계를 넘어 수신되는 전파를 타고 온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서로의 눈빛이 일치의 점을 찾듯 꼭 들러붙었다. 하선우는 그의 눈빛 속으로 홀리듯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강주한은 전화를 끊었다. 보트 위에 휴대폰을 툭 던진 그는 하선우와 반대 방향의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멀리까지 헤엄쳐 사라지는 강주한을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던 하선우는 엉거주춤 개헤엄을 쳐 보트로 다가갔다. 보트에 힘들게 올라간 그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소금맛에 침을 연신 바다로 뱉어내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새까맣게 변한 화면을 하선우는 찡그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강주한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를 리 없었다. 손을 뻗어 수신을 확인해볼까 고민하던 하선우는 입안의 짭짤한 침만 그저 바다로 퉤 뱉어버리고 말았다.

그사이 강주한은 보트와 계속 멀어지고 있었다. 바다를 헤엄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기본적으로 근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강주한의 너머로 펼쳐진 수평선과 그의 발아래 아득한 해저면의 깊이를 생각하자 하선우는 그가 너무도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의 뇌리로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서 마비되는 강주한의 모습이 섬뜩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떤 행복은 비극의 기운을 머금은 느낌을 풍길 때가 있고, 하선우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 역시 위태로운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는 더 멀리 나아간다. 그는 이제 거의 하선우의 엄지손톱만큼 작아져 있었다. 하선우는 거의 눈을 찡그려가며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파도는 바다를 향해 치고 있었고, 그는 물결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사라져갔다. 하선우는 짠맛이 느껴지는 아랫입술을 저도 모르는 사이 짓씹고 있었다.

자유형과 평형으로 번갈아 헤엄쳐 나아가던 그는 갑자기 물속에서 멈추어 섰다. 숨을 고르듯이 제자리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그가 돌연 손을 흔들었다. 파도가 그의 상체를 뒤덮을 듯 날름거렸고, 그는 부표처럼 수면 위와 아래로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오랫동안 거듭했다. 그는 여전히 계속 손을 흔들어댔다. 하선우는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안녕 하고 손을 흔드는 것인지, 아니면 구조요청을 하려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선우는 고개를 보트 밖으로 길게 빼내어 심각한 눈으로 강주한을 살펴보았다. 그가 보내는 신호를 오독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동안 심장이 가빠지고 선체를 감아쥔 손아귀에서는 진땀이 끈적하게 솟아올랐다. 위험이 그의 머릿속에 경고등을 울렸다. 마치 하선우가 강주한과 함께 파도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기라도 하듯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결국 그가 선장을 부르려 무전기를 드는 순간, 얄궂게도 강주한이 배를 향해 헤엄쳐 오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게.

파도를 거슬러 오는 속도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뎠다. 돌진하듯 나아갔던 좀 전과는 달리 그의 움직임은 바다에서 빠져나오려는 진저리에 가까웠다. 하선우는 발가락 끄트머리에서 갑작스럽게 치미는 경련에 이를 악물었다.

승무원들이 보트를 요트의 선미에 부착하는 것을 지켜보며 강주한은 생수병을 기울였다. 숨이 차도록 물을 반병 가까이 급하게 비워낸 그는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닦아냈다. 희게 질린 하선우의 얼굴을 돌아본 그가 풀썩 웃음을 흘렸다.

“선우 씨는 근처에서 물장구친 게 전부잖습니까. 수영은 내가 했는데 왜 선우 씨가 기진맥진한 얼굴을 합니까.”

하선우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주한 씨가 물에 빠진 줄 알았어요.”

강주한은 나지막이 웃으며 물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장골에 걸쳐진 수영복을 끌어 올릴 생각도 않고 선루프의 그늘 속에 놓인 선베드에 드러누운 그는 지친 표정으로 하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달콤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그의 몸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가쁘게 산소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은 쉼 없이 오르내렸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마치 무감정한 얼굴에 억지로 웃는 입술을 합성한 예술작품처럼 어딘가 어색하고, 작위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철렁했습니까?”

“예. 저 멀리서 손 흔들 때…… 구조 요청하는 줄 알았거든요.”

한순간에 갑자기 겨울나무처럼 여윈 것 같은 하선우를 쳐다보던 강주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폐부가 가득 차도록 거창하게 숨을 들이쉰 그는 선베드의 팔걸이를 잡고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를 넓게 벌린 그는 긴 정강이를 팔걸이에 기대고 발목을 서로 엇갈려 편안하게 앉았다.

“일부러 그랬습니다.”

하선우는 비스듬하게 뜬 눈으로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아 하선우는 되물었다.

“뭐라고요?”

“……일부러 한 번 그래 봤다고요.”

“그런 게 재밌어요?”

강주한은 포멜라를 집었다. 사람의 피부 같은 불투명한 껍질을 아무렇게나 벗겨내 그 속에 뭉쳐 있는 노란 올챙이 떼 같은 과육을 치아로 긁어냈다. 연한 과육이 뭉크러지고 사방으로 포멜라의 향기가 퍼져 나갔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장난을 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그의 태도는 하선우에게 불편한 느낌으로 남았다.

그는 과일 하나를 더 집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열대과일이었다. 시체 썩은 냄새를 풍기는 그것을 오른뺨이 불룩해지도록 씹어 먹은 그는 엄지와 검지에 묻어난 과육을 입술로 빨아 훔쳐내고는 체리와 오렌지, 자몽 따위를 먹었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면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하선우의 입술이 벌어졌다. 어제의 사랑한다는 말에 이어 갑자기 왜 오늘은 싸우자는 시비를 거는 건가 싶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강주한이 하선우의 팔목을 잡았다. 그는 별다른 말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호하고도 검질긴 그의 힘에 하선우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하선우는 그가 무슨 생각과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결국 조심스럽게 그를 파헤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강주한은 감아 쥔 하선우의 팔목에서 힘을 거두며 말했다.

“휴대전화 배터리 남았습니까?”

“예? ……예.”

“그럼 지금 휴대폰 전원을 켜는 게 좋겠습니다.”

하선우는 미심쩍은 눈길로 강주한을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판을 지나 객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갑갑하게 몸을 조이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던지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휴대폰 전원을 눌렀다. 누가 제 마음의 잔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근질근질하고 뒤숭숭했다.

초조한 기다림 뒤에 시스템이 실행되었다. 부재중 통화와 수신된 문자가 쏟아질 듯 수신함을 채우고 있었다. 모두 이석에게 걸려온 전화와 문자였다. 하선우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석연찮은 수준을 넘어 불길했다. 요금폭탄 따위 알 게 뭐냐. 이석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하선우는 내심 그가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발신음이 울린 지 5초도 지나지 않아 이석이 전화를 받았다.

-너 전화 왜 이렇게 안 받아.

속을 삭인 목소리였다. 하선우는 이석이 분노를 넘어 체념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웬 전화를 이렇게 많이 걸었어. 무슨 일 있어?”

-문자 확인 안 했냐?

“어? 어……. 아직 못했어. 부재중 통화 보고 바로 전화 건 거라. 무슨 일인데?”

당장이라도 퍼부어댈 것 같던 분위기와는 달리 이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선우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아주 힘들게 입을 떼었다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엘텍에서는 별말 없냐?

“별말이라니. 그게 무슨……. 없어. 아무 말도 못 들었어.”

-그럼 됐고. 너 지금 당장 한국 돌아와라.

“왜.”

-급한 일이 생겼어. 그게……, 그게 말이지.

“왜 자꾸 뜸을 들여? 무슨 일인데.”

짜증 섞인 하선우의 말에 이석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벡스에서 엘텍 상대로 소송 걸었다더라.

하선우는 이석의 말이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벡스면…… 엘텍 계열사 아냐? 엘텍의 계열사에서 엘텍에 소송을 걸어?”

더듬거리며 자신이 내용을 받아들인 대로 되짚어 말한 하선우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엘텍 계열사에서 왜?”

전화기 너머로 수심에 가득 찬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끊지 말고 내가 보낸 메시지 읽어봐.

하선우는 휴대폰의 버튼을 눌러 메신저 앱을 실행했다. 아직 읽지 않은 메시지가 100여 개에 달했다. 이석과 김주안, 문도일을 비롯해 윤 대리 및 그가 아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이석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안녕하십니까. 엘벡스 대표이사 김운형입니다.

엘벡스는 2일 자사가 독점계약을 맺은 전극소재기술 특허를 침해한 엘시스를 상대로 시스템 파워팩에 대한 사용(생산)금지 가처분 신청을 서울 중앙지법에 요청하였습니다. 나노튜브를 이용한 이차전지 소재기술을 사용한 시스템 파워팩에 대해 생산, 사용, 양도, 판매 행위를 중단하도록 요청했고 이를 이행하지 않고 판매 행위를 진행할 경우 1일에 최소 10억 원의 이행 강제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소장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대기업의 자회사인 엘시스의 소송에 대응해 기술자산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 엘벡스는 특허기술이 적용된 제품의 생산을 즉각 중단하고 10억 원을 우선적으로 보상하라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소송의 배경은 위와 같으며 특허계약 체결에 대한 귀사의 협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불응 시 엘벡스와 NnG의 특허계약에 고의적인 반사회적 법률 행위가 의심되는 바, 자사가 독점계약을 맺었던 전극소재기술 특허를 타사와 이중계약 체결한 NnG의 하선우 사장과 그 내용을 잘 알면서도 특허 이중계약에 적극 가담한 대표이사 이석을 업무상 배임죄로 고소할 예정입니다.

한 번을 읽은 뒤에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그는 작게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한 번 더 반복해 읽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머리가 텅 비어서 글자를 읽어도 뜻이 잘 인지가 되지 않았다. 한 번 더 거듭해 읽은 뒤에야 뜻을 이해한 그는 닫힌 선실의 문을 돌아보았다. ‘자사가 독점계약을 맺었던 전극소재기술 특허를 타사와 이중계약 체결한 NnG의 하선우 사장과 그 내용을 잘 알면서도 특허이중 계약에 적극 가담한 대표이사 이석을 업무상 배임죄로 서울 중앙지법에 기소할 예정입니다.’ 머릿속으로 의문부호가 가득 떠올랐다.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를 기소한다는 말이지.

“그럼 엘벡스가, 그러니까 우리가 두 번째로 계약 맺었던 회사가 엘텍 계열사가 아니라는 거야?”

-그런 것 같아.

“왜?”

-…….

“그…… 형이 비상장 음극소재 회사라고 했잖아. 자료까지 받았고. 그…… 누구더라. 누구더라. 엘텍 IP센터에서 장 실장. 특허센터 실장한테 확인 전화까지 했잖아.”

-……했지.

“근데 왜?”

-나도 모르겠어.

하선우는 답답한 마음에 전화기를 반대편 손으로 바꿔 들었다.

“도대체 뭔데 이게. 무슨 상황인 건데.”

-모르겠어.

한숨을 푹 내쉰 하선우는 목소리를 억눌러 말했다.

“이사님이 모르면 누가 알아.”

휴대폰 너머로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파의 수신이 좋지 않아 치직거리는 소음이 그의 괴로운 숨소리와 한데 뒤섞였다.

“엘벡스에 전화는 걸어봤어?”

-응. 전화를 거니까 웬……. 오히려 역성을 내더라. 그쪽 말로는 자기들이 우리 때문에 피해를 보게 생겼다고 손해배상 청구할 거라고 하더라고.

“장 실장은? 그 사람이랑 계약 맺었다며.”

-장 실장은 그냥 특허 전문 브로커였어. 그 새끼도 오히려 이제 와서 왜 사람 뒤통수 치냐고 노발대발하더라고. 대기업이랑 엮인 줄 알았으면 자기도 안 건드렸다면서 욕해대는데…….

이석의 욕설을 한 귀로 흘리며 하선우는 정수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사기당한 거야?”

두 사람 사이로 두터운 침묵만이 쌓여갔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하선우는 입을 열었다.

“아니, 대체 왜?”

이석은 울고 싶다는 듯 속삭였다.

-모르겠다. 나도.

하선우는 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럼…… 간단하네. 사기당한 걸 증명하고 계약을 파기하면 되겠네.”

-저쪽에서 우리를 기소한다고 나올 정도면 그게 쉽게 증명이 될까 싶다, 나는.

“석 형. 형이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아무런 의심 없이 법인 인감과 증명서, 위임장을 이석에게 넘겼던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선우는 어느새 허리를 푹 숙이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는 차마 묻기 두려워 목 졸린 소리를 내며 물었다.

“엘텍에서는?”

-팩스로 공문 왔어. 잠시만…… 읽어줄게. 잠깐 중요한 부분이…….

전화 너머로 몇 번이나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이를 급하게 넘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찾았다는 탄식 섞인 중얼거림이 이어진 뒤에 이석의 한숨이 이어졌다. 한숨이 잦은 통화였지만 그가 이번에 내뱉은 한숨은 뒤틀린 내장 깊은 속에서 길어 올린 듯이 유독 어둡고 탁한 기운을 품었다.

-특허권 이중계약은…… 특허권자에 제1계약자, 제2계약자 사이에 복잡한 법률관계를 발생시키고 특허권자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수반합니다. 엘텍전자와는 통상실시권을 계약하는 동시에 특약을 설정하여 특허권자의 실시권을 획득한 뒤, 복수로 제2계약자와 독점적 통상실시권을 계약한…… 주식회사 NnG 소속 하선우 사장에 대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예정입니다. 하아, 아무튼 이렇게 법무팀에서 연락이 왔어. 2차 공문은 법적 검토가 끝난 뒤에 보내준다고는 하는데 아무튼 네가 한국으로 와야 할 것 같다. 자세한 건 한국에서 얘기하자. 홍콩에서 많이 바쁘냐? 분위기는 괜찮고?

“어…… 뭐, 그렇지. 몰랐으니까. 아무튼 갈게. 가야지.”

전화를 끊은 하선우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몸으로 바다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이곳이 여전히 따듯한 남중국해의 바다 위이고 적도와 가까운 홍콩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선우는 이곳이 천국이라고 해도 느끼는 기분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패닉이 오자 어떤 대처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의 모든 회로가 싹둑 잘려나간 것 같았다. 그는 생각의 침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든 것을 초래한 것이 자신의 무관심과 안일함이라니 더더욱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지옥의 입구를 열어 선실 밖으로 나갔다. 요트는 속도를 높여 정박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해풍은 여전히 지옥불처럼 뜨겁기만 했다. 강주한은 갑판의 난간에 팔을 걸치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반나절 해수욕을 했을 뿐인데 상아색에 가깝던 그의 피부는 화상을 입은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삼지창과 뿔, 꼬리만 달려 있으면 지옥 같은 상황은 더 완벽해질 것 같았다.

자신에게 패닉이 오면 생각이 또렷해지기보다는 도망갈 곳을 찾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그는 한 번 더 실감했다. 또다시 심각한 상황을 회피하려는 습관이 그의 머릿속에서 도지고 있었고, 하선우는 서둘러 부풀어 오르는 상상을 털어내버렸다.

그는 선루프 그늘 아래에 가만히 서서 앞으로 흘러가게 될 자신의 운명을 그려보았다. 그가 특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저 특허를 출원하는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 수준 정도에 불과했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 특허전문 변호사를 만나 상황을 수습해보는 게 중요했다.

“한국 돌아가야겠죠?”

강주한과 조금 거리를 둔 채로 하선우는 말했다. 목소리의 끄트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비굴함이 묻어나 있었다.

강주한은 난간을 손으로 툭툭 건들며 물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까.”

하선우는 도저히 자신의 입으로 사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장 한심스러운 치부를 드러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자 앞에서 그가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기를 당한 것 같습니다.”

강주한은 그제야 고개만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따갑게 찌르는 햇살에 내리깐 눈으로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거의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시선에 하선우는 어느 먼 바다에 홀로 남겨진 조난자가 된 것 같았다.

“IP센터의 장문혁 실장이 특허계약을 위해 고의적으로 접근을 했고, 엘벡스가 엘텍그룹의 계열사라고 속였기 때문에 엘텍전자와는 완벽하게 계열 분리된 비상장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이중으로 특허계약을 맺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엘벡스가 엘텍전자와 계열 분리된 회사라 엘텍전자에 특허와 관련된 실시권을 요청할 수가 없어 아무런 의심 없이 장문혁 실장의 요구로 독점적 통상실시권을 계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NnG의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공식적으로 해명한 내용이라는데 맞습니까?”

하선우는 마른침으로 쩍 달라붙는 입술을 떼 간신히 대답했다.

“예.”

강주한은 몸을 돌려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하선우가 알지 못하는 아주 다른 사람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나마 서운한 마음이 들 뻔했지만 얼른 그 마음을 한구석으로 던져버리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한국 돌아가면 이중계약 철회하겠습니다.”

강주한은 아주 조금, 비스듬히 웃음을 지어보였다.

“쉽지 않을 겁니다.”

“아뇨. 증명 가능합니다. 자료도 있고……. 무엇보다 계약을 맺은 시기가 엘텍이 앞서잖습니까.”

“물론 시일은 엘텍이 앞서긴 합니다. 하지만 엘텍이 맺은 계약은 비독점계약에 가깝고 하선우 씨가 엘벡스와 맺은 계약은 독점계약입니다. 애초에 엘텍과 맺으려 했던 전용실시권을 유지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죠. 특허권 소유자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계약서에 특약을 넣은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었습니까.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때 특허계약을 맺을 게 아니라 하선우 씨의 특허를 살 걸 그랬군요. 수많은 거래를 해왔지만 선불금을 받아간 기업이 제1계약자의 눈을 속여 이중계약을 맺은 사례는 단 한 건도 본적이 없습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형사 고발당해서…… 아, 아니. 변호사 선임 같은 절차를 밟으면 사실을 밝히는 게 가능할 겁니다.”

강주한은 횡설수설하는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빛 속에서 걸어 나온 그는 하선우를 굽어보았다. 하선우는 본능적으로 그 얼굴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취사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얼굴임을 알았다. 그의 얼굴에는 묘하게도 패색의 기운이 짙게 어려 있었다. 하선우는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강주한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파고들면 전모야 밝혀지겠죠. 하지만 브로커를 잡아넣는 데 그칠 겁니다. 그 후에는 엘텍과 하선우 씨, 그리고 엘벡스 사이에서 지루한 소송 과정이 이어질 겁니다. 아주 길게는 몇 년을 끌지도 모르죠. 지금 엘벡스가 어떤 기업인지 파악도 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외국의 악질적인 특허 회사인지 아니면 정말 단순한 에너지 전문기업인지 모르겠지만 하선우 씨 덕분에 지금 내가 골치가 많이 아픕니다.”

그의 앞에서 하선우는 한없이 작아진 기분을 느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던 사이였지만 그런 건 이제 상관없었다. 하선우는 자신이 저지른 안일한 실수에 체면이 서질 않았고, 강주한은 그에게 너무 커다랗고 먼 존재로만 느껴졌다.

하선우를 몰아세우는 저 입술에서 어젯밤 사랑한다는 고백이 흘러나왔었지만 과거의 일은 서고의 먼지 쌓인 앨범 속에 고이 간직한 추억만큼이나 하찮게 느껴졌다. 자신이 강주한이었다고 해도 오만정이 다 떨어졌으리라.

그는 법인인감 도장과 위임장, 온갖 증명서를 이석의 손에 넘기던 순간에 자신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하선우는 그 자신의 한심함에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버리고만 싶었다.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하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혼나는 학생처럼 두 손을 배 위에 포개고 선 그는 이곳이 요트가 아닌 삭막한 사무실처럼 느껴졌다. 내쉬는 숨결마다 한숨이었다.

하선우와 거리를 두고 있던 강주한이 가까이 걸어왔다. 그는 소금기로 거칠어진 하선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이마 뒤로 넘겨주었다. 강주한의 온기를 찾으려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대고 싶었지만 하선우는 남자로서, 실수를 저지른 사업가로서 비굴하게 그의 인간적인 부분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보통 이럴 경우 가차 없이 행동합니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경계가 참 모호하군요.”

하선우는 근심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뺨을 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아이의 얼굴에 생긴 생채기를 살펴보듯 세심하게 흔적 하나하나를 눈여겨본 그는 양손의 엄지로 주름이 얕게 파인 미간 사이를 꾹꾹 눌러 인상을 펴도록 했다. 하선우는 불과 몇 십 분 전에 마주쳤던 강주한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눈빛에는 진짜 웃지 않는 무감한 감정만큼이나, 진짜 화를 내지 않는 초연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하선우를 관통해 그 속의 불안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선우는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주한이 말하던 취사선택.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 선택하는 것은 그의 본능이었고 그가 숙명으로 받아들여온 것들이었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강주한은 이미 하선우에 대한 취사선택을 마쳐두었을 것이다. 다만 하선우는 그가 왜 그 자리에서 특허와 관련된 사실을 털어놓지 않고 먼 바다까지 헤엄쳐가며 하선우의 마음을 졸이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그 자신의 위기와 하선우의 괴로움을 놓고, 자신이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상처의 크기를 확인하려 피학적인 폭력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하선우의 눈을 집중해서 바라보며 말했다.

“몇 가지 해결책을 생각했습니다. 시간 길게 끌지 않고 말하죠.”

하선우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첫 번째가 뭔데요?”

“내 밑으로 들어와요.”

“그게 무슨.”

“CTCO 부서에 선우 씨 엔지니어 자리 만들죠. 우량기술과 최고고객 관리를 담당하는 내 밑의 직속부서입니다.”

하선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쉰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전 사장이라서 옮기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라고.”

“대표이사가 있잖습니까.”

하선우는 높은 벽을 눈앞에 둔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래도 그건 너무 갑작스럽고… 또 특허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잘…….”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선우 씨의 특허를 무효처리 할 겁니다.”

무심코 벌어지는 입술을 응시하며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특허를 무효화하고 포기하는 데는 비용이 따를 겁니다. 고의적인 특허 포기이기 때문에 엘벡스에서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제기할 거고요. 그 비용은 제가 개인적으로 대겠습니다. 특허를 유지하느라 엘텍이 제기하는 천문학적 금액의 손해배상 청구 요금을 배상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차라리 특허를 포기하고 엘벡스에 위약금을 지급하는 게 낫겠죠. 개발된 실물이 없으면 위약금을 포함해서 손해배상금이 10억 단위를 넘지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특허 자체에 대한 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건데요.”

강주한은 공평무사한 눈빛으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어렵지 않은 상식을 이해시키듯 그는 말했다.

“권리를 유지하든지 금전적으로 이익을 얻든지 그건 모두 하선우 씨의 마음에 달렸으니 선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선우 씨가 특허로 적은 이익을 챙겨가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엘텍으로부터 2억의 선불금과 사업투자를 받았고 …이번에 엘벡스로부터 기술료로 1억 5천을 받았더군요. 맞습니까?”

“예. …그랬죠.”

“하지만 선우 씨가 권리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겁니다. 일차적으로 엘벡스에서 NnG의 두 대표를 이중계약 혐의로 고소할 테고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할 경우, 손해배상 청구도 각오해야겠죠.”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NnG 사장을 그만두고 엘텍으로 옮겨갑니까.”

하선우는 시름을 느끼며 강주한의 상박을 잡았다. 강주한은 뿌리치지 않고 하선우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엘텍에서 도의적 차원으로 소송을 걸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엘벡스로부터 받은 기술료가 1억 5천이니 위약금으로 최소 4억 5천을 갚아야 할 테고 손해배상 청구까지 받으면 선우 씨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그냥 도와주는 거 아닙니다. 내 밑으로 스카우트하는 겁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말이 단번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치 버튼 한 번 잘못 눌렀을 뿐인데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불과 십 몇 분 전까지 자신은 피해자였는데, 도장과 날인, 서류 몇 장에 의해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의 실수조차도 실감 나지 않았고, 억 단위로 오가는 소송과 위약금의 배상액은 더더욱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상황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으로 일단 돌아가서 상황파악부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선우는 의식적으로 희미하게나마 웃음을 띠며 물었다.

“다른 방법은 뭔데요. 몇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웃음을 길게 유지하느라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는 하선우의 입가를 내려다보던 강주한은 계단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내려가서 하죠.”

그들은 1층의 살롱으로 들어갔다.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지나치게 밝고 요란한 분위기의 응접실이었다. 앞으로 나눌 그들의 대화가 그를 질식시킬 수준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니 이 명랑한 분위기가 하선우는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강주한은 칵테일을 주문했고 하선우는 타는 속을 달랠 물 한 잔만을 주문했다. 다리를 꼰 강주한은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칵테일 속의 빨대를 휘저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여유로움이 도리어 자신을 압박한다고 느꼈다.

“특허 전문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이사의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티슈를 깔고 그 위에 빨대를 내려놓은 그는 라임과 민트로 혼탁해진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시큼한 칵테일의 맛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가장 큰 피해는 특허 소유자인 선우 씨가 받을 테고 대리인인 이사는 별다른 손해를 입지 않을 텐데도 잘못을 덮어두기 급급해서 늘어놓을 법한 변명들을 둘러대더군요. 사실 이사는 하선우 씨의 의사표시를 대신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뿐이잖습니까. 내가 이석이라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입을 닥치고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을 텐데 말이죠.”

강주한은 조금 애석하다는 듯이 웃은 뒤에 덧붙였다.

“그래서 선우 씨가 대표이사와 통화를 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석 씨가 특허 전문 브로커… 흠, 그러니까 엘텍그룹의 IP센터 장 실장이라는 사내와 만남을 갖던 시기를 중심으로 계좌를 추적해봤습니다. 계약을 맺은 이후 800만 원이 대표이사의 개인계좌로 입금되었더군요.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오만 생각이 들더군요. 고작 800만 원에 판단력이 흐려지는 사람을 곁에 두고 사업을 하기에는 하선우라는 사람이 아깝다는 생각과…….”

“…….”

“대표이사의 배신행위로 인한 무단계약으로 이석에게 모든 법적책임을 지울 수 있겠다.”

강주한은 아무런 감상이 없는 얼굴로 하선우를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대리인의 사기행각으로 인한 다중계약 체결일 경우, 그 계약은 무효화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피해를 이석 씨가 떠안게 되겠지만 선우 씨와 엘텍이 입는 피해는 최소한이 되겠죠.”

이석이 뒷돈을 받았다는 충격은 차치하고서 강주한의 말을 듣는 동안 그는 안에서 조금씩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함을 느꼈다. 강주한의 어조는 침착했고 눈빛 또한 사사로움이 없었지만 방법을 제시한다기보다는 그에게 어떤 압력을 가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건 이사님을 매도…….”

“매장이죠.”

“…….”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겁니다. 수십억의 빚을 지는 대신 징역을 살 수도 있죠. 저라면 징역을 살 겁니다.”

그의 어조는 하선우에게 지나치게 명징하게 느껴졌다. 그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 하선우는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그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남의 인생 매장하면서 제 인생 편해지는 건 싫습니다. 이사님이 뒤에서 저 몰래 은밀하게 주고받은 돈이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그건 이사님과 제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강주한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하선우를 건드릴 듯이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 말이 편한 제안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악을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선우 씨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하선우는 가만히 숨만 쉬었다. 반은 텅 비고 나머지 반은 수치심에 잠긴 사람의 얼굴로 그는 물었다.

“…이후의 선택지는 뭐가 남아있습니까.”

“특허법원으로 이 사건을 끌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허법원이면… 특허등록 자체를 무효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 처음에 했던 제안과 무슨 차이가…….”

석연찮은 얼굴로 말을 흐리던 하선우는 곧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까끌한 입안을 혀로 느리게 쓴 그는 쓴웃음을 흘렸다.

“자발적으로 특허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강제로 포기를 당하느냐. 둘 중에 하나 하라는 거죠? 지금.”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면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다 끌어안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중계약을 철회할 수 있다면요?”

“말했다시피 특허소송이라는 건 길게는 몇 년을 끌고 가는 문제죠.”

“그렇겠죠. 먼지 같은 성일금형도 특허 문제로 4년을 끌었으니까요.”

강주한은 눈빛을 달리하며 비스듬히 기울였던 몸을 뒤로 젖혔다. 하선우는 간신히 평행을 유지하고 있던 강주한과 자신의 세계가 궤도를 달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충돌을 향하여 조금씩 방향을 꺾고 있음을, 서로가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음을 느꼈다.

“지금 하선우 씨의 태도는 사고를 수습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주한 씨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제 특허가 가치가 있는 특허인 것 같아서 더 포기가 안 되네요.”

비스듬히 눈을 뜨는 강주한을 보며 하선우는 말했다.

“GM자동차에 들어가는 시스템 파워팩에 제 원천기술이 포함돼 있다는 건 저도 압니다. 그래서 지난주 금요일에 울산에 완공된 엘텍 전지공장 다녀왔을 때 내심 뿌듯하기도 했어요.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종합기술원에 출근을 하다 보니 아주 바보는 아니거든요.”

“태도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 같은데.”

강주한은 잘라내듯이 말했다.

“하선우 씨는 지금 NnG의 사장으로서 엘텍에 끼친 피해를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이지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주장할까,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닙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말들을 감당해보려 잠자코 숨만 몰아쉬었다. 잔을 두 손으로 꽉 감아쥔 그의 손가락 마디 끝마다 새하얗게 관절이 불거졌다. 그는 강주한의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특허를 무효화하고 나면 제 기술과 관련된 모든 권리는 자연스럽게 엘텍으로 양도되는 거겠군요.”

그의 혼잡한 머릿속으로 강영광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비집고 들어왔다. 왜 하필 지금, 그의 인생에 손톱만큼도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뇌리를 파헤치며 기어 나오는가, 의문을 품었던 하선우는 곧 그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억울하지 않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모듈 테스트 시설을 갖춘 엘텍의 종합기술원이 놀이터라도 되는 것마냥 매주 한 번, 협력업체 연구원 자격으로 찾아오는 하선우를 미친놈 취급하며 강영광은 그런 말을 했었다.

‘죽어라 대가리 굴려봐야 결국엔 회사 좋은 일 하는 게.’

그는 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보는 눈으로 하선우를 바라보곤 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긴 하지만 하선우는 작년 늦가을 무렵부터 올해 여름까지, 엘텍에 출근도장을 찍고 있었다.

하선우가 낸 원천특허에서 착안한 기술을 진보시킨 또 다른 기술들을 엘텍 종합연구소의 수많은 연구원들과 함께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국내에서 등록한 특허만 60여 개에 달했다. 그 특허는 직무발명에 속해 협력업체 연구원으로서의 하선우는 개발에 따른 보상금만 급여로 받을 뿐이었고, 원천특허 소유자로서의 하선우는 60여 개의 특허가 실용화될 경우, 각각 로열티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에 타격을 주는 것은 로열티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로열티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차치물론된 이미지에 불과했다.

발생, 모의 태, 뿌리가 싹둑 잘려나가고 엘텍이란 이름 아래서 끝없이 번식하며 형질을 변형시켜나갈 자신의 기술들을 생각하자 하선우는 모욕을 받은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대가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엘텍의 이름으로 출원되는 특허의 서류란에 엘텍 소속의 발명자 중 하나로 기재되고는 했다. 또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하는 것만으로 통장에 세금을 제한 220만 원을 달마다 입금받았다. 대한민국 30대 남성 평균 월급의 3분의 2 수준이니 한 달에 고작 네 번 출근하는 것치고는 아주 달콤한 대가였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선우는 정말 강영광의 말처럼 죽어라 대가리 굴려 엘텍에 유리한 일만 하고 있었다. 이대로 하선우의 원천특허만 무효처리 해버리면, 엘텍전자에서 국내외로 출원한 특허는 오롯이 엘텍그룹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불과 몇 초 사이에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났고, 하선우의 눈빛은 순식간에 온기를 잃었다. 그는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강 전무님이 저를 만난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대로 하선우는 선실로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하선우는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나왔다. 해수욕 뒤에 샤워도, 하다못해 세수조차 하지 않아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은 소금기로 푸석푸석해 보였다.

“여태까지 나름대로 기대에 부응해드린 것 같은데 일이 잘 마무리되어가는 판국에 한심한 실수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일단…….”

하선우는 마른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습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제 입에서 포기한다는 말은 안 나올 것 같네요.”

차가운 목소리로 빠르게 쏟아낸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올라 2층의 갑판 위로 올라간 그는 선실 속으로 들어갔다. 문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깊숙이 걸어간 그는 욕실 속으로 숨어버릴까 고민하다, 갑자기 모든 게 의미 없이 느껴져 욕실 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마치 나선의 껍데기 속에 몸을 감춘 달팽이처럼 방어적으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등 뒤에서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손아귀에 짓눌리고 강하게 몸이 돌려세워지는 바람에 하선우는 강주한의 얼굴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선우는 눈을 내리깔았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얼굴에 가득 쓰여 있었다.

“애처럼 이럴 겁니까.”

“…….”

“눈 맞춰요.”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강주한은 종용했다. 하선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며 눈을 들었다. 낯선 타인을 보는 듯한 하선우의 응시에 강주한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하선우는 억눌렸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주한 씨의 태도를 보고 느꼈습니다. 내 특허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가치가 있는 특허였구나.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되지 않을 만큼 돈이 되는 그런 특허인가 보다. 그럼 나는 먼지 정도는 아니고, 빨아서 없애야 하는 얼룩 정도는 되겠구나!”

의미심장해지는 강주한의 눈빛을 보며 하선우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엘텍에 유리한 기회가 아닐까. 원천특허를 무효화할 구실이 생겼으니 강주한 씨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어쩌면, 성일금형의 문도일이 내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선우는 마지막 말을 뱉어내고는 아랫입술을 느슨하게 깨물었다. 강주한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그는 눈을 감았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싼 그는 싸울 기력을 끌어모으다, 돌연 자신을 팽개치는 투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는 다를 거라는 한심한 기대를 했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특허도 주고 몸도 대주고 나중에는 마음까지 주고. 아… 나 되게 순정파였네요.”

그는 지난밤에 의혹을 너무나도 예사롭게 넘겨버렸다. 서유임의 입에서 나온 ‘결혼으로 고용된 아내’라는 말이 품은 수많은 번뇌를 너무 쉽게 간과해버렸다. 강주한의 꿀 발린 말에 홀려 진지하게 되짚지 못했던 감정에 하선우는 온통 뒤흔들리고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손목을 잡아 이마를 가린 손을 치워냈다.

“눈 떠요. 눈 뜨고 시선 맞춰요.”

목소리를 더 없이 낮추며 강주한은 말했다. 하선우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떠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하선우 씨가 내게 왜 이러는지 오히려 이해가 안 갑니다.”

“이해가 안 간다고요?”

“보잘것없는 회사를 키워준 것으로도 모자라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준 사람에게 고작 이런 취급을 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의도가 불순하다. 그딴 유치한 말을 하려는 거면 관둬요. 내게 첫눈에 반하는 애들 장난 같은 사랑을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운명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선우 씨야말로 내가 아무것도 없었다면 내 옆에 있었겠습니까.”

“저는 강주한 씨가 재벌이라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하선우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강주한 씨에게 저는 그냥… 목적지에 가는 와중에 잠깐 들러 가는 기착지일 뿐인 것 같네요. 약탈하고 안 내놓으면 불 지르고 떠나버리고. 내 말 틀렸어요? 틀렸으면 특허 포기 안 한다는 내 말을 그대로 수용해주세요.”

팽팽하게 당겨진 서로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강주한은 숨을 죽였다. 의심을 담아 자신을 겨누는 하선우의 눈빛에 숨이 막히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이마 위로 힘줄이 가느다랗게 불거졌다.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며 그는 말했다.

“특허를 포기할 생각도 없고, 대표이사를 이중계약 혐의로 고소할 마음도 없다면… 선우 씨는 손해를 어떻게 감당할 생각입니까. 예? 선우 씨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랍니까.”

“왜 미리 결론을 내야 합니까. 한국 가서 저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보고 결론을 내려도 안 늦잖아요. 그때까지 시간이라도 달라고요.”

“그때까지 엘텍전자가 입을 손해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는 하선우의 어깨를 짓누른 채로 물었다. 하선우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조금 벌린 채 주저하고 있자, 강주한이 벌어진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묻었다 떼어냈다. 하선우는 흠칫 몸을 떨며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빼냈다. 강주한은 끓는 얼굴로 말했다.

“조금만 하선우 씨가 더 유연했으면, 조금만 더 부정직한 사람이었다면 뒤로 물러나지 않았겠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활용을 안 합니까. 하선우 씨는 가장 큰 내 약점인데. 내가 하선우 씨를 가장 큰 약점 취급해주고 있잖아요. 혹시 압니까. 베갯머리송사 한 번이면 녹아나게 될지.”

“정말요?”

“…….”

“정말 베갯머리송사 한 번이면 제가 원하는 원칙대로 해줄 겁니까?”

하선우는 희미하게 일그러진 얼굴 위에 비스듬한 웃음을 걸며 말했다.

“주한 씨는… 베갯머리송사에 넘어갈 만큼 저한테 정말로 넘어온 적이 있긴 합니까? 언제나 무언가를 버리고 선택하면서 차익을 계산하던 게 아니고요?”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던 하선우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거두어졌다.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강주한이라는 사람한테 나는 뭘까 싶네요. 빼앗고 싶은 장난감을 쥔 어린아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갖고 싶은 장난감은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데도 아이가 말도 잘 듣고 제법 유순하게 굴어서 내버려뒀던 게 아닐까. 그런데 장난감에 흙을 묻히고 돌아다니니 화가 나서 빼앗아버려야겠다 결심한 건 아닌가.”

말없이 듣고만 있던 강주한이 처음으로 표정을 구겼다. 하선우는 빠르게 언성을 높였다.

“지금 내가 드는 생각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굳이 내가 아니었어도 상관이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바보 같은 소리 좀 그만해요!”

강주한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하선우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상박에 손을 얹으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럼 왜 제가 원하는 대로 안 해주는 겁니까. 주한 씨가 내미는 조건 납득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내가 저지른 실수 모르는 척해달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만회하게 해달라는 거잖아요. 내 거니까! 내가 죽어라 노력해서 얻어낸 걸 빼앗지 말라고 그걸 부탁하는 거잖습니까. 페어플레이 하자고요.”

“페어플레이요.”

하선우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되짚어준 강주한은 헛웃을 흘렸다.

“페어플레이, 공정함이라.”

그것이 흥미로운 단시라도 된다는 듯 단어를 천천히 음미한 그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공정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애초에 공개 입찰에서 엘텍의 거래처로 NnG를 내정자로 두고 심사를 진행했을 때부터 공정한 거래는 없었어요.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잊은 것 같은데, 하선우 씨도 동의했고 불과 1년도 안 된 일입니다. 입찰에서 떨어진 세 곳은 회사 존폐의 위협을 받았죠. 그리고 이번 일은 대표이사가 뒤로 돈을 받았다는 것부터가 실수라고 덮어둘 만한 사건이 아닌 겁니다. 공정이요? 선우 씨가 대표이사를 그렇게 감싸주고 싶다면… 나도 내 식의 공정한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어요.”

강주한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짧은 연결음이 들리고 누군가와 통화가 연결되었다.

“이 시간 이후로 엘텍전자와 하선우 출원인과의 통상실시권 계약해지 절차 밟도록 하죠. 위반사항이 명백하니 해지할 수 있을 겁니다. 선불금으로 지급된 2억에 대한 위약금으로 6억, 손해배상금은 별도로 청구하십시오. 그리고 엘벡스 대표이사 김운형이란 인간이 누군지 알아와요. 아니, 엘벡스라는 회사 정체가 뭔지 알아내요. 그리고…….”

그는 하선우의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특허무효심판 청구 준비하세요.”

전화를 끊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선우를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며 말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낸 걸 왜 그렇게 안일하게 남의 손에 맡겼던 겁니까.”

육지가 코앞이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침대 위에 벗어두었던 셔츠를 맨살 위에 그대로 걸쳐 입었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바싹 마른 입술, 완전히 무감한 상태의 표정. 망연자실에 가까운 하선우의 무無한 얼굴이 자신에게 반항을 한다고 느꼈다. 총과 칼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는 얼굴이었다. 강주한은 소금이 가늘게 부수어지는 머리카락을 손갈퀴로 쓸어 올리고는 하선우의 맞은편에서 허리를 숙였다. 하선우와 눈을 맞추며 그는 말했다.

“하선우 씨. 우리 이런 일로 싸우지 맙시다.”

하선우의 무기력한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격렬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모조리 지켜보며 강주한은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걸 잘 알잖아요. 몰랐던 것도 아니잖습니까.”

“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알고 있던 것과 실제로 겪어보는 건 천지차이네요.”

하선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길이 창밖으로 성큼 다가온 육지를 향했다. 그의 외면은 고요했지만 그의 속은 어느 순간부터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듯한 원심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마치 회전속도를 초과해 재료의 물성을 파괴해버리는 극한의 속도에 다다른 것처럼, 한계속도의 임계에 아슬아슬하게 다다라 있었다. 어깨에 가볍게 닿아오는 강주한의 손을 밀쳐낸 하선우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휘두르지 마요. 터질 것 같으니까.”

강주한은 밀쳐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강남에 위치한 70평대 아파트와 목동의 상가 정리해 넘기라고 하겠습니다. 위약금도 없던 얘기로 하죠.”

“강주한 씨. 그보다는…….”

“사과를 받고 싶다면, 하겠습니다. 특허무효심판 청구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고집을 부리면 하선우 씨의 욕심이 과한 겁니다.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봅니까. 이 일이 불합리하게 느껴집니까? 맞아요.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겠죠. 하지만 나는 하선우 씨의 실수와 대표이사의 부정을 합리적으로 처리할 생각이 없습니다.”

눈높이를 맞추려 강주한은 허리를 숙였다. 그는 하선우가 느끼는 고통을 해부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나 순진한 하선우 씨.”

“…….”

“화는 고통을 동반하지만 증오는 고통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화와는 달리 증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거든요.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불합리한 일에는 뭇매를 맞을 악인이 필요합니다. 화가 아니라 증오를 퍼부을 대상 말입니다.”

그는 숨을 거의 쉬지 않는 하선우를 향해 말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일이 왜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지는 하선우 씨도 내심 알고 있을 겁니다. 아니면 감정에 치우쳐 나를 증오하는 사람들 편에 서고 싶은 겁니까?”

하선우는 참고 있던 숨을 탄식처럼 쏟아냈다.

“아뇨. 나는 화를 내는 거예요. 절망스럽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텅 비어 있는, 아무것도 없어 그저 공허하게 먹어치울 뿐인 강주한을 노려보며 하선우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그만해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껴안으려는 강주한의 팔을 밀쳐내며 진저리를 친 하선우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우리 헤어져요.”

강주한은 느리게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가 너울처럼 흔들거렸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눈물을 비벼 닦느라 하선우는 강주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강주한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감정에 치우쳐서 하는 말…….”

“원래 연애는 감정에 치우쳐서 하는 겁니다. 만나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하선우는 시뻘게진 눈으로 강주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눈에 담는다는 표현이 적절한 응시였다. 하나의 유구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그 얼굴이 하선우의 심장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순간 이후로 그는 강주한을 단념하고, 그를 증오하는 사람들 편에 설 것이었다. 조금의 연민도 이해도 없이 마음껏 미워하리라 생각하며 하선우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내 짐은 다 버려요. 추억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작은 가방을 챙겨 정박지로 뛰어내린 하선우는 손바닥으로 눈을 부여잡았다. 폭력적인 여름의 태양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빛에 적응한 두 눈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채찍질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바닷가에서 달아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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