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심연(深淵)
-임자 형. ……형?
격렬한 소음이 여기저기서 펑펑 터져 나온다.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짝짓기를 하려는 가을벌레의 신경질적인 울부짖음 같기도 했고, 사람의 비명소리와 폭발음을 닮기도 했다. 철 지난 유행가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뒤죽박죽 뒤섞였고, 그 사이로 총성과 흐느낌, 걸걸한 욕설이 울려 퍼졌다.
고막을 날카롭게 헤집는 포격음을 뒤로하고 홀로 적요하게 서 있는 남자. 그는 냉막하게 다물린 입술과 무감동한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풍기는 분위기는 권태롭고도 오만하다. 이지적으로 솟아오른 광대뼈와 약간 마른 듯 패인 뺨, 굵직하고도 남자다운 턱, 준수한 외모지만 또 너무 비현실적으로 잘생기지는 않은 외모였다. 남자의 피부에서는 윤이 났고, 마른 근육에 다리가 길어 무엇을 입어도 핏이 좋았다.
하선우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마주 보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찾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다. 매일 잠들기 전에 보는 천장에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얼룩을 찾아내거나 자주 입던 티셔츠에 적힌 영어가 실은 엉터리 문장이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는 것과 비슷했다. 남자의 외모는 마치 최종 선언문과도 같았다.
너는 조금도 잊지 못했다고. 여전히 그 남자가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조롱하고 있었다.
-임자 형! 렉 났어요? 아! 아? 씨바! 장판 깔렸! 아……! 마린아, 극딜! 극딜! 지금 다운 맥여!
-오빠 저 한 번도 안……해 봤! 잘…… 못해요! 지금요?
화면 속에서 최종 보스 몬스터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스몹이 광역 공격을 시전하기 전에 일어나는 전조였다. 재빨리 딜러인 하선우가 다운을 먹여 광역 스킬을 차단해 파티원의 전멸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하선우에게 게임 속의 전투는 자신과는 무관한 먼 사건에 불과했다. 그는 지금 마우스 휠로 자신의 게임 캐릭터를 확대해 바라보고 있었다.
몇 달 전에 그는 게임 서버에 권법을 사용하는 권사 캐릭터를 생성했었다.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맞붙는, 줄여서 PvP에 가장 유리한 직업군을 고르다 보니 만들게 된 권사는 마우스와 키보드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컨트롤 위주의 캐릭터였다.
잘 만든 콘텐츠와 세련된 그래픽, 현실감 넘치는 전투 시스템으로 2년 전부터 한국과 중국은 물론 미국에서 유저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대박 게임이었다. 롤플레잉 게임인 ‘카르달’은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선정적이고 폭력의 수위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카르달의 장점이라면 그래픽이 세련되고 캐릭터가 아름다우며 외모를 섬세하게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이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이디를 만들고, 직업군까지 선택한 하선우는 캐릭터의 성별을 남자로 정한 뒤에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캐릭터의 외모를 조정했었다. 눈매와 눈의 크기, 눈썹의 굵기서부터 콧망울의 도톰함과 이마 돌출의 각도 같은 세세한 부위까지, 여자들이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듯이 캐릭터의 외모를 조각해나갔다. 체구와 덩치, 다리 길이와 팔의 굵기, 손 크기까지 상세하게 조절을 끝낸 그는 필드 위의 캐릭터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마치 자신이 만든 상像에 반한 키프로스의 왕처럼.
자신이 최초로 만들었던 게임 캐릭터가 누구를 닮았는지를 깨달은 피그말리온은 백일몽에서 깨어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반쯤 먹어치운 라면은 보기만 해도 신물이 올라올 만큼 흉하게 불어 있었고 그가 있는 곳은 40평 남짓한 PC방이었으며 아무런 기반 없이 사는 인생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돌연 현실을 깨닫게 된 그는 키프로스의 왕처럼 신에게 캐릭터를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캐릭터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지워버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림자 형! 렉이면 말 좀 해줘요. 형 없으면 이번 판 못 깨요. 헤드셋 고장 난 거면 겜톡 확인해봐요.
-임자 오빠, 뭐해요?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공들여 키워온 ‘고독의그림자’를 무無로, 아무것도 아닌 허무의 존재로 지워버리는 것은 그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는 고독의그림자의 무고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런 죄가 없다. 캐릭터가 필연적으로 연상시키는 누군가의 얼굴이 하선우로 하여금 어떤 씁쓸한 기억을 불러오게 할 뿐, 그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그가 오래전의 추억 속으로 소급해 들어간 동안, 자신을 포함해 화면 속의 파티원 모두 전멸했다.
헤드셋 너머로 요란한 한탄 소리가 들려오고 채팅창에 미친 듯한 속도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결국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냈다. 롤플레잉 전용 유저들이 사용하는 게임톡 창에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미안^ㅁ^; 나 잠깐 피씨 방 밖;; 뒤에 앉은 손님이랑 문제가 있었어. 십 분 뒤에 돌아갈 테니까 대기 타고 있어!」
문자를 꾹꾹 찍어 보낸 그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퉁퉁 불은 라면과 단무지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매일 얼굴도장 찍는 아르바이트생이 이젠 라면이 아닌 우동이 되어버린 음식을 보고는 입맛이 없나 봐요, 한마디 했다.
“예. 질리네요, 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웰치스 포도맛 하나 주세요.”
빨대를 꽂은 캔을 들고 그는 자리로 돌아왔다. 갑자기 눈앞의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오후 4시였지만 암막스크린으로 가린 창에서는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실내를 밝히는 빛은 파랗고 노란빛이 도는 조도가 낮은 조명과 LCD 모니터 빛이 전부였다. 퀴퀴한 냄새가 밴 의자와 때가 낀 마우스, 최면에 걸린 듯 창백한 인상의 사람들을 쳐다보던 그는 단맛이 강하게 나는 탄산을 쪼옥 빨았다.
하선우는 자신의 캐릭터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이용자가 많아 더 이상의 캐릭터 생성이 불가능한 서버 중의 하나인 ‘절세의 이루칸’에서 최근 PvP 랭킹 5위를 기록한 권사였다.
준결승전 이후부터는 게임 채널에서 PvP 랭킹전을 생중계했기에 TV에 나가고 싶지 않아 5위로 기권했지만 게임 게시판과 그와 관련된 사이트에서는 그의 실력을 암암리에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PvP 토너먼트 이벤트로 결코 적지 않은 보상을 받았다. 그의 캐릭터가 손목에 끼고 있는 권갑 무기인 ‘신의 무화’로 전설급의 무기템이었다. 또한 그는 토너먼트 이벤트를 통해 캐릭터의 무기는 물론 엄청난 금액의 금화와 물약, 그리고 의상을 받았는데, 서버 내에 세 벌밖에 없는 옷이었다.
캐릭터의 상의는 거의 탈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죽으로 된 벨트를 승모근과 잘 짜인 가슴 근육 위에 꽉 맞게 조인 것이 전부였다. 하반신의 사정은 좀 나아서 그나마 뭐라도 제대로 걸치고 있었다. 스키니한 핏의 검은 에나멜 가죽바지는 흰색 광이 번쩍거리는 디자인이었고 신발은 군화를 연상시키는 검은 워커였다. 머리장식으로는 납작한 제복 모자를 쓰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의지 능력치를 0.3% 향상시키는 의상 장식이 걸려 있었다. 채찍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주화의’는 당장이라도 주인님 하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코스튬 의상에 가까웠다.
옷을 장착하던 당시에는 섹시하네 하고 말았지만 캐릭터에 자신의 무의식이 투사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꼴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시발. 하선우는 조용히 욕설을 뇌까렸다.
-형 왔어요?
“응.”
-엥? 옷 갈아입었어요? 많이 본 옷인데.
하선우는 컴퓨터 책상에 의자를 바짝 끌어 붙였다. 파티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채팅창이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선우와 몇몇 길드원은 게임을 하는 도중에 키보드를 두드리기 싫어 헤드셋을 이용하지만, 마이크 이용이 부담스럽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구성원들은 채팅창을 이용하곤 했다. 4, 6인 구성원의 파티를 맺으면 커다란 LCD 모니터의 구석이 새로운 메시지로 늘 요란하게 반짝거리곤 했다.
-형! 그거 무슨 옷이에요?
하선우는 갈아입은 캐릭터의 옷을 휙휙 둘러보며 길드 매니저인 청원에게 대답했다.
“기억 안 나. 그냥 있는 거 입었어.”
스치면뒈진다 : [ 그거 맨첨에 수련할 때 받는 옷인데. 줘도 안갖는 완전기본템ㅋㅋㅋ ]
oO부들부들Oo : [ 전설옷은 질렸다 이거임? ]
“부들 형. 질려서 안 입는 건 아니고요.”
-임자 형, 주화의 안 입으려고요?
“응. 안 입어. 청원이 가질래?”
-헐! 헐! 저 줘요.
스치면뒈진다 : [ 주화의 거래불가템임^^ 분해도 불가능함ㅋㅋㅋ ]
“아… 거래도 안 되고 분해까지 안 돼?”
-헐! 형 분해하려고요?
스치면뒈진다 : [ 임자형이 드디어 미쳤다ㅋㅋㅋㅋㅋ ]
oO부들부들Oo : [ ㅋㅋㅋㅋㅋㅋ ]
꽃보다마린 : [ 오빠 미쳤어요? ㅠㅠ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앙대여 ㅠㅠ ]
하선우는 무심한 눈길로 아이템 보관함 속의 코스튬 복장을 바라보았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단 탄산음료를 빨며 그는 대답했다.
“안 미쳤어.”
-아씨! 아까워. 형 갑자기 왜요? 옷에 옵션 붙지 않았어요? 크리티컬이랑 의지, 치명타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긴 한데. 옷이 너무 변태 같아.”
하선우는 란제리룩에 가까운 전투복을 입은 힐러 캐릭터가 부끄러운 모션을 취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캐릭터의 행동은 게임 창에 ‘/아잉’을 입력할 때 나오는 소셜 액션이었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길드 내 별명이 ‘거야’인 그녀가 이번에는 ‘/엉엉’을 입력해 우는 모션을 취했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임자오빠 ]
“응.”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임자오빠 앞으로는 주인님 옷 안 입을 거예영? 되게 주인님 같았었는데 ]
게임음가슴으로하는거야 : [ 버리지마여. 이렇게 빌게여. ]
-거야 말 묘하게 한다. ……하하.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마린 언니 뭐가여? ]
-응?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제 말이 뭐가 묘해여? ]
꽃보다마린 : [ ....아니야^^;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 ]
수 초간의 정적이 파티창에 흘렀다. 농도의 차이일 뿐 어느 곳을 가든 진상은 존재했다. 하선우는 그 진리를 얼마 전부터 새삼스레 고작 게임 속에서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 정도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정도는 아니니, 귀여운 진상에 속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저런 건 진짜 도발도, 유혹도 아니었다. 손안에서 호두알을 굴리고 노는 정도의 감흥만 줄 뿐이다. 하선우는 잇새로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수리 다 해놨지?”
-예. 가죠, 바로.
“그럼. 고 한다.”
채팅창으로 올라오는 파티원들의 대답을 확인한 하선우는 곧바로 마우스로 몬스터를 겨냥하고 폭격을 가했다.
하선우의 캐릭터 ‘고독의그림자’인 권사는 주로 몬스터에게 강력한 데미지를 가하는 딜러의 역할을 했기에 그는 늘 몬스터의 우선 공격을 받아내는 어그로를 끌곤 했다. 동시에 그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파티장으로서 파티원의 역할을 하나하나 지도 편달했다.
“응, 지금… 그래. 마린아, 서포트 안 하고 뭐해? 보호막 켜야지…. 하나, 둘, 지금 W키 눌러. 10초 뒤에 암귀 위에 붉은숨결 터져 나올 때 진다가 속박 스킬 써.”
그들이 들어온 곳은 ‘암귀의 나락’이라는 던전이었다. 열흘 전, 카르달이 대대적인 개편을 거치며 메인 스토리가 서드에서 포드 시즌으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 중에 공개된 메인 퀘스트였다. 현재로서는 게임 내에서 가장 고난이도의 던전이었다. 최하층인 무간지옥에는 최종 보스 몬스터인 아비암귀가 나락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퀘스트가 공개된 당시에는 던전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진 정보가 없었다. 최종 보스까지 최단 시간 안에 클리어하는 것을 놓고 수많은 길드에서 치열한 경합을 겨루었다. 포드 시즌이 공개된 지 62시간 하고도 18분 만에 하선우의 길드에서 ‘암귀의 나락’을 클리어하였다. 이는 하선우가 속한 서버에서 첫 번째 클리어였고, 전체 게임 성적에서 보자면 두 번째로 빠른 기록이었다.
첫 번째는 맨땅에 헤딩이라 죽을 맛이었지만, 두 번째로 던전에 들어갔을 때는 클리어하기까지 열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세 번째에는 네 시간 만에 게임을 끝냈고 이제는 함께 던전에 들어가는 파티원의 수준에 따라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안에 최종 보스를 잡을 수 있었다. 몬스터가 얼음 공격을 펼칠 때는 어떤 공격으로 방어를 해야 하는지, 광역 공격의 전조를 보일 때는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공격의 패턴이 보이자 반응의 방법이 떠올랐고, 도식화시킬 수 있었으며 공략을 짜낼 수 있었다.
카르달의 포드 시즌이 공개된 지 열흘째, 벌써부터 온라인상에는 다양한 공략집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선우는 게임에 열중해 사는 하드 유저들이 그러하듯 직업별 몬스터 대응 공략을 게임 게시판에 정리해 올렸고, 운영진들은 그의 글을 유저들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가이드북으로 퍼 날랐다. 하선우가 카르달 게임에 미쳐 살던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임드 유저가 되어가고 있었다.
1,200만에 달했던 아비암귀의 피가 점차 줄어들어 420만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변신을 코앞에 둔 3페이즈 단계였다. 거대한 도깨비의 형태였다가 두 번째 변신을 거쳐 백의의 날개 달린 천사로 바뀐 몬스터는 샛노란 불빛을 사방으로 흩뿌린 후에 또 한 번의 변신을 거듭했다.
물처럼 반투명한 인간 형태의 벌거벗은 그림자가 구체의 암기를 파티원들에게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게임 초반에 아비암귀의 칼을 한 방 맞고 죽어나간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를 제외하고 끝까지 버텨주던 파티원들 대부분이 이미 쓰러진 뒤였다. 하선우와 꽃보다마린, 스치면뒈진다는 시간제한으로 전멸의 위기를 코앞에 두고 간신히 최종 보스를 쓰러트렸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로의 수고를 고마워하는 가운데 거야가 채팅창에 글을 올렸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임자 오빠 수고하셨어여 ㅠㅠㅠㅠ 저 무기 먹는 거 때문에 맨날 이렇게 도와주시구 ㅠㅠ ]
“고맙기는. 다 같이 무기 먹으러 온 건데. 상자 열어봐. 무기는 나왔어?”
-아! 형 저 검 나왔어요!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뜨케여ㅠㅠㅠㅠㅠㅠㅠ저 이번에도 안나와써여. ]
oO부들부들Oo : [ 어.... 이번에도 내꺼만 나왔네. 미안 거야야; ]
“거야가 운이 없네. 엊그제도 두 번 연속 그러더니.”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임자 오빠 한 번만 더 버스태워줘여; ]
“아… 미안. 나 지금 PC방에 29시간째 있는 거라서 좀 졸려. 집에 가봐야 돼.”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ㅠㅠㅠㅠㅠㅠㅠㅠ임자오빠ㅠㅠㅠㅠㅠ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ㅠㅠㅠ임자오빠 안대여ㅠㅠㅠㅠㅠㅠㅠ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ㅠㅠ임자오빠 가지마여어ㅠㅠㅠㅠㅠㅠ ]
꽃보다마린 : [ 오빠 내일 접속할거죠? ]
“응.”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ㅠㅠ임자오빠 다른 길드사람들이랑 파티맺어서 가면 안돼요? ]
꽃보다마린 : [ 거야야 내일해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언니는 무기 먹었잖아요...^^;; ]
꽃보다마린 : [ ....너는 스테이지 시작하는 즉시 죽으면서;; 무기가 꼭 필요해?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무기가 구려서 죽는거라구여ㅠㅠ ]
꽃보다마린 : [ .... ]
스치면뒈진다 : [ 발로 컨트롤 하면서 무기탓하고있냐 ㅋㅋㅋ 존웃ㅋㅋㅋㅋ]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힝ㅠㅠ 나만미워해 ㅠㅠ ]
꽃보다마린 : [ 오빠 피곤하대 나도 피곤하고 ]
oO부들부들Oo : [ ....일단 나갈까? ]
스치면뒈진다 : [ 나가여. 생명의 회당에서 만나여들 ]
“그래.”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ㅠㅠ내일은 무기 머긍ㄹ수있게찌?ㅠㅠ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ㅠㅠㅠ흑흑 내일도 도와줄거져? ]
“어. 접속하기 전에 문자해.”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임자오빠거마어여 ㅠㅠ 어빠 사랑해여 ]
던전의 후방 게이트를 타고 밖으로 나온 그들은 각자 볼일을 본 뒤에 회당에서 뭉쳤다. 생명의 회당은 길드회관이 있는 장소였고 그곳에는 몇몇 길드원의 캐릭터가 가만히 서 있었다. 대학생들의 시험기간인 데다가 퇴근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도 더 남아 있었기에 서버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인벤토리 정리를 마친 하선우는 접속시간을 확인하며 휴대폰의 전원을 살짝 눌러보았다.
30시간 가까이 PC방에 머물렀지만, 걸려온 부재중 통화라고는 대출 관련 스팸 전화가 전부였다. 덕분에 배터리가 3분의 1도 닳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틀째 연락이 없는 막내아들의 안부가 궁금하지도 않은지 흔한 문자 하나 보내지 않았다. 그에게 오는 메시지라고는 스팸 문자와 게임 전용 메신저 앱를 통해 날아오는 길드원들의 메시지뿐이었다.
-오늘은 그 찌질이 접속 안 하네요.
“찌질이?”
-맨날 형 쫓아다니는 미친놈 있잖아요. 전에 PvP에서 개 발렸던 싸이코 새끼. 멋도 모르고 길드 가입시켜줬다가 형한테 하는 짓 보고 제가 강퇴시킨 놈 있잖아요.
“아… 그새끼…. 차단했어. 말 못 걸게.”
-어쩐지 안 보이더라. 장비 겁나 비싼 것만 장착해도 발려서 이젠 PvP 대전하자는 말도 안 꺼내죠?
“뭐, 그렇지.”
하선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F2를 눌러 샌드박스를 열었다. 차단한 유저의 아이디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접속중이라는 뜻이었다.
-임자 형.
“응.”
-저 스킬 찍은 것 좀 봐주세요.
“응. 연결해봐. ……너처럼 발컨인 애가 이렇게 찍으면 죽기 딱 좋지.”
-아 형!
“내 블로그 들어가봐. 던전, 퀘스트, PvP 상황 바뀔 때 어떻게 스킬 바꿔서 찍어야 하는지 분석해서 올려둔 자료 있거든? 참고해서 바꿔.”
-형은 정말 덕후계의 지존이에요.
“…어. 하나도 안 고마워.”
싫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하선우는 탄산이 거의 다 빠진 설탕물 같은 음료수를 쪽 빨았다.
oO부들부들Oo : [ 임자 ]
“예. 형.”
oO부들부들Oo : [ 내일은 전사캐로 들어와. 나 권사 무기 필요해. 거야 던전 돌 때 같이 돌자. 나도 버스태워줘ㅋㅋ ]
“이 사람들이! 내가 진짜 버스기사로 보이나. 버스비 받을 거야.”
oO부들부들Oo : [ 뭐야 남녀차별함? ㅋㅋ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헤헿 ^^* 임자오빠는 임자이씀 내꺼라그래영 ]
“뭐라는 거야. 나는 나만의 건데?”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집에 돌아가면 저녁도 먹지 않고 곧바로 세수만 하고 침대로 기어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의미 없는 대화만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또 자신을 찾았다.
스치면뒈진다 : [ 형! 가기 전에 저랑 비검사로 한판 하고가요. ]
“졸려. 내일 해.”
스치면뒈진다 : [ 아... 내일 못들어오는데 ]
꽃보다마린 : [ ....와... 오빠 비검사도 키워요? ]
“응.”
꽃보다마린 : [ 아이디 몇 갠데요? ]
“여덟 개.”
꽃보다마린 : [ 헉ㅋㅋㅋㅋ 다 만렙찍었어요? ]
oO부들부들Oo : [ 다 만렙 찍고 무기도 암귀의 나락 던전에서 나온걸로 바꾸지 않았냐? ]
“예. 바꿨어요.”
꽃보다마린 : [ ㅋㅋㅋ대박@[email protected];;;;;; 낫닝겐ㅋㅋㅋㅋㅋㅋㅋㅋ]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헤헿 ^^* ]
스치면뒈진다 : [ PC방 폐인으로 살면 가능합니다 ]
“진다야. 너 스치면 진짜 뒈진다.”
꽃보다마린 : [ 진다가 오빠 아픈 데 찔렀어 일부러 말 안 하는건데 ]
“어. 아프다. 갑자기 현타 오네.”
-흐흐, 맞다, 형! 정모 오실래요? 이번 주 금요일에 홍대에서 모이는데.
“바빠.”
-형. 휴대폰으로 보면 형 맨날 접속 중이던데.
“응. 게임하느라 바빠.”
꽃보다마린 : [ 지겹지도않아요...? -ㅁ-;; ]
“지겨우면 게임하겠냐?”
-형 또래 누나들도 많이 와요. 제 또래도 많이 오고.
oO부들부들Oo : [ 오 여자들 많이 와? 좋겠다 ]
-부들이 형도 오세요.
oO부들부들Oo : [ 부산에서 올라가는 차비만.... 차비는 그렇다 치고 잠은; ]
-밤새고 놀다 가는 거죠!
oO부들부들Oo : [ 꺼져;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부들 오빠도 오고 임자 오빠도 와여 저도 갈게요 ]
스치면뒈진다 : [ 거야 너 말고도 임자형 오기를 누나들이 벼르고 있다ㅋㅋㅋ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ㅅ-;; 오빤 내건데여;; ]
-형, 와요! 예쁜 누나들 많아요.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그래요? 흠... 별로 없던데^^;; ]
꽃보다마린 : [ ㅎㅎㅎㅎ ]
oO부들부들Oo : [ 거야야 그런 생각은 마음 속으로만 해^^ ]
꽃보다마린 : [ 에혀; 우리길드 애물단지...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마린 언니 사랑해여ㅋㅋㅋ ]
프리나이츠는 소속 길드원만 100명에 육박하는 거대 길드였고, 길드 매니저인 청원이 관리를 부지런히 해서 정모가 잦은 편이었다. 길드 매니저인 청원을 중심으로 홍대에서 비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곤 했는데 어쩌다 한 번 하선우는 충동적으로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금요일 저녁 홍대 클럽거리 뒤편에 위치한 이자카야로 하선우는 모처럼 외출을 나갔다. 허구한 날 아저씨 같은 직장인들만 쳐다보고 살다, 20대 초반의 푸릇푸릇한 청춘들을 마주하게 되니 그가 지금껏 느껴왔던 위압감과는 다른 종류의 압박감이 그의 마음속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서른둘, 슬슬 기반을 닦아놔야 하는 시기에 그는 거대한 암초를 만났고 좌초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는 거리의 어린 얼굴들을 바라보며 실감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젊음이라는 버팀목에 의지할 만큼 어린 나이가 아닌데도 지나온 시간에 비해 쌓아온 토대는 희박하기만 했다. 그는 떠내려오는 인파를 거슬러 정모를 약속한 장소로 들어갔다. 자신의 옷차림이 지나치게 ‘직장인’ 같아 보인다는 자격지심과 싸우면서.
연령대는 다양했다. 20대 초중반부터 하선우의 나이대로 보이는 직장인과 30대 후반의 아저씨들까지. 홍대보다는 이태원이나 강남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연령층이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이미 한창 달아올라 있었고, 약속 시간을 한참 넘겨 나타난 자신에게 갑자기 쏟아진 관심에 하선우는 적잖은 부담을 느꼈다.
고독의그림자는 그가 아주 우울했던 시기에 짧은 단시를 짓듯, 진심만을 담아 지은 닉네임이었다. 한 톨의 허세도 섞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꼭 그렇게 닉네임을 지을 필요가있었을까 싶다.
‘프리나이츠에서 주로 권사로 활동하고 있는 고독의그림자라고 합니다.’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닉네임을 밝히자 남자들의 얼굴에는 묘한 실망감이, 동시에 여자들의 혼란스러운 얼굴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기쁨이 피어났다. 처음에는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남자들의 떨떠름한 견제와 여성들의 은근한 관심에 하선우는 곧 그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꼬박 게임에 접속해 있는 하드코어 유저인 고독의그림자를 길드원들 대부분이 은연중에 무시해왔다는 것을, 외모 하나만으로 그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상쇄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하선우는 모임에 있는 내내 서름서름하게 웃고 있었다.
길드 역시도 또 하나의 사회이며 사람들의 편견과 판단이 작용하는 세상이었다. DSLR 카메라를 가져온 회원이 길드게시판에 정모 사진을 올리면서 정모에 참여하지 않았던 회원들도 고독의그림자의 외모를 알게 되었고 한동안 게임게시판 밖으로 그의 사진이 퍼져 나가면서 소란 아닌 소란이 일기도 했다. 몰래 찍었던 단독 사진들이 유독 잘 나왔던 탓도 있지만, 그가 걸치고 있던 옷들이 회사생활 할 때 입던 반듯한 ‘사장님’ 복장이었던 이유가 컸다.
평상복이 없어 고민 끝에 입고 나갔던 옷에 대한 반응이 예상 외로 좋아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생에서 로그아웃한 게임 잘하는 오덕’에서 ‘신의 컨트롤을 구사하는 잘생긴 루저’로 전격 상향조정되었다. 그저 온라인상에서 게임만 하고 싶었던 하선우에게는 그들의 판단도, 호기심도, 관심도 모두 번거로울 뿐이었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오빠 올거죠? ]
“미안해.”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저 이쁘게 입구갈게여 ]
“오빠는 사랑할 준비가 안 됐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제가 준비시켜 드릴게여~♡ ]
꽃보다마린 : [ 엄청들이댄다... ]
oO부들부들Oo : [ 분위기가... ]
“미안하다. 오빠는 실연의 상처가 너무 커서 아직 회복이 안 됐다.”
스치면뒈진다 : [ 실연의상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실연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으로 잊어야지영^^ ]
꽃보다마린 : [ 우리 길드 분위기 어쩔겨;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캐릭터가 커다란 가슴을 흔들었다. ‘/부끄’를 게임창에 입력할 때 캐릭터가 취하는 모션이었다.
자신이 게이인 걸 알면 실망할 텐데. 자꾸만 번지수를 잘못 찾는 거야의 행동이 부담스러워 하선우는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남기고 로그아웃을 했다.
컴퓨터 전원이 꺼지자 그의 인생 스위치도 함께 내려간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두운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빛을 보지 않아 허옇게 뜨고 밥을 거르기 일쑤라 살이 빠진 마른 얼굴이 그 안에 있었다.
카르달 게임 서버 속의 고독의그림자는 모든 스킬을 마스터한, 일명 신의 컨트롤 구사하는 존잘이었지만 모니터 밖의 하선우는 그저 무기력하게, 어떤 것도 바꿀 의욕 없이 숨을 쉬는 PC방 게임 폐인일 뿐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지만 모두가 닉네임이라는 익명성에 기댄 허구의 존재들이고 현실의 그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면서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연락이 끊겼다. 전화는 셋째형 와이프의 명의로 개통한 것이었다. 은행, 채권단, 추심, 각종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리던 벨소리가 뚝 끊겼다.
정수리 조금 뒤에서 노란 고무줄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사과 꼭지처럼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패딩점퍼를 껴입고 PC방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저물었다. 퇴근과 하교 시간이 겹쳐 교복과 정장을 입은 무리가 길 위에서 혼잡하게 뒤섞였다.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한 학생들이 조금 전 하선우가 나온 PC방으로 들어가며 시끌벅적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6시 2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벌써 잠이 쏟아졌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자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 시간에 하선우가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 7시에서 10시 사이, 저녁 6시에서 8시. 그 시간은 일반적으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출퇴근을 하려 주차장과 아파트 입구,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시간이었다. 평소 어머니는 극성맞을 정도로 성공한 아들을 자랑하고 다녔었는데 하선우가 독립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온 이후, 막내아들의 존재 자체를 일절 함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내아들에 대한 소문은 그녀의 주변으로 야화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다. 여자의 유일한 노후 계획이었던 용인 땅의 5층 상가 건물을 급매물로 내놓으면서 그녀의 일신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대놓고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남들이 출퇴근할 시간에 추레한 몰골로 아파트를 어슬렁거리는 하선우를 보면 누구라도 ‘백수’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사업에는 실패했지만, 어머니는 제 밥그릇이나 챙기는 집안의 좀생이 같은 의사들과는 달리 막내아들을 삼국시대의 조조나, 유비, 제갈량 같은 그릇을 타고난 인물로 생각했다. 유달리 머리가 좋았고 인물은 훌륭했으며 엘텍의 임원진으로부터 그녀를 위한 고급스러운 악어가죽 선물을 받아내기까지 했다.
사업하는 사람이야 큰돈을 쉽게 얻고 쉽게 잃고 오뚝이처럼 서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면이 있으니 자신의 어린 막내아들이 다시 일어서리라는 낙관이 그녀의 안에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아주 작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염치없이 불쑥 손을 내미는 아들에게 절대 기죽지 말라고 용돈을 쥐여 주기까지 했다. 물론, 그녀는 그녀 자신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사람들 출퇴근하는 시간 피해서 PC방 다녀. 통장 아줌마랑 마주치면 일주일 동안 10원도 없어.’
패딩에서는 은은한 담배 냄새가 났고 숨결은 달짝지근했다. 혀끝에 웰치스 포도맛이 까끌하게 맴돌았다. 다디단 디저트에는 아메리카노가 어울리듯, 씁쓸한 것이 당겼다. 평소에는 생각도 나지 않던 크레마가 풍부한 원두커피가 마시고 싶어 하선우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현금이 1,700원 남아 있었다. 내 주제에 무슨, 때려치우자.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졸음으로 몽롱한 눈동자는 성능 나쁜 영사기처럼 세상의 빛을 번져 보이게 만들었다.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그는 적당한 벤치를 찾아 앉았다. 이 시간의 공원은 너무 어둡고 인적이 드물어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편의점은 고작 라면 하나를 시켜놓고 한두 시간을 때우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는 정류장의 벤치에 앉아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낯선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목적지 없는 막연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외국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지에서는 삶을 소모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듯이, 지금의 하선우 역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위로를 받는 것이다. PC방의 공기가 갑갑하게 느껴지거나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면 그는 그렇게 자신을 방치하는 기분을 만끽하고는 했다.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하선우는 치열하게 세상을 향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에게 흉터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듯, 멀쩡히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신용불량자였고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앉아 있었지만 깡소주를 까지도 않았으며, 마포대교 위로 올라가 119 대원들과 실랑이를 벌이지도 않았다. PC방 죽돌이로 살며 게임 속의 존잘이 되는 거라면 자학의 수준이 꽤 양호한 편이라고 남몰래 생각하고 있었다. 남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지만 서른두 살의 하선우는 제법 귀엽게 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리 난도질을 해도 죽지 않는-달리 말해 대책이 서지 않는-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하선우를 정말로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주한 그 씨발 새끼조차도 하선우를 진짜 죽음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오랫동안 방심하고 있던 탓인지, 강주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따끔거렸다. 마치 가드를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찌르기와 내리찍기를 연속으로 맞고 딜레이 상태에서 연타로 발검을 맞아 생명력이 0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현실 타격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어제 자정 무렵 아무 생각 없이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가 검색어 상위에 랭크된 강주한의 이름을 발견했다. 사이트에 언론사별로 링크된 뉴스의 작은 페이지에는 그의 사진이 엄지손톱만 하게 걸려 있었다. 방송사 인터뷰 중에 캡처된 강주한의 사진 밑으로 기사 제목이 짧게 실려 있었다.
강주한, 엘텍전자 사장 승진 ‘강주한 체재 굳혀’
어디서든 존잘은 존잘이구나. 클라스는 영원한 법, 한번 존잘은 영원한 존잘.
인터넷 용어와 네티즌들이 심심찮게 사용하는 말로 언어습관이 개조된 하선우는 나름대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아 비관의 늪에 빠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하선우가 신의 컨트롤을 구사하며 게임 속의 존잘이 되어가는 동안 강주한은 현실 속의 존잘이 되어가고 있었다.
강주한의 얼굴은 온종일 불길한 예감처럼 그의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었다. 애써 그의 존재를 잊으려고 PvP 플레이와 던전을 도는 일에 몰입하던 하선우는, 어느 순간 ‘고독의그림자’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자신이 공들여 커스터마이징했던 캐릭터에게서 강주한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바다를 건넌 이주민이 새로운 터에서 삶을 시작하듯, 그는 온라인이란 세상에서 ‘고독의그림자’로 또 다른 하선우의 삶을 살았다. 비록 그것이 도피의 의미일지라도 게임 속의 하선우는 철옹산성처럼 견고한 존재였다. 그러나 하선우가 그토록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들은 역설적으로 강주한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선우는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했다.
허공을 쏘아보며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던 하선우는 스쳐 지나가는 버스의 외부광고를 보고는 결국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외국인 모델이 지갑 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는 사진 옆으로 광고 카피가 세련된 필기체로 적혀있었다. ‘What's in your wallet?’ 엘텍카드 광고였다.
게임의 존잘이 되었지만 지금 그의 전 재산은 1,700원뿐이었고, 그는 여전히 강주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네 지갑 속에 뭐가 들었냐고? 그가 애지중지 키워놓았던 고독의그림자가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아 하선우는 뜨거운 눈물을 찔끔찔끔 쏟아냈다.
“아… 정말 안 울려고 그랬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누가 볼세라 하선우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슥슥 닦아냈다. 눈물을 짜내다 보니 그는 자신의 궁상맞은 처지가 좀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제3자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무심한 태도로 까내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자기 학대로 농담의 기술을 터득한, 구질구질한 코미디언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30분 남짓을 정류장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눈물이 마른 눈은 버석거렸고 코끝은 추위로 발갛게 얼어 콧물이 맺혔다. 이 시간에 아파트 주변에서 통장 아주머니와 마주칠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하선우는 졸음이 몰려오는 머리로 몇 가지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그 순간,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처럼 좀처럼 울리지 않는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010으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였다.
하선우는 요 몇 달간, 낯선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회사사정이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하던 9월 무렵부터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가 부쩍 잦아졌고, 1차 부도를 냈던 10월부터는 휴대폰에 불이 나도록 전화가 걸려왔으며, 법정관리 대상에서 제외되어 최종부도가 날 즈음에는 전원을 아예 꺼놔야 할 만큼 하루 종일 벨이 울려댔다.
심리학 용어 중에 분명 낯선 번호에 대한 공포증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선우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주 낯선 번호는 아니었다. 휴대폰을 음소거 모드로 바꾸고 하선우는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한참 진동이 느껴지더니 잠잠해지고 곧바로 알람음이 울렸다.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전화 좀 받아라」
이석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하선우가 새로 바꾼 휴대폰에 메신저 앱을 깔지 않았기에 그는 하선우와 연락을 하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는 했다. 하선우 역시 이석의 연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가 보내는 문자는 꼬박꼬박 확인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검지로 화면을 천천히 올려 지금까지 그가 보낸 메시지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문자 메시지는 하선우에게 사과하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그의 방만한 경영, 그리고 그런 그를 믿고 따라왔을 하선우가 느꼈을 배신감, 잇속에 눈이 멀어 뒷돈을 챙겼던 자신에 대한 후회, 하선우의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그리고 직원들에 대한 미안함이 적혀 있었다.
가끔 그는 감성에 촉촉하게 젖어 삶에 대한 시를 적어 보내기도 했고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회생절차를 밟는 방법을 알아볼 테니 가이드라인을 정해 다시 시작해보자는 문자를 보내다가 결국에는 한 가지 문장으로 귀결되는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 좀 받아라」
하선우는 굳은 얼굴로 화면을 쳐다보다 전원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긴히 네게 할 얘기가 있다 도일이 미국 간대」
하선우는 잠자코 그가 보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그사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도일이 지금 너 만나러 분당 가는 중이다」
그는 화면의 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졌던 화면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하선우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선우냐?
“그럼 선우지. 누구겠어.”
대답을 하면서도 하선우는 자신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난 몇 달간 임자 내지는 임자 오빠, 임자 형으로 불렸던 그였다.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이석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긴. 하도 네 목소리 듣는 게 오랜만이라. 섭섭하다, 야. 내가 맨날 전화할 때는 안 받더니 문도일 얘기 꺼내자마자 냉큼 전화받고.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형이랑 하하 웃으면서 통화할 만큼 속 넓은 놈 아니다.”
건너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깊은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리고 이석이 말했다.
-그래. 그렇지.
전화기 너머가 소란스러웠다. 그 역시 하선우처럼 도로 위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는 듯했다. 그 발걸음에 목적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치 뭔가가 얹힌 것처럼 명치 근처가 답답했다. 계속 두드리고 있으면 꺼억 하고 트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가슴을 두드려봐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홍콩에서 돌아오자마자 하선우는 엘텍 법무팀으로부터 서류뭉치를 전달받았다. 특허계약에 관한 계약무효 및 위반행위 심의조정 서류였다. 강주한이 행동으로 옮기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곧바로 하선우의 숨통을 죄어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미처 위험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들의 회사채 등급에는 문제가 없었고, 당좌대출도 이자를 포함해 꾸준히 갚아나갔으며, 그들을 속 썩이던 또 다른 만기어음까지 해결해 채무사정이 점차 나아지던 중이었다. 그래서 이석은 99% 확률로 만기가 연장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금의 유동성이 부족하긴 해도 NnG가 부도날 정도면 대한민국 회사의 절반이 부도날 거라며, 어음의 만기연장을 이석은 꿈에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만기일이 도래하던 날 산산이 부서졌다.
지급제시 전날, 은행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며 갑자기 말을 바꾸어 어음의 만기연장을 거부했다. 대신 일시적인 자금부족 사정을 감안해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11억을 갚아도 된다는 연장조건을 걸었다.
이틀 만에 현금 11억을 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영업종료 시간이 지난 이후 NnG는 어이없게도 1차 부도를 맞았다. 법률상으로는 최종부도까지 세 차례의 1차 부도가 용납되기에 하선우와 이석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현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고작 11억 때문에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회사가 무너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려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NnG의 성장률과 자기자본 대비 부채율의 비율이 하선우와 이석이 낙관하던 것만큼 희망적인 그래프를 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선先투자된 돈은 모조리 빚이었고 안정적인 납품처가 있지만, 원리금 지급에 대한 불안요소가 있으며 채무 불이행의 위험이 큰 투기적인 회사이기에 대출해줄 수 없다는 딱딱한 거절의 말을 무수히 들었다. 그들이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실에 하선우와 이석은 격렬하게 두드려 맞은 기분을 느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들은 오로지 빚진 돈으로만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들은 팔아치울 수 있는 모든 걸 팔아 현금을 닥치는 대로 마련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전셋집, 오피스텔을 급매물로 내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울산의 프레스 기계까지 거래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돈은 턱없이 부족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엘텍에 무이자 대출금을 상환하는 날짜가 다가왔다. 미처 구조조정을 단행할 시간도 없이 몰아치는 빚의 늪에 하선우는 결국 부모님에게 손을 벌렸다. 그 이후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구질구질한 일들뿐이었다. 부모님의 노후재산으로 남겨놓았던 아파트를 급매로 팔아치우고–근저당이 잡혀 있었는데 설정된 3억도 하선우의 빚이었다-도 모자라 결국 회사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회생절차를 밟아보려는 생각이었지만 그들의 앞으로 10억에 달하는 특허계약 위반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관한 문서가 날아오는 순간, 모든 의욕이 꺾여버렸다. 어음 교환소의 규약을 지킬 것도 없이 3차 만기일이 도래한 날 NnG는 최종부도 처리되었다.
벼락을 맞은 나무가 순식간에 숯 덩어리가 되듯 NnG 역시도 한순간에 부도가 나버렸고 그곳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도 함께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들의 인생은 하선우와 이석이 채무 불이행의 대가를 징역으로 갚는다거나, 파산신청을 함으로써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도 회사를 하나둘 떠나가던 직원들의 뒷모습이 눈을 감으면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어른거렸다. 마치 까만 밤하늘 너머로 사라지는 풍등의 아스라한 불빛 같았다.
-뭐하고 지내냐. 목소리 잊겠다.
“누가 들으면 내가 전화를 아주 피하는 줄 알겠어.”
-생사확인은 해야지. 요즘도 게임해?
“……응.”
-인마. 적당히 해라.
“하다 질리면 알아서 관둬. 형은 요즘 어디서 지내는데.”
-도일이가 소개해준 일자리 다니면서 계속 NnG 파산절차 밟고 있지. 이래서 사람은 힘든 사람 돕고 살아야 하나 봐.
그의 목소리에 묻어난 자조의 기운에 하선우도 풀썩 웃음을 터트렸다.
“햇살 고시원은 살 만하고?”
-내가 돈이 없으니 여기서 살지…, 에휴. 그래도 눈칫밥 먹으면서 부모님이랑 사는 것보단 낫지.
“내가 부모님 얘기 하지 말랬지.”
-알지. 나 때문에 부모님 집 날리고 너 눈칫밥 먹으면서 사는 거. 자학개그 같은 거야.
“자학개그는 내가 해야지, 형이 왜 해?”
-너 그러고 평생 살 거 같아서.
“그럴까도 생각 중이다. 안 그래도 이 나이에 적성 찾은 기분이야. 부모 등골 빨아먹는 백수 아들이 적성에 딱 맞아.”
-딱 올해까지만 해라.
“신경 꺼.”
-그렇게 살 거면 나오든지. 일자리 알아봐줘?
“취직해서 어느 세월에 빚을 갚아. 차라리 그때 파산하지 말고 고의적으로 부도내고 징역 살다 나올걸 그랬어. 그게 더 빨랐을 텐데.”
-미친놈.
“뭘 더 말아먹을 것도 없는 인생이야. 그냥 나 좀 내버려둬.”
-말 참 쉽게 하네. 그럴 생각도 없는 놈이.
하선우는 고개를 모로 기울여 휴대폰을 어깨와 귓등 사이에 받쳤다. 그는 아스팔트 도로를 냉담한 얼굴로 바라보며 얼어붙은 바닥을 발끝으로 무의미하게 툭툭 건드려댔다. 그네처럼 일정한 행동을 반복하는 그의 모습이 일견 천진해 보였다.
“그래, 나 그렇게 망가지고 싶지도 않고 위악 떨고 싶지도 않아. 내 나이가 서른둘인데 그럴 만한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지.”
-알고는 있냐?
이석의 타박에 하선우는 휴대폰을 고쳐 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면 일부러 전화 걸어서 훈계하고 용기 불어넣어주려고 하지 마. 형이 브로커에게 뒷돈을 받았든, 어음만기일이 연장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거든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다 지난 일이고…. 나는 꼭 그것 때문에 회사가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한테 절절맬 필요 없어. 그냥…… 나는 혼자 있었으면 하는 거야. 다 잃었는데 넋 좀 놓고 있으면 안 돼? 왜 자꾸 보채냐. 나 좀 내버려둬.”
건너편에서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와 씨근거리는 듯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건네려다 포기한 걸까. 하선우는 이석의 우울한 얼굴을 떠올리고는 그를 안심시킬 만한 한마디를 덧붙일까, 잠시 고민했다. 나라고 평생을 이렇게 살 생각은 없다고, 내가 쓸모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고 예전처럼 다시 행복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지만 하선우는 결국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도일이 형 미국 간다니.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이야.”
-아……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였지.
힘주어 툴툴거린 이석은 하선우로부터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더는 한국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마침 취업비자도 나왔다고 하고.
“신용불량자인데 취업비자가 나와?”
-그렇더라.
하선우는 발끝으로 다시 한 번 차갑게 언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너 보러 분당 간다고 하던데. 전화 안 왔어?
“아직 안 왔어. 어디서 출발했는데.”
-노량진.
“도착하면 전화하겠지.”
푹 숙인 시야 안으로 낡은 운동화가 들어왔다. 하선우는 고개를 길게 뺀 그대로 얼굴을 들었다. 한 손은 주머니에, 나머지 한 손은 휴대폰을 쥐고 있는 문도일이 하선우를 굽어보고 있었다.
“지금 도착했네.”
-뭐야. 만났어?
하선우는 민망한 낯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응. 갈 데 없어서 정류장에서 죽치고 있었거든.”
-허허.
“끊는다.”
매정하게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하선우는 벤치를 손바닥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달 하고도 20여 일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특허 문제로 특허심판원을 출석하고 파산절차를 밟느라 법원을 들락거리던 시기에 본 후로는 두 사람 모두 만남이 뜸했다.
하선우는 가만히 손바닥으로 뺨 언저리를 쓸어보았다. 살짝 까슬하긴 했지만 초췌할 정도로 수염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는 어제 아침 어머니의 등살에 마지못해 면도를 해두었었다.
“저녁은?”
“저는 괜찮아요.”
“그럼 커피숍이나 가자.”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었지만 간단한 인사치레도 없이 곧바로 눈에 띄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시간 넘게 찬바람을 맞았던 하선우는 따듯한 실내의 공기에 급격히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는 왜 정류장에서 죽치고 있었냐.”
“어머니가 사람들 출퇴근하는 시간에는 집에 기어들어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하선우는 티슈로 코끝에서 새어 나오는 콧물을 닦아냈다.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문도일의 표정에 하선우는 피식 웃었다.
“어머니가 좀 극성맞게 제 자랑을 하고 다녔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요 모양 요 꼴이 됐으니 동네 창피해서 그런 거죠.”
문도일은 적당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깊은 저음의 침음을 흘렸다. 코를 훌쩍거리는 하선우를 차분히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감기 걸렸냐.”
“아뇨. 추운 데 있다가 들어왔더니 그러네요. 이러다 말겠죠.”
“머리도 많이 길었고 얼굴이 마르기도 많이 말랐네.”
“요즘 도통 입맛이 없어서요.”
식욕이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지만 그런 그에게도 가끔씩 유별나도록 먹고 싶은 게 있었다. 하필이면 주머니에 1,700원밖에 없던 오늘, 너무나도 마시고 싶던 커피였다.
하선우는 크레마가 풍성하게 뒤덮인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몇 시간 전에 그렇게 커피가 마시고 싶더니 결국에는 소원을 성취했다.
“미국 가신다면서요.”
“응.”
“언제요?”
“2주 뒤.”
하선우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빠르네요.”
“실은 한국생활 정리할 게 없어서 바로 내일 떠나도 상관없어.”
하선우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생각해보면 문도일이 한국에 미련을 가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 엘텍과의 특허소송을 또다시 재개했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법원은 특허등록무효 소송에서는 일부 성일금형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엘텍이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특허의 일부분은 다시 복원되었지만 엘텍하이스코에서는 성일금형이 주장하는 핵심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법원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엘텍하이스코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 성일금형에 대해 패소를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들끓는 언론으로도, 소송으로도, 엘텍하이스코와 성일금형의 관계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문도일은 또다시 직장을 잃었으며 그의 후배는 그와 비슷한 인생의 절차를 밟아가고 있었다.
“한국은 이제 지긋지긋하겠어요.”
문도일은 대답 대신 비스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마시는 커피가 꼭 쓴 소주처럼 보였다.
“응. 지긋지긋해.”
“…….”
“여기는 희망이 없어.”
커피를 조금 마시다, 입에 맞지 않는지 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도로는 퇴근하는 무리로 붐비고 있다. 그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음미하는 것 같다. 하선우는 문도일의 얼굴이 지쳐 보인다는 사실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얼굴에 어린 익숙한 그늘의 흔적을 이제는 그의 얼굴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이 아닌 다른 세상에 또 다른 희망을 걸어보기에는 그는 너무 지쳐 있다.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너무 멀리 날아온 철새처럼 보였다. 창가에서 시선을 뗀 그는 하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큰 거 바라지 않고 이제는 숨 쉴 구멍만 있으면 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려고. 이번에도 형 신세 지게 됐어. 연구원 자리로 알아봐준다고 하더라. 너희 회사에서 배웠던 기술을 거기서 써먹게 됐다. 미안하다.”
“도움됐으니 잘된 거죠, 뭐. 석이 형이 섭섭하겠어요.”
“그러게. 나 때문에 그 고시원으로 오게 된 건데. 나 대신 네가 석이 좀 자주 만나줘라.”
하선우는 긍정도 부정도 않고 애매한 태도로 커피만 마셨다.
“너는 그동안 석이 안 만나서 모르겠지만 녀석 고생 많이 했다. 파산 말고 법적관리 받으면서 회생하려고 노력 많이 했어. 1차 부도 때부터 산원테크에서 관심을 가졌다기에 인수협상도 추진해보려고 했었고. 결국에는 잘 안 됐지만. 스트레스성 탈모로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서 이마부터 정수리까지 절반이 휑하다.”
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 나이에 M자 탈모면 큰일이네요. 가뜩이나 우리 형, 얼굴도 못생겼는데.”
문도일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자주 만나서 위로 좀 해줘. 이제 장가도 못 가게 생겼는데.”
“껄끄러워서 그래요.”
“미워서 그러냐?”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사업 실패가 형 때문인 것도 아니고……. 석 형 탓할 생각 없습니다.”
“그럼?”
“복합적이에요. 피해의식도 있고 피해를 줬다는 의식도 있고.”
하선우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문도일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더는 얘기 안 할게.”
그는 거의 입을 대지 않은 커피에 손을 뻗었다. 아주 조금 잔을 기울여 마신 그는 다시는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듯 잔을 저 멀리로 밀어내버렸다.
“미국에서 자리 잡으면 부르마. 아니, 자리를 못 잡더라도 일자리 정도는 주선해줄 수 있어.”
하선우는 대답 대신 커피를 마시며 입술만 조금 휘어 웃어 보였다.
“왜 웃어.”
“말만으로도 고마워서요.”
“그냥 빈말로 하는 소리 아니다.”
“왜요. 아직도 그 말이 마음에 쓰여요?”
하선우는 입꼬리를 양쪽 아래로 심술궂게 내리고는 문도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문도일은 처음에는 하선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당황하며 얼굴을 조금 붉히더니 피식거리며 손사래 쳤다.
“한때 조금 좋아했던 걸로 선배 곤란하라고 농담하는 놈은 너뿐일 거다.”
하선우는 입술을 다시 비죽거린 뒤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형을 좋아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런 감정이 아니면 된 거 아닌가요. 제가 좋아했던 게 곤란해요?”
“그런 건 아니고…. 방금 그 말은 미안했다.”
“참나, 뭘 또 바로 사과까지 하고 그래요?”
심각하지 않은 분위기로 하선우는 그를 나무라듯 웃었다.
조금도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산 같은 문도일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선우는 문득 그의 바위 같은 단단함이 부럽게 느껴졌다.
‘나를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굳이 내가 뭘 증명하며 살 필요는 없더라. 내가 나를 인정하기로 한 거지.’
하선우는 문도일과 재회했던 여름날에 그와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가끔씩 떠올리곤 했다. 문도일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치열하게 싸워 어떤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지만, 하선우는 생각할 의욕조차도 없었다.
회사가 부도나고 특허를 놓고 소송을 벌이는 동안 하선우는 분노보다는 무기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막연히 불안감을 느끼지만, 발목을 무겁게 죄고 있는 무기력이란 족쇄를 끊어내고 싶은 의욕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 아닐까. 아직은, 그래도 아직은 쉬고만 싶었다.
“갑자기 사모님이 부럽게 느껴지네요.”
문도일의 긴장을 느끼며 하선우는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시쳇말로 완벽한 남자를 가리켜서 벤츠남이라고 말한대요. 그래서 좋은 짝이 있으면 벤츠남, 벤츠녀를 만났다고 그렇게들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방금 든 생각인데 벤츠남 중에서도 최고는 선배일 거예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그러냐. 나한테 뭘 얻어먹을 게 있다고.”
문도일은 이런 유의 농담에는 절대 익숙해지지 못할 인물이었다. 어색한 얼굴로 웃고 있는 문도일을 보며 하선우는 농담의 수위를 더는 높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입은 그 자신의 급소를 찌르고 있었다.
“벤츠인 줄 알았던 강주한이 똥차였어요.”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하선우는 눈을 내리깔았다. 두 사람 사이로 긴 정적이 흘렀다. 문도일이 입에 대지도 않던 커피를 다시 가져가는 것을 보며 하선우는 말했다.
“저도 잘 몰라요. 강주한이 고의적으로 NnG를 부도내려고 했었는지 아니면 특허와 관련된 소송만 벌인 건지 알 길이 없어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진짜 못된 새끼인 건 사실이에요. 형이랑 저처럼 착하게 사는 사람들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놈은 인간미라는 게 없었어요. 마치 자본이나 시스템 그 자체 같다고 해야 하나. 그때 형 말이 다 맞았어요.”
생각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말이 목구멍을 뚫고 쏟아져 나왔다. 하선우는 더는 횡설수설하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고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조용히 마셨다. 그들은 잠시 어색하게 앉아 흐르는 시간을 견뎠다. 문도일은 지난여름 이후로 더는 강주한에 대해 묻지 않았고, 하선우 역시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문도일은 쓴 커피 대신 함께 나온 냉수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래, 착하게 사는 우리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지.”
“…….”
“그러니 이석의 불행까지 네 탓을 할 필요는 없어. 그놈들이 도둑놈들인 거지. 너는 운 나쁘게 사람 하나 잘못 만났을 뿐이야.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문도일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선우는 천천히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눈을 뜬 그는 카페의 우아한 조명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형은 참 대단해요.”
“뭐가.”
“저는……. 아무런 의욕이 안 생겨요.”
한때는 그토록 가슴 사무쳐했던 첫사랑이었는데, 하선우는 문도일을 보고도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쯤의 동질감과 부러움, 그리고 인간적인 존경심이 전부였다.
사실 하선우는 오늘 강주한, 그 씨발놈의 얼굴을 보고 내심 반가움을 느꼈었다. 그는 수면 아래 잠겨 있던 무기력한 하선우의 멱살을 잡아 물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뺨을 후려쳤다. 현실적인 아픔을 얼마나 오랜만에 느꼈던가. 울컥하고 덩어리져 올라오는 분노의 감정이 너무도 진하고 뜨거워서 하선우는 일순간이나마 활기를 찾았다.
“처음엔 막 절망적이었는데… 그 다음에는 내가 왜 절망을 느꼈었지? 어리둥절하더라고요. 나한테 닥친 상황이 이해가 안 되고, 앞으로 잘 해결되겠지 막연하게 기대하게 되고. 그런데 정말 상황이 최악으로만 치닫고 박탈감을 느끼니까, 무기력만 남더라고요.”
“불굴의 의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드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나도 마찬가지였고.”
하선우는 가붓이 눈을 감았다 떴다. 졸렸다. 34시간이 넘게 깨어 있었다. 세상에 투명한 막이 덧씌워지고 멀어져갔다. 잠이 묻어난 눈을 깜빡이며 그는 눈앞에 있는 역전의 용사를 바라보았다. 비록 패전했지만, 전쟁 속에서 어떤 의미라도 찾아보려고 노력했던 한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네가 게으른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건 안다. 지금 네가 무기력한 건 너무 고갈돼서 그렇다는 것도 알아.”
“예.”
“하지만 그 이유에 기대서 너를 너무 놓고 살지는 말아라. 무턱대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말고. 너무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다 자기 변명에 불과한 거야.”
문도일이 하는 말은 전부 다 빤하게 들리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하선우는 동시에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하게 떠들어대는 말과 달리 그의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다. 독한 인생을 통해 진하게 우려낸 그의 이야기를 비웃을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진리라는 것은 언제나 단순하고도 뻔했다.
“알아요. 제가 하기에 따라 다르다는 거.”
“알기는? 게임 적당히 하라는 소리야, 인마.”
문도일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선우는 생각했다. 여전히 그가 희미하게 짓는 미소에는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는, 불가사의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를테면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찾아든 처마 밑의 고마움이나, 늦은 밤 아버지의 귀가 길을 밝히는 노란 가로등 불빛 같은 따스함이었다. 그건 전심으로 전해지는 투박한 위로 같은 것이었다.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 내보일 수 있는 평화가 거기에 있었다. 하선우는 아주 잠시나마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온기를 느꼈다.
* * *
꿈에 도시가 나왔다. 새카만 도화지에 온갖 호화스러운 보석들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화려한 야경의 도시였다. 그곳의 빛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눈이 시리도록 부셨다. 그 황홀한 마천루에 강주한이 있었다. 수많은 뭇별들을 품은 도시 속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한 하선우는 그를 향해 손을 뻗지만, 하선우는 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밑을 향하여 추락하고 있었다. 아무리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강주한과의 거리도 여전했다. 강주한과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상태로 하선우는 늘 추락할 뿐이었다. 변하지 않는 상황이 하선우는 무서웠다. 끝없는 추락은 끔찍했다. 차라리 바닥에 머리를 짓찧어 산산이 부서지고 싶을 정도였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을 꾸고 나면 근육이 긴장을 했었는지 턱이 욱신거리고 몸이 아려왔다.
그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깼다. 티셔츠를 잡아 늘여 이마와 목을 적신 진땀을 훔쳐냈다. 자신의 침대였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자신 것이었던, 지나칠 정도로 익숙한 그의 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잠시 신세를 지는 손님이 된 기분을 느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후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몸은 결코 밥때를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가 식사시간을 알릴 때까지 침대에 드러누워 있기로 한 하선우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침대 맞은편 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하선우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받아온 상장이 벽 반쪽에 거의 도배되다시피 걸려 있었다. 중요한 상장은 형제들의 상장, 그리고 가족사진과 함께 거실에 붙여져 있었다. 그 중에는 어머니가 특별히 신문사에 연락해 받아낸 사진도 있었다. 홍콩 전자박람회에서 하선우와 강주한이 악수를 나누고 있는 사진이었다. 북한 가정에서 북한 수뇌부의 초상화를 집 안에 걸어놓듯, 강주한과 하선우가 악수를 나누는 사진은 얼마 전까지 부모님의 집을 수호하고 있었다.
NnG가 최종부도 처리되던 날 하선우의 어머니는 액자 속에서 사진을 꺼내 동네의 후미진 놀이터에서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하선우는 생전 욕이라고는 않던 권정옥 여사의 입에서 ‘육시랄할 잡놈들’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묘한 쾌감과 그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머니의 반응은 마치 멀쩡한 아들놈 군대 보내놨더니, 군대가 아들을 반병신으로 만들어놨다고 국가를 불신하는 태도를 보이는 여자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추워….”
혼잣말하며 하선우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땀이 증발하며 몸의 열을 빼앗아갔다. 하선우는 오슬오슬 떨며 이불속으로 몸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단지 꿈을 꾼 것뿐인데 실제로 마라톤을 한 것 같았다. 젖산이 분비된 몸은 근육통을 호소했고, 산소와 따듯함을 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며칠 전 강주한의 사장 승진 소식을 인터넷 신문기사로 접한 뒤, 그는 다시 추락하는 꿈을 꾸게 됐다. 그가 이 꿈을 처음 꾸었던 날은 강주한과 헤어지고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그는 엘텍의 법무팀으로부터 특허계약 무효 및 위반행위 심의조정 서류를 전달받았고 이후부터는 지긋지긋한 부도의 위기를 넘나들어야 했다. 그가 이 꿈을 마지막으로 꾸었던 건 10억에 달하는 특허계약 위반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당한 이후였다.
최악의 정점을 찍은 뒤부터 하선우는 더는 추락하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회사의 최종부도가 선고되고, 그의 전 재산이 압류되었던 밤에도 그는 꿈꾸지 않고 잠들었다. 특허 심판원이 하선우의 특허를 상대로 무효소송을 낸 엘텍의 편을 들었던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선우는 고개를 이불 밖으로 빠끔 내밀어 달력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1심의 결과가 3주 뒤에 나올 예정이었다. 이미 특허심판원에서 진보성의 이유를 들어 엘텍의 편을 들어주었고, 무효소송을 놓고 계류 중인 사건이었기에 하선우는 소송의 결과를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모로 기울여 벽을 향해 누웠다. 하선우의 앞으로 빚이 38억 남아 있었다. 엘텍에서 무이자 대출로 빌려 썼던 돈이 고스란히 빚이 되어 되돌아온 데다가, 엘텍전자에 지불해야 하는 특허 관련 위약금도 있었다. 당좌대출, 사업자금, 수없이 숨어 있던 돈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하선우와 이석의 앞에 나타나 그들을 뭉개버렸다. 그나마 울산과 일산 공장이 헐값에라도 팔리고 나면 빚의 액수가 줄어들겠지만 하선우는 앞으로 자신이 남은 돈을 평생에 걸쳐 갚아나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처음 한 달간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강주한에게 사과를 할 생각을 했었다. 먹고사니즘만큼 모든 이념을 초월하는 개념이 없다고 생각하며 강주한에게 대들었던 자신의 배부른 머리를 탓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강주한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탐욕을 위해 그를 만나야 한다면 몸을 파는 창부와 다를 바가 없었고, 회사의 존폐를 걸고 그를 만난다면 그것 나름대로 하선우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다. 결정을 유보하는 사이 회사는 무너졌고 특허는 1심 심판에서 무효처리 되어 계류 중이었다.
내 곁을 떠나지 말라는 강주한의 말에 흔들렸고, 붉어지는 강주한의 얼굴을 보며 진심을 믿었다. 그러나 세상의 극단에 서 있는 비정한 인간이 하선우에게만 다정하게 굴 리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홍콩에서의 달콤한 시간에 마취되어 서유임이 했던 말의 의미를, 너무 쉽게, 그 행간 속의 의미를 무시해버렸지만 하선우는 이제 뼈에 새긴 교훈을 얻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애인으로 고용된 것이었다. 아주 달콤한 고용이었고, 그가 자신에게서 무엇을 앗아가는지도 몰랐으며, 해고의 결과는 이토록 가혹했다. 착취할 것을 모두 착취했으니 그는 이제 쓸모없는 자신을 만날 리 없었다.
“밥 먹어!”
하선우는 어슬렁어슬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슬으슬한 게 감기 기운이 도는 게 분명했다. 몸보신이 필요했다. 그러나 밥상에는 어제 먹다 남은 멸치볶음과 일주일째 밥상에 오르는 우거지된장국, 마늘장아찌가 전부였다. 하선우는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아버지는요.”
“등산 가셨다.”
“음…….”
“너도 등산이나 좀 가지 그러니?”
하선우는 수저를 입에 물고 기운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신인지 뭔지 투자했던 게 요즘 반토막이 나서 네 아버지 속이 말이 아니잖니. 아파트도 날리고…… 이제 주식이랑 연금밖에 없는데. 주식은 저 모양이고 연금은 쥐꼬리만큼이고. 의사 마누라라고 큰소리치던 내가 이 나이에 백수 아들 건사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하선우의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딱한 얼굴로 혀를 찼다.
“아버지 주식 파신대요?”
“글쎄다. 요즘 뉴스 보면 비리니 뭐니, 난리났잖니. 9시 뉴스에 꼬박꼬박 얼굴도장 찍던데?”
“팔지 마시라고 해요. 다시 오를 거예요.”
“뭐?”
“누가 작전 쓰는 거라서 내버려두면 오르게 돼 있어요. 아파트도 집주인 바뀐다고 집값 떨어지는 거 아니잖아요.”
유상증자 소문과 안신과 정계의 유착 의혹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9시 뉴스와 신문을 담 쌓고 사는 하선우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파트의 새로운 주인은 강주한이 될 터였고, 그는 입주하기 전 청소업체를 통해 온갖 먼지를 요란스럽게 털어내고 있었다. 조만간 쫓겨날 주인의 치부를 이곳저곳에 널리 알려대고 있었다.
어머니는 하선우를 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팔지 마요. 망하기 전에 저도 주워들은 게 있어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선심을 쓴다는 듯 아버지에게만 내주는 반찬을 하나 더 접시에 덜었다. 메추리알 몇 개와 장조림이었다. 하선우의 시선은 간장 위로 둥둥 떠다니는 새하얀 기름 위에 머물렀다.
“돈 줄 테니까 머리카락도 좀 자르고 해라. 계집애같이 그게 뭐니?”
하선우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보고 저길 봐도 먹고 싶은 게 보이지 않았다. 어제도, 엊그제도 그는 지금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는 쌀 냄새가 진하게 나는 오래전에 지은 밥 위에 가느다랗게 찢은 장조림을 올렸다.
“올해만 이렇게 지낼 거지?”
“예.”
“취업이나 아니면 다시 일을 해본다거나 계획은 짜고 있는 거고?”
하선우는 묵묵히 밥만 먹었다.
“하긴 큰일을 당했으니 회복이 쉽진 않겠지. 전에 일이 수습된 것도 아니고. 그럼 그 전에…… 간단하게 과외라도 해보지 그러니?”
입안에 밥을 퍼 넣은 하선우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심약하게 숨을 몰아쉬며 손을 심장 근처로 가져갔다. 그녀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밥을 먹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잠이 드는 생활을 아들은 반복하고 있었다. 태연자약하고도 무심한 아들의 태도가 그녀의 평화를 자꾸만 분탕질 쳤다. 이제 좀 편하게 늙어가나 싶었는데, 가장 아픈 손가락이 심하게 얻어맞고 와서는 자꾸만 아프다고 그녀를 괴롭혀댔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하선우의 앞으로 각종 고지서와 법원에서 날아온 서류를 내려놓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녀가 모은 것들이었다.
“내가 남들 퇴근시간 전에 우편물 수거하러 가는 게 일이다. 남들 볼까 봐 내가 조마조마해가지고…. 아휴, 이런 말 해서 뭐하니.”
과로한 심장께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들? 주소지를 저 멀리 섬이나 도 들어간 데, 그러니까 외딴 데로 옮겨놓는 게 어떠니. 사는 건 여기서 살더라도 주소지만 옮겨.”
“누구 있어요? 아는 사람?”
“있겠니? 네 엄마 태어난 곳이 서울이고 네 아버지도 경기도 사람인데.”
하선우는 수저를 들지 않은 손으로 어머니가 식탁 위에 내려놓은 서류를 들춰보았다.
“신문 보니까 저 지방 외딴 섬 가면 10만 원에도 집 한 채 산다더라.”
하선우는 어머니와의 대화 중에 처음으로 피식 웃어 보였다.
“추심하는 사람들 바보 아니야. 안 믿지. 제가 이 집에 주소지를 옮겨놓은 것도 아닌데 알아서 이곳으로 서류를 착착 보내잖아요. 사람들 참, 일 잘해요?”
하선우는 뒤적거리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젓가락마저 밥그릇 옆에 가지런히 놓고는 눈동자를 뒤룩 굴리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면 정말 섬에 가서 살까?”
결국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노무 새끼가!”
하선우는 씩 웃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PC방 요금을 며칠 전에 충전해둬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오늘은 하루 종일 손가락을 빨며 집에서 뒹굴 뻔했다.
다리에 착 달라붙는 트레이닝 바지와 패딩 점퍼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그는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를 피해 집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1층 복도를 지나며 집 호수가 적힌 우편물 수거함을 보았다. 그곳에는 채권추심 기관에서 온 우편물이 도착해 있었다.
수신인. 하선우. 어머니가 20년 동안 그토록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다닌 막내아들이었다. 하선우는 우편물을 빼내 패딩 점퍼 안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부모님의 집에 오래 머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돈을 납부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난이도 상급 수준의 악성 채권을 회수하는 채권추심 기관으로 자신의 이름이 넘어갈 테고 그때는 우편물 수준에서 그치지 않게 될 것이다. 직접 사람이 찾아오는 순간 자식농사 잘 지었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게 될 것이다. 게다가 평생을 명망 있는 의사로 살아온 아버지에게도 커다란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하선우는 아파트 단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색 칸에 최종협의문이라고 협박성으로 적힌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집에서 20여 분 떨어진 PC방은 외관은 허름하지만 나름 최신식 PC를 들여놓은 곳이었다. 그가 즐겨하는 게임을 무리 없이 플레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집에서 멀어 그를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오늘은 주말이라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다행이도 하선우가 늘 앉는 카운터 근처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음료수 하나를 들고 지정석에 앉은 하선우는 PC방에서 진을 치고 사는 몇몇 눈에 익은 남자들을 보았다.
하선우와 같은 열에 앉거나, 하선우의 건너편 대각선에 앉아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영혼 없이 화면을 바라보던 남자들이 하선우의 등장에 흘끗 시선을 주고는 다시 게임에 몰두했다. 그들을 스윽 훔쳐본 하선우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게임을 실행했다.
그가 가장 공들여 키웠고, 가장 조작하기가 편한 권사 캐릭터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하선우는 마우스의 휠을 굴려 고독의그림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의식하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확실히 강주한을 많이 닮았다. 고집이 느껴지는 입꼬리가 긴 입술과 눈매, 약간 각진 턱, 검은 눈동자, 큰 손과 단단해 보이는 마른 몸이 특히 그러했다. 비록 캐릭터를 닮은 남자의 육체를 뼛속까지 느끼던 때가 있었지만 그 속에 있는 것은 프로그래밍된 허상에 불과했고 단순한 3D 캐릭터에 하선우가 거리낌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하선우는 석연치 않은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 지우긴 아까운데. 내가 이걸 어떻게 키웠는데.”
강주한이 밉고 증오스럽긴 했지만, 그럼에도 카르달 서버 랭킹 5위에 빛나는 고독의그림자를 삭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화면 하단의 외모 변경 쿠폰을 클릭했다. 그러나 게임회사는 고독의그림자에게 다른 외모로 인생을 살아볼 기회를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아악!”
하선우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수중에 32,000원이란 돈이 없었고 게임 아이디와 휴대폰 명의자가 달라 휴대폰 소액결제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캐릭터 외형을 두고 부심하던 그는 고독의그림자로 접속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연맹전이 있어 부계정 캐릭터가 아닌 본래 캐릭터로만 접속해야 하는 날이었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그를 반기는 길드원들의 인사가 화면 아래 길드창을 빼곡하게 채웠다. 대부분 어제 정모 즐거웠는데 왜 오지 않았냐는 타박이 주를 이루었다. 그가 접속하자마자 여기저기서 파티초대 메시지가 도착했고 하선우는 가장 먼저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초대를 승낙했다. 파티원 중에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가 있음을 확인한 하선우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오빠 ㅠㅠ 왜 정모 안왔어여 ㅠㅠ 꽃단장하구갔는데 ]
“미안.”
청원 : [ 그게 꽃단장 한거야? ㅋㅋㅋ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길마오빠왜그래여 ㅠㅠ ]
하선우는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가 우는소리를 하기 전에 서둘러 말을 잘랐다.
“오늘 연맹전 어디서 해? 티룸의 숲에서?”
-아뇨. 유골의 협곡에서 2시 반부터 시작한다고 공지 올라왔어요.
“바로 시작하네? 지금 길드원 다 거기 있어?”
-예.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오빠 안와서 심심했어여 ㅠㅠ ]
“무기 수리하고 갈게. 길드 채팅창으로 얘기한다? 파티 창 못 볼 수도 있어. 거야야.”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ㅠㅠㅠㅠ네 ]
연맹전은 MMORPG 게임인 카르달의 고유한 콘텐츠 중 하나로, 길드 단위의 연맹에 가입해 여러 활동을 통해 결속을 다지는 커뮤니티 활동을 뜻했다. 각각의 도시마다 연맹을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이자 연맹활동의 최종목표인 ‘집정관’을 선출하고는 했다. 오늘은 상대편 집정관을 공격하고, 진영을 파괴하는 연맹전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이번 연맹전이 벌어지는 곳은 47번째 집정관이 선출된 유골의 협곡이었다. 평소 20레벨의 유저들이 30레벨까지 폭풍 레벨업을 하려 던전과 몬스터를 때려잡는 사냥터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20이하의 저렙은 아예 출입할 수 없고, 30이상의 고렙은 시시해서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보니 평소에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연맹의 협공으로 굳게 잠겼던 유골의 협곡의 문이 열리고 요격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집정관의 수복들이 반격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2시 30분부터 시작되었던 연맹전은 두 시간에 걸친 계속된 전투 끝에 소강상태를 보이다, 상대편 연합 별동대의 투입으로 하선우 편의 연맹이 기습을 당하면서 급작스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가까스로 집정관은 지켜냈지만 진영이 파괴되면서 사실상 연맹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지친다.”
-아, 그만하고 싶어요. 재미도 없고.
“우리가 지니까 재미없지.”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부활도 안 되고! 이거 왜하는지 모르겠어여ㅠㅠ ]
스치면뒈진다 : [ 너 진짜 전력에 도움안됨....-_-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힐 주잖아 ]
스치면뒈진다 : [ ㅋㅋㅋㅋㅋ힐ㅋㅋㅋ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힐이 왜! ]
“힐이 왜.”
스치면뒈진다 : [ ㅋㅋㅋㅋㅋ아니에여ㅋㅋㅋ ]
“그만하자. 퇴각할래?”
-예.
청원 : [ 끝났네 끝났어 ]
일부러 보란 듯이 전체 창에 글을 올리며 청원은 패배를 인정하는 글을 올렸다. 싱거운 소모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만 갔고, 협곡 안으로 들어갔던 연맹의 공격대원들이 전원 퇴각하면서 사실상 47회를 맞은 카르달 연맹전이 마무리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유골의 협객에는 인적이 드물어지더니 주변에는 길드 캐릭터 몇몇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연맹전이 끝났으니 부계정 캐릭터의 PvP 랭킹이나 올려둬야겠다고, 한가로운 생각이나 할 무렵이었다.
하선우는 가까이서 느껴지는 담배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등받이가 커다란 PC방 의자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담배 연무가 공기 중으로 희미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 금연간판이 무색해 보였다. 독한 연기를 짜증스레 쳐다보던 하선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 ]
조용히핥는 : [ 고자 ]
조용히핥는 : [ 야. 고자. ]
조용히핥는 : [ 뭐하냐 멍때리고. ]
조용히핥는 : [ ㅅㅂ 차단 안 푸냐?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저기요;;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니에요? ]
청원 : [ ;; ]
조용히핥는 : [ 할 말 있어. 차단 좀 풀어 봐 ]
끈질긴 새끼. 하선우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채팅창에 글을 썼다.
고독의그림자 : [ 여긴 20렙 이상인데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
조용히핥는 : [ 20 넘었어 ]
하선우는 조용히핥는, 아이디도 심히 불쾌한 캐릭터를 대충 훑어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큰 가슴을 덜렁거리는 여자 캐릭터는 현금결제로 처바른 값비싼 아이템을 걸치고 있었다. 모두 만렙 이상의 캐릭터만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조용히핥는 : [ 차단 풀어. 전화를 받든지 ]
고독의그림자 : [ 나 부캐로 들어올게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네 오빠 ]
조용히핥는 : [ 아. 가슴 씨 모르나본데 고자 저 사람 오빠 소리보다 형이란 말 좋아해. 가슴보다는 고추를 더 좋아하고 ]
고독의그림자 : [ 파티 초대해줘 ]
조용히핥는 : [ 아 ㅅㅂ 또 쌩까냐? ]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진짜 찌질하다;; PvP 졌다고 스트레스 푸는 거 되게 찌질해보여요;; ]
조용히핥는 : [ 고자. 너 여기서 나가면 후회할텐데 ]
캐릭터를 로그아웃시키려던 하선우는 ‘조용히핥는’의 말에 멈칫했다.
조용히핥는 : [ 네 특허 말이야. 휴대폰에도 내년부터 소급적용 된다던데…… 하이고 고자야. 우리 고자 속상하고 배아파서 어쩌나. ]
고독의그림자 : [ 고자라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조용히핥는 : [ 고독의그림자를 줄여서 고자라고 하는 건데 왜? 찔려? ]
헤드셋 너머로 청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핥는 : [ 하긴 고자는 고자지. 영 쓸 일이 없었잖아. 뒤만 썼지 앞은 영 사용해 볼 엄두가 안났잖아. 형 상대로 써본적은 있어? ]
고독의그림자 : [ 상대할 가치를 못느끼겠군요 운영진 쪽에 신고글 올리겠습니다 ]
조용히핥는 : [ 자기! 섭섭하게 왜 그래~ ]
하선우는 그 즉시 샌드박스를 열어 ‘조용히핥는’의 차단을 해제했다. 1:1 채팅창을 열어 장문의 욕설을 순식간에 적어 전송한 하선우는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자판기를 미친 듯이 내리쳤다. PC방 아르바이트생이 카운터를 벗어나는 것이 느껴져 가까스로 행동을 멈추었지만 그럼에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온갖 욕설로 점철된 장문 메시지에 대한 답장은 간단했다. 그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타자 치기 귀찮으니 전화하라는 것이었다. 하선우가 그의 번호를 스팸번호로 차단했으니 전화를 걸 수 있는 건 하선우뿐이었다. 결국 하선우는 건물 밖으로 나와 그의 번호를 눌렀다. 웃음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너 성격 많이 변했다.
“덕분에.”
-너 그런 욕 한 번이라도 형 앞에서 한 적 있어?
“해줬어야 했는데, 미처 못해주고 끝났다.”
-아… 아쉽네. 형이 그런 말을 들었으면 너한테 더 반했을 텐데. 너도 잘 알겠지만 우리 형 변태잖아. 가학적인 면도 있지만, 피학적인 면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변태. 그걸 네가 잘 개발시켜줬어야지. 아, 어쩌냐. 너무 아깝다.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는 영혼의 한 쌍이었는데.
“나한테 찰지게 욕 처먹어볼래?”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는 아니지. 운명공동체한테 그러면 쓰나. 네 특허가 곧 내 특허인데.
여전히 웃음이 묻어난 목소리로 강태한은 끌끌거렸다. 하선우는 머리에 열이 오르는 느낌에 차가운 벽에 이마를 기댔다.
가장 중요한 강태한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니, 잊었다고 말하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었다. 특허가 1심 재판에서 무효처리로 계류 중인 지금, 하선우는 강태한을 굳이 신경 써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특허가 무효처리 됐으니 아까워서 어떻게 하지. 네가 준 1억 5천 잘 썼다. 거지 적선했다고 생각해. 너한테는 푼돈이잖아. 1,000원의 가치는 되나?”
하선우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강태한을 생각하면 하선우는 자신의 특허가 무효처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강태한은 하선우의 부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은 아니었지만, 하선우의 부도를 유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 하선우는 그 사실을 PC방에서 게임을 하던 중에 느닷없이 알게 되었다. 수상쩍은 닉네임의 유저가 자꾸만 고독의그림자에게 오프라인상의 하선우만이 알 법한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것도 장문혁 실장이 이석에게 뒤로 대준 것이 돈만이 아니었을 거라는 은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젊어서 못 놀아본 놈들이 사회에서 돈 좀 쥐어보면 회까닥 정신이 뒤집히는 건 동서고금 똑같다고, 처음에는 술집 아가씨들 앞에서 체면을 세우던 이석이 어떻게 놀았는지를 상세하게 떠들어댔다. 알지 못했던 이석의 이면을 떠드는 강태한의 말을 하선우는 거의 흘려듣다시피 했다. 그는 걸핏하면 확인되지 않은 거짓들로 사람들을 현혹했고 이간질을 놓는 인간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진실들도 더러 섞여 있었지만, 이미 회사가 부도난 마당에 이석의 부정했던 과거를 낱낱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하선우는 강태한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만약 처음부터 강주한이 하선우의 억울함을 들어주었거나, 엘텍이 하선우를 상대로 벌인 특허무효 소송이 패소를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선우는 신문고를 찾는 백성의 마음으로 사기를 계획했던 사람의 정체를 밝혀달라고 법원을 찾아갔을 터였다. 그러나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 강태한이었음이 밝혀진 지금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특허는 무효처리 되기 직전의 계류 상태로, 이는 거의 패소가 확정되었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이쯤 되니 하선우는 궁금하기도 했다. 왜 그가 무효처리가 될 게 뻔한 하선우의 특허를 비집고 들어와 이중계약을 맺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하선우에게 강주한의 진짜 모습을 밑바닥까지 보여주려 했다면 그의 계획은 철저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강태한은 누군가를 심판하려는 동기로 행동을 취하는 결곡한 인물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몰인정한 그가 기초공사를 하듯 이석에게 뒷돈을 주고, NnG에 계약금을 주었다면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강주한은 네가 엘벡스 소유주인 거 몰라?”
하선우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건너편에서 코웃음 치며 강태한이 말했다.
-몇 번을 말해. 나는 엘벡스와는 서류상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니까. 대표이사는 김운형이라니까.
“그러니까 그 김운형이 누군데.”
-그야 나도 모르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으니까.
강태한은 피식 웃은 뒤 말을 이었다.
-필리핀에서 행방불명된 실종자야. 브로커에게 듣기로는 행려병자라고도 하고. 실종신고는 안 됐다고 하더라.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하선우는 느슨하게 기대었던 등을 똑바로 폈다. 휴대폰을 고쳐 잡은 그는 잇새로 욕설을 씹은 뒤 말했다.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실종자 명의로 계약을 맺은 거라고?”
-그래도 대리인은 나야. 그 정도 서류야 구비해놨지. 법적으로 문제없어.
“미친 새끼.”
-왜 열을 내고 그래. 아무리 나라도 김운형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해. 이제 와서 김운형이 나타나는 건 또 내가 많이 곤란하고.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김운형이가 억울해할 것 같아? 필리핀에서 그걸 누가 수사해.
끌끌거리던 강태한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한참 뒤 입을 연 강태한의 분위기는 이전과 달리 차분해져 있었다.
-그런데 필리핀 경찰도 내버려두던 걸 형이 캐고 다녔더라고. 형이 계속 엘벡스 뒷조사를 하고 다녔거든. 알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지. 김운형이 이 새끼가 환상적인 놈이었거든. 한국은 기본이고 중국, 미국, 일본……. 한국인을 상대로 물장사하다가 캄보디아에서는 신부 장사하다가, 태국에서는 좆 달린 놈들로 장사를 했어. 어디 가서 칼 맞고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놈이었지. 필리핀에서도 물장사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몇 년 전부터 행방이 묘연해졌어. 뭐, 서류상으로는 멀쩡히 살아 있지만.
“그래서?”
-형이 곧 눈치를 깔 거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형제끼리 잘 해결해봐.”
-운명공동체끼리 이러면 안 되지. 너는 내게 독점실시권을 넘겼으니 나는 네 허락 없이는 다른 용도로 특허를 사용할 수 없고, 너 역시도 내 허락 없이는 특허를 사용할 수 없으니 한 배를 탄 거잖아. 순순히 내 말 좀 듣지? 솔직히 생각을 해봐. 형이 너한테 손해배상 10억 청구할 때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잖아. 위약금을 청구하기를 했어,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를 했어? 넌 나한테 고맙지도 않냐?
“그래. 계약해지를 요구하지도 않고, 위약금 소송을 걸지도 않아서 수상쩍다고 생각했어. 어차피 무효처리 될 특허니까 좀 미안한 감정도 있었고. 근데 그게 너인 걸 알고 나니까…….”
하선우는 꽝꽝 얼은 땅을 발끝으로 거칠게 차며 말했다.
“제발, 여태 조용히 있던 김에 제발 그대로 구석에 구겨져 있어라. 1억 5천은 내 인생 망친 대가로 적선했다 쳐. 정말 부탁하는데 너희 가족 개싸움에 내 인생 좀 말려들게 하지 마!”
하선우는 거칠게 소리를 지르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개처럼 짖어대는 강태한의 목소리를 차단한 뒤에도 하선우는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참을 씩씩거렸다. 휴대폰을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하선우는 무모한 생각을 금방 거두어버렸다.
휴대폰의 명의자는 자신이 아니었으며, 그가 찬바람을 맞으며 분노를 삭이는 동안에도 PC 사용 요금은 꾸준히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강제적인 평정을 안겨주었다. 궁상은 분노를 가두는 힘이 있었다.
그는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강태한의 아이디를 차단했다. 강태한이 하선우의 샌드박스에 장문의 메시지를 전송했지만 그는 읽지도 않고 창을 꺼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유골의 협곡에 있었고 하선우는 강태한의 캐릭터가 따라올세라 다른 대륙으로 이동해버렸다.
-형, 어디 다녀왔어요?
“편의점.”
-저 새끼는 신고하셨고요?
“신고? 왜.”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오빠한테 자꾸 이상한말하자나여ㅠㅠ ]
“아…… 됐어. 열폭하는 건데 내버려둬. 나 아우르고 굉으로 이동했어. 성물 모아서 수호석으로 교환해야 하거든.”
oO부들부들Oo : [ 일퀘돌게? 같이가자 ]
“예. 일퀘 안 하신 분 같이 가죠?”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저도가여 ]
그러나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하선우의 마음은 다른 곳에 닿아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무기력이 아니라, 그의 의지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길 원했다. 몬스터가 휘두르는 무기에 맞서 반사적으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는 대신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이나마 무기력에 쉼표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하선우의 생각은 길드 매니저의 질문에 멀리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임자 형.
“응?”
-형한테 열폭하는 찌질이가 저한테 자꾸 말 걸어요.
“뭐? 뭐라고.”
-길드 가입시켜달라고요.
“무시해. 미친놈.”
-형. 이 말만 전해달라는데요.
“무시해.”
-그래도 이 말은 전해야 할 것 같은데. 귓말 보낼게요.
청원 : [ 차단 안 풀면 나도 너 고소한다. 위약금 4억 5천에 손해배상청구는 따로 ]
청원이 보낸 귓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선우는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무시해도 돼. 너도 차단해.”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뭔데 오빠들끼리 얘기해여ㅠㅠ ]
-차단했어요. 근데 형 아는 사이예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잖아. 변태 유저가 전에 PvP 신청해서 받아준 것 말고는 접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 게임 새로 시작하는 유저인가 보다 하고 가르쳐주는 마음으로 대결한 게 전부라니까.”
그 말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칼을 휘두르고, 달리고, 걷고, 점프하는 스킬밖에 모르는 강태한에게 PvP를 신청했던 것은 하선우였다. 내내 대화를 차단하던 하선우가 메시지를 보내자, 말을 건다고 생각했던 강태한은 Yes 버튼을 눌렀고 대결모드로 바뀐 후 하선우는 곧바로 풀로 채워두었던 산사태 기술을 먹였다. 와르르 쏟아지는 주먹질에 ‘조용히핥는’이 손도 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아무런 스킬도 먹히지 않는 딜레이에 걸린 것이었다. 하선우는 곧바로 평타의 딜을 넣으며 강태한 캐릭터의 생명을 야금야금 깎아내기 시작했다. 뒤늦게 하선우의 계획을 알아차린 강태한이 욕설을 퍼부었지만 블락을 먹어 채팅창에 그대로 옮겨지는 것이 없었다. PvP 모드로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조용히핥는’은 기절과 그로기를 반복하며 하선우의 손발 아래에서 고기가 다져지듯 야무지게 부수어졌고, 결국 그는 하선우를 한 대도 때려보지 못하고 패배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때 형이 너무 잔인하게 조졌어요. 완전 발컨이던데.
“그래? 내가 너무 심했나?”
-뭐, 자존심이야 상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형을 쫓아다니면서 괴롭힐 정도는 아니죠.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각박하면 그런 걸로 앙심을 품나 모르겠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싸이코에여 싸이코! 감히 내 임자오빠한테 ㅠㅠ ]
oO부들부들Oo : [ 그러게; 싸이코네;; / 성물 여기 많이 몰려 있다 나 있는 데로 와 ]
하선우는 파티원들이 성물을 채취할 수 있도록 진을 치고 있는 기동대를 처치하다, 코를 파고드는 담배 냄새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안에 받쳐 입고 온 카디건을 당겨 코끝을 덮은 그는 모니터를 쳐다보지도 않고 평타 키를 누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바로 뒤에서 나는 냄새였다.
줄곧 줄담배를 피워대는 인간에게 이곳은 금연구역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려다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오빠 저한테도 귓말와여 ]
“미안하다. 나 때문에 게임 분위기 흐리네.”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모르는척해여? ]
“응. 무시해.”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근데여 오빠; 이 사람 진짜 이상한사람 같아요ㅠㅠ ]
“왜?”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막… 진짜 싸이코 아니에요? ]
“싸이코라니? 왜? 너한테 뭐라고 그래?”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그건아닌데여 ㅠㅠ ]
“뭐라는데.”
게임은가슴으로하는거야 : [ 오빠한테 뒤좀 돌아보라구 전해달라구……;; ]
oO부들부들Oo : [ 현피냐;; ]
스치면뒈진다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소름ㅋㅋㅋㅋ ]
하선우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현피는 현실의 앞글자인 ‘현’과 Player Kill의 ‘P’를 딴 합성어로 게임과 인터넷 댓글, 혹은 메신저처럼 웹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실제 싸움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현피가 실제 사건으로 일어날 확률은 아주 희박했고, 우스갯소리로 유저들 사이에서 ‘현피 뜰까’라는 말이 오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험악한 농담처럼 취급되곤 했다.
현피라니. 농담의 질이 나빴다. 물론 강태한은 늘 질 나쁜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러나 MMORPG 게임에 익숙한 유저들이 사용하는 과격한 인터넷 언어로 농담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하선우는 의자를 돌렸다. 짓궂은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놀리는 방식으로 두 손을 벌려 왁, 하고 소리 지르듯 강태한이 소리 지르진 않을까, 내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강태한은 하선우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의 반이 가려진 채였다. 그는 아주 지루한 듯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의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깨끗하게 손질된 손톱의 반질반질한 광을 엄지로 느리게 문질거리다, 뒤늦게 하선우의 존재를 의식한 듯 눈을 조금 들어 올렸다가, 다시 손톱에 시선을 두었다.
하선우는 헤드셋 속에서 흘러나오는 게임 소리를 의식하며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 아무도 없는데.”
-당연히 없겠죠. 형, 쫄았어요?
“쫄았다기보다 조심한 거지. 미친놈한테 걸린 건 처음이라서. 세상에 워낙 이상한 놈들이 많잖아.”
-하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렇긴 한데…… 형 이번에도 렉 났어요? 이 지역 성물 다 캤는데. 다른 데 가요.
“어? 아아……, 나는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집에서 전화 와서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래도 퀘는 완료하고 가죠?
“나중에.”
-이거 일퀘라 오늘 완료 안 하면 소용…….
하선우는 자신을 뒤덮듯이 허리를 기울여 컴퓨터를 강제 종료하는 강태한을 올려다보았다. 강태한을 피해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인 하선우는 숨을 멈추었다. 부담스럽게 거리를 좁힌 강태한과의 물리적인 접촉을 피해 하선우는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강태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컴퓨터의 본체에 손을 얹고 남은 손을 장골에 얹은 자세로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약탈하는 자와 약탈당하는 자의 전형적인 포즈였다. 하선우는 뒷걸음질로 의자를 굴려 카운터 쪽으로 몸을 조금 빼냈다.
“생각보다는 싱거운 반응이네.”
“뭐가.”
“뺨이라도 맞을 줄 알았는데.”
“……주먹으로 처맞는 게 아니라?”
강태한은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다문 입술을 위로 당겼다. 하선우를 남자로서 인정해줄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선우는 강태한을 인간으로 인정해줄지 말지 고민하다 패딩을 집어 들었다. 옷을 껴입는 하선우를 지켜보던 강태한은 고개를 돌려 PC방의 전경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구나?”
감탄의 눈길로 그는 PC방을 빠르게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카르달 전체 랭킹 5위, 절세의 이루칸 서버의 전설, 프리나이츠 길드의 긍지, 고독의그림자님이 계신 아지트가.”
붉게 달아오르는 하선우의 얼굴을 즐거운 눈길로 바라보며 강태한은 말했다.
“왜. 나름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꼭 비꼬는 것 같아서.”
“비꼬는 거 아니야. 순수하게 감탄하는 거지.”
“하긴, 나도 네 캐릭터 연타로 기절시키고 그로우 상태에서 피 계속 깎아 죽이니까 게임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강태한은 킥 웃고는 숙였던 허리를 폈다. 하선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친한 척 몸을 붙인 그는 상체에 힘을 주었다. 지갑 속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아르바이트생에게 내밀고는 반항하는 하선우를 밖까지 끌고 갔다.
“그냥 얌전히 따라와. 귀찮은 일 생기는 거 나도 싫어.”
“귀찮은 일은 네가 만들고 있잖아!”
결국 강태한을 건물 밖 화단으로 밀쳐낸 하선우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본 뒤, 거칠게 몸을 돌렸다.
“정말 손 놓고 살 거야?”
등 뒤에서 커다랗게 소리치는 강태한의 말을 무시하며 하선우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패딩에 달린 모자까지 그 위에 뒤집어쓴 하선우는 주변의 정류장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그러나 금세 강태한에게 따라잡혔고, 주변에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너 이거 납치!”
“어, 맞아. 납치.”
리모컨을 눌러 뒷좌석의 도어록을 잠근 강태한은 몸싸움을 벌이려는 하선우에게 손을 뻗었다. 오히려 몸을 바짝 붙이자, 하선우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좌석의 바닥을 짚으며 하선우를 올라탔다. 헉 하고 들숨을 몰아쉰 하선우는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강태한의 얼굴을 경악 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우리 형이랑은 차에서 몇 번이나 그 짓 해봤어?”
“넌 생각하는 게 그런 것밖에 없어?”
긴장으로 목이 잠긴 소리가 났다. 강태한은 죽은 개구리처럼 배를 보이는 하선우의 항복하는 자세와 바짝 오그라든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왜요, 고독의그림자 님. 강주한 닮은 캐릭터로 대리만족 느끼시는 분이, 나는 안 돼? 솔직히 닮았잖아.”
“미친……. 비켜.”
그는 끌끌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하선우는 불쾌함이 잔뜩 묻어난 얼굴로 차창을 향해 몸을 바짝 붙였다.
“장난친 거야.”
강태한은 갑자기 친근하게 태도를 바꾸었지만, 하선우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용건이 뭐야.”
“이제 궁금해? 그렇게 내 연락을 씹어대더니.”
“계속 이렇게 쫓아다니면서 진상 부릴 것 같아서 네 용건 듣기나 하려고.”
“진상 부린 보람이 있네.”
고개를 끄덕이며 하선우의 말을 수긍한 강태한은 이윽고 말했다.
“휴대폰에 네 특허기술 소급적용된다고 한 말 전해 들었어?”
“그래.”
“EUABC와 공동으로 개발 진행됐던 배터리 유럽에서 시생산 시작된 거 알고 있어?”
“네가 알려줬잖아.”
“울산 엘텍 전지공장에서 생산한 시스템 파워팩 올해 처음 미국에서 상용화된 건 들었고?”
“……뭐야. 용건만 말하라니까. 지금 나 배 아파 죽으라는 거야, 뭐야. 내 특허는 한국에서 무효처리 돼서 사장됐는데 잘나간다고 자랑하러 왔어?”
“아니지. 나도 배 아프지. 서류상으로는 김운형 씨 소유긴 해도 엘벡스 내 거잖아. 너만 배 아프겠냐.”
강태한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퍽이나. 네가 안타깝겠다.”
“아니지. 내가 널 볼 때마다 강조하는 게 뭐야. 운명공동체. 그리고 엘벡스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특허만 소유한 페이퍼컴퍼니기는 해도, 그래도 세금은 계속 내 주머니에서 나가고 있다.”
“나도 널 볼 때마다 누누이 말하지만 네 종이쪼가리 회사가 유일하게 소유한 특허에 네 형이 무효소송을 냈다고. 1심에서 무효처리가 될 판인 데다가 지금 계류 중이라고!”
하선우는 결국 속이 터져 거칠게 소리를 내질렀다.
“잘난 네 형이 그 특허에 무효소송을 냈어. 계류 중이지만 이미 진 싸움이야. 법정에서 싸울 경우 특허 무효율이 60% 가까이 돼. 그나마 나 같은 개인과 대기업이랑 붙으면 40%는 꿈도 못 꾸고! 한마디로 죽 쒀서 개 준 것보다 못하단 말이야! 이 상황에서 배가 아파? 네 힘으로 무효처리를 막아볼 생각은 있어? 형한테 빌빌거리는 네가 무슨 재주로?”
강태한은 하선우의 도발에 그저 매끄럽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근사해 보일 수도 있는 미소였다. 이쯤에서 악의 섞인 반응이 되돌아와야 하는데 너무 조용해서 하선우는 도리어 불안해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강태한은 말했다.
“너 정말 무효처리 돼도 상관없어?”
하선우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선우의 눈빛이 침침해졌다.
“나도 너한테 고소할까? 아, 물론 필리핀에서 칼 맞고 뒈졌는지 살았는지 알 방법이 없는 김운형의 이름으로. 위약금 4억 5천에 손해배상청구는 따로.”
강태한은 손바닥으로 느리게 턱을 쓸었다. 하선우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그는 계속해서 턱을 매만졌다. 살 껍질을 벗겨낼 듯이 힘을 주어,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동작에 하선우는 점점 숨이 차올랐다. 그건 마치 정신이상자의 반복행동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행동을 멈춘 그가 입을 열었다.
“형은 네가 갑자기 마포대교로 달려갈까 봐 걱정이 많아.”
“마포대교보다는 한남대교가 더 가까워. 그리고 강은 분당에도 많거든? 뒈지려고 마음먹었으면 진작 뒈졌어.”
강태한은 하선우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형한테 가서 빌지 그래. 오매불망 기다리던데.”
“……뭐?”
입술을 씰룩거리며 강태한은 웃었다.
“그냥 뒤 좀 대주고 편하게 살라는 소리야. 원래도 후장 대줬잖아.”
“그러게. PC방 폐인보다는 후장 좀 대주고 편하게 사는 게 낫겠네. 너도 진로를 바꿔보는 건 어때. 기업가보다는 진로 상담해주는 게 적성에 더 맞겠는데.”
“까분다.”
“이게 까부는 소리로 들려?”
하선우는 강태한을 노려보았다.
“제일 재수 없는 건 너야. 친한 척하는 걸 내버려두는 건 내가 모든 걸 다 내려놨기 때문이고 정말 지쳐서…… 다 귀찮아서 화내기도 귀찮아서 그런 거야. 네가 인간이면 정말 내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깐죽거릴 수는 없는 거지. 하긴, 애초에 너희 형제들에게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화내.”
“화낼 기운도 없다고.”
“복수할 생각은 있어?”
“내가? 복수를?”
하선우는 강태한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코웃음 치며 방어하듯 팔짱을 꼈다.
“마음속에서는 수천 번도 더 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복수가 컴퓨터 게임으로 대전 신청해서 죽이는 거? 그 일로 내가 화가 났을 것 같아?”
“났잖아! 만렙 찍고 비싼 템으로 무장했잖아!”
“씨발, 내가 게임을 했겠어? 밑에 놈 시켰지.”
“뭐가 됐든 화가 나서 한 거잖아.”
“너랑 내가 수준이 같냐? 넌 그렇게 당하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구나. 독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평생 나 같은 놈한테 피 빨리고 살겠어. 맹추 같은 놈.”
하선우는 화도 나지 않아 체념한 얼굴로 강태한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식 비웃음을 흘린 강태한은 반대편 문에 등을 기대었다. 차창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그는 말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형한테도 소식이 닿았을 거야.”
하선우는 강태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소식이라니.”
“PC방에 있는 너를 납치했다는 소식. 또 내가 엘벡스의 실제 소유주인 사실도.”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한 배를 탔다는 거지.”
강태한은 미간을 모았다.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만 리의 항해를 떠나며 결의를 다지는 사람의 얼굴로 하선우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선우는 강태한의 시선을 피해 굳게 잠긴 도어록을 바라보았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 당겨보았지만 역시 열리지 않았다.
“너나 나나 특허를 딴 데 못 파는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야. 백 번째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 운명공동체라고.”
“그래. 무효처리 될 쓸모없는 특허를 공동으로 소유했다 치자.”
“사람이 말을 하면 얼굴을 봐야지. 하 사장님.”
강태한은 하선우의 얼굴을 억지로 자신을 향해 돌렸다. 억세게 턱을 잡아 움직인 손아귀의 힘에 하선우는 표정을 구기고는 강태한의 손을 힘주어 빼내었다.
“나한테 위약금으로 4억 5천 뜯길래, 아니면 한탕 할래.”
“한탕이라니.”
“팔아치워야지.”
“팔아치워?”
강태한은 하선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태한은 엄숙하게 하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묘하게 웃음을 깨물고 있는 느낌이었다. 석연찮은 기분에 하선우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차피 무효처리로 1심에서 계류 중이야.”
“아… 진보성이니 뭐니, 방해된다? 뭐 그랬지? 사실 나도 특허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라.”
“그렇겠지. 그러니 그런 신소리를 하겠지.”
강태한은 하선우가 귀엽다는 듯 큭큭거리며 웃었다. 하선우는 약이 올라 목소리를 잔뜩 낮춰 퍼부어대듯 말했다.
“너와 내가 특허를 포기한다고 쳐. 무효처리 되기 직전인 특허를 누가 양도받겠어? 그것도 엘텍을 상대로 소송 중인 특허를.”
강태한은 불신이 가득한 하선우의 얼굴을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고달픈 표정으로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병신 새끼. 이래서 네가 안 되는 거다.”
“뭐?”
“체급이 비슷한 라이벌에게 팔아치워야지. 그것도 강주한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증오하는 사람한테. 그래야 가장 이문이 남지.”
그는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강주한이 도로 사가든가. 되파는 값은 네가 정하고.”
강태한은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선우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얼음동상으로 변한 인간의 저주를 풀듯 이마를 검지로 툭 밀어낸 그는 한마디 덧붙여 말했다.
“병신.”
하선우의 꽉 다물린 잇새로 가느다란 균열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더운 숨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천천히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는 하선우를 보며 강태한은 자동차 키로 도어록을 열었다. 앞좌석의 문을 열어 운전석에 앉은 그는 룸미러의 각도를 조절했다. 미러의 한가운데에 하선우의 얼굴이 들어왔다. 여전히 부동자세 그대로였다. 그는 혀를 차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어때. 오붓하게 저녁 식사나 하자고 할까? 이렇게 네 사람이 모이는 건 처음이지?”
“…….”
“됐다. 말을 말자. 메뉴는 내가 고른다.”
경호 형이 뭘 좋아하더라. 천진한 얼굴로 저녁 식사 메뉴를 걱정하던 강태한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자동차가 퇴근시간의 혼잡한 도로로 섞여드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하선우는 여전히 애매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하선우는 자신의 무기력 속으로 난입해 들어온 강태한이 난장을 부리는 것을 그저 망연자실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