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두려움과 마주 앉아서 (16/26)

16. 두려움과 마주 앉아서

만감. 실연 뒤에 뒤따르는 추스르기 벅찬 온갖 모호한 감정들.

이별의 감정에 도취된 남자란 웃음거리 삼기 좋은 소재였다.

의외일지 몰라도 하선우와 헤어진 이후로 강주한은 오랫동안 온갖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실연을 당한 사람들이 한낮에는 일 중독자로, 심야에는 시인으로 삶을 집행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일 중독자와 시인이라는 이중적인 행로 속에서 그는 굳이 자신이 느낀 상실감을 다독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만감의 늪 속에 무력하게 잠겼으며, 덩어리진 우울함이 자신을 짓누르도록 무능하게 방관했다. 또한 이별을 맞이한 사람답게 자기 연민과 감상에 빠졌고, 이 모든 것이 쓸데없는 고집이라는 걸 알면서도 실연의 무기력에 잠겼다.

그러니까 그는 온 마음과 온전한 진심을 다해 슬퍼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그건 마치 자신의 대척점에 선, 모든 것을 잃은 남자를 향해 수동적이면서도 아주 공격적인 모욕을 퍼붓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강주한은 남동생이 빙긋 웃으며 물어왔을 때, 신발 속 가시를 밟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연놀이 재밌어?”

실연놀이.

그의 동생은 의외의 순간에 아주 드물게 직관적일 때가 있었다. ‘놀이’의 사전적 의미처럼 즐거움도 만족도 없었지만, 강주한은 이별의 감정을 초연히 음미했던 것이다.

지금껏 강주한은 동생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애쓴 적이 없었고, 그가 한 행동과 말,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알아주길 바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대신 그는 듣고 있던 합창단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위티어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영화음악이었다. 처연한 선율이 바람에 날리는 부들처럼 부피를 늘리며 울려 퍼졌다. 소음에 가까운 데시벨의 영역까지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분명한 형의 반응을 무시하고 강태한은 멜로디를 따라 허밍을 했다.

“정기 인사발표도 났잖아. 내일이면 공식 취임식도 열리는데 나라면 한강변에서 스트립쇼도 벌이겠다. 남의 등골 빼먹고 올라간 자린데 기뻐해야지.”

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데 열의를 보이는 동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빙글 웃으며 강태한은 말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 슬픈 음악을 다 듣고 말이야. 어울리지도 않는 궁상을 떠는 걸 보니 놀이에 아주 푹 빠진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찾아왔어.”

“난 바로 본론부터 들으려는 형의 화법이 참 싫더라. 정 없게 느껴지잖아.”

강태한은 강주한의 뒤로 다가왔다. 조금 전 그가 올렸던 볼륨키를 낮추며 말했다.

“노래가 너무 청승맞아서 못 들어주겠어.”

강태한은 오디오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CD 보관함을 열었다. 손끝으로 CD 케이스의 옆면을 훑으며 제목을 살피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취향 참 고리타분하다.”

들을 노래가 없어 노래가. 타박하며 강태한은 앨범을 골랐다. 그의 태도는 특별한 순간, 어떤 장면을 연출하기에 알맞은 사운드를 고르는 음악감독처럼 신중했다. 그의 손끝이 멈춘 곳은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을 모아둔 자리였다.

“새 앨범 나왔네?”

강태한의 손에는 한향시립악단에서 발매한 말러 교향곡 9번이 들려 있었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노란 딱지를 붙인, 올해 수석지휘자가 된 중국인 마에스트로와 한향시향의 공연 실황이 담긴 앨범이었다.

“이거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연주회 맞지?”

강태한은 책을 보느라 대꾸가 없는 강주한을 흘깃 쳐다보곤 피식 웃었다. 그는 플레이어에 CD를 집어넣고 재생했다. 1악장이 적막 속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음악은 화폭 위에 붓끝을 놀리는 대가의 솜씨 같았다. 하나의 선이 모여 그림이 만들어지듯, 단편적인 음이 모여 극적으로 선율이 부풀려졌다.

“짱깨 지휘가 이정한보다 낫지? 이정한은 겉멋만 들었잖아. 아, 요즘은 다 중국으로 교체돼. 다 메이드 인 차이나야. 우리라고 다를 게 있어?”

찬웃음을 지은 강태한은 CD 케이스의 뒷면을 살폈다. 지난 10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말러 레퍼토리의 교향곡 연주회가 있었다. 한향시향의 수석지휘자가 한국인에서 중국 국립 교향악단 출신의 진아륜으로 교체되면서 화제가 되었던 연주회였다. 뿐만 아니라 한향시향의 후원자 모임 초청으로 강주한과 강태한 역시 직접 공연을 관람했었다.

한동안 지면과 웹 기사로 그들의 사진이 실린 ‘공연 관람하는 엘텍 가家의 자제들’이란 기사가 돌았다. 안 비서가 가져온 신문기사를 통해 강주한 역시 지면 속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강주한의 옷차림은 화려하게 꾸민 동생의 옷차림과 비교가 되었다. 그의 동생은 진저색의 트위드 슈트를 입고, 클래식한 둥근 금테 안경을 썼다. 게다가 강태한은 30년대 영국 신사들처럼 조끼 주머니에 회중시계를 꽂아 멋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에 비해 강주한의 차림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장례식장의 조문객처럼 흰 셔츠를 제외하고는 온통 검은 것투성이였다. 특별히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말러 교향곡 9번과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사람들은 말러의 교향곡 9번이 죽음 혹은 이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들 말했다. 확실한 점은 죽음과 이별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연주회가 있던 날 그는 오랜 친구를 만났다. 우진헌은 요란하게 멋을 낸 강태한을 흘깃 보고는 늘 짓곤 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강주한에게로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연예인이네. 완전 연예인처럼 요란하게 멋을 부렸어.’

진헌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쟤는 저렇게 튀는 걸 좋아하더라?’

발목을 드러내는 익살스러운 디자인의 바지를 흘깃대며 속삭였다. 강태한이 있는 방향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강주한이 물었다.

‘네 와이프는 어쩌고 혼자?’

‘여동생 만나러 북경으로 여행 갔어.’

‘처제가 북경에서 대학 다닌다고 했지.’

‘응. 장모님이랑 와이프 신나서 가더라.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런 데 혼자 왔어?’

강주한은 우진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 나른하게 웃었다.

‘혼자라니. 태한이가 있잖아.’

우진헌은 얼굴을 찌푸렸다.

‘태한이 말고. 그 잘생긴 친구. 볼 때마다 붙어 다니더니 오늘은 어디다 떼놓고 왔어?’

강주한은 웃음을 유지한 채로 생각했다. 짧은 침묵 뒤, 그는 평범한 어조로 말했다.

‘싸웠어.’

‘싸워?’

‘그래.’

‘세상에. 허허…… 별일이네?’

‘별일까지야.’

‘별일이지. 하선우 씨 보기보다 재밌는 친구였네? 강주한이랑 싸울 깜냥도 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줄 걸 그랬다.’

우진헌은 끌끌거리며 웃었다. 하선우라는 이름 석 자를 입에 담는 친구의 얼굴은 진심으로 유쾌해 보였다.

‘왜 싸웠는데?’

우진헌은 타인에게 관심을 잘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그간의 사정이 궁금한 듯 보였다. 그 호기심 가득한 눈을 보자 헤어진 뒤에 상대방을 모욕하고, 함께한 시간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처럼, 강주한도 하선우를 모욕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그 원색적인 감정은 곧바로 식어버렸고, 그 대신 자신의 평판을 망쳐버리고 싶은 비틀린 욕망이 틈을 비집고 나왔다.

‘내가 하선우 씨의 특허를 뺏었거든.’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 뒤로 변하는 감정들이 흘러 다녔다. 그 생각들은 너무나도 쉽게 읽혔다.

‘야…….’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강주한을 부른 우진헌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어색한 웃음을 지은 우진헌이 짐짓 가볍게 말을 건넸다.

‘그건 진짜 화낼 만하다.’

‘그래?’

‘그래? 그래라니. 내 걸 빼앗기고도 화 안 낼 사람이 어디 있어?’

우진헌은 기가 막혀 말했다.

‘그 친구는 지금 뭐하는데?’

‘회사에 빚이 많아 부도가 났다더군.’

우진헌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가셨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가 감정이 얹힌 사람처럼 말했다.

‘부도?’

‘응.’

우진헌은 신중하게 물었다.

‘완전히 망한 거야?’

‘그렇겠지. 파산신청 했으니까.’

여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우진헌은 강주한을 살폈다. 자신의 안에 깃든, 정상적이지 않은 뭔가를 찾아내려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강주한은 이쯤에서 퇴행적인 장난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미친놈 보듯 쳐다보지 마. 그간 말하기 곤란한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어.’

난감하게 웃으며 강주한은 신뢰를 담은 눈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친구의 눈에선 여전히 미심쩍은 의심의 기운이 걷히지 않았다. 때마침 강주한을 향해 한향시향의 단장이 다가오는 바람에 그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러나 옹색한 덧칠이 벗겨지고 하선우라는 이름 석 자가 드러난 순간부터 마치 그 얼굴을 마주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새벽녘이 되도록 강주한은 하선우를 생각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그 나름의 정성을 기울여 하선우의 실용적이지 않은 태도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들이 비걱거리기 시작한 조짐을 찾아 더듬고 그들의 연애가 막을 내린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하선우가 떠나던 날에 있었던 일들을 스냅사진이나, 어떤 영상 기록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도 있었다. 침묵 속에서 그는 몇 번이고 그 순간을 재생하며 감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선우가 느끼는 감정에 다가서려 하면 늘 벽에 가로막히곤 했다. 함부로 이별을 고하는 하선우의 얼굴을 떠올리면, 머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가슴은 폭력 같은 열기로 뜨거워졌다. 그는 하선우의 증오와 절망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손쉬운 방식으로 그의 옛 연인을 판단하기로 했다. 하선우는 궁지에 몰려 어떻게든 그 상황을 타개하려 한 것이다. 궁지에 몰려 이성을 잃은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하 사장은 요즘 뭐하고 지내?”

난데없는 질문에 강주한은 생각을 멈추었다. 강태한은 본격적으로 강주한의 서재를 살펴볼 셈인지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왜 그게 궁금하지?”

“그냥. 근황이 궁금해서.”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아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그래. 형보다는 내가 하 사장에게… 아니지. 망했으니까 더 이상 하 사장이 아니지. 내가 더 하선우한테 관심이 많지. 하선우는 아는가 모르겠어. 우리 형이 이렇게 실연에 푹 젖어 있는걸. 하선우도 참 미련해.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뒤 좀 대주면 될 걸 그렇게 뻗대고 있나 몰라.”

검지로 책의 세로 면을 하나하나 훑던 강태한이 음침하게 웃었다.

“형은 알아? 하선우 요즘 PC방에서 폐인처럼 살고 있다더라.”

강주한에게서 되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강태한은 말했다.

“게임 아이디가 뭔지 알아? 고독의그림자래. 줄여서 고자. 웃기지 않아? 쓸모없는 좆 달고 다니더니 게임 아이디까지 고자라니.”

여전히 되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강태한은 서재에 꽂혀 있는 검은 화집을 보았다. 신중하게 화집을 바라보기를 한참, 나지막이 숨죽여 물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게임하는 데 보내더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진짜 한심해. 형은 그 자식의 어디가 좋아서 붙어먹었어?”

이번에도 역시나, 강주한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태연히 책의 낱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속궁합이 잘 맞았나? 남자랑 하는 건 어때? 형수랑 비슷한가?”

강주한은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 참고 들어줄 수 없어 책을 소리나게 덮었다.

“왜 자꾸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난 형이 화내는 게 너무 좋거든.”

굳은 표정으로 강태한을 바라보던 강주한은 새롭게 자신의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경멸을 받는 게 좋은 거야, 아니면 경멸이라도 받고 싶은 거야?”

“형제들에게 늘 채이던 막내의 열등감이라고 생각해둬.”

“열등감이라.”

강주한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열등한 능력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더군.”

“맞아. 자신의 약점을 의식한 사람은 그 약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하는 법이지.”

강태한은 무언가 번뜩 떠오른 표정으로 덧붙였다.

“말더듬이였던 데모스테네스가 그리스 제일의 변론가가 된 것처럼.”

“예를 든다고 모든 경우가 그 예에 들어맞는 법은 아니지.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네가 열등한 능력 때문에 시비를 건다는 거였어. 한계가 분명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네가 부도낸 엘튼 벤처투자사처럼.”

“엘튼 벤처투자사 얘기는 좀 너무 나갔다. 그때는 금융위기 때문에 시장의 거품이 빠지던 시기라 뭘 해도 망하던 시기였다고.”

강주한은 강태한을 빤히 쳐다보던 시선을 책으로 거두었다.

“소문 돌더라. 네게 상속분쟁에 영향을 줄 자료가 있다고.”

“아아, 노도현이 뿌린 돈?”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을 거다.”

“왜? 원소유주를 알 수 없도록 세탁해서? 근데 그게 뭐? 내가 뭐하러 상속분쟁에 똥을 뿌려. 나야 알 바 아니지. 외할아버지 재산을 엄마가 상속받으면 나야 좋은 거잖아.”

강태한은 코웃음을 치며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설마 엄마가 딴 주머니 차고 큰아들만 챙기겠어?”

자리에서 일어나 강주한을 내려다보며 그는 입꼬리를 길게 늘려 웃었다. 뭔가를 감추고자 할 때 그가 짓곤 하던 미소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말없는 대치가 계속되었다. 강태한의 웃음이 가늘게 신경을 긁어 불쾌한 감정이 서서히 그의 내부에 번져갈 때였다.

강태한은 갑자기 무언가가 퍼뜩 떠오른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참, 형 열받게 하려고 여길 들른 게 아니었는데. 꽃다발은 안 가져왔지만 형 승진한 거 미리 축하하려고 온 거였거든. 미리 축하할게. 내일은 내가 참석을 못해서.”

“기자들도 올 거다. 다른 임원들도 승진하는 인사발표회 자리야. 참석해.”

“미안. 내일은 윤세은 알지? 요즘 잘나가는 배우잖아. 걔랑 하루 종일 씹질하기로 해서 못 갈 것 같아. 아버지한테는 알아서 잘 말해줘?”

강주한의 시선 속에 순간적으로 어리는 강렬한 혐오의 빛에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강태한은 몸을 돌렸다. 형의 방에서 흘러나오던 말러의 교향곡을 허밍으로 낮게 따라 부르며 그는 냉소를 지었다. 신경증적이고, 어떤 의미가 암호처럼 숨겨진 것에 매료되는 형과 달리 그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것들에 매력을 느꼈다. 이를테면 그의 방식은 화염이 터지는 액션영화를 본다거나, 시끄러운 락 음악을 틀고 도로를 고속으로 질주하는 것이었다.

자동차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끼워 빙빙 돌리며 강태한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희끄무레한 입김이 눈앞에서 흩어졌다. 초원처럼 울창했던 정원의 모든 것이 겨울의 갈퀴에 쓸려가버렸다. 그는 몰아치는 추위에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걸음을 걸었다. 마침내 건물 뒤편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형의 독일제 세단 옆에 세워둔 그의 벤틀리가 마치 체구가 작은 아이처럼 왜소해 보였다. 부드럽게 시동이 걸리고, 곧 싸늘한 차 안의 공기를 시끄러운 팝송이 밀도 있게 채워나갔다. 그는 삼청동의 저택을 빠져나와 대로를 탔다. 속도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퇴근시간과 겹쳐 집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목적지는 한남동이었다. 그의 일가친척들은 대부분 종로구에 모여 살지만 홍콩에서 돌아온 그는 홀로 떨어져 나오기를 택했다. 주변의 적당한 유흥가와 강남과 강북 등, 서울의 어디라도 쉽게 달려 나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홍콩에서는 집 없이 고급 호텔을 전전하며 살았고, 자동차는 리스로 얻은 벤틀리 컨티넨탈이었으며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한남동의 주택 또한 전세로 얻은 집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예상처럼 물적인 것을 소유하는 데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다.

프리즘 너머로 굴절된 무지갯빛처럼, 돈을 통해 사람들은 빛나는 강태한을 보았다. 그에게 목을 매는 여자들도, 그를 경멸하는 사람들도, 황색언론을 통해 보도된 그의 찌라시를 읽은 사람들도 돈을 통해 왜곡된 강태한을 보았다. 강태한은 그런 왜곡이 나쁘지 않았다. 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이기에, 저택과 고급 차, 고가의 미술품이 없어도 억만장자인 그는 얼마든지 선택적으로 가난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 남자, 그 누구라도 깨어지지 않을 만큼의 얄팍하고 가벼운 관계를 맺었다. 돈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돈은 그가 쉽게 질리는 것들을 버리고 새로 대체할 수 있게 했다. 그는 모든 것에 쉽게 질리는 성격이었고 누적하고 소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소유에 집착하는 그의 형은 얼마나 구질구질한가. 그는 인정받으려 하고, 모든 걸 가지려고 애쓰다 못해, 이별한 옛 연인에게까지 집착했다. 그는 형의 미련함이 우스웠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훈기가 확 끼쳤다. 코가 콱 막힐 정도의 건조한 더위였다. 습도에 민감한 그는 방 안의 습도를 조절하곤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꽉 닫혀 있는 욕실의 문을 열자 습한 열기와 함께 우디 계열의 향기가 묵직하게 퍼져 나왔다. 천장과 바닥은 물기로 흥건했고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배수구에 뭉쳐 있었다. 거품 목욕까지 즐기고 갔는지 물 빠진 욕조에는 미처 하수구로 빠져나가지 못한 거품이 말라붙어 있었다.

“씨발년.”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그는 당장 전화를 걸어 욕을 퍼부으려다 헛웃음을 흘렸다. 수건걸이에 걸린 흰색의 브래지어를 뜯어내듯 잡아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갓 데뷔한 신인치고 주변 눈치 보지 않는 대담한 성미가 마음에 들어 집까지 불러들였더니, 욕실에 아주 깜찍한 짓을 벌여놓았다. 기억에 남으려는 수작이라면 아주 성공적이었다.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으니까.

강태한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욕실을 나와 드레스룸 옆에 붙어 있는 비교적 작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쿠지 안에서 피곤을 풀려던 애초의 계획이 틀어져 급하게 샤워를 마친 그는 샤워가운만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불쾌한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보통 기분이 바닥을 칠 때면 술을 진탕 마시거나 여자들의 품을 찾곤 했지만, 지금은 다른 여자를 침대로 불러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떠올렸다. 넋 나간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멀끔한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느닷없이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 그는 태블릿의 전원을 눌렀다.

그는 24시간마다 한 번씩 보안 메일로 보고를 받았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게임인 ‘카르달’의 일부 유저의 활동내용이 선택적으로 기록된 내역으로, 주로 온라인 게임에 접속한 시간과 활동 및 대화 내용 같은 로그 기록이었다. 유저의 아이디는 ‘tjsdn777’, 주로 접속하는 캐릭터의 이름은 ‘고독의그림자’. 그 외에도 고독의그림자와 어울리는 몇몇 유저에 관한 사항이 적혀 있었다. 어제, 그제와도, 아니 몇 달 전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고독의그림자, 아니 하선우는 오늘도 게임에 25시간이 넘게 접속을 했다.

“미친놈이네 이거. 잠은 언제 자는 거야?”

비뚜름한 눈으로 태블릿 화면을 쳐다보던 그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컴퓨터를 켰다. 게임에 로그인을 하자 커다란 가슴을 덜렁거리는 헐벗은 캐릭터가 그를 반겼다. 마우스를 휘휘 돌려 커스터마이징한 캐릭터의 잘빠진 몸매를 감상한 그는, 대화창을 열고 고독의그림자를 찾았다. 고독의그림자 옆으로 ‘접속 중’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정오를 기준으로 25시간 로그인 중이었으니 저녁이 지난 지금, 30시간이 넘게 게임에 빠져 있다는 얘기였다.

“한심한 새끼.”

강태한은 깍지를 낀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등받이가 아슬아슬한 각도로 기울어졌다. 그는 게임 화면을 나른한 눈으로 응시했다.

게임에 빠져 사는 하선우에게선 돌파구를 찾는 대신 자포자기하는 기색이 읽혔다. 그가 강태한에게 한 복수는 게임 속에서의 대결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하선우의 캐릭터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패배의 기억이 짜증스러웠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 같잖고도 치사스러운 복수라니.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선우의 속수무책이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격이라지만 불쌍했다.

EUABC와 공동으로 개발한 엔진을 장착한 엘텍의 신차가 내년 상하이 모터쇼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신차의 엔진에는 하선우의 특허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 파워팩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이미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시생산 및 상용화가 시작되었다. 하선우는 호화스러운 별장에서 알몸으로 쫓겨나 담벼락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강태한은 허리를 세우고 하선우와의 대화창을 클릭했다. 아무 의미 없는 글자를 자판으로 두드린 뒤 전송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차단 상태인 듯했다. 강태한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기어이 하선우의 잘난 면상을 마주해야 할 때가 왔다.

다음 날, 강주한의 공식 취임식은 어머니 소유 아트홀 중 하나인 아르카이크홀에서 열렸다. 가족 모두가 그의 취임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강태한은 자랑스러운 형제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다하는 길을 택했다.

직접 운전대를 잡은 강태한은 같은 블록을 질서정연하게 나열한 도미노를 떠올리게 하는 분당의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들어섰다. 아파트 옆에는 4차선의 도로를 마주한 3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었다. 그는 끈적끈적한 오물이 들러붙은 계단을 올랐다. 좁은 공간에 규칙적으로 다닥다닥 붙여놓은 컴퓨터와 의자를 보며 느낀 PC방의 첫인상은 벌집 같다는 것이었다. 어둡고 비좁은 공간 속에서 꿈틀거리는 유충처럼, 풀기 없이 지친 낯으로 게임에 몰두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이 각자 차지하고 앉은 공간의 협소한 규모에 인상을 찌푸린 강태한은 카운터에 앉아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사용법을 물어 자리에 앉았다.

몇몇은 낯이 익었다. 기껏해야 스쳐 지나가며 한두 번 본 것이 전부일 테지만,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강태한은 PC방 곳곳에 앉아 있는 얼굴들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강주한이 부리는 사용인들이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찾던 인물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선우는 카운터 근처 자리에서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등받이에 상체를 파묻은 게으른 자세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옆얼굴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많이 말랐다.

옆 좌석의 어두운 모니터 화면에 비친 하선우를 훔쳐보며 캔커피를 땄다. 하선우는 한참 게임 연맹전을 하느라 빠르게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현실도피로 선택한 게 고작 게임이 전부인 하선우의 한심한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사람마다 보이는 각종 행동유형이 있었다. 하선우의 장르는 부조리하고도 멍청한 방식으로 세상의 근심을 잊으려 하는 스크루볼 코미디였다. 그는 입가를 매만지며 조용히 웃었다.

그는 인터넷 뉴스페이지를 열었다. 엘텍가 승진 관련 뉴스가 메인 화면에 걸려 있었다. 엘텍 임원진 인사발표 내역이 주를 이루는 기사였다. 20여 명이 넘는 인사들이 새로운 직함을 얻었지만, 가장 눈에 띈 기사에는 강제한 엘텍전자 회장의 장남인 강주한 엘텍전자 전무가 사장으로 승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기사 사진 속에서 가족들은 경호원 틈에 둘러싸여 아트홀 로비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근엄한 얼굴로 앞장 서는 아버지와 그의 뒤를 따르며 환하게 웃는 어머니, 누이와 처형이 보였다. 강태한은 스크롤을 조금 더 내렸다. 강주한은 가족 중 가장 마지막으로 아트홀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유일한 단독 샷으로, 카메라를 피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경멸을 받는 게 좋은 거야, 아니면 경멸이라도 받고 싶은 거야.’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던 형제의 얼굴이 사진 속 미소 짓는 얼굴 위로 겹쳐졌다. 형제에 대한 분노가 다시 마음속을 달구었다. 이미 오래전에 습관이 된 분노였다.

게임을 실행하며 그는 품에서 담배를 찾았다. 로딩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문자로 보고받은 하선우의 게임 속 접속 장소와 서버를 확인했다. 담배에 불을 붙여 천장을 향해 한 모금 길게 뱉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온다. 마우스를 움직이며 그는 옆 모니터에 비친 하선우을 보았다. 연기를 몇 모금 뿜어내자 모니터 속에 반사된 하선우가 의자를 획 돌렸다. 담배를 피우는 자신을 힘껏 노려본 그는 짜증 가득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강태한은 자신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금연 표지판을 보곤 어깨를 떨며 웃었다. 하선우는 담배를 끄라고 말할 밸도 없는 약해빠진 새끼였다.

하선우가 접속한 서버로 들어가 지형을 조금 헤맨 끝에 모니터 속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고독의그림자. 아이디도 꼭 저 같은 고자로 짓는 하선우의 작명 센스에 감탄이 나왔다.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강태한은 경쾌하게 키보드를 눌렀다.

이유 모를 초조함이 강태한을 들뜨게 했다. 낮은 고도에 머무르는 헬기에서 뛰어내려 스키를 타거나, 깊은 수심 속으로 다이빙을 하기 직전의 상태와 비슷했다. 초조하지만 그것은 두려움보다는 스릴에 가까웠다. 철저하게 묵살되어온 그의 존재가, 세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순간이 바로 코앞이었다. 그는 형의 오만한 얼굴 위로 총알을 갈겨버리고 싶었다.

* * *

기분이 가라앉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녘의 잔잔한 호숫가처럼 고요하던 감정의 수면에 이랑이 일었다. 그는 그 자신의 기분이 아래로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다고 느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실의 그는 자신의 감정과는 다르게 정상을 향해 성큼 다가섰으니 말이다.

강주한 사장.

그는 새롭게 바뀐 자신의 직함이 낯설었지만 아주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직함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물려받은 유산이자 숙명이었으므로 스포일러를 통해 스토리를 모두 알고 보는 영화처럼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동생의 말처럼 남의 등골을 빼먹고 올라간 자리였지만 기쁘지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기분이 한없이 밑바닥을 향해 추락할 뿐이었다.

저녁 식사는 매제 소유의 레스토랑에서 가졌다. 예상했던 대로 강태한은 그의 취임식에 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동생의 부재에 내심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불만은 고스란히 여동생과 매제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여동생 강예진과 매제인 김성민은 2년 전 유통업체의 중국 진출에 대단한 기대를 걸었으나 중국 법인과의 마찰로 투자금을 모두 날렸다. 그들의 사업이 순탄했다면 그들 역시 승진으로 새로운 직함을 달았겠지만, 자금난 해소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처지가 된 그들은 순한 양처럼 얌전히 굴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테이블의 끄트머리에는 계열사의 핵심 경연진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강 회장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고분고분하게 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누구도 모난 돌처럼 튀어나오려 하지 않았고 그건 강주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주한은 그의 부친이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병환으로 자리를 보전하게 되거나, 그의 장례식 이후 일어날 법한 일들을 자주 상상하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깝지 않은 미래였다. 강주한은 여전히 너무 젊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너무도 정정했다.

그 순간 진동으로 해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강주한은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안 비서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엘벡스 실소유주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묘하게 변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강주한은 독일 합작 법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우고 일어났다. 주차장과 연결된 비상계단에서 그는 전화를 걸었다. 강주한의 전화를 받은 안 비서의 목소리는 신중했다.

한 달 전, 페이퍼컴퍼니 설립 대행업체인 월든 트러스트의 내부자료를 확보했다. 엘벡스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자료였다. 추적 끝에 버진 아일랜드에서 엘벡스골드 매니지먼트라는 회사를 찾게 되었다. 설립한 등기이사는 필리핀에서 사라진 김운형이었으며, 그의 회사에서 발행한 주식은 1달러짜리 주식 1주로 전형적인 유령회사였다. 내부문서에 따르면 한 개의 주식을 소유한 김운형은 대리인을 두고 있었는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메이슨 킴이라는 묘령의 사내였다. 그는 한국에 엘벡스 지사를 세울 때에도, 버진 아일랜드에 엘벡스골드 매니지먼트를 차릴 때에도 필리핀에서 실종된 김운형의 대리인으로 활약을 한 인물이었다.

-엘벡스 주주 대리인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메이슨 킴은 장문혁 실장 처남의 대학 후배였습니다. 본명은 존 킴으로 영국 국적입니다. 이전까지 MtM 페이퍼컴퍼니 설립 대행업체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브로커 활동을 한 것 같습니다.

강주한은 벽에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등을 곧게 폈다.

-강태한 사장과 메이슨 킴 사이의 거래를 증명할 만한 서류와 계좌 거래는 찾지 못했지만, 오늘 정오에 메이슨 킴의 통장에 30만 달러가 입금된 내역을 확인했습니다.

“먼지 하나 안 묻혔군요. 차명계좌였겠죠?”

-그렇습니다.

“자금출처 추적해봐야 그림자 하나 안 보이겠고요.”

-…추적해보라는 지시는 내렸습니다.

대답하는 안 비서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NnG에 접근하고 이석에게 이중계약을 유도한 것은 강태한의 측근인 장문혁 실장이었기에 엘벡스의 배후에 강태한이 있다는 것은 월든 트러스트의 내부자료를 확보하기 전부터 확신하고 있던 일이었다. 다만 직접적 증거가 없었다. 김운형은 엘벡스의 대표이사였지만 필리핀에서 흔적이 지워진 상태였다. 그의 대리인으로 활동한 메이슨 킴은 추적이 어려운 데다가 연결고리마저 간접적이었다. 안 비서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가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강주한은 창백한 맞은편 벽을 쳐다보며 물었다.

“김 팀장에게 전해 들은 말은 있습니까.”

건너편의 목소리가 뜸을 들였다. 마치 자신이 전할 내용이 두렵다는 듯이.

-그러지 않아도 김 팀장으로부터 하선우 씨와 관련된 보고가 있었습니다.

강주한은 폐 안에 뭉친 숨을 소리 없이 느리고 길게 내쉬었다. 하선우에 대한 보고를 받기 전, 가벼운 메스꺼움을 동반한 답답함을 해소하려 내쉬는 한숨. 그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습관이었다.

“말씀하시죠.”

-강태한 사장님께서 하선우 씨를 끌고 건물 밖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보고를 전하는 비서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웠다. 맞은편 벽에는 70, 80년대 빈티지 영화 포스터가 죽 붙어 있었다. 그는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안 비서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려, 사진 속의 이미지에 집중하려 애썼다.

-확신할 순 없지만 정황상 두 사람이 사라지기 전까지 같은 게임에 접속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 말은 같은 건물 안에 있었다는 겁니까.”

-예. 강태한 사장님의 자리가 벽에 가려진 위치라 미처 등장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빠른 시간 안에 PC에 남은 두 사람의 로그 기록을 분석해 다시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의 맞은편에 있는 영화 포스터는 76년작인 록키 포스터였다. 록키와 애드리언이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보는 뒷모습의 흑백 포스터는 영화를 좋아하는 매제의 취향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영화의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무적에 가까운 헤비급 선수 아폴론을 상대로 마지막 15회 라운드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려 애쓰던 록키.

그는 영화를 좋아했던 아내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아내와 사귀던 시절에도, 결혼을 한 이후에도 그는 한눈을 판 적 없었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그녀 외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이따금씩 확신하곤 했다. 사랑과 의리라는 감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정념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던 듯하다. 소모적이고 부질없는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강주한은 모르는 척했고, 아내는 불길할 정도로 말라갔으며 그는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아내는 강주한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매일 아침 미용사가 머리를 감겨주고 드라이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과에 끝내 익숙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도움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녀는 사용인들의 성이 아니라 이름까지도 모두 외웠으며, 개개인의 특성과 표정과 기분까지도 세세하게 살폈다. 그녀가 자주 하던 말처럼 다정도 병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강주한과 그녀의 아버지가 태연하게 저지르는 불법들이었다. 은밀하고도 조심스럽게 이루어졌지만 모든 걸 숨기지는 못했다. 그랬기에 결혼은 언제나 서로의 간극만을 체험하는 생활이었다. 누군가의 예언처럼 애초부터 예정된 실패였던 것이다.

그는 영화 포스터에서 시선을 뗐다. 죽은 아내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죽은 이는 추억 속 작은 틈새 사이로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법이었다. 다만 이젠 관념만이 남아 있을 뿐, 생전의 생생한 감정과 맛, 색깔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 길었다. 그는 새로 온 메시지를 확인하려 휴대폰을 켰다. 강태한과 함께 사라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누군가는 두꺼운 남색의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강주한은 홍콩에서 헤어진 이후로 줄곧 하선우의 일과를 보고받았다. 그와의 재회를 염두에 두고 어떤 기회를 건져보려 보고를 받는 건 아니었다. 그는 하선우와의 관계에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으며, 그 자신이 하선우에게 집착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보고를 받는 것은 그저 관성 같은 것이었다. 하선우의 체취와 체온, 그의 땀냄새 같은 것들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사진이나 짧은 동영상 클립 속 하선우의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이미 차고 넘치게 그의 휴대폰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다운받은 이후로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잡은 물고기를 바다로 방생하듯 삭제해버리지도 않았다.

하선우와 강태한이 만났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다만, 짧은 시간 내에 그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선우와 헤어졌던 날 들었던 말이 뭐였더라. 그는 사진 속 남자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고민했다.

‘내 짐은 다 버려요. 추억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쓰레기 버리듯 추억까지도 부정하며 강주한의 인생에서 사라졌던 그가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의 편에 서서 다시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던 나이 든 임원이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강주한은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무심한 시선이 투명인간처럼 그를 비껴가고 벽 어딘가에서 흩어졌다.

강주한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진단했다. 그는 모래와 먼지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막의 바싹 마른 돌이자, 오물 가득한 늪의 바닥에서 부패 중인 시체였다. 그는 무엇을 느끼고 싶지도 않을 만큼 그저 한없이 그 스스로를 방치하고 싶은 기분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풀썩 웃었다. 지금은 하선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특허무효 심판을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결과까지 3주나 남았다.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형제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질렀다. 문제는 강태한의 욕심이 어느 선까지 닿느냐는 것이었고, 형제의 욕심 많은 손길에 머리가 채여 하선우가 어디까지 따라오냐는 것이었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 화면에 강태한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그의 이름을 말없이 노려보던 강주한은 전화를 받았다. 형! 명랑한 동생의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쇠가 벽을 긁듯이 불쾌한 무언가가 귓속을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 * *

전화를 끊은 강태한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지는 도로에 시선을 두었다. 자동차 안에는 적막만이 가득 차 있었다. 심각한 낯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강태한은 자못 과묵하게 보였다. 그 모습이 낯이 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하게 느껴져서, 하선우는 룸미러 속에 비치는 강태한의 얼굴을 이따금씩 훔쳐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연히 연상되는 얼굴과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어진 뒤로 몇 달이 흘렀지만 강주한의 얼굴과 목소리는 그의 망막과 고막 안에 사는 것처럼 그의 세상에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강태한이 기나긴 침묵을 일순간에 깨드리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교장의 설교처럼 인용구나 한 토막의 일화를 넣어 대화하는 편이었어.”

“그렇게 말하면 적당히 교훈도 주고 좀 있어 보이는 줄 알았나 보지.”

강태한은 어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 우리 집 사람들이 좀 허세가 있는 편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도 비슷한 화법으로 얘길 해볼까 하는데, 샐리그만의 개 실험이라고 들어봤어?”

“파블로프의 개는 들어봤다.”

강태한의 잰 척이 꼴 보기 싫어 하선우는 불퉁하게 말했다. 푸스스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강태한은 말했다.

“그래 뭐, 따지고 보면 비슷한 실험이야. 다만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선 종소리가 울리면 보상을 줬지만 샐리그만은 ‘벌을’ 줬다는 차이가 있지. 결과는 어땠을 것 같아?”

하선우는 대꾸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강태한의 질문이 자신을 시험하는 도발처럼 느껴져 심기가 불편했다. 그러다 돌연 마지못한 기색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못마땅한 마음이 드는 한편, 결과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종이 울리면 도망갔겠지.”

“땡! 틀렸어.”

즐겁게 웃는 강태한을 보며 하선우는 얼굴을 구겼다.

“원래 연구의 목적은 종이 울렸을 때 개가 도망가는 행동을 학습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거였어. 그런데 연구 도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지. 강제로 전기충격을 받았던 개들이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환경이 돼도 도망가지 않았거든. 샐리그만의 실험을 당했던 개들 대부분이 전기충격을 견디며 그냥 누워 있었어.”

“그래서 요점이 뭔데?”

“어련히 때 되면 안 말할까. 성급하기는.”

불편한 심기를 가시처럼 드러낸 하선우의 반응에도 강태한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입가에 거만한 조소가 어렸다.

“샐리그만은 무기력한 개들의 증세를 발견하곤 연구를 심화했어. 개와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도 비슷한 증세가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됐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을 겪고 나면 다른 상황에 놓여도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거지. 심리학 용어로 비수반성 인지현상이라고 하는데.”

강태한이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커브를 돌았다. 옆으로 쏠린 몸을 바로 하는 하선우를 무심하게 바라본 강태한이 곧 우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기력을 학습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단 말이야. 그나마 한다는 게 현실을 등지고 게임 속으로 도피하는 게 고작이지. 솔직히 좀 흥미로웠어. 마약이나 도박도 아니고 온라인 게임 따위에 빠져 산다는 게.”

하선우는 기분 나쁜 얼굴을 외면하며 차 문을 향해 몸을 바짝 붙였다. 자신의 무기력을 조롱하고 유식한 척하는 강태한의 태도에 속이 뒤틀렸다.

“그렇게 만든 게 누군데.”

“나. 그리고 강주한.”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대답한 강태한이 하선우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선우는 자신의 반응을 샅샅이 긁어내는 강태한의 시선에 분이 차올라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강태한은 마치 그런 하선우의 속내를 뻔히 다 알고 있다는 듯 살살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적어도 난 다르지. 다시 재기할 기회를 주잖아.”

“기회?”

“틀린 말은 아니잖아? 어쨌거나 무효가 될 특허를 경매에 부치게 됐잖아. 너는 오늘 가서 강주한 홀릴 생각으로 그냥 예쁘게 웃고만 있으면 돼.”

하선우는 심장 근처를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심장에 과부하가 일어난다는 듯이.

“싫으면 말고. 계속 엄마한테 젖 달라고 조르면서 PC방이나 다니든가.”

“내가 그깟 특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그럼 특허 말고 뭐가 문젠데?”

“네가 기회를 준다고? 개좆같은 새끼, 지랄하네. 내 인생, 아니 내 회사를 말아먹고 두 번째 기회를 준다고? 애초에 네가 건들지만 않았으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어. 그깟 특허로 돈 좀 만지면 부도난 회사가 다시 돌아와? 네 회사에 우리 직원들 정직원으로 채용해줄 거냐? 이문을 남겨? 좆같은 소리하고 있네. 씨발! 네가 실직한 사람들 다 먹여살릴 거냐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부들거리며 욕을 내뱉는 하선우의 모습은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강태한은 운전을 하는 틈틈이 해맑은 어린애처럼 눈을 빛내며 하선우의 분노를 감상했다. 그는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즐거워 보였다.

“이 새끼 욕 늘었네. 주둥이에 가시 돋친 것 좀 봐라. 하여간 좆좆거리는 게 좆은 더럽게 좋아해.”

돌아버리겠다는 듯이 강태한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하선우는 폐에서 숨을 모조리 뽑아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넌 왜 이렇게 인간이 더럽게 꼬였어?”

“글쎄. 상담의는 발달단계를 엉망으로 보내서 그렇다는데. 애정결핍에다가 구강기의 욕구가 충족이 안 돼서 여자 젖처럼 빠는 것만 보면…….”

“강태한.”

하선우가 강태한의 말을 가로막았다. 주절거리던 입을 다물게 만들 만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엔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하선우는 그를 불러놓고도 막상 말이 없었다. 그저 강태한의 뒤통수를 고요히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다. 하선우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는 뇌까리듯 물었다.

“장난하지 말고 대답해. 왜 그랬어.”

강태한은 애초에 이런 종류의 질문이 달갑지 않았다. 착취와 이별, 배신 따위에 거창한 이유가 있다고 믿으며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는 부류. 그런 건 너무나 고리타분했다. 여느 때보다도 진지한 질문이었지만 강태한은 여전히 이 즐거운 놀이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을 엿 먹이려면 네 특허가 필요했거든.”

하선우의 얼굴에서 감정이 지워지는 것을 보며 강태한은 덧붙여 말했다.

“물론 네 처지가 곤란하게 된 건 미안하게 생각해.”

“…….”

“그래도 위임장과 인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잖아?”

하선우에게선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온종일 초원에서 풀이나 뜯던 미련한 초식동물이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 한다면 꼭 저런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어째선지 더한 걸 끌어내고 싶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고약하고도 질 나쁜 비웃음을 매달고 강태한은 웃었다.

“이석도 그렇지만 너도 사람 보는 눈…….”

“잠깐. 좀 닥쳐봐.”

콱 인상을 찌푸린 하선우는 머리를 감싸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숨만 몰아쉬었다. 담배 한 대를 태워버릴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하선우는 혼잣말하듯 웅얼웅얼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부도낼 필요까진 없었잖아.”

바닥과 무릎 사이에서 울린 목소리가 담뱃재처럼 텁텁했다. 그 텁텁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강태한은 목이 다 깔깔했다.

“부도라니. 네 회사가 부도난 건 NnG에 빚이 많아서였잖아.”

“강태한.”

오늘따라 제 이름이 자주 불린다. 그것도 경고가 담긴 어조로.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사이드포켓 속에서 민트맛 캔디를 꺼낸 뒤, 재주를 부리는 물개처럼 허공에 던져서 널름 받아먹었다.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어음만기 너야?”

“어음만기?”

“은행에 어음만기 연장 못하게 압력 넣은 게 너냐고!”

더 이상의 헛소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듯 하선우는 거칠게 물었다. 강태한은 사탕을 하나 더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같은 배를 탔지만 배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었기에 강태한은 어디까지나 여유로웠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믿기는 하고?”

퉁명하게 대꾸하자 하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동안 망설이듯 뜸을 들이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강주한이야?”

하선우는 미처 감추지 못한 치부를 와르르 쏟아내는 눈빛으로 강태한을 보았다.

“글쎄.”

강태한은 조금 더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침묵하다, 핸들을 꺾으며 말했다.

“형이 그랬다고 말하면 믿기는 하고?”

차는 테헤란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퇴근시간과 겹쳐 도로 위의 차들은 서행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배를 곯다 늦은 저녁이라도 먹어보겠다고 퇴근길에 오른 허기진 시간이었다. 안신그룹 사옥 근처에 그의 누이가 운영하는 외식 계열사 브랜드가 있었다. 오늘 저녁은 딤섬을 먹고 싶었다. 홍콩에서 자유롭고 방탕하게 지내던 시절, 질리도록 먹었던 특급 호텔의 딤섬만큼은 아니었지만 차이니즈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 솜씨도 나쁘지 않았다. 입안에 침이 고인다. 입맛을 다시며 앞차를 노려보던 강태한은 막히는 길을 벗어나 옆 차선으로 끼어들려 핸들을 꺾었다. 주변 차량들이 고급 외제차와 거리를 두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아댔다.

“내려줘.”

강태한은 눈동자를 조금 굴려 룸미러 속에 비친 하선우를 보았다. 흠씬 두들겨 맞고 후반전을 기다리는 권투선수처럼 하선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뭐라고?”

“내려달라고.”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하며 강태한은 코웃음을 쳤다. 하선우는 돌연 차 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낮지만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내릴 거니까 잠금 풀라고.”

강태한은 하선우의 행동이 미련하게 느껴져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도 끔찍하고 네 형도 끔찍해. 누군가의 편이 되느니 차라리 빚을 더 떠안고 말지.”

“진심이야?”

“그래.”

강태한은 도로 한복판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수석에 오른손을 올린 채 뒷좌석을 향해 몸을 돌린 강태한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럼 내려. 너 아니어도 방법은 많으니까.”

강태한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하선우는 문을 당겼지만, 여전히 차 문은 잠겨 있었다. 항의의 눈빛을 보내자 강태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갑자기 분위기를 바꾼 강태한이 은근해진 목소리로 떠보듯 말했다.

“마지막으로 강주한 얼굴 안 보고 싶어?”

강태한은 그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자신의 갈고랑이 같은 말 한마디가 하선우의 치부를 콱 찌르고 쇠를 박아 넣었음을.

“강 전무… 아니 이제 강 사장이지. 그 얼굴이 얼마나 빤질빤질해졌을지 안 궁금해?”

한 손으로는 자동차의 도어캐치를 잡아당기고 있었지만 하선우에게 조금 전의 독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고뇌에 빠져 있었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인연과 재회하는 게 두려운 한편, 일단은 부딪치고 싶은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다. 도로 위의 차들은 빼곡하게 늘어서서 서행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멈추어 선 강태한의 차 앞은 넓은 공터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의 주변으로 숱하게 차가 지나가고, 소란스러운 경적이 울려댔지만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강태한은 하선우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특허무효 심판과 NnG의 부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그를 휘몰아쳤던 사건들을 겪으며 하선우는 늘 한 가지에 골몰해 있었다. 그는 자기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확신 없는 그의 상태는 시시때때로 그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불안에 빠트리곤 했다. 매번 그를 혼란하게 만드는 질문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 질문은 강주한에게서 시작된 말이었다.

‘내 말이 편한 제안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악을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선우 씨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강주한의 말은 그림자처럼 하선우를 따라다니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과연 내가 옳게 행동한 것인가?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때마다 하선우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1차 부도를 맞고, 특허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청구 소송문서가 날아오는 순간에도 하선우는 계속해서 갈등했다. 3차 만기일이 도래하고 빚을 갚지 못해 최종적으로 부도처리가 되던 날에 하선우는 긴 고민의 결론을 내렸다. 후회스러운 건 단 하나였다. 강주한에게 굽히고 들어가지 못한 것. 지킬 필요 없는 것을 지키려는 아집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잃게 된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하지만 강주한이 은행에 어음만기를 연장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생기고 나니, 그런 고민은 애초부터 필요가 없던 것 같았다.

“지난 반년간 일어난 일은 사실 자세히 기억나는 게 없어. 방구석에 눕거나 PC방에 가서 게임하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빠져들었던 게 전부였지. 내가 옳게 행동했던 걸까. 계속 그딴 고민이나 했어. 시간이 지나서 드는 생각이란, 내가 너무 미련하고 감정적인 선택을 했다는 거지. 지금까지도 내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내 성격 탓이겠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복수라는 걸 하고 싶지는 않거든. 내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나는 그냥 이대로 계속 시궁창 같은 현실에 처박혀 있는 게 전부일 테…….”

“말 끊어서 미안한데, 너 지금 존나 지루하거든. 설마 나한테 인생 상담하냐?”

하선우는 욱한 표정으로 강태한을 노려보았다.

“널 대상으로 이런 얘길 하는 내가 한심하…….”

“아, 그래서 자학의 시간을 가지시겠다고. 계속해봐.”

“씨발, 좀 끝까지 들어!”

“그래, 알았어. 계속해.”

강태한은 너그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하선우는 이미 기분이 몹시 언짢은 상태였다. 하선우는 울컥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네 형이 의도적으로 NnG를 부도낸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강태한은 알겠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는 강 사장의 잘난 면상 보면서 고민해보자고.”

다시 몸을 돌린 강태한은 그들의 주변으로 어지럽게 울리던 경적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끄러운 음악을 커다랗게 틀었다. 강태한은 유쾌한 기분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이 탄 차는 곧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 * *

임경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침은 6시 30분으로 정해진 약속 시간을 훌쩍 넘어 48을 향해 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가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겠지만 그가 자신의 성격을 참아내면서까지 진득하게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약속 대상자가 강태한이었기 때문이었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지만 한 번도 먼저 연락을 하거나, 연락이 온 적 없던 이름이었다. 그는 회사 근처의 중식당에서 갑자기 저녁이나 먹자고 전화를 걸어온 강태한의 연락을 받고 망설임 없이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서로의 생사 정도만 확인하던 사촌이 갑작스럽게 접근한 의도가 궁금했던 까닭이다.

고개를 든 그는 홀과 연결된 유리문을 보았다. 약속 장소로 잡은 중식당은 VIP룸이 별도로 없는 일반 레스토랑이었고, 단체석과 일반석을 나눈 것은 유리로 만든 격벽이 전부였다. 단둘이 처음 만나는 장소가 이렇게 캐주얼한 장소라니. 그는 강태한의 안목이 우습게 느껴졌다. 게다가 격벽으로 분리된 장소는 출입구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임경호는 비서에게 지시를 내려 식당 측에 일반 손님을 받지 않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 레스토랑의 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비어버렸다.

그는 안경을 벗어 모서리에 작게 묻어난 지문을 꼼꼼하게 닦았다. 안경은 기존에 그가 쓰던 것과 달리 안경알이 둥근 편이라 마르고 길어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의 단점을 보완해주었다. 게다가 안경테는 그가 좋아하는 바다거북의 등껍질로 만든 귀갑테였다. 투명하고 옅은 호박색에 드문드문 검은 얼룩이 진, 상품 중에서도 가장 고가에 속하는 백갑이었다. 몇 주 전, 임제상 장관이 그에게 선물로 준 안경이었다.

안경은 임경호가 모으는 몇 안 되는 수집품 중 하나였고 장관이 준 선물은 여러 가지 의미로 임경호의 마음에 꼭 들었다. 장관이 그룹 고문으로 지내면서 챙긴 돈과 여자들에 대해 넌지시 언급한 게 전부였음에도 이렇게 귀한 선물을 준비해주었다. 세련된 말보다 투박할지언정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 임경호는 이런 방식이 좋았다.

물론 그런 행동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귀한 선물은 그저 임경호의 뿔난 마음을 달래는 사탕에 불과할 뿐이었다. 상황은 여전히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심과 2심 모두 상속분쟁에서 패소한 뒤 마지막으로 대법원 상고심을 진행 중이었지만, 결과를 낙관할 수 없었고 안신전자의 주가 역시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주주 측에서 경영상의 불신을 이유로 안신전자의 주식을 증자하여 엘텍, 아니 강주한에게 배정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강주한에게 넘길 바엔 차라리 자멸의 길을 걷고 싶었다. 강주한이 꿀꺽하려는 상속재산의 정체가 실은 안신의 비자금이라고 소리치고 싶다는 충동을 받을 때가 가금씩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영권은 물론 재산 상속권까지 잃게 되겠지만 그들에게 단 한 푼도 넘겨주지 않아도 될 테니까. 게다가 임경호에게 등 돌린 공모자들에게 칼을 꽂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임경호 자신이 가장 뼈아프게 알고 있었다.

그는 티 포트에 담긴 차를 작은 잔에 따랐다. 10분이 더 흘렀다. 기다림이 길었으므로 그는 잔 안의 차를 다 마시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이미 그는 강태한의 무례함을 후하게 참아주고 있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임경호는 초점이 흐려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처럼 인상을 쓰고 출입문을 보았다. 그가 발견한 인물의 행색이 도저히 강태한으로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바람이 잔뜩 들어간 남색의 패딩을 껴입은 남자가 얼굴의 반을 가릴 만큼 볼캡을 푹 눌러쓴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곧바로 임경호를 발견했다. 그 순간 임경호가 눈썹을 쓱 추켜세웠다. 두꺼운 유리 격벽 때문에 왜곡돼 보이긴 했지만, 남자의 얼굴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임경호는 별다른 기색 없이 침착하게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강태한이 하려는 장난질의 종류를 가늠할 수가 없어 임경호는 잠자코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남자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장소로 발을 들인 것처럼 보였다.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출입구를 돌아보길 반복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양아치 차림을 한 강태한이 들어섰다. 그는 곧바로 임경호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 형! 늦어서 미안!”

7시 1분. 약속한 시간보다 반 시간이 넘게 늦었지만 강태한은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임경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임경호는 강태한의 인사를 무시하고 그가 달고 온 혹을 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하선우였다. 강주한이 가지고 놀다 질린, 아예 망가트려서 내다버린 조금은 특별했던 장난감.

임경호 역시도 소문을 들어 하선우의 사정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강주한이 연애놀음을 하며 소기업을 중기업 규모로 키워놓았다가, 연애놀음이 질리자 회사까지 내다버렸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강주한의 변덕이 다소 의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선우 자체를 유다른 인물로 고려해본 적은 없었다. 다시 말해 하선우를 그가 다시 재회해야 할 인물로 여겨본 적은 결단코 없다는 말이었다.

강태한은 임경호의 맞은편에 착석했지만 그가 데리고 온 혹은 임경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출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잘 지냈냐고 묻지 않을게. 요즘 형 죽 쑤고 있는 건 대한민국이 다 알잖아.”

계집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날티 나는 미소를 지으며 강태한은 코끝을 찡끗거렸다. 임경호는 대답 대신 두 사람을 보았다. 강태한은, 그의 사촌은 기본적으로 경박한 인물이긴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들떠 천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하선우는 테이블을 향해 상체는 고정했지만, 다리는 출구를 향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두 사람의 조합은 엇박자를 타는 불협화음의 노래였다. 강태한은 하선우를 억지로 끌고 왔고, 하선우는 자기 확신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상상력을 동원해봐도 짚이는 게 없었다.

게다가 하선우의 차림은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미적으로도 매력적인 구석이 없었다. 그럼에도 임경호는 그를 자극하고 싶었는데, 하선우는 그에게 관용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치파오 차림의 매니저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는 강태한의 자리에 조심스럽게 스프를 내려놓았다.

“넌 강주한이 가지고 놀다 질린 장난감이나 파는 뚜쟁이로 직업을 바꾼 건가? 그 전에 내 취향을 고려해볼 생각은 안 했나.”

이번에는 매니저가 하선우의 자리에 스프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몸을 돌려 자리를 뜨기도 전에 임경호는 말했다.

“아니면, 정말 강주한과의 섹스 동영상이라도 찍어왔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볼캡의 챙에 가린 하선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뭐… 장사를 하려는 건 맞는데 형이 기대하는 몸장사는 아니야.”

“아쉽게 됐네. 동영상이었으면 크게 몇 장 챙겨주려고 했는데.”

매니저가 자리에서 뜨지 않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강태한은 선한 웃음을 지으며 메뉴 설명은 필요 없다는 말로 매니저를 내보냈다.

“동영상보다 괜찮은 물건 가져왔어.”

“물건?”

“그래, 장사하려고 왔다니까.”

“그럼 뜸 들이지 말고 뭘 팔려는 건지나 말해.”

“급할 거 뭐 있어? 저녁도 먹고, 이렇게 만난 김에 서로 사는 이야기나 하면서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임경호는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고 인상을 썼다.

“뭘 기다린다는 거지?”

“입찰자를 기다리자고.”

“입찰자?”

“내가 아주 솔깃한 물건을 경매에 부칠 거거든. 아, 마침 왔네.”

임경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출입문을 향해 상체를 돌린 강태한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옷차림은 포털 메인을 장식했던 기사 속 사진 그대로였다. 검은 옷을 입었고, 은빛이 도는 청색의 세련된 넥타이를 맸다.

요란하게 강주한을 맞이하는 강태한의 소리가 들렸지만, 강주한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란 뚜벅거리는 구두 소리가 전부였다. 그가 발치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하선우는 강주한의 발끝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하선우 씨.”

하선우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라면 재회를 했을 때 평범한 인사말로 서두를 시작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은 절묘하게 들어맞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하선우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재회의 순간 자신이 느낄 감정이 벼락, 불꽃 내지는 불씨도 남지 않은 재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덤덤했다. 막상 그와 대면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 위로 침을 뱉고 싶다는 충동도 없었다. 거슬리는 느낌을 한 가지만 꼽자면 그저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것 정도였다.

하선우는 시선을 먼저 피하며 이 자리에 관심 없는 사람처럼 등받이에 등을 불량하게 기대었다. 한동안 강주한은 그 이상의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하선우의 곁을 지키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선우로부터 되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이윽고 강주한은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비어 있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 나 혼자 이해 못하는 쇼를 보고 있는 기분인데.”

하선우는 임경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잠시 잊고 있던 본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그것이 강태한만의 문제인지, 아니면 두 사람의 공통 목적이 될 수 있는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하여간 이 모임에는 이유가 있었다.

“뭐, 쇼…라고 생각한다면 쇼일 수 있겠지. 홈쇼핑 같은 거라고 생각해. 강태한이 보증하는 특별한 구성의 물건은 오늘 마지막으로 판매되니 주저하지 말고 전화주세요! 뭐, 이런 식일 거니까. 아, 거기. 전채요리 설명 필요 없으니까 그냥 바로 음식이나 내와.”

요리를 내려놓는 매니저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한 강태한은 아무도 웃지 않는 가운데 혼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경매든, 쇼든 일단 먹고 시작하자고. 채식 괜찮지? 작년 봄 한정으로 나왔던 메뉴인데 겨울 내내 계속 생각나더라.”

“거슬리는 얼굴 마주 보고 있다간 뭘 먹어도 얹힐 것 같은데. 안 그래? 하선우 사장?”

하선우는 움찔하며 임경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차례대로 나오는 음식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아, 누구 때문에 회사가 부도나고 빚더미에 앉았으니 더는 하 사장이 아니지. 그러고 보니 오늘 식사는 강주한에게 유감 있는 사람들이 모였군.”

“……유감?”

강주한은 생소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임경호의 말을 신중하게 되뇌다 곧바로 하선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강주한의 표정은 감정을 읽기에는 너무 단단하게 감춰져 있었다.

“편먹고 싸우는 애들도 아니고. 경호 형은 유치하게 왜 그래.”

강태한의 코웃음 소리가 냉랭한 분위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딤섬을 비롯해 나물을 이용한 샐러드와 해초를 올린 연두부가 원형 테이블 위에 놓였지만, 오직 강태한만이 요리에 손을 댈 뿐이었다. 강주한의 등장에 눈에 띄게 불쾌해 보이던 임경호의 얼굴 위로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가 덧입혀졌다. 영원히 찻잔만 기울일 것 같던 임경호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는 물고기 모양으로 섬세하게 빚어진 딤섬을 집어 소리 없이 씹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하선우는 자신에게 원칙 하나를 세웠다. 강주한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강주한은 여전히 하선우에게 미련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예전이었다면 이 불편한 자리에서 강주한이 자신을 데리고 도피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거북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이 없었다. 오직 하선우만이 그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에 익숙해져 그가 바랄 만한 것들을 기민하게 읽어내려 노력했을 뿐이다.

하선우와 강주한은 차를 마시지도 음식에 손을 뻗지도 않았다. 하선우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앉아 있는지 궁금했다. 강주한의 성격상 그저 옛 연인의 얼굴을 훔쳐보려 이곳까지 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선우는 그가 어떤 셈도 없이 이 자리를 찾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효처리 되기 직전의 특허는 엘벡스에 독점실시권을 줬다는 점에서 강태한과 하선우가 공동으로 소유한 상황이었다. 좌초되기 직전인 선박의 키를 두 사람이 동시에 쥐고 있지만 서로 간에 어떠한 협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선우의 고집 때문에 이대로 배가 가라앉는다면 그의 앞에 놓인 38억의 빚에 4억5천의 위약금이 더해질 것이고, 강태한이 의도한 대로 강주한과 임경호 두 사람 중 누군가에게 특허가 이양된다면 그의 보장대로 하선우는 한탕을 하게 될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만 그는 고민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금전적 보상 이상의 것, 돈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하선우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강주한이 받을 피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 대충 배를 채웠으니 얘기를 좀 나눠볼까.”

딤섬을 몇 개 집어 먹은 강태한은 의자를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소개부터 할까? 나야 뭐 다들 알 테고. 먼저 여기 앉아 계신 샌님 같은 분은 보기보다 화끈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덤벼들어서 내 위에 올라타더니 나를 막 깔아뭉개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라고. 덕분에 수도 없이 기절했잖아.”

점점 사나워지는 하선우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강태한은 뻔뻔스레 말을 이었다.

“카르달 전체 랭킹 5위, 절세의 이루칸 서버의 전설이자 프리나이츠 길드의 긍지인 고독의그림자님이셔. 줄여서…….”

“적당히 해.”

말을 급하게 자르며 하선우는 붉어진 얼굴로 강태한을 노려보았다.

“왜 그래, 분위기가 너무 삭막해서 그러는데. 그리고 네가 뭐가 어때서. 자신감을 가져. 꿀릴 거 하나도 없다니까. 절세의 이루칸 서버 전설이라고 불릴 정도…….”

하선우는 모자를 확 벗으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엉킨 앞머리가 손가락 끝에 걸려 넘어가질 않아 힘주어 당기다, 아차 싶어 정수리를 가렸다. 노란 고무줄로 앞머리를 묶어 사과 꼭지처럼 달랑거리던 것이 떠올랐던 탓이다. 고무줄을 쥐어뜯어낸 하선우는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이고 짜증을 냈다.

“야….”

“이루칸 서버 게시판에 고독의그림자 검색하면 존잘 권사로 하선우 사진이 뜨는데 댓글이 200개가 넘어가거든? 주한 형, 궁금하면 찾아줄까?”

“야이! 씨…, 그만! 적당히 하라고.”

“유머가 안 통하는 사람들이라니까. 하긴, 의미를 알아야 유머도 통하는 법이지. 알아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임경호는 강태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강주한에게선 순간적인 동요의 기색이 읽혔다. 강태한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귀밑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하선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선우라고 해. 아! 경호 형 말처럼 주한 형이 가지고 놀다 질린 장난감 팔려고 나온 건 아니야.”

강태한은 강주한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대략적인 설명이 필요하겠네.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주위를 환기시키려 강태한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경쾌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하선우… 아니, 우리 선우가 엘텍전자와 특허계약을 맺어놓고는 엘벡스라는 페이퍼컴퍼니 회사와 특허 독점실시권을 맺었어.”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임경호의 질문에 강태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이 너무 순진하다 보면 그런 실수도 할 수 있지. 결과적으론 그것 때문에 주한 형에게 버림받았지만. 우리 선우 계약위반 위자료에 손해배상,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엘텍에 갚아야 할 대출금까지 있지? 평생 빚 갚다가 골로 가겠어.”

“페이퍼컴퍼니 정체는 뭐지?”

“김운형이라는 사기꾼이 만든 회사.”

써늘한 미소를 지은 임경호가 거만스럽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 배후는 너겠군.”

강태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게 어떤 특허인지는 형도 잘 알 거야. 유럽 전기차 개발 컨소시엄. 어디서 많이 들어봤지? 형이 엘텍에서 임권혁 빼가면서까지 참여하려 했던 프로그램 기억나? 형은 애초에 임 사장을 빼가는 게 아니라 하선우의 특허를 알아봤어야 했어.”

그때까지 대화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임경호가 자세를 달리했다.

“차세대 배터리 팩 개발에 우리 선우의 원천특허 기술이 들어가. 게다가 2월에 출고 예정인 휴대폰 시리즈에도 특허기술이 소급적용돼. 불쌍한 우리 선우, 평생 남이나 빨아주다 뒈지겠어.”

하선우는 강태한이 제멋대로 각색하는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저 뜯어먹을 궁리로 즐거워하는 강태한의 위선이 불쾌할 뿐이었다.

“네가 팔려는 물건이 하자가 있는 물건이란 걸 알아뒀으면 좋겠군.”

참관자처럼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주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자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친 강태한이 곧바로 맞받아쳤다.

“하자? 하선우 특허를 상대로 형이 걸었던 특허무효심판 청구? 아직 무효처리 된 건 아니잖아. 계류 상태지. 1심에서 지면 2심 가면 되고, 그래도 안 되면 대법원까지 가면 되는 거지 뭐. 근데 그거야… 안신에 특허를 팔면 해결되는 문제 아닐까?”

강태한은 조금 뜸을 들인 후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말하기 시작했다.

“개인과 엘텍이 붙으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지만 안신과 엘텍이 붙으면 승률이 달라지겠지. 게다가 엘텍전자에서 하선우의 특허를 사용한 정황이 이렇게나 명백한데 승률이 더 올라가지 않겠어? 벌써 침해한 기술특허만 해도 최소 여섯 개가 넘지? 손해가 얼마일까. 1억 달러? 너무 짠가? 아니면 그 이상?”

피식 웃은 강태한은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강주한과 임경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강주한은 어둠처럼 고요했지만, 임경호의 눈빛은 영리하게 반짝거렸다. 강태한은 자신에게 집중된 좌중의 시선을 즐기며 말했다.

“흠, 비즈니스 얘기를 했으니 이제 사적인 얘기를 좀 해볼까?”

강태한이 차가운 물 한 모금으로 칼칼해진 목을 축이며 잠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마시던 컵 너머로 히죽 웃은 강태한이 느닷없이 엄숙함을 꾸민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엘텍의 마지막 양심을 수호할까 생각 중이야.”

강태한은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선우는 순간마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분위기를 조율하는 그의 화법에 짜증이 치밀었다. 강태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게 증거자료가 있어.”

“자료?”

임경호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성급히 되물었다. 그런 임경호를 향해 강태한은 기다리라는 듯 입가에 쉬, 입바람을 불며 검지를 세워 보였다. 강태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엘튼 장학회 고문으로 활동 중인 노도현 변호사가 검찰청 특수단과 진술을 짜 맞춘 CCTV 영상이 백업된 보안용 하드디스크가 나한테 있어.”

강태한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 영상 속에 어머니도 나오는데 노도현이랑 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녹화돼 있더라고. 부장판사에게 건넨 장학회의 돈이 어디서 세탁되었는지 그 출처까지 친절하게 노도현이 알려주는데 어머니는 듣기만 하더라고. 뭐,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삼촌과 어머니의 상속분쟁을 둘러싼 엘텍의 각종 비리가 담겨 있는 자료라 할 수 있…… 형, 그렇게 노려보지 마.”

강태한은 하선우의 뒤편으로 다가와 섰다. 하선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는 덧붙여 말했다.

“나도 먹고살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

하선우의 앞에 놓인 디저트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쏙 넣으며 강태한은 웃었다. 하선우는 공기의 경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숨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강주한이 굳은 표정으로 강태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쳤구나.”

“왜?”

“무모하게 굴지 말고 당장 넘겨.”

“그러게 왜 형이 저지른 일을 어머니가 수습하게 만들어. 울 엄마 평생 자기 손으로 머리 한 번 안 감은 양반인 거 몰라? 이미 여의도 편집국에 관련 정보 들어갔을 거야. 내가 정보지를 흘렸거든. 아, 이거 어쩌나. 소문 돌면 높으신 분들이 궁금해할 텐데.”

한참 동안 강태한을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강주한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분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무표정한 얼굴로 그는 말했다.

“정보지를 돌렸다고?”

“그래. 내가 찌라시 좀 풀었어.”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낯을 찌푸리고 한참 무언가를 생각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어머니가 곤란해질 거다.”

“아니 왜? 나는 CCTV 영상이 있다는 소문만 냈지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한 적은 없는데?”

강태한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주한은 위악을 떠는 그의 동생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조만간 검찰 찌라시 정보팀 나설 테니까.”

“그렇게 불안하면 나한테 하드디스크를 사면 되겠네.”

강태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런 근심이 없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는 말했다.

“설령 하드디스크가 검찰에 넘어간다고 해도 뭐가 걱정이야. 어머니가 옥살이 몇 년 좀 하다 나오면 되지. 돈 좀 있는 양반들은 쌈짓돈으로 질 좋은 하늘색 수의 입는다더라.”

“강태한.”

“형, 내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솔직히 말해봐. 상속분쟁이 어머니 주도로 일어났다고 집중적으로 보도되는 게 두려운 거야, 아니면 꿀꺽하려던 안신의 비자금을 놓칠까 봐 두려운 거야? 내가 맞춰볼까? 불효자가 돼도 돈이 더 좋지? 나는 그렇거든.”

강주한의 얼굴에 떠오르는 혐오의 빛을 발견한 그는 조롱의 웃음을 띤 채로 임경호를 돌아보았다. 투명한 유리알 너머로 번뜩이는 눈동자를 직시하며 그는 말했다.

“경호 형은 관심 있어?”

“그래.”

“하하, 이걸 어쩌나.”

“조건은 뭐지?”

“역시 경호 형은 뭘 좀 알아. 비위 맞추려고 애써도 모자랄 판국에 강주한처럼 사람 기분 엿같이 만들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하선우?”

하선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강태한이 말하는 거래라는 것이 하선우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줬기 때문이었다.

“어떤 걸 원하지?”

임경호는 다시 한 번 더 조건을 물었다. 강태한의 방식에 조금도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그는 서두르지 않고 덧붙여 말했다.

“유동자산 매각해서 엘튼 호텔에 투자하지. 더 원하는 게 있다면 추후에 계약을 진행해도 좋고.”

“고작 그거 하나? 어머니한테 넘어가려던 거 절반은 줘야지.”

굳어진 임경호를 보며 피식 웃은 강태한은 강주한을 돌아보며 물었다.

“경호 형한테 말한 조건 들었지? 주한 형은?”

강주한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강태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는 비어 있는 하선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형이 가진 엘텍그룹 주식 20퍼센트 나한테 넘겨. 그게 싫으면 제주도에 카지노 세워줘.”

강태한의 표정과 말투는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강태한은 손바닥을 펼쳐 엄지와 검지를 붙여 원을 만들어 보였다.

“고민을 많이 했어. 마카오에 카지노를 세우는 게 좋을지 아니면 제주도에 카지노를 세우는 게 좋을지. 마카오는 결국 카지노를 중국 정부에 반환해야 하니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제주도에 터를 닦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 카지노 허가 내려면 미화로 5,000만 달러가 더 필요한데, 푼돈은 형이 인심 쓰는 김에 더 써. 외삼촌이 주는 용돈에서 해결하면 될 테니까.”

강주한은 잠자코 강태한의 말을 듣기만 했다. 등받이에서 구부정하게 등을 뗀 채로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고 맞잡은 손가락을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긴 시간 말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아주 멀리 떠나간 사람처럼 원목 테이블의 옹이에 눈길을 던지고 있던 강주한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무려 16조였지. 상장기업이 된 후로 꾸준히 뒤로 빼돌렸던 안신의 비자금 액수가.”

그는 차분하게 서두를 던지고 강태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빛이 매서웠다.

“태한이 네가 가진 자료를 안신에 넘기면 나도 가지고 있던 안신 비자금 자료를 검찰에 넘길 거다. 수사는 절대로 피할 수 없을 거야. 언론, 시민단체 모든 걸 동원해서 알릴 거니까. 꽤 시끄러워지겠지.”

그는 시선을 임경호에게로 옮겼다.

“형은 실형을 살 수밖에 없을 거야. 봐서 영치금 정도는 넣어줄게. 그 돈으로 외삼촌과 형이 입을 수의나 사면 되겠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폭을 일으키는 것처럼 임경호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임경호가 강주한을 매섭게 노려보며 노기가 잔뜩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태한이 자료를 산다면 고모 역시 무사할까? 횡령, 배임, 뇌물공여죄 무시할 게 아니다. 주한아.”

“그래서 자폭이라도 할 건가? 횡령, 배임, 뇌물공여라면 형도 무시할 수준이 아닐 텐데. 외국으로 도망갈 생각이라면 알아둬. 앞서 말한 죄의 공소시효는 5년이고 뇌물공여죄는 7년이니까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한몫 잘 챙겨둬야 할 거야.”

“이거 참 가족끼리 너무하네. 이러다 아주 온 가족이 감옥에서 만나겠는데. 대통령한테 특사로 내보내달라고 사이좋게 머리 맞대고 편지라도 쓰자는 거야?

굳어지는 두 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보며 강태한은 애교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그러니까 좀 둥글게 가자고. 나한테는 어머니의 자료가 있고, 주한 형은 안신의 비리자료가 있어. 내가 터트리면 주한 형도 비리자료를 터트리겠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 내가 어머니랑 외삼촌 나란히 손 붙잡고 감옥 가시라고 소문을 흘렸겠어?”

강태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연히 아니지. 내가 찌라시를 풀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찌라시일 뿐이야. 실체도 없는 뜬소문일 뿐이지.”

강태한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가, 곧바로 분위기를 바꿔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소문을 듣고 파리 떼가 꼬이는 거. 언론이나 검찰에서 괜히 피곤하게 파고들어봐. 나한테 영장 내밀면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고스란히 넘기고 우리 셋 다 쫄딱 망하는 거지. 돈은 돈대로 날리고, 그게 뭐야. 우리 사회정의니 뭐니 촌스럽게 굴지 맙시다. 그냥 우리가 서로 협조하고 유무상통하면 좋게 해결될 일이지. 자, 다른 사람도 있는데 창피하게 굴지 말자고. 이제 집안싸움은 그만하고 회사 얘기 좀 합시다. 우리 사업하는 사람들이잖아.”

“미친 새끼. 진짜 못 들어주겠군.”

가만히 듣고 있던 임경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때였다.

“특허는 공짜로 넘길 생각이야.”

강태한의 말에 임경호는 일어나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하선우 역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놀란 눈으로 강태한을 바라보았다. 하선우와 눈을 마주친 강태한은 안심하란 듯 웃어 보였다.

“아, 그쪽 말고 이쪽.”

강태한의 손끝이 강주한에게서 임경호로 옮겨갔다.

“경호 형이 특허를 산다면 공짜로 넘겨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소송을 걸어달라 이건가?”

임경호의 신중한 물음에 강태한은 동료애를 보이듯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쉽지는 않을 거야. 소송판결 기간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3년은 걸릴 테고, 100퍼센트 이긴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그래도 해볼 만은 할 거야. 물론 국내특허에 한하긴 한데, 또 알아? 안신에서 예쁘게 굴면 해외특허 계약까지 넘겨줄지.”

임경호는 구미가 당기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끝으로 턱을 가만히 쓸어내린 그가 말했다.

“단순히 강주한을 향한 보복으로 특허권을 행사해달라는 건 아닐 테고… 배상금을 원하나?”

“그래. 3분의 1을 넘겨.”

강태한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짧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에게.”

하선우는 뻣뻣이 얼어붙은 자세로 두 사람의 대화를 망연히 듣기만 했다. 강태한과 하선우를 번갈아 바라본 임경호가 등받이에 몸을 편안히 기대며 물었다. 그의 몸짓에서 심리적인 여유가 느껴졌다.

“만약 강주한이 특허를 가져간다면… 그때 강주한은 네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지?”

“1억 달러.”

강태한은 한 번 더 속삭였다.

“1억 달러를 줘.”

강태한은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호기심을 대놓고 드러낸 임경호와 혼란스러워 보이는 하선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주한에게서 시선을 멈춘 강태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비아냥거렸다.

“왜? 버린 특허 다시 사려니 배 아파? 그래도 그게 싸게 먹히는 걸 텐데. 경영시간에 숱하게 배웠잖아. 시장에서 추방하기 위한 특허권 행사가 어떤 의미인지.”

“코닥이 폴라로이드 특허를 침해했던 일이 생각나는군.”

임경호가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보이며 끼어들었다.

“코닥은 특허침해로 20억 달러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 지금도 큰 액수긴 하지만 25년 전 일임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손해지. 게다가 옆집의 R&K는 유사한 디자인 때문에 10억7천만 달러를 배상해야 한다던데. 근데 태한아. 이거 승소 가능성은 있는 거냐?”

“글쎄. 그건 형이 알아서 할 일이고.”

가볍게 손사래를 친 강태한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이거 우리 형 어쩌나. 헤어진 연인의 변심이 이렇게 무섭네.”

강주한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형식적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대화에 별다른 성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순간이긴 했지만, 하선우는 그의 눈 밑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강주한뿐만이 아니라 하선우에게도 불쾌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강태한은 입안에 혀 대신 사람을 병들게 하는 녹슨 칼날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상체를 기울인 강태한이 하선우에게 바짝 붙으며 말했다.

“선우 너는 1억 달러 말고 다른 거 갖고 싶은 거 없어?”

“…….”

“너는 왜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네 입맛엔 너무 달아?”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말투였다. 하선우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강태한은 다른 두 사람을 과장된 동작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

“원하는 대로 다 불러봐. 여기 있는 사람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사람들이야. NnG를 다시 세워달라고 하는 건 어때? 그게 싫으면 음, 강남에 있는 빌딩? 말해봐. 여기서 못 주워먹으면 그건 정말 네가 병신인 걸 인증하는 거고. 설마 옛정 생각해서 망설이고 있는 거야?”

“옛정?”

옛정이라. 마치 처음으로 단어를 배우는 외국인처럼, 낯선 단어의 쓰임새를 음미하듯 곱씹어 말한 강주한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침묵이 하선우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왠지 입술이 자꾸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선우는 연거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이윽고 강주한은 짧게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네가 주식의 20퍼센트를 가져간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가진 주식을 내가 물려받으면 네가 가진 주식으론 의결권의 영향력이 없을 거다.”

“뭐, 그래. 아버지가 가진 주식 46퍼센트, 형한테 몰아주면 회사는 형 게 되겠지. 근데 그 믿음이 너무 확고한 거 아니야?”

강태한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크게 헛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짐짓 안타까운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참 이상해. 장자에 대한 환상이 있다니까. 총수의 첫째아들이 모든 것을 잘 이끌어가고 결정할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 심지어 형까지도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잖아. 너무 이상하지 않아? 기업이라는 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거지, 한 사람의 힘으로 굴러가는 게 아닌데도 그래. 한 사람 때문에 기업의 명운이 좌우된다면 그건 이미 망한 기업이라고 봐야지. 안 그래, 하선우? 다들 합리적이지가 않다니까.”

열변을 토한 강태한은 가볍게 숨을 고른 뒤 이어서 말했다.

“아버지가 이 일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봐. 좆질에 눈이 멀어서 일을 망쳤다고 형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전문경영인을 앉히지 않겠어?”

강주한은 일견 무심해 보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강주한을 겪었던 강태한은 알 수 있었다. 그의 형제는 쏟아지기 직전의 충동을 단단하게 봉해두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정말 일을 엉망으로 했다면 벌도 달게 받아야지. 그런데 넌?”

강태한은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내가 뭘?”

“회삿돈으로 카지노를 세우고 특허를 사라고 말하는 넌 제정신일까?”

“아까도 말했잖아. 나도 먹고살려면 어쩔 수가 없다고. 혹시 가족 간의 정. 그런 걸 기대한 거야?”

강주한은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으며 풀썩 웃었다.

“애초에 네게 기대란 걸 해본 적이 없어. 다만 이렇게까지 네가 쓰레기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지.”

“알아줘서 고맙네. 앞으로 더 진지하게 쓰레기처럼 굴 거거든. 두 사람과 달리 난 잃을 게 없어서.”

“그럼 일단 여기서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나? 그렇다면 먼저 일어…….”

별안간 임경호가 대화의 흐름을 끊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급하게 서두르는 눈치였다. 그가 전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강주한이 찻잔에 손을 뻗으며 임경호를 불러 세웠다.

“경호 형.”

강주한은 입술만 살짝 축인 뒤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언가 생각에 집중한 듯 한참 동안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심각한 표정을 지은 강주한이 임경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형이 강태한과 거래를 하면 난 안신 비리자료를 풀 거야.”

임경호의 매서운 시선을 받으며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강태한이 언론에 엘튼 장학회 자료를 풀어도 안신의 비자금 비리자료를 풀겠어.”

“뭐?”

세 사람의 놀란 시선이 강주한에게로 향했다.

“그러니 형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태한을 막아.”

공기가 얼어붙었다. 수 초 후, 강태한의 웃음소리가 홀 안에 기습적으로 울렸다. 무릎을 치며 웃던 강태한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강주한을 노려보았다.

“내 자료를 사기는 싫은데 사고 칠까 봐 걱정은 또 되는 모양이지? 그래서 경호 형한테 다 떠넘기려는 거잖아, 지금. 근데 어쩌냐? 아까 했던 말 취소할 거거든.”

강주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음, 나는 마음이 약하니까 딱 20일 줄게. 그 안에 결정해. 엘튼 장학회 비리를 언론보도 하기 전에.”

강주한은 그의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숨소리가 점차 불규칙하게 흐트러졌지만, 이윽고 그는 다시 돌처럼 단단해졌다.

“그럴 만한 배짱이 있다면 그렇게 해.”

그는 강태한을 외면하며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하선우 씨는.”

강주한은 피로한 눈길로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름을 부른 뒤에도 하선우를 아주 오래도록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마치 사람이 살고 나간 집을 보듯, 싸늘한 공기 속에 스며든 먼지 냄새를 맡듯, 버려진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보듯 하는 사람처럼.

마침내 그곳이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임을 확인한 그가 물었다.

“하필이면 왜… 강태한과 같이 있습니까.”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하선우를 향해 몸을 완전히 틀어 앉았다. 하선우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기이한 거리감을 느꼈다. 세상이 사라지고 이곳에 오로지 둘만 남은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붕 떠 있는 낯선 감각에 할 말을 잊어 하선우는 대답할 타이밍을 잃었다.

강주한이 언성을 낮추며 물었다.

“복수심?”

“…….”

“그렇다면 그 기준이 뭐지? 애초에 특허소송의 원인이 된 건 강태한이 아닌가?”

혼잣말처럼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밧줄처럼 하선우의 생각을 묶었다.

복수? 애초에 하선우는 복수를 다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조차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한없이 무력하고, 강주한이 지독하게 미울 뿐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수치스럽게도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바람을 지금껏 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이지 당신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군. 너무 난해한 세상 속에 살아서…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어.”

건조하게 말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선우에게 등을 보였다. 의자에 걸어둔 코트를 챙기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특허를 엘텍에 넘길 겁니까. 아니면, 안신에 넘길 겁니까.”

하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거하게, 억울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선우의 침묵을 예상했다는 듯 코트를 걸치며 강주한은 말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은 없지만, 임경호에게 넘긴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특허를 무효로 만들 겁니다.”

옷을 모두 갖춰 입은 그가 가방을 들었다. 방을 나서기 직전, 어깨 너머로 하선우를 뒤돌아보며 그는 말했다.

“만나서…… 반갑지가 못해 안타깝군요.”

비스듬히 내리꽂던 시선을 거둔 그는 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룸을 빠져나갔다. 하선우는 허망한 눈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 난해한 세상 속에 살아서…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가 했던 말들이 하나둘씩 뻗어 나와 하선우의 속을 휘저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떠오르는 가요의 후렴처럼, 머릿속을 너덜너덜하게 만들며 파고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말에 한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선우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레스토랑의 붉은 홍등과 검붉은 벽장식이 갑자기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의 곁에서 동의를 구하듯 강태한이 무언가를 지껄였지만 하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강태한이 내뱉는 소리는 그저 개 짖는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실제로도 왈왈거리는 소음처럼 그의 정신을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느닷없이 현기증이 일었다. 강주한의 눈빛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읽은 것은 경멸이었다. 하선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등 뒤에서 뻗어온 강태한의 손이 하선우를 잡아당겼지만 억세게 뿌리치고 룸을 벗어났다. 계단을 서둘러 내려온 그는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선명한 추위가 정신을 가혹하게 일깨웠다. 마치 홍콩에서 강주한과 헤어졌던 날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잊고 있던 감정에 시동이 걸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강주한이 어떻게 자신을 경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를 해치고 싶다는 난폭한 감정에 휩싸인 채 강주한과 닮은 뒷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근처의 주차장을 이용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사라진 걸까? 초조하게 하선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원근감에 따라 소실되어가는 대로변의 어두운 풍경 속에 강주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가던 하선우는 그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뒤까지 뛰어갔을 때, 강주한은 우뚝 멈추어 서 있었다.

하선우는 그를 분노하게 했던 감정을 뒷전으로 만드는 이질적인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전자기기 판매점과 휴대폰 대리점, 김밥과 분식을 파는 체인점, 베이커리 전문점, 일상의 환한 불빛 옆에 그가 있었다. 커다란 키와 근사한 옷차림은 여느 때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뭇시선을 끌었다. 퇴근시간이 조금 지난 번화한 거리 속에 서서 자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순간 하선우의 얼굴 위로 지난날의 감회가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갔다.

“돈을 원하는 겁니까?”

잠시 잊고 있던 두 사람의 현실을 그가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고르던 하선우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잔뜩 인상을 구긴 채 그는 강주한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하긴, 강태한이 말한 액수라면 누구라도 흔들리겠죠.”

달음박질치던 심장은 더 많은 산소를 갈구했지만 하선우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쉬는 것을 잊은 까닭이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낸 하선우가 결국 벅찬 숨에 섞어 토해내듯 말했다.

“내가 돈 때문에 이런다고요?”

“그럼 이제 와서 뭘 원하는 겁니까.”

하선우는 말문이 막혔다. 급기야 희한한 웃음소리마저 터져 나왔다.

“그러게요. 내가 …뭘 원했을까.”

강주한은 몸을 돌려 하선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이 묘했다. 분노한 이유를 헤아려보려는 듯이, 낯선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듯이 그가 하선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무심하고도 건조한 그 표정과 시선이 하선우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부도를 낼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끓는 감정을 애써 삭이며 말하자 강주한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는 부드러운, 그래서 보는 사람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는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NnG를 부도낸 겁니까?”

하선우는 흠칫 굳어버렸다. 강주한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까칠하게 변해 있었다.

“그건 하선우 씨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아니, 애초에 능력이 없었던 거였죠. 회사가 시스템으로 굴러간다고 하죠. 하지만 시스템 역시도 사람이 만든 겁니다. 당신의 무능, 판단력 결여로 NnG가 무너졌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물론 쉽게 인정할 수 없겠죠. 지금 하선우 씨에게 남은 건 자존심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선우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PC방, 게임, 그 밖의 나태한 삶, 그것이 전부인 인생. 그 자신이 하잘것없는 쓰레기가 돼버린 기분이 갑자기 그를 덮쳐왔다.

“난, 나는… 특허를 무효화하는 심판청구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부도는 완전히 다른 문제야.”

하선우는 헐떡이며 말했다. 강주한의 말을 곱씹을수록 조금이나마 그를 염려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대신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이 가슴을 채웠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받을 피해 따위를 생각하고 있던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직장… 회사 아니, 모든 걸 잃었어. 그게 내 선택이라고?”

나직이 내뱉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선우는 눈을 내리뜬 채 입술을 짓씹었다. 강주한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머릿속을 빨갛게 달궜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넘칠 듯 가득 찬 감정을 쏟아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코끝이 답답해졌다. 울음을 간신히 참아가며 하선우는 말했다.

“그게… 흐, 어떻게 내 선택이라는 겁니까. 돈을 갚기만 하면 회사를 살릴 수 있었는데… 시간만 더 있었으면… 버틸 수 있었는데… 흐으, 그 기회를 앗아간 건 당신이잖아!”

갑자기 목울대가 후끈거렸다. 숨이 목에 걸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선우는 눈물이 가득 고인 충혈된 눈으로 강주한을 노려보았다.

“그렇게까지 망치고 싶었어?”

하선우는 강주한의 상박을 단단하게 옥죄며 말했다.

“정말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하선우는 분노를 참지 못해 치를 떨었고, 그의 감정은 강주한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본디 감정이란 전염성을 지니는 법이었다. 강주한은 싸늘한 표정으로 하선우를 내려다보며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순수하게 자신을 증오하는 하선우의 눈빛이 그의 잔인함을 불러일으켰다. 여느 때보다도 명징한 감각이 그의 살을 가르는 것만 같았다. 분노가 불러일으킨 욕구가 내장을 쥐고 흔들었다. 그 역시도 할 수만 있다면 하선우의 목을 조르고만 싶었다.

가혹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그들은 침묵했다. 두 사람의 정지된 흐름 사이로 도로변의 소음과 상가에서 울려 퍼지는 대중가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온갖 종류의 뒤섞인 소음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다른 기압 속에 떨어진 것처럼 외부의 세상은 고요하고도 먹먹하게 느껴졌다.

문득 강주한은 무언가를 정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하선우의 손을 하나씩 떼어냈다.

“강태한과 한 배를 타지 마십시오. 배에 뚫린 구멍이 커서 멀리 가지 못하고 침몰할 겁니다.”

왼손을 팔뚝에서 떼어내던 강주한은 손톱이 길게 자라난, 거칠게 부르튼 하선우의 언 손을 가만히 응시하다, 곧 손을 내려놓았다.

하선우는 멀어지는 강주한의 뒷모습을 망연히 서서 지켜보았다. 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마그마처럼 지글지글 끓어오르던 머릿속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텅 빈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강주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선우는 자신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도로변 위로 맹렬한 추위가 휘몰아쳤다. 그의 머릿속이 차가워질 만큼 가혹한 추위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느닷없이 몸 옆으로 바짝 붙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차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던 하선우의 시야 속으로 강태한이 들어왔다.

“멀리도 뛰어왔네. 강주한은 갔어?”

강태한은 하선우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정신 사납게 둘러보았다. 그곳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너 뭐 보냐?”

“…….”

“뭐 보냐고.”

여전히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강태한은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하선우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밀랍처럼 창백한 강태한의 손은 마치 선물상자 속에서 튀어나온 장난감 손 같았다. 놀래키는 용도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용수철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장난감. 별 볼 일 없는 기계적 장치를 연상하던 하선우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다. 평소라면 결코 떠올리지도, 시도하지도 못할 법한, 생각만으로 속이 울렁거리는 담대한 종류의 일이었다.

하선우는 느리게 침을 삼켰다. 흐리멍덩하던 하선우의 눈에 초점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을 보며 강태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강주한은 뭐래. 얘기해봤어? 특허 산대? 아니면 너 그냥 안신에 팔 거야?”

하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묵직한 침묵에 답답함을 느낀 강태한이 두 손으로 쥐어뜯듯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 너 진짜 지금 변비 걸린 애새끼같이 답답해. 대답 좀 해.”

“…….”

“야! 씨발 좀 대답하라고.”

짜증스레 소리를 지른 강태한이 미칠 것 같다는 듯 바닥을 걷어찼다.

“진짜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 없네.”

“…….”

“야, 대답해.”

하선우는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치받는 감정을 삭이려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에 찐득하게 눌러붙은 어떤 생각을 불현듯 입 밖으로 와르르 쏟아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하선우는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수많은 생각이 삽시간에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선우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 뒤에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도 네가 가진 자료 필요해.”

“뭐?”

“네가 가진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선우는 강태한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아주 명료하고도 간단한 요구였다. 이를테면, 패스트푸드점에서 메뉴를 주문하는 손님의 요구와 같은. 하지만 강태한이 가진 자료가 누구든 간단히 주문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햄버거와 같을 리 없었다.

“하하하, 너 돌았냐?”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던 강태한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금세 얼굴을 굳히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강태한은 의심에 찬 눈빛으로 하선우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선우는 그의 시선에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네가 가진 자료 가져야겠어. 엘튼 장학회 비리자료를 언론보도 하겠다고 했지? 어차피 네가 가진 자료 대한민국이 다 알 텐데 내가 먼저 알게 된들 무슨 상관이야.”

하선우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강태한의 얼굴에 일순 비웃음이 번졌다. 하선우는 그를 무시한 채로 계속해서 말했다.

“강주한도 임경호도 네 자료에는 관심 없어 보이는데 언론에 보도하기 전에 나한테 사본 하나만 복사해줘. 우리 같은 배 탄 사이라며.”

“아아, 이제 보니 하선우의 진정한 매력은 순진함이었네. 우리 형이 저 미련한 성격에 정신을 못 차렸던 거구나.”

강태한은 짓궂은 감탄을 담아 박수를 치며 이죽댔다. 그의 비꼬는 말에 하선우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자꾸만 신경을 돋우는 강태한의 유치한 행동들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가 역겨울 정도였다. 정말이지 강태한이 하는 짓거리는 하나같이 탐탁스럽지가 않았다.

“이렇게 순진한 놈을 제물로 삼았으니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현실 파악을 못하고 있지. 지금 내가 같은 배에 태워줬다고 해서 우리가 친구라도 됐다고 착각하는 거야? 주제 파악도 못하는 새끼.”

노골적인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강태한이 하선우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자못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강태한이 거만하게 말했다.

“넌 강주한이나 임경호 외에는 비리자료를 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엘텍에 칼 꽂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

“그래? 그럼 그런 사람들한테 팔아. 난 아무한테도 특허 안 팔 거니까.”

“뭐?”

“내일 특허청 가려고.”

“뭐? 특허청은 왜?”

강태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비딱하게 서 있던 자세를 달리하며 바짝 다가섰다. 하선우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짐짓 대화에 흥미를 잃은 척 딴전을 부렸다. 뭐라 볶아치지도 못하고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는 강태한은 쭉 내버려둔 채로 이대로 나 몰라라 할 것 같더니, 어느 순간 하선우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돈보다도 네 형한테 관심받는 게 훨씬 더 좋거든. 네 말대로 순진하고 착각 잘하고 주제 파악도 못하는 데다가 미련한 새끼라서.”

강태한의 말을 고대로 되돌려준 하선우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전에 없이 강한 어조였다.

“사본 복사 안 해주면 특허 없애버린다.”

“씨발, 너.”

드디어 강태한이 찌를 물었다. 사납게 변하는 분위기를 읽은 하선우는 강태한에게 주의를 기울여 눈빛을 맞추는 대신 도로변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내일 특허청 들어간다.”

하선우는 주위를 살펴보며 무심한 어조로 덧붙였다.

“요즘은 특허취소신청 제도 도입돼서 특허 취소하기도 쉬워졌더라. 간다?”

강태한을 밀치며 하선우는 도로를 향해 걸어갔다. 조금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택시가 있었다. 도로변으로 향하던 그는 이차선에서 그를 발견하고 차선을 변경하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뭐? 씨발, 야! 거기 서, 안 서?”

손목을 잡아채는 강태한의 손을 뿌리치며 하선우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특허를 취소한다고? 좆도 없는 게 지랄하고 있네. 씨발, 좆같은 씹쌔끼가 진짜. 너 솔직히 말해봐. 지금 나 간 보는 거지? 어?”

무심한 척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강태한의 욕을 들어주기가 힘이 들었다.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랐을 그가 어디서 저런 상스런 욕을 배웠을까, 솔직한 마음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하선우는 결국 유지하고 있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간 보는 거 아니거든? 확인하고 싶으면 내일 특허청 앞으로 오든가.”

“지랄하네. 고자 새끼 주제에 퍽이나 특허 취소하겠다. 그럴 만한 깡다구도 없는 주제에. 너도 일평생 빚더미 속에서 허덕이다 뒈지긴 싫을걸. 위약금은 또 어쩌시려고?”

“게이면 다 고자냐? 나도 좆 있거든? 그리고 위약금 4억5천이랬냐? 어차피 망해서 빚 더 얹어봐야 티도 안 나, 씹쌔야! 억울하면 소송 걸든가!”

강태한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 뒤, 또다시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쥐뿔도 없는 게 허세 부리지 마. 너한테 남아 있는 특허나 네 좆이나 쓸모없긴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이젠 아예 고자가 되시겠다고?”

혐오 가득한 하선우의 시선이 강태한의 얼굴 위를 사납게 긁고 지나갔다. 치를 떨며 강태한을 노려본 그는 몸을 휙 돌려 택시를 향해 뛰듯이 걸어갔다. 등 뒤에서 강태한이 멈춰 서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지만, 하선우는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디 가! 씨발. 하던 얘기는 마저 하고 가야 될 거 아니야.”

막 택시 뒷좌석의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등 뒤에서 나타난 강태한의 방해에 문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하선우는 강태한을 등으로 떠밀며 간신히 택시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함께 들어오려는 강태한을 발로 힘껏 쳐서 밀어낸 하선우는 다급한 목소리로 택시기사에게 외쳤다.

“분당! 분당이요! 정자동으로 가주세요!”

차창 밖으로 길길이 날뛰는 강태한의 모습이 보였다. 차창에 매달려 조금씩 멀어지는 강태한의 모습을 지켜보던 하선우는 이윽고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뒷좌석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사실 자신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던 강태한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내심 겁이 나던 차였다.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아직은 미동하지 않는, 하지만 머잖아 카운트를 시작할 미터기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다 점퍼 속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휴대폰 속 단축번호를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건너편, 아들의 전화를 받는 여자의 목소리는 결코 다정하지 않았다. 하선우는 보일 리 없는 상대방을 향해 멋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주무셨어요? 저 30분 뒤에 도착하는데 택시비가 없어서요. 3만 원만 들고 아파트 단지 앞에…….”

하선우의 잔뜩 주눅 든 목소리가 택시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안 비서가 문을 열었을 때, 강주한은 기괴한 그림이 병풍처럼 콘크리트 벽을 둘러싼 방 안에 있었다. 그가 유학을 가기 전까지 사용했다던 방에서는 지하실 특유의 습한 물 냄새와 텁텁한 담배 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완벽할 정도로 정리된 방은 벽면을 차지한 기괴한 그림 탓에 황폐하고 초토화된 인상을 풍겼다. 임직원의 승진을 축하하는 만찬회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진 주인공이 시간을 보낸 곳은 동굴 같은 지하실이었던 모양이다. 강주한은 여전히 슈트 차림이었지만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느슨한 자세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얼음이 거의 녹아 작은 알갱이만 남은 위스키 잔과 뚜껑도 따지 않은 위스키가 놓여 있었다.

“말씀하신 로그 기록입니다.”

담배를 비벼 끄며 강주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내렸던 지시사항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눈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파일을 응시하던 강주한이 이내 마른 웃음을 흘렸다. 안 비서로부터 로그 기록을 받아 든 강주한은 하선우와 강태한의 게임 접속 기록을 살펴보며 말했다.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하군요. 로그 기록이 필요 없게 됐습니다. 두 사람, 이미 만났거든요.”

안 비서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하선우 씨와 강태한 사장님 말입니까?”

강주한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불쾌한 기색이 다분했다. 무언가 생각에 골몰한 듯 강주한은 짧은 침묵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경호 형도 왔더군요.”

강주한의 말이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아 안 비서는 조금 뒤늦게 반응했다.

“그게 무슨….”

“두 사람이 저와 경호 형을 초대했습니다. 태한이가 소송과 관련된 엘텍 재단의 비리자료를 갖고 있더군요. 하선우 씨의 특허를 나눠 가진 사람도 예상대로 강태한이었고요. 과감하게도 그 두 가지를 경매 부치더군요.”

안 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태한이 약점을 쥐고 압박을 가하려는 목적으로 분탕질을 쳤음은 알았지만 여기에 안신까지 끌어들일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엘텍 재단의 비리자료는 사모님, 아니 소송 자체에 치명적이었다.

안 비서가 마른침을 삼키며 다급히 물었다.

“어떤 조건을 붙였습니까?”

“엘텍그룹의 주식 20퍼센트를 요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상속재산으로 카지노를 지어달라는 요구입니다.”

안 비서는 할 말을 잃고 낯을 찡그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가슴을 크게 들썩인 후에야 물었다.

“특허를 넘기는 조건도 있습니까?”

“1억 달러를 요구하더군요.”

“하 사장… 아니, 하선우 씨도 동의한 일입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또다시 강주한은 깊다란 침묵 속에 잠겨들었다.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 위에 시선을 둔 그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답지 않게 자신의 손을 어떻게 두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입술을 검지와 엄지로 부드럽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 비서와 그의 상사는 지시사항을 내리고 그것을 따르는 것 외에는 사적인 대화를 거의 주고받지 않는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의 침묵은 비서로서 그에게 조언과 해결책이 될 만한 무언가를 제시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주었다. 그가 신중하게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강주한이 불현듯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타협을 해야만 하는 걸까요.”

사색에 잠겨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 같았다. 안 비서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건넨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주한의 입 밖으로 말이 나온 이상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장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흐려져 있던 눈의 초점이 한순간에 되돌아왔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놓은 그가 안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커다랗게 뜬 그의 표정이 묘했다.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얄팍하게 신경줄을 당기는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한 안 비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강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다른 데 몰두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돌연 낮고 짙은 음색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술을 좀 마시겠습니다. 앉으세요.”

그는 위스키 잔에 담긴 얼음물을 통에 쏟아버리며 말했다.

“서동현 의원으로부터 인상 깊게 들었던 얘기가 있습니다.”

강주한의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위스키 병의 뚜껑을 비틀어 딴 그는 술을 잔에 따랐다.

“자기애는 우리의 눈을 닮았다고 하더군요. 눈은 뭐든 볼 수 있지만 자신만은 볼 수 없죠. 자신을 보지 못하는 건 자기애만 한 아첨꾼이 없기 때문이라고 어느 프랑스 작가가 말했답니다.”

술잔 안에 황금빛으로 고인 위스키를 찰랑 흔들며 그는 말했다.

“아버지에게 다 맡겨버릴 수도 있겠죠. 그늘에 숨으면 되니까 가장 간단한 방법일 겁니다. 추잡하게 즐겼던 호모짓이 내 발목을 잡았다고 고백한 뒤에 아버지에게 경멸을 받고 벌을 받으면 되겠죠.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인정받고 싶습니다. 자기 객관화가 된 사람인 척 굴었지만 오만하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죠.”

강주한은 위스키가 든 잔을 입가에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비틀린 얼굴로 그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버지도 알게 될 일입니다. 태한이가 정보시장 선수들에게 이미 소스를 흘린 모양이더군요. 지금쯤 정보를 재가공하는 단계일 테니 시중에 돌아다니는 소문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빠르면 이번 주, 늦으면 2주 뒤에 발간되는 정보지를 통해 찌라시가 판매될 겁니다. 소문이 퍼져나가면 엘튼 장학회 비리자료를 원하는 곳이 안신 말고도 더 많아지겠죠.”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감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타협하는 수밖에 없군요.”

“강태한 사장님이 원하는 걸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경호 형이 엘튼 장학회의 자료를 사도 제가 안신의 비리를 가지고 있는 한, 쌍방이 다투고 있으니 태한이에게는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겁니다. 어부지리를 원했겠지만 도요새와 무명조개가 사라지면 태한이는 어부의 포지션이 될 수 없거든요. 하지만 경호 형이 아닌 제3자가 자료를 원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가겠죠. 제가 안신의 비리를 터트릴 이유가 없으니 태한이는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라도 제 등에 칼을 꽂을 겁니다. 아니, 그런 액션이라도 취하겠죠.”

무심중에 한숨을 내쉰 그는 바삭거리는 목소리로 조소했다.

“타협해야겠죠. …가족이니까.”

불안에 사로잡힌 눈을 내리깔며 강주한은 긴 시간 침묵했다. 치미는 무언가를 억누르려 타협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를 꼽아보던 그는, 곧 어떤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잔 안의 술을 단번에 비워냈다. 강주한의 눈은 초읽기에 들어간 바둑기사의 눈처럼 형형했다.

“김운형이란 사람 필리핀에서 실종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출국 기록상으론 7년째입니다. 대사관을 통해 현지 경찰과의 공동수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강주한은 겉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생각에 집중했다. 잠시 후 그는 또다시 위스키를 잔에 가득 채우며 물었다.

“한국에서 결혼을 했다고 했습니까?”

“네. 결혼을 했지만, 이혼한 상태입니다. 전처는 현재 한국에서 거주 중입니다.”

“자녀가 있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 갓 성인이 됐을 겁니다.”

“잘됐군요. 자녀에게 김운형의 실종신고를 하도록 설득하세요.”

“그건 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안 비서는 의문에 가득 찬 시선으로 강주한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실종선고를 받게 해야죠. 선고 시점에 따라 엘벡스와 하선우의 거래가 무효가 되거나, 김운형이 가진 반쪽짜리 특허를 아들이 상속받을 겁니다.”

안 비서의 표정이 확 변했지만, 그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안 비서가 조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실종선고까지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대리인이 김운형의 생사를 증명할 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곤란해집니다. 게다가 무효심판 판결이 3주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안신에 특허이전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안신에서 엘텍에 대항한 특허전담 부서를 꾸릴 가능성이 높으니 그에 대비하는 게….”

“안신에 안 뺏깁니다. 특허소송전담 부서는 차선으로 미뤄두죠.”

“네? 하지만.”

“그건 제가 해결하죠. 김 팀장에게 지시해 태한이한테 사람 붙여 동향 계속 보고하라고 하시고, 우선 안 비서님은 실종신고부터 비밀리에 해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안 비서가 빠르게 강주한의 지시를 숙지하는 동안 강주한은 다시 술잔을 들었다. 좀 전에 마셨던 한 잔의 술이 뒤늦게 혈관을 돌며 몸속에 불을 지폈다. 약간의 각성과 부유감이 아주 갑자기 긴장의 끈을 놓게 만들었다.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았던 적은 거의 없다. 이럴 때일수록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사건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평소보다 물렁해진 그는 자신을 둘러싼 적의에 조금 더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무관심으로 벽을 치던 것들이 면역을 뚫고 그의 안으로 번져 들어온다.

‘나는 모든 걸 잃었어. 그게 내 선택이라고?’

‘그렇게까지 망치고 싶었어?’

하선우가 말한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러나 이입이 쉽지 않다. 선천적으로 그는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절망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불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자신이 그를 지독한 불행에 빠뜨렸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를 망가뜨리려고 했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하선우와의 대화에서 줄곧 미심스러웠던 부분을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안 비서님.”

강주한은 불현듯 떠오른 투로 불쑥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팀장에게 지시를 내려 최종부도 처리되기 전 1년간의 NnG 재무상태 보고해주세요. 부도나기 전 3개월간의 은행거래도 알아보시고요.”

“알겠습니다.”

안 비서를 돌려보낸 뒤 그는 하선우와 강태한의 로그 기록을 읽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게임회사 자체 서버에 저장되기에 채팅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접속 시간과 PC사용 같은 일반적인 사안은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 평소에 김 팀장을 통해 보고받던 하선우의 일거수일투족과 별다른 것 없는 내용이었다.

하선우가 자포자기한 삶을 살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삶이 망가졌다는 것도. 다만 강주한은 자신이 하선우를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그를 태만하게 방치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애초에 하선우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강주한에게 헤어진 옛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실연의 감정에 젖어들었고 관계의 끝을 받아들이면서도 모순되지만 습관처럼 그를 감시했다. 그는 그런 일상을 그저 관성처럼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오늘 그와 재회하고 나서야 그간의 무심함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았다. 마음속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하선우를 향한 공격성과 그를 처절하게 밟아버리고 싶은 격렬한 증오를 느꼈다. 그를 가장 당황하게 만든 사실은 여전히 하선우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동시에, 그로부터 기인하는 절망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헤어짐은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 함께 있었던 장소, 함께 들었던 음악, 사소한 모든 것에 하선우를 떠올리게 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그중에는 지하실의 쿰쿰한 방에서 나누었던 거친 섹스도 있었다. 몸살이 나도록 하선우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그 밤의 기억에 아랫도리가 욱신거렸다. 그의 살덩어리를 녹여서 빨아먹고 싶어 게걸스럽게 그를 탐하고 탐닉하며 그를 괴롭혔었다. 번식기를 맞은 짐승처럼 자신은 드물게 인내심을 없애버렸고, 하선우는 생각하기를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덤벼들었다. 두 사람의 성기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엉망이 될 때까지 뒤섞였다.

꿈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강주한은 갑작스러운 단절감을 느꼈다. 강주한은 그를 불길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 위로 시선을 던졌다. 검은 3부작. 하선우에게서 식은땀을 뽑아낸 검은 3부작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살로 삶을 마무리한 연인 다이어에 관한 일련의 헌정작을 남겼다. 화가의 젊은 연인은 프란시스에게 끝없는 사랑을 갈구했으나 충족되지 않는 갈증에 수없이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화가의 경력이 정점에 달했던 파리에서의 전시회 날, 진정최면제를 과다투여해 화장실 변기를 끌어안고 온갖 오물을 쏟아내며 괴로움 속에 죽어갔다. 그 과정을 묘사한 그림은 황폐한 절망이 끈끈하게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앞의 그림은 자신의 토사물 속을 뒹굴며 죽어가는 다이어의 절망을 담은 모작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죽여 당신을 벌하겠다.

그는 화가의 그림을 볼 때 그를 사로잡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베이컨의 그림에 끌리는 이유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왜곡된 인간상 속에 그려진 절망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림 속에서 해체된 인간의 모습은 마치 고문실에서 고문을 받는 짐승의 모습처럼 보였다. 화가의 연인은 자신을 죽임으로써, 자신을 방치한 연인에게 최고의 형벌을 내리고 있었다.

암회색의 콘크리트 벽에 걸린 그림을 못 박힌 듯 들여다보고 있던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고 떠나간 옛 연인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어떤 이와의 마지막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어떤 이의 얼굴은 그에게 수치심을 안겼다. 그리고 하선우의 우는 얼굴은, 그에게 아주 이상한 흔적을 남겼다. 프란시스가 그린 다이어의 얼굴처럼 들여다보기 괴롭지만 시선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하선우의 우는 얼굴을 좋아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하선우의 눈물은, 지금껏 그를 자극하던 울음과는 아주 느낌이 달랐다. 격렬한 증오를 품은 하선우의 눈빛이 강주한의 흉중에 남아 서걱거리는 느낌을 남겼다.

그는 더는 하선우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선우를 떠올리는 것은 멀미를 앓는 것과 같다. 흔들리는 마음의 질서를 잡으려 그는 그림에서 시선을 뗐다. 지독하게 피곤했다. 하지만 잠들지 않을 것이다. 자고 나면 한결 기분이 나아지겠지만 지금은 피곤을 핑계로 잠들 수 없었다.

* * *

유통기간이 지난 유제품을 꺼내 정리하고 있던 두현은 문을 밀고 들어오는 벨소리에 약간의 소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적이 뜸한 새벽 시간에 들르는 손님은 두현이 아무리 20대의 팔팔한 사내라 하더라도 조금은 꺼림칙했다.

그는 아직도 소년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었고, 근육보다도 물렁살이 더 많은 허약 체질이었기 때문이었다. 24시간 편의점이긴 해도 이차선 도로변에 인접해 있어서 이 시간에는 오히려 손님이 거의 없었다. 점주가 새벽 타임에 아르바이트생인 두현을 고용한 이유는 이른 아침에 공단에 출근하는 손님을 받기 위해서였다. 두현 역시도 점주가 시급을 좀 더 쳐주지 않았다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단 주변이라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았고, 안성 시내에서도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라 이곳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내들이 머무는 원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이곳을 찾는 일반적인 손님들과는 다른 유형이었다. 근무 중 작업복을 걸치고 담배를 사러 오거나, 두툼한 패딩에 추리닝 차림으로 야식을 사러 오는 손님들과 다르게 그는 한눈에 봐도 값비싼 코트 안에 고급스러운 정장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안성의 공단이 아니라 강남과 광화문, 여의도 일대의 빌딩에서 근무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지적이고도 창백한 인상의 그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몰골로 편의점 안을 천천히 배회하다 적당한 무언가를 골랐는지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편의점 식품 중에서도 제법 가격대가 나가는 따듯한 건강 음료였다.

“6,400원입니다.”

카드로 계산한 남자는 음료를 가져가는 대신 곧바로 두현에게 유리병을 건넸다. 의아해하는 두현에게 남자가 말했다.

“김두현 씨 되십니까?”

“네?”

눈을 부릅뜬 두현이 음료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하자, 남자가 신중한 태도로 음료수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그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집어 들더니 그것을 두현에게 건네며 말했다.

“안영석이라고 합니다.”

두현은 명함 속의 글자를 빠르게 확인했다.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 특이한 명함이었다. 옅은 회색 종이를 앞뒤로 살펴보던 두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요? 무슨 일인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에게는 어떤 경위로든 눈앞의 남자와 관련될 만한 일이 없었다. 남자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 두현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김운형 씨 실종 관련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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