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 이유
시외버스에서 내려 10분쯤 걷자 지도 어플에서 보았던 형태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옅은 회색의 사각기둥 네 개가 둥근 돔에 연결된 구조의 건물이었다. 관세청과 조달청, 특허청과 통계청, 특허심판원 등등 정부의 많은 기관이 모여 있는 대전 청사 건물을 올려다보며 하선우는 졸린 눈을 비볐다.
분당에서 대전까지 버스로 이동하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내리 잠만 잔 그는 아직도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멍한 상태였다. 그러나 대로변에 주차된 익숙한 차량을 본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특허를 취소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긴 했지만 이 위태로운 줄다리기에서 강태한이 일방적으로 손을 놓아버릴까 내심 걱정이 되던 차였다. 하선우는 강태한의 차량을 흘깃 곁눈질하면서도 청사를 향하던 걸음의 속도를 유지했다. 차 안에서 처자느라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강태한은 의외의 장소에서 튀어나왔다.
“야!”
건너편 카페에서 롱코트를 휘날리며 강태한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전날 하선우에게 모욕당한 것을 실컷 복수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 자신을 한껏 미화한 차림이었다. 색이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색의 오버사이즈 코트를 입은 그가 순식간에 하선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씹새야.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4시야. 불길한 숫자 사, 죽을 사, 노렸어? 사망하고 싶어서 4시에 왔냐? 나 엿 먹이냐?”
음산한 말투로 강태한은 뇌까렸다. 분노를 뿜어내는 강태한의 분위기에 하선우는 웃지 않으려 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었다. 강태한의 의혹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강태한이 기다릴 거라는 생각에 일부러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샤워를 한 뒤, TV 다시보기로 예능프로그램 한 편을 보고 느긋하게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해 대전에 도착한 차였다.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기다리며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강태한을 생각하니 웃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어쩌라고. 이게 내 생활패턴인데.”
“하긴 게임 폐인이 그렇지 뭐.”
주머니 속에 두 손을 푹 찔러 넣은 강태한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짜증을 냈다.
“생각할수록 좆같네.”
분노를 온몸으로 앓고 있는 강태한을 버려두고 하선우는 묵묵히 경비대 초소 앞으로 걸어갔다. 온풍기를 쬐며 한산하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경비가 창문을 열며 물었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아뇨. 예약해야 하나요?”
“최근에 청사 방문 절차가 복잡해져서요. 예약하셨을 때에만 방문증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냐? 좆됐네.”
하선우의 바로 뒤에서 강태한이 목덜미에 기습하듯 턱을 붙여오며 빈정거렸다. 하선우와 강태한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경비가 멍한 상태에 빠져 있다, 당황해 말했다.
“아, 아닙니다. 미예약자는 안내 데스크 가셔서 도우미에게 부탁하시면 됩니다. 대신 담당 공무원과 동행해야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하선우는 코웃음 치며 강태한을 밀쳤다. 강태한의 계속된 시비 덕분에 그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거짓된 의도로 가치를 거듭 깎아내야 할 만큼 강태한에게는 특허가 중요한 의미였던 것이다.
“너 나 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지? 정말 취소할 생각 쥐뿔도 없으면서 센 척은.”
하선우는 강태한을 무시하며 초소를 지나쳐 계단 위로 올라갔다. 유리문을 지나 안내 데스크로 향하는 하선우의 팔을 잡아 걸음을 멈춰 세운 강태한이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야. 내 말 씹지 말라고.”
“가지고 왔어?”
“뭘.”
“자료.”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강태한이 시선을 피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선우는 더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이 강태한을 지나쳐 데스크를 향해 곧바로 걸었다. 전산자료를 입력하고 신분증을 맡긴 뒤, 도우미가 담당 공무원에게 연락을 하는 동안 하선우는 근처의 소파에 앉아 처리가 끝나길 얌전히 기다렸다.
“진짜 할 거야?”
하선우의 바로 앞에 선 강태한이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또다시 시비조로 물었다. 강태한이 자신을 따라 신분증을 내지 않아 속으로 불안함을 느꼈지만 하선우는 이번에도 심드렁한 태도로 반응했다.
“응.”
“그래.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
강태한은 안내 데스크 앞으로 걸어갔다. 안내 데스크 안쪽으로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강태한은 선글라스를 벗어 맨얼굴을 보이며 수더분한 외모의 젊은 여직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태한이라고 합니다. 엘텍그룹 강제한 회장님 셋째아들.”
“네? 아, 아 네.”
지갑 속에서 명함을 꺼내 직원 앞으로 내민 그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특허심판원 방문증을 받고 싶은데요. 보안상의 문제로 제 신분증을 맡기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실례가 아니라면 명함으로 안 되겠습니까? 저 친구와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요.”
내가 누군지 알아? 진상을 부릴 거라고 예상했던 하선우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강태한을 쳐다보았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여직원이 두 손으로 강태한의 명함을 받아 들고 저, 저, 잠시만. 말을 더듬었다. 반질반질한 낯으로 유들거리는 강태한의 태도에 하선우는 속이 뒤틀렸다. 강태한은 한 건 해결했다는 오만한 태도로 건들거리며 하선우의 앞으로 걸어왔다.
담당 공무원은 연락을 받고 급히 내려온 티를 내며 하선우를 지나쳐 강태한의 앞에 섰다. 마르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키의 중년 사내였다. 심지어 직급은 부서장이었다. 말단 직원도, 단순 실무원도 아니었으며, 방문객을 안내할 위치의 공무원도 아니었다.
부서장은 초현실적인 상황을 맞닥뜨린 소년처럼 어리둥절해 보였다. 평생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을 그가 자본가, 그것도 재벌을 대처하는 능력이 빈약하리라는 것은 남자를 잘 알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커, 커피라도.”
“볼일은 제가 있습니다.”
하선우는 어떻게든 무엇이라도 대접하려 애쓰는 부서장의 안쓰러운 호의를 제 선에서 잘라냈다. ‘강태한’을 버려두고 고작 이 남자에게 신경을 기울여도 되는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부서장의 마음을 읽은 하선우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맞아요. 볼일은 저쪽이 있습니다.”
강태한은 자비를 베풀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한의 허락 비슷한 것이 떨어지자, 그제야 부서장이 하선우를 향해 몸을 돌려세우며 물어왔다.
“무슨 일로….”
“특허신청 취소 때문에 왔습니다. 조금 전에 전산자료 입력했는데요. 특허취소 이유를 제출하려고 한다고.”
“아… 아아. 그러시군요. 네, 알겠습니다.”
버퍼링 걸린 기계처럼 버벅거리던 부서장은 뒤늦게 정신을 차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앞장 서 걸으면서도 강태한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힐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강태한에게 따라붙는 시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청사 내부에 엘텍그룹 셋째아들에 대한 소문이라도 돈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업무를 보는 척 서류를 들고 복도로 나와 강태한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뭇사람의 시선을 함께 받게 된 하선우는 선글라스를 쓰고 느긋한 보폭으로 뒤를 따라오는 강태한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그런 하선우의 기분을 알 리 없는 부서장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한술 더 떠 말했다.
“TV에서 뵙던 것보다 훨씬 키가 크고 준수하시네요. 연예인 같으십니다.”
누가 봐도 빤한 입발림이었지만 강태한은 마땅히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는 듯 예사로이 반응했다.
“알아요. 재벌 중에서 제가 제일 잘생겼죠.”
“네? 하…하하…하.”
부서장의 어색한 미소를 마주 보며 인위적으로 웃어준 강태한은 그를 독려하듯 어깨를 힘주어 두드려주었다.
“뭐하세요? 앞장서세요.”
“네? 네.”
사무실은 한산했다. 방문자도 얼마 없었고, 공무원들은 모두 데스크에 앉아 차분하게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기 중에 떠도는 묘한 긴장감으로 인해 사무실은 소음 하나 없이도 지나치게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감사를 온 것도 아닌데 유난이다 생각하며 하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텍그룹 셋째 도련님에 대한 배려로 최대한 일이 빠르게 처리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 것이다. 애초에 이 작전은 모 아니면 도였다. 강태한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초조하기는 강태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류작성 카운터에 앉은 하선우는 흔들리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비장하게 부서장의 지시를 따랐다.
“여기에 당사자 성명과 주소를 적으시고 출원일자, 출원번호, 발명의 명칭, 실시권 범위, 취소의 취지와 이유, 그리고 특허의 권리범위, 설명서와 도면을 첨부해주시면 됩니다. 보통은 변리사 통해서 해결하는데. 많이 번거롭죠?”
“괜찮습니다.”
시계를 힐끗 곁눈으로 확인했다. 4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가방 속에서 천천히 노트북을 꺼낸 그는 돌돌 말린 이어폰 줄을 풀어 노트북 플러그에 연결하고 기분을 전환해줄 적당한 음악을 고심해서 골랐다. 2000년대 초반에 많이 듣던 영화음악 OST를 재생하며 특허심판원 홈페이지에서 서식을 다운받은 그는 또박또박,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공란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선우의 바로 옆에 앉아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가소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강태한은 짜증을 참지 못하고 천장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쏟아냈다.
“하선우.”
“…….”
“6시 다 돼가.”
“거의 다 했어.”
침을 삼키느라 강태한의 긴 목 사이에 툭 튀어나온 울대뼈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강태한은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하선우는 정신없이 기존에 작성해두었던 특허의 도면을 서식에 첨부했다.
“지금 빚이 38억이랬지?”
“…….”
“엘벡스에 대한 단순위약금만 4억5천. 손해배상청구로 …한 10억 요구할까?”
혹여 파일이 날아갈까 틈틈이 저장하며 실시권의 범위를 서술했다. 하선우로부터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강태한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라도 영향을 미치고 싶어 연연하는 강태한의 미성숙한 면이 거꾸로 하선우를 안도하게 만든다는 걸 안다면 분명 그는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강태한은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면 이미 빚이 너무 많아서 실감이 안 나나? 너한테는 되게 큰돈일 텐데?”
“맞아. 실감이 안 나더라. 거기서 빚 10억쯤 더 얹는들 뭐가 다르겠어? 앞으로 게임이나 계속하지 뭐.”
욕설을 짓씹는 강태한을 무시하며 하선우는 노트북을 들고 부서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프린트기 좀 사용해도 될까요?”
“아니. 내가 먼저 확인하고.”
부서장에게 건네려는 노트북을 중간에서 강태한이 낚아챘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티셔츠에 대충 걸치며 그는 노트북 화면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안 내놔? 네가 특허에 대해 뭘 알아?”
“제대로 한 거 맞아? 뭐가 이렇게 길어?”
하선우의 손이 닿지 않도록 뒤로 물러나며 노트북을 높이 치켜든 그는 스크롤을 내리며 터치패드를 건드려 파일을 끄려 했다.
“삭제할 생각 하지 마. 웹하드에 따로 저장했어.”
아쉬운 얼굴로 짓궂게 웃으며 하선우에게 노트북을 건네던 강태한은 순간적으로 표정을 달리했다.
“너 지금도 나 간 보지?”
냉소 띤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묻는 강태한을 보며 하선우는 쉽게 말을 고르지 못했다. 처음부터 강태한이 가진 자료를 주지 않으면 특허를 없애버리겠다는 결론이 나는, 답은 하나인 문제였다. 일방적으로 강태한에게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떠오르는 묘수도 없었다. 하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하선우의 상황이 정말로 극에 몰렸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불리한 건 내 쪽이야. 더 불행해지고 말 것도 없어.”
강태한은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가 자료를 주면 다 해결될 일이지만 주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넌 여태 허공에 삽질했다 치고, 나는 여기서 더 인생 막장으로 떨어지면 그만이니까.”
“누누이 말했지. 내가 너한테 자료를 줘야 할 이유 없다고.”
“줘야 할걸? 너랑 헛소리할 시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6시까지는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치는 하선우의 일방적인 무시로 끝이 나버렸다.
“프린트기 사용해도 될까요?”
“예? …예.”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 부서장은 강태한의 의도를 기민하게 읽어내려 노력하며 말했다.
“접수… 해드릴까요?”
강태한이 미쳐 입을 떼기도 전에 하선우는 얼른 대답을 가로챘다.
“네.”
예상외로 강경한 하선우의 반응에 강태한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비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하선우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던 그가 별안간 옆구리를 푹 찌르더니 말했다.
“따라 나와.”
문을 닫고 복도로 나간 강태한을 확인한 하선우는 허겁지겁 부서장에게 다가갔다. 노트북에 프린터기를 연결하려는 부서장을 다급하게 말렸다.
“잠깐만요! 프린트는 나중에, 나중에 제가 할게요.”
당황하는 그를 본체만체하고 곧바로 강태한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다 짧은 고민 끝에 책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강태한은 복도 끄트머리 벽에 붙어 있는 전신거울 앞에 서서 천천히 걸어오는 하선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선우는 곧장 강태한에게 가는 대신 거울 옆에 있는 자동판매기에 지폐를 넣고 캔 음료를 하나만 뽑아 홀짝홀짝 마셨다. 그 모습을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지켜보던 강태한이 한마디 말을 꺼내려던 찰나 하선우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잠깐만. 톡이 와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터치하며 하선우는 말했다.
“너 때문에 어제 퀘도 못하고 나왔어. 메인 퀘도 끝내야 해서 시간 없어 죽겠는데 진짜. 오늘 언제 접하냐고 길드원들한테 계속 톡 온다.”
“가지가지 하네. 폐인 새끼들.”
화면을 터치하던 하선우는 갑자기 발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폐인? 게임하면 폐인이야? 나는 PC방 폐인일지 몰라도 길드원들 대부분이 멀쩡하게 직장 다니거든? 카지노 세운다는 사람 입에서 나온다는 논리라는 게 이런 편견 가득한 인식이라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다. 너 비디오게임과 폭력영화가 범죄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독재정권에서 나온 논리라는 건 알아?”
하선우는 더없이 끔찍한 모욕을 받았다는 듯 분노에 치를 떨었다.
“아… 존나 꼴통새끼.”
강태한은 불현듯 찾아온 정신적인 고단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평소라면 후한 점수를 줬겠지만, 지금은 저 꼴통새끼와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갈증이 난 사람처럼 단번에 음료를 마신 하선우는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요점만 말해.”
“취소 신청할 거냐?”
“응.”
하선우의 마른 얼굴을 빤히 노려보던 강태한이 말했다.
“취소 신청해도 바로 되는 건 아니더라. 심사과정만 몇 년이고 결과는 그 후에야 나온다며?”
“그래서?”
“절벽에서 몸 던져봐야 그 밑에 아무것도 없어.”
하선우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며 시큰둥하게 맞받아쳤다.
“동아줄 내려주든가.”
강태한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난 너처럼 밑바닥에서 발악하는 새끼들을 보면 환멸을 느껴.”
“위에서 발악하는 너보다는 무해해.”
“미친년이. 듣자 듣자 하니까.”
“너희 형제 덕분에 온갖 번뇌에 시달렸던 건 오히려 나야. 누가 내 특허 도둑질하래? 나도 그 대가로 엘텍 소송 비리자료 갖겠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나도 달라고. 줘!”
“미쳤어? 닥치고 내가 시키는 거나 하라고!”
번거롭고 성가시게 들러붙는 진드기를 떨쳐내듯 소리를 버럭 지른 강태한이 자판기를 발로 걷어찼다.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씩씩 숨을 몰아쉬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하선우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형이 좀 놀아줬다고 주제파악이 안 돼? 좆같은 새끼네 이거. 빚이 10억쯤 더 생겨도 실감이 안 날 것 같다고? 앞으로도 엄마한테 천 원 2천 원 용돈 받아가며 PC방 폐인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내 친구들은 점잖지 못한 덩치들인데. 오장육부 팔도강산 뿔뿔이 흩어져서 팔려가든가, 아니면 산 채로 섬에 팔려가 염전이나 닦든가, 그것도 아니면 여기저기 평생 후장이나 대주고 살든가. 다른 선택지 없어. 셋 중 하나만 골라. 아, 너 후장 대주는 거 좋아하니까 환장하고 덤벼들겠다? 마지막 거 고르면 되겠네.”
검지로 하선우의 이마 정중앙을 툭툭 찌르며 강태한은 못되게 빈정거렸다. 하선우는 휴대폰을 꽉 쥔 채로 눈을 감고 흥분을 가라앉히려 아랫입술을 혀로 가만히 쓸었다. 하마터면 휘말릴 뻔했다. 강태한이 정상적인 인격체가 아니라는 걸 너무 자주 잊곤 했다.
“너는 네 부모님이 다치는 상황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
“뭐?”
“네 형들 의사랬지? 손가락이 생명이겠네.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손가락 다치는 건 어때? 다 잘난 막내아들 탓인 걸 알면 원망이 대단할 텐데. 그깟 자존심 지키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훈련이 안 돼? 개처럼 구는 게 그렇게 힘들어?”
강태한의 말이 남긴 여파에 하선우의 얼굴은 조금 질린 듯 보였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손에 꽉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는 결국 영 기운을 차리지 못해 벽을 짚고서야 가까스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하선우는 최대한 강태한과 멀찍이 떨어졌다. 문득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6시가 넘어 있었다.
“거봐. 결국 6시 넘었잖아.”
“강태한.”
“왜. 내일 또 오시려고?”
하선우는 휴대폰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엘텍그룹 강제한 회장 셋째 아드님.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다.”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재빠르게 터치한 뒤에야 하선우는 강태한을 돌아보았다. 하선우가 자신을 부를 때 사용할 리 없는, 낯간지러운 수식에 강태한은 할 말을 잃었다. 그 순간, 강태한의 시선이 하선우가 목숨줄처럼 잡고 있는 휴대폰으로 매섭게 돌아갔다.
“너 녹음했지.”
취조하는 형사처럼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대답 안 해?”
강태한이 단번에 하선우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와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빼앗기기 직전 하선우는 소리쳤다.
“SNS 비밀계정에도 올리고 클라우드에도 올렸어! 동기화시켜 놨으니까 박살내도 소용없어!”
“어우씨발!”
강태한의 눈빛 속에 하선우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갈구가 가득했다. 누군가를 도륙해버리고 싶다면 꼭 저런 살기 띤 눈을 할 것만 같았다. 의지와 무관한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하선우는 지지 않고 강태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녹음했어.”
“복도 나와서 네가 지랄할 때부터.”
“이거 진짜 또라이 새끼네.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 지워.”
“싫어. 넌 이미 충분히 미친놈이잖아.”
“지우라고 했잖아!”
강태한의 노성에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공무원들이 나와 복도와 문 사이에서 기웃거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혐오를 가득 담은 눈으로 하선우를 노려보던 그는 떨리는 입술을 감추려 치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쩌면 우습게 여겼던 하선우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자료 주면 지워줄게.”
강태한은 충혈된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했던 말 하나라도 새어 나가기만 해봐.”
“나한테 했던 말이 심한 말인 건 아나 보지?”
“내가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했겠어? 넌 그런 소리 들을 만한 새끼야.”
하선우는 낯을 찡그리며 신음을 토했다. 발암물질과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삭제해.”
“자료 넘기면.”
“씨발! 안 준다고!”
“솔직히 말해봐. 가져왔지?”
강태한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쪽 눈썹을 비딱하게 추켜세웠다.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꽉 쥔 주먹을 덜덜 떨며, 마지못해 반응한다는 듯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줄 생각이었으면서.”
“성질 돋우지 마.”
하선우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힘주어 노려보며 그가 말했다.
“노트북 챙겨서 로비로 내려와.”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사양하겠다는 듯 라운드넥 셔츠에 걸어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내 눈을 가리고 코트에 달려 있는 커다란 후드까지 머리에 뒤집어쓴 그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죄 무시하며 비상구 출입구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 * *
가을걷이가 끝나 방치된 논밭의 풍경은 한산했다. 이차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는 드물었다. 하선우가 발뒤꿈치에 일회용 밴드를 붙였던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초라한 슈퍼도 문을 닫았다. 일대에서 유일하게 우뚝 솟아 있는 암흑색의 조립식 패널 건물 역시도 괴괴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공장건물은 열을 조금도 발산할 수 없는, 에너지를 모조리 소모해버린 거대한 잿더미처럼 보였다. 콘크리트와 콘크리트 틈새로 바짝 마른 일년생 잡풀이 길게 자라나 죽어 있었고,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폐자재가 건물 사이사이에 쌓여 뒹굴고 있었다. 이제 고작 5시가 됐을 뿐인데 황량한 공장의 지천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치 흑백사진 위로 누런 얼룩이 떨어져 번져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강주한은 철문 앞에 서 있었다. 사슬로 야외 출입구를 묶어 진입을 막은 철문 앞에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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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 낀 두 손으로 녹슨 철제문을 잡아 흔들자 적막 속으로 비걱거리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문을 힘주어 잡고 사다리 삼아 올라탄 그는 철 난간을 넘어 버려진 땅 너머로 털썩, 내려섰다. 어쩐지 냉기가 더 뚜렷하게 느껴지는 기분에 몸을 떨며 그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보도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NnG를 처음 방문했던 당시에는 생산라인이 가동 중이었지만, 지금은 기존에 있던 설비가 빠져나가 공장 내부가 거의 비어 있었다. 기계는 모두 매각했고 부동산과 공장은 법원경매에 부쳐진 상태였지만, 경기가 좋지 않아 경매공고 당시보다 가치가 20% 하락한 상태였다.
공장 입구에 서서 느슨하게 팔짱을 낀 그는 공장 내부에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을 살폈다. NnG에서 엘텍에 납품하던 캔 샘플이 바닥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공장 벽에는 알루미늄 롤이 세워져 있었다. 오물로 얼룩진 목장갑과 캐비닛 파편, 석판 조각과 부러진 의자, 플라스틱 파이프와 스티로폼 부스러기 따위의 쓸모라고는 하등 없는 폐기물 위로 부옇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본다면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고 질색할 만한 풍경을 방관자처럼 지켜보던 그는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스르르 팔짱을 풀었다. 운송 중에 무언가로부터 떨어졌는지 분홍색 압류물 표시 스티커가 샘플 위에 붙어 있었다.
그는 압류명령이 내려오던 날의 날짜가 적힌 지방법원의 압류 스티커를 집어 들었다. 같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압류 스티커를 내려다보던 그는 별안간, 이마에 오르는 미열을 느꼈다. 가슴속에 뻐근한 답답증이 차올라 담배를 꺼내 입술 끄트머리에 물었다. 그 자신을 사로잡는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때는 담배 한 개비를 모조리 다 태우고 난 후였다.
오늘 오후 사장이란 직함을 달고 첫 출근을 했던 강주한은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김 팀장에게 지시했던 최종부도 처리되기 전 3개월간의 NnG 재무상태 보고서였다. 그가 이전에 받았던 NnG의 재무보고서와 별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매출은 올랐지만 원자재값이 50% 이상 상승하고 납품가는 올리지 못해 마진율 자체는 절반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공장 확장, 인건비 상승과 같은 구조조정 문제를 껴안고 있었고, 엘텍에 무이자로 대출한 원금과 당좌대출, 만기 직전의 어음까지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고비가 위기로 즉결되는 건 아니지만 회사채 등급이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떨어지는 충분한 근거가 되리라고 생각해왔었다. 메일 속에 새롭게 첨부된 파일을 읽기 전까지 그의 생각엔 변화가 없었다. 파일 속에는 강주한이 한 번도 깊게 파고들어본 적 없던 문제의 진짜 속사정이 드러나 있었다.
조금 전 그는 김 팀장과 함께 NnG의 주거래 은행 지점장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지점장은 어음만기 연장을 거부하여 NnG의 1차 부도를 초래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유약한 인상의 지점장은 김 팀장의 추궁에 난색을 보이며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죠. 은행 입장에서 기업이 부도나봐야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일부러 부도나라고 고사 지냈겠어요? 저희 은행은 실적 모니터링밖에 안 합니다. 신용등급을 제가 떨어트린 것도 아니고 말이 안 되죠.’
‘그럼 동반성장 결제시스템에 가입한 게 신용 하락의 원인이라는 겁니까?’
김 팀장의 말에 지점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은행은 모니터링밖에 안 한다니까요. NnG 부채비율이 높은 건 전달해주신 자료를 보면 알 수 있고, 신용평가는 금융회사에서 산정하는 일이니 섣불리 말할 수 없죠. 뭐, 그래도 동반성장 결제시스템에 가입한 게 원인일 수는 있죠. 올 초에 정부에서 처음 도입한 시스템이라 사고가 많았어요.’
‘동반성장 결제시스템’은 은행권의 수익 증대 및 10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관계 증대를 위해 정부에서 도입한 결제시스템이었다. 중소기업이 기존에 어음을 사채 시장에서 할인하는 규모를 고려해 어음부도에 따른 피해를 줄이려 도입한 프로그램이었다.
취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권력구조로 인한 새로운 종속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대기업에서 하도급 업체에 외상 매출이 많은 경우엔 가점을 주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종합평가에 영향을 주어 최악의 경우 신용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문제는 NnG의 ‘동반성장 결제시스템 상품’에 가입을 재촉했던 당사자가 은행 측의 사람도, NnG 측의 사람도 아니라는 데 있었다.
올 초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컨설턴트 팀을 소개한 일이 있었다. 소규모의 기업에서 시작해 중소기업이 되었지만, 여전히 벤처회사의 조직형태를 가진 NnG를 위해 컨설턴트 팀은 조직골조뿐 아니라 회계와 재무 파트를 전체적으로 업데이트하도록 제안했다.
실적과 수익 향상을 위한 민감한 사안임을 고려할 때, 결과적으로 그들이 제안한 컨설팅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아니,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재무안정성이 떨어졌다는 판단과 특허계약 위반, 기타 특이사항이 자체적으로 평가되어 기업 종합평가에 영향을 미쳤고, 회사채 등급이 3단계나 하락한, 투기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이미 흠뻑 젖은 손수건으로 턱 끝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지점장은 너무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강경하지도 않은 투로 강주한에게 말했다.
‘엘텍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협력업체 사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다고 저희 탓은 아닌 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예치계좌를 관리하고 모니터링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뿐입니다. 당좌계좌를 닫은 건 등급이 너무 낮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정에도 없던 스케줄을 불과 도착 시간 30분 전에 통보하고, 반년 가까이 된 기업부도 사건을 캐물었으니 지점장으로서는 난데없는 봉변이었을 것이다.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하던 황달 낀 누런 눈자위를 떠올리며 강주한은 그가 했던 말을 조용히 혼잣말로 뇌까려보았다.
“재무파트 쪽에 물어보세요. 하청업체 동반성장지수 종합평가니 뭐니 관리하는 그런 부서 있을 것 아닙니까.”
지점장이 강주한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며 하소연하던 말이었다. 실제 그런 부서가 있는지 따로 알아보지는 않았다. 전화 한 통이면 수 분 내에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제 와서 부서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고 담당자를 찾아내 책임론을 들먹이며 아무런 요점도 없고 생각도 없는 해결책으로 현실도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그와 같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타개할 만한 편법을 타인을 통해, 그리고 그 스스로 깨우쳐온 부류들이었다.
책임론을 들먹여 꼬리를 잘랐으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분열’과 ‘불화’와 같은 선상에 두어 극도로 예민한 사람들로 취급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논쟁보다는 치유가 필요한 시대라는 투의 감정을 현혹하는 말로 거짓된 인간애에 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 거짓된 인간애에 현혹되고 싶은 건 바로 강주한 자신이었다. 그 역시 치유라는 환상에 매달려 외면하고 싶었다.
강주한은 자신의 선택이 불러일으킨 결과의 참혹한 허물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폐공장에 서서 담배 한 개비를 더 태웠다. 잔해 위로 꽁초를 던져 불씨를 비벼 끄고 공장 밖으로 나와 중앙 보도를 따라 걸었다. 짙은 청록의 조경수와 새로 리모델링한 건물의 외벽은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먼지도 거의 뒤집어쓰지 않았다. 중앙건물의 입구는 공장과 달리 두꺼운 체인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투명 강화유리문을 통해 어두운 내부가 들여다보였는데, 로비의 벽면 정중앙에 강주한과 하선우가 악수를 나누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마치 타인의 치부를 보고 부주의한 농담을 한 소년이 된 느낌이었다. 생각 없이 떠든 뒤에야 싸늘한 뭔가를 느끼지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타이밍이 지나버린 채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버린.
안으로 들어갈 길을 찾으려 했지만 모두 잠겨 있었다. 밖을 어슬렁거리던 그는 비교적 가장 작은 창을 문틀째로 떼어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의 사정 역시 공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부를 가득 채웠던 물품이 사라진 장소에는 훼손되고 부서진 것들의 잔해가 부스러기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발에 채는 자재를 피해 조심스럽게 걸었다. 복도 끄트머리에 하선우의 개인연구실 표찰이 보였다. 문을 열려 했지만 안에서 뭔가에 가로막힌 듯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어 밀자, 이윽고 바닥에 무언가 끌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문을 가로막고 있던 것은 하선우가 연구실에서 쪽잠을 잘 때 사용하곤 했다던 접이식 간이침대였다. 침대 겉에는 두꺼운 비닐이 씌워져 있었는데, 내부에서 습기가 빠져나가지 않아 여름 동안 곰팡이가 슬었는지 검게 얼룩져 있었다.
침대를 밟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구석에서 캐비닛을 발견했다. 엎어져 있는 녹슨 캐비닛을 일으켜 세우는데 문이 활짝 열리며 그 안에서 내용물이 한 번에 쏟아지고 말았다. 슬리퍼와 칫솔, 땀으로 변색된 작업복과 넥타이, 습기에 오랫동안 노출된 책과 서류들이었다. 점점 희미해지는 빛 속에서 강주한은 두툼한 파일을 발견했다. 하선우의 특허를 정리해놓은 파일이었다.
* * *
스트로로 마시지도 않는 스무디를 휘저으며 하선우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겹쳐 인적이 드물었던 인도 위로 사람들이 조금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툼한 외투로 가린 몸을 잔뜩 웅크리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거리 위의 사람들을 쳐다보는 하선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강태한과 하선우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고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파일을 듣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이좋게 음악을 공유하는 줄로 알겠지만 그들은 조금 전 강태한이 하선우에게 일방적으로 퍼부은 인신공격을 세 번째 연속 재생으로 듣는 중이었다. 하선우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제 그만 삭제하지?”
강태한은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왜? 듣기 좋은데. 내 목소리 좋지 않아?”
‘…이거 어쩌나. 내 친구들은 점잖지 못한 덩치들인데. 오장육부 팔도강산 뿔뿔이 흩어져서 팔려가든가, 아니면 산 채로 섬에 팔려가 염전이나 닦든가, 그것도 아니면 여기저기 평생 후장이나 대주고 살든가. 다른 선택지 없어. 셋 중 하나만 골라. 아, 너 후장 대주는 거 좋아하니까 환장하고 덤벼들겠다? 마지막 거….’
귀에서 이어폰을 빼낸 하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북받치는 짜증을 참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거하게 한숨을 토해낸 하선우는 말했다.
“그렇게 듣기 좋으면 음성 파일 보내줄 테니까 모닝콜로 해놓지 그래.”
하선우는 더는 강태한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 변태 새끼란 욕을 내뱉었다.
“내가 자기애가 강하긴 한데, 욕 메들리를 모닝콜로 듣고 싶을 정도는 아니야.”
뻔뻔한 낯짝으로 심드렁하게 대꾸한 강태한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한 뼘 남짓한 크기의 몸통이 두꺼운 USB를 꺼내 하선우의 앞으로 던졌다.
“복사해.”
강태한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등받이에 한껏 몸을 기대고 있던 하선우가 돌연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테이블에 바싹 다가붙어 앉았다. 강태한이 변심하기 전에 일을 진행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하선우는 재빠르게 노트북 전원을 켜고 암호를 눌렀다.
“근데 내가 백업 영상을 원본 그대로 담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강태한은 대답 대신 언짢은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불신의 눈으로 강태한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운영체제가 실행되기를 기다려 파일 탐색기를 클릭했다. 강태한이 건넨 USB에 담겨 있는 파일은 동영상 파일이 아닌 오디오 파일이었다.
“얘기가 틀리잖아.”
“너 정말 뒈지고 싶냐.”
순식간에 하선우의 앞으로 상체를 확 숙이며 다가온 강태한이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주제파악이란 걸 좀 해. 이 음성 파일 다른 데 새어 나가면 너 진짜… 진짜 내 목숨 걸고 살가죽 벗겨 죽인다.”
강태한은 먼 미래에 하선우가 정말로 그들의 비밀을 세상에 누설하기라도 할 것처럼 적의를 드러냈다. 여기까지 하선우에게 끌려온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지 그는 갑자기 폭력적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신음을 토해냈다.
하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들은 척 만 척, 휴대폰에서 이어폰을 뽑아 노트북에 연결해 음성 파일을 클릭했다. 동영상 파일에서 추출하면서 생긴 노이즈가 섞인 음성 파일은 전체 길이가 40여 분에 달했다.
“뭐야. 네가 말한 영상이랑 길이가 다르잖아.”
“씹탱아. 편집했다. 됐냐?”
하선우는 인상을 쓴 얼굴로 강태한을 쳐다보았지만 이제 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중간중간 대화를 빨리 감아가며 파일의 이상 여부를 확인한 하선우는 바탕화면에 지정해둔 폴더 속에 파일전송을 완료했다. 됐다. 이걸로도 충분했다. 하선우는 만족한 기색으로 폴더를 재차 확인했다. 그 순간 테이블에 잔뜩 늘어지듯 기대어 앉아 턱을 괴고 있던 강태한이 불쑥 손을 내뻗어 하선우의 귀에서 이어폰을 잡아 뺐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좀 묻자. 네가 이게 왜 필요해?”
입술이 종잇장처럼 얇아질 만큼 하선우는 입술을 꾹 가늘게 다물었다. 시선과 고개를 옆으로 돌려 외면하던 하선우는 짧은 침묵 끝에 대답했다.
“그런 게 있어.”
“정의실현, 일확천금. 캐릭터에 안 맞게 이런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
“너 속으로 딴 계획 세우냐?”
“…….”
강태한의 얼굴에 점점 사나운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칼날 같은 침묵이 강태한의 강퍅한 신경줄에 칼금을 새기기 직전 하선우가 입을 열었다.
“보험용으로 필요해.”
“보험?”
“같은 배 탄 사이라며.”
“그래. 근데 쫄따구 새끼가 왜 보험이 필요하냐고.”
“네 말대로 쫄따구라서 보험이 필요하다. 네가 언제 필요 없어졌다고 나를 바다에 던져버릴지 모르니까. 특허계약 맺는 대로 돌려줄 거야.”
그 말에 강태한의 사납던 기세가 아주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것 같았다.
“시발, 딴데로 새기만 해. 어?”
“안 새.”
“내 말 허투루 듣지 마. 배신 때리면 그날로 넌 살아 있는 목숨 아니야.”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강태한은 노트북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녹취 파일도 클라우드에 자동 동기화했냐?”
“노트북에만 남아 있으면 뻑치기로 뒤통수 날리고 노트북은 뺏으려고?”
“왜. 클라우드에 남겨둔 건 삭제 못할 것 같냐?”
강태한은 깜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배부르게 웃었다. 하선우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휴대폰과 클라우드에서 강태한의 음성 파일을 삭제했다.
“네 욕 메들리 삭제했어.”
“아아, 그건 좀 뒀다 삭제하지 그랬어.”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혀로 핥으며 강태한은 말했다.
“한 번 더 들으려고 그랬는데. 아니면 삭제하기 전에 음성 파일로 보내주지. 언제는 이 오빠보고 모닝콜로 하라더니.”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던 하선우가 멈칫해서 강태한을 돌아보았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마치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짓던 하선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던졌다.
“너 동성애자 할 생각 없냐?”
성향이 자의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면서도 하선우는 묻고야 말았다. 놀란 눈으로 하선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강태한은 수 초 후 코웃음을 치며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같잖다는 듯 하선우를 보며 웃더니, 느닷없이 은근해진 태도로 물어왔다.
“왜… 갑자기 꼬시고 싶어졌어?”
아아, 젠장. 강태한이 잘못된 오해를 했구나 싶어 하선우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강태한의 감은 철저하게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발달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선우는 강태한의 오해를 정정해주고 싶은 초조함에 좀 더 강한 변화구를 던졌다.
“아니면 여자가 되고 싶진 않아? 트렌스젠더가 돼서 대한민국 성평등에 일조한다거나.”
대번에 강태한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선우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여 말했다.
“적어도 너는 무정자증이거나, 동성애자거나, 트렌스젠더거나 셋 중 하나인 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좋을 것 같아서. 네 성격에 자녀를 낳는다면 애새끼도 분명 성격파탄자일 거 아냐. 아니면 결혼하기 전에 단명하든가.”
“재밌네.”
가만히 듣고 있던 강태한이 경멸조로 웃었다.
“남이야 씨를 싸지르고 다니든 말든 고자인 하선우는 신경 꺼주시죠. 애새끼 키울 것도 아니면서 대한민국의 미래야 무슨 상관이야?”
오후 내내 변화무쌍하던 감정에 비하면 지금 강태한의 기분은 아주 바닥인 것만은 아닌 듯했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휴대폰 따위를 챙긴 강태한이 아직도 노트북을 붙들고 있는 하선우를 재촉했다.
“다 떠들었으면 마무리하지?”
하선우는 시선만 힐끗 주었을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벗어두었던 코트를 걸쳐 입은 강태한이 하선우의 노트북에서 USB를 뽑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특허 안신에 팔 거야?”
“그래야겠지.”
“그래야겠지? 남 일이야?”
기가 찬 듯 웃음을 터트린 강태한은 말을 이었다.
“일주일만 기다릴 거야. 엘텍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안신과의 거래를 결정해야겠어. 1억 달러가 무리라면… 로열티를 받는 방법으로 선회할 수도 있으니까. 집에서 꼼짝하지 말고 내 전화 기다리고 있어.”
“그러시든지.”
하선우의 시큰둥한 태도가 거슬려 미간을 확 구겼던 그는 얼마 뒤 평정심을 찾았다. 덩치가 작은 개일수록 겁이 많아 크게 짖는 법이다. 자존심을 지키려 발악하는 하선우의 헛소리에 일일이 반응하느라 지금껏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말았다. 문득 그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강태한은 자리에서 미련 없이 일어났다. 엘튼 장학회 자료 녹음 파일은 도난이나 해킹, 최악의 경우 하선우의 말대로 뻑치기와 같은 음성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면 될 문제였다.
“간다. 집에는 알아서 가라.”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음에도 하선우는 고개도 움직이지 않았다. 꼴에 같잖은 자존심을 세우는 하선우를 비웃으며 강태한은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강태한이 자리를 비운 후에도 하선우는 오랫동안 카페에 앉아 있었다.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을 24시간 연속재생으로 청취한 듯 귓속이 멍했다. 관자놀이 주변으로 띠를 두른 듯한 맥박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로 인한 가벼운 두통이었다.
어쨌든 우여곡절이야 많았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실은 누군가의 약점이 아니라, 제 발목을 구속하는 무거운 추를 늘리는 게 아닐까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벌써 7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대한 고래들이 몸부림치는 싸움 속에서 등 터진 새우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더 이상 없었다. 어제처럼 게임에 접속해 일일 퀘스트와 메인 퀘스트를 마무리하고, 던전을 돌아달라는 길드원들을 도와주면 하루가 지나갈 것이다. 늘 그랬듯이.
휴대폰으로 분당으로 향하는 차편을 알아보던 하선우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멈칫했다. 네모박스 속의 ‘분당’이라는 검색어를 지워버리고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그는 한참 뒤에야 기억 속에서 강제로 지워버리고 있던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택시 요금을 카드로 긁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18,000원을 긁자마자 카드사용 내역이 웹 발신으로 어머니 휴대폰으로 곧바로 전송됐을 것이다. 분명 예전에는 택시를 타든, 백화점에서 브랜드 셔츠를 사든, 분해용으로 사용할 전자오락기를 사든, 사소한 씀씀이로 마음 졸였던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물론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어머니의 허락 없이 택시 값으로 18,000원을 지불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단순한 변덕으로 지난 몇 달간 밟지 않았던 일산을 방문했다. 안 좋은 기억을 품고 쫓겨나듯 떠났던 고향 땅을 다시 밟은 실향민의 기분이 꼭 이럴까 싶었다. 마음에 커다란 납덩이를 매단 것 같았다. 어딘가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을 속 시원히 늘어놓을 곳도 없었다. 실패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진 유일한 동료는 결코 하소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잠시 이석의 얼굴을 떠올렸던 하선우는 씁쓸한 한숨만 내쉬다 걸음을 뗐다.
공장부도 후 주변 일대를 밝히는 불빛은 가로등이 전부였다. 이차선 도로에는 차가 드물게 다니는 데다가 가로등 설치 간격이 멀어 이전에도 민원이 잦은 편이었다.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을 희미한 빛에 의지해 걸었다. 직원들이 드나들던 중앙 입구 대신 그는 트럭이 오가던 우회로를 택해 철로 된 낮은 펜스를 넘어 제2라인 공장단지로 들어섰다.
쉼 없이 알루미늄 캔을 찍어내던 기계가 사라진 공장은 무한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어둠이 짙어 거대하고 참혹한 실패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강제로 모든 걸 빼앗겼으니 침략의 흔적이라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한동안 그는 공장 입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강태한이 가진 자료를 손에 넣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건 오로지 강주한 때문이었다. 그 원동력에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정의감 같은 건 없었다. 바짝 긴장했을 강태한에겐 희소식이겠지만 하선우의 바람은 소박했다. 자료를 통해 엘텍으로부터 돈을 얻어낸다거나, 언론사 보도로 정의를 실현하는 선택지도 없었다. 강주한으로부터 반성을 얻어내겠다는 포부도 없었다. 그는 그저 신발 속에 들어온 작은 돌멩이처럼 끊임없이 치사스럽고 신경 쓰이는 고역을 안겨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선우는 자신이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지질한 단역으로 소모될 법한 캐릭터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주제파악을 못했으며, 개인적 앙심을 품고 거대한 비밀에 너무 깊숙하게 개입해버렸다. 결국 결함을 가진 별종 단역의 운명이 그러하듯 제거될 일만 남았다. 그의 제거를 담당할 주인공은 누구일까. 강주한일까, 강태한일까.
“내가 미쳤지.”
참담한 기분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선우는 도리질을 쳤다. 아무리 강주한이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미웠어도, 너무 엄청난 일에 엮이게 생겼다. 강태한의 말처럼 하선우의 인생이 ‘조져지기’ 전에 녹취 파일은 특허계약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돌려주는 게 일신상에도 이로울 것 같았다.
한 편의 희극 영화를 머릿속에서 재생한 하선우는 결말을 끝내 상상하지 못한 채로 공장을 나섰다.
그가 충동적으로 옛 NnG 본사 건물에 들른 이유 중 하나는 지금껏 방치하고 있던 그의 사품을 챙기려는 까닭도 있었다. 회사가 부도나던 시기, 난리 속에 챙겨올 생각을 못했고 나중에는 자포자기해 마냥 버려두고 있었던 그의 물건들이었다. 대부분의 회사자산이 은행의 담보물로 넘어가 압류됐지만, 만에 하나 그대로 남아 있다면 가져가고 싶었다. 그중에는 그의 논문이 실린 화학잡지도 있었다.
본사 건물에는 가로등 불빛이 들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웠다. 하선우는 배터리를 아껴두려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애석하게도 배터리가 3%만 남은 상태였다. 플래시 앱을 실행하는 대신 아쉬운 대로 희미한 빛을 내뿜는 휴대폰 화면에 의지해 어둠 속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갔다. 중앙 로비로 향하는 문은 예상대로 쇠사슬로 잠겨 있었다. 유리창을 깨부수고 무단으로 침입해야 하나 고민하며 찬찬히 건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데, 해결방법은 예상외로 간단했다. 누군가 이전에 이곳으로 드나들었는지 유리창이 창틀째로 떼어져 외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어둡고 적막한 복도를 걸어 그가 개인공간으로 사용했던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때였다. 복잡한 기분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연구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하필이면 배터리가 2%대로 줄어들어 휴대폰 화면의 밝기가 최소로 줄어들었다. 이제 휴대폰 불빛은 가슴팍까지도 닿지 못했다. 이쯤 되면 사무실 탐방이 문제가 아니라 집에 돌아가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돌아갈까 말까. 잠시간 고민하던 하선우는 이내 명쾌한 답을 내렸다. 적어도 건물 안에는 있으니 노숙을 해도 얼어 죽지는 않으리라. 해가 뜰 때까지 버티다, 어떻게든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짙은 어둠이 깃들어 있는 사무실은 어딘가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비록 반년이라는 공백이 있긴 하지만, 한때 그가 매일같이 생활하던 공간으로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하선우는 갑작스러운 긴장에 명치를 꾹꾹 눌렀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가까스로 등뼈를 곧추세운 그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사무실 허공을 향해 휴대폰을 뻗었다. 부연 먼지가 짧은 가시거리 속에서 너풀너풀 어지럽게 춤을 춰댔다. 혹여 무언가에 잘못 걸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하선우는 신중하게 행동했다. 발을 바닥에서 거의 떼지 않은 채 신발을 질질 끌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뻗은 손으로 쉼 없이 허공을 저었다. 봉사처럼 더듬더듬 나아가던 하선우는 어느 순간 뭉툭한 뭔가가 닿는 느낌에 놀라 숨을 멈췄다.
“뭐….”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어렴풋이 섬유조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의 형체 같기도 하고, 마네킹 같기도 했다. 긴장으로 가슴이 뻐근하게 움츠러들었다. 식은땀이 이마와 머리칼을 온통 적시고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화면을 조금 더 내리자 침대가 보였다. 그가 연구실에서 사용하곤 했던 접이식 침대인 라꾸라꾸였다. 온통 혐오스러운 새까만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핏자국인가?
으허억, 비명을 내지르려는 입술을 다른 손으로 황급히 틀어막았다. 검은 형체는 분명 사람이었다. 사람이 분명했다. 하선우는 울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있는 어떤 형체를 재빠르게 훑었다.
한을 품은 누군가가 회사에서 자살을 한 건가? 죽은 지 오래된 건가?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된 거지? 침대에 진물이 쏟아져서 곪아버린 건가? 왜 내 사무실에서 자살을 했을까? 설마 내게 원한이 있는 걸까?
온갖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생각이 하선우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휴대폰이 비춘 것이 성기게 주먹을 쥐고 있는 검은 남자의 손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면, 하선우는 분명 휴대폰이 꺼지는 순간 남자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하선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무…후우… 흐… 무우…….”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끼기기이-. 철제 침대의 프레임이 마찰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헉!”
뒤로 벌렁 나자빠진 채 손발로 바닥을 밀치며 미친 듯이 도망을 치던 하선우는 간신히 방을 빠져나왔다. 암흑 속에서 복도로 벗어났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때 철제 침대가 요란하게 움직이며 비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누군가가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하선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무…뭐야!”
“…….”
“오지 마! 오지 마! 우씨! 가만, 가… 안 둔다!”
괜히 큰소리치며 말했지만 겁에 질린 목소리는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성큼 다가온 누군가가 손을 뻗었다.
“오지 마! 오지 말랬지!”
“하선우 씨?”
“으아아아아악! 하지 마! 만지지 마!”
“여기서 뭐합니까.”
“으아아아악!”
“하선우 씨!”
“아아악! 만지지 마!”
“정신 차려요. 강주한입니다.”
강주한의 이름이 들린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에 숨을 멈췄다. 복도 바닥에 구겨져 몸을 웅크리고 있던 하선우는 눈을 부릅떴다. 시야는 여전히 어두웠다. 뺨을 파묻은 틈 사이로 차갑고 매끈한 무언가가 파고들며 하선우의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 차끈한 촉감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철렁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맥이 뛰는 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진, 진짜예요?”
목구멍이 버석하니 메마른 탓인지, 목소리가 쉰 것처럼 희한하게 갈라져 나왔다.
“접니다. 강주한 맞습니다.”
강주한의 목소리가 맞았다. 강주한 앞에서 모양 빠지게 생난리를 쳤다고 자존심 상할 틈도 없었다. 그는 멍하게 어둠 속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 여긴 왜.”
울컥한 목소리로 묻던 하선우는 새삼 자신에게 닿아 있는 강주한의 손을 기억해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가죽에 감싸인 손. 맨 처음 그가 죽은 사람의 손이라고 오해했던 강주한의 손이었다. 갑자기 열이 뻗친 하선우는 강주한의 손을 뿌리쳤다.
등 뒤로 손을 뻗어 벽을 짚은 하선우는 여전히 후들거리는 다리에 잔뜩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폰으로 플래시를 켠 강주한이 바닥을 비췄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바닥을 통해 반사된 빛조차도 너무 밝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하선우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강주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도 잔뜩 놀란 얼굴이었다.
“여, 여기서 뭐해요?”
“잠깐 생각나서 들렀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서 뭐했냐고요!”
하선우의 손이 가리킨 곳은 활짝 열려 있는 사무실 안이었다. 어슴푸레한 짧은 가시거리 속으로 보이는 접이식 침대는 한눈에 봐도 더럽게 오염되어 있었다.
“저기서 잠이라도 잤어요?”
“예.”
“저 더러운 데서요?”
“비닐에 싸여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먼지가 좀 쌓여 있긴 했지만.”
“아니, 그러니까 저기서 왜 잠을 자요. 난 누가 자살이라도 한 줄 알았네.”
“자살?”
하선우의 머릿속에서 부풀려진 상상력이 어디까지 뻗어 나갔는지를 알아차린 강주한은 그를 안심시킬 만한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마치 그런 행동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처럼.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하선우 씨야말로 여긴 무슨 일입니까.”
“뭘 좀 가지러 왔죠.”
“가져갈 건 없어 보이는데요. 침대라도 가지러 왔습니까.”
강주한이 플래시로 침대를 가리켰다. 침대의 몰골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처참했다. 검은 곰팡이가 침대 전면을 뒤덮다시피 한 모습이 역겨웠다. 유광의 폴리비닐 재질에 반사되어 되돌아온 플래시의 시린 빛이 눈을 찔렀다. 하선우는 눈을 찡그리며 강주한에게서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하선우는 진로를 방해하는 접이식 침대를 넘어 서둘러 사무실 안을 빛에 비추어보았다. 왼편에서 오른편, 사선, 플래시를 재빠르게 움직여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기에 해저를 탐험하는 것처럼 화소와 채도가 낮아 보였다. 물이끼처럼 잡동사니에 쌓여 있는 먼지를 제외하면 내부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건질 만한 것이라곤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찌그러지고 녹슨 캐비닛 하나가 전부였다. 벽을 가득 채웠던 캐비닛 중에서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게 어디냐 생각하면서도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선우의 얼굴에 갑자기 비장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는 잔뜩 녹이 슬어 파상풍균을 감염시킬 것만 같은 잠금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속에서 퀴퀴한 먼지 냄새가 쏟아졌다. 슬리퍼와 땀에 삭은 작업복, 너절한 넥타이가 한데 엉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중에서 쓸 만한 것이라곤 습기에 오래 노출되어 쪼글쪼글해진, 누렇게 변색된 경영도서들밖에 없었다. 그가 기대했던 특허 관련 서류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캐비닛 안을 샅샅이 뒤집어 살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가장 기대했던, 그의 논문이 실린 영문판 화학잡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치열했던 20대와 30대를 짧게 스치고 지나간 영광을 미화할 유일한 흔적이 사라졌다. 방치했던 그의 잘못이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만 그의 젊은 시절도 함께 사라진 기분에 허탈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캐비닛 안을 바라보던 하선우는 손바닥의 먼지를 털었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강주한은 왜 여길 왔을까. 그가 무슨 사정으로 이 한밤중에 추위를 무릅쓰며 부도난 회사에서 밤을 보내고 있는지 정말이지 궁금했다. 휴대폰을 돌려주며 하선우는 물었다.
“여긴 정말 무슨 일로 들렀어요.”
강주한은 대답 대신 받아 든 휴대폰으로 복도를 비췄다. 검은 무언가가 플래시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그는 침대 맡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챙겨 어깨에 가방끈을 걸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어두운 사무실에 남은 하선우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지는 강주한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지켜보았다.
플래시로 바닥을 비추며 걸어가던 강주한은 복도와 벽이 만나는 지점에서 허리를 숙였다. 무언가를 주워 코트에 비벼 닦은 그는 여전히 사무실에 머물러 있는 하선우를 향해 말했다.
“휴대폰 떨어트렸습니다. 여기 있어요.”
하선우는 입술 안의 점막을 꽉 깨물었다. 조금 전 귀신을 본 것처럼 요란 떨었던 모습을 고스란히 들켰던 일만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해 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밀었다. 침대를 함부로 쾅 밟고 넘어선 하선우는 복도로 뛰어나와 강주한에게서 휴대폰을 힘주어 채갔다.
충동적이긴 했지만 회사도 들렀고 찾던 자료의 존재유무도 확인했으니 이젠 돌아갈 일만 남았다. 하선우는 원래 이곳에서 어떻게든 하룻밤 버텨볼 생각이었지만, 조금 전 진이 빠진 이후로 텅 빈 회사에서 밤을 지새울 자신이 없어졌다. 복도에 남아 있는 강주한에게로 가 닿는 신경을 애써 차단하며 하선우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창틀에 손을 얹고 힘주어 몸을 띄운 그는 가볍게 회사 밖 바닥으로 착지했다.
도로와 연결된 보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지만 이후의 계획은 없었다. 날은 추웠고 휴대폰 배터리는 모두 방전되어 있었으며 회사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허허벌판에 세워져 있었다. 하선우는 논밭과 인도의 구분이 따로 없는 도로변을 무작정 걸었다. 얼마쯤 휑하니 트인 길을 걸어갔을 때였다. 서둘러 걸어가던 하선우는 갑자기 몸이 뒤로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몸 좀 데우러 가죠.”
강주한의 손이 하선우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하선우는 사위를 분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빛 속에서 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려 가늘게 눈을 떴다. 몸 좀 데우러 가자니. 이상한 말이었다. 단순히 흘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무엇이 이상한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이상한 말이었다.
“몸을 데워요?”
“도로변에 주차했습니다. 가죠.”
그의 말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섣불리 판단 내리기를 유보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하선우는 무엇보다 강주한에 대한 적의를 호기심으로 억누를 수 있을 만큼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강렬하게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주한이 NnG 사옥을, 그것도 경매에 넘어가버린 사옥을 찾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무실 중에서도 그가 머물렀던 곳은 하선우가 사용했던 사무실이었고 그가 누웠던 곳은 하선우의 간이침대였다.
하선우는 바지 주머니에 주먹을 찔러 넣고 강주한과 일정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그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겉에는 코트 길이의 패턴이 많이 들어간 다운 점퍼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가죽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저쯤 되면 춥기는커녕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날 것 같았다.
비닐을 씌운 더러운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던 강주한의 모습을 상상하면 섬뜩한 동시에 기묘했다. 강주한은 공포체험을 즐길 만큼 스릴을 찾아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다. 혹여 신세를 망친 옛 연인의 침대 위에서만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이상한 수면장애를 앓고 있는 걸까. 의혹의 눈초리로 강주한의 뒷모습을 살폈지만 그가 모르는 사이 그런 괴벽이 생겼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선우는 쓸데없는 잡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강주한은 회사 지리를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지 조경이 잘 꾸며진 큰길로 나가는 대신 공장 뒤편의 작은 보도로 방향을 꺾었다. 캄캄하게 그늘졌던 길 사이로 조금 더 걸어 나가자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강주한의 그림자를 하선우의 발치까지 길게 늘어트렸다. 강주한의 뒷모습이 점점 더 멀어져갈수록 따듯한 빛과 검은 그림자의 경계가 점차 옅어져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뒤따라 걷던 하선우는 불현듯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얄궂게도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곰팡이 핀 간이침대와 먼지 쌓인 캐비닛만 덩그러니 놓인 사무실이 아니라 스탠드 조명으로 어둠을 밝히고 전기난로를 틀어 온기가 도는 정갈한 사무실이 배경이었다. 토요일 저녁, 하선우는 그의 개인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간이침대에 누워 연구자료를 살피며 소박한 행복을 느끼던 그는 잠시 잠이 들었고,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하선우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강주한의 얼굴과 그가 했던 말들을 기억해보려고 애를 썼다. 잠기운 중에 들었던 강주한의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 기억의 회로를 수없이 옮겨 다니며 헤맨 끝에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는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호감을 두려워하는 하선우를 의아하게 여겼다.
하선우는 멍하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도 강주한은 하선우를 찾아오던 순간부터 섹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강주한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피스텔로 끌어들였다. 무지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대담한 선택을 하는 법이니까. 첫 섹스의 기억이 선명했다.
“안 옵니까.”
그때 하선우의 발치가 밝아졌다. 어두워서 길이 안 보인다 생각한 건지 다시 되돌아온 강주한이 휴대폰으로 하선우의 발치를 비춘 것이었다. 하선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떠올린 생각이 좀 병신 같아서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강주한이 서 있는 곳을 지나쳤다.
철문으로 가로막힌 공터가 보였다. 이미 시동을 걸어두어 얼어붙었던 자동차의 엔진 덮개에서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선우는 그 차를 얻어 탈지, 이대로 시내까지 걸어갈지 고민했다.
몸 좀 데우러 가자는 그의 말이 정말 단순하게 차를 마시러 가자는 의미라 할지라도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가 미심쩍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 동안 감정에 수많은 변화가 있어 어제 일이 마치 아주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지만, 그가 느꼈던 감정까지도 희석된 건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은 강주한에게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선우는 강주한을 일별한 뒤에 말도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 10시 20분. 생각보다는 이른 시간이었다. 등가방을 가슴에 안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줘요.”
“할 말 있습니다. 얘기가 깁니다.”
방어적으로 가방을 꽉 껴안으며 하선우는 퉁명하게 말했다.
“그럼 본론만 말해요.”
하선우는 차 문을 향해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차창에 그가 꽉 껴안고 있는 가방이 비쳤다. 사실 조금 전부터 가방 속 노트북이 신경 쓰이던 차였다. 강태한이 하선우에게 자료의 사본을 넘겼음을 알릴 이유는 없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강주한이 알고 있을까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옥에서 강주한과 마주쳐 혼비백산했을 때 뒤로 넘어지는 와중에 노트북이 망가졌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주식 용도로 사용하는 노트북이었다. 하선우는 숨을 멈췄다.
지퍼를 단번에 내린 하선우는 파우치 속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일단 외관상으로는 멀쩡했다. 하선우는 마음을 졸이며 전원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곧 불이 들어왔다. 다행히 노트북은 별다른 이상 없이 작동되었고, 액정이 갈라지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그는 종료도 하지 않고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사옥에서 강주한을 마주쳤을 때만큼이나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전 다녀왔습니까.”
대전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하선우는 경직된 얼굴로 강주한을 보았다.
“아무리 나라도 미행을 붙이진 않습니다. 가방 속에서 티켓 봤어요.”
공터에서 도로변으로 핸들을 꺾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하선우는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보았다. 노트북 파우치 위에 오늘 일자의 대전 시외버스 터미널 티켓이 붙어 있었다.
“연구직 알아보려고 갔다 왔어요. 취업이나 할까 하고.”
아무리 강주한이라고 해도 하선우가 특허심판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리 없을 텐데 지레 찔렸던 하선우는 그가 묻지도 않았던 말을 툭 내뱉었다. 말하고 난 뒤에야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 특유의, 미래를 보증 삼은 잰 척이라는 생각이 들어 후회가 됐다.
“취업 제안 받았나 보군요.”
“아는 형이 밥 사준다고 해서 분위기 보고 왔어요.”
“이미 결정된 게 아니면 괜찮은 자리 마련해줄 수 있습니다.”
“…….”
“외국계 기업이나 정부출연연구기관 같은 곳으로 말해줄 수 있어요.”
하선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어제였다. 강주한의 상박을 잡고 있던 하선우의 손을 떼어내던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듯, 모조리 정리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놓고 왜 하루 만에 달라졌을까.
잠시 후 하선우는 표정을 지운 얼굴로 차갑게 대답했다.
“강주한 씨 입장에서는 그런 거 친절도 아니겠죠. 그냥 말 한마디만 하면 되니까. 그러면 밑에 사람들이 부랴부랴 여기저기 전화 돌리고, 일자리 알아볼 테고, 압력받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없던 자리라도 만들어낼 테니까. 뭐 위에서 시키는데 별수 있나요. 진짜 말… 말 한마디만 하면 되겠네.”
하선우는 잠겨 있는 문고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거지한테 적선하듯 말하지 마요. 우리 그런 말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그들의 바로 앞에서 트럭 한 대가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후방 라이트를 깜빡일 때마다 눈부신 빛이 오랫동안 잔상을 남겼다. 트럭에는 압축된 생활폐기물이 큐브처럼 쌓여 있었는데, 화물의 정량을 초과 적재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고 있었다. 몇 톤 이상은 달릴 수 없는 이차선 도로인 데다가 과적 차량이니 신고를 하면 높은 확률로 단속될 터였다. 트럭은 바로 뒤에서 달려오는 값비싼 외제차가 부담스러웠던지 깜빡이를 켜고 있었다. 반대편 도로에서 달려오는 차가 없으니 추월하라는 의미였다. 핸들을 꺾어 중앙차선을 넘은 차는 과적한 트럭을 지나쳐 한참을 더 달려간 뒤에야 다시 제 차선으로 돌아왔다.
의미 없이 차창에 시선을 두고 있던 하선우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아니면 특허 때문에 그래요?”
코끝을 간질이는 앞머리가 신경 쓰여 옆으로 치워버렸다. 차 안의 적막이 신경 쓰였다.
“아뇨. 특허 때문은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답지 않게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가로등의 개수가 늘어갈수록 도로변의 차량도 함께 늘어났다. 길가를 따라 건물도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하선우는 아무 정류장에나 내려달라고 말하려다 치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강주한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하선우는 대시보드 속의 시간을 노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허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꿀 이유가 없었다. 하선우는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도로 주변이 넓어져 있었다. 눈앞 도로 표지판에 장항IC 글자가 보였다.
“지금 자유로예요?”
“집 앞까지 가겠습니다. 안전벨트 매요.”
차를 돌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의 차는 서울, 김포대교 방향의 차선을 타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강주한의 옆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하선우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어쩔 수 없었다. 자유로를 탄 이상 도로에서 쉽게 빠져나가기는 글렀다.
“분당 가는 길 알아요?”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포에서 경부고속도로 타고 판교 방향으로 가는 거 압니다. 선우 씨 집이 분당 정자동인 것도 알고요.”
“그럼 고속도로 말고 강변북로 타고 반포에서 내려줘요. 거기서 버스 타고 갈 테니까. 같이 있는 거 거북해서 그래요.”
강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는 이미 예상하던 바였기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하선우는 그와 감정적으로 격의 없이, 스스럼없이 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안전벨트를 오른손으로 꽉 당겨 쥔 하선우는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와 자신이 오늘 부도난 회사에서 마주친 일은 우연일지라도, 강주한이 회사를 찾아온 일은 절대 우연일 리가 없었다.
“나한테 할 말 있죠?”
룸미러를 통해 잠깐 하선우를 쳐다보던 강주한의 시선이 다시 도로를 향했다.
“강주한 씨가 부도난 회사를 찾아온 거요.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거죠?”
강주한은 천천히 침을 삼켰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선우는 강주한이 긴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지만.”
가볍게 한숨을 쉰 강주한은 핸들을 잡은 손가락을 두드리며 덧붙여 말했다.
“왜 이런 불편한 접이식 침대에서 궁상맞게 잠을 잘까. 궁금했어요.”
“그런 게 궁금했어요?”
하선우의 한쪽 눈썹이 어이없다는 듯 바짝 솟았다.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선우 씨 방식이 이해가 안 갔거든요. NnG를 두고 분업화가 안 된 구멍가게 수준의 회사라고 쓴소리도 했었죠.”
하선우는 인내심을 동원해 그의 말을 들었다. 진짜 목적은 숨긴 채로, 빙 에둘러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려는 그의 이야기를 참아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강주한이 무척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들어 하선우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들을 참아냈다.
“어제 내게 하선우 씨가 했던 말 중에서 이해가 안 갔던 말이 있었습니다. 내가 NnG를 부도냈다는 말이요. 솔직히 말하면 모욕적이라고 느꼈죠.”
하선우는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왜요?”
“최종부도 처리되기까지 NnG의 재무상태는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부도 전의 상황은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하락하는 근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죠. 어음만기가 거부된 것도 계좌가 닫혀서 그랬던 걸로 알고 있었고요. 하지만 선우 씨는 내가 고의로 그랬다고 오해하고 있더군요.”
“그럼 아니라고요?”
하선우의 강한 목소리에 강주한은 인상을 썼다. 그의 침묵을 향해 하선우는 다시 물었다.
“그럼 아니라는 거냐고요.”
강주한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느린 호흡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운전대를 잡지 않은 왼손으로 부드럽게 관자놀이 부근을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지금부터 그가 하게 될 말이 그 자신에게 부담이 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오늘 낮에 NnG 주거래 은행의 지점장을 만났습니다.”
그는 뻣뻣한 투로 운을 뗐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속에서 무언가가 정리되지 않은 투였다. 하선우는 예상치 못한 말에 충격받은 얼굴로 강주한을 향해 완전히 몸을 틀었다.
“은행권에 동반성장 결제시스템이라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2년 전부터 홍보를 시작했고 올 초에 도입한 시스템이죠. 중소기업이 사채 시장에서 어음을 할인하는 규모를 고려해… 단순히 말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동반성장을 돕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결제시스템입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히터 바람 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하선우는 손을 뻗어 히터를 완전히 꺼버렸다. 그의 말이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왜요. 부도랑 무슨 상관인데요.”
“NnG와 엘텍전자가 동반성장 결제시스템에 협력관계로 가입을 했습니다. 은행은 중간에서 모니터링을 했죠.”
“금시초문인 걸 보면 이사님 결정이거나 김주안 부장 권유였겠네요.”
“아닙니다.”
“그럼요?”
“올해 초에 소개했던 컨설턴트 팀 기억합니까?”
하선우는 눈을 굴렸다. 정작 하선우는 시생산과 연구개발에 정신이 팔려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경영전문 컨설턴트 팀을 소개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사가 전적으로 그들을 접대하고 컨설팅을 받았기에 식사를 한 번 같이 한 것 외에는 업무적으로 부딪칠 일이 없었다.
“예. 기억합니다.”
“회계와 재무 파트를 전체적으로 업데이트하도록 제안하면서 동반성장 결제시스템에 가입을 유도했더군요.”
“유도요?”
“대시보드 안의 자료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읽고 판단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조수석을 향해 몸을 틀었다. 오른손을 뻗어 글러브 박스를 열고 그 속에서 파일을 꺼내 하선우에게 건넸다. 조수석의 조명을 켜고 다시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그는 룸미러를 통해 틈틈이 하선우의 얼굴을 살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막연하게나마 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는 걸 알 것 같았다.
그가 보여준 서류는 신문기사와 지급제시 이전 기간의 은행 기록이었다. 경제 일간지의 기사 제목은 <올해 ‘동반성장 결제시스템’ 본격 도입. 대기업 협력으로 中企기업 ‘숨통’ 트여>였다. 하선우는 기사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동반성장 결제시스템은 ‘제5차 동반성장 기본계획’ 중의 하나이다. 은행으로선 대출 수요 확대에 따른 수익 증대가 예상되어 안정적인 대출 수익원이 생기는 셈이며…… 대기업이 1차 협력업체에 상품 가입을 재촉시키겠다는 취지다. ……대기업이 1차 협력업체에게 발행한 외상 매출이 10% 이상이면 다음 해 동반성장지수 산정 시 가점을 줄 수 있으며, 반대로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 동반성장지수 산정 시 벌점을 매길 수 있다. 이로 인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권력구조로 인한 새로운 종속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하선우는 반복해서 같은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반대로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 동반성장지수 산정 시 벌점을 매길 수 있다.
미간 사이의 주름이 깊게 패도록 신중하게 기사를 읽던 하선우는 숨소리 하나 없이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곳에는 은행에서 제공한 자료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결제시스템의 도식표였다. 동반성장 결제시스템의 협력사별 자금 흐름도 및 단계별 종합평가 모니터링시스템.
시스템의 이름만큼이나 도식화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워 보였다. 하선우는 난수표를 들고 해독해야 하는 암호 같은 그림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노려보다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눈을 들어 강주한의 옆모습에 시선을 둔 하선우가 말문을 열었다.
“우선적으로 알고 싶은 게 있는데.”
하선우의 손안에서 서류가 구깃하게 구겨졌다.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 동반성장지수 산정 시 벌점을 매길 수 있다. 이 말이… 신용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NnG에도 영향을 미쳤고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런 평가는 누가 하는데요.”
하선우는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협력업체를 관리하는 부서가 따로 있습니다. 단계별 종합평가 자료는 메일로 전송하겠습니다. 저도 오늘에서야 알게 돼서 자료가 부족…….”
“하긴.”
하선우는 냉정한 목소리로 강주한의 말을 잘랐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끝없이 펼쳐진 한밤중의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던 그가 짧은 침묵을 두고 덧붙여 말했다.
“은행에서도 모르는 걸 강 전무… 아니 강 사장님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선우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강주한과의 대화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손안에서 구겨버린 파일 중에서 강주한이 건넨 마지막 서류를 꺼냈다.
NnG가 사업을 접기 전에 민간기업 제출용으로 발급한 평가서였다. 투자부적격 등급이 매겨진 NnG의 보고서 내용을 읽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왜 회사가 부도났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명확한 이유는 여전히 알지 못했고, 책임의 소재를 물을 만한 대상조차 불분명했다.
동반성장을 말하고서 대기업에 유리한 판을 짜는 결제시스템을 만든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익추구에 솔직했던 대기업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아니면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서류에 결재한 이석의 탓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컨설턴트 팀을 보낸 강주한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 매뉴얼대로 벌점을 매긴 협력업체 관리부서의 직원을 탓해야 하는지.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음표였다. 죽어나간 피해자는 분명히 있지만 한 번에 너무 많은 화살이 날아와 꽂히는 바람에 정확히 누가 치명상을 날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히터를 꺼놓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차 안의 공기가 사늘하게 변했지만 둘 중 누구도 추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한남동에서 내려주세요. 버스 타고 가겠습니다.”
하선우는 지나치게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강경한 요구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설득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는 멍하게 도로를 바라보며 생각의 늪에 빠져 있었다. 강주한은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이따금씩 하선우의 얼굴을 살폈다.
어떤 참사나, 복구 불가능한 수준의 재해가 일어날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조사관처럼 엄격하게. 그러나 하선우의 멀쩡한 얼굴 거죽 밑으로 이미 거대한 싱크홀이 발생해 있는 것 같았다. 그 공동空洞을 메워버릴 시간을 오랫동안 방치했음을 깨달은 강주한은 처음으로 마음이 썼다.
한참을 달려 강변북로를 지나 한남동의 대로변에 차를 세웠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 밖으로 나간 하선우는 길게 늘어선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어깨에 걸친 가방을 추슬러 메며 전광판 속 버스 시간을 확인하면서도 그는 끝내 강주한이 차를 주차한 방향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분당으로 향하는 버스는 만차였다. 빼곡하게 들어선 사람들 틈에 자신을 욱여넣으며 건조한 눈길로 창밖을 응시하는 하선우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강주한은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