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상투어에 둘러싸인 남자 (1)
“내가 사는 건데 좀 팍팍 먹어라. 사는 사람 생색 좀 내게.”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을 하선우 앞으로 덜어준 김주안은 빈 불판에 생고기를 올렸다. 삼겹살 위로 후추와 소금을 솜씨 좋게 뿌리며 그녀는 핀잔을 한마디 더 보탰다.
“왜 이렇게 못 먹어. 고기 싫어? 회 먹을 걸 그랬나?”
“됐어.”
“그럼 잘 좀 먹든가.”
부추절임을 깨작깨작 먹고 있던 하선우는 마지못해 고기 몇 점을 집어 커다랗게 쌈을 쌌다.
“내가… 너하네 고기도 다 어더머고 벼일이네.”
입안을 가득 채운 고기쌈을 간신히 넘긴 하선우는 물었다.
“이젠 먹고살 만한가 봐?”
“그럼, 취업한 지 좀 됐잖아. 소고기도 아니고 고작 삼겹살 하나 못 사줄까 봐?”
“일은 할 만하고?”
“재미없고 마감 때 죽어나는 것만 빼면 거래처도 대부분 오래됐고 안정적이야. 내가 거기서 막내 짬밥인 것만 봐도 뻔하지.”
“총각은 있어?”
“쌈빡한 연하도 연상도 없단다. 내 위로 노처녀만 셋이잖아.”
깻잎 위에 삼겹살과 파채를 올리고 쌈장과 구운 마늘까지 올린 그녀는 커다란 입안에 쌈을 보기 좋게 밀어 넣었다. 입술에 칠한 립스틱이 조금도 번지지 않는 모습이 꼭 TV프로그램 속 ‘먹방’을 찍는 연예인 못지않았다. 그녀는 부지런히 다음 쌈을 싸며 물었다.
“소주나 더 깔까?”
“그래.”
“이모! 참이슬 두 병이요.”
NnG가 부도난 뒤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김 부장은 몇 번의 고배를 마신 뒤 판교 근방의 세무사 사무소에 취업했다. 이미 소주 한 병을 비운 그녀는 살짝 취기가 올라 있는 상태였다. 하선우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그녀는 말했다.
“우린 각자 플레이해. 회식도 나 입사했을 때 딱 한 번 하고 없어. 다른 건 다 좋은데 그런 건 좀 심심해. 다들 골드미슨데 심심하지도 않나?”
“너처럼 회식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어. 집에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 그럼 넌 집에서 뭐하는데?”
하선우는 대꾸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도 하선우의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에둘러 물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뭐했고?”
“TV 봤어. 나 좋아하는 히어로물 많이 하더라.”
젓가락을 쪽쪽 빨며 김주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녀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 돈 많다던 아가씨랑은 어쩌고.”
“응?”
“너한테 명품 사다 안기던 아가씨 있었잖아. 자동차 한 대값 우습게 나가던 옷 사다 바치던 아가씨. 어떻게 됐어? 계속 사귀는 것 같지는 않은데. 헤어졌어?”
대답하기 싫은 말만 얄밉게 골라 물으며 그녀는 오랫동안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하선우는 소주를 단번에 비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야, 하선우 술 좀 하네. 취기가 오른 그녀는 호전적으로 소리치며 웃었다.
그녀는 그간의 사정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한 말이겠지만, 김주안의 말로 인해 하선우는 지금껏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피스텔을 팔고 분당의 아파트로 이사 오며 그는 대부분의 짐을 집으로 가져왔다. 베란다 구석에 쌓아놓은 박스 안에는 한 벌에 소형 자동차 한 대값이 훌쩍 넘는 옷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그 외에도 값나가는 선물들이 많았다. 구두와 가방, 넥타이, 사소하게는 만년필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빈곤한 와중에도 그는 강주한의 선물을 팔아치우지 않았다. 중고로 팔아 이윤을 남기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폐기처분해버리기에는 물건의 어마어마한 가격이 하선우의 결심을 매번 막아섰다. 정리를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그가 줬던 선물들을 잊었고, 박스 위에는 먼지만 쌓이게 되었다.
“버려야지.”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선우는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강한 알코올맛이 불쾌했다. 그는 술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로 도피할 만한 상처를 갖고도 술자리를 전전하는 대신 온라인 게임 속으로 도피했던 그였지만 근래는 그마저도 시큰둥했다. 며칠 동안 게임톡으로 길드원들의 연락이 수시로 오곤 했다. 하지만 컴퓨터를 끄고 휴대폰에 설치한 앱 하나만 삭제하면 차단기가 내려가듯 끊어지는 관계였다. 길드원들이 알면 섭섭하겠지만 그는 지금 당장은 게임에 접속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선우의 변화를 가장 반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PC방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던 아들이 마음을 잡고 다시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데다가 최근 들어 하선우 앞으로 심상치 않은 선물들이 배달되고 있었다.
소믈리에가 집 안까지 직접 와인을 출장 배달하는가 하면 홍삼과 커피, 자연산 송이버섯, 고급 한우 선물 세트 따위가 집 앞으로 배송되었다. 모두 임경호가 보내온 선물이었다.
그는 정 많고 다정한 친구라도 된 양 하선우와의 사적인 친분을 강조하며 짧은 자필 편지도 선물에 첨부해 보냈다. 임경호가 아닌 그의 비서가 대필한 편지일 게 분명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대통령 훈장이라도 보관하듯이 소중하게 코팅해 사진첩 속에 꽂아 넣었다. 하선우는 이와 비슷한 느낌을 이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추억의 결말은 어머니와 자신에게 쓰라린 아픔을 남겼다.
회사가 최종부도 처리되던 날 어머니는 강주한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액자 속에서 꺼내 아파트 놀이터에서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당시의 교훈을 어느새 잊어버린 어머니는 아들이 다시 출셋길에 올랐다며 이곳저곳에 자랑을 하고 있었다.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채권자의 빚독촉 전화가 떠올라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던 하선우의 표정이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 미묘하게 변했다.
“나 잠깐 전화 좀.”
뒷골목으로 나간 하선우는 가만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무정자남.
하선우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강태한의 이름 대신 무정자남으로 그를 연락처에 저장했다.
-칼침 맞고 뒈졌을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네.
하선우는 무정자남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강태한에게 성심성의껏 대꾸해봤자 그는 어차피 하선우를 업신여길 테고, 대답하지 않아도 업신여길 테니 기운 빼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았다.
-오늘도 안신에서 선물 보냈다며.
“응.”
-안 봐도 그려지는군. 대기업 오너가 보내는 선물이라고 굽실거릴 인간들이. 출셋길이 열렸다고 환상에 빠져 있겠지.
“…그 정도는 아니야.”
-경호 형 특허전담팀 꾸렸다고 들었어. 엘텍 IP센터에서는 여전히 네 특허 무효화 진행 중이고. 3일 남았어. 그 전에 강주한이 어떤 액션도 안 취하면 안신에 도장 찍는 거다.
“응.”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하선우의 태도가 못내 마뜩찮았는지 전화 건너편에서 쉴 새 없이 떠들던 강태한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갑자기 심술 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매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어.
가끔은 하선우도 강태한의 개소리를 넘어갈 수 없을 때가 있었다. 하선우는 참담한 일을 고백하는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얼굴을 숨기며 말했다.
“적당히 좀 해라. 피곤해.”
-너 사본 언제 없앨 거야.
“그건 이미 나한테 넘어왔을 때 끝난 거래잖아.”
건너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흥분한 콧숨소리.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하선우는 잠시 겁을 상실했다.
“아니면 내 반쪽짜리 특허 다시 돌려주든가.”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그러나 도취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강태한이 전화를 끊고 하선우의 앞으로 달려올 것 같았다. 자존감을 회복해보려 덤벼들었다가 사달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농담이었어. 정말로.”
무골로 만들어진 연체동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하선우 자신이었다. 미친개에게 물리느니 자존심 한 번 버리는 게 대수냐 싶었다. 납작 엎드린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던 강태한의 숨소리가 누그러지는 것이 곧바로 느껴졌다.
-하선우. 매 좀 자초하지 마라. 진짜.
“알았어.”
-사본 없애. 기한 준다. 이번 달까지 안 없애면 정말 칼침 맞는다.
“알았어. 이번에 특허계약 맺는 대로 정말 없앨게.”
사본이야 USB에 따로 복사해서 몰래 보관하면 그만이었고, 머릿속에 암기해놓은 건 누구도 빼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강태한도 모르는 바가 아닐 것이다. 미지근한 의심을 남긴 채 통화를 끊었다. 하선우는 강태한과의 통화를 마친 뒤에는 늘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찾고 싶을 만큼 힘이 빠지곤 했다. 하선우를 천대하는 그의 태도에 맞서 그 자신을 지켜낼 만한 기운이 그에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선우는 왠지 뻐근한 어깨를 주물거리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는 그사이 익숙한 얼굴이 한 명 더 늘어 있었다. 개발팀의 윤 대리였다. 판교에 사는 그는 김주안의 전화를 받고 지금 막 도착한 참이었다. 더는 윤 대리로 부를 일이 없었지만, 그를 호칭 대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낯설어 어색해하는 하선우에게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하이고, 하 사장님. 꼴이 왜 이래?”
그는 웃는 낯으로 빈정거리며 김주안과 하선우 사이에 의자를 끌어 앉았다.
“잘 차려입고 다니던 양반이 이게 뭐야? 왜 혼자 부도난 티는 다 내고 다녀요.”
“내 옷차림이 어때서요.”
하선우는 자신의 티셔츠를 당겨 훑어보곤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윤 대리는 얼굴 좋아졌네요?”
“좋아지긴요. 살찐 거지. 그리고 이젠 윤 대리 아니에요. 윤성우라고 불러요.”
“하긴, 나도 하 사장은 아니지. 그냥… 형이라고 불러요. 선우 형.”
씁쓸하게 웃으며 하선우는 윤성우의 자리에 수저를 세팅했다. 하선우의 앞에 놓인 고기를 쓸어 빈 접시 위에 담으며 윤성우는 말했다.
“이사님은요? 안 와요?”
윤성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주안이 수저를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깜짝이야.”
“야, 내 앞에서 그 새끼 이름 꺼내지 마.”
곰 같은 덩치를 움츠리며 놀란 눈을 끔뻑거리던 윤성우가 억울한 표정으로 하선우를 돌아보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요. 입모양으로 하소연하는 그를 보며 애써 웃음을 유지하던 하선우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등짝으로 김주안의 매서운 손이 날아온 것이다.
“아아…파!”
“너 이사랑 아직도 연락하지.”
“거의 안 해.”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안 해? 하긴 한다는 거야? 넌 속도 없냐?”
김주안은 금방이라도 험한 말을 내뱉을 것처럼 거칠게 화를 냈다. 고작 몇 백만 원과 몇 번의 룸살롱 대접에 일을 소홀하게 처리한 이석에게 하선우 이상으로 실망한 그녀였다.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며 윤성우는 냉큼 집게를 들어 삼겹살을 뒤집었다.
“누가 들으면 엄청 반가워서 연락받은 줄 알겠네.”
“아예 받질 말았어야지. 이석 연락을 왜 받아줘?”
“도일 형 미국 간대서. 그거 알려준대서 전화받았어.”
“아아, 그 얘기?”
“넌 알고 있었어?”
“우리끼리는 알고 있었지. 근데 그걸 제가 왜 전해줘? 어지간히 너한테 말 붙이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뭐래?”
“잘 사냐고 묻고 게임 그만하라고 잔소리하더라.”
“웃겨? 저 인생이나 잘 살 것이지.”
술에 취한 김주안의 목소리가 컸다. 맞장구를 치고 싶지 않아 하선우는 자신의 잔에 묵묵히 술을 따랐다.
“넌 이사가 밉지도 않냐?”
하선우는 대꾸 없이 윤성우의 빈 잔에도 술을 따랐다.
“밉겠죠, 당연히.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사장님. 아니, 선우 …형이었을 것 같은데.”
새로 바뀐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아 어색한 표정으로 윤성우는 말했다.
“나라면 형이고 뭐고 고소했어요.”
“그러니까. 하선우 쟤는 너무 물러.”
김주안과 윤성우가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그는 잔을 들었다. 소주의 쓴맛에 인상을 쓰던 그는 대리인의 사기행각으로 이석을 고소하라고 조언했던 누군가가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부도의 책임을 모두 이석의 탓으로 돌릴 수 없고, 그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있었지만, 그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하선우는 수십 번도 더 생각했다. 이미 자신의 믿음을 저버린 이석에게 신의를 지킬 필요가 있었을까. 이석을 고소하고 회사와 자신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했으면 어땠을까. 결국 그가 한 선택은 이석은 지켰지만, 정작 자신이 지켜야 하는 회사에 대한 의무는 저버리게 된 꼴이었다. 아니, 결론적으로 지켜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전 강주한을 만나 듣게 된 이야기가 목구멍 속을 점하고 있었다. 기침이라도 하면 금방 쏟아낼 만한 위치에 턱 하니 걸려 있었지만, 그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말을 꺼내면 회사의 부도가 이석의 부정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회사 사람들이랑 연락해?”
김주안의 질문에 하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넌 해?”
“아니. 난 안 하는데 성우는 두루두루 하더라. 사무실 사람들 말고도 생산공장에서 일하던 파트장이랑 생산장이랑도 연락해.”
“울산 내려가 있는 동안 아저씨들이랑 술 마시러 다니느라 친해져서요.”
“그래? 어떻게 지내신대?”
하선우는 그간 회사 사람들의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죄책감 때문에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주안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파트장님은 구직 중이고, 그룹장은 해충방역 회사에 취업하셨대요.”
“해충방역 회사? 아니, 왜 그 좋은 기술을 썩히고 바퀴벌레 잡는 회사에 취직하셨대?”
“요즘 세상에 취직이 쉽나요?”
윤성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김주안의 빈 잔에 술을 따르던 하선우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지만, 그는 곧 자연스럽게 자신의 빈 잔에도 술을 채웠다. 술을 입안에 털어 넣은 김주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하선우를 바라보며 말을 툭 던졌다.
“안 그래도 후회된다고 성우한테 푸념한다더라.”
“뭐라고 말하는데?”
“우리도 진즉 산원테크로 이직할 걸 그랬다고.”
아, 정말, 술 취했어요? 윤성우는 하선우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말을 급히 막으려 손을 뻗었다. 김주안은 자신의 입을 막으려는 윤성우의 팔을 잡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야! 선우도 알 건 알아야지. 우리 잘나갈 때야 뭐가 아쉬웠냐? 공장장이랑 금형 설계자 NnG에서 경쟁회사로 옮길 때 뒤에서 무지하게 씹어대기나 했지. 욕했던 것들이 지금은 제일 부러워한다더라. 어차피 NnG 부도나면서 산원테크 대상으로 진행하려던 소송도 흐지부지됐잖아. 영업비밀을 침해했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어차피 걔들은 더 좋은 조건으로 회사 옮겼고 남은 사람들은 지금 손가락만 빨고 있잖아. 솔직히 걔들은 운 더럽게 좋은 거지. 용한 무당한테 점이라도 봤나? 부도날 걸 미리 알고 산원으로 용케 옮겨 탔어! 에이씨! 나는 퇴직금도 다 못 받았는데! 그나마 받은 것도 석 달 만에 간신….”
“어허, 목소리 좀 줄여요!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요, 쪽팔리게. 언제 이렇게 취했어요. 사장님. 주안 씨 말은 그냥 흘려들어요.”
“몰랐어? 원래 상처는 가까운 사람이 더 주는 거야, 이 새꺄. 야, 윤성우, 이거 놔…. 어쭈!”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하선우는 술잔으로 입가를 가리며 무안한 낯으로 웃었다.
윤성우의 우려와 달리 김주안의 비난은 하선우에게 상처를 주지 못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던 것이다. 3차 만기일이 도래했던 날,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최종부도를 선언했던 오후가 떠올랐다. 그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 일자리를 잃고 한순간에 퇴직금도 없이 실업자가 된 직원들과 주식으로 피해를 입은 주주들이 임원진을 향해 쏟아내던 원망과 원색적인 비난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깟 특허 하나가 뭐라고.
그는 쓴 술을 단번에 비웠다. 하선우는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다시 홍콩을 떠나던 그날로 돌아가 강주한이 제안을 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냐고. 아마도 자신은 강주한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선우는 여전히 자신의 자존심이 중요했고,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비극적인 감정에 심취한 비련의 주인공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몇 번째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어떤 상실감을 느낄지, 강주한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지 몰라 고민은 했겠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걸 잃었고 의도치 않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 * *
하염없이 걷고 싶어 그는 일부러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정류장에서 내렸다.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거리였지만 한파주의보가 내린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잿빛 벽돌이 깔린 보도와 대로변 위로 바람이 칼춤을 추듯 불었다. 고작 소주 한 병 마셨을 뿐인데 진한 취기가 올랐다. 잎을 잃은 헐벗은 가로수에 등을 기대어 간신히 선 그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려보았다. 넓은 보도 위를 지나가는 사람은 반듯한 옷차림의 직장인들뿐이었고 그마저도 서로를 앞질러 가기 바빠 보였다. 모두가 하선우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는 취기에 둔해진 손으로 더듬거리며 두꺼운 외투의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돌돌 말린 이어폰 줄을 풀어 귀에 꽂고 그는 휴대폰의 음성 파일을 재생했다.
‘임정호 장관님 챙긴 돈이 얼…데요. 우리 돈 좀 씻어 달라카소. 몬 …씻음 옷 벗…야제.’
중년 남성의 목소리 중간중간 화이트 노이즈가 뒤섞여 있었다. 잡음이 많았지만 목소리가 구분이 가지 않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선우는 내용을 정확하게 숙지해두려 일부러 시간을 들여 타이핑하고 암기까지 해두었다. 위험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파일의 내용을 숙지하는 이유를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입속으로 내용을 되뇌며 의미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하선우의 눈에 그가 서 있는 방향으로 곧장 다가오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들어왔다. 숨을 멈추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올 때까지 쳐다보다, 마침내 남자가 자신의 앞을 지나간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씨바… 놀래라.”
입에 붙지도 않는 욕이 절로 튀어나오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다. 근래 하선우의 일상은 안도와 긴장의 반복이었다. 강태한의 자료를 손에 넣은 이후로 그는 늘 불안에 시달렸다. 하선우는 강태한의 저주대로 뒤에서 뻑치기를 당하고 휴대폰을 빼앗기거나, 납치를 당해 섬에 팔려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놀라기 일쑤여서 작은 일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가 PC방 출입을 끊은 데에는 게임에 흥미가 사라진 이유도 있었지만 강태한의 협박 탓이 컸다.
두려움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던 하선우는 휴대폰 알람음에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 상단에 어머니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보나 마나 임경호로부터 무슨 선물이 도착했다는 종류의 메시지일 게 뻔했다.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고 메시지를 확인하는 대신 그는 주머니 속에 휴대폰을 집어넣어버렸다. 대신 그는 영어단어를 암기하는 고등학생처럼 녹취록 속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파트 단지로 어슬렁어슬렁 들어섰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고등학생 무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하선우는 집으로 가는 호수의 번호를 눌렀다. 하나, 둘 시커먼 머리의 땀내 나는 학생들이 내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하선우가 지친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그를 반긴 것은 문 앞에 쌓여 있는 빈 박스였다. 모두 임경호가 보낸 선물을 포장했던 포장지였다. 고가의 내용물만큼이나 포장도 화려해서 선물을 풀고 나면 쓰레기가 저렇게 가득 쌓이곤 했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건 백수인 하선우의 몫이었다.
“귀찮게.”
인상을 팍 쓰며 문 앞에 쪼그려 앉은 하선우는 켜켜이 쌓아놓은 재활용 박스를 보았다. 종이박스 외에도 그 속에는 혼례함으로 사용해도 될 것 같은 널찍한 나무 궤짝도 있었다. 갖다 버릴 생각을 하니 기운이 빠졌다. 손을 비벼 먼지를 털며 일어난 하선우는 못마땅한 얼굴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놀란 하선우가 뒷걸음질 칠 새도 없이 조심스럽게 현관 구석으로 하선우를 몰아세운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전화했어요?”
어머니는 복장을 찧을 노릇이라는 얼굴로 하선우를 보았다.
“내가 얼마나 전화를 했는데!”
새된 고함을 조그맣게 내지르며 하선우를 윽박지르던 어머니는 갑자기 거실 너머의 눈치를 보았다.
“진동으로 해서 몰랐어요. 무슨 일 있어요?”
현관이 복도식이었기에 거실이 바로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거실 너머에서 들려왔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보통 이맘때쯤이면 9시 뉴스도 끝나 어머니는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고,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며 남은 하루를 끝마칠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거실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채권자라도 와 있는 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하선우는 급하게 신발을 벗고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 패딩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마주친 얼굴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을 안겼다. 이를테면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칼을 든 살인마와 마주친 공포 비슷한 기분이었다.
술이 갑자기 확 깨며 심장이 미친 듯이 쿵, 쿵 뛰었다. 물론 강주한은 칼도 총도, 무기가 될 만한 어떤 것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하선우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모든 신경이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졌다. 세상이 그의 앞으로 갑자기 확 쏠리고, 입안은 물론 혀까지 바짝 말라비틀어지는 느낌에 그는 쩝, 소리를 내며 간신히 침을 삼켰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강주한. 모두가 하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마비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하선우는 등을 가볍게 밀치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상기된 표정의 어머니가 마치 복화술을 하듯 하선우에게 속삭였다.
“뭐라도 좀 해. 한참 전에 오셨어.”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는 말했다.
“회사 사람들 좀 만난다고 연락을 못 받았대요. 원래 이렇게 전화를 못 받는 애가 아닌데. 근데 또 뭘 이런 걸 사오셨대요.”
입술을 가리며 뻣뻣한 웃음을 흘린 어머니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이 선물로 가져온 것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말해주었다.
“숙성 한우래. 느이 첫째 형 좋아하는 와인도 가져오셨고. 좀 가져가라고 해야겠다. 아, 말씀들 나누세요.”
어머니의 손길에 등 떠밀린 하선우는 아버지와 강주한 사이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와 재회하는 방식은 왜 늘 상식을 벗어날까. 명함 하나로 그가 넘지 못할 대한민국의 문턱이 있을까. 칼보다도 강주한 이름 석 자의 효과는 훌륭했다. 심지어 그는 하선우의 부모로부터 넘치는 환대를 받고 있었다. 과하게 긴장상태에 머무르는 아들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말했다.
“뭐하냐, 선우야. 앉아라.”
하선우의 몫으로 가져다놓은 방석을 가리켰다. 하는 수 없이 하선우는 아버지가 가리킨 자리에 간신히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왜 여기 있는 거지? 형편없이 흔들리는 시선을 내리깔며 하선우는 앞에 놓인 술을 벌컥 삼켰다.
방 네 개짜리 평범한 아파트에 손님을 따로 접대하는 접객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실에 있는 4인용 소파는 TV를 보는 용도로 구매했기에 서로 마주 보며 얘기를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거실 바닥에 방석을 깔고 다과상을 놓는 것으로 강주한에 대한 예를 다하기로 했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는 눈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 셋을 의사로 만들고 어디 가서 기 한 번 죽어본 적 없는 권정옥 여사였다. 그런 어머니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딘지 뻣뻣하게 구는 하선우와 말이 없는 강주한의 눈치를 번갈아 살펴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공손한 태도가 하선우의 심장 속에 핀을 찔러 넣는 것 같은 아픔을 남겼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강주한, 그리고 하선우. 각자가 서로에게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가운데 침묵에 책임감을 느끼는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뿐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 음, 음. 몇 번이나 목청을 돋웠다.
“저… 선우야 강주한 사장님께서 사업차 오셨다고.”
“그래. 그러셨대. 들어올 때 내가 말했지? 선물도 사오셨다고.”
하선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주한이 사온 선물 바구니를 노려보았다. 별로 수고롭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서를 시켜 주문만 하면 됐을 테니까.
“밤 10시도 넘었는데? 이 시간에?”
하선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도로록 움직여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분침은 어느새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업하는 사람이 급한 용건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당황한 어머니가 눈을 부릅뜨며 하선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노부부 집에 빌붙어 사는 백수 아들을 찾아, 그것도 밤 10시에 찾아오는 결례를 범할 만큼 분초를 다투는 다급한 사안이 무엇인지 하선우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강주한이 신비한 존재일지 몰라도, 하선우에게 더 이상 그는 신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강주한에게 거는 기대와 그의 앞에서 벌이고 있는 한 편의 촌극이 안쓰럽기만 했다. 이게 다 못난 자신의 탓이란 것도 씁쓸하기만 했고. 하선우는 한숨을 쉬며 술을 빈 잔에 따랐다.
“일단 좀 드시면서 얘기하세요.”
어머니는 각자의 앞에 놓여 있는 다과상을 가리켰다.
“전통주도 있는데 드실래요? 안동에 있는 장인이 직접 담근.”
“아닙니다. 차를 가져와서 운전해야 합니다.”
그는 결명자차로 만족한다는 듯 품위 있게 웃으며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소리 없이 마셨다. 강주한의 준수한 얼굴이 칠십에 가까운 여자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하선우는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모두 비워버리고 빈 잔에 술을 다시 채웠다.
그는 부모님이 곤란할 걸 알면서도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 농담 같은 걸 떠들고 싶지 않았다. 김주안과의 술자리로 이미 술기운이 올라 있던 그였다. 그의 감정을 통제하는 기능은 점점 더 무뎌져가고 있었다. 강주한이 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와 마주 보고 있으면 그의 시선이 속을 다 갉아먹는 것 같았다. 꽁꽁 감춰놓은 원초적인 감정이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올까 봐 하선우는 마음의 문을 다시 닫아걸었다.
이제 분위기를 이끄는 것은 아버지와 강주한 두 사람이었다. 대화는 엘텍재단 산하 의료기관인 현성병원과 그곳에서 근무하는 둘째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엘텍장학재단 사업으로 뻗어 나갔다. 강주한은 자신의 사업 분야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새해에는 의료 분야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교육 장학사업, 비영리법인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어머니 소유의 아트홀 티켓을 드리겠습니다. 남북한 작가들을 초대해서 열린 한국화 전시회니 흥미로울 겁니다. 3층의 레스토랑 식사권도 드릴 테니 식사도 즐겁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러실 필요까진.”
“괜찮습니다.”
“에휴, 에휴. 엘튼에서 좋은 일 하시네.”
손사래 치며 부담스러워하는 부모님을 앞에 두고 강주한은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없이 묵묵히 차만 마셨다.
우리 부모님에게 환심을 사려고 작정하고 끼를 떠는구나.
가늘게 뱁새눈을 뜨고 강주한을 노려보던 하선우는 강주한이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칠까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남북한 작가들을 초대해 작품전시회를 열고 장학사업을 하고 비영리법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일은 분명 멋진 일이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들이 비리로 얼룩져 있지만 않았다면, 엘텍이란 이름에 먹칠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선우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척 휴대폰을 꺼냈다. 암전된 화면을 클릭하자 실행 중인 뮤직앱이 떴다. 여전히 녹취록이 재생 중이었다. 이어폰을 꽂아두었기에 밖으로 음성은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괜스레 심장이 찌릿한 느낌이 있었다.
앱을 종료시키고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하선우는 강주한을 살펴보았다. 그는 밤으로 만든 작은 한과를 먹고 있었다. 맛이 좋다는 말로 어머니의 기분을 띄우기까지 했다. 그가 기울이는 그런 사소한 노력들이 하선우의 눈에는 너무도 이상하게 보였다. 뭐가 달라진 걸까. 이전과는 다른 근소한 차이들이 눈에 보이자 초조함이 치밀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강주한을 흐뭇하게 지켜보기까지 했다.
“차린 것도 없는데 잘 드시네.”
차린 게 없다니.
예사롭게 덧붙인 말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형편치고는 너무 거품이 많이 낀 말이었다. 최고급 멜론과 일본 장인이 만들었다는 화과, 고급 한과가 소담하게 담겨진 상은 모두 임경호가 보낸 선물로 채워진 다과상이었다. 임경호가 알면 기절할 일이었다. 그가 보낸 선물로 강주한을 대접하는 아이러니가 우스워 하선우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이미 한바탕 취해 있던 하선우는 감정조절이 쉽지 않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입술까지 손바닥으로 틀어막아 큭큭거리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과일을 하나씩 물고 있던 그의 부모님이 하선우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흘깃, 강주한의 눈치를 보았다.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은 어머니는 귀신 들린 놈 쳐다보듯 하선우를 보았다.
“선, 선우야.”
“왜요, 엄마. 흐흐.”
“뭐가… 그렇게 우스워서 그래.”
가늘게 갈라진 심약한 목소리로 어머니는 하선우를 조심스럽게 타박했다.
“왜 엄마는 멀쩡한 아들 귀신 들린 놈 보듯이 봐요.”
“뭐, 뭐?”
“귀신 들렸으면 다행이게요. 부업으로 박수무당 뛰었지. 하 도령으로 살면서 내 팔자는 점쳤을 거 아니에요. 혹시 알아? 엘텍전자 강주한이랑 얽히는 흉사는 진즉 피했을지.”
술기운이 확 올라 갑자기 갑갑해졌던 하선우는 입고 있던 패딩의 지퍼를 내리고 다리를 주욱 뻗었다. 등을 소파에 기대며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올려다본 그는 후우우 장탄식을 내뱉었다. 뒷골이 다 당겼다.
중학교 시절 방과 후 활동으로 과학특별반 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날 과학 선생님 지도로 액체질소 실험을 했는데 영하 196도의 초저온 액체 속에 담갔던 바나나로 못을 박는다던가, 휴지를 얼려 다트 놀이를 하는 실험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중에서 하선우의 뇌리에 가장 남았던 것은 금붕어를 급속 냉동했다 살려내는 실험이었다. 살아 있는 금붕어를 액체질소 속에 담그는 순간 팔딱거리던 금붕어는 몸부림치던 그대로 동태처럼 꽝꽝 얼어버렸다.
지금 그들의 주위로 흐르는 것이 액체질소가 아닐까, 아니면 그것과 유사한 초저온 액체물질일지도.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음조각을 목도하는 기분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살피던 하선우에게 뒤늦게 죄책감이 밀려왔다.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가장 의외인 건 강주한의 다음 말이었다.
“제가 하선우 씨에게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모두가 숨죽였다. 하선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실수를 보상할 방법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보상이요?”
하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꽝꽝 얼었던 몸이 자유낙하로 와장창 깨진 기분이었다. 술이 완전히 깬 하선우는 강주한을 살벌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구태의연한 태도에 속이 뒤틀렸다.
하선우의 말투가 지나치게 사나웠던 탓에 그를 말리려 부모님이 모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였다. 부모님이 지켜보는 거실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하선우는 거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에, 방에 들어가서 얘기하죠. 사업 얘기하러 왔다면서요.”
잠자코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주시하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황을 거들었다. 여기가 선우 방입니다. 강주한을 방으로 안내한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에 몸을 돌렸다. 아버지의 옆에서 초조하게 눈을 굴리던 어머니가 아랫입술을 치아로 짓씹으며 한탄했다.
“괜히 태워버렸나? 그때 그 사진. 한동안 우리 거실에 걸어뒀었잖아.”
그녀가 직접 불태웠던 신문기사 1면에 실린 강주한과 하선우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가족사진 옆에 자랑스럽게 걸어두었던 사진을 강주한이 직접 목격했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바람을 내심 드러내는 어머니의 눈치에 하선우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사진을 내보여서 점수라도 따야 한다는 소리처럼 들려 참을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소릴.”
아버지의 타박에 민망해진 어머니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거실로 사라졌다. 안검하수로 눈꺼풀이 잔뜩 내려앉아 졸려 보이던 노인네의 반개안에 오늘따라 웬일인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하선우의 아버지는 늘 과묵한 사람이었다. 그가 하선우에게 묻는 질문이란 먹고살 만한지, 돈을 얼마를 버는지, 사업은 괜찮은지와 같은 생계와 관련된 사항이 전부였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취미를 가졌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와 같은 불호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커밍아웃을 한 뒤로는 그마저도 소원해졌고, 지금은 한집에서 지내면서도 부자지간에 나눈 대화라고는 손으로 꼽힐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가 강주한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는 하선우를 막으며 따로 불러 세웠다.
“말 가려서 해라.”
아버지는 단 한마디만 했다.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높으신 분께 말실수를 하지 말라는 당부의 의미로 하선우의 어깨를 가만히 꽉 쥐었다 놓으며 쓸어주었다. 어색하게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인 아버지는 뒤로 물러났다. 그 묵직한 진심이 곤혹스러웠다.
방 안으로 들어선 하선우는 문을 달칵 잠가버렸다. 문을 열자마자 경시대회에서 받은 상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는 인사동의 이름 모를 갤러리에서 그의 어머니가 구매한 특징 없는 정물화가 걸려 있었다. 방은 매우 넓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전체적으로 어수선했다. 책과 손때 묻은 잡화가 가득해 쿰쿰한 냄새도 났다. 선범이 결혼을 하고, 하선우 역시 독립을 하기 전까지 함께 사용했던 방이었기에 벽에는 빼곡하게 수납공간이 채워져 있었다. 천장에서부터 벽 중간까지 선반을 설치해 공간의 낭비를 없앴고, 사이사이 리빙 박스를 넣어 지저분한 것을 가렸지만 어수선하고 조잡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주한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따로 소파나 스툴 같은 것을 두지 않아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았을 테니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선우는 그에게 침대에 앉으라는 말도, 책상 의자를 끌어다 앉으라는 권유도 하지 않았다. 하선우는 문에 붙어 말을 하려다, 어쩌면 문 뒤에 붙어 있을지도 모를 그의 가족을 떠올렸다. 침대로 걸어가 모서리에 털썩 앉은 하선우는 강주한을 올려다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여기 온 게 많이 거슬립니까.”
“예.”
하선우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부모님은 강주한 씨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요. 그런 분들한테 대접받는 거 악취미 같던데요.”
강주한은 책장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하선우 씨에게 난 어떤 의미인지 물어도 됩니까.”
하선우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빤히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한참 뒤 하선우는 대답했다.
“회사를 부도낸 전 거래처 사장, 내 특허를 무효처리 하려고 심판 청구한 전 거래처 사장.”
어깨를 으쓱인 하선우는 고개를 모로 돌리며 강주한을 외면했다. 약간의 뜸을 들인 후 조금 전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게 헤어진 전 애인.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호모포비아고요.”
그는 신랄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덧붙였다.
“이제 좀 우리 집에 찾아온 게 미안하게 느껴집니까?”
강주한이 걸음을 옮기는 것이 느껴졌다. 침대가 출렁이고 하선우와 조금 떨어진 곳에 강주한이 앉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이러한 상황을 의도한 기술인지 하선우의 손가락 위로 그의 손가락이 아주 살짝 겹쳐졌다. 하선우는 그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새삼스럽게도 하선우는 긴장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유리한 위치를 점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개자식은 아닙니다. 대접받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선우는 대놓고 지친 한숨을 쉬었다.
“그럼 왜 왔는데요.”
살짝 겹쳐졌던 손을 빼낸 하선우는 땀이 나는 손바닥을 패딩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강주한은 방어적인 하선우의 자세를 눈여겨보았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말투도 조금 어눌한 구석이 있었지만 많이 취한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하선우의 기분은 아주 최악인 것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알코올이 감정의 벽을 허물어놓은 이때 그를 찾아온 게 다행스러운 일인지 강주한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부터 강주한이 하려는 말은 세심한 언어로 조율된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된 음을 누르거나, 하선우의 감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튈 가능성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하선우에게 두 가지 청산해야 할 빚이 있었다. 첫째는 특허에 관한 무효심판 청구였고 둘째는 회사부도와 관련된 의도치 않은 사고였다. 특히 두 번째 문제는 그의 의지와 무관했지만 강주한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였다. 시스템은 누군가의 인생에 그늘을 드리운 뒤에야 오류가 발견되었다. 하필이면 그 누군가가 하선우였고, 아마 강주한은 그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별다른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선우에게는 재앙이었지만 강주한에게는 사고였다. 그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입장의 차이가, 일체一切가 비어 있는 공허한 간극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모든 것을 잃은 남자를 향해 수동적이면서도 아주 공격적인 모욕을 퍼부었다.
하선우가 게임이라는 세계에 갇혀 스스로를 소모하며 살아가는 동안, 강주한은 하선우를 방관했다. 강태한의 말대로 실연놀이, 아마 그런 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그는 굳이 자신이 느낀 상실감을 다독이려 하지 않았고 이별을 맞이한 사람답게 자기 연민과 감상에 빠졌으며 실연의 무기력에 잠겼다. 강주한 스스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하선우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하선우를 원했다. 문제는 하선우 역시 인내하고,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조차도 그가 최우선으로 삼은 타깃은 하선우의 특허였다. 강주한은 그의 특허를 안신에 빼앗길 수 없어 분당에 있는 그의 부모님의 집을 찾아왔다. 이런 몇 가지 사실들은 강주한 그 자신을 아주 쓰레기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 자신에게조차 은밀하게 숨기고 싶은 비밀 하나. 강주한은 수치심을 느꼈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모든 것이 틀어질 수 있었다. 그는 평온을 가장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특허무효심판 청구 취하할 겁니다.”
하선우는 숨을 멈췄다. 강주한의 말을 받아들여 명확한 사고를 하게 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선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효심판 청구를 취하한다고요?”
강주한은 하선우의 눈에서 불신을 읽었다.
“갑자기 왜.”
급하게 말을 뱉어내던 하선우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 안을 가로질러 맞은편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던 그는 산만한 태도로 강주한의 근처로 다시 다가와 섰다. 그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이거. 이제 와서 갑자기 이러는 건 안신에 팔까 봐 이러는 거죠?”
강주한은 긍정하며 약점을 인정할지 침묵으로 일관할지 생각했다. 하선우의 단정적 어조가 말해주듯 추론할 수 있는 단서 자체가 뻔했다. 그는 거짓말쟁이는 되지 않기로 했다.
“안신에서 접촉 시도 중인 걸로 압니다. 국내에 걸었던 무효심판 청구 취하하겠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공개단계에 들어간 특허는 인정받는 대로 계약을 맺었으면 합니다. 내게 좋은 감정이 없다는 건 알지만….”
“1억 달러 줄 겁니까?”
며칠 전 강태한이 했던 말을 하선우는 그대로 되물었다. 강주한은 말했다.
“안신과 엘텍전자와의 소송. 길게는 15년을 끌 수도 있습니다. LS플러스와 서일텔레콤의 특허소송은 13년을 끌고도 결론이 나지 않았죠.”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특허소송 문제를 여기에 끌고 오면 안 되죠. 우리 그런 얘기는 여기서 하지 말죠. 엘텍하이스코와 성일금형, 엘텍전자와 NnG, LS플러스와 서일텔레콤. 그런 동종 패턴 반복 너무 식상하지 않아요? 아, 정말 돌림노래도 아니고.”
하선우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침대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강주한은 말했다.
“내 말은 불확실한 미래에 모든 걸 걸지 말라는 겁니다. 안신이 소송에서 패소한다면 하선우 씨는 빚을 변제할 기회마저 모두 날려버리는 겁니다.”
하선우는 기운이 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 뒤 고개를 든 그는 말했다.
“그럼 대가로 뭘 줄 건데요?”
“이전 계약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재계약하죠. 로열티 인상, 계약금 지급, 선우 씨와 이석 씨 앞으로 남아 있는 빚 역시 모두 변제하겠습니다. 퇴사한 직원들 앞으로 남은 퇴직금까지 일괄 지급하고요.”
온통 마음이 휘둘렸다. 그에게 형편없이 흔들리는 눈을 들켜도 어쩔 수 없겠다고 하선우는 생각했다. 간신히 목소리를 꾹 눌러가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떤 조건을 갖다 대봐야 1억 달러를 반으로 나눠 갖는 것만 못한데요.”
강주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나는 CEO일 뿐이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하선우는 재미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넘어간다고 쳐도 강태한은 설득될 것 같아요?”
“태한이 일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불신 가득한 하선우의 눈을 바라보던 강주한은 긴 침묵 끝에 결국 그의 계획 한 조각을 털어놓기로 했다.
“실종신고를 하진 않았지만 김운형이 필리핀으로 출국한 후 생사불명기간이 6년에 가깝습니다. 서류상으로 생존해 있다는 증거는 만들어냈지만 김운형은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리인이 활동을 대신해왔죠. 계획은 이렇습니다. 한국에 김운형의 친자가 있습니다. 친자는 가정법원을 통해 김운형에 대한 실종선고 신고를 할 겁니다. 필리핀 경찰에 공조수사를 요청했으니 선고 시점에 따라 두 가지 결과가 나오겠죠. 김운형은 애초부터 죽은 사람이었으니 하선우 씨와 엘벡스의 특허제휴는 사기였음이 증명된다. 또는 엘벡스가 가진 반쪽짜리 특허를 아들이 상속받는다.”
“아들이 상속받은 특허는….”
“엘텍전자가 사들인다.”
강태한은 여태 정성껏 죽을 쑤어다가 남 좋은 일만 했다는 얘기였다. 하선우는 속으로 탄식했다. 강태한은 정말이지 병신새끼였다. 그러나 강주한의 말에도 허점은 있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늦은 밤 부모님이 계신 하선우의 집을 문턱이 낮다고 여기며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법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지만 실종선고에 걸리는 시간이 아주 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전에 특허를 안신에 넘겨버리면 실종선고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텐데….”
거기까지 말하던 하선우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강주한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낮아지며 하선우의 얼굴 어딘가를 헤맸다. 강주한의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움츠러든 감정이 읽혔다.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일까? 강주한은 미묘한 순간들을 포착해 능숙하게 표정을 빚어내는 재주가 있는 개자식이었다.
아아, 하선우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그는 강태한이 안신과의 거래를 종용해도 시간을 끌며 버텨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세요. 강주한 사장님.”
긴 한숨을 내쉬며 하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못 본 사이에 마음이 약해지셨네요.”
주머니 속에 손을 푹 찔러 넣은 하선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와의 거리를 넓혔다.
“옛정을 너무 과신하네요. 거래도 거래지만, 이 얘기를 강태한에게 전할 가능성은 조금도 고려 안 한 모양이죠?”
“누군가가 아주 많이 다치길 원한다면 전하겠죠.”
강주한은 마른 코웃음을 작게 흘렸다. 마치, 하선우가 절대로 그들 간의 신의를 저버리는 짓을 할 리가 없다는 듯이.
하선우는 정지한 상태로 강주한이 애써 내보이는 의연한 태도를 바라보았다.
강한 인상의 얼굴과 큰 골격의 키, 단단한 근육을 가졌음에도 그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기울이거나 눈을 내리까는 방식으로 복잡한 감정을 드러낼 때면, 절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는 않지만 세상으로부터 한 마디씩 부피가 줄어들어 존재감이 사라지는 듯한 아스라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의 강주한은 웃음기 없는 유약하고도 불행한 미녀를 연상케 했다. 여인에게 미혹된 기사들은 자진하여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그녀의 불행을 대신 떠안는다.
그늘에 잠긴 강주한에게는 그런 불길한 정조情操가 있었다. 강주한을 상대로 그런 기분을 느끼는 자신이 비정상인지, 아니면 강주한 스스로가 그런 정서를 의도한 것인지 하선우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선우는 미녀의 불행을 대신 떠안고 스스로를 희생할 기사1의 역할을 맡을 생각이 없었다.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기에는 칼 들고 설칠 만한 체력이 없는 데다가, 오래전에 미녀의 튼튼한 근육질 몸에 얻어터져 병실 신세를 졌던지라 그녀를 대신해 칼받이가 되고픈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과거도 남아 있었다.
아주, 느닷없이 강주한이 배 위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공정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악을 선택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타일렀었다.
그가 또 무슨 말을 했더라. 하선우 씨,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말을 했던가. 하선우는 생각했다. 감정적으로 구는 하선우에게 그런 말을 함부로 뱉어놓고, 이제 와서 그는 감정에 호소하고 있었다. 가면을 쓴 얼굴 뒤로는 지극히 이성적인 머리와 차가운 심장을 숨긴 채로.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헛웃음을 터트린 하선우는 말했다.
“제가 왜 강 전무, 아니 강 사장님 좋은 일을 하겠어요. 호구도 아니고.”
무심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하선우는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 날카롭게 대답했다. 속에 불이 붙는 느낌이 갑자기 치솟아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무언가를 구겨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손을 덜덜 떨었다.
“강주한 씨가 많이 다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내 마음이 움직일 줄 알았어요? 왜 내가 그걸 신경 써야 합니까.”
“…….”
“페어플레이하자고 하셨잖습니까. 근데 이건 페어플레이가 아니잖아요.”
“…….”
“정작 그쪽은 미안하다는 말조차 안 하는데.”
붉게 충혈된 눈에 어느새 눈물이 잔뜩 고였다. 자존심이 상해 우는 모습 따위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울면 정말 넌 정말 인간쓰레기다. 하선우는 자신이 병신처럼 느껴져 답답증이 치밀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입안의 점막을 씹었다. 가까스로 눈물만큼은 떨어뜨리지 않았다.
강주한의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멍하게 초점을 잃은 얼굴은 마치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것 역시 거짓일 것이다. 언제 한 번이라도 하선우의 말이 그에게 영향을 준 적이 있던가. 하선우는 이 순간까지도 그에게 휘둘리는 스스로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내가 아직도 그쪽한테 미련 남은 그런 한심한 놈으로 보여요?”
그 순간 침대에서 그가 일어났다. 자동연사되는 소총처럼 빠르게 다음 말을 뱉어내려던 하선우의 말문이 갑자기 막혔다. 강주한이 감정을 알 수 없는 묘한 눈으로 미동 없이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로 얽혔다. 왠지 그가 유발하는 이상한 분위기에 짓눌려 섣불리 입을 뗄 수조차 없었다. 심각한 정적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서로의 심장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주한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얼굴을 구기며 바삭하게 마른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찰나였다. 잔뜩 긴장된 공기를 가르며 느닷없이 방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좀 열어도 될까요?”
문 너머에서 어머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어.”
하선우는 강주한의 표정을 미처 살필 새도 없이 뒤로 돌아섰다. 서둘러 손바닥으로 눈가의 눈물을 찍어낸 그는 멀끔한 낯으로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선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 위에는 포도 주스가 담긴 쟁반이 놓여 있었다. 하선우를 올려다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지나치게 해맑아 보였다.
“이거 마셔.”
사업 얘기 중에 끼어들어 송구하다는 눈으로 강주한을 쳐다본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씀 중에 죄송해요. 목마르시죠? 이거 드시면서 말씀 나누세요.”
어머니의 이마와 머리선 사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갑자기 바닥으로 한없이 꺼지는 기분에 하선우는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사왔어요?”
“술은 운전 때문에 안 드신다고 하셔서.”
방해가 되지 않으려 살짝 빠져나가려고 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하선우는 쟁반을 다시 돌려줬다.
“아니, 됐어. 이야기 끝났어요.”
“응?”
“11시 다 됐네. 아버지 주무실 시간인데 너무 늦었잖아요. 이 시간까지 계속 있는 건 예의 없는 짓이지.”
당황한 어머니를 보지 못한 척 하선우는 강주한을 돌아보았다.
“더 할 말 없으면 집으로 가시죠.”
문을 활짝 연 하선우는 거실로 나와 천연덕스럽게 턱짓으로 강주한을 밖으로 불러냈다.
“선우야, 넌, 넌 어디 가고!”
“중요한 일 있어요.”
“뭐?”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
“뭐, 뭐가 중요한데? 사업 얘기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하선우는 천천히 방 밖으로 나오는 강주한을 노려보았다.
“일일 퀘스트 돌아야 돼요. 캐릭터 새 무기 나왔단 말이에요. 일퀘 돌아야 보상으로 무기 줘요.”
황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못 본 척 하선우는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사실 게임은 핑계에 불과했다. 어디에 갈지 그조차도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피신할 장소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는 지금 너무도 바삭하게 메말라서 부모님에게 강주한과의 관계를 설명할 인내심도, 거짓말을 꾸며낼 만한 정신적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입꼬리에 경련이 이는 어색한 웃음을 간신히 걸고 있는 게 전부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급하게 음료수를 내려놓고 강주한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강주한의 손을 차마 잡지도 못하고 애를 태우며 말했다.
“더 말씀 나누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밤도 늦었는데 가보겠습니다.”
아들이 황금 같은 기회를 엉망으로 걷어차버렸다는 생각에 안타까워하는 여자를 향해 강주한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그때 망나니 아들이 분위기를 망치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아버지가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선우야.”
하선우는 현관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기 직전의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많은 감정을 꾹꾹 욱여 담은 무거운 목소리로 그는 한 번 더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하선우의 발을 묶어두었다.
“배웅해드려라.”
단호한 아버지의 명령에 하선우는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주한에게 화가 났을 뿐, 부모님에게 심술을 부리려던 건 아니었다. 철없이 굴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강주한을 향하던 분노마저도 제풀에 꺾이려던 때였다.
“제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지가 비장한 표정으로 강주한의 앞에서 허리를 깊숙하게 굽혔다.
“선우가 요 근래 방황하긴 했지만 원래 요령 피우는 일 없이 착실하고 야무지게 일하는 녀석입니다. 착하고 머리 좋고 부모한테도 잘하고, 학교 다닐 때도 1등 한 번 놓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엘텍은 한국의 자랑스러운 기업이니까 우리 선우 같은 인재도 많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앞으로 걸어 나가려는 하선우를 곁에 있던 어머니가 막았다. 하선우의 손목을 감아쥔 어머니의 눈에 화가 깃든 단호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한 번만 재기할 기회를 주시면….”
아버지가 허리를 숙이며 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강주한의 가슴 언저리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붉었다. 수치심과 민망함, 아들에 대한 실망, 그 밖의 다른 문제들은 모두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버지의 얼굴은 비굴하고도 절실했다.
“제 아들 앞으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주한은 잠시 숨을 멈추고 늙은 남자가 내민 주름진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하선우의 아버지는 그의 긴 침묵을 단순한 거절의 기색으로 받아들여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주한의 생각은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깊이 심사숙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넓은 영역의 작용범위를 가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그 말은 의도를 갖는다면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도 있는 말이었다. 호모포비아라던 노인이 하선우와 강주한이 성적으로 연결되었던 사이란 걸 알았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단어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하선우가 서 있는 방향을 보지 않았다. 하선우 역시도 이 순간의 중의적인 의미를 파악했을 테니까.
아들을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하선우의 아버지가 의도한 의미는 하선우가 경제적으로 재기해 예전처럼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일 테지.
그는 꽤 오랜 시간 생각했다. 그에게서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모두의 절박한 사정을 헤아릴 수도, 완전히 기피할 수도 없었기에 그들을 따돌리는 데에는 약간의 사교적인 기술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중소기업을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담론의 장을 마련하겠다, 대기업의 경제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 노력을 기울이겠다와 같은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듣기에는 좋은 세련된 표현들을 동원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들은 무언가 속는 기분이 들면서도, 일시적으로 기분이 고무되어 돌아가곤 했다.
강주한은 상투어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었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가끔은 그들이 강주한을 향해 어쩔 수 없이 지어주는 웃음에 강주한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저열한 자기위로인지 강주한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뱀처럼 매끄럽고 속이 텅 빈 천박한 언어로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주한은 한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거의 박이지 않아 말랑말랑한, 부드럽고 주름진 노인의 손이 강주한의 손을 포개듯 감쌌다. 머뭇거리던 강주한은 서류가방의 끈을 어깨에 걸고, 나머지 한 손도 노인의 손 위에 마저 포갰다. 두 손을 맞잡자 감명을 받은 듯, 그가 악력이 느껴질 정도로 손을 세게 잡아 흔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강주한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센서등에 불이 들어와 침침한 현관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곳에 서 있어야 할 하선우는 보이지 않았다.
* * *
놀이터, 보도, 주차장, 놀이터, 보도, 주차장. 끝없는 반복 끝에 그는 이제 겨우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기분에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지면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평평하고 매끈한 계획도시에서의 삶이 짜증나는 순간은 바로 이럴 때였다. 누군가가 마음먹고 찾아 헤매기 시작하면 그를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평소 거리에 넘쳐나던 택시는 보이지도 않았고 아파트 단지 앞에서 버스를 탔다간 금방 잡힐 것 같았다. 그는 아파트 단지와 한참 떨어진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가출한 사람의 절차를 착실히 밟아가는 중이었다. 목적지가 없었고, 빈약하나마 반항심까지 갖추었으며, 진짜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사춘기 무렵에도 하지 않던 반항을 서른이 지나 하고 있다니, 알 수 없는 인생이었다. 그는 휴대폰은 꺼두었지만 집을 완전히 떠날 생각은 없었다. 부모님은 죄가 없는 데다가 그들에게 애먼 화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이대로 며칠간 잠적할 계획을 짜는 그는 이미 충분히 부모님을 고문하는 중이었지만.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지나 마을버스 정류장에 선 하선우는 배차 간격을 확인하려 표지판을 봤다. 이미 막차 시간이 한참 전에 지나 있었다.
“내가 그렇지 뭐.”
착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린 그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길고 넓은 산책로 주변에는 부석부석한 죽은 풀이 말라붙어 있었고, 물이 바싹 졸아들어 수면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탄천은 드문드문 물길이 끊겨 있었다. 산책로와 내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건너편에 지하철 역사가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빌딩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지만 지하철 역사는 눈에 띄게 환했다. 가방을 고쳐 메며 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등 뒤에서 가방이 당겨지는 느낌에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강주한이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하선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찾아 뛰어다녔는지 그는 허리를 잔뜩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선우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강주한을 내려다보며 가방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방의 무게중심은 강주한의 손 위로 거의 쏠려 있었다. 가방을 빼앗으려 몇 번이나 잡아당겼으나, 가방을 뺏기지 않으려 그가 온 힘을 주고 있었다.
“가방 줘요.”
“얘기… 하아… 좀 하죠.”
“얘기요?”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숨을 고른 강주한은, 무릎을 짚으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턱 끝에 맺힌 땀이 무게를 못 이겨 땅에 몇 방울이나 떨어진 뒤에도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숨을 골랐다. 육체를 급작스럽게 한계까지 몰아붙인 피로가 쉽게 가시지 않아, 그는 눈썹을 찡그린 채로 하선우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네.”
“할 말 있으면 아버지랑 하지 그래요. 고지식한 노인네 놀리는 거 재미 들린 것 같던데.”
비딱하게 중얼거린 하선우는 지하철 역사를 힐끔거렸다. 도주로를 확보하려는 도망자처럼 여차하면 가방을 버리고 달려갈 거리를 재고 있는 듯 보였다. 하선우를 간신히 찾아낸 강주한은 여기서 그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의 절실한 마음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그의 진심이 곡해된 부분이 억울하기도 했고.
“왜 내가 하선우 씨 아버지를 놀리는 일로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하선우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차마 이유를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모르는 척하지 마요.”
“그럼 내가 아들의 재기를 도와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했어야 합니까?”
손등으로 턱의 땀을 닦아 공중에 털어낸 그는 긴 한숨을 마지막으로 토해냈다. 그의 숨은 비로소 편안해져 있었다. 하선우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단순한 핵심을 알면서도 본질을 흐리는 그의 화법에 짜증이 치밀었다. 설령 강주한이 아버지의 부탁을 단순한 청탁의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는 이미 아버지가 허리를 굽힌 순간부터 누군가 명치를 쥐어짜는 듯한, 애통한 아픔을 느꼈다. 강주한과 막내아들이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면서 예의 바르고 친절한 인상을 남기려 부단히 노력하는 노부부를 보며 줄곧 느꼈던 감정이었다.
하선우는 줄다리기하듯 잡아당기고 있던 가방끈을 툭 놓아버리고 꽁꽁 얼어 있는 손바닥으로 칼바람에 건조해진 얼굴을 거칠게 비볐다. 화가 나서 미쳐버리겠다는 듯이.
“말을 말자.”
구시렁거리며 언 바닥을 걷어찼다. 분을 못 이겨 보도블록을 몇 번이나 연이어 걷어차다, 발끝이 아파 결국 제풀에 지쳐 관둬버렸다. 강주한은 담담한 얼굴로 하선우의 발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는 바람에 하선우는 갑자기 또 화가 치밀었다. 갑자기 자신이 한심한 남자의 전형이 돼버린 기분이 들었다. 가방을 다시 달라고 손을 내밀며 보채려고 할 때였다.
“그런 분위기를 사적으로 이용한 건 미안하지만 내 허영심을 채우진 않았습니다.”
그가 유독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자녀를 부탁한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는 당부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나더군요.”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얘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을 때가 떠올랐어요.”
하선우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물론 그때의 아내와 나는 지금의 우리처럼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하선우는 긴장한 얼굴로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강주한이 말하는 자리는 아마도 아내의 부모님을 찾아 뵙는 장소였을 것이다. 정치인을 아버지로 둔 여자의 집을 찾아가는 젊은 강주한의 모습은 그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드라마 속에서 뻔하게 그려지던 상황들을 무심코 떠올렸다.
값비싼 선물을 사 들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는 모습부터 그를 지극히 반갑게 반기는 장모의 얼굴까지. 신기하게도 서유임의 이름은 떠올랐지만, 여자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흰 달걀처럼 부옇게 흐려진 여자의 존재만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강주한은 여자의 아버지가 건네준 술을 공손한 자세로 받는다. 계속 강권되는 술잔에 결국 취해 속엣말을 꺼내며 허술하게 웃는 강주한의 모습이 TV드라마의 모습처럼 낯설게 그려졌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선우는 강주한이 서유임의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강주한은 조금 긴 침묵 뒤에 덧붙여 말했다.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물론 선우 씨 아버지를 안심시켜드리고 싶어 꺼낸 말이었습니다. 거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선우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주한과 비슷한 것을 생각하긴 했지만, 하선우는 그의 방식에 악의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구는 강주한의 태도는 미처 벽을 세우지 못한 하선우의 약한 부분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무르게 굴고 싶지 않아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하선우는 말했다.
“헤어진 사이에 그런 얘기 꺼내는 건 좀 거북하죠.”
하선우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치솟았던 화는 어느새 물거품처럼 사라져 마지막으로 뱉은 목소리는 아물아물했다.
강주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민하게 하선우의 기분을 읽어내려 시도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마치 보기 편하게 내용을 간추려놓은 핸드북 같았다. 목차를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면 하선우라는 사람의 개개인의 특성을 파악하는 실마리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첨부된 지도를 젖히면 그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좌표가 번쩍거렸다.
속 안에 견고한 성을 쌓고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자신을 고스란히 해체해 드러낸 지도가 있었다. 강주한은 한 손에 첨부된 지도를 펼쳐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망원경을 들고 마음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향한다. 수없이 드나들어 길이 반질반질해진 땅뙈기를 밟고 굽이진 골짜기를 지나 암벽을 타고 올라 정상까지 오른다. 군데군데 구름이 끼긴 했지만, 높은 정상에 서면 어렵지 않게 그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하선우는 인터넷으로 본 시답잖은 기사 한 줄도 함께 공유하길 원하고, 자신의 허무맹랑한 망상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상 얘기들을 곧잘 떠들어대는 편이었다. 물론 강주한이 하선우의 단순한 이야기들을 늘 즐겁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나아졌지만 그를 사귀면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하선우가 일상을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공대를 나온 사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선우는 데이터를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요령 없이 일상 얘기를 꺼낼 때가 많았다. 결국 강주한의 지적으로 고치긴 했지만, 하선우는 점심때 먹은 반찬의 개수와 종류, 회식 때 먹은 술안주와 술이 무엇인지는 물론, 즐겨보는 TV프로그램과 전자부품의 기능 따위를 하나씩 하나씩 재미없는 말투로 나열하곤 했다.
침대에서의 버릇은 색달랐다. 옷을 벗기 전에는 능청스러운 시도도 서슴지 않았지만, 막상 과감하게 몰아붙이면 숫기 없는 얼굴로 숙맥처럼 굴어 가학심을 자극했다. 그는 실없는 농담을 던져놓고 반응이 없으면 멋쩍게 웃기 일쑤였고, 화를 내다가도 몇 시간 뒤에는 쉽게 미안한 투로 사과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영리하지만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허술하고 멍청하며, 하찮은 일로 꽁해 손톱만 한 자존심을 세우는 남자였다.
그는 강주한과 같은 예술작품을 보고, 듣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미술을 공부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작품에 대한 세속적 가치만을 매겼다. 그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존재의 이유를 예민하게 고민하지도, 모순된 상황을 꿰뚫어보고 그 너머를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절대로 시인이나, 철학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할 말 없으면 가방 주시죠. 지하철 놓치기 전에 가야 하니까.”
하선우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아마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긴 시간을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주한은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떨고 있는 하선우를 또렷한 눈으로 유심히 훑어보았다. 강주한의 얼굴이 점차 심각해졌다.
“내가 왜 하선우를 사랑하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난데없는 말에 얼굴이 붉어진 하선우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실은 나 역시도 왜 이렇게 하선우 씨한테 질척거리는지 궁금하거든요.”
강주한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묘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강주한은 하선우에게 가방을 돌려주지 않으려 가방끈을 한쪽 어깨에 고쳐 멨다. 하선우의 손을 붙잡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우리 대화 좀 하죠. 아니, 내 얘기를 좀 들어줘요.”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