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상투어에 둘러싸인 남자 (2)
좁은 화장실 안으로 사람들이 수도 없이 꾸역꾸역 들어왔다. 그들 중 태반이 볼일을 보고, 지퍼를 올린 뒤에 손도 씻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사라졌다. 악취로 뒤덮인 화장실에서 재빨리 손을 닦고 나온 하선우는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연말이라 술집과 식당가가 밀집해 있는 역 앞 빌딩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변기는 세 개뿐인데 그중 하나는 고장이 났고, 나머지 두 개의 상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복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승강기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쏟아냈다. 건물에 입주된 술집, 음식점마다 송년회 모임으로 사람들이 가득했고, 바닥에 깔린 화강석 타일 사이사이에는 검은 때가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영수증과 껌을 싸서 버린 종이 따위가 복도 구석에 쌓였고, 외진 창가에는 몰래 버린 담배꽁초가 나뒹굴고 있었다. 연이어 몰려드는 손님에 청소를 할 시간도, 관리할 인력도 없어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소한 범법 행위를 모르는 척 눈감아주고 있었다.
하선우는 술에 취해 언성을 높이는 회사원 무리를 지나, 복도 바닥 한가운데에 엎어져 있는 여행사 카탈로그 거치대를 빙 돌아서 입구 조명이 꺼진 바 앞으로 걸어갔다. 언뜻 보기에는 연말, 그것도 수요가 넘쳐나는 성수기에 문을 닫은 것으로 보였지만, 가게 주인은 장소를 빌려주는 대가로 상당한 매출을 올렸을 것이다. 강주한이 바 주인에게 얼마짜리 수표를 건넸을지, 예전이라면 궁금했을 것들이 그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천장의 조명은 꺼놓고 바의 진열장과 바닥의 반사등, 스탠드석 주변으로 온풍기 몇 개를 켜둔 게 전부여서 어두운 실내는 마치 장사를 접은 듯이 보였다. 강주한은 탄천 산책로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스탠드 석에 앉아 있었다. 바의 주인이 사다 주었는지 눈에 익은 로고가 새겨진 테이크아웃 커피가 강주한의 자리와 그의 바로 옆 빈자리에 놓여 있었다.
“화장실 더러워요.”
상쾌하게 웃으며 경고한 하선우는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뚜껑을 열어 커피의 온도를 식히고 있던 강주한은 흠, 애매한 소리를 내며 코를 찡긋거렸다.
“화장실 안에 따로 있다고 가게 주인이 전해주던데요.”
그는 창가 끄트머리에 화살표 스티커가 붙은 화장실 표지판을 가리켰다.
“아, 진작 말해주지.”
더러운 화장실에서 숨을 참아가며 용변을 보던 방금 전 일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기분이 언짢아졌다. 하선우는 시큰둥한 얼굴로 따듯한 커피를 손으로 감쌌다. 주인은 과일 안주와 간단한 핑거푸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가게를 비워둔 상태였다.
많고 많은 자리 중에 창가에 나란히 붙어 앉는 스탠드석을 고른 탓에 그와의 거리가 신경 쓰일 만큼 가까웠다. 사실 하선우는 조금 전부터 신경을 건드리는 표현들로 머릿속을 심란하게 만드는 강주한이 거슬렸다. 대화를 하자는 포석을, 아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자리를 마련해놓았지만 강주한은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몰라도, 자꾸만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에게 하선우는 조금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직도 말투가 어눌해요.”
“원래 말투예요.”
그는 술에 취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강주한이 웃느라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지금은 술 좀 깼습니까?”
흘리듯 지나가는 말투가 다정해, 하선우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거칠어졌다. 다시 뒤늦게 술이 오르는지 머리가 뜨거웠다. 차가운 김이 서린 유리벽에 이마를 쾅 기댄 하선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쳐요.”
이마와 유리벽 사이로 따듯한 체온이 파고들었다. 건조하고 기다란 손가락이 하선우의 얼굴을 감싼 뒤 발갛게 찧은 자국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하선우는 그의 행동이 유난스럽고 유독 닭살이 돋는다고 느꼈다.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아직도 술 냄새 많이 나요. 얼마나 마신 겁니까.”
술 냄새를 풍기는 하선우와는 달리, 그에게서는 늘 맡던 향수 냄새가 났다. 어쩌면 그가 늘 사용하는 바디샴푸 냄새거나, 섬유유연제에서 배어나온 냄새일지도 몰랐다. 하선우는 인공적인 방법으로 매력을 가공하는 것에 서툴렀고 또 무감한 편이었으므로 강주한의 고유한 향기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 몰랐지만,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풍기던 이 향기에 애착을 가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과거의 애정이 현재의 미움을 불러일으켰다.
괜히 이 자리에 따라왔다는 후회가 들었다. 표정과 호흡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애쓰며 강주한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많이 안 마셨어요.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렇게 느껴질 뿐이지.”
“그런 것치고는….”
“그런 것치고는 뭐요?”
“박수무당 이야기… 선우 씨 부모님 놀란 것 같던데요.”
강주한의 표정이 미묘하게 장난스러워졌다. 흥미를 드러내는 표정에 반발을 느끼며 하선우는 다시 냉정하게 벽을 세웠다.
“취중진담이었어요.”
하선우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내 인생 점칠 줄 알았으면 강주한 씨랑 안 얽혔어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사주팔자나 길흉화복 같은 걸 믿나 보죠.”
하선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강주한이 그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아뇨. 안 믿어요.”
하선우는 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남아 있고 이야기의 방향이 튀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껄끄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믿나 보죠?”
“글쎄요.”
강주한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기울이며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얹었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어떤 기운 같은 게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기운요?”
“인생 곳곳에 지뢰가 깔려 있는 거죠. 선우 씨 말대로 얽혀서는 안 되는 사람을 만나는 흉사 같은 것 말입니다. 감이 발달한 사람은 피해 갈 수도 있겠죠. 선우 씨가 말한 무당처럼요.”
의외의 대답에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절대 안 믿을 것 같은데 예상 밖이네요.”
“믿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한다는 말도 아니지만.”
그는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마신 뒤에 말을 이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40대 때 동양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고 무속신앙도 공부했죠. 기업가 안주인이 무속신앙에 관심을 두면 뒷말이 나오기 마련이라 할머니의 단속이 심했지만, 어머니는 진지하게 무속문화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사후세계를 믿으시는 분입니다. 취미가 종교인들을 만나 온갖 담론을 나누는 일이니까요. 저 역시 어머니 영향 때문에 흥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듣기로 보통의 경우 신내림받은 무속인은 일반인보다 서른 배 정도 감이 발달한다고 하더군요.”
하선우의 표정은 조금 풀려 있었다. 강주한의 얘기가 생각보다 재미있어 예상치 못한 흥미를 느꼈다. 즉시 경계를 풀어버리는, 술기운에 느슨하게 풀어진 무구한 눈을 보며 강주한은 말했다.
“그런 면에서 선우 씨는 만신 같은 능력 있는 무속인은 아니었을 것 같군요. 어쨌든 나와 얽히는 흉사를 피하지는 못했을 거란 얘기죠.”
“참나, 감이 발달하지 않아서요?”
“그럴지도 모르죠.”
이상한 분위기였다. 진담을 하는 건가, 아니면 조금 짓궂은 농담을 하는 건가 헷갈렸던 하선우는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업하는 사람도 작두 타는 무속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방심하는 순간 칼날에 베이죠.”
“무당이 굿을 잘못하면 애꿎은 사람이 다치기도 하나 보죠?”
하선우는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안 그래도 막막한데 조상님 은덕 좀 보려고 굿판 한번 잘못 벌였다가 쫄딱 망해버렸네.”
하선우는 그에게 약간의 타격을 준 것만 같아 통쾌함을 느꼈다. 눈에 띄게 굳어진 강주한은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가 정적을 의식할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 강주한은 말했다.
“맞아요. 내 능력이 부족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죠.”
하선우의 얼굴 위로 조금씩 눈에 띄는 동요가 드러났다. 고작 그 한마디를 했다고 미안한 눈을 한다. 그는 여전히 방패는 들 수 있어도 칼을 쥘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강주한은 느리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착해빠져서는.
강주한은 단순히 하선우와 미신에 대한 흥미 위주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말을 하는 사이, 안개로 뒤덮여 있어 불확실하던 머릿속이 맑게 개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하선우의 무방비한 면을 사랑하고 있음을.
하선우는 기질적으로 둔감한 사람이었다. 예민하지도 않았고 자의식에 관한 뼈아픈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그는 시인도, 철학자도 될 수 없었으며 종교인, 무속인과 같은 계시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세상은 단순한 공식에 가까웠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무해하고도 직설적이어서 낭만적인 분위기도, 예술적인 기교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런 답답한 면면들을, 강주한은 긴 생애 동안 간절하게 찾아 헤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뭐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디고 천연스러워서 날카롭고 경계가 많은 강주한을 자연스럽게 매료시켰다.
하선우는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할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지독하게 증오할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다. 풀 죽은 눈으로 강주한의 팔 언저리를 살피는 하선우의 유순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강태한과 임경호, 그리고 자신이 다 같이 대면했던 자리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증오는 어느새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사람의 기분이 늘 일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너그러운 편인 하선우는 어떠한 고통스러운 감정도 다정하게 녹여 포용하는 편이었다. 주로 서운한 감정을 투덜거리며 내비치다 결국에는 이해를 하고 용서를 했으며,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실없는 농담이나 망상을 동원해 딱딱한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그는 용서를 할 수 없을 때는 자신만의 동굴을 찾아 웅크리며 현실도피를 했다. 그런 대책 없는 성격 덕분에 지금껏 커다란 마음의 구멍 없이 놀라운 회복력과 탄력성을 잃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로 강주한은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하선우의 낙관적인 성격에 기대를 걸기엔 그의 상처가 너무 컸다. 그는 피를 흘리지도 구멍이 뚫리지도 않았지만 탄력을 잃었고 지속적인 충격에 딱딱하게 각화되었다. 한계에 다다랐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미 한계를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강주한은 이 순간 또 한 번의 이해를 바라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하선우가 강주한을 인내하고 희생해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운명이나 숙명 같은 이야기는 믿지 않았지만 하선우의 말대로 그와 자신이 얽히는 일은 흉사일지도 몰랐다. 그를 작아지게 만드는 건 결국 강주한이었다. 그가 가진 애정의 형태는 한없이 탐욕스러워서 반짝거리는 하선우의 모습들을 하나씩, 하나씩 훔치고 깎아내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들을 보물처럼 숨겨 혼자 간직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게걸스럽게 그를 뼈째 삼키고 나서야 만족할 아귀도의 아귀일지도 모른다. 강주한은 가끔씩 그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고, 불필요하게 잔인해졌으며, 그의 몸속에 들러붙어 살고 싶은 애욕에 몸부림치고, 단절감에 괴로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점잖은 척 차가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하선우를 마지막으로 만난 뒤로 상반된 감정 속에서 헤매었다. 그를 다시 소유하고 싶은 욕심과 그를 재앙에 빠뜨렸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그는 긴 시간 동안 갈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는 하선우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전해주려고 했던 자료가 있었습니다.”
강주한은 테이블 옆에 올려두었던 서류가방을 집어 들었다.
“선우 씨 집에서 건네주려고 했던 자료인데 여기서 주게 됐군요.”
그는 가방 속에서 A4사이즈의 얇은 책자를 꺼냈다. 습기에 울어 종이가 울퉁불퉁하게 휘어지고 곰팡이가 선 자국이 남아있는 책이었다. 하선우는 눈을 의심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영문판 화학저널이었다.
하선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저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그의 이차전지 전극소재에 관한 논문이 실려 있었다. 그의 인생을 짧게 스치고 지나간 영광의 흔적이었다.
“이게 왜 당신한테 있어요?”
“며칠 전에 회사에서 챙겨 갔습니다.”
“그때 내가 찾던 게 이거였어요. 모르는 척 훔쳐가놓고 왜 갑자기 돌려주는 건데요.”
하선우의 목소리가 심문하듯 낮아졌다. 그 속에 분노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는 모르는 척한다. 강주한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긴 침묵 뒤에 하선우가 앉은 방향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다시 만날 핑계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유리벽 위에 이중노출 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아파트와 도로, 하천 너머의 깊은 어둠 위로 실내의 두 사람이 쓸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의 서류가방 안에는 NnG가 부도가 나게 된 직접적 원인을 밝힌 자료가 들어 있었다. 그의 한 면은 이 사건의 시시비비를 밝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선우가 다른 이들처럼 침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하선우였기에 강주한은 알면서도 숨어 있을 수 없었다.
“NnG의 신용등급이 하락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자료입니다.”
그는 서류가방 속에서 서류가 든 종이봉투를 꺼냈다. 테이블 위로 서류를 천천히 밀어 하선우의 앞으로 건네주었다. 비스듬하게 기울었던 허리를 똑바로 세운 하선우는 두툼한 자료를 인상 쓴 눈으로 내려다보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뻗지 않았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크라프트 재질의 거칠거칠한 종이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서류봉투와 강주한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본 그는 끝내 결심한 듯 단단하게 봉해진 봉투 끝을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은행의 파생금융거래, 업종 및 규모에 따른 신용종합평가모형, 신용평점에 따른 신용등급 분류, 부실예측모형의 구조, 실적에 따른 불가산평가법… 목차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보고서 내용을 그는 한 장 한 장 훑어보았다. 그는 마지막 장까지 빠르게 넘겨보았다.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데다가 김주안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대부분 의미 파악도 쉽지 않은 것들이라 새겨볼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봉투 속에 대충 쑤셔 넣고 테이블 위에 던졌다.
“와. 회사가 망한 이유를 마침내 알았네요. 이제 드디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겠어요.”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고 손바닥 위에 턱을 얹은 하선우는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약간의 명랑함이 뒤섞인 그의 말투에는 뒤틀린 심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하선우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얼굴로 접시 위를 내려다보았다. 포도를 손으로 집어 입안에 털어 넣고는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 뒤, 나초칩 위에 사워크림을 얹은 핑거푸드를 무료한 표정으로 씹어 먹었다. 그의 무미건조한 표정이 사라진 건 덜 익어 강한 산미를 풍기는 파인애플을 씹다 뱉어냈을 때였다.
하선우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두껍게 뽑아낸 티슈에 파인애플을 뱉어냈다. 그는 파인애플의 물크러진 형태가 보이지 않도록 몇 번이나 꼼꼼하게 티슈로 싸매 테이블 저편으로 밀어냈다. 그는 강주한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선심 써요?”
하선우의 공격적인 말에 강주한의 얼굴에 서서히 동요의 감정이 번졌다.
“이걸로 뭘 기대한 건데요.”
검지로 서류봉투를 두드린 하선우는 제 손끝을 쳐다보았다.
“이 자료를 준비하면서 했던 생각이 있을 거 아니에요.”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보다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보상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 차원으로 갚을 수만 있다면….”
“잠깐만요. 아니, 그전에.”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하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유… 아니 강주한 씨 경우에는 목적이란 단어가 어울리겠네요. 이 자료를 건넨 목적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내 의도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속셈, 아니 악의를 가졌다고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악의요? 하하. 그건 단어가 너무 센데.”
재미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하선우는 억지로 웃었다. 최대한 감정적으로 굴지 않으려 노력하며 하선우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눈을 굴리며 그는 지나온 시간과 기억을 되밟아보았다. 강주한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헤아리고 강주한의 눈빛과 표정을 가늠하고 분위기를 측량한 그는 갑자기 마음속에서 차가운 회의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강주한을 외면한 채 생각을 조금도 거르지 않고 말했다.
“강주한 씨 말솜씨 좋은 사람인 거 아니까 설득하려 하지 말고 왜 내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지 우선 좀 말해봐요. 오늘 내게 안신에 특허를 팔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죠. 강태한 뒤통수치게 시간을 끌어달라고. 나를 설득하려니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가 있었겠죠. 내 특허를 상대로 무효심판 걸었던 것도 마음에 걸리고, NnG의 부도 과정도 신경 쓰였을 거야. 그래서 선심 쓰듯이 심판청구를 취소하겠다고 말하고 이거.”
하선우는 강주한의 앞으로 두꺼운 서류봉투를 밀었다.
“이걸 주면서 NnG가 왜 부도나야만 했는지 알려주려고 했나 본데.”
가벼운 헛웃음을 흘린 후 그는 말을 이었다.
“원인을 알게 된다고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습니까? 그럼 이 세상 모든 피해자들은 상처 하나 없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이미 일어난 결과는 바뀌는 게 아니잖아요.”
조금씩 하선우의 목소리가 허물어지듯 작아졌다. 지독하게 곪아버린 염증을 간직한 사람처럼 잊고 있던 상처를 자극당해 무력하게 아픔에 골몰하는 눈으로 그가 말했다.
“당신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고 했죠. 그래서 날 설득하려고 이 늦은 밤에 찾아오고 날 감정적으로 휘둘러서 빈틈이라도 찾아보려고 했겠지만… 당신이 뭘 압니까. 당신이야 안 믿겠지만 난 정말 돈은 상관이 없었어. 빚더미에 앉은 구질구질한 거지새끼가 자존심 세우는 걸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난 강태한 그 개자식 말에 넘어가서 1억 달러를 탐내려는 간 큰 새끼도 아니고 당신들처럼 양심이 썩어빠진 인간도 아니거든요. 솔직히… 신용회복만큼은 꼭 하고 싶어서 안 흔들렸다면 거짓말이지만… 이제 와서 당신한테 뭘 기대한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빠르게 말을 잇던 하선우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끝을 흐렸다. 분노를 자제하려 했지만 숨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갑자기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내가 왜 하선우를 사랑하는지 생각하고 있다고 했죠.”
울지 않으려 애를 쓰던 그는 무심코 나약한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문득 감정이 북받치면서 사나운 말이 튀어나갔다.
“사람을 도구 취급하는 게 바로 당신 사랑방식이야?”
그 순간 강주한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격한 감정이 자신의 속을 한바탕 부식시키는 느낌을 가만히 방관했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억세게 닦아낸 하선우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작게 덧붙였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강주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하선우와의 다툼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믿음을 잃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하선우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거칠어졌다.
가방을 챙겨 자리를 떠나려던 하선우는 무심결에 가방으로 테이블 위를 건드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접시와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뜨거운 커피가 강주한의 손과 다리 위로 쏟아졌다. 얼어붙어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티슈를 건네주려던 하선우는, 입술을 깨물며 가방을 챙겨 몸을 돌리려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린다는 거 압니다.”
굳게 잠긴 목소리로 강주한은 말했다. 문을 향해 걸어가던 하선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강주한을 향해 반쯤 돌아섰다.
“난 변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해도 결국엔 오해할 테니까.”
그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가 손끝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톡톡 떨어졌다. 젖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그는 가슴팍을 크게 부풀려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하선우가 완전히 강주한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성큼 다가온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특허무효심판은 회사를 위한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NnG 부도는 업무처리 과정 중에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 그런 이야기가 회사, 아니 강주한 씨가 진심으로 내게 하고 싶었던 변명이겠죠.”
한 걸음 더 가까이 강주한의 앞으로 다가온 하선우가 인상을 쓰며 불안한 얼굴로 눈을 치떴다. 평소보다 훨씬 더 왜소하게 느껴지는 지친 표정의 그가 물었다.
“그럼 나는 어디에서 어떤 말을 들어야 해요?”
착잡하게 웃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강태한에게 가서 들어야 하나, 이석한테 가야 하나. 아니면 내가 망한 건 그냥 이유가 없는 건가?”
결국 여기까지 와버렸다.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왔지만 그는 더는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태까지 두 사람 사이에 직면한 진짜 문제를 무시해버리고 싶은 유혹은 너무나도 달콤하게 강주한의 속을 어지럽히곤 했다. 하선우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누군가에게는 재앙이고, 누군가에게는 사고에 불과한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그들은 늘 외면해왔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언론을 향해 들려주던, 일반적인 매뉴얼로 만들어진 아무런 구원도 없는 상투적인 표현들을 하선우에게 들려줄 수는 없었다. 화려한 수식을 제외하고, 감상적인 표현을 제거하고, 텅 빈 위로를 지워버리고 나면 대체 무슨 말이 남는단 말인가.
“…미안합니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늘 혀끝에 머물렀지만 내뱉은 적은 없었던, 담배를 피운 듯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한마디의 말. 그 말을 내뱉은 뒤에야 그는 자신이 무심코 어떤 말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서둘러 미안하다는 말을 포장할 만한 수식어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멍한 머리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없었다. 이런 보잘것없는 옹색한 진심으로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도… 미안합니다.”
그는 멈추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지만 속에서 말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타인으로 인해 느끼는 수치심은 강주한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지만, 입 밖으로 고해하지 않고서는 심장 안에 위태롭게 자리 잡아 그를 찔러대는 죄책감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겠죠. 하소연할 곳도 원망할 곳도 없겠죠.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대도 난 여전히 특허무효심판 청구를 걸었을 테고, 유책행위가 엘텍에 있지 않는 한 NnG의 부도를 법적으로 책임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미안합니다.”
형편없는 사과에 이 끝이 엉망이 되리라는 씁쓸한 예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묵묵히 밀고 나갔다.
“나는 내가 있을 자리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뱉은 말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깊은 혐오를 느꼈다. 스스로의 능력을 회의하고, 암초에 부딪히면서도 보전된 자리를 의심하는 법 없이 그는 결국 최고 CEO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게끔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가 가진 비전 역시도 그릇된 것일 수 있었다.
“내가 잘못된 패를 뽑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괴롭습니다. 선택에는 늘 대가가 따르고, 내 선택의 대가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니까.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다 움켜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니까.”
너의 쓸모는 너의 행복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격언으로 삼고, 시장의 논리를 초월하는 기업을 이끄는 부품처럼 살겠다는 각오를 다져왔지만 한편으로 그는 벽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잘살아보려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얼굴들, 개별로 존재하지만 구별되지 않고, 뭉텅이로 덩어리진 군중들을 상상해야만 했다. 가끔은 가슴을 찔린 듯 예민한 가책을 느꼈지만 누군가는 그에게 언젠가는 곧 무디어질 통증이라고, 그의 집행은 결국에는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강주한은 괴롭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다고 내가 단 한 번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빠르게 뱉어내던 말은 낯선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선우를 보자 제동이 걸린 것처럼 멈추어버렸다. 강주한은 자신이 뱉은 말이 갑자기 우스웠다. 그가 느낀 수치심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순간적인 망설임 끝에 그는 하선우의 손을 꽉 틀어잡았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내리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는 탁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 번만 더 견뎌줬으면 좋겠어. 일방적으로 이해를 바라는 내가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이게 어쩔 수 없는 내 바닥이니까. 추하게 느껴진다면 그 추한 면까지도 허물을 덮어줬으면 좋겠어. 상처를 입혀놓고 아픔까지 참아달라는 내가 뻔뻔하다는 건 알아. 그래도 난 당신이 필요해.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내 옆을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꽉 잠겼다.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고 서로를 괴롭게 만드는 한이 있어도 강주한은 하선우가 곁에 남아 있길 원했다. 강주한은 자신이 구질구질하고 추하게 굴고 있으며, 심지어 모든 걸 망쳐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하선우를 놓을 수 없었다.
하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주한은 섣불리 말 건네기를 삼간 채 침묵했다.
“강주한 씨 의외로 감상적인 사람이네요.”
하선우는 지친 듯 말했다. 강주한은 손끝이 하얀 밀랍처럼 핏기 없이 질릴 때까지 무의식중에 힘주어 잡고 있던 손을 뗐다. 아린 손목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쓴 하선우는 손바닥으로 손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시겠지만 난 감상에 젖을 겨를 없었어요.”
갑자기 피가 돌며 저리는 느낌에 주먹을 쥐었다 펴며 그는 말했다.
“헤어진 직후에는 특허 때문에 돌 것 같았고 곧바로 부도가 나서 빚더미에 올랐잖아요. 강주한 씨를 찬 건 전데 후회하긴 싫어서 감상적으로 굴고 싶진 않았어요.”
그는 돌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접시를 주워 테이블에 올려두고, 휴지로 바닥을 닦고, 커피에 젖은 서류를 수습했다. 고민하는 눈으로 문제의 발단이 된 서류뭉치를 내려다보던 그는 가방 속에 그것을 쑤셔 넣었다.
갑자기 환기된 분위기에 강주한은 가만히 서서 하선우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를 향해 망설이며 어렵게 내민 손길을, 하선우는 무람없이 단칼에 잘라낸 것만 같았다. 출혈이 일어난 손끝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고통인지 수치심인지 그는 좀 헷갈렸고 그래서 자신이 없었다. 얼떨떨한 눈으로 하선우의 움직임을 좇으면서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엉망이 된 주변을 대충 수습한 하선우는 긴 한숨을 내쉬며 가라앉은 기분을 추슬렀다. 가방을 양쪽 어깨에 걸쳐 메고 근처의 낮은 사각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품이 넓은 청바지와 공기로 부푼 패딩을 입은 그는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부드러운 살집을 가진 양순한 소년처럼 느껴졌다. 얼마간 고민 가득한 눈길로 강주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면 여러 가지로 생각 정리가 되잖아요. 순간순간 살기 싫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해본 적은 없었어요. 부도나고 빚 떠안고, 그 과정 다 처리하고 PC방에서 무기력하게 사는 동안 강태한을 조지고 싶었고, 석이 형도 조지고 싶었고 강주한도 조지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깊게 생각했던 건 다른 거였어요. 내가 정말 미련한 선택을 한 거였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강주한은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그거 하나였어요.”
하선우는 헐렁하게 무릎 위로 늘어뜨린 자신의 손바닥 위로 시선을 던졌다.
“내가 감상에 젖을 겨를이 없다고 했죠. 난 계속 궁금했거든요. 강주한이 내 선택에 대한 보복으로 부도를 내라는 압력을 넣었느냐, 아니었느냐.”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만큼 긴 한숨을 느리게 내쉰 뒤에 하선우는 말했다.
“고의였느냐, 아니었느냐. 원한에 의한 범죄였느냐 아니면 자존심만 남은 새끼가 NnG를 운영할 능력은 쥐뿔도 없었으면서 남 탓할 구실만 찾고 있는 거냐. 결론이 나야지만 내 인생이 갈릴 것 같았거든요. 뭐, 지금에 와서야 별것도 아닌 게 되긴 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게 저한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어요.”
재회하던 당시 강주한은 말했었다. 하선우의 무능력과 판단력의 결여가 NnG를 무너뜨렸다고. 그걸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하선우에게 남아 있는 것이 오로지 자존심 하나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만성적으로 앓고 있던 무기력을 떨쳐버릴 만큼, 그는 강주한을 가혹하게 난도질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하선우라는 사람이 원래 그러하듯, 그 감정은 일시적인 충동일 뿐이었다. 그때는 누군가를 향한 음성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부류의 사람들처럼 복수 외의 다른 가능성은 모두 봉쇄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직 증오를 원동력 삼아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미친놈이 될 수 없었다. 조그만 틈만 있으면 미움이 흩어져버렸고, 분노는 증발해버렸으며, 기껏 모았던 독기는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결국에는 속으로 화를 삭이며 복수를 해서 뭐할 거냐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마는 것이다.
강주한이 했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성격은 곧 무능력 그 자체였다. 이석에게 모질지 못했던 결과가 제 발등을 찍었으며, 멍청한 낙관주의가 사태를 이렇게 키웠다. 그의 말대로 하선우에게 남은 건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그는 복수할 용기도, 속이 썩어 문드러지도록 강주한을 미워할 용기도 없어 무력하게 현실도피를 선택했다. 그는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미워할 수 없었다. 강주한을 증오하는 삶은 그 스스로를 죽여나가는 짓이었다. 그랬기에 강주한이 고의로 부도를 냈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하선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하선우는 고개를 들어 눈앞을 성가시게 가리는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그는 대뜸 물었다.
“정말로 고의가 아니었단 말 맹세할 수 있어요? 서류 조작하고 없는 말 만들어내고 그런 거 아니죠?”
강주한은 산소가 부족한 사람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쉰 뒤에 고개를 저었다.
“변명같이 들리는 거 알지만 그런 지시를 내린 적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문제거든요.”
알겠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린 하선우가 불쑥 말했다.
“왜냐면 그건 용서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거든요.”
강주한은 인상을 썼다. 하선우의 입에서 너무 쉽게 흘러나온 용서란 말에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는 헛된 기대를 품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속 솔직한 욕망을 무시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목소리를 억누르며 물었다.
“지금 나를 용서한다는 겁니까?”
“예. 강주한 씨 지시가 아니라면서요.”
강주한은 하선우의 대답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미동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정의할 수 없는 기이한 떨림이 전율처럼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분에 넘치는 과분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지도 마냥 미심쩍어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던 그는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왜 갑자기….”
“조금 전에 그렇게 화를 냈으면서, 이제 와 이런 말 해봤자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거 압니다. 그렇지만 충동적으로 하는 말은 아니에요. 전에 강주한 씨 차 안에서 얘기 전해 들었을 때 생각 정리해뒀던 일이에요.”
하선우는 고개를 숙이고 의미 없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그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행동이 지나치게 산만하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이 기묘한 평화가 깨어질까,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무려 엘텍의 강주한 사장님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를 받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 아니에요.”
하선우는 앞니로 엄지의 손거스러미를 잘근거리며 떼어냈다.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뭉개 입술을 핥은 그는 말했다.
“물론 용서가 쉬운 건 아니지만.”
하선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떼어내며 아리도록 붉어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용서하려고는 했었어요. 그냥 나 마음 편해지고 싶어서요. 원망할 대상이 사라지면 연연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시 눈을 뜬 하선우는 먼 기억 속, 서로를 알기 이전의 강주한을 마주하듯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절벽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아무런 위기감도 없이 다리를 흔들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연상됐다. 이름을 부르면, 소년은 무심한 표정으로 뒤를 한 번 돌아보곤 아무런 미련도 없이 훌쩍 뛰어내릴 것만 같았다. 소년이 사라진 낭떠러지 끝에는 쨍하게 내리쬐는 칼날 같은 햇살과 푸른 하늘만이 가득하고. 그는 아마 상실감으로 눈이 멀어버릴지도 몰랐다.
강주한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는 인상을 쓰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러니까. 더는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강주한은 이런 상황은 조금도 예측하지 못해 끝이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왜 그런 결론이 나는지를 묻는 겁니다.”
“용서하겠다는 건 지나간 일을 더는 탓하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그건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거고,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사라지면 서로 기운 뺄 일 없으니까 좋잖아요. 앞으로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하선우는 띄엄띄엄 기력 없이 말했다. 하선우의 말은 앞으로 강주한과의 관계에서 벌어질 모든 일들에 대한 체념에 가까웠다. 그는 피식 웃으며 코를 긁었다.
“날 좋아해주는 건 고마워요. 솔직히 내가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말해줬을 때 깜빡 잊고 또 휩쓸릴 뻔했거든요.”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같은 남자가 왜 나한테 반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그는 누그러진 얼굴로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음. 우선 내 얼굴에 반했을 것 같긴 한데 근데 이 정도 얼굴은 흔치는 않지만 찾아보면 많을 것도 같거든요. 아니면 특허 때문인가? 뭐 그렇게 따지면 내 특허보다 괜찮은 특허는 세상엔 훨씬 많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 같은 남자가 왜 나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하선우는 머리카락을 살살 만지작거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냥 평생 시시하게 살다 갈 거 같거든요.”
강주한은 감정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상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선우는 진짜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어린애처럼 실없이 굴고 있었고, 자신은 그에게 아무런 자극도 줄 수 없는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말을 조금도 진지하게 듣지 않는 상대에게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던 강주한은 결국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기를 포기했다.
“이런 식으로 용서를 받고 단절을 당하느니 차라리 증오를 받는 게 낫겠군요.”
초조한 마음이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날카롭게 터져 나온 말에 하선우의 입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일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웃지 않는 하선우는 차갑고 서글픈 인상을 풍겼다. 그의 말은 하선우의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서툴게 봉합했던 상처를 건드렸다. 하선우는 추위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상체를 웅크리고 바닥을 응시했다. 하선우는 말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없습니다. 선택이 있다면 포기도 있는 거죠.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어요.”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강주한과 눈을 맞추며 괴롭게, 하지만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를 설득하듯 애정과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왜 당신은 다 가져야 하는데요.”
강주한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결국엔 하나도 포기 안 할 거면서 왜 나까지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데요.”
하선우의 말투는 온건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고집을 꺾지 않는 초연함이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혈을 집힌 것처럼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악인이라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가진 비전, 죄책감, 수치심도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거기까지예요. 당신이 날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엘텍을 구성하는 부품 중 하나인지 잘 구별이 안 돼요. 주한 씨의 최우선은 언제나 엘텍이고 당신이 가진 그 무엇도 부정할 생각이 없잖아요.”
마침표를 찍지 않고는, 밤새도록 결론 없는 얘기를 반복할 것만 같았다. 서로의 기운만 소진시키는 그런 소모적인 이야기는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선우는 말했다.
“당신과 나를 동등하게 생각한 적도 없잖습니까. 나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사랑이 소유하는 개념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하선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다스려야 했다. 말이 길어질수록 그의 안에서 미처 정리되지 못한 애정이 혼란을 부추겨 감정을 자극했다. 그 순간 팍 터져 나온 눈물이 꼴사나워 온 얼굴을 찡그려 급하게 눈물을 떨어뜨렸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선우는 결국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로 말을 이었다.
“나는… 고쳐 쓸 수 있는 로봇 같은 게 아니에요.”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 단절된 틈으로 시간이 사라진 것 같았다.
점점 잦아드는 울음소리는 강주한의 마음속을 어수선하게 뒤흔들었다. 강주한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날카로운 부끄러움이 채찍처럼 그를 난도질하는 느낌에 온몸이 뒤틀렸다. 눈물을 수습한 하선우는 수렁에 빠졌던 감정을 다시 건져 올렸다.
잔기침으로 목을 푼 그는 말했다.
“특허는 원하는 대로 넘길게요. 대신 저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하… 따라붙는 조건이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하선우의 말을 끊으며 강주한은 다급하게 말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을 억지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의 표정이 불안해졌다.
“이러지 마요.”
어떻게든 상황을 희망적으로 유지하려는 사람이 지을 법한 절박한 웃음을 지으며 강주한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게는 안 돼.”
강주한은 억지를 부렸다.
하선우는 시선을 피하며 휴대폰을 잠깐 꺼내어 어두운 화면을 들여다보곤, 다시 휴대폰을 쥔 채로 주머니 속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강주한은 왜 이런 순간까지도, 하선우가 휴대폰 따위에 신경을 기울이고 생각을 낭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에게는 하선우의 진심을 움직일 단 한마디의 말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머뭇거리다 두 팔을 벌려 하선우를 껴안으며 정수리에 입술을 파묻었다.
“떠난다는 말 대신 내게 원하는 걸 얘기해줘. 내가 줄 수 있는 걸 얘기해줘요.”
하선우의 몸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는 강주한을 마주 안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서 축축하게 땀이 솟아올랐다.
“내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선우는 강주한을 자극하듯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강주한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하선우의 뺨을 꽉 쥐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는 하선우의 찡그린 눈 속에서 불쑥불쑥 치솟아 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읽었다.
“내가 정말 곁에 있길 원해요?”
강주한은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당신 생각을 …문득문득 했어요.”
하선우는 나직이 숨을 죽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선우는 강주한을 무언가로 후벼버리고, 그의 것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싶은 괴로운 욕구를 느꼈다. 자신은 여전히, 아니 그 이상으로 눈앞의 탐욕스러운 사내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그에게 좀 더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내가 당신에게서 뭔가를 훔쳐간다고 해도 여전히 날 사랑할 자신이 있는지를.
눈물은 완전히 말라 있었다. 충혈된 눈과 붉어진 눈가는 하선우를 병색이 완연한 환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강주한은 곁에 머물러달라 말하면서도 그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선우는 지금껏 강주한에게서 빛나는 무엇을 착취해본 적 없었지만,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그에게 무언가를 포기하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법과 윤리, 언론, 어떤 통제와 간섭도 받지 않고 기업의 규모를 키우고 확대시켜나가겠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를 꺾어버리는 일이 가능하긴 할까?
그는 강주한이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 중 하나가 자신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고 싶었다.
하선우는 뺨을 감싼 강주한의 손을 떼어냈다. 자신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강주한의 손을 거머쥐고 그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묻었다. 한참 뒤 고개를 든 그는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아무것도 줄 필요 없어요. 당신에게서 내가 직접 훔쳐 갈 거니까. 곁에 남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요.”
하선우는 강주한의 손을 놓았다. 뒷걸음질로 그에게서 멀어진 하선우는 곧바로 몸을 돌려 복도로 뛰쳐나갔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강주한이 뒤늦게 하선우를 뒤따라 나왔지만 그는 이미 복도 비상구의 계단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