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The Thieves
강태한은 비서로부터 건네받은 파일에 암호를 입력했다. 복사하거나 인쇄할 수 없도록 보안처리 된 파일은 소위 증권가 찌라시로 불리는 사설 정보지였다. 파일이 열렸다. 3페이지 남짓 내용을 간추려놓은 목차가 보였고, 말미에 경쟁 정보지 회사의 정보가 별첨으로 붙어 있었다.
그는 간단하게 목차 내용을 훑었다. 아이돌 출신 J배우의 인성 관련 소문과 연예인 A와 국회의원 K의 약물복용 찌라시, C모 의원의 취중발언을 통해 공개된 K기업 CEO의 사생활 녹취기록, H그룹의 정국 현안에 대한 입장 등 확인되지 않은 온갖 소문이 최종정리된 형태로 가공되어 있었다.
이번 주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찌라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강태한 역시 찌라시 속 단골 소재였다. 프리랜서 작가들과 정보시장에 접속해 있는 ‘선수’들은 늘 강태한을 주목하는 편이었는데, 주로 그가 일으키는 연예인과 관련된 추문을 주워듣기 위해서였다. 절반은 허위사실이었고 절반은 사실에 근접했지만, 사설 정보지에 언급됐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진위와 관계없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추문에 반응했고 강태한은 늘 그 악의적인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소문들로 인해 형성된 이미지는 늘 그를 패자로 만들었다. 강태한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냉담했고, 그는 엘텍 가문에서 악의 축을 담당해야만 했다. 그는 어차피 악역을 담당해야 한다면 단칼에 사라지는 역할이 아니라, 진득하게 살아남아 악당이 이기는 결말을 맺고 싶었다.
강태한은 최근 연예인 담당 찌라시를 작성하는 특정 프리랜서 주변에 소문을 흘렸다. 그는 사설 정보지 중에서도 하급으로 분류되는 찌라시 업체와 거래를 하는, 소위 작가로 불리는 프리랜서였다.
기업체 정보 담당도, 국회위원 보좌관 출신도, 전직 국정원 직원도 아닌 연예인 찌라시나 만들던 스포츠 기자 출신 작가에게 흘린 소식은 제법 그럴싸한 정황이 담긴 엘튼 장학회 관련 정보였다. 그가 주워들은 정보는 고작 세 줄짜리 간략한 소문에 불과했지만, 여의도와 논현 일대의 단란주점을 거쳐 1차 가공되었고, 그럴싸하게 부풀려져 상품화되었다. 하급업체를 통해 급하게 배포된 찌라시는 대부분 괴소문으로 취급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관심 있는 누군가는 이 소문을 바탕으로 재조사에 들어갈 것이고 아마 며칠 후에는 CEO와 사정기관 관계자, 언론인 회원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CEO 리포트나, 한민신문의 프리미엄급 정보지에 좀 더 상세한 소문이 실릴 것이다.
그는 페이지 목차를 클릭했다. 그가 흘렸던 소문과 유사한 내용의 문건이 드러났다.
‘엘텍과 안신의 상속소송의 결말은? 임용화 사전 승소설’ 자극적인 제목 밑으로 엘튼 장학회의 회장과 법조계 인물들이 사전에 교감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며, 엘튼 장학회 회장인 임용화의 주도로 상속 소송분쟁의 판결 권한을 가진 법조계와 ‘빅딜’이 있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임용화 회장의 최측근인 노도현 변호사와 검찰 특수단 인사가 진술을 짜 맞추는 동영상 자료가 있으며, 영상을 입수하기 위해 안신과 엘텍에서 혈안이라는 소문이 ‘임용화 사전 승소설’의 골자였다.
문건을 모두 읽은 그는 느리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실명이 거론된 사설 정보지의 내용은 곧 이니셜 처리되어 공식 언론을 제외한 온갖 매체를 통해 퍼져나갈 것이다. 강태한과 연예인, 강태한과 마약, 강태한과 도박, 그와 관련된 온갖 추문이 그러했듯이. 강태한이 하급 사설 정보지 업체를 선택한 이유가 소문을 거의 가공하지 않고 ‘날것’을 그대로 싣는 업체이기도 했지만, 가장 빠르게 소문을 퍼트리는 업체인 까닭도 있었다. 퍼져나간 소문은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날고 기는 재벌이라 할지라도 없애버릴 수 없었다. 소문의 원인이 된 증거물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그런 면에서 강태한은 가벼운 불안함을 느꼈다. 하선우 그 개자식이 자신이 차려놓은 밥상에 재를 뿌리는 게 아니라, 아예 밥상 자체를 뒤엎어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문득문득 드는 탓이었다.
강태한은 어제 마지막으로 하선우와 통화한 이후 보고받았던 그의 행적에 대해 생각했다. 전 회사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하선우는 놀랍게도 이미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주한과 마주쳤다. 보고에 따르면, 강주한은 특허 관련 건으로 이야기를 나누려 했던 모양이지만 대화가 잘 풀리지 않았고, 하선우는 거의 도망치듯이 그의 부모님 집을 나와 종적을 감췄다가, 몇 시간 뒤 그가 늘 찾던 PC방으로 돌아와 게임에 접속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열네 시간째 게임에 접속해 있었고, 자장면을 PC방으로 배달시켜 점심 겸 저녁을 때웠다고 했다. 여차하면 납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파트와 PC방 주변에 강주한과 임경호가 심어놓은 사람들이 있어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컴퓨터를 종료한 그는 초조한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의도 바닥에 엘튼 장학회 비리와 관련한 소문을 흘린 뒤로 그는 계속 신경이 다른 데 쏠려 있었다. 호텔 업무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심장이 거슬릴 정도로 빨리 뛰었다. 찌라시가 단순한 소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의 구체적인 수사로 이어지고, 엘튼 장학회의 비리조사로 연결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모든 걸 망쳐버리기 전에 그가 떠안은 폭탄을 누군가가 비싼 값에 사들여야만 했다.
마음을 졸이며 넓은 사무실을 산만하게 걷던 강태한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얼굴이 부석부석 메말랐다. 거울을 보며 튼 입술을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임경호로부터 온 전화였다. 강태한의 표정이 즉각 미묘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야.”
잔뜩 날을 세운 목소리에 건너편에서 건조한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녁 약속 잡지.
강태한은 축배를 마셔야 할지, 아니면 잔에 든 술을 들고만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인상을 썼다.
“왜?”
-네가 흘렸다는 소문 꽤 구체적이던데. 너무 구체적이라 검찰 쪽에서도 의심했을 거야. 사설정보지 만들었던 업체 이름은 참새, 프리랜서 작가 이름은 소네트. 소네트에게 소문 물어다 준 양아치 새끼들 패다 보면 그 윗대가리가 너인 거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야.
눈을 부릅떠 이마에 주름을 잔뜩 만들며 그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 가만히 눈을 굴렸다. 음성을 녹음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모호한 대답을 골라 말했다. 이 모든 게 하선우 그 새끼 때문에 생긴 버릇이었다.
“내가 한 일도 아닌데 그런 헛소문은 뭐하러 신경 써. 그래서 오늘 저녁 약속 잡자고 한 이유가 뭐야. 사겠다는 거야?”
전화 건너편에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강태한이 말을 돌리는 이유를, 흐리터분하게 대답을 피해 가는 까닭을 짐작한 임경호가 잠시 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나만 있는 거겠지?
“그래. 장치째로 뜯었으니까 하나일 수밖에.”
CCTV 영상이 저장되는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뜯어 그만이 알고 있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장소에 숨겨놓고 있었다. 음성을 녹음한 사본 파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걸 지금 당장 임경호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오늘 저녁 7시까지 물건 들고 집으로 찾아와.
“그건 좀 곤란한데.”
-뭐?
“물건 들고 가는 건 곤란하다고. 오늘 늦게 가족모임 있을 거야. 말썽꾸러기 막내아들이 토라졌으니 어떻게 하면 요 막가는 놈을 달래줄 수 있을지 노인네들이 머리 좀 굴릴 거 아냐.”
강태한의 신이 난 말투에 임경호의 목소리가 더없이 낮아졌다.
-그래서?
“경호 형이 나한테 쥐여 주는 사탕? 엄마 아빠가 나한테 쥐여 주는 사탕? 어떤 게 더 맛있어 보이는지 고민 좀 해보려고.”
맹랑한 강태한의 목소리에 한동안 임경호에게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긴 한숨이 들려왔다. 임경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선우도 같이 만났으면 하는데.
“하선우?”
-네 물건 거래는 미룬다고 쳐도 특허 건은 빨리 마무리 지었으면 하는데. 하선우한테서 별다른 피드백이 없는 걸 보면 키는 네가 쥐고 있는 모양이지?
“뭐 그런 당연한 걸 물어봐.”
코웃음을 치며 거울 앞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화를 받기 전보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상태로 통화를 끝낸 그는 팔짱을 끼고 자신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입안을 공기로 부풀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이기도 하면서 거울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그는 하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6시까지 엘튼 호텔 로비로 뛰어와.”
그는 건너편 벽에 매달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짜증 가득한 말대답이 들려온다.
-아, 왜!
“뭐? 왜? 너 지금 왜라고 씨불였냐?”
강태한은 하선우가 있는 PC방 앞으로 차편을 보내줄까 고민했지만, 하선우의 짜증에 손톱만큼 남아 있던 배려심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그래, 왜라고 했다. 나 지금 취업준비 때문에 바쁘거든?
“지랄하네. 지금 게임 접속한 거 다 알거든? 튀어나오라고 하면 잔말 말고 재깍 나올 것이지 더럽게 말이 많아.”
-…너 지금 감시하냐?
“같잖은 소리 하지 말고 6시까지 와라.”
갑자기 전화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간간이 하선우의 숨소리만 들려올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한참 뒤 하선우는 물었다.
-계약해?
“간 보는 것도 계약하는 것도 다 내가 결정하니까, 넌 의문 갖지 말고 그냥 내가 지시하는 대로만 해. 그리고 올 때 사본 파일 가져와. 네 입으로 약속했다. 특허계약 하는 대로 파일 없애겠다고.”
하선우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야, 대답해.”
-그랬었지.
“가져와.”
-알았어.
말끝을 흐리는 하선우의 목소리가 미심쩍었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강태한은 휴대폰을 힘주어 붙들고 코로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쥐었다.
“너 설마 사고 치려는 거 아니지?”
-사고 안 쳐.
“농담이 아니야. 제발, 제발, 제발 내 기분 상하게 하지 마라.”
강태한은 그를 너무 몰아붙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하선우가 소심한 성격이라고는 해도 일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를 자극해봐야 좋을 건 없었다. 강태한은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는 대신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 달래듯 말했다.
“6시까지 엘튼 호텔 로비로 와. 기다릴게. 하선우 너도 다 잊고 새 인생 시작해야지.”
하지만 부드러운 느낌을 주려 억누른 목소리는 오히려 어색한 긴장감만 낳을 뿐이었다. 하선우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통화는 이미 꽤 오래전에 끊어져 있었다. 어두운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본 강태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자.
그는 눈을 감고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견뎌보려 했다. 참을 인 셋이면 살인을 면하니, 주제파악도 못하고 까부는 하룻강아지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하선우의 인생도 참으로 딱하지 않은가. 입술이 가늘어지도록 입꼬리를 잔뜩 당기며 그는 컴컴하게 웃었다.
* * *
사설정보지 업체에 유통되기 시작한 정보는 엘텍 정보팀에서 바로 이틀 전에 입수했고, 검찰 측에서는 조금 늦은 오늘 오전, 찌라시가 풀리기 직전에야 입수했다. 그러나 이미 시중에 풀린 정보를 수습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설정보지, 즉 찌라시는 생산과 공정 단계가 거의 첩보 수준으로 은밀했고 참여인원도 각계각층이었다. 확인된 사설정보업체만 20곳이 넘었고, 비공식적인 업체의 수는 파악조차 불가능했다.
찌라시 정보는 강태한이 말한 사실과 일치하기는 하지만 상당 부분 정보공개가 제한적이었다. 그가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강태한은 여러 가지 면에서 거대한 폭탄을 떠안고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도현 변호사와 검찰청 특수단이 진술을 짜 맞춘 내용뿐만이 아니라, 영상 속에는 어머니까지 등장했다. 게다가 노도현과 어머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속에 장학회 돈이 세탁된 경유와 사용처까지 담겨 있다고 했다. 문제는 찌라시로 인해 안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조직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지가 멀지 않은 이때 갑자기 나타난 암초에 침몰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애초에 자신의 무리한 욕심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왜 당신은 다 가져야 하는데요. 결국엔 하나도 포기 안 할 거면서 왜 나까지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데요.’
몸속에 하선우의 목소리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따금 들려오는 하선우의 목소리는 그를 마비시키고 그의 사고체계를 정지시켰다.
“사장님. 사장님?”
강주한은 그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오래전에 자동차의 시동을 끈 안 비서가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엘튼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주한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강태한이 집무를 보는 층수를 눌렀다. 넓은 복도를 걸으며 무표정하게 서 있는 다수의 경호원들을 지나쳤지만,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신 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 강주한을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크 없이 강주한은 문고리를 비틀었다. 육중한 무게의 나무문을 밀어젖히자 낭비에 가까운 넓은 집무실이 드러났다. 유리벽 너머로 서울의 밤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깝게는 을지로 일대를 가득 채운 빌딩부터 멀게는 청와대, 경복궁, 그리고 북악산까지도 보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지만 완전한 밤이 찾아오지는 않아 볕의 자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곳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강주한은 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무균실 같은 집무실 속에서 강태한은 널찍한 중역 책상에 두 다리를 걸치고 결재할 서류를 읽고 있었다.
“일어나.”
“나 일하는 중이잖아.”
서류철에 가려 강태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강태한의 앞으로 걸어가 서류철을 빼앗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집에 가자. 할 일 있어.”
“선약 있어.”
못 미더운 표정을 지으며 강태한은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강주한은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누구. 임경호?”
강태한의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갔다.
“응. 경호 형이 나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
“카지노 건설 건으로 할 얘기가 있어.”
천천히 굴러가던 눈동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한계까지 벌어졌던 의자 등받이 각도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비서를 호출해 자신의 외투를 찾았다.
“아, 경호 형이랑 선약 잡았는데. 어쩔 수 없이 취소해야겠네. 피는 물보다 진하다니까.”
“내 차로 이동하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알았어.”
강주한은 집무실을 나서려 먼저 돌아섰다. 비서가 뒤에서 벌려주는 코트를 껴입으며 매무새를 점검한 강태한은 불현듯 생각난 투로 물었다.
“아버지도 계시지?”
강주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고리를 돌리던 그대로 멈추어 서서 대답했다.
“그래. 어머니도 알고 계셔.”
강태한은 코트 깃의 테두리를 따라 목도리를 걸치는 것을 돕던 비서의 손길을 성가시다는 듯 밀쳐냈다. 그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강주한이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간 뒤에도 강태한은 한동안 말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강태한은 벽에 걸린 시계로 초점을 옮겼다. 5시 29분. 약속 시간까지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임경호 사장한테 전화해서 약속 내일로 미루자고 전하세요.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못 만나겠다고 해줘요. 아, 그리고 30분 후에 하선우가 호텔 로비에 도착할 겁니다. 호텔 빈방에 가두고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아놓고 있으세요.”
“하선우 씨가 외부로 연락할 수도 있으니 휴대폰이나 기타 연락수단을 압수할까요?”
강태한은 흥미로운 눈으로 비서를 내려다보았다.
“빼앗아서 잠시 맡아두고 있어요. 곧 데리러 가겠습니다.”
집무실 밖으로 나온 강태한은 강주한이 기다리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의 모서리 벽만을 쳐다볼 뿐 서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늘 강주한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안 비서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한옥마을과 카페거리를 관통하는 이차선 도로를 천천히 달리는 동안 강태한은 노변 주위로 그들의 차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짜증스러운 눈길로 내다보았다. 연말이었고, 북촌은 관광객들이 찾는 서울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였다. 그는 지금 긴장으로 과민했고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갑한 차 안에 처박혀 있는 상태가 못 견디게 답답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그는 강주한을 향해 몸을 획 돌렸다.
“어제 하선우 찾아갔다며.”
태블릿PC로 보고서를 확인 중이던 강주한의 옆모습이 흔들렸다.
“선물까지 싸 들고 갔다더니, 특허 때문에 찾아갔어?”
강주한을 향해 완전히 몸을 틀며 강태한은 차량 냉장고 안에서 탄산수를 꺼냈다. 뚜껑을 비틀어 딴 그는 시원한 얼굴로 말했다.
“결과가 안 좋았나 봐? 분위기 구렸다고 들었어.”
“우리 일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는데.”
“우리 일이라니. 하선우의 일이 곧 내 일이잖아. 잊었어?”
강주한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뒷목을 헤드레스트에 기대었다. 그는 비스듬하게 시선을 내리깔아 강태한을 보았다. 마치 벌레를 밟아 으깨버리고 싶다는 듯이.
“아니면… 진부하게 다시 시작해보자. 뭐, 그런 이야기라도 하러 간 거야? 로맨틱해라.”
드물게도 강주한의 얼굴에 짙은 감정이 드러났다. 그의 가슴팍이 느리게 부풀었다. 마치 피가 솟구친다는 듯이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강태한은 숨을 고르게 내쉬려 노력하는 형제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강태한은 비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형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차 안에 다시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번화한 상가를 지나고 미술관과 단독주택이 늘어선 일대를 지나 북한산 부근의 사유지로 들어섰다. 강태한은 한남동에 전세로 얻은 주택에서 주로 머물렀기에 부모님이 있는 삼청동을 찾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거대한 활엽수 두 그루가 저택을 절반씩 나누어 뒤덮은 풍경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났다. 형제들이 유년기부터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곳이자, 아버지의 묵인 속에 서로의 쓸모와 가치를 파악하기 시작한 장소였다. 저택이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집 안이 댐 속에 가라앉은 수몰 마을처럼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희원이랑 여희는?”
“취임식 끝나고 예진이가 미국 데려갔다. 두 달 뒤에 데려올 거다.”
“와, 형 진짜 불량 아빠구나.”
강주한은 강태한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코트와 재킷, 넥타이를 벗어 고용인에게 맡기고 그는 곧바로 입구의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2층의 식당에 식사를 준비해두었다는 고용인의 말에 강태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긴장으로 굳어졌다. 운동경기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그는 손목의 근육을 비틀고, 고개를 돌려가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가벼운 심호흡 끝에 강태한은 형제의 뒤를 따라 홀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탁은 간소하게 차려져 있었다. 집어 던져도 치명상을 입을 만한 묵직하고 날카로운 자기그릇은 없었지만, 단 한 가지. 반주로 곁들이려 아버지 근처에 놓은 백일주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에 뵙네요.”
강태한은 자신에게 따라붙는 아버지의 매서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의자를 끌어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젓가락을 들어 그의 앞에 놓인 반찬을 하나하나 뒤적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집밥 먹는다고 기대하고 왔는데 반찬이 별것 없네. 어머니도 같은 여자라고 요리하는 사람한테 감정이입하고 그래요? 그래서 대충 차려도 된다고 봐주고 그러나?”
임용화는 더는 들어주기가 힘들어 괴로운 얼굴로 외면했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제한이 강태한의 앞으로 검은 무언가를 던졌다. 그릇을 요란하게 밀치고 강태한의 앞으로 서류철 하나가 미끄러졌다.
반항하는 한마디를 보태려던 강태한은 자신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긴장한 얼굴로 서류철을 펼쳤다. 그 속에는 그가 흘렸던 소문, ‘임용화 사전 승소설’에 관한 찌라시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는 서류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전에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사고 칠지 모른다고.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사고를 칠 수도 있다고.”
소리나게 서류철을 닫은 강태한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예. 이거 제가 한 짓이에요. 놀기 좋게 판 좀 깔아봤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제한은 바로 앞에 놓인 술병을 집어던졌다. 강태한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병은 맞은편 벽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강태한의 숨소리가 서서히 거칠어졌다. 그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턱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노도현 변호사가 검찰청 특수단과 진술 짜 맞춘 장소에 어머니도 등장하던데요. 장학회 돈이 세탁된 경로, 사용처까지… 그러게 왜 경솔하게 집 밖에서 그런 얘길 떠드셨어요. 낮말도 밤말도 CCTV HD 카메라가 듣는 세상인데.”
“태한아.”
피식 웃음을 터트린 강태한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머리를 가볍게 털어내며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저한테 CCTV 영상 백업된 하드디스크 있어요.”
우습게도 강태한은 이 순간 그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 자리에 그의 어머니가 없길 바랐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을 테니까. 잠자코 있던 강주한이 냉랭하게 끼어들었다.
“태한이가 카지노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 순간 강제한의 얼굴 위로 우둘투둘한 혐오의 감정이 서렸다.
“카지노? 아직도 카지노 타령이냐.”
강제한은 막내아들의 교활하고도 어리석은 면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외삼촌과 어머니의 상속분쟁을 염두에 두고 벌인 일입니다. 어머니가 재판에서 상속받은 돈과 사내유보금을 합쳐 마카오나 제주도에 메가톤급 카지노 호텔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강태한을 향해 있던 강제한의 분노 가득한 감정이 강주한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강주한을 뚫어버릴 듯이 바라보았다.
“네 어미를 진흙탕 싸움에 끌어들이면서까지 짜던 판은 내팽개치고? 쓸모없는 녀석.”
강주한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적대감을 드러내는 대신, 냉정을 찾으려 했다.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턱관절이 단단하고도 질기게 도드라졌다.
“아버지. 형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형이라고 별수 있었겠어요? 생각해보니까 마카오에서 카지노 건설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고요. 마침, 제주도에 매입해둔 부지도 있겠다, 제주도 땅에 카지노 세워주세요.”
강제한은 코웃음을 흘렸다. 강제한은 그의 아들을 이해하면서도 물러터진 면을 멸시했다. 그가 강주한이었다면 CCTV를 세상에 공개하는 시나리오를 한 번쯤은 고려해보았을 것이다. 유상증자를 통해 안신전자의 대주주로 올라서는 계획을 완수하고, 세상이 그들을 향해 퍼붓는 온갖 악담과 혐오를 감수하며 차라리 악어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강제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로서도 기업에 막대한 이미지 손상을 입히고, 그의 아내를 옥살이시키는 선택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장 큰 위협은 따로 있었다. 그의 막내아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데다, 권위에 도전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더 큰 문제는 찌라시로 인해 다른 조직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부조직 중 일부는 믿을 만한 찌라시를 잡고 전략을 세운 뒤 정보보고서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정보를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엘텍은 정부의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 살얼음판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사용인에게 지시를 내려 반주를 내오도록 했다. 침묵 속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침내 그가 벽에 집어 던졌던 병과 같은 백일주가 식탁 위에 올랐고 강제한은 손수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제주도 카지노 건설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그는 인상을 썼다.
“하지만 엘텍도 메가히트 호텔 카지노를 건설할 때가 됐지.”
그는 여전히 불쾌한 투로 말했다.
“네가 관광사업 주무부서 인물들을 관리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게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군.”
강태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성과는 없었어요. 그래서 드리는 부탁인….”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댄스음악에 강제한은 거슬리는 기분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강태한은 못마땅한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의 비서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하선우와 관련된 전화임이 분명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의 눈치를 살피며 고심하던 그는 결국 수신을 거부해버리고 조금 전에 하던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강제한은 어림없는 일이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태백에서 반발이 심할 거다.”
국내 유일의 내국인 카지노 허용 시설인 강원랜드는 변변한 산업기반이 없는 폐광지역의 생명줄과도 같은 곳이었다. 내국인 카지노인 강원랜드가 태백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가운데, 제주도에 내국인 카지노, 그것도 메가톤급 카지노 호텔을 건설한다면 사북, 고한, 태백 지역의 거센 저항에 휩싸일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강태한의 시선이 강주한에게로 옮겨갔다.
“형이 도와주면 되잖아요.”
강제한은 무슨 의미인지 눈으로 물었다.
“서동현 의원. 주한 형 장인어른한테 도움 청하면 되잖아요.”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강주한의 표정이 비릿해졌다.
서유임의 아버지이자, 야당 최고의원인 서 의원은 제주 도지사는 물론 태백시와 정선군의회, 군수협의회와도 깊은 연고가 있었고 오래전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추진에 힘써온 인물이었다. 강주한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서 의원님이 폐특법 제정에 힘을 쓰긴 했지만 강원랜드와 제주도 카지노 건설은 사업 성격부터가 달라.”
“카지노 세워주기 싫어? 그럼 그냥 어머니가 상속받은 재산 나한테 다 넘겨버리고 끝내? 내가 야금야금 그 돈 다 쓰고 날려버리면 좋겠어?”
강주한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그의 신경은 아버지에게 닿고 있었다. 무언가를 뒤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고 있는 무표정한 장남의 얼굴을 아버지는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강주한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떼쓰는 아이처럼 굴지 마.”
“내가 나만 잘 먹고 잘 살자고 그래? 다 우리 잘되자고 이러는 거잖아.”
강태한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그의 목소리가 꿈을 꾸는 듯했다.
“아버지. 조선, 철강, 건설, 잘나가던 주요 산업 모두 위기 맞고 있잖아요. 전자, 화학, 자동차 사업이 언제까지 승승장구하리라고 생각하세요. 우리도 돌파구를 찾아야죠. 중국은 부상하고 일본은 부활하는데 국내 투자성향은 저하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모험할 필요가 있어요? 내국인과 외국인이 모두 찾는 제주도에 카지노라는 안정적인 수입처가 있는데!”
동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아버지의 비웃음이 강주한을 점점 더 한계선 밖으로 몰아붙였다. 주변 공기가 끓어오르는 것 같아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미칠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고, 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분노가 만滿으로 차고, 해소되지 않은 울혈이 덩치를 키워나가던 어린 시절의 그로 다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결국 그는 괴로운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내 말이 웃겨?”
“그래.”
그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기분 나쁜 악몽을 쫓아내듯이.
“그래서 고작 원하는 게 카지노라고?”
그의 입가에 경멸과 흡사한 조소가 흘렀다.
“카지노? 좋지. 인간의 쾌락에 올라타라. 술, 담배, 도박만 한 보증수표는 어디에도 없지. 차라리 국내 최대 규모의 양조장을 만들어보는 건 어때. 그게 훨씬 더 경제적일 것 같은데. 실은 술에 취한 난봉꾼 이미지보다 카지노 재벌이 좀 더 그럴싸해 보여서 그래?”
“비웃지 마!”
자리에서 일어난 강태한이 분노에 차 강주한에게 덤벼들었다. 강주한은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넌 내 앞길을 막느라 바쁘지.”
“아니야!”
강주한은 저항하려는 강태한의 손을 잡아챘다. 차가운 손바닥을 힘껏 비틀어 잡아 치워내고, 강태한의 멱살을 잡은 그는 낮은 숨을 식식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덕분에 엘텍전자 보유한 요소기술, 엘텍 계열사가 보유한 이차전지 기술과 생산시설까지 모두 날려버리게 생겼어.”
강주한의 이마에 툭 혈관이 불거지고 눈에 핏발이 섰다. 목구멍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감정을 비틀어 짜냈다.
“차세대 기술 투자엔 시기가 있고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 이건 빌어먹을 치킨게임이야. 네가, 네가! 엔진을 꺼버리면 미래 자동차 수준 격차가 기술선도국에 비해 자그마치 5년이나 뒤처지게 돼버린다고! 아직 기회가 있는데 왜! 왜 그래야 해! 왜!”
강주한은 난폭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멱살이 잡힌 채 강주한을 올려다보고 있던 강태한의 얼굴이 목이 졸린 사람처럼 온통 붉게 변해 있었다. 숨쉬기가 버거웠지만 도리어 그의 표정은 점차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강태한은 가늘게 뜬 눈으로 오래도록 형제의 얼굴을 응시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강태한은 얼음처럼 차끈하고도 매끄러운 손바닥을 강주한의 손등 위에 포갰다.
“하선우.”
그는 강주한만 들리도록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치정싸움 때문에 얻어터진 이후로… 형이 이렇게 열받은 모습 처음 봐.”
강주한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확인한 강태한은 코에 잔주름이 지도록 찡긋거리며 웃었다. 멱살을 잡은 손아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그는 강주한의 옆얼굴에 살짝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보기 좋다. 형이 흥분한 모습.”
강태한은 만족스러운 나머지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형제는 지글지글 분노가 끓어오르는 투사이지만, 자신의 무력함을 어쩔 수 없이 시인해야 하는 패배자였다. 그런 형의 모습이 그를 심란하게 만드는 동시에 떨리게도 만들었다. 그는 형의 머리를 마구 벽에 찧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멱살을 잡은 손을 떼어내고 점잖게 뒤로 물러났다.
그는 웃음이 새어나갈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구겨진 옷깃을 펴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일부러 자극하는 말을 했다.
“조바심 내지 마. 우리가 언제부터 기술로 세계 일류 타이틀을 땄다고 그래.”
그는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깟 로열티 좀 내면 어때서 그래. 엘텍은 영원히 기술종속 기업으로 남고, 카지노로 대한민국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배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강주한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혓바닥이 입천장에 들러붙고 타는 듯한 갈증이 그를 목마르게 했다. 그는 급하게 손을 뻗어 냉수를 단번에 비워냈다.
질린 얼굴로 입술을 틀어막고 있던 어머니에게서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그는 그제야 같은 공간 안에 부모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강주한은 날카롭게 웃었다. 기분이 너무나도 이상했던 탓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으려 노력했고, 늘 스스로를 점검하며 살아왔다. 엘텍을 위한 도구로, 수단으로 살아오면서도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조금도 서글프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삶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사랑의 방식마저도 닮아버렸다. 누군가를 도구로 여기고, 소유하는 개념에 아무런 문제점을 깨닫지 못하게 됐던 것이다.
강주한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빛을 거의 보지 않아 창백한 피부와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 감정이 메마른 눈빛, 비뚜름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선악이 모호해 보였고 의뭉스럽게 느껴졌다. 누구도 나에게 함부로 다가오지 마라, 나의 권위에 도전하지 마라. 그 눈은 그런 말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의 강제한은 흥미로운 눈으로 아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강태한과 강주한이 나누는 대화가 꽤 논쟁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을 자극하는 주제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카지노 건설과 엘텍전자의 미래사업 투자. 그는 저울에 두 가지 사안을 올려놓고 현실적인 맥락에서 판단하는 중이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그들에게 간섭받지 않는 자본을 불러다줄 시스템.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강태한과 외부로부터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카지노를 선택할 것이다. 그 대가로 양심이 필요하다면 아무런 가책 없이 값싸게 팔아치울 것이다.
양심이라니. 강주한은 불현듯 떠올린 그 단어가 우스웠다. 그 역시 안신의 비자금을 추적하고, 어머니의 뒤에 숨어 판의 규모를 키웠을 때부터 이미 기업윤리 따위는 저버리고, 값싸게 양심을 팔아치우지 않았던가. 그는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반성하지 않을 자신을 잘 알았다. 똑같은 욕심 때문에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여전히 착취하고, 모든 것을 망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강태한이 강주한을 자극하기 위해 뱉어낸 하선우의 이름으로 인해 그의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가 떠올랐고, 그는 처음으로 묻고 싶어졌다.
“아버지. 왜 우리는 다 가져야 합니까.”
하선우의 말이 가슴을 얼얼하게 찔렀다. 강주한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담은 눈으로 아버지를 직시했다.
강제한은 먼 풍경을 조망하듯 그의 아들을 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전과 달라진 변화를 감지했다. 일견 이상할 것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눈의 상하가 뒤바뀌어 있고, 입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마거릿 대처 효과가 적용된 필터를 아들의 얼굴 위에 씌워놓은 것 같았다. 분명히 무언가 낯설고 기괴하게 변해버렸는데 그 미묘한 변화를 그의 뇌는 단번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강제한은 불쾌함과 호기심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들은 여느 때보다 감정적이었고 미친 사람 같았다. 왜 우리는 다 가져야 합니까.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입에서 나올 법한 물음을 던져놓고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는 자신의 아들이 왜 그런 의문을 품었는지 이해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도덕적인 성취감을 얻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정체성이 흔들려서는 안 됐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턱을 매만졌다.
“남모르는 곳에서는 구린내를 풍겨도 지켜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는 박수받고 싶다는 거냐.”
그는 코웃음을 쳤다.
“미쳐서 그러죠 뭐.”
강제한은 자신의 말을 거드는 막내아들을 거슬린다는 듯 힘주어 노려본 뒤 강주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할 말이 있는 거냐.”
강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만히 서서 이미 죽은 이를 보듯 아버지를 보았다. 그 자신도 무엇이 그를 이렇게 몰아붙이는지 알지 못했다. 오만한 자신과 역겨운 동생의 반목을 흥미롭게 방관하는 아버지의 숨을 틀어막고, 묻어버리고 싶었다. 물론 강주한은 철옹성 같은 아버지를 바늘만큼도 자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서 이미 아주 작게 반역은 움트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아들의 미묘한 변화를 조금씩 눈치채고 있는 것 같다. 강주한은 일종의 기이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한결 고요해진 분위기로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안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봐라.”
“하드디스크는 오늘 이후로 공동 보관했으면 합니다.”
“뭐?”
“1월이면 소송 마무리될 겁니다. 이변이 없는 한 1심과 2심 소송 결과가 그대로 이어져 승소하겠죠. 카지노 건설에 대한 논의는 그때 가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영상이 백업된 하드디스크는 얘기가 다르죠. 태한이가 저를 믿을 수 없듯 저도 태한이를 믿을 수 없습니다.”
강태한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하드디스크를 계속 보관하고 있는 한 사본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고, 너 역시 내가 하드디스크를 미리 파기해버리면 소송이 끝난 뒤 카지노를 건설해준다고 장담할 수 없겠지. 그러니 하드디스크를 공동으로 보관하자는 말이다.”
강태한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공동? 그게 말이 돼? 24시간 그걸 같이 감시라도 하자는 말이야?”
“피차 바쁜 사람끼리 시간낭비할 필요 없지. 아버지 금고가 있는데.”
“그건!”
강태한의 말문이 막혔다.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이지만, 동시에 아버지라는 이름이 주는 부담감 자체가 강태한에게는 가장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차마 아버지가 있는 방향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눈으로 강주한을 노려보았다.
“괜찮은 생각이구나.”
강제한은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투로 말했다.
“오늘 당장 신 전무와 물건 챙겨와. 아니, 내가 직접 가지.”
“네? 아, 아니… 그러실 필요까진.”
“하긴, 내 정신 좀 봐라. 하드디스크를 넘겨받는 게 우선이 아니라 막내아들 계약이 먼저였지. 그래. 계약서 쓰고 바로 하드디스크도 받자.”
“아, 아뇨. 아무리 그래도 좀 신중하게.”
“왜. 내 금고에 맡겼다간 탈이라도 날까 겁나더냐?”
“아뇨. 그건 아니지….”
“내부비리만큼 남겨먹는 장사가 없다지만, 살붙이를 향해 칼을 겨눠서는 안 됐다. 아무리 그래도 너와 네 어미는 혈육이야! 가족 팔아 한탕 하려는 놈이 두 번은 못 팔아먹겠어? 뒤에서 또 무슨 수작을 벌일지 어떻게 알아. 당장 넘겨!”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분노의 노성을 내질렀다. 그가 조성한 고요한 긴장감 속에서 모두가 숨을 죽였다. 강제한은 번뜩이는 눈으로 강태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노도현 불러.”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사안에 강태한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술만 깨물었다. 그가 바라왔던 상황이긴 했지만 하드디스크를 끝까지 자신의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강주한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노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주한입니다. 집으로 노 변호사님이 와주셔야겠습니다. …네. 네.”
짧은 통화를 끝낸 강주한은 강태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계약은 노도현 변호사가 도착하는 대로 문서화하기로 하고 지금부터는 계약의 세부사항을 정하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강태한의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왜? 시간 끌 이유 없잖아.”
“그렇지. 맞는 말이긴 한데… 나도 좀 심사숙고할 시간이….”
“시간 끌 필요 있니? 아버지 요즘 수면부족이셔. 적어도 오늘 밤엔 악몽은 안 꾸셨으면 좋겠다.”
날카로운 어머니의 말에 강태한은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강태한이 벌인 내부비리 고발극에서 적어도 표면적으로 가장 많은 비난을 받게 될 주연은 그의 어머니였으므로. 괴로운 한숨을 내쉬며 강태한은 말했다.
“그래. 뭐, 좋아. 그럼 내 조건을 말할게. 다들 나 무시하지만 멀리 보고 시작한 일이야. 사업계획 승인에서 건축허가까지 길게는 5년, 건축은 길게 잡고 4년 걸릴 수 있겠지. 연면적 70퍼센트는 엘텍관광개발에서 소유, 운영할 거야. 호텔 레지던스는 엘튼 호텔을 통해 아시아 상류층에 일부 분양할….”
“우선 조건이 있어.”
강주한은 차갑게 강태한의 말을 잘라버렸다.
“어떤 형태의 사본도 존재해서는 안 돼.”
중간에서 말이 가로채여 화를 내려던 강태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마치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았다는 듯이. 서서히 다물어지던 강태한의 입술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다시 벌어졌다.
“영상은 물론 음성, 변조된 음성, 텍스트, 동영상 캡처, 엘튼 장학회와 관련된 그 어떠한 자료도 안 돼.”
강태한은 짧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강태한의 한 박자 느린 대답에 강주한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미심쩍은 기분을 느끼고 묘한 눈길로 동생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강태한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숨기고 입술은 서툰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테이블 위에 엎어둔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본이 존재할 시 협상 자체가 결렬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
한순간이었지만 강태한에게서 딱딱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강태한은 과장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그는 등받이에 등을 바짝 기대고 상체를 문이 있는 방향으로 비틀어 앉았다. 아랫입술을 치아로 죽죽 긁어 올린 강태한은 손등으로 입매를 문질러 닦았다. 그는 지나치게 불안정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은 몸을 억지로 우리 속에 구겨놓은 짐승처럼,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앉아.”
테이블 위에 엎어두었던 휴대폰을 집어 들던 강태한의 손길이 지나칠 정도로 움찔 떨렸다. 휴대폰을 집을지 말지 고민하던 강태한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비서한테 걸려온 전화 때문에 그래요. 조금 급한 건인데.”
그 순간 강태한의 손과 휴대폰 사이로 강주한의 손이 스윽,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는 강태한이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휴대폰을 가져가 지체하지 않고 종료 버튼을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강주한은 강태한을 냉담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네 우선 조건을 들어보지. 연면적 70퍼센트를 엘텍관광개발에서 소유, 운영. 호텔 레지던스는 엘튼 호텔을 통해 분양하는 조건. 그 외에 또 뭐가 있지?”
강태한의 눈이 아래위로 흰자위가 보일 만큼 커다랗게 홉뜨였다. 그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적의로 가득 찬 형제와 냉담한 어머니, 그리고 의뭉스러운 아버지의 얼굴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끈끈하게 그의 머릿속으로 들러붙었다.
* * *
보통 이 시간 즈음은 그녀가 한창 저녁 식사를 준비할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있는 곳은 주방이 아니었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도 주방 도구가 아니었다.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가득 미국산 랍스타와 특대 사이즈 노르웨이산 크레이지크랩, 자연산 송이버섯 등 특이한 식재료가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도무지 요리할 마음도, 차려놓은 밥상을 먹을 입맛도 없었다. 그녀는 여성 전용 찜질방 바닥에 황토 매트를 깔고 드러누워 골치 아픈 문제로부터 도피 중이었다.
엘텍의 강주한이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안신의 임경호가 보내는 선물만으로도 분에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강주한이 직접 선물을 들고 방문을 했다. 평소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동네 양품점이나 목욕탕, 며느리와 아들들에게 구구절절 막내아들에 대한 자랑을 떠들어댔겠지만 어째선지 어제 일만큼은 함부로 떠들어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입단속도 한몫하긴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과 강주한 사장 사이에 흐르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그녀의 가볍고 명랑한 입술을 콱 틀어막았다.
선우는 강 사장을 개인적으로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예의 따위는 걷어차버리고 천방지축 펄펄 날뛰며 희한한 말을 경솔하게 떠들어댈 정도로 아주 깊은 친분을 나누었던 사이로 보였다. 그 방향이 적의로 느껴져 여자는 좀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선우를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됐던 것이다. 수십억을 빚으로 떠안았는데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애처럼 굴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무래도 전화를 걸어 한바탕 퍼부어야 해소가 될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아들은 PC방에 콕 처박혀 있었다. 그러나 막상 통화 버튼을 누르려니,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들었던 아들의 우울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엄마, 용돈 좀 주세요. 한 38억쯤.’
실없는 농담을 시도하는 아들의 목소리에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짜증조차 나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걱정이 가슴에 조마조마한 이물감을 남겼다. 자세를 모로 고쳐 누우며 좀 더 편한 자세를 찾아보지만, 무얼 어떻게 해봐도 조여드는 마음은 편해지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허리를 세워 앉으며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결국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오랜만에 된장도 맛있게 지지고, 묵은지가 아닌 겉절이를 만들고, 랍스타도 꺼내 삶아보고, 강주한 사장이 가져온 한우도 굽고, 둘째 부부와 손녀들도 불러서 선우의 기분을 풀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정하게 대해주고, 좋게 타일러서 안신이든, 엘텍이든 높으신 분들 따라 재기하게 힘을 불어넣어줘야지.
그러나 그녀의 고무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아 곧바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휴대폰 화면이 반짝이고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알람음이 울렸다. 그녀는 노안으로 가물거리는 시력 때문에 인상을 쓰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막내아들로부터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어머니, 아들 여행 다녀올게요?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짧고 간결한 문자 메시지를 소리 내어 읽은 여자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여자의 황당함은 곧이어 도착한 메시지에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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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카드 권*옥 님
12/ 2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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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행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벌어졌다. 단기 카드대출 170만 원. 그녀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자를 확인해봤지만, 숫자를 잘못 센 게 아니었다. 용돈 대신으로 쥐여 주었던 카드로 백수 아들놈이 170만 원을 현금서비스 받은 것이었다.
“어이구.”
탄식하며 급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평화로운 저녁 식사 풍경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그녀는 분노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이 쌍노무 새끼가!”
* * *
임경호는 비서실을 통해 들어온 보고서를 확인했다. 보고서에는 그의 앞으로 송구영신 카드를 보내온 명단이 적혀 있었다. 전·현직 청와대 고위인사와 국회의원, 장관, 기업총수, 언론사주 등이 망라돼 있지만 확실히 엘텍과의 소송에 휘말리기 전보다 절반 이상 줄어든 명단 길이가 마음에 걸렸다.
“모두 몇 명이지?”
“87명입니다.”
애써 헛웃음을 지으며 임경호는 짧아진 명단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측 정월 선물 대상자 명단은 모두 몇 명이지?”
“132명입니다.”
“많군.”
비서는 아차 싶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사장님께 카드를 보낸 명단을 우선으로 대상자를 줄여서 선물을 보내도록 할까요?”
임경호는 정월 선물 대상자 명단을 천천히 눈여겨보았다. 그나마 이 명단도 지난해 중추절 선물 대상자 명단과 비교하면 새롭게 추가된 이름은 거의 없었고, 30명 가까이 인원이 줄어든 것이었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 인원은 보내야 관계유지가 되겠지. 미운 놈들 떡 하나 더 준다 쳐.”
“알겠습니다.”
페이지를 넘기자 가장 맨 아래에 하선우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비서실을 통해 그는 며칠 전부터 하선우에게 보내는 선물의 종류를 보고받고 있었다. 하선우로부터 별다른 피드백이 없음에도 그에게 꾸준히 선물을 보내는 이유는 특허가 가진 중차대한 가치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에 지시 내리신 하선우 씨 행방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임경호는 차분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버스를 이용해 분당에서 용인 터미널로, 터미널에서 이천으로 이동한 뒤에 택시로 갈아탔습니다. 일부러 주변에 CCTV가 설치되지 않은 외진 지역에서 하차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여전히 휴대폰은 꺼져 있고 가족들에게도 연락하지 않는 걸로 보아 잠적한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임경호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꼈다.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강태한이 하선우를 미친 듯이 찾는다고….”
임경호는 가늘게 뜬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뭔가를 놓친 기분이 드는데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비서를 내보낸 뒤에 그는 스케줄표를 확인했다. 2주 뒤면 특허무효심판이 판결난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하기 직전의 특허였다. 특허를 팔아치우지 않으면 하선우는 더 이상 재기할 기회가 없다. 그런데 이 상황은 하선우가 그 기회를 포기해가면서까지 잠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태한과 하선우 사이에 있는 연결고리, 강태한이 하선우를 미친 듯이 찾아다녀야 하는 그 이유가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그는 결국 휴대폰을 꺼내 들어 강태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아, 씨발.”
대번에 표정을 구기며 신경질을 낸 강태한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차창 위에 비벼 꺼버렸다.
“귀찮게. 타이밍 더럽네 진짜.”
휴대폰 화면 속 임경호의 이름을 짜증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다, 강태한은 눈을 굴렸다. 며칠 전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 뒤 차일피일 약속 잡기를 미루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응, 왜. 무슨 일 있어?”
-어디야.
“김포공항 가는 중. 좆같지만 지금 내가 좀 바빠서. 제주도에 출장 가야 해서.”
-아아, 그래. 물건 넘겼다는 소문 돌더라.
“뭐야…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강태한은 싱겁다는 투로 피식 웃었다.
“아버지한테 넘겼어. 조건이 좋아서 경호 형한테까지 갈 필요가 없겠더라고.”
-조건? 무슨 조건.
비딱한 임경호의 물음에 강태한은 손바닥으로 따끔거리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외삼촌이 주는 용돈에 엘텍 출자로 제주도에 카지노 세우기로 했어. 삼촌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일부러 자극하는 말을 지껄인 강태한은 클클 웃으며 건조한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건너편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목덜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10대와 20대 초반, 겨울철마다 매번 그를 괴롭게 만들던 아토피가 다시 도지려는지 희미한 증세가 보였다. 목덜미의 상처를 신중하게 매만지며 그는 임경호를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특허가 있잖아. 특허는 형한테 팔게.”
휴대폰 너머로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선우 잠수 탄 상황에서 네가 무슨 수로.
강태한의 움직임이 멎었다.
“뭐?”
-너 요즘 하선우 뒤꽁무니 냄새 맡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하선우가 뭘 가져가서 네가 그렇게 미친개가 됐는지 궁금하단 말이지.
엘튼 장학회 비리와 관련해 사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강태한과 하선우 두 사람뿐이었다. 분명히 외면적인 상황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선우가 잠수를 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특허무효심판 심리 결정까지 2주도 남지 않았고, 그 전까지 어떻게든 반쪽짜리 특허를 최대한 값비싼 가격에 팔아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심결이 확정되고 나면 동일 사실과 동일 증거에 의해 다시 심판을 청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선우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엘튼 장학회 비리가 녹음된 사본 자료를 갖고서. 임경호가 이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명백하게 떠보려는 목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성질 같아서는 한바탕 욕이라도 내지르고 싶었지만, 더 이상 부주의하게 굴 수는 없었다. 그는 터져나가려는 분노를 억누르며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개라니. 표현이 과하다. 그 새끼가 나한테 삐쳐서 잠수 타긴 했지만… 특허무효 되기 전엔 돌아올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조져버린다고 했거든.”
강태한은 입술을 꽉 깨물며 참아보았지만 쉽게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래도 임경호에게 한마디 쏘아줘야겠다는 생각에 달라진 눈빛으로 그는 말했다.
“형이 그렇게 나오면… 그럼 안 되지. 나 열 뻗쳐서 특허까지 강주한 줘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형은 닭 쫓던 개새끼꼴 나는 거야. 안 그래도 피는 못 속인다고 팔이 안으로 굽으려고 한단 말이야.”
울상을 지으며 강태한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형이 나한테 좀 다정하게 대해줘라.”
-너 이 개자식! 강주한에게 당한 거 나한테 화풀이 하….
강태한은 슬그머니 웃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임경호의 번호를 수신 거부로 돌려놓자 그는 가슴속에 쌓였던 울화가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상쾌해진 기분으로 좌석에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만족스럽게 걸려 있던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사라져버렸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감정은 별안간 완전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선우가 자취를 감춘 지도 벌써 나흘째였다.
“그 새끼는 어디 있을까요.”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강태한은 속삭였다.
하선우의 머릿속에 GPS 수신기가 심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정답을 알 리 없는 비서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지역이 이천의 가산리 부근인 걸 생각하면 일부러 중부고속도로와 인접한 부근으로 이동한 듯합니다. 휴대폰 사용 지역도 중부고속도로를 따라 남하하며 사용한 것으로 판단되어, 일단 이천 일대의 렌트카 업체와 교통수단을 수소문하도록 지시해두었습니다.”
바짝 긴장한 목소리에 강태한은 눈동자만 살짝 굴려 비서를 쳐다보았다. 비서의 표정은 비장했다.
“그리고 하선우 주변 인물 감시, 특히 윤동환 기자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무슨 경계강화? 집 앞이라도 막아서고 있으려고요? 자료를 메일로 보내면 끝인데 무슨 경계강화?”
강태한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비서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는 말했다.
“담배.”
신속하게 품에서 담배를 꺼내 강태한의 입술에 물려준 비서는 지포 라이터로 끄트머리에 불을 붙여주었다. 강태한의 불만 가득한 눈빛을 그는 죄지은 사람처럼 공손하게 감내했다. 그의 얼굴 위로 뿜어지는 독한 담배 연기마저도.
강태한은 결국 지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에 옆얼굴을 기대어 줄담배를 태워댔다. 환풍기가 쉼 없이 돌아갔지만, 자동차 안의 뿌연 연기가 맑아진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윤동환 기자. 그는 최근, 엘텍과 특허청은 ‘한 몸’이란 자극적인 타이틀의 기사로 한차례 센세이션을 몰고 온 적이 있었다. 엘텍과 성일금형,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 언론에 보도되고 종합편성 채널을 통해 방영되었으며 몇 차례에 걸쳐 후속 기사도 보도된 바 있었다. 그 일로 인해 강주한은 엘텍하이스코와의 관계를 해명하느라 꽤 곤욕을 치렀다. 덕분에 강주한과 하선우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으니, 강태한은 꽤 짭짤한 수확을 얻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일이 훗날의 커다란 우환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만약 하선우가 비리자료를 넘길 후보를 찾는다면 윤동환 기자일 가능성이 컸다. 업계에 그만큼 쓸데없이 기자윤리강령을 지키는 기자가 없는 데다가, 청탁과 압력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세원일보의 차기 주필 후보이자 명망 있는 선임기자였다. 세원일보는 안신 계열사에서 독자 법인화되어 분리된 언론사였다. 즉, 엘텍에 관해 적대적인 보도는 가능하지만 안신에 대한 보도만큼은 우호적이어야 하는 언론사였다. 결정적으로 그는 문도일 사건 보도로 하선우에게 엄청난 신뢰를 얻은 상태였다. 하선우가 작정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한다면 윤동환 기자에게 메일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곧 미국으로 출국하는 문도일, 고시원을 전전하는 이석, 김주안, 하선우의 가족과 그가 가깝게 지낸 사람 모두가 감시 대상이었다. 강태한은 정말이지 하선우가 이런 미친 짓거리를 벌이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개자식은 자신이 다섯 차례에 걸쳐 남긴 음성 메시지까지 모두 확인한 상태였다. 무려 여덟 번에 걸쳐 강태한은 아무것도 기약하지 않는 상대를 향해 촌극에 가까운 원맨쇼를 펼쳤다.
시비를 걸고 분노를 터뜨리고, 시니컬하게 굴기도 하고, 저주를 걸었다가 협박을 하고, 호소를 하기도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감정적인 수단을 갈퀴로 긁어모아 애걸했으며 종내에는 속죄의 의미로 화해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선우는 여전히 응답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향해 소리치는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 *
TV에선 신년 특집 외화를 방영하고 있었다. 무려 쇼생크 탈출이었다. 그가 아주 어릴 적에 개봉했던 영화였으니 최소 15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신년 특집으로 쇼생크 탈출을 방송하다니, 영화전문 케이블 채널이 영화의 홍수 속에서 감을 잃었나 보다.
방영 전 지역광고가 흘러나오는 TV 화면을 흥미 없는 눈길로 쳐다보던 하선우는 일단 테이블 위에 신문지를 깔았다. 오늘은 너무 많이 걸었고, 그에 비해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은 끼니가 부실했으니 저녁은 푸짐하게 먹고 싶었다.
그는 꽤 비싼 돈을 써가며 저녁거리로 대게 한 마리를 쪄왔다. 식당에서 챙겨주는 초장, 마늘, 고추장 같은 기본 반찬은 모두 거절하고 딱새우와 생굴 같은 해산물, 그리고 맥주만 챙겨 왔다. 푸짐하게 차린 상차림을 보자 어느새 기분까지 넉넉해졌다. 그는 한 손에는 편의점에서 사온 문구용 가위를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뜨거움이 한 김 식어 뜨끈뜨끈한 열이 오르는 대게 다리를 들고 부지런히 다리 살을 갈라냈다.
그사이 지역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됐다. 유약하고 섬세한 인상의 사내가 아내와 아내의 애인을 죽인 혐의로 법정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앤디 듀크레인이었다.
대게의 껍데기 속에서 솜씨 좋게 살점만을 골라 빼냈다. 후우, 입김을 불어 김을 식히고 다리살의 절반을 앞니로 끊어 오물오물 씹었다. 화면을 쳐다보기보다는, 대게 살을 골라내고 딱새우의 껍질을 벗기는 식사에 열중하며 하선우는 TV 속 대화를 듣기만 했다.
생각보다도 영화에 몰입되는 순간은 빠르게 찾아왔다. 영화가 시작되고 5분을 조금 넘긴 시간, 모건 프리먼이 죄수로 나와 나레이션을 하는 장면부터였다. 하선우는 열중하며 먹고 있던 대게를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첫날밤이 제일 힘들다. 그건 분명하지.
태어날 때처럼 발가벗고 걸어 들어와 피부는 이를 죽이는 소독약 때문에 따갑고, 눈은 보이지도 않지.
감방에 처넣어지고 철창이 닫히면 그 순간 실감하게 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예전의 일은 사라져버리고, 과거를 생각할 끝없는 시간만이 남는다.
하선우는 영화 속 잿빛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 감옥 속 죄수들이 죗값으로 치르는 것은 인생이다. 과거를 생각해볼 끝없는 시간만이 남은 채.
인생이 저당 잡힌 것도, 그를 구속하는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선우는 지난 며칠 동안 과거를 끝없이 떠올렸다. 그 대상은 주로 강주한이었다. 강주한 역시 과거를 회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얼굴이 자신의 얼굴일지 궁금했다. 불현듯 하선우를 떠올릴 때마다, 후회와 애틋한 감정이 그의 가슴에 이물감을 남길지 알고 싶었다.
혼자서 거뜬히 먹어치울 줄 알았던 대게가 절반 가까이 남았다. 짭짤한 소금기로 물든 손가락을 쪽쪽 빨며 그는 짠 비린내를 풍기는 게 껍데기를 한데 모아 신문지와 함께 뭉쳐 비닐봉지에 쑤셔 넣고 남은 건 포장째로 냉장고에 넣었다. 양치도 하지 않고 그는 하루 종일 먼지바람을 쐰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곳은 경상남도 통영의 한 모텔이었고 오늘은 1월 2일이었다. 어젯밤 모텔은 일출을 보러 먼 길을 달려왔을 관광객들로 붐볐을 것이다. 하룻밤 숙박에 5만 원인 모텔에 청결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침대에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정사의 냄새가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는 적당히 부른 배를 두드리며 조금 전에 보았던 영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아니,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그에게 쇼생크 탈출은 명작이라는 이야긴 익히 들어왔으나, 막상 시간을 들여 보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서재에 꽂혀 있는 세계문학 전집에 손이 잘 가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생각해보니 강주한과 함께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유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영화를 찾아보는 타입은 아니었고, 주말에 시간이 맞아 간신히 만나면 전시회장에 가거나 섹스부터 하기 바빴기에 그와 영화를 본 기억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 희귀한 기억 속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아보라면 단연 굿 월 헌팅이었다.
쾌청한 오후, 휴일을 게으르게 즐기는 방법을 고안하던 두 사람은 고민 끝에 영화를 보기로 했고, 인터넷 검색으로 평점이 높은 순으로 찾아보다 강주한의 선택으로 굿 월 헌팅을 보게 되었다.
소파에 앉아 차가운 맥주캔을 하나씩 들고 영화를 보는 동안 강주한은 하선우의 얼굴을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자신이 고른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꽤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남들이 중고등학교 시절 적어도 한 번씩은 봤을 영화를 서른이 넘어서야 작정하고 보고 있으려니 곤혹스러운 감상이 몰려왔다. 남들이 다 볼 때 무얼 했냐고 타박하자, 강주한은 남들이 다 봐서 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며 겸연쩍게 웃었다.
왠지 강주한이라면 쇼생크 탈출도 남들이 다 봤다는 이유로 보지 않았을 것 같았다. 머리가 좋은 그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반전을 눈치채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정말 끝내주게 재미있는 영화인걸.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 여행을 떠나는 자유로운 사람, 국경을 넘어 꿈에 그리는 친구를 만나 악수하게 되기를 희망하는 주인공의 여운 가득한 얼굴. 모건 프리먼의 얼굴 위로 자신을 대입해보던 하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하선우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해를 남해의 낯선 모텔에서 맞이하게 될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샤워볼에 검은 음모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정사의 체취가 남아 있는 싸구려 모텔에서.
그는 급하게 짐을 싸 들고 집 밖으로 나온 후 어머니의 카드로 170만 원의 현금서비스 대출을 받았다. 본래는 100만 원을 대출할 계획이었지만 좀 더 풍족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기습적으로 그의 양심의 눈을 가렸고 결국 충동적으로 70만 원을 추가 인출하고야 말았다. 그렇게까지 물색없이 굴 생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매 끼니를 지역의 특산물로 푸짐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는 발길이 닿는 대로 버스를 타고 분당에서 용인으로, 용인에서 이천으로 이동했고, 이천에서 히치하이킹으로 화물트럭을 얻어 타고 대전으로 내려왔다. 이틀간은 이천에서 머물렀고, 대전에서 하루, 그리고 오늘 고속버스를 이용해 통영으로 움직였다. 추적이 쉽지 않도록 고속도로를 이동하는 중에 휴대폰을 켜서 수신된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 그사이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착한 송구영신 메시지, 어머니로부터 10여 건에 달하는 부재중 통화기록과 세 개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고, 강태한으로부터는 여덟 개의 음성 메시지와 57개에 달하는 문자 메시지, 100여 건에 달하는 부재중 통화기록이 도착해 있었다.
강태한이 그에게 남긴 소음에 가까운 길고 긴 음성 메시지를 간결하게 축약하면 몇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로, 사본을 삭제해라. 둘째로, 언론, 인터넷, 그 밖의 어느 곳에도 엘튼 장학회 비리와 관련된 정보가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셋째로,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와 네 가족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남긴 음성 메시지에서 강태한은 아주 놀라운 제안을 했다. 사본 파일을 완전히 삭제해준다면 서초동에 위치한 3층짜리 고급 빌라를 선물로 주고 카지노 건설 시 호텔 레지던스를 통해 고층부의 뷰가 좋은 룸을 무료로 분양해주겠으며, 김운형 명의로 독점체결한 특허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강태한의 수많은 욕설 퍼레이드에 질릴 만큼 질려 있는 상황이었지만, 하선우는 그 수위와 집요함의 정도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이유를 강태한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제주도에 카지노를 건설한다.
하선우는 침대에 모로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관련 뉴스를 검색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구체화된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기사화된 소식은 전무했다. 그는 방법을 바꿔 엘텍관광개발과 관련된 주식을 검색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지만, 매집이 시작됐는지 관련주 가격이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상증자 논란으로 끝없이 바닥을 치고 있던 안신전자 주식 가격은 며칠 사이 소폭 상승했다.
과정이야 알 수 없지만 강주한은 결국 강태한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수치가 말해주듯 강주한을 대상으로 유상증자를 추진하기로 했던 기회를 날려버린 것만은 분명했다. 망나니 막내 동생에게 카지노를 양보하게 된 강주한의 심정이 어떨지 하선우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강주한의 말대로 그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서 타협을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주한이 안쓰럽다거나, 불쌍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아니, 하선우는 셋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임경호에게도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주머니가 아닌, 타인의 주머니에서 훔쳐온 재화를 차지하려 칼을 뽑아 든 사람들이었다. 부정과 부패로 모은 재화에 눈독을 들여 애초부터 죄책감 없이 시작한 게임이었던 것이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아내가 메말라갔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지치게 만들었던 패턴도. 그리고 자신이 강주한의 곁에 남겠다는 선택을 내린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 느낌은 충동과 끌림과 괴로움에 가까웠다. 그러나 옳고 그르다는 기준만으로 설명되기엔 감정은 너무나 복잡했다. 연인으로 살면서, 그와 함께 숨 쉬는 모든 순간들이 매 순간 갈등을 일으키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으로 넘쳐날지도 몰랐지만, 하선우는 불확실한 미래를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불명확하고도 예민한 문제들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필요한 가정들을 제거하고 사안의 핵심에 집중해 가위질을 치다 보면(크리스토프 히친스,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독서신문, 2012년),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질문만이 남는다. 본질은 명확했다. 강주한의 곁에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하선우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장 속에 걸어놓은 가방을 꺼냈다. 가방은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짐이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옷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 가지런히 짐을 풀기 시작했다. 속옷 두 장과 양말 두 켤레, 면 티셔츠 두 장과 바지 두 장, 구겨진 모자 하나, 그리고 정장 한 벌과 구두 한 켤레가 그가 챙겨온 옷의 전부였다. 그중에서도 정장과 구두는 매번 짐을 쌀 때마다 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번거로운 물건이었다. 매번 구석에 쑤셔 넣느라 침대 위에 펼쳐놓은 정장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하선우는 백마 탄 왕자님의 포지션을 맡고 싶지도, 정의의 사도 역할을 맡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적당히 극적인 방법으로 강주한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자신이 저지른 일들로 인해, 이미 충분히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지만.
다만 그가 머뭇거리며 시간을 끄는 이유는, 강주한과의 관계를 멀리서 조망하며 천천히 돌아볼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때마침 시간은 넘치게 있었다. 그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강주한의 소유물도, 수단도 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그의 옆에 동등한 자격을 가진 연인으로 서 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뭔가 대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따졌듯 강주한은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는 사람이었으므로, 하선우는 강주한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을 작정이었다. 사랑을 원한다면, 대금을 지불한다. 아주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그래야 한다고 느꼈다.
마침 하선우에게는 그의 각오를 분명하게 실현해줄 두 가지 폭탄이 있었다. 기폭장치를 누르는 순간, 그의 장대한 착취의 역사가 낱낱이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선택 사항은 세 가지가 있었다.
특허.
엘튼 장학회 비리자료.
특허와 엘튼 장학회 비리자료.
특허를 안신에 넘기거나, 엘튼 장학회 비리자료를 언론에 흘리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무엇을 선택하든지 강주한과 엘텍그룹에 타격을 줄 것이다. 전자는 타격의 방향이 기업을 향할 것이고 후자는 기업 속에 숨어 왕처럼 군림하는 엘텍가를 향할 것이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강태한이 건넨 USB는 오래전에 파기해버렸고, 남은 사본 파일은 휴대폰 속에 저장된 MP3 파일이 전부였다. 윤동환 기자의 메일주소를 기억하는 일은 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증거물로 제출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녹음파일 속 음성대화를 모두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그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 그들이 나눈 사소한 농담까지도 전부 적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하선우는 그가 내릴 수 있는 선택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공학이 아니었다. 그가 내릴 판단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가 없었다. 강주한은 얼마나 다치게 될지, 만약 역풍이 분다면 거슬러 부는 바람에 실려 온 화마가 자신까지 덮쳐올지, 후회하게 될지, 아무것도 분명치 않았다. 그럼에도 하선우는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느꼈다.
하선우는 더 이상 숨고 싶지 않았다. 그 자신으로부터도.
* * *
“유감이네만 사람 잘못 찾아왔군.”
서동현은 얼음이 가득 담긴 잔에 소주를 따랐다. 맑은 갈색 빛이 도는 화요 소주는 강주한의 옛 장인이자, 아이들의 외조부인 서동현 의원이 가장 즐겨 마시는 주종이었다.
“굵직한 대형공사로 지역구 공적을 쌓고 싶어 혈안인 의원들이 탐내는 자리가 국토위야. 총선 실패로 국토위 자리를 여당에서 대부분 쓸어갔지. 요즘 국권당 분위기가 안 좋아. 일은 쌔빠지게 많은데 명절선물 없는 상임위 떠맡았다고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려오거든.”
그는 강주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술을 들이켰다.
“자네는 나를 찾아오는 게 아니라 국토위, 교문위, 산통부 위원장한테 술 따라주러 가봤어야 해. 힘없는 야당 원내대표 만나봐야 먹고살기 힘들다는 넋두리밖에 더 듣겠나?”
껄껄 웃으며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서동현은 먹곤색의 누빔 원단에 야생화 무늬가 점잖게 들어간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염색을 하지 않은 자연모는 잿빛에 가까웠으며, 이마의 주름은 길고도 깊었다. 얇은 잿빛 입술은 거의 완벽하게 수평의 각도에 맞춰져 있었고, 눈이 나이답지 않게 맑고 커다란 데다가 눈꼬리가 길어 웃지 않아도 웃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도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강주한에게 아버지와는 다른 의미로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 술은 태한이 쪽 사람들이 따를 겁니다. 제가 서 의원님을 뵙기로 한 건….”
“서 의원님?”
서동현은 일부러 강주한의 말을 강조해 따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그 말이 신선한 의미로 다가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강주한은 잠시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긴… 자네 입에서 장인어른 소리 안 나온 지 3년 좀 넘었어. 딸아이도 죽었으니 좀 더 새롭고 무미건조하게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거겠지? 하여간 장사꾼들 속 시꺼먼 건 알아줘야 해.”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사위가 아니라 돈줄로 여기며 이득을 취한 건 서 의원님이었습니다. 그게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는 방식이라 생각해서 이제 와 굳이 새롭게 관계를 정립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서동현은 기가 막히다는 듯 빈정거리며 웃었다.
“그래. 자네 말은 우리 둘 다 속이 시꺼먼 속물이라 이거지?”
일식을 좋아하는 서 의원의 입맛에 맞춰 레스토랑을 예약했지만 강주한도, 서동현도 회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서 의원은 푸짐하게 나온 성게알에 몇 번 젓가락을 가져가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성게알이 뭐 이리 비쩍 말랐어? 여기도 한물갔군.”
성게알은 표면이 아주 조금 말라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명백하게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다시 가져다 달라고 말하죠.”
“됐어.”
벨을 누르려는 강주한을 말린 그는, 주먹을 말아 쥐며 그 속에 헛기침을 했다. 그는 건조한 목을 풀며 말했다.
“…카지노 건설에 자네가 나서다니 의외인데. 뜻이 없었던 걸로 알고 있었네만.”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네가 나서나.”
강주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술이 꽉 찬 유리잔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수행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강주한은 조금도 흥미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는 지극히 무미건조해 보였지만 어쩐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몇 주 전 의원들 사이에 임용화와 임용우 간의 유산상속 다툼 사이에, 엘튼 장학회 비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속소송이 더러운 청탁과 추문, 온갖 비리로 얼룩지리라는 건 모두가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나 누구도 얼룩이 CCTV라는 증거물로 남을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임용화 사전 승소설 찌라시.
서동현 역시도 최근 일대를 쓸고 간 소문 때문에 피가 끓는 신참 의원들과 검사, 젊은 언론인들이 한참 뒤를 캐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
서동현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허허, 소문의 영상이 존재하긴 하나 보군.”
강주한은 표정변화 없이 말했다.
“대답드릴 수 없습니다.”
서동현은 강주한의 말 한마디와 메마른 얼굴을 보곤 그간의 사정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허!”
그는 불쾌한 기분에 짧게 신음을 흘렸다.
“보나 마나 강태한이 짓이겠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도와주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나는 자네의 그 뺀질거리는 동생 놈이 정말 역겹고 싫거든. 그놈은 오만하고 재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대가리에 든 것도 없고 탐욕스러워. 돈의 가치 따윈 고려하지 않고 돈의 위력만 생각하는 놈이지. 안 그런가? 그딴 놈이 카지노?”
서동현은 갑자기 실실 웃음을 터트렸다.
“네 애비도 맛탱이가 완전히 가버렸군.”
“그래서 안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서동현은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허리를 숙였다. 총칼로 협박당하는 포로처럼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며 그는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강원랜드는 폐광지역의 생명줄이라네. 제주도에 내외국인, 그것도 메가톤급 카지노 호텔을 건설하면 자연히 강원도 내륙의 경기는 사멸하겠지. 대체 누굴 위해서?”
강주한은 목이 탔다. 갈증을 느끼며 그는 술잔을 들었다. 한 모금 술로 마른 입술을 적신 그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아는 놈이 그딴 부탁을 해?”
“태한이와 계약서를 썼습니다.”
“계약서라면… 정말 카지노를 짓기로 했단 말이야?”
강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동현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화가 나 죽겠다는 얼굴로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계약을 엎을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어쨌든 성실하게 카지노를 건설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합니다.”
서동현은 강주한의 말 속에 숨은 미묘한 뉘앙스를 읽어냈다.
“안 하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데.”
“위반할 시에 이중으로 배상을 해야 합니다. 태한이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도, 저도 함부로 계약을 어길 수는 없어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약을 엎을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뭔데?”
이번에도 강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동현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전에 여론을 조성해주셨으면 합니다. 의원님께서는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힘써오셨으니 강원도에 연고가 깊으신 것으로 압니다. 의원님께서 말씀하셨죠. 정치와 사업 모두 논리가 앞선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사회는 다르다고. 논리가 3할이면 인정과 도리가 7할이라고 하셨습니다. 강원랜드 설립 주년이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의원님 말씀대로 폐광지역 생명줄이죠. 사북, 고한, 태백 지역을 움직이는 중요 근육 중 하나가 레저 세금입니다. 제주도에 메가톤급 카지노 호텔을 건설하면 자연히 강원도 내륙의 경기가 침체될 겁니다. 안 될 일이죠. 사람들을 만나세요. 언론에 흘리든지, 시민단체를 만나든지. 엘텍이 한국의 고혈을 쥐어짜 배를 불리려 한다고 선동하셔도 좋습니다. 국민정서의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메가 리조트건설 종합관광개발계획이 몇 년이 더 미뤄질 수 있게 자극적인 프레임을 씌우세요.”
강주한의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서동현의 표정이 점점 더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아무리 나라도 엘텍과 반목할 순 없어.”
강주한은 마른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의원님 특기지 않습니까. 투쟁하는 삶.”
“자네 지금 도와달라는 건가, 나보고 깽판 쳐달라는 건가?”
“도와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서동현은 잔 안의 술을 단번에 비워내고 침음했다.
“아이들이 멀쩡한 기업을 물려받는 걸 보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할 수 있다면 의원님이 바로잡으셔야죠.”
그 순간 서동현의 눈빛이 교활하게 빛났다.
“그럼 훗날에 나를 차기 대권주자로 밀어주기라도 할 건가?”
강주한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술맛이 떨어져 그는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강주한은 서종현이 역겹게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서동현 역시 강주한에게 같은 감정을 느꼈다. 서로를 사로잡은 그 격렬한 혐오스러움은 결국 동족에 대한 혐오와 다를 바 없었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 속 자신의 눈을 고요하게,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는 느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듯이 강주한 역시도 서동현의 눈을 마주 보기가 버거웠다.
추악한 비밀을 고하자면, 강주한은 가끔 세상이 자신의 우월함을 인정하여 선택받은 자로 임명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강주한은 ‘선택’이라는 표현에 도취되지도, 고무되지도 않았으며 만족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짐처럼 느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선민의식에 젖었고 그의 의지와 사명감으로 세상을 선지자처럼 이끌어가려 했다. 강주한은 서동현의 눈빛을 보며 그 역시도 마찬가지로 저변에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강주한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원내대표까지 많이 올라오신 겁니다. 거기까지만 하세요.”
서동현은 비죽 웃었다.
“내가 멈추리라 생각하나?”
강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눈길로 강주한을 힘주어 쳐다본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는 뒤늦게 허기진 사람처럼 대화도 없이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도미구이를 그릇째 들어 소리 없이 비워내고 가리비 찜과 활전복을 씹고 갓김치와 튀김은 물론, 디저트로 나온 양갱과 아이스크림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얼음에 잔뜩 희석된 소주로 가볍게 입안을 헹궈낸 그는 손수건으로 입가의 기름을 닦아내고 주먹으로 명치를 문질렀다. 끄윽, 얼굴을 찌푸리며 트림을 한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좆 달린 놈한테 정신 팔렸다며.”
술잔을 쥐고 있던 강주한은 눈동자를 느리게 움직였다. 조금 전에 그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정지했다. 그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나타난 행동에 서동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강주한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와 구차하게 의연한 태도를 가장하고 싶지 않았다.
“협박이라도 하실 겁니까.”
서동현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그는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며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는 약간의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다행히 씨는 안 남기겠구먼.”
강주한은 서동현의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미묘한 변화를 본능적으로 드러내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강주한은 들고 있던 술잔을 손안에서 느리게 굴리다,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모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서동현이 혐오보다 안도를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아 강주한은 소리 없는 자조를 흘렸다.
빈 잔에 남은 술을 가득 따른 서동현은 병을 잔 위에 몇 번이고 흔들어 마지막 방울까지 털어냈다.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 위로 옅은 땀이 배어나와 희미한 광택이 돌았다. 그는 반 잔을 비우고, 나머지 반 잔은 아껴 마셨다. 잔을 비우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침묵하고 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의식하고 있었다. 인척의 관계로 맺어져 서로를 이용했지만 오래전에 연이 끊어져버린, 증오와 필요만이 남아 있는 관계. 서로를 사로잡은 긴장감 속에서 오랜 고요 끝에 서동현이 입을 열었다.
“애들은?”
“미국에 있습니다. 한 달 정도 여동생 부부가 데리고 있으면서 서부지역 위주로 여행 다닌다고 하더군요.”
“여행?”
서동현은 공허하게 웃었다.
“고작 네다섯 살인 애들이 나중에 기억이나 하겠어?”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서동현의 늙은 얼굴 위로 서유임의 우울한 미소가 겹쳐졌다.
“네 자녀이기도 하지만 내 손주들이기도 해. 애들 그렇게 품에서 떨어트려놓을 거면 미국에서 돌아오는 대로 내 집으로 보내. 아이들 얼굴 못 본 지 오래라 아내가 섭섭해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가 데리고 있을 거다.”
딸을 잃은 아버지로서, 그리고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로서 그는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했다. 보드라운 살결과 해맑은 웃음을 가진 아이들을 완충재 삼아 그들은 앞으로도 만남의 구실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강주한은 섣불리 어렵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네 지금 손자들을 무기로 나를 엘텍의 블랙리스트에 올리려 하는 거라네.”
그는 목이 마른 사람처럼 성급하게 술잔을 모두 비워버렸다. 그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한다. 그는 약이 올라 당장에라도 꺼져버리라고 외치고 싶은 얼굴로 강주한을 노려보면서도 목줄이 붙잡혀 앞으로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사냥개처럼 낑낑거렸다. 한계에 부딪힌 그는 결국 굴욕감을 느끼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은 해보겠네.”
그는 기운 없이 덧붙여 말했다.
“아이들. 그게 내 조건이야.”
어두운 탐욕의 호수 위를 겉도는 기름진 혈육의 정. 결코 가라앉지도, 분리될 수도 없는 끈끈한 피의 끌림에 그는 결국 무릎 꿇었다. 서동현의 검은 눈이 번들거렸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기에 괴로운 눈빛이었다.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온통 떨렸다.
“손주들이 보고 싶어.”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주한은 눈을 떴다. 아주 짧게,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머리가 무겁고 생각이 잘 굴러가지 않았다. 어둡게 코팅된 차창 밖으로 커피를 들고 있는 기사의 손이 보였다. 문을 열자 찬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와 미지근하던 실내의 공기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그는 어느새 화면이 꺼져버린 태블릿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잠도 깰 겸 밖으로 나가 기사로부터 뜨거운 커피를 받아 들었다.
묵직한 두통이 몰려오는 옆머리를 짓누르며 강주한은 커피를 마셨다. 그는 거의 열흘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강주한의 낯이 보기 딱할 만큼 상했던지 기사가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피곤하실 텐데 안에 들어가서 쉬시죠.”
“아뇨. 잠 좀 깨고 싶습니다.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강주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안함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추우실 텐데 외투라도 꺼내드릴까요.”
“아닙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자 기사는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본래 강주한의 출퇴근길은 을지로 본사와 삼청동의 자택을 왕복하는 짧고 경제적인 경로가 전부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퇴근길에 한 가지 번거로운 경로가 추가되었다. 그는 퇴근길에 하선우의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한두 시간씩 머물다 가곤 했다. 덕분에 그의 운전기사는 아파트 부근 지리에 익숙해져 근처 카페에서 부탁하지도 않은 커피나, 따듯한 곡물음료를 사오곤 했다.
강주한은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뺨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들었다. 1층부터 층수를 세어 하선우의 부모님이 사는 17층을 확인했다. 거실은 어두웠다. 서 의원과의 저녁 약속 때문에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벌써 10시 30분이었다.
강주한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상주차장에 한 대, 그리고 김 팀장의 보고를 통해 확인된 바로는 지하주차장과 아파트 단지 입구에 각각 한 대의 승합차가 거의 하루 종일 주차되어 있다고 했다. 승합차마다 세 명씩 인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 의도가 감시인지, 아니면 납치를 위함인지 알 수가 없어 비슷한 수의 인원을 김 팀장 역시도 배치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했다. 강태한은 특허를 사이에 둔 알력다툼이라는 말로 변명하고 있지만, 무언가 다른 진실이 더 숨어 있었다.
CCTV 영상이 백업된 하드디스크는 강태한이 머무는 한남동 자택에 보관되어 있었다. 강제한은 그 즉시 디스크를 회수하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강제한과 임용화, 강태한, 노도현, 그리고 강주한. 강태한의 자택 거실에 모인 다섯 사람은 비밀유지를 위한 구체적 범위를 설정하고, 사업의 대략적 개요를 담은 보안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민형사상의 처벌을 감수하며, 손해배상을 한다는 비밀유지 각서가 담긴 계약이었다.
가장 급한 불을 끈 후 그들은 상속소송 이후의 본계약에 대해 대략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안계약서를 체결함과 동시에, 강제한의 금고에 있는 하드디스크를 파기하는 내용을 포함한 본계약도 체결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자정을 한참 넘긴 이후에야 계약서에 사인을 마칠 수 있었다. 계약서를 나누어 가진 뒤에야, 강태한은 먼지 쌓인 지하창고로 사람들을 인도했다. 그는 이음새가 매끈한 커피머신의 상단부 프레임을 뜯어내고 진공팩으로 포장한 디스크를 그 안에서 꺼냈다.
강태한은 비로소 카지노 건설을 돕는 업무협력 계약서를 손에 쥐게 되었지만, 아버지의 손에 하드디스크를 건네는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계약을 하는 동안 강태한의 시선은 줄곧 계약서의 두 번째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다.
제1조의, 특별규정을 우선으로 하는 원칙을 계약의 전 범위에 적용한다는 조항이 적혀 있는 페이지였다.
강주한은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서 꺼내 갤러리 속 사진을 열었다. 강태한의 한남동 자택에서 작성했던 계약서 원본 중 일부분이 그의 휴대폰 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화면을 터치로 확대해 사진 속 계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1. 갑은 ■■■의 일체를 즉시 을에게 양도한다.
2. 외부에서 ■■■의 사본이 발견·배포되거나 사본으로 인한 분쟁이 야기될 경우, 을은 갑이 요구한 업무협력 계약을 협의 없이 즉시 해지할 수 있다.
3. 2의 경우 을은 인도받은 ■■■을 반환하지 않고 파기할 수 있다.
CCTV 영상이 백업된 하드디스크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계약서에는 사각형의 검은 특수문자 기호를 사용했다. 계약서가 유출된다 하더라도 CCTV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으니 언론과 검찰의 추궁을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보안계약서는 그들 사이에 수없이 쌓여 있었다. 그날 강태한과 작성했던 계약서도 그런 비밀계약서 중 하나였다.
영상의 사본이 존재한다면, 강태한과 협의하지 않고 즉시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금고에 보관된 하드디크스 역시 강태한에게 반환하지 않고 파기하기로 했다. 엘튼 장학회 비리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과제가 계약 전체를 아우르는 기본 조건이었기에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주한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강태한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동생은 애써 웃음 짓고 있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마치 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듯이 몸을 사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보일 수 없는 반응이었다.
하선우가 사라진 뒤로 열흘이 흘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은 1월 둘째 주였고, 특허무효심판 심리 결정까지 3일밖에 남지 않았다. 강태한은 하선우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무효심판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특허 때문에 그가 하선우를 찾는 행동은 일견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보안계약서를 작성하던 당시에 보여준 강태한의 석연치 않은 태도가 강주한의 신경을 가늘게 잡아당겼다.
그는 추위와 긴장으로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화단으로 분리된 옆 아파트 단지 너머의 주차장을 노려보았다. 화단의 전나무 옆, 가로등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그늘진 곳에 9인용 승합차가 세워져 있었다. 강태한은 명백하게 하선우의 주변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영상의 사본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선우는 막연히 여행을 떠난다는 메시지를 어머니에게 남기고 170만 원을 인출해 경기도를 벗어났다. 그의 위치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지역은 경상북도 군위휴게소와 의성IC 일대를 지나는 중앙고속도로 사이였다. 그는 늘 고속도로를 이동하는 중에만 휴대폰을 켰고, 가끔 버스 편을 이용하긴 했지만 히치하이킹으로 장소를 옮기는 편을 선호하는 것으로 추측되어 경로 파악이 쉽지 않았다. 아니,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동경로가 확실하지 않은 그를 추적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터미널 CCTV를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선우는 예상외로 숨바꼭질에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같은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강주한이 유령처럼 자취를 감춰버린 하선우의 행방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란 거의 전무했다.
가슴속이 바싹 메말랐다. 사소한 계기 하나면, 작은 불씨에 모조리 재가 돼버릴 만큼 그는 지쳐 있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하선우의 방이 위치했을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나에게 아무것도 줄 필요 없어요. 당신에게서 내가 직접 훔쳐 갈 거니까. 곁에 남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요.’
하선우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은, 그가 잠적한 이유를 알려주는 열쇳말이었다. 처음엔 그 말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가 자신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훔쳐 가려 하는 건지 점차적으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이후, 강주한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한철을 보냈다.
하선우에게 영상자료의 사본이 있다.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강태한의 수상쩍은 행보를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강주한은 부침浮沈을 반복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수면 아래에서 목이 졸려 죽기 직전까지 의식이 흐려질라 치면,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다. 희망과 절망이 교묘하게 반복되며 그를 고문했다. 그는 상상 속에서 극과 극의 상반된 결과를 마주쳤다. 사본을 강주한에게 넘겨준다면 강태한의 카지노 건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본을 언론에 넘긴다면 파국에 다다를 것이다.
하선우는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오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거대한 낫을 들고 오는 저승사자일 수도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랐으나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그는 하선우에게 남은 마지막 인간적 의리를 지키려 애를 썼고, 의연한 태도를 내보이려 노력했다. 적어도 강태한과 같은 추한 방식으로 일을 꾸미고 그의 주변을 탐색하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천천히,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진실을 고하자면 그는 여전히 진정한 의미의 참회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뿐이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강태한 같은 최악의 부류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소 어둡고 부패하긴 했지만 차악에 가까우며, 어쩌면 그보다는 나을 거라고 자위했다.
좀 더 진솔하게 진실을 고하자면 그는 그 속에서 허무와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이상적인 기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그가 과제로 여겼던 모든 한계를 초월하는 기업이 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아마 그의 영혼을 갈아 넣어도 영원히 불가능할지 모른다.
분노가 많았던 소년은 제 쓸모를 인정하고 순한 양처럼 길들여지기로 결심했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고, 청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는 매 순간 의혹을 느꼈지만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그 의혹이 자연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인간 강주한에 대한 정체성마저도 함께 죽어버린 것 같다. 강주한은 그 상실을 서유임을 통해 깨달았고, 하선우로 인해 뼈아프게 절감했다. 하선우가 떠나가버린 후 그의 인간적 실마리와 이어지던 끈이 싹둑 잘려나간 것만 같다. 그 상실감 속에서 강주한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하선우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감상적으로 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이성은 이런 감정이 한낱 사춘기 소년 같은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감정에 속지 마라. 그의 이성이 외쳤다.
식은 커피를 근처의 하수구에 부어버리고 강주한은 차에 올라탔다. 짧은 잠에 취해 있던 기사가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갈까요?”
“네. 돌아가죠.”
도로 위를 주행하자 차 내부에 금세 훈기가 돈다. 오랫동안 지속된 불면에 강주한은 두통이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창문 없는 작은 독방 속에 갇혀 끝나지 않는 고문을 받는 기분이다. 생각의 속도도 함께 느려진다. 그러나 끈질기게 생각해야 했다. 이마를 손끝으로 지그시 압박하며 그는 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허무효심판 청구 취하하세요.”
건너편에서 숨소리가 멈춘다. 잠시 후 안 비서는 곤란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3일, 아니 곧 자정이 지날 테니 이틀 남았습니다. 이대로 하선우 씨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효처리가 될 텐데요. 굳이 후환을 남겨두는 것보다는 계속 진행하는 게….
“하선우도 그 사실을 몰라서 잠적한 게 아닙니다. 특허를 포기하면서까지 엘텍을 배려할 처지가 아니니까요. 차라리 우리 쪽에서 특허심판을 취하하는 행동을 보이면, 적어도 그 이유를 생각할 겁니다. 모진 사람이 아니길 바라죠.”
-하지만 그 특허를 안신에 넘긴다면 어쩌실 겁니까.
강주한은 인상을 썼다. 그 수를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건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었다. 장학회 비리 사건이 언론에 공개된다면 특허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최악을 피할 수 있다면 차라리 차악을 택하고, 하선우의 자비에 기대는 수밖에.
긴 침묵 끝에 강주한은 말했다.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무효심판 청구 취하하세요.”
* * *
하선우는 은색 바탕의 카드에 금박으로 적힌 글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이테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초의 신 중 하나로 창공과 대기를 상징하는 의미였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카드는 목동의 중심에 자리한, 서남부 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인 아이테르 출입증이었다.
백화점 뒤편과 연결된 아이테르 1단지 입구에 서서 하선우는 깊은 갈등에 빠져 있었다. 괜히 여기서 출입카드를 잘못 찍었다가, 재수 없게 강태한에게 위치가 발각되면 지금까지의 도피생활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수원의 모텔촌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모텔에서 하룻밤을 더 머무는 대신 목동으로, 두 사람이 함께 머물던 아지트로 찾아왔다.
감시 카메라를 등지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고민 끝에 카드를 인식기에 가져다 댔다. 카드가 정지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쯤은 기대를 버렸던 그는 막상 문이 열리자 멍하게 서서 시간을 지체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상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출입구를 지나 넓은 로비를 지나친 그는 중앙의 엘리베이터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10시 13분. 퇴근시간은 지났고 잠들기에는 애매한 시간대였기에 주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상층부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짧은 기다림 끝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강주한과 함께 수없이 그들의 아지트를 방문했지만 입주민과 마주친 적은 처음이었다. 지하의 피트니트 센터에서 운동을 마쳤는지 가벼운 운동복 차림을 한 중년부부가 승강기 밖에서 굳어 있는 하선우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하선우는 고민 끝에 안으로 들어가서 카드를 카드 인식기에 가져다 댔다.
스테인리스 유리를 통해 부부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대시보드의 버튼은 55층까지만 노출되어 있었고 56층 이후부터는 카드를 인식기에 터치해야지만 정해진 층수가 인식되었다. 엘리베이터 화면에 숫자 67이 뜨자 부부가 동시에 놀란 눈으로 하선우를 발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훑어보았다.
“처음 뵙네요?”
“예?”
“67층 주민은 처음 봬요.”
“아… 예.”
하선우는 목을 긁적이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67층에도 입주 주민이 있었구나. 처음부터 아무도 안 들였는지 알았는데.”
하선우는 67층 전체를 분양 당시부터 비워놓았다는 강주한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 좀 멀리 여행을 다녀와서요.”
부부는 하선우의 초췌해 보이는 몰골과 커다란 배낭가방, 먼지와 구김이 잔뜩 진 낡은 운동화를 보고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물었다.
“혼자 사시나 보죠?”
“…가끔 들러요.”
어딘가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분위기에 부부는 더는 묻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여 짧게 인사를 나눈 그들이 40층에서 엘리베이터 밖으로 사라지고 긴장이 풀린 하선우는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갈까. 타워를 벗어나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낼까 고민하던 사이 67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크림색의 대리석이 깔린 기다란 복도가 드러났다. 그는 결국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걸음을 내디뎠다. 6701호. 익숙한 문 앞에 선 그는 심호흡을 했다. 131313. 하선우가 선호하는 사이즈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분히 자신을 놀리려는 목적으로 강주한이 설정해둔 비밀번호였다. 그 숫자를 누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억울함을 느꼈었던가.
[*131313#]
기호와 숫자를 차례대로 누른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카드까지는 그대로 두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고 유지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하선우는 보물찾기를 하듯 어떤 거창한 의미를 찾으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그는 강주한에게 돌아가기 전 들러야 할 기착지가 있다면 막연히 이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주한과 공유한 추억 중에서도 이 공간 안에서의 기억들은 유난히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난방은 중앙난방으로 유지되어 텅 빈 집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훈기가 돌았다. 그는 고민 끝에 거실 미등을 켰다. 희미하게 내부를 밝힌 빛 속에서 하선우는 안의 모습이 거의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밴 바닐라 향기도 그대로였고 농구코트 같은 거실 너머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외부 유리창을 가린 얇은 레이스 커튼을 뚫고 안양천과 한강 너머의 찬란한 인공의 빛이 수채화처럼 스며들었다.
현관 매트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슬리퍼 중 하나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드레스룸과 트레이닝룸, 빈방, 그리고 침실의 문을 차례대로 열어보았다. 빛이 부족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구와 가구의 배치는 이전과 똑같았다. 조금 더 과감해진 그는 침대 맞은편에 놓여 있는 콘솔 위의 스탠드를 켰다. 고풍스러운 조명이 들어오자 내부가 좀 더 자세하게 보였다. 브라운톤의 소파와 와인바, 콘솔에 놓인 장식품과 관능적인 디자인의 거대한 침대가 모두 그의 마지막 기억에서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는 스탠드 불빛 앞에 서서 콘솔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집을 관리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두께감 있게 쌓여 있었다. 그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껍게 껴입고 있던 패딩 점퍼와 모자도 벗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성가신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는 콘솔 옆 미니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서 차가운 맥주캔을 꺼내 마른 목을 축인 그는 콘솔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깨끗하게 세탁된 속옷과 홈웨어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옷을 들고 침실과 연결된 욕실에 들어가 따듯한 물로 꼼꼼하게,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샤워까지 마치고 나자 친숙한 공간이 주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다. 꿈지럭거리며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간 그는 몸을 누에고치처럼 말았다. 아늑한 잠자리가 주는 편안함에 하선우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하선우는 눈가를 찌르는 아침 햇살에 가늘게 눈을 떴다. 그는 비몽사몽 중에 온 얼굴이 구겨지도록 하품을 하며 찌뿌듯한 몸을 비틀어댔다. 꿈조차 꾸지 않고 그는 긴 숙면을 취했다. 위기의식 없이 게으르게 침대 위에 드러누워 그는 부드러운 베개 커버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고 만족을 느꼈다. 아침 9시 40분이었다. 긴장감도 없이 늘어지게 숙면을 취했구나 싶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그 말인즉 긴 밤이 지나도록, 하선우가 목동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이었다. 하품을 하며 허리를 세워 일어난 그는 맞은편 거울을 보았다. 샤워 후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아 온통 까치집이 일어나 있었다. 엉망으로 뒤집힌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눌러봤지만 가라앉을 생각을 않는다.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씻기 귀찮은데.”
하지만 오늘은 기념적인 날이 될 테니 머리 상태가 단정해야 했다. 3일째 면도를 하지 않아 턱 주변 감촉도 까칠했다. 아침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하던 그는 냉장고 옆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검은 사각형의 박스였다. 어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캐리어였다.
지난해 여름, 홍콩으로 짧은 여행을 갔던 당시에 그가 끌고 다녔던 캐리어였다. 영수증과 스티커는 물론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네임텍까지 여전히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는 홀린 듯 가방 앞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캐리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내 짐은 다 버려요. 추억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별의 순간 그가 강주한에게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여권과 지갑만 든 작은 가방을 챙겨 정박지로 뛰어내렸었다.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픈 느낌이 그의 속을 움켜쥐었다. 그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리어를 챙겼다면 그 속의 짐을 버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스탠드가 놓여 있는 콘솔서랍장 안에 짐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두고 간 여름옷과 운동화, 속옷은 물론, 강주한에게 선물로 주었던 티셔츠와 뿔테안경 따위가 있었다. 그 외에도 지나치게 사소한 짐이 그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갤러리와 관광지를 방문한 티켓과 영수증, 냉장고에 붙이는 용도로 산 홍콩기념 마그네틱, 토이저러스에서 샀던 캐릭터 볼펜과 헌책방에서 샀던 화집 따위가 서랍장 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눈에 봐도 조잡해 보이는 빨간 케이스가 빳빳하게 다림질된 남색 손수건 위에 놓여 있었다. 문구점에서 파는 싸구려 귀걸이나, 반지, 목걸이가 들었을 것 같은 케이스였다.
그는 낯선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반지였다. 그것도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비취로 만든 쌍가락지였다. 하선우는 낯설지 않은 느낌에 가락지를 케이스에서 꺼내 블라인드 날 사이로 갈라져 들어오는 햇볕 속에 비추어보았다. 은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붉은 산호로 조각한 나비를 고정한 반지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한참 동안 들여다본 끝에야 하선우는 익숙한 느낌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낄 옥가락지를 사러 몽콕의 야시장을 방문했던 날 밤에 전통 장신구를 판매하는 상점에서 강주한이 장난기 없는 얼굴로 골라주었던 쌍가락지였다.
아마도 이 반지는 강주한의 눈에 유난히 예뻐 보였던 모양이다. 하선우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약지엔 헐렁했고 중지엔 맞았지만 두 개나 끼우고 다니기엔 크기와 두께가 커서 불편했다. 게다가 단순한 민무늬도 아니고 산호로 조각한 붉은 나비가 조각된 옥반지라 남자가 하기엔 좀 남세스러웠다. 아니, 젊은 여자가 끼기에도 너무 요란스러워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산 거야?”
구시렁거리면서도 하선우는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애처롭고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는 붉은 나비 조각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정성을 들여 제작한 반지에 비해 케이스는 지나치게 조잡해 보였다. 케이스 속에 반지를 집어넣고 서랍장을 닫은 그는 콘솔의 이음매와 윗면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의외였다. 강주한이 홍콩에서의 추억들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두 사람의 공간 안에 살뜰하게 옮겨놓았다는 사실이 눈으로 보고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하선우가 하찮게 취급하고 팽개쳤던 추억을 강주한은 고운 포장지로 싸서 방치해놓고 있었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연연했을 그를 떠올리며 하선우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맨 앞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문자 앱을 터치했다. 수원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그는 잠시 휴대폰을 정상 작동했다. 그사이 폭탄처럼 메시지가 쏟아졌다. 대부분이 강태한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그 이후로도 메시지는 한참을 이어졌다. 하선우는 스크롤을 맨 밑으로 내려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바로 어젯밤 자정 무렵에 강태한이 보낸 메시지였다.
“줘도 안 먹는다. 역겨운 자식.”
휴대폰을 벽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문자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강렬한 충격에 비하면 덜했지만, 다시 읽어도 여전히 소름이 돋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신에 우둘투둘 부스럼이 올라오는 듯한 혐오스러운 느낌에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상박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특허무효심판? 웃기고 있네.”
그는 무심결에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강태한은 11일에서 12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특허심판에 대해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하고 갖은 똥폼을 잡고 협박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하선우는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두 손을 공중으로 쭉 뻗어 휴대폰을 높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가장 최근에 확인했던 메시지는 보낸 이의 이름을 저장하지 않아 이름 대신 번호가 노출되어 있었다. 강주한의 번호였다. 지금이야 메시지를 여러 번 확인한 덕분에 처음의 놀라움이 많이 가신 상태지만 바로 어제 오후, 택시 안에서 문자를 확인했을 때 하선우는 한동안 뒤통수를 세게 가격당한 듯이 얼빠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강주한은 14일에 예정된 특허심판 청구를 취하했다고 전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간략한 메시지 한 줄이 전부였다. 대전 청사에 전화를 걸어 구술심리 일정을 확인한 결과 스케줄이 비어 있었다. 엘시스사의 자진 취하에 따라 자동으로 하선우 특허의 승소로 마무리되었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결과였다.
예상치 못한 강주한의 메시지에 하선우는 선물을 받았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습을 당한 기분을 느꼈다. 하선우는 본래 14일로 예정된 심판 일정에 맞춰 13일, 바로 오늘 강주한을 만날 계획을 짰었다. 강주한이 소유한 것들 중에서 무언가를 직접 훔쳐 가리라 생각했다. 막무가내에 터무니없는 계획이었지만 어쩐지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게 옳은 일이라고 그는 의지를 사용해 지금껏 자신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강주한의 의지가 개입했고, 그는 자기 손으로 순순히 특허를 포기해버렸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특허 포기 이유를 실용적 면에서 이해했다. 단 한 번도 암시한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하선우가 가진 폭탄의 정체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덕분에 하선우는 김이 새버렸다. 강주한과 재회했을 때, 그는 좀 더 화려하고 강렬한 잽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는 대상에게 잽을 날린들 그 기분이 상쾌하고 통쾌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하선우는 그를 상대로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릴 것이다. 설령 건설적인 성과도 없고, 아무런 교훈도 없는 실패를 낳는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그는 용서한다는 입에 발린 공허한 한마디의 말로, 그가 받은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책임을 묻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건강한 방법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한 사람의 일방적인 착취와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 누군가의 결핍이 없도록 건전해지기를 바랐다.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만 있다면, 이기적으로 구는 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 * *
-무슨 수작질이야?
강태한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만년필의 뚜껑에 펜을 끼워 넣던 강주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전화기를 한쪽 귀와 어깨 사이에 받쳐 든 채로 딸깍, 강주한은 펜을 뚜껑 속에 마저 밀어 넣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의 오만한 동생에게 대꾸할 말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근래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강주한은 빈정거리거나, 자극적인 말로 동생의 마음에 칼금을 긋는 대신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피곤이 잔뜩 눌어붙은 목소리에 강태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몰라서 물어? 특허심판 취하했잖아.
“그래. 그게 뭐.”
-형이 심판을 취하할 이유가 없잖아. 이대로 진행하면 자동으로 무효로 심결 확정될 텐데.
“너야말로 이상하군. 내게 따지는 이유가 뭐야. 오히려 내게 감사할 일 아닌가?”
강태한이 침묵했다. 자신의 말 속의 오류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긴장이 느껴졌다. 강주한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며 뻣뻣했던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주무르며 말했다.
“무효처리 될 특허를 살려놨으니 너로선 이득이잖아.”
-위협이 될 수도 있는 특허잖아. 그걸 내버려둬? 네가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강태한이 이를 까드득 깨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바닥으로 버석하게 마른 얼굴을 뒤덮었다. 손바닥에 가로막혀 되돌아온 그의 숨결이 따듯하고 축축하게 그의 피부 위로 퍼져 나갔다. 강태한이 물었다.
-하선우와 연락했어?
동생의 목소리에 우려와 억울함이 가득했다. 마치 하선우와 강주한이 작정하고 그를 괴롭히기라도 한다는 듯이. 강주한은 코웃음 치며 얼굴을 뒤덮은 손을 떼어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뭐야, 진짜 연락했어?
갑자기 목소리가 괄괄해졌다.
-이런 젠장!
“나는 네가 왜 흥분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집어치워! 씨발!
무언가를 집어 던지는 과격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주한은 등허리를 기대고 있던 등받이에서 허리를 뗐다. 유리가 깨지고, 무언가가 밀쳐져 연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하선우가 원하는 게 뭐야. 어? 씨발! 어? 뭔데! 무슨 작당모의를 하기로 한 거냐고!
강주한의 눈이 번들거렸다. 전화기를 잡은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는 곧 평정을 찾았다. 그는 그의 동생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강주한은 차분하게 말했다.
“하선우에게 사본이 있는 게 확실하군.”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한참 뒤 강태한이 소리를 냈다.
-뭐?
얼빠진 아이처럼 강태한은 반문했다.
-연락…했던 게 아니야? 그럼 왜 심판 취하를….
강태한은 다시 또 말이 없어졌다. 침묵 속에서 강주한은 강태한의 혼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랫입술을 빨다가, 입안에서 혀를 굴려대는 산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뒤 강태한은 입안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캐러멜 조각처럼, 너무 부드러워서 오히려 거슬리는 느낌을 주는 어조로 말했다.
-씨발, 내가 너무 흥분해서 말을 함부로 했던 것 같네. 형이 기업을 위해 애쓴다는 건 알고 있어. 나는 단지… 알잖아. 지금 우리 상황이 좀 예민하다는 거. 그래서 형이 말없이 일을 꾸미는 기색이 느껴지면 굉장히 언짢아. 알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거. 내가 형한테 했던 짓들 고스란히 되돌려받을까 봐 겁먹고 있는 거야. 하지만 우리 가까스로 휴전했잖아.
“휴전?”
-휴전이 아니면 평화라고 부를까? 의기투합?
강태한은 강주한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지만, 어쨌거나 피를 나눈 형제라고 어린 태도로 버릇없이 굴었다. 마침내 강태한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사본은 없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어디서 그런 오해가 시작됐는지 모르겠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걸 내가 굳이 해명해야 하나?
강태한은 웃었지만 강주한은 상상할 수 있었다. 동생의 커다랗고 예쁘장한 손은 축축한 땀이 배어 있을 것이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하선우를 먼저 찾아낼 방법을 궁리하고 있겠지. 그의 목소리엔 진땀이 밴 듯했다.
-형.
화제를 바꾸고 싶은 듯 강태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날 너무 미워하진 마. 나만을 위해 이 모든 일을 꾸민 건 아니었어. 어쨌든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우리도 보통 형제들처럼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는 강주한으로부터 되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털어놓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주절거렸다. 강주한은 동생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구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밀함과 애정으로 이루어진, 마치 보통의 형제들이 나누어 갖는 순수한 형제애를 그들도 나눌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같았다. 강주한은 강태한이 말하는 방식에 심란함을 느꼈다. 그가 말을 길게 늘어놓을수록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얄팍한 깊이만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난 후 그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강태한의 일방적인 주절거림을 듣는 동안 그는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것처럼 전후 맥락은 떠오르지 않았다. 강주한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남동생은 무슨 이유엔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실망시켰고, 심하게 혼이 났었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실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에 죽죽 낙서를 갈기며 동생이 그에게 물었다.
‘평범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 것 같아?’
변성기에 갓 접어든 목소리가 귓속을 따갑게 갈퀴질했다. 강태한은 자신의 바람이 한심한 취급을 받을 경우를 대비해, 껄렁거리는 투로 만약을 가정해 강주한에게 물었다.
평범한 어머니와 평범한 집안, 평범한 아버지. 강주한은 단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이 없음을 낯설게 깨달았다.
동생은 한 번 더 물었다.
‘형, 평범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면 우린 어땠을까?’
동생의 눈빛이 날것처럼 부드럽고 질척하게 강주한의 피부 위로 들러붙었다. 맹목적이면서도 다정하고, 소년다운 쑥스러움이 공존한 애정 가득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평소 강주한은 동생과 달리 피붙이, 혈육, 혈연과 같은 단어에 간절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가족이라면 당연시되는 애정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이었다. 마치, 오래전에 그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허물처럼.
아마도 그의 어린 시절을 앗아가고, 규칙과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아버지의 교육방식으로 인해 그의 어떤 부분이 소멸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동생의 물음에 그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가능성을 생각해보지도 않았으므로. 많은 것이 달랐겠지, 아마 고민 없는 상투적인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성취욕구가 대단히 큰 사람이었다. 강주한의 동생은 차별을 당했고, 언어적인 부분에서 학대를 당했으며 무심한 형제에게 보상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런 동생을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고 걸리적거리는 고장 난 부품으로 평가했던 그였다. 벽을 세우고 묵살하는 일상에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던 그는 많은 부분이 고장 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 * *
강주한은 곁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저녁 6시 41분이었다. 동생의 전화에 지체되었던 퇴근을 서두르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으로 관자놀이에서 심하게 맥박이 뛰었다. 전담비서의 도움을 받아 퇴근을 준비하며 코트와 가방을 챙기던 그는 메시지 도착 알람소리에 휴대폰을 꺼냈다.
낯선 번호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는 이어플러그를 귀에 꽂은 듯, 사방이 조용해짐을 느꼈다. 주변의 소음이 차단되고 몸속에서 울리는 아주 작은 이명만이 신경을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선우의 얼굴을 마주 보고 대치하는 기분이었다. 메시지는 그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7시 30분까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85 – 강주한관리인」
그는 촉박한 시간 속에 서둘러 달려 나갔다. 그러나 퇴근시간의 도로사정에 가로막혀 한계가 있었다. 출발 당시 내비게이션은 이동시간이 21분이면 충분하다고 예측했지만,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도착예상 시간은 늘어나기만 했다. 여의도 일대에 도착해 저 멀리 63빌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는 어느덧 22분을 지나고 있었다. 헬기를 타고 왔어야 했나, 그는 조급한 마음에 속이 타들어갔다.
드높게 솟은 63빌딩을 지나고 한강공원의 주차장 끄트머리까지, 더는 차를 타고 움직일 수 있는 진입로가 없을 때까지 차를 끌고 갔지만 하선우는 보이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은 이미 몇 분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림 메시지를 남기고 종료되었다.
주소를 보낸 낯선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의 주인은 하선우가 아니었다. 그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메시지 하나만 보내자는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낯선 손님에게 휴대폰을 빌려주었을 뿐이라고 했다.
7시 26분. 손목시계를 확인한 강주한은 차에서 내렸다. 겨울 강바람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긁고 지나갔다. 그는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선우가 보낸 메시지 속 주소지는 여의도 한강공원 부근이었고 주변시설 중에는 레스토랑, 레저스포츠점, 수상택시 시설, 그리고 한강유람선 선착장이 있었다.
그의 눈길이 빛으로 번쩍거리는 선착장에 멈추었다. 승선장에 2층 높이의 붉은색 유람선이 환한 빛을 내뿜으며 계류 중이었다. 그는 비로소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왜인지 하선우가 그곳에 있다고, 그의 안에서 어떤 느낌이 말해주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매표소를 향해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갔다.
출발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급히 티켓을 끊은 그는 줄전구가 번쩍거리는 하트모양의 교각과 승선장을 지나 유람선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을 확인했다. 7시 30분.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선착장과 유람선을 연결한 문이 닫혔다. 배는 여의도 선착장을 떠나 반포대교를 향해 느린 유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렁거리는 물살이 단단한 실내 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난간을 단단히 잡아 흔들리는 몸을 고정한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족한 공기를 빨아들였다. 폐 속을 가득 채우는 산소와 수면의 흔들림, 밝은 실내의 불빛 속에서 그는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는 가까스로 벅찬 호흡을 다스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여자가 칸막이를 지나 선실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문이 열렸던 잠깐 사이, 아코디언과 바이올린 선율의 음악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하게 실내로 울려 퍼졌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남색 모자를 쓴 붉은 원숭이 캐릭터가 팔짱을 끼고 바닥의 중앙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키즈매직 어린이 선상 마술쇼’ 곳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동물 캐릭터 조형물로 인해 그는 동화적이고 마법적인 공간 속에 홀로 외떨어진 것만 같았다.
희미하게 아코디언 연주가 배의 선미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나타난 안전요원의 안내에 따라 그는 홀 안으로 들어섰다. 중학교 동아리의 연극무대처럼 꾸며진 조잡한 무대가 선실의 중앙에 놓여 있고, 그 뒤로 소극장 규모의 객석이 놓여 있었다. 공연이 곧 시작되려는지 정중앙의 무대와 후면의 입구를 제외한 조명은 모두 꺼져 있었다. 비수기임에도 객석은 절반이 넘게 차 있었다. 아이들과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 젊은 커플이 빼곡하게 착석한 자리 너머로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완벽에 가까운 두상과 실제 나이보다 그를 어리게 보이게 만드는 단정한 느낌의 하관, 그리고 모양 좋은 귓바퀴를 보았다. 짧게 이발을 했는지 긴 뒷목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새하얀 셔츠와 검은 슈트를 입은 그는 편안한 옷차림의 학부형들과 대비되어 눈에 띄었다. 하선우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대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독 그의 주변으로 부연 빛과 먼지가 떠도는 듯했다. 두려움과 희망이 강주한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그조차 모르던 저 깊은 속에서 하선우가 그를 흔들었다. 하선우를 외면하고 싶은 한편 그를 만나고 싶었다.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키즈매직 어린이 선상 마술쇼를 어린아이들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관람하는 청년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학부형 중 일부는 TV와 영화에서 흔하게 봐왔던 지루한 마술쇼보다도 키즈매직을 즐기는 청년에게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멀끔한 청년의 분위기는 어린이 마술쇼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공연을 보다가도 힐끔힐끔 하선우를 훔쳐보았다.
모자 속에서 살아 있는 비둘기를 꺼내는 오프닝쇼를 마친 마술사가 풍선마임 마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손끝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서 핑크색 풍선이 움직이는 신기한 마임공연에 여기저기서 요란한 탄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정작 하선우는 서커스의 내용이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연은 분명히 아기자기하고 즐거웠지만 그가 생각했던 재회의 분위기와는 아주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디너뷔페가 열리는 크루즈에서 강주한과 조용히 야경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선우가 앉아 있는 장소는 으리으리하고 럭셔리한 크루즈가 아니었다. 각종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코코몽 유람선이었다.
그는 겨울철에는 디너뷔페 크루즈가 주말에만 한정 운영된다는 사실을 매표소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그리고 유람선 회사가 비수기 야간 유람선에 승선할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 소셜커머스 사이트에 광고를 올렸다는 사실을 승선한 뒤에야 알았다. 할인쿠폰을 공동구매한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하선우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의 모든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왜인지 공기로, 뒷목에 닿는 저릿한 시선으로 강주한이 한 공간 안에 머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술사의 손을 따라다니던 풍선이 허공에서 터지고 풍선 속에서 꽃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하선우의 멍하던 시선이 선명해졌다.
새빨간 코르덴 양복을 입은, 자신을 몽키 마술사라고 소개한 남자가 두 손을 크게 벌려 호응을 유도했다. 본격적으로 매직 월드로 아이들을 초대하기 전에 마술의 열쇠를 불러오는 주문을 알려주었다.
“수리 수리 마! 수리 얍! 따라하세요. 수리 수리 마! 수리 얍!”
하선우는 주변 학부형의 눈치를 보며 소극적으로 따라했다. 수리 수리 마 수리 얍. 그 순간 마술사의 손에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색 열쇠 풍선이 부풀어 올랐다.
“소리가 작네요. 좀 더 노력해주세요, 매직키즈 여러분! 자, 외쳐봐요, 하나 둘 셋!”
수리 수리 마 수리 얍! 숫기 없는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고 아이들이 신이 나 고함을 내질렀다. 그 순간 몽키 마술사의 손에 들린 검은색 열쇠가 은색으로 바뀌며 손바닥만 한 크기로 부풀었다.
“자, 매직키즈 여러분! 마지막 한 번 남았어요. 맨 뒤에 계신 선생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어린 친구들의 바람을 담은 마법 황금 열쇠가 나타나 매직 월드로 들어갈 수 있답니다. 자, 선생님! 따라해주세요. 수리 수리 마! 수리 얍!”
정적이 찾아왔다. 이어지는 침묵에 객석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선우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천천히 상체를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강주한이 숨을 짧게 들이쉬는 것이 느껴졌다. 찰나였지만 눈빛이 서로를 꿰뚫는 듯했다.
“선생님?”
움찔 눈을 찡그린 강주한은 애써 하선우에게 눈길을 떼어내 사회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황금 열쇠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수리 수리 마! 수리 얍!”
하선우와 마술사를 번갈아 바라보는 강주한의 딱딱한 표정에는 자세히 바라보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곤란함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이맛살을 조금 찌푸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강주한은 지나치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수리수리…마수리….”
“안 돼요. 소리가 작아요. 선생니임.”
몽키 마술사의 애교 섞인 타박에 학부형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객석의 모두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혼자 하는 게 쑥스러우시면 친구들과 함께 외쳐볼까요? 이번엔 조금 더 크게 외쳐주세요. 자, 하나 둘 셋!”
강주한은 난처한 표정으로 붉어진 광대뼈 주변을 손끝으로 슬쩍 쓸어내렸다. 그는 아이들의 외침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리수리 마… 수리….”
“얍! 감, 사합니다.”
썩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라는 듯 마술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웃었다. 그의 손안에서 풍선으로 만들어진 열쇠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황금색으로 변했다.
하선우는 붉어진 얼굴과 멍하게 벌어진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고 있었다. 유치한 마법주문을 외우기에는 강주한은 자신의 세계가 지나치게 견고한 사람이었다. 아니, 설령 그가 여덟 살짜리 꼬마아이였다 할지라도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황금 열쇠를 불러오는 주문을 외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본의 아니게 강주한에게 시련을 줌으로써 두 사람이 재회하는 과정에 몇 가지 단계를 설정하게 된 셈이었다. 마치 아이템을 얻으려면 퀘스트를 실행해야 하는 롤플레잉 게임처럼.
총 30여 분에 달하는 공연이 끝나고 나자 회항로인 반포대교가 근처라는 선장의 알림방송이 흘러나왔다. 하선우는 굼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르르 소극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옆으로 비껴선 강주한이 하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선우는 두 팔을 교차해 상박을 쓸어내리며 그의 앞에 섰다. 승객이 빠져나간 객석은 텅 비어 있었고 무대를 정리하는 스텝 두 명만이 중앙의 세트장에 남아 있었다. 하선우는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굴려던 마음가짐이 흔들렸다. 두 사람의 재회는 감동적이거나, 격정적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분노에 가득 차 있거나, 어쨌든 극단적인 감정을 달릴 줄 알았다. 하지만 강주한이 외운 마법주문은 둘 사이에 어색한 괴리감을 만들었다. 하선우는 서로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겸연쩍어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2층에 스낵 코너 있던데 거기로 가요.”
하선우는 앞장서 걸었다. 나선 형태의 계단을 올라가자 1층에 비해 넓게 트여 있는 갑판이 드러났다. 투명한 강화플라스틱으로 사방에 창을 내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한강변을 관람할 수 있는 구조였다. 중앙에 스낵 코너가 마련되어 있고 좌우로 두 줄씩 줄지어선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관람객들은 저마다 간식을 들고 창가에 매달려 한강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날이 추워 외부 갑판으로 나가 강바람을 맞는 대신, 비교적 따듯한 실내에서 강변을 따라 이어진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빈자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 한 번 더 계획이 틀어졌다. 속으로는 평정심이 흐트러졌지만 하선우는 겉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츄러스와 커피를 사 들고 배의 후미로 걸어갔다.
야외에는 두꺼운 커플 패딩 점퍼를 입은 남녀 커플이 서로를 간질간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과 떨어진 구석 자리로 걸어간 하선우는 난간에 기대어 섰다. 강주한을 손짓으로 부른 그는 츄러스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받아요. 저녁 안 먹었을 텐데.”
강주한은 하선우의 앞에 서서 커피와 하선우를 번갈아 쳐다보다, 그가 내미는 것들을 받아 들었다. 하선우는 제 몫의 츄러스를 씹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강바람에 대비한 겨울 패딩을 준비하지 않았고, 멋을 부리느라 겨울 정장만 입은 탓에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시 내색할 수 없었다.
“왜 하필 유람선으로 불렀는지 의아하죠?”
강주한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미상관법 알죠? 첫 문장을 끝 문장에서 반복하는 문학적인 기법. 중학교 국어시간에 배웠으면 기본으로 알 거예요. 수미쌍관법이나 수미상응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시에서 많이 쓰죠. 소설이나 에세이, 영화에서도 쓴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이런 수사법을 설명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선우는 말을 할수록 실패한 농담을 지껄이는 스탠딩 코미디언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위해 이런 설명을 늘어놓는지 그 목적을 잊고 장황하게 풀이만 반복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시작과 끝을 비슷하게 반복하면 여운을 주는 효과가 있대요. 그래서 여기로 불렀습니다. 작년 여름에 헤어지자고 통보했던 장소가 홍콩의 요트 위였잖아요.”
하선우는 심호흡을 하며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부석부석해진 강주한의 지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좀 유치하더라도 결말을 맺는 장소도 배 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강주한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커다란 덩어리의 감정이 목구멍에 걸린 듯했다. 그는 저녁을 먹지 못했지만 허기도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긴 시간 동안 내내 마비상태였는지도 몰랐다. 강주한은 자신의 손을 차지하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커피와 츄러스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강주한은 확인받아야 했다.
“지금 결말을 맺자고 말한 겁니까.”
“예.”
하선우는 손가락 반 뼘만큼 남은 튀김 덩어리를 입안에 모두 쑤셔 넣고 뜨거운 커피로 목을 축였다. 그는 의심과 혼란이 복잡하게 뒤섞인 강주한의 지친 얼굴을 외면한 채로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내가 뭘 좀 훔쳐갈 거라고.”
갑자기 사람들이 실내에서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멀지 않은 거리에 반포대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며 유람선은 잠수교를 향해 나아갔다. 잠수교 위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이 교각과의 거리가 가까워져간다. 사람들은 신이 나 휴대폰과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댔다. 유람선은 잠수교 밑의 교각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한참을 더 상류를 향해 올라가던 유람선은 반포대교 북단에서 방향을 틀었다. 새빛섬과 반포대교를 꾸민 경관조명의 빛이 고스란히 강주한의 얼굴 위로 반사되었다. 차가운 온도에서 따듯한 온도의 색으로 조명이 바뀌어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쉽게 누구 하나 서로 먼저 말문을 열지 못했다. 강주한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속을 죽이며 물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엘튼 장학회 관련 동영상… 사본 있습니까.”
하선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기대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하선우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그의 눈이 혼나기 직전의 아이처럼 겁을 집어먹었다고 느꼈다.
“네.”
강주한은 얼굴을 약간 찌푸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격동을 일으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동영상은 아니고 녹음 파일이에요. 물론 저는 파일에 나온 명단과 액수, 출처 다 외웠습니다.”
하선우는 고개를 돌리며 강주한을 외면했다. 지평선의 빛이 어지럽게 떠다니는 검은 수면을 바라보며 무심한 투로 말했다.
“녹음 파일이 담긴 USB는 지금 내 주머니에 있어요. USB를 빼앗고 나를 한강에 던져버리면 완벽하게 증거가 인멸되겠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 시도할 생각 하지 마세요.”
강주한은 아주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하선우는 비스듬히 기댔던 몸을 바로 하며 강주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일까지였던 특허무효심판 취하했더라고요.”
“그랬습니다.”
“왜 그랬어요?”
“하선우 씨가 사본을 갖고 있다고 짐작했습니다.”
“내가 언론에 넘길까 봐, 그 전에 좀 잘 보이고 싶었어요?”
강주한은 가슴이 뻐근해질 때까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실핏줄이 불거진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다, 후우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습니다.”
“애처럼 이럴 겁니까.”
“…….”
“눈 맞춰요.”
강주한은 허공을 노려보던 그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느리게 시선을 움직여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콧잔등에 잔뜩 주름이 지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한 그대로였다. 언젠가 이런 비슷한 종류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당신 동생한테 제주도에 카지노 짓게 됐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저 안신전자 유상증자니 뭐니 주한 씨 곁에서 주워들었던 거 많았잖아요. 그래서 짐작했죠. 강주한 당신 CCTV 때문에 결국 강태한과 타협했구나.”
강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들어와 옷깃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한이 치밀어 하선우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온기를 챙겼다.
“지난 열흘 넘게 떠돌아다니는 동안 틈틈이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어요. 당신 동생이 나를 필사적으로 찾던데요. 특허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사본 때문이었죠. 사본을 돌려주면 돈도 주고 땅도 주고 주식도 주고 반쪽짜리 특허를 돌려주겠다고 말하더군요.”
하선우는 마른 웃음을 터트리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심지어 사본을 삭제해주면 뒤까지 대주겠다고 하던데요.”
강주한의 눈빛이 달라졌다. 혼란스러워하는 강주한을 사나운 감정 속으로 패대기쳐놓고는, 하선우는 손을 털어버리듯 홀연히 다른 분위기로 말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필사적으로 사본을 되찾을 거였으면 애초부터 사본을 복사 안 해줬으면 됐잖아요. 애초에 나한테 사본을 복사해줄 때는… 물론 내가 특허를 취소신청 하겠다고 협박을 하긴 했지만.”
강주한의 표정을 살피며 하선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무시하고 사본을 안 넘기면 그만이었거든요. 그래서 이해가 안 간 겁니다. 그때는 특허를 취소한다는 협박에 사본을 넘겨줘놓고, 이제 와서 특허를 되돌려줄 테니 사본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하니까 앞뒤가 안 맞잖아요.”
하선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는 한 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느낌이긴 한데 강태한은 내가 언론에 비리자료를 넘기는 걸 걱정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표면적으로는 기사화될까 봐 겁먹는 것 같았지만…. 내가 사본을 갖고 있으면 강태한이 귀양살이라도 가나 보죠?”
설명을 바라는 뚱한 얼굴로 하선우는 커피를 조용히 머금었다.
강주한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하선우는 흥미가 떨어지면 얼마든지 샛길로 멀리 돌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하선우에게 엘튼 장학회 비리 관련 사본이 있다. 명백한 기회였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느닷없이 자신이 가진 정치적인 소질을 모두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다. 강주한은 조금 지치고, 피로를 느꼈다. 그는 자신의 유능한 세 치 혀를 사용하는 대신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비밀번호가 걸린 갤러리에서 이미지를 로딩한 그는 보안계약서 사진을 내밀었다. 혹독한 추위에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지만 하선우는 휴대폰을 꽉 쥐고 화면 속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계약서는 일부만이 촬영되었고 세부사항을 모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선우가 정보를 습득하는 데 제한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가 알고 싶은 건, 사본의 존재 유무가 강태한과 강주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느냐는 것이었다.
페이지를 넘겨 계약서를 모두 읽어 내린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얼어붙은 손을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가 담긴 잔으로 문지르며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해가 되네요. 오죽하면 그 더러운 성격에 뒤까지 대준다고 했을까 싶기도 하고.”
하선우는 애석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깊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얄팍한 동정이었다.
그는 남은 커피를 모조리 마시고 쓰레기통에 잔을 던져 넣었다. 비로소 두 손이 자유로워진 그는 얼어붙은 손을 얼른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유람선은 어느새 성수대교 교각 사이로 다가서고 있었다.
십 수 년 전에 일어났던 붕괴사고 이후, 심혈을 기울여 재건축한 성수대교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교 중에서도 가장 튼튼하고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교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왼편의 서울숲 방향의 수면은 중랑천 상류에서 흘러온 느린 유속의 상류와 한강 하류의 물살, 각종 정화된 하수가 뒤섞여 얼음으로 드문드문 뒤덮여 있었다. 거대한 녹지로 조성된 공원은 겨울의 추위에 메말라 황량한 들판처럼 보였다. 반면 강 건너 반대편은 압구정 일대로 아파트촌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수대교를 지날 때 사진을 찍어대던 관광객들과 사랑을 나누던 커플 모두 추위를 버티지 못하고 일찌감치 실내로 들어가버렸다. 사방이 트여 있었지만 비로소 완전히 둘만 남게 되어 훨씬 더 비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사본을 넘겨주면 강태한은 아주 많이 곤란하겠네요. 카지노 건설은 없던 일이 돼버리고 당신 아버지 금고에 보관된 CCTV 증거는 파기되니까요. 게다가 강주한 당신은 동생 물 먹이는 대가로 원래부터 꿈꿨던 계획을 다시 실행할 수 있게 되겠네요.”
강주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선우는 석연치 않은 기분에 휩싸여 느리게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하지만 내가 비리 사건을 언론에 보도 하면 두 사람 다 물 먹는 거네. 그렇죠?”
강주한은 표정을 굳혔다.
하선우는 강주한은 물론, 비리를 저지르는 그들 모두를 엿 먹이고 정의의 투사가 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윤동환 기자의 메일로 자료가 첨부된 메일을 전송하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선우는 강주한이 입을 타격과 상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주한을 생각할 때면 그는 배앓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자주 기진맥진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페어플레이해요.”
하선우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나도 내 방식의 공정한 플레이를 하고 싶거든요.”
하선우는 강주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자신에게 시선을 맞추기를 기다렸다.
페어플레이. 강주한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선우의 말을 되뇌었다.
조금 전부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강주한의 기억을 휘저었다. 하선우의 행동과 말을 하나하나 마음속으로 복기해보던 강주한은 곧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하선우가 내뱉는 말들은 홍콩에서 자신이 그에게 모질게 뱉어냈던 말들을 변주한 것이었다. 심지어 단순한 조롱이 아니었다. 기억의 거울을 꺼내 과거의 자신을 마주 보게 만들고 있었다. 강주한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는 버석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하선우 씨가 좋은 패를 가졌군요.”
담담한 태도로 강주한은 수긍했다.
하선우는 강주한에게로 성큼 가까이 다가갔다.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그는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본능적으로 선택하며, 자신의 불안을 꿰뚫어보던 그의 초연한 눈빛의 기억을 애써 지워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좋은 패를 가졌다. 약삭빠른 사람이라면 강태한에게 사본 넘기고 되돌려 받은 특허를 안신에 팔아치웠을 것이다. 한탕 챙긴 돈으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테니까. 반대로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자료를 언론에 넘겨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걸치고 있는 영역이 달랐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냈어요.”
하선우는 우울하게 말했다.
“내 본심은 당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더라고요.”
강주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꾹 다물렸다. 그는 안경을 빼앗겨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 허탈함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선우는 갑자기 허물어지는 강주한의 반응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을 전해주려고 이곳까지 날 부른 겁니까.”
강주한의 목소리가 잠겼다. 그는 무심코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사람 말 끝까지 들어요.”
하선우는 서둘러 강주한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가슴속이 뭉클하게 뭉친 느낌이 버거워 하선우는 강직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끝까지 들으라고요. 용서를 못한다는 게 아니라 책임을 묻고 싶었어요. 가능하다면 건강한 방법으로.”
강주한은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로 하선우를 보았다. 표정을 풀지 않는 그는 하선우의 말이 너무 난해한 공식으로 이루어진 문제 같아, 조금 더 쉽게 이해를 시켜주길 바라는 듯 보였다.
“말했잖아요. 그냥은 안 돌아오겠다고. 좀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어요.”
강주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그는 하선우의 뒷말을 기다렸다.
하선우는 강주한을 붙잡았던 손을 움직였다. 천천히, 그의 몸을 만지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낯선 기분으로 머뭇머뭇 강주한의 상박을 쓸어내렸다. 마침내 힘주어 팔꿈치를 꽉 쥐었다 떼어낸 하선우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쪽지를 꺼냈다. 그는 몇 번이고 접었다 펼쳐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강주한에게 건넸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우리 관계를 생각해봤어요. 머릿속으로 회고록, 에세이 수십 편은 썼을걸요. 결론적으로 난 강주한 씨 옆에 있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공짜는 싫어요.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강주한 씨 장사꾼이잖아요. 나를 여전히 원한다면 대금을 지불해줘요.”
하선우는 추위로 감각이 없는 손을 펼쳤다. 손안의 쪽지를 강주한에게 넘겨주며 그는 말했다.
“방법은 당신이 선택해요. 나는… 당신 말대로 좋은 패를 가졌지만, 도무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거든요.”
강주한은 건네받은 종이를 펼쳤다. 손때와 땀으로 얼룩져 누렇게 변해버린 종이의 하단에, 하선우가 여러 번에 걸쳐 고심 끝에 고쳐 쓴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첫 번째 방법. 특허를 안신에 판다.
두 번째 방법. 윤동환 기자에게 엘텍 비리자료를 넘긴다.
세 번째 방법. 윤동환 기자에게 안신의 비리자료를 넘긴다.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눌러써, 순박한 느낌마저 주는 기록을 그는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노트를 찢어 맨 윗부분과 한가운데에 필기를 했다가 새까만 펜으로 뒤덮고 새로 쓴 자국이 있었다. 자주 접었다 펼치고, 또 접기를 반복해 종이가 접혔던 모서리와 각이 진 마디는 이곳저곳 닳아 있었다. 수많은 고민 끝에 하선우는 방법을 세 가지로 압축했고 강주한에게 선택의 기회를 양도했다.
그는 오래전 자신이 배 위에서 하선우에게 선택을 강요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물론 강주한은 그날 나누었던 대화 대부분을 잊어버렸지만 그날의 분위기와 하선우의 창백한 낯빛,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매던 시선은 잊을 수가 없었다.
굴욕적인 기억에도 불구하고, 하선우는 그날 자신이 받았던 선택의 강요를 부드러운 방식으로 변용하여 적용한 것이다.
세원일보 차기 주필 후보로 거론되는 저명한 언론인이자, 과거 황성록 로비 사건 취재로 표적 징계까지 받았던 윤동환 기자는 기사의 취재를 지시하고 조정하는 데스크급 인사였다. 그에게 엘튼 장학회 관련 사본 파일이 넘어간다면, 오래전 황성록 로비 사건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파장이 그룹 내부에 일어날 것이다. 강주한은 그런 일만큼은 지양하고 싶었다.
다른 의미로 IK 전담반을 통해 파악한 안신의 비자금 리스트를 윤동환 기자에게 넘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강주한이 이 시궁창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이유는 이웃이 훔친 재화가 탐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재화를 모두 잃게 된다면 강주한은 이 선택지를 고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겠죠.”
강주한의 가슴께를 내려다보고 있던 하선우는 짧은 시간이 흐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 씨의 제안이 오히려 내게 득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까?”
하선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침묵 끝에 물었다.
“첫 번째죠?”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수뇌부, 그것도 그룹의 후계자들이 사적으로 저지른 불법을 고발하기보다, 특허소송을 통해 공적 차원으로 그룹에 피해를 덮어씌우는 게 차라리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대중은 특허라는 전문적인 영역의 전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을 테니까.
강주한은 자신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하선우의 시선에 심리적인 부담감을 느꼈다. 그가 강태한의 사본이 존재하기를 강렬하게 바라왔다는 걸 안다면 하선우의 제안은 그에게 벌이 될 수도, 책임을 대신한 대금이 될 수도 없었다.
사본이 있다면 강태한과 강주한의 계약은 파기될 것이다. 계약이 파기된다면 강주한은 그 반대 여파로 안신그룹의 경영에 높은 지분을 갖게 될 것이다. 확장된 영향력으로 그는 안신과 엘텍전자와의 특허전쟁을 엘텍에 훨씬 더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이게 벌이 아니란 걸 압니까?”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알아요. 당신에게 운이 좋은 상황이었죠.”
하선우는 뚱한 표정으로 강주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표정 안에는 그래서 더 다행이라는, 진심 어린 안도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속은 후련합니다. 쥐뿔도 없는 놈이 엘텍을 상대로 한 방을 날린 거잖아요?”
“미안합니다.”
강주한은 말했다. 그가 지금껏 수없이 뱉어온 상투어들로 인해 언어는 힘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 더 말했다.
“미안합니다.”
“알고 있어요.”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싱겁게 웃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눈을 마주쳤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던 경계는 사라져버리고 그 사이로 익숙한 애정이 조금씩 스며들어왔다. 그럼에도 강주한은 여전히 하선우와의 거리를 좁혀도 되는지, 가 닿아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가 지금껏 자랑스럽게 활용해온 대범함과 심리전술의 재주가 증발해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는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린 지금에서야 하선우에게 진실할 수 있었다.
매서운 강바람에 애써 정돈했던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망가졌다. 칼날 같은 추위가 사방에서 휘몰아쳐 피부에 감각이 없었다. 코를 훌쩍인 하선우는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라 겸연쩍게 웃었다. 갑자기 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왜 내 짐은 그대로 뒀어요?”
“짐이라뇨.”
“홍콩에 두고 왔던 내 짐이요. 다 버리라고 했잖아요. 추억하고 싶지도 않다고.”
하선우는 멋쩍게 코를 긁적거렸다. 강주한의 얼굴이 이상했다. 하선우는 아마도 그가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젯밤에 목동에 있는 우리 집에서 잤어요.”
강주한은 허를 찔린 표정으로 하선우를 보았다.
“…우리 집?”
“네. 우리 집.”
침묵이 흘렀다.
추적을 피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장소가 등잔 밑이었다는 사실에 그는 놀람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 더 그를 진동시킨 것은 하선우의 입에서 나온 우리 집이라는 말이었다. 너와 나의 집이 아닌, 우리라는 일인칭으로 불린 두 사람의 세계. 그 말이 아주 오래전, 하선우를 감성적으로 만들었듯이 강주한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습관처럼 감정을 자제하려던 그는 맥을 탁 놓아버렸다. 후터분한 열기가 그의 내부에서 솟았다. 자신은 교활하고 여전히 비겁했으며, 사랑만을 끌어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안에 있는 뜨거운 날것의 감정이 때로는 두려웠다. 하지만 때론 두려움이란 앞으로 그가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길잡이별인지도 모른다. 강주한은 보면 괴롭고, 행복을 주고, 그를 감정적으로 만드는 두려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랑이 소유하는 개념이 아니고, 당신이 고쳐 쓸 수 있는 로봇이 아니라고 하선우 씨가 내게 말했죠.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서 괴로웠어요. 미안했거든요.”
강주한은 손을 뻗었다. 추위에 빨갛게 얼어붙은 하선우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 진땀이 배어 나온 자신의 손으로 감싸듯 손바닥을 매만졌다. 그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비참하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물론 이런 내 말이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맞잡은 손바닥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눈동자가 맑게 반짝였다.
“더 노력할 테니까 여전히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하선우는 미소를 지었다. 강주한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 확인받고 싶어서,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사랑을 채근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하선우는 그의 불안이 애틋했다.
하선우는 가벼운 울렁임을 느꼈다. 그는 결국 어떤 생각도 거르지 않고 말했다.
“사랑해요.”
아주 오랜만에 보는 하선우의 진심 어린 웃음에 강주한은 그의 가슴을 채근하던 조바심도 잊고 그를 그저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강주한을 몰아붙여온 분노와 불안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하선우를 바라보는 강주한의 애정이 깃든 시선에 조금씩 안정과 여유가 차오르고 있었다.
저 멀리 여의도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첨탑들이 보였다. 유람선은 어느새 한강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서로를 탐색하고 화해하고 애정을 확인하게 만들었던 혹한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