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Cheek to Cheek
「곧 퇴근합니다♡」
휴대폰으로 짧은 메시지를 전송한 하선우는 눈앞이 그늘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하선우의 책상 옆에 서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백성희가 애절한 빛을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박자 느리게 놀란 하선우는 지레 찔려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성희 씨는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대번에 백성희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하 선임님. 저 서울까지 한 번만 태워주심 안 될까요?”
“서울? 성희 씨 하남 살잖아.”
“네. 근데 오늘 서울에 볼일 있어서요.”
하선우는 서울에서 성남으로 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기에, 간혹 서울까지 차 좀 태워달라는 부탁을 듣고는 했다. 보통의 경우 하선우는 몇 가지 정해진 레퍼토리 안에서 핑계를 대며 번번이 부탁을 거절하곤 했다.
“이거 어쩌나. 내 차가 아니라서 태워준다고 말하긴 좀 곤란한데. 나도 카풀로 얻어 타고 다니는 거라서.”
“아… 그랬어요?”
카풀하는 남의 차까지 얻어 탈 염치는 없었던 백성희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하선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7시 08분. 메시지를 보냈으니 수 분 내로 연구단 건물 앞에 하선우를 태울 차가 도착할 것이다. 그는 백성희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포니테일로 단순하게 질끈 묶었던 머리에 웨이브를 넣고, 안경 대신 렌즈를 꼈으며 옅게 화장까지 했다. 게다가 매일같이 고집하던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 대신 발랄한 블라우스와 짧은 반바지를 입었다. 이 아가씨는 오늘 데이트를 하는 모양이었다.
“데이트 가냐?”
“네. 8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늦었어요.”
하선우는 실실 웃으며 못되게 말했다.
“근데 왜 그걸 나한테 하소연해. 뛰어가. 버스 타면 조금만 늦겠네.”
“하 선임께서 일… 많이 시키셔가지고….”
과감하게 불만을 토로할 자신은 없어 백성희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하선우는 뺨을 벅벅 긁었다.
하선우는 성남에 세워진 기초과학연구소, 그중에서도 화학공정 분야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화학공정 분야는 파트너십형 사업으로 캠퍼스 연구단과 협력사업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백성희는 인턴십 과정으로 연구활동에 참여하게 된 올해 22세인 대학생이었다.
하선우가 속한 그룹 2팀은 연수학생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고, 하선우는 격의 없는 성격으로 연수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골호인의 포지션은 아니었기에 학생들로부터 부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노물질 연구단지는 연구소의 입구에서 차를 타고 3분 남짓 떨어진 장소에 있었고, 걸어가면 20분도 더 넘게 걸렸다. 하선우는 백성희가 운동화 대신 신은 구두를 딱한 눈길로 쳐다보다, 약간의 고민 끝에 물어보았다.
“서울 어디까지 가는데?”
“정말요?”
“일단 물어만 보는 거야.”
“명동이요.”
하선우는 순간 멈칫했다. 느리게 눈을 굴리며 그는 그녀와 자신이 데이트 중간에 마주칠 가능성을 생각했다. 생각만 해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딴청을 부리듯 말했다.
“설마 명동에서 놀다가 뭐, 촌스럽게 청계천 가고 그럴 거야?”
백성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뇨? 명동에서만 놀 건데요. 근데 청계천에 가는 게 뭐가 촌스러워요?”
그녀는 뜻밖의 질문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차마 데이트 중에 마주칠까 봐 청계천에 오는지 확인해본 거였다고 말할 수 없었던 하선우는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며 화제를 돌렸다.
“가자. 데려다줄게. 어차피 가는 길에 내려주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7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여전히 환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쏟아내는 복사열이 숨을 막히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연구단지 건물 앞에 서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지열로 달궈진 도로 위로 검은 차가 달려와 하선우의 앞에 멈춰 섰다. 하선우의 옆에 꼭 붙어 서 있던 백성희가 차와 하선우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거리감을 느끼는 눈을 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생뚱맞은 고백을 했다.
“카풀을 벤츠 S클래스로 한다는 소문이 진짜였네. 저 벤츠 처음 타봐요.”
그녀는 신이 난 얼굴로 하선우보다 먼저 차 문을 열고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명색이 카풀인데 설명할 기회는 줘야지. 요즘 애들은 알 수가 없어. 곤란한 얼굴로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하선우는 뒤늦게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 안은 에어컨 바람으로 쾌적했다. 싸느랗게 피부에 와 닿는 찬바람에 손바닥으로 팔뚝을 쓸자, 하선우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 운전자가 에어컨의 세기를 낮추었다. 하선우는 말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아뇨. 선우 씨와 일이 비슷한 시간에 끝났어요. 동승하신 분은 누구….”
운전석에 앉은 남자와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설명을 바라는 눈길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신이 나서 차 안에 들어왔던 백성희는 앞좌석에 앉은 남녀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가만히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실례가 아니라면 서울 가시는 길에 저 좀 내려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하 선임님께 부탁드렸어요.”
모기 날갯짓만 한 소리로 말한 그녀는 목을 움츠리며 앞좌석의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운전자인 김석문은 키가 195가 넘었고 조수석에 앉은 장미선의 키는 183이 넘었다. 두 사람 모두 기초과학연구소 단지 내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외형을 갖고 있었다. 연구소보다는 선수촌이나 경호단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들은 연구원이 아니라 실제 하선우의 개인 경호원이었으니까.
“가는 길에 명동역에 이 아가씨 좀 내려주세요. 가는 길이니까 괜찮죠? 석문 씨.”
룸미러로 하선우와 백성희를 번갈아 쳐다본 김석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죠.”
김석문은 평소에도 말수가 없는 편이었다. 그는 낯선 사람의 등장에 더욱더 입을 다물어버렸다.
카풀이라는 명목으로 경호원 두 사람이 하선우의 출퇴근을 도운 지 세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대전의 연구단지와 서울 일대의 연구소, 일반 기업에 면접을 보러 다니던 그는 면접관의 소개로 성남의 기초과학연구소에 취업 자리를 알선받게 되었다.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을 연구하는 연구단으로, 그곳의 연구단장에게 면접관이 하선우의 논문을 소개해주며 연이 닿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PC방 폐인과 취업준비생으로 지내오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렸던 그는 마침내 취업을 하게 되었고, 이 기쁜 소식을 강주한에게 당장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퇴근하고 돌아와 하선우의 얘기를 전해 들은 강주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자신과 강주한 사이에 드러난 극명한 온도 차이에 실망한 하선우는 결국 대놓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평생 집에서 백수로 살며 당신을 기다렸으면 좋겠느냐고.
‘컨트롤 프릭, 그런 겁니까?’
하선우의 입에서 나온 표현에 강주한은 침묵했다. 그는 입안에 든 버섯 조각을 모조리 씹어 넘긴 뒤에야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자신이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인 이유를 설명했다.
‘통제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지금 상황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좀 다른 걸 걱정했습니다.’
‘걱정이요?’
‘태한이가 선우 씨에게 가진 유감을 생각하면… 경호원 없이 직장에 다니는 건 싫습니다.’
‘하지만 평생 경호원을 달고 직장에 다닐 순 없잖아요!’
두 눈을 크게 부릅뜬 하선우는 소리쳤다. 강주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깐 입을 고집스레 다물었던 그는 ‘오랜만에 태한이가 남긴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선우는 몇 번의 괴로운 경험을 통해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강태한의 메시지에 관한 화제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언급된 날이면 강주한이 은근한 심술을 부리곤 했던 것이다.
지난겨울, 강주한과 화해를 한 직후 하선우는 강주한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모두 보여주었다. 강태한이 사본을 삭제해주면 하선우에게 뒤까지 대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고, 그저 강주한을 도발하려는 목적으로 넌지시 던졌던 말이 훗날의 화근이 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휴대폰에 남겨진 음성과 문자 메시지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는 특히 납치, 살해 협박과 ‘굴욕감을 감수하고서라도 네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강태한의 메시지를 불쾌하게 여겼다. 전자는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불쾌해했지만, 그는 후자에 관해서만큼은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두 가지 키워드는 강주한을 그답지 않은 고집불통의 소년처럼 만들어버리곤 했다.
결국 두 사람은 타협 끝에 각자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하선우는 취업을 했고, 강주한은 하선우의 주변에 경호원들을 붙여놓았다. 그는 기초과학연구소에 발전기금을 넣는 조건으로 하선우가 일하는 연구소 바로 앞 건물에 빈 사무실을 얻었고, 흡사 국정원 비밀요원을 붙여두듯이 경호원들을 위장 취업시켰다. 납치가 실제 물리적인 형태로 일어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주한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렇게 카풀이라는 명목으로 경호원들이 하선우의 출퇴근을 도운 지 세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카풀을 하는 경호원들은 하선우와 강주한의 사생활에 대해 일절 관심을 두지 않도록 교육받은 덕분에, 하선우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먼저 입을 떼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외부인이 동승한 이상 너무 긴 침묵은 이상하게 비쳐질 게 뻔했다.
“지루하죠? 라디오 틀게요.”
차 내부의 삭막한 분위기가 신경 쓰였는지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편인 장미선이 라디오를 틀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어 강원도와 바닷가, 관광지로 향하는 도로사정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는 교통정보가 흘러나왔다.
“저… 어느 부서에서 일하세요?”
조금 전까지는 숨소리도 조심스럽게 내뱉던 백성희가 돌연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물었다. 경호원 두 사람의 어깨가 경계로 굳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지만 백성희만이 유일하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시설안전팀에서 일합니다.”
“아아… 그래서….”
그녀의 줄임말 속에는 그래서 덩치가 남다르시구나, 란 감탄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연구소에 앉아 연구나 하고 있을 샌님들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의문이 해소된 것이다. 백성희는 옆으로 바짝 몸을 기울이며 손바닥으로 하선우의 귀를 가렸다. 누가 봐도 귓속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그녀는 속삭였다.
“저 앞에 두 사람 커플이에요? 시설안전팀 월급으로 벤츠 몰 수 있어요? 선임님은 어쩌다가 카풀하게 됐어요? 벤츠로 카풀하면 비싸지 않아요?”
“몰라. 궁금한 것도 많다.”
귀찮은 표정으로 대꾸한 하선우는 파리를 쫓아내듯 커다랗게 손사래를 쳤다. 금세 삐쳐서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는 하선우를 흘겨보더니 가방 속에서 보란 듯이 휴대폰을 꺼냈다. 메신저 앱을 실행한 그녀는 연구소에 있는 동안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를 확인하며 답장을 보냈다. 자동차는 어느새 지하차도로 진입해 동부간선도로로 접어들었다. 서울로 진입하는 상행선은 이맘때면 늘 막히곤 했지만, 도로사정은 예상보다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강주한과의 약속 시간까지 늦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 만의 만남이었다.
한참 동안 메시지를 주고받던 백성희는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하 선임님도 톡으로 찌라시 같은 거 받아요? 단체톡방에 막 사람들이 보내주고 그러잖아요.”
강주한을 만나면 뭘 할지 고민하느라 하선우는 백성희의 말에 조금 뒤늦게 반응했다.
“응?”
“잠시만요. 보내드릴게요.”
“뭘?”
메시지 알림음 소리가 주머니 속에서 울렸다. 하선우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녀가 보낸 메시지는 이니셜 기사였다. 오늘 아침 그가 속한 단체톡방에서 김주안이 보내주었던 메시지와 동일했다.
“봤어요? 누구 같아요?”
한참 동안 메시지를 들여다보기만 하자 그녀가 재촉하며 물었다.
“교제하던 힙합가수 B와 헤어지고 운동선수 C에게 환승한 것으로 알려진 아이돌 출신 여가수 A가 B에게 다시 만나달라고 애원하며 주사를 부리다, C에게 발각되어 B와 C 모두에게 차이게 되었다. 뭐 떠오르는 사람 없어요? 난 레싸 생각나던데. B는 MC베건이고 운동선수는 축구선수…. 누군지는 잘 모르겠고.”
“요즘 애들은 그런 게 재밌나 봐.”
“재미없어요? 찌라시 대부분 사실이잖아요. 이런 거 죽어도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결국 몇 달 뒤에 스캔들로 다 사실이었다, 밝혀지고 그러던데? 그럼 이건 어때요?”
백성희는 하선우의 앞에 휴대폰을 들이밀며 스크롤을 내렸다.
“가족경영을 유지해오던 국내 N기업에서 최근 창업주의 가족이 아닌 전문경영인을 CEO의 자리에 앉히는 파격인사를 벌였지요. 기업의 권력이 전문경영인에게 옮겨져 한국식 재벌문화의 각종 폐단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뒷소문이 무성한 모양입니다. 어때요? 이거 강태한 맞는 것 같죠? 그 엘텍 또라이 막내라는.”
순간 차 안의 공기가 진공처럼 바짝 조여들었다. 그녀만이 바뀐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신이 나 떠들었다.
“재벌 3세인 G는 CEO 자리를 내려놓은 이유를 대외적으로는 전문 학위를 받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무리한 사업확장과 문란한 사생활 등으로 인해 회장의 눈 밖에 난 것으로 알려졌….”
운전을 하던 경호원이 라디오의 볼륨을 티 나지 않게 서서히 높였다. 룸미러를 통해 뒤를 돌아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선우는 결국 말을 돌렸다.
“글쎄. 난 잘 모르겠네. 근데 남자친구는 뭐하는 사람이야? 연상?”
애써 돌린 화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때부터 백성희는 신이 나서 연상의 남자친구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어린 연수생인 그녀는 여러모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백성희는 김주안 같은 귀염상은 아니었지만, 타고난 개방적 분위기와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는 붙임성, 가십을 좋아하는 면이 김주안을 연상하게 했다. 하필이면 오늘 아침 단체톡방에 찌라시 기사를 전송한 사람 역시 김주안이기도 했다.
단체톡방은 지난 6월 말에 하선우의 주도로 개설한 방이었다. 지나치게 잦은 소환에 질려 단체방을 나가버린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화방에 남아 있는 인원은 73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때 NnG에 근무했던 직원들이었다. 지금은 안부를 묻는 용도보다는 김주안이 찌라시 기사를 올리거나, 간단히 설문조사를 올리는 쓰임새로만 활용하고 있었지만 애초의 목적은 미지급한 퇴직금 때문에 연락하는 용도로 개설한 방이었다.
미지급한 퇴직금을 돌려주기까지 제법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 한국에 있는 김운형의 친자를 통해 가정법원에 실종선고 신고를 했고, 필리핀 경찰에 공조수사를 요청하여 김운형과 그 주변의 뒤를 캤다. 물론 이 과정에 강주한이 개입했으니 투명하고, 공정하게 돈 한 푼 없이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김운형의 실종은 명확하게 선고되었다. 하선우와 엘벡스가 특허제휴를 맺던 해의 1년 전을 실종된 지 5년째 되는 시점으로 보았다. 결국 김운형과 하선우와의 특허제휴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사기였음이 증명된 것이다.
하선우는 강주한과 약속한 대로 기술이전 비용과 차후 배상금 일부를 받는 조건으로 특허를 안신에 넘겼다. 물론 마지노선은 정해두었다. 안신에 넘기는 특허는 하선우가 국내에 출원한 특허에 한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 해외에서 출원한 국제특허는 소정의 퍼센트를 로열티로 지급받는 대가로 엘시스와 독점계약했다. 영역과 국가를 기준으로 법을 적용하는 속지주의를 따르는 특허의 특성상 소송분쟁의 결과는 생산공장과 판매된 국가에 따라 영향을 받을 터였다. 물론 하선우는 특허전쟁 속 법적인 문제에 대해 전문가만큼 아는 바는 없었지만 누군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고, 또 누가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했다. 물론 하선우 자신은 엘텍과 안신 사이에서 반사적인 이익을 얻게 되었지만. 하선우가 NnG의 직원들에게 퇴직금으로 지급한 돈의 출처가 바로 그 반사이익이었다. 덕분에 하선우는 여전히 빚더미에 앉아 있었지만, 훗날 안신이 엘텍과의 특허분쟁에서 승소한다면 배상금의 일부를 얻게 될 것이었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 백성희의 연애사와 데이트 계획을 한 귀로 흘려듣는 사이에 그들이 탄 차량은 올림픽대로를 지나고 있었다.
“선임님은 연애할 때 리스트 작성 같은 거 했어요?”
갑자기 그를 사로잡는 연애라는 단어에 하선우의 신경이 다시 백성희에게로 완전히 돌아왔다.
“리스트라니?”
“서로의 사랑스러운 점을 적는 리스트? 상대방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리스트 같은 거요.”
하선우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백성희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는 그런 건 안 만들었는데. 그건 왜?”
“꽤 효과적이에요. 연애에도 연애 자존감이라는 게 필요하거든요. 서로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고 또 새로운 사람인지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거죠. 음, 이건 제가 꺼낸 얘기가 아니라 남자친구가 제안한 거예요.”
“차라리 서로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를 만드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일 것 같은데.”
“아니, 왜요?”
발끈하는 백성희의 말에 하선우는 조금 당황했다. 상대방의 사랑스러운 점을 적는 리스트라니, 연애가 본래 어떤 바보 같은 짓도 마다하지 않는 감정놀이라지만 그런 꿀 떨어지는 행동은 하선우의 감성과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선우와 강주한의 연애스타일이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내뱉었던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어 하선우는 짧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상대방이 그 리스트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또 싸우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나의 어떤 부분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지 이해하고 서로 조심할 수 있잖아. 솔직해지는 동시에 서로에게 훨씬 더 예의를 차릴 수 있게 되는 거지.”
“뭐, 이론적으로 그렇죠. 하지만 100퍼센트 대판 싸우고 헤어질걸요?”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을걸.”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확신의 근거를 대라는 백성희의 말에 하선우는 자신이 조금 우스꽝스러운 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겸연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화 안 낼 자신 있거든.”
하선우의 말에 반박할 준비를 하던 백성희는 순간 모든 의지를 잃은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화를 안 낼 자신이 있다는 이유로 싸우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선임의 자신감이 그보다 한참 나이 어린 아가씨의 눈에도 우스워 보였던 것이다.
“아아, 그러시구나. 연애할 때 화를 안 내시는구나.”
납득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하 선임님의 말씀이 다 옳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는 확실히 뼈가 있었다. 무안해진 하선우는 무어라 덧붙여 말하려다 한숨만 내쉬었다.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명동에 도착했다. 금요일 오후 서울 중심가의 교통사정은 복잡하기만 했고, 그녀를 내려준 후에도 강주한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20분은 족히 더 걸렸다. 약속 시간보다 10분이 더 지나서야 평화시장 인근에 내린 하선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흘렀다. 한참을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지만 건너편에서 신호를 수신하고 있을 누군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주한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휴대폰을 붙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선우는 갑자기 목 뒤에 닿는 서늘함에 놀라 목을 움츠렸다.
“오랜만.”
정수리 한가운데에 턱을 얹으며 강주한이 말했다. 하선우는 눈을 한껏 치뜨고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당연히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키 크다고 유세는.”
손바닥으로 강주한의 얼굴을 밀어내며 하선우는 몸을 돌렸다. 손바닥에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남아 짐작했던 바였지만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홍콩 여행에서 하선우가 선물로 주었던 도수 없는 검은 뿔테 안경이었다. 청량감을 주는 소재 위주로 옷을 입은 그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였다. 린넨 소재의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 셔츠와 회색톤의 곧게 뻗은 면바지를 입고, 린넨으로 만든 짙은 회색의 헌팅캡을 대충 눌러썼다. 지나치게 꾸민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멋스러웠다. 하선우는 뿌듯한 티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떼어냈다.
“모자 썼네요?”
“왁스 바르기 싫어서요.”
얼굴을 마주 보며 싱겁게 웃은 두 사람은 상박을 가깝게 붙인 채 걷기 시작했다. 일주일만의 만남이라 이것저것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와 재회하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출장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떨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허전했는지. 그런 사소한 말은 일체 오가지 않았다. 서로를 향한 애정이 너무도 당연했던 둘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상대방의 외로움을 짐작할 뿐이었다.
붐비는 인파 속을 걸으며 두 사람은 평화시장 부근의 헌책방 일대로 방향을 틀었다. 청계천 바로 옆 상권, 청계천을 바라보는 병렬의 형태로 헌책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영업을 아예 하지 않는 상점을 제외하고는 문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하게 개방되어 있었는데, 책방 대부분이 인도의 일부분을 점하며 책을 드높게 쌓아놓았다. 한의학 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방부터 아동 양서를 다루는 책방, 아동용 전집을 취급하는 책방 등 4, 5평 남짓한 공간마다 책이 빈틈없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비교적 한산한 거리를 걷던 두 남자는 외서와 화집 위주로 헌책을 판매하는 책방으로 들어갔다.
“찾는 거 있으세요?”
높게 쌓여 있는 책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50대 여성이 하선우와 강주한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책 도둑으로는 보이지는 않는 멀끔한 외형에 그녀의 눈빛에서 경계가 가셨다.
“아뇨. 좀 둘러보겠습니다.”
여자는 보던 신문을 내려놓고 묘한 눈길로 강주한과 그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선 하선우를 지켜보았다. 특히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안경을 쓴 남자는 낯이 익었는데 어디서 봤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키가 크고 체형이 좋아 막연히 오래전에 신문광고나 잡지에서 봤던 모델인가 싶었다. 잘생긴 사람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게 보기 좋아 장사를 접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재촉하기는커녕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선우는 흥미를 끄는 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 있었다. 그는 골목을 밝힌 상점이 하나씩, 하나씩 어두워지는 것을 발견했다.
“사장님.”
“예?”
“여기 몇 시에 문 닫아요?”
“하절기에는 8시까지 하고 동절기는 7시까지 해요. 괜찮아요. 좀 더 봐도 돼. 헌책방은 처음인가 봐?”
“네. 여기는 처음이라 몰랐어요.”
“헌책방이 처음이야, 청계천이 처음이야?”
“…둘 다요.”
굳이 따지자면 청계천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아 대충 얼버무린 대답이 여사장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서울 사는 양반들이 아닌가 봐?”
하선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엘텍전자 사옥은 청계천 주변 일대의 고층 건물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강주한은 단지 청계천과 헌책방 일대에 발을 디딜 일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가 출근하면 매일 마주 보는 엘텍전자 건물이 저 남자의 일터이고, 그가 바로 엘텍전자 사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하선우는 미련하게 눈만 껌뻑거렸다.
“…뭐. 예. 근방에 살진 않아요.”
“멀리서 왔나 보네. 다시 오긴 힘들겠네. 기다려줄게. 실컷 보고 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번갈아 지켜보던 강주한은 관심이 식은 눈으로 다시 책의 목록을 훑기 시작했다. 마침내 흥미를 끄는 사진집을 찾아낸 그는 높게 쌓여 있는 책더미 속에서 조심스럽게 낡은 책 두 권을 끄집어내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몇 가지 화집을 더 골라냈다. 그는 하선우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또다시 책더미 속의 사진집을 훑으며 물었다.
“갖고 싶은 책 없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너무 늦게 왔나 봐요. 다음엔 좀 더 일찍 와서 구경해요.”
위에서부터 섬세하게 목록을 훑던 강주한의 손길이 멈췄다. 사진집의 제목은 노골적이었다. ‘LOVE(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하다)’ 하선우는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제목을 보고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오른손으로 강주한의 상박을 슬쩍 밀쳤다.
“밖에선 좀 적당히 해요.”
강주한은 하선우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이 쌓여 있는 책더미를 들어 올려 사진집을 뽑아냈다. ‘사랑’이란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만큼 그런 류의 감동을 자극하는 뻔한 이야기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뒤에 서서 고개만 살짝 모로 기울인 채 그가 펼쳐 든 사진집을 훔쳐보았다.
뻔한 내용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세계적인 규모의 프로젝트로 시작된 사진집이었다. 뉴질랜드의 저명한 출판사에서 공모전을 열었는데, 160여 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1만7천여 명이 넘는 사진작가들이 출판사로 4만여 장의 사진을 보냈다. 그 결과 우정과 사랑, 가족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사진을 선정해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었던 것이다. LOVE는 그중 두 번째로 나온 시리즈였다.
쪽방만 한 크기의 비좁은 서점 안에서 계속 시간을 죽이고 있기 부담스러웠던 두 사람은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헌책방을 나섰다.
“무슨 책 샀어요?”
강주한은 들고 있는 책의 목록을 하선우를 향해 돌려주었다. LOVE(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하다), 한국의 전통 민속학 사진집 가면극 시리즈 1, 2, 김수남 작가의 사진집을 합쳐 모두 네 권이었다. 강주한은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지만 유다른 정도는 아니고, 조예가 깊다고 볼 수도 없었다. 과거와 달리 그에게 예술은 그저 매혹적인 취미의 가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가끔은 오래전에 그의 안에서 꿈틀거리다 사라졌던 창작의 욕구가, 마치 되살아난 불씨처럼 온기를 피워 올릴 때가 있었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어버리는 하선우의 얌전한 잠버릇을 가만히 지켜볼 때나, 거품 가득한 입안에 칫솔을 물고 있을 때, 또는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며 실없이 웃어대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였다. 그런 모습들은 막연히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워서, 영원으로 박제해놓고 싶은 충동을 남기곤 했다. 강주한이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우려를 감안하고 데이트 장소를 회사 근방의 헌책방으로 잡은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우선 누군가의 기록물을 살펴보고 그는 착실하게 두 사람의 순간들을 박제해둘 생각이었다. 그는 그림이든, 사진이든, 어떤 형태로든 두 사람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기록처럼 남기고 싶었다.
“뭐… 글씨는 적고 그림은 많으니 금방 보겠네요. 어? 저기 들렀다 가요.”
하선우가 가리킨 곳은 캔버스 가방과 스터드를 비롯해 각종 리폼재료를 판매하는 상권이 몰려 있는 골목이었다. 역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아, 불을 켠 상점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환하게 불을 밝힌 실내로 들어서자 정유된 석유 냄새와 흡사한 섬유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피혁제품과 와펜, 레이스가 진열대마다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진열대 너머에서 직원들이 재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책이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캔버스 가방 두 개를 사서 사진집을 각자 나누어 들고 상점을 나오려던 하선우의 눈에 피혁제품이 눈에 띄었다.
“파는 거죠?”
“당연히 팔죠. 버팔로 통가죽으로 만든 메쉬 제품이라 튼튼해요. 3미리짜리로 뭐 만드시게? 팔찌?”
짙은 갈색의 가죽끈은 그물 모양으로 꼬아놓은 제품이었다. 검지와 엄지로 문질렀을 때 촉감도 나쁘지 않았다. 곁에서 가만히 하선우를 지켜보던 강주한 역시도 궁금증을 담은 눈길로 하선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하선우는 뿌듯하게 웃기만 할 뿐 구체적인 대답을 미뤘다.
“비슷한 거 만들려고요. 주세요.”
“90센티씩 파는데 얼마나 필요하세요?”
“270센티요. 자르지 말고 주세요.”
계산을 마친 하선우는 돌돌 만 가죽끈을 가방 속에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날이 후덥지근했다. 저녁 식사 때를 한참 지난 터라 두 사람은 무척 허기진 상태였다. 청계천과 헌책방 골목, 평화시장 인근 데이트를 검색하면 웹사이트와 SNS의 상단에는 온통 광장시장의 맛집이 노출되어 있었지만 이 무더위 속에 에어컨 없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간 쪄 죽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강주한은 길거리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청계천 부근 탐방은 이쯤에서 적당히 타협을 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김주안의 추천으로 알게 된 음식점을 찾았다. 한식과 퓨전 음식, 술집이 주를 이루는 종로3가 먹자골목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시아 음식 전문점이었다. 근방에서 수 분을 헤맨 끝에 외벽에 붙어 있는 동그란 갈색 간판을 간신히 발견한 두 사람은 지하 입구로 이어지는 출입구로 들어설 수 있었다.
태국음식 특유의 시큼하고 톡 쏘는 향기가 입구에서부터 강렬하게 풍겨왔다. 중앙에 제비집을 연상하게 하는 둥근 조명이 공중에 매달려 있고, 조명을 사이에 두고 여섯 개의 테이블이 넓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 끝에는 조리실이 있었는데 벽의 중간을 창문 형태로 뚫어놓아 조리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저녁 식사 때를 지난 시간이었기에 손님은 뜸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침한 인상의 식당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그들은 테이블 위에 쇼핑한 목록을 올려놓았다. 무지 에코백 두 개와 화보집 네 권, 그리고 3미터에 가까운 갈색 가죽끈이 짧은 쇼핑으로 건진 결과물의 전부였다. 강주한은 칭칭 감아놓은 가죽 매쉬 끈을 손바닥 안에서 공처럼 굴리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걸로 뭐할 겁니까.”
“집에 가서 알려줄게요.”
하선우는 근사한 선물을 기대하라는 듯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웃으면 나는 어두운 방향으로 상상력이 뻗어 나갈 수밖에 없는데요.”
강주한은 얼음물을 마시며 음흉하게 웃는 입가를 가렸다.
“아… 대단하시네. 난 지금 너무 더워서 그런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 못했는데.”
하선우는 헛기침을 하며 얼음물을 한 모금 삼켰다. 강주한의 손바닥 위에 놓인 가죽끈을 바라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들어나 보죠. 가죽끈으로 뭘 상상한 건데요?”
그 순간 접시와 수저, 피클이 자리에 세팅되고 가장 먼저 맥주와 똠양꿍과 솜땀이 나왔다. 직원이 물러간 뒤에도 강주한은 쉬이 말문을 열지 않았다. 강주한이 시큼한 국물요리와 짭짤한 파파야 샐러드를 한 입씩 먹어치우는 동안 감질난 하선우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요. 가죽으로 뭘 하고 놀 수 있는데요. 날 묶기라도 하려고요?”
하선우는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 자신이 뱉은 말을 누가 들었을세라 좌우를 살폈다. 그는 조금도 성적인 뉘앙스를 줄 생각은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강주한이 말없이 계속 쳐다보자 결국 머쓱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강주한은 하선우가 주는 신호를 모르는 척 웃었다.
“묶는 건 싫어하잖습니까.”
하선우는 천천히 눈을 굴렸다. 최근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경험과 몇 번의 비정상적인 경험을 떠올린 끝에 어깨를 움츠렸다. 하선우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적당히라는 게 없잖아요. 내가 그만하자고 하면 적당히 끝낸 적이 없고 늘….”
“하지만 결국엔 만족했잖습니까.”
하선우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침대에서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엔 지나치게 구차하게 느껴졌다.
“내가 강압적으로 굴었다고 느꼈다면….”
“아. 잠깐만요.”
하선우는 갑작스러운 감탄사와 함께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강주한의 말을 막아버렸다.
“방금 생각났는데 건의 하나 할게요. 우리 리스트 작성하죠.”
“리스트라면 …버킷리스트 같은 걸 말하는 겁니까.”
불쑥 맥락 없이 튀어나온 제안에 강주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뇨. 그런 건 너무 흔하잖습니까. 남들이 다 낭만적인 걸 한다고 우리까지 낭만적인 걸 할 필요는 없죠.”
“그럼 무슨 리스트를 작성하고 싶은 겁니까.”
“서로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 작성해요.”
강주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조금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잠시 후 거품이 가라앉은 맥주잔을 가볍게 손목으로 흔든 그는 하선우를 물끄러미 주시하며 맥주의 절반을 비워냈다.
“그런 리스트를 작성하는 건 우리 두 사람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 같은데. 아니, 그보다 자칫 잘못하면 감정만 상할지도 모르죠.”
“아뇨. 서로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감추는 것보다는 낫죠. 한 대 맞으면 얼얼한 진짜 불만부터 시작해서 아주아주 사소한… 화를 내기도 치사스러울 만큼 짜증스러운 부분을 적을 수도 있는 거죠.”
강주한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선우는 덤벼보라는 듯 두 손을 강주한을 향해 까딱거리며 말했다.
“난 주한 씨가 무슨 말을 적어도 화 안 낼 자신 있어요.”
“설마. 내가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데 누구보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걸 알면서.”
“싸우자 모드로 가요? 강태한처럼 굴 거면 때려치우고요.”
강주한은 맥주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흥미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알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가능성은 있는 거잖습니까. 내가 하선우 씨를 화나게 만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소원 들어줄게요. 누구든 목록에 적힌 상대방의 불만을 보고 화를 내면 소원을 들어주는 겁니다.”
단호하게 선언한 하선우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파파야 샐러드를 젓가락으로 크게 집어 입안에 가득 밀어 넣었다. 볼을 볼록하게 채운 채로 강주한을 바라보며 꾹꾹 오랜 시간 씹어 삼킨 그는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메모 앱을 실행시킨 그는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예를 들어, 강주한의 짜증나는 부분을 하나 꼽아보자면 침구, 속옷 빨래를 절대 자신의 손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트와 속옷은 결벽증 수준으로 갈아치우면서 빨래는 늘 하선우의 몫으로 남겨놓는 게 강주한의 가장 짜증나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목록을 채워나갈 수 있겠죠.”
하선우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용감하고도 치사스럽게 달뜬 고백을 마친 남자는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휴대폰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흥미를 갖고 나른한 자세로 하선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주한이 말했다.
“물론 빨래가 하선우 씨 취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말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서 내버려둔 겁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어차피 사용인이 와서 치울 텐데 왜 하선우 씨가 세탁을 하는 겁니까?”
하선우는 들여다보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강주한이 빨래를 돕지 않았던 이유는 하선우의 짐작대로였다. 어차피 하선우가 빨래를 하지 않아도 주중이면 그들이 출근한 사이에 고용인이 다녀가 깨끗하게 빤 시트로 침구를 갈아놓곤 했다.
지금껏 그들을 마주친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하선우는 고용인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아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래서 섹스를 하기 전에는 꼭 침대 위에 커다란 사이즈의 홑이불을 깔아놓곤 했다. 애액이 침대에 묻더라도 시트와 이불 전체를 빠는 것보다는 홑이불 하나만 빠는 게 훨씬 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아, 주한 씨는 몽정하고 나서 속옷 빨래도 직접 해본 적 없죠?”
강주한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의 무언에서 충분히 긍정의 가능성을 유추해낸 하선우는 치를 떨며 대답했다.
“애액, 정액, 이것저것 온갖 것 다 묻히고 뒹굴었잖아요. 그런 걸 그 사람들이 다 들여다보는 거잖아요. 부끄럽지 않아요? 그건 진짜 사생활의 영역인데. 난 그런 건 남이 뒤처리하는 게 싫거든요? 으으….”
하선우는 턱을 못나게 구기며 항의했다. 하선우는 가끔 얼굴을 못나게 구긴다든가, 뚱하게 입술을 내밀고 눈을 굴리는 만화 캐릭터 같은 방식으로 긴장감을 풀어버리곤 했다.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키기보다, 물이 끓어버리기 직전에 찬물을 부어버리는 방식으로 미적지근한 온도를 유지하는 버릇이었다. 하선우는 항의의 방법마저도 늘 이렇게 시시하고도 온순했다.
강주한은 성의를 갖고 고심하며 항의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하선우의 이런 모습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그가 말한 시시한 인생이 이런 삶이라면, 강주한은 섹스한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은 시트를 빠는 일쯤은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도 도울게요.”
하선우는 얼굴을 붉히며 안도했다.
“그래요? 분명 그거 말고도 또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강주한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목록을 추가 작성하려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윗입술로 뽀득뽀득 빨며 눈을 굴렸다. 자리 깐 김에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하선우의 노력이 어처구니없고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와 강주한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당장 생각해야 할 게 아니면 리스트를 채울 시간은 많으니까… 일단 먹죠.”
하선우는 강주한을 미안한 얼굴로 쳐다보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리스트를 100장 가득 채워와도 화 안 낼게요.”
도시의 정체된 공기 사이로 온갖 종류의 소음이 퍼져 나갔다. 군중의 소음과 차도의 경적소리, 청계천의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쉼터 시설에서 들려오는 마리아치 전통 연주, 그 밖의 수많은 소리가 더위로 가득 찬 공기를 진동시켰다. 하선우는 기분이 들떴다. 사방이 꽉 막힌 실내에서는 들을 수 없는 거리의 소음에 비로소 야외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음이 실감 난 것이다. 주말을 맞이한 청계천 인근의 분위기는 주중의 한낮과 완전히 달랐다. 사무직 일꾼들 대신 연인과 가족, 관광객들이 도시를 차지해버렸다.
두 사람은 아이스커피를 하나씩 들고 지상에서 물길이 흐르는 다리 아래로 내려와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지상에 비하면 지하가, 지면보다는 물길에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시원해졌다. 두 사람은 물길이 넓어지고 벽화가 아름답게 꾸며진 길을 지나며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엘텍그룹과 서울시가 함께 청계천 데이트 코스로 조성한 엘텍 분수길이었다.
삼일교 주변으로 꽃과 사랑을 주제로 한 벽화를 그려놓고, 청계천 한가운데 분수 노즐과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는 수중등을 깔아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진으로만 봤을 뿐,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가방을 뒤에서 슬쩍 잡아당겼다.
“그럴싸한데요?”
삼일교 아래 돌계단 방향으로 움직이던 강주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처음에 하선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곧 하선우의 눈에 담긴 칭찬의 의미를 이해하고 웃음을 흘렸다.
“내가 계획한 일도 아닌데요. 뭐.”
“아…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강주한은 주변을 둘러보며 빈자리를 찾았다. 청계천 일대 중에서도 명당으로 알려진 자리였기 때문인지 삼일교 아래 돌계단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커플과 가족으로 이루어진 관광객 대부분이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휴가 분위기를 내는 사람들은 구석진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물가에 앉은 사람들은 마치 계곡에 놀러 온 것처럼 계천에 발을 담그고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비교적 물가에 가까운 돌계단 아래쪽에 자리를 잡았다. 발을 조금만 뻗으면 구두가 흠뻑 물에 젖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물가에 신발이 닿지 않도록 긴 무릎을 거의 안다시피 하던 강주한은 자세가 불편했는지 몸을 이리저리 꿈지럭거리다, 결국 신발과 양말을 가지런히 벗어 계단에 올려두었다.
“발 담그려고요?”
“예.”
강주한은 바지를 무릎 중간까지 걷고 물에 발을 담갔다. 강주한이 드물게 벌이는 일탈의 모습을 지켜보던 하선우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천에 발을 담갔다.
“서울 한복판에서 별걸 다 해보네요.”
약간은 장난스럽게, 조금은 천진한 듯한 헤벌어진 웃음을 흘리며 하선우는 말했다. 동해 바다나 강원도의 계곡은 아니었지만, 서울 한복판의 개천에 발을 담그는 이런 조촐한 휴가도 나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강주한도 그들을 의식한 것이 틀림없었다. 등 뒤로 팔을 뻗어 상체를 지탱한 하선우의 손 위로 강주한의 손이 포개졌다. 긴장감을 주되, 일상적인 선을 넘지 않는 정도의 겹쳐짐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평생 뭇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키스는 나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맞닿은 피부의 온기, 그 사소한 접촉이 유발하는 긴장감만으로도 족했으니까.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친다. 물이끼로 반들거리는 돌바닥에 발바닥을 문질거리며, 하선우는 계곡에서 죽을 뻔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다들 그런 경험이 한 번씩은 있겠지만 난 정말 죽을 뻔했어요. 그날 물살이 엄청 셌거든요. 또 한 번은 동해에서 튜브 없이 놀다가 파도에 휩쓸려간 적도 있었고, 여덟 살에 차에 치인 적도 있어요. 팔다리만 부러지고 말았지만. 아 맞다. 나 심장수술도 했네.”
“어쨌든 살아남았잖아요. 하선우 씨는 운이 좋아요.”
“맞아요. 사실 태어나기 전에 몇 번이고 낙태하려고 고민했던 게 저였대요. 위로 형제가 많기도 했고 어머니 몸도 안 좋았으니까. 태어나고 보니 심장도 안 좋았죠. 그래서 어머니는 저 어릴 때 얘길 잘 안 꺼내요. 하고 싶지가 않은 거죠. 하여간에 전 형제 중에서 가장 별난 자식이에요.”
하선우는 발목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발목에 저항하는 물살이 흰 포말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강주한을 보았다.
“어머니가 우리 사이 대충 짐작했어요.”
강주한은 모자를 벗었다. 의미 없이 앞머리를 쓸어내리고 다시 모자를 걸쳐 썼다.
“마음이 복잡해 보이더라고요. 어머니 소원이 나 장가가는 거잖아요.”
“…반대는 안 하십니까?”
“반대까지는 안 하는데 반기지도 않죠. 네 분수나 알라고 하죠.”
하선우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에 덧붙였다.
“전에 연애하다가 헤어져서 네 회사도 말아먹은 거냐고 묻던데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은 오랜만에 떠올린 과거의 주제를 의식하며 웃어야 할지, 아니면 미안해야 할지 고민했다. 불현듯 떠오른 사건들은 그저 농담처럼 가볍게 넘겨버리기엔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었고, 시간은 상처가 아물 만큼 흐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결국 하선우가 먼저 웃어버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자꾸 웃다 보면 정말로 언젠가는 둘 사이의 일들이 농담거리가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테니까.
“대답하기 애매해서 아니라고 했어요. 책임공방을 따지고 들기엔 너무 복잡하기도 하고 그걸 다 밝혔다가는 어머니가 드러누울 것 같아서.”
강주한은 시선을 내리며 미안한 눈을 했다. 하선우는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내일 집에 들러서 갈비찜 가져가래요. 정작 부모님은 오늘부터 일주일간 여행 간다고 집 비울 거라지만.”
하선우는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숨기려 뺨이 간지러운 척 손끝으로 긁적거렸다. 강주한을 마주 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달아난 어머니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것만 같았다.
* * *
퉁퉁 물에 불은 다리를 손수건과 양말로 닦고 그들은 택시를 잡아탔다. 한강변을 낀 도로를 가로질러 대교를 건너고, 한참을 달린 끝에 두 사람은 그들의 아늑한 아지트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후덥지근한 침실의 에어컨을 켠 뒤, 두 사람은 각자 욕실로 사라진다. 강주한은 침실 곁에 딸린 욕실로, 하선우는 거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간다. 강주한은 일주일 만의 재회이니만큼 함께 진득하게 자쿠지 안에서의 나른한 목욕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하선우의 표현에 의하면 자신은 남자이기 때문에 효율적인 섹스를 위해서는 곤혹스럽고 번거로운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당신이 그런 걸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변태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 과정을 죽어도 보여줄 생각이 없다고 했다.
둘 사이의 은어로 반사의 시간이라고도 했는데, 반(反)낭만적이고 사적인 시간의 줄임말이었다. 어쨌든 하선우는 반사의 시간을 홀로 갖고 나면 새빨갛게 익은 흐물흐물한 몸으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성욕이 모두 사라진, 현자의 얼굴로 강주한을 올려다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가운을 걸치고 나온 하선우는 웬일인지 신이 나 보였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강주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저녁나절에 청계천 인근을 돌아다니며 샀던 가죽끈과 가위가 들려 있었다. 강주한의 상상력이 야릇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려는 찰나, 하선우가 가죽끈을 길게 풀어 강주한의 목에 감았다.
“뭐하는….”
하선우는 재단을 하듯 가죽끈을 당겼다. 쇄골 아래, 가슴의 중간까지 끈을 잡아 길이를 가늠한 뒤, 여유분을 주어 끈을 잘랐다. 같은 길이로 끈을 하나 더 만든 그는 강주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스탠드가 놓여 있는 콘솔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서랍장을 열어 조악한 모양의 빨간 상자를 꺼낸 그는 그 안에서 반지를 꺼내 가죽끈 안에 집어넣었다. 끈의 끄트머리를 짧게 매듭짓고, 나머지도 비슷한 길이의 목걸이로 만든 그는 강주한의 앞으로 걸어왔다.
“반지 기억나요?”
강주한은 잠시 멍하게 목걸이에 엮인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천연 비취로 만든 가락지였다. 기억의 틈을 휘젓지 않아도, 옥 반지의 출처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홍콩 여행에서 하선우가 먼저 나간 가게에 홀로 남아 반지를 계산했던 일과 비교적 최근 강주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즐거워하던 하선우의 얼굴을 차례대로 기억해냈다.
“옥반지로 펜던트를 하려고 했군요.”
“네. 옥가락지를 손에 끼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명색이 커플링인데 몸에는 지니고 다녀야죠.”
“다른 반지를 맞춰주려고 했었는데. 이 반지가 마음에 듭니까?”
하선우가 내미는 목걸이를 받아들며 강주한은 물었다.
“예.”
“왜요?”
받아 든 목걸이를, 강주한은 자신의 목에 거는 대신 하선우의 목에 걸어주었다. 하선우는 슬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이 반지를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샀는지를 생각할 때면 즐거운 기분이 들거든요.”
“즐거워요?”
“예. 이런 걸 커플링으로 끼고 다니는 아저씨들은 없을 거 아닙니까.”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눈으로 강주한을 바라보며 하선우는 목걸이를 강주한의 목에 걸어주었다. 강주한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반지를 샀는지,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보려 애를 썼다. 그는 쇄골과 가슴팍 사이에 매달린 반지를 들어 올렸다. 매끄러운 표면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좀 이례적이긴 하네요.”
“앞으로 평생 목걸이 빼면 안 돼요.”
“목욕을 할 때도?”
“뭐… 가죽이니까 그 정도는 타협해줄게요.”
마치 어린애들 같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선우는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하선우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강주한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들어와 앉았다. 강주한의 아랫배에 뒷머리를 기대고 손을 뻗어 리모컨을 찾았다. TV를 켜고 습관적으로 채널을 돌리다 고개를 들어 강주한의 턱을 쳐다보며 하선우는 물었다.
“영화 볼까요? 미스 리틀 선샤인. 아직 그 영화 안 봤죠?”
좋을 대로. 영화에 관해서는 특별한 호불호가 없는 강주한의 대답에 하선우는 리모컨을 눌러 TV 결합 상품을 통해 영화를 결제했다. 주말을 맞이하기 전날 영화 한 편씩을 보는 일은 두 사람 사이의 일상으로 굳어져가고 있었다. 지방의 허름한 모텔에서 하선우가 쇼생크 탈출을 보며 강주한을 기억한 이후로, 두 사람은 인생의 쉼표를 찍듯 영화를 보며 사뿐하고도 게으른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쇼생크 탈출, 죽은 시인의 사회, 포레스트 검프, 제8요일과 같은 명작과 종교색이 짙은 벤허와 십계, 그리고 십대 소녀들의 바이블과 같은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아주 많은 영화를 보았다.
명작과 대중적인 영화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영화를 하나씩 정복해나가던 그들이 오늘 감상하기로 한 영화는 하선우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미스 리틀 선샤인이었다. 한 편의 영화를 곱씹어보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미스 리틀 선샤인만큼은 내용을 외우도록 봤었다. 하선우는 특히 스티븐 카렐을 좋아했다. 그는 영화에서 프루스트 학자인 프랭크를 연기했는데, 늘 코믹한 연기만 하던 그가 웃음기를 쫙 뺀 진지한 역할을 맡은 게 좋았다. 물론 가장 좋았던 건 그가 게이 지식인 역할을 맡았다는 거였다. 프랭크는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게이 지식인으로, 스스로를 연민하고 깊은 우울에 빠져 있는 남자였다.
영화는 가족영화이자 코미디로, 황당한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였다. 여덟 살 막내 올리버의 미인대회 참여를 위해 여섯 명의 후버 가족은 고물 미니버스를 타고 1박2일 동안 뉴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의 라돈도 비치까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할아버지의 죽음, 경찰의 추격, 빈털터리가 되며 각자의 꿈이 좌절되는 와중에도 후버 가족은 캘리포니아행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미인대회에 도착한다. 그리고 작정한 듯 미인대회를 엉망으로 망쳐버렸다.
하선우는 자신의 아랫배 위에 놓인 강주한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저 대사가 너무 좋아요.”
-프루스트는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해서 뒤를 돌아보고는 이렇게 결론 내렸어. 고통받은 날들이 인생 최고의 날들이었다고. 그때의 자신을 만들어준 시간이었으니까. 행복했던 시간? 완전히 낭비였지. 하나도 배운 게 없어.
프랭크가 고집스럽게 고독을 고집하는 조숙한 자신의 조카를 향해 말했다.
어떤 영화 평론지에서는 프랭크의 대사를 두고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오답이 무엇인지는 말해줄 수 있는 듬직한 어른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실패와 좌절을 겪어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담백한 인생사용 후기라는 것이다(김세윤, <스티븐 카렐>, 씨네21, 2015).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묵언수행을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여행 도중 색맹인 것이 밝혀져 1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결국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조카에게 프랭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말하게 돼 기쁘다. 보기보다 멍청하지 않은 것 같다.
“저 웃음도 너무 좋고.”
화면 속에서 좀처럼 웃지 않는 조카와 삼촌이 서로를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강주한은 이유를 묻는 눈으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뭉클하잖아요.”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는 강주한의 커다란 손을 만지작거리며 하선우는 말했다.
“인생에서 패배를 경험한 사람들의 성장담이 끌리더라고요. 뭐, 다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패배를 겪잖아요.”
하선우는 강주한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대었다. 가슴팍에 뒷머리를 기대며 그는 불쑥 말했다.
“경험담이라서 그런가?”
가슴을 들썩이며 웃자 강주한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상체를 바짝 자신에게로 잡아당긴 그는 하선우의 뒷목에 고개를 깊숙이 묻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 그 얘길 꺼내면…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선우는 강주한의 웅얼거리는 목소리 속에서 그가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주한은 그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묻어두려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하늘 같은 자존심을 안간힘을 다해 꺾고, 매 순간 자신의 흠을 인정하는 일은 그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늘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하선우는 그런 강주한의 모습이 좋았다. 자신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강주한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던 것이다.
“난 그냥 무용담처럼 얘기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하선우는 웃으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강주한은 하선우와 마주 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숨소리를 의식했다. 살갗에 닿는 체온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성적인 의도가 더욱 명백하게 느껴졌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다리를 벌리려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하선우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실눈을 뜨며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주한에게도 순식간에 하품이 옮아갔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시원하게 하품을 한 두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멈칫, 웃음을 터트렸다.
“피곤합니까?”
연신 하품이 나왔다. 찔끔 흘러나온 눈가의 눈물을 비벼 닦으며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피곤하면….”
그의 말은 석연치 않은 끝을 맺었다. 그냥 잘까요? 하선우는 강주한이 이으려던 뒷말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차마 뒷말이 입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쩐지 짓궂은 기분이 든 하선우는 강주한이 질색할 걸 알면서도 그를 놀릴 궁리를 했다. 몇 달 전 강주한을 평생 놀려먹을 에피소드를 얻게 되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예. 많이 피곤합니다.”
“그럼 오늘은 건너뛸….”
“강주한 씨의 협조가 필요하다고요. 그래야 당신의 바람을 담은 마법 황금 열쇠가 나타나 섹스 월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선생님, 따라해주세요. 수리 수리 마!”
남은 주문을 외우려던 하선우의 입이 그의 커다란 손에 강하게 틀어막혔다.
“그 얘기는 다신 안 꺼내기로 약속했잖습니까.”
어깨를 떨며 웃는 하선우를 힘주어 노려본 강주한은 목을 울리는 그르렁 소리를 냈다. 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질색하는 거 알면서 놀릴 겁니까?”
강주한이 강한 태도로 나오자 하선우의 눈가가 축 처졌다.
“눈으로 불쌍한 표정 지으면 뭐합니까. 입술은 웃고 있는데.”
입술을 막은 강주한의 손바닥을 두 손으로 떼어낸 하선우는 짓궂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안 속네.”
그는 한 번 더 배짱을 부렸다.
“그래서 안 해요?”
“섹스하는 데 왜 그런 유치한 주문이 필요한 겁니까? 낭만적이지도 않고 재미도 없어요.”
한기가 느껴질 만큼 냉담한 어조로 다그치는 강주한을 하선우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하선우는 그를 정말 빤히 들여다보였다. 강주한은 화려하고 우아한 섹스부터 천박한 섹스에 이르기까지 얼마든지 극단을 오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희화화하는 익살과 능청스러운 재주만큼은 조금도 타고난 면이 없었다. 한마디로 강주한은 유치한 연애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니, 거의 젬병이었다.
그래서 하선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여전히 웃는 얼굴로 강주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선우는 손해 볼 것이 없었으므로. 결국 강직하게 굳어 있던 강주한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고 그는 곧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말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강주한에게 하선우는 재촉했다.
“분위기 좀 맞춰봐요. 주문 좀 외우는 게 어때서 그래요. 황금 열쇠를 꽂아야 섹스 월드가 열린다니까요?”
“…유치하군요. 정말.”
강주한은 봐달라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단호한 하선우의 표정에 그는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수리수리 마수리…… 나머진 못하겠습니다. …이제 만족합니까?”
그는 체념의 조로 말했다.
반면 하선우는 신이 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헤헤 웃다가, 돌연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워버렸다. 그는 엄청난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진지하게 다리를 벌리며 말했다.
“어쨌든 마법주문의 효과가 나타났잖아요.”
하선우는 강주한을 향해 다리를 서서히 벌렸다. 성인들만의 놀이동산이 지금 막 개장했다는 듯이 무릎을 세워 벌린 그는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강주한을 불렀다.
강주한은 차라리 노골적인 욕망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런 식의 성적인 농담은, 적나라한 수준의 더티톡보다 더 강주한을 견딜 수 없게 만들곤 했다. 마치 성에 대한 호기심만 가득한 경험 없는 소년처럼 그의 몸을 배배 꼬게 만들었다. 이런 느낌이 싫은 건 아니었다. 유치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농담으로 강주한을 웃게 만드는 사람이 세상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선우의 유치한 기술은 나날이 늘어만 가는데 그는 좀처럼 면역이 늘지 않았다. 강주한은 치를 떨면서도 하선우에게 매혹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찌푸린 얼굴을 붉히며 강주한은 결국 못 이긴 척 하선우에게 덤벼들었다. 뺨을 두 손으로 힘주어 감싸고 살짝 벌어진 입술을 깨물었다. 막상 그를 유혹해놓고도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러트렸던 하선우는 다정하게 점막을 비비는 입술에 긴장을 풀고 강주한의 등을 껴안았다.
나체가 되는 일은 간단했다. 가운의 끈을 풀기만 하면 됐으니까. 강주한이 자신의 가운 끈을 푸는 사이에 하선우는 손을 뻗어 리모컨으로 방 안의 조명을 낮추었다. 단숨에 사적인 순간을 공유하기에 적절한 분위기로 변하자 강주한은 좀 더 거리낌이 없어졌다. 그는 하선우의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 하반신을 능란하게 비벼대며 자신의 가운을 저 멀리 벗어던졌다.
두 사람은 가운을 벗느라 잠시 떨어졌던 그 순간이 아쉬워 다시 입술을 꼭 밀착하고 입맞춤을 나누었다. 치열을 훑는 물컹한 혀에서는 민트맛이 났고, 뒷목과 등 뒤를 더듬더듬 껴안고 놔주지 않는 강주한의 커다란 손바닥에서 차츰 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반쯤 발기한 자신과 달리, 강주한은 이미 완전하게 발기해 벌써부터 프리컴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선우는 성급하게 불타오른 남자의 성욕에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와 곤란했다. 결국 입술을 떼어낸 강주한이 긴 한숨을 내쉬며 하선우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는 하선우의 발목을 잡아당겨 침대 한가운데로 끌어냈다. 그는 작정한 얼굴로 하선우의 위에 올라탔다. 땀과 머리카락이 한데 엉켜 달라붙은 이마와 미간, 땀이 송골송골 돋아나 있는 콧날과 턱 끝, 목울대와 쇄골 위로 천천히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그리고 아주 섬세하고 연약한 감촉이 젖꼭지 위에서 느껴졌다. 혀끝으로 유륜 위를 슬쩍 핥아 내린 것이었다.
“으….”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츠러트리자 강주한은 양 손목을 잡아 침대 위로 눌렀다. 그는 이전보다 과감하게 젖꼭지를 머금었다. 혀로 휘감고, 입술로 조였다가, 혓바닥의 넓은 부위로 발딱 솟아오른 살덩이를 넓게 쓸었다. 입술을 꾹 깨문 하선우는 금방이라도 애원조의 신음을 토해낼 것 같은 눈으로 강주한을 내려다보았다.
들썩임이 줄어들자 강주한은 손목을 짓누르던 손을 풀었다. 그는 하선우의 무릎 뒤에 손을 넣어 상체를 향해 밀며 말했다.
“무릎 넓게 벌린 상태로 껴안고 있어요.”
“이렇게요?”
벌겋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하선우는 쑥스럽게 대꾸했다. 강주한의 요구대로 하선우는 다리를 벌린 자세로 무릎 뒤에 손을 집어넣어 껴안았다. 강주한은 하선우에게 윙크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침대 바로 옆에 놓인 협탁에서 루브와 조금 전에 사용하고 남은 가죽끈을 꺼내왔다. 평범하게 섹스를 시작하는구나 안도했던 하선우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라 강주한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남는 거 활용하면 좋잖습니까.”
“…구속 플레이라니 그건 좀 너무 본격적인데요.”
“조금 전에 외웠던 마법의 주문 백번도 더 외울 수 있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기분에 그는 눈을 부릅떴다. 강주한은 흥미로운 눈길로 하선우를 내려다보며 가죽끈을 길게 잡아당겼다. 그가 굳어 있는 사이 왼쪽 다리와 왼쪽 손을 너무 조이지도, 헐겁지도 않게 동여맨 그는 남은 길이로 나머지 팔다리도 함께 구속해 고정했다.
“아니, 이건 좀.”
“싫으면 풀까요?”
하선우의 몸 위로 상체를 기울이며 강주한은 물었다. 얼굴이 붉었다. 섹스에 관해서라면 하선우는 판단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한 선은 긋지 않지만 그 자신이 어느 수준까지 감당 가능한지, 어디까지 모험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 스스로도 전부 다 알지 못했다.
“내가 풀라고 말하면 풀어요.”
“알겠습니다.”
“사장님이라고 말하면 진짜 멈춰야 돼요?”
하선우의 확고한 말에 강주한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사장님은 두 사람 간의 세이프 워드였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돔과 섭의 플레이를 즐겨본 적은 없었지만 특별한 계기 없이 세이프 워드를 만들어두었다. 하선우는 그 자신의 신체에 가해지는 쾌락 또는 고통을 어느 수준으로 인내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둔 용어였다.
“알겠으니까 시작해도 됩니까?”
하선우는 투루루, 입방귀를 뀌듯 투레질을 하며 눈을 굴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의 시큰둥한 반응은 금세 깨어지고 말았다. 하체에 말캉하게 와 닿는 감촉에, 그는 무방비한 신음을 흘렸다.
“아!”
회음부에 따듯한 숨결이 닿고 손가락이 살짝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검지를 아주 살짝 밀어 넣고, 엄지로 주름을 문질거리며 강주한이 말했다.
“오렌지 냄새 나요. 클렌저 제품 바꾼 게 전보다 낫군요.”
손가락을 빼낸 그가 입구에 꾹 입술을 맞췄다. 강주한이 혀나 입술을 사용해 회음부와 구멍 주변을 리밍할 때면 하선우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곤 했다. 민망한 장소를 향해 마주 인사하는 느낌에 하선우는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따듯하고 축축한 입술이 회음부와 고환 사이를 흡입하듯 가볍게 빨아들이며 오물거렸다. 하선우는 구멍 주변이 근질거리는 초조한 느낌에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활짝 다리가 벌려진 상태로 팔다리가 함께 구속된 느낌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부자연스럽고 갑갑했다. 고개를 들었다가 내리고 주먹을 쥐었다 펴는 좁은 한계 외에는 그가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없었다. 아무래도 강주한은 오늘 자신을 작정하고 녹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바짝 조여든 구멍 주변을 혓바닥으로 넓게 쓸어내리는 느낌이 섬뜩해서 하선우는 잡고 있는 허벅지를 힘주어 꽉 껴안았다. 강주한이 예민한 살갗을 혀끝으로 잔뜩 힘을 주어 핥아 내렸다. 거친 콧숨이 터져 나왔다.
강주한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벌린 다리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하선우의 모습이 지나치게 야릇했다. 강주한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하선우의 신체를 게걸스럽게 탐닉하고 싶은 욕망으로 하체가 뻐근하게 당겼으며, 동시에 동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자제심이 그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가학적인 지배 욕구와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다 보면 늘 한 가지 타협안이 내려졌다. 그는 하선우가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수준이 조금 지나치다 하더라도.
그는 빳빳하게 기립한 하선우의 성기를 한 손으로 감아쥐었다. 엄지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귀두를 문지르자 즉각 반응이 왔다. 하선우는 허리를 둥글게 띄우며 인상을 썼다. 그는 고개를 숙여 투명한 체액이 흘러나온 귀두를 혀끝으로 살짝 핥았다. 흐읍, 하선우가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그는 그대로 성기를 머금었다. 귀두가 목젖을 찌르는 느낌이 불쾌했지만 개의치 않고 그는 침을 삼키는 시늉을 냈다. 목구멍이 조여들며 귀두가 진득하게 눌리는 느낌에 하선우의 허벅지가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뺨이 오목해지도록 힘주어 쪽쪽 빨자, 목을 긁는 탁한 탄식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강주한은 손을 더듬더듬 뻗어 루브가 담긴 통을 찾았다. 손바닥을 기름지게 적신 그는 움찔움찔 구멍 속으로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자, 자… 자자잠깐!”
당황한 하선우가 어떻게든 반동을 줘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강한 압력으로 페니스가 빨렸다.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이며 성기를 애무하는 동시에 그는 손가락을 천천히 꽉 다물린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길고 마디가 튀어나온 손가락이 구불진 속으로 쑥쑥, 들어오는 생생한 느낌에 하선우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으… 으…아!”
손가락이 살짝 벌어지고 다시 모여 고환 바로 아래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위를 슬쩍슬쩍 자극했다. 강렬한 감각에 하선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구멍이 별개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조여지고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아랫배가 부풀었다, 바짝 수축해 희미한 선의 근육이 드러나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몸속을 역행하며 자꾸 꾸물꾸물 기어들어오는 섬세한 손가락의 움직임에 눈앞이 벌겋게 변했다. 쾌감을 밀어내고 싶으면서도 더 강렬하게 닿고 싶었다.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났다. 살짝 열린 입구에 걸쳤던 손가락을 모아 단번에 주욱 쑤셔 넣고 함부로 전립선을 짓눌러댔다. 잔뜩 느끼는 부위만 집중적으로 빨리고 쑤셔져 급격하게 성감이 고조된 하선우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미치, 읏… 겠… 네. 흐읏… 흐응! …아!”
시트를 잡아 뜯거나,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결박된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다수의 악마에게 돌아가며 구음과 삽입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극점을 향해 쌓여가는 감각을 버티던 하선우는 전신을 달달 떨며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강주한의 입안에 사정을 했다. 허벅지와 팔을 고정한 가죽끈이 질기게 당겨질 때까지 하선우는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럽게 사정을 했다.
팔이 아릴 정도로 빠르게 구멍을 쑤셔댔던 손을 빼냈다. 강주한은 루브와 체액으로 젖은 손 위에 입안에 머금었던 정액을 뱉어냈다. 뿌옇고 양이 많았다. 입가에 남은 정액을 혀로 진득하게 핥아먹은 강주한은 턱관절이 얼얼한 느낌에 아래턱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하선우는 풀어진 시선을 천천히 올리다 강주한과 눈이 마주치자,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강주한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돌려주었다.
“이건 좀 미친 짓 같아요.”
하선우의 목소리는 이미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짜 미친 짓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그는 정액으로 흠뻑 젖은 손을 구멍 주변에 문지른 뒤, 자신의 페니스에도 대충 문질렀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무릎 꿇고 앉은 그는 빳빳하게 기립한 성기를 구멍을 향해 맞췄다. 그리고 몸속으로 푹 찔러 넣었다. 여전히 긴장이 가시지 않은 몸속의 탄성이 질겼다. 그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베개를 집어 엉덩이 밑에 깔아준 뒤, 양쪽 발목을 잡고 위로 밀어 올렸다. 허리가 허공으로 들려졌다. 강주한은 연인의 엉덩이에 걸쳐 앉듯이 삽입 자세를 바꾸었다. 깊어지는 삽입에 하선우가 괴롭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가장 잘 느끼면서도, 가장 괴로워하는 체위 중 하나였다.
“헉!”
강주한은 지체하지 않고 삽입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뿌리 끝까지 박아 넣고 귀두 가까이 뽑아내고, 다시 뿌리까지 삽입하기를 반복했다. 하선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이마의 혈관이 불거졌다. 그의 것은 너무 커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본능적인 거부감에 몸의 힘이 풀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깊게 박아 넣을 때마다 숨이 턱, 턱 막힌 소리를 내뱉던 하선우는 갑자기 내벽이 마구 문질러지는 느낌에 비명을 닮은 신음을 내질렀다. 참을 수 없는 요의가 느껴졌다. 조금 전의 사정으로 완전히 발기도 되지 않은 상태였던 성기 끝에서 희뿌연 애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윽! 미치겠…흐윽! 흐으으….”
강주한은 푹 찔러 넣은 상태로 삽입을 멈추었다. 움직임을 멈춘 사이에도 내벽은 연동운동하며 단단한 성기를 쥐어짜고 있었다. 거슬러 들어오는 살덩이를 되밀어내려는 내벽의 힘에 아랫입술을 혀로 훔친 강주한은 이를 악물었다. 하선우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충혈된 눈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이 지독하게 야하게 느껴졌다. 물을 가득 채운 풍선처럼 조금만 더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는 반쯤 말랑거리는 하선우의 성기를 검지와 엄지로 집어 흔들었다. 찔끔찔끔 흘러나온 애액이 아랫배를 향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뿌리 깊게 박아 넣었던 성기를 모두 뽑아낸 그는 살짝 열려 있는 구멍 주변을 귀두로 둥글렸다.
“흐으… 그으… 그거.”
“좋습니까?”
하선우는 상기된 얼굴로 꿈을 꾸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말랑말랑하게 열려 있는 구멍은 폭신하면서도 축축했다. 매끄럽게 젖어 번들거리는 좆의 기둥을 잡고 강주한은 구멍 주변을 귀두로 문질렀다. 으으응, 목 안으로 잠겨드는 끄는 신음을 흘리며 하선우는 허리를 뒤척거렸다. 싫다는 건지 보채는 건지, 호부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 애매한 반응에 그는 목이 탔다. 성기의 밑기둥을 잡고 구멍 속으로 절반 넘게 푹, 찔러 넣은 그는 탄력 있는 점막의 벽을 힘주어 긁어 내렸다. 강하게 마찰하는 느낌에 하선우는 날카로움은 신음을 내질렀다.
“흐윽!”
반쯤 발기했던 성기가 다시 단단하게 힘을 얻고, 애액이 질질 쏟아졌다. 강주한은 허리를 유연하게 돌리며 다시 깊게 쑤셔 박았다.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힘주어 짓누른 자세로 위에서 아래로 속도를 높여 푹, 푹, 찔러 넣었다. 아랫입술을 짓씹고, 깨물며 목소리를 억누르던 하선우는 어느 순간부터 발성을 거치지 않은 숨소리만 토해내기 시작했다. 예민하게 느끼는 곳이 강렬하게 비벼지고, 짓눌렸다. 그는 정신이 산화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멍한 시선으로 강주한을 올려다보며 온몸을 쥐어짜던 긴장을 놓아버렸다. 탈력감을 느끼는 하선우와 시선을 맞추며 강주한은 허리를 숙였다.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추삽질을 반복할 때마다 하선우의 얼굴 위에서 앞뒤로 흔들거렸다. 그는 반지의 고리에 검지를 슬쩍 끼워 넣고, 밭은 숨을 몰아쉬는 하선우의 입술을 문질렀다. 넋을 놓은 눈빛에 느릿하게 초점이 돌아왔다. 하선우는 강주한을 뚜렷하게 직시하며 입술을 벌렸다. 혀를 내밀어 손가락 끝을 핥고,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강주한의 손가락을 농밀하게 빨았다. 그러는 사이 강주한의 삽입 속도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강주한은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부드러운 촉감의 혀끝을 농밀하게 만지작거렸다. 하선우는 앞니로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빼내고 침을 뱉듯 퉤, 반지를 뱉어버렸다. 강주한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틀어막았다. 다시 재시동이 걸리기라도 한 듯이, 삽입의 속도도 빨라졌다. 입 맞추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 젖은 살이 거칠게 맞닿는 소리가 한참을 울려 퍼졌다. 그사이 하선우는 몇 번이나 몸을 비틀어보려 했지만, 구속복에 갇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강주한을 껴안기라도 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을 것 같았지만 자신의 다리를 힘주어 껴안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한 압박감과 일방적으로 퍼부어지는 쾌감 속에서 몇 번이나 세이프 워드를 외칠 뻔했지만 기이하게도, 누군가 목줄을 잡아채기라도 하는 것마냥 목구멍 밖으로 그 말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농후하고 짙은 자극이 끝없이 퍼부어지는 한계 밖으로 더 나아가라고, 그 세계에서 완전히 자신을 놓아버리라고 끌고 가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눈가에서 팍 눈물이 새어 나왔다. 사람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미칠 것 같은 느낌에 하선우는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선우는 강주한이 조금만 더 거칠게 삽입해주길 바랐다. 손바닥으로 페니스를 아프게 비벼줬으면 했다. 섹스는 지긋지긋했으나 동시에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흘레붙는 짐승처럼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는 강주한의 아래에서 괴롭게 쾌감을 버티던 하선우의 몸이 경직됐다. 강렬한 사정의 감각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꺾어지는 신음을 터트리며 그는 온몸을 조였다. 첫 번째 사정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는 오랫동안 사정했다. 하지만, 사정을 마친 뒤에도 강주한의 삽입이 한참이나 끝나질 않아 하선우는 결국 짜증 섞인 울음을 터트렸다.
“흐흐으… 지…겨워. 정말… 흐으… 힛, 으응… 체위라도… 바꿔주던가…!”
강주한은 하선우의 눈가를 손으로 닦아주면서도 허리짓은 멈추지 않았다.
“답…답해, 하아… 미치겠…윽…! 그…만. 그으흑… 흐읏…그, 그만! 흐으으….”
원망 가득한 눈으로 강주한을 노려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하선우는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 하지 말… 흐읏…라고! 사, 사장님!”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깊게 찔러 넣은 성기를 강주한은 뿌리 뽑듯이 단번에 뽑아냈다. 그는 하선우의 아랫배에 한 손을 올린 채로 남은 손으로 질척하게 젖은 성기를 급하게 문질러댔다. 허억, 허억, 낮은 숨을 토해내며 등을 굽힌 그는 한참을 하선우의 다리 사이에서 자위를 했다. 욕구를 배출하기 직전에 쫓겨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강주한의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 묘했다. 그는 아무런 자의식 없이 본능에 잠겨 욕구를 해소하고 있었다. 불안한 표정의 그는 이를 악문 채 하선우의 눈을 마주 보며 끊임없이 성기를 흔들어댔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비딱하게 쳐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환희를 느낀다는 기별도 없이 길고 긴 사정을 마쳤다. 강주한은 낮은 숨을 토하며 자위로 질척하게 젖은 손을 들어, 손등으로 이마와 턱에 고인 땀을 닦아냈다. 침대에 깔아둔 홑이불에 손바닥을 쓱쓱 닦아낸 그는 하선우의 팔다리를 구속한 가죽끈의 연결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뒤늦게 몰려드는 탈력감에 긴 한숨을 내쉬고는, 하선우의 몸 위로 천천히 엎어졌다.
“있죠. 나 지금 섹스 쇼 본 기분이에요.”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선우는 말했다. 하선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강주한은 고개만 들어 올렸다. 열렬한 성욕에 시달리는 소년처럼 하선우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일시정지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잠시 후 싱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 또 하나의 금기의 벽을 허물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심지어 그 과정은 어딘가 우습고, 만화적이며 평범하지가 않았다.
하선우는 세이프 워드를 입 밖으로 뱉어냈던 조금 전의 상황을 되짚어보다, 민망한 기분에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진짜 잘해. 허리짓이 예술이야.”
하선우는 손을 저 아래로 뻗어 강주한의 엉덩이를 도닥여주었다. 강주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지만, 그의 뺨은 웃음으로 부풀었다.
“나도 당신만큼 야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가슴팍에 옆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그는 왼손으로 살며시 부풀어 있는 하선우의 유륜을 살짝 비틀었다. 흐읍, 급하게 숨을 삼켰다. 강주한은 검지로 가슴 주위부터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움직이다, 젖꼭지를 툭툭 건드렸다.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리며 장난스럽게 웃던 하선우는 점점 더 집요해지는 강주한의 애무에 결국 몸을 엎드리며 손길을 피했다.
“나 오늘 감도 완전 좋고 엄청 예민해졌으니까 좀 적당히 건드리죠?”
강주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선우의 몸 위에 엎드려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그가 속삭였다.
“그럼 2차전은 좀 쉬었다 할까요?”
그러나 쉬어가자는 말과는 달리 강주한은 하선우의 뒷덜미에 입을 맞추고 귀를 입안에 넣었다. 귓바퀴를 따라 따듯하게 움직이는 젖은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둔부 사이에 어느새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느껴졌다. 강주한이 귀를 문 방향으로 목을 움츠린 하선우는 고개를 비틀며 그를 떼어냈다.
“잠깐, 잠깐, 하지 말고 좀. 예? 사장님. 일어나 봐요.”
미적거리며 붙어 있는 강주한을 떼어낸 하선우는 허리를 세워 앉았다. 그는 팔다리에 끈으로 새겨진 얇은 자국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불쾌함이나 불만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색다른 섹스로 만족을 얻은 사내가 지을 법한 개방적인 너그러움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는 뭔가 좀 더 다른 걸 원하는 눈길로 강주한을 보았지만, 쉽게 말문을 열지는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하선우는 저 멀리 침대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가운을 가져왔다. 그는 아랫배에 묻은 애액을 닦아내며 날씨를 묻듯 일상적인 어조로 물었다.
“전에 미국 출장에서 사온 물건 어디 있어요?”
“미국 출장에서 사온 물건이면… 향수 말하는 겁니까.”
하선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손바닥을 가운에 비벼 닦고, 가운을 반으로 접어 바닥에 던져버리며 말했다.
“그으… 거요. 그거. 진동 있는 거어.”
자연스럽게 말하려 했지만 결국 어색하게 운을 띄우고야 말았다. 강주한은 하선우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제야 짐작이 갔다. 그러나 하선우가 원하는 바를 분명히 해주길 바랐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하선우는 애매한 태도를 버리고 말했다.
“성인용품점에서 사온 선물이요.”
아, 그 선물.
강주한은 마침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홀가분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는 하선우의 심경이 변화하기 전, 확인 작업을 거칠 필요를 느꼈다.
“사용하고 싶어요?”
하선우는 아리송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봐서요.”
거실로 사라졌던 강주한은 몇 분 뒤에 나타났다. 그는 한 손에는 종이봉투를, 남은 한 손에는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트레이에는 온더락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술은 왜요?”
“알코올의 효과를 빌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는 종이봉투를 뒤집어 하선우의 앞에 쏟아냈다. 박스는 모두 네 개였다. 박스를 뜯어보기 전 강주한은 술잔을 내밀었다. 하선우는 잔을 받아 들었다. 짙은 꽃냄새에 독주의 향기가 가려져 있었다. 40도를 웃도는 위스키가 잔 가득 담겨 있었다. 멍한 눈으로 황금빛 위스키를 쳐다보던 하선우는 시선을 강주한에게로 옮겼다. 강주한은 잔을 모조리 비워 선수를 쳤다. 뒤늦게 하선우는 깨달았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강주한은 지금 은근히 들떠 있었다.
“어….”
하선우는 뜻 모를 감탄사를 뱉어내며 눈을 껌뻑거렸다. 짧은 버퍼링이 지나고 그는 망설임 없이 잔을 모조리 비워버렸다. 마시는 즉시 취기가 오르는 기분에 곧바로 후회했지만.
두 사람은 침대에 나체로 마주 앉아 박스를 뜯었다. 가장 작은 박스에 들어 있는 섹스토이는 살색의 실리콘 덩어리였다. 설명서를 읽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쓰임새는 분명했다. 사람의 입술 모양을 본 따 만든 그것은 페니스에 끼우고 흔드는 관통형 홀이었다. 관통형 홀 옆에는 작은 용량의 튜브용 젤이 동봉되어 있었다.
하선우는 자위도구를 포장한 비닐을 벗겨냈다. 관통형 자위기구의 크기는 손바닥보다는 조금 짧았고, 둘레는 한 손으로는 다 잡을 수 없을 만큼 굵었다. 겉은 일반적인 실리콘 촉감이었으나 입술 모양의 좁은 홀 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와… 이거 있으면 내가 손이나 입…으로 해주울 필요 없겠다.”
하선우는 취기를 의식하려 노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 과감해지는 건 좋지만 그 적정선을 술에 취한 뇌가 정한다는 게 문제였다. 기분이 금세 들뜬 하선우는 좁은 홀 속에 젤을 잔뜩 짜 넣고 강주한에게로 다가왔다. 반쯤 시든 그의 페니스가 하선우의 도전의식을 자극했다.
“내가 할래. 내가 해주께요… 해봐… 흐…요.”
강주한은 웃으며 하선우에게서 자위기구를 빼앗았다.
“일단 남은 것 먼저 살펴보죠.”
하선우는 구시렁거렸지만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결국 물러났다. 남은 세 개의 박스 중 두 개는 이전 박스보다 크기가 컸고, 나머지 하나는 크기가 아주 작았다. 하선우는 박스를 모두 해체해 그 안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5센티미터가량의 도톰한 달걀모양 로터가 연결된 핑크색의 자위기구와 흉측한 모양의 애널 플러그가 상자에서 나왔다.
“달걀모양인데요? 흐흐… 이건 좀 귀엽네.”
하선우는 영어로 된 설명서를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렸다.
“진동은 1에서 12까지고 …음, 방수? 방수 기능이 있네. 얼마 주고 샀어요?”
“100달러… 그쯤이었을 겁니다.”
“이런 게 10만 원이 넘는다고요?”
하선우는 놀란 눈으로 로터를 내려다보다 설명서를 다시 자세히 살폈다.
“아아… 비쌀 만하네. 생활방수가 아니라 완전방수네요. 어… 적어도 IP등급이 7 이상이라는 얘기거든요. 무슨 말이냐면 등급이 높을수록 방수기능이 뛰어나다고 보면 돼요. 음… 고가 상품이니까 연결부위를 실리콘 링으로 감싸지는 않았을 테고 방수시트를 사용했겠네. 고작 섹스토이일 뿐인데에… 물속에서 사용할 일이 있나?”
하선우는 접합부가 보이지 않는 매끈한 이음새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설명했다. 설명이 길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강주한은 하선우에게서 로터를 빼앗으며 말했다.
“방수기능이 필요한 곳에서 사용하면 더 재밌나 보죠. 이건 어떻습니까.”
애널 플러그를 하선우에게 건네주며 강주한은 물었다.
“으, 이건 좀 흉측하다.”
애널 플러그는 탁구공에서 골프공 크기, 계란만 한 크기의 구슬이 울퉁불퉁하게 연결된 도구로 이것 역시 진동기구였다. 영어와 스페인어,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설명서가 있었지만 구색을 갖추기 위한 용도일 뿐, 읽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ON/OFF 버튼 옆에 숫자 10이 쓰여 있었다. 진동의 세기가 1에서 최대 10까지 조절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가장 작은 상자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AAA와 AA사이즈의 전지였다. 기성제품과는 다르게 전압, 회사명, 브랜드 로고 없이 검게 프린트된 포장재로 겉면이 싸여 있었다.
“건전지가 흐음… 특이하네.”
꽤 독한 술이었는지 뺨에 벌써 감각이 없었다. 하선우는 아랫입술을 쭙 빨며 건전지를 앞뒤로 돌려보았다.
“연구소에서 샘플로 제작한 제품입니다. 이런 자위기구에 사용하기엔 좀 과분하죠.”
하선우의 손에 들린 AAA 사이즈의 건전지를 가져가 로터의 리모컨에 끼워 넣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선우 씨 특허기술을 적용해 만든 겁니다. 물론 기존 기술보다 훨씬 진보된 형태긴 하지만.”
남은 전지를 로터의 리모컨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은 그는 AA 사이즈의 전지를 애널 플러그 손잡이 속에 끼워 넣었다. 그는 하선우의 손 위에 애널 플러그를 올려주고 ON 버튼을 눌렀다. 자동으로 최소 강도의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선우는 야릇함을 느껴야 할지, 아니면 뿌듯함을 느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눈으로 진동하는 로터를 보았다.
“배터리 용량이 어떻게 되죠?”
“AA 사이즈의 경우 두 개 합쳐 24,000밀리암페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진동 크기에 따른 전력소모량은 설명서에 안 적혀 있겠죠?”
꼼꼼하게 설명서를 찾아보던 하선우는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음… 아무것도 안 적혀 있네.”
강주한이 하선우의 손 위에서 징징 울리고 있는 애널 플러그를 가져가며 말했다.
“한나절? 아니면 하루 가까이 가겠죠.”
입모양만으로 감탄사를 뱉어낸 하선우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NnG의 연구개발 기술을 이런 용도로 쓰게 될 줄이야.”
공기를 울리며 진동하는 장난감을 손바닥에 쥔 강주한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는 튜브형 젤을 집어 들며 말했다.
“엎드려서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마주 보고?”
하선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강주한이 들고 있는 검은 애널 플러그와 달걀모양의 로터, 관통형으로 생긴 자위기구를 차례대로 보았다. 그는 입술 모양으로 생긴 자위기구를 집어 들고 강주한에게로 다가갔다. 어깨를 밀어 침대에 바로 눕힌 그는 강주한의 아랫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반쯤 발기한 묵직한 성기를 한 손으로 잡고 귀두를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으음. 강주한은 낮게 신음했다. 깔고 앉은 아랫배가 긴장으로 단단해지고, 허벅지의 대퇴근이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선우는 쥐고 있는 실리콘 덩어리를 조금 더 빠르게 흔들었다. 반대편 입구를 뚫고 살색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고, 실리콘은 쥐기 버거울 만큼 둘레가 늘어났다. 완전히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하선우는 물었다.
“어때요? 좋아요?”
“차갑…군요.”
차갑다는 강주한의 감상에 짓궂은 장난기를 느낀 하선우는 엉덩이를 떼고 그의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엎드렸다. 그는 실리콘을 쥔 손에 힘을 꽉 쥐고 흔들며 끄트머리로 반 뼘 넘게 삐져나온 성기를 머금었다. 강주한의 왼쪽 무릎이 살짝 들렸다, 다시 침대 위로 내려왔다. 하선우는 남은 손으로 조금 전 불쑥 튀어 올랐던 무릎을 잡았다.
자위도구 속에 잔뜩 짜 넣었던 젤에서는 사과맛이 났다. 텁텁한 실리콘 냄새와 땀냄새, 샤워코롱 향기와 사과풋내가 뒤섞인 사타구니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하선우는 강주한을 녹일 생각으로 작정하고 페니스를 빨았다. 혀끝으로 귀두를 문지르며 입술로 기둥을 오물오물 빨자, 남자의 흥분이 점차 고조되는 것이 느껴졌다.
강주한이 두 손으로 하선우의 엉덩이를 잡았다. 부드럽게 엉덩이를 매만지던 손이 천천히 구멍 주위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엄지로 살짝 부어오른 축축한 구멍 주변을 매만지다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자위도구를 흔들며 귀두를 쪽쪽 소리나게 빨던 하선우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콘솔 서랍장 위에 걸린 벽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자세가 지나치게 외설스러웠다. 강주한은 구슬 타입의 애널 플러그에 치덕치덕 젤을 짜 바르고 있었다. 뒤늦은 동요로 마비된 하선우의 몸을 벌리고 그는 첫 번째 구슬을 밀어 넣었다.
흐으? 하선우의 반응은 물음표에 가까웠다. 진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고, 부피감 역시 미미했다. 오히려 젤의 차가움을 더 불쾌하게 감각했을 뿐이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입구를 다물자 구멍을 비비며 두 번째 굴곡이 다가와 속을 벌리고 쏙 들어왔다. 하선우는 차마 거울을 볼 수가 없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행위는 하선우의 망상 속에 자리 잡은 욕망보다도 더 자극적이었다. 상상보다 훨씬 더 진일보된 섹스를 물리적인 현실로 실행하고 있으려니, 그들의 행위가 부끄럽고 변태적으로 느껴졌다. 완전히 미친 짓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부끄러웠고, 자기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술을 더 마셨어야 했다. 차라리 대취하여, 완전히 본능에 몸을 맡기면 자의식도 수치심도 없을 것이므로. 새빨개진 얼굴로 하선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강주한의 귀두를 우물거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뭔가에 열중하고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 번째보다는 네 번째가, 네 번째보다는 다섯 번째의 진입이 더 쉽지 않았다. 휘어지기는 하지만 탄성이 거의 없는 경도의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자위기구는 내벽을 단단하게 자극했고 구슬과 구슬이 맞닿은 요철부위가 입구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강주한은 젤을 한 번 더 찐득하게 짜 입구 주변에 바르고 마지막 구슬을 입구 주변에 문질렀다. 내벽 안의 구슬이 점막을 긁고, 입구에 걸쳐진 구슬이 주름 주변을 슬근대는 촉감이 간지러워 하선우는 성기를 입에 문 채로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너무 미미하여 거의 느껴지지도 않던 진동이 조금씩 의식되기 시작했다. 분명히 부끄러운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니, 굳이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가 섹스토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쾌락을 좀 더 솔직하게 탐구해보고자 한 목적이 아니었던가.
강주한은 허공에 매달린 플러그 본체를 잡고 컨트롤노브를 중간 단계로 높였다. 단번에 반응이 왔다. 엉덩이 근육이 바짝 수축하며 높게 들렸다.
“흐, 흐아!”
마지막 남은 구슬을 밀어 넣으려 했지만 꽉 다문 구멍은 구슬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빳빳하게 발기된 성기 중간에 우스꽝스럽게 매달려 있는 실리콘 덩어리를 뽑아 던져버렸다. 그는 침대 위에 뒹굴고 있는 가죽끈을 들고 하선우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진동을 끄려고 허우적거리는 하선우의 두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겨, 벗어날 틈을 주지 않고 가죽끈으로 묶었다.
“뭐! 뭐예요!”
“세이프 워드 외치면 관둡니다. 알죠?”
하선우는 몸을 단단하게 굳혔다. 잠시 후 그는 뒤를 거의 흘겨보듯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 흐으…어요.”
강주한은 손목을 여러 번 칭칭 동여맸다.
“가으…죽끈 한번 요긴…흐윽! 하게 쓰네.”
강주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엉덩이 사이에 툭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를 잡고, 마지막 남은 구슬을 깊게 욱여넣었다. 푹, 찌르고 들어오는 충격에 짧은 비명을 질렀던 하선우는 곧이어 강렬한 진동을 느끼고 나른한 신음을 토해냈다. 약에 취한 기분이었다. 진동으로 느끼는 쾌감은 그가 알던 종류의 쾌감과는 아주 달랐다. 어딘가에 하체를 마구잡이로 비벼대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하선우는 다리를 넓게 벌렸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개구리처럼 넓게 다리를 벌리고 그는 뭉쳐 있는 이불 위에 하반신을 비벼댔다. 진동이 갑자기 강해졌다. 몸속에서 진동이 울리는데도, 웅웅거리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강렬한 진동이 배 속을 온통 후려치는 것 같았다.
하반신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힘을 줘 내벽을 조였다가는 도리어 감각만 증폭될 터였다. 손잡이를 잡은 강주한이 플러그를 살살 뽑아냈다. 요철이 있는 구슬이 빠져나가는 감각은 배설감을 극대화시켰다. 사정할 것 같았다.
“흐앙… 으! 하! 앗! 읏! …하앗!”
하나씩, 하나씩, 구슬이 빠져나갈 때마다 벼락을 맞는 것 같았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신음, 숨소리, 근육 움직임의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으려 그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았다. 타타탁, 콘트롤노브 스위치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전보다 공기를 울리는 진동소리가 커졌다.
심란한 기분에 하선우는 눈을 재빠르게 굴렸다. 세이프 워드를 말할까, 아니면 좀 더 느껴볼까. 고민하는데 강주한이 땀에 젖은 엉덩이에 입 맞추며 말했다.
“웃지 말고 들어요. 나 정말 진지하게 내 페니스에도 진동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
황당함에 뒤를 돌아보려던 하선우는 입구를 열고 들어오는 구슬에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진동 기능이라니. 강주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곱씹을수록 우스워 그는 큭큭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나 애널 플러그가 몸속을 몇 번 들락거린 뒤로 그는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움직임은 점점 집요해져갔고, 본래 목적이 고통을 주려는 게 아니라 쾌감을 주려는 것임을 일깨워주듯 전립선 주위를 오래도록 지근거렸다.
그는 시트를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시트라도 깨물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요철이 있는 딜도는 삽입의 쾌감을 배가시켰고, 빠져나갈 때는 미묘한 배설의 쾌감을 증폭시켰다. 그사이에 사나운 진동이 뒤섞여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반신과 머리를 향해 피가 몰리고 호흡이 급격하게 가빠졌다. 하선우는 극도의 오르가즘 속에서 괴롭게 사정했다. 엉덩이를 앞으로 빼내면서 도망가려는 사람을 따라가며 괴롭히는 취미는 없어 강주한은 전원을 끄고 애널 플러그를 뽑아냈다. 손목을 묶은 가죽끈을 풀어주자마자 그의 팔이 바닥을 향해 힘없이 떨어졌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누웠다. 여운에 젖은 숨을 몰아쉬며 아직도 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발갛게 상기된 뺨을 쓰다듬다, 땀에 젖은 앞머리와 귀밑머리를 넘겨 모양 좋은 이마를 드러내고 그 위에 입 맞췄다. 하선우는 슬며시 눈을 떴다.
“나도 진지하게 말하니까 웃지 마요. 주한 씨 성기에 진동 기능 없어서 다행이야.”
웃지 않으려 했지만 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강주한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 입술로 하선우에게 짧게 입 맞췄다. 하선우는 눈을 나른하게 감았다 떴다. 격렬한 섹스와 혈관에 흐르는 알코올의 기운이 그를 평소보다 빠르게 지치게 만들었다. 지독하게 피로했고,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세 번 가는 동안 한 번 갔었나?”
“뭐가 말입니까?”
“사정한 횟수요. 아직 발기한… 상태죠?”
강주한은 하선우의 콧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졸음에 겨운 말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예.”
“하고 싶겠네. 입으로 해줄…까요? 아니면 손으로….”
나직하고도 어눌한 목소리가 귀여웠다. 강주한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럴 정신이나 있습니까. 내버려두면 시들겠죠.”
“웬일이에요?”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흐리멍덩하던 눈에 초점이 반짝 돌아왔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선우는 꾸물꾸물 손을 뻗어 강주한의 팔을 잡아당겨 머리에 받쳤다. 입맛을 다시며 그는 잠에 취한 눈으로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대신 내일 아침에 하죠.”
“하… 그럼… 그렇지.”
“안 씻을 겁니까?”
“…몰라…요….”
눈살을 굼뜨게 끔뻑거리던 그는 곧 눈을 감아 빛을 차단해버렸다. 하선우에게 팔베개를 해주는 바람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강주한은 어쩔 수 없이 씻기를 포기했다. 그는 리모컨으로 방 안의 불을 끄고, 이불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아이처럼 웅크린 하선우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는 이불을 덮지 않았다. 혈관을 도는 술기운도, 성욕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조금 괴로운 불면의 밤을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를 지루한 밤에서 건져 올리는 존재는 눈앞의 하선우가 유일했다. 그는 하선우에게로 몸을 좀 더 바짝 가까이 기울였다. 그는 하선우의 입술에 도둑키스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몸 안의 열기가 조금도 달래지질 않았다. 하지만 차마 하선우를 건드릴 수 없었다.
코끝에 닿는 숨결은 괴롭게 상냥했고, 밤은 지독한 속도로 더디게 흘렀다.
* * *
습한 공기가 답답했다. 산소 대신 폐 속 가득 수증기를 채우는 기분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수증기 역시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이니 산소 자체를 빨아들이고는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물로 호흡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공기가 부족한 느낌에 헐떡이던 하선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몸속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에그가 뒤로 확 당겨지고 가장 치명적인 부위에 닿았다. 하선우에게서 야릇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자쿠지의 난간을 힘주어 잡으며 그는 온몸을 경직했다. 더 이상 배출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투명한 애액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강주한은 앞에 들러붙어 하선우의 성기를 맛있는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안에서 굴려대며 빨고 있었고, 뒤에서는 에그의 로터가 그를 괴롭게 간질이고 있었다.
전립선 주변을 두드리는 강렬한 진동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얼이 빠질 것 같았다. 마취제를 바른 것처럼 말초신경의 감각이 차단되었다가,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감각이 증폭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안, 안 되겠… 흐아…. 응, 으응! 거기 전립… 전립선에 닿… 흐으….”
하선우의 성기를 뱉어낸 강주한은 뜨거운 물속에 전선을 늘어트린 로터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고작 섹스토이일 뿐인데 완전방수 기능이 들어간 로터를 사용할 일이 있겠느냐고 묻던 어제의 천진한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리모컨을 들어 붉은빛을 내는 숫자를 확인했다. 에그 타입의 로터는 진동이 12단계까지 있었고 리모컨 속에 표시된 숫자는 8에 불과했다. 전선을 천천히 잡아당겨 뒤로 뽑아내자 위험한 부위에서 멀어진 것만으로도 살 것 같은지 반응의 정도가 한결 가라앉았다.
“이…이 정도면 괜찮… 괜찮아. 아니, 좋아. 하아… 좋아.”
하선우는 이를 꽉 깨물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혀를 콱 빼물고 죽고 싶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자쿠지 난간에 걸터앉은 하선우의 다리를 좀 더 넓게 벌리며 강주한은 전선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동그란 계란형의 구체가 서서히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핑크색 에그의 가장 두꺼운 지름이 말초신경이 집중된 입구에 걸쳐졌다. 부르르 진동하는 에그와 함께 이전에 싸지른 애액이 그의 구멍 속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모습이 지독하게 선정적이었다.
하선우의 흉곽이 빠르게 부풀었다. 신을 찾는 사람처럼 허공을 노려보며 헉헉거리던 그는 도무지 자극을 참을 수가 없어 배출하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 근육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러나 에그가 빠져나오기 직전, 강주한이 손가락으로 다시 에그를 쑥, 밀어 넣었다.
“흐앙!”
하선우는 제 입에서 나온 앙앙거리는 신음소리에 굴욕을 느낄 새가 없었다. 느슨하게 이완된 입구에 귀두가 맞춰졌다.
“흐악!”
몸을 일으키려는 하선우의 아랫배를 누르며 강주한은 귀두를 푹 밀어 넣었다. 하선우는 놀란 눈으로 강주한을 올려다보다,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 안에! 안에 있어. …안 돼!”
“알아.”
일부러 반말로 대답하며 오므라진 속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성기를 절반쯤 박아 넣자 귀두에 진동하는 구체가 닿았다. 인공적인 자극이 이렇게 강렬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강주한은 전신이 다 지끈거렸다.
“이런…이런 거 지, 진…짜 이상해요.”
성기를 문 내벽이 경련처럼 살덩이를 급박하게 쥐어짜댔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속으로 조금 더 파고들며 대답했다.
“늘 말했듯이 원하면 관둘 겁니다.”
뺨에 입을 맞춘 뒤, 강주한은 손에 들고 있는 리모컨의 버튼을 보란 듯이 눌렀다. 몸속을 울리는 에그의 진동이 점점 더 거세졌다. 쾌감을 넘어 작열감에 가까운 감각이 내벽을 예민하게 두들겨대는 순간 그가 좀 더 깊게 파고들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헛숨을 삼켰다. 몸이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강주한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하선우의 입술을 뒤덮어버렸다. 달달 떨며 하선우는 강주한의 목을 감싸 안았다. 허벅지 뒤로 강주한의 손이 파고들고 공중으로 번쩍 몸이 들어 올려졌다. 하선우의 허리와 엉덩이를 고쳐 잡고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연결된 그대로 자쿠지 속으로 들어가 앉았다.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마른 숨만 몰아쉬는 하선우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꾹 입술을 찍은 강주한은 자쿠지의 버튼을 눌렀다. 이쯤에서 관둘까? 하선우는 생각했다. 그는 두려웠다. 쾌락에 익숙해진 자신이, 앞으로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게 될까 봐. 쾌감에 익숙해진 사람은 누구나 강렬한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과감해지는 법이었다. 자신이 그 기로에 놓여 있다는 생각에 하선우는 쉽게 그 자신을 내던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을 제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섹스에 장난감을 사용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아니었다. 난잡한 하체의 사정은 어디까지나 물보라를 일으키는 수면 아래의 일일 뿐이었다.
심지어 강주한은 하선우에게 여러 차례 밝히지 않았던가. 머릿속에 어떤 성적 환상을 품어왔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라고. 강주한이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왼쪽의 심장 근처에 입 맞추는 순간, 하선우는 갑자기 수치심에 초연해졌다.
그는 생각했다. 정상적인 섹스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아닐까.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오럴섹스를 법으로 금지했지만 누구도 따르지 않는 사법死法이 되었듯, 누군가 윤리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고, 배설적인 쾌감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같았다. 그들은 바닥이 없는 끝을 알고 싶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긴 목선을 손바닥으로 조르듯 감쌌다. 입술을 살짝 겹친 채로 자세를 천천히 낮추었다. 강한 진동에 온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강주한은 전선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에그는 하선우의 움직임에도 계속해서 귀두 위에 얹어진 채로 머물러, 위아래로 뜀을 뛰듯 움직일 때마다 닿는 모든 곳을 자극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다, 속도를 더해 허리를 띄우던 그는 강주한의 어깨를 짓누르며 엉덩이를 힘주어 내렸다.
허어억. 허벅지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하선우는 몸을 굳혔다. 너무 깊은 곳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신음도,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엉덩이를 아주, 아주 조금 더 낮추자 강주한의 딱딱하게 도드라진 허벅지 근육이 느껴졌다. 쾌감과 고통이 동시에 배 속을 지지고 지나갔다.
너무, 말도 안 되게 깊었다. 그는 정신을 겨우 차리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선우는 입을 벌린 채 얌전히 숨만 몰아쉬었다. 움직일 때마다 매번 다물린 구멍에 새로 길을 내고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섬뜩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동시에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쾌감이 그 속에 있었다.
“……깊 …깊어. 하아….”
찐득하게 조이는 내벽과 선단에 닿는 구체의 자극에 온몸이 떨렸다.
“우으… 흡… 깊, 깊어어.”
강주한은 넋을 놓고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새빨갛게 익은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폐에서 쏟아지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하지만 조금만 잘못된 곳을 찌르면 비명을 지르고 자지러질 것처럼 그의 눈은 물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격렬한 쾌감에 휩쓸린 하선우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하아… 좋아… 하하… 아파… 읏, 힛! 좋아, 아, 아니… 싫, 싫어. 으응….”
횡설수설하며 웃음을 흘리다, 그는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뜀을 뛰듯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철썩철썩 수면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긋지긋한 쾌감이 사악하게 몸속에 불을 지르는 것 같았다.
“미치겠… 흐흣… 하아, 으응, …하아, 하아….”
잘 참는가 싶더니 하선우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강주한은 하선우의 허리춤을 잡았다. 발작하듯 뒤트는 허리를 꽉 잡고 그는 쾅, 쑤셔 박았다. 위로 튀어 오르려는 몸을 꽉 껴안은 그는 그대로 욕조 속을 빠져나왔다.
습기로 미끌거리는 차가운 타일 바닥에 하선우를 그대로 내려놓고 강주한은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하선우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다가, 펑펑 울어대기를 반복했다. 강주한의 어깨를 쥐어뜯고, 황홀경에 빠져 강주한의 턱과 뺨, 눈과 입술에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몇 번의 드라이오르가즘을 겪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강주한의 사정이 임박하고 조밀하게 들러붙은 점막 속에 정액을 듬뿍 퍼부은 뒤에도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영원이 둘 사이에 머무르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그들은 서로를 안았다. 그건 하나가 되었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서로의 살과 내장, 육신의 모든 부분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켜 끊어내려야 끊어낼 수 없는 기묘한 관계가 된 것만 같았다. 하선우의 내장 속에 들러붙어 살고 싶다던 강주한의 음란한 바람이 이루어지고, 어떤 상실도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순수하게 일체가 되었다.
* * *
욕실에 들어간 사이 이불 빨래를 돌려놓았던 침구는 세탁은 물론, 건조까지 완료되어 있었다. 하선우는 소파에 힘없이 기대앉아 강주한이 이불 빨래를 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욕실에 들어가서 간단히 씻고, 정말 딱 한 번만 섹스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불이 붙었고 손발의 피부가 퉁퉁 불고 골이 다 울릴 때까지 욕실에서 뒹굴었다. 하선우는 배 속이 아직도 진동으로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한동안은 속이 더부룩해서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았다.
강주한은 편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거실 바닥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이불 빨래를 직접 한 데다가, 세탁실이 따로 있는데 굳이 거실까지 이불 빨래를 가져와 꼼꼼하게 각을 잡고, 개켜 쌓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져와봐요.”
하선우의 목소리는 심한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앞으로 이보다 낮은 음역대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며 그는 말했다.
“다는 말고 하나만.”
강주한은 베개 커버 하나를 들고 하선우에게 다가왔다. 하선우는 무심하게 세탁물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그는 가늘게 눈을 떴다. 한숨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대신 그는 놀리듯 웃으며 강주한을 추궁했다.
“에이, 이럴 줄 알았어. 섬유 유연제 안 넣었네.”
“섬유 유연제?”
강주한은 자신이 무언가 놓친 게 있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마침내 어떤 절차를 빠트렸는지를 깨닫고 난감한 듯이 웃었다.
“뭘 말하는지 알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다음번에는 잊지 않고 챙기죠.”
“미안할 것까지 있나요. 뭐, 세탁 보조제라서 꼭 넣을 필요는 없어요. 잘했어요.”
강주한에게 다시 베개 커버를 돌려주며 하선우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어떤 자세를 해도 허리가 아프고 밑이 얼얼했다. 아구구,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그는 TV장 밑에 보관된 의약품 속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냉수와 함께 한 알을 삼키자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강주한이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한참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가죽 서류철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 속에는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나무로 된 몸체에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링과 캡, 그리고 펜촉. 오래전 강주한에게 선물받았던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캡의 상단에 정교하게 세공된 몽블랑 로고를 살펴보던 하선우는 강주한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이건 왜요?”
“자진 납세하죠.”
“뭘요?”
“리스트에 적어요. 섹스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변태성욕자. 성도착자. 무슨 말이든. 뭐라고 적어도 상관없으니까.”
그는 서류철을 펼쳐 하선우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A4 사이즈의 레포트 용지가 바인더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선우는 실실 웃음이 나왔다. 서로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하자고 먼저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그리 진지하게 고려해본 사항은 아니었다.
“정말 이걸 해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적으면 억울하지 않을까요.”
그는 서류철 반대편에 적혀 있는 회색의 레포트 용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지금 당장은 불만이 없습니다. 다음에 생각나면 적죠.”
그는 하선우가 리스트를 언급했던 최초의 순간에 보였던 충격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두 사람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으며, 자칫 잘못하면 감정만 상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반응했던 그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게임이 이판사판 극단으로 치닫는 시합이 될지, 아니면 제자리에서 누가 더 침을 멀리 뱉느냐 수준의 한심한 시합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어쩌랴 싶었다. 지금 당장은 진지하게 따져 묻는 수준의 상처 주는 이야기를 적을 생각이 없었다. 하선우는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오래전에 그에게 만년필을 선물받았을 때 러브레터를 써주겠다고 낯간지러운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꿈에도 강주한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를 적는 용도로, 이 값비싼 몽블랑 만년필을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펜을 이런 용도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씁쓸하게 웃은 그는 숫자를 매기며 리스트를 적어 내려갔다.
1. 침구와 속옷을 직접 세탁하는 법이 없다. 은밀한 흔적이 남은 세탁물까지도 늘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둔다.
2. 페니스에 진동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희망사항으로 끝냈어야 했다.
하선우가 내미는 서류철을 건네받으며 강주한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1번은 이미 극복한 것 같죠?”
“두고 봐야겠죠.”
강주한은 리스트를 살펴본 뒤 코웃음 쳤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소극적인 불만의 표시였다. 이를테면 당신도 즐겼지 않느냐는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냈다가는 별로 좋은 꼴을 보지 못하게 될 투정이기도 했다. 대신 강주한은 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쏟아냈다.
“섹스가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에그 타입의 자위기구는 버리는 게 좋겠군요.”
강주한은 서류철을 덮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작을 부리고 있군. 하선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좀 전의 섹스가 싫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강주한의 페니스에 진동 기능이 추가되는 일을 그저 손해라고 볼 수는 없었던 하선우는 긴 망설임 끝에 결국 리스트의 목록을 지우기로 했다. 그는 우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서류철 다시 주세요.”
건네받은 서류철 속 리스트에 빗금을 죽죽 그은 하선우는 새로운 목록을 작성했다. 강주한이 보지 못하도록 등을 굽히고 팔로 서류철을 가린 채로 그는 펜 끝에 힘을 꾹꾹 주어가며 정성껏 글씨를 써 내려갔다.
2. 페니스에 진동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희망사항으로 끝냈어야 했다.
2. 수동적인 척 역전승을 노린다. 그 기술은 대부분 성공한다.
하선우는 리스트를 보여주지도 않고 서류철을 덮어버렸다. 강주한은 몹시 궁금했는지 가만히 서서 하선우가 서류철을 다시 돌려주기를 기다렸다. 하선우는 서류철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다음에 봐요. 아니면 당신도 내 리스트를 적으면 되겠네요.”
뿌듯하게 웃으며 하선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재의 책꽂이에 서류철을 꽂아놓고 돌아온 하선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 그들은 할 일이 많았다. 오전의 섹스로 벌써 몇 시간이나 지체되어버렸다.
* * *
하선우는 강주한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와 함께 분당으로 향했다. 주말을 할애해 오래전부터 미뤄왔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늦겨울 무렵부터 하선우는 부모님 집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틈틈이 그의 짐을 목동으로 옮겨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집에 두고 온 책이 갑자기 읽고 싶을 때나, 서랍장에 두고 온 옷을 입고 싶을 때, 그 외에도 많은 사소한 순간들이 짐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만들었다. 접이식 카트와 플라스틱 골판지 박스를 트렁크에서 꺼내던 하선우는 손부채질을 했다.
주차장 일대는 한산했다. 여름철이면 늘 경쟁이 치열한 울창한 교목 그늘 아래도 텅 비어 있었다. 벚나무는 바람결에 춤추며 버찌를 떨어뜨렸고, 아스팔트는 보랏빛 버찌에 물들어 알록달록했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매미의 울음소리만 남은 아파트는 묘하게 한산한 느낌이었다.
집으로 들어온 그들은 곧바로 식사를 준비했다. 하선우는 장식장에 잠들어 있는 그릇을 꺼냈다. 셋째 형의 결혼 무렵에 형수가 예단으로 마련한 고급스러운 반상기였다. 물그릇으로 크리스탈 고블렛 잔을 꺼내고, 평소에는 번거로워 사용하지도 않는 격자무늬 식탁 매트도 깔았다. 최대한 좋은 것들로 대접하고 싶었지만 요리솜씨는 별 볼 일 없는 그였기에 묵은 것들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둘러 쌀을 안치고 어머니의 회심의 역작인 갈비찜을 데웠다.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르는 건 강주한의 몫이었다. 하선우 이상으로 부엌살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그는 얌전히 식탁에 앉아 따라놓은 물을 마시며 음식이 조리되기를 기다렸다. 밥이 완성되기까지 20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식탁에는 아버지가 보던 경제신문이 놓여 있었다. 하선우의 아버지는 타고난 운도, 실력도 없는 평범한 개미투자자였지만, 그 자신의 평범함을 어떻게든 노력으로 극복해보려 애를 썼다. 바로 그 점이 하선우의 아버지가 불행한 이유였다. 주식은 단순히 공부와 성실함만으로 극복이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원흉이 하선우의 눈앞에 있었다.
경제신문 1면의 기사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안신전자, 유상증자 이어 회사채 발행
안신전자는 3일 우선주 유상증자 계획을 밝혔다. 공동 의결권이 포함된 우선주 2천만 주를 발행할 예정이며 발행규모는 1조 6천억 원에 달한다. 이번 유상증자로 기존 주주가치는 다소 희석된다.
안신그룹은 2천억 원 규모의 3년 만기 무보증 사채를 발행한다고 3일 오전 밝혔다. 대표주간사는 **투자증권으로 발행가액과 금리는 8일 수요예측 결과에 따라 확정된다.
긴 기사의 중간 즘에 소제목으로 강주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제한과 강주한, 유상증자에 참여할까
엘텍그룹의 강제한 회장과 엘텍전자의 강주한 사장 등 엘텍그룹 오너 일가의 유상증자에 대한 참여규모가 주목된다. 업계에서는 엘텍그룹 오너 일가가 우선주 유상증자로 안신전자의 지분을 확보하고, 안신그룹의 경영에 참여하는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신문기사 속에 등장하는 강주한의 얼굴은 지금보다 더 어려 보인다. 하늘색과 회색의 중간색 프린트를 배경으로 정장을 입고 찍은 증명사진이다. 사진 속의 그는 지금보다 젖살이 남아 있다. 강한 라이트 빛에 짙은 겉눈썹이 일부분 날아갔고, 이목구비가 좀 더 평면적으로 보였으며 신문용지에 프린트되어 얼굴빛이 잿빛에 가까웠다. 하선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
“실물 미남인데.”
강주한은 풀썩 웃었다.
“그렇습니까?”
“이런 증명사진은 어디서 찍는 거예요?”
“사진작가가 와서 찍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도 찍었는데 이 사진은 아니었습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신문을 펼쳤다. 경제지에 실린 기사의 내용이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강주한은 1면의 기사를 모두 읽은 뒤에 말했다.
“이제 상속소송을 포기한 이유를 추측하는 기사도 쏟아지겠군요.”
“이미 인터넷에는 쫙 깔렸던데요?”
강주한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4월 중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임용화 측에서 유산상속청구 소송을 취하했다. 민사 최대 규모였던 9조 원대의 소송은 1심과 2심의 판결이 임용화에게 유리하게 판정되었고 대법원의 판결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여겨졌다. 소송을 취하하여 얻을 실리보다, 판결 이후의 실리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만큼 소송을 포기한 배경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더는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주목하지 않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조용히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며칠 전, 과거의 사건에 불씨를 지피는 일이 일어났다. 안신그룹이 우선주 유상증자 계획을 밝힌 것이다. 8월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하고, 11월 신주를 상장하여 본격적으로 안신전자의 지분보유 구조를 혁신하는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항간에는 공동 의결권이 포함된 유상증자의 원인이 상속소송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엘텍그룹의 안주인이 유산상속을 취하한 배경에 안신전자의 지배권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물밑의 협상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엘텍가와 관련하여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소식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강태한 소문도 뜨겁고요.”
강주한은 코웃음 쳤다. 그는 이미 강태한의 소식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사설정보지 말이군요.”
“예. 찌라시를 바탕으로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서 쫓겨났느냐. 온갖 추측이 난무하더라고요. 제가 봤던 얘기는 대부분 여자 연예인과 관련된 추문뿐이었지만.”
강주한은 태연한 낯으로 말했다.
“태한이가 사설정보지의 단골소재긴 하죠.”
강주한은 펼쳤던 신문을 다시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한인이 적은 곳으로 보냈습니다. 남부의 조용한 가톨릭계 대학이고, 보수적인 학풍이라 마음 비우고 공부하고 돌아오기 좋을 겁니다. 이번에도 석사과정 마치지 못하면 아예 한국 땅을 밟을 수도 없을 테니 홍콩이나 마카오에서의 생활과는 다르겠죠.”
강주한은 자신의 미련한 동생에게 손톱만큼의 동정도 느끼지 않는 듯이 보였다.
하선우는 찌라시라는 말은 숱하게 들어왔지만 최근까지도 찌라시의 전신이 사설정보지이며, 누가 어떤 목적으로 소문을 만들어내고 유통시키는지는 알지 못했었다. 그 속에는 정치와 자본, 권력과 관련된 복잡한 심리전이 펼쳐지고 있었고,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은 신뢰도에 따라 값싸게 때로는 값비싸게 팔려나갔다.
하선우는 조금 전보다 새로운 기분으로 강주한을 보았다. 소문을 제공하는 베일에 싸인 후원자이자, 그 소문을 다시 사들이는 기득권인 당사자가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뒷목을 긁었다. 그는 딴청을 부리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소문 중에 카지노 건설에 관한 언급이 조금도 없는 걸 보면 잘 덮었던데요?”
그는 괜히 목이 탔다. 잔 안의 물을 모조리 마시자 강주한이 곧바로 하선우의 빈 잔에 물을 따랐다.
“카지노 건설 계획은 극히 일부에게만 퍼져 나갔던 계획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실패로 돌아간 계획이기도 했고.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안심할 수 없습니다. 엘튼 장학회 사건은 묻혔지만 불씨가 죽은 건 아니니까요. 언제든 다시 불씨가 지펴질 수 있다는 얘기죠.”
그는 하선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그의 말은 어딘지 복잡하고도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하선우는 엘튼 장학회 비리명단은 물론, 돈의 세탁경로와 출처, 사용처까지도 모조리 암기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양심적인 브로커가 되기로 결심한다면 작은 불씨는 언제든지 대화재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이 가능성은 강주한과 하선우 두 사람 사이에 영원히 낫지 않는 염증으로 남을 것이다. 그들은 그 염증이 불러일으키는 간지러움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물론, 색다른 방식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다. 바로 권력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할 경우였다. 강주한은 대기업 오너였고, 하선우는 일반인이었다. 그들은 균형이 맞지 않는 시소에 올라탄 사람들이었다. 하선우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증거들은 불균형을 맞출 그가 가진 유일한 패이자, 하선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그의 가족들까지도 쥐고 흔들 수 있는 무기였다. 하선우는 위험천만한 사건에 그 스스로를 내던지며 자폭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쥐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 잊지도 않았다.
“그걸 알면 성질 돋우지 말고 나한테 잘해요.”
“그거면 되는 겁니까?”
“나한테 잘하면 하나씩 잊어줄게요.”
일부러 건달처럼 건들거리며 하선우는 말했다. 강주한은 이 주제를 두고 진지하게 얘기해보리라 다짐했지만, 오늘도 얘기를 꺼내기는 글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선우의 웃음은 강주한의 안에 남아 있는 끈질긴 불안을 너무 쉽게 훌훌 털어버렸다. 지금처럼만 하면 앞으로도 평생 행복할 거라는 낙관을 믿게 만들었다.
때마침 밥이 완성되었다. 강주한이 밥을 푸는 동안 하선우는 속이 깊은 그릇에 갈비찜을 양껏 담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오래도록 푹 끓인 고기는 입안에서 크림처럼 부서졌다. 하선우는 어머니의 요리 중에서 갈비찜을 가장 좋아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는 고기의 질감과 달고 짠 소스에 풍부하게 배어난 육즙을 사랑했다. 그에게 갈비찜은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반찬이었다. 작정하고 살을 찌우기로 결심한 사람이 먹을 법한 진한 고단백 음식이었던 것이다.
“지금껏 먹어본 갈비찜 중에 가장 맛있습니다.”
입에 맞는지, 맛이 어떤지를 묻기도 전에 강주한은 선수를 쳤다.
“그 허풍을 엄마가 직접 들었어야 했는데.”
뼈를 빈 그릇에 던지며 하선우는 말했다.
“어디에 자랑도 못하고 끙끙 앓았을걸요.”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의 영향력이 그러하듯, 강주한의 말은 분명 어머니의 자부심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어머니는 강주한을 절대로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한다는 듯 겸연쩍게 웃은 강주한은 물었다.
“여행준비만으로도 바쁘셨을 텐데 음식까지 만들려면 배는 고생하셨겠어요. 어디로 여행가신 겁니까. 국내?”
“제주도로 여행 갔어요. 주한 씨 밥해주고는 싶은데 만나기는 부담스러우니 갈비찜 해놓고 도망간 거죠 뭐.”
하선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티슈로 손가락의 양념을 닦아냈다. 어머니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강주한이 게이 아들의 연인이라는 점은 어머니의 허영을 어느 정도는 만족시켜주겠지만, 오히려 그 점이 어머니를 두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강주한과 마주치는 일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가족끼리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 있나요? 난 이게 편해요.”
“오히려 선우 씨 어머니는 관대하신 편이죠. 파트너에게 갈비찜까지 만들어주는 어머니가 한국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긴.”
하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다가갔다. 커피머신에 고정된 수통을 꺼내 정수기로 물을 받고, 서랍 속에서 캡슐을 꺼냈다. 그는 강주한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사실 그런 생각도 들어요.”
“무슨 생각?”
“당신 부모님이 칼 들고 날 쫓아오지 않으시는 건 어느 정도는 주한 씨 아이들의 영향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요. 주한 씨가 미혼이었으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어쨌든 한 번 결혼을 했었고 슬하에 자녀들도 있잖아요. 아빠 노릇이 시원찮아서 그렇지.”
강주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강주한에게 커피 잔을 내밀며 하선우는 그의 기분을 알고도 모르는 척 물었다.
“다음 주가 아이들과 보내는 주죠?”
“예. 아이들 방학기간이라 2주간 같이 지냅니다.”
초봄부터 강주한의 자녀들은 서동현 의원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의 자녀들을 교육할 개인교사를 강주한이 직접 채용한다는 요건과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양육을 양보한다는 조건부 허락이었다.
“애들이랑 뭐하고 놀아줄 건데요?”
“전에 입양했다던 보더콜리 두 마리 기억합니까?”
“사랑이, 희망이였죠?”
“정원에 강아지 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난방까지 고려하다 보니 업체에 맡기게 돼서 완제품을 조립하는 수준에서 끝내겠지만요. 아이들은 페인트칠을 도울 거고요. 선우 씨 조언대로 아이들과 뭘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도했습니다.”
“잘했어요. 사진 많이 찍어 와요.”
고개를 끄덕인 강주한은 한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시기만 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무언가 마음에 걸린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뭐가요?”
“내가 이도 저도 아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연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뭐요. 나한테 올인이라도 하려고요? 지금도 형편없는 아빠인데 얼마나 더 엉망으로 굴려고.”
하선우는 가볍게 혀를 차며 강주한의 맞은편에 앉았다. 거품이 풍성하게 올라온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다 혀가 데여 서둘러 찬물을 마셨다. 한참을 소란스럽게 굴던 그는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나는 내가 전혀 불쌍하지 않은데 자꾸 미안해하면 꼭 내가 불쌍한 사람처럼 느껴지잖아요. 뭐 좀 그립기야 하겠죠. 근데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장거리 연애도 아닌데 뭐 어때요. 애들한테나 잘해요, 좀! 나도 바쁜 사람이니까.”
천연덕스럽게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 상식적인 연애를 하자고요.”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사람들 틈에서 자라온 강주한은 하선우의 관대함과 동정심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자신은 꽤 행운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강주한은 무심결에 미소를 지었다.
하선우의 방은 다락방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공간이었다. 둘째인 선범이 장가를 가기 전까지 함께 사용했던 방이었다. 이곳에는 형제의 인생을 추론할 만한 실마리가 모두 모여 있었다. 형제는 서향으로 난 커다란 이중창 밑에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놓고 공부를 했다. 10년도 더 전에 사용했던 책상 책꽂이에는 형제가 사용했던 낡은 교과서 몇 권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2000년대 중반에 사용했던 낡은 컴퓨터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선범도 물건을 버리는 일은 젬병이었던 것이다.
벽에 고정된 선반 위에는 하선우가 즐겨하던 게임인 세가의 소닉 드라이브 게임팩 시리즈와 닌텐도의 슈퍼마리오 시리즈팩이 정리되어 있었고, 중학교 시절부터 조립해온 트랜지스터와 자잘한 로봇 부품들이 덮개에 덮여 보관되어 있었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부터 출판사 전집시리즈, 카세트테이프와 여 아이돌의 CD와 CD플레이어,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풀던 문제집 묶음, 인도 소년과 펜팔하며 나눈 편지 등등. 그가 방치했거나, 아니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남겨두었던 이미 지나버린 시절들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외에도 결혼한 형제가 두고 간 애니메이션 CD와 펜탁스, 소니 카메라 몸통, 통기타와 일본 기타리스트의 앨범, X-Japan의 해적판 CD 같은 구시대 유물 따위가 리빙 박스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선우의 방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나름의 질서와 정연을 갖춘 공간이었다. 그는 방에서 물건을 찾을 때 물건의 위치를 몰라 헤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목동의 집에 가져갈 물건들을 머릿속에 하나씩 꼽아보았다.
여름옷과 가을옷은 물론, 대학교 때 사용하던 삼파장 스탠드와 제도용 샤프, 노트북 쿨러, 마우스 받침대, 회사에서 단체로 맞춘 머그. 없어도 상관없지만 있으면 유용하게 사용할 물건들을 떠올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란다에 쌓아놓은 신문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그는 방 안에 서 있는 강주한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니 강주한은 할 일이 없었다. 무엇을 두고,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아는 사람은 하선우 자신뿐이었으니까.
“TV 보면서 쉴래요?”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책 고를래요? 주한 씨 취향은 없을 것 같지만. 보고 싶은 책 있으면 빌려줄게요.”
정작 강주한의 시선이 향한 방향은 책꽂이가 아니었다.
“봐도 됩니까?”
그는 리빙 박스를 쌓아놓은 선반을 가리켰다.
“음… 거기 재미있는 게 많긴 하죠. 구경해요. 보고 나서 제자리에만 두면 돼요.”
카메라를 보관해둔 리빙 박스를 꺼내 드는 강주한을 힐끔 쳐다본 하선우는 다시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는 허리춤까지 오는 낮은 책꽂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기초개념을 오랜만에 다시 공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전공서적 몇 권과 소설책 두어 권, 인문학 서적 한 권을 챙겼다. 책꽂이 중간에는 특허와 논문에 관한 자료를 모아두었다. 하선우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구겨지고 짙은 물얼룩이 남은 책자를 꺼냈다. 표지에는 Angewandte Chemie라고 쓰여 있었는데 독일의 학술저널 이름이었다. 폐업한 회사에 방치되어 있다가, 강주한에게로, 다시 하선우에게로 돌아온 잡지였다. 그 속에는 하선우의 이차전지 전극소재에 관한 논문이 실려 있었다. 그 논문은 현재까지 269회의 인용횟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저명한 화학자들의 논문에 비해 결코 많은 인용횟수를 자랑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선우는 어쨌든 자신이 나름의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그 논문으로 인해 수많은 사건사고와 얽혔지만, 권위 있는 저널에서 인정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강주한과 인연을 맺게 되지 않았던가. 하선우는 잡지를 신문에 감싸, 박스 안에 조심스럽게 세워두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강주한은 침대에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처음에 하선우는 그가 들여다보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강주한은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나 팔 법한 플라스틱 클리어화일을 침대 위에 늘어놓고 있었다. 에반게리온의 신지와 레이, 원피스의 루피와 보아 핸콕. 그 외에 아리카와 지브리에서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의 일러스트 엽서를 모아놓은 클리어화일이었다. 선범의 물건이었다.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던 둘째 형은 용돈을 받을 때마다 애니메이션 CD와 일러스트 엽서, 굿즈를 사러 용산을 방문하곤 했다. 하선우는 강주한이 역시 일본 애니메이션에 아련한 추억이라도 있나 보다 짐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들춰진 사진을 보고 자신의 오해였음을 깨달았다.
선범은 엽서 수집 외에도 수동 카메라를 모으고, 수동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었다. 그는 많은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촬영과 보관은 별개의 문제였다. 가족앨범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가족들은 선범이 열의를 갖고 찍는 사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리는 오로지 선범의 몫으로 남았다. 그는 오래전에 정리를 포기하고 가족사진과 애니메이션 엽서를 한군데 뭉뚱그려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걸 어떻게 찾았어요?”
“박스에 사진이 비치던데요.”
강주한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산맥의 능선이 눈에 뒤덮인 풍경사진이었다. 멋들어지게 풍경을 찍어보고 싶어 산봉우리를 카메라에 담았지만, 노출을 너무 낮춰 설경이 아니라 잿더미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이 솜씨가 어설픈 아마추어의 사진은 분명 선범이 찍은 것이었다. 어딘가 눈에 익은 장소였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 하선우는 슬리퍼를 벗고 침대 위로 훌쩍 올라갔다. 그는 강주한을 도와 애니메이션 엽서와 그의 형제가 찍은 사진의 분류를 도왔다. 하선우 역시 처음 보는 사진이 대다수였다.
비슷한 구도의 사진이 반복되었다. 구름에 갇힌 노을, 풍성한 침엽수림 속에서 산란하는 태양빛, 들판 너머의 원경에 수직으로 솟아 있는 도시의 풍경. 나름대로 피사체를 표현하려 고심한 흔적이 노골적으로 돋보이는 사진들을 넘겨보던 하선우는 젊은 부모님의 사진과 맞닥뜨렸다. 큰형의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어머니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웃고 있었다.
풍경사진을 제외하면 피사체는 대부분 어머니와 하선우였다. 아버지와 첫째 형, 셋째 형은 카메라 앞에 서기를 기피했고, 둘째 형이 가장 찍고 싶은 대상은 어머니였으며, 대충 찍어도 그럴싸한 사진이 나오는 피사체는 하선우뿐이었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하선우와 강주한은 낡은 사진들을 시기별로, 종류별로 분류해보았다. 선범이 찍은 풍경사진을 따로 빈 상자에 쌓으며 하선우는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맨 처음 발견했던 설원의 풍경이 낯이 익은 이유가 있었다. 날카로운 능선이 이어진 산맥은 태백산맥의 중간 즘에 위치한 발왕산의 산봉우리였다. 아버지와 네 형제가 해마다 찾던 스키장에서 바라본 백두대간의 풍경이었다.
“스키장에서 찍었던 사진이 많군요.”
강주한은 스키장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내 가운데에 쌓으며 말했다.
“형은 스키장 가는 겸, 출사 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그런 걸로 풀었으니까요. 의대 진학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거든요.”
발왕산의 산봉우리를 찍은 사진이 연이어 나타났다. 1,400미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백두대간의 풍경은 아마추어의 솜씨긴 하지만 제법 그럴싸했다. 하선우는 슬로프 정상에서 찍었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이날 저 몸살 걸렸던 날이에요. 형이 입던 스키복을 물려줬는데 방수 기능이 떨어져서 속옷까지 홀딱 젖었거든요. 덕분에 벼르던 스키복을 새로 샀는데… 음, 제대로 된 사진이 없네?”
쌓여 있는 사진을 뒤적거리던 하선우는 마침내 원하는 사진을 찾아냈다. 노란색 스키복을 입은 병아리 같은 소년이 야외 테이블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사진이었다. 상체가 클로즈업된 사진 속의 소년은 펑퍼짐한 스키복을 입고 홍조로 달아오른 뺨을 하고 있었다.
“아, 진짜 촌스럽다.”
강주한은 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사진 속 어린 하선우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묘했다.
하선우는 야외 원목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최상급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블랙코스 부근의 야외 휴게실이었다. 그의 앞에는 떡볶이와 어묵이 일회용 그릇에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짝을 맞춰 벗어놓은 장갑, 모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반듯하게 넘긴 소년은 빨갛게 얼어붙은 손끝으로 이쑤시개를 섬세하게 집어 분식을 깨물고 있었다. 홍조로 달아오른 뺨과 환하게 웃는 눈, 심지어 떡볶이 국물은 입가를 지나 뺨까지 번져있었다.
“이 사진.”
강주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눈을 떼기가 힘든 매력적인 미소였다.
“난 여기서 파는 음식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요. 먹을 만했습니까?”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려 하선우와 시선을 마주쳤다. 단지 눈빛을 교환하는 단순한 행위일 뿐인데도 하선우는 새삼스럽게 강주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선우는 목이 조여드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맛은 기억이 안 나요. 비싸고 맛은 없고 양은 더럽게 적다고… 형이 투덜거렸던 것 같긴 한데.”
기시감을 느끼며 머뭇머뭇 대답하던 하선우는 도중에 떠올렸다. 어떻게 그 기억을 잊을 수 있는지 그는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파인스 리조트의 최정상 코스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고, 사고에 휘말려 호텔 방으로 그를 데려다주러 갔던 날 밤에 그들은 충동적으로 몸을 얽었다. 오늘 밤 실수해버리자는 강주한의 의미심장한 도발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던 장소가 바로 사진 속의 최정상 코스임을 모두 잊고 있었다.
“주한 씨도 파인스 리조트로 스키 타러 다녔다고 그랬죠? 블랙코스 이용자였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강주한은 사진 속에서 무구하게 웃는 하선우의 어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된 추억을 만난 듯이 그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1998년 1월 29일이면 IMF 외환위기 당시군요.”
“98년이면 그랬겠네요.”
“이날은 특히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나이도 어렸는데 학원에서 미리 모의고사를 봤었죠. 가채점 결과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기분은 썩 좋지 못했어요. 불만이 많았던 시기였거든요.”
“되게 자세하게 기억하시네요.”
강주한은 사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 하선우의 얼굴과 그 너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남자의 흐릿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란 스키복을 입은 하선우와 달리 남자는 칙칙한 검정색 스키복을 입고 있었다. 렌즈의 초점을 하선우에게 맞춘 탓에 그 외의 풍경은 포커스 아웃 되면서 남자의 얼굴도 조금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하지만 강주한은 사진 속 남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선우의 둘째 형이 마구잡이로 셔터를 눌러댄 사진 속에 우연히도 강주한이 같은 앵글에 잡혔던 것이었다. 이목구비가 흐릿하긴 했지만, 눈여겨보면 알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하선우는 그의 뒤에 있는 칙칙한 인상의 소년이 강주한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에 박제된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거든요.”
하선우는 아리송한 수수께끼를 들은 것처럼 멍하게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이 사진 가져도 되겠습니까?”
강주한은 하선우의 사진과 비닐 속의 필름을 펄럭이며 물었다. 하선우는 불만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갖고 싶으면 가져요. 사진 더 볼 거면 구경해요. 난 마저 짐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하선우는 서랍장 속에서 옷을 꺼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동봉된 필름을 현상해 거실에 커다랗게 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는 두 사람이 아주 오래전에 같은 앵글 속에 우연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이유도 모른 채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사진에 불만만 가졌던 하선우가 언제쯤 그의 뒤에 서 있는 소년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될지, 강주한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