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
햇살에 따듯하게 데워진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옅은 야자수 냄새가 묻어나는 바람이었다. 82번 국도 교차로에서 스탠퍼드 대학의 메인광장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의 주변에 심은 가로수는 모두 야자수였다. 도로의 이름은 지역의 명물인 팜 드라이브였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는 야자수 도로를 달리면 그 길 끝에 스탠퍼드 대학의 정문과 연결된 메인광장이 나타난다. 붉은 지붕을 얹은 아크 구조의 복도와 메모리얼 교회가 시야에 어렴풋이 걸렸다. 근사한 풍경이었지만 같은 광경을 반복해 보다 보니, 최초의 감동이 희석된 지 오래다.
대신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든다. 제주도에도 캘리포니아, 동남아 못지않게 종려과의 나무가 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제주도 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주쳤던 키가 큰 종려나무와 주한의 별장 속 온실에서 키우던 대추야자나무, 그리고 바닷가 별장 앞에 해먹을 걸어놓은 키가 작고 몸피가 두꺼운 흑갈색의 왜종려를 떠올렸다. 나는 거의 필연적으로 바닷가 별장 앞에서 나누었던 야외 섹스의 추억을 되살려내고 말았다. 5년 전 여름, 주한과 나는 여름휴가를 제주도의 별장에서 보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해먹 위에서 모기에 피를 뜯겨가며 개방적인 섹스를 나누었던 추억이었다. 섹스의 계기는 뜬금없었다. 나는 그 무렵 취미로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단순암기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분류학만 한 게 없었기에 나는 작심하고 식물계와 동물계의 계문강목과속종을 암기하게 되었다.
암기방법은 의외로 단순해서 하루에 다섯 번씩 책을 주의 깊게 읽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분류학은 너무 방대한 분야였기에 모든 범위에 정성을 쏟지는 않았고 전부터 관심이 가던 분야만 팠다. 이를테면 호모사피엔스가 속하는 영장목이나, 외떡잎식물, 상록교목과 같은 범위에 한했다. 그중에서도 외떡잎식물인 야자수는 나의 전문 분야나 다름없었다.
그 날 강주한과 나는 별장 주변의 바닷가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돌아와 2인용 해먹에서 쉬고 있었다. 바닷물의 소금기를 씻어내지도 않고 해먹 위에 드러누워 우리 두 사람은 게으른 낮잠을 즐겼다. 눈을 뜬 시간은 매직아워의 시간대였다. 일광이 흐릿하게 남은 남색 하늘과 사유지와 국유지의 경계선인 절벽을 따라 낮게 자라난 야자수를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거의 감탄조로 말했다.
‘제주도에는 참 야자수가 많네요.’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늘 어딘가 지나친 면이 있는 주한은 내 몸 위에 바짝 마른 소금 결정을 털어주며 순수한 선의로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제주도는 국내에서 가장 남쪽이라는 테마에 어울리는 관광지로, 여타 지역과 차별성을 둬야 하기 때문에 낙엽이 떨어지는 낙엽수 대신, 도 차원에서 야자수를 심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한림지구 종합관광개발계획이 행정법에 부딪히게 된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별로 흥미롭지 않은 지식자랑’에 대한 대항마로 나 역시 그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분류학’ 이야기를 카드로 꺼냈다. 하지만 뜻밖에 그는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문상록나무과의 외떡잎식물의 번식기관을 설명할 때 그는 특히 눈을 빛냈다. 암술머리, 암술대, 씨방 등등, 생물의 생식기관에 대해 설명하는 내 말이 지나치게 외설적이며 성욕을 자극한다는 이유였다. 고루한 학문에서 외설스러운 무언가를 연상하는 것도 강주한의 타고난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나는 좀 그리운 기분에 휩싸인 채로 옆에 앉은 소녀를 힐끔거렸다.
“여희야. 검색 좀 해봐.”
차 안에서는 걸그룹 틴 팝이 커다랗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상체를 힘차게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던 여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정신없이 춤추던 여희가 나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왜?”
“거울 좀 봐봐.”
룸미러로 내 모습을 빠르게 확인했다. 차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옷깃 사이로 파고들어 체크 셔츠를 임신부의 배처럼 부풀리고,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엉클어트렸다.
나는 이게 왜 우스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길로 아이를 쳐다보다 다시 말했다.
“검색 좀 해줄래?”
여희는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음악에 묻힌 내 목소리가 아이에게 잘 닿지 않았다.
“제주도에 언제부터 야자수를 심었는지 검색 좀 해봐.”
“응?”
언성을 높였지만 여전히 못 알아듣는다. 결국 차창을 닫고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줄였다.
“제주도에 언제부터 야자수를 심었는지 검색 좀 해줘.”
아이는 혼란을 느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을 헤 벌린 채로 눈알을 한 바퀴 둥글게 굴리더니 오, 마이 가-쉬, 라고 말한다. 버터와 크림치즈, 생크림과 피넛버터, 진하고 느끼한 맛을 내는 온갖 종류의 식재료가 귓속에서 굴러가는 기분이다.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탓에 여희의 표현방식은 가끔 내게 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빠가 틀렸는지 맞았는지 또 그거 검색하는 거지?”
무안한 기분에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희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 죽겠다는 듯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고 좌석에 등을 깊게 파묻었다. 휴대폰으로 뭔가를 한참 동안 찾던 아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본 규슈가 원산인 종려나무를 제주도에 들여와서, 실패를 거듭하다가 1972년에 처음으로 종묘 재배에 성공했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경사업을 시작. 찾아보니까 이렇게 나왔네. 아빠가 맞았어, 틀렸어?”
“…맞았어.”
여희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한국 나이로 열네 살이 된 아이는, 벌써 사춘기 소녀 특유의 도전적인 눈빛을 보낼 줄도 알게 되었다.
“두 사람 가만히 보면 웃겨 진짜.”
아이를 웃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철없이 행동한 대가로 여희의 비웃음을 고스란히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끔 열네 살 소녀의 사고 수준이 인생을 배 이상 살아온 나와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아이의 조숙함과 나이에 비해 덜 성숙한 나의 물색없는 면은 결과적으로 균형을 이루었다. 열네 살 소녀는 언제나 나를 제 수준으로 여기고 맞먹으려 들었지만, 화를 내는 대신 그러려니 하고 어울려주었다. 이런 면은 나의 엄청난 단점이자, 별 볼 일 없는 장점 중 하나였다.
그래도 가끔은 어른 흉내를 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이번에는 좀 칭찬받을 만한 짓을 하기로 했다.
“배고프지? 랍스터 먹고 싶다고 했잖아. 큰 사이즈 랍스터 들어왔다고 해서 주문해뒀어. 당장 가자.”
예약한 레스토랑은 번화가에서 떨어진 주택가 부근에 있었다. 인근에 가게라고는 맞은편의 컵케이크 가게와 꽃가게, 카페, 그리고 내가 예약한 레스토랑이 전부였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레스토랑은 간판이 따로 없었다. 간판 대신 입구의 벽면에 붓으로 글씨를 써넣었을 뿐이었다. 스크립트 폰트를 흉내 내 Mary's Steak House라고 휘갈겼는데, 악필이었지만 조잡하지 않고 나름 그럴싸한 인상을 남겼다.
“어? 나 여기 오고 싶었는데.”
“해산물로 유명한 맛집이야. 내가 예약을 무려 3주 전에 했거든?”
“잘했어. 선우.”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른 여희는 신이 나서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 올라갔다. 기다란 정강이와 허벅지, 사슴처럼 긴 목과 각진 어깨,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고 긴 팔. 몇 주 못 만난 사이에 여희는 키가 더 큰 것 같았다. 소녀는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됐지만 키가 160대 후반이었다. 그녀의 오빠인 희원도 마찬가지로 나이에 비해 키가 겅중 컸다.
희원과 여희 남매는 살이 붙는 속도가 키 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뼈마디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눈을 떼고 있으면 휘청하고 넘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섬약한 외모와는 달리 먹성이 엄청난 남매였다.
랍스터를 해체하는 서버의 능수능란한 솜씨를 새침하게 지켜보던 여희는 서버가 물러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접시에 살점을 옮겨 담았다.
“우와, 집게가 내 손보다 커.”
“집게가 아니라 집게발. 랍스터나 게 종류에 달린 건 다 집게발이라고 말해.”
“나도 알거든? 아주 잠깐 단어가 생각 안 나서 그래.”
쀼루퉁한 얼굴로 대꾸한 여희는 랍스터 위에 레몬에 절인 양파를 올리며 말했다.
“조금 전부터 지적해주고 싶었는데 랍스터 아냐. 로브스타야. 중간에 브는 묵음이고.”
“됐다. 말을 말자.”
그러거나 말거나 여희는 이미 랍스타, 아니 로브스타에 빠져 있다. 얇게 채 썬 양파를 파스타 면발처럼 포크에 끼워 돌돌 만 뒤 도톰한 살점을 찍어 입안에 쏙 밀어 넣었다. 흐으음, 과장된 신음을 흘리며 여희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쉰 아이는 조금 전의 심술은 어느새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매일 이런 것만 먹었으면 좋겠다. 기숙사 음식 정말 별로야.”
“매일 로오브스똬만 나오는 기숙사에 입학하려면 지금 내는 기숙사 비용의 두 배는 줘야 할걸?”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그런 것만 먹고 싶대?”
뾰족한 여희의 말에 나는 한발 물러나준다.
“하긴 비싼 돈 주고 간 곳인데 음식이 별로면 억울하지. 음식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뭐 밥 먹으러 간 건 아니니까. 공부 잘하는 요조숙녀 되려고 입학한 곳이지. 요조숙녀라니 요즘 세상에 너무 웃긴 말 아니야? 사전 찾아보니까 말과 행동이 품위가 있고 정숙한 여자래. 정숙한 여자가 뭔지 알고 싶어서 또 사전을 찾아보니까 행실이 곧고 마음씨가 맑고 고운 거래. 음, 안 되겠어. 먹으면서도 계속 뭔가가 먹고 싶은 행동을 정의하는 단어는 한국어 사전에 없어? 로브스터도 맛있지만 우리 다음번에 한식 먹으러 가자. 나 요즘 육개장이 너무 먹고 싶어.”
앞뒤 없고 두서도 없는 얘기를 정신없이 쏟아낸 뒤, 또 부지런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강주한을 닮은 얼굴로 여희가 헛소리를 한바탕 퍼붓고 나면 혼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멍하게 여희를 쳐다보던 나는 콱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근처에 육개장 파는 곳이 있었나?”
“내가 이미 알아놨어. 아빠는 지금 캐나다고, 화요일에야 미국에 온다고 했으니까 주말에 우리 같이 가자. 꼭 육개장 먹는 거야? 알았지?”
여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전에 캡처해둔 지도를 내가 앉은 방향으로 밀어 전송했다.
“여기야. 선우 집에서 40분밖에 안 떨어졌어. 백화점이랑 가까워.”
육개장은 핑계고 주목적은 쇼핑일 게 뻔했다. 시큰둥한 내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여희는 계속해서 제 할 말만 떠들어댔다. 그녀는 내게 남매끼리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남매가 주고받는 연락 대부분은 한국에 있는 사도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도들은 올해 아홉 살이 된 보더콜리 두 마리를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개의 이름은 사랑이와 희망이로, 그 이름이 사도의 삶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줄여 부르게 된 것이었다. 여희가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주한이 일로 바쁘다 보니 사도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쓰고 실제로는 예뻐만 하는-은 전적으로 희원의 몫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희원이와 어색한 사이였다. 주한의 부모님과 외가의 예쁨을 독차지하며 자란 희원은 여희에 비해 보수적인 편이었고, 아버지의 동성 연인인 나를 어렵게, 때로는 불편하게 여겼다. 표면적으로 실례를 범한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서로 예의를 차리는 관계였다. 반면 여희와의 관계는 편했다. 희원이는 섬세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지만 여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이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무신경함을 타고났다. 타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한 성미 덕분인지 소심한 면이라고는 없었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냉소적으로 굴지만, 속이 깊고 온정이 넘쳐 아이의 곁에는 늘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성격이 유전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나는 여희의 이런 면이 누구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내 삶의 배경 중 하나가 된 여자. 바로 서유임이었다.
“마놀이 선우보고 귀엽대.”
“마놀이 누구더라?”
“엘리아스 퀘레제따 프로두시오네스 시네마토그라피까-스.”
“뭐… 뭐?”
“내가 전에 말했잖아. 망해가는 아트무비 제작사. 거기 막내 따님이 내 친구 중의 한 명이라고. 기억 안 나? 나를 지갑처럼 생각하는 못돼 처먹은 애.”
아아, 나지막이 감탄하며 살점을 꼭꼭 씹어 먹었다. 여희를 지갑 취급하는 애들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못돼 처먹었다는’ 특별한 부사가 더해지니 확실하게 떠오르는 소녀가 있었다. 청록색 눈동자에 구불거리는 밤색 머릿결을 지닌 마놀로 아브릴이라는 아이였다. 내가 특별히 그 스페인 소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여희의 짓궂은 장난 때문이었다.
지금껏 여희의 친구들을 만나 몇 번 음식을 대접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아이들에게 여희의 아버지와 내가 파트너로 설명되는 연인 관계라고 이해시킨 적은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나를 여희의 먼 친척쯤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여희가 어떻게 말해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녀들은 나를 여희만큼은 아니지만 적당한 부를 상속받을 상속자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굳이 해명할 이유를 찾지 못해 나는 소녀들의 착각을 내버려두었다.
수다스러운 소녀들과의 만남은 늘 인상적이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놀과의 첫 만남이었다.
‘옷빠 동아니에요. 망나서 방갑삼니다.’
그건 여희가 ‘못돼 처먹은’ 마놀로 아브릴에게 알려준 한국식 인사법이었다.
“기억났어. 나보고 오빠 동안이에요, 라고 말한 애지? 뭐, 욕을 가르쳐준 것보단 낫지만 너무 어린애잖아?”
한 손에는 포크를, 남은 한 손에는 나이프를 쥐고 있던 여희가 테이블을 소리나게 내려치며 푸하하 웃었다. 여희는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낭랑하게 말했다.
“괜찮아. 오빠 젊잖아. 제 나이로 안 보여. 완전히 탱탱해.”
나는 입안의 음식을 씹던 것을 멈추었다. 언짢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여희야. 나 방금 소름 돋았다.”
“난 선우가 계속 탱탱했으면 좋겠어. 항산화제 먹고 동안 유지해야지. 내가 직접 USDA에서 자료 찾아봤는데, 라즈베리, 로즈 힙, 초크베리, 엘더베리, 블루베리가 노화방지에 좋대. 지금 당장 외워. 라즈베리, 로즈힙, 초크베리, 엘더베리, 블루베리. 로즈 힙, 라즈, 초크, 엘더, 블루.”
“넌 가끔 너무 산만해.”
“외우라니까? 젊게 살자, 오빠.”
“오빠라니, 난 네 아빠뻘인 사람이야.”
낮고 걸걸한 목소리를 내보려 노력하지만 나도 안다. 내 말투와 나를 둘러싼 분위기에는 어떤 권위도 없다는 것을.
“아저씨들은 오빠라고 하면 좋아한다던데. 흠, 게이라서 오빠라는 말에는 느낌이 없나?”
여희는 무신경한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떨었다. 지나치게 높고 낭랑한 웃음소리였다.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걸 알지만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점점 기분이 언짢아지고 있었다.
“게이?”
“몰랐어? 난 희원이한테 선우를 하 게이라고 말하는데.”
혀를 비쭉 내밀며 여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평소의 나라면 무골호인처럼 함께 허허 웃어버리고 어색해지는 순간을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희의 농담은 재미없었고, 나는 어색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입안에 남은 음식물을 꿀꺽 삼켰다. 약간의 흥분과 분노, 비극적인 기분이 속에서 제멋대로 가열되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너무 공격적이지도 않고, 너무 물렁물렁하지도 않은 적당히 뼈가 있는 표현을 찾아 헤맸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여희야. 내가 하 게이면 네 아버지는 강 게이냐?”
타이르는 말로 쓰이기에 문장은 적당히 우습고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인 어조로 말하는 바람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발탄에 저격당한 여희가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평화는 물 건너갔다. 결국 나는 내 자존심을 지키려 본심을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 게이가 뭐야. 내가 아무리 편해도 조금 존경을 담아서 말하지 그래.”
“뭐야. 지금 굉장히 불편한 기분인가 봐?”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여희의 눈은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속이 갑자기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웃으며 말해야 할까?”
“게이 맞잖아. 게이라서 게이라고 부른 거고. 난 나를 강 헤테로라고 불러도 상관없는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분노를 감추지 않고 여희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기분이 나쁘다니까.”
“아… 그래. 난 그냥 농담이었어. 근데 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안 그럴게. 안 부르면 되잖아.”
여희는 여전히 별종을 바라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기분이 완전히 바닥으로 꺼져버렸다.
“네가 선우, …선우. 그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건 문화적인 이유로 적응했어. 하지만 하 게이? 내가 내 이름을 존칭으로 불러달라고 어려운 요구를 했어? 아니잖아. 적어도 그딴 비칭으로 사람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
입맛이 뚝 떨어졌다. 랍스터가 절반 가까이 남아 있었지만 뭔가를 더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입가를 닦은 냅킨을 나는 거의 던지듯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좋았던 저녁 식사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 정적은 계속되었고, 누구도 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침묵에 대한 나의 책임감은 무거워진다. 그 무거운 무게는 인생을 훨씬 더 오래 살아온 나의 몫인 것 같다. 여희의 농담을 내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일까, 내가 어른답지 못했나, 손톱만큼 미안한 마음이 강퍅했던 마음을 조금씩 녹여간다. 나는 소중한 대상을 밀어내고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쓰였다. 결국 먼저 화해를 시도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여희는 분노를 품은 고집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해는 글러먹었군. 나는 코웃음 치며 가장 손쉬운 해결책인 동시에 가장 비겁한 수를 썼다.
“네 아버지한테 이를지 말지 고민 중이야.”
여희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한다.
“강주한한테 말하지 마. 나 질풍노드야.”
“강주한? 강주한이랬냐?”
“그래! 강주한!”
“소리 지르지 마. 이름으로도 말하지 마. 아버지라고 말해.”
“미국에서는 다 이름으로 말해!”
“아, 그래, 그렇지. 강여희. 근데 너 한국 사람이거든?”
“진짜 짜증나게 굴고 있어. 누가 미국 보내래?”
“내가 미국 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돈 댄 것도 아냐. 한국에서 공부하라는 걸 네가 가겠다고 굶고 떼써서 어쩔 수 없이 보낸 거지. 유학 왔다고 네가 갑자기 미국 사람이 돼?”
“짜증 내지 마. 짜증나게 굴지 마. 나 질풍노드랬어?”
여희는 짜증나 죽겠다는 듯 윽박질렀다. 떼를 쓰는 아이처럼 의자 위에서 몸을 들썩거리며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속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더는 여희를 몰아붙일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쿵쿵 맥박이 빠르게 뛰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허리를 굽힌 채로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넋을 놓았던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을 때 나는 식어가는 랍스터를 거의 노려보고 있었다.
질풍노드가 아니라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이 용어의 바른 사용이었다. 그러나 단어의 교정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겠지.
또다시 위기의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도피의 병이 도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비딱하게 기울어진 고개를 들고, 문제를 마주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상처로부터 보호할 만한 말을 쥐어짜고 있을 때,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처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내 딴에는… 유머였어.”
머리를 감싼 손을 내려놓고 구부정하게 굽혔던 허리를 폈다. 여희는 눈을 내리깔고 씩씩거리며 화해를 시도하고 있었다.
“기분 나쁠지 몰랐다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는 단지 서툴고 어색한 태도로 미안한 내색을 한 게 전부였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이를 낳은 적도, 키운 적도, 하다못해 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지만 그런 비슷한 대상이 주는 어떤 애착의 느낌을 알 것만 같았다.
미운 감정이 사라진 자리엔 멋쩍은 애정이 들쩍지근하게 들러붙었다. 나는 너무 감상적으로 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어쭙잖은 개똥철학을 주절거렸다.
“너도 알겠지만 어른들도 상처를 받아.”
누그러진 말투에 아이의 경계태세가 풀린다. 여희는 한참 만에 말했다.
“…알아.”
“네 딴에는 농담으로 한 말일 수도 있어. 하지만 백 명이 웃어도 농담의 당사자가 웃을 수 없으면 그 사람에게는 유머가 아니야. 왜냐면 사실이니까. 그것도 그 사람에게 약점일 수도 있는 사실. 네가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약점을 갖고 농담을 해서는 안 돼. 나는 하 게이라는 말이 재미없어. 네 유머감각은 좀 형편없었어.”
헐렁하게 기울어져 있던 여희의 자세가 다시 단단해진다. 눈을 치뜨며 항복 직전의 권투선수가 잽 자세를 취하듯이 상체를 들었다.
“약점이라고?”
여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말의 어디에서 심사가 뒤틀렸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왜지? 분명히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소심하게 내 표현을 점검해본다. 그 순간 여희의 커다란 눈이 갑자기 그렁그렁해진다.
“아저씨와 아빠가 게이인 게 나한테도 약점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나는 심장이 철렁해져 숨을 멈추었다. 여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삭이며 말했다.
“나는… 좀 편하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랬어. 나도 아빠가 게이인 게 좋은 게 아니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안 들었을 거고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평범하게 자랐을 거야. 근데 아니잖아. 그건 나도, 아빠도 어쩔 수 없는 문제잖아. 난 선우가 좋고 아빠도 좋아하니까, 그냥 나름대로 단순하게 생각했던 거야. 둘이 파트너인 걸 이해해보려고 나름대로 가볍게 굴어보려고 시도해본 거였어. 나는…, 나는 나도 웃으니까 백 명이 다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눈물을 찔끔 쏟아낸 여희는 한참을 눈을 깜빡거렸다. 그 큰 눈에 눈물이 다시 와락 쏟아질 것처럼 고인다. 눈물을 부끄러워하는 아이는 울지 않으려 거의 노려보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십 수 번의 깜빡임 끝에 마침내 눈물을 완전히 말려버린 아이는 단호한 결심을 내렸다.
여희는 말했다.
“미안해. 재미없게 굴어서.”
조금 전까지 감상적으로 굴지 않으려 애를 쓰던 나의 태도는, 아이의 솔직한 기세에 눌려버린 지 오래였다. 속이 다 울렁거렸다. 이러다 나까지 울어버리면 곤란했다. 다 큰 어른이 똑같이 여희를 노려보며 눈을 십 수 번이나 깜빡거릴 수는 없었으니.
“알고 있어. …고마워.”
나는 여희의 사과를 고마워하며 애처럼 입술을 삐죽거렸다. 여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 게이라고 안 할게. 마음속으로도 안 부를게.”
“잘 생각했어.”
“선우, 우리 싸우지 말자.”
“그래.”
“화해의 의미로 나 스테이크도 주문해도 돼?”
“그래.”
“그리고 그 집게… 집게발도 나 먹을 거야.”
나는 서둘러 포크에 양파절임을 끼우고 깨끗하게 잘라낸 집게발의 단면을 찍었다. 새끼손가락으로 새침하게 귀밑머리를 넘기는 여희에게 도톰한 랍스터를 집은 포크를 가져가는 것으로, 우리는 화해의 도장을 찍었다.
여희가 다니는 사립학교와 내가 사는 웹스터 스트리트의 한적한 주택은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니까, 거대한 땅덩이를 가진 미국이라는 전제하에. 차를 타고 편도로 40분이 넘게 떨어진 기숙학교에 사는 여희와 잦게는 격주에 한 번, 적게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났다. 그녀는 나를 친구처럼, 보모처럼, 때로는 운전기사처럼 부렸다. 그녀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백화점을 돌거나, 그녀가 검색으로 알아본 레스토랑을 갈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은 항상 나였다.
우리는 주로 밖에서 만나는 편이었지만, 가끔 여희가 기숙사 외출증을 받아와 한산한 나의 집에서 잠을 자고 갈 때도 있었다. 바로 어제가 그녀가 나의 집에서 자고 간 날이었다. 덕분에 나는 온 주말을 여희와의 시간에 할애하게 되었다. 나는 인생의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하려 한국을 떠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타지에서 자유로움보다는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여희는 열 살 무렵에 캘리포니아 주 서부 도시로 유학길에 올랐고, 나는 그녀보다는 2년 늦게 실리콘밸리의 팔로알토 지역에 입성했다. 독일 회사인 MGK 모터스에서 연구소를 팔로알토 지역에 설립했는데, 나를 적임자로 판단한 CTO의 추천으로 취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충전 분야 연구개발 디렉터라는 그럴듯한 직책을 갖고 있지만 어쨌든 3년이라는 한시적인 기간을 조건으로 일하는 계약직이었고, 1년 뒤에 다시 국내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초반에 연구소에 적응하던 시절, 모국어가 아닌 제2외국어로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고 나면 뇌는 과부하에 걸린 듯이 피로를 호소했다. 그 당시의 나는 한국에 있는 강주한에게 전화를 거는 일과만이 하루의 유일한 낙이었다. 돌이켜보면 건강한 대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순간에도 내 말투에는 거친 투정이 묻어나곤 했다.
신문명 발생지라고 불리는 이곳은 물가가 살인적으로 비쌌으며, 고학력자들이 즐비한 곳이고, 빠르게는 2년, 길게는 5년마다 연구원들을 갈아치우는 회사들이 즐비했다. 한국의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내게는 도전에 대한 동경과 어떤 열망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몇몇 대학의 교수직 제의와 강의요청, 그리고 강주한이 제안한 일자리는 모두 거절했으면서 실리콘밸리와 글로벌기업의 취업 제안에는 마음이 벅차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도전을 감행했다. 내 나이 30대 후반 줄에 접어들었고 앞으로는 이런 욕심을 부리지 못하리라는 어떤 조급함이 나를 채근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3년간 취업을 다녀올 생각이니 허락해달라는 내 말에, 여희가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던 그때처럼 강주한은 괴롭게 거절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여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듯, 그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대신 우리는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장거리 연애가 앞으로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서로가 바람을 피울 가능성과 애정이 식을 가능성은 없는지, 계약이 연장되어 이별의 시간이 더 길어진다면 어떻게 할지, 연락하는 시간대는 어떻게 정할지, 신뢰의 문제는 어떻게 극복할지, 만에 하나 싸운다면 연락하는 방법은 어떻게 할지, 휴가는 어떻게 보낼지, 한국으로 올지, 미국으로 갈지, 1년에 몇 번이나 만나게 될지, 사소하게는 성욕해소는 어떻게 할지(물론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폰섹스를 할지, 그렇고 그런 사진을 보낼지, 영상을 보낼지, 떨어져 있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온갖 문제들을 두고 얘기했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본 장거리 연애는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나는 우주로 쏘아 올린 탐사선에 홀로 몸을 실은 기분을 느꼈다. 같은 지구라는 땅을 밟고 서 있는 게 아니라, 그는 지구에 남아 있고 나 홀로 대기 없는 무중력의 공간 속에 떠 있는 듯했다. 해저 케이블과 위성을 이용한 통신사의 연결로, 그와 수시로 연락을 할 수는 있었지만 전파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어딘가 안타까운 느낌만 더할 뿐이었다.
나의 이기심으로 이역만리 먼 길을 떠나왔지만 미국에 온 뒤로 나는 한동안 외로움 속에서 헤매었다. 연구소에서 바쁜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 허무함이 속을 쓰리게 할 때면, 오래전 강주한과 전쟁처럼 치렀던 다툼이 떠오르곤 했다. 나는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선택은 없다고 말했다. 선택이 있다면 포기도 있으며,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다 가질 수 없다고 쏘아붙였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비웃을 만한 얘기였다. 감당하지도 못할 욕심을 손에 꽉 쥐고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버티고 있을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나는 단지 이곳에서의 시간이 강주한과의 이별을 견딜 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보다 앞서 우주탐사선에 탑승했던 여희는 외로움에 관해서는 나보다 한 수 위의 선배였다. 우리는 광활하고 허무한 우주공간에서 재회한 반가운 친구였다. 만약 여희가 없었다면 주말에 나는 집에서 궁상을 떨며 온종일 강주한의 연락을 기다리거나, 그저 연구소에 죽치고 앉아 쌓여 있는 일거리에 치여 살았을 것이다.
“선우, 저 컵케이크 사줘.”
“너는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런데 나만 보면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각나지? 평소에는 죽어도 먹기 싫던 것도 막 먹고 싶어지고.”
“맞아. 나 좀 다른 사람의 지갑으로 사는 데 지쳤거든. 그래서 누가 나한테 돈 써주는 게 너무너무 너어-무 좋아. 특히 선우가 사주는 게 제일 좋아. 너무너무 조오아.”
거의 노래를 부르듯 말한 여희는 내 표정을 확인한 뒤 우뚝 멈추어 섰다.
“왜? 돈 없어? 컵케이크 사줄 돈도 없어? 나름 부자라고 들었는데?”
“부자? 누가 그래?”
“삼촌.”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다,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강태한이?”
“응!”
심각한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아이는 레스토랑의 맞은편 컵케이크 가게로 뛰어갔다.
여희의 입에서 삼촌이란 말이 나온 것도, 내 입에서 강태한의 이름이 나온 것도 오랜만이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강태한이란 이름을 잊고 살았다. 녀석은 미국에서 간신히 졸업장을 따고 국내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버렸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우연으로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난 지인의 소개로 중국 광저우의 유명 엔터테인먼트 사업가인 연상의 부호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자기 자리를 대신할 전문경영인 영입 문제와 이사회 보고, 그 외의 파트너십 문제로 한국을 방문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나날을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녀석이 결혼식을 올린 뒤부터 내 주변을 단속하는 경호원 팀의 규모가 줄어들었고, 미국으로 건너온 후로는 강태한을 완전히 잊고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강태한은 나에 관한 관심을 완전히 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나에 관한 소식은 어디서든 쉽게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신과 엘텍 사이에 일어난 특허소송은, 남매간의 유산상속 소송에 비해 세간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 9시 뉴스와 신문, 인터넷 뉴스의 경제면을 통해 여러 차례 보도되긴 했지만 혈육 간의 자극적인 상속전쟁에 비해, 국내기업 간의 특허소송은 너무 건전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안신은 서울 중앙지법에 엘시스와 엘텍전자를 대상으로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엘텍전자 계열사의 제품 다섯 가지와 엘시스의 제품 두 가지, 그리고 엘텍의 전지공장에서 생산한 시스템 파워팩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뿐만이 아니라 국외공장에서 제조된 엘텍 제품의 국내판매 금지, 국내제품 생산중단을 신청했다.
6년에 걸친 소송은 결국 부분합의를 통해 끝을 맺었다. 특허전쟁의 특성상, 시간이 흐를수록 소송의 목적은 달라졌다. 초반의 감정적이고 배타적인 특허권 행사에서 협상을 위한 특허권 행사로 변해갔던 것이다.
엘텍은 안신을 대상으로 381억 원의 손해배상액을 지급하라는 시시한 판결을 받았다. 안신과 엘텍이 양 사 간의 법적 다툼을 일부 합의하고, 기술 공유를 약속하게 되면서 애초의 예상보다 손해배상금액이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배상금 일부를 받는 조건으로 특허를 안신에 넘겼던 나는, 반사이익도 함께 줄어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특허로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국내특허로는 배상금 29억3천만 원을, 국제특허로는 사용료 58억을 정산받았다. 나름대로 부자라는 말이 아주 틀린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돈으로 내 앞에 쌓인 빚을 갚은 뒤, 이석 형의 목을 조르는 빚을 갚아 재기를 돕고, 미국에 있는 도일 형이 사출회사를 차리는 데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과거에 벌어졌던 모든 사건사고가 깨끗하게 청산되는 후련함을 느꼈다.
컵케이크 가게로 들어왔을 때 설탕이 달궈진 냄새가 확 풍겨왔다. 절로 입에 침이 고이는 냄새였다. 알록달록한 스퀘어 상자가 반복적으로 붙어 있는 벽면에는 조형으로 만들어진 컵케이크가 들어 있었고, 천장과 벽이 닿는 면마다 파티 플래그가 걸려 있었다. 이곳의 컵케이크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벌써부터 알 것 같았다. 분명 혀가 아리도록 단맛이 날 것이다.
“몇 개나 사는 거야?”
“스무 개만 살게. 선우 것도 사. 뭐가 맛있어 보여?”
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여희는 얼굴을 구긴 나를 보고는, 눈을 도르르 굴리며 다시 진열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캐롯 셋, 얼그레이 둘, 바나나 다섯 개를 추가 주문했다. 진열대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난 여희는 눈짓으로 카운터를 가리켰다.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나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조금 전에 말했지. 우리 싸우지 말자고.”
“아… 그랬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바짝 들러붙는다. 팔짱을 끼는 아이에게선 딸기 냄새가 났다.
“그래도 알아. 선우는 나한테 맛있는 걸 사주는 게 인생의 즐거움이잖아.”
“내 인생의 즐거움을 왜 네가 정하냐?”
“다 알아. 나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아는 여자애거든.”
“희한한 소리 하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서남부의 호수공원과 인접한 기숙학교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차에 올라탄 우리는 골든 게이트 다리 출구를 빠져나왔다. 뻥 뚫린 주니페로 대로를 달리며 우리는 틈틈이 조금 전에 디저트 전문점에서 사온 컵케이크를 먹어치웠다. 역시 예상대로 혀가 아리도록 단맛이었다.
버터크림으로 만든 꽃잎을 입안에서 살살 녹여 먹으며 여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올드팝을 목청껏 따라 부르다, 돌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요즘도 그거 적어?”
“뭘?”
“리스트.”
“리스트가 뭔데.”
“서로 짜증나는 부분 지적해주는 리스트.”
여희는 내게로 몸을 돌리며 상체를 가까이 붙여왔다.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뺨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운전대를 힘주어 잡고 부동자세로 정면만을 바라보며 나는 이 대화 주제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여희가 그 리스트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주한이 그걸 아무 곳에나 내버려둘 리가 없는데. 설마 여희가 우리가 없는 사이에 리스트가 적혀 있는 서류철을 발견한 걸까. 그렇다면 여희는 내가 목록에 휘갈긴 치사스럽고 민망한 내용의 불만을 모조리 읽었을지도 모른다.
“잠깐. 네가 그 리스트를 어떻게 알아.”
곤란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 여상한 투로 말했지만, 이어지는 여희의 말에 나는 분노하고 말았다.
“아빠한테 들었어.”
“뭐?!”
소리를 지르자 여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빠가 그걸 말했다고? 언제.”
“작년 여름방학에 한국 갔을 때.”
“뭐? 나한테는 일언반구 없더니. 뭐, 뭐라고 말했는데.”
“왜 그렇게 흥분해? 그럴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흥분하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 여희는 말했다.
“두 사람이 목록을 오래전부터 작성해왔다며? 아빠도 나한테 서운한 게 있으면 목록을 작성해 달래. 특히 나는 떨어져 지내니까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다 듣고 싶대. 뭐 굳이 그런 걸 듣고 싶냐고 물었더니 그게 우리 부녀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대.”
여희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선우는 엄청 많이 적었다며?”
“그런 것까지 말했어?”
“아빠는 두 가지 적고 나니까 적을 만한 내용이 더는 생각이 안 났는데 선우는 아직도 목록을 끝내지 못했다며. 아빠가 자기는 짜증 유발자라고 슬프다고 하던데?”
“어, 그래. 나는 아직도 현재진행중이야. 심지어 지금 막 목록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됐거든? 네 아빠를 고자질쟁이라고 적어놔야겠다.”
“어른들이 유치하긴. 거기 뭐라고 적었는데? 다 그런 식이야?”
나는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만다. 목록 속의 불만 중에는 가끔 성적인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시한 내용밖에 없어.”
나는 ‘서로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목록을 작성한 건 재작년 겨울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주한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의 목록 작성은 현재진행형이라기보다는 일시중지 상태에 가까웠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언제, 어떤 계기로 그 목록이 시작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목록의 가장 상단에는 세탁물을 처리하는 방법을 두고 불만을 토로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그런 글을 썼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강주한은 늘 나보다 먼저 일어났고, 내가 미안함을 느낄 만큼 부지런을 떨었다. 그는 심지어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용인들이 보기 전에 서둘러 홑이불과 속옷을 세탁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의 버릇은 나의 불만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습관일 터였다. 리스트에 불만을 적고 나면 주한은 효율적으로 민원을 처리하는 행정기관처럼 곧바로 그 불만을 접수해 처리하는 편이었다. 덕분에 나에게 목록작성은 일종의 유치한 습관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정말로 상처가 될 만한 말이나, 저주, 싸구려 발언, 감정에 휩싸인 기록은 일절 기록하지 않았지만, 쌓아놓으면 꽁해질 게 뻔하고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하기에는 모호한 이야기를 그곳에 털어놓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대범한 성미가 아니었고 조금은 눈치를 보는 데다가, 상대방의 모든 단점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큰 인물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런 주제에 평화주의자였다.
강주한은 버릇처럼 목록을 작성하는 나와는 달리 진지하게 기록을 남기는 편이었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셀 수도 없는 많은 리스트를 남겼지만, 그는 고작 두 개의 불만을 적었다.
그는 나와는 달리 오래 참았고, 불만의 열매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그만큼 그가 숙고하여 남긴 내용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묵직했다.
그는 우리 사이에 균열과 갈등의 조짐이 보일 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체념하지 않으려는 용도로만 목록을 사용했다. 그는 목록을 2년하고도 석 달 전에 마지막으로 작성했다. 내가 MGK 모터스의 취업 제안을 받아 미국행을 결정했을 무렵이었다.
그와 내가 공유한 ‘하선우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어져 있었다.
2. 강주한이 제안하는 모든 것들이 하선우는 반갑지 않다. 그의 제안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굴레이며, 굴욕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꿈에 젖은 사대주의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마지막 목록은 신랄하고 공격성이 짙었다. 주한은 꾸준히, 그러나 부담스럽지는 않게 내게 취업을 제안해왔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절대로 일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기에 과분하기까지 한 그의 모든 제의를 꾸준히 거절해왔다.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염려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달리, 그는 내심 나의 거절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가 내보인 공격성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왜 나를 오해하는지, 그가 어떤 동기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생각했다. 이유는 너무도 자명했다. 경쟁업체, 그것도 이역만리 떨어진 해외의 연구소에서 3년간 떨어져 지내겠다는 나의 선포에 그는 결국 폭발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목록을 통해 진심을 내보인 일은 아주 잘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속에서부터 곪아버리기 전에 농을 짜내고, 결국엔 아물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농담처럼 당시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꿈에 젖은 사대주의자.
그의 코멘트 밑에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작게 코멘트를 덧붙여두었다.
댁은 국수주의자들 덕분에 굴러가는 기업의 오너.
물론 이 말로 인해 우리는 또 며칠간 냉담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리가 남긴 목록은 여전히 과거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리는 증거를 조작하거나, 지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리스트를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 * *
나의 집은 강가와 드라이브 도로를 사이에 둔,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이곳은 대체로 풍요롭고, 고즈넉했으며 낮은 나무 울타리로 서로의 정원 사이에 경계를 세웠다. 대부분이 조경에 신경을 썼지만 소질이 없다는 이유로 애초부터 포기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중 내가 사는 집의 정원 풍경이 가장 황량했다. 전 입주자가 두고 간 잔디깎이 기계로 가끔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과 잔디를 정리해줄 뿐, 나는 정원을 가꾸려는 노력을 해본 적은 없었다. 각기 다른 크기, 방향의 컨테이너를 쌓아놓은 듯한 캔틸레버 구조의 세련된 주택은 혼자서 지내기에는 너무 낭비가 심한 공간이었다.
하루 종일 옆에서 시끄럽게 종알대던 여자아이가 사라진 공간은 훨씬 더 크고 살풍경하게 느껴졌다. 어젯밤 TV를 보며 간식으로 먹던 나초와 과카몰리, 팝콘 부스러기가 테이블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다못해 머리를 묶었던 머리끈까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이가 집에 왔다 가면 이렇게 흔적이 남았다. 주변을 어지럽히지도,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 주한과 달리 여희가 다녀가면 늘 이랬다.
어차피 주한은 화요일에야 도착을 하고, 나는 월요일부터 휴가였다. 그의 출장에 맞춰 일주일간 휴가를 낸 상태였기에 대청소의 날은 내일로 미뤄두기로 했다. 휴대폰을 챙겨 2층의 계단을 올랐다. 지금쯤이면 캐나다의 일정도 마무리를 했을 테니 연락을 넣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고객사는 잘 만났어요? 화요일에는 몇 시 비행기로 와요?」
빠르게 메시지를 넣고 옷을 벗었다. 그는 즉각 답장을 하는 편이었지만 읽었다는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체념하고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온수를 맞으며 샴푸를 짜냈다. 풍성하게 낸 거품으로 두피 속을 거의 뽑아낼 듯이 문질러대는데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타이밍 끝내주네.”
평소에는 조용하던 전화기가 꼭 머리 감을 때만 울린다니까. 실눈을 뜨고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을 때 기대하던 이름 대신 예상치 못한 이름이 떠 있었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선반에 올려둔 휴대폰 위로 손을 흔들었다. 스피커통화가 되도록 모션처리 해둔 덕분에 연결이 끊어지기 전에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도일 형?”
-잘 지내냐?
“아…. 네 잘 지내요.”
머리를 감을 수도, 전화를 끊을 수도 없어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어떻게 잘 지내는데? 또 그냥저냥 잘 지내냐?
“잘 아시네요.”
-일은 할 만하고?
“글쎄요. 인정을 받는다는 게 뭔지, 하루에 백 번씩 한국으로 돌아갈까 후회하지만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냉소적인 내 목소리에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욕실 안을 울렸다.
-언제 한번 놀러 오라고 전화 걸었어. 회사도 자리 잡혀간다. 마우스 사출하는 거래처도 하나 더 늘었어. 이번 달부터 네 계좌로 상환하는 돈도 더 늘릴 수 있을 것 같아.
“급한 거 없어요. 천천히 해도 돼요.”
-됐어.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래. 너 언제 시간 나냐. 아내가 너 보고 싶대.
“형은요. 형은 저 안 보고 싶고요?”
가늘게 뜬 눈 틈 사이로 거품이 들어갔다. 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가웠다. 급하게 손바닥에 물을 받아 눈가를 닦아내는 동안 전화 건너편에서 도일이 말했다.
-나도 보고 싶지. 내 인생에 아내 말고 너 같은 빛은 없을 거다. 근데 너 목소리가 멀다? 거기 비 와?
“아뇨. 지금 샤워 중이에요. 실은 머리 감고 있었어요.”
-그래? 그럼 나중에 통화하자.
“그럴까요? 제가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먼저 전화 좀 끊어주세요. 손에 거품 묻어서.”
짧은 통화를 끝내고 샤워기 밑에 섰다. 머리를 헹군 뒤에도 쓰라린 느낌이 가시지 않는 눈을 깜빡거리며 아픔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서서히 통증이 사라져간다. 벌게진 눈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오래도록 뜨거운 물을 맞고 있을 때였다.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는 기이한 느낌에 손을 내렸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도일과 그렇게 다정하게 통화하는 사이였습니까.”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휴대폰 음성 메시지 종류일까,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휴대폰이 전달할 수 있는 음성의 종류는 제한적이었다. 전파를 통해 수신된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나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감정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샤워실과 복도 사이의 열린 문가에 서 있었다.
“나도 선우 씨보다 연상인데 왜 나한테는 형이라고 안 합니까.”
그는 비뚜름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퉁명하게 가시를 세우지만 그 속에는 여유롭게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장난스러움이 있었다.
심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나는 너무 감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목을 억누르며 말했다.
“형 오셨어요?”
“참나.”
주한은 넥타이에 검지를 걸어 단번에 끌러내며 풀썩 웃었다. 도무지 나를 당해낼 수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짓는 그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걸치고 있던 정장 재킷을 차례대로 벗어 복도 층계의 난간에 걸쳐두었다. 마침내 신고 있던 신발과 양말까지 모조리 벗어 던져 완벽하게 알몸이 된 그는 욕실로 걸어 들어왔다.
“화요일에 온다면서요.”
물에 젖은 내 머리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마구 헤집으며 그는 말했다.
“미리 출국했습니다. 출장 일정은 그대로 진행되고요.”
웃음을 잔뜩 매단 얼굴로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주한은 내게 도장을 찍듯 입술을 꾹 묻었다 떼어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살과 닿고,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터무니없을 만큼 내가 그를 열렬하게 원해왔음을 깨닫는다. 그건 마치 진짜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움이 숨을 막는지도 모르고 살아오다, 해방감을 느낀 지금에서야 내가 얼마나 모자란 호흡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온몸으로 그를 호흡하고 싶은 욕구가 끓어올라, 그의 등을 감싸 안으며 샤워기 아래로 잡아당겼다.
“집에 오면 씻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이벤트가 기다릴 줄은 몰랐습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는데 까짓것 봉사 좀 하죠.”
젠체하며 말하지만 나는 이미 여유를 잃어버렸다. 아랫배가 욕망으로 쑤셨고 닿고 싶어서 애가 탔으며 기대감으로 전신의 모공이 바짝 조여들었다.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듬뿍 짜 거품을 낸 뒤에 그의 쇄골 사이에 비볐다. 주한은 마치 어디 해보란 듯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거품이 묻지 않은 맨어깨에 뺨을 기대고 나는 천천히 그의 몸에 샤워볼을 문질렀다.
거치적거리는 목걸이를 어깨 너머로 치워버리고, 쇄골과 가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겨드랑이와 등허리, 옆구리, 그리고 아랫배를 향해 움직일수록 풍성하던 거품이 물에 씻겨 사라져갔다. 반쯤 기립한 페니스를 문지르자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주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입을 벌려 귀를 깨물었다. 귓바퀴의 윤곽선을 따라 그의 혀끝이 농밀하고 질척하게 움직였다. 그는 침착하고 느긋하게 나의 아주 작은 한 부분만을 가지고 놀았지만, 그곳에서 뻗어 나온 욕망이 온몸을 근질거리게 만들었다.
거센 수압의 물줄기에 비누포말이 씻겨 내려가 샤워볼엔 거의 거품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노골적으로 그의 발기한 물건을 꽉 잡아 쥐고 흔들었다. 고개를 비틀어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여유롭던 주한의 눈빛에 열기가 가득했다. 그를 헉헉거리게 만들고, 빨리 싸게 만들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를 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샤워볼을 집어던져 버리고 맨손으로 그의 성기에 남아 있는 거품을 쥐어짜듯 단번에 주욱 훑었다. 자극이 강했는지 으음, 목을 긁는 소리를 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귀두가 목구멍에 닿았지만 헛구역질을 참고 좀 더 깊게 그를 안으로 넣었다. 그를 놓치지 않으려 엉덩이를 둘러 안고 가능한 한 삼켜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뿌리까지 머금는 일은 무리였다. 나는, 이런 종류의 일에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를 전부 소유하고 싶었다. 결국 손을 사용해 커다란 음낭을 주무르자, 쉰 목소리로 주한이 탄식했다. 점점 숨을 쉬는 속도가 빨라졌다. 배가 함몰할 때마다 윗배의 근육이 도드라지고, 어깨를 감싸 쥔 그의 손길에도 악력이 더해졌다. 나는 혀로 혈관이 도드라진 기둥을 사악 핥아 내렸다. 그의 허벅지 대퇴근이 단단하게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보다 빠르게 사정의 순간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에 서둘러 입술을 떼어냈다. 주한이 당장이라도 나를 쓰러트리고 싶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샤워기의 물로 대충 입안을 헹궈낸 뒤 퉤 뱉어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벽에 등 기대고 앉아요.”
그는 온순하게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상기된 붉은 뺨과 탁한 숨을 몰아쉬는 입술을 감추려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아무렇게나 쓱, 문질러 닦아냈다. 그는 해방을 원하는 얼굴로 재촉했다.
“빨리 와요.”
실은 나 역시 조금도 여유롭지 않았지만 조급한 그를 보자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그에게 다가가는 대신 뒷걸음질 치며 욕실 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잠깐만 세우고 있어요. 콘돔 좀 사올게요.”
“하선우.”
그는 이를 갈며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넘쳐나는 성욕에 참담함을 느끼고 있는 그를 방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 자신을 고문하면서까지 그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얼굴을 문지르는 그의 한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의 허벅지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벌린 채로 엉덩이를 띄워 앉았다.
구멍 주변을 문질러주려는 주한의 손을 치워내고 나는 그의 성기 끝의 뿌리 부분을 잡았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구멍 사이로 귀두를 위치시켰다. 근육을 이완시키며 엉덩이를 천천히 내렸다. 벌어지는 느낌이 섬뜩했다. 젤도 없었고, 풀어주지도 않아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을 부려서라도 생살을 느끼고 싶었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를 응시하며 몸을 더 낮추었다. 근육을 느슨하게 이완시키려 노력하지만, 내장 속을 거슬러 들어오는 살기둥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찰의 아픔과 불편한 배설감에 자꾸만 움찔움찔 속이 조이고, 점막이 찐득하게 위로 치솟았다. 한참의 시간이 걸려 마침내 주한을 깔고 앉았다. 속이 꽉 차는 압도감에 허벅지를 부들부들 떨며 몸이 크기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몸 안에서 뭔가 제자리로 돌아간 느낌이 나고, 하체의 떨림이 조금 진정된 뒤에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번, 허리를 띄우고 내릴 때마다 내장 속에 새로운 길을 내는 기분이 들었다. 벌려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너무… 커. 너무… 커어. 흐으…. 흐앗!”
매번 몸을 벌릴 때마다, 충격 가득한 감탄사를 연이어 쏟아냈다. 그의 성기는 나의 기억에서 즐기기 적당한 사이즈로 미화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감당하기 힘든 크기가 내 속을 잔뜩 휘저어놓고 있었다. 울고 싶었다.
오럴섹스로 이미 사정 직전까지 상승했던 주한의 해방은 빠르게 찾아왔다. 그는 내 허리를 쥔 손에 악력을 주며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울컥, 안에서 무언가 출렁이는 느낌이 여러 번에 걸쳐 났다.
“흐응.”
나른한 한숨이 절로 샜다. 단 한 번의 사정으로 삽입이 훨씬 수월해졌다. 크기는 버거웠지만 매끄러움을 얻자 통증이 줄었다. 그의 어깨를 잡고 나는 좀 더 본격적으로 엉덩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성기가 끈기 있게 점막에 들러붙으며 찌걱찌걱거리는 음란한 소리를 내고, 기분 좋은 곳을 긁고, 압박했다. 이미 한 번의 사정으로 과민해진 상태였던 주한은 비좁은 내벽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기를 자극받자 허벅지를 덜덜 떨며 낮게 신음했다.
그는 내 두 손을 나의 등 뒤로 잡아당겨 수갑을 채우듯 손아귀 안에 가두었다. 그대로 입술을 크게 벌려 다가온 그는 혀끝으로 가슴을 살짝 핥았다. 젖꼭지를 힘주어 빨다, 치아로 살짝 깨물다, 다시 모유를 빠는 아이처럼 힘껏 머금어 빨았다.
“흐으음… 아아….”
아프고 괴로울 정도로 빨고 비벼대던 그가 이번에는 혀끝으로 부드럽게 꼭지를 핥아 내렸다. 입술을 떼어낸 그는 부드럽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미치겠!… 으핫…. 학…… 으…아아응….”
쾌감이 정통으로 몸속을 들쑤셨다. 삽입은 점점 더 빨라졌고, 커다란 성기는 가격하듯 내벽의 온갖 곳을 찔러댔다. 나는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다, 자지러지는 비명을 쏟아냈다. 결국 가슴츠레 눈을 뜨고 그의 상체에 온몸을 기댄 채로 몸속 깊은 곳을 빠르게 들락거리는 좆을 무력하게 받아냈다. 미칠 것 같은 감각이 겹겹이 증폭되고, 증폭되었다. 빨리 이 감각에서 해방되거나, 아예 벗어나버리고 싶었다. 손으로 앞을 흔들어 사정하려는 그 순간, 갑자기 기다란 성기가 뿌리 뽑혀나가듯 단번에 쑥 빠져나갔다. 몸이 휙 일으켜 세워졌다. 무릎을 세울 힘이 없어 휘청거리는 몸을 끌어안고 그가 뒤에서 좆을 푹 찔러 넣었다.
“하으으…….”
다물어지지 못하고 바라져 있는 구멍을 벌려 끝까지 쑤셔 넣은 그가 나의 상체를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대로 1층 거실까지 걸어가죠.”
“…뭐, …흐으, 뭐라고요?”
“난 좀 개방적인 곳에서 낭만적으로 즐기고 싶은데.”
삽입을 한 그대로 은근히 자세를 낮추며 그가 물었다. 서로가 서로의 벗은 몸에 대해 아무런 자의식이 없고, 어떤 실험을 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까지 온 우리였지만 이건 좀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였다.
“낭만적…인 게 아니라 난…흐으…잡한 거…겠죠.”
귀를 깨물며 강주한이 말했다.
“그래서 싫다고요?”
“그, 그건 아닌데. 이거 먼저 해결…읏 …하고요.”
성기를 쥔 손을 흔들며 끙끙거리자 그가 허리를 팍, 쳐올렸다.
“그건 가면서 해결해도 되죠.”
허리 아래를 끈기 있게 바짝 들러붙으며 강주한이 웃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몸속에 파묻혀 있는 단단한 살덩어리의 질감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긴장으로 허벅지 안쪽이 단단해지며 구멍을 조이자 그가 탁한 신음을 흘렸다.
난잡하고 낭만적인 방법으로 지속될 긴 밤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신이 떨렸다. 넉 달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서로에게 퍼부으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것 같았다. 주한의 넘치는 성욕을 감당할 체력이 될까? 쓸데없는 걱정으로 멈칫거리는 나를 재촉하며, 등 뒤의 그가 한밤중의 쾌락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내가 계약한 이 집의 전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손수 집을 디자인하고, 인테리어까지 모두 전두지휘한 그는 목욕을 좋아하는 일본인답게 특히 욕실에 공을 들였다. 창가와 욕조 수면의 높이가 거의 동일하도록 바닥의 단을 계단처럼 만들고, 욕조 자체도 목재로 만들었다. 반사유리를 사용해 사생활은 보호하면서 외부 풍경은 바라볼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지만, 혼자 살면서 이 욕실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주한의 방문으로 방치해둔 욕실을 오랜만에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는 좁은 욕조에 게으르게 몸을 겹치고 드러누워 있었다. 집중해서 보지도 않는 TV를 소리 낮춰 틀어놓고, 꼼지락거리며 서로의 벗은 알몸을 만지작거렸다. 밤새 섹스를 하고, 게으르게 낮잠을 즐기고 또 욕조에서 한바탕 섹스를 나누자 오후가 모두 지나가버렸다.
밖은 5월의 날씨치고는 드물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너편 드라이브 도로 너머에는 샌 프란시스퀴토 강이 굽이쳐 흘렀고, 그 주위에는 우거진 수풀이 둘러쳐져 있었다. 유리창에 빗금을 치며 내리는 빗방울을 멍하니 지켜보는데 그의 손가락이 내 목에 걸린 옥가락지 펜던트를 살짝 잡아당겼다. 검지에 옥가락지를 걸고 엄지로 반지의 부드러운 면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반지를 낀 손으로 젖꼭지 위를 빙글빙글 움직이며 장난을 쳤다. 나는 파리를 내쫓듯 그의 손을 치워버리고 들고 있던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
냉장고를 뒤져 나온 음식이라곤 얼그레이 컵케이크와 누텔라 넛밤이 전부였다. 어젯밤 디저트 가게에서 여희의 강요로 샀던 케이크였다. 부스러기가 욕조에 떨어지지 않도록 유산지를 케이크 바닥에서 신중하게 떼어냈다. 여희에게 투덜거렸던 게 미안할 만큼, 나는 케이크를 무척 조심스럽게 아껴 먹고 있었다. 손가락에 찐득하게 묻은 누텔라를 쪽쪽 빨아 먹은 나는 기름진 손을 따듯한 물속에 비벼 닦았다.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았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요.”
“체력은 예전이 더 별로였던 것 같은데? 아, 여기 새치 생겼군요.”
주한이 정수리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새치라니, 기분이 묘했다.
그를 흘겨보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깨에 턱을 얹은 그가 애정이 묻어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운동을 해서 근육이라도 있지 예전에는 젊음만 믿고 아무것도 안 했잖습니까.”
“그게… 한국에 있을 때는 도무지 운동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지금은 좀 시간이 납니까?”
“한국보다는 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말하면 사대주의자가 되는 건가? 응?”
놀리듯 말하자 그가 곤란한 미소를 짓다 이내 내 등에 이마를 기대며 모습을 감춰버렸다. 꿈에 젖은 사대주의자. 이 주제에 대해서 더는 얘기를 꺼낼 생각이 없다는 듯 그는 항복을 선언했다.
“안 그래도 여희가 젊게 살고 싶으면 베리류 과일 먹으라고 하던데요.”
“젊어지고 싶습니까?”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씩 사내 헬스장을 찾고 있었다. 동료의 추천으로 단백질 보조제를 먹었으며, 각종 영양제까지 챙겨 먹고 있었다. 그러나 건강을 유지하는 목적일 뿐 젊어지겠다는 각오로 덤벼든 일은 아니었다. 주한이 물속에서 아랫배를 천천히 매만졌다. 근육으로 굴곡진 아랫배의 느낌이 신선한지 그는 손가락으로 근육을 하나씩 눌러보기도 했다.
“글쎄요. 그런 건 별로 생각 안 해봤는데. 젊어지고 싶지도 않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금보다 잘 살 자신 없거든요.”
나는 수상쩍은 기분을 느끼며 손바닥으로 욕조의 물을 튀겼다.
“왜요. 내가 늙으면 딴 놈으로 갈아치우게?”
그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나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조금 지나칠 수도 있는 짓궂은 농담. 눈을 흘겨보았지만, 등 뒤에 앉아 나를 안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가만히 물을 튀기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우야.”
그가 나직이 나를 불렀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나는 괜히 억울해.”
나의 뒷목에 이마를 기대며 그가 속삭였다. 그의 숨소리가 힘없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나는 열없이 붉어지는 얼굴을 느꼈다. 온몸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새삼 놀라웠다. 이 나이가 되고도 사랑에 다시 또 빠져들 수 있다니.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그와 떨어져 지내게 될 10일 이후의 생활이 벌써부터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벌써부터 조급증이 치밀었다.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주말에 시간 되는 거 맞죠? 기사 보니까 토요일까지는 계속 일정이 잡혀 있던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 일정 외에는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죠?”
“네. 일요일부터 쉴 겁니다.”
“여희는 토요일부터 만나는 줄 알고 완전 기대하던데. 물론 나도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고요.”
어느새 기분이 풀린 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낮에 이미 통화했습니다. 일요일에 같이 육개장 먹으러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공식 일정이 기사로 보도된 모양이군요. 개인 일정이 섞여 있으니 자세하게 보도하지 말라고 지시했었는데.”
나는 며칠 전에 그의 출장에 관한 내용을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접했었다. 기사의 내용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강 부회장은 평소 권위적인 활동을 불편하게 여기는 만큼 이번 캐나다, 미국 출장 역시 전용기가 아닌 민항기를 통해 조용히 출국하였다. 그는 전자박람회 참석 기간 동안 엘텍의 부품을 구매하는 주요 고객사들과 비즈니스 미팅을 가지며, 현지의 사업장을 방문해 사업부문장들과 미주시장 공략계획을 의논할 예정이다. 캐나다의 고객사를 방문한 후, 미국에서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프랑스의 현지 사업장을 방문할 계획이다.
그의 이름과 박람회에 관한 키워드로 검색 영역을 좁히자 최신 기사로 범위가 줄어들었다. 개중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기사도 있었다. 그의 출장 패션을 분석한 기사와 함께 출장을 가는 엘텍 내의 핵심 인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특히 어떤 기자는, 그가 어깨에 메고 있는 서류가방이 얼마나 낡았는지를 집중 보도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나는 반골 성향의 인간도 아니고, 웬만한 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성격이었지만, ‘비즈니스 활동의 기록이 새겨진 낡은 서류가방과 함께 강 부회장은 오늘도 전 세계 각지의 고객사를 만날 것이다.’ 같은 아부성 기사를 접할 때면, 대놓고 주한의 앞에서 기사를 낭송하고 까불거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데서 오는 야릇한 만족감을 즐기기엔 우리가 함께 있을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끝내주게 행복한 추억만 만들고 가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던 것이다.
강주한의 낡은 서류가방에 대한 기사를 머릿속에서 삭제하시겠습니까? 머릿속에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어차피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이 기사를 읽은 즉시 야유를 보냈을 테니 나까지 그 야유에 함성을 보탤 필요는 없지 싶었다. 나는 결국 긴 고민 끝에 Yes 버튼을 클릭했다.
* * *
따듯한 물이 미지근하게 식을 때까지 게으르게 욕조에서 몸을 불리던 우리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떠났다. 주한은 외출할 때면 늘 착용하는 뿔테 안경을 쓰고, 내 옷장에 걸려 있는 옷 중에서 그나마 사이즈가 가장 큰 체크남방을 티셔츠 위에 걸쳤다.
앞머리를 내리고 이전에 내가 사두었던 황토색의 잭필드 면바지까지 갖춰 입은 그는 팔로알토에서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연구원들 중 하나로 보였다. 어딘가 내향적이고, 몽상가의 기질을 가졌을 것 같은, 친구가 적은 부류의 사내. 잘생겼으나 본인이 잘생겼는지 모르고, 자신보다 한참은 덜떨어진 상대들 속에 뒤섞여 큰 꿈 없이 소박하게 살아갈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왜인지 뿌듯한 느낌이 치밀어 올랐다. 결국 그 몰래 사진을 몇 장이나 찍어두었다.
거센 비가 내린 후 주택가의 공기는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바람에 섞인 가랑비에서 젖은 풀냄새가 났다. 거미줄처럼 얼굴을 감싸는 습기 찬 바람을 맞으며 차고로 향했다.
차고에는 두 대의 차량이 있었다. 왼쪽은 출퇴근용으로 사용하는 평범한 SUV 차량이었고, 오른쪽은 시중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디자인의 차량이었다.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딥블루 색상의 차는 무선마우스를 닮은 매끈한 외형을 하고 있었고, 후면에 MGK 모터스의 상징인 바람 모양의 광라이트 앰블럼이 박혀 있었다.
주한은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는 운전석 문으로 다가가 은색의 단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외부의 문에 손잡이가 돌출된 형태가 아니었기에 은색 바를 터치한 후에야 손잡이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겨울에 언론에 공개한 시제품이죠? 모델 이름이 W-Zero였고. 폐쇄 트랙에서 시험 중인 줄 알았는데.”
“봄부터 100대가량의 시제품을 생산해서 일반도로에서 주행 시험 중이에요. 뭐 그렇다고 이렇게 차고에 처박아놓을 차는 아니죠.”
운전석으로 마음대로 들어가는 주한을 곤란한 눈길로 쳐다보며 나는 뒷말을 이었다.
“경쟁업체 오너한테 보여줄 만한 차도 아니고요.”
나는 찝찝한 마음에 출퇴근용으로 사용하는 SUV 차량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차 타고 가요.”
“시제품 타고 가죠. 어차피 언론 공개도 했고 도로주행도 한다면서요.”
주한은 이미 운전석에 앉아 안전띠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그는 고집스럽게 문까지 닫아버리고 내가 조수석에 타기를 기다렸다.
영 찝찝한데. 뒷목이 당기는 느낌에 차 안의 그를 난감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공개한 제품이니까 괜찮겠지. 만에 하나 차를 끌고 시내에 나갔다가 동료에게 들킨다 하더라도 강주한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기합리화라는 걸 알면서도 귀찮은 일이 있을까 싶어 조수석에 올라탔다.
주한은 차량의 내부를 바쁘게 둘러보고 있었다. 의자를 뒤로 눕혀 각도를 확인했다가, 대시보드의 재질을 만져보고 글러브박스를 열어 내부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정신없이 구는 주한을 대신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이미 W-Zero에 대한 보고서 받았을 거 아니에요. 뭘 그렇게 자세히 봅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자존심 싸움처럼. 이럴 때면 나는 하선우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가 필연적으로 떠오르고 만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성한 두 번째 목록과 그가 작성한 목록 밑에 앙심을 품고 작은 메모를 남긴 나의 코멘트 역시도. 꿈에 젖은 사대주의자와, 국수주의자들 덕분에 굴러가는 기업의 오너. 그 메모들이 마음에 서걱서걱 걸린다.
시동이 걸리자 클러스터 계기판과 센터페이스가 있어야 할 중앙의 대시보드에 불이 들어온다. 18인치 터치 가능한 디스플레이에는 공조 조명 등, 자동차의 기능을 제어하는 모든 창의적인 시도들이 담겨 있었다. 주한은 시동을 건 뒤에도 한참 동안 제어판의 세부기능을 살펴보았다.
“국내 차량에도 이미 도입했잖아요. 별 차이 없을 텐데?”
주한은 애매한 태도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국수주의에도 사대주의에도 물들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땅덩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주한의 이런 행동에 바라지도 않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이성적이지 못한 너그러움을 베풀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느 곳에도 발을 걸치지 않은 상태란 결국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내가 져주는 수밖에.
“터치 디스플레이는 엘텍 제품이라면서요?”
핸들을 한 손으로 움직여보던 그가 내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내 말의 의미를 가늠해보듯 눈을 맞추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조금 전 은근한 자존심의 날을 세우며 오만하게 침묵하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W모델의 한 해 판매 예상을 4만 대로 잡은 걸 보면 주문량이 적은 모양이더군요.”
“아… 네. 뭐, 작은 회사라 생산능력이 안 따라줘서 그렇지 앞날은 창창해요. 대기 수요는 엄청나거든요?”
나는 너무 발끈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트의 좌표를 불러왔다. 주한은 핸들을 움직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압니다.”
차고를 빠져나와 주택가의 도로를 달리다 이차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는 내게 물었다.
“자동주행 모드로 변경해도 되겠습니까?”
“네, 해봐요.”
디스플레이를 터치해 주행모드를 변경하고 그는 핸들을 잡았다. 인터넷 업체와의 합작으로 고속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자율주행 기능이 저속과 고속을 오가며 제한적으로 사용 가능해진 것이 이번 W시리즈의 가장 큰 차별기술이었다. 그는 핸들에서 손을 거의 떼고 주행의 느낌을 감상했다.
“자동주행 기술은 엘텍에서도 진행하고 있잖아요.”
“지난달에 모델 L로 150만 마일 주행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MGK나 구글에 비하면 멀었지만, 어쨌든 엘텍도 구글에서 라이선스를 공급받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구글만큼 자동주행에 기술이 앞서는 회사는 없으니까요. 자동주행 기술면에서 엘텍은 한참 멀었습니다.”
“뭐 어때요. 배터리 충전기술은 전 세계에서 엘텍이 가장 앞서잖아요. 아… 지겨워라. 적당히 좀 해요. 그래 봤자 죽어나는 건 나 같은 공돌이랑 중소기업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부드러운 어조로 타박한 나는 좌석에 몸을 푹 파묻으며 팔짱을 꼈다. 물론 내 말은 진심 반, 농담이 반 섞여 있었다. 나 역시도 비즈니스 세계에 적당히라는 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불안에 깊이 빠져 부심하고 있으면 그 불안은 터무니없고 강력한 것으로 둔갑되어 세상으로 확산되곤 한다. 나는 그 불안이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고, 침묵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다면성을 띠고 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한 면은, 여전히 강주한이 가진 한 면의 허물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나는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 견고하게 그에 대한 애정을 키워나가고, 나답지 않게 처절한 크기의 외로움을 쌓아나갔다-누구를 사랑하는데 멜랑콜리한 감정이 따라다닌다는 건, 그건 좀 우울한 일이었다. 어쨌든 인간이 아무리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해도, 존재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어두운 부분을 부정하는 나도, 그를 사랑하는 나도 하나였다. 나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애틋하고, 나답지 않게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적자생존과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란 그저 태평한 투정 정도였다. 당신이 지나치게 애쓰고 불안해하면 결국 죽어나는 건 나 같은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적당히 좀 살자고. 나의 천연덕스러운 투정들은 날카로운 독설 없이도 그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주한은 전방을 주시하며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부끄러울 때 예의 짓곤 하던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스티어링을 꺾고, 복원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이에 마트 주변 거리에 도착했다. 블라인드 코너에서는 경고음을 울리며 운전 통제권을 운전자에게 넘겨주었다가, 코너를 지나 자동모드를 터치하자 좁은 주차장 안에서 W는 능숙하게 자동주차를 완수해냈다.
차에서 내려 마트로 가는 동안 주한은 팔짱을 끼고 말없이 걸었다. 그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럴 때는 내버려두는 게 낫다는 걸 알기에 나는 눈치를 보는 대신 저녁으로 뭘 먹을지를 고민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은 친환경 유기농 제품만을 판매하는 대형 체인 마켓이었다. 주말은 늘 판촉행사로 번잡한 분위기였는데 비가 내린 월요일의 마켓은 한산하다 못해 텅 빈 느낌이었다.
집에서 차를 타고 10분 내외의 거리, 직장에서도 차를 타고 5분 내외의 거리에 있는 마켓이라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이곳에 들러 장을 보곤 했다. 대부분 조리된 음식을 샀고, 가끔 여희가 찾아온다고 통보를 하는 주에는 과일이나 스테이크용 고기, 해산물을 구매하기도 했다. 누군가 집으로 찾아올 때 요리를 대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고, 그 누군가가 여희라면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고작해야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아보는 수준이었고 맛있기보다는 먹을 만한 정도의 음식을 만드는 게 다였지만 여희는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맛있게 먹어치워주었다. 덕분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꾸준히 구독하는 요리 유투버도 생겼고, 사용법도 모르는 특이한 소스나, 외형이 독특하고 아기자기한 통조림을 모으는 게 취미가 되었다.
물론 나의 음식 취향은 여전히 달기보다는 짜고, 싱겁기보다는 매운 종류의 자극적인 음식이었다. 그러나 살면서 라면만은 먹지 말라는 할머니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란 여희는 라면을 거의 독극물 수준으로 생각했기에 한밤중에 내가 끓이는 라면을 소 닭 보듯이 했다. 버터와 크림이 잔뜩 들어간 케이크는 달고 살면서 라면을 먹지 않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여희가 오면 늘 건강식으로 식사를 차리려고 노력을 했다.
나는 할 수 있는 음식도 제한적이고 요리에 한해 모험을 펼치는 편도 아니라, 카트에 담는 목록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선식품 코너에서 아보카도와 양파, 샐러드용 야채와 깎아놓은 과일 모둠을 골랐다. 평소에는 이 수준에서 장보기를 끝내고 조리식품을 파는 코너로 넘어갔겠지만 주한이 오기도 했으니 뭔가 요리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걸 살 겁니까?”
어느새 관심이 생겼는지 내 손에 들린 고기를 쳐다보며 주한이 물었다.
“네.”
나는 스테이크용 안심을 사이에 두고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5센티미터와 3센티미터 두께의 고기 중에서 어떤 걸로 스테이크를 굽는 게 좋을지, 선택이 쉽지 않았다.
“스테이크 구울 줄 알아요?”
“나 스테이크 잘 구워요. 여희가 먹어봤을 텐데 말 안 해요?”
팔짱을 끼고 내 손에 들린 고기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그가 천천히 눈을 굴렸다. 필시 여희로부터 무슨 말을 들은 눈치였다.
“되게 정성껏 만들었는데. 이상하네? 그날 배고프다고 말해서 두 번이나 만들어줬거든요. 냉장고에서 몇 시간 숙성시키고 미디움 레어로 적당히 잘 익혀서 줬어요. 싹싹 비웠는데 별말 안 했어요?”
그는 팔짱을 풀지, 말지 고민하는 느낌으로 상체를 들썩거렸다.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허둥대는 게 둘이 내게 떳떳하지 못한 대화를 나눈 게 분명했다. 나는 양손에 고기를 든 채 그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비켜서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그는 난감한 얼굴로 이실직고했다.
“겉이 좀 탔…고 간이 짜긴 했지만 먹을 만했다고 하더군요.”
“…그건 너무 두꺼운 고기로 요리해서 그랬나 봐요.”
“만들어준 정성이 좋았다고 했습니다.”
내 기억 속의 여희는 스테이크를 무척이나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딱히 맛있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던 것 같다. 여희는 늘 걸신들린 듯 배가 고픈 아이고, 맛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으니 내 멋대로 추측했던 거였다.
나름대로 억울한 점은 있었다. 두꺼운 고기에 간이 배게 하느라 소금을 듬뿍 뿌려 몇 시간이나 숙성시키고, 겉면을 익히는 시간을 늘렸던 게 문제였던 것이다.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주한이 내 어깨를 한 손으로 둘러 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진열대 속 스테이크 고기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고기는 내가 들고 있는 고기의 중간 사이즈였다.
“있죠, 나는 염장한 고기로 숯을 만들어도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주한은 겸연쩍은 태도로 카트를 밀며 고기 코너 밖으로 걸어가버렸다. 역시 뭘 좀 아는 사내답게 그는 나의 의기소침을 단칼에 일축해버렸다.
* * *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마트를 나오자마자 차 안에서 마신 맥주 한 캔의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분 좋은 상승감이 하늘을 찌르려 했다. 한 손으로는 느슨하게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있는 주한은 자동주행 모드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곡률이 있는 도로에서는 좀 불안정해지는군요.”
“그래요?”
그가 하는 말의 내용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나는 진지한 주의를 기울이는 척 되물었다. 깍지를 낀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규모 있는 공용 주차장이 있는 목적지 근방이었다. 식당 앞에는 주차할 자리가 없어 주한은 공용 주차장으로 핸들을 꺾었다. 그리고 자동주차 기능을 다시 한 번 시험해보려는 듯 주차기능을 실행했다.
한 손을 다시 나에게 내준 채로, 그는 디스플레이 화면 속 후방카메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머리를 내린 그는 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고,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을 옷차림을 한 그는 영어식 표현대로 어딘가 너디해 보였다.
지금의 그는 무해하기 그지없는 인상이었다. 어딘가 젊은 청년의 분위기를 풍기는 옆얼굴을 바라보다 보니 동그랗고 모양 좋은 뒤통수를 쓰다듬고 싶어졌다. 아니, 키스하고 싶어졌다.
“잠깐 나 좀 봐봐요.”
주한이 내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디스플레이의 조도를 확 낮춰버린 뒤, 주한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서로의 코끝이 살짝 닿고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느긋하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숨을 죽이며 마치 맛을 보듯 그의 윗입술을 빨았다. 당황하던 그는 이내 유순하게 입을 벌리고 나를 받아들이다, 좀 더 능동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혀를 섞는 소리가 축축했다. 술을 마시면 적극적으로 변하는 나를 아는 주한은 입을 맞추는 동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혈관이 확장되고 피가 솟는 느낌이 아찔했다. 아랫배가 저릿하게 당겼다. 주차가 완료되고 우리의 길었던 입맞춤도 끝이 났다. 나는 그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섹스 또 하고 싶다.”
은은한 성욕이 아랫배에 뭉쳐 그를 욕망하게 했다. 그를 유혹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 말에 주한은 이미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돌아갈까요?”
그런 말을 하는 주한이 한창때의 젊은 청년처럼 느껴져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밤을 새워도 무리가 없는 청년이 아니고, 오늘 끼니로 때운 것은 컵케이크 한 조각이 전부였기에 어떻게든 열량을 보충해둬야 했다.
“배고파서 안 돼요. 저녁 먹고 집에 가서 해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잡고 있던 그의 뒷목을 놓아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찾은 곳은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스 음식점이었다. 가격은 비싸지만, 맛과 서비스 면에서 평이 좋아 주말에는 예약 없이는 이용하기 힘든 곳이었다. 오늘은 예약을 걸어놓지는 않았지만, 평일에 비도 왔으니 손님이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찾아왔다. 그러나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오늘은 예약 없이 이용이 불가능하다는 매니저의 거절을 들어야 했다.
“주변에 레스토랑 많아요. 뭐… 맛은 여기만 못하지만.”
“끼니만 때우면 됩니다.”
이미 다른 걸 먹고 싶은 주한은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으로 대충 허기만 채워도 상관없는 눈치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던 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중얼거렸다.
“여기 진짜 맛있는데 외식할 줄 알았으면 예약해둘 걸 그랬어요. 내일은 여기서 저녁 먹어요. 오늘은 맞은편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죠. 해산물 괜찮….”
갑자기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뒷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만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익숙한 붉은 얼굴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식사하고 가는 거야?”
회사 동료인 케빈 힘스였다. 염소 같은 흰색 수염을 기른, 둥실한 인상의 그가 나가려는 나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회사 동료를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식사를 하러 왔는지 그는 옷도 제법 근사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아니. 예약을 못해서 자리가 없어. 그냥 가려고.”
“누구?”
힘스의 곁에 있던 여자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와 주한을 번갈아 보았다. 빨리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서누 하. 편하게 써누라고 불러주세요.”
외국에서 낯선 방식으로 내 이름을 소개하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이번에는 주한에게 닿았다. 설마 주한을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심장이 철렁했다. 초조하게 힘스의 눈치를 볼 때였다.
“준. 준 킴.”
만나서 반갑, 습니다. 서툰 느낌의 영어로, 심지어 아주 단답형으로 주한이 대답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영어가 서툰 아시아인의 느낌이었다.
나는 벌어지는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그를 향해 돌렸다. 그의 순발력에 감탄하는 마음보다 그의 뻔뻔함에 놀라는 마음이 더 컸다.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오, 애매한 감탄사를 흘렸다. 영어가 서툰 나의 동행인에게 어떤 친절을 베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미소만 한 것은 없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케빈 아내인 베라예요. 우린 예약했는데 불편하지 않으면 같이 동석해요. 딸아이랑 같이 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안 오겠다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자리가 남아요. 4인석으로 예약했거든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힘스의 아내가 붙임성 있게 내게 제안을 했다.
“괜찮아요. 이럴 때일수록 두 사람이 데이트해야죠. 우린 가볼게요.”
주한의 어깨를 팔꿈치로 슬쩍 밀어내며 나는 맞은편의 식당을 가리켰다. 그러나 주한은 묘하게 버티는 느낌으로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힘스의 아내가 말했다.
“둘이 하는 데이트가 무슨 재미가 있나요? 같이 식사해요. 여보. 여보도 괜찮지?”
“그래. 서누, 같이 식사하면서 얘기나 나누지?”
“남편 회사생활 좀 들려줘요.”
거절하지도, 긍정하지도 못하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자 분위기가 서서히 동결되기 시작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힘스의 아내가 결국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동행인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런 이유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말을 못해도 나름대로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 즐거울 수 있어요. 내가 젊을 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언어를 가르치는 어학원 강사 일을 했었거든요. 이래 봬도 언어교정 자격증도 있고요.”
그녀는 자부심 가득 찬 표정으로 주한을 보았다.
“준 킴, 저녁 식사 괜찮죠?”
그녀는 스프를 뜨는 시늉을 낸 뒤 레스토랑을 가리켰다. 계속 그녀의 얼굴과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주한은 스프를 뜨는 동작을 따라 한 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굿.”
정말이지 환장할 것 같았다.
영국 출신인 힘스는 나와 같은 직급이긴 했지만, 일하는 분야가 달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는 엔지니어였다. 깐 달걀 같은 번드르르한 피부의 그는 상급 CNC 프로그래머였다. 공작기계에 기계언어로 수치를 작성하여 공작물을 가공하는 일을 하는 그는 시제품을 생산하는 주요직급 중 하나였다. 제조조립 유지와 부품 수리에 대해 전반적인 실무능력을 가진 유능한 인재였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문어요리를 우물우물 씹어 넘긴 힘스가 식전 빵을 집어 들며 말했다.
“차 끌고 왔던데.”
“어?”
“주차장 보니까 차 끌고 왔더라고. 자동주행으로 왔어?”
“어…? 으, 응.”
“킴이랑 같이 왔지? 시승 소감은 어땠는지 좀 물어봐줘.”
소스를 푹 찍어 입안에 빵을 집어넣으며 힘스는 물었다. 나는 차마 힘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매하게 눈만 굴리다, 주한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한국어로 물어보았다. ‘시승소감 어떠냐고 묻는데요.’ 내 말에 주한은 뻔뻔하게도 눈을 치뜨며 ‘시승?’ 하고 되물었다. 나보다 훨씬 더 고급 영어를 구사하면서도 그는 상황극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이 웃지 못할 촌극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힘스 부부의 기대에 찬 시선이 주한에게로 향했다. 주한은 생각에 잠긴 신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근엄하게 다문 입술의 곡률은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은근한 각도로 장난스럽게 휘어져 있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시승 후기를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기대에 부푼 힘스를 위해 그대로 주한의 말을 번역해 들려주어야만 했다.
“내연기관차와 크게 다른 점을 모를 정도로 회생제동 반응이 자연스럽대. 완전히 저속으로 달린 게 아니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모터 소음도 적은 편이라 훌륭하고. 코너링 돌 때 차체가 쏠리는 느낌이 적었는데 무게중심이 얼마나 낮은 건지도 …궁금하대.”
예상외로 전문적인 대답과 질문이 되돌아와 힘스는 먹던 빵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는 놀란 눈으로 주한을 쳐다보며 기름진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음. 맞아. 무게중심이 아주아주 낮은 편이지. 차에서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배터리를 바닥에 깔았으니 뭐, 그 덕을 톡톡히 봤지. 그 위치가 20인치가 좀 안 되거든.”
힘스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횡가속 시험결과 0.94까지 버텨냈거든. 주행 중에 전복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나는 힘스의 말을 그대로 주한에게 전해주었다. 처음과 달리 힘스는 주한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준 킴, 그를 한국에서 관광 온 외사촌으로 소개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한은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진행하고 연설을 하는 타입의 최고경영자도, 대외적으로 국외에 얼굴이 알려진 CEO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힘스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실리콘밸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옷차림의 영향이 컸다. 힘스는 주한을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인물이라고 단정 지은 것 같았다.
“미국엔 무슨 일로 왔는데?”
“관광차 왔어.”
“아아, 휴가 냈다고 했지. 킴은 무슨 일을 하는데? 자동차 관련 업계에서 일하나?”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장, 장사해.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뭐… 그런. 전자제품? 대형 매장… 영업 팀장 뭐… 그런.”
주한의 시선이 내 얼굴 위로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힘스와 베라가 굉장히 의외라는 듯 감탄을 했다.
“자동차에 굉장히 관심이 많나 봐요?”
떠듬떠듬 주한에게 베라의 말을 번역해주자 주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을 들썩이며 한참을 소리를 죽여 웃은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괸 그가 나를 은근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가장 관심이 많은 분야는 하선우고, 주력 분야도 하선우’라고. 아랫입술을 꾹 깨문 나는 으르듯 말했다.
“티 나게 굴지 좀 마요.”
그가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도장을 찍듯 나를 힘주어 바라보았다. 힘스와 베라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주한과 내가 심술궂은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대화의 주제는 인근의 맛집과 관광지, 6월에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축제에서 회사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하필이면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이야깃거리이자, 주한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주제였다.
자동주행 기술은 게임에서 사용하는 계산엔진은 물론, 소프트웨어의 자기학습 능력, 제스처를 인식하는 센싱기술 등 그 밖의 수많은 첨단산업이 복합적으로 융합된 기술이었다. 그만큼 수많은 회사가 물밑에서는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외부에서는 협력의 형태로 기술개발을 추진해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충전 분야를 연구개발하는 디렉터였고, 힘스는 자동차의 외형을 가공하는 엔지니어였다. 우리 두 사람은 자동주행 분야에 관해서는 외부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어쨌든 최근 회사가 가장 주력하는 분야가 자동주행이다 보니 이야기의 주제도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번에 제럴드 모쇼노프가 다른 회사로 옮긴다는 소문 돌던데.”
크림이 잔뜩 들어간 고기요리를 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제럴드가? 어디로?”
“엘텍으로.”
사레들지 않으려 급하게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안 그랬으면 코로 무언가를 잔뜩 뿜어낼 판이었다. 제럴드는 연구소에서 자율주행 기술을 연구하는 핵심 인력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BMW와 엘텍 중에서 간을 보고 있었나 봐. 엘텍이 돈을 더 불렀나 보더라고. 엘텍이 요즘 관련 경력자들을 무더기로 채용해간다고 들었어. 우리 회사에서만 세 명이었지. 하긴, 뭐 네 상사도 엘텍에서 데려온 연구원이니 억울하다고 할 수만은 없지.”
코웃음 치며 힘스는 푹 익은 양고기를 나이프로 잘게 썰었다.
“지난번에 스탠리가 나가고 나서는 부사장이 뭐라고 독설했는지 알아? 엘텍은 MGK 모터스가 버린 것만 주워 모으는 쓰레기통이라고 비꼬더군.”
끌끌 웃으며 그는 포크로 부스러진 고기의 잔해를 긁어모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동주행 기술에서 엘텍은 우리의 발끝도 못 좇아올 거야. 부사장이 지난 언론발표회에서 인터뷰했던 말 기억하나? 레벨5 기술이 적용된 W시리즈를 3년 안에 실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었잖아. 엘텍은 지금 레벨2에 간신히 턱걸이나 했나 모르겠군.”
“글쎄… 지금쯤이면 레벨3 정도지 않을까.”
“그래, 높이 쳐준다고 쳐도 레벨3. 근데 그 수준으로 끌어 올린 건 엘텍이 아니라 인터넷 검색업체와의 협업 덕분이었지. 엘텍은 아웃소싱 맡은 것밖에 더 있어? 엘텍은 오토브레인 운영체제의 영원한 위탁처리 업체, 남 뒤나 닦아주는 수준으로 남을 거야. 내 장담하지.”
“그건… 너무 속단하는 거 아냐? 난 모르겠는데. 주행기술도 연구 중이라던데….”
“꿈 깨. 거기 걸 누가 써? 아아, 한국 사람들? 써누, 같은 한국이라고 편드는 거야? 언제는 국수주의 정신 때문에 한참은 멀었다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골리며 힘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힘스를 마주 볼 수 없었고 주한의 얼굴은 더더욱 볼 수가 없었다. 음식을 먹는 일에 집중하는 척 치즈에 절인 보리만 깨작깨작 먹어치웠다.
이중스파이가 된 기분이었다. 경쟁회사를 깎아내림으로 스스로의 위신을 세우는 건 우리들에게는 아주 일반적인 대화방식이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주한은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도 귀를 열어두고 힘스의 이야기를 모조리 귀담아듣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힘스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저 남자에게 얼마를 주면 쓰레기통으로 거취를 옮길지 궁금하군요,’라고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내게서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그는 홀로 말없이 식사를 했다. 지루한 대화가 한참을 더 이어지고, 주한은 태연하다 못해 새침하게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양고기, 도미 요리 새로 주문해서 포장해가죠. 음식은 마음에 드니까.”
나는 손에 쥔 스푼을 내려놓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맛이 완전히 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러야만 했다.
* * *
텅 비어 있던 냉장고를 채워 넣으며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주한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종이봉투에서 신선식품과 실온에 보관할 식재료를 구분해 내게 건네는 중이었다. 스테이크용 소고기와 연어, 대용량 사과주스와 탄산, 그리스 음식점에서 주문해온 요리 따위를 냉장고에 집어넣고 나머지 실온재료를 바구니 속에 담아 정리를 끝냈다.
“과카몰리 만들어줄까요? 나초랑 먹으면서 TV 봐도 좋고요. 아니면 카드게임이나 바둑 둘까요?”
나는 봉투를 줍는 강주한을 향해 애써 명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기분을 신경 쓰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종이봉투를 반으로 접어 찬장의 구석에 집어넣은 주한은 난방을 벗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피곤할 텐데 쉬어요.”
내가 그에게 원했던 반응은 이게 아니었다. 나는 나의 위로가 그에게 진심으로 닿고, 조금 전의 일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그가 건강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속이 애달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주한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그의 기분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입을 완전히 다물지도 않았고, 들뜬 사람처럼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차 안에 갇혀 있는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가 나눈 대화는 대부분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떠다녔다. 그는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체념한 듯 기분을 추스르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로부터 연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평소라면 이런 순간은 상대방을 조금만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되었다. 상대방이 나를 돌아볼 때까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도록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었다.
생각해보니 집에 오면 섹스를 하자고 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저녁 식사를 하기 전,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성욕이 동해 충동적으로 뱉은 말일 뿐이었다. 성욕은 알코올의 기운이 사라진 직후 증발해버렸고, 지금 내 정신은 말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분위기를 해소해야 했기에 주한이 들어간 욕실의 문을 열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난 안 피곤합니다. 지금 피곤해요?”
주한은 욕실에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짜고 있었다. 그는 칫솔을 입에 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아느.”
“그럼 섹스할래요?”
내 어조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는지 그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천천히 양치질을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입안에서 하얀 거품의 양이 풍성하게 늘어났다. 그는 거품을 베어 문 상태로 인상을 조금 구겼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그 탓에 조금 움츠러든 나는 조금 전보다 소극적으로 물었다.
“그것도 아니면… 술 마실까요?”
나를 직시하며 주한은 여전히 양치질을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적막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특히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건, 정의 내릴 수 없는 확신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말 없는 대치 상태를 깨버린 건 주한이었다. 그는 수도를 틀어 입안에 가득한 거품을 뱉어내고 몇 번이나 입안을 헹궜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입안에 공기를 넣어 볼을 공처럼 부풀렸다가, 푸우 공기를 내뱉었다. 어쩌면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언론, 그보다 더 과격한 인터넷 여론을 통해 엘텍을 향한 온갖 종류의 비난을 들어왔겠지만, 면전에서 그런 비방을 들은 적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오래전에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던 연인의 국수주의 논란을 경쟁업체 직원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다. 섹스를 하자고 덤벼들거나, 술을 마셔 유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어야 했다.
“당신이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거 압니다. 애쓰는 것도 알고.”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입을 헹군 그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주한은 손바닥으로 젖은 입가를 닦으며 남은 손으로 수도를 잠갔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묘했다. 나는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힘스가 했던 말이 다 사실은 아니에요. 원래 영국인들이 풍자랍시고 떠드는 말이 좀 모질잖아요. 내가 했던 말도… 그런 의미로 했던 말은 아니었는데.”
“압니다. 선우 씨가 날 조롱하는 건 괜찮지만 제삼자가 날 욕하면 기분 나쁘다는 거.”
눈을 커다랗게 치뜨느라 잔뜩 주름진 이마를 새끼손가락으로 긁적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한 말은, 조금 전부터 내심 꺼내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을 생각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던 본심이었다. 핵심을 정확하게 찌른 그의 표현에 나는 얼마간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세면대 옆에 놓인 녹색의 칫솔을 꺼내 치약을 짜고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근데 그게 섹스와 술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나를 세면대로 잡아당긴 그가 어서 양치질을 하라는 듯 손에 칫솔을 쥐여 주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나는 나대로 혼란스러워 그가 쥐여 준 칫솔로 얌전히 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의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좀 황당했는데.”
“워가오?”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거잖습니까. 아니면 내가 동굴로 들어가서 당신과 이야기하기 싫다고 벽을 세웠다고 여겼거나.”
벽을 세우지는 않아도 존재감을 감추는 느낌. 분명히 내가 그에게서 느꼈던 건 거리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너무 세세한 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 무안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러케가지는 아잉데 비스하게느 느껴써오.”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내 불편한 기분을 권력처럼 휘두를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 버릇은 선우 씨한테 많이 혼나면서 오래전에 고쳤잖아요.”
그는 눈을 유순하게 내리깔았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며 그는 차분하게 반박했다.
“내가 시큰둥했던 건… 화풀이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습니다. 물론 기분이야 가라앉았지만 그 시간도 고작 17분밖에 안 됐습니다. 레스토랑을 나와서 8분, 집으로 돌아와서 짐 정리하고 양치질하느라 9분. 길지 않았잖아요.”
그는 부드럽게 나를 타이르지만, 나는 그래도 여전히 확인받고 싶었다. 나는 급하게 양치질을 마무리하고 입을 헹궜다. 제대로 헹궈내지 않아 입안에서 치약맛이 자꾸만 되살아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망설이며 물었다.
“혹시 모르죠. 내가 말 안 했으면 기분이 계속 가라앉아 있었을지도.”
주한은 물기에 젖은 세면대 옆에 걸터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엄지로 내 입가의 거품을 닦아내주었다.
“내가 선우 씨를 걱정하게 만듭니까?”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맞췄다. 미안한 듯, 그의 눈썹이 기울어진다. 그가 말하는 걱정은 내게 너무도 복합적인 의미였다. 하지만 나를 집중해서 바라보는 그의 엄격한 눈을 마주 보고 있으려니, 내 복합적인 걱정이 너무 소모적인 신경전으로 느껴졌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나는 어느새 걱정을 초월해버리는 공식을 잊어버리고 의연하게 사랑하는 방법까지도 잊어버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결국 시인해야 했다.
“같이 있는 시간 내내 좋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 잠깐을 못 기다리고…. 다음 휴가 때까지 만날 수가 없어서 초조했나 봐요. 철부지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내가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떨어져 있게 된 건데. 우습고 이기적이네, 그죠?”
젖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기적이라고 목록에 적어도 할 말이 없어요.”
“목록?”
얼굴을 찌푸리며 목록을 중얼거리던 그는, 곧 목록의 의미를 깨닫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목록 말하는군요.”
그는 손을 뻗어 나를 품에 가두었다.
“나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쉽긴 하지만, 딱 1년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졌어요. 안달하는 당신을 언제 또 보겠습니까. 이런 걸로 아옹다옹하는 게 연애 초기 같고 좋은데요. 같이 살며 성격 맞춰가던 무렵에 리스트가 증식했던 시절도 생각나고.”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금까지 82개 썼죠?”
나는 얼굴을 붉혔다. 반면에 그는 고작 두 개의 불만을 적었기 때문이었다.
수치대로라면 강주한은 결점투성이 남자고, 하선우는 그럭저럭 고쳐서 사용할 만한 적은 결점을 가진 연인이다. 그러나 꼭 수치가 사실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의 진짜 문제에 접근해 그를 뿌리부터 바꿔놓으려는 진지한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나의 목록은 나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사소한 잔소리의 변형에 가까웠다. 나는 그저 큰 기대 없이 떠들고 봤는데, 그 기저에는 아니면 말고라는 시시한 도전정신이 깔려 있었다. 그가 흔쾌하게 고치겠다고 말해주면 고마워하지만, 변하기 싫다고 방어하면 깨끗하게 단념했던 것이다.
강주한이 목록을 작성하는 방식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우리 앞에 위험이 도사렸다고 판단했을 때, 그 위험을 극복하려는 용도로만 목록을 사용했다.
“난 진짜 사소한 것밖에 안 적었거든요?”
콧잔등을 긁적이며 덧붙여 말했다.
“물론 사소하지 않은 것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주한 씨가 상식적으로 굴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요. 내 조카 돌잔치에 무기명으로 1억을 넣은 건 진짜 아니었어요. 무기명을 할 거면 완전히 무기명으로 하던가, 하선우 지인은 왜 썼어요? 그날 어머니 얼굴이 얼마나 사색이 됐는지 모르죠? 나도 변명하느라… 아휴.”
곤란하게 웃는 주한을 보고 있자니 더는 나무랄 기분도 나지 않았다. 중상층이 경조사 시에 지출하는 일반적인 선에 맞춰 돈을 보내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보내온 금액은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물론 당사자인 셋째 형과 형수는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좋아했지만, 돈의 출처를 아는 나와 어머니는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비슷한 일이 조카의 돌잔치 외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그 바람에 가족들은 막내의 돈 많은 지인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눈치를 채게 되었다.
주한은 세면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내 손을 잡아 손깍지를 끼우고 그는 나를 욕실 밖으로 이끌었다. 그는 벽에 붙은 욕실의 스위치를 끄며 말했다.
“최근에 강주한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여희와도 이런 종류의 소통을 해보면 어떨까, 그 애도 선우 씨처럼 꽤 솔직한 편이니까 시도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참고를 하려고 당신이 적은 리스트를 다시 찾아봤어요.”
그는 나를 장난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유쾌한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괴팍한 남자의 인생을 담은 전기傳記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사적으로 묘사해둔 기록이니까. 어떤 건 황당하고 어떤 건 우스웠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열두 번째 글이었습니다. 가장 재밌는 글이기도 했고요.”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인상적이라는 그의 말에 뜨끔하여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산 지 2년쯤 되던 해. 스키장에 다녀왔던 날에 적었던 글입니다. 기억납니까?”
그의 자세한 설명에 비로소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홍안의 미소년이 얽힌 대사건 말이죠?”
차마 그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내 입으로 홍안의 미소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았다. 사진에 얽혀 있는 몇 가지 사건들이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
아주 오래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님의 집에서 짐 정리를 하던 중에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한은 유독 촌스럽게 나온 나의 독사진을 마음에 들어했고, 사진은 물론 필름까지 달라고 요구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사진 중에 그 사진을 갖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지만 이유를 묻지 않고 넘겨주었다.
주한은 며칠 뒤, 가져간 필름으로 나의 독사진을 커다랗게 인화해 거실 벽에 걸어놓았다. 나는 조금 언짢았다. 나는 내 얼굴을 커다랗게 인화해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사진을 걸어놔야 한다면 스튜디오에서 찍은 가족사진이거나, 커플의 사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고른 것은 많고 많은 사진 중에 하필이면 멍청하게 웃고 있는 나의 단독사진이었다. 뒤에 스쳐 지나가는 남자가 찍혀 있어 엄연히 말하면 단독사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포커스가 내게 맞춰져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유행이 한참 전에 지난 샛노란 스키복을 입고 있었다. 웃느라 눈이 다 사라진 나는 떡볶이를 치아로 급하게 끊어 먹느라 시뻘건 국물이 입가에 범벅이었다. 선명한 이미지 속의 홍안의 소년은 천진하다 못해 맹추처럼 보였다. 필터를 씌운 듯 색감이 총천연색으로 도드라졌다.
처음에는 그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치우려고 했다. 그러나 강주한은 묘하게 고집을 부리며 매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진을 내리는 일을 포기하게 된 나는 어느새 촌스러운 과거의 모습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종내에는 달이 지난 달력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되었다.
나는 꽤 오래도록 착각에 빠져 있었다. 주한이 어수룩하고 천진한 소년 시절의 내 모습을 좋아해서 사진을 벽에 걸어놓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익숙함에 무뎌졌던 사진이, 새롭게 다가오게 된 계기는 사진을 벽에 걸어놓은 지 꼬박 1년 반이 지나서야 찾아왔다.
주한과 함께 심야 스키를 타고 돌아온 날 밤이었다. 추위와 피로에 굳은 몸을 따듯한 샤워로 풀어주고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을 지나쳐갈 때였다. 평소에는 거의 신경을 기울이지도 않았던 내 사진이 갑자기 거슬리게 느껴졌다.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심야 스키를 탔던 장소와 사진 속의 소년이 있는 장소가 같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린 하선우는 스낵 코너에서 사온 떡볶이와 어묵을 먹고 있었다. 스낵 코너의 내부 인테리어는 달라졌지만 실외의 야외 테이블은 현재와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멍청하게 웃고 있는 저 소년은 바로 저 장소에서 2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엘텍의 강주한을 만나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나답지 않은 감상에 젖어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주 익숙한 무언가를 불현듯, 낯설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는 거대한 캔버스 사진을 한참 동안 숨죽여 들여다본 끝에 어린 하선우의 어깨 너머로 포커스 아웃된 소년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했다. 초점이 흐릿하게 번진 미숙한 소년의 정체는 분명히 강주한이었다.
나는 오래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첫 만남의 순간을 대사건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나는 너무 들뜬 나머지 우주에 그와 나를 관통하는 어떤 숙명적인 끈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이 운명적인 대사건을 지금까지 어떻게 혼자만 끌어안고 있었느냐고 주한을 타박했으며, 대체 언제부터 날 좋아했던 거냐고 그를 놀리기까지 했다. 강주한 본인은 끝내 부인했지만 내 안의 일부는 여전히 강주한의 첫사랑이 나일 거라는 무구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리스트 12번은 대사건 즈음에 나온 사소한 불만이었다. 사진 속의 소년이 자신이 맞다고 인정하긴 했지만 그는 대사건이 일어났던 날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문 주한에게 몇 조각의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 기억나는 게 없냐고, 그를 조르고 달래며 온갖 투정을 목록 속에 적어 넣었다.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98년도의 첫 만남을 그의 입으로 자세히 듣고 싶었다. 그가 98년도에 만났던 하선우를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그 시절의 나는 어떤 느낌으로 남아 있는지, 또 홍콩의 컨벤션센터에서 재회했을 때 단번에 날 알아봤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주한은 대사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대사건의 날은 여전히 내막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 글이 왜 인상적인데요?”
내 말에 주한은 미소를 지었다. 계단을 올라 침실에 다다른 우리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나란히 마주 보고 드러누운 그가 내게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의 첫 만남이 궁금하다고 했죠? 또 내게 어떤 느낌으로 남아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고.”
나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얘기를 꺼내는 그의 말에 숨을 죽였다.
“형제들 사이에서 선우 씨가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너의 쓸모는 너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선우 씨의 형제 중 누군가가 거드름을 피웠죠. 한참 어린 선우 씨를 놓고 과학고등학교와 일반고 진학 문제를 형제들끼리 의논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의대 입시를 위해서는 일반고에 진학하는 게 유리하니 과학고에 지원하지 말라고 누군가 명령했었죠.”
“아… 기억날 것도 같은데….”
나는 그를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주한 씨가 거기 있었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쓸모는 너의 행복보다 중요하다. 우연히 엿들은 대화로 인생의 이치를 깨달았죠.”
단조로운 농담조로 말을 이은 그는 돌연 풀썩 웃었다.
“가끔 생각했습니다. 곤돌라 안에서 마주쳤던 예쁘장한 남자애는 당연히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었을 거라고. 행복이니 쓸모니, 아무런 줏대 없이 그저 집에서 정해준 길을 갔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홍콩의 전자박람회에서 마주쳤던 겁니다. 그것도 화장실에서 나를 몰래 훔쳐보다 재수 없다고 중얼거리는 당신을 본 거죠. 하선우라는 이름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재수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 들켜 서둘러 화장실을 벗어나던 기억이 뚜렷했다. 거울 속 강주한이 나의 가슴팍에 있는 명찰을 쳐다보던 눈빛도 소름 끼칠 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유구무언이란 말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내게 그랬죠. 인간의 쓸모는 인간의 행복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 측은하게 들린다고. 당신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나름대로 쓸모 있는 인간이라 자부심을 느끼며 산다고. 내가 기억하는 10대의 하선우와 30대의 하선우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그 말이 좋았습니다. 나는 목록을 작성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작성할 말이 없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선우 씨에게 불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나의 뺨을 감쌌다. 열기가 내 얼굴 위를 파도처럼 쓸고 지나갔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다시 짓궂어졌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왼쪽 뺨에 입술을 맞대며 속삭였다.
“사실 그 이상은 너무 기고만장해질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털어놓은 김에 다 얘기하죠. 이미 그대로도 완벽하니까, 철들지 마요.”
웃음이 샜다. 기고만장해질 만한 말을 실컷 늘어놓고서는 기고만장해지지 말라니.
“나 지금 정말 하고 싶은 일 생겼는데 우리 철없는 짓 하나만 할래요?”
“그게 뭡니까?”
“키스 기록 세워볼까요? 전에 32분까지 하다가 힘들어서 관뒀잖아요. 그 기록 넘어봐요.”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주한은 내게 팔베개를 해주며 코끝을 가깝게 붙였다.
“오늘은 한 시간 넘게 도전해보죠.”
손목의 시간을 확인한 그가 곧바로 내게 입술을 겹쳐왔다. 시작부터 웃음이 터져 나와 곧바로 고비가 닥쳐왔지만 우리는 그럭저럭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다시 진지한 입맞춤을 나눈다. 그의 입술은, 그리고 나의 입술은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맛을 확인하고 사랑하는 질감을 확인하며 포개어졌다.
우리는 잘못된 패를 뽑는 사람일 수도, 이기심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부딪치고 닳아가며 우리가 가진 날은 마모되고 무뎌져버렸다. 불멸일 것만 같던 우리의 젊은 날은 지나갔지만, 나는 우울하지도 근심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품에서, 그는 나의 품에서 완전함을 느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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