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26)

⫸ 아지툰소설   

2.

자꾸만 하품이 쏟아졌다. 하선우의 마음은 초등학생 시절 소강당에서 열렸던 영어 연극 발표회에 참석했을 때처럼 떨리고 긴장되었지만, 그의 몸은 지독한 나른함에 휩싸여 있었다. 온몸이 노곤하고 피로하여 머리 댈 곳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질 것 같았다.

“흐아암.”

하품이 연달아 쏟아져 그는 몇 번이나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하품할 때마다 눈물이 찔끔 솟아, 눈곱이 끼지 않도록 몇 번이나 눈가를 점검해야 했다.

“만나자마자 하품하는 건 아니겠지.”

무려 일주일만의 만남인데 재회의 인사로 하품부터 하게 될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선우는 급히 진하게 샷을 내린 커피를 사 와 졸음이 잔뜩 낀 몸에 카페인을 주입했다.

그가 졸음과 사투를 벌이길 한참, 마침내 전광판에 강주한이 탄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정보가 떴다. 비행편 문제로 상하이를 거쳐 인천으로 환승을 해 입국하는 이동 경로였다. 일주일간의 타지 생활과 환승 비행, 건강 문제가 겹쳐 강주한에겐 아주 고단한 출장이었을 것이다.

하선우는 곧바로 게이트 앞으로 그를 마중 나갔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재회의 인사로 하품부터 하고 말았다.

“흐어으음…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참으려 해도 기침이 터져 나오듯 하품이 쏟아졌다. 하품은 감기보다 전염력이 강해서 강주한을 쉽게 물들였다. 그러나 하품조차 흐트러진 모습이라 생각해 쉽게 보여주지 않는 그답게 고개를 푹 숙여 입가를 가린 채였다.

“주한 씨, 피곤했나 봐요.”

하선우는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시시덕거렸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얼굴을 찬찬히 눈여겨 살피며 말했다.

“선우 씨야말로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요.”

“네, 뭐…. 주한 씨 기다리면서 충분히 쉬어서 괜찮아요.”

하선우는 강주한을 위아래로 살피다, 고개를 내빼 미어캣처럼 그의 뒤편을 재빠르게 훑었다.

“그냥 왔어요?”

“그냥 왔다뇨?”

“휠체어요. 왜 안 탔어요?”

하선우는 강주한의 한참 뒤에서 짐을 실은 카트를 끌고 따라오는 비서들을 탐탁지 않은 눈길로 흘깃거렸다. 공항에 분명 이동 보조 서비스로 휠체어가 갖춰져 있을 텐데도 강주한은 휠체어를 타지도, 목발로 몸을 지탱하고 있지도 않았다.

분명 진통제를 복용해 통증에 무뎌진 상태일 게 분명했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하건만, 강주한은 비서들이 제공하는 편의를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절했을 게 분명했다.

강한 책임감을 느낀 그는 강주한에게서 무거운 서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괜찮습니다. 휠체어를 탈 정도는 아닌…….”

강주한의 말문이 서서히 닫혔다. 그는 놀란 눈으로 하선우의 뒤에 있는 커다란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건… 뭐죠?”

“휠체어요. 혹시 몰라서 따로 가져왔는데 잘됐네요. 얼른 타요.”

“휠체어인 건 나도 압니다. 설마 ……직접 만든 겁니까?”

강주한의 시선이 전동 휠체어의 커다란 바퀴를 향했다. 폭 10센티에 지름이 30센티에 달하는 바퀴 4개를 휠체어의 앞뒤로 달아 주행 능력을 한껏 향상시킨 전동 휠체어였다. 하선우는 뿌듯함과 쑥스러운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웃었다.

“바다 보고 싶다면서요. 모래사장이나 자갈길은 일반 휠체어 바퀴로 주행하기 어렵잖아요. 석모도 바닷가가 돌도 많고 울퉁불퉁해서 일반적인 휠체어로는 더 다니기 어려울 거예요.”

“…….”

“기존에 있던 전동 휠체어를 아주 조금만 손댔어요.”

“바다를 보고 싶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대퇴골두 골절이라면서요. 선열이 형한테 물어보니까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휴가를 내내 누워서 보내기엔 아까워서 만들어 봤죠.”

강주한은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바퀴 때문에 다른 휠체어보다 높이가 높아요. 조심히 앉아요.”

다행히 공항 주변에는 기자가 없었다. 휴가 시즌이라 공항의 이용객은 많았지만 강주한의 편한 분위기에 그를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하선우의 전투적인 휠체어에 눈길이 쏠려 있었다.

“좀 눈에 띄어서 그렇지 막상 앉으면 편해요. 얼른 앉아요.”

“괜찮습니다.”

“아아, 얼른요. 한 번만 앉아 주세요.”

하선우의 재촉에도 강주한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확고한 하선우의 태도와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며 휠체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하선우의 얼굴 위로 낙심의 감정이 번져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강주한이 신중한 태도로 휠체어 위에 올라타자 하선우의 기분은 금세 회복되었다.

“수리수리 마수리도 그렇고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단 말이지.”

“뭐라고 했습니까?”

“아니에요!”

수리수리 마수리 얘기만 나오면 은근하게 발끈하는 강주한에게 명랑하게 대꾸한 하선우는 씩씩하게 휠체어를 힘주어 밀었다.

차량으로 인천에서 강화도의 석모도 별장으로 이동하는 구간을 제외하면 주한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일반적인 휠체어보다 높이가 높긴 했지만 쿠션을 밀도 있게 넣고 스프링을 추가해 흔들림이 덜했다. 게다가 기존 전동 휠체어의 장점인 일체형 컨트롤러가 장착되어 있어 주행 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다.

“집에서도 휠체어 사용해요. 제가 문턱마다 경사로 깔아 놔서 다니는 데 불편한 건 없을 거예요.”

“…그렇군요.”

“바로 씻을 거죠? 도와줄게요.”

간병인 역할에 자신감이 붙은 하선우는 별장 안의 욕실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는 굳은 얼굴로 샤워실을 둘러보는 강주한을 이끌어 엉덩이 받침 한가운데가 뻥 뚫린 의자에 앉혔다. 하선우가 이끄는 대로 의자에 앉은 강주한이 석연치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뭡니까.”

“샤워용 보조 의자예요. 요양원에서도 많이 쓴다고 하더라고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제가 씻겨 줄게요.”

“저건요?”

“아, 이거요? 신기하죠? 이동식 샴푸 개수대에요.”

하선우는 바닥에 있던 개수대를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 개수대를 등에 놓고 지지대를 어깨에 걸쳐 사용하는 이동식 보조 샴푸용 개수대였다.

“환자를 앉힌 상태로 몸은 적시지 않고 머리만 감길 수 있는 제품이더라고요. 혹시 몰라 검색해 봤는데 기성품이 있었어요. 샤워 대신 머리만 감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사 봤어요.”

강주한은 샤워 보조 의자의 팔걸이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그는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하선우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말수가 줄어든 강주한을 눈치채지 못했다.

“씻어 볼래요? 이동식 샴푸 개수대부터 써보고 싶은데.”

“괜찮습니다. 나보다는 선우 씨가 더 환자 같은 몰골인 거 압니까?”

“제가요?”

하선우는 급히 욕실 거울로 자신의 몰골을 확인했다. 눈 밑이 거무스름하게 그늘진 데다가 연이은 하품으로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굳어 눈곱이 되어 있었다. 그는 속으로는 히익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태연하게 눈곱을 떼어 냈다.

“머, 멀쩡한데요, 뭘.”

“혼자 씻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부탁할게요.”

“진짜 괜찮겠어요? 내가 구석구석 씻겨 줄 수 있는데. 흐흐.”

하선우는 강주한의 어깨를 조몰락거리며 음흉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강주한은 그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혼자 씻을 수 있다는 듯 하선우를 욕실에서 내보냈다.

하지만 하선우의 지나친 의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건 …뭡니까?”

“아, 저거요? 혹시 몰라서 승강기를 만들었어요. 복층 계단이 너무 가파르더라고요.”

강주한은 별장으로 사용하는 저택을 몇 채 소유하고 있었다. 대부분 저택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었지만 강화도에 있는 별장은 건물도, 정원의 크기도 아기자기한 편이었다.

부지는 300평이 넘지만 건물은 작은 단독주택 한 채와 창고뿐이라 적은 인원만 머물 수 있었다. 게다가 1층에는 방이 없어 잠을 자려면 복층의 침실을 사용해야 했다.

하선우는 강주한이 탄 휠체어를 자연스럽게 밀어 복층 아래의 수상한 기계 앞에 세웠다.

“최대 하중 150kg까지 실을 수 있어요. 관리인 아저씨랑 테스트도 했는데 엄청 안전해요.”

하선우가 자신한 기계는 평평한 강철 합판을 사다리와 난간에 튼튼하게 연결해 전동 도르래로 끌어 올리는 간이 엘리베이터였다. 이번에도 역시 의욕부터 앞선 하선우는 강주한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휠체어를 합판 위로 밀어 올렸다.

“…안전벨트도 있군요.”

“당연하죠. 떨어지면 안 되잖아요.”

하선우는 합판과 연결된 안전벨트를 당겨 강주한과 휠체어를 칭칭 감은 뒤 버클을 채웠다. 그는 마지막으로 휠체어의 바퀴가 움직이지 않도록 걸쇠를 걸어 휠체어를 합판에 고정했다.

“자, 올라갈게요.”

하선우의 조악하고 투박한 엘리베이터는 10초에 50센티미터씩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전동 휠체어는 사륜구동의 오프로드 차량을 떠올리게 하는 외관을 갖춰 자랑스러웠지만, 엘리베이터는 기능 실현에 급급해 멋없고 짜임새가 없어 어디 내놓기에 조금 부끄러운 면이 있었다.

“속도가 좀 느리죠? 시중에 파는 제품으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에요.”

5분처럼 느껴지는 30초가 흐른 뒤에야 강주한과 하선우는 눈높이를 같이할 수 있었다.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돌릴 때 시간이 유독 더디게 흐르는 것처럼, 엘리베이터는 속이 답답할 만큼 느릿느릿 움직였다. 아주 조금씩 눈높이가 올라가는 강주한을 올려다보며 하선우는 멋쩍게 웃었다.

“골절 환자한테는 계단이 제일 고비잖아요. 불편해도 걷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강주한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안 드나?’

열렬한 반응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주한의 반응이 석연치 않아, 하선우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쓰다 보면 마음에 들겠지.’

거추장스럽기는 해도 몸은 편하니 사용하다 보면 마음에 들 게 분명했다. 지난해 가을에도 오늘과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작년 초가을 무렵에 두 사람은 강화도의 석모도 섬으로 떠나는 2박 3일간의 짧은 휴가를 계획했었다. 여행을 준비하던 하선우는 동영상 채널에서 서해안 바닷가 해루질이란 키워드를 접했다. 갯벌이 아닌 일반 바닷가에서도 충분히 조개를 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직접 캔 조개로 조개탕을 끓여 먹겠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조개를 캐는 방법을 속성으로 공부한 그는 조개는 야행성이기에 물의 수위가 낮아지는 밤 시간과 물의 수위가 낮아지는 시간을 노려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휴가를 일주일 앞둔 시점부터 하선우는 조개잡이 용품을 구매하려 열심히 검색했지만 그의 마음에 마땅히 차는 기성품이 없었다.

결국 그는 해루질에 사용할 용품을 직접 제작하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린 그는 적당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일단 농부들이 농약 살포기로 주로 사용하는 배낭 타입의 플라스틱 압축 분무기 가방을 샀다. 가방의 윗면을 절단하고 경첩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했으며, 스틱 끝의 분무기를 떼어내 방수가 되는 플래시와 갈고리 타입의 만능 집게를 연결했다.

처음에 강주한은 하선우의 조악한 발명품을 반기지 않았다. 농약 살포기 가방을 커플 아이템으로 맞추고자 붉은색과 녹색 두 가지로 구매했던 하선우는 고집을 부려 강주한을 바다로 끌고 나갔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그였지만 조개를 캐다 보니 차차로 흥미가 더해졌는지, 두 사람은 플래시 전원이 꺼질 때까지 어두운 바닷가를 거닐며 농약 가방을 가득 채울 만큼 조개를 잡았다. 잡은 조개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서울로 가져가 한동안 온갖 조개 요리로 소비했다.

그들은 늦은 밤 농약을 뿌리는 농부 같은 모습으로 수심이 얕은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조개를 캤었다. 어쩐지 그리운 기분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던 하선우는 철제 합판이 어딘가에 부딪혀 덜컹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주한이 탄 엘리베이터가 복층에 도착해 있었다.

“혹시 무서웠어요?”

하선우는 뒤늦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짧은 거리였지만 그는 전력 질주를 하느라 급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다. 잠시만요. 이게… 다 좋은데 엘리베이터에서 직접 내릴 수가 없어서 좀 불편해요.”

하선우는 경첩을 단 난간을 안으로 열고, 휠체어를 고정한 팩을 뽑은 뒤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휠체어를 복층 방향으로 당겨 그를 안으로 들인 뒤에 다시 꼼꼼하게 난간을 닫았다.

“좀 번거롭죠?”

강주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재빨리 주변을 탐색했다. 무언가 더 괴상한 이벤트가 그를 맞이할 줄 알았지만, 침실은 등을 기댈 수 있는 커다란 삼각형 쿠션을 따로 마련한 것 빼고는 평범했다.

“이걸 어떻게 준비한 겁니까?”

“강화도에서 출퇴근하면서 혼자 열심히 준비했죠.”

“강화도에서 출퇴근을 했다면… 경호원들은요?”

그의 얼굴에 어리기 시작한 그늘을 발견한 하선우는 재빨리 변명했다.

“강태한이 설마 여기까지 사람을 보내겠어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죠.”

“아무 일 없었잖아요. 강태한도 몇 년 지났으니 이제 다 잊었을걸요?”

강주한은 여전히 만에 하나를 걱정하는 얼굴로 하선우를 보았다. 조금도 고집을 꺾지 않는 그에게 하선우는 서둘러 변명했다.

“승용차 타면 짐을 실을 수가 없어서 픽업트럭을 타야 했어요. 어차피 강화도와 성남을 오갈 거라 경호원들에게 카풀 안 한다고도 했고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때요? 엘리베이터도, 휠체어도 어떤지 감상 안 들려줄 거예요?”

“고생했겠군요. …특히 엘리베이터요.”

“그게 제일 복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반쯤은 재미로 한 거라 힘들지는 않았어요.”

“며칠이나 밤새운 겁니까?”

“며칠까지는 아니에요. 저 정말 컨디션 괜찮아요.”

“…그렇군요.”

하선우는 유쾌한 톤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강주한은 신기해한다거나 감탄하는 기색은커녕 재미있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선우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심각한 걱정거리를 품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도 작년에 준비했던 조개잡이 가방은 나름대로 즐거워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리액션이 시원찮았다.

하긴, 고작 2박 3일간 머물 공간을 이토록 복잡하게 어지럽혀 놓았다면 누구라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뒤늦게 하선우는 자신이 너무 요란을 떨었다는 자각에 민망해졌다. 하지만 가라앉은 기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 조금 더 다정하게 노력하는 연인이 되어 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쉴래요? 몸도 성치 않은 상태로 외국에서 피곤했을 텐데.”

강주한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바다는 거울처럼 빛을 반사해 눈을 시리게 했다.

“아직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조금 자는 게 좋겠군요.”

“그럴래요? 너무 밝죠? 블라인드 쳐 줄게요.”

하선우는 재빠르게 움직여 에어컨의 온도를 적당하게 낮추고 블라인드를 쳐 침실에 은은한 어둠이 머물게 만들었다. 침대에 올려놓은 커다란 삼각 쿠션을 치워 평평하게 만든 하선우는 휠체어에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주한을 일으켰다.

강주한은 갑자기 쇠약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하선우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얌전히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침대에 누운 강주한을 따라 침대맡에 몸을 반쯤 걸쳤던 하선우가 물었다.

“에어컨 온도 더 낮춰 줄까요? 이불 얇은 걸로 바꿔 줘요?”

“됐습니다. 선우 씨도 이리 와요.”

“네? 난 괜찮은….”

“한 시간 동안 하품을 스무 번도 더 한 거 압니까? 얼른 와요.”

강한 악력으로 손을 깍지 껴 쥔 강주한이 하선우를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말대로 하선우는 한 시간 동안 하품을 스무 번도 더 할 정도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코 골까 봐 그래요. 주한 씨 잠귀도 밝으니까 혼자 편하게 자요.”

“걱정 마요. 선우 씨 코 고는 소리 좋아하니까.”

“예? 저 평소에도 코 골아요?”

멋없게 목소리를 높이는 하선우의 말에 강주한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자요. 자고 나서 얘기해 줄게.”

그는 하선우의 머리를 감싸 자신의 품에 당겨 안았다. 하품을 연방 쏟아내고 찔끔 삐져나온 눈물을 닦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텼던 그는 강주한의 품에 안긴 지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하선우는 작게 코를 골기도 하고, 푸우, 푸우, 입바람을 내기도 하며 뒤척임 없이 곤잠을 잤다. 하선우의 얼굴에서 점점 긴장이 풀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주한도 이내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파도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퍽 현실적으로 들렸다. 꼭 깊은 수면을 위해 틀어놓는 백색 소음처럼 다양한 주파수 성분의 소리가 부드럽게 뒤섞여 귓가에 부서졌다.

휴대폰을 침실에 놓고 잤던 모양이라고 잠결에 생각하던 하선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삼각형으로 좁아지는 천장 모양이 낯설었다. 그는 곧바로 여기가 어딘지를 깨달았다. 강주한과 휴가차 찾아온 강화도의 작은 별장이었다.

뒷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그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침대가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밤 11시 3분이었다. 2박 3일간의 짧은 휴가 중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더없이 허무하게 보내 버렸다.

게다가 하선우를 홀로 두고 어디로 갔는지 강주한은 곁에 없었다. 휠체어도 복층에 그대로 있었다.

하선우는 깊은 숙면에 잔뜩 부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만지작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거실은 최소한의 조명만 켜두어 몹시 어두웠다. 혹시 자신이 코를 골아 주한이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던 걸까 싶었지만 거실에도, 부엌과 욕실에도 그는 없었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어디로 간 건지 걱정되어 하선우는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어두운 정원을 가로질러 불 켜진 창고로 들어가자 그가 허리를 숙여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하선우는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철문을 퉁퉁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랄 법도 하건만 강주한은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잘 잤습니까?”

“네. …하루가 다 갔지만요.”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죠.”

하지만 늦은 밤에 즐길 만한 뭔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섹스를 떠올렸겠지만 현재 강주한의 몸은 절대적인 요양을 필요로 했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는 커다란 부직포 봉투를 들고 있었다.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커버를 씌워 보관 중이던 물건의 용도가 짐작이 가지 않아 하선우는 강주한의 근처로 걸어갔다.

“이게 뭔데요?”

“조개잡이 가방입니다. 작년에 선우 씨가 만들었던 거요.”

“아아, 여기 창고에 보관 중이었죠.”

강주한은 덮개를 벗겨 조개잡이 가방을 하나씩 하선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농약을 치는 압축 분무 가방을 개조해 만든 조개잡이 가방은 그의 기억보다 훨씬 더 허접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선우는 그 조악한 모양새에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이걸 메고 밤늦게까지 조개를 잡았던 거예요?”

추억의 보정이 사라져 한결 객관적이 된 하선우는 배를 잡고 한참을 킥킥거렸다. 지난해, 가방을 처음 본 강주한이 질색하며 거부한 이유가 십분 이해되었다.

“이건 왜 꺼내는데요? 해루질하려고요?”

“마침 보름달이 떠서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대사리라고 하더군요. 물때가 좋아서 지금 가면 조개를 많이 캘 수 있습니다.”

“그건 그런데… 플래시 배터리 방전됐을 거예요.”

“보조배터리 충전해 왔습니다. 연결하면 돼요.”

하선우는 해루질을 향한 그의 진심에 조금 놀랐다. 그도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고 골뱅이를 줍는 소소한 일상에 행복을 느끼는 보통의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안 돼요. 지금도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한다고요. 조개는 제가 캐면서 대리 만족시켜줄 테니까 해변에 앉아서 내가 얼마나 많이 캐는지 구경이나 해요.”

“괜찮아요. 안 아픕니다.”

“진통제 먹어서 안 아픈 거예요. 보호대 차면 아픈 걸 더 못 느끼고요.”

강주한은 살짝 짓다 만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하선우는 그의 허리춤을 더듬거리며 보호대의 흔적을 찾았지만 옷 너머로 얇은 속옷만 느껴질 뿐이었다.

“설마 보호대 안 찬 거예요?”

하선우는 그에게 잔소리하기 싫었다. 그의 행동을 단속하고 자잘하게 훼방 놓으며 내 말대로 하라고 강요하는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훼방꾼을 자처해야 했다.

“정말 조심해야 해요. 선열이 형한테 주한 씨 다친 부위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부위가 안 좋대요. 대퇴골두 부위 골절은 예후가 안 좋아서 절대적인 요양은 필수래요. 관리 못하면 정말 안 좋아진다고요.”

강주한은 하선우의 걱정 가득한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각종 자재를 구하고 설계하고 제작하는 데는 분명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이 바쁜 일정을 핑계로 정밀 검사를 미룬 탓에 하선우는 하지 않아도 됐을 고생을 사서 하게 되었다. 그는 그 점이 가장 미안했다.

“난 정말 괜찮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아프지 않아서 괜찮다고 말한 겁니다.”

고개를 든 강주한은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저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하선우에게 말했다.

“출발하기 전날 인도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미세 골절로 의심됐던 부위가 실은 아무 이상이 없더군요. 몸이 점점 나아진다는 느낌을 받아서 검사를 미뤘던 건데, 선우 씨 고생할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검사받을 걸 그랬습니다. 괜한 고생을 하게 했어요.”

강주한은 미안해했지만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하선우의 얼굴은 점차 밝아졌다. 최악의 상황을 염려했던 만큼 머릿속의 폐쇄 트랙에서 온갖 변수를 작용시키며 모의 주행 중이던 상상력이 드디어 멈춰 설 수 있었다.

“아… 나는, …나는 내가 별장을 너무 어지럽혀서 언짢은가 했어요.”

“말도 안 됩니다.”

강주한은 왜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선우 씨 너무 애쓴 거 알아서 미안해서 그랬습니다. 말할 때를 놓쳐서 안 해도 될 고생을 한 거잖습니까.”

“저 보람 있으라고 주한 씨 아픈 게 더 말이 안 되죠. 반은 재미있어서 만든 거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솔직히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실용적이지는 않았잖아요.”

강주한은 녹색과 적색의 조개잡이 플라스틱 가방을 가만히 쓰다듬다 피식 웃었다.

“때때로 하선우 씨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를 놀라게 합니다. 이번에도… 오프로드 타입의 휠체어를 만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복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만들 줄도 몰랐고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감정을 형언할 적당한 말을 고르듯 생각에 잠겼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건 정말… 놀랐습니다.”

하선우는 이윽고 이어진 강주한의 말이 생각보다 싱거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경쾌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혹시 모르죠. 80살쯤 되면 유용해질지도.”

그들은 물때를 놓치지 않으려 재빨리 해루질에 사용할 도구를 챙겼다. 가슴 높이까지 방수가 되는 멜빵바지 타입의 작업복을 옷 위에 입고 고무장갑을 낀 두 사람은 조개잡이 가방을 챙겨 바닷가로 향했다.

“발에 뭐가 밟히는데? 이게 왜 이렇게 안 잡히지.”

백색의 플래시 빛에 비친 물의 색은 희뿌연 민트색에 가까웠다. 허벅지까지밖에 오지 않는 깊이였지만 모래 입자가 떠다녀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신발에 뭐가 걸리는지 하선우는 장화 바닥으로 모래를 계속해서 파헤쳤다. 바닥에 무언가가 깊게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강주한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플래시로 하선우의 다리를 더듬어 발이 있을 법한 방향을 비추었다.

희뿌연 물을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하선우의 발치에 삐죽 튀어나온 붉은 껍데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계속 비춰 줘요.”

하선우는 신중하게 집게를 벌려 넓은 갈퀴로 붉은 껍데기를 포위해 잡은 뒤 물 밖으로 꺼냈다.

“아, 이번에도 골뱅이네.”

“조개만 캘 줄 알았는데 골뱅이도 있네요.”

“골뱅이는 꽤 있더라고요. 근데 이번에는 소라가 없네요. 소라 구워 먹고 싶었는데.”

하선우는 팔을 뒤로 뻗어 등에 멘 플라스틱 가방 속에 골뱅이를 툭 던졌다. 일용할 양식을 얼마나 모았는지 궁금해진 강주한은 플래시로 하선우의 가방을 비췄다. 한참 열심히 바닥을 비추고 다니더니 해삼과 조개, 골뱅이는 물론이고 꽃게까지 잡았다.

“오늘 물때가 좋다더니 진짜 많이 잡았죠?”

하선우는 강주한의 뒤로 걸어가 그의 조과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확인했다.

“이야, 수렵 시대였으면 굶어 죽었겠다.”

“칭찬해 줘야 의욕도 생기죠.”

“흠, 의욕이 없어서 못 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강주한의 저조한 성적이 만족스러워 하선우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가 더 많이 잡아야지.”

신이 난 그는 경쟁의식을 숨길 생각도 않고 플래시로 바닥을 비추며 다시 해루질 삼매경에 빠졌다. 바닥에 밟히는 큼지막한 조개와 골뱅이를 간간이 주우면서 천천히 앞서나가던 하선우는 가끔씩 뒤돌아보며 강주한이 너무 먼 바다로 향한 건 아닌지를 확인했다.

물의 저항감에 느린 속도로 몸을 뒤뚱거리며 강주한에게로 다시 걸어온 하선우는 그사이에 조개가 얼마나 많이 늘었는지를 확인했다.

“잠깐만 숙여봐요. 가방 안이 잘 안 보여요. 오, 소라도 두 개나 잡았네요? 내일은 소라 먹을 수 있겠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엉덩이를 두드려 칭찬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죠? 내가 조개잡이 키트 만들자마자 뭐라고 했더라?”

“하선우 씨가 사업을 안 해서 다행이라고… 그런 말을 했었죠.”

“가끔 보면 사람이 참… 그래요.”

“선우 씨가 계속 집요하게 캐물어서 어쩔 수 없이 속마음을 꺼낸 겁니다. …선우 씨 사업에 피해를 끼쳤던 사람으로서 그 발언은 많이 경솔했던 거 압니다.”

“나보다 훨씬 즐겼잖아요. 지금도 손맛을 잊지 못해서 다시 가방 꺼낸 거면서.”

하선우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는 저 홀로 마음 상해 투덜거렸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하찮은 일로 낙심한 하선우는 조금 귀여워서, 강주한은 그의 상심을 말없이 지켜볼 때가 있었다.

하선우는 물때가 지날까, 다시 부지런히 조개를 캐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르며 함께 바닷가의 바닥을 더듬던 강주한은 자신이 분명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하선우의 모든 제안을 이토록 가타부타 없이 곧바로 수락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했다.

발밑에 또 무언가가 걸렸다. 발밑에서 쉽게 부서지는 모래와 대비되는 울퉁불퉁하고 단단한 감촉이 꼭 소라 껍데기 같았다. 그는 강한 플래시 빛으로 바닥을 비추어 흐릿한 윤곽을 발견하고는 집게를 벌려 소라를 잡았다.

먼 바다 위에는 조업 중인 오징어잡이 배가 휘황한 집어등으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보름달이 뜬 팔월의 어느 한산한 날을 그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았다.

***

“하 사장님! 그러다 낚싯대 놓쳐요!”

한때 지겹게 들어 이름보다 더 익숙한 호칭이었기에 회사를 접은 지 몇 년이나 되었음에도 몸이 바로 반응했다. 화들짝 잠이 깬 하선우는 재빨리 느슨하게 쥐고 있던 낚싯대를 꽉 잡았다.

“꾸벅꾸벅 졸다가 몇 마리나 놓치셨나 모르겠네.”

선장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하선우는 졸음을 쫓아내려 눈을 부릅떴다. 혹시 몰라 입가를 더듬었지만 다행히 침까지 흘리며 추하게 잠든 건 아니었다.

그는 배의 후면에서 아이스박스를 의자 삼아 앉아 바다낚시를 하고 있었다. 새벽까지 해루질을 하고 오전에는 바닷가를 산책한 데다가 정오에 출항한 배를 타고 선상 낚시를 시작했다. 뱃사람도 이렇게 부지런히 조업하지는 않을, 꽉 찬 어촌 체험 일정이었다.

“많이 잡았어요?”

하선우의 낚싯대 위치를 잡아주며 선장이 참견했다.

“아뇨. 보리멸 몇 마리 잡은 게 다예요.”

“그럼 그만 졸고 좀 더 집중해서 해 봐요. 한 마리라도 더 잡아가야죠.”

“새참을 먹어서 그런가 봐요. 식곤증인가….”

늘어지게 하품을 쏟아낸 하선우는 몸을 요리조리 스트레칭 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오후 4시 30분이었다. 날이 더운데다가 강하게 내리쬔 햇볕을 피하려 긴 옷을 입고 있어 몸에서는 연신 끈적한 땀이 쏟아졌다.

강주한은 뱃전에 있었다. 그는 배의 난간에 몸을 살짝 걸치고 서서 물속의 루어가 리듬감 있게 흔들리도록 낚싯대를 살살 위아래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자신은 앉아서 낚시하는데도 허리와 팔이 아프고 졸음이 쏟아지는데 그는 몇 시간째 서서 자세의 변화 없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기본적인 체력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생각했다.

골격? 근육량? 아니면 꾸준한 유산소 운동? 그것도 아니라면 식사량? 강주한은 열량이 큰 음식을 선호하긴 했지만 하선우와 식사량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는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쪼그려 앉아 강주한의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많이 잡았어요?”

“아뇨.”

바닷물을 얕게 부어 놓은 아이스박스 안에서 생선 여러 마리가 팔딱거리고 있었다. 여러 어종 중에서 보리멸과 광어만을 알아본 하선우는 생선의 숫자를 하나둘 속으로 세고는 말했다.

“많이 잡았네요. 오늘 야식으로 광어 회 먹으면 되겠다.”

“선우 씨 야식 못 먹고 돌아가자마자 곯아떨어질 것 같은데요.”

“저녁 10시까지 버티다 잘 거예요. 밤낮 바뀌면 더 피곤해요.”

아이스박스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앉은 하선우는 강주한의 허벅지에 옆머리를 기대고 앉아 낚시를 구경했다. 강주한의 낚싯대 초릿대가 휘어져 아래로 꿀렁꿀렁 움직이더니 다시 느슨해졌다. 낚싯줄을 감는 사이 물고기가 도망가 버린 것이다.

하선우가 반쯤은 졸고 반쯤은 깨어 강주한의 낚시를 지켜보는 동안 그는 몇 마리의 물고기를 더 잡았다. 하선우의 선잠을 보다 못한 강주한이 육지로 돌아갈 것을 부탁했고,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육지를 향해 나아갔다. 복사열에 데워져 미지근한 온기를 품은 바닷바람을 한참을 맞은 끝에 그들은 육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직접 잡은 물고기를 들고 식당을 찾아 회를 뜨고 매운탕으로 배를 채운 뒤 별장으로 돌아왔다. 김장 김치로 쓸 배추도 이보다는 덜 절이겠다 싶을 만큼 둘은 땀에 푹 전 상태였다.

서둘러 몸을 씻고 욕조로 들어간 하선우는 벽에 걸린 벽시계를 졸음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7시 30분이었다. 밤을 꼬박 새워서 그런지 하루가 지나치게 길었다.

“욕조에서 자면 위험합니다.”

하선우는 아랫배까지 오던 물의 수위가 배꼽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느낌에 눈을 떴다. 다른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강주한이 자쿠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자는 줄도 모르고 잤어요.”

잠이 드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오후 8시를 지나고 있었다.

강화도의 별장은 규모는 작지만 욕실은 무척 큰 편이었다. 바다를 향해 큰 창을 내고 그 앞에 원형의 6인용 자쿠지를 두어 해묵은 피로를 풀 수 있게 했다. 일정하게 유지되는 온수가 기분 좋은 정도의 세기로 와류 하며 노곤한 몸을 마사지했다.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서해의 절경을 음미하며 반신욕을 즐길 수 있어 하선우는 석모도의 별장을 찾을 때면 꼭 욕실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피곤하면 일찍 잘까요?”

하선우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강주한에게 물을 튕기며 웃었다.

“잘 거면 자쿠지에는 왜 들어오는데요?”

강주한은 기포 발생기를 끄고 밸브를 돌려 자쿠지 물의 수위를 높였다.

“여기까지 와서 반신욕 안 하면 손해잖습니까.”

강주한은 욕조 옆에 놓인 반신욕 전용 소금을 한 움큼 움켜쥐고 물속에 뿌려 손으로 휘저었다. 수면의 파동이 잦아들자 그의 발가벗은 하반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근육이 단단한 허벅지와 반듯하고 긴 정강이가 보기 좋았다. 하선우는 자신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강주한의 발을 힐끔거렸다. 그의 발이 물에 왜곡되어 꼭 항공모함처럼 커 보였다.

“발 사이즈가 295랬죠?”

“네.”

“300 사이즈도 맞겠네요, 그럼?”

“편하게 신을 때는 300을 신죠.”

“손도 크고 발도 크고 키도 크고 …거기도 크고…….”

하선우의 발바닥에 강주한의 발끝이 닿았다. 그는 굳은살 박인 하선우의 뒤꿈치를 발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히다 발가락을 접어 하선우의 발끝을 감싸 잡아당기기도 했다. 발 크기가 5센티미터 가까이 차이 나 그와 맞댄 자신의 발이 꼭 어린아이 발처럼 작아 보였다.

“기사에서 봤는데 음경의 크기는 발과 손, 코의 크기나 비만 지수에 좌우되지 않는데요.”

하선우는 발을 살짝 띄워 강주한의 발과 발끝 높이를 같게 하며 말을 이었다.

“발이 작다고 음경 크기가 작다는 건 속설인 거죠.”

하선우는 흐흐 웃으며 발끝으로 강주한의 발가락을 눌러 안으로 눕혔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발이 그의 것보다 조금 더 커 보이기라도 한다는 양. 강주한은 끝내 고개를 숙여 웃음을 터트렸다.

“어? 이 타이밍에 웃는 이유를 모르겠네.”

“귀여워서 웃었습니다.”

“네, 뭐…. 성기가 엄청 큰 사람이 그런… 귀엽다는 말을 하니까, 음, 뭐 할 수는 있죠.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작은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하하. 저는 자격지심 있어서 그런 말 한 게 아니거든요?”

“알아요.”

“정말로요. 저 평균보다는 커요.”

“평균이 워낙 작아야 말이죠.”

하선우의 얼굴에 가득했던 항변의 의지가 단번에 꺾여 버렸다. 욕을 들은 것도 아닌데 눈빛이 너울처럼 흔들렸다. 여기서 조금만 더 자극하면 자러 가겠다고 일어날 것 같아 그는 냉큼 하선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선우 씨 안 작은 거 잘 압니다. 선우 씨 자지 빨면 목구멍도 아프지만 그 너머까지 아프거든요.”

“아, 정말! 그걸 위로라고.”

하선우는 질색하며 몸을 틀었지만, 강주한이 그를 제지하며 등 뒤에서 꽉 껴안았다. 아랫배를 감싸 자신에게로 당기며 옆얼굴에 입술을 비비자 하선우의 짜증은 한 번 끓어보지도 못하고 미적지근한 온도로 식어 버렸다.

“아아, 간지럽게 왜 그래요.”

옆구리를 피아노 치듯 손끝으로 간지럽히자 하선우는 허허실실 웃으며 몸을 비틀었다. 강주한은 간지럽다고 아우성치는 하선우를 꽉 껴안고 살냄새를 맡으며 짐승처럼 킁킁거렸다.

장난스러운 시작이었지만 강주한은 빠르게 불이 붙었다. 그는 하선우의 허리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려 자쿠지의 턱에 앉혀 허벅지 사이로 들어갔다. 어깨에 하선우의 무릎 아래를 걸치고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바짝 처박아 물에 젖은 음낭을 입 안에 넣었다. 부드러운 살갗 너머로 탄성 있는 고환이 느껴졌다. 그는 음낭을 머금어 혀로 굴리며 부드럽게 빨았다.

“흐!”

그는 집중한 눈으로 복근이 수축해 안으로 함몰하는 하선우의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입에 압력을 주어 음낭을 한 쪽씩 아플 정도로 빨다, 발기한 좆기둥을 긴 혀로 쓱 핥자 하선우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느꼈다.

“좋아요?”

“하아, 읏, 네, 흐, 네.”

젖병을 빨 듯 귀두를 압력을 가해 빨고, 혀로 요도 입구를 막았다 떼어내며 귀두를 앞니로 살짝 긁기도 했다. 팽팽하게 일어나는 성기를 감아쥐어 절절 흔들자 하선우는 허벅지를 더 넓게 벌리며 강주한의 머리를 당겼다.

목구멍이 찔리는 감각에 혀가 굳고 오심이 치밀었다. 강주한은 성기를 목구멍 너머로 꾹꾹 밀어 넣으며 버텼다. 하선우를 노려보듯 올려다보며 그는 커다란 양손으로 엉덩이를 힘주어 구겨 쥐듯 움켜쥐었다. 목구멍에서 잇따라 올각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압박감에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에 맺혔지만 그는 집요하게 구음을 계속했다.

그는 때로는 치아로 살 기둥을 깨물고, 연한 살가죽을 난폭하게 날름거리기도 하면서 성기를 빨았다. 집요하고도 게걸스러운 자극에 하선우는 힘겨워서 온몸의 힘을 쥐어짜며 헉헉거렸다. 간질간질하게 꽉 막힌 듯한 감각이 해방되며 벼락같은 전율이 치밀었다.

“헉, 가, 갈 것 같아요. 흐, 빼, 빼줘요.”

하지만 강주한은 하선우의 엉덩이를 잡아당겨 목구멍 안으로 삽입이 더 깊어지게 했다. 그는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완강하게 버텼다.

“흐아, 학!”

하선우는 헐떡거리며 사정했다.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진한 정액에 쿨룩거리며 잔기침을 한 강주한이 고개를 조금 뒤로 빼, 다시 능숙하게 구음을 했다. 덥고 비좁은 입 안에서 성기가 녹아 사라질 것만 같은 쾌감에 하선우는 자꾸만 소스라쳤다.

강주한은 더운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목구멍이 억눌리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지만, 하선우에게 삽입하는 쾌감을 집요하게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하선우가 질질 싸며 가는 모습만으로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를 문지르며 그는 정액 섞인 비릿한 침을 성기 위로 툭 뱉었다.

그는 이미 단단하게 팽창해 혈관의 모양이 두드러진 성기를 쯔걱쯔걱 가볍게 문지르며 다리를 벌린 하선우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좆대를 두 손으로 힘주어 쥔 채로, 꽉 다물린 구멍 위를 귀두로 꾹 누르자 틈이 벌어지며 점막이 살갗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흐아!”

마치 입술 앞에 가져다 댄 듯 구멍이 귀두를 뱉지도 씹지도 못하고 질척하게 오물거렸다. 가벼운 전율을 느낀 강주한이 앞이 막힌 듯 비좁은 내벽에 길을 트려 허리를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헥! 흐! 자, 잠깐만요!”

하선우가 강주한의 어깨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더… 더 넓혀줘요.”

“너무 급했습니까?”

“네. 지금 삽입하면 좀… 아플 것 같아요.”

당장 좁은 곳을 쑤시고 싶어 지글지글 끓는 열기로 가득했던 강주한의 머릿속이 찬물을 부은 듯 가라앉았다.

“윤활제 많이 바르고 해 줘요.”

“많이? 언제는 윤활제 조금만 쓰는 게 더 좆 맛이 잘 느껴진다면서요.”

하선우는 몹쓸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렇게 말 안 했거든요?”

“흠, 비슷한 말이긴 했죠.”

“…암튼 이번에는 많이 발라주세요. 욕실 선반 아래 칸이요. 보이죠? 저기 있어요.”

몸을 뒤로 물러 안에 살짝 걸쳐진 귀두를 냉큼 빼낸 하선우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욕실 선반을 가리켰다. 욕조 밖으로 나가 그가 가리킨 선반에서 윤활제를 꺼내 온 강주한은 포장지를 뜯어 본품을 꺼냈다.

“인터넷으로 주문했어요. 애널 섹스 전용 온열 젤이래요.”

뭉툭하게 튀어나온 입구가 달린 뚜껑과 투명한 몸통이 전체적으로 작은 소스 통을 연상케 했다. 강주한은 새롭게 정립되는 욕망을 느꼈다. 하선우가 쾌감에 지쳐 몸을 뒤틀고 자극에 저항하다 결국에는 벌벌 떨며 애원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엄청 미끈거려서 아주 조금만 써도 된대요.”

강주한은 벗겨낸 포장지에 적힌 설명서를 빠르게 훑으며 말했다.

“관장, …의약용인 것 같은데요.”

“어? 아닐 텐데?”

하선우는 멋쩍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줘 봐요.”

비건 수용성 러브젤, 200ml, 병풀 추출물, 글리세린 함유량 60퍼센트, 식용 용도로 사용하지 마세요…. 포장지에 적힌 설명을 눈으로 읽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오해를 정정했다.

“글리세린 함유량이 일반 젤보다 훨씬 높긴 하지만… 의약용은 아닌 것 같은데요? 바닐릴부티에터가 함유된 걸 보면 마사지용품에 가까운 것 같아요. 이게 열 증감제 성분이거드은… 헉! 아!”

차가운 플라스틱 뚜껑이 구멍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하선우의 설명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강주한이 통을 힘주어 눌러 찐득한 점성의 윤활제가 구멍 속에 꿀럭꿀럭 빨려 들어왔다.

“읏, 차가! 응!”

재빨리 엉덩이를 띄웠지만, 강주한이 통을 구길 듯 힘주어 쥔 채로 따라왔다. 구멍에 윤활제 통을 푹 꽂고 이리저리 엉덩이를 흔드는 우스꽝스러운 자세에 하선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강주한은 부륵, 뷰르륵 추잡한 소리를 내는 윤활제 통을 우그려 하선우의 몸속에 젤을 모조리 쏟아내고는 통을 아무 데나 던져 버렸다.

하선우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정도의 새빨개진 얼굴로 굳어 있었다.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포획되기 전 겁먹은 짐승처럼 벽에 바짝 붙어 충격에 휩싸여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뭐, 뭐예요? 뭐예요! 흐앙!”

강주한은 오밀조밀하게 다물린 항문 입구를 중지로 살살 간질이더니, 지체 없이 푹 깊게 꽂아 넣었다.

“싫으면 싸면 되죠.”

강주한은 뻔뻔하게 웃으며 남은 손으로 하선우의 손을 내려 입술이 드러나도록 했다. 하선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춘 그가 말했다.

“사장님.”

“흐, 으으….”

“못하겠으면 사장님이라고 말해요.”

하선우는 크게 부릅뜬 눈으로 강주한을 올려다보았다. 경악에 가까웠던 표정은 서서히 다른 감정으로 변해 갔다. 충격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감정은 걱정이었다. 배설에 대한 두려움에 안에 든 것들을 와르르 쏟아낼까, 반사적으로 구멍을 꽉 조이게 됐다.

그 순간 몸속에 들어온 손가락이 얕게 삽입을 반복하며 점점 더 깊게 파고들었다. 가려운 곳에 약을 살살 바르듯 손가락이 내벽 전체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감각이 너무 달았다. 너무 달아서 저도 모르게 항문에 힘이 풀어질 정도였다.

“자꾸 지릴 겁니까? 조여요.”

혼내듯 몸속의 손가락이 굽어졌다. 작은 언덕처럼 도드라진 전립선을 손가락이 짓문질러 하선우는 흡, 숨을 집어삼켰다. 전립선을 까딱까딱 두드리고 긁어 대는 자극에 절로 몸이 뒤틀렸다. 문지를수록 서서히 더해지는 열감에 몸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의 존재감이 더더욱 두드러졌다.

강주한은 남은 손으로 하선우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엄지와 검지로 유륜의 주변부 살을 모아 빨기 좋게 튀어나오도록 꼬집은 뒤에,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를 혀끝으로 살짝 문질렀다. 주위를 빙글빙글 문지르고 입술만으로 힘주어 눌러 자극하다가 뽑아낼 듯 빨면 하선우의 허리가 절로 휘었다.

“남은 쪽도 빨아줄 테니까 튀어나오게 꼬집고 있어요.”

강주한의 요구에 하선우는 바닥을 짚은 손을 간신히 떼 자신의 유두를 문질렀다. 검지와 엄지의 배면으로 살살 누르다, 심지를 꼬듯 세게 비볐다.

“그만. 빨기 좋게 잡고 있으랬지 누가 즐기랬습니까.”

강주한이 젖꼭지를 손끝으로 튕기며 나무라자 하선우는 흐읍, 숨을 집어삼켰다. 그는 순순히 엄지와 검지로 가슴팍의 살이 두툼하게 튀어나오도록 모은 뒤에 강주한의 입술이 닿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강주한은 혀끝으로 삐죽 치솟은 심을 아주 살며시 문질렀다.

하선우는 벌레가 살갗에 닿는 듯한, 얄팍하게 근질거리는 감각에 애가 탔다. 세게 빨려 살갗이 터도 좋으니 부풀어 오른 젖꼭지를 쓰라리게 빨아줬으면 했다. 온몸을 확 달구는 좀 더 강한 자극을 원했다. 항문이 벌름대며 몸속에 들어온 손가락을 꼭꼭 물자 강주한이 웃었다.

하선우의 바람을 알아챈 그는 송곳니로 유두가 납작해지도록 깨물었다. 표피를 한 꺼풀 벗길 듯 날카롭게 긁으며 팽팽하게 늘어나도록 잡아당기다, 통증을 보상하듯 입으로 힘있게 오물거리며 빨았다.

키스 마크보다 더한 멍이 들 것만 같았다. 바늘이 꽂힌 듯한 통증과 잘근거리는 압박감 사이에 저릿저릿한 쾌감이 치밀어 하선우는 구멍을 조이는 것도 잊고 항문의 근육을 죄다 풀고야 말았다.

“흐아!”

구멍의 둘레가 몸속에 꽂은 손가락의 굵기보다 조금 더 벌어져, 그 틈새로 윤활제가 왈칵 흘러나왔다. 몸속의 것을 게워내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하선우는 허리를 뒤틀며 재빨리 구멍을 좁혔다.

혀를 쯧쯧 찬 강주한은 하선우의 몸속에서 손을 뽑아냈다. 강주한의 손바닥을 흠뻑 적신 윤활제가 그의 손바닥을 타고 욕조 위로 뚝뚝 떨어졌다. 하선우는 어쩐지 부끄러워 항문을 재빨리 조였지만 글리세린 특유의 물처럼 가볍고 기름처럼 번들거리는 촉감은 그에게 계속 벌어져 있는 듯한 불안함을 안겼다.

강주한은 손바닥을 흠뻑 적신 윤활제로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를 끈끈하게 훑어 내렸다. 그는 하선우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회음부에 강주한의 단단한 성기가 살짝 닿았다가, 미끈거리는 감촉만 남기고 떨어졌다.

지금이라도 구멍에 머금고 있는 것들을 싸야 하나. 하선우는 혼란에 잠겨 구멍의 힘을 풀지, 말지를 고민했다. 관장도 했고 몸도 깨끗했지만, 두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섹스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에게 배설과 유사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저, 저 못 하겠… 흑! 아앗!”

강주한은 예고 없이 파고들었다. 뭉툭한 귀두가 굳게 다물린 속을 뚫고 아주 천천히, 그러나 깊게 들어왔다. 당황스러울 만큼 하선우는 살갗이 스치는 모든 부위에서 쾌감을 느꼈다. 쾌락이 온몸을 확 달궈, 식은땀이 쏟아졌다.

“흐아! …하, 끗, 흡, 하아!”

성기를 중간까지만 쑤셔 넣은 뒤, 강주한은 하선우의 허벅지 뒤로 손을 집어넣어 엉덩이를 감쌌다. 몸을 연결한 채로 하선우를 힘주어 안아 든 그는 삽입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하선우의 몸을 강하게 고정하고 욕조의 턱에 걸터앉았다. 덕분에 하선우는 강주한의 성기에 몸이 꿰인 채로 어중간하게 허리를 띄우게 되었다.

“전에 하던 거 마저 해 줘요.”

구멍이 벌렁벌렁 움찔대는 느낌이 유독 과했다. 강주한의 성기가 굵지 않았다면 필시 안에 든 것들을 울컥 쏟아냈을 것이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어깨를 잡아 몸이 뒤로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하며 헉헉거렸다.

“하으, 하던 거, 흐, 라뇨?”

하선우는 되물은 즉시 그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이해했다. 강주한이 출장을 가기 전 트레이닝 룸에서 섹스를 하려던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위에서 아래로 강주한을 굽어보며 그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싶어, 기승위를 시도하려 했었다.

“그날의 흐, 연장선이라기엔… 흣, 너무 과하지 않아요?”

하지만 과하다고, 괴롭다고 말하면서도 하선우는 단 한 번도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쾌감에 대한 역치가 낮아 작은 자극에도 절절한 쾌락을 느끼는 주제에 어떤 섹스든 한계를 긋지 않았다.

“과합니까? 여전히 부족한 것 같은데.”

강주한은 빳빳하게 곧추선 하선우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윤활제가 듬뿍 묻어 미끌미끌한 손바닥으로 대충 몇 번 훑어주자 뒷구멍이 꽉 오므라들어 좆기둥을 불겅불겅 씹었다. 마치 침을 흘리듯 몸 안의 점액을 지려 강주한의 사타구니가 미끄럽게 젖었다.

강주한은 눈앞에 있는 살갗이 까진 유두를 혀끝으로 날름거리며 재촉했다.

“얼른.”

쾌락에 대한 기대로 하선우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곧 그는 마치 명령을 받아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벼랑 끝에서 몸을 내던지는 사람처럼 그대로 푹 주저앉았다.

“아악!”

충격에 새된 비명을 내지른 그가 허벅지를 넓게 벌리며 부르르 떨었다.

“허억, 헉, 흐으….”

하선우는 벌게진 눈으로 강주한을 노려보았다. 강주한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은 죽을 것 같은데 강주한은 그 어떤 자극조차 받지 않은 것 같았다.

하선우는 다시 엉덩이를 띄웠다. 몇 번의 자극이 더해지자 강주한의 얼굴 위로 짙은 흥미가 더해졌다. 날카로운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는 하선우를 집중해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선우는 이미 격류에 휘말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하악! 앗, 아! 흐앙! 힛, 앙!”

신음이 자꾸만 동그랗고 교태 있게 새어 나와 하선우는 입술을 감쳐물었지만 자꾸만 놓치기를 반복했다. 그는 자신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동그란 신음이 싫고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배 속을 꿰뚫는 저속한 쾌락에 더는 수치스러운 신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성기가 몸의 중심을 꿰뚫도록 앉았다가 반쯤 빠져나오게 엉덩이를 띄웠다. 몸속을 가득 채운 점액이 비좁은 내장 속에서 역류했다가, 싸하게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배설의 욕구와 내벽이 짓이겨지는 쾌락의 공존은 끔찍한 자해에 가까웠다.

“하으, 응! 흡, 흐응!”

절로 눈물이 터져 나오는 쾌감이었다. 하선우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끔찍한 쾌감을 좇아 뜀을 뛰었다. 허벅지 근육이 뻐근해 지쳤음에도 하선우는 강주한의 단단한 좇기둥으로 몸속을 휘저어 원하는 깊이 이상으로, 쾌락의 역치를 넘어 오랫동안 자극했다.

입술을 짓씹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흐느끼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뒤통수를 감싸 자신에게로 당겼다. 흐무러진 과육이 짓이겨지고 곤죽이 되어 가는 환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쾌락으로 몸 안의 구석구석이 난도질 되는 것 같았다. 점점 더 견딜 수가 없어졌다.

오한을 느꼈다. 부끄러움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더는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배설하지 못한다면 죽을지도 몰랐다. 하선우는 더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일으켰다.

“안돼애애! …힉, 흐아! …그만!”

그러나 강주한은 너무나도 손쉽게 하선우의 의지를 꺾었다. 등 뒤로 손을 뻗어 양쪽의 어깨를 감싸 밑으로 당겨 하선우는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엉덩판이 잔뜩 짓눌리도록 완전히 주저앉아 성기를 뿌리까지 머금은 순간 사정의 느낌이 치밀었다.

“허억!”

다시 또 몸이 들리고 이번에는 밑에서 강주한이 허리를 쳐올렸다. 배가 싸한 아픔과 배꼽이 떨리는 진한 쾌감에 하선우는 구멍을 옴죽옴죽 조이며 괴롭게 사정했다.

강주한은 온몸을 뒤떠는 하선우를 꽉 끌어안고 허리를 들썩였다. 미지근했던 윤활제는 어느새 뜨겁게 달아올랐고 계속된 삽입에 찰기가 더해졌다. 내벽이 좆기둥에 엉기듯 따라와 자극이 컸다. 그는 비좁게 꺾이는 내벽을 좆머리로 쾅쾅 짓찧으며 하선우의 멍하니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흐아, 아! 아!”

하선우의 비좁은 내벽에 성기가 들락거릴 때마다, 윤활제가 역류와 순류를 반복했다. 강제적인 배설과 주입을 유도하는 움직임에 전신에 으스스한 오한이 치밀었다. 지나친 쾌감이 그가 견딜 수 있는 쾌락의 역치를 한껏 넓혔다. 하선우는 그 감각에 꿰여 한계에 억지로 머물렀다. 경직된 몸에서 일체의 긴장이 빠져나가 무릎이 풀려 주저앉았다.

멍하니 도취되어 식은땀을 쏟아내며 일방적인 삽입을 당하던 그는 한참 만에 숨을 꺽, 꺽 삼켰다. 숨을 멈추고 있는 줄도 모르고 쾌락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흔들었다.

“쌀래요. 흐아! 아! 놔, 놔요. 싸게… 해줘. 아, 아! …그만! 그만! 사, 사… 읍!”

우스꽝스러운 세이프 워드를 간신히 입 밖에 냈지만 강주한이 커다란 손으로 하선우의 얼굴을 강하게 감쌌다. 그는 집요하게 입 맞추며 하선우가 어떤 말도 쏟아내지 못하도록 비명과 신음까지도 틀어막았다.

감각 속에 비좁게 욱여넣어져, 하선우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쾌락과 뒤죽박죽 뒤섞인 아릿한 통증뿐이었다. 하선우는 자신을 태우는 뜨거운 감각을 방출하고 싶어 애가 탔다. 그는 흐느껴 울며 강주한의 입술에 매달려 도착적으로 빨았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간 틈을 타 하선우는 목이 멘 소리로 울며 모자란 호흡을 삼켰다. 급히 숨을 몰아쉬어 산소를 모은 그는 이번엔 자신이 먼저 강주한의 입술을 찾아 틀어막았다. 가능하면 강주한을 질식시키고 싶었다.

내벽 안에서 좆이 단단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비좁은 틈 속에서 피스톤질하던 강주한은 하선우의 내장을 꾹 짓누르며 감각의 첨단을 들어 올렸다. 뜨끈한 정액이 솟구쳐 결장 너머로 흥건하게 고였다.

하선우는 격렬한 통증과 도착적인 쾌락에 사로잡혔다. 연약하게 구부러진 내장이 달콤하게 저미는 듯한 쾌감에 입에 절로 신 침이 고였다. 뒷구멍이 좆의 뿌리를 빠득빠득 빨아먹고, 내장의 깊고 우묵한 부위는 펠라를 하듯 귀두와 축축하게 맞닿아 오물거렸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거침없는 피스톤질.

강주한은 비좁은 점막을 새길을 내듯 위로 들어 올리고, 몸을 녹이듯 빠져나갔다. 하선우는 그때마다 쾌감에 미쳐 흐느껴 울었다. 동물적 정욕과 배설의 쾌감이 뒤섞였다. 그는 강주한의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먹어 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곧바로 복부가 팽만하는 싸한 느낌에 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마침내 강주한이 하선우의 몸을 일으켰다. 구멍 안에서 희뿌연 점액이 높은 수압에 떠밀려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하선우는 배설의 난잡한 쾌감에 엉엉 울며 재빨리 구멍을 틀어막았지만 한참 이완되어 벌어져 있던 구멍은 곧바로 오므라들지 못했다. 탁구공만 하게 뻥 뚫린 구멍 틈새로 꼴꼴꼴 소리를 내며 정액이 섞인 윤활제가 거품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숨 막히도록 음란한 광경을 집중해 바라보던 강주한은 먹은 것들을 희게 게워내는 구멍 속에 중지를 찔러 넣어 함부로 긁었다.

“아으으!”

길게 울며 하선우가 뒤로 넘어가려 했다. 하선우의 등허리를 감싸 자신에게로 잡아당긴 강주한이 말했다.

“벌어져 있어요.”

“흐앙!”

“평생 이렇게 벌어져서 살면 어쩝니까.”

“조금만 있으면… 흡, 다물릴, 거예요. 흣, 아아, 으응!”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하선우를 일으킨 강주한은 그의 몸을 돌려 욕조의 턱에 올라가도록 했다. 쪼그려 앉아 다리를 넓게 벌리고 엉덩이를 뒤로 쭉 내민 자세를 만들었지만, 하선우는 훌쩍거리며 울면서도 부끄럽다는 이유로 거부하지 않았다.

“결국엔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울기나 하고.”

강주한은 뻔뻔하게 말했다.

“알잖아요. 당신이 울면 난 더 울리고 싶어지는걸.”

엄지 두 개가 구멍 속으로 폭 박혀 들어왔다. 평소였다면 옴쭉 조였을 구멍이 완전히 이완되어 강주한이 좌우로 당겨 벌리는 대로 주름 하나 없이 벌어졌다.

따듯한 풀죽 안에서 손가락을 휘젓는 듯한 느낌을 즐기던 그는 엄지를 빼냈다.

그는 새로운 기분으로 정액과 윤활제가 뒤섞여 희뿌연 거품이 된 점액 사이로 단번에 네 개의 손가락을 깊게 찔러 넣었다. 중지로 부풀어 오른 점막을 살살 긁어주자 축 늘어졌던 하선우의 성기가 빳빳해지며 일어섰다. 성기로 전립선액을 뚝뚝 지리며 하선우는 넋 나간 신음을 흘렸다.

“으응, …으, 아, 아, …흐아!”

아무렇게나 쑤시고 가지고 노는데도 구멍은 계속 헤 벌어져 있었다.

“죄 풀어져서 주먹도 들어가겠어요.”

“흐아! 아, 안 돼, 요, 그런, 그런 건 싫, 싫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섬뜩함에 척추로 오한이 치밀었다. 전율인지 쾌감인지 알 수 없는 소름이었다.

부풀어 오른 전립선을 집요하게 자극하던 강주한은 손가락을 웅크리며 구멍 속에서 뽑아냈다. 그는 물기에 젖어 쪼글쪼글 부르튼 손가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욕조의 물로 대충 손을 씻고 서로의 하반신에 가볍게 물 칠을 한 그는 물기도 훔치지 않고 하선우를 안아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하선우를 내려놓았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누운 하선우를 그의 짐승처럼 커다란 몸이 뒤덮었다. 그는 하선우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더운 온기를 내뿜는 자신의 기다란 좇기둥을 잡아, 뱀의 굴처럼 아가리를 벌린 하선우의 항문 사이로 뭉툭한 귀두를 쑤셔 넣고 허리를 단번에 내렸다.

“흐아아! 읏, 윽, 하아!”

뿌리를 끝까지 집어삼킨 구멍은 조금 전의 섹스와 다르게 훨씬 더 찐득하게 살갗에 달라붙었다. 몇 번만 피스톤질해도 뜨겁게 불이 붙을 것 같은 마찰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강주한의 성기가 하선우의 장기를 으스러트릴 듯 우악스럽게 찔렀다. 하선우는 몸이 반으로 접히고 등만 소파에 걸쳐진 자세로 강주한의 체중까지 더해진 채로 박혀야 했다.

“응! 윽! 하읏! …주한, …윽, 씨, 헉!”

하선우는 턱 막힌 신음을 토하며 연이어 짓찧는 난폭한 삽입을 버티다, 애타게 강주한의 이름을 불렀다. 성기가 귀두까지 빠졌다가 뿌리까지 처박힐 때면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지르며 구멍을 빠듯하게 조였다.

하선우는 강주한이 저를 위에서 아래로, 말을 타듯 깔아뭉개 삽입하는 체위가 좋았다. 귀두가 치명적인 부위에 아프게 닿을 때면, 통증과 전율에 절로 절규를 내지르게 되었다.

강주한의 품에 갇혀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틀어박힌 성기를 빼낼 수 없고, 자세도 바꿀 수 없는 강압적인 체위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고 도파민이 폭주했다.

그는 기어이 강주한의 등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손톱자국을 남겼다. 하선우는 더 강주한을 느끼기를 원했다. 강주한이 그에게 퍼붓는 쾌락에 잠겨 익사하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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