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지툰소설
3.
사륜구동 휠체어를 기업에서 생산하지 않는 데는 공학적 이유가 있었다. 휠체어의 바퀴를 직경 30센티로 만든 시도까지는 좋았으나 가로 폭이 좁고 세로로 긴 휠체어의 특성상 무게 중심이 위로 쏠렸다. 경사가 높거나 걸림돌이 크면 아찔하게 휘청여 넘어질 위험이 컸다.
결정적으로 전동 휠체어가 아닌, 전동 스쿠터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었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전동 휠체어의 속도를 최대로 높여 빠르게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진 하선우는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어, 어제 섹스가 너무 과격해서 허리가 나간 거예요. 절대 휠체어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하선우는 끙끙거리면서도 씩씩하게 일어나 몸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그는 깜짝 놀라 한달음에 달려온 강주한의 걱정을 무색하게 하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휠체어치고 속도가 굉장한데요? 스릴 넘쳐요.”
강주한은 모래사장에 파묻혀 헛바퀴 도는 휠체어의 전원을 껐다. 그는 휠체어를 일으켜 세워 모래를 털어내며 딱딱하게 말했다.
“속도 높이지 말아요. 평지도 아니고 위험합니다.”
“모래사장인데 뭐 어때요. 넘어져도 괜찮아요.”
강주한은 목 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참으며 아무런 내색 없이 하선우의 머리카락 곳곳에 숨은 모래를 털었다. 마음 같아서는 휠체어를 못 타게 하고 싶었지만 휠체어를 오프로드 타입의 사륜구동으로 업그레이드한 당사자에게 당신의 작품은 위험하니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닥에 파묻힌 도톰한 무릎 담요를 두드려 모래를 탈탈 떨어냈다. 새벽까지 계속된 섹스로 엉덩이와 허리가 아픈 하선우를 위해 휠체어에 방석 대신 깔아준 이불이었다.
“뭐… 직접 타고 험지를 다녀보니까 제 작품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걸 알겠네요. 어쩔 수 없죠. 전 공학자가 아니니까.”
민망함을 감추려 허허 웃은 하선우는 다시 휠체어에 앉아 스위치를 눌렀다. 휠체어의 기능을 실험하고 싶어 안달이 난 물색없는 남자를 말리려 강주한은 속도계의 버튼을 최저에 맞추었다.
“앞서가지 말고 속도 맞춰 걸어요.”
“알았어요.”
강주한은 휠체어의 속도에 맞춰 하선우의 곁을 보조해 걸으며 모래와 돌투성이인 바닷가를 걸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별장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는 보문사 사찰이었다.
“괜찮아요? 휠체어 탈래요?”
“안 힘들어요. 이 정도는.”
강주한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하선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땀을 잘 흘리지 않는 강주한이었지만 내리쬐는 뙤약볕에는 그도 어쩔 수 없는지 연신 땀을 훔치고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보문사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사찰은 석모도 안에서 가장 높은 산방산의 일맥과 이어진 낙가산의 자락에 있었다. 길이 잘 닦였지만 산행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름길을 쉬지 않고 올라야 했다.
주차장을 지나 사찰의 초입에서 입장료를 내고 돌아온 강주한은 모자를 벗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미지근한 생수로 목을 축였다.
“엄청 큰 사찰이네요.”
하선우의 말에 강주한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처음 옵니까?”
“네. 강화도에 올 일이 없었어요. 특히 석모도 섬은 주한 씨 별장 아니었으면 절대 방문할 일 없었을걸요?”
사찰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국내 4대 해안 사찰 중 하나라 휴가철 방문객들로 붐빌 거라 예상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관광객이 드물었다. 8월 한낮의 지글지글한 뙤약볕을 맞으며 가파른 오르막길 위의 사찰을 방문하고자 하는 방문객이 드문 까닭이었다.
강주한은 얼굴을 가리려 썼던 모자를 둘둘 말아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하선우의 휠체어와 속도를 맞춰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을 지났다. 그 이후로도 완만한 오르막길과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허벅지 근육이 단단하게 팽창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와 속도를 맞추려 휠체어의 속도를 조금 더 저속으로 낮추었다.
다행히 사찰의 경내는 평평한 평지였다. 아기자기한 석상이 모인 오백 나한을 구경하다 수령이 600년이 된 향나무 노목의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 땀이 식은 뒤에는 대웅전인 극락보전의 문밖에 서서 부처의 조각상과 선명한 원색의 연등을 설렁설렁 살폈다.
하선우는 불교를 포함해 종교에 관심이 없어 모든 게 비슷비슷한 풍경으로 비칠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 곳, 끝없는 계단이 드높게 펼쳐진 웅장한 암봉은 그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해수관음 성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이래요.”
하선우는 마애해수관음 성지 표지판을 휴대폰 카메라 앱으로 찍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기도 발원하면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잘 받게 된대요. 기도발이 좋나 봐요, 여기.”
“보문사는 사찰 중에서도 특히 기복 신앙의 색이 짙은 곳이죠. 산과 지역 일대의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할 만큼 신라시대 때부터 복을 빌러 찾아오던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어요?”
강주한은 무심히 말했다.
“방문 장소를 사전 조사하는 건 나한테는 기본입니다.”
어휴, 잘난 척은.
하선우는 ‘서로의 짜증 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에 그의 장황한 지식 자랑이 거슬린다고 목록화할까 생각했지만, 그로 인해 득을 볼 때도 많았으므로 일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대신 언젠가는 더 많이 공부해서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올라가 봐야겠죠?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으면 엄청 영험할 것 같은데.”
“관세음보살 좌상은 일제 강점기에 만든 겁니다.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영험함을 기대한 거라면 힘든 걸음 안 해도 돼요.”
하선우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지그재그로 나 있는 419개의 계단을 지나야 보문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마애관세음보살을 볼 수 있었다.
지난밤 섹스로 온몸을 지나치게 혹사한 탓일까, 컨디션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왜 다음날의 컨디션이 엉망이 될 걸 알면서도 1차원적인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섹스에 얽매이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욕실과 소파에서 섹스를 끝내지 못하고 침실에 올라가서도 서로의 몸을 찾았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성스레 핥아 주다가도 모든 성감대가 멍이 들 만큼 빨았으며, 구멍이 한계까지 늘어나도록 박고 또 박았다.
그는 결국엔 하선우를 완전히 벌어진 상태로 만들었다. 그는 무방비한 몸을 끊임없이 탐하고 침입했다. 하선우는 끝내 자신의 구멍이 영원히 닫히지 않게 될 거란 어리석은 착각에 빠져 눈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와 몸을 겹쳐 일어나는 불길을 때론 막을 수가 없었다. 하선우는 몸 안에서 움직이는 그를 매번 새롭게 발견하고 싶었다. 모든 기운이 소멸할 때까지,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그와 절박하게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대가는 썼다. 하선우는 바닥을 치는 컨디션으로 피부를 녹여 버릴 듯 퍼붓는 불볕 아래를 걸어야 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선우는 어떤 우주적이고 인간에게 우호적인 존재가 24시간 귀를 열고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려 대기 중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 신에게 연결된 주파수가 운 좋게 맞아, 단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가요. 가고 싶어요.”
하선우는 휠체어의 시동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와 엉덩이는 물론이고 무릎과 어깨, 결리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웠다.
예전이었다면 계단 위의 풍경이 천금처럼 값지고 멋있다 하더라도 귀찮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계단 근처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생겼고, 그 소중한 누군가가 무사하고 평온한 하루하루를 맞이했으면 했다.
“업혀요.”
그 소중한 대상이 하선우에게 등을 보이며 말했다.
“힘 자랑하려고요?”
“다리품 풀기에 적당한 높이라 업고 가 보려고요.”
“됐어요. 소원 빌러 가는 데 이 정도 수양은 해야죠.”
하나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휠체어 누가 가져가지는 않겠죠?”
“소원을 빌러 오는 곳에 나쁜 마음 먹은 사람이 오겠습니까? 괜찮을 겁니다.”
강주한은 다른 이유를 감춘 얼굴로 능청맞게 대답했다. 이토록 눈에 띄는 휠체어를 가져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본심이 눈에 그린 듯 보였지만 하선우는 어쩐 일로 거짓말이 뻔히 보이는 그의 말을 얼렁뚱땅 믿어주기로 했다.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휠체어를 구석에 밀어놓고 그들은 대웅전과 옥으로 만든 불상사의 사잇길로 걸어갔다.
아파트 20층에 달하는 높이의 계단 위로 군데군데 수풀이 우거져 있고 알록달록한 연등이 그늘을 만들어 숨 돌릴 수 있었지만, 지난밤부터 새벽까지 체력을 모두 소모한 하선우는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업어준다고 회유하는 강주한을 뿌리치고 꿋꿋하게 정상인 암봉까지 오르고 나니 절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서 아래를 보자 보문사 경내의 풍경은 물론, 서해 바다를 낀 근처의 섬과 암초처럼 올망졸망하게 자리한 무인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석모도에서 가장 높은 해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여, 짠 내 섞인 바닷바람을 맡으며 아늑하고 순한 산세를 즐길 수 있었다.
눈썹 모양의 커다란 돌에 새겨진 마애관세음보살 불상 앞에는 인적이 없었다. 한낮의 뙤약볕이 가림막 하나 없이 내리쬐는 산 정상에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불전 외는 소리만 아스라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누구도 기도를 시작하자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나무로 만든 단에 신을 벗고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저마다 정숙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맞바로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정성껏 기도를 드리고 있으려니 오래전 깎아지른 암벽을 올라 부처님의 은덕을 바라며 기도를 드렸을 불자가 된 것마냥 마음이 경건해졌다.
곁눈으로 강주한을 슬쩍 살피자, 그는 미간 사이가 내 천(川) 자가 되도록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종교 활동에 열심이라 생각하며 하선우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두피에서부터 흘러 턱 끝에 고인 땀방울이 나무 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땡볕 아래에 몇 분만 더 있다가는 일사병이 올 것 같아 하선우는 서둘러 기도를 끝냈다. 마침 비슷하게 기도를 끝낸 강주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사찰의 팸플릿으로 꽁꽁 싸맸다.
“뭐예요?”
“보시요.”
“보라고요? 뭘 봐요?”
눈썹을 추켜세우고 하선우를 마주 본 강주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을 헷갈리게 했군요. 쌀을 공양한다는 의미의 보시를 말한 겁니다.”
“아아, 그 보시.”
공연한 말을 해서 알고 있던 걸 틀렸다는 생각에 민망해진 하선우는 찡그린 콧등을 손톱으로 긁적거렸다. 강주한은 사소한 일로 낙심한 그가 귀여워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복전함에 사찰의 팸플릿으로 감싼 지폐를 집어넣었다.
“얼마 넣었어요?”
강주한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네? 알려줘요. 재벌은 이런 일에 얼마 써요?”
“글쎄요. 선우 씨 기도 값까지 가진 현금을 다 넣었으니 정성을 봐서라도 소원 들어주시겠다 싶은 정도?”
그들은 돌을 깎아 만든 비좁은 길과 우거진 수풀을 가로질러 쌓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올라갈 때는 곡소리가 나오도록 힘들었는데 내려가는 길은 더없이 기분이 상쾌해 하선우는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조금 전 그냥 지나쳤던 용왕단구룡 조각품이 나타났다. 절경이 좋은 위치에 넓게 층계참을 내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난간 앞에 여의주를 쥔 용 조각을 전시한 것이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용의 조각을 보며 소원을 빌었는지 소원지가 담긴 유리병이 주변에 가득했다.
“소원지 밑에서 팔던데 사 올 걸 그랬어요.”
아쉬워하는 하선우에게 강주한은 말했다.
“더 높은 곳에서 더 영험한 분께 빌었으니 들어주시겠죠.”
“그런가?”
“불상 앞에서 무슨 소원 빌었습니까?”
“말하면 기도 효과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하선우는 걱정하면서도 순순하게 털어놓았다.
“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 주시고, 우리 두 사람과 가족 모두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평범하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잖아요.”
“태한이도?”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와 하선우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 그 자식은 빼야 했는데!”
강태한은 한적한 산책길에 성가시게 따라붙는 도깨비바늘 같은 자식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소식만큼이나 싫어하는 사람들의 소식 또한 궁금한 법이기에, 하선우는 옷에 들러붙는 도깨비바늘을 떼어 내는 기분으로 말했다.
“그 자식은 뭐 하고 지낸대요?”
“석사 학위를 따려고 혈안이라고 하더군요. 공부를 싫어하는 녀석이 학위에 목매는 걸 보면… 학교가 못 견디게 끔찍한가 봐요.”
“그래도 사고 칠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사고를 치기는 했습니다.”
“네?”
하선우는 흥미를 숨기지 못하고 눈을 빛내며 강주한을 향해 몸을 완전히 돌렸다.
“대학 복도에 걸려 있던 남부연합기를 찢는 바람에 꽤 문제가 됐었죠. 그 깃발을 복도에 내걸었던 학생이 인종 정책 갈등으로 민주당에서 탈당한 남부 정치인 집안의 자녀였거든요.”
백인들이 대다수인 남부의 대학에서, 인종 분리 정책의 상징 같은 깃발을 찢다니. 역시 보통의 또라이가 아니다 싶었다. 강태한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하선우는 조금 전, 못되게 먹었던 마음을 고쳤다. 소원을 포괄적으로 빌길 잘했다. 미친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한국으로 살아 돌아오려면 마애관세음보살님이 강태한도 지켜주셔야 했다.
“주한 씨는 무슨 소원 빌었어요?”
용왕단 조각의 맞은편 난간 너머로 산의 낮은 등선마다 아기자기한 돌탑군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을 보러 방문한 관광객과 신도들이 정성을 담아 쌓은 돌탑이었다. 강주한은 그중에서 사람들의 손길이 비교적 닿지 않을 높이에 있는 무너진 돌탑을 다시 쌓고 있었다.
“선우 씨에 대해 함부로 말한 사람들 인생 고달파지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뜻밖의 말에 하선우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요? 나는 하도 열심히 빌어서 엘텍전자 시가 총액 세계 1위 되게 해 달라고 비는 줄 알았어요.”
강주한은 몸을 돌려 귀를 의심하듯 잠시 멍한 표정으로 하선우를 보다, 자기도 모르는 결에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함박꽃나무가 만개한 듯한 그의 환한 웃음에 하선우는 왜 사람들이 함박웃음이란 표현을 쓰게 되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강주한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싣고 말했다.
“그 소원 좀 끌리긴 하네요.”
“소원 다시 빌러 갈까요?”
“됐습니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이뤄 볼게요.”
“보문사 석상의 기도발이 좋다니까 아쉬워서 그러죠. 그러게 좋은 데 와서 왜 그런 소원을 빌어요? 난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하선우는 강주한의 골절 소식을 들은 이후로 한가하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자료를 찾고 철물점과 의료기점을 돌며 재료를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고, 강화도와 성남을 오고 가며 출퇴근을 반복하는 동안 강주한의 건강 문제 외에는 그의 관심사에서 모두 지워 버렸다.
그는 강주한이 말하기 전까지 동영상 사이트에 직무 영상 VLOG를 올렸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난 잊지 않았습니다.”
강주한은 팔꿈치 길이만 한 돌탑 위에 얹을 적당한 돌을 신중하게 찾았다. 마침내 아래가 평평하고 윗부분이 뾰족한 돌을 찾은 그가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탑 위에 마지막 돌을 올렸다.
하선우는 그가 사찰을 방문해 419개의 계단을 올라 넉넉한 보시를 했음에도, 그가 절대적인 존재를 향해 진지하게 소원을 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고작 악플러를 저주하는 일로 419개의 계단을 오르는 정성을 들이기엔, 강주한에게는 악플러들의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어줄 효율적인 다른 방법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옆모습을 흘긋거렸다. 잠깐이지만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단단한 냉소는 하선우를 당황하게 했다. 그가 드물게 보이는 냉정함은 그의 인품을 의심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상하게 여기게 했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을 불신하던 과거를 다시 마주하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하선우는 더는 그런 의심을 품고 강주한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박애주의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가 가진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못돼지지 말아요.”
강주한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못된 짓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작도 하지 말라고요.”
하선우는 다정하게 어르며 강주한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목덜미에서 기분 좋게 풍기는 보디 워시 향에 하선우는 심각한 와중에 뜬금없이 같은 샴푸와 같은 보디 워시를 써도 왜 그의 몸에서 향기가 훨씬 더 강하게 발향될까를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할거죠?”
하선우는 대답 없는 그에게 몸을 더 밀착하며 물었다.
“불법적인 일이든, 합법적인 일이든 절대 안 돼요.”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악플러의 모습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강주한이 손을 쓴다면 악플러들은 하선우와 합의할 새도 없이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게 되어 얼떨결에 전과자가 될 것이다. 그들의 불행은 높은 확률로 거기서 끝나지 않고, 국내 최고의 법률사무소를 통해 민사 소송을 당할지 모른다.
하선우는 악플 하나로 인생을 시궁창에 몰아넣게 될,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그들의 인생이 아주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에 힘쓰지 말아요.”
하선우는 다시 한번 거절의 뜻을 밝혔다. 거듭된 거절에 강주한은 하는 수 없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하선우는 근심을 떨쳐 금세 환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 악플러들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불법적인 일은 하지 말라면서요. 신상 정보를 캐는 건 불법입니다.”
하선우는 강주한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에이, 약간의 불법 정도는 눈감아 줄게요.”
강주한에게 듣게 된 악플러들의 정체는 놀라웠다. 악플러들의 신상을 일부 파악했는데 대부분이 10대 소년들이었다. 중학생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 순으로 고등학생이 많았지만, 초등학교 4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도 있었다.
학업 스트레스가 극심한 것일까, 아니면 요즘 세대의 공격성이 눈에 띄게 높아진 걸까. 직무 영상 VLOG가 하선우의 외모를 두고 지나치게 극찬하는 바람에 불특정 다수의 어그로를 끌었다고는 해도,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가혹한 조롱을 해 대니 참 몰인정하게 느껴졌다. 하선우는 진심으로 이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어 잠시 우울해졌다.
하선우는 시들병을 앓는 노인처럼 쓸쓸하게 말했다.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어린 것들이 사람 얼굴 보고 부패가 진행 중이라고 조롱이나 하고.”
“그 말은 ……40대 교수가 한 겁니다. 평소에도 악플을 많이 달던 사람이더군요.”
“교수가 그런 짓을 한다고요?”
경악에 차 외쳤던 하선우는 곰곰이 생각을 곱씹었다.
“하긴… 발효와 부패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기분 나쁜 악플이기는 했어요. 교수가 된 이후로 심리적으로 비뚤어진 걸까요? 우리 연구소에도 강의 나가는 분들이 있는데 또라이가 많긴 해요.”
하선우는 걱정이 섞인 눈으로 물었다.
“설마 악플러가 우리 연구소 다니는 사람은 아니겠죠?”
“아닙니다.”
하선우는 눈에 띄게 안심해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타인의 불행에서 즐거움을 얻고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보통 한 가지 잘못만 하지 않는다. 하선우와 강주한 모두를 분노케 했던 악플러는 서울의 유명 대학에 재직 중인 40대 후반의 교수였다.
그는 정부와 엘텍을 포함한 대기업으로부터 지원받은 연구비를 수없이 횡령하고 대학원생들을 착취했다. 그러나 그의 부정은 외부에 알려진 바 없었고 그는 정교수로 취임하여 굳건하게 교수직을 지키고 있었다.
누군가의 신고가 없다면, 앞으로도 별 탈 없이 그 자리를 지키게 될 터였다.
“주한 씨는 괜찮아요?”
하선우의 곁에 앉아 속으로 사악한 생각을 하며 서해의 풍광을 바라보고 있던 강주한은 고개를 돌렸다.
태양 빛이 너울거리는 수면에 반사돼 하선우의 얼굴이 유독 새하얘 보였다. 더위에 약한 그가 땀을 뚝뚝 흘리며 걱정을 담은 눈길로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뭐가 말입니까?”
“주한 씨는 저보다 훨씬 악플이 많이 달릴 거 아니에요.”
강주한을 향한 대중의 반응은 대다수의 재벌, 특히 강태한에 비하면 온건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그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신경 안 씁니다.”
“말도 안 돼. 나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말 더듬는 어린애가 말한대도 인내심을 갖고 귀담아들을걸요?”
강주한은 검색 창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본 게 언제인가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했지만 그가 자신의 이름을 직접 검색했던 일은 기억에 없어 그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나에 대한 평판과 여론은… 이미 이사회의 평가와 언론 기사를 통해 접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주가와 매출, 기업 평가 등급처럼 객관적인 수치로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일반 대중의 ‘강주한’이란 개인에 대한 평가가 궁금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 정도로 타인의 평판에 관심이 없을 수가 있는지. 그는 자신을 시스템의 일부처럼 여겨 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경영인으로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늘 평가받기 때문인지… 그 외의 세평을 신경 쓰지 않지만.”
강주한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하선우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한 사람만큼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궁금하긴 합니다.”
그는 하선우의 턱에 고인 땀방울과 이마에 송송 내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톡톡 찍어 냈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그 리스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어요.”
하선우는 자꾸 움직거리는 입술을 꾹 다물어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 해도 강렬한 만족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행복의 몸부림을 치는 그에게 강주한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웃지 그래요?”
“아, 진짜. 그런 로맨틱한 말은 면역력이 없단 말이에요!”
좋으면서 괜히 투덜거린 하선우는 입술을 쪼뼛 내밀었다. 새 부리처럼 튀어나온 입술을 본 순간 강주한은 그에게 공기처럼, 내리쬐는 햇살처럼 닿고 싶어졌다.
그는 뙤약볕에 따끈하게 열이 오른 하선우의 머리카락을 커다란 두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뾰족하게 다물렸던 입술이, 강주한의 입술과 마주 닿자 살며시 벌어졌다. 그는 하선우의 숨결과 맛, 체온을 느끼며 무한의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불볕을 피해 모든 사람이 그늘 아래로 부지런히 숨어든 8월의 한적한 오후, 서로를 음미하기에 좋은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