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6/26)

⫸ 아지툰소설   

4.

하선우는 시린 눈을 찌푸리며 모니터를 힘주어 노려보았다. 창문으로 들이비친 햇살이 모니터에 반사돼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 있을 특허 미팅 회의로 변리사와 검토할 자료를 정리해야 하건만 이대로는 도무지 일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선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자리에서 경원우 책임연구원이 자꾸만 그의 신경을 갉작갉작 건드리고 있었다.

“오전 업무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일, 그러니까 수요일에 있을 전고체 배터리에 적용할 실리콘의 농도를 실험 중인, 아니, 실험하려고 하는 것을 준비하려고 하는 것을 하는 겁니다. 어? 야, 김남구 웃어?”

일의 사단은 바로 어제 일어났다. 마케팅 부서의 권 팀장이 평소 친분이 있던 경원우에게 미팅을 요청해 과중한 업무를 떠넘겼다. 엘텍케미칼과 기초과학연구소 간의 업무 협약이 있을 예정이니, 직무 영상 VLOG를 촬영하며 업무 협약식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본래 권 팀장이 직무 영상 VLOG 촬영을 고려한 대상은 하선우였다. 하선우가 촬영한 VLOG의 누적 조회수가 지난 2주 동안 17만을 넘어 기초과학연구소 채널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차지하게 되어, 그 인기에 힘입어 하선우 연구원의 맞춤 콘텐츠도 준비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VLOG 촬영은 없다는 하선우의 단호한 거절에 권 팀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하선우와 같은 연구실에 근무하는 경원우 책임에게 촬영을 요청했다. 사람은 좋지만 은은한 관종기가 있는 경원우는 기다렸다는 듯 권 팀장의 귀찮은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서 하선우는 오늘 아침부터 경원우 책임이 명함의 절반 크기인 액션캠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잠시 후 12시부터 점심 식사를 하, 할 건데요, 오늘은 구내식당을 이용할 예정입니다. 그다음에는 소강당에서 엘텍케미칼과 기초과학연구소 간의 업무 협약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배터리 건물, 아, 아니. 엘텍전자와 연구소 간의 공.동.연구.소, 아, 아니지 아니지. 편집자님? 여기는 컷뜨 컷뜨.”

경원우는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는 다시 한번 심기일전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엘텍케미칼과 기초과학연구소에서 공동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번, 소강당을 갑니다. 아, 아니, 편집. 컷뜨, 컷뜨. 제가 한번 소강당에서 열리는 업무 협약식을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하선우는 편집자가 과연 경원우의 영상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한 문장이면 족할 이야기를 어찌나 중언부언 늘어놓는지. 참 똑똑한 사람인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그의 모습이 속상했다.

하선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VLOG를 찍는 경원우를 지켜보다, 화면에 떫은 자신의 얼굴이 담길세라 재빨리 표정을 수습해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창가 햇살이 실내로 강하게 쏟아져 화면이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화면의 밝기를 최대로 올려도 애초부터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싸구려 모니터는 시인성이 떨어져 눈만 침침할 뿐이었다.

하선우는 가급적이면 경원우의 눈길을 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시가 바빠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선임, 블라인드를 내릴 거야?”

“네? 예.”

“내 쪽도 내려줄래?”

“예.”

“고마워, 하 선임. …아! 편집해 주시는 분! 아이디어 하나만 내겠습니다. 이 장면에 사이좋은 3연구동의 제2그룹 연구원들이라고 텍스트로 강조를 쎄게! 해 주시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하선우는 경원우 책임이 추구하는 콘셉트가 무엇일지 자못 궁금해졌다. 군말 없이 그에게 장단을 맞춰 주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영상에 달릴 악플을 보고 그가 상심할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찍을걸.

그의 딱한 모습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는 사악한 즐거움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선우는 그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만을 느끼도록 양심을 서둘러 단속했다. 그는 군말 없이 경 책임의 요구를 들어준 뒤에 자신의 자리 뒤편 창가로 가 블라인드를 내리려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문득 창밖의 부산한 풍경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초과학연구소의 소강당 건물은 하선우가 근무하는 3연구동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소강당에서는 주로 학술 발표회와 특강이 열렸으나 가끔은 이슈에 따라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오늘 열리는 행사는 엘텍케미칼과 기초과학연구소 간의 업무 협약식이었다.

「경! 엘텍케미칼-기초과학연구소 배터리 공동연구센터 설립 축!」

‘엘텍케미칼과 기초과학연구소’ 공동연구 지원을 위한 공동연구센터 전용 연구 공간 구축!」

「경! 엘텍케미칼-기초과학연구소 공동연구 업무 협약식(MOU) 축!」

소강당의 입구 초입에는 공동연구센터의 설립을 알리는 현수막이 어수선하게 걸렸고 로비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이를 축하하는 각종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공동연구센터의 출범을 축하하는 여러 단체가 보낸 화환 중에는 엘턱전자 사장이 보낸 화환도 있었다.

祝發展
엘텍전자 사장 강주한

수많은 화환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강주한’이란 이름을 발견한 하선우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

된장국에 들어간 갈비의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랫동안 푹 삶아 부드럽게 몰캉거리는 갈빗살에 적당한 간의 국물이 얼큰하게 배 있었다. 하선우는 눈을 의심했다. 흔하디흔한 우거지 된장국에 고기가 잔뜩 붙은 왕갈비를 세 개나 넣어 주다니.

게다가 오늘은 간식도 종류가 세 가지나 되었다. 소떡소떡에 치킨 강정, 생과일주스까지, 영양사가 메뉴 선정에 혼을 갈아 넣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메뉴였다.

신이 나서 우거지갈비탕을 한술 뜨려던 하선우는 경원우의 갑작스러운 저지에 가로막혔다.

“잠깐, 하선우!”

하선우는 어정쩡하게 숟가락을 빨며 그의 식판 위로 액션캠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초과학연구소의 구내식당의 메뉴는 늘 두 가지로 나온답니다. 한식 메뉴인 A코스와 그 외의 B코스로 나뉘어 있어요. 기초과학연구소의 구내식당은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편이랍니다? 자, 자세히 볼까요? 오늘은 A코스가 더 맛있어 보이네요? 와, 여러분 보이시나요? 왕갈비가 세 개나 들어가 있답니다?”

경원우는 하선우의 식판을 카메라에 담으며 이전보다 능숙한 멘트로 촬영을 이어 나갔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왕갈비와 손바닥 크기를 비교해 보여주기까지 했다.

비위가 상했다. 유치원 선생님 같은 그의 말투와 너튜브 크리에이터를 흉내 내는 그의 행동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선우의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경원우는 자신의 B코스 메뉴가 담긴 식판으로 카메라를 옮겼다.

“간식 메뉴는 동일하군요? 하지만 메인 메뉴에는 많은 차이가 있네요. B코스의 메인 메뉴는 바로바로, 두구두구두구, 돈가스입니다! 돈가스는 연구원들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과연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들에게 제공하는 돈가스는 어떤 맛일까요? 제가 한번 먹어 보겠습니다.”

경원우는 돈가스 한 조각을 집어 입에 털어 넣고는, 지켜보던 이들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리액션을 했다.

“아, 힘들다.”

경원우는 식사만큼은 편안하게 하고 싶었는지 카메라를 끄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와, 맨날 싸구려 요구르트 주더니 오늘은 주스도 생과일주스를 주네? 사기당한 기분이야. 다시 찍을까? 기초과학연구소 구내식당의 진실 편 같은….”

“그냥 드에오.”

하선우는 경원우가 카메라를 다시 켤세라 급하게 갈비를 잡아 살코기를 뜯으며 대답했다. 뚱한 표정으로 하선우를 흘겨본 경원우는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 메뉴 무슨 일이래. 우리 구내식당 영양사가 이렇게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금세 기분을 회복한 경원우는 얼굴만 한 왕돈가스를 잘게 칼질하며 말했다.

“방금 만든 것처럼 따끈따끈하니 맛있다야. 우거지갈비탕 때문에 A 코스도 땡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소울 푸드는 돈가스야. B 코스 하길 잘했다. 먹어볼래? 갈비 하나랑 바꿔 줄게.”

하선우는 가끔 그의 직속 상사인 경원우 책임을 볼 때마다 과거의 인연이 떠오르곤 했다. 그와 같은 대학을 나와 함께 회사를 차렸던 이석이었다.

경원우와 이석은 성격도 외모도 닮은 데가 없었음에도 그랬다. 경원우는 이석보다 나이가 많고 키는 반 뼘은 작은 데다가 눈치가 더럽게 없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같았다. 하지만 하선우를 친근한 막냇동생 대하듯 장난스럽게 대해, 그 부분만큼은 하선우가 믿고 의지했던 과거의 이석을 떠올리게 했다.

하선우가 엘텍 종합 기술원에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강주한의 회유에도 기초과학연구소에 꿋꿋하게 출근 도장을 찍는 데는 경원우 책임의 역할이 컸다.

그는 지나치게 철딱서니가 없어 밉상일 때가 많았지만, 그런 대부분의 순간을 제외하면 태생적으로 사람을 어려워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면이 있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하선우는 기초과학연구소의 좁은 연구실과 사무실에서 NnG를 설립했던 초창기로 돌아간 향수를 느꼈다.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도, 실적에 대한 압박감도 없이 오로지 연구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인데, 이석과의 추억을 도려낸 듯 잊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하선우는 마비된 듯 울적해졌다. 저 혼자만 너무 잘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든 탓이었다.

“어쭈? 갈비탕 먹다 울겠네.”

불쑥 끼어든 경원우의 목소리에 하선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완전 괜찮아요.”

“그래? 갈비탕 맛있냐?”

“네. 저 혼자 다 먹기에 양이 딱 적당하네요.”

“그러지 말고 하나만 줘 봐.”

“안 됩니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김남구 주임이 깍듯한 태도로 국그릇을 경원우의 앞으로 내밀었다.

“제 것 좀 드실래요?”

“야, 야. 됐다, 됐어. 너처럼 풀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은 애 거를 내가 어떻게 뺏어 먹냐? 하선우. 갈비 하나 줘 봐.”

“새로 가져오시면 되잖아요.”

“아, 하나만. 하나만 줘라.”

김남구는 경원우와 하선우의 투덕거림을 지켜보다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 왜 이렇게 메뉴가 잘 나온 거예요?”

기어코 하선우의 갈비를 빼앗은 경원우는 썰어둔 돈가스를 하선우와 김남구의 식판에 몇 조각씩 덜어주며 말했다.

“왜긴? 엘텍케미칼이랑 업무 협약 맺어서지?”

“그건 그렇지만… 소강당에서 협약식만 하고 가기로 한 거 아니에요? 엘텍 사람들이 구내식당에 들를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모르잖아. 원장은 큰돈 들어오는 날이니 신경 쓰였겠지. 원장이 오늘은 모든 게 완벽해야 한다고 부원장을 얼마나 쪼았는데. 부원장까지 독이 잔뜩 올랐잖아. 흥, 그래 봤자 강당 가서 손뼉 치는 것밖에 더 하냐?”

김남구가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협약식에는 엘텍 임원들도 오겠죠?”

“당연히 오겠지.”

“강주한도 올까요?”

“크흡, 큽!”

물을 마시던 하선우는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와 사레들려 한참을 심하게 캑캑거렸다. 김남구가 눈치 빠르게 휴지를 가지고 올 동안에도 콜록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야, 추잡하게. 네 침 잔뜩 들어간 거 절대 안 뺏어 먹는다. 천천히 먹어.”

한참 만에 기침을 멈춘 하선우는 김남구가 건네는 휴지를 받아 얼굴과 손바닥을 닦고 충혈된 눈가에 맺힌 눈물도 훔쳤다. 그의 모습을 염려 섞인 표정으로 살피던 경원우가 돌연 김남구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여기서 강주한 얘기가 왜 나와? 강주한 걔는 엘텍전자 사장이지 엘텍케미칼 사장이 아니잖아.”

“밖에 강주한이 보낸 화환도 있길래 그냥 한번 말해 봤어요.”

경원우는 김남구의 소심한 항변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말했다.

“그래, 오면 내가 영상 찍어줄게. 됐지? 이제 그만하자?”

“예? 제가 강주한 영상 봐서 뭐 해요.”

“…저는, 크흡, 흠, 주셔도 돼요.”

하선우는 잔기침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말하고 보니 너무 뜬금없는 요청이라 후회가 되었다. 역시나 경원우는 하선우를 희한한 물건 보듯 한참을 쳐다보다가 쯧쯧 혀를 찼다.

“왜? 원수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경원우는 강주한이 하선우의 철천지원수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강주한 그 사람이 왜 제 원수예요?”

“아니라고? 엘텍 얘기 나올 때마다 표정이 싹 굳더구먼.”

하선우가 강주한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굳은 얼굴을 한 이유는 저도 모르게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을까 봐 염려스러워 표정을 단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주한을 촬영한 영상을 달라고 한 이유는 수트 입고 사회생활 하는 그의 모습을 본 지 오래되어 영상으로나마 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선우는 입을 벙끗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경원우의 착각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하선우를 수십억의 빚을 진 사업가에서 특허로 간신히 빚더미에서 벗어난 사업가 출신의 연구원으로 기억했다. 그 대척점에 엘텍이 있었기에 연구원들은 특허 문제가 자신의 미래라도 된 것처럼 관심을 가졌다.

NnG의 직접적인 부도 원인은 기업 종합 평가에 의한 신용 하락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엘텍이 중소기업의 특허를 노려 하청업체를 고의적으로 부도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착각은 진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실제로 엘텍에서 하선우의 특허를 무효로 돌리려 시도했고 신용이 하락한 데에는 엘텍의 책임도 있었기에, 하선우는 굳이 사실 정정에 힘쓰지 않았다. 물론 오해가 불거진 데는 하선우의 침묵의 공이 컸다. 그 누구도 하선우에게 직접적으로 부도의 원인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아. 오늘 네가 기분 저조한 이유가 엘텍 때문인 거. 난공불락 같은 요새 엘텍이 네 발밑에서 무너지지 않는 한 네 상처는 회복되지 않겠지.”

이건 무슨 콘셉트이지? 하선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 책임님. 저 더는 사업 망했던 일로 힘들지 않아요. 상처받은 것도 없고 정말 괜찮아요.”

“하선우.”

경원우는 코웃음 치며 안경을 가운뎃손가락으로 명민하게 쓱 쓸어올렸다. 안경을 추켜올린 보람도 없이 안경 코 받침이 낮은 콧대를 따라 코 중앙을 향해 느린 속도로 아주 서서히 미끄러졌다.

“속일 사람을 속여라. 조금 전에 네가 창가에 서서 강주한이 보낸 화환을 눈을 부릅뜨고 매섭게 노려보는 거 다 봤거든?”

“그…건 그냥 신기해서.”

“네 마음이 어떻겠냐.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해, 특허는 빼앗기게 생겼어, 빚더미에 앉아 더는 뭘 시작할 수도 없어. 사채업자들한테 시달리기는 또 얼마나 시달렸겠어? 불구대천의 원수인 강주한을 산 채로 잡아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겠지. 이해해.”

하선우는 이제라도 이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진실로 거슬러 올라가려면 강태한의 사기에 걸려든 이석과 강주한에게 소개받았던 컨설턴트 업체, 임경호와 강주한 사이의 거래 등 수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했다.

하선우는 거짓말에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상상력을 더해 없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주는 더더욱 없었다.

‘역시 안 되겠어.’

하선우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경원우의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하선우.”

“네?”

“자, 먹어라.”

경원우는 하선우의 국그릇에서 왕갈비를 꺼내 푹 익은 고기를 갈빗대에서 분리해 칼로 먹기 좋게 썰어주었다. 그는 모처럼의 진수성찬을 행복하게 음미하라고 독려하며 하선우의 기분을 살폈다.

“인생 길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건 없으니까 엘텍케미칼이든, 엘텍전자든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네 끼니부터 잘 챙겨 먹어. 어? 먹는 게 남는 거야.”

자신이 해명하려 하면 할수록, 경원우의 비장함은 더더욱 견고해져만 갔다. 그가 어디까지 이르게 될까 두려웠던 하선우는 결국 자신은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기를 포기했다.

경원우는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하선우를 끌고 휴게실에 밀어 넣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사무실로 복귀해야 하건만 경원우는 도무지 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우 씨, 오늘은 농땡이 쳐도 돼.”

“자료는요? 4시에 변리사 미팅 있는데요.”

“업무 협약식 다녀와서 도와줄 테니까 놀아. 어차피 오늘 분위기 어수선해서 다들 일 안 해.”

“사무실 누가 찾아오면 어쩌고요.”

“연구실에 간 줄 알겠지.”

경원우는 이래도 따르고, 저래도 따르겠다는 사람 좋은 얼굴로 서 있는 김남구를 데리고 바로 옆의 탕비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금방 올 테니까 쉬고 있어!”

하선우는 경원우의 당부를 핑계 삼아 휴게실의 소파에 드러누웠다.

여행의 피로가 채 풀리지도 않았는데 바로 일상으로 복귀해 여전히 여독이 몸 곳곳에 쌓여 있었다. 하선우는 안락한 장소에서 몇 시간이고 쉬고만 싶었다. 그 순간 휠체어 이미지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라, 하선우는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안락함과는 참… 거리가 멀었는데.”

오히려 너무 오래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닌 바람에 여독을 풀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의 쓸모없는 발명품을 생각하며 키득거리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등받이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창가에 소파가 붙어 있어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자 창밖의 전경이 보였다.

소강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화환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본격적으로 업무 협약식을 준비하는지 오전보다 화환의 개수가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자리는 따로 있어, 가장 눈에 띄는 초입에 엘텍케미칼 사장이 보낸 화환이 놓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강주한이 보낸 축하 화환이 있었다.

강주한이 보낸 화환은 디자인도 독특했다. 대부분의 화환에는 업무 협약과 공동연구센터의 설립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적은 레터링 장식이 달려 있었으나, 엘텍전자 사장이 보낸 화환은 아주 단순하게 꾸며져 있었다.

祝發展
엘텍전자 사장 강주한

커다란 명함을 연상하게 하는 직사각형의 패널 위에 그의 직함과 이름을 간략하게 프린트했다. 하선우는 창가에 붙어서 강주한 이름 석 자가 크게 박인, 오만한 인상을 주는 그의 화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선우의 직장인 기초과학연구소는 학국과학기술원법에 의해 설립된 고등교육 공공기관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산업체와 산학협력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체결해 왔다. 그러나 기초과학연구소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공공기관임에도 지금껏 엘텍그룹과 중장기 단위의 업무 협약을 맺은 적은 없었다.

대신 엘텍은 연구소 출신의 박사급 연구원을 엘텍 종합 기술원에 대량 채용했다. 그래서 기초과학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엘텍 종합 기술원을 미래 직장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엘텍은 필요에 따라 이곳의 인재를 수혈해 갔지만 그 반대의 교류는 없었기에 이번 업무 협약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엘텍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엘텍케미칼에서 기초과학연구소에 중장기 프로젝트의 업무 협약을 제안했다. 향후 10년간 500억 원 이상의 투자와 최고 사양의 실험 장비가 마련된 공동연구센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선우는 그 중심에 강주한이 있다고 생각했다. 강주한은 엘텍케미칼 사장의 결정이라고 말했지만, 확신했다.

강주한은 엘텍케미칼의 CEO는 아니었지만 최대 주주였고 전기차 사업을 엘텍의 주력 사업 중 하나로 두려는 만큼, 향후 전기차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차세대 배터리 연구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하선우는 엘텍케미칼 그룹의 결정이 미래 사업을 대비한 무척 합리적이고 필요에 근거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사적인 영역을 겨누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제는 엘텍 종합 기술원에 자리를 마련하겠으니 이직하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더니. 기초과학연구소의 건물을 리모델링해 휴게 공간을 만들고 이번에는 공동연구센터를 구축한다고 한다.

“마음껏 꿈을 펼치라는 거야 뭐야.”

하선우는 축하 화환에 걸린 강주한의 이름을 뚱하니, 쳐다보았다.

이 휴게실만 해도 그랬다. 제3 연구동의 3층 휴게실은 8개의 연구동 중에서 가장 호화롭고 안락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ㄱ’자 모양의 10인석 대형 카우치 소파를 둔 것은 물론이고, 1인용 하이넥 안락의자를 20석이나 준비해 두었다. 모두 유명 가구 디자이너의 제품이었다. 고급 호텔의 로비 라운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휴게실은 하선우의 사무실 바로 옆에 있었다. 바쁜 업무 중에 틈틈이, 부담 없이 쉬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하선우는 그의 배려에 설레지도 감동하지도 않았다. 아니다. 분명 처음에는 그런 감상을 받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을 교란하는 선명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강주한이 자신을 위해 함부로 돈을 쓰는 게 싫었다. 엘텍케미칼의 연구소 지원은 회사 차원의 일이었고 필요에 따른 결정이었다지만 연구 단지의 전체적인 개축은 강주한의 개인 주머니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

기초과학연구소는 90년대에 설립되어 규모를 차근차근 넓히며 2005년까지 8개의 연구동을 세웠다. 연구 단지의 건물들은 지은 지 오래되어 시설이 낡아 애로사항이 많았는데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는 화장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연구소 건물에 대한 불만도 사소했다. 화장실에서 가끔 하수구 냄새가 독하게 올라온다고 스치듯 말했을 뿐인데, 어느 날 익명의 독지가가 나타나 각 연구동의 화장실과 탕비실을 리모델링하고 층마다 휴게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부족한 연구실의 대안으로 최고 사양의 실험 장비로 중무장한 공동연구센터 건물을 구축하겠다고 한다.

강주한은 하선우가 폐쇄 트랙 속의 자동차처럼 그가 창조한 트랙 위에서만 달리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하선우를 감싼 세계를 그의 사랑만큼이나 확장하려 했다. 하선우가 다른 세상을 선택한다면 그는 또 기꺼이 하선우를 감싼 세상을 우주적으로 확장할 것이다.

그래서 하선우는 그의 애정이 가시처럼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강주한이 1억을 200원처럼 사용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선우는 그의 200원이 아깝고 소중했다. 그 자신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하선우는 강주한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잔돈을 유일하게 아까워하는 세상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밖이 꽤 시끌시끌하던데요? 기자들이 꽤 온 것 같죠?”

탕비실에 다녀온 두 사람이 티 테이블에 과자와 캔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엘텍케미칼 주식을 좀 사둘 걸 그랬나….”

경원우는 혼잣말하다 하선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하선우는 경원우가 쓸데없이 비장한 말을 꺼내기 전 서둘러 말했다.

“카메라는 왜 두고 오셨어요? VLOG 촬영 안 하세요?”

“선우 씨도 참. 근무 시간에 휴게실에서 시간 때우는 걸 왜 찍어? 원장이 보면 앞으로 영원히 집에서 시간이나 때우라고 할걸?”

“하긴 그렇겠네요.”

“나 좀 한숨 자야겠다. 30분만 잘 테니까, 하선우, 김남구, 나 꼭 깨워… 어?”

경원우가 소파의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잠잘 자세를 취하려던 때였다.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박민중 원장의 눈과 경원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경원우는 윗몸일으키기 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내리고 다시 굽히며 뒤이어 들어오는 강주한과 눈을 마주쳤다. 팔꿈치가 무릎에 닿은 자세 그대로 경원우의 몸이 정지했다.

“대박! 강주한 왔대요. 지금 원장실에 있다는데요? 실물 쩐다고 단톡방 난리났…!”

때마침 휴대폰으로 온 연락을 받고 신이 난 김남구의 외침도 정지했다.

강주한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놀라움을, 동료들을 향한 부끄러움이 압도해 하선우는 쥐구멍에 숨고만 싶었다. 박 원장의 사나운 눈길이 근무 시간에 농땡이를 부리던 세 사람의 얼굴 위로 거칠게 지나갔다.

“어, 어서 오세요. 여긴 무슨 일로….”

경원우는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거덕 일어나 휴게실을 찾은 원장과 강주한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남은 두 사람도 그를 따라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잠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강주한은 방문의 목적을 밝히지 않은 모호한 표현으로 대답하며 휴게실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박 원장의 눈길이 다시 한번 더 날카롭게 세 사람을 찔렀다. 원장은 열린 문을 눈짓으로 가리켜 축객령을 내렸다.

과자를 챙겨갈지 말지를 고민하던 경원우는 원장의 재촉에 서둘러 하선우와 김남구를 챙겨 밖으로 나가려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말씀들 나누세요. 그럼….”

“아뇨. 제가 불청객이니 편히 계십시오. 같이 말씀 나누어도 좋고요.”

네 사람의 얼굴이 강주한을 향했다. 일개 연구원 나부랭이와 말을 섞을 것 같지 않은 차갑고도 초연한 인상의 사내가 사교성 좋게 말했다. 잠시 당황했던 박 원장은 곧 정신을 차리고 안쪽의 자리로 강주한을 안내했다.

“이 자리가 좋겠군요. 강주한 사장님. 여기 앉으세요.”

강주한과 원장은 각자 1인용 소파를 차지하고 앉았고, 세 연구원은 자연스레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나란히 몸을 붙여 앉게 되었다. 1인용 소파의 등받이가 뒤통수보다 높고 팔걸이까지 갖춰져 있어, 호조건 속에서 그는 일개 연구원 나부랭이를 압도하는 권력자처럼 보였다.

하선우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 애인의 방문에 놀란 마음이 차차 정리되자, 상황이 새롭게 보였다. 하필이면 원장과 강주한을 마주 보고 앉는 부담스러운 위치라 경원우와 김남구는 혼이 나가 보였다.

“휴게실이 참 멋지지 않습니까? 여덟 개의 연구동에 층마다 휴게실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3 연구동의 3층이 가장 넓고 가장 아늑합니다. 어떻습니까?”

늙은 살쾡이 같던 박 원장은 평소의 표독스러움을 지우고 세상 인자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이 꼭 강주한의 확인을 바라는 듯해, 둘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있는 듯했다.

“연구 단지 중에서도 이곳의 편안한 분위기가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격무에 시달렸을 연구원분들이 휴식하시는 모습 보기 좋았습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기초과학연구단지의 대대적인 개축을 진행한 익명의 독지가가 강주한임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대화였다.

‘이젠 아주 숨기지도 않는구나.’

하선우는 눈치를 보며 경원우와 김남구를 곁눈질했지만, 다행히 그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매일 아침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함께 잠들며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다 보니 강주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고 있었다. 그는 출입증도 없이 원장이라는 가이드까지 대동해 연구소의 높은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휴가는 다녀오셨습니까?”

“네.”

“어디로 다녀오셨습니까?”

“국내로 다녀왔습니다. 인천 근방의 섬에 별장이 있어서 거기서 쉬다 왔습니다.”

어떤 불똥이 튈지 몰랐기에 낮은 직급의 세 사람이 나서서 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성을 발휘하는 것은 박 원장뿐이었다. 원장 주도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 강주한이 하선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선우의 시선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절대 자신에게 말을 걸지 말라고 사력을 다해 눈빛을 보냈으나 강주한은 가볍게 무시했다.

“하선우 씨 피부가 보기 좋게 그을렸군요. 전에는 참 하얬던 것 같은데.”

대기업 재벌 3세가 일개 연구원을 난데없이 아는 척하자, 남은 세 사람의 휘둥그런 시선이 하선우에게로 쏟아졌다.

이 사람이 정말. 하선우는 거칠어지는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바, 바닷가로 휴가를 다녀와서요.”

“바닷가면 어디?”

“서해요.”

“…서해요.”

강주한은 무심한 투로 말했지만, 그를 잘 아는 하선우는 그가 모두의 호기심이 집중된 상황을 즐기고 있음을 알았다.

“서해면 제가 간 휴가지와 가깝겠군요.”

“서해 해안선이 2,200km가 넘는 길이기는 하지만 아주 우연한 확률로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강주한은 하선우의 속사포 같은 대답에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지만 차마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직접 호기심을 해결해 주었다.

“기초과학연구소 채널에 등록된 하선우 씨의 영상을 봤습니다. 채널 영상 중에서 조회수가 가장 높아 보게 됐습니다.”

“아아, 어쩐지. 영상으로 보셨군요! 최근에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았거든요.”

평소였다면 눈치껏 입을 다물었을 경원우가 극성 부모처럼 급격히 발진해 끼어들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조회수가 17만이었습니다. 아주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다는 얘기죠. 댓글 창은… 어쩌다 보니 닫아 놓았지만.”

“그럴 만했어요. 편집도 재미있더군요. 저도 여러 번 봤습니다.”

“여러 번… 강주한 사장님께서 하 선임 VLOG를요?”

“네. 관심이 있어서요.”

하지만 강주한은 말과는 달리, 뻗어 나가는 관심을 애써 차단하는 사람처럼 소파 등받이를 향해 조금 물러나 앉았다.

“실은 하선우 씨 구면입니다.”

강주한은 눈길을 돌려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 넓은 휴게실에 단둘만 남겨진 듯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서서히 좁아졌다. 하선우는 강주한을 감각하는 신경이 발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달아오른 호흡과 상기된 얼굴, 행복으로 들뜬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하선우는 그의 감정에 무방비하게 휩쓸리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써야 했다.

“하선우 씨 생각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거든요.”

하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진정하지 않으면 그를 향한 애정이 넘쳐흐를지도 몰랐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선우는 입력된 텍스트를 발성하는 기계처럼 아주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강주한은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네. …덕분에.”

두 사람은 순간 쏘는 듯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당사자들 간에는 전기적인 자극이 통하는 시선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시선의 교환이었다.

‘지 때문에 망했는데.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저리 뻔뻔할 수가!’

특히 본인은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눈치가 좋지 못한 경원우의 경우, 그는 사회의 서글픈 단면을 목격한 듯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를 느꼈다. 그는 소시오패스가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는 데는 희생자를 대면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의 비정한 성격이 한 축을 담당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강주한과 하선우를 둘러싼 자극적인 소문은 하선우가 미국의 전기자동차 기업으로 취업을 떠나기 전까지 기초과학연구소에 도시 전설처럼 떠돌았다.

하선우는 강주한을 앞에 두고도 용기와 품위를 잃지 않는 사자의 심장을 가진 남자이며, 엘텍그룹이 세계 무대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한 데는 소시오패스의 표본적 인물인 강주한의 비정한 성격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는 뜬소문이었다.

오직 하선우를 둘러싼 소문을 끝까지 몰랐던 박 원장만이 강주한과 하선우가 주고받는 눈빛이 희한할 정도로 야릇했음을 간파했다. 박 원장은 이후 뉴스와 기사로 강주한의 이름을 접할 때면 두 남자가 주고받던 은밀한 눈빛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기억으로 희미하게 추억하게 되었고, 아득한 시간이 지날 무렵에는 완전히 잊어 버렸다.

<도둑들 외전 ‘애정의 공학’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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