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을 마치자 주변에서 기다렸다는 듯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옆에서 호들갑스럽게 감탄하는 캐디와 일행을 등진 채 클럽으로 잔디를 짚은 지혁이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에겐 그다지 감흥이 없는 샷이었다.
저 멀리 푸른 물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공을 들인 조경도 제법 운치 있었다. 햇볕도 나쁘지 않게 들고 샷 치기에 그라스도 적당해 라운딩하기 제격이었다. 하지만 지혁에겐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의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하루였다. 지혁이 곧게 뻗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당장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굴더니 고작 이런 필드 약속 때문에.
조부의 농간으로 주말 휴일을 반납하고 여기까지 왔고 정신을 차려 보니 골프채를 쥐고 있었다. 거기다 언제 도착했는지 처음 보는 장년층의 남자는 아까부터 본인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묻지 않아도 어차피 알게 될 테다. 제 아버지가 찾은 혼처의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본인은 쏙 내빼고 그나마 반발심이 덜한 조부를 앞세운 계획임이 눈앞에 그려졌다. 지혁은 힐끔 눈을 돌려 코스 옆 편의점을 살폈다. 저번 방문까지만 해도 그늘집이 있던 장소였는데 편의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간 꽤 안 오긴 했군. 새삼 세월을 느낀 지혁이 잠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야겠다는 의도로 편의점을 향하였다.
대충 아무거나 골라잡아 계산하려던 와중에 눈길을 잡아끄는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땡초참마김볶: 새로 나왔어요! 맛을 아는 당신에게 추천!
〈그건 맞는데요. 오면서, 오면서 먹었어요.〉
〈오면서? 뭘 먹었는데요.〉
〈어…… 땡초참마김볶이요.〉
당시에 유일하게 알아들은 ‘땡초’ 뒤의 단어는 ‘참마김볶’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미친. 이러니까 못 알아듣지. 어린애들 빼고는 김밥 맛도 모르고 사 먹으라는 건지. 지혁이 투덜거리며 홀린 듯 진열장에 전시된 삼각김밥 하나를 빼냈다.
계산을 위해 김밥 바코드를 찍는 아르바이트생이 지혁을 신기한 듯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이런 편의점 김밥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땡초참마김볶’ 맛이라니. 아직 저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신상 김밥이었다.
그런 알바생의 시선을 알 리 없는 지혁이 계산을 마치자마자 삼각김밥을 쥐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흐음.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 본 경험이 전무한지라 지혁은 포장지를 어떻게 제거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곤란한 표정으로 손바닥 위에 얹은 김밥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지혁에게 오늘 배정된 캐디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희 이제 다음 코스 가려고요. 출출하세요?”
“아닙니다.”
“아…… 예. 혹시 손에 쥐고 계신 거 드시려던 거 아니었나 해서요.”
궁금하긴 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급하게 차해교가 먹었을 음식의 맛이. 조그만 입술을 오물대며 먹었다고 말하는 모습과 신상 김밥이라며 웃던 모습도 연이어 떠올랐다. 다음에 또 이야기를 하면 아는 척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맛이 궁금하긴 하네요. 혹시 포장지 제거하는 법, 아십니까?”
캐디는 지혁이 삼각김밥 포장지를 제거할 줄 모른다는 게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삼각김밥과 연이 없는 삶을 살아온 남자가 갑자기, 하필이면 이 골프장에서, 뜬금없이 이름도 이상한 김밥을 골라 든 게 놀라울 뿐.
“예. 제가 도와 드릴게요.”
캐디의 도움으로 껍질을 벗겨 내 김밥을 한 입 베어 문 지혁의 표정이 미묘했다.
……. 요즘 애들은 이런 맛 좋아하나?
지혁이 느끼기엔 정말 독특하다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하긴 네이밍도 그랬지. 씨발. 왠지 꼰대가 된 기분이었다. 아직은 그럴 나이가 아닌데. 새삼스러운 세대 차를 느끼며 지혁이 손에 쥔 삼각김밥을 마저 입 안에 밀어 넣고 삼켰다.
* * *
필드를 벗어나 조부에게 등 떠밀려 처음 보는 일행과 저녁 식사까지 함께했다. 이후 자리를 옮겨 한잔하자는 이야기만은 받아 줄 수가 없던 지혁이 조부를 포함한 모두에게 정색하는 모습을 보이고 차에 올랐다. 당분간 연락은 무시해도 딱히 할 말이 없을 만큼 참아 준 하루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고속도로가 꽤나 막혀 차량 내비게이션은 시내 주행을 안내하고 있었다. 가로등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구불구불한 길을 연속으로 지나자 피곤과 짜증이 몰려왔다.
그런 도중 한적한 길가에 번쩍번쩍 빛나는 싸구려 조명이 달린 가게가 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법했는데 왜일까. 지혁은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난잡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지하 가게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
“……그럼 편히 살펴보시다 궁금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지혁이 들어간 곳은 성인용품점이었다. 얼굴을 굳히고 딱히 대답 않는 지혁을 보고 김이 샌 직원이 또 그냥 구경만 하다 가겠구나, 하며 구시렁대었다. 보통 저렇게 멀쩡하게 빼입은 사람은 호기심에 걸음했다가 몇 코너 돌아보지 않은 채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얼굴을 구기고 나가기 일쑤였다.
그렇게 잘나신 분들이 굳이 왜 ‘성인용품’이라는 글자에 이끌려 들어오는 건지. 뚱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보던 직원이 입을 삐쭉거렸다.
잠시 후, 불만 가득하던 직원의 눈에 서서히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쪽에는 관심도 없을 것 같던 남자가 적극적으로 물품을 탐색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설명 좀 해 드릴까요? 이거는 신상이라서요.”
“……음. 예.”
지혁의 손에는 케겔 볼이 들려 있었다. 일전에 지혁이 해교의 보지에 직접 꽂아 준 진동기와 비슷한 핫핑크 색상의 둥근 볼은 보기보다 가벼웠다.
“손님. 이걸 쓰면요. 사용하면서 골반 근육이 단련되고, 그러다 보면 할 때 느낌이 장난 아니겠죠? 덤으로 애널 조임도 조절 가능해져요.”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속삭이는 직원의 표정이 야릇했다. 지혁은 직원의 말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넘치게 작은 보지 때문에 좆이 터질 것 같기에 딱히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이어지는 설명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애널이라……. 아주 작게 내뱉은 지혁의 혼잣말을 들은 직원이 흥미롭게 눈을 반짝였다.
“아, 그쪽에 관심 있으세요? 또 애널에는 기가 막힌 게 따로 있거든요. 잠시만요.”
지혁이 대답을 하기 전에 직원은 창고로 달려갔고 곧이어 우당탕탕,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몇 번 더 물건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고에서 돌아오는 직원의 손에 섹스 토이가 한가득 들려져 나왔다.
가게 내부 진열장에 있던 물품들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몇 번 나가지는 않았지만 의사 모임에서 주워들었던 진기한 성인용품이 모두 이 가게에 있는 듯했다. 당시 들었던 바와 달리 애널용이 대부분이라는 게 차이점이었지만.
지혁은 크게 표정을 바꾸지는 않은 채 직원의 손에 들린 물품을 들여다보고, 만져도 보며 골라 나갔다. 이건 이래서 차해교에게 해 보고 싶고 저건 저래서 차해교에게 해 보고 싶었다. 용도가 비슷해 보이는 물품이 있을 때면 망설임 없이 2개 다 골랐다.
지혁이 고르는 것마다 뿌듯한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이는 직원 덕택에 그는 직원이 가지고 나온 제품 반절은 넘게 구입해 버렸다.
소개하는 족족 담아 양손을 가득 섹스 토이로 채우곤 가게를 빠져나가는 지혁의 뒷모습을 직원이 계속해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보기 힘들다는 잘생긴 변태였다.
다시 서울로 향하는 운전대를 잡은 와중에 자꾸만 차해교가 생각이 나 큰일이었다. 오늘 양껏 고른 여러 물품들의 사용에 보드랍고 쫀득한 보지가 녹아 드는 모습과 절정에 이르러 신음을 흘리는 차해교의 얼굴이 교차되어 떠올랐다.
내일이면 볼 수 있다. 그럼 다음 주도 또 이래야 하나? 지혁은 순간 당분간 병원 운영을 주 7일로 바꿔 볼까 하는 미친 생각까지 했다. 스스로가 낯설 지경이었다.
이 정도로 차해교와 몸을 맞대는 게 기꺼울 줄이야.
픽, 어이없는 듯 웃음을 짓던 지혁이 제 조수석 위에 쌓아 둔 섹스 토이를 보곤 미친놈, 하고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