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상한 남자=)
선웅의 첫 몽정은 고등학교 1학년 봄, 대상은 남자였던 교생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당시 반장이던 선웅에게 유독 친절하게 굴었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선웅이 기특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는데, 어느 날은 손길이 어깨와 등을 타고 내려와 오래 머무르기도 했다.
얇은 하복 너머로 느껴지는 선생님의 손길을 떠올리며 자위도 해 보았다. 낮에 학교에서 선생님을 볼 때마다 점점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늦은 밤, 잠든 엄마와 할머니 몰래 화장실에서 축축하게 젖은 속옷을 손빨래하는 날이 늘어 갈수록 죄책감은 조금씩 옅어져 갔다.
이후로 선웅은 자신이 이성보다 동성에게 더 끌린다는 걸 알았지만, 커밍아웃은커녕 누굴 좋아하거나 만난 적도 없었다. 정말 자신이 동성을 좋아하는 게 맞긴 한 걸까? 긴 시간 동안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성적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진 22세의 여선웅은 어떤 결심을 하게 된다. 몽정을 통해 깨달았으니, 좀 더 명징한 확신을 위해서는 섹스를 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누군가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종로의 거리로, 떠오르는 해를 가장 먼저 보기 위해 정동진으로 향하는 12월 31일.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1년의 마지막 날이라는 건, 신중하고 겁이 많은 이에게도 일탈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한번 결심하고 나니,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비장함마저 들었다.
과 동기들과 만든 밴드에서 몇 달간 준비했던 홍대 버스킹 공연을 마치자마자, 선웅은 무작정 기타를 메고 이태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급히 버스 안에서 갈 만한 바를 검색했다. 너무 요란스럽거나 본격적으로 보이는 곳들은 부담스러워 제외했다. 검색 중에 갤러리로 보일 만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라운지 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오픈한 건지 흔한 홍보 글 하나 없었지만 선웅은 이곳으로 결정했다.
연말로 북적이는 거리의 인파를 헤치고 도착한 라운지 바의 네모난 입구 앞에서 선웅의 작은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었는지 모른다.
바텐더에게 가장 저렴한 병맥주를 주문하고 높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이미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기분이었다. 메마른 목을 맥주로 축이기 바쁜 선웅의 얼굴은 누가 봐도 어리숙한 티가 역력했다.
맥주 한 병을 비워 갈 때쯤 근사한 옷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가 옆에 앉자 선웅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돌아갔다.
남자는 웃으며 술을 한 잔 사도 되는지 정중하게 물었고, 선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갔다.
처음 마셔 보는 값비싼 양주, 매혹적으로 흘리는 남자의 웃음에 선웅의 경계가 차츰 흐려졌다.
오늘 이 남자랑 하게 되는 걸까. 많이 아프다던데, 정말 괜찮을까 하는 두려움이 솟았다. 그럴 때마다 선웅은 호박색 액체를 꼴깍꼴깍 넘겼다.
“…….”
얼마나 마신 걸까? 흐무러지는 의식과 몽롱한 시야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선웅은 자신의 몸에 올라탄 남자의 매끈한 이목구비에 시선을 빼앗겼다.
바에서 봤던 얼굴이 이랬던가? 되게 잘생겼네. 태평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또?”
선웅의 표정을 읽은 남자는 하,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내 커다란 상체를 숙여 선웅에게 키스했다. 입 안으로 들어온 남자의 혀가 곳곳을 만지고 핥을 때마다, 입에서 낯선 신음이 샜다.
난생처음으로 해 본 키스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황홀했다. 남자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아쉬워 입맛을 다실 정도였다.
그러면 남자는 선웅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다시 키스를 해 주었다. 선웅은 기꺼이 남자의 목에 매달려 남자의 입술과 혀를 빨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선웅을 쾌감으로 휘저어 놓았다.
키스도 이렇게 좋은데, 섹스는 어떨까? 기대감인지 취기인지 모를 것으로 선웅의 얼굴과 목이 더욱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섹스가 주는 쾌락은 선웅의 조악했던 상상의 한계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아, 힉! 으응!”
몽둥이 같은 남자의 성기에 꿰뚫리고 아래가 한계까지 벌어지는 감각은 지나치게 생경했다. 극치의 쾌락이 전신을 뒤덮었다.
군살 하나 없이 근육으로만 들어찬 남자의 몸은 버둥거리는 선웅의 팔다리를 손쉽게 시트로 짓눌렀다. 찰싹, 찰싹! 남자가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선웅의 귀에는 얻어맞는 소리처럼 들렸다. 남자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에게 당장 잡아먹힐 것 같은 공포감마저 들었다.
쾌감은 고통으로, 다시 고통은 쾌감으로 끊임없이 변모했다. 그만해 달라고 선웅이 애원할수록 남자는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섹스는 몇 번을 기절했다 깨어나는 동안에도 끝나지 않았다. 더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입술만 뻐끔하고 벌렸다.
개자식.
그 순간 짐승 같은 검은 눈동자가 이채로 번뜩였다. 오싹한 감각에 몸을 떨자, 달래듯 입 속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가 감겨 들어왔다.
“으…….”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눈은 쉬이 떠지지 않았다. 허리 아래로 마비가 온 것 같았다. 도무지 얼얼한 뒤를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도 벌어져 있는 것 같은데……. 그때 식은땀이 흐르는 목뒤로 와 닿는 숨결이 느껴졌다.
……설마? 망설이던 선웅이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남자의 성기가 제 몸에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미, 미……!”
미친놈아! 생각 같아서는 쩌렁쩌렁 외치고 싶었으나, 쉬어 버린 목에선 쇳소리만이 나왔다. 게다가 남자가 깨면 곤란할 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잠든 남자의 얼굴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보였다. 그 무구한 얼굴만 보면 남의 몸에 흉측한 좆을 박아 넣고 있다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하필 이 순간에 네 살배기 아들은 잘 때가 가장 예쁘다던 사촌 누나의 말이 왜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
일단 이곳에서 빨리 나가야 한다. 선웅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침대의 모서리를 붙들고 조심스레 남자에게서 몸을 물렸다. 즈읏, 굵고 긴 것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거의 빼냈다고 안심했을 때, 성기가 재차 몸 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읏!”
선웅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겁을 집어먹은 선웅이 눈동자만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앞 머리칼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
다행히 남자는 깨지 않았다.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 듯했다. 감은 눈앞에 손을 흔들어 그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 심기일전하여 조금씩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배 속이 텅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감각에 몸이 떨렸다.
침대 끝에 겨우 몸을 세워 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힘을 주자마자, 찌르르한 통증이 발끝부터 척추를 타고 흘러 정수리까지 쭈뼛, 섰다.
“끄으…….”
간신히 몸을 일으킨 선웅은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엉망진창으로 흩어진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걸을 때마다 묶어서 던져 놓은 콘돔을 하나씩 발견했다. 몇 번이나 한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많기도 했다.
그러다 선웅은 뒤늦게 제 손에 감긴 붕대를 발견했다. 손은 또 언제 다친 거야?
“으음…….”
남자가 뒤척이는 소리에 선웅은 얼음처럼 그대로 굳어졌다. 제발 자신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남자가 깨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남자는 엎드려 누워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
만주벌판처럼 넓은 남자의 등판에 새겨진 근육은 남자가 잠결에 베개를 고쳐 벨 때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움푹 팬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유려한 선 끝엔 탄력 있는 엉덩이가 하얀 시트 아래로 반쯤 드러나 있었다.
꿀꺽, 무의식적으로 삼킨 침에 목에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개자식한테 밤새 시달리고도 정신을 못 차린 자신을 질책했다.
거꾸로 입은 니트의 상표가 밖으로 드러난 줄도 모르고 선웅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 소중한 기타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의 툭 튀어나온 2인용 좌석에 구겨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어제 갑자기 사라진 선웅을 탓하는 동기들에게 대충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고,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응시했다.
어제 바에서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눈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 기억은 듬성듬성했다. 결코 술이 약하지 않은데, 처음 마셔 본 양주는 주량을 가늠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선웅은 끊긴 기억들을 되새기려다 곧 그만두고 두 눈을 꼭 감았다. 버스가 과속 방지 턱을 지날 때마다 덜컹이는 좌석은 불편한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다시는 섹스하나 봐라.’
충동적인 결정을 후회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긴 고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꿈에 더는 선생님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고, 불행인 것은 폭격 같은 쾌감을 세차게 쏟아붓던 남자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는 것이다.
그것만 제외하고 변한 것은 없다고, 선웅은 생각했다.
* * *
올해로 50세가 된 이희진은 나이가 무색하게 군살 하나 없는 몸매를 자랑했고, 세월과 함께 생긴 주름마저도 붓으로 그린 것처럼 우아했다.
그녀는 열아홉에 우연히 찍은 CF 하나로 국민 첫사랑, 한국의 소피 마르소 등의 칭호를 얻으며,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타고난 스타성과 연기력까지 갖추어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을 꿰차며,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녀는 최고의 전성기에 재벌 2세와 결혼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모든 활동을 중단하더니 아들을 하나 낳았고, 또 곧바로 이혼했다. 1년 동안 연애, 결혼, 출산과 이혼까지 한 방에 했던 것이다.
당시 이희진은 이혼이란 꼬리표를 단 것보다, 철없던 자신이 전남편에게 눈이 멀었던 과거를 더 쪽팔려 했다. 전 남편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받고 번지르르한 연예계를 미련 없이 은퇴한 그녀는 8년 후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또 낳았다.
첫째 아들 고호경은 타고난 사업가였다. 지 애비를 닮아 사업 수완이 좋고 돈 냄새를 잘 맡았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로 샐샐 웃으며 여자든 남자든 잘 홀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데 서슴없었다.
둘째 아들 천제환은 고호경과는 생김새부터 달랐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었다. 어딜 가든 따라붙는 외모 칭찬엔 콧방귀를 뀌다 못해, 종내는 어쩌라는 거냐며 짜증을 내는 성미까지 정반대였다.
싫은 건 곧 죽어도 하는 법이 없었으며, 집에서 제일 어린 녀석이 가장 고지식했다.
그는 언제나 힘이 넘쳤다. 공을 들고 나가기만 하면 남의 집 유리창을 깨부쉈고, 교통사고로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서도 병원 복도를 뛰어다녔다.
승부욕은 또 어찌나 강한지 태권도장에서 겨루기를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집에 안 가고 도장에 남아 훈련을 하겠답시고 매트에 드러누워 소리를 꽥꽥 질렀다.
말이 잘 통하고 알아서 몸을 사려 별다른 걱정을 끼치지 않는 호경에 비해 제환은 육아 난이도가 극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제환에게 정이 조금 더 가기는 했다. 세상 살아가기 피곤한 성격이라 걱정도 좀 됐고. 어쨌든 이희진은 각자 생긴 대로 사는 두 아들을 나름대로 사랑했다.
크고 작은 대회에서 우승 메달을 거머쥐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천제환의 떡잎을 알아본 고호경은 계열사로 스포츠 마케팅 에이전시 A&T를 차렸다.
능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스포츠 선수들을 후원하거나 각종 이벤트를 열고, 은퇴 이후 스포테이너로 활동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 계획이었다.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배우들보다 잘생긴 동생은 사업의 첫 단추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태권도 종주국임에도 국민의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와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천제환이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그의 인지도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컸으니 말이다.
고민에 빠진 고호경은 천제환의 첫 예능으로 《살아남아라! 정글!》을 선택했다. 천제환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대본이 정해져 있는 스튜디오 촬영보다 정글에서 적응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공중파 3사 중 동 시간대 시청률과 화제성이 가장 높은 프로그램이었고, 한번의 촬영으로 3주 내내 황금 시간대에 방영되었다.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고호경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촬영 초반에 무뚝뚝하게 굳어 있던 천제환은 막상 정글에 도착해서는 넘치는 힘과 피지컬로 장작을 패거나, 높은 나무에 밧줄을 매달며 대장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아침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굴욕 없는 잘난 얼굴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그림이었고, 생존이란 취지에 맞게 열심이니 방송 분량이 잔뜩 늘어난 건 당연한 결과였다.
방송에서 천제환이 무른 과일을 먹을 때 팔목을 따라 흐르는 자줏빛 과즙을 핥아 먹는 모습은 ‘제환아_과일을_왜_그렇게_먹어.gif’로, 채집한 열매들을 담을 곳이 없어 티셔츠를 벗어 바구니로 만드는 데 열중한 손 대신 복근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이가_없으면_복근으로.gif’로 각종 커뮤니티를 휩쓸었다.
천제환은 단지 배가 고파 과일을 열심히 먹었을 뿐이고, 본인이 힘들게 딴 열매를 하나도 버리지 않기 위해 했던 것이지만, 보는 사람이 소년의 얼굴로 나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천제환은 세계 태권도 선수권 대회에서 보란 듯이 금메달을 땄고, 태권도 선수로서는 최초로 팬 카페까지 생겼다. 태권도+아이돌이 합쳐져 ‘태권돌’이란 별명도 생겼다. 물론 천제환은 처음 듣고서 욕이냐고 화를 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다시 돌아와서, 《살아남아라! 정글!》은 출연자를 납치하듯이 데려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다른 연예인들에겐 회사 차원에서 미리 귀띔을 해 주지만, 천제환의 고집을 아는 고호경은 촬영 직전까지 이를 함구했다.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그의 스케줄을 미리 전해 받은 제작진은 훈련하러 온 천제환을 그대로 공항으로, 머나먼 오지 속 정글로 데려갔다.
납치되듯 정글에 던져졌던 천제환은 열흘간의 촬영을 끝내고 공항에 도착했다. 방송이 나가기 전이라 공항 한복판에 서 있어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제작진에게서 휴대폰을 돌려받자마자 고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이런, 썅.”
모든 것이 고호경의 계획이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비행기 안이었다. 살아남으라기에 일단 열심히 집을 짓고 먹을 것을 구하긴 했지만, 열흘 동안 훈련도 못 하고 개고생을 하다 왔는데 전화를 안 받아?
부재중 통화가 세 자리로 넘어가기 직전 전화를 받은 고호경은 오랜만에 맘에 드는 남자와 밤새 뒹굴 예정이니 나중에 전화하란 말을 전했다. 보수적인 면모를 지닌 동생이라면 더럽다니, 변태 새끼니 하며 연락을 그만둘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호경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열흘간 정글에서 구르다 온 천제환의 분노는 그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고 고호경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천제환은 자신을 픽업 온 매니저를 협박하여 고호경을 밖으로 유인한 후에 ‘고호경이 밤새 뒹굴 남자’를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저기요.”
“네에…….”
일단 빡쳐서 남자를 끌고 나오긴 했지만, 막상 술기운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걸 보고 있으니 골칫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천제환은 삐딱하게 서서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의 낡은 운동화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집이 어디예요?”
“집…….”
휘청휘청 흔들리던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가로등의 주황빛을 받은 갈색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유치한 만화 영화의 연출처럼.
줄곧 어긋나던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
남자의 눈은 위, 아래 모두 속눈썹이 촘촘하고 길었다. 오른쪽 눈의 쌍꺼풀은 반대쪽보다 조금 더 짙었고,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긴 눈매는 어딘가 묘한 감상을 남겼다.
어디서 듣기로 짝눈은 바람둥이라던데, 이 남자도 그런가? 그래서 고호경과 하룻밤을 보내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남자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천제환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두어 번 끔뻑거렸다. 그때쯤 천제환의 시선은 남자의 입술로 내려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 하게요? 좁을 텐데…….”
“미쳤어요?”
천제환이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발끈한 어투긴 했다. 그러나 자신은 고호경처럼 아랫도리를 함부로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지금껏 누구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섹스라는 건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해야 한다는 고조선 마인드를 가진 그였다.
“제가 오늘 그……. 꼭 섹스를 해야 되거든여…….”
섹스가 무슨 개학 전날 몰아서 해야 하는 방학 숙제도 아니건만, 남자는 아까부터 계속 섹스 타령이었다.
원래 게이들은 이렇게 다 문란한가? 평소 남의 성적 취향에 관심을 가져 본 적 없었는데, 이 남자 때문에 없던 편견도 생길 것만 같았다.
“나 알아요?”
“…….”
남자는 당연한 천제환의 물음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어떻게 섹스를 하냐고요.”
제 물음에 갈색의 눈동자가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도르르 굴렀다. 벙긋벙긋하던 남자의 작고 통통한 입술이 열렸다.
“이름은 여선웅. 스물두 살. 이제 몇 시간 후면 스물셋…….”
“……?”
꼼질꼼질 손가락 두 개를 폈다가, 한 개를 더 펴 보이는 남자는 자신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그러나 천제환은 곧이곧대로 자기가 미성년자라고 말하기는 싫어 일자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세 시간 후면 자신도 남자와 같은 성인이니까, 뭐.
말이 없는 천제환에게 남자는 주섬주섬 지갑에서 학생증을 내밀었다. 교복을 입고 찍은 증명사진이 가장 먼저 보였고, 이름과 나이는 그가 알려 준 게 맞았다. 한국대 심리학과라니, 의외로 공부를 곧 잘했던 모양이다.
“어……. 못 먹는 음식은 쑥떡이에요. 어렸을 때 할머니가 쑥떡을 만들어 주셨는데, 맛있어서 계속 먹다가 목에 걸려서 죽을 뻔했거든요.”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황당해하는 천제환의 얼굴에도 상대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취미는 쓰레기 줍기고요……. 또오…….”
“나 참.”
이제 알겠다. 처음 본 사람과 어떻게 섹스를 하냐고 따졌더니, 지금 이 남자는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거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언제까지고 남자가 하는 헛소리를 들어 줄 순 없었다. 그냥 이대로 길바닥에 버리고 갈까 싶은데, 자꾸 남자의 장단에 맞춰 주게 되는 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
일단 남자가 술이라도 좀 깨야 말이 통할 것이었다. 천제환은 남자의 어깨를 잡고 당부하듯 말했다.
“잠깐 편의점 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요.”
“푸우…….”
“금방 올 테니까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고요.”
혹시라도 좋다고 헤헤 웃으며 다른 놈을 따라가면 곤란하다.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데,
“약속.”
“…….”
남자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을 꾹 찍으며 헤 웃었다. 그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던 천제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숙취 해소제를 사러 다녀온 잠깐 사이에 남자는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방비하고 대책 없는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이봐요. 일단 좀 일어나 봐요.”
천제환은 남자의 상완을 붙잡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남자가 별안간 고개를 위로 들었다. 의아한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어……. 근데 얼굴이 원래 이랬었나?”
“…….”
“……왜 더 잘생겨진 것 같지?”
지금 날 보고 고호경보다 잘 생겼다고 하는 건가? 평소 잘생겼다는 말은 지겹도록 들었지만 이번만큼은 좀 다르게 들렸다.
남자는 천제환의 발그레해진 양 볼을 손바닥으로 붙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갸웃거리는 방향대로 같이 움직이며 살피기 시작한다. 그 바람에 천제환의 입술이 오리 입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천제환이 볼에 들러붙은 남자의 손을 떼어 내려는 찰나, 입술에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쪽, 하고 붙었다 떨어졌다.
“악!”
쿵! 소리와 함께 배시시 웃던 남자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으로 엎어졌다.
갑작스러운 입술 박치기에 당황한 천제환이 힘껏 밀어내는 바람에, 남자와 함께 내팽개쳐진 하드 기타 케이스의 입구가 열리며 매끈한 기타의 바디가 드러났다.
“아으, 아파…….”
“아씨! 그러니까 갑자기 왜 입술을 부비냐고요!”
바닥에 긁힌 남자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털어 낸 천제환은 남자를 다시 벤치에 앉혔다.
“괜찮아요? 내가 힘 조절을 못 해서 미안하…….”
“…….”
남자의 입에서 뽀얗고 작은 입김이 연달아 퐁, 퐁, 퐁 터졌다.
“……이봐요? 울어요?”
“우웩!”
* * *
안주도 없이 술만 처먹었는지 온몸이 술 냄새로 진동했다. 근처 모텔에서 남자를 대충 씻겨 놓고 나가려다, 찝찝함을 못 이기고 천제환도 샤워를 마쳤다.
입을 옷이 없어 비치된 가운을 입고 나왔다. 남자는 침대의 끝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자고 있었고, 손에는 제가 직접 처치해 놓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모습에 천제환은 양심이 조금 찔렸다.
“씨발…….”
고호경한테 복수해 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취객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됐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속수무책으로 휘말리는 기분이다. 머리를 말리던 수건을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린 천제환은 침대 헤드에 기대듯 몸을 뉘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 정글에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졸음이 밀려왔다. 수상한 남자를 만나 꼬여 버린 몇 시간이 정글에서 있었던 열흘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배터리가 나간 휴대폰을 비치된 충전기에 꽂아 두고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TV 속 화면에는 연말 시상식이 한창이었고, 화려한 드레스와 슈트를 갖춰 입은 연예인들이 지루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을 얼마쯤 지켜보다 눈을 감았다.
“……?”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천제환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아 제 입술을 꾹, 누르고 있는 남자 때문에 모든 잠기운이 달아났다. 두 번째라 그런지 처음보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시야로 나비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촘촘한 속눈썹이 보였다. 쪼옥,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떨어진 입술은 아까보다 붉어 보였다.
‘씨발. 뭔 남자 입술이 이렇게…….’
예쁘지.
천제환은 천천히 멀어지는 남자의 입술의 궤적을 그대로 쫓아갔다. 뒤로 기댔던 등을 곧추세우고, 작고 동그란 남자의 머리통을 잡아챘다. 통통한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자, 제 어깨를 그러쥐는 손길이 느껴진다. 박하 향을 풍기는 좁고 뜨거운 입 속에서 헤매는 혀를 제 것으로 당겨와 빨았다.
첫 키스였다.
그것은 난생처음 단맛을 느낀 아이처럼 혀가 붙들리고, 수천 개의 미뢰가 한꺼번에 깨어나는 경험이었다.
입 안의 굴곡을 혀로 쓸어 올릴 때마다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이 좋았다. 그대로 남자를 뒤로 눕히고 품에 가두었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갈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서툴고 성급해서 번번이 어긋나던 움직임이 조금씩 맞물려 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두 입술은 떨어지자마자 다시 맞붙었고, 급하게 서로의 뜨거운 입술을 빨았다. 물속에서 숨을 최대한 참고 참다가 물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가진 숨을 모두 소진하고 나서야 겨우 떨어졌다. 떨리는 두 입술 새로 얇고 가느다란 실이 반짝였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남자가 시트 위에서 쌕쌕, 밭은 숨을 내뱉었다. 붉어진 얼굴과 입맞춤으로 더욱 통통해진 입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키스만으로 충분히 발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야릇한 얼굴에 좆이 터질 것처럼 더욱 부풀었다.
평소 태권도 외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천제환은 성적인 것에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의 고지식함에 개탄한 호경이 성교육이랍시고 이것저것 알려주었기에, 남자와 어떻게 섹스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당시 듣기 싫다며 인상을 찌푸리면, 고호경은 언젠가 제게 고마워할 날이 올 거라 자신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재수가 없었던지.
남자의 골반 위로 올라탄 천제환은 샤워 가운의 매듭을 풀었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스르륵, 가운이 내려가며 근육질의 나신이 드러났다. 아시안게임과 정글에서 구르다 육체는 어느 때보다 단련되어 더욱 육감적이었다. 아래에 깔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처음인데, 형이 책임질 거야?”
물으면서 천제환은 마찬가지로 남자의 가운 매듭을 풀었다. 깨끗한 피부에 굴곡 없이 판판한 몸은 누가 봐도 남자의 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뜸을 들이는 제 행동이 애가 타는 듯, 남자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팔을 뻗어왔다.
미약한 힘에 기꺼이 끌려간 천제환은 입술을 마주 댄 채 물었다.
“대답해요. 나는 평생 한 사람하고만 섹스할 거니까.”
“으응…….”
“형도 그럴 거야?”
“흣, 아…….”
제게 몸을 문질러 오는 서툰 몸짓에 겨우 한 줌 남아 있던 이성이 모두 휘발되었다.
“씨발. 형이 먼저 나 건드린 거야.”
TV 속 시상식에서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 5, 4, 3, 2, 1 해피뉴이어!
쏟아지는 사람들의 함성, 그리고 펑! 펑퍼펑!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폭죽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아앗, 흑, 아!”
처음 만난 수상한 남자에게 성난 좆을 박아 넣으며, 천제환은 그렇게 성인이 됐다.
* * *
“…….”
쏴아아,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선웅은 자신을 ‘단군’이라 칭하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별안간 나타나 맨손으로 모기를 때려잡고, 쫄티를 내쫓은 ‘썬더볼트’는 당장이라도 뚫어버릴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말을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선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기타…….”
그러거나 말거나 썬더볼트는 검은 마스크를 한번 고쳐 쓰고는 선웅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평소 스스로 힘이 약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던 선웅은 저를 붙든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팔은 왜.”
“일단, 내 차로 가서 얘기해요.”
별안간 썬더볼트가 왜 저를 차로 끌고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선웅은 발끝에 힘을 주고 버텼다.
직거래를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기 마련이다. 단군마켓에도 종종 이상한 거래자를 만났다는 글이 올라오곤 했는데, 제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저기요.”
선웅의 단호한 부름에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마스크 위로 드러난 짙은 눈썹이 가볍게 위로 들렸다.
“일단 돈부터 주셔야 하는데.”
“돈이요?”
응당 거래를 하러 만났으면 돈과 물건을 맞바꾸는 것일진대, 남자는 제게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잔금 아직 안 주셨잖아요.”
“…….”
최대한 이 남자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겠지. 선웅은 손으로 V 자를 그리며 말갛게 웃었다.
이백만 원이라는 뜻이었다.
‘미치겠네.’
길게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에 천제환은 입술을 짓씹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헐레벌떡 차 키와 휴대폰만 챙겨 바로 이곳으로 온 탓에 돈을 들고 오지 않았다. 천제환은 옆에서 자신이 도망가기라도 할까, 제 티셔츠 자락을 꼬옥 붙들고 있는 선웅을 힐긋 보았다.
“계좌 이체 하셔도 괜찮은데.”
“아, 그게…….”
안타깝게도 정보 사회를 살아가는 고조선 마인드의 소유자 천제환의 스마트폰에는 흔한 은행 어플 하나 깔려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천제환의 모친이 상금과 각종 자산을 관리했고, 기업들로부터 스폰서를 받거나 CF를 찍게 되면서 액수가 점점 커지자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몽땅 고호경의 에이전시에 맡겨 버린 탓이었다.
현재 이희진과 고호경이 호텔 에스테틱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는 줄 모르는 천제환은 두 사람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아 신경 줄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선웅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기도 전부터 사기꾼으로 낙인찍히게 생겼다. 오랫동안 꿈꿨던 재회의 그림 중에 이딴 건 없었다. 천제환은 이를 빠득 갈았다.
엄지로 통화 기록을 죽죽 내리던 천제환은 사백우의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이 자식에게 제가 도움을 요청할 날이 오다니.
그러나 통화 연결음이 계속 이어졌다. 종일 휴대폰을 끼고 사는 놈이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는 거야? 상대가 수신 거절을 누르는지 신호음이 중간에서 끊겼다.
다시 전화를 걸려는 찰나,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백우
「쉿. 데이트 중^.~」 오후 7:08
나
「지금 보내주는 계좌로 이백만 원 입금해.」 오후 7:09
사백우
「보이스 피싱?」 오후 7:09
나
「아니거든.」 오후 7:10
사백우
「내 친구 돌려줘!! 이 악마야!」 오후 7:10
나
「전화 받아. 설명할테니까.」 오후 7:12
사백우
「훗, 아무리 그래도 태안 사씨 18대 손인 사백우 돈은 쉽게 못 가져간다고.」 오후 7:13
나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오후 7:14
사백우
「백우의 어릴 적 장래희망은?」 오후 7:14
나
「태권도 선수겠지.」 오후 7:15
사백우
「땡」
「정답은 축구 선수였습니다~!~!!」 오후 7:15
그럼 나가서 공을 차지, 왜 태권도는 하고 지랄이셨지? 그렇게 답장을 보내고 싶었으나, 지금 아쉬운 건 제 쪽이니 잠자코 있었다.
사백우
「다음 문제. 우리 집 귀염둥이 막내 이름은?」 오후 7:16
천제환은 사백우가 매번 지치지도 않고 수십 장씩 보내던 갈색 푸들 사진을 떠올렸다.
나
「해피.」 오후7:16
사백우
「초코!!!!! 시발아!!ㅗㅗ」 오후 7:17
무슨 인터넷 사이트 비밀번호 찾기 힌트도 아니고, 별 질문 같지도 않은 걸 자꾸 물으니 짜증이 났다. 참지 못한 천제환이 전화를 걸었으나, 사백우는 통화를 종료시켰다.
사백우
「마지막 질문.」 오후 7:17
꿀꺽. 천제환은 어쩐지 긴장했다.
사백우
「여자들이 반하는 내 매력 포인트는?」 오후 7:18
나
「씨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오후 7:19
이 새끼한테 뭔가를 바란 게 병신이었다. 화면 너머 낄낄거리고 있을 사백우를 떠올리자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천제환이 각종 욕설을 꾹꾹 눌러 담은 메시지를 우르르 써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썬더 님.”
딱딱하게 굳은 선웅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었던 천제환의 어깨가 흠칫했다.
“……제가 입국하자마자 바로 오느라 지갑을 못 챙겼어요. 사기 치려는 게 아니라…….”
천제환의 말을 들은 선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현재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선웅은 거래가 불발되면 당장에라도 떠날 태세였다. 선웅에게 저의 결백을 증명할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 시각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제 얼굴을 들이미는 방법밖에는.
천제환은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천제환의 얼굴을 알아본 선웅의 눈이 놀란 빛으로 물들었으나, 금세 침착해졌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선웅은 목을 가다듬었다.
“흠.”
썬더볼트가 방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왔든, 태권도 세계 랭킹 1등이든, 최연소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국민 영웅 천제환이든 간에 변한 건 없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는 법. 단군마켓에서 나중이라는 건 없는 법이다.
“선수님을 못 믿는 건 아닌데요. 제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일단 따라오실래요?”
* * *
한곳에서 터줏대감처럼 30년째 제자리를 지켜온 대중목욕탕 ‘용궁탕’의 널찍한 평상 위. 193cm의 키와 단단하고 두꺼운 골격을 가진 남자가 앉아 있다.
옷을 벗지 않아도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몸매에, 주위 남자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며 지나간 시간을 반성 중이었다.
몹시 숙연한 분위기에 리드미컬한 차―악! 착! 소리가 끼어들었다. 타일과 청소용 솔이 마찰하는 소리였다. 영업을 종료한 남탕 안에서는 청소가 한창이었다. 긴 다리를 접어 앉은 천제환은 한쪽 무릎 위에 턱을 괸 채로 요구르트를 쭉 빨았다.
금세 빈 요구르트 병을 쓰레기통으로 휙 던져 넣고, 다음 요구르트에 신경질적으로 빨대를 꽂았다. 뭐라도 입에 처넣지 않으면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대중목욕탕이라는 장소는 오랜만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거슬리냐 하면…….
♨
ㅇㄱㅌㅏ
ㅇ
글자가 거의 반 이상 뜯겨 나간, 사이즈가 지나치게 커서 제 몸에나 맞을 법한 사우나복 상의 아래로 보일락 말락 한 짧은 바지를 입고서 밀대로 바닥을 청소 중인 선웅의 옷차림이었다. 천제환은 얇은 빨대를 질겅질겅 씹었다.
여긴 남탕이고, 다리 사이에 모두 같은 것을 달고 있으며, 같은 XY 염색체를 가진 이들 사이에서 유독 선웅만 튀는 것이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시발, 허벅지는 왜 저렇게 하얀 거야? 선웅이 수세미로 벽에 걸린 거울을 닦자, 이번엔 매끈한 배가 드러났다. 얼씨구?
요구르트의 단맛으로 끈적거리는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천제환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제 성기를 바싹 조이던 뜨겁고 축축한 내벽, 그 깊숙한 곳에서 겪어 보지 못한 절정을 맞았던 그때. 자신은 모든 게 처음이었다. 지금도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생생하게 모두 기억났다. 파정의 쾌락 끝에 꾸었던 꿈까지도.
꿈속에서 자신은 수풀이 우거진 정글에서 막 사냥을 마치고 온 참이었다. 갓 잡은 사냥감은 한 달 가까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제가 직접 지은 집에서 토끼 같은 아이들의 젖을 먹이며 저를 기다리고 있을, 뽀얗고 예쁜 그 얼굴이 사냥한 고기를 발견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활짝 웃고는 저를 끌어안고 입을 쪽쪽, 맞춰 줄 것이다. 그럼 난 그의 분홍색 혀를 원 없이 빨아 줘야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다가 종국엔 달리기로 변했다.
‘나 왔어, 여보! 어서 내가 잡아 온 사냥감을 봐! 어때. 종족 번식의 욕구가 느껴지지?’
그러나 집엔 아무도 없었다.
‘……여보? 자기야?’
그대로 온 집안을 뒤지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
눈을 떴을 때 무언가 이상했다. 닿을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하던 몸의 부드러운 감촉은 어디 가고, 버석버석하게 마른 시트만이 만져졌다. 긴 팔을 휘적거리던 천제환은 눈을 부릅떴다. 기분 좋게 머물던 나른함이 불길함으로, 불길함이 분노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딸 둘에 아들 둘, 순풍순풍 낳고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 보려던 단꿈을 꾸게 한 남자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처음엔 현실을 부정했다. 어디 잠깐 외출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난생처음 큰맘 먹고 순결을, 몸을 내줬건만 남자는 자신을 따먹고 버린 것이다! 그는 스무 살의 첫날, 떡국 대신 모욕을 말아 먹은 기분이었다.
자신과 자 보겠다고 갓 전학 온 초등학생처럼 자기소개를 해 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룻밤 상대를 찾았을 뿐인 문란한 게이에게 절대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시 천제환은 한국대와 대한대 두 곳에서 모두 입학 제의를 받아 고민 중이었다. 결국 체대로서 역사도 깊고 어쩌고 한 한국대를 선택했지만, 깊고 깊은 무의식에는 자신을 먹고 버린 그 ‘문란한 게이’가 다니는 학교라는 것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그때의 천제환은 깨닫지 못했다.
다니는 학교와 이름과 얼굴까지 알고 있으니,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나잇을 하는 사람들은 곧잘 거짓말을 한다지만, 순진했던 천제환이 알 리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선웅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을 거란 가능성은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다. 어쨌거나, 선웅이 말한 모든 것은 진실이었다.
개강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천제환은 인문대 앞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선웅을 기다렸다. 한국대 캠퍼스는 워낙 넓어 교내 셔틀버스가 있는데, 그중 인문대 건물들이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 대부분 이 셔틀을 타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넓은 캠퍼스에서 선웅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그를 찾지 못한 제환은 강의동 복도를 수색했다. 지나다니는 학생들에게 선웅에 대해 물으면, 몇몇이 “선웅이? 방금까지 여기 있지 않았어?”, “선웅 오빠 아까 학식에서 봤어요!”, “도서관에 간다고 하던데.” 하며 순순히 그의 위치 정보를 알려 주었다. 다만 말끝에 얼굴을 붉히며 “혹시…… 천제환 선수?” 하고 되묻는 바람에 그 방법은 금방 포기해야 했다.
다람쥐처럼 어찌나 잘 도망 다니는 건지, 잡힐 듯 말 듯 하다가 눈앞에서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까지 했다. 자신의 팬이라는 학생에게 사인과 사진을 찍어 주고, 겨우 선웅이 듣는 수업 몇 개와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다.
지방에서 일주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선웅의 전공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강의실 입구로 달려왔다. 달음박질치는 심장을 감추고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서.
그러나 문밖으로 빠져나오는 얼굴 중 자신이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가장 마지막에 스냅백을 쓴 남자가 나올 때까지.
텅 빈 강의실을 살핀 천제환이 스냅백을 붙잡고 선웅은 어디 있느냐 물었고, 여선웅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스냅백은 그걸 왜 제게 묻느냐며 신경질을 냈다. 그래 놓고 싸늘한 천제환의 반응에 바짝 쫄은 스냅백은 얼마 전 선웅이 군대에 갔다며 우물쭈물 전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얼음 망치로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차갑게 굳어 버렸다.
이후 여선웅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SNS도 하지 않아 사진 한 장 건질 수 없었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라 했다. 신데렐라는 구두 한 짝이라도 남겼지, 여선웅은 제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시간 속에서 겹겹이 덧칠된 감정은 복잡했다. 여선웅을 떠올릴 때마다 자꾸만 모호하고 불편한 감정이 따라왔다. 그것은 해갈되지 않은 갈증과도 같았으며, 아무리 지르밟아도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뜨끈한 무엇이었다.
천제환은 하얀 도복과 검은 띠처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좋았다. 좋거나 싫거나,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그렇게 2년을 기다렸다. 그동안 천제환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운동선수로서의 커리어, 메달 수, 인기와 명성 같은 것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단 하루도 잊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천제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청소와 샤워까지 모두 마치고 나왔는지, 선웅의 갈색 머리칼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목욕탕에서 비치해 놓은 대용량 싸구려 샴푸 냄새마저도 선웅의 체향이 섞이니 특별하게 느껴졌다. 한껏 들이쉰 숨에 천제환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결국 두 사람은 처음 만났던 하늘공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슥, 슥, 슥, 슥. 이 소리는 천제환이 가까스로 인출해 온 200만 원을 선웅이 세고 있는 소리였다.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는 여선웅을 의식하느라 정신을 빼놓은 나머지 오만원 권이 아닌 만 원짜리로 200장을 뽑아 버렸다.
선웅은 손가락 사이에 지폐를 비스듬히 접어 끼우고서 반대쪽 손의 엄지로 한 장씩 빠르게 넘겼다. 지폐와 손끝이 찰지게 마찰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천제환은 능숙하고도 절제된 손동작에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이 화려한 지폐 계수 능력은 선웅이 과일 도매 새벽 경매장에서 알바를 하며 얻은 기술이었는데, 선웅은 무려 1초에 3장씩 지폐를 셀 수 있었다.
197, 198, 199, 200…….
계수를 마친 선웅이 지폐를 가지런히 정리해 가방에 챙겨 넣고는, 약간의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선수님.”
오늘 선웅이 자신을 불렀던 호칭은 총 세 가지였다. ‘저기요’, ‘썬더 님’, 그리고 마지막은 ‘선수님’. 아, 처음엔 ‘누구세요?’였지. 그 사실을 되짚자 슬그머니 짜증이 피어올랐다. 절로 불퉁한 대꾸가 튀어나왔다.
“예.”
“기타 왜 샀어요?”
선웅은 질문과 동시에 양손으로 천제환의 왼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천제환이 커다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손바닥에서 비죽비죽 땀이 솟았다.
“제가 모를 것 같았어요?”
“……!”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둥글게 말려 올라간 선웅의 속눈썹이 나붓하게 깔리며, 천제환의 손가락 끝의 뭉툭한 부분을 살피었다.
“기타를 한 번도 안 잡아 본 손인데…….”
선웅은 진실로 궁금했다. 아무리 마니아들에게 수요가 있는 기타라지만, 말 그대로 찾는 이들만 찾는 물건이었다. 다른 기타에 비해 소리가 독특해서 초보자들은 잘 찾지 않는다. 천제환이 기타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값을 두 배로 치르면서까지 산 걸까?
사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제 손을 떠난 기타가 좋은 주인에게 갔으면 했다. 가치를 알아봐 주고, 아껴 주는 주인에게 가기를. 누군가의 꿈과 애정, 시간이 깃든 악기가 먼지만 쌓여 가지 않기를 바라는 사사로운 욕심이 담긴 물음이었다.
생각에 잠긴 선웅은 자신이 꽤 오랫동안 천제환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질문을 들은 천제환의 눈매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기타를 왜 샀냐고? 너 잡으려고.’
선웅이 전역할 시기를 기점으로 그의 흔적을 좇다가, 단군마켓 이용자가 올린 거래 후기에서 여선웅의 사진을 발견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여선웅을 다시 만나기까지의 여정은 몹시 험난했다.
그런데.
“나 기억 안 나요?”
“네?”
“나를, 어? 언젠가 본 적이 있다든가.”
여선웅은 저를 따먹고 버리다 못해 머릿속에서 깨끗이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모른 척 연기를 하는 걸까?
“아니. 하…… 그게 아니고, 혹시 나한테 할 말 없냐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자세히 잘 봐 봐요. 정말 모르겠어?”
천제환은 선웅의 팔목을 잡아 제게로 잡아당겼다. 가까워진 선웅의 갈색 눈동자에 오롯이 저만이 담겨 있었다. 민망한 웃음을 달고 조금씩 벌어지는 입술에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 음, 금메달 축하드려요. 실은 바빠서 경기는 못 챙겨 봤지만…….”
“…….”
“생각해 보니까 제가 오늘 그쪽한테 좀 무례했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
대답하며 선웅은 붙잡힌 팔목을 빼냈다. 빨갛게 손자국이 남은 부분을 문지르며, 천제환이 좁힌 거리만큼 뒷걸음질했다. 전 국민이 다 아는 금메달리스트를 사기꾼 취급하며 동네 목욕탕에 앉혀놨으니 화가 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선택은 같았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돈을 주지 않는다면 누가 억울한 제 말을 믿어 주겠는가. 자신 같은 일반인이 금메달리스트와 다시 마주칠 일도 요원할 텐데.
메고 있는 기타 케이스의 어깨끈을 잡아 내리려던 때, 선웅의 전화가 울렸다.
“네, 사장님.”
발신자를 확인한 선웅이 볼륨키를 눌러 소리를 낮췄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워낙 괄괄한 탓에 천제환도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상대는 좀 전에 선웅이 청소하고 온 용궁탕의 사장이었고, 오늘 욕탕 청소는 선웅이 대타로 했던 모양이었다. 통화의 내용은 선웅의 갑작스러운 입대 후에 일하던 사람들이 영 시원찮았다며, 다시 일해 줄 수 있냐는 제안이었다.
천제환은 남탕에서 하얗고 길쭉하게 뻗은 다리와 매끈한 배를 드러내며 청소에 열중하던 선웅을 떠올렸다.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서 홀로 뽀얗게 빛났더랬다.
“아, 제가―.”
선웅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천제환은 손을 뻗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그대로 굳어버린 선웅이 무례한 상대를 바라봤다.
천제환은 성큼 걸어 다시 선웅과의 거리를 좁혔다. 두 사람의 운동화 앞코가 바짝 맞닿았다.
“하지 마요.”
“예?”
“얼마면 돼요?”
남의 전화를 멋대로 끊고서 한다는 말이 90년대 드라마 속에 나오던 대사였다. 천제환이 그 드라마 주인공의 뺨을 후려치고도 남을 만큼 잘난 얼굴이긴 했으나, 저는 상대역처럼 가냘프게 얼마면 되느냐고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선웅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냈다.
“기타 상태 확인해 보세요.”
그러나 천제환은 기타엔 시선 한 톨 주지 않고 선웅만 바라본 채 같은 것을 물어왔다.
“얼마면 되냐니까요.”
“뭐가요?”
“알바 해서 얼마나 벌어요? 내가 다른 일 소개시켜 줄 테니까 하지 마요.”
……또라이인가? 황당했지만 선웅은 표정을 잘 갈무리할 줄 알았다. 헛소리에 대답해 줄 필요는 없었다.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거래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싶었다.
“확인 끝나신 거죠? 나중에 딴소리하시면 안―.”
그대로 선웅의 손에서 기타를 홱 채 간 천제환이 기타를 공중에 달랑 들어 보였다. 그 작태가 인질을 빌미로 협박하는 인질범처럼 보였으나, 기타는 이미 그의 소유였다. 그럼에도 선웅의 눈동자가 불안함으로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뭐 하시는…….”
천제환이 기타의 넥을 살짝 놓았다가 잡았다. 순식간에 확 낮아진 기타의 높이에 선웅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발까지 구르며 놀라는 게 지금까지 오늘 중 그가 보인 가장 솔직한 반응이었다. 선웅은 인질범을 대하는 협상가처럼 격해진 어조를 애써 내리눌렀다.
“일단 기타 내려놓고 얘기해요. 네?”
“하하.”
이까짓 기타보다도 못한 취급이라니. 천제환은 제 처지가 퍽 우스워 웃음이 나왔다. 기타는 그저 여선웅을 다시 만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으나, 보아하니 이 기타가 그에게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다. 천제환은 벌벌 떨리는 선웅의 손끝을 보며 확신했다.
천제환은 운동선수답게 본능적으로 상대의 빈틈을 알아챘고, 승기를 잡기 위해 작전을 바꿨다.
“기타 가르쳐 줘요.”
“……제가요?”
“네. 여선웅 씨가 나한테요.”
“저는 강습을 하는 사람이 아니, 아 진짜!”
어쭈? 방금과 같은 동작을 한 번 더 반복하자, 화들짝 놀란 선웅이 얼른 대답했다.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오. 그럼 하나 더.”
천제환은 빙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형이라고 부를게요.”
“예?”
씩 웃는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에 선웅은 아연해졌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아무튼, 그는 좀 전에 들었던 의문에 마침표를 찍었다. 천제환은 또라이가 맞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또라이의 입꼬리가 더욱더 시원스레 올라갔다.
“잘 부탁해요, 선웅이 형.”
……많이 잘생긴 또라이.
* * *
[잡담] 좀 길다) 오늘 제환이 만나서 사인 받음ㅇㅇ
작성둥 / 조회수 43029 20xx.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