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2)

* * *

“아, 죽겠다…….”

수업을 마치고 나온 선웅은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습관이 무서운 건지 종일 잠잠한 휴대폰이 어색하다. 오전에 보낸 메시지에 천제환은 아직까지도 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었길래 그렇게 부재중을 많이 남겼을까. 전화를 걸어 볼까, 고민하던 선웅은 그만두었다.

“하아…….”

또 ‘그 꿈’을 꾸었다. 그런데 어제는 꿈이 유독 생생했다. 선웅도 술기운을 빌려 ‘남자’에게 매달려 입을 맞췄다.

자신의 행동이 달라져서일까, 어제 꿈은 평소와 진행이 달랐다. 꿈도 꾸다 보면 점점 실제 같아지는 건가. 선웅은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식혔다.

“…….”

하지만 아무리 꿈이라 한들, 천제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남자와 뒹굴고 나니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몸 상태도 좀 이상했다. 맨투맨의 안쪽 거슬거슬한 면에 유두 끝이 닿을 때마다 목덜미로 소름이 올라왔다. 선웅은 괜히 간지러운 가슴께를 긁적이며 걸었다.

삼삼오오 무리 지은 이들이 들뜬 얼굴로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본격적으로 크게 열리는 5월의 축제와 비교해 규모는 다소 작지만, 가을 축제는 동아리 박람회를 함께 진행했다. 그 덕에 동아리의 특색을 담은 여러 홍보 부스들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선웅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컥, 끄억, 꿰에엑!”

“아, 깜짝…….”

그러나 좀비 분장을 한 연극부원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건 좀, 많이, 깜짝 놀랐다. 놀란 가슴을 조용히 쓸어내리는 선웅의 모습에 만족한 좀비는 다른 희생자를 찾아 떠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선웅의 손에는 신입 연극부원 모집 홍보지가 들려 있었다.

“…….”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릴 수는 없어, 선웅이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1학년이죠?”

웃으며 다가온 여자에게 선웅은 자신이 4학년이라 정정해 줄까 하다 말았다. 여자는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설문지 하나 작성해 주시면 여기서 선물 뽑으실 수 있어요.”

“괜찮아요.”

선웅의 거절에 도로 종이를 집어넣은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투명한 아크릴 상자를 내밀었다.

“그럼 그냥 여기서 하나만 뽑아 보실래요?”

거듭 거절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아, 선웅은 상자에서 캡슐 하나를 뽑아 건넸다. 뽁, 소리와 함께 열린 캡슐 안에는 ‘천연 비누 제작 무료 체험권’이 들어 있었다. 

여자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당첨을 축하드린다며 박수를 짝짝 쳤다.

“자, 그럼 저 따라서 이쪽으로 오세요!”

“아뇨. 제가 시간이 별로 없는―.”

“에이, 걱정 마세요! 30분이면 끝나요!”

그녀의 억센 힘에 붙들려 도착한 곳은 핸드메이드 동아리 부스였다. 남자부원을 절실하게 원하는 부원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자리에 앉은 선웅은 어색하게 눈만 굴려 아기자기한 부스 내부를 살폈다. 곳곳에 가죽공예로 만든 소품이나 비누, 향초 등이 진열돼 있었고, 작은 미니 배너에는 ‘직접 만든 마음을 전달해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부스 가운데로 나온 동아리 회장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저희랑 같이 비누를 만들어 보실 텐데, 완성하신 건 예쁘게 포장해서 바로 선물할 수 있게 해 드릴 거예요. 일단 앞의 바구니에서 맘에 드는 몰드부터 골라 보실까요?”

회장의 말에 사람들이 앞으로 나가 마음에 드는 몰드를 신중히 골랐다. 선웅은 마지막에 남은 걸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비누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선웅에게 어려운 건 호오에 따른 선택이었다. 마트에서 샴푸 하나를 사더라도 가장 저렴하거나, 1+1 행사 중인 걸 샀다. 옷은 무늬가 없는 무채색 위주로 샀고, 선택의 기준은 필요와 쓸모였다.

선웅이 머뭇거릴 때마다 부원은 친절한 어투로 끈질기게 ‘어떤 게 더 마음에 드냐’고 물었고, 아무거나 골라 달라고 대답하자 그럼 선물하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자신은 누구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작은 비누 두 개를 만드는데도 몰드, 오일, 분말, 효능에 따른 첨가제 등을 각각 두 번씩 골라야 했다. 그중 가장 어려웠던 선택은 죄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리본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다. 30분 후 마침내 비누 만들기가 끝났다. 부스를 빠져나오는 선웅은 제 몸에 퍼지는 비누 향처럼 은은하게 지쳐 버렸다.

“하아…….”

털레털레 걸음을 옮기는 선웅의 옆으로 잘빠진 흰색의 세단이 멈춰 섰다.

“실례지만, 길 좀 물어도 될까요?”

부드러운 음성에 선웅의 고개가 느릿느릿 돌아갔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실로 감탄을 자아낼 만한 미모였지만, 선웅은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후였다. 

선웅은 대답 대신 눈썹만 들어 올렸다.

“체육관을 찾고 있는데요.”

“아, 거기라면 이쪽이 아니라 정문으로…….”

설명하던 선웅은 이내 상황을 깨달았다. 축제 때문에 차도를 통제해 놓은 탓에 외부인이 길을 찾기 힘든 모양이었다. 체육관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던 선웅의 검지가 어색하게 공중을 헤맸다.

“…….”

선웅은 어쩌다 자신이 이 값비싼 세단의 조수석에 타고 있는지 생각했다.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남자의 고운 손이 핸들을 쥐고 기울일 때마다 차는 부드럽게 방향을 전환했다.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에 맞춰 허밍을 하던 남자가 물어 왔다.

“몇 학년이에요?”

“4학년이요.”

“무슨 과?”

“심리학과요.”

“이름은?”

“여선웅이요.”

“애인은?”

눈으로는 길을 찾으며 묻는 대로 대답하던 선웅이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없는데요?”

“아아. 그래요? 있는 줄 알았는데 없구나.”

어딜 봐서? 뚱한 선웅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의 귀와 목이 이어진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마치 여린 첫 음을 울리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듯한 우아한 동작이었다.

“여기에 누가 표시 남겨 놨길래. 소유욕이 대단한 애인을 뒀구나, 했죠.”

“……?”

어리둥절한 선웅이 선바이저를 내려 그가 가리킨 곳을 살폈지만, 작은 거울과 각도가 맞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다. 모르겠다. 도로 선바이저를 닫은 선웅이 전방에 바리케이드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만 갈 수 있나 봐요. 근처라서 일단 여기에 차 세우고 걸어가야 할 것 같아요.”

“네에.”

고분고분 대답한 남자는 선웅이 얘기한 곳에 주차를 마쳤다. 시동이 꺼지기도 전에 선웅은 안전벨트를 끄르고 먼저 내렸다. 체육관을 향해 나아가는 선웅은 깃발을 들고 등산복 무리를 이끄는 여행사의 가이드 같았다.

“선웅 씨.”

“네?”

앞서가던 선웅을 불러 세운 남자가 한 곳을 가리켰다. 희고 긴 손가락의 끝이 가리키는 곳은 커피 트럭이었다.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덕분에 이런 것도 먹어 보네요.”

어느새 남자와 선웅의 손에는 뚱뚱한 생크림 와플과 아메리카노가 쥐어져 있었다. 맛있었다. 이 와플을 꼭 먹어 보고 싶었다던 남자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국 대학교 축제는 처음인데 신선하네요.”

“그런가요?”

자신의 학교 축제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선웅은 아메리카노를 쪼옥 빨며 대충 대답했다. 선웅이 하는 대로 똑같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대학을 미국에서 나왔거든요.”

“아.”

한국대의 축제가 처음이라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대학 축제를 말하는 거였군. 선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플을 우물거렸다. 단걸 먹으니 몇 개쯤 빠졌던 나사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선웅은 와플을 한 입씩 먹을 때마다 점점 느려지는 걸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 걸음으로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20분이나 걸려서 도착했을 때, 남자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선웅 씨 물건이 제 차에 있는 것 같은데요.”

“제 물건이요?”

손에 쥔 와플과 커피를 번갈아 보던 선웅이 기억난 듯 아, 소리를 냈다. 남자의 차에 비누를 놓고 왔다.

“그냥 가지세요.”

“와, 나 주는 거예요?”

“……별건 아니고 비누예요.”

“선웅 씨가 직접 만든 것 같던데 고마워서 어쩌죠?”

퍽 감동적인 표정을 지은 남자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선웅의 크로스백 포켓에 끼웠다.

“이건 사례의 표시예요.”

포켓 위로 삐죽이 솟은 명함 모서리로 선웅이 흘긋 시선을 내렸다. 곧 웃음기가 다분한 물음이 들렸다.

“왜요?”

“……아니에요.”

딱히 자신이 선물을 준 것은 아니긴 했지만, 사례라고 주는 게 명함이라니. 남자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주 비싼 종이로 만든 거니까 함부로 버리지 말아요.”

때마침 재킷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낸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남자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선웅은 근처의 쓰레기통에 다 먹은 와플의 껍질을 버리고 돌아왔다.

“지금 체육관 앞이야. 내가 들어갈까, 아니면 네가 나올래.”

선웅은 통화 중인 남자에게 가 보겠다는 의사를 전하려 눈을 마주쳤다.

“성질 내지 마. 어제 미팅하다 말고 남의 차 키 뺏어다 뛰쳐나간 게 누군데? 잠깐만.”

송화구를 손바닥으로 막은 남자가 눈가를 곱게 접으며 작게 덧붙였다.

“우리 또 만나요, 선웅 씨.”

이 사람과 또 만날 일이 있을까. 선웅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건넨 후 교문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 알바까지 두어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쩔까, 고민하던 선웅은 단군마켓 어플을 실행시켰다.

[도움] 강아지(라 쓰고 대형견이라고 읽는) 산책 도와주실 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