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지독하게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거실의 공기는 싸늘했다. 엄마가 세탁해 둔 커튼을 거실 창문에 달아 줄 아빠가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큰 창 너머 보이는 풍경은 깨끗한 캔버스 위에 흰색 유화 물감으로 겹겹이 덧칠한 그림 같았다. 하얀 눈밭에 반사된 햇살은 아이의 머리칼에 부딪혀 갈색빛으로 비산했다.
‘삐뽀삐뽀. 소방차 출동. 길을 비키세요! 부우웅―.’
아이는 가진 자동차 장난감을 모두 꺼내 나무 바닥에 줄 세웠다. 나란한 자동차들의 뒤편에 빨간 소방차가 등장하면, 자동차들은 옆으로 비켜 길을 내준다. 용감한 소방차는 사람들을 도와준다. 마치 아이의 아빠처럼.
아빠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이 골목을, 동네 사람들을, 길 위의 작은 동물들까지 빠짐없이 사랑했다. 아침이면 골목길의 낙엽을 손수 쓸었다. 그는 수선집 할머니가 쓰러졌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었으며, 혼자서 딸을 키우는 분식집 앞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다 두었다. 매년 고시에 떨어지는 고시생에게 소주를 따라 주며 등을 도닥였다.
아내는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며 핀잔했지만, 그때마다 웃으며 볼에 입 맞추는 남편의 다정한 심성을 사랑했다. 발아래에서 아이가 저도 끼워 달라 발을 동동 구르면, 아빠는 가족을 한 품에 끌어안고 쪽쪽 입맞춤을 내렸다. 꺄르르, 싱그러운 웃음이 아이의 팽팽한 뺨에 퍼져 갔다.
폭설이 내리는 날 떠나는 남편의 출장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조심해서 다녀오겠다며 아내를 안심시키고 출장길에 올랐던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교통사고였다.
한동안 집을 드나드는 낯선 어른들은 발길에 채는 아이의 장난감을 성가셔 했다. 삐뽀삐뽀…….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공허한 거실에 드륵, 드륵 소방차의 바퀴 소리만이 울렸다.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섞인 고의나 약관이란 단어를 알게 된 건 시간이 좀 더 지나서였다. 아빠가 10년간 성실 근속한 회사는 보험 회사였다. 포상으로 온 가족을 스키장에 공짜로 보내 준다던 회사는, 아빠의 교통사고를 신변 비관 자살로 판결하려 했다.
‘그이가 그럴 사람 아닌 거 진석 씨가 잘 알잖아요.’
‘네. 저는 알죠. ……그래도 회사에서는 절차상 확인이 필요―.’
쾅! 소리와 함께 안방 문이 열렸다. 엄마는 양복을 입은 남자를 거세게 떠밀며 당장 나가라 소리쳤다. 그는 아빠의 직장 동료였다. 간혹 아빠와 함께 술에 취해 어깨동무를 하고 찾아와 엄마와 아이의 단잠을 깨웠다. 다음 날 아침에 멋쩍은 얼굴로 엄마가 끓여 놓은 콩나물국을 그릇째 후루룩 마시다, 눈이 마주치면 씩 웃어 주곤 했다.
언젠가의 아침처럼 그는 까슬한 수염과 구겨진 양복 차림이었지만, 표정은 본 적 없이 굳어 있었다. 엄마는 신발도 신지 않고 대문까지 아저씨를 내쫓았다. 아이는 엄마의 신발을 챙겨 밖으로 쫓아 나갔다. 칼날 같은 바람이 목덜미를 할퀴고 지나갔다.
대문 앞에는 동네 사람들이 눈 무더기처럼 모여 웅성거렸다. 엄마는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 질렀다. 아빠를 향한 엄마의 핀잔은 딱 들어맞았다. 결국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그의 상냥함은 왜곡되고, 거짓은 사실인 양 좁은 골목을 떠돌았다.
모두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주저앉은 엄마는 서린 울분을 토해 냈다. 붉은 손 갈퀴가 하얀 눈밭을 후벼팠다.
마음을 떼어 내 건네준 자리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은 무게와 서슬을 가지고 자라나 이따금 마음을 할퀴고 흉터를 남긴다는 것을, 아이는 너무 이른 나이에 깨달아 버렸다.
작은 손가락 사이로 시리도록 무심한 눈발이 날아올랐다.
* * *
코끝에 메마른 겨울 공기가 시큰하게 밀려들었다. 추워, 추워……. 선웅은 중얼거리며 몸을 옹송그렸다. 뜨거운 모래를 한 움큼 삼킨 것처럼 입 안이 쩍쩍 갈라졌으나, 알몸으로 그 계절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진 사람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선웅은 언제나 그랬듯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머리끝까지 뒤집어쓸 이불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 봐도 이불이 잡히지 않았다. 진득하게 들러붙은 눈꺼풀을 간신히 열었을 때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새카만 머리칼이었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이 만들어 내는 강한 인상, 그와 상반되는 소년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 천제환이었다.
그의 눈꺼풀이 들리는 기척에 선웅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
선웅의 몸이 그대로 끌려갔다. 하나를 닫으면 보란 듯이 다른 쪽이 활짝 열리기 마련이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퍽 다정한 손길, 열을 가늠하려는 듯 이마를 마주 대는 몸짓, 제 입술에 닿아 부서지는 긴 숨결, 저를 주시하는 시선의 무게까지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맞닿은 따뜻한 체온까지도. 천제환과 알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선웅은 어깨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체액으로 범벅이었던 몸에는 찝찝함이 전혀 없었다.
설마 천제환이 밤새 자신을 돌보기라도 한 걸까.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선웅은 복잡한 제 머릿속처럼 뻑뻑한 눈동자를 굴렸다.
천제환은 선웅의 어깨 위 도톨도톨하게 일어난 살갗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열 내릴 때까지 추워도 조금만 참아요.”
“…….”
잠기운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천제환은 자신이 깨어난 것을 진작 눈치챈 모양이지만, 선웅은 아무렇지 않게 그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느 때처럼 이 좁은 침대엔 저 혼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잠결에 목구멍 안으로 미지근한 물과 씁쓸한 약이 들어왔다. 내도록 선웅을 뭉개고 휘저었던 그의 붉은 혀도 함께였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매끈한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천제환의 젖은 머리칼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눈꺼풀로 똑 떨어졌다. 선웅이 한쪽 눈을 찡그리자 곧장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밤보단 열이 좀 내렸는데 아직 뜨겁네요.”
이마를 덮은 손의 온도는 기분 좋을 정도로 시원했다. 힘없는 손짓으로 천제환의 손을 떼어 낸 선웅이 입을 열었다.
“……집에 안 갔네.”
“아픈 사람 두고 갈 정도로 그렇게 내가 매정해 보여요?”
“…….”
못마땅한 대꾸에 선웅은 아랫입술을 감쳐물고 시선을 내렸다. 트레이닝복 바지만 걸친 천제환은 근육으로 꽉 짜인 상체를 드러낸 채였다. 아침이라 더욱 굴곡이 도드라진 몸은 그대로 찍어 당장 헬스 잡지의 표지로 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몸을 일으키려던 선웅은 다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천제환의 거구가 쏟아 내는 힘을 온몸으로 받아 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태연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자신의 처지가 더욱 와닿았다. 선웅은 끙,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책상 위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한 천제환은 그대로 잠시 나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그는 들고 온 여러 개의 쇼핑백에서 낱개로 포장된 음식들을 차례대로 꺼냈다. 뷔페를 통째로 옮겨 오기라도 한 듯 음식과 과일 등이 끊임없이 나왔다.
“일단 죽 위주로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냉장고에 썩은 사과는 버렸고요.”
“뭐가 이렇게 많…….”
천제환은 또 다른 쇼핑백에서 꺼낸 검은색 맨투맨의 상표를 대충 떼어 내 입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훈련이 있어요. 전화하면 제때 못 받을 수도 있으니까, 모자라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 남겨 놔요.”
“…….”
이미 출발해야 하는 시각을 넘긴 탓에 천제환의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렸다. 감독과 코치뿐 아니라 사백우까지 그를 찾는 재촉으로 난리였다. 사정을 대충 둘러대고 공항까지 늦지 않게 도착하겠다는 연락을 보냈다.
선웅은 밤새 혹사당한 아래의 상태가 어떨지 걱정이 되었다. 몸을 일으키기조차 쉽지 않은 걸 보면 찢어져 피가 났을지도 모른다.
갓 태어난 기린처럼 파들거리는 선웅을 발견한 천제환이 다가와 이불을 걷었다. 순식간에 잇자국과 울혈이 낭자한 나체가 드러났다.
“아, 야 지금 너 뭐 하―.”
“가만히 있어요.”
천제환은 선웅의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어제 제 것을 받느라 한계까지 벌어졌던 구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촘촘히 다물어진 채였다. 밤새 춥다고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해가 뜨자마자 데면데면하게 구는 여선웅처럼.
천제환은 새 연고의 뚜껑을 열어 손가락에 쭉 짠 후 조붓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붉게 물든 여선웅의 구멍은 잘 익은 과실처럼 식욕을 돌게 하는 색이었다.
“읏……. 하, 하지 마.”
“찢어지진 않았는데 많이 부었어요. 열도 나서 발라야 해요.”
“내가…… 흐, 내가 할게.”
그대로 확 손가락을 빼내자 선웅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박아 줄 때뿐만이 아니라 뺄 때도 느끼는 야해 빠진 몸뚱이. 그런 주제에 자꾸 저를 밀어내는 게 못마땅하다. 천제환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그래요, 그럼.”
“…….”
천제환은 선웅의 앞에 연고를 툭 던져 놓고 팔짱을 꼈다. 자신이 발라 주는 게 싫다면 혼자 바르게 해 드려야지. 대신 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목덜미까지 시뻘게진 선웅이 이불을 끌어당기려는 것을 제지한 천제환은 연고를 눈짓했다.
“뭐 해요? 안 바르고.”
“이따가 혼자 있을 때 할―.”
“그런 소리 할 거면 얌전히 다리나 벌려요.”
제가 서울에 없는 일주일 동안 여선웅이 약을 바르겠답시고 혼자서 뒤를 쑤시다 다른 놈을 부를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쾌락에 무너지는 여선웅의 얼굴을 애먼 새끼들이 본다는 상상만으로 부득부득 이가 갈렸다.
다시는 이곳에 쥐새끼들이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하는데, 하필 일주일간 제주도에서 훈련이 있는 게 짜증이 났다. 뭐, 지구 반대편도 아니고 오면 되지. 떠벌리는 사백우 입만 잘 막아 놓는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천제환은 선웅의 다리를 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아직도 열이 남아 있는 뜨끈한 몸이 맥없이 딸려왔다.
“…….”
어젯밤 무슨 꿈을 꾸는지, 선웅은 밤새 끙끙 앓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아빠를 찾았다. 그 모습이 내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 여러모로 신경이 쓰여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천제환은 먹기 좋게 무르익은 엉덩이를 움켜쥐어 벌린 후 부러 진득한 손길로 한참 동안 약을 발라 주었다.
* * *
빈 도장에서 홀로 훈련을 마친 찬영은 정리를 하고 나왔다.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지금쯤 제주도에서 한창 훈련 중일 터였다. 찬영도 훈련에 함께 참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재활이 필요한 무릎 상태였지만, 차마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는 상황이 진짜 이유였다.
찬영에겐 동생이 셋 있는데, 막내는 이제 유치원에 막 들어갔다. 막내가 현재 찬영의 나이가 될 때쯤이면 부모님은 환갑이었다. 찬영이 비용을 이유로 태권도를 포기하려 할 때마다 부모님은 도둑질을 해서라도 지원해 주겠다 하셨지만, 바꿔 말하면 제가 욕심을 낼수록 부모님께 못 할 짓이라는 거다.
깊은 좌절의 구덩이에 빠질 때마다 천제환의 영상을 보면서 발차기를 한번 더 연습했고, 결국 저의 우상인 그와 같은 대학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열정이 애매한 재능과 냉혹한 현실을 해결해 줄 순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 감각과 조금만 더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매일 들쑥날쑥했다.
“에휴…….”
찬영은 단체 채팅방에 동기들이 보내온 야자수 아래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점심 약속이 있는 학생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근 알바를 하며 친해진 선웅이 형은 의욕은 앞서지만 다소 일머리가 없는 자신과 달리 뭐든지 척척 해냈다.
사장님께 꾸중을 듣고 기가 죽어 있는 제 곁에 다가와 음료수를 건네는 게 그 나름의 위로라는 걸 알았다. 이따금 무릎 통증을 삼키는 제 모습을 눈치채고 궂은일을 대신 해 주었고, 어느 날 막내가 응급실에 갔단 소식에 벌벌 떠는 저를 진정시켜 택시비까지 쥐여 주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형! 여기요!”
멀리서 걸어오는 선웅을 발견한 찬영이 두 손을 붕붕 흔들며 웃었다. 혹시라도 선웅이 저를 발견하지 못할까 봐 제자리에서 살짝 콩콩 뛰기까지 했다.
찬영을 발견한 선웅이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제가 일찍 왔는데요.”
“배고프지? 들어가자.”
점심시간에 딱 맞춰서 왔더니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찬영은 키오스크 중 가장 짧은 줄을 찾아 맨 뒤에 섰다.
<오늘의 메뉴>
고구마치즈돈가스+크림스프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