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2)

  5. 줄, 달이기=)

느슨한 운동화 끈을 묶어 매듭을 팽팽하게 조인 선웅이 어깨와 턱 사이에 끼워 둔 휴대폰을 바로잡았다. 수화기 너머 서운한 투정이 흘러나왔다.

― 이러다 우리 아들 예쁜 얼굴 다 까먹겠어.

“이번 주에 중간고사 끝나는데 주말에 내려갈까? 엄마 시간 괜찮으면.”

― 그러지 말고 여기 다 정리하고 서울에 큰 아파트 사서 엄마랑 할머니랑 올라가서 같이 살까?

생각지 못한 말에 선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응이 없는 아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내 정신을 차렸다.

― 아들?

“……응?”

― 왜. 다 컸다고 서울에서 혼자 사니까 좋아서 그래?

농담 섞인 말투에 선웅이 푸스스 웃었다. 싫을 리가 없다. 아들은 엄마의 말속에 담긴 진심을 곰곰 헤아려 본다.

몇 년간의 지리멸렬한 법리 논쟁 끝에 회사에서 아버지에게 씌웠던 누명은 벗겨졌다. 이후 회사는 그들이 저지른 무례함과 모욕의 값을 멋대로 측정해 거액의 보험금을 입금했다.

그러나 엄마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돈을 없는 셈 치고 살아왔다. 그건 선웅도 마찬가지였다. 방금과 같은 말은 농담으로라도 한 적이 없었기에 놀란 것이었다.

생각을 마친 선웅은 말머리를 돌렸다.

“할머니 뭐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시대? 과일 좀 보낼까?”

― 그런 거 말고 네 옷이나 사 입어. 넌 젊은 애가 맨 칙칙한 옷만.

곱게 낳아 놓으면 뭣 하나, 스스로 꾸밀 생각을 않는데. 평소 무엇이든 알아서 척척 잘하는 아들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잔소리는 몇 안 됐다. 얼굴도 잘생긴 데다 옷 태도 좋아서 어떤 옷이든 척척 걸치기만 해도 멋진 아들이 무채색의 옷만 입고 다니는 것이 첫째.

― 밥은? 또 삼각 김밥 같은 편의점 음식만 먹고 있는 건 아니지?

워낙 식욕이 없어 대충 끼니를 때우는 나쁜 식습관이 둘째였다. 남들보다 먹는 양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음식을 찾아 먹지도 않았다.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야위는 아들에게 해 먹일 음식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뜻밖의 대답이 이어졌다.

“나 요즘 엄―청 잘 먹어. 살도 쪘는데?”

벽걸이 거울에 비치는 선웅의 얼굴은 보기 좋을 정도로 통통하게 볼살이 올라 있었다. 이 정도면 깐깐한 할머니의 기준에도 합격일 듯싶다. 선웅은 엄마에게 최근에 제가 먹었던 음식 메뉴들을 수상 경력처럼 자랑스레 읊었다. 소고기, 전복과 각종 한방 재료가 들어간 삼계탕, 불도장, 장어구이, 해신탕 등등.

― 어머, 웬일로 네가 기특하게 그런 걸 다 챙겨 먹었어?

“그냥 어쩌다 보니까.”

― 얘는, 어쩌다 보니 먹은 것치고는 메뉴가 죄―다 보양식이구만.

“어……. 그런가.”

듣고 보니 엄마의 말이 맞았다. 절대 선웅이 먼저 찾아 먹을 일 없는 음식들은 누군가 일부러 관심을 기울여 먹인 것만 같았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입이 작게 벌어졌다.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맛만 좋다고 먹을 줄만 알았지, 그게 다 보양식이었을 줄이야.

― 누구랑 먹었는데?

“……아는 동생이랑 먹었어.”

― 아는 동생?

“응.”

띠리릭, 도어락이 잠기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선웅이 계단참으로 발을 놀렸다. 귓가에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들뜬 기색이 느껴졌다.

― 근데 아들. 그 동생 자주 만나나 봐?

“응. 일주일에 두세 번?”

아닌가, 서너 번? 네다섯 번? 교양과 기타 수업 외에도 천제환과 꽤 많이 마주쳤다. 생각해 보니 거의 매일 만나 밥을 먹은 것 같았다. 운동선수다 보니 식단이 다 보양식이고 그랬던 건가.

― 그 동생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 예뻐?

“어……. 예쁜가?”

선웅은 예쁘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커다란 덩치와 잘생긴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젯밤 제 옆에서 곤히 잠들었던 얼굴이 좀 예뻐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오죽했으면 참지 못하고 제가 먼저…….

선웅은 윗니로 간지러운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긁었다.

― 그 친구만 괜찮으면 같이 내려와. 엄마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응. 한번 물어볼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선웅이 1층에 다다랐다. 각종 고지서와 전단지를 버겁게 삼키고 있는 우편함을 막 지났을 때, 인기척을 느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재빠르게 건물 밖으로 사라졌다.

“……?”

영 좋지 못한 기시감을 느낀 선웅이 따라 나갔지만,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은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알바들은 손님이 많을 때는 홀에서 서빙을 돕고, 손님이 없을 때는 인형 탈을 쓰고 나가서 전단지를 돌렸다. 오늘은 가게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창고로 들어온 선웅이 곰인형 옷을 집어 들었다. 인형 탈만 남기고 일단 개어 놓은 맨투맨 티셔츠를 가방에 집어넣으려는데, 짐 더미 속 휴대폰이 먹먹한 진동과 함께 빛을 냈다.

[천제환]

수신 화면이 부재중 글자를 띄우자마자 재차 전화가 울렸다. 또 입술이 간질거렸다. 오늘 몇 번이나 잘근댔는지 모를 입술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

가방 속에서 전화기를 꺼내 받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동작이 무척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망설이던 선웅은 휴대폰을 가방 속에 넣어 두고 창고를 나섰다.

길거리는 대학가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형 탈을 쓴 탓에 거리의 소음은 웅웅거리게 들렸다. 챙겨 나온 전단지의 마지막 장까지 빠짐없이 모두 나눠 준 선웅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소란과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선웅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찬영.”

“…….”

“오늘 여선웅 봤어?”

다짜고짜 저를 주찬영이라 부르는 남자는 천제환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커다란 곰돌이 얼굴 속 선웅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복슬복슬한 곰돌이의 고개가 도리도리 좌우로 흔들렸다.

선웅은 지난번, 고깃집에서 곰돌이 옷을 입은 채 천제환과 고기를 먹던 찬영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은 두꺼비 탈을 쓰고 있었던가. 여하간 그래서 천제환이 자신을 찬영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코앞에 저를 두고 찾고 있는 남자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촘촘한 그물로 이루어진 곰인형의 눈동자를 통해 바라본 천제환에게 난폭한 기운이 느껴져, 선웅은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본 건데도 그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상대가 받지 않는 전화를 몇 번 걸던 천제환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자 짜증이 잔뜩 고여 있는 미간이 드러났다.

“여선웅 보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알았어?”

“…….”

그는 휴대폰에 고정됐던 눈동자만을 들어올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곰인형을 직시했다. 천제환은 어딘가 단단히 화가 나 보였다. 혹시 제가 새벽에 했던 짓을 알고 이렇게 화가 난 걸까? 해맑게 웃고 있는 곰돌이의 얼굴과 달리 선웅의 이마에서는 땀이 삐질삐질 솟아났다.

피할 도리 없이 내리꽂히는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쳤다.

“씨발. 잡히기만 해 봐.”

“…….”

피 냄새를 뒤쫓는 맹수 같은 말이었다. 곰 인형 속 선웅의 심장이 빠듯하게 긴장감으로 두근거렸다. 호흡이 딸리는 기분에 선웅이 숨을 집어삼켰다.

딸꾹.

딸꾹.

별안간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어릴 적 선웅이 딸꾹질을 하고 있노라면 할머니가 웃으며 ‘이 녀석, 꿀 훔쳐 먹었지?’ 하고 물으셨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달콤한 꿀을 훔쳐 먹은 아이처럼, 제가 남몰래 했던 짓 때문에 뒤늦게 딸꾹질을 하는 것일까. 딸꾹. 딸꾹. 눈치 없는 딸꾹질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 찬영아, 미안. 선웅은 어설픈 연극의 끝을 고하듯 눈앞의 관객에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한 발짝, 두 발짝 그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데, 뒤에서 낮게 끓어오르는 성난 목소리가 울렸다.

“야.”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인형 탈의 위로 턱, 하고 올라온 무게감을 느낄 찰나, 그대로 붙잡힌 팔에 휙 몸이 돌아갔다.

“읏……!”

순식간에 큼지막한 손이 인형 탈을 벗겨 냈다. 감춰져 있던 선웅의 얼굴에 바람이 확 불어닥쳤다. 좁았던 시야가 단번에 확장되며 천제환이 가득 들어찼다. 땀이 식은 자리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딸꾹.

선웅의 열기를 실어 나른 바람이 천제환의 검은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와 곤두선 눈썹, 짙은 눈동자, 잘 뻗은 콧날, 사납게 비틀린 잇새로 드러난 단단한 이가 질긴 분노를 내뱉었다.

“멋대로 입술 부벼 놓고 어딜 도망가?”

“……!”

붙들린 팔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선웅이 팔을 비틀어 빼내려 할수록 힘은 올무처럼 더욱 감겨 왔다.

“이것 좀 놓고―.”

“놓으면. 또 도망치려고?”

저렇게 살벌한 눈을 하고 쳐다보는데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을 것이었다. 완고하게 움켜쥔 손은 쉽사리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았다.

“……끅, 알겠으니까.”

“알겠으니까?”

천제환은 선웅의 말을 똑같이 되물었다.

“안 도망갈 테니까, 끅, 팔 좀 놔줘. 아파서 그래.”

“…….”

“정말, 아파…….”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선웅의 얼굴은 퍽 간절해 보이기는 했다. 천제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선웅은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악!”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스텝이 꼬여서 그대로 뒤로 자빠진 선웅은 천제환의 운동화에 애처롭게 짓밟힌 곰 발바닥을 발견했다. 애초에 천제환은 자신이 도망칠 것을 알고 발을 밟은 채로 팔에 힘을 풀었던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며 잔뜩 빈정거리는 대꾸에 선웅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천제환의 눈동자에 금세 샐쭉하게 변한 여선웅의 얼굴이 담겼다. 제게 거짓말을 하고 내빼려고 했던 주제에 억울한 빛으로 물든 얼굴이었다.

“발 좀 치워 봐.”

“싫은데?”

제 그림자에 가둬진 선웅의 형용을 훑는 천제환의 눈동자가 검게 빛났다. 이대로 실수인 척 여선웅의 가는 발목을 부러뜨리는 것쯤 아무것도 아닌데. 그럼 최소한 여기서 더 도망치지는 못할 것 아닌가.

부러뜨린 후에 제가 ‘실수’한 것이니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 여선웅이 어쩌겠는가. 그렇게 제 옆에 못 박아 두다가 발목이 다 나을 때쯤 되면 반대쪽을 부러뜨리는 것도…….

천제환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살벌한 생각을 알아차릴 리 없는 선웅은 곰 발바닥을 빼내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다. 그냥 신발이면 발부터 먼저 빼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선웅이 입은 옷은 신발까지 모두 일체형이었다.

기고만장하게 서 있는 천제환의 모습에 선웅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도망치려는 자신의 속셈을 읽었듯, 선웅도 지금 상대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천제환이 원하는 말은 아마, 이런 말일 것이다.

“……와줘.”

“뭐라고요?”

“도와 달라고.”

“뭘?”

“일으켜 줘!”

정말 모른다는 듯 뻔뻔한 천제환의 태도에 참다못한 선웅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에 놀란 건 제환이 아닌 선웅 자신이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러본 건 처음이었다.

저런 놈이 새벽엔 왜 예뻐 보여서는. 내가 미쳤지. 선웅은 당장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웅은 씩씩 어깨를 들썩이며 얄미운 상대를 노려보았다.

“흠…….”

천제환은 그대로 무릎을 접어 앉았다. 한쪽 무릎에 턱을 괴고 선웅과 눈을 마주했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고요.”

“……뭐를?”

불길한 예감을 삼키는 선웅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나 잘 때 입술 부빈 거 맞죠?”

“…….”

뭐지? 확신하고 물은 게 아니었나? 천제환은 그냥 떠본 건데 자신이 괜히 지레 찔려 도망간 건가?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구실을 찾은 눈동자가 바삐 굴렀다. 선웅은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막말로 증거도 없지 않은가.

“……아니. 그런 적 없는데. 착각한 거 아니야?”

“그래요?”

천제환이 슬쩍,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선웅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네. 형이 나 잘 때 몰래 키스했는데. 혀 넣고 막 휘저었잖아요. 변태처럼.”

“야. 내가 언제? 난 그냥 입술만 살짝―.”

“와…….”

기울였던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오더니, 입가가 씰룩거렸다. 선웅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했구나?”

“…….”

“하하.”

천제환의 어깨가 잘게 들썩이며 쿡쿡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여선웅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확신이 맺어지자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발칙하게 먼저 뽀뽀한 주제에 또 꽁무니를 빼는 여선웅이 괘씸하긴 하지만,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천제환은 새빨개진 얼굴로 딸꾹거리는 선웅을 눈에 담았다.

뒤지게 귀엽네, 진짜.

천제환은 들고 있던 곰돌이 대가리를 선웅의 품에 던지고 그대로 선웅을 번쩍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두 다리가 공중에 띄워진 선웅이 버둥거렸다.

‘먼저 고백할 때까지 적당히 모른 척 기다려 줘야겠지?’

천제환은 하늘로 한껏 치솟는 입꼬리를 누르며 다짐했다.

한편 길 한복판에서 남자의 품에 덜렁 안기게 된 선웅은 천제환은 알아보는 행인들 때문에 쪽팔려 죽을 맛이었다. 낯짝이 두꺼운 천제환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당연한지 몰라도 저는 아니었다. 선웅은 냉큼 안고 있던 곰인형 탈을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선웅은 차에 타려다가 곰 대가리를 차 문에 박고 또 뒤로 자빠질 뻔했다. 자신의 멍청한 짓이 즐거운 듯 뒤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남자를 무시하고 차에 올랐다.

“나 가게에 짐 두고 왔어.”

“짐?”

“핸드폰이랑 옷 다 거기 있는데.”

“하루 종일 전화도 안 받는데 쓸데없이 핸드폰은 뭐 하러 챙겨요?”

선웅은 쓸데없이 잘생기고 뻔뻔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도대체 천제환의 머릿속엔 어떤 사고 회로가 장착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안 봐도 나 잘생긴 거 아니까 벨트부터 매요.”

“무슨―.”

선웅은 하마터면 간신히 멈춘 딸꾹질이 재차 도질 뻔했다. 입이라도 맞출 듯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 탓이었다. 이내 귀 옆에서 스르륵, 안전벨트가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달칵, 버클을 채우고 제자리로 돌아간 천제환은 시동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 어디 가는 건데?”

“옷 사러. 설마 계속 그 차림으로 다닐 생각은 아니죠?”

그는 대답과 동시에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부웅― 속도를 올렸다. 앞으로 내밀었던 선웅의 상체가 그대로 시트에 고꾸라졌다.

사방이 거울과 쇼윈도인 백화점에서 선웅은 그곳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지 않으려 땅만 보고 걸었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천제환의 보폭에 맞추어 곰 발바닥이 반짝거리는 대리석 위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콩, 선웅의 정수리가 딱딱한 등판에 부딪혔다. 도착한 곳은 유명 명품 브랜드의 플래그숍이었는데, 천제환을 알아본 점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물론 천제환은 패션에 쥐뿔도 관심 없었다. 거의 매일 트레이닝복 차림인 그는 팬들이 질색하는 파란색 단체 티셔츠도 불편함 없이 잘만 입고 다녔다. 요즘엔 선웅에게 멋있게 보이려고 나름대로 차려입고 다니긴 하지만.

이곳은 쇼핑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고호경에게 종종 끌려오던 곳이었다. 안목이 까다로운 모자가 인정한 곳이니 그럭저럭 괜찮을 터였다.

점원에게 선웅을 맡기고 탈의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종일 여선웅을 찾아다녔더니 피곤했다. 배도 고프니 얼른 옷 사 주고 밥이나 먹으러 가야……. 거기까지 생각하던 천제환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선웅이 탈의실에서 나오자 점원의 얼굴에 진심 어린 감탄과 화색이 돌았다.

“와아. 피부가 워낙 밝으시고 이목구비가 또렷하셔서 이런 색도 잘 받으세요.”

“감사합…… 니다.”

갈수록 점원이 선웅의 얼굴 아래 갖다 대는 옷들의 컬러가 화려해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선웅이 절대 사지 않을 것들이었다. 처음 점원이 끌고 온 행거에 걸린 옷가지들을 볼 때만 해도, 저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입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선웅에게 입힐 옷들을 선별해 온 것이었다. 다섯 벌째 갈아입고 나왔을 때 선웅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그렇다고 성심성의껏 일하고 있는 점원에게 싫은 내색을 할 순 없었다. 열심히 일하는 점원이 무슨 죄겠는가.

난감한 선웅이 손가락을 꼼질대며 천제환에게 간절한 신호를 보냈다. 적당히 하고 가자는 간절함을 담아. 그러나 잡지를 뒤적이기 바쁜 남자에게는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천제환을 부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 활짝 웃으며 다음 코디 세트를 건네는 점원의 행동에 선웅은 탈의실로 지친 몸을 돌려야 했다.

“……와하.”

탈의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천제환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점원의 호들갑에 마음속으로 수백 번 맞장구쳤다.

선웅은 흰색 셔츠를 입으면 청초했고, 레몬색 같은 걸 입혀놔도 상큼하고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었다. 아이돌이야 뭐야? 무심코 펼쳐 놓은 잡지의 향수 광고 화보의 꽃들보다도 예뻤다.

“와, 세상에. 너무 잘 어울리세요!”

“…….”

애꿎은 잡지만 팍팍 넘기던 손동작이 점원의 말과 동시에 우뚝 멎었다. 천제환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선웅의 흰 피부와 몹시 잘 어울리는 연분홍빛 브이넥 니트가 반듯한 어깨선을 타고 손등의 중간까지 우아하게 떨어져 내렸다. 곧고 늘씬한 다리의 실루엣을 적당히 드러내는 아이보리색 바지까지 천천히 훑어내린 천제환은 이 장관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를 떠올렸다.

‘선녀, 천사, 요정…….’

가진 단어들을 죄다 꺼내 늘어놓아도 빈약하게만 느껴졌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계산대에 선 선웅은 자신이 입었던 모든 옷을 점원이 고이 접어 쇼핑백에 담는 것을 보며 천제환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그러나 그는 시선 한 톨도 주지 않았다. 지방 없이 근육만 있는 몸 때문에 손가락만 아플 뿐이었다. 대체 이게 다 얼마냐고! 선웅은 호기롭게 물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매장을 나와 근처 카페로 들어왔다. 창가 앞에 자리를 잡은 선웅은 쇼핑백들을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보았다.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천제환이 선웅 앞에 아이스 라테를 내려놓고 옆자리에 몸을 늘어뜨리듯 앉았다.

“제환아.”

“왜요.”

“이 중에 하나만 사면 안 돼? 방금 산 거니까, 나머지는 바로 가서 환불하면―.”

“형.”

천제환은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쭈욱 빨며 맞은편을 턱짓했다. 그를 따라 선웅의 시선이 옮겨간 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알고 입는 스포츠 브랜드의 매장이었다. 2층으로 된 매장의 쇼윈도 전면을 가득 채운 대형 광고 포스터의 모델은 천제환이었다.

“내가 저거 찍고 얼마 받았는지 검색하면 금방 나오는데, 유난 떨지 말고 그냥 받는 게 어때요.”

“…….”

그러니까 적당히 예쁘든가……. 빨대를 물고 중얼거리는 말을 선웅은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됐어요.”

얼떨결에 값비싼 선물을 덥석 받게 된 선웅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제게 한 아름 안겨 준 선물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뻔뻔하고 약간은 재수 없는 태도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이 한데 뒤섞인 머릿속은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선웅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고마워.”

카페를 가득 채운 음악 소리, 각종 머신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만들어 내는 뭉뚝한 소음을 가로지른 한 마디가 귓가에 또렷하게 전해졌다. 달그락달그락, 천제환이 들고 있는 컵에서 얼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래요.”

그렇게 고마우면 제게 고백하는 날, 이 분홍색 니트를 입고 오면 좋고. 천제환은 하고 싶은 말 대신 씁쓸한 커피만 삼켰다. 지이잉.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감독의 전화였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응.”

자리에서 일어난 천제환은 살짝 선웅의 왼쪽 어깨를 잡고는 전화를 받으러 갔다. 잠깐 닿았다 떨어진 촉감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선웅은 오른손으로 어깨를 더듬으며 천제환의 화보를 눈에 담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천제환의 눈빛은 뭐랄까, 중력처럼 모든 시선을 끌어당긴다고 해야 할까.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는 걸 보니, 광고모델로 천제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터다.

얼마쯤 지났을 때, 투명한 유리창에 선웅의 등 뒤로 긴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쳤다. 벌써 왔나? 라테 한 모금을 머금은 선웅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돌아보니, 유려한 몸 선에 알맞게 테일러링된 슈트를 갖춰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의아한 선웅이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에 화답하듯 고호경은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보통 이런 경우 상대는 넋을 잃고 저를 보기 마련이나 상대의 반응은 밍숭맹숭 심심했다.

“……누구세요?”

“나한테 선물도 줬으면서 기억 못 하는 거예요?”

선물? 자신이 이 남자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곱씹던 선웅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기억났다. 차에 놓고 내린 비누를 선물이라 하더니 답례라며 자신의 명함을 건네던 이상한 남자였다

“아, 그 명함―.”

“음. 내 이름은 명함이 아니고, 고호경인데요, 선웅 씨.”

고호경과 달리 상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선웅이 난감한 듯 시선을 피했다. 남자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었어요?”

“제가요?”

“네에. 선웅 씨가요.”

고호경은 창가를 눈짓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선웅은 그가 말하는 것이 천제환의 사진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천제환 선수 팬인가봐요?”

“아, 네…….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잘 익은 과일처럼 발그레한 얼굴에, 고호경은 지나간 기억 하나를 건져 올렸다. 얼마 전 한국대에서 선웅을 만났을 때는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2년 전 바에서 어리숙하게 앉아 있던 남자. 그때나 지금이나 제 취향에 꼭 맞는 예쁜 얼굴이다.

“선웅 씨, 이전에 우리 만난 적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학교에서요?”

“아뇨. 더 전에.”

이 질문을 언젠가 받았던 것 같은데. 곰곰 생각을 더듬던 선웅은 직거래 날 천제환이 자기를 모르냐며 따지듯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스스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비슷한 질문을 근래에 연달아 듣게 되는 것이 민망했다.

그래도 남자에 대해 더 기억나는 건 없었다.

“다른 분이랑 헷갈리신 거 아닐까요.”

“그래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고호경은 선웅의 옆자리를 차지한 쇼핑백들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쇼핑 많이 했네요? 이 브랜드 저도 좋아하는데.”

“……네.”

“밥 먹었어요?”

“아뇨.”

“시간 괜찮으면 같이 식사할래요?”

고호경의 제안에 거절의 대답을 내놓으려던 찰나였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유리창 너머로 전해졌다. 반사적으로 돌아간 선웅의 시선이 아래층의 소란을 발견했다. 무심하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어, 다음에요.”

다급하게 발을 떼려던 선웅이 쇼핑백으로 시선을 돌렸다.

“죄송한데, 잠시 제 짐 좀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금방 올게요.”

내내 어색하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선웅이 다소 뻔뻔한 요구를 해왔다. 픽 웃은 고호경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정중히 길을 터 주었다. 그제야 안심한 선웅은 아래층으로 뛰어갔다.

천제환은 작고 시끄러운 무리에 둘러싸여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삼키고 있었다. 당최 어디서 나타난 건지,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우와아아!”

“천제환이다!”

새파랗게 어린 놈들이 저의 이름을 찍찍 부르며 다리에 달라붙었다. 본디 성질머리가 더럽기 짝이 없는 천제환이었으나, 그가 제 성질대로 못 하는 것이 어린이들이었다. 제가 팔다리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연약함 때문이었다.

그때, 한 아이가 천제환의 오른쪽 허벅지에 얌전히 수납된 성기를 만지며 “이거 총이에요?” 하고 물었다.

“ㅆ…….”

씨발, 어딜 만져?

그는 재빨리 욕지거리를 삼켰다. 아이들이 만나게 될 수많은 못돼 처먹은 어른의 숫자에 구태여 저까지 보태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총? 어디 어디?”

“나도 만져 볼래!”

갑자기 고사리 같은 손들이 허벅지 위로 척척, 달라붙기 시작했다. 집채만 한 야생 곰도 고환을 잡으면 꼼짝 못 한다는데, 천제환이라고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때였다.

“안녕. 얘들아!”

조그만 다람쥐들의 사이를 가르고 나타난 구세주, 아니 선웅이 아이들의 이목을 제게 집중시켰다. 선웅은 양손에 든 작은 장난감과 아이스바를 흔들어 보였다. 근처 상점에서 아이스바를 구매하면 증정하는 장난감이었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단숨에 알록달록한 캐릭터 모양의 아이스바와 장난감으로 쏠렸다.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아이들은 얌전히 원 모양의 벤치에 나란히 둘러앉아 아이스바를 쯉쯉거렸다. 그 앞에서 선생님으로 보이는 여자가 천제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공부방 아이들이 선생님과 한 달 전부터 약속했던 문화의 날이라 했다. 바지에 실수한 친구 때문에 선생님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TV에서나 보던 천제환이 눈앞에 나타나자 아이들은 얌전히 있으란 선생님의 당부를 잊어버렸다. 자초지종을 듣자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었다.

통제를 벗어난 꼬마들을 단숨에 진정시킨 선웅의 실력에 선생님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키즈 카페 알바로 단련된 선웅은 마지막에 등장한 아이의 것까지 잊지 않고 사 온 참이었다. 실수로 주눅 들어있던 아이의 얼굴이 제 몫의 아이스바와 장난감을 발견하고 활짝 펴졌다.

“얘들아, 선수님하고 여기 삼촌한테 감사하다고 인사드리자.”

“선수님. 감사합니다!”

“삼촌, 고마워요!”

선생님의 당부에 달콤함으로 물든 입술들이 목 놓아 외쳤다. 아이들 앞에 쭈그려 앉아 작은 손에서 녹아내리는 아이스바를 하나씩 챙겨 주던 선웅이 웃음을 터뜨렸다.

천제환은 선웅이 다람쥐 무리의 대장 다람쥐 같다고 생각했다. 웃느라 둥글게 휘어진 눈으로 시선을 마주쳐 올 때는, 무지하게 사랑스러워서 와작와작 씹어 먹고 싶었다.

다람쥐처럼 깜찍한 얼굴을 바라보며, 천제환은 하루빨리 그가 제게 고백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재력을 자랑했으니, 다음은 뭐가 좋을까…….

“아, 맞다.”

그제야 선웅이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는 위층의 카페를 향해 뛰어갔다. 천제환도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건넨 후 뒤따라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선생님은 재빨리 커뮤니티에 접속해서 오늘 제가 직접 보고 경험한 일을 빠짐없이 적어 넣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 게시글은 천제환 미담 기사가 되어 포털 메인에 며칠간 걸려 있었다.

그리고 창가에 앉은 고호경은 아래층의 소란과 선웅이 수습하는 과정까지 모두 지켜본 참이었다.

도덕적으로 살면 거리낄 것이 없다. 고호경은 자신을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이와 몸을 섞지 않는다거나, 한 침대에서는 한 사람과만 섹스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형제의 파트너를 가로채지 않거나.

2년 전 그날 밤. 수십 통에 달하던 동생의 부재중 전화, 급하다고 불러냈으면서 우물쭈물하던 천제환의 매니저, 잠시 나간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던 취향에 꼭 맞던 남자.

당시에도 일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고지식한 줄만 알았던 동생이 깜찍하게 형의 뒤통수를 때렸을 줄이야.

고호경은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선웅을 바라보는 천제환은 꿀이 뚝뚝 떨어진다기보다는,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보며 침을 뚝뚝 흘리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첫사랑에 흠뻑 빠진 덩치 큰 동생의 모습이 퍽 귀엽긴 했다.

그러나 제 파트너를 갈취해 갔던 괘씸죄는 언젠가 갚아 줄 생각이다. 이왕이면 녀석이 질색하는 TV 예능을 잔뜩 잡아줘도 나쁘지 않겠지.

또 궁금해졌다. 운동 말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 없던 녀석이 어쩌다 남자에게 처돌았는지. 선웅이 보기 드물게 예쁜 얼굴이긴 하지만. 

팔팔 끓다 못해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은 천제환과 달리, 상대는 이제 막 작고 연약한 불씨만 틔운 수준인 듯한데.

어쨌거나,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긴 해야겠다. 고호경은 선웅의 짐을 카페 직원에게 맡기며 약간의 팁을 웃음과 함께 건넸다. 두 뺨을 붉힌 직원은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 * *

천제환은 좁은 골목에 주차를 마치자마자 내렸다. 큰 보폭으로 건물 안으로 당장 들어가려는 걸 겨우 쫓아간 선웅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밥 산다니까.”

“라면 먹고 싶다고요.”

“그럼 분식집이라도 가서―.”

삐빅. 차 키로 도어를 잠근 천제환이 선웅을 흘겼다.

“진짜 눈치 없이 이럴래?”

“……뭐가?”

“됐어요. 여기서 형이 끓여 주는 라면 먹고 갈 거니까, 그런 줄 알아요.”

부득불 좁은 선웅의 자취방에서 라면을 먹겠다는 완고한 고집에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들이 걷는 대로 어둡던 복도에 센서등이 하나씩 켜졌다. 집 앞에 도착한 선웅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 이게 왜…….”

선웅의 집 현관문의 도어락이 누군가 떼었다가 붙인 듯 비뚤게 돌아가 있었다. 배터리가 빠진 건지 아무리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선웅이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현관문이 저항 없이 그대로 열렸다.

현관 옆의 전등 스위치를 켜자마자 선웅은 제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 대신 안으로 먼저 들어선 천제환이 난장판이 된 내부를 살폈다.

“씨발, 이게 뭐야?”

책상 서랍과 수납장, 싱크대의 상·하부장까지 모두 열려 있었다. 안에 있는 내용물들이 바닥에 흩어져있고, 시트가 모두 벗겨진 매트리스는 절반 이상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굴러다니는 건전지 주변에는 벽걸이 시계가 처참하게 깨진 채로 버려져 있었다. 방바닥엔 멋대로 돌아다닌 침입자의 발자국이 낭자했다.

아침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방의 모습과 습관처럼 늘 잠긴 문을 확인했던 것까지 떠올린 선웅은 눈앞의 광경에 소름이 끼쳤다. 대체 누가? 왜?

112에 신고를 한 후 진술서를 작성했다. 피해품을 적는 칸에 딱히 적을 것도 없었다. 훔쳐 갈 물건 하나 없는 허름한 집에 들어온 도둑이 화가 나서 집을 온통 헤집어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집을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상황은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도통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도어락이 아예 망가져서 제대로 문이 잠기지 않았다.

선웅의 갈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덤덤한 그라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천제환은 떨리는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

“당장 필요한 것만 챙기고…….”

그의 말에 선웅은 바닥에 떨어진 액자 하나를 손에 들었다. 핏기를 잃은 손끝이 차가웠다.

천제환은 선웅의 손을 깍지껴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가자.”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선웅은 천제환의 집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로션을 가지고 앞으로 다가온 천제환이 메마른 선웅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로션도 안 바르고 뭐 해요.”

“아, 깜빡했다…….”

천제환은 옆에 앉아 손바닥에 로션을 짠 뒤, 선웅의 얼굴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섬세하게 한다고 했으나 손길은 몹시 투박했다. 선웅의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주물러졌다.

얼굴이 작아서 그런지 로션이 많이 남았다. 천제환은 남은 것을 제 얼굴에 슥슥 닦아 내듯 발랐다. 주무른 그대로 자국이 남은 얼굴은 여전히 망연한 빛을 담은 채였다.

말없이 선웅을 살피던 천제환이 선뜻한 제안을 건넸다.

“영화 볼래요?”

“응? 웬 영화.”

“그냥.”

“그래.”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선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취방에서부터 천제환이 하자고 하는 모든 것에 저항 없이 따르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리는 선웅의 무릎에 두툼하고 보드라운 담요가 덮이고, 손에는 따뜻한 머그잔이 쥐어졌다. 집 안의 불을 모두 끄고 소파 아래에 기대앉은 천제환이 영화를 재생했다.

선웅은 머그잔에 있는 따뜻한 포도주를 홀짝거렸다. 코끝에 계피와 시트러스 향이 풍겼다. 만족스러운 눈썹이 가볍게 들리는 것을 아래에서 지켜본 천제환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천제환이 고른 영화는 자동차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의외로 이런 취향인가? 처음엔 갸웃거렸던 선웅도 이내 영화에 빠져들었다.

아니, 되레 취향 저격을 당해 정신없이 본 건 선웅뿐인 듯했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자 잠든 천제환의 고개가 선웅의 허벅지 위로 툭, 얹어졌다. 빈 머그잔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은 선웅이 리모컨으로 TV의 볼륨을 줄였다.

재밌게 보던 영화도 잊고, 선웅은 화면이 뿜어내는 다양한 색채가 반듯한 이목구비를 이리저리 물들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잠든 천제환의 모습은 옴짝달싹 못 하도록 시선을 묶어 두는 데가 있었다. 선웅은 잠잠히 어제 새벽을 떠올렸다.

백우의 침실에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천제환의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잡은 채로 자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눈앞의 남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때때로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은 것들이 있다. 남몰래 품은 나쁜 생각,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욕심, 초라하고 지리멸렬한 현실, 덜 여문 상처.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마시멜로를 눈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홀린 듯이 선웅은 천제환에게 입을 맞췄었다.

“…….”

분명 낮에는 자신이 지난 새벽에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에 잠겼던 선웅은 어느새 천제환의 얼굴과 부쩍 가까워진 거리감을 인식했다. 내가 진짜 왜 이러지.

앞으로 한껏 기울였던 상체를 세우려 할 때였다.

방금까지 감겨 있던 천제환의 눈이 뜨였다. 깜짝 놀란 선웅의 목덜미를 잡아 바투 끌어당긴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여간 여선웅, 호시탐탐 천제환 따먹을 생각뿐이지.”

그게 아니라 해명하려던 선웅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천제환에게 그대로 입술을 내준 탓이었다. 거꾸로 맞붙은 입술 새로 들어온 혀끝이 선웅의 가지런한 아래의 치열을 하나씩 쓰다듬었다. 나른하게 혀뿌리를 지분거리는 움직임에 입 안에 샘이 고였다.

질척이는 온도가 올라갈수록 심장에도 열이 고였다. 반 바퀴 몸을 돌려 무릎으로 일어난 천제환이 선웅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선웅의 팔을 제 목으로 감게 만든 후 양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 그대로 안아 올렸다.

시작이 달라서였을까, 이제껏 본 적 없을 만큼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놀란 가슴을 쓰다듬는 위로 같기도 했다. 땅에 닿지 않는 두 다리가 불안하지 않은 걸 보면.

이내 선웅의 등이 폭신한 침대 위로 닿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품에 안긴 채로, 선웅은 아무 걱정 없이 눈을 감았다.

무심한 껍데기 아래에 감춰놓은 무르고 연약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도 괜찮은 밤이었다.

* * *

옆자리를 더듬는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을 번쩍 뜨니, 역시나 빈자리였다. 잘 자고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분명 꿈이 아닌데, 흐물흐물해진 여선웅을 데려다 씻기고 재웠는데 또 어딜 내뺐단 말인가.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온 성난 발걸음이 집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게 뭐야.”

부엌의 식탁에 조촐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노란 포스트잇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적힌 쪽지도 함께였다.

급하게 알바 대타가야해서.

아침 해놨으니까 먹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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