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2)

* * *

천제환이 침실의 문을 닫고 들어오자마자 선웅은 내내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왜 그래?”

“뭐가요?”

“왜 엄마한테 거짓말하는데.”

“내가 언제?”

“천제환.”

발끈한 선웅이 반박을 위해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천제환은 보란 듯이 선웅과 시선을 마주치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오늘따라 종잡을 수 없는 천제환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했다. 그가 가까워질 때마다 조금씩 뒷걸음질한 선웅의 등이 벽에 닿았다.

“난 거짓말한 적 없는데.”

“이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거짓말했잖아.”

선웅은 오늘 천제환이 꺼낸 수백 개의 헛소리 중 하나를 꺼냈다. 물론 뻔뻔한 얼굴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 그럼 형 자취방에 도둑 새끼 들어서 난장판 됐다고 곧이곧대로 말씀드려야 했을까요?”

“그건 내가 알아서 설명할 일이고.”

“그럼 어머니 나오시면, 내가 다 사실대로 말할게요.”

선웅의 대답을 못마땅하게 여긴 천제환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건 또 그것대로 불안했다.

“……뭘?”

“여기, 내 방에서 우리가 뭘 했는지.”

“야!”

저도 모르게 높아진 목소리에 놀란 선웅이 속삭이듯 물었다.

“너 미쳤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때마침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팽팽한 실처럼 당겨졌던 긴장이 끊어졌다.

“나중에 얘기해요.”

천제환이 나가자마자 선웅은 참았던 숨을 겨우 터뜨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또라이 같은 놈의 감정 기복이 종일 널을 뛰었다.

거실로 나가니 천제환은 제 트로피들과 메달을 구경 중인 엄마에게 친절하게 하나씩 설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엄마 친구들과 한 명씩 영상 통화까지 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팬미팅보다도 열심인 모습이었다.

“…….”

……그런데 엄마가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최선을 다해 시어머니를 돌봤다.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마저도 모녀 사이인 줄 알았다며 깜짝 놀랄 정도였다. 좀처럼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는 엄마가 서울에 무슨 일로 왔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천제환과 맥주를 마시며 실컷 담소를 나누던 엄마는 어느덧 잘 시간을 넘긴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그들 사이에서 사과를 깎던 선웅도 멈추고 자리를 정리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엄마 얘기 듣느라 고생했다, 아들들.”

“아니에요. 즐거웠는걸요.”

천제환이 웃으며 엄마의 어깨를 주무르며 대답하는 것에 선웅은 뒤에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제환이, 잘 자.”

“어머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천제환이 제 방을 선웅의 방이라 말해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단둘이 천제환의 침실로 들어왔다. 넓고 폭신한 침대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은 엄마의 모습에 선웅은 입술을 깨물었다. 좀 전에 이 방에서 둘이 뭘 했는지 상기시켰던 천제환의 말이 생각났던 탓이다. 

대체 오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선웅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그때, 디리링― 하는 익숙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천제환이 방 안에 고이 모셔 둔 아빠의 기타를 엄마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사실 연주라기엔 그녀가 두어 개 기억하고 있는 코드를 잡아 본 것이지만, 굳어 있던 선웅의 긴장이 풀어지기엔 충분한 선율이었다.

커다란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아들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포동포동한 아이의 볼살에 묻어 있던 짓궂은 장난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작게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선웅아.”

“응?”

조금의 잠기운도 묻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아들이 곧장 대답했다. 마치 엄마가 자신을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아들.”

“응, 엄마.”

아이처럼 품에 안겨 온 아들이 작은 북소리 같은 어미의 심장 소리에 맞추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엄마 오늘 진석이 삼촌 만나고 왔어.”

“진석이 삼촌?”

“응. 밤마다 아빠랑 잔뜩 취해서 우리 잠 깨웠던 아저씨 있잖아. 같은 회사 다니던.”

진석이 삼촌, 맞아. 그 삼촌에게 늘 아빠가 진석아, 하고 친밀하게 불렀던 것 같다.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에, 대문 앞에서 엄마의 원망을 묵묵히 받아 내던 아저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중에야 아빠의 누명을 벗겨 낸 장본인도 진석이 삼촌이었다는 소식을 건너서 들었다.

“많이 늙었더라.”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렇지. 선웅이 네 말이 맞아.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지.”

제 등을 두드리는 아들의 손길이 눈가를 시큰하게 데워 왔다. 그동안 그녀는 남편의 보험금을 없는 셈 치고 살아왔다. 정확히 얼마가 통장에 들어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옹색한 형편에 허덕이면서도 꺾지 않았던 고집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수치와 울분, 산산이 조각난 자존심을 쥐고 허덕이는 동안 제 아들의 마음이 식어 가는 줄 몰랐다. 즐거울 땐 동네가 떠나가라 웃고, 한번 울기 시작하면 종일 자지도 먹지도 않고 울던 아이였다.

이제는 선웅이 치열한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온 마음을 다해 웃고 마음껏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변해야 함을, 그녀는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지금에 다다라서야 깨달았다.

“…….”

“…….”

다시금 시작된 침묵 위로 생각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윽고 마침표를 찍은 그녀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할머니 더 좋은 병원에 모시려고 해. 은선이 이모가 소개해 줬는데, 거긴 지금 있는 곳보다 시설도 좋고 의사도 훨씬 많대. 어르신들 심심하지 않게 프로그램도 많고…… 큰 병원에서 하는 곳이라 돈 있는 사람들이 많이 간다고 하더라.”

“할머니 좋아하시겠다. 그럼, 엄마도 더 편해지는 거지?”

“선웅아.”

“응…….”

“엄마가……. 정말 많이 고마워.”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마주 본 아들의 고운 얼굴을 품에 안았다.

“……이제 힘든 일도 다 그만하고, 엄마는 선웅이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좋겠어. 네 또래들처럼 배낭여행도 가고, 연애도 하고.”

엄마의 물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선웅은 생각했다. 제 몫의 삶은 무엇이 하고 싶고, 되고 싶은지를 헤아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선웅은 자신이 또래와 같아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단단한 껍질을 비집고 들어온 변덕 같은 관심에, 그 희박한 반전에 기대를 걸어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며 선웅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도 다 괜찮다.

느릿느릿한 눈꺼풀이 몇 번 오르내렸다. 얕은 잠에서 깨어난 선웅은 달아난 잠기운을 다시 불러오기를 포기했다. 옆자리에서 곤히 잠든 엄마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거실로 나온 선웅은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물이나 마실까. 복도를 따라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던 선웅은 복도 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천제환을 발견하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 안 자고 뭐해?”

“형은요.”

“……잠이 안 와서.”

“나도 그래요.”

끝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엔 어쩐지 성마른 기색이 배어 나왔다. 선웅은 그가 어깨에 둘러멘 스포츠백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동하려고?”

“수영이나 할까 해서요.”

“이 시간에? 수영장 문 닫지 않았나.”

“아파트에 주민 전용 수영장 있어요. 이 시간에 가면 사람도 없고.”

“……그래, 잘 다녀와.”

제 얼굴 위로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선웅의 발길이 부엌으로 향할 때였다.

“같이 갈래요?”

“나 수영 못 해.”

“그럼 같이 가서 구경하든가.”

선웅의 팔을 잡아당기며 하는 말은, 장난감이 있는 곳으로 엄마의 손을 이끄는 어린아이처럼 막무가내였다.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집 밖으로 나와 수영장이 있는 층에 다다랄 때까지도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불 꺼진 데스크와 텅 빈 탈의실을 지나 수영장으로 들어서자, 습윤한 공기와 고요한 수면이 그들을 맞이했다.

5부 수영복 위로 드러난 천제환의 상체는 낮은 조도의 조명에도 굴곡이 선연했다. 청동상처럼 크고 단단한 근육은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유연하게 늘어났다. 선웅은 근처 선베드에 앉아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풍덩.

막연한 적막을 깨고 천제환은 단숨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일으킨 물보라가 다리에 닿아 와, 선웅은 간지러운 발끝을 확 오므렸다.

잠영으로 한참 동안 사라졌던 천제환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다시 사라지길 반복했다.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저렇게나 오랫동안 숨을 참는 게 신기했다. 그가 물속으로 사라질 때 선웅도 따라 숨을 참았다가, 천제환이 올라오기도 전에 먼저 숨을 터뜨렸다.

수영장 풀은 천제환의 움직임에 따라 매서운 물살을 만들어 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졌다. 흘러넘친 물은 어느새 선웅의 발밑까지 찰랑찰랑 고여 들었다.

용기를 내 풀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선웅은 무릎을 굽혀 물속에 손을 넣고 휘저어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따뜻한 물살에 망설임이 씻겨 내려갔다. 이윽고 선웅은 반바지를 허벅지 위까지 끌어 올린 후 두 다리를 담갔다.

내내 시렸던 발끝이 녹으며 조금씩 간질간질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며 시간을 흘려보내던 선웅의 발목이 물속에서 별안간 휘어 잡혔다.

“으아!”

당황해 버둥거리던 선웅은 때마침 물 위로 올라오는 천제환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거친 호흡으로 젖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팍이 위아래로 빠르게 오르내렸다. 답답한 듯 수경을 벗어 던진 천제환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저보다 눈높이가 아래에 있어 그런 건지, 유독 천제환의 눈매가 매서웠다. 검은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남자다운 턱과 이어진 목, 그 위로 박동하는 굵은 핏줄로 미끄러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천제환의 얼굴에 피어오른 초조함을 금세 알아차렸다. 아니, 실은 더는 모른 척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당도한 것인지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눈치를 채고 제 발목을 세게 움켜쥔 남자는 보란 듯이 선웅을 몸 쪽으로 더 잡아당겼다.

“그만해.”

함축된 문장과 고요한 시선은 단호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두 손으로 상대를 힘껏 붙들어야 하는 건 선웅이었다. 두 사람 사이는 한 뼘 정도로 가까웠으나, 더는 좁혀질 수 없는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턱이 아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던 천제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호경 말이에요.”

“…….”

“엄마가 첫째 남편하고 낳은 아들이에요. 그 남편이랑 1년 만에 이혼했고, 지금 우리 아빠랑 결혼해서 낳은 게 나고. 좀 웃기긴 한데, 어쨌든 고호경이랑 난 서로 형제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굳이 공표한 적은 없지만, 가십에 관심을 기울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선웅도 이전에 포털 사이트에서 천제환을 검색하다 여배우 이희진의 아들이라는 것까진 알고 있긴 했지만, 그의 가정사보다 사진이나 경기 영상을 더 찾아봤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고호경 왜 만났어요?”

천제환은 여느 때처럼 비꼬거나 넘겨짚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가진 인내를 모두 끌어모아 부글거리는 질투를 간신히 눌렀다. 한번만 더 여선웅을, 저 무구한 눈동자를 믿어 볼까 싶어서. 자못 간절하기까지 한 물음이었다.

“우연히 만났어.”

“하하, 우연…….”

젖은 얼굴과 머리를 한번에 쓸어 올리는 천제환의 손길이 거칠었다. 손 틈새로 섬뜩한 웃음소리와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우연?

저는 2년 내내 여선웅의 꽁무니를 쫓아 겨우 만났는데. 눈앞에 데려다 놓고도 불안해서 이 발목을 부러뜨리고 싶다거나,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가두고 저만 보게 하고 싶단 미친 생각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해 대는데. 우연. 우연이라고?

천제환은 씁쓸한 자조를 삼키며 뇌까렸다.

“대체 그 좆같은 우연이 몇 번이나 겹쳐야 고호경 집을 드나드는 건지 궁금하네…….”

얼마 없는 인내심이 금세 바닥나 버렸다. 여선웅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고 보듬고 싶다가도, 그가 가진 것을 망치고 모두 빼앗고 싶은 파괴적인 소유욕이 든다. 할 수만 있다면 여선웅을 제 손아귀에 쥐고 남김없이 씹어 삼키고 싶은 도착적인 충동은 정상일까.

당장 오늘 밤만 해도 그랬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좁은 구멍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포악하게 제 좆을 박아 넣었다. 그의 옆에 누가 누워 있건 상관없이 정신병자처럼. 그 자괴감을 지우기 위해 폐가 터질 때까지 물속에서 몸부림을 쳤다.

천제환의 악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읏, 아파.”

“…….”

선웅은 천제환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는 다정함으로 제 두려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워 버리다가도, 때때로 파괴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좀 전까지 저를 모욕하던 입술은 다시금 돌변해 달콤한 입맞춤을 내리고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지금도.

날 좋아한다고 말해 줘.

깊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는, 도리어 투명하게 마음을 드러낸다. 당장이라도 부러뜨릴 듯이 제 발목을 쥐고서. 또는 이것만이 저와 연결된 얇은 끈이라도 되는 양 간절하게.

“……천제환.”

천제환이 건넨 ‘좋아한다’는 고백은 열없는 제 마음에 품기엔 너무 뜨거워서, 받는 것만으로 존재에 붉은 화인이 새겨지는 것 같다. 지나치게 격렬하고 선명하다.

선웅은 사정없이 구겨진 천제환의 미간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천제환과 눈을 마주치면서는 도저히 말을 끝맺을 자신이 없는 탓이었다.

“난 널, 좋아하지 않아.”

그런 것 같아.

선웅은 손끝이 하얘지도록 잡고 있던 천제환을 놓았다. 상대가 저를 잡고 있어 그런 것인지, 각오했던 것과 달리 물에 풍덩 빠지지는 않았다.

“여선웅…….”

그답지 않게 말꼬리가 흐릿했다. 마비라도 된 것처럼 얼얼하게 굳어 버린 혀는 제 기능을 상실했다. 선웅을 움켜쥔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어졌다.

“오늘 우리 엄마한테 잘해 준 거……. 고마워. 진심이야. 그리고…… 집 해결되는 대로 빨리 나갈게. 그게 좋겠어.”

말을 마친 선웅은 몸을 일으켰다. 초점을 잃은 시선이 제 손자국이 빨갛게 남은 선웅의 발목에 가 닿았다.

“……그럼, 나 먼저 올라갈게.”

천제환이 빠르게 가로질렀던 레인을 따라, 선웅은 의연하게 걸어 나갔다. 선웅의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시린 귓가를 울렸다. 멀어지는 선웅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던 천제환은 한참이 지나서야, 물 아래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여선웅의 마음을 얻어 내는 것이 쉽다고 자신했다. 참으로 우스운 착각이 아닐 수 없었다. 감은 눈 사이로 밀려들어 온 물에 눈가가 시큰했다.

새삼스러운 사실이 의미하는 건 명백했다.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내주어도 여선웅이 원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방향을 상실한 간절함은 내도록 미지근한 물속을 부유했다.

* * *

오늘따라 서울 하늘은 미세먼지도 없이 맑았다. 선웅의 어머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쓴 채 운전 중인 천제환의 옆모습을 보며, 뉘 집 아들인지 참 잘생겼다는 감탄을 했다.

제 아들 선웅이 세필 붓을 놀려 그린 고운 얼굴이라면, 제환은 만년필의 날카로운 금속성 펜촉으로 완성한 얼굴이었다. TV에서나 보던 스포츠 스타가 운전해 주는 차의 조수석에 제가 타고 있다니, 인생이라는 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버스 터미널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섰다. 제환이 집까지 직접 모셔다드린다는 걸 바쁜데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했더니, 그러면 기사 딸린 차를 붙여 드리겠다며 귀여운 협박을 해 왔다. 겨우 타협한 게 터미널까지였다.

주차를 마친 천제환이 보닛을 돌아 차 문을 손수 열어 주었다. 태권도만 세계 최고인 줄 알았더니, 매너도 단연 세계 최고였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선웅도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따라 내렸다.

“어휴,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내가 산 거 아니고, 제환이가…….”

엄마의 타박에 선웅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트렁크에서 짐가방을 들고 온 천제환이 선웅의 손에 있는 선물 보따리를 가져가며 길을 안내했다. 미리 예매한 버스표에 적힌 플랫폼을 찾아 대기석에 앉았다. 

선웅이 카페를 가리키며 물었다.

“엄마. 마실 것 좀 사 올까?”

“좋지. 커피 한 잔씩 할까? 엄마 가방에 지갑 있어.”

“나도 돈 있거든요.”

천제환은 카페로 향하려는 선웅의 팔을 붙들었다.

“여기 있어요. 제가 사 올게요.”

“……아냐. 내가 사 올게. 커피 뭐 마실래?”

“그럼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응. 엄마는 카푸치노 맞지?”

“그럼.”

선웅은 손을 떼어 내고 카페로 뛰듯이 걸어갔다. 어머니 앞에서 어떻게든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게 눈에 보였다. 천제환은 착잡한 심정을 삼키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가 걱정스레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피곤해 보이네. 어제 잠 못 잤어?”

“아, 네…….”

내내 싹싹하게 굴던 천제환의 대답이 짐짓 시무룩하게 흘러나왔다.

“둘이 싸웠지?”

“…….”

어제 난생처음으로 고백을, 그것도 당신의 고운 아드님께 했는데 차였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무언의 대답도 대답이라고, 그녀는 덩치만 커다란 녀석이 귀여워 킥, 웃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레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선웅에게로 가닿았다.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어미는 자식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만다. 새벽에 나갔다가 물 냄새와 함께 돌아온 아들은 밤새 뒤척였다. 이따금 푹푹,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는 게 청춘 아니던가. 누군가 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고민일지라도 그들에겐 우주만 한 법이다.

어머니는 비밀을 속삭이는 사람처럼 손바닥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천제환은 높은 상체를 그녀에게로 기울였다.

“엄마는 제환이 편.”

“…….”

“파이팅.”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굳어 있던 시야에 불쑥 컵이 들어왔다. 그대로 들어 올린 천제환의 시선을 선웅이 재빨리 피했다. 엄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커피를 마셨다.

“궁금하면 제환이한테 물어봐.”

“하하…….”

선웅은 어색하게 웃으며 빨대를 입에 물고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얼마 후 출발 시각이 가까워지자 주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엄마 갈게. 또 보자.”

그녀는 두 아들과의 진한 포옹을 나눈 후 승차 홈으로 향했다. 짧은 사이에 몇 번씩 돌아보며 손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야에서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웃는 표정 그대로 사이좋게 굳어 있던 두 사람은 터미널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주차장과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선웅의 어깨를 천제환이 잡아 세웠다.

“어디 가요?”

“버스 정류장 저쪽이라서.”

“내 차로 가요.”

“됐어. 버스 타면 돼.”

“그래요, 그럼.”

순순히 대답하고 선웅을 앞질러 걸어가는 천제환을 불러 세웠다.

“너 어디 가? 주차장 그쪽 아니야.”

“버스 탄다면서요.”

뭐가 문제냐는 듯 선글라스 위의 짙은 눈썹이 가볍게 올라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터미널 한복판에 서 있는 천제환을 알아본 인파가 점점 늘어났다. 이와 같은 북새통 속에서 홀로 우뚝 솟은 존재감처럼, 오직 그만 태연했다.

결국 선웅은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조수석의 문을 연 천제환이 재촉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선웅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조수석으로 불쑥 들어온 큰 손은 벨트까지 채워 주었다. 부쩍 가까워진 얼굴에 선웅이 시트에 바짝 몸을 기대자, 천제환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

운전석에 탄 천제환은 곧바로 잠금장치를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야?”

“밥 먹으러요.”

“……갑자기 밥을 먹는다고?”

천제환은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이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제멋대로 구는 성미가 하루 이틀도 아닌지라 대거리할 힘도 없었다. 선웅은 아이스커피를 쭉 들이켜며 타는 속을 달랬다.

“그거 내 건데.”

“푸―!”

그런데 하필 두 잔 중에 천제환 커피를 마실 건 뭐람. 재빨리 손등으로 젖은 입가를 닦는데, 옆에서 뻔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어때요? 더한 것도 한 사이에.”

“…….”

말을 말자. 탁, 거치대에 컵을 내려놓은 선웅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라디오에서 흐르던 노래가 끝나고 활발한 DJ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희가 이분들을 모시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벌써부터 부스에 생기가 흘러넘치고 있는데요. 걸그룹 디어큐브! 청취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디어큐브 주다인입니다.

― 와, 다인 씨. 오늘따라 더욱 화사해 보이는 건 기분탓일까요? 지금 게시판이 청취자분들의 반응으로 뜨겁습니다. 국민 영웅 천제환 선수와의 뜨거운 열애―.

시끄러운 음성이 일순 뚝 끊겼다. 천제환이 카 오디오의 전원을 꺼 버린 탓이었다. 순식간에 차 안엔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씨발, 욕을 뇌까린 천제환이 입을 뗐다.

“오전에 스캔들 정정 기사 바로 나갔어요. 그런데 지금 저쪽에서 멋대로―.”

“그래서?”

“……뭐라고요?”

“나한테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

핸들을 꽉 쥔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설명할 필요 없다고?”

“그래.”

창백한 얼굴은 무표정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어려운 말 아닌데 왜 못 알아듣지?”

“너야말로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네가 누굴 만나든 관심 없으니까―.”

끼익! 꽉 밟은 브레이크에 찢을 듯한 파찰음이 고막을 때렸다. 급정거에 앞으로 튀어 나간 몸이 벨트에 턱 걸렸다. 자신을 보호하려 가슴에 올라온 천제환의 손을 거칠게 떼어 낸 선웅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야!”

“여선웅 진짜…….”

선글라스 아래 서러움을 삼키는 입매가 볼록한 곡선을 그렸다.

도착한 식당은 고즈넉한 골목에 자리한 프랑스식 레스토랑이었다. 마당을 끼고 있는 2층짜리 단독 주택 건물이었다. 로즈우드 목재의 테이블과 의자, 크기와 무늬가 모두 다른 타일 바닥, 빈티지한 샹들리에가 어우러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점원에게 안내받은 창가 자리에 선웅이 먼저 앉았다. 이윽고 테이블로 걸어오는 금발의 여자, 셰프 엠마는 천제환과 다정한 포옹 후 쪽쪽, 소리를 내며 비주를 나눴다.

멀뚱히 앉아 있는 선웅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천제환의 어깨를 어루만진 엠마는 싱긋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천제환이 프랑스어도 할 줄 알았나. 괜히 저조해진 기분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선웅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테라스에 막 들어선 남녀를 발견한 선웅의 눈매가 움찔했다. 세단에서 내리는 남자를 보았을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제가 본 게 맞았다. 황망한 선웅의 시선에 천제환도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쯧.”

좀 전의 천제환과 마찬가지로 엠마와 비주를 나누는 고호경과 동행한 여자는 주다인이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천제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뭐야.”

“뭐긴, 밥 먹으러 왔지. 선웅 씨 우리 자주 만나네요?”

“……안녕하세요.”

싸늘하게 굳은 천제환을 모른척한 고호경은 선웅과 다인을 서로에게 소개해 주었다. 다인이 앉을 의자를 빼 준 후 고호경도 자리에 앉았다. 천제환과 고호경은 아무리 반쪽짜리 형제라도 닮은 구석 하나를 찾기 힘들었다.

어색한 기운이 만연한 원형 테이블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얼마 후 선웅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따라붙은 두 남자의 시선에, 선웅은 담배를 핑계로 밖으로 혼자 나올 수 있었다.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가니 뒷마당이 나왔다. 긴 벤치의 끝에 재떨이로 쓰는 커다란 홀토마토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직원들이 쉬는 곳인 모양이었다. 선웅은 벤치에 털썩 앉아 불을 붙인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들이켰다. 한숨 같은 연기를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불편하다. 천제환의 억지에 여기까지 끌려올 때부터 불길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막말을 쏟아 내던 천제환이 다짜고짜 좋아한다며 고백한 게 어제다. 다음 날인 오늘 고호경, 주다인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라니.

살벌한 이부형제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들 사이에 끼어 있는 심정이란. 삼류 로맨스 영화도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진 않을 것이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오래 묵어 있던 담배는 뒷맛이 썼다.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였다. 자박자박 잔디를 밟는 소리가 나더니, 주다인이 두리번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담배를 끄려는 선웅에게 다가온 다인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피우셔도 되는데.”

“아, 네.”

바람의 방향을 확인한 후 선웅은 그녀에게 연기가 가지 않도록 왼쪽으로 비켜섰다.

“안 오셔서 제가 직접 찾으러 나왔어요.”

“네?”

“농담이에요.”

다인은 흐흥, 웃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저 두 분, 형제라더니 하나도 안 닮지 않았어요? 저 처음에 듣고 완전 깜짝 놀랐잖아요.”

“그러게요.”

“완전 남남인 저희 멤버끼리도 하나씩은 공통점이 있는데 두 분은 외모랑 성격, 하는 일까지 모조리 반대잖아요. 어떻게 그러지?”

선웅도 동의하는 바였다. 둘이 형제라는 걸 전혀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저 분위기에서 더 먹었다가는 된통 체할 것 같아서 나왔어요. 웬만한 약도 소용없을 것 같다니까요.”

그녀가 장난스레 몸서리를 치며 하는 말에 선웅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가 불편했던 게 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 고 이사님이랑 미팅 있어서 스케줄 끝나자마자 온 건데, 천 선수님 계신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왜요?”

막을 새도 없이 멋대로 물음이 튀어 나갔다. 선웅이 재차 입을 뗐다.

“아니, 말실수예요. 대답 안 하셔도―.”

“저도 한 대만 주실래요?”

“담배요?”

“네.”

“……미성년자는 아니시죠?”

“스무 살이거든요.”

입술을 삐죽이는 주다인의 얼굴은 어린 티가 역력했다. 선웅보다 다섯 살이 어리니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선웅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함께 건넸다. 

작은 손에서 철컥, 철컥 부싯돌이 몇 번 헛돈 끝에 담배에 불이 붙었다. 볼이 홀쭉해지도록 연기를 마시자마자 다인이 마구 기침을 터뜨렸다.

“쿨럭! 끅!”

“괜찮아요? 물 가져다줄까요?”

그녀는 주먹으로 가슴께를 쿵쿵 두드리며 도리질을 쳤다. 얼마 후 간신히 진정된 다인은 눈물을 닦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 사실 담배 처음 피워 봐요.”

선웅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당당하게 달라고 하셔서 속을 뻔했어요.”

“후우, 속이 답답해서 담배라도 피우면 좋아질까 했는데 쉽지 않네요.”

다인의 대답을 끝으로 어색하지만 불편하진 않은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푸르른 하늘을 응시하던 선웅과 다인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고, 또 동시에 풉, 하고 작게 웃음이 터졌다.

“실은 저도 연예인이지만……. 다른 연예인들 스캔들 터지고 부인할 때, 속으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싶었거든요. 근데 굴뚝 아래에서 신나게 부채질해 대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렇게 되더라고요.”

“…….”

다인은 제 손가락 사이에서 조금씩 짧아지는 담배 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날 당장 부산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을 때 농담인 줄 알았거든요. 다음 날 퀵으로 보내드린다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고.”

선웅은 다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애장품 경매에서 바뀌었던 기타 이야기였다.

“부산 도착해서 천 선수님은 기타 찾자마자 바로 공항 가셨는데 스캔들이 딱 터진 거예요. 그때는 솔직히 천 선수님이 원망스러웠어요.”

“원망이요?”

“하루만 기다려 주지. 전 국민한테 사랑받는 금메달리스트랑 여자 아이돌이 스캔들 나면 욕먹는 건 이쪽이거든요.”

다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그 기타가 저한테나 소중하지, 천제환에게는 그저 단군마켓에서 중고로 산 물건일 텐데. 아예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하루만 참지……. 선웅은 가슴께가 뻐근하게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근데 알고 보니까, 저희 소속사에서 선수님 동의도 없이 스캔들을 터뜨린 거더라고요. 저희 그룹이 계약 기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저희랑 회사 입장이 좀 달라요.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언론 플레이 하면서 협박해 올 줄 몰랐어요. 저 때문에 멤버들까지 루머에 시달리고, 팬분들한테도 죄송하고…….”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다인의 얼굴엔 웃자란 수심이 역력했다. 닳고 닳은 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추저분한 소문에 다치는 건 이토록 무고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다. 선웅도 어린 나이에 경험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매일 벌서는 기분이에요.”

“…….”

그런 순간이 있다. 가슴에 난 구멍에 싸늘한 바람이 일고, 상대의 말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 내가 걸어온 길 뒤로 버려진 폐허를 발견하는 시간. 시간을 삼키고 홀로 아물었을 뿐, 아직 그 자리에 있노라고 흉터가 제 존재를 드러내는 때가. 

선웅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묵묵하게 다가오는 남자의 깊은 시선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됐다. 다인은 팔을 앞으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읏차,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그래도 다행히 고 이사님이 많이 도와주시고 계세요. 인생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해결해야죠.”

그녀가 스무 살이라고 했던가. 다인은 기꺼이 제게 내밀어진 도움을 받아 불이익에 대항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저를 숨기고, 귀를 막아 버린 저와는 달랐다.

선웅은 궁금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지. 그래서 그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질문을 꺼냈다.

“두렵지 않아요?”

“두렵죠. 솔직히 말하면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포기하고 싶어요. 저도 겁 무지 많거든요.”

가감 없는 솔직한 대답에 선웅이 엷게 미소지었다.

“근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려니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받는 게 어―엄청 억울한 거 있죠? 그래서 있는 힘껏 싸워 보려고요.”

소중한 사람. 선웅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깨달았다. 용기라는 건 타고나야지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 자가 기꺼이 선택할 수 있도록 제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 선수님한테 감사하게 됐죠. 덕분에 회사의 속내에 대해 알게 된 거니까요. 그래도 여전히 불편하긴 하지만…….”

막막한 수심을 털어 내듯 다인이 맑게 웃었다.

“신세 한탄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아, 담배도요.”

그럴듯한 조언이나 응원의 말 한마디를 건넬 말주변이 없어, 선웅은 그저 그녀를 따라 웃을 뿐이었다. 아이돌인 다인도 얼마간 넋을 놓을 만큼 고운 미소였다.

그간 운동 외의 질문에 답변을 꺼리던 천제환이 최근 인터뷰에서 이상형에 관한 질문에 ‘웃을 때도 예쁜 사람’이라 대답했다. 그 모호한 답변은 팬들 사이에서 ‘천제환 연애하는 거 아니냐’, ‘그냥 평범한 답변일 뿐이다’로 나뉘어 꽤 시끄러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지금 와서 그 인터뷰가 왜 생각난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천제환과 고호경 둘만 남은 테이블엔 전운과도 같은 침묵이 깔려 있었다. 손깍지를 끼워 그 위에 턱을 살포시 올려놓은 고호경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선웅 씨 말이야.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병원에 데려와서 검사 좀 해 보지 그래?”

“뭐?”

감히 저 입에 여선웅의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더러운 일인데, 제가 모르는 건강 문제라니. 천제환의 손에서 스푼이 휘어졌다.

“미적 감각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한테 안 넘어오지? 세 번이나 만났는데 말이지.”

“세 번?”

세 번이나 만났다고. 천제환의 교근이 딱딱해졌다.

“그래, 세 번.”

고호경은 보란 듯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곤,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 학교에서 우연히 만나서 길을 물었었어. 그때는 그냥 내 취향이라서 명함 준 게 다야. 예전에 한번 만났던 사람이란 걸 알아본 건 백화점에서 다시 만났을 때. 카페 창가에 앉아서 누구 화보에서 시선도 못 떼고 귓불까지 붉히고 있는 모습에, 2년 전에 만난 남자가 기억이 났지.”

그럼 자신이 여선웅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고호경도 여선웅을 만나지 않았던 것인가? 그는 체육관에서 자신을 몰아붙이던 제게 불같이 화를 내던 선웅의 모습을 떠올렸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고호경이 흐음, 하며 목을 울린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네. 하늘에서 비는 주룩주룩 내리지, 밖은 깜깜하지, 집에도 못 들어가고 공원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처음 루시 만났을 때보다도 더 불쌍해서 안 주워 올 수가 없었어. 알다시피 내가 마음이 약하잖아.”

“장난치지 말고 알아듣게 제대로 얘기해.”

“우리 직원들이 회식 끝나고 그러더라고. 네 대리운전 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고.”

“……뭐?”

“너 스캔들 터지기 전에, 인터넷에 사진 돌자마자 기자들 네 집 앞에 잔뜩 몰려갔었던 건 알아?”

“……하.”

탁, 손에서 휘어진 스푼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고호경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날 여선웅이 왔었다고? 큰 손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반듯한 이목구비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 밤에 자신 때문에 밖을 헤맸을 선웅을 생각하니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참을 수 없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를 체육관에 가두고 고호경과 붙어먹은 거냐고 몰아붙였다.

씨발, 좆같이 멍청한 새끼.

고호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존심도 고집도 센 놈이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져든 게 보였다. 뭐든지 마음먹은 대로 되던 인생이 선웅에게 꼼짝없이 휘둘려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재밌다. 뭐 조금, 기특하기도 하고.

더 약 올려 볼까. 고호경은 짓궂게 입을 열었다.

“우연이 반복되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사람들은 그런 걸 운명이라고―.”

휘몰아치는 자괴감에 괴로워하던 천제환이 번쩍 고개를 들어 고호경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연은 우연일 뿐이야. 함부로 갖다 붙이지 마.”

“하하.”

그럼에도 천제환은 선웅과 제 사이에 운명이나 인연 따위의 이름을 붙일 만한 것이 없어 입맛이 썼다. 하다못해 고호경에게는 세 번이나 있었던 우연도 제게는 한번 거저 주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시팔, 그러면 뭐 어떤가. 여선웅이 저를 받아 줄 때까지 쫓아다니면 될 것을. 천제환은 그답게 빠른 결론을 내렸다.

“여선웅한테 관심 꺼.”

“먼저 남의 파트너 가로채 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곧바로 살벌한 빛을 띠는 천제환의 눈동자에 고호경이 슬쩍 테이블 위의 나이프들을 치웠다.

“선웅 씨 두고 너랑 경쟁할 생각 없으니까 눈에 힘 좀 풀지? 엄밀히 말하면 난 큐피드나 다름없지 않나 싶은데.”

휘익―, 휘파람을 불며 화살을 쏘는 시늉을 한 고호경이 테이블 위에 서류 파일을 툭 올려 두었다.

“스캔들은 오늘 중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거야. 기사 다 내릴 거고.”

천제환은 눈썹만 비뚤게 올릴 뿐, 상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번에 급한 쪽은 고호경이었기에 그는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뗐다.

“내년 상반기에 론칭하는 프리미엄 스포츠 라인 TVC 기획안이랑 계약서. 그랑프리 끝나고 촬영 들어갈 거야. 어차피 1등하고 돌아올 테니 다음 달 온에어하면 딱이지.”

결국 오늘 저를 찾아와 속을 박박 긁어낸 고호경의 본론은 이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스캔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겠단 말은, 고호경이 계산을 끝마쳤다는 말인 거다. 

내내 굳어 있던 천제환이 그제야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지?”

“여선웅 미적 감각엔 전혀 문제없으니까 걱정해 줄 필요 없어.”

“뭐?”

성의 없이 서류를 들썩거리던 천제환이 툭, 서류를 고호경 앞으로 도로 던져 놨다.

“나한테는 존―나 잘생겼다고 했거든.”

“……허어.”

정확하게는 잘생겼냐고 물은 것에 선웅이 응, 하고 대답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고호경보다 제 얼굴이 선웅의 취향이긴 한 모양이다. 기특하게도 저 불여우 같은 얼굴에 용케 안 넘어간 걸 보면.

그날 저녁, 고호경의 연락을 받은 남 비서는 에스테틱 풀코스를 예약했다.

* * *

다음 날 선웅은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다. 제 자취방을 털었던 절도범 용의자가 드디어 붙잡혔단 소식이었다. 경찰서에 도착해 생활안전과를 찾은 선웅은 용의자의 형용을 확인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구영준?”

“……선웅아.”

조사석에 앉아 있던 구영준이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때마침 커피를 들고 조사실로 들어온 형사가 방문자를 알아보고 물었다.

“아는 사입니까?”

“네. 학교 동기요.”

선웅의 대답에 형사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나 참, 말 한마디를 안 해서 사람 돌아 버리게 하더니. 친구였어?”

“…….”

형사가 제자리로 돌아와 앉자마자, 구영준은 재차 고개를 푹 숙였다. 조서를 작성하던 형사가 신경질을 내며 노트북을 덮었다.

“이봐요, 학생. 야주절(*야간 주거 침입 절도)이 얼마나 죄가 무거운 줄 알아? 이런 건 벌금으로 안 끝난다고. 당신 징역 살고 싶어? 무작정 입 다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구영준의 목은 숙여지다 못해, 거북이처럼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형사님. 둘이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으래요. 친구 사이시라니까. 잠깐 담배 좀 피우고 올 테니 휴게실 가서 얘기들 나누쇼.”

“감사합니다.”

선웅의 요청에 형사는 빈정거리듯 대꾸하고는 겉옷과 담배를 챙겨 나갔다. 휴게실로 들어온 두 사람은 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선웅이 자판기에서 뽑아 온 율무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영준.”

“…….”

“정말 너야? 네가 그랬어?”

“…….”

“아까 형사님 하신 말씀 못 들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나도 너 못 도와줘.”

단호한 선웅의 어투에 구영준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가까이에서 바라본 구영준의 얼굴은 눈 밑이 퀭하고 살이 내려 턱이 푹 꺼져 있었다. 구겨진 옷 소매 아래 안절부절못하는 손가락엔 거스러미가 하얗게 일어난 채였다.

“왜 그랬어?”

“…….”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왜 그랬냐고.”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을 몇 번 쥐었다 편 구영준이 점퍼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 구영준. 너도 지금 많이 취한 것 같은데 후회할 짓 하지 마.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

― 씨발, 야. 먼저 꼬실 땐 언제고 사람 병신 만드는 거야, 뭐야? 사람을 우습게 알아도 정도가 있지. 별 볼 일 없는 새끼가.

영상 속 장면은 선웅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2년 전 술에 취한 자신에게 구영준이 추행을 했고, 그를 거부하다 몸싸움이 났었다. 그 후에 선웅은 학과에 일방적으로 아웃팅을 당했다. 당시 할머니의 수술비가 필요해 등록금을 환불받아 처리한 후에 군 입대를 했다. 여기까지가 선웅이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선웅은 불쾌한 기억을 불러온 영상을 꺼뜨렸다.

“뭐 하자는 거야? 당장 지워.”

“……소용없어.”

“뭐라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휴대폰을 꽉 쥐었다.

“이때 우리 밴드도 해체되고, 과에는 네가 사고 치고 군대로 도망갔다고 소문이 났었어.”

“그래서.”

저질스러울 게 뻔한 소문의 내용은 궁금하지 않았다. 제 방에 멋대로 쳐들어와서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자신이 구영준에게 원한을 살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때 구영준이 저를 추행하지 않았다면, 졸업까지 그럭저럭 지냈을 과 동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입대해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하던 말을 멈추고 구영준은 다 식은 율무차를 들이켰다.

“매주 금요일 새벽 한 시에, 없는 번호로 이 영상이 문자로 와. 처음엔 나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웠어. 솔직히 막말로…… 우리가 뭘 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지워도 지워도 계속 계속 오는 거야…….”

“…….”

“학과에 네 이미지는 점점 이상해지고, 이 영상엔 내가 너를…… 막 그렇게 하는 게 찍혀 있으니까…… 불안했어. 혹시라도 이 영상이 아빠한테 들어가기라도 하면…….”

딱, 딱, 딱 구영준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을 쏟아 냈다.

“하. 대체 이 영상을 누가 보내는 건지 학교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계속 의심했어. 저 사람은 왜 나한테 말을 걸지? 얘는 왜 나를 쳐다보지? 왜 내 뒤에서 웃는 거지?”

“…….”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미쳐 가는구나 싶었어. 그때 성진범이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솔직하게 다 얘기했어. 처음에는 걱정하면서 같이 범인을 찾아보자고 하더라고. 자기가 도와준다면서. 그러더니 이번 학기에 너 복학한 거 알고는, 갑자기 네가 범인인 것 같다고 하는 거야. 내가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자기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대. 사람들이 호, 혹시 내 얘기인 거 알 수도 있으니까 선웅이 너는 여자로 바꿔서……. 그 게시글에 댓글이 죄다, 꽃뱀한테 당한 거라고, 그 여자가 작정하고 글쓴이 괴롭히는 거라고 그랬어. 나도 댓글 거기 달린 거 다 읽었는데…….”

하, 선웅은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꽃뱀이니 무고죄니 운운하는 개소리를 듣고 있자니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대체 대가리에 뭐가 들었으면, 피해자가 가해자를 자신의 영상으로 협박을 한다는 망상을 단체로 하는 것도, 그걸 믿는 병신이 있다는 것에도 놀랐다.

이어진 구영준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그 후에 성진범이 시키는대로 하고, 돈을 빌려주고도 못 받았으며,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도 입 한번 벙긋하지 못했단다.

거절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면 오히려 섭섭하다며, 성진범은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된다는 둥 교묘하게 죄책감을 심었다. 선웅의 자취방에 영상 파일이 있는 USB를 찾아와야 한다며 부추긴 것도 성진범이었다. 그 말에 복종하는 개처럼 집 전체를 샅샅이 뒤졌지만 소용이 없었고, 불안함에 떨며 집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게 잡혀 온 것이었다.

테이블을 덮은 유리 상판이 구영준이 내뱉은 습기로 뿌옇게 흐려졌다. 모든 상황을 실토하고 나니 숨이 벅찼다. 그는 테이블에 비친 무표정한 선웅의 실루엣과 눈이 마주쳤다.

“결국 증거를 못 찾았잖아.”

“어……?”

“그래서 그다음엔, 어쩌려고 했는데?”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덤덤한 음성이었다. 구영준은 긴장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성진범이 중요한 파일이니까, 네가 자기 자취방이 아니라 다른 데 숨겼을 것 같다고 했어.”

톡톡톡, 선웅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어디에?”

“……천제환 집에.”

“…….”

돌연 모든 소음이 차단된 듯한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구영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자의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머리채를 휘어잡은 선웅이 휴대폰 위로 구영준의 이마를 쾅! 처박은 후였다.

* * *

학교 앞 술집은 종강 파티로 시끌시끌했다. 몇 년 만에 과 행사에 참석한 선웅에게 과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쏠렸다. 신입생들은 처음 본 선웅을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히기 바빴다.

재수 없는 새끼. 성진범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2년간 여선웅이 문란한 게이라고 입이 아프도록 소문내고 다녔는데 인간들은 저 반반한 얼굴만 보면 제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는 모양이다. 게다가 처음엔 제 말을 모두 믿는 것 같더니, 이제는 확실하냐고 의심스럽게 물어 왔다.

나도 모르지, 씨발. 그냥 내가 대충 지어냈으니까. 그러나 이럴 때 열을 냈다간 역풍을 맞을 수 있어서 잠잠히 있는 중이다. 기분도 좆같은데 구영준은 연락도 씹고 어딜 간 거야?

괜히 구석진 곳에 앉아서 찐따들과 한 테이블에 있으니 저까지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 같다. 기분이 못마땅해진 성진범은 소주를 털어 넣으며 옆 테이블에 앉은 이지영을 힐끔거렸다. 1학년 대표인 지영은 예쁘고 성격도 좋아서 두루두루 인기가 많았다.

“지영아.”

“네?”

만면에 웃음기를 띠던 지영의 얼굴이 금세 싸늘해졌다. 성진범은 빈 잔을 흔들며 느물거렸다.

“넌 무슨 여자애가 센스가 없냐, 센스가. 여기 선배 잔 비어 있는 거 안 보여?”

“직접 따라 드시면 되잖아요.”

“자작하면 재수 없는 거 몰라? 그리고 같이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도 하자는 거지. 어?”

“저 지금 동기들이랑 대화 중인데요.”

“야. 넌 선배 말이 우습냐? 선후배끼리 같이 술 한잔하자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영이 소주 한 병을 들고 테이블로 걸어왔다. 달칵, 소리와 함께 소주의 입구가 열렸다. 성진범이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지영아. 선배가 좋게 좋게 말할 때, 고분고분하게 나왔어야지.”

작은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지영이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투명한 액체가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이죽거리던 성진범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기울인 병에서는 끊임없이 술이 흘러나왔다. 잔을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야, 야!”

지영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낸 빈 병을 내려놓았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성진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씨발, 너 미쳤어?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뒈질라고!”

지영을 위협하려 들어 올린 성진범의 손이 공중에서 붙잡혔다. 신경질적인 고개가 홱 돌아갔다. 선웅이었다.

“야, 안 놔?”

“괜찮겠어?”

“씹. 뭐가.”

성진범이 붙들린 팔목을 빼려 용을 썼으나 소용없었다. 흠뻑 젖은 성진범의 아래를 일별한 선웅이 속삭였다.

“누가 몰래 찍어서 올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선웅의 시선이 테이블 칸막이 위에 올려 둔 텀블러로 향했다. 선웅의 시선을 따라간 성진범이 눈을 홉뜨며 욕을 뱉었다. 선웅이 빈정거리듯 물었다.

“왜? 저게 뭔데?”

싸늘한 정적으로 가득 찼던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텀블러를 유심히 살핀 지영이 동기에게 물었다.

“이거 여자 휴게실에 있던 거 아니야?”

“어. 맞아. 진범 선배가 전에 놓고 갔다고 했던 건데.”

자리에서 일어선 학생들이 텀블러를 든 지영 근처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거 카메라 같은데?”

“진짜?”

“맞네, 여기 렌즈 있어.”

“헐, 어디 봐. 와 정말이네.”

성진범은 선웅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힘껏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엔 손쉽게 놓아 버린 선웅 때문에 균형을 잃은 성진범이 테이블에 엎어지며 접시가 와장창 떨어졌다. 사방에 날카로운 파편과 음식물이 마구 튀었다.

온몸에 반찬 국물을 뒤집어쓴 성진범이 벌떡 일어나 손을 뻗었다. 그러나 키가 큰 지영은 머리 위로 텀블러를 들어 손길을 피했다.

“썅. 내놔!”

“설마 여자 휴게실에 카메라 설치한 거야?”

수백 개의 눈동자가 경멸과 혐오를 담아 성진범을 쳐다봤다. 성진범이 고함을 왁왁 질렀다.

“씨발 것들아. 증거 있어? 저게 내 거라는 증거 있냐고!”

지영의 동기 중 하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 저번에 선배가 본인 텀블러라고 직접 말했잖아요!”

“씨발! 내가 언제!”

드르륵, 구석진 곳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에 사람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구영준이 소란 가운데로 걸어왔다.

“저거 성진범 거 맞아. 쟤가 나한테 시켜서 사 오게 한 거라서 나한테 영수증도 있어. 통화 녹음이랑 문자도 있고. 그리고 이것도.”

구영준이 손에 들고 있던 외장하드를 들어 보이자, 성진범의 낯이 대번 창백해졌다.

“야! 썅, 야! 자, 잠깐!”

풍덩 소리와 함께 팔팔 끓는 어묵탕에 들어간 것은 성진범이 모든 자료를 백업해 놨던 외장하드였다. 그간 구영준을 하인 부리듯이 시키느라 자취방의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던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씨발! 저게 어떤 건데!”

“윽!”

성진범이 곧장 구영준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었다.

“개새끼야!”

엎치락뒤치락하던 둘은 한 덩이가 되어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구영준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성진범은 가스버너 위 냄비가 엎어지며 팔팔 끓어오르는 국물을 그대로 뒤집어썼다.

“아악! 뜨거워! 씨아아발! 물! 물! 좆같은 새끼들아! 처보고 있지만 말고 물! 아니 씨발 구급차, 구급차 불러!”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텀블러형 카메라에 얼굴과 손에 붉게 화상을 입은 채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성진범의 모습이 녹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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