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네가 흘린 것=)
결국 종강 파티의 끝은 엉망진창이었다. 소란을 일으킨 성진범과 구영준은 곧바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참고인 조사차 따라간 후배들의 증언과 구영준의 자백이 더해져, 그동안 성진범의 행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동시에 2년간 선웅을 따라다니던 저질스러운 소문의 진원지 역시 성진범이었다는 것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추문은 혐오를 덕지덕지 붙이고 부피를 키우다가도 값싼 동전의 양면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거대해 보이지만 바람만 불면 모두 흩어지는 먼지처럼 허무하고 헛된 것이었다.
탈력감이 찾아왔다. 무언가를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목소리를 내는 경험은 선웅에게도 생소한 것이었다. 당장 자고 싶었다.
그러나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후라 그런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힘이 없었다. 순간 이동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편의점에 들러 초코우유 하나를 계산한 선웅은 파라솔 아래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앉았다. 테이블 위로 엎드리자 뺨 한쪽에 서늘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또 술 먹고 길바닥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있지.”
머리 위에서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웅은 눈동자만 굴려 상대를 쳐다봤다. 부쩍 가까워진 긴 인영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키가 컸다.
놀라 헤벌어진 입은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술기운 때문일까, 그가 무척 반갑기까지 하다.
“천제환이다…….”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자신이 어디에 있든 간에 매번 용케 저를 찾아내는 천제환이 신기했다.
“뭘 잘했다고 웃어요?”
“왜 보자마자 시비야?”
긴 다리를 접어 앉은 천제환이 가까이서 선웅의 얼굴을 훑었다. 잘생긴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씨발, 여기 왜 이래?”
“……왜?”
천제환의 손이 닿은 입가가 쓰라렸다. 아까 난리 통에 조금 스친 모양이었다.
“아파…….”
“어떤 새끼가 이랬어요?”
찬 바람이 무색해질 만큼 따뜻한 체온이 선웅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네 손 따뜻하다.”
“말 돌리네.”
“정말 따뜻해서 그런 건데…….”
“그러니까 추운데 왜 이러고 있어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녹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천제환을 보자마자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종일 팽팽하게 당겼던 얼굴에 서서히 힘이 풀어졌다.
“왜 자꾸 웃어요?”
“나 웃고 있어?”
“하여튼, 아무것도 모르고 매번 사람 속 터지게 하지.”
“그럼 울까?”
선웅은 장난스레 미간에 힘을 주었다.
“미쳤어요? 어떤 새끼가 볼 줄 알고.”
“뭐 어쩌라는 거야.”
웃어도 울어도 난리야……. 선웅이 투덜대자, 남의 속도 모르고 웃는다며 타박이 돌아왔다.
“일어나요. 집에 가게.”
“……응.”
일어나면서 중심을 잃은 선웅의 동그란 이마가 단단한 가슴팍에 콩, 부딪혔다.
“아야…….”
“가지가지 하네.”
머리 위에서 픽 웃음을 터트린 천제환이 선웅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업혀요.”
“나 걸을 수 있어.”
“알았어.”
“걸을 수 있다니까.”
“알았다니까.”
대답은 알겠다고 하면서 요지부동이었다. 이 고집을 누가 꺾어. 선웅은 하는 수 없이 천제환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기댔다. 그가 그대로 일어나자,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에 선웅은 눈을 감았다.
“여선웅.”
“…….”
선웅은 낮은 목소리의 울림으로 한번, 그와 닿아 있는 곳에 번지는 떨림으로 두 번 전해지는 제 이름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대답 대신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천제환은 생각을 정리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팬 미팅 날 나 데리러 왔다면서.”
“…….”
“미안해.”
그의 담백한 사과에 선웅은 목구멍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천제환은 다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속상하게 해서.”
“…….”
“그래도 왔다고 말해 주지. 병신같이 나만 아무것도 몰랐잖아.”
선웅이 들이켜고 뱉는 동그란 숨이 천제환의 귓바퀴에서 흩어졌다. 한참의 침묵 끝에 선웅이 중얼거렸다.
“……말하는 거 어려워.”
“어려울 게 뭐 있어.”
“그냥 다…….”
“그럼 지금부터 배우면 되지. 애기들처럼 옹알이부터 해 보든가.”
엉터리 같은 조언에 선웅이 핀잔을 놓았다.
“그게 뭐야.”
“뭐긴, 뭐든지 다 들어 줄 테니까 말해 보란 소리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아.”
천제환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선웅이 입을 뗐다.
“너 진짜 짜증 나는 거 알아?”
“…….”
“착각도 병이라면, 넌 불치병 수준이야.”
“…….”
“늘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이야. 고집은 더럽게 세서는. 실컷 막말해 놓고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다야? 재수 없어.”
잠자코 듣던 천제환은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래서. 싫다는 거 다 고치고 오면 나 좋아해 줄 거야?”
선웅은 대답 대신 푸우, 숨을 터뜨렸다. 천제환은 등 뒤의 선웅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대답을 보채듯 발을 굴리며 선웅의 몸을 들썩거렸다.
“응? 좋아해 줄 거냐고.”
“으, 어지러워…….”
선웅의 한마디에 천제환은 바로 동작을 멈췄다.
“잠깐 앉을래요?”
“아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목을 꼬옥 끌어안은 선웅이 발끝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너랑 있으면……. 붕 떠 있는 기분이야. 발이 이렇게 막…….”
움직이는 몸이 떨어질세라 천제환은 선웅의 허벅지를 붙들어 제게로 더욱 밀착시켰다.
“그러다 떨어져요.”
“안 떨어질걸.”
천제환의 시야에 보란 듯이 더욱 동동거리는 운동화가 들어왔다. 어린아이 같은 선웅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네가 잡아 줄 거잖아.”
“…….”
선웅은 없는 용기를 그러모아 체육관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던 날을 떠올렸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천제환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게 되어 버린 걸까.
너는 언제 이만큼이나 내 안에서 존재감을 키웠을까.
종일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점점 허물어진다. 잠기운에 깜빡깜빡 눈이 감겼다. 천제환이 발을 뗄 때마다 그의 어깨에 흐드러진 선웅의 머리칼이 팔랑거렸다.
이윽고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천제환은 허탈하게 웃었다.
“재수 없는 새끼가 업어 준다고 하면 등짝을 발로 냅다 차 버려야지, 이렇게 업혀서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천제환은 늘어진 선웅의 몸을 한 번 추어올려, 안정적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나는 좋아해.”
“…….”
“겁은 많은데 이상하게 용감해. 상처 준 인간들을 원망하지 않으면서도, 함부로 본인을 망가뜨리지도 않아. 싫은 것보다 좋은 기억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솔직히 가끔 멋있다고 속으로 생각한 적도 있어. 근데 또 속은 잔뜩 물러서 말랑한 복숭아 같고……. 아씨, 몰라. 그냥 여선웅 네가 너무 좋은데 어쩌라고.”
“…….”
“……우리 사이에 우연이든 운명이든 그럴듯하게 내세울 건 없지만, 그냥 나 좋아해 주면 안 되나. 내가 좋아하는 마음의 반의반만이라도 괜찮으니까.”
“…….”
얼마나 거닐었을까. 그는 어스레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무심하도록 짙은 남색의 장막이 거둬지고 서서히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추측과 오해처럼 불확실한 것들이 옅어진다.
단 하나, 선웅을 향한 마음만이 오롯이 선명해지는 시간이었다.
* * *
며칠 후 선웅은 늦은 밤 걸려온 엄마의 전화에 잠이 깼다. 할머니가 손자하고 인사하고 싶으시대. 담담한 한마디에 담긴 함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웅과 나눈 다정한 인사를 끝으로 할머니는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부의금을 받지 않았다. 썰렁할 거라 생각했던 장례식장엔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생업을 내려놓고 찾아왔다. 그들은 선웅의 왼팔에 달린 상주의 완장에 눈시울을 붉히고, 엄마의 손을 잡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오히려 엄마는 웃으며 그들을 위로했다.
장정 세 사람이 빈소를 찾았다. 백우와 찬영, 그리고 제환이었다. 금메달리스트인 제환과 백우를 알아본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선웅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랑프리 준비로 합숙 훈련에 들어갔기에, 당연히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조문객에 그들과 겨우 눈인사만 나눴다. 엄마에게 양해를 구한 후, 밖으로 나왔으나 벌써 떠난 건지 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쉬움으로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선웅이…… 맞지?”
뒤에서 선웅을 부른 남자는 일곱 살 남짓한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는 듯한 선웅의 표정을 읽은 남자는 머쓱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 준영이 형이야. 맨날 고시 떨어지던 세탁소집 아들.”
“아, 죄송해요.”
그제야 생각이 난 선웅이 사과를 건넸다. 준영은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괜찮아. 내가 좀 많이 변했어야지. 잘 지내지? 넌 어릴 때도 곱상하더니 지금도 그러네. 연예인인 줄 알았다. 하하. 별건 아니고……. 이거.”
준영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흰 봉투였다. 부의금은 받지 않았기에 선웅이 난감한 얼굴을 들었다.
“이거 부의금 아니야. 그냥 너희 아버지한테 내가 신세 진 게 너무 많아서…….”
“…….”
“예전에 고시 떨어질 때마다 형님이 포장마차에서 술 사 주시면서 매번 용돈 챙겨 주셨거든. 그리고 내가 서울 올라가서 연락도 못 드렸는데…….”
그는 손바닥으로 뜨끈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꼭 신세 갚으려고 자리 잡다 보니까 형님 소식도 뒤늦게 들었어. 형님한테 사람 구실 하고 사는 거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선웅이 너라도 대신 받아 주라.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럴게요.”
“그래. 고맙다.”
선웅이 묵직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아이가 칭얼거리며 아빠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이고, 나 이만 가 봐야겠다. 잘 살고. 선웅아.”
“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웅은 준영이 떠나고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다가온 천제환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얇은 정장 차림의 선웅을 감쌌다.
들으려고 애쓴 것은 아니었으나, 곳곳에서 조문객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파편을 모은 끝에 천제환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가장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찾아온 불순한 소문, 남은 이들이 견뎠을 고통의 시간, 그리고 선웅이 힘써 지키려 했던 것들을.
선웅의 빨개진 코끝이 추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천제환은 선웅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선웅의 눈동자는 갈색이다.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는 한결같은 나무의 색이었다.
그런 선웅에게 유의미한 존재가 되고 싶다. 오해가 아닌 이해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선웅의 곁에서 그에게 쉽게 사랑받고 싶은 이기적인 욕심이 든다.
“감기 걸리게 왜 이러고 있어요.”
“……안 갔어?”
“빨리 가라고요?”
짙은 눈썹 한쪽이 장난스레 올라갔다. 선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바쁘니까. 벌써 간 줄 알았어.”
제환은 큼직한 제 코트에 선웅의 팔을 꿰어 입히고 단추까지 모두 채웠다. 아빠 옷을 입은 어린아이 같은 선웅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선웅은 제환의 웃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억 속에 이 장면을 새겨 넣고 싶은 사람처럼.
“아쉽지만 금방 가 봐야 해요. 잠깐 나온 거라서.”
“…….”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요. 밥 안 먹었어?”
“너는?”
걱정스레 묻는 그야말로 턱선이 전보다 날카로워져 있었다. 부쩍 살이 내린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는 경기 때문에 조절하는 거고―.”
제환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선웅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 미안. 내 손 차갑지.”
금방 거두려는 선웅의 손목을 붙잡은 제환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며 웃었다.
“괜찮아요. 시원하고 좋아.”
“…….”
“좋다.”
시렸던 손이 그가 품고 있는 높은 체온에 녹으며 간지러운 감각이 찾아들었다. 살 것 같네……. 선웅의 손바닥에 대고 중얼거리는 제환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저만치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다가오는 백우와 찬영을 발견한 선웅이 손을 떼어 냈다. 선웅은 남아 있는 온기가 사라질까, 주먹을 꽉 쥐었다.
백우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형 만나자마자 간다는 인사를 해야 하다니.”
“아니야. 바쁠 텐데 와 줘서 고마워.”
“그런 말이 어딨어요. 당연히 와야죠. 진천에 짱 박혀 있다가 나오니까 살 것 같아요.”
백우의 너스레에 웃은 선웅이 옆에 있는 찬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찬영이는?”
“저는 선배님들 훈련 참관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찬영이 좋겠네.”
혀엉, 하며 찬영이 선웅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짧았던 찬영의 머리칼이 어느덧 많이 자라 있었다. 선웅이 찬영을 쓰다듬자, 옆에서 못마땅한 천제환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혀엉…… 알죠? 외롭고 아플 때 전화해요. 으앗!”
제환이 선웅을 끌어안은 찬영을 떼어 냈다.
“갈게요.”
“…잘하고 와. 다치지 말고.”
“그럴게요.”
선웅의 응원에 제환은 자신만만한 대답을 돌려주며 웃었다.
“혀어엉!”
찬영은 옷걸이에 걸린 옷처럼 제환에게 질질 끌려갔다. 찬영이 켁켁거리자 옆에서 백우가 애를 잡는다며 타박을 놓았다. 그 모습에 선웅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환의 체향과 체온이 진득이 묻어 있는 코트는 몹시 따뜻했다.
* * *
장례를 치른 후 집에 돌아왔다. 좁은 자취방이 아닌, 지난 시간을 두고 온 진짜 선웅의 집이었다. 간혹 할머니를 뵈러 고향에 내려올 때도 와보지 않았던 터라 거의 5년 만이었다. 마치 선웅을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집은 기억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뽑혀 있던 전자 기기들의 플러그를 꽂고 보일러를 켰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집 안 곳곳에 두껍게 쌓인 먼지를 걷어 내며 며칠을 분주하게 보냈다.
세탁하여 햇볕에 잘 말려 놓은 커튼을 높은 거실 창에 다는 것은 이제 아빠 대신 선웅의 몫이었다.
“선웅아. 이거 봐 봐.”
“뭔데?”
의자에서 내려온 선웅이 엄마가 건네는 상자를 받았다. 낡은 상자는 보기보다 무거웠는데, 생김새는 선웅에게 퍽 익숙한 것이었다.
“여기 써 있네.”
박스 앞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선웅이의 보물상자’라고 적혀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선웅은 침대에 걸터앉아 상자를 열었다.
하얀 조개껍데기는 놀러 갔던 바다에서 아빠가 주워 준 것이었다. 투명한 파란색의 씨글라스를 처음 봤을 때는, 만화에서나 보던 보석을 발견한 줄 알고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작은 소방차 장난감, 들여다볼 때마다 다른 색 무늬를 보여 줬던 만화경, 크레파스로 그린 가족,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 맞췄던 퍼즐, 구슬로 가득 찬 주머니, 지우개 도장, 하굣길에 툭툭 차면서 걸었던 행운의 돌멩이, 네모난 캐러멜, 시간이 멈춘 아빠의 손목시계….
상자 속에 간직해 온 보물들은 눈이 펑펑 내려 아빠가 돌아오지 못했던 그 겨울 이후로 시간이 멈춰 있었다. 마음을 내주면 꼭 그만큼 아프게 될까 두려워 꼭꼭 닫아 놓았던 선웅의 마음처럼.
다시 발견한 것은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되찾은 마음은 그동안 어떻게 잊고 살았는지 놀라울 만큼 선웅에겐 소중한 보물이었다.
끼익, 녹슨 대문이 닫혔다. 해가 짧아져 벌써 어두워진 골목은 더욱 고요하고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하늘에선 연약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선웅은 집 앞 전봇대의 불 꺼진 가로등을 걱정스레 올려다봤다.
선웅은 엄마에게 집으로 돌아올 때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녀가 눈이 쌓인 어두운 골목길을 걷다 혹여라도 다칠까 염려된 탓이었다. 엄마가 보낸 밝은 이모티콘을 확인한 선웅은 웃으며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오래된 슈퍼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선웅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 엄마와 놀러 간 은선이 이모 대신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자리를 지키는 모양이다.
담배를 계산하려던 선웅의 시야에 땅콩 캐러멜이 보였다. 보물상자에 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선웅은 캐러멜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 두었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할머니가 보고 계시는 작고 볼록한 TV 화면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천제환 선수가 20XX 월드 태권도 그랑프리 파이널 결승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랑프리 파이널은 한 해 세계 최고의 태권도 선수를 가리는 경기인데요. 이로써 천제환 선수는 올해 아시안게임, 올림픽,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모두 참여하여 국제대회에서 모두 정상에 섰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역대 최고의 전과를 올리며 종주국의 자존심을 한껏…….
“웅아, 거스름돈 받아야지.”
“아, 네.”
할머니의 목소리에 화면에 고정했던 시선을 거둔 선웅은 슈퍼 밖으로 나왔다. 작은 상자의 비닐을 뜯고 연갈색의 캐러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쫀득한 캐러멜을 몇 번 오물거리자 고소한 단맛이 입 안에 퍼졌다. 눈발은 아까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긴 골목의 끝, 대문 앞에 서 있는 긴 인영을 발견한 선웅의 발걸음이 멎었다. 검은 허공에서 춤추듯 너울거리는 하얀 눈송이를 응시하던 시선과 마주쳤다.
“안녕요.”
이윽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느새 익숙해진 체향을 느낀 그 순간에, 두 사람의 위로 가로등의 환한 빛이 쏟아졌다.
홀연히 켜진 가로등처럼 찾아온 깨달음은 눈가를 데웠다. 형태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리움은 통증으로, 감각으로 보란 듯이 심장을 긁었다. 왈칵 차오른 눈물 한 방울이 기어이 흘러내렸다. 그 궤적을 따라 제환의 시선이 미끄러졌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선웅이 손을 들어 닦을 새도 없이, 뜨거운 손길이 먼저였다. 눈물을 어루만지는 손짓은 조심스러웠다. 바람도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데, 뒤죽박죽된 머릿속에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웅얼거리던 선웅은 제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 주겠다던 제환의 말을 떠올렸다.
“나, 있지…… 집에서 상자 하나를, 찾았는데.”
“…….”
“거기에, 끄으, 뭐가 있었냐면…….”
점차 호흡이 가팔라졌다. 제환은 그저 가만히 기다린다.
닦아 내도 눈물은 퐁퐁 솟아나기만 했다. 닦지도 못하게 상대가 팔목을 잡아 버렸다. 한계까지 차오른 눈물이 넘실거리다 끝내 흘러넘쳤다.
‘그냥 나 좋아해 주면 안 되나. 내가 좋아하는 마음의 반의반만이라도 괜찮으니까.’
활활 타오르는 것만이 사랑인 줄 알았다. 보잘것없고 열없는 마음도 사랑의 모양이 될 수 있다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네가 알려 줬으니까.
보호색처럼 선웅을 가려 주던 어둠을 녹여 버린 빛의 테두리에서, 하필이면 눈이 펑펑 내리는 지금 집 앞을 찾아온 그에게, 간직해 온 보물을 꺼낼 시간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제게는 소중한 것.
“좋아하고 있어.”
심장이 빠듯하도록 조여들었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가늠할 수 없는 애정이 밀려들어 온다.
“좋아해…….”
선웅은 까치발을 들어 제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에 제 마음을 새기듯 되뇌었다. 들끓고 애타는 마음은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게 만들었다.
“좋아해, 너무…….”
혹시 내 고백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선웅은 제환의 코트 옷자락을 꽉 쥐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겹쳐진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제환아, 좋아―.”
그대로 선웅의 입술이 삼켜졌다. 눈물과 함께 미끄러져 들어온 혀가 선웅의 입 안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오래 메말랐던 마음을 적시듯 섞인 타액이 서로에게 흘러들어 갔다. 입맞춤은 짜고 달고 뜨거웠다. 뒤엉키는 혀의 온도가 자늑자늑하게 스며들었다.
내려다보는 얼굴에 진한 만족감이 서리더니, 선웅의 세상이 뒤집혔다. 천제환의 어깨에 걸쳐진 선웅의 두 발이 위로 떠올랐다.
쾅, 방문이 닫히자마자 제환이 다시 달려들었다. 그는 몇 번이나 빨아 통통하게 부어오른 선웅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 왜 이렇게 달아요?”
“흐으, 캐러멜 먹어서…….”
“씨발, 귀여워…….”
제환은 선웅을 그대로 번쩍 안아 들었다. 선웅도 있는 힘껏 그에게 매달렸다.
쪽, 쪽, 쪽 제환은 선웅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달아, 달아 죽겠다. 뭐든지 선웅에게서 나온 것은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다디단 것뿐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선웅을 침대에 눕혔다.
찰나의 순간마저도 제게서 떨어질세라 힘주어 끌어안는 선웅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제환은 자신이 선웅을 먼저 좋아하게 돼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갓 움튼 애정이 만들어 내는 작은 몸짓, 깊어지는 시선의 온도, 상대에게 활짝 열리기 시작하는 감각.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으므로.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가슴 벅차는지 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지금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제환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물에 입을 맞추고, 열 오른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었다.
“하아…….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아……. 좋아해.”
벌써 수백 번은 더 들은 말인데도 좋아서 돌아 버릴 것 같다.
“나 1등하고 왔잖아. 축하해 줘야죠.”
“하으, 사람들한테 축하 못 받았어?”
“여선웅한테는 아직 못 들었지.”
“그럼 자, 잠깐만.”
선웅은 제환의 얼굴을 감싸 올려 시선을 맞췄다. 설렘과 벅참, 흥분이 넘실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축하해.”
“또 해 줘.”
“축하해.”
“아니, 그거 말고.”
“말고?”
의아한 선웅이 눈을 깜빡거렸다. 제환이 쪽, 입을 맞추자 선웅이 웃었다.
“으음, 그럼 좋아해.”
“또…….”
한층 짙어진 눈동자에 사랑스러운 얼굴이 가득 담겼다.
“좋아해.”
아아. 한시도 눈을 떼기 싫을 만큼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제환은 이 순간 넘치도록 차오르는 마음을 토해 냈다.
“사랑하고 있어요.”
언제나 그렇듯, 제 마음은 이미 한참을 앞서간 지 오래였다. 그래도 괜찮다. 재촉하지 않아도 언젠간 맞닿을 테니.
단군이세요? 마침.
외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