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2)

  외전1. 우리 사이에=)

냄비에 물을 올린 선웅은 라면 다섯 봉지를 차례대로 뜯었다.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선웅의 늘씬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라면 끓이게요?”

“응.”

몸에 매달리다시피 한 큰 덩치는 선웅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왔다. 티셔츠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오는 손길을 저지한 선웅이 입을 열었다.

“가서 앉아 있어. 금방 끓여.”

“싫어. 같이 있을래.”

제환은 선웅이 요리하는 것을 싫어했다. 부엌으로 가려고만 하면 차라리 나가서 먹자며 선웅의 손을 잡아 끌었다. 따뜻한 크레파스 맛이 나던 오믈렛이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은 탓이었다. 그런 제환도 선웅이 끓여 주는 라면은 군말 없이 잘 먹었다. 그래서 라면은 선웅이 가장 자주 만드는 음식이 되었다.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자 금세 맛있는 냄새가 수증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그제야 선웅을 놓아준 제환은 냉장고에서 꺼내온 파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 넣었다. 선웅의 입맛에 맞게 계란은 풀지 않았다. 그 사이 선웅은 그릇을 식탁 위에 세팅했다. 손발이 척척 맞았다.

제환은 선웅의 어머니가 해 준 김치를 잘 먹었다. 금세 바닥을 보인 김치 통을 꺼내며 선웅은 곧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찬을 더 보내 달라는 연락을 받으면 무척 좋아하실 것이었다. 받침대 위에 라면 냄비를 올려 둔 제환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이따가 택배 올 거예요. 어머니 이번에 동치미랑 깍두기 새로 담그셨대요.”

“응?”

금시초문이다. 선웅은 자리에 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고속버스로 택배 보내셨다고 하셨어요.”

“왜 그걸 너한테 전화하셨지?”

“내가 전화드린 건데?”

두 사람은 얼마간 의아한 시선을 마주치다 이내 풋, 웃어 버렸다. 제환이 진짜 아들인 자신보다 더 자주 연락하는 것 같아 선웅은 민망해졌다.

“불겠다, 먹어요.”

“응.”

사이좋게 라면 다섯 개를 거뜬히 해치웠다.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친 제환은 겉옷을 입고 나온 선웅의 모습에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가요?”

“나? 집에.”

“……집?”

여기가 집인데 웬 집? 본가에 일이라도 생겼나? 의아함에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응. 집주인한테 연락 왔어. 수리 다 끝났다고 와서 보라고 해서.”

“아.”

제환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난번 도둑이 들어 난장판이 됐던 자취방의 수습이 끝났단 소식이었다.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선웅이 못마땅한 건 어쩔 수 없다.

가긴 어딜 가. 멋대로 튀어 나가려는 말을 꾹 눌러 삼킨 제환은 창밖을 살피는 척했다.

“밖에 추운데, 내일 나랑 같이 가요. 데려다줄 테니까.”

“괜찮아. 이 옷 따뜻해.”

선웅은 제환이 사 준 흰색 롱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잠근 채 팔을 휘적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이 눈사람 같아 퍽 귀엽긴 하나, 지금은 싹 벗겨서 집에 앉혀 놔야 속이 시원할 듯싶다. 생각을 마친 제환은 선웅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 영화도 보기로 했잖아요.”

“금방 갔다 올 건데.”

“흠.”

제환은 보란 듯이 아랫입술을 비죽였다. 선웅이 목 끝까지 채워 올린 지퍼 끝을 잡고 슬렁슬렁 흔들며 못마땅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 중얼거린 선웅은 하는 수 없이 제환이 지퍼를 내리는 대로 두었다.

결국 선웅은 사흘 동안 제환의 집을, 정확히는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나가려는 낌새만 보이면 그가 잽싸게 몸을 붙여 온 탓이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내내 붙어 있으면서 속속들이 알게 된 건 식성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성실하게 서로의 몸을 탐닉하며 보냈다.

제환은 몸으로 배운 건 잊는 법이 없었고, 그가 주는 쾌락에 꼼짝없이 사로잡히다 보면 몇 시간씩 정사가 이어졌다. 섹스 후 기절하듯 잠들고, 겨우 뜬 눈으로 그가 떠먹여 주는 밥을 먹고 나면 하루가 지나가기 일쑤였다.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아으…….”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겨우 열린 눈꺼풀 사이에 따뜻한 주황빛이 스며들어 왔다. 눈동자만 굴려 창밖을 확인하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도착한 연락에 밀린 답장을 보낸 선웅은 잠든 제환을 살폈다. 잘 때는 천사가 따로 없는 얼굴이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내도록 섹스하고, 기절한 자신까지 챙겼으니 깊이 잠들었을 터였다. 잠든 남자의 얼굴을 하염없이 감상하던 선웅은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실과 멀리 떨어진 욕실까지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들어가 옷을 벗었다. 선웅은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온몸이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제 피부색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통 잇자국과 빨린 흔적이었다.

“진짜, 천제환…….”

물줄기 아래에서 따끔따끔한 몸을 씻으며 선웅은 짓궂은 남자에게 투덜댔지만, 이내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자신도 답이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뒤적이던 선웅은 제환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옷을 입었다간, 붉은 자국이 홀라당 드러날 것 같아서였다. 제환의 회색 터틀넥 스웨터는 품이 컸다. 두꺼운 이불에 폭닥 감싸인 꼴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드레스 룸 밖으로 나온 선웅은 거실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제환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라요. 죄지은 사람처럼.”

“그야, 말도 없이 거기 서 있으니까…….”

“잠든 사이에 몰래 나가려던 게 누군데.”

“…….”

제환은 자고 일어났을 때 선웅이 없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잘 자고 있는 그를 일부러 깨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가온 제환은 선웅의 손등 절반을 덮도록 내려온 소매를 접으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요?”

“약속이 있어서.”

“누구랑.”

때마침 선웅이 쥐고 있던 휴대폰에 전화가 왔다. 그대로 선웅의 손목을 눈앞에 가져와 발신자를 확인한 제환은 짜증스레 미간을 콱 구겼다.

“……만난다는 게, 이 새끼에요?”

약속 장소는 멀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방학이라 비교적 한산한 술집들 가운데, 주막처럼 꾸며 놓은 막걸리집은 사람이 제법 많았다. 곳곳에 놓인 짚더미와 항아리를 훑은 시선이 약속 상대를 찾아 바삐 굴렀다.

“형!”

선웅의 약속 상대는 백우와 찬영이었다. 진천에서 먼 장례식장까지 찾아왔던 그들에게 선웅이 밥을 사겠노라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은 백우는 찬영과 선웅을 초대해 채팅방을 만들었다. 만나기도 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백우와 찬영이 떠드는 통에 휴대폰 배터리가 금세 닳을 정도였다.

“미안, 좀 늦었지.”

“전―혀요. 시간 딱 맞춰서 왔는데요? 보고 싶었어요, 형.”

성큼성큼 다가온 백우가 두 팔을 벌려 선웅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헐, 우리 형 살 빠진 거 봐.”

몸을 옥죄는 거센 악력에 큭, 하고 기침을 토해 낸 선웅의 몸이 무 뽑히듯 쑤욱, 들어 올려졌다. 그제야 또 다른 상대를 발견한 백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선웅의 뒤에 태산처럼 버티고 선 천제환은 한쪽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

“뭐야, 네가 왜 여깄냐? 뒤진 줄 알았는데.”

“…….”

천제환은 그랑프리에서 우승하자마자 갈라쇼에 참석도 하지 않고 바로 한국으로 날라 버렸다. 현지에 남은 백우는 천제환 대신 그랑프리 위원회와 감독, 각종 언론까지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고, 그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그에게 했던 수백 통의 연락을 모두 무시당한 후였다.

뻔뻔하고 비싼 낯짝이 입을 열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야지 별수 있나.”

“누가 바늘이고 누가 실인데.”

“당연히 내가 넣으니까 실― 읍.”

다급히 입을 덮는 선웅의 손길에 제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곤두세운 선웅의 눈썹을 내려보았다. 여기서 더 말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나름의 협박인 듯했다. 혀끝으로 손바닥을 톡 건드리자 바로 선웅의 미간이 움찔했다.

“뭐? 뭘 넣어?”

백우의 물음에 선웅이 고개만 돌려 대답했다.

“어, 아 그, 그게 너희 다 제환이랑 친하고 그래서 내가 같이 보자고 했어.”

“이 새끼가 연락을 받았어요?”

백우는 배신감에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십 년 우정이 와르르 무너지려 했다. 선웅이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그, 내가 제환이네 집에서 잠깐 신세 지고 있거든.”

“형 얘 집에 있었어요?”

“아, 응. 당분간…… 그렇게 됐어.”

요즘 선웅과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기에 백우도 그의 소식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제환의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지는 몰랐다. 둘이 그렇게 친했었나? 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 선웅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할까?”

“자리 이쪽이에요.”

등 뒤로 따라오는 천제환을 흘기며 백우는 선웅을 자리로 이끌었다.

“찬영이는?”

“알바 대타가 있어서, 좀 늦을 것 같대요.”

겉옷을 벗으며 자리에 앉은 선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점원은 백우가 미리 주문한 음식을 내왔다. 막국수, 모듬전, 묵무침, 조금씩 맛을 볼 수 있는 막걸리 샘플러 등이 차려졌다. 자연스레 선웅의 옆에 앉은 심드렁한 얼굴을 한 번 더 째려본 백우는 손뼉을 짝 쳤다.

“아 참, 형! 우리 초코 드디어 새끼 낳았어요.”

“진짜? 그때 검진 데려간다더니. 걱정했는데.”

“다행히 세 마리 다 건강해요. 사진 볼래요?”

“응, 보자.”

선웅과 백우는 이마를 바짝 맞대고 휴대폰의 액정으로 사이좋게 시선을 내렸다. 눈도 뜨지 못한 채 어미의 젖을 빠는 강아지들의 사진을 보며 그들은 제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예를 들면,

“형. 그때 제가 그때 말했던 거.”

“성공했어? 결국 해냈네.”

“그쵸? 제가 이거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형은 알죠, 진짜.”

“그러니까. 와, 진짜 대단하다.”

얼씨구? 선웅의 감탄사에 제환의 눈가가 구겨졌다. 두 사람은 ‘그때’, ‘그거’, ‘이거’ 등의 단어를 남용하며 저를 대화에서 제외시켰다. 탁자 끝에 있는 막걸리를 가져오는 척하며 휴대폰을 흘긋 보니 3천피스짜리 퍼즐이었다. 흥. 저게 뭐 별거라고. 제환은 코웃음을 쳤다.

“근데, 형. 있잖아요.”

“응.”

새로 서빙된 유자 맛 막걸리가 입맛에 맞았다. 백우가 따라 주는 족족 잔을 비우며 선웅이 대답했다.

“이 새끼 요즘 누구 만나는지 알아요?”

쿨럭, 부드럽게 넘어가던 막걸리가 목구멍에서 걸렸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기침 탓에 선웅의 낯이 붉게 물들었다. 선웅에게 물을 따라 주고 괜찮냐 걱정한 백우가 말을 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뭐 그렇게 대단한 연인이길래 꽁꽁 숨기고 보여 주지도 않는지. 그랑프리에서도 이 새끼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백우는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는 젓가락을 들어 묵 무침을 입에 넣었다.

“제가 생각을 해 봤거든요? 대체 이놈이 누굴 만나길래 저 천둥 지랄을 떨어 댈까.”

“관심 끄랬지.”

“아오, 저 싸가지.”

제환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틀어 들썩이는 등을 쓸어내리기 바빴다. 이렇게까지 놀랄 건 뭔가. 하여간 귀엽다. 그는 웃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물 더 줄까?”

“아니, 큽, 괜찮아.”

겨우 진정한 선웅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 백우가 저들의 사이를 눈치채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엄습했다. 선웅은 제환의 팔을 떼어 내고 엉덩이를 들어 그와 한 뼘 떨어져 앉았다. 제환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연예인은 아닌 것 같거든요? 그동안 얘한테 대시한 아이돌이며 배우가 몇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비밀로 할 것도 아니고.”

“장난 아니긴 했지.”

들으라는 듯 선웅의 귓가에 중얼거린 제환은 계속해 보라며 손끝을 까딱였다. 여선웅도 자신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 남자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럼 상대방한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건데…….”

턱을 매만지던 백우가 딱, 핑거 스냅을 쳤다.

“고민하다가 내가 딱 알았지.”

“그래?”

흥미롭다는 듯 물어온 건 제환이었다.

“천제환, 딱 말해라.”

“뭘.”

“너 유부녀 만나지?”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천제환은 짜증스럽게 선웅의 접시에 놓아 주려던 호박전을 던졌다. 반사 신경 좋은 백우는 젓가락으로 날아오는 호박전을 잡아채 우물우물 삼켰다.

“아니, 야. 생각을 해 봐. 그거 말고 네가 이렇게 입 꾹 다물고 있을 이유가 있냐? 내 말이 틀리면 누굴 만나는 건지 말을 해 보든가.”

“딱 보면 모르냐?”

등신아, 하고 말을 이으려던 제환의 허벅지를 테이블 아래 선웅의 손이 꽉 꼬집었다.

“아야.”

들으라는 듯 일부러 소리를 낸 제환은 제게로 쏘아붙이는 눈빛을 맞받아쳤다. 다소 눈치 없는 백우가 그제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수상한 기류를 발견했다.

“뭐야, 뭐야. 둘이 눈빛 왜 주고받는데! 형은 아는구나?”

“어?”

“형, 혼자만 알기 있어요? 우리 사이에 비밀 만들고 그러기 있냐고요오.”

“나도 몰라.”

“아, 혀어어엉.”

백우는 시치미를 떼는 선웅에게 두툼한 어깨를 흔들며 아양을 떨었다.

우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저 토 나오는 꼴을 보느니 말을 해 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제환은 재차 시선을 보냈다. 물론 선웅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제환의 입꼬리가 샐쭉하게 올라갔다.

“늦어서 죄송해요, 헉!”

그때 우다다 뛰어 들어온 찬영이 제환을 보고 깜짝 놀라 꾸벅 인사했다.

뭐야,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랑프리 이후에 잠수 탄 본인 잘못은 생각 안 하고, 불청객 취급에 못마땅해진 제환은 냉수를 컵에 콸콸 따랐다.

카운터에 선 점원이 손님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빨간색 스포츠카 8775 차주분 계세요?”

“어, 저요!”

“여기 이분이 차 좀 빼 달라고 하시는데.”

점원이 가리킨 남자는 꽤나 급한 듯해 보였다. 무심코 차 키를 챙겨 일어서던 백우가 아차, 했다.

“맞다. 나 술 마셨는데.”

“형. 차 키 주세요. 제가 갔다 올게요.”

“오, 찬영아. 그럼 같이 나가자. 공간이 좁아서 봐 줘야 될걸.”

백우는 겉옷을 입으며 점원에게 찬영이 먹을 음식을 추가로 주문했다. 찬영과 백우가 나가고 둘만 남자 선웅의 고개가 제환에게로 홱 돌아왔다.

“천제환.”

“왜요.”

“사람들 앞에서 말이랑 행동 조심해.”

“내가 뭘?”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묻는 제환과 달리 선웅의 눈매는 퍽 단호했다.

“우리 사이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알면 뭐 어때서요.”

“안돼. 싫어.”

선웅의 대답이 조금씩 꼬여 있던 심사를 더욱 뒤틀었다. 그는 선웅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눈을 내리깔았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혹시 나 몰래 만나는 여자 있어요? 아님, 나한테 나이 속였어? 사실 미성년자라든가.”

가당치도 않은 물음에 선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지금도 그렇다. 주점에 들어온 순간부터 저와는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사백우하고만 시시덕거리기나 하고. 여자들이 제게 대시했다는데 질투도 안 해 주고, 둘 사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싫다?

사람들과 있거나 밖에만 나오면 둘 사이에 선명하게 그어지는 선이 못마땅했다. 그들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 테이블로 다가온 여자가 선웅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 안녕. 오랜만이네.”

상대는 얼마 전 종강 파티에서 보았던 지영이었다. 신입생이 당차게 성진범의 잔 위로 콸콸 소주를 붓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선웅은 제환을 홱 밀어내고 후배를 마주 보았다.

선웅이 지영을 알아보는 기색이자 뒤에서 그녀의 일행도 하나둘 선웅에게 인사했다. 시끌시끌한 동기들을 일별한 지영은 앞으로 모아 잡은 손을 꼼질거렸다.

“그때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선배님 연락처를 몰라서…….”

“지영아. 잠깐만.”

선웅이 벌떡 몸을 일으켜 지영의 손목을 잡았다. 지영이 토끼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헉, 제 이름 기억하고 계셨…….”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잠깐 나가서 얘기할까?”

“네, 네.”

“나 후배랑 잠깐만 얘기 좀 하고 올게.”

벙찐 제환이 무어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선웅은 지영과 함께 가게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주차를 마치고 먼저 들어온 찬영은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선배님, 방금 선웅이 형이랑 나간…… 어?”

찬영은 제환이 든 잔 안에 출렁이는 뽀얀 막걸리의 수면을 보고 혹시 지금 지진이라도 났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었다. 회오리가 일어난 저 막걸리만 빼고 모두가 평온했다. 어리둥절한 시선이 거슬러 제환의 얼굴로 올라갔다.

“어디 불편한 데 있으세요……?”

“…….”

“저어, 천제환 선배님?”

때마침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백우는 씩씩대며 제환이 들고 있던 막걸리 잔을 뺏어 타는 목을 적셨다. 자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 친구와 싸우느라 바쁜데, 연애하느라 얼빠진 놈의 모습에 배알이 꼴렸다. 백우는 크으, 소리를 내며 손등으로 입가를 거칠게 닦았다.

“찬영아, 진짜 연애가 존나 어렵다…….”

짧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백우가 중얼거릴 때였다.

“근데, 진짜 여선웅 선배님 완전 보살이다.”

“그러니까. 나 같았으면 성진범 그 사람이 저질렀던 일 대자보 써서 학교에 다 까발리겠다.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 소문만 믿었잖아.”

“변태 새끼. 아우, 소름 끼쳐.”

방금까지 지영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에 세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쌓였던 눈이 높아진 기온에 녹아 발걸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도착한 선웅이 주위를 살폈다.

종강 파티 날 술집에서 있었던 소란이나 구영준과 성진범이 벌인 일을 굳이 그에게까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었고,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라도 지영의 입에서 그날 있었던 일이 나올까, 일단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선웅은 지영의 손목을 놓으며 사과했다.

“미안. 놀랐지.”

“아, 아뇨!”

“갑자기 멋대로 끌고 나와서 미안해. 내가 사정이 있어서.”

“괜찮아요.”

지영은 대답하며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그날 잘 들어갔어? 끝까지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때 나도 많이 취해서.”

“아니에요. 잘 해결됐는걸요.”

“그래? 다행이다.”

지영은 진심으로 선웅이 왜 사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개진상 성진범한테서 저를 구해 주고, 난리 통에 모두가 허둥대는 사이 경찰을 불러 상황을 설명한 것도 그였다. 선웅이 아니었다면 여자 휴게실에 불법 촬영 장비가 떡하니 놓여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

경찰서에서 성진범과 구영준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던 지영은 구영준을 자백하게 만든 사람 역시 선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진범이 학과에 낸 소문도 결국 사실이 아니었고, 그도 피해자일진대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라니.

담벼락과 가게 사이, 좁은 공간에서 마주 본 선웅의 얼굴은 현실감이 없을 만큼 잘생겼다. 키가 큰 편인 지영은 얼마 전 소개팅에 힐을 신고 나갔다가 상대에게 매너가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똑같은 신발을 신고 있는 지금, 선웅은 저보다도 훨씬 컸다. 간판이 뿜어내는 허접한 불빛도 그의 미모를 빛내는 조명 같았다.

“선배님, 저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응?”

“어……, 아! 저희 과에 사람들 아무도 선배님 번호 모르더라구요. 그냥, 제가 학년 대표이기도 하고……. 비상시 연락망 같은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선웅은 한 학기 남은 제게 그녀가 비상으로 연락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지영에게 알려주어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선웅은 순순히 지영의 휴대폰에 번호를 찍어 건넸다.

지영은 제 전화기가 떨어질세라 두 손으로 조심조심 받아, 선웅의 이름을 꼭꼭 찍어 저장했다.

“방학인데 아직 본가 안 내려갔어?”

“자취방 계약이 끝나 가서 다음에 살 집부터 구하고 내려가려고요.”

학교 앞 자취방은 1년 단위로 계약하는 곳이 많았다. 이제 곧 2학년이 되는 지영도 미리미리 다음 살 집을 구해야 할 터였다.

골목의 끝에서 선웅과 지영의 단란한 작태를 잠시간 지켜보던 제환은 운동화 밑창에 걸리는 돌멩이를 짓이기다 걷어차 버렸다. 작은 돌멩이는 이곳저곳에 부딪혀 요란하게 팅팅 튀는 소리를 냈다.

좁은 골목 사이로 제 커다란 몸을 욱여넣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저벅저벅 걸어온 제환은 두 사람 앞에 당도했다.

선웅은 겉옷도 입지 않고 나온 제환을 걱정스레 살폈다.

“왜 나왔어, 추운데.”

“안 들어와서요.”

“금방 들어가려고 했는데.”

제환은 선웅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영 쪽을 턱짓했다.

“아뇨. 이쪽.”

“저요?”

지영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제환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찾던데.”

“아……, 안 들어와서 애들이 찾나 봐요. 선배님,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연락해, 지영아.”

“네.”

제환은 슬쩍 몸을 틀어 지영에게 나갈 틈을 만들어 주었다. 서둘러 지영이 빠져나가자마자 원래대로 제 앞을 막은 커다란 인영에 선웅은 금방 가려졌다.

선웅이 가라앉은 제환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다 입을 뗐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아.”

제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뻗어 선웅의 손바닥을 지분거렸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안 그래도 낮은 선웅의 체온이 더욱 시리게 느껴졌다.

“와, 이제야 나한테 관심 가져 주는 건가…….”

제환이 내뱉는 숨에 술기운이 한층 더 짙어져 있었다. 선웅은 자신이 이만큼이나 자리를 오래 비웠던 걸까 생각했다. 취기 때문인지 제환의 눈가가 느른하게 풀려 있었다.

“술 많이 마셨어?”

“응.”

제환은 선웅의 손바닥에 제 얼굴을 비비며 긴 숨을 내쉬었다.

“나 여선웅이 왜 이렇게 좋지.”

“…….”

“화도 못 내게.”

선웅의 얼굴에 제환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밤하늘보다 짙게 가라앉은 눈빛과는 다르게 키스는 상냥했다.

* * *

체육관 옆 야외 정자에 나란히 앉은 천제환과 사백우의 입엔 사이좋게 담배가, 주찬영의 입엔 초코 맛 쭈쭈바가 물려 있었다.

천제환과 사백우는 열여덟 살에 현지원에게 담배를 배웠고, 첫 국대 선발 이후 약속이라도 한 듯 담배를 끊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 맛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백우는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 있었다. 물론 그 담배를 제공한 제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뒷덜미부터 이마까지 헤집듯 마구 머리를 쓸어 넘긴 백우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씨발. 별 미친 새끼들 다 보겠네.”

“…….”

“그 새끼 맞지? 네가 전에 멱살 잡았던 씹돼지새끼.”

백우는 지난번 천제환이 공중에 덜렁 들었던 놈을 떠올렸다. 얼굴이 시뻘게지면서도 저들 앞에선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던 찌질한 새끼. 그놈이 선웅이 형을 모함하고 거지 같은 소문을 낸 인간인 줄 알았으면, 천제환을 말릴 게 아니라 흠씬 두들겨 맞도록 망이나 봐 줬어야 했는데.

백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제환은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냈다. 어제 새로 산 담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본디 천제환은 불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화가 날 때마다 때려 부수고 엉망으로 만들었다면, 그가 운동선수로서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천제환은 서늘하게 침잠한 분노를 속에서 천천히 굴리는 중이었다.

어제 주점에서 선웅이 후배를 데리고 나간 수고가 무색하게, 그녀의 일행이 선웅에 대해 떠드는 이야기는 세 사람의 테이블로 건너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천제환이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렇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구영준의 추행, 그를 이용한 성진범의 협박, 그리고 악의로 점철된 선웅의 안 좋은 소문까지.

모 교수와 부적절한 관계라는 둥, 수상쩍은 알바를 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으나, 당사자가 딱히 부정하지 않았으므로 추문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종강 파티가 있던 날 술에 취한 선웅을 데리러 갔을 때, 평소와 다르게 풀어진 모습이 의아하긴 했다. 무거운 짐을 던져 버린 듯 홀가분한 얼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를 주저했던 것도 같다. 

선웅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허허실실 그를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으니, 머저리 같던 자신에게 화도 났다.

어쨌거나 문제는 선웅의 기지로 모두 해결되었다. 한 마디로 상황 종료. 그러니 선웅은 자신이 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선웅에게 좆같은 일이 있었음에도, 자신은 배제되었고 이토록 무력했다.

어찌해 볼 틈도 없이 선 밖으로 떠밀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이 비틀리고 불쾌한 기분을 선웅에게 쏟아붓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내내 무거운 침묵에 빠져 있던 그는 바닥에 담배를 지져 끄고 몸을 일으켰다.

“나 간다.”

제환이 떠나고 백우는 경찰인 현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씩씩거리는 백우에게 돌아온 대답은 법적으로 이 이상 그를 더 처벌할 수 없으며 괜히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한없이 어리게만 느껴지는 동생들이 행여 사고라도 칠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자신들이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그걸 알고 있으니 이렇게 속이 답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같은 상황이라도 운동선수가, 그것도 국가대표 신분으로 일반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면 법적인 논쟁을 떠나서라도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재수 없으면 자격 박탈까지 운운할 게 뻔했다.

슈퍼히어로처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변신이라도 해서 흠씬 두들겨 패 주면 좋으련만. 전화를 끊은 백우는 이를 득득 갈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때 뽁,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쭈쭈바를 떼어 낸 찬영이 얼얼한 입술을 움직였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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