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2)

  외전2. 첫날밤, 첫 남자=)

푸른 빛의 자기를 열자 담황색의 고운 빛깔이 드러났다. 천연 벌꿀과 고급 한약재가 어우러진 진한 향이 사방에 가득 퍼졌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보내온 선물이었다. 한 스푼에 기십만 원을 호가하는 꿀이었지만 제환은 아낌없이 머그잔에 푹푹 퍼 담았다.

탁, 물을 끓여 놓은 전기포트의 스위치가 내려갔다. 컵 안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천천히 머들러로 뭉친 꿀을 녹였다. 완성된 꿀물에 온더록스용으로 얼려 둔 둥근 얼음을 넣었다.

손바닥으로 컵을 감싸 온도를 확인했다. 부엌을 나와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 위의 선웅은 엎드린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침대 모서리에 조심히 걸터앉은 제환은 하얗고 매끄러운 몸에 꽃처럼 수놓은 제 흔적을 눈에 담았다.

시트에 볼이 눌린 얼굴은 한 입 베어 먹은 찐빵 같았다. 눈가는 발갛게 부어 있다. 오늘 아침까지 그가 엉엉 울도록 박아 댄 탓이었다.

좀 심했나. 하지만 어젯밤에 선웅이 제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런 예쁜 짓을 할 때는 곱게 잠들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말았어야지. 다시 생각해도 아래가 빠듯하게 반응해 왔다.

검지로 하얀 볼을 콕 찌르자 으음, 소리를 내며 선웅이 뒤척였다.

“이것만 마시고 더 자요.”

“이따가…….”

웅얼대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하긴 목소리뿐 아니라 어디든 성한 곳이 없을 터다.

“일단 일어나 봐요.”

이불 위로 동그랗게 솟은 엉덩이를 주물렀다. 시트에 코를 박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잘 들리진 않지만 저를 욕하는 내용인 것 같다. 저렇게 나오면 자신은 반성이 아니라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걸 모르는 게 분명하다. 존나 귀엽게.

제환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려는 선웅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물에 젖은 미역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추슬러 앉혔다.

잠에 취해 감겨 있던 눈꺼풀이 조금씩 벌어졌다. 부은 눈을 비비며 조금씩 선명해진 시야로 제환의 형용을 확인한 선웅이 작게 입을 벌렸다.

제환은 선웅이 어제 선물로 샀던 잠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색의 타탄체크 무늬 파자마를 입은 모습은 제 예상보다도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잘 어울려요?”

“응. 예쁘다.”

예쁜 건 지가 예쁘면서. 선웅의 손에 꿀물을 쥐여 준 제환은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택에 커플 파자마라고 써 있던데, 형 거는 안 샀어요?”

“아. 그렇긴 한데, 여성용 사이즈만 조금 남고 남자 사이즈는 다 품절이더라구.”

“그랬어요?”

“응.”

“아쉽네.”

고개를 끄덕이는 선웅의 아랫입술이 비죽하게 나왔다 들어가는 찰나를 제환은 놓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집에서 입는 파자마만큼은 제환과 함께 맞춰 입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제 사이즈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선웅도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제환에게 잘 어울리니 됐다.

꿀물은 선웅이 먹기 좋은 온도였고, 기분 좋을 만큼 달았다. 제환은 섹스 후에 이렇듯 꿀물을 챙겨 주었다. 꿀물을 마시고 있노라면 격한 정사를 겪은 침대엔 언제 그랬냐는 듯 뭉근하고 달큰한 안온이 찾아왔다.

선웅은 깔끔하게 비워 낸 컵을 제환에게 건넸다. 처음보다 작아진 투명한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컵 안을 돌아다녔다. 침대 옆 탁자에 빈 컵을 올려 둔 제환은 파자마 단추를 하나씩 끄르기 시작했다.

“나, 이제 더 못 하는데. 힘, 힘든데.”

말까지 더듬으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리는 선웅의 앞에 근육으로 짜인 제환의 두툼한 상체가 드러났다.

“떡칠 사람은 생각도 안 했는데 김칫국은.”

제환은 선웅의 팔에 자신의 잠옷 상의를 꿰어 입혔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하얀색의 단추를 채우는 것을 선웅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환에겐 딱 맞던 어깨선은 선웅의 팔 중간까지 내려왔고, 잠옷의 밑단은 앉아 있는 선웅의 맨 허벅지의 절반을 가렸다. 우스운 모양새지만 어쨌거나 하나씩 나눠 입으니 커플 잠옷이긴 했다.

“예쁘네.”

좀 전에 선웅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는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추었다. 찰나에 스쳐 간 서운함마저 별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제환의 행동에 선웅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환은 이불을 들추고 침대 가운데로 올라왔다. 자리를 비켜 주려 무릎을 세워 일어난 선웅의 몸이 제환에게 덜렁 들어 올려졌다. 제환은 침대 헤드에 기대듯 누워 제 가슴 위로 선웅을 거꾸로 앉혔다.

“앗.”

엉덩이 아래로 불쑥 들어온 손에 이끌려 선웅은 제환의 가슴 양쪽으로 내린 무릎을 세워 일어난 자세가 됐다. 졸지에 제환의 얼굴 앞에 엉덩이를 갖다 댄 꼴이다. 갑작스러움에 당황할 새도 없이 제환은 단조로운 어조로 지시했다.

“잡고 있어요.”

제환은 아슬아슬하게 둔부를 가린 파자마 상의를 추어올려 선웅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곧 제환의 시야에 뽀얀 엉덩이와 허벅지가 모두 드러났다. 보드라운 살결에 새겨진 이불 자국이 귀여웠다.

밤새 제환을 받아 낸 구멍의 입구는 발긋하게 부어 있었다. 손끝을 갖다 대 보니 뜨끈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으…….”

“가만히 있어 봐요.”

아래를 살피는 제환의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선웅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상태가 심각한데.”

“……많이 심해?”

“흠…….”

제환은 탁자 위의 머그로 긴 팔을 뻗었다. 빈 컵에 남아 있던 큼직한 얼음을 입에 넣어 굴렸다. 등 뒤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에 의아함을 느낀 선웅이 고개를 돌리려는 때였다.

엉덩이 사이에 닿는 서늘한 살덩이의 촉감에 선웅의 등허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아, 너 또― 힉.”

뜨끈한 주름 위를 문지르던 혀는 구(球) 형태의 얼음을 선웅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급작스러운 침입에 놀란 선웅이 허벅지를 바짝 조였다. 차갑고 둥근 얼음이 좁고 홧홧한 내벽에서 데굴, 굴렀다.

“아으……. 흐, 이거, 빼……, 빼.”

“금방 녹아요.”

작지 않은 크기의 얼음이 부어 있는 살점에 닿을 때마다 선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빠끔거리는 구멍 밖으로 새어 나온 물이 선웅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제환의 혀가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하, 하으, 읏. 아……!”

팔을 뒤로 뻗어 얼굴을 밀어내려는 선웅의 손목을 잡은 제환은 입을 크게 벌려 보란 듯이 게걸스럽게 핥기 시작했다.

“그마, 그만, 해애! 아!”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릴 때마다 발기한 성기가 판판한 복부에 탁! 탁! 부딪혔다. 제환은 얼음이 모두 녹아 없어질 때까지 아래를 빨아댈 기세였다. 선웅은 제환에게 붙들린 팔을 휘둘렀다. 정말, 정말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몸이 이상했다. 참을 수 없는 요의가 찾아왔다.

“제발, 힉, 아, 나 지금, 이상해, 제화, 응, 제환아! 그만!”

선웅의 귀두에서 또다시 맑은 물이 터져 나왔다. 끝내 다리에 힘이 풀린 선웅은 제환의 얼굴에 주저앉아 버렸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선웅의 허리에 팔을 두른 제환은 구멍에 콧날이 박히도록 통통한 엉덩이 사이로 얼굴을 처박았다.

천제환은 선웅의 몸에서 나오는 물을 남김없이 몽땅 받아 마시고 나서야 기진맥진해진 연인을 놓아주었다.

체크무늬 상의 아래 잘 뻗은 다리가 부엌을 바삐 움직였다. 제환의 짧은 러닝 쇼츠를 겨우 얻어 내 입고 나서야 선웅은 안심하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선웅의 어머니는 택배로 김치와 밑반찬 등을 보내며 바로 끓여 먹을 수 있도록 해물탕의 재료까지 모두 손질해서 보냈다. 선웅이 소파 앞 테이블에 먹음직스러운 해물탕과 앞접시를 차리는 사이 제환은 냉장고에 있던 소주와 잔을 꺼내왔다.

해물탕은 점점 바닥을 보이고, 먹고 난 해물의 잔해와 빈 소주병이 늘어갔다. 통통한 새우의 머리를 똑, 따며 선웅이 입을 열었다.

“넌 진짜 변태 같아.”

“취중 진담인가?”

선웅은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고 반응도 즉각적이며 퍽 솔직해졌다.

선웅이 까던 새우를 가져오며 제환은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여선웅의 속살까지 모두 취하고 싶은 도착적인 충동을 ‘변태’라는 귀여운 단어로 적당히 눙쳐 준다면야 제겐 잘된 일이다. 껍질을 벗긴 통통한 새우살을 선웅의 입으로 가져가자 또 얌전히 받아먹는다.

제환은 슬쩍 눈썹을 들어 올리며 놀리듯 말했다.

“난 그래도 섹스할 때 오줌은 안 싸는데.”

“야!”

퍽! 발차기로 복부를 얻어맞은 제환이 윽, 신음을 냈다. 아, 진짜 다람쥐 같은 게 은근히 힘세다니까.

“진짜, 거기를 진짜…… 넌.”

선웅의 얼굴이 수박 속살처럼 빨개졌다. 나중에 제환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자신이 진짜 실수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되긴 했지만, 저렇게 놀리면 도리 없이 수치스러워졌다. 제환은 다음 새우를 까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 사랑하면 물고 빨고 한다잖아요. 다들 나 같을걸.”

“……다들 너 같지 않아. 억지 부리지 마.”

“모르지. 난 여선웅이 다 처음이라.”

“나도 마찬가지야.”

“난 진짜, 정말, 완전 다 처음이거든.”

“나도 진짜, 정말, 완전 다 처음이거든.”

“뻥.”

한 마디로 선웅의 말을 부정한 제환은 제 잔에 소주를 따랐다. 와중에 선웅은 제환의 잔을 손끝으로 톡 건드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여선웅 만나기 전까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완벽한 아다였어.”

“아ㄷ…….”

아다라니. 성에 갓 눈뜬 십대 소년들이나 내뱉을 법한 단어에 선웅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할 말을 잃고 헤매는 눈동자를 보며 제환은 코웃음 쳤다. 어디서 거짓말을 해? 선웅에게 호되게 차인 후 처절하게 주제 파악을 마친 그는 선웅의 과거는 묻어 두기로 했다. 그러나 한 번씩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주 두 잔을 연거푸 입에 털어 넣은 선웅은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딱 한 번.”

제환은 손에서 잔을 빙글 돌려 선웅의 손끝이 닿은 부분에 입술을 댔다. 씁쓸한 소주를 한가득 입에 머금었을 때였다.

“스물두 살에, 정말 딱 한 번이었어.”

쾅,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은 선웅이 말을 이었다.

“그날 술에 너무 취해서 잘 기억 안 나기는 하는데…….”

성 정체성에 대해 무진장 혼란을 느끼던 때였다. 남들과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도, 누구를 만나 선뜻 연애를 시작하는 것도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소 무모한 방식으로 혼란스러움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22세의 마지막 날이었다.

술을 따르려던 선웅의 손에 빈 소주병이 잡혔다.

“에이. 언제 다 먹었지……. 냉장고에 술 더 있나 봐야겠다. 잠깐만.”

“…….”

냉장고에서 차가운 소주를 가져온 선웅은 뚜껑을 열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하나는 분명히 기억난다. 상대가 진짜 개자식이었다는 거.”

주르륵, 충격으로 벌어진 제환의 입에서 소주가 도로 흘러내렸다. 티슈를 툭툭 뽑은 선웅이 제환의 젖은 입가를 닦았다.

“뭐야. 갑자기 숨겨 놓은 과거가 생각나기라도 했어?”

장난스레 질문을 던진 선웅은 뒤늦게 얼음처럼 굳어 있는 상대를 발견했다. 제환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소주잔을 쥐고 있는 손끝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선웅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한껏 깃들었다. 선웅은 떨리는 손에서 소주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로 치웠다.

“제환아?”

“하.”

제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에 묻었다. 스물두 살에 딱 한 번이라고? 말인즉 자신은 열아홉이었던 그날 밤을 말하는 거였다. 그는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뭐가?”

“……전에 나를 다른 남자로 착각했었잖아요. 그, 그건, 뭔데.”

술에 취한 선웅을 데리러 갔던 날. 그의 자취방에서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다. 선웅은 익숙한 듯 키스에 응해 왔고 자신의 밑에서 달콤한 신음을 터뜨렸었다. 그래 놓고 다음 날 선웅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 데다, 심지어는 구영준 앞에서 저를 더 볼 일 없는 사이라 선을 그었다.

그때의 기분은 다시 떠올려도 좆같다.

다시 찾아간 자취방의 침대 위에서 선웅은 제환을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는 말로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첫날밤이 선웅에겐 숱한 밤 중 하나였다는 게 확실해졌던 순간이었다.

제 맘을 모르는 척 저를 계속 밀어내기만 하는 여선웅에게 안달이 났었다. 다시는 저를 잊지 못하도록 밤새 선웅의 몸 안팎에 미친놈처럼 흔적을 남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아, 그때…….”

제환의 질문을 알아들은 선웅이 민망한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게, 실은……. 종종 그날 꿈을 꿨었어. 근데 너랑 키스하고 난 후부터 그 자식 얼굴이 너로 바뀌어서 꿈에 나오는 거야. 원래는 얼굴이 엄청 흐릿했거든.”

“…….”

“꿈꾸고 나서 네 얼굴 볼 때마다 엄청 양심에 찔렸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날도 당연히 꿈인 줄 알았지.”

뒷덜미를 주무른 선웅이 말을 맺었다.

“그래. 너와 달리 나는 그 아ㄷ……, 흠. 첫 경험은 그 개자식이랑 했지만…….”

“…….”

“내 첫사랑은 너야.”

투명하리만치 맑은 눈동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제환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이라도 인 듯이 벌벌 떨렸다. 큰 손바닥이 넋이 나간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동안 자신은 이 무구한 얼굴 위로 착각과 오해를 덕지덕지 오려 붙인 똥멍청이었다. 모자이크처럼 모호하고 불투명한 선웅의 모습은 그가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이런 돌대가리가 무려 여선웅의 첫 남자, 게다가 첫사랑이기까지 하다니. 울컥. 속에서부터 뜨끈한 감정이 치솟았다. 눈가가 홧홧해진 제환은 선웅을 와락 끌어안았다.

“너 울어?”

“아닌데요.”

……그러나 몰려든 감격을 마냥 누리기엔 어딘가 석연치 못한 구석이 있긴 했다.

“우는 거 같은데. 봐 봐.”

“아니라니까.”

선웅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코를 훌쩍인 제환은 자신이 그 개자식이라는 건 평생 비밀에 부치기로 다짐했다.

* * *

제환은 부엌에서 선웅과 함께 먹을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아직도 두 사람은 나름대로 커플 파자마를 나눠 입고 있는 상태였다. 파자마 팬츠 위로 드러난 두툼한 상체 근육이 존재감을 뽐냈다.

막 침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다가온 선웅이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내가 도와줄 건 없어?”

“없어요. 다 되면 부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선웅도 아침잠이 없는 편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일찍 일어나 운동까지 다녀오는 제환에 비하면 게으른 것 같아 민망했다. 선웅은 멋쩍게 볼을 긁으며 거실로 걸음을 돌렸다. 

소파에 누운 채로 꺼진 TV 화면에 비치는 저의 게으른 실루엣을 살피다 리모컨을 찾아 전원을 켰다.

아침 뉴스의 오프닝 영상이 지나가고 아나운서가 멘트를 시작했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입니다. 12월 31일, 모닝하이 시작하겠습니다.

벌써 올해도 마지막 날이었다. 주요뉴스를 들으며 선웅은 볼륨을 조금 더 키웠다.

― 대한당 구승진 의원이 자신의 아들을 건설회사에 채용되도록 청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요즘 같은 취업난 속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대한당 원내대표 차 의원은 당 윤리심판원에 직권 조사를 요청하였습니다.

“구승진?”

선웅이 작게 읊조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어디서 들었지? 기억을 떠올리는 선웅의 앞으로 다가온 제환이 TV 화면을 가렸다. 선웅이 빼꼼 고개를 옆으로 내밀자 그는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밥 다 됐어?”

“응.”

대답한 제환은 리모컨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저걸 왜 들고 간담. 픽 웃은 선웅은 몸을 일으켰다.

식탁 위엔 양가에서 보내온 반찬과 국으로 푸짐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꼬박꼬박 아침을 차려 먹는 제환 덕에 선웅도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허전했다.

제환은 밥부터, 선웅은 국물부터 먹었다. 북엇국 한 숟갈을 떠먹으며 선웅이 물었다.

“나는 몇 시까지 준비하면 될까?”

“두 시에 차 보낸다고 했으니까, 그때 맞춰서 내려가면 돼요.”

“응.”

오늘은 고호경의 회사인 KH그룹에서 주최하는 자선 파티가 있었다. 고호경은 선웅에게도 특별히 친필로 적은 초대장을 보냈다. 그 초대장은 선웅이 확인하자마자 제환에게 뺏기긴 했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함께 참석하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수저를 내려놓은 선웅의 표정이 골똘해졌다.

“무슨 생각 해요?”

“아, 별건 아니고……. 좀 전에 뉴스에서 들은 이름이 묘하게 낯이 익어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생각이 안 나네.”

선웅을 따라 식사를 마친 제환이 물을 마시며 대꾸했다.

“국회의원이라서 그런가 보죠.”

“그렇겠지?”

대충 고개를 끄덕인 제환은 일어나 식탁을 함께 정리했다. 손에 고무장갑을 끼는 선웅에게 다가온 제환이 물었다.

“커피 마실래요? 아니면, 차?”

“음…… 커피?”

“그래요.”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꾹꾹 짜던 선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너한테 내가 그 사람이 국회의원이라고 얘기했나?”

“응. 아니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가.”

제환의 말에 쉽게 수긍하고는 이내 설거지를 시작했다. 뒤를 돌아 선웅이 좋아하는 원두를 꺼내는 제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구승진은 선웅을 추행하려 했던 구영준의 아버지이자 대한당의 국회의원이다. 그 멍청하고 한심한 새끼를 꼴에 자식이라고 그 아비는 취업 청탁을 넣었다. 천제환은 그 사실을 원내대표인 차 의원에게 알리고, 그로부터 구승진을 다음 공천에서 배제할 것이라 약속을 받았다. 얼마 전 꼰대들이 모이는 자리에 그가 얼굴을 비췄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간 과 내에 있었던 선웅을 둘러싼 소문과 일련의 사건들을 모두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무력감이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다. 이제는 안다. 선웅이 그 일을 제게 말하지 않은 건 저를 밀어낸 게 아니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하지만 선웅의 본심을 알았다고 해서, 다 끝난 일이 됐다고 해서 가만히 있기는 싫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조져 놓기로 결심했다. 감히 여선웅을 건드려? 절구통에 대가리를 넣고 빻아 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씹새끼들.

“커피 향 좋다.”

설거지를 끝낸 선웅이 커피를 내리는 제환에게 다가와 끌어안고 등에 볼을 비볐다. 지잉, 아일랜드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도착한 서 기자의 메시지를 확인한 제환은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전화기를 뒤집었다.

“누구야?”

“아는 기자요.”

“기자?”

“이따가 만나면 잠깐 인터뷰 좀 하고 싶다고.”

“아…….”

몸을 돌려 선웅을 끌어안은 제환은 동그란 머리꼭지에 입술을 내렸다. 오늘 파티에 꼭 가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아직 처리해야 하는 놈이 하나 더 남았기 때문이다.

* * *

고호경은 약속한 시간에 맞춰 기사가 딸린 세단을 보냈다. 차에 실려 도착한 청담동의 숍에 따로 마련된 룸에서 제환과 나란히 앉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하는 중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얼굴에 화장이란 걸 받아 본 선웅은 스태프들의 쏟아지는 칭찬에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손발이 베베 꼬이는 저와 다르게 화보 촬영이나 미디어에 노출될 일이 많은 제환은 익숙해 보였다. 앞에 나열된 여러 화장품을 훑던 선웅이 시선을 들어 올리자, 정면의 거울을 통해 제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지루한 듯 손잡이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자세였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소매 위로 드러난 시계를 눈짓하며 씩 웃는다.

선웅이 선물한 손목시계는 역시 제환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시계를 받을 때도 몹시 기뻐하긴 했지만, 그날 저녁 한참 서재에 있다가 나오더니 더욱 좋아했다. 저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시계를 눈짓하고 방긋방긋 웃는 일이 잦아졌다.

이후에 선웅은 엄마의 부탁으로 컴퓨터를 사용할 일이 생겼다. 급한 대로 제환의 노트북을 빌려 일을 처리하는데 포털 사이트에 최근 검색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시계 선물 의미’, ‘애인 시계 선물’, ‘시계 선물 뜻’ 등이 있었다.

호기심이 든 선웅도 검색어를 누르자 검색 결과가 주르륵 이어졌다. 스크롤을 내리던 중 파란색의 링크들 사이에 딱 하나 보라색으로 변한 제목이 있었다. 얼마 전 제환이 확인한 글인 듯했다. 선웅도 같은 것을 클릭해 들어갔다.

♥애인이 선물한 시계의 의미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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