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2)

  외전3. 단잠=)

막 중간고사가 끝난 5월의 초입이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학생들은 쏜살같이 급식실로 뛰어갔다. 선웅은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교무실 앞에 도착해 미닫이문을 열었다.

“선웅이 왔어? 점심은.”

“아, 이제 먹으려고요.”

다음 달 출산을 앞둔 담임선생님의 배가 불룩했다. 선웅은 가져온 서류를 선생님께 건넸다. 빠진 서류가 없는지 확인한 그녀는 빙긋 웃으며 선웅의 등허리를 토닥였다.

“그래, 고생했어. 얼른 가서 밥 먹자.”

“네.”

“아참, 선웅아 이거.”

서류를 서랍에 넣던 선생님이 책꽂이에서 문제집 세 권을 뽑았다. 문제집 표지에는 ‘교사용’이라 적혀 있었다. 그의 형편을 아는 담임선생님은 이렇듯 선웅을 챙겨 주곤 했다.

좀 전에 제출한 서류도 선웅의 가난을 증명해 주는 것들이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는 그녀가 미리 서류를 챙긴 것도 선웅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담임이 자신의 뒤의 비어 있는 자리를 눈짓했다. 체육 교사의 자리였다.

“다음 주부터는 체육 선생님이 나 대신 우리 반 맡아 주실 거야. 선웅이가 반장이니까 많이 도와드려. 알았지?”

“네.”

“그래. 선생님은 선웅이 있어서 걱정 안 해.”

문제집을 품에 안은 선웅은 꾸벅, 인사한 후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때마침 들어오는 체육 교사와 마주쳤다. 통화 중인 그는 대충 손을 흔들며 선웅의 인사를 받았다.

“예, 선배님.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그럼요. 예, 예. 워낙 제환이 고 녀석이 알아서 잘하기도 하고요. 예, 예.”

체육 교사는 학생 때 입은 부상으로 진로를 틀기 전까지 태권도 선수 출신이라 했다. 선웅의 반에도 태권도 선수가 있다. 듣기로는 뭐 엄청 대단한 천재라던데,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촬영도 해 갔다.

선웅은 한적한 복도를 따라 걸었다. 주기적으로 서류를 내야 하는 날엔 어쩐지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한 부모 가정에 가난한 형편이라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공적인 기록으로 확인하는 건 불유쾌한 일이기는 하니까.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공짜 문제집도 감사해야 하는 게 제 처지라는 건 안다. 그렇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허허실실 웃어넘기는 성격도 못 되었다.

선웅은 충동적으로 급식실이 아닌 건물 뒤편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옥상이라도 열리면 답답한 속도 뻥 뚫리고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옥상은 학생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점심을 먹고 나오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 따위를 먹으며 교정을 거니는 것이 보였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 인적이 드문 뒤편에 도착했다.

선웅은 낡은 벤치에 앉아 산 너머에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봄바람을 느꼈다. 주머니를 뒤적여 캐러멜을 꺼내 입 안으로 쏙 넣었다. 달고 고소한 조각을 씹으며 발끝을 휘휘, 돌렸다.

법으로 정한 것도 아닌데 작은 동산 수준의 산일지라도 학교의 교가엔 꼭 산 이름이 들어간다. 무슨 산의 푸른 정기를 받아서 어쩌고저쩌고. 시답잖은 생각을 이어가던 선웅은 완만한 산등성이에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때 저만치에서 “꺅!” 기뻐하는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두 여학생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두 손바닥을 모아 코앞에 붙이고 중얼거렸다.

“제발 이번 팬미팅 당첨되게 해 주세요.”

“저도요.”

옆에 있던 친구가 덧붙이자, 원래 소원의 주인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야! 내 소원에 맘대로 네 꺼 얹지 마. 부정 탄다고.”

“이씨, 존나 치사해. 야, 기다려.”

투덜거리던 옆 학생이 치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 웅덩이로 던졌다. 하나, 둘, 셋, 넷 던지는 족족 엇나가자, 친구가 한껏 비웃었다.

“포기해라.”

“닥쳐. 아악! 이게 마지막인데. 제발, 제발, 제발…….”

손에 쥔 동전에 후후, 입김을 분 학생이 던진 동전이 포물선을 그리며 목표 지점에 안착했다. 풍덩! 맑은소리가 울리자마자 두 눈을 꼭 감은 학생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 1열이요 무조건, 1열 당첨요.”

“와. 나도 그렇게 할걸.”

당첨은 기본이고, 앞자리까지 점지해 줄 것을 바란 학생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이거 진짜 되는 거 맞아?”

“야. 말도 마. 진짜 구라 아니고, 저번에 나 계 탔던 팬싸 알지? 그거 여기서 소원 빌고 당첨된 거임.”

“진짜지.”

“믿기 싫음 말어. 괜히 너 괘씸하다고 내 소원까지 안 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손절할란다.”

“야! 같이 가!”

두 사람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사라졌다. 졸지에 뒤에서 대화를 모두 엿듣게 된 선웅은 좀 전 그들이 있던 곳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그곳엔 산에서 졸졸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든 작은 샘이 있었고, 맑은 수면 아래 밑이 깨진 항아리에는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옆에는 돌로 세워 놓은 탑들도 꽤 있었는데, 1학년인 선웅은 모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런다고 소원이 이뤄질 거라 믿다니, 바보 아닌가. 간절한 소원의 흔적들을 감흥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선웅은 문제집을 챙기고 몸을 돌렸다.

그 사이 예비종이 쳤다. 1학년이 쓰는 건물은 왔던 대로 빙 돌아서 가기엔 시간이 좀 촉박했다. 선웅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뛸 모양인지 운동장엔 아직도 축구에 열심인 학생들이 있었다.

‘아, 좀 배고픈데.’

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납작한 상자는 가벼웠다. 캐러멜이 몇 개 남았더라? 선웅은 무심코 상자를 흔들었다. 몇 없는 캐러멜이 상자를 돌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야!”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에 선웅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직사광선을 쏘아 대는 태양 때문에 선웅의 시야가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손 그늘을 만들어 빛을 가리자 제게로 빠르게 날아오는 축구공이 보였다. 피하려고 했으나 발끝만 움찔거릴 뿐, 생각과 다르게 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탁!

“으아!”

순식간에 선웅의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손바닥으로 공을 쳐 냈다. 둔탁한 타격음에 겁먹은 선웅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손에 있던 문제집과 캐러멜이 모래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친놈들아, 똑바로 안 차?”

“미안.”

상대의 사나운 반응에 몇몇이 사과를 건넸다. 다행히 공에 맞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뜨자 시야에 명찰이 보였다. 천제환이었다.

“괜찮아, 반장?”

씨발, 욕설을 뇌까린 싸늘한 음성과는 다르게 물음은 퍽 다정하게 돌아왔다.

“어? 어…….”

천제환은 바닥에 떨어진 선웅의 문제집을 주워 탁탁, 먼지를 털어 건넸다. 선웅은 문제집을 뺏듯이 가져왔다. 교사용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누군가 보는 게 싫었다.

공이 날아오기 전에 선웅이 했던 것처럼 천제환은 캐러멜 상자를 귀 옆에 대고 흔들었다. 한쪽 팔로 문제집을 가슴께에 고정한 선웅이 남은 손을 내밀려는 때였다. 딩동댕동. 5교시를 알리는 종이 쳤다.

다음 과목은 수학이었는데, 지각하면 무조건 기합이었다. 천제환은 허둥지둥 당황하는 선웅의 선웅의 팔목을 움켰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선웅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더니 물었다.

“뭐해. 안 급해?”

“아니, 팔은 왜.”

“너 나보다 달리기 빨라?”

“아니.”

“그럼 잔말 말고 따라와. 신속 배달 해 줄 테니까.”

“야, 야! 잠깐!”

자신이 짜장면도 아닌데, 뭔 신속 배달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천제환은 선웅의 팔목을 잡고 무작정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가는 천제환을 따라잡느라 선웅도 바삐 발을 놀려야 했다. 손목을 붙든 강한 힘과 너른 등, 구김 하나 없는 교복 셔츠,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당연하게도, 천제환은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입학식에서도 그는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나갔었다. 교장은 그가 얼마나 전도유망한 선수이며, 대한민국 태권도의 미래를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떠들었다.

얼마 전 천제환 다큐를 찍는다고 온 방송국 사람들 때문에 학교가 소란했었다. 반장인 선웅에게 인터뷰를 하자고 카메라를 들이댄 PD에게 천제환과 친하지 않아서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 당연히 편집될 줄 알고 한 말이었는데, PD는 선웅의 인터뷰를 그대로 내보냈다.

천제환이라면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모두가 그의 관심과 친밀함의 부스러기라도 얻고자 애를 썼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터뷰할 것이지, 왜 하필 저에게 해서는…….

딱히 그와 대화를 한 기억도 없었다. 그래서 안 친하다고 한 건데, 좀 미안했다. 뭐 천제환은 신경도 안 쓸 테지만. 아무튼 그 인터뷰가 나간 후로 천제환과 괜히 더 어색해진 기분이었다.

선웅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도착한 천제환은 교실의 앞문을 당당히 열고 들어갔다. 선생님이 아직 오시지 않은 교실은 부산스러웠고, 나란히 들어온 두 사람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선웅은 얼른 팔목을 빼냈다.

“반장.”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선웅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거 내가 먹는다.”

씩 웃으며 제 자리로 들어가는 천제환의 손엔 선웅의 캐러멜이 들려 있었다. 솜털까지 곤두설 정도로 놀랐던 게 무색할 정도의 가벼운 미소였다.

* * *

체육시간이었다. 체육 부장이 우르르 다 끌고 나간 교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심부름을 하느라 교실에 뒤늦게 도착한 선웅은 사물함에서 서둘러 체육복을 꺼냈다.

빨리 갈아입고 나가야겠다. 선웅은 셔츠 단추부터 풀었다. 책상 위에 벗은 셔츠를 개켜 놓고, 체육복 상의에 오른쪽 팔을 끼워 넣는데, 등에서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읏! 깜짝이야!”

파드득, 튀어 오른 선웅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천제환이었다.

“뭐, 뭐야?”

“거기 점이 있어서.”

그러니까, 제 등에 점이 있어서 쿡 찔렀다는 소리였다. 검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대답하는 말투는 평이했다. 지구가 둥글다, 뭐 이런 당연한 말을 할 때처럼. 화들짝 놀란 자신이 도리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등에 점이 있는데 뭐 어쩌라는 건가. 왜 맘대로 남의 등을…….

“근데, 너 되게 예민하네.”

가만히 있는 남의 등을 멋대로 찔러 놓고 한다는 말이 저랬다. 천제환은 그대로 검지를 가져가 제 볼을 긁더니 태연히 말을 이었다.

“성감댄가?”

“뭐라고?”

선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님 말고.”

널따란 어깨를 으쓱인 천제환은 훌렁, 셔츠를 벗었다. 무슨 몸이……. 운동선수들은 다 저런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크고 단단한 몸은 이미 완성된 것 같았다. 마치 어른의 몸처럼…….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괜히 저 녀석이 등을 찔러서는. 선웅은 몸을 돌리고 재빨리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여전히 천제환은 나를 보고 있을까? 그러지 않으려 해도 등 뒤가 자꾸 의식이 됐다.

사물함의 자물쇠를 잠그고 뒷문으로 걸어가는 선웅의 다급한 발걸음이 교실을 쿵쿵! 울렸다.

그날 저녁, 샤워를 하던 선웅은 거울 앞에서 열심히 제 등을 살피는 중이었다. 목에 쥐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등을 들여다보니, 엉덩이 위 나란한 보조개 한쪽에 작은 점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 가까이서 봐야 겨우 보일 정도로 희미한 점이었다. 오히려 점 주위로 붉은 자국이 더 눈에 띄었는데, 종일 그곳을 신경 쓴 선웅이 긁어 댔던 탓이었다.

* * *

“야. 천제환 기사 봤냐? 교통사고 나서 다쳤다던데.”

“어, 부상 존나 심하다며? 그럼 국대 선발전 좆망한 거 아니냐?”

“집에 돈도 많은데 뭔 걱정이야. 암담한 네 미래나 걱정해라.”

“뭐야, 씹새꺄 뒤질래?”

“존나 너 같은 새끼가 천제환 걱정하니까 우스워서 그러지, 병신아.”

천제환은 며칠째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의 옆에서 아부를 떨던 놈들이 신나게 목소리를 높였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선 토끼가 왕이라더니. 사람이 다쳤다는데, 저들끼리 킬킬 웃으며 떠들어 대는 말들이란 천하고 졸렬하기 그지없었다.

입으로는 시끄럽게 떠들면서 손은 바쁘게 숙제를 베끼고 있는 놈들에게 선웅이 다가갔다. 기한 내에 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점수가 깎일뿐더러 운동장 20바퀴를 뛰어야 했다. 웬만큼 공부를 하지 않는 애들도 어떻게든 제출하는 숙제였다.

“어억! 반장, 조금만 기다려 주라.”

공책을 한아름 안고 있는 선웅이 저승사자라도 되는 듯 놈들의 손이 더욱 바빠졌다. 선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10분만.”

“안 돼. 선생님이 바로 가지고 오라고 하셨어.”

“야, 그럼 5분. 어? 제바알!”

손목시계를 확인한 선웅은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을 빠져나갔다.

“여선웅! 야! 좀만 기다려 달라니까!”

놈들의 간절한 외침이 쾅! 문이 닫히는 소리 너머로 사라졌다.

숙제를 제때 내지 못한 놈들이 땡볕 아래 개마냥 헉헉대며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꼴좋다.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썼어야지. 거기까지 생각한 선웅은 제가 놈들에게 했던 행동도 심술이라는 건 모른 척했다.

놈들이 기합 받고 있는 것에 잠시 좋아졌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숙제를 내고 나오다가 교무실 앞 복도에서 부담임인 체육 교사의 통화 내용을 들은 탓이다. 그는 대학 선배이자 국가대표 선수단의 감독과 긴 통화를 이어갔다.

다음 달에 있을 전국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는 세계 선수권대회에 나갈 국가대표 자격을 얻는다. 그러나 경기 한 달 전에 벌어진 천제환의 부상 소식에 걱정한 감독이 전화를 한 것이다.

‘예, 선배님 제가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잠시만요, 녀석이 입원한 병원이…….’

* * *

“휴…….”

병실 앞 복도에서 선웅의 운동화는 같은 자리를 맴맴 돌았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애초에 남의 통화를 엿듣고, 이곳까지 온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핑계 삼아 들고 온 가정통신문의 귀퉁이만 점점 구겨졌다. 제 꼬리를 쫓아 도는 강아지처럼, 얼마나 빙글빙글 돌았는지 멀미가 났다.

캐러멜을 세 개쯤 먹었을 때, 선웅은 망설임을 거두고 병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한눈에 봐도 호화스러운 1인 병실이었다. 보호자도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조용했다. 내려가 있는 블라인드는 고요한 병실 바닥에 빛으로 줄무늬를 그렸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겨 침대 가까이 다가가자, 천제환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선웅은 소리가 나지 않게 작은 스툴을 끌어다 옆에 앉았다. 일단 가정통신문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

상대가 자고 있으니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고 있으니까 더 머물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것은 왜일까? 선웅은 저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못 이기는 척 조금 더 앉아 있기로 했다.

‘잘 자네…….’

반듯한 이마와 오뚝한 코, 굳게 다물린 입술과 남자다운 턱선. 툭 튀어나온 목젖과 얇은 환자복 사이로도 언뜻 보이는 탄탄한 근육까지. 기다란 몸을 따라 내린 시선은 붕대가 감겨 있는 발목에 도달했다. 팽팽한 고무줄의 끝을 당겼다 놓은 것처럼, 선웅의 시선은 다시 발끝에서 천제환의 얼굴로 돌아왔다.

선웅은 잠이 든 천제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멀리서만 보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뚝, 뚝 링거액이 떨어지는 소리와 천제환이 내쉬는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한 탓에, 선웅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입술이 예쁘게 생겼네.’

선웅이 그 생각을 하자마자 다물린 입술이 작게 꿈틀거렸다. 그제야 선웅은 자신도 모르게 교복 명찰이 침대 모서리에 바짝 다가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천제환의 얼굴에 제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웠다.

힉, 숨을 삼킨 선웅이 두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상체를 바짝 세웠다. 잠결에 뒤척이는 천제환의 긴 팔이 올라와 잘생긴 얼굴을 가렸다.

그때 지잉, 지이잉. 교복 바지에 넣어 놓은 전화기가 진동했다. 진동 소리가 퍼지지 않게 전화기를 꽉 쥔 채 몸을 일으킨 선웅은 뒷걸음질하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집에 돌아온 선웅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천제환을 검색했다. 최신순으로 정렬된 기사들은 제목만 봐도 한숨이 나왔다. 밤이 늦도록 기사와 칼럼, 블로그 글까지 모두 읽었다.

심각한 부상을 얻은 그가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 태권도 종주국이란 의식에 갇힌 기성세대의 우둔한 낙관, 굳센 의지로 이겨내야 한다는 방구석 전문가들의 비아냥 등…….

천제환도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볼까? 이런 건 그가 보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를 응원하는 팬들이 훨씬 많았다.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에 충전기를 연결하며 그의 팬들이 올려놓은 영상을 클릭했다. 검었던 화면이 점점 밝아지며 묵묵히 경기장을 향해 걸어가는 너른 등이 보였다.

* * *

“안녕.”

문제집으로 내렸던 고개가 위로 들렸다. 교실의 한 가운데, 선웅의 책상 앞에 긴 인영이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한 선웅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병원에 있던 천제환이 왜 학교에 있는 거지?

그가 제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는데, 재생속도를 잔뜩 늦춘 영상처럼 천제환의 입술만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침까지 천제환의 영상을 봐서 헛것을 보는 건가. 선웅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반장?”

“……어?”

굳은살이 배긴 커다란 손바닥이 선웅의 얼굴 앞에서 흔들렸다. 헛것이 아니었다. 선웅이 눈을 깜빡거렸다.

“자. 이거 나만 안 냈다고 체육이 그러더라.”

“아, 응.”

그가 책상에 올려 둔 종이는 선웅이 어제 병실에 두고 갔던 가정통신문이었다.

“쉬엄쉬엄해.”

그는 선웅의 어깨를 탁, 짚고 교실을 나갔다. 저절로 시선이 천제환의 발목을 따라 내려갔다. 감겨 있던 붕대는 온데간데없었다. 영상에서 보았듯, 그의 뒷모습은 변함없이 단단했다. 의아함을 담은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밤의 학교는 으스스한 분위기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날씨면 더더욱.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를 한 선웅은 자습실의 문을 잠그고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휘이잉. 스산한 바람에 창문들도 몸을 떨었다.

……빨리 가야겠다. 선웅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짙은 남빛 하늘에 노란 우산이 팡, 하고 펼쳐졌다. 미지근한 봄기운은 사라지고 비바람만 쌩쌩 불었다. 선웅은 갑작스러운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교문으로 향하던 선웅은 불 켜진 체육관을 발견했다. 이 시간에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나? 선웅은 홀린 듯 빛을 향해 걸었다. 같은 곳에 저 아닌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등 뒤까지 쫓아왔던 공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체육관에 도착해 빗물에 젖은 우산을 접었다. 선웅의 발길이 향하는 대로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이 복도에 궤적을 그렸다. 선웅은 나름대로 예상을 해 보았다. 체육 선생님일 수도 있고, 문단속하러 온 경비 아저씨일 수도, 아니면 그저 누군가의 실수로 불이 켜져 있을지도 모른다.

선웅이 회색 철문의 동그란 문손잡이를 돌렸을 때였다.

“씨발!”

거친 욕지거리에 깜짝 놀란 선웅이 어깨를 푸드덕, 떨었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보이는 파란색 매트 한가운데에 천제환이 앉아 있다. 땀으로 젖은 운동복은 그의 성난 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천제환이 몸을 일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쿵! 둔중한 소리가 났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그가 낙하하는 소리였다. 이어 퍽, 주먹으로 매트를 내리치는 신경질적인 그의 모습이 보인다.

아까와 달리 테이핑이 된 발목은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는 절뚝거리며 일어나 다시 발차기를 시작했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발을 뻗는 동작은 선웅이 보기에도 고난이도의 동작이었다. 쿵! 다시 천제환의 몸이 매트 아래로 떨어졌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천제환은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고, 또 다음, 그다음을 반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산의 물기가 모두 마를 때까지 선웅은 천제환을 지켜보았다.

그때 하늘에서 우르르! 천둥이 치고, 쏴아아― 빗줄기가 거세졌다. 입구에 텅 빈 우산꽂이를 떠올린 선웅은 자신의 노란 우산을 곱게 접어 문고리에 걸어 두고 체육관을 나섰다.

탁, 탁, 탁. 웅덩이에 젖은 발소리가 속도를 올렸다. 최대한 비를 적게 맞으려고 온 힘을 다해 뛰었건만, 집에 도착한 선웅은 흠뻑 젖어 있었다. 애초에 빗속으로 뛰어들면서 조금만 젖길 바란 게 어리석었다.

질척질척 몸에 달라붙은 교복을 벗으며, 땀으로 흠뻑 젖었던 천제환을 떠올렸다.

상대를 기민하게 살피는 매서운 시선, 끝내 목표한 곳에 확적하게 꽂히는 발끝,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마침내 쏟아지는 환호…….

왜 천제환은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까? 언제나 당연한 듯 이기는 그를 보며, 태어날 때부터 승리를 손에 쥔 채 태어나는 인생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한 건 선웅 자신이었다.

모든 것은 지리멸렬한 고통과 인내를 심고 마침내 쟁취한, 그의 과실이었다.

집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탓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도 여전히 가슴을 두드리는 통증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선웅은 밤새 꼬박 아팠다.

* * *

“콜록.”

결국 감기에 걸렸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목에 두른 손수건을 매만졌다. 중앙현관에 서서 선웅은 애꿎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침까지 맑게 개었던 하늘은 어디 가고, 다시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없었으면서.

휴대폰으로 날씨 어플을 실행하니 그제야 현재 날씨가 비로 바뀌었다. 이건 뭐, 날씨 예보가 아니라 날씨 생중계 아닌가. 뾰로통해진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안녕.”

옆으로 다가온 사람은 천제환이었다. 선웅은 제 얼굴로 향하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똑바로 천제환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어려운 탓이다.

“우산 없어?”

“어? 어…….”

“난 있는데.”

천제환은 앞으로 돌려 맨 가방에서 노란 우산을 꺼내며 씩 웃었다. 어제 선웅이 체육관에 놓고 간 우산이었다.

“그럼, 내일 봐.”

직, 지퍼를 닫고 가방을 고쳐 맨 천제환은 선선한 인사를 건넸다. 웅크렸던 우산이 그의 손에서 경쾌하게 몸을 펼쳤다.

“……잘 가.”

선웅은 우두커니 서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는 노란 우산을, 아니 너머의 천제환의 등을 흘겨보았다.

‘저거 내 우산인데.’

비에 젖은 운동장을 걷던 긴 다리가 우뚝 멈춘다. 그리고는 노란 우산이 바람개비처럼 빙그르르, 돌아갔다.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빗물을 응시하던 선웅은 휙, 돌아선 천제환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선웅의 얼굴에 하하, 웃음을 터뜨린 그가 성큼성큼 계단을 다시 올라왔다. 계단 하나를 덜 올라온 천제환은 선웅과 눈높이가 맞았다.

“반장.”

“어?”

“우리 친해?”

“……그건 왜 물어?”

“친하다고 하면 우산 씌워 주려고.”

선웅의 입술이 삐쭉였다. 자기 우산도 아니면서 약 올리듯 조건을 다는 게 얄미웠다. 선웅은 계단을 한 칸 내려가 우산으로 쏙 들어갔다. 확 좁혀질 거리감을 예상 못 했는지, 천제환의 낯에 놀란 빛이 스쳤다.

“친해.”

“…….”

깜빡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올려 보며, 선웅은 다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어젯밤 너한테 이 우산을 빌려주고 비를 흠뻑 맞았어. 그래서 감기에 걸렸고,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닌데 잠도 안 오고 심장이 빨리 뛰어. 너를 볼 때마다 등이 간지럽고…….

“그러니까 나 집까지 데려다줘.”

토독, 토독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운동장의 모든 소음을 눌러 버릴 만큼 크게 들렸다. 우산 손잡이를 잡은 큰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늘 시원시원하던 그답지 않게,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집에 가는 길이 이렇게 짧았던가? 우산을 나누어 쓴 게 무색하게 갈수록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비가 멎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우산을 접었지만, 천제환은 우산을 접지 않았다. 선웅도 그에게 비가 그쳤다고 굳이 말해 주지 않았다. 어느덧 선웅의 집 앞에 도착했다.

주택에 사는 선웅과 달리, 같은 학교의 아이들은 대부분 아파트에 살았다. 어릴 때부터 살아 자신에겐 익숙한 집이 그에겐 신기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집을 살피던 천제환이 물었다.

“여기 살아?”

“응.”

아카시아 나무에서 열린 흰 꽃이 선웅의 집 담벼락을 넘어 주렁주렁 피어 있었다. 갈색 담벼락 사이 흰색 대문은 며칠 전 선웅이 페인트를 사다가 칠한 것이었다. 처음엔 망한 줄 알았는데 며칠간의 간격을 두고 덧칠했더니 점점 그럴싸해졌다. 나무로 된 우편함은 선웅이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만든 것인데, 만듦새가 좋아서 지금까지도 잘 쓰고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해 손을 꼼지락거리는데, 천제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이…….”

“……?”

“너 같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곤 노란 우산을 접었다. 선웅은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았다. 천제환은 고이 접은 우산을 선웅에게 내밀었다.

“덕분에 잘 썼어.”

“…….”

그가 건넨 제 우산을 보며, 선웅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천제환은 처음부터 이 우산이 내 거라는 걸 알았단 말인가?

“그리고 이거.”

천제환은 앞으로 멘 가방을 열어 묵직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그 안에는 약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해열제, 종합감기약, 목감기약, 두통약 등.

“너 감기 걸린 거 같길래.”

“……나?”

“응.”

아까 점심시간에 약을 사러 간다고 조퇴증을 끊길래 걱정했는데, 이걸 사러 갔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지 선웅의 양 볼이 뜨거워졌다. 봉투를 살피는 선웅에게 천제환은 약을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건 알약이고 그건 시럽. 이거는 열날 때 먹으면 좋대.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몰라서 감기약 종류별로 다 쓸어 왔어. 아, 비타민도 샀는데.”

“비타민은 왜?”

그가 말한 건 하나씩 낱개 포장된 비타민이었는데, 아이들이 주로 먹는 건지 캐릭터가 그려진 것이었다.

“너 닮았잖아.”

비타민의 껍데기엔 다람쥐 캐릭터가 있었다. ……이게 날 닮았다고? 선웅이 슬쩍 눈썹을 모았다.

“귀엽지?”

“…….”

“그럼 진짜로, 내일 보자. 갈게.”

씩 웃은 천제환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몇 걸음 뒤로 걸었다. 선웅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천제환.”

그는 대답 대신 눈썹만 가볍게 들어 올렸다.

“……괜찮아?”

질문은 모호하면서 명확했다. 어제 체육관에 갔던 걸 들킨 마당이었으니, 그도 자신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터였다. 선웅의 질문에 천제환은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장난스럽게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옅어졌다.

“음…… 솔직하게?”

“응. 솔직하게.”

흔들림 없는 선웅의 시선을 바라보던 천제환은 입을 열었다.

“아니.”

* * *

시간은 흘러 대회는 내일로 다가왔다. 체육 교사는 당사자인 천제환보다 더 긴장한 건지 도통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 그 때문에 선웅도 종일 심부름을 해야 했다.

그 후로 천제환과 선웅 사이에 오간 말은 더 없었다. 이제는 늦게까지 자습을 해도 체육관에 혼자 남은 그와 마주치지 못했다. 이따금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가 선웅에게 다가오지 않았으므로, 선웅도 그에게 더 다가갈 수 없었다. 원래 그랬는데,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건만 천제환과의 거리감을 떠올리면 가슴께가 콕콕 쑤셔 왔다.

수업이 끝났다. 종례하러 들어온 교사는 아이들에게 천제환을 위해 격려를 보내 주자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책상을 두드리고 호들갑을 떨며 그를 응원했다. 선웅은 교실 맨 뒤에 앉은 천제환을 바라보지 않고 박수만 쳤다. 그래서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도통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평소 마지막까지 자습실에 남아 있던 선웅이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짐을 챙기는 선웅의 모습에 모두가 어디 아프냐고 한마디씩 물어왔다. 대답 대신 웃으며 선웅은 학교를 빠져나왔다.

집 앞에 도착한 선웅은 자신의 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천제환을 발견했다. 그는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아카시아 꽃을 보고 있었다.

“천제환?”

“안녕.”

깜짝 놀란 선웅과 달리 그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내일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왜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너 왜 여기 있어?”

“흠, 글쎄……?”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는 마치 남 일처럼 중얼거렸다. 그 태도에 선웅은 제가 다 불안해졌다. 천제환에게 가까이 다가간 선웅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너. 잠깐 나 좀 따라와.”

천제환을 끌고 도착한 곳은 다시 학교였다. 학교 건물 뒤편으로 도착한 선웅은 숨을 골랐다. 어찌나 빨리 걸었는지 또 심장이 뛰고 있었다.

“와, 우리 반장 힘 되게 세네.”

“미안.”

여기까지 군말 없이 끌려왔으면서, 천제환은 도착하자마자 손목이 아프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제야 선웅은 잡은 손을 놔주었다.

좀 전까지 선웅의 체온이 머물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샘 안에 가득한 동전과 돌탑들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웅이 바보 같다 여겼던 풍경이었다.

“근데 여긴 왜 데려왔어?”

웃음기가 만연한 얼굴에 그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의심스러웠지만, 선웅은 여기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더라 하는 유치찬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말을 모두 마쳤을 땐 선웅의 귓바퀴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차피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선웅은 무어라 덧붙이는 대신 주머니에서 묵직한 동전 지갑을 꺼냈다. 동시에 툭, 캐러멜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퐁당, 퐁당……. 동전을 잔뜩 가져온 보람도 없이 선웅이 던지는 동전은 얄궂게도 하나같이 목표물을 비껴갔다. 간절한 선웅의 옆에서 천제환은 태평하게 캐러멜의 포장을 벗겨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마지막 동전이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심호흡한 선웅이 심기일전하여 다시 동전을 던졌다.

퐁! 항아리 안으로 안착한 동전에 선웅이 제자리에서 팔짝, 뛰어올랐다. 아! 이럴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두 손을 모은 선웅이 작게 중얼거렸다. 천제환이 안 다치고 경기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말이었다.

소원을 다 빌고 눈을 뜨니 천제환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선웅은 민망하게 중얼거렸다.

“……너도 얼른 해.”

됐다고 하거나 비웃을 줄 알았는데, 천제환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난 하나밖에 없네.”

널찍한 손바닥에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반짝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이 더 빨리 성공했어야 했는데. 선웅은 제 손에서 던지는 족족 빗나가던 동전들을 아쉽게 떠올렸다.

샘 쪽으로 몸을 돌린 천제환이 동전을 던졌다. 동시에 선웅의 심장이 긴장으로 두근거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동전은 퐁! 맑은 소리를 내며 한 번에 목표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먹을 불끈 쥔 천제환이 감탄사를 뱉었다.

“오!”

“빨리, 빨리 소원 빌어!”

선웅의 재촉에 천제환이 킥킥 웃으며 눈을 감았다. 무슨 소원을 비는 건지,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한참을 눈만 감고 있다. 해가 지기 전, 가장 나긋하고 부드러운 햇살을 받은 얼굴이 근사했다.

“…….”

얼마 전 병원에서 잠든 그의 모습과 겹쳐지는 장면이었다. 그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했더라. 선웅은 홀린 듯이 다가가 천제환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입술에 닿은 천제환의 뺨이 볼록하게 올라왔다.

감았던 눈을 뜬 천제환은 선웅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웅의 눈이 커다래졌다. 얼굴 아래로 들어온 큰 손이 부드럽게 턱을 쥐었다. 상체를 기울인 천제환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다가왔다. 가까이서 바라본 얼굴은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여선웅.”

늘 반장,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낮게 제 이름을 불렀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선웅은 작은 입술을 오므렸다.

“네가 먼저 한 거다.”

그대로 두 입술이 포개어졌다.

입맞춤은 달고 고소했다. 선웅이 좋아하는 캐러멜 맛이었다.

* * *

선웅은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나고도 얼마간 현실감이 없어 눈만 깜빡였다. 꿈이구나. 주말에 늦은 점심을 먹고 소파에서 사이좋게 뒹굴거리다가 잠이 들었었다. 저를 끌어안고 잠든 제환은 아직 꿈나라를 여행 중인 듯하다.

선웅은 눈만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저를 안은 제환의 품이 아늑해서일까. 꽤 긴 시간 동안 잠시도 깨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좋은 꿈을 꾸는지 잘생긴 입매가 한 번씩 씰룩인다.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며 선웅은 제환이 잠에서 깨면 이야기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만났어도,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됐을 거라고.

단군이세요?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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