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Kiss me goodnight with your sour breath (1)
왜 그랬지?
내가 진짜 왜 그랬지?
“…하.”
시계는 어느샌가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잤다. 눈만 감았다 하면 호진의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인정하기도 용납하기도 싫지만, 호진과 이런저런 짓을 하는 상상에 빠져 버린 건 분명 사실이다. 그리고 정인은 느닷없이 맞닥뜨린 오류를 덤덤히 넘길 만한 성품이 못 됐다.
“왜 이러는데, 정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작금에 사태에는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요소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의 성패에 달려 있는 할아버지의 빌딩도 빌딩이고, 최근 가깝게 지낸 타인이 호진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내로라하는 마케팅 담당자들이 ‘그렇게’ 분위기를 조성해 놓은 곳이 바로 퀸즈 아일랜드이니, 그들의 매출 극대화 전략에 조금 휩쓸리는 것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뜬금없는 게 아닌가.
상대는 유호진이다. 평생 서로가 지구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다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을 알았을 뿐인 남이다. 그런데 도대체 뭘 어쩌자고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결국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 헤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런데 문득 벽 너머 호진의 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태의 원흉 되시는 분께서는 오늘도 정확히 다섯 시에 맞춰 일어나신 듯했다.
세상은 아직 고요했고,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곤 호진과 정인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얇은 벽을 타고 넘어온 옆방의 소리는 무섭도록 또렷했다. 물이 쏟아지다 멈추고, 또 쏟아지다 멈추는 걸로 보아 아마도 샤워를 하고 있는 듯했다.
“…….”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 내가 뭐. 방음이 잘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허공에 대고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뉴스 기사를 조금 훑어보다가 그 아래 달린 광고도 로 번 눌러 보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들을 읽다가 결국 메인 페이지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물소리는 여전했고 이제 더는 할 일이 없었다.
텅 빈 검색창을 노려보던 정인은 톡톡 손가락을 움직여 호진의 이름을 써넣었다. 어차피 리서치 업체에 리포트를 부탁할 예정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정말 정말 진짜 진짜 맹세컨대 단지 자료 조사를 위해서였다.
“…뭐가 좋다고 웃어.”
프로필 사진 속의 호진은 언제나처럼 얄밉게 웃고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자 온갖 잡다한 기사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심지어 어제는 하루 종일 테마파크에서 놀기만 했는데도 어제 자로 나온 기사까지 있었다. 십중팔구는 의류나 스포츠용품 광고 기사에 호진의 이름만 끼워 넣은 애드버토리얼이었다.
그것들을 한참이나 지나쳐 내려가자 그제야 광고 아닌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목에만 자극적인 내용을 붙여 놓고 결국 별 내용은 없는 낚시성 기사였다.
[유호진, LA 올림픽 출전 확정…“글쎄”]
참 별짓들을 다 하는구나. 예상대로 본문에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호진의 상태만 줄줄 적혀 있었다. 어떤 부상을 입었느니, 그래서 재활은 얼마나 했느니 하는 둥의.
설렁설렁 기사를 넘겨 가던 정인의 시선은 곧 댓글들에 머물렀다.
댓글
늘ㅡ감사하고 자랑스러운호진선스ㆍ 대한민국의아들ㅡ금메달 화이팅~~^^
Re : 아재 고추서요?
Re : 이새끼 컨셉충임 댓글모음보셈
크랄렌스키 또 발리겠네ㅉㅉ
Re : 그래도 너보다 부자임ㅋ
유호진 선수 올림픽까지 화이팅! 대한민국이 항상 응원합니다!
Re : 해 준것도 없으면서 꼭 이럴때만 국뽕찾지; 역겹다
Re : 해 준 게 없으니까 댓글로라도 응원하는 거지; 쿨병 종자 역겹다
조금 정신이 사납긴 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호진에게 긍정적인 편이었다.
그의 평판이 좋아야만 빌딩을 지킬 러 있는 정인의 입장에서야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마냥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올림픽 얘기가 벌써 나와?”
다음 올림픽까지 족히 2년 이상이 남은 시점이다. 그러나 세상은 부상을 입고 이제 막 회복한 스물한 살짜리 선수에게 벌써부터 너무 큰 기대를 쏟아붓고 있었다.
고작 반년 남짓의 시간조차도 기다려 주지 않고 허구한 날 유호진의 끝을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가 당연히 다음번의 올림픽에도 출전하고 금메달까지 따올 거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물론 나쁜 마음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한 분야의 선두가 되어 온 국민의 기대와 환호를 받는 건 호진에게도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지.
하지만 이게 무너진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저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대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지금처럼 그를 자랑스러워하고 응원해 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구보다도 많이 이 모든 상황을 가정해 봤을 유호진은 정말 괜찮은 걸까.
…나라면 조금 숨 막힐 것 같은데.
“…….”
식물의 죽음에 대해 말하던 호진의 목소리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좋은 마음도 가끔은 독이 될 때가 있어요.’
자를 대고 그어 놓은 선 같던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본 빈틈.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눈으로, 호진은 그렇게 말했다.
‘사실은 숨이 막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쩌면 그건 그 애의 마음이었는지도 몰라.
‘결국 마지막 숨구멍까지 틀어막혀서, 하룻밤 사이에 말라 버리는 거예요. 손쓸 수도 없이.’
정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작은 화분 하나가 보였다.
새 물이 끊임없이 차오르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저 밑에서 썩어 들어가는 뿌리의 모습을 상상했다. 금메달을 가져오겠다며 자신 있게 웃던 호진의 얼굴이 따라왔다.
“아….”
지금 당장 호진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다. 정인은 곧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막 현관문을 여는데,
“어, 형.”
“미친…. 깜짝이야.”
아침 식사가 담긴 비닐 봉투를 들고 있던 호진과 마주쳤다. 정인은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아니, 어.”
까만 머리카락이 축축했다. 호진은 물기가 가시지 않은 말간 얼굴로 뚫어지게 정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형, 이 시간에 왜 이렇게 말짱해요? 혹시 어제 안 주무셨어요?”
“응.”
얘가 이렇게 예뻤나?
갑자기 손끝이 저렸다. 어쩐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정인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왜요?”
“그냥 잠이 안 와서.”
너 때문이라는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수 없다. 대충 얼버무리자 호진은 정인에게 음식이 든 봉투를 안겨 주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말똥말똥한 거예요, 아니면 좀 몽롱한 상태로 잠만 못 자는 거예요?”
“별일 아니야.”
“어제 2만 보는 족히 걸었는데 아직까지 잠을 못 잔 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에요, 혹시 자주 이래요?”
“그렇지도 않아. 오늘 저녁에 몰아서 잘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따끈한 기운이 올라오는 봉투를 끌어안은 채, 정인은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하려던 말이 목구멍 안쪽에 걸렸다. 침대를 박차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응당 전해야 할 말이란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막상 호진을 눈앞에 두고 보니 그게 또 쉽지가 않았다.
혹시 오버하는 건 아닐까, 알아서 잘할 텐데 굳이 내가 입을 댈 필요가 있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꼭 금메달이 아니어도 돼.”
“네?”
첫 마디를 뗀 이상 무를 수 없게 됐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아도, 칼을 뽑았으니 이제 무라도 썰어야 한다.
“4월 대회 말이야. 나 때문에 나가는 대회가 아니라는 건 알아. 그래도 부추긴 건 나인 것 같아서 그래.”
“…….”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그냥 네가 경기를 하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던 거야. 너한테 일등 하라고 부담 줄 생각은 없었어.”
슬리퍼 위로 드러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써야 했다.
“메달 바랄 자격 없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야. 이 대회는 너를 위해 필요한 거니까 다른 사람들의 이유 같은 건 생각할 필요 없어. 너는 너만 생각하면 돼.”
사실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닌데,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꼬인다. 정인은 돌려 말하기를 그만두고 본론을 꺼내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금메달 같은 거 안 따도, 설령 꼴찌를 해도 너는 똑같이 유호진이니까….”
“…….”
“…그러니까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호진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을 견디다 못해 고개를 들었다.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여전한 침묵이 조금 더 부담스러워졌다.
“…어쨌든 이건 잘 먹을게. 그럼 가 봐.”
“형.”
호진이 정인의 손목을 붙들었다. 한 걸음 가까워진 호진에게서 깨끗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 사나운 구석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순하기만 한 향이었다.
“저랑 꽃 구경 가 주세요.”
이건 또 웬 뜬금없는 소린가.
“마지막까지 제대로 대회 준비 할게요. 매일매일 숨도 안 쉬고 열심히 할 거예요.”
“야.”
그런 식으로 몸 갈아 가면서 하지 말라고 한 얘기라는 건 곧 죽어도 못 알아듣나보다. 어이가 없어진 정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진은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정말 열심히 할 테니까, 그러니까 다음 주에도 딱 하루만 저랑 놀아 주세요.”
요사스럽게 눈웃음을 치며 네에? 하고 조르기까지 했다.
어디 되도 않는 끼를 부리나 싶어, 정인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대답했다.
“알았어.”
“정말요?”
어, 이게 아닌데.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이러지? 나 진짜 어디 고장 났나?
“형 혹시 갈비 좋아하세요? 가는 길에 석갈비 끝내주게 하는 집 있거든요. 조금 더 넘어가면 되게 유명한 매운탕 맛집도 있고…. 둘 다 별로 안 좋아하시면 한정식집 갈까요? 아니다. 그냥 이 중에 골라 보세요. 갈비, 매운탕, 한정식, 부속구이, 육회.”
“…갈비?”
떠밀리듯 대답해 버렸다.
“오, 그래요? 그럼 다음 주 일요일로 예약해 놓을게요.”
“아니….”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화이팅!”
어버버하는 사이 호진은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콩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발이 떨어졌다. 정인은 찜찜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섰다.
“뭐야…. 왜 이렇게 되는데.”
책상 위에 밥과 반찬들을 내려놓으며, 괜히 핸드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다. 이제 겨우 수요일이니 다음 주 일요일까지는 열흘 가까이가 남았다.
“…꽃 같은 건 혼자 보러 가도 되잖아.”
되받아치지 못한 게 억울했다. 왠지 성질이 나서 밥을 퍽퍽 떠먹었다. 중간중간 목이 막혀 몇 번인가 기침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끝까지 밥 한 공기를 싹 비우고 나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연근조림 한 개를 오독오독 베어 물며 정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째서 이렇게 한숨이 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
유부초밥, 방울토마토를 곁들인 닭가슴살 샐러드, 무가당 오렌지주스와 밀크쉐이크.
이미 제 몫의 뼈 간식을 모조리 해치운 태피가 군침을 줄줄 흘리는 가운데, 탄수화물 덩어리인 유부초밥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이따금 샐러드나 집어 먹던 주영의 눈길이 정인을 향했다.
조금 푸석해 보이는 얼굴로 느닷없이 저택에 쳐들어온 최정인 군께서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그러나 야무지게 음식을 해치워 가고 있었다.
“진짜 잘 먹네.”
어릴 적부터 늘 이랬다. 입이 짧은 것 같으면서도 가만 보면 은근히 먹는 걸 좋아하는 데다, 심지어 열심히 먹기까지 해서 보기만 해도 절로 배가 불렀다. 작품 도중 뭔가 먹고 싶은 게 생기면 꼭 정인에게 그걸 사다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요리 좀 하는 애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꼬시면 홀라당 넘어가겠어, 아주.”
“웁, 헉, 으윽.”
유부초밥을 오물거리던 정인이 그 말에 숨넘어가는 소릴 내며 가슴을 두드렸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얼른 물을 건네주었다. 정인은 여전히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도 주영에게 꾸벅 인사하며 컵을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묘하게 촉이 섰다. 주영은 장난치듯 슬쩍 던져 보았다.
“설마 진짜 요리 잘하는 애가 취향이야?”
“아뇨?! 뭐 그런,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나 다를까 정인은 기다렸다는 듯 미끼를 물었다. 그리고 이런 순둥이 하나를 뼈째로 씹어먹는 건 주영에게 일도 아니었다.
“못 할 말 한 것도 아닌데 반응이 왜 그래? 너도 이제 성인인데 이상형 같은 거 좀 있을 수도 있지.”
“진짜 아닌데….”
누가 숫총각 아니랄까 봐 뽀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아주 난리도 아니다. 주영은 목 끝까지 올라온 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살살 정인을 구슬렸다.
“야, 이상형 그거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실제로 만나는 사람은 완전 딴판인 경우가 더 많다고.”
“…형도 이상형 같은 거 있었어요?”
“당연하지.”
묻는 걸 보니 이제 관심이 좀 생기나 보다. 주영은 정인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곧바로 조건을 설정했다.
어디서 뭘 얻어먹고 와서 애가 이렇게까지 맛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요리를 해 주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상대가 돈을 줬거나, 아니면 자신이 상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을 줬거나.
그리고 돈을 받았든 마음을 줬든 웬만한 사이코가 아닌 이상 두 경우 다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잘할’ 수밖에 없으니, 아마 큰 카테고리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다정한 사람 좋아했어. 이것저것 잘 챙겨 주고, 착하고, 말 잘 듣고.”
“진짜요?”
당연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정인은 낚싯바늘이 꿰인 것도 모르고 그대로 딸려 올라오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어쩌다가 삼촌이랑 만나게 된 거예요?”
“사람 일이라는 게 좀 그래.”
주영은 자세를 고쳐 정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래서 네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데?”
“잘 모르겠는데…. 저는 연애 같은 거 생각 없어요.”
“그래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
한 번 더 밀어붙이자 정인은 그제야 음, 하며 말을 골랐다.
“혹시라도 누구 만나게 되면…. 저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 좋겠죠.”
“그리고?”
“음. 그리고….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요. 물론 요리까지 잘하면 더 좋…고요.”
그런 말을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어색한지 자꾸만 말꼬리가 끊어졌다. 주영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정인의 말을 기다렸다. 순둥한 도련님께서는 이제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좀 반듯하고 바른 사람이면 좋겠어요. 웃는 모습이 예쁜 것도, 정서가 안정적인 것도, 감정조절 잘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도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가끔은 바보같이 우직한 면이 있는 것도 좀 괜찮은 것…. 아니, 이게 아니고요!”
“응?”
“뭘 어쩌겠다는 게 절대 아니에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썩 나쁘진 않겠다 정도인 거지.”
오, 얘 진짜 뭐 있나 보네.
“응, 그렇구나.”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인 이상형 뒤에는 반드시 실존 인물이 있는 법이다. 조금 전의 말을 요약하면 정인이 최근 마음에 들인 상대는 ‘요리깨나 하는 호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굴까. 주영은 재벌가 도련님의 동선 안에 있을 만한 사람들의 직업을 하나하나 추렸다.
“그럼 한마디로 착하고 성실한 호텔 주방장 정도면 된다는 거야?”
“아….”
떨떠름한 걸 보니 아니다.
“파인 다이닝 셰프? 요리 연구가? 청와대 조리장…은 나이가 너무 안 맞고. 아니면 뭐, 한정식집 딸? 푸드 칼럼니스트?”
그러자 정인이 주영을 흘겨보았다.
“형, 지금 저 떠보는 거죠.”
“맞아.”
어차피 얻을 정보는 다 얻었다. 주영은 간단하게 수긍했다.
“진짜 그런 거 생각 없어요.”
정인은 뭐 대단히 날카로운 추리라도 해낸 듯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귀엽고도 같잖은 기세였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연예계 짬을 먹어 온 주영에게 지금 정인의 모습은 그저 성난 아기 고양이 같기만 할 뿐이었다.
“알았어, 미안해. 장난 좀 쳤다고 그렇게 삐지기 있냐?”
“삐진 거 아니거든요?”
누구든 사랑에 빠지면 결국 티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특히나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순한 애라면 굳이 캐내려 하지 않아도 결국 어디선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서 모두에게 들키고야 말 것이다.
“이거나 마셔,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주영은 일부러 오버하며 정인의 앞에 밀크쉐이크를 놓아 주었다. 정인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도 또 열심히 쉐이크를 쭉쭉 빨기 시작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얘가 최현욱의 핏줄이라는 건 정말이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된다.
그나저나 우리 미친놈 이거 알면 분명히 개지랄 떨 텐데 어쩌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사서 걱정하며 주영은 양상추 한 조각을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이미 모든 것이 그 미친놈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
Pathologically, relevant mutations, susceptibility, factor genes….
“아.”
검은 글자 위로 핏물이 툭 떨어져 스몄다.
“어, 미정이, 미정이.”
또 코피다. 로커 룸에 틀어박혀 논문을 들여다보던 호진은 곧바로 제 무릎에 앉아 있던 인형부터 치웠다.
어딜 가나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는 돌고래 인형의 이름은 ‘미니 정인이’, 줄여서 ‘미정이’였다. 어쨌든 미니 정인이는 무사했다.
인형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고 티슈로 코를 눌렀다. 시선은 여전히 논문에 고정된 채였다. 마지막으로 찾아낸 단어들의 뜻을 적어 넣고 초록으로 돌아왔다.
“심박수 변화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구나….”
호진이 보고 있는 것은 LGS 통증 완화와 운동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자료였다.
최대한으로 잠을 줄여 가며 매달렸는데도 전부 해석하기까지 꼬박 일주일이나 걸렸다. 그래도 운동과 관련된 자료이니 뭐라도 아는 단어가 있겠지 싶었지만, 정작 운동 관련 문장은 얼마 되지도 않고 온통 생물학 이야기뿐이었다.
어쨌든 포스트잇 한 묶음을 거의 다 써 가며 얻어 낸 결론은 처음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대부분의 질병에 그러하듯 적당한 근력 운동과 심장 강화는 LGS에도 유의미한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오역을 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 호진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실을 정인에게 어떻게 전해야 불편해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우선 핸드폰부터 찾으려는데,
“호진아.”
정우가 불쑥 로커 룸으로 들어섰다.
“너 오늘…. 뭐야, 코피 났어?”
그는 휘둥그레 눈을 뜨며 다가와 호진의 얼굴을 살폈다.
“아, 요즘 좀 이래. 아무래도 혈관 터진 것 같아.”
“그래? 얼른 지져야겠네.”
운동을 하다 모세 혈관이 터지는 건 사실 너무 흔한 일이라 두 사람 다 별생각이 없었다. 피 묻은 휴지를 대신 쓰레기통에 버려 주며 정우는 말을 이었다.
“하여튼 이따가 순댓국 먹으러 갈래? 펜싱 애들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아, 난 오늘 할 일이 좀 있어서. 재미있게 놀다 와.”
“이 시간에 무슨 일?”
정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배시시 웃음이 났다. 호진은 온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대답했다.
“누구 좀 만나러 가려고.”
사실 정인이 만나 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은 찾아가서 어떻게든 비벼 볼 작정이었다.
“뭐야. 너 설마 연애하냐?”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냐, 얼굴 보니까 완전 맛이 갔는데.”
호진의 상태를 단박에 알아본 정우는 막 일어나려는 호진을 붙들어 앉혔다.
“내가 살다 살다 유호진이 연애하는 꼴을 다 보네. 상대가 보통 잘난 게 아닌가 봐?”
“…응.”
혹여 정인에게 누가 될까 봐 그와 관련된 것은 한 조각도 흘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정인이라는 사람이 잘난 건 너무 당연하고 자명한 사실이니까.
“얼마나 만났어?”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야.”
“…설마 짝사랑이냐?”
호진은 논문의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우가 헛웃음 쳤다.
“에이, 뭐야. 고백하고 사귀자고 하면 되잖아. 너 싫다는 사람 없을걸?”
그 말에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싫어하진 않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좋아해 주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이런 마음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다. 지나간 일들을 하나하나 따져 봤지만 이렇게까지 어떤 일 앞에 자신이 없던 적은 없었다. 타인의 거절 같은 걸 두려워하는 것도, 만약을 가정하고 걱정하느라 망설이는 것도, 비겁하게 승부를 피하는 것도 호진의 방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인에게는 태연해지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의 위험 부담도 지고 싶지 않았다.
‘금메달 같은 거 안 따도, 설령 꼴찌를 해도 너는 똑같이 유호진이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쩌면 매번 그렇게 나조차도 모르는 나의 바람을 말해 주는 걸까.
깊은 수렁에 빠진 미물을 볕 드는 곳으로 건져 올리는 것이 신의 일이라면, 최정인은 이미 유호진의 신이 된 지 오래였다.
너무 귀하고 애틋해서,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어렵다. 이제 그의 앞에 쏟아 낼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해야 함께 봄꽃을 보러 가 주지 않겠냐는 초라한 물음 정도가 전부다.
“제대로 빠졌나 보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래?”
어떤 사람이냐니, 호진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말도 못 하게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야.”
꽃을 보러 가자고, 함께 밥을 먹자고, 오늘은 구름이 예쁘고 날씨가 좋다고.
그런 말들로 진심을 꼭꼭 감추어 내미는 일이 조금도 귀찮지 않을 만큼, 이제 최정인이라는 사람이 너무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
한편 정인은 이제 막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차량 내부 스피커의 볼륨을 높이고 있었다.
“네?! 뭐라고요?”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말에 저도 모르게 핸들을 틀어버릴 뻔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스피커 속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 정인이 너도 사무소 한번 와야겠다고. 이게…. 네 서명도 들어가야 하는 것 같구나.
통화 중인 상대는 어릴 적부터 정인의 자산 일부를 관리해 준 회계사였다. 그는 오늘 오후쯤 현욱이 개인 변호사를 통해 ‘성원 메디컬 타워 담보 설정 건’을 본격적으로 문서화했다고 전했다. 신탁에 들어 있는 건물이다 보니 권한 대행을 위임받은 회계사에게까지 자동으로 넘어간 듯했다.
“아니, 삼촌이 정말로 그걸 공증까지 받아 오셨어요?”
- 그래. 혹시 몰라서 온 그대로 두긴 했다. 큰도련님 말로는 이미 너랑 협의가 된 일이라던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하…. 그러게요. 자세한 건 직접 뵙고 말씀드릴게요. 이런 일로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지끈지끈 골이 쑤셨다.
-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니, 몸조심하고.
“네.”
정인은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주먹으로 핸들을 쾅 내리쳤다.
“아, 씨…. 이거 뭐 어떻게 되는 거야.”
생각보다 일의 사이즈가 커진 것 같았다. 어차피 계약이 약속대로 이행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사적으로 각서 정도를 주고받을 때와는 부담감의 무게가 달랐다.
곧바로 리서치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는 동안 차체는 터널을 빠져나와 학교 근처의 골목으로 진입했다.
“실장님, 어제 부탁드린 유호진 선수 리포트요. 혹시 조금만 더 빨리 받아 볼 수 있을까요?”
- 음, 그럼 일단 3대 포털 데이터만 먼저 보내 드릴게요. 유호진 선수 자료가 워낙 방대한 데다, 오피셜은 아니지만 곧 얼라이드랑 계약도 할 것 같거든요. 아마 긍정이든 부정이든 소폭 변동이 있을 거예요.
“네에?”
또 한 번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얼라이드는 TH 서비스 그룹에 속한 스포츠 의류 브랜드의 이름이었다. 정인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잠시만요, 계약 얘기가 벌써 나왔다고요? 어디서 들으셨어요?”
- 얼라이드 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한 7할 정도 확률로 맞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하….”
기가 차고 코가 차서 말문이 열리지가 않았다.
TH 그룹의 파워는 에너지, 전자, 중공업이 순서대로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뒤로도 생명 공학에서부터 금융까지 ‘돈이 되는’ 계열사가 차고 넘치지만, 조금 전 거론된 얼라이드는 패션 계열사 중에서도 가장 말단이었다.
시장 파이로만 보면 아주 죽을 쑤는 곳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쪽에서는 할아버지의 빌딩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게 고작 의류 모델 자리 정도라니.
세무사와 통화를 하던 시점부터 설마설마하던 가정은 사실이 되었다. 아무래도 현욱은 지금 고의로 정인을 압박하려 하는 것 같았다.
당초 예상대로 유호진의 스폰서가 되는 게 TH 코퍼레이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만약 정말 얼라이드와 계약을 하게 된다면 이것저것 아무리 빵빵하게 넣어 봐야 부대비용이 총 100억을 넘기지 않는다. 빌딩의 시세를 후려칠 만큼 후려쳐도 매매가의 10분의 1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얼마든 현금으로 때울 수 있는 액수를 두고 굳이 ‘매각’을 조건에 붙였다는 건 결국 감히 그 앞에서 딜을 치려 한 것에 대한 암묵의 처벌임과 동시에, 뒤는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말고 무조건 이 건을 성사시키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최정인은 최현욱에게 단단히 찍혔단 소리다.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더니, 그렇게 내가 예뻐 죽는다더니.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정말 왜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몰아붙이나 싶어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승부욕이 솟았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주차까지 마쳤다. 정인은 씩씩대며 차를 벗어났다.
“내가 못 할 줄 알고? 유호진이 대회 한 번만 나가 봐, 게임 끝…. 흡.”
말해 놓고도 스스로 놀라 입을 탁 틀어막았다. 틈이 날 때마다 자료 조사 목적으로 호진의 기사를 읽어 댔더니 점점 인터넷 기사 댓글 속에 사는 유호진의 극성팬들과 정신 상태가 닮아 가는 것 같았다.
찜찜한 마음으로 건물에 들어선 정인은 현관문 앞에 서자마자 습관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언제나 따끈한 음식 봉투가 놓여 있던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아, 맞다.”
대회 준비를 앞두고, 호진은 선수촌에서 더 오래 훈련을 하게 되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진 아르바이트를 도와주는 것도 식사 준비도 어려울 것 같다며 사과하던 말에, 정인은 가서 운동이나 하라고 쌀쌀맞게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매일 받아먹던 밥이 없으니 조금 허전했다.
“밥 한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무슨.”
뭐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괜히 툴툴대며 방문을 열었다.
차키를 대충 책상에 던져 놓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호진의 기사를 검색했다. 역시나 오늘도 다른 스폰서 기업에서 내보낸 광고성 기사 투성이였다. 주르륵 달려 있는 댓글들을 슥슥 훑어보는데,
댓글
ㅂㅅ들ㅋㅋ 전나못생긴 퇴물 자꾸 빨아주는 이유가 뭐냐ㅋㅋ루삥뽕
귀여운 악성 댓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허.”
정인은 헛웃음을 치며 곧바로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했다. 그러고는 차분한 마음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선수 본인이 볼 수도 있는 공간인데, 현역 선수에게 이런 식의 저급한 댓글을 다는 건 좀 예의가 아니지 않나? 그리고 ‘빨아 주는’ 이유가 뭐냐고?
분명 가볍게 변호만 할 예정이었는데 쓰다 보니 갑자기 내핵의 용암 같은 분노가 솟구쳤다. 정인은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그걸 몰라서 니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야 이 개빡대가리 새끼야ㅋㅋㅋㅋㅋㅋ 너 방구석에서 이딴 댓글이나 싸지르는 동안에도 유호진은 죽어라 훈련하는데 얻다 대고 같은 인간인 척을 해? 너 같은 것도 국민이라고 또 누가 한글과 인터넷 사용법을 가르쳐 놓았나 본데, 진심으로 너 따위에게 낭비된 대한민국 복지/의료/교육 시스템의 인력과 자본이 아깝다. 네 쓰레기 같은 댓글 하나 쏘겠다고 데이터 센터가 배출한 CO2도 범우주적 개손해니까 앞으로는 지구를 위해서라도 인터넷 하지 마^^ㅗㅋㅋ
부들거리며 미친 듯이 장문의 댓글을 적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전화가 걸려 왔다.
공교롭게도 발신인은 호진이었다.
“…여보세요.”
- 형.
그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슴 한가득 들어차 있던 악플러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고, 어쩐지 조금 서글퍼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호진에게 괜한 투정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 지금 어떤 새끼랑 싸웠는데, 너무 속상하다고. 짜증 나서 미치겠다고.
- 지금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왜.”
일부러 덤덤하게 되물었다. 호진은 잠깐 뜸을 들였다.
- …날씨가 좋아서요.
정말 별것 아닌 이유였다.
“어딘데?”
그럼에도 의지와 관계없이 입이 열렸다. 요새 정말 왜 이러지, 정인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 누리대로 지나가고 있어요, 5분 안에 갈게요.
“됐어.”
싸늘하게 대답하며 의자에 걸려 있던 호진의 트랙 톱을 걸쳤다. 그리고 덧붙였다.
“…천천히 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섰다. 건물의 외벽에 기대선 정인은 지퍼를 목 아래까지 잠갔다.
상큼한 꽃향기가 짙어져 가는 사월의 봄밤, 문득 고개를 드니 까만 하늘에 새하얀 별 서너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인공위성인가?”
그렇든 아니든, 호진의 말대로 날씨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좋았다.
***
캄캄하기만 하던 아스팔트 바닥 위로 헤드라이트가 하얗게 비쳤다.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골목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형.”
깔끔하게 평행 주차를 마친 호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인에게로 달려왔다.
“왜 나와 계세요, 쌀쌀한데.”
“바람이나 좀 쐴까 하고.”
아주 큰일이라도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를 바라보며 정인은 마음속으로 호진을 초대형견에서 중대형견 급으로 하향 조정했다.
여태까진 폭신폭신 동그란 그레이트피레네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보다 보니 그것보단 조금 더 날렵하고 오밀조밀한 느낌이다. 허스키나 리트리버 과인가? 사모예드? 아니면 진도? 아니면, 조금 더 복슬한 느낌의 풍산개?
“저녁은 드셨어요?”
“…응.”
정인은 슬슬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비우자마자 끼니를 걸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호진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뭐 드셨어요?”
그러나 추가 질문이 떨어질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뭘 먹었다고 해야 자연스러우려나, 고민하는 동안 침묵이 길어지자 호진이 한숨을 쉬었다.
“안 드셨죠.”
“…먹었어.”
우물거리며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인은 고개를 들지 않고 버텼고, 호진은 곧 커다란 몸을 접어 아예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정인을 올려다보았다.
“형. 혹시 저 걱정시키는 거 싫어서 이러시는 거예요?”
너무 깨끗하게 정곡을 찔러 버리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정인은 그의 눈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호진이 웃었다. 모난 구석 없이 반듯한 이목구비가 찬찬히 눈에 담겼다.
“정말 그런 거예요?”
늘 보던 얼굴 그대로였다. 놀랍도록 깨끗한 눈빛도,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호흡도, 균형 있게 잡힌 자세가 주는 안정감도 모두 평소와 똑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딘가가 달라 보였다. 정인이 알고 있던 호진은 분명 두부처럼 말랑말랑 순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내려다보니 콧대가 반듯하게 서서 인상이 꽤나 뚜렷하다. 완벽한 대칭을 이룬 눈썹도 예쁘고,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곧은 선도 예쁘고….
얘 원래 이렇게 잘생겼었나?
딴생각에 빠진 사이였다. 커다란 손이 정인의 소매 끝에 닿았다.
“…걱정되는 거 맞아요.”
달래듯 옷감을 살살 당기며 호진이 말했다.
“하지만 영원히 걱정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을 거예요.”
정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내내 바닥에 납작하게 앉아 있던 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 끝난 거 아니잖아요, 지금이라도 밥 먹으러 가면 돼요.”
간단히 내려 주는 해답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어디서 느껴 봤더라.
“아….”
곧 언젠가의 패스트푸드점에서 겪은 일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원경을 모욕하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았던 날, 처음으로 호진에게서 이런 모습을 봤다.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었으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심을 찾던. 너무나도 손쉽게 중심을 잡아 제자리로 돌아오던.
“길 건너에 백반 잘하는 집 있어요, 저랑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정인은 당기는 손을 따라 홀린 듯 걸음을 뗐다.
“…응.”
영원히 너를 걱정하거나 슬퍼하지는 않겠다는 말.
사실은 모든 것을 겪어 내는 동안 가장 간절히 듣고 싶던 말이었다.
***
‘현욱 씨.’
어스름한 잠결이었다. 닫힌 문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없이 눈을 들어 방의 풍경을 살폈다. 기억이 뚝 잘린 걸로 미루어 보건대 아무래도 그사이에 또 정신이 나갔었나보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약 기운에 머리가 멍했다. 엉엉 울며 뭔가 중얼거렸던 것 같긴 한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번만큼은 아빠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저를… 봐요…. 정인이가… 해요.’
끊겨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살짝 방문을 열고 거실을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선 작은 아빠의 등이 보였다. 나는 문손잡이를 쥔 채 가만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많이 생각했는데…. 정말 안 될 것 같아요.’
약을 먹으면 늘 감각이 무뎌졌다.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고, 어딘가에 세게 부딪혀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마치 꿈결 속을 사는 것처럼 모든 것이 멀고 희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몽롱함의 강도로만 보면 약을 한 주먹은 먹은 것 같은데도 아빠의 담담한 목소리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쯤은 선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 정인이….’
아빠가 또 나 때문에 슬퍼하는구나.
혹시 내가 또 나쁜 말을 했나?
‘…현욱 씨가 잠깐만 데리고 있어 주세요.’
이어지는 목소리에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드디어 아빠는 나를 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부탁할게요,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현욱 씨가 우리 애기 좀…. 돌봐 주세요.’
자꾸 나쁜 말로 상처 입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프기만 해서, 매일 걱정시켜서, 슬프게 만들어서.
‘…….’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곧바로 쫓겨날 것 같아서 얼른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행여나 숨소리가 샐까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입을 꽉 틀어막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몇 번이나 이불을 들추고 일어났다. 하지만 아빠에게 다가가 말을 걸 용기는 나지 않아 결국 도로 이불 속에 파묻혔다. 정말 울고 싶었지만 울먹일 자격조차도 없는 것 같아 오랫동안 뜬눈으로 허공을 더듬다 그대로 잠들었다.
‘정인이 잘 있었어?’
‘응….’
돌이켜보면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손이 벌벌 떨릴 만큼 두려워했던 게 무색하게도, 그건 그냥 아빠들의 장기 출장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해외 일정으로 몇 주간 자리를 비운 큰 아빠와 일정이 겹친 게 문제였다. 일주일짜리 출장을 3일 만에 마친 작은 아빠는 짐도 풀지 않고 제일 먼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동안 나를 돌봐 준 건 때마침 일을 쉬고 있던 주영이 형이었다.
‘바빴을 텐데 고마워요, 주영 씨.’
‘내가 진짜 할 말이 많아, 얘 밥 엄청 먹는 거 아시죠?’
아빠는 내 얼굴을 쓰다듬느라 정신이 없었고, 주영이 형은 꿀벌처럼 툭툭 아빠를 쏘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찬 가리지도 않고 주면 주는 대로 후식까지 얼마나 씩씩하게 잘 챙겨 먹는지…. 게다가 이 쪼끄만 배신자가 글쎄, 낮에는 그렇게 친한 척해 놓고 밤에는 자느라 바빠서 나랑 놀아 주지도 않잖아요. 게임 하기로 해 놓고.’
‘하하하, 그랬어요?’
‘참나, 웃을 일이 아니거든요? 형 없는 3일 동안 얘가 이 집 기둥까지 뽑아 먹었으니까 밥값 내고 가요.’
‘…고마워요.’
그리고 나는 아직도 아빠에게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 그냥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로, 주영 씨한테 고마운 게 너무 많아요.’
지금이야 당연히 알고 있다.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말도 안 되게 극단적인 상상을 했을 뿐이라는 걸.
하지만 그땐 그런 걸 가려낼 힘이 없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설령 정말로 아빠에게 버려진다 해도 억울해할 자격 따윈 없다고,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기어이 나를 버리지 못한 아빠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정말로 나 같은 거 낳지 말지.
더 예쁘고 착한 아이의 아빠였다면, 슬프지 않아도 됐을 텐데.
“어? 밤막걸리도 있네요.”
“…응?”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던 정인은 고개를 들었다. 메뉴판을 뒤적이던 호진의 눈길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형 혹시 알밤막걸리 아세요?”
“그게 뭔데?”
호진은 곧 메뉴판을 펼쳐 정인에게 보여 주었다. 오이소주네 레몬소주네 하는 잡다한 것들로 가득한 메뉴판 한구석에 촌스럽게 생긴 술병 사진이 붙어 있었다.
“공주 술이거든요. 이게 여기까지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마셔 보실래요?”
“너 술 마셔도 돼?”
“막걸리 한 잔 정도는 괜찮아요.”
호진이 이모, 하고 손을 들었다.
“뚝불 두 개랑 밤막걸리 하나 주세요. 밥 많이요.”
“아이고, 공주 사람이라고 공주 술 마시는 거야?”
살가운 물음에 호진은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사장은 정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왜, 공주에 유명한 거 딱 세 개 있잖아. 무령왕릉, 공주알밤, 유호진.”
“아이, 진짜….”
순식간에 귀까지 새빨개진 호진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저 배고파 죽어요, 빨리 밥 주세요. 애교 섞인 투정에 못 이기는 척 물러난 사장은 곧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인은 머뭇머뭇 다가오는 호진을 향해 건조하게 웃으며 짝짝 박수를 쳤다.
“오, 공주 3대 명물 오시네.”
“그런 거 아닌데….”
의외로 이런 걸 못 견디는 타입인가보다. 호진은 온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냅킨 한 장을 정인의 앞에 깔고는 그 위로 수저를 착착 올렸다. 시중에 유통되는 백색 냅킨에서 종종 형광 증백제가 검출된다는 기사가 떠올랐지만 굳이 그걸 지적하진 않기로 했다.
“그래서 정말 왜 온 건데?”
“네?”
“정말 날씨가 좋다고 진천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건 아닐 거 아냐.”
물을 따르고 있던 호진이 그 말에 아, 하고 정인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방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맨몸 운동 루틴 좀 알려 드리고 싶었거든요. 공부하면서 중간중간 하시면 리프레쉬도 되고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 어떤 거?”
이래저래 기운이 모자라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뿐 여전히 운동에 관심이 있긴 했다. 솔깃해진 정인이 묻자 호진은 몇몇 운동의 이름을 나열했다.
“코어 좀 쓰는 건데, 말로는 설명이 좀 힘드니까 같이 자세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한 시간 정도?”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정인도 한창 운동을 하던 때엔 스태틱 위주로 몸을 만들었으니 대충 설명을 들으면 금방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그래.”
뭐 별거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어느샌가 호진과 정인의 앞에는 팔팔 끓는 뚝배기와 온갖 반찬들이 차례로 놓였다.
“와….”
단박에 정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계란말이였다. 머스터드와 케첩이 약 3밀리미터가량의 갭을 두고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엑스 자로 줄줄이 뿌려져 있었다. 가히 명장의 솜씨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란말이 좋아하세요?”
“응.”
베어 물자마자 따끈하고 폭신한 계란이 톡 잘리며 따뜻한 치즈가 줄줄 쏟아져 나왔다.
계란에 치즈에 뛰어난 심미성까지 갖춘 계란말이라니, 경이로운 콜라보에 감탄한 정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이게 뭐야.”
“맛있어요?”
“응, 그냥 계란말이는 먹어 봤는데 치즈 들어간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메인 요리인 불고기에는 손도 대지 않고 걸신들린 듯 계란말이만 집어 먹었다. 그러자 호진은 별안간 조금 슬픈 눈을 하더니 제 몫의 계란말이를 전부 정인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많이 많이 드세요.”
“너는?”
“어…. 저는 오늘 계란 너무 많이 먹어서 좀 물려요. 고기도 좀 드시고요.”
“응.”
호진이 접시를 밀어 줄 때마다 반찬을 하나씩 집어 먹다 보니 슬슬 배가 불렀다. 아찔한 속세의 맛에 반쯤 눈이 돌아가 있던 정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호진을 흘끔거렸다. 깨작거리며 정인이 밥 먹는 모습만 보고 있던 호진은 그제야 씩 웃으며 작은 사발 하나를 건넸다.
“이제 막걸리도 한번 드셔 보세요.”
“이걸로 마시는 거야? 신기하네.”
“…설마 막걸리도 처음이에요?”
“응.”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땐 가끔 아빠들이 손톱만큼 따라 주는 와인을 얻어 마셔 본 게 전부였고, 성인이 되던 시점에는 외국에 있었기에 이런 건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상아색 막걸리가 찰랑찰랑 차오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호진이 픽 웃었다.
“…그럼 형은 이제 평생 막걸리랑 치즈계란말이 볼 때마다 제 생각 하시겠네요.”
적당한 선까지 차오른 사발을 쥔 채 정인은 눈을 들었다. 소년처럼 맑게 웃고 있는 호진의 얼굴이 보였다.
“…….”
왜 너는 자꾸만 당연하다는 듯 미래를 말할까.
언제 죽어 없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내 미래는 그 어떤 작정도 계획도 없이 새하얗기만 한데.
150에 심박수를 맞춰 살겠다느니, 평생 막걸리와 치즈계란말이를 보면 네 생각을 할 거라느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어째서 나에게 미래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해?
“짠 할까요?”
“…응.”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에 쥔 사발 안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셔 보는 술이 들어 있었다.
허공에서 사발이 부딪쳤다. 정인은 막걸리 한 모금을 입술 사이로 머금었다.
“맛있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앞으로 어떤 모습의 미래를 살게 되든, 정말로 그 말마따나 살아 있는 한은 평생 막걸리를 볼 때마다 유호진을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한 번도 가정해 본 적이 없던 미래에 처음 생겨난 게 고작 막걸리 따위라고 생각하니 이 삶이 더없이 우습게 느껴졌다. 정인은 깨끗하게 빈 잔을 새로 채웠다.
“어어, 그렇게 드시면 취해요.”
“괜찮아.”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기억해야 할 사람이 생긴다는 건, 언젠가 죽을 만큼 아파질 거란 소리니까.
늘 그랬으니까. 정말이지 사는 내내 단 한 번을 비껴간 적이 없었으니까.
뽀얀 뺨에 홍조가 올랐다.
“이모…. 저 이거 하나만 더 주세요.”
정인은 사발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빈 막걸리 병을 흔들었다. 호진은 얼른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아니에요, 안 주셔도 돼요.”
사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냉장고 앞에 서서는 팔짱을 낀 채 호진과 정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어떻게 하라고?”
“아, 그냥 주세요. 가게에 있는 거 다 주세요.”
정인은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고는 몇 방울 남지 않은 막걸리를 탈탈 털어 제 사발에 부었다.
“기가 막히네…. 왜 여태까지 이런 걸 모르고 살았지?”
“형, 이제 정말 안 돼요. 더 마시면 내일 힘들어요.”
막걸리를 마시고 취하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밤막걸리의 고장에서 나고 자란 호진은 이미 이런저런 잔치에 불려 다니며 지옥을 경험해 본 바가 있었다. 그리고 호진이 울상 지으며 만류하자 정인은 꼬인 발음으로 투덜거렸다.
“야, 유호진. 너 천재야?”
“…네?”
“네가 그렇게 천재냐구…. 내가 내일 힘들지 아닐지 네가 어떻게 알아, 척척박사야? 아님 척척 석사야? 지도 아직 학부생이면서 아는 척하기는….”
이미 눈이 많이 풀려 있었다. 곱게 진 쌍꺼풀이 끔뻑이는 것을 보며 호진은 웃음을 꾹 참았다.
정인은 호진이 막연히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술에 약했다. 마시면 마시는 대로 얼굴에 바로 티가 나는 데다 심지어 본인이 취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여웠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겠는가, 잘 익은 제철 복숭아가 횡설수설 말도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귀여워도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종목이 종목이다 보니 이제는 정말 이쯤에서 말려야 했다.
“이모, 저희 계산 좀 해 주세요.”
“어어?”
호진이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호진아아.”
정인이 호진의 이름을 불렀다. 다 녹은 설탕 같은 목소리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커다란 창이 확 꽂히는 듯한 느낌에, 호진은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한 병만 더 마시자, 응?”
“…….”
“딱 한 병만.”
정인이 손을 뻗어 호진의 옷자락을 쥐었다.
“으응?”
사월 복사꽃처럼 웃으며 살살 흔드는 손길에 애간장이 사르륵 녹았다. 하지만 정인은 이미 너무 취해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정말로 온 세상의 막걸리를 전부 사다 안겨 주고 싶지만, 내일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안 돼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펄펄 끓어오르는 한숨을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치사해.”
“다른 날 또 마시면 되잖아요.”
“…너 미워.”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발갛게 익은 얼굴이 폭 떨어졌다. 그에 기어이 호진은 견디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안 미운 거 다 알아요.”
“…….”
그러자 정인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일어나세요. 집에 데려다드릴게요.”
아무 말 없이 그저 물끄러미 바닥만 보는 정인의 눈높이로 내려앉아 눈을 맞췄다.
“미안해.”
입술만 달싹이던 정인이 불쑥 사과했다.
“네?”
가느다란 속눈썹이 깜빡였다.
“너 밉다는 말, 사실 진심 아니야. 그냥…. 내가 못되게 말한 거야.”
“에이, 알아요.”
어쩌면 이렇게 착할까.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꽁꽁 싸매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이렇게나 무른 사람이다.
호진은 흐흐 웃으며 정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정인은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술병을 흔들어 놓고서는,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축 늘어져서는 미동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갈 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이모, 저 조금만 도와주세요.”
“떡이 됐네, 그냥 떡도 아니고 아주 개떡이 됐어.”
사장은 끌끌 혀를 차면서도 호진이 정인을 업는 것을 도와주었다. 호진은 으쌰 하고 정인을 추슬러 업은 뒤 반짝이는 거리로 나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 늘어진 팔이 맥없이 흔들렸다.
혹시나 정인이 뒤로 넘어져 다칠까 봐 호진은 허리를 잔뜩 굽히고 걸었다. 무게 중심이 허리에 걸려 있으니 이론적으로는 응당 아파야 정상인데, 어찌 된 일인지 조금도 아프거나 힘들지가 않았다. 그저 좋기만 했다.
“이래서야 오늘은 운동도 못 하겠네요.”
“…미안.”
목덜미에 코를 콕 박은 정인이 또 한 번 사과했다. 호진은 천천히 제자리에 멈춰 섰다.
“형은 뭐 그렇게 미안한 게 많으세요.”
“그러게.”
묻는 말에, 등 뒤에서 작은 한숨이 터졌다.
“…난 왜 이렇게 미안한 게 많을까.”
시끌벅적한 밤의 소음 사이로 떠오른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닿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물음이었다.
“착한 사람이라서요.”
“…….”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일마저 하나하나 미안해할 만큼, 착한 사람이라서요.”
사방에 피어난 진달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저는, 그런 형이….”
좋아요.
차마 바로 꺼내 놓을 수 없는 마음은 일단 한 번 접기로 했다.
“…멋지다고 생각해요.”
“정말?”
돌아오는 질문이 맑았다. 호진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최정인은 무지무지 착하고 멋진 사람이에요.”
“흐응…. 그렇구나.”
어느샌가 익숙한 골목이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과 건물 사이로 뽀얀 반달이 보였다. 호진의 등에 업힌 정인은 이따금 길게 하품했다. 동그랗고 따뜻한 소리에 가슴속이 간지러웠다.
호진은 실실 웃으며 건물로 들어섰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정인의 방문을 열었다. 그다음에는 업혀 있는 사람에게 대고 허락을 구했다.
“잠깐만 들어갈게요.”
“그러세요….”
조심조심 정인을 침대에 눕혔다. 그러자 정인은 발그레한 볼을 하고는 그대로 벽을 향해 뒹굴었다. 막 벽에 부딪치기 직전, 호진은 겨우 그를 붙들었다.
“큰일 날 뻔했네.”
조심스럽게 목 아래에 베개를 받치고, 발치에 굴러다니던 이불도 펼쳐 덮어 주었다. 정인은 당연하다는 듯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형.”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인을 불렀다.
“혀엉.”
벌써 곯아떨어졌는지 정인은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마음껏 정인을 구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호진은 침대에 턱을 괴고 그를 쳐다보았다.
“…삼신할머니가 형을 만들 땐 조금 더 신경 쓰셨나 봐요.”
가느다란 세필로 그려 놓은 그림처럼 곱다.
“얼굴도 마음도 다 예쁘게 만들어 보내셨네….”
정작 막걸리 두 병을 전부 비운 건 정인인데, 만취한 사람을 보고 있자니 괜히 저까지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슬슬 무거워지는 눈을 비비며 정인의 손등에 천천히 이마를 기댔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손마디마다 무게를 실어 꾹꾹 누르듯 얼굴을 붙이다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어….”
정인이 맨정신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제가 한 짓에 화들짝 놀란 호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달칵, 불을 끄고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정인의 손마디에 닿았던 자리마다 열꽃이 피는 것만 같았다.
***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정인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자취방의 풍경이 아니었다. 포근한 햇살, 참고서와 공책, 바람에 흩날리는 포스트잇, 그리고 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있는 손.
‘…….’
아, 또 꿈이구나. 깨닫기 무섭게 절로 입이 열렸다.
‘됐어. 나가면 될 거 아냐.’
이야기는 언제나와 같은 플롯으로 진행됐다. 시야가 뒤틀리고, 빠른 걸음으로 원경과 정훈을 지나친 정인은 그대로 현관을 나서며 세게 문을 닫아 버렸다. 그와 동시였다. 문 너머에서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인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렸다.
반쯤 열린 문틈 너머에는 여전히 아빠들이 서 있었다. 그러나 뭔가가 이상했다. 문 너머의 풍경이 한 장의 종이로 변해 있었다.
‘어?’
사실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낡은 프린터로 인쇄해 놓은 듯 딱딱하고 흐릿해진 장면 속, 원경과 정훈의 가슴을 지나 쭉 찢어진 흔적을 바라보며 정인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나 때문에 찢어진 거지?
큰 아빠도 작은 아빠도, 내가 저렇게 만들어 버린 거 맞지?
“허억….”
번쩍 눈이 뜨였다. 심장이 터질 듯 벌컥거렸다. 정인은 두근대는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빠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머리가 너무 아팠다.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처럼 아팠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질끈 눈을 감았다. 빨갛고 파란 점들이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윽….”
그냥 숙취라기엔 조금 지나치다 싶은 수준의 통증이었다. 슬슬 올라오는 몸살기에, 정인은 쓰러지듯 바닥을 기어가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는 지난번 크게 앓은 뒤로 혹시 몰라 사다 놓은 히트 사이클 자가 진단 키트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겨우 들어 포장을 뜯었다. 손가락 끝으로 키트를 누르고 기다리자 액정 화면 위로 숫자가 깜빡거렸다. 0에서부터 시작한 숫자는 곧 무서운 속도로 치솟았다.
“…아, 미치겠네.”
기준치는 고작해야 50에 불과하다. 그러나 키트 속의 숫자는 80, 90을 넘기다 못해 에러 메시지를 띄우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분명 얼마 전에 지나갔는데, 왜 또 시작된 거지?
“아, 윽.”
눈을 뜨자마자 들이닥친 고통이 정오를 넘기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숙취와 제대로 겹친 히트 사이클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의 통증을 몰고 왔다.
직전의 히트 사이클에서 약을 과다 복용한 게 문제가 됐는지, 지금은 아예 억제제가 듣질 않았다. 몇 번이고 속을 게워 내는 동안 열은 오를 대로 올랐는데, 그 와중에 정신은 또 이상하게 또렷했다.
“…하아.”
입을 열 때마다 억눌린 숨소리가 샜다. 반쯤 탈진한 정인은 힘없이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하도 울어 이미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고, 낡아 빠진 장판은 손톱자국으로 가득했다.
정인은 제가 남긴 손톱자국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텅 빈 방 안의 풍경을 훑는데, 볕 드는 창가에 놓인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하늘 반듯하던 식물의 잎과 줄기가 전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물을 안 줬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손에도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꾸만 몸이 미끄러졌다.
책임져야 할 생명이라곤 순하기 그지없는 화분 하나가 전부인데도 그걸 못 해 기어이 이 사달을 내다니. 다 죽어 가고 있는 꼴을 빤히 보면서도 물 한 컵을 부어 주지 못하는 처지가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났다.
“아, 아윽, 하….”
정말 너무 아팠다. 지난번보다 더 아픈 것 같았다. 고통에 질린 채, 정인은 얼마 전의 히트 사이클을 떠올렸다. 눈이 뒤집힐 만큼 아프다가 하루 만에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던.
‘알파의 페로몬으로 진통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거,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때 호진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다는 게 떠올랐다.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 정인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덜덜 떨며 호진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인가 신호음이 울리고,
- 형, 일어나셨어요?
싸늘한 기계 너머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러나 정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정말 도와 달라고 해도 되는 걸까?
많이 속상해할 텐데. 숨 한 번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할 텐데. 결국엔 호진이도 나 때문에 슬퍼할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하니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 두통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이런 걱정을 하게 만들기엔 미안할 만큼 따뜻한 목소리였다.
“…응. 괜찮아.”
정인은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개똥이가 아픈 것 같아. 시들시들해.”
- 개똥이요? 아, 싱고니움?
떨리는 숨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이 찰 때마다 핸드폰을 멀리 떨어트렸다.
- 되게 잘 사는 친구래요, 조금 말라도 물 주면 바로 살아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응.”
정작 도와 달란 말을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전화를 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일 땐 그렇게도 견디기가 힘들었는데, 호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이 됐다.
참 신기한 사람이야.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 줄이 서서히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정인은 눈을 감았다.
***
멀리 정우가 손짓하고 있었다. 호진은 전화 너머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라는 뜻이었음을 알아본 정우는 호진의 타월까지 챙겨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로커 룸 안에는 호진만이 남았다.
“형, 오늘은 뭐 하실 거예요?”
- …글쎄.
정인이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건 처음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두 번째지만, 처음은 호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건 것이었으니 카운트하지 않기로 했다. 하여튼 이건 평생 가지고 갈 만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운동하실 수 있어요?”
- 너 또 올라오게?
눈 뜨자마자 식물부터 걱정하는 걸 보니 다행히도 힘들 만큼 숙취를 겪는 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열심히 마신 막걸리가 없던 술이 되는 건 아닌지라 정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게 또 나름대로 매력 있어 호진은 실실 웃었다.
“오늘까지만 올라가고 내일부턴 또 운동 열심히 할게요.”
- …응.
허튼짓하지 말라며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웬일로 정인이 쏘아붙이지 않았다. 호진은 바보같이 웃어 버렸다.
“진짜 시간 내 주실 거예요?”
- 응.
“그럼 저녁도 같이 먹을까요?”
- 응.
“…커피는요?”
- ….
단답이 이어지다 뚝 끊겼다. 커피까진 너무 나갔나 싶어진 호진은 얼른 정인에게 인사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이제 훈련 가요, 이따 뵐게요.”
그와 거의 동시였다. 수영장으로 떠났던 정우가 달려오더니 문틈으로 빼꼼히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호진, 빨리 나오래.”
“아…. 응.”
핸드폰을 갈무리한 호진은 곧장 몸을 돌려 미니 정인이를 바라보았다.
“열심히 하고 올게요.”
보드랍고 예쁜 돌고래 인형의 이마에 입 맞춘 후에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러나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새 습관이었다.
***
오후 훈련이 전부 끝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호진은 훈련이 끝나자마자 피곤한 줄도 모르고 곧바로 차를 몰아 서울로 향했다.
“형.”
생전 하지 않던 과속까지 해 가며 열심히 밟았지만 퇴근 시간을 피해 갈 수는 없어, 막상 도착하니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 있었다. 어둑어둑한 센서 등 아래 선 호진은 조심스럽게 정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몇 번이고 두드려도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봐도 묵묵부답이었다.
“…집에 없나?”
이게 곧 시험 기간이니 어쩌면 도서관에 갔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호진은 정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다릴게요ㅎㅎ 집에 오시면 알려 주세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제 방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태블릿 PC와 새 논문을 나란히 펼쳐 놓고 제목부터 차근차근 읽었다. 이번에는 LGS 완치 사례가 수록된 논문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첫 줄부터 모르는 단어가 가득했다.
“음….”
지끈지끈 골이 아파진 호진은 금세 정인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운동을 한 다음에는 뭘 먹이면 좋을까. 또 백반집에 가면 되려나. 이러다 정말로 커피도 같이 마실 수 있게 되면 어떡하지. 카페는 아직 알아본 데가 없는데. 형은 어떤 분위기를 좋아할까, 지금이라도 유영이한테 물어볼까….
아니지, 그래도 처음으로 형이랑 같이 커피 마시러 가는 건데 다른 친구에게 기댈 수는 없지.
“…….”
호진은 논문을 뒷전으로 한 채 빠른 탐색을 시작했다.
번잡한 곳은 싫어할 것 같아 조용해 보이는 곳 위주로 하나씩 눌러 보았다. 범위를 많이 좁혔는데도 은근히 선택지가 줄지 않아 손가락이 바빴다.
디저트가 맛있는 곳, 신선한 원두를 볶아 주는 곳, 사진 찍기 좋은 곳, 테마가 신기한 곳. 하여튼 별의별 카페가 다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든 공간이 전부 정인과 잘 어울렸다. 정말이지 이중 어디에 앉혀 놔도 예쁠 것 같았다.
“하긴, 허허벌판에 혼자 덜렁 서 있어도 그렇겠지.”
피식피식 웃으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불현듯 문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호진은 휙 고개를 돌렸다.
“형이다.”
부리나케 운동화를 꺾어 신고 문밖으로 나섰다. 정말로 누군가가 건물에 들어서고 있었다.
“형!”
호진은 한달음에 그를 향해 달려갔다. 바쁜 발소리를 따라 센서 등이 툭툭 켜졌다.
“…어?”
“어?”
그러나 마침내 호진이 마주하게 된 사람은 정인이 아니었다.
“…유호진 선수 아니에요?”
호진의 얼굴을 알아본 상대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뜻밖의 얼굴에 얼음처럼 굳어 있던 호진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유호진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인의 가족이었다.
코트를 걸친 어깨에서부터 뚝 떨어지는 단정한 선에 새하얀 얼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눈꼬리와 다갈색 눈동자에 이르기까지.
정인보다는 조금 연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멀리서도 한눈에 정인이라 착각했을 만큼 모든 것이 똑 닮아 있었다. 미래의 정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왔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실례지만 혹시 정인이 형의 형이세요?”
“…아.”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우아한 사람이었다. 차분한 눈빛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단박에 호진을 압도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 말에 남자는 하얗게 웃었다. 그 모습마저도 호진이 알고 있는 정인과 너무 닮아 신기하기까지 했다.
“정인이 아빠예요.”
“헉.”
호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벌벌 떨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요….”
“하하하.”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반가워요, 유원경이에요.”
“우와, 저…. 저도 유 씨인데. 제 이름은 유호진이에요. 아 참, 아까 말씀드렸죠….”
아, 정말이지 그냥 이쯤에서 먼지가 되어 버리면 좋으련만.
너무나도 바보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원경은 벌벌 떠는 호진을 보며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영광이에요. 이렇게 대단한 선수를 실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우리 정인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그게, 저. 제가 더 영광입니다. 학교에서 알게 됐습니다. 제가 동생이에요.”
“…정말요? 정인이보다 어린데 이렇게 키가 커요?”
원경이 흘끔 눈을 들어 호진의 머리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멍하니 서 있던 호진은 부리나케 그의 앞에서 비켜섰다.
“아니다. 저,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제 방에서 잠시만 계세요.”
“네?”
“정인이 형 지금 도서관 간 것 같거든요. 이 주변에는 기다리실 곳이 마땅치 않아서…. 누추하신 분을 이렇게 귀한 곳에 모시자니 조금 송구스럽습니다만 얼마든 편히 계셔도 됩니다.”
너무 긴장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주절주절 지껄이며, 호진은 제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청소를 게을리하는 편은 아니라 방이 아주 못 보일 꼴은 아니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원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이어지는 말에 호진의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정인이 지금 병원에 있어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생각보다 작은 방이었다.
“…….”
원경은 느리게 정인의 방을 둘러보았다.
다 무너져 가는 책상에는 볼펜 몇 자루가 굴러다니고, 침대 위에는 이불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정인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핸드폰은 이불 속에서 나왔다. 급히 해야 할 연락이 있다며 눈을 뜨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났다.
핸드폰과 함께 가져다 달라 부탁한 몇 권의 책을 챙겨 돌아서려는데, 창가에 시들시들한 화분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물 한 번만 주면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경은 그것을 싱크대로 가져가 조심스럽게 물에 적셨다. 무슨 식물인지 궁금해 한참 살펴봤지만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주영 씨한테 받아 왔나?”
화분 아래의 구멍으로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낡고 작은 방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보며 현관을 나섰다. 문 앞에는 호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 계속 여기 있었어요?”
“아버님, 혹시….”
“응?”
“정인이 형 입원한 게 몇 시쯤이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원경은 병원에서 연락을 받은 시간대를 떠올렸다.
“음, 아마 한 시 조금 넘겨서였을 거예요.”
“…한 시요?”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정인이 응급실로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무슨 정신인지도 모른 채 정훈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이번에도 히트 사이클에 심하게 앓은 모양이었다. 급격히 떨어지는 심박수를 감지한 시계가 강제로 응급실에 신호를 보내 준 게 천만다행이었다. 빨리 조치를 취한 덕에 다행히도 금세 안정을 찾긴 했지만, 현욱이 채워 놓은 시계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를 떠올리니 새삼 고마워서 현욱이 있는 곳으로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인이 이상한 이름을 써 가며 병원에 다닌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음먹고 캐내려 한 건 아니었지만, 국내에 얼마 되지도 않는 LGS 케이스가 정인이 귀국하자마자 서울 여기저기서 다발적으로 발생해 버리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
너무나도 착한 아이라서, 천사 같은 아이라서. 가족들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그 작은 몸으로 참 열심히도 웅크리고 산다.
누굴 닮아 그렇게 고집이 센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백날 말해 봐야 듣질 않는다. 오히려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들려고만 한다.
어디에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동그랗게 누워 있었을 아이의 등을 상상하니 가슴이 천 개의 조각으로 낱낱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원경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 아버님.”
까만 눈동자에 담뿍 물든 걱정이 여전했다.
“혹시 면회가 가능하다면…. 저도 정인이 형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물론이죠.”
원경은 활짝 웃었다.
“같이 가요.”
“…감사합니다.”
호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커다란 몸을 접어 원경의 차에 올랐다. 못해도 족히 190은 넘을 것 같은 거구가 올라타자 차가 조금 기우는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원경은 병원을 향해 차를 몰며 간간이 호진의 모습을 살폈다.
키도 훌쩍 크고, 떡 벌어진 어깨에 온몸이 굉장히 탄탄해 보였다. 운동을 업으로 하는 선수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뭘 먹고 이렇게 건강히 잘 컸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정인은 아주 어릴 적부터 썩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인이, 학교에서는 어때요?”
풀 죽은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게 신경 쓰여 물었다. 호진은 얼른 허리를 바로 세웠다.
“…아, 정말 멋진 형이에요. 공부도 삶도 늘 열심이고.”
아무래도 처음 만나는 친구 부모님과 단둘이 가는 길이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적잖이 긴장되는지 바짝 기합이 들어가 있는 게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원경은 부드럽게 호진의 말을 따라 했다.
“정인이가 멋진 형이에요?”
“네에.”
정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내내 먹구름만 껴 있던 호진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어디가 그렇게 멋진데요?”
“전부 다요. 그중에서도 마음이 강한 게 제일 멋있어요. 눈앞을 가리는 것들에 현혹되거나 휘둘리지 않고, 매사에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 너무너무 똑똑하고 대단해요.”
기운이 참 깨끗한 사람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우성 알파인데도 정인이 제 건물에 들일 만큼 가까이 두는 이유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어려서 들뜬 마음을 숨기지는 못하고 그대로 털어놓지만, 내뱉는 말의 마디마다 진중하고 바른 성품이 느껴졌다.
정인이 혼자 외로이 지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런 아이가 정인과 이웃하여 산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심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도 어찌나 다정한지. 부드럽고 유한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떤 순간에는 놀라울 만큼 담대해지고…. 좋은 면이 하도 많아서 어디가 멋지냐 물으시니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한 72시간쯤 열심히 말하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아버님 주무셔야 하니까 좀 어렵겠죠….”
그리고 아마도,
이 아이는 정인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정인이 형은 정말, 백마 탄 왕자님 같아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도 끝까지 조목조목 정인의 장점을 짚은 호진은 발갛게 달아오른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에 원경은 또 한 번 웃었다.
정인의 마음이야 알 길이 없으나, 원경은 고작 30분 남짓을 본 게 전부인 유호진이라는 사람이 썩 마음에 들었다. 어느 모로 봐도 반듯하고 선한 청년인 것 같았다. 물론 정훈의 평가는 다르겠지만.
“아 참, 전화 한 통만 할게요.”
“넵.”
그러잖아도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눈이 뒤집혀 있는데, 돌도 씹어 먹을 나이의 우성 알파가 정인의 주위를 얼쩡거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간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행여나 애꿎은 어린애를 잡도리할까 무서워, 원경은 주차를 마치자마자 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예요?”
- 잠깐 집에 들렀어. 병원이야?
“응, 이제 올라가려고요.”
다행히도 정훈은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원경은 핸드폰을 귀에 딱 붙인 채 호진에게 이제 내려도 좋다 손짓했다. 통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1밀리미터씩 꼬물꼬물 조용히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또 웃음이 났다.
“언제 올 거예요?”
- 30분쯤 후에 출발할 거야. 로비에서 볼까?
“그래요.”
열심히 꼬물거리던 호진이 마침내 차를 벗어났다.
- 조금 이따 봐. 사랑해.
“나도요.”
언제나처럼 사랑한다는 말로 통화를 마쳤다.
“별관 701호로 가면 돼요.”
“아버님은 같이 안 가세요?”
원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편하게 이야기 나눠야죠.”
그러고는 정인이 부탁한 책과 핸드폰을 종이봉투에 착착 담았다.
“미안하지만 가는 김에 이것들도 좀 전해 줄래요? 급하게 연락할 데가 있는지 자꾸 핸드폰을 찾아서.”
“…아.”
“그리고 30분 지나면 바로 떠나야 해요. 절대로, 단 1분이라도 넘기면 안 돼요.”
빠진 게 없는지 확인한 뒤에는 혹시 몰라 한 번 더 단단히 당부했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호진은 끝까지 원경을 향해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그리고 원경은 빠른 걸음으로 병동에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예쁘기도 해라.”
한참 어린 지금도 저렇게나 반듯하니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분명 더더욱 단단하고 멋진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오래도록 정인이와 사이좋게 지내 주면 참 좋을 텐데, 조금은 이르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
정인은 제 왼쪽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삼촌이 준 건 평범한 스마트워치가 아니었다. 심박수가 정상 수치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바로 응급실에 콜이 간 것이다.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나긴 했다만, 별것도 아닌 일로 아빠들이 걱정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영 편치가 않았다.
“이제 와서 내다 버릴 수도 없고….”
시계가 정인을 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훈과 원경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늘 이 시계를 차고 다니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진작 빼 놓고 다닐 것을 그랬다며 뒤늦게야 후회해 봐야 이제는 별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고 병실 안으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당연히 원경이 들어오리라 예상하고 있던 정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혹시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몇 번인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쭈뼛거리며 정인에게로 다가서는 사람은 분명 호진이었다.
“뭐야. 네가 왜…. 여길 어떻게 왔어?”
“아버님 만났어요, 자취방 복도에서.”
아빠를 만났다고?
호진을 알고 지낸다는 게 어디 책잡힐 일은 아닌데도, 원경이 호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민망함에 가슴이 뜨끔해졌다. 정인은 얼른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호진이 종이 가방 하나를 건넸다.
“부탁하신 핸드폰이랑 책이요.”
“아….”
사실 핸드폰은 호진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필요한 거였다.
가물가물한 기억에 따르면 정신을 잃기 직전 호진과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것 같았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와중에 혹시라도 호진이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을까 봐, 실은 조금 전까지도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간이 의자를 펴 앉은 호진이 낮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응, 이제 괜찮아.”
“…….”
아득한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가만히 정인의 발치만 바라보던 호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형.”
조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훈련을 마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기, 호진아.”
전화 같은 거 하지 말걸.
하루 종일 힘들었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미안해.”
더듬더듬 사과하자, 호진은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길게 이어지는 한숨 소리를 들으며 정인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기절했거든. 그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그래도…. 적어도 전화를 끊기 전에는 오늘 보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형, 제발….”
호진이 정인의 말을 끊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하얀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렀다.
“어떻게, 도대체 왜…. 형이 뭐가 미안해요.”
그는 정인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원망하듯 울먹이다가, 기어이 끅끅 삼키던 울음을 터트렸다.
“왜 이렇게 미련하세요, 정말….”
그러면서도 꼭 붙들고 있던 정인의 손을 한 번 더 단단히 고쳐 쥐었다.
너무 속상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호진은 정인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당장 숨이 넘어갈 것처럼 힘들어도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 고집을 피우는 사람이 오죽 아팠으면 입원까지 했을까. 그러면서도 얼굴을 보자마자 하는 말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단다. 안쓰러울 만큼 순해 빠져 가지고는 고작 그까짓 게 미안하단다.
정신이 들고 핸드폰부터 찾은 것도 아마 나 때문이겠지. 그놈의 약속이 뭐라고, 얼마나 마음에 걸렸으면 편히 쉬지도 못해.
“…죄송해요.”
“뭐가.”
“전화까지 해 주셨는데, 아픈 거 몰라서요.”
왜 몰랐을까. 정말 어쩌면 그토록 까맣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정인이 입원한 시간은 호진과의 통화가 마무리된 시간과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통화 중에 기절했다는 말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그건 정인의 마지막 구조 요청이었을 것이다.
정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팔자 좋게 커피숍 사진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죽을 것 같았다.
“…형. R1형이시죠, 지난번에 억제제 드리면서 봤어요.”
너무나도 속상했다. 하지만 정말로 호진을 절망하게 만드는 건,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늘이야 어떻게든 저물겠지만 언젠가 정인은 또 아플 것이다. 그리고 아픔을 참아 내는 일에 인이 박인 이 사람은, 아마 다음번에도 혼자 전부를 견뎌 내려 할 것이다.
호진은 참담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인은 아무 말 없이 호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도 R1형이에요. 그리고 우성이에요.”
떨리는 숨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푹 젖은 얼굴을 거칠게 닦아 냈다.
“제 몸 써 주세요. 설령 형이 우성이 아니셔도 제 페로몬이면 커버할 수 있대요.”
“…….”
“그럼 당분간은….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을 거래요.”
어쩌면 이로써 모든 게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
“재촉하지 않을 테니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우리가 이대로 어색해지면, 잔뜩 기대하던 봄꽃도 내일의 날씨도 모두 없던 일이 될지도 모른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래도 당신이 혼자 앓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그저 기쁘기만 할 것 같아.
“혼자 아프지 마세요, 제발….”
한계까지 차오른 둑이 기어이 다시 터져 버렸다. 창피함도 잊은 채 엉엉 울며, 호진은 정인의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
한참을 울던 호진이 물러나자 다시 어둠이었다.
‘제 몸 써 주세요.’
아마 섹스를 하자는 거겠지.
성적인 욕구를 풀기 위해 던진 제안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토록 서러운 얼굴로 엉엉 울며 하는 말에 다른 마음이 끼어들 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호진은 분명 온전한 진심으로 정인이 나아지기만을 원하는 것 같았다.
참 고마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말도 안 되는 얘기라 아예 현실감 자체가 없었다.
“…….”
가벼운 키스 정도를 상상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직도 페로몬이 강한 알파의 곁에 가면 가끔씩 속이 뒤집히고 환상통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페로몬 덩어리를 교환하는 일을 과연 내가 멀쩡히 버텨 낼 수 있을까.
침대 시트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던 정인은 문득 핸드폰을 들었다. 멀뚱멀뚱 빈 화면만 바라보다 인터넷을 켰다.
검색창 위에 섹스, 라는 글자를 적어넣고 엔터를 누르자 성인 인증을 하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뭐야….”
열심히 번호를 적었더니 다음에는 통신사를 선택하란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통신사를 선택했더니 이번에는 또 인증 번호를 받아야 한단다. 그래도 꿋꿋이 성인 인증을 마치고 한 번 더 검색해 보았다. 섹스의 개념을 정리해 놓은 페이지가 우르르 떠올랐다. 세계 제일의 검색 엔진은 혹시 이것을 찾으셨냐며 친절하게도 ‘성교’라는 단어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흠.”
섹스 로봇, 첫 섹스를 앞둔 커플의 고민, 섹스와 연애의 상관관계…. 스크롤을 아무리 내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다들 이렇게 섹스에 관심이 많나, 아니면 한국 사람들만 유독 이러는 건가. 혹시 몰라 영어로도 쳐 보았다. 한글 검색 결과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섹스를 주제로 한 각양각색의 포스트가 잔뜩 쏟아졌다.
정인은 개중 하나의 링크를 눌렀다. <15 Health Benefits of Sex>, 섹스와 건강에 관한 아티클이었다. 면역 체계와 혈압, 스트레스와 심장병. 심지어 암 발병 확률까지 낮춘다며, 저자는 마치 섹스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된다는 듯 찬양하고 있었다.
“…진짜 그랬으면 다들 섹스에 미쳐 살겠지.”
비웃으며 화면을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새 탭이 등장하며 웬 동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아, 흣, 하앙…. 아흥!”
날카로운 신음 소리가 병실을 가득 메웠다.
딱히 이런 쪽에 흥미가 없는 탓에 동태 눈깔로 멍하니 그걸 쳐다보고 있는데, 별안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정인아. 큰 아빠 지금 오는 중인데, 저녁….”
“앙! 앙! 앙!”
“…아.”
잠시 문가에 멈춰 서 있던 원경은 문워크를 추듯 그대로 뒷걸음질 쳐 병실을 빠져나갔다.
“아빠!”
정인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링거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섰다. 그새 놀라운 속도로 복도 끝까지 멀어져 간 원경은 정인의 부름에 흘끔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이, 진짜.”
일이 꼬여도 뭐 이렇게 꼬여. 정인은 낑낑대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방금 건 말야,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게 절대 아니야. 내가 뭘 좀 잘못 눌렀거든? 영어로 검색하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어 버리잖아.”
“응.”
“…진짜 그냥 잘못 누른 거라니까? 내가 보려고 본 게 아니란 말이야.”
“그래.”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억울해진 정인은 팔팔 끓는 주전자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항의했다.
“아빠 너무해!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믿어. 우리 아들을 아빠가 안 믿으면 어떡해.”
원경이 웃으며 정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인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하여튼 큰 아빠 지금 오는 중이라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아니야, 난 나중에 배고파지면 먹을래. 아빠끼리 먼저 먹어, 그리고….”
원경의 발치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사과했다.
“…방금 전에는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하하하.”
원경은 나지막이 웃으며 두 손으로 정인의 볼을 감쌌다. 쪽, 소리가 나게 이마에 입 맞췄다.
“착한 내 새끼.”
예뻐 죽겠다는 듯한 눈빛 앞에, 그 애틋한 목소리에 너무 미안해졌다. 정인은 머쓱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 먹고 싶어지면 전화해. 알겠지?”
“응.”
마지막까지 정인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원경이 돌아섰다. 정인은 링거대를 움켜쥔 채 한참을 그대로 서서 원경의 등을 바라보았다.
“…….”
나는 비겁한 사람이다.
멀쩡히 굴러가는 오늘을 헤집어 오래 묵은 상처를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렇게 큰 상처를 입혀 놓고도 이날 이때껏 사과 한 번을 하지 않았다.
나 편하자고 모르는 척 덮어 두는 거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사과하기 힘들어질 거란 걸 안다. 하지만 오늘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는 늦으면 안 되는데.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아빠의 상처가 아주 깊은 곳에 가라앉아 버렸다는 걸 분명 알고 있는데.
나의 상처는 모두가 살뜰히 보살펴 주었어도, 아빠의 상처는 누구도 쓰다듬어 준 적이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아빠는 못된 나를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형.”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본 곳에는 호진이 서 있었다.
“집에 간 거 아니었어?”
“못 가겠더라고요.”
눈가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나 이대로 가 버리면, 형이 혼자 또 미안해할 것 같아서.”
그는 당연하다는 듯 정인에게로 다가와 링거대를 쥐었다.
“일단 들어가요.”
등을 떠미는 손을 따라 병실로 들어섰다. 정인이 침대에 눕는 것을 확인한 호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 지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형, 혹시 다마고치라고 아세요?”
“그게 뭔데?”
“…모르시는구나.”
호진은 외계인처럼 팅팅 부은 눈을 접어 웃었다.
“요만한 크기의 장난감인데…. 그 안에 동물들이 살아요. 진짜 동물은 아니고 그림이긴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정인의 손바닥 위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주었다.
“배가 고파지면 밥 그림이 나오고, 똥을 싸면 똥 그림도 나와요. 그런데 가끔 그 안에 든 애들이 아플 때가 있어요. 그러면 화면 구석에 병원 모양 그림이 나와요.”
단정한 손톱이 긁고 지나간 자리가 간지러웠다.
“…형은 지금 그런 상태인 거예요.”
호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병원 모양 그림을 달고 있는 거예요.”
그가 그려 놓은 원을 따라 정인의 손안에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다마고치 속의 캐릭터가 아파한다고 그 애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있다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겠죠.”
“…….”
“형도 마찬가지예요. 형이 아픈 건, 잘못된 일도 미안할 일도 아니에요.”
이어지는 목소리가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제가 운 건 형이 아파서가 아니라, 형이 아픈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고 속상해서였어요. 그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만큼 속상했다고, 내 마음 좀 알아 달라고. 마치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정인은 꼼지락꼼지락 이불을 움켜쥐었다.
“…내가 말을 안 했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
“네가 미안할 일도 아니야.”
참 이상한 애다. 한참 어른 같다가도 금방 이렇게 애기 같아지네.
“…형이 그렇다니까 지금부터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은 해 볼게요.”
호진은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침대 위에 얼굴을 박더니, 이불자락에 얼굴을 푹 파묻고 웅얼거렸다.
“대신 형도 지금부터 제 말대로 생각해 주셔야 돼요.”
“…응.”
호진이 눈만 쏙 들어 정인을 바라보았다.
“그럼 따라 하세요. 최정인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
“…뭐?”
“얼른요, 똑같이 말해 주시기 전까지 저 여기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예요.”
끝끝내 고집스럽게 조르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정인은 못 이기겠다는 듯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최정인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
어쩐지 어색해서 한 번 더 말해 보았다.
“…최정인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
***
편의점 간판 아래 포충 등이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길을 잃은 풀벌레들이 이따금 그 아래를 지날 때마다 탁, 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정인은 편의점 바깥에 차려진 테이블에 앉아 유리 벽 너머로 호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마지못해 컵라면에 물을 받고 있었다.
링거를 달고 편의점까지 들어가기가 어려우니 컵라면 하나만 사다 달라는 말에, 호진은 차라리 김밥을 먹으면 안 되겠느냐며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결국 승자는 정인이었다. 정인이 끝까지 굽히지 않자 그는 잔뜩 울상을 지으며 그럼 사다 줄 테니 정말 한 입만 먹으라 신신당부하고는 발길을 뗐다.
“무슨 놈의 걱정이 그렇게 많은가 몰라….”
많이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섹스 이야기까지 오간 상대다. 그런데도 서로 별다른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그런지, 오히려 지금은 그와 키스하는 상상을 한 것에 놀라 밤을 새웠던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마음이 편했다.
물론 호진은 자신과의 밤을 진지하게 고려해 달라는 말 이후로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정인을 챙겨 줄 뿐이었다.
“진짜 바보야.”
모두에게 친절하고, 미련하리만치 착하다. 테마파크에 수두룩하게 깔린 전구 하나조차도 가만두질 못하고 고쳐 놓는 사람이니, 그 선한 성정에 남이 아픈 꼴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어쩌면 고작 컵라면 하나를 끓이는 일마저도 저토록 유호진스럽게 하는지, 그는 물을 다 받고 나서도 정수기 주위에 묻은 물방울을 전부 정리한 뒤에야 자리를 떴다.
매사 저렇게 순하고 성실해서 어쩌나. 한참 동안 호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인은 픽 웃었다. 그리고 금세 편의점을 빠져나온 호진은 컵라면과 함께 꼬마 김치 한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와서는 정인의 앞에 앉았다.
“정말 이걸 꼭 드셔야겠어요?”
호진이 한 번 더 물었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세요. 환경 호르몬이 얼마나 나쁜데요, 오늘 몸에 무리도 많이 갔을 텐데….”
“이제 정말 괜찮아.”
거짓말이 아니었다. 호진과 가볍게 산책을 하는 동안 언제 그렇게 아팠냐는 듯 컨디션이 확 좋아져서, 지금은 이게 정말 응급실에 실려 올 일이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진짜 진짜 조금만 드셔야 되는데.”
“됐어.”
정인은 들은 체도 않고 젓가락을 부러트렸다. 이어 얇은 뚜껑을 쭉 찢어 내자 스티로폼 그릇 안에 갇혀 있던 수증기가 퍼지며 고소하고 매운 냄새가 풍겼다.
“다른 것도 많은데 왜 하필 컵라면이에요?”
“맛있잖아.”
끝까지 투덜거리는 말에, 정인은 보란 듯이 면발을 휘저었다.
“두 달 동안 매일 이것만 먹은 적도 있어.”
“네?”
호진이 입을 떡 벌렸다.
“두 달을 컵라면만 드셨다고요?”
“응.”
열여덟의 봄쯤이었다. 한창 타인과 담을 쌓고 싶어 하던 때였고,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한국어도 영어도 사용하지 않는 하우스키퍼를 알아보던 중 아르메니아에서 온 아주머니와 연이 닿았다.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제법 친해져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간단한 잡담을 나누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해 주는 음식은 정인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선택권이 없었지.”
미안한 마음에 차마 내색하진 못했지만 당시 정인은 매일 종류만 바꿔 가며 나오는 치즈와 고기에 물릴 대로 물려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인이 운영하는 마트에 들러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든 것을 시작으로, 그날부터 중독자처럼 두 달 내내 질릴 때까지 컵라면만 먹었다.
한국에 있을 땐 쓸데없이 자극적이기만 한 음식이라고 생각해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한국 사람이라고 막상 물 건너에서 살다 보니 또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낯선 세상에 뚝 떨어져 있다가도, 아는 글자들이 박힌 포장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래도 가끔은.
아니, 사실은 매일. 보고 싶은 얼굴들을 잊지 않고 떠올릴 수 있었다.
“…여기다 덜어 드세요, 뜨거우니까.”
“고마워.”
호진이 종이 뚜껑을 컵 모양으로 곱게 접어 내밀었다. 정인은 호록호록 컵라면을 불어 먹었다. 역시 기억하던 맛 그대로였다.
“근데, 형.”
“으?”
뜨뜻한 면을 문 채 고개를 들었다.
“저…. 한식, 중식, 양식, 일식 다 할 줄 알아요.”
정말 뜬금없는 소리였다.
“다른 나라 요리도 말씀만 하시면 얼마든 배워 올 수 있고요.”
갑자기 요리 실력을 뽐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운을 떼나 싶어 쳐다보자, 호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랑 계속 친구 해 주시면…. 컵라면 말고 다른 선택지 많이 드릴 수 있는데.”
“무, 뭐라는 거야. 그렇게 요리하는 게 좋으면 수영 선수가 될 게 아니라 요리사가 됐어야지.”
이유도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인은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컵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호진은 제 발끝을 바닥에 툭툭 치며 고개를 숙였다.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그때였다. 그의 머리카락 위로 날벌레 한 마리가 앉았다.
“호진아, 잠깐만.”
내내 불규칙하게 깜빡이던 포충 등이 잠시 꺼졌다. 정인은 볼 한가득 면발을 욱여넣은 채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내 정인의 손끝이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순간,
“네?”
꺼져 있던 불이 환하게 들어오며, 호진의 눈동자 위로 일순 샛별 같은 불빛이 어렸다.
“…….”
풀벌레 한 마리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기어이 유명을 달리했다. 기어이 타 죽게 될 거란 사실을 몰라서, 그저 저 앞에 쏟아지는 빛이 예쁘다고 무식하게 달려들던.
“…벌레 묻었어.”
“고마워요.”
정인은 어정쩡하게 떠 있던 손을 재빨리 움직여 호진의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형, 아버님이랑 정말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이런 얘기 많이 들으셨죠?”
“응, 보는 사람마다 그러더라고. 그런데…. 헉.”
큰 아빠랑도 많이 닮았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훈이 병원으로 오는 중이라던 원경의 목소리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너 이제 집에 가.”
정훈은 가끔 무섭기까지 할 정도로 페로몬에 예민했다. 게다가 오늘은 ㅡ정인이 갑자기 입원까지 해 버렸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ㅡ 기분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본인도 알파면서 어찌나 알파를 미워하는지, 실은 발현하기도 훨씬 전부터 효준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알파와 어울리지 말라며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말했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성 알파와 어울리는 꼴을 들켰다간 괜히 죄 없는 호진에게까지 불똥이 튈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라도 그 사이에 호진의 향이 배지는 않았는지, 정인은 옷자락 여기저기를 킁킁대며 미친 듯이 온몸을 털어 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 시간 많은데.”
“이제 피곤해. 들어가서 좀 자려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진은 곧바로 테이블을 정리했다.
테이블은 순식간에 깨끗해졌고,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이었다. 깔끔하게 인사를 마치고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걸음을 떼지는 않았다.
“데려다드릴까요.”
“아냐, 나 혼자 갈 거야. 혼자 가야 돼.”
정인은 아무래도 먹다 만 컵라면이 조금 아쉬워서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훈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이제는 슬슬 올라가야 했다.
“형, 저 이제 가끔은 아무 일 없이도 전화하면 안 될까요?”
답지 않게 급한 목소리로, 호진이 물었다.
“형 잘 있는지 걱정될 것 같아서요. 이래서는 집중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훈련 전후로 안부 차 한두 번만 연락했으면 좋겠어요.”
“굳이 전화를 해야 돼? 문자 보내면 되잖아.”
“역시 그게 좋겠죠?”
그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럼 이제부터 안부 문자 정도는 자주 해도 되는 거죠?”
걱정돼서 저러는 사람에게 전화도 하지 말라고 해 놓고, 문자까지 보내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못 할 짓인 것 같았다. 순식간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정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돌아섰다.
“그러든가.”
“넵, 들어가세요.”
실실 웃고 있는 호진을 등진 채 걸음을 뗐다. 그 와중에도 풀벌레들은 끊임없이 전등 아래로 날아들어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끔찍하게 아프겠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진짜 싫다.”
마침내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나아가며 다짐했다. 그럴 일 따윈 없겠지만 혹시라도 다음 생에 풀벌레로 태어난다면 나는 절대 저렇게 바보같이 타 죽지 않겠다고.
“타 죽을 걸 정말 몰라서 저러나.”
제아무리 예쁜 빛이 나타나 눈앞을 맴돈다 해도, 결단코.
기어이 나를 아프게 태워 죽이고야 말 빛을 따라 걷지는 않겠다고.
***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정인이 헐레벌떡 병실 안에 들어선 지로부터 고작 5분 남짓이 지난 뒤였다.
어차피 호진과는 같이 마주 앉아 컵라면을 먹은 게 전부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일부러 창문을 전부 열어 놓았더니 그새 방이 조금 쌀쌀해져 있었다. 황급히 창문을 닫으며 정인은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최개떡.”
이어 들려오는 것은 역시 큰 아빠 정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노크를 해 놓고도 문을 열지 않았다.
“하….”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경에게 억울한 오해를 받았다는 것을 떠올린 정인은 제 발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모든 것을 전부 전해 들었는지, 그는 가볍게 정인을 스쳐 가며 한 마디 던졌다.
“뼈 삭는다.”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글쎄?”
“그래.”
믿어 주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건지. 정훈 또한 원경과 마찬가지로 들은 시늉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작은 아빠는?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
정인은 링거를 질질 끌며 그에게 따라붙었다.
“올라오는 길에 원장님 만나서 이야기 중이야, 곧 올 텐데….”
태아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정인을 돌봐 준 주치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훈은 막 포장해 온 듯한 초밥과 쿠키 박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별안간 서늘한 시선으로 병실을 한 번 둘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누구 왔다 갔어?”
뜨끔해진 정인은 그의 눈길을 피했다.
“응? 아무도 안 왔는데.”
“그런데 무슨 냄새가 이렇게 나.”
역시 이 정도로는 속여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인은 빠르게 눈치를 살피며 다른 말을 꺼냈다.
“저기, 근데 아빠. 나 이제 통증 없는 것 같아. 너무 멀쩡해.”
그러자 정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르륵 녹아내렸다. 그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하고 정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다행이네.”
“이게 응급실까지 와야 할 일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어. 이제 슬슬 퇴원해도….”
“그래도 퇴원은 정해진 날에 하는 거야.”
단칼에 잘라 낸 정훈은 음식을 하나씩 펼쳐 주었다. 초밥과 쿠키의 종류부터 음료까지 모두 정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쿠키는 밥 먹고 먹어.”
“몇 개?”
“세 개.”
어차피 답을 알고 있음에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까마득한 어릴 적부터 세 개로 설정되어 있던 정인의 하루 쿠키 할당량은 20년 가까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빠, 지구상 그 어떤 재화의 가치도 이 정도로 상승률이 박하진 않았어. 10년만 존버 하면 뭐라도 되는 게 정상이라고. 그런데 20년이 다 되도록 0퍼센트가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럼 이참에 어닝 서프라이즈 한번 내 보든가, 올해 안에 키 180 넘으면 하나 더 붙여 줄게.”
“…허, 참. 성장판 닫힌 지가 언젠데.”
어이가 없어 투덜대자 정훈은 일단 앉으라며 침대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가 젓가락을 꺼내 내밂과 거의 동시에 원경도 병실로 들어섰다. 정인은 통통한 연어가 올라간 초밥을 집어 먹으며 눈짓으로 원경에게 인사했고,
“왔어?”
정훈은 저에게로 다가서는 원경의 손을 잡고 습관다럼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한 장면이라, 정인은 그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초밥을 해치웠다.
“그런데 원경아.”
별안간 정훈이 원경을 향해 물었다.
“어디서 계속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혹시 정인이 담당 의료진 중에 알파도 있던가?”
“웁….”
정인은 쏟아질 뻔한 기침을 겨우 틀어막으며 원경에게 진심으로 간절하게 눈빛을 보냈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제발.
그리고 그를 찰떡같이 알아본 원경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한둘 정도는 있겠죠, 다른 환자들한테서 조금 묻어 왔을 수도 있고.”
“이형질 전문 병원이라면서 그런 거 하나 똑바로 관리를 못 해?”
정훈은 너무나도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사이클 당겨지는 것도 알파 페로몬 영향이라는데, 도대체 어떤 새끼가 자꾸 아픈 애를…. 잠깐. 최정인, 너 혹시 만나는 알파라도 생긴 거 아니야?”
“응?”
뜨끔해진 정인은 젓가락 끄트머리를 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분명 말했어, 알파 같은 거 만나지 말라고.”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흘리지 말고 똑똑히 새겨. 알파 따위가 페로몬 앞세워서 조금이라도 네게 상처가 될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내가 가만히 안 놔둬, 알아들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말하는 도중에 분노가 증폭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왜 애를 잡고 그래요. 오며 가며 가끔 스칠 수도 있는 거지.”
원경이 적당히 그를 커트해 주는 사이, 정인은 오물오물 초밥을 씹어 넘기며 잠시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저에게 가끔 올라오는 그러데이션 같은 분노는 역시 정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았다.
“오히려 자주 노출되면 익숙해져서 덜 예민해질지도 모른다니까 너무 걱정 마요. 효준이랑도 봐, 매일 놀러 다녀도 아무 일 없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효준이랑 붙어 지낼 땐 별일 없더니.”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 말에 원경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효준이랑은 분명 별일 없었는데.”
웃으며 하는 말속에 뼈가 든 것 같았다. 더는 마음 편히 초밥이나 주워 먹을 수가 없어서, 정인은 그만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아니…. 그러니까. 학교에는 조효준 말고도 알파 많단 말이야. 가끔 같이 밥 먹으러 가기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러자 정훈과 원경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정인은 아빠들과 초밥을 번갈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그게.”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원경은 호진을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정말 죽어도 절대 ‘그런 거’ 아니지만, 어쩌면 원경이 호진과 자신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당장 해명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바빠졌다.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알파랑 돌아다닌다고 해서 전부 다 그런…. 이상한 사이인 것도 아니고.”
우물쭈물 변명하는데, 내내 화가 난 듯한 무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정훈의 얼굴에 문득 미소가 드리웠다. 성큼 걸음을 떼 다가온 그는 천천히 정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밌게 지내나 보네.”
안도감으로 가득한 목소리에 그만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그래서 밥은 뭐 먹고 다니는데.”
“대부분 한식이지…. 백반 잘하는 집 있거든.”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뭐가 문제이기에 항상 이런 식일까.
아빠들은 항상 내 걱정뿐인데, 나는 그저 어떻게든 내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으로만 가득하고.
“놀러 간 데는 어디였고?”
“그냥….”
죄책감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훈과 원경은 따뜻한 눈으로 정인이 하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그때였다. 온통 애정으로만 가득한 눈동자 앞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스스로의 존재가 마치 곧 터질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학교 근처도 왔다 갔다 하고…. 조금 멀리 가기도 하고.”
제대로 끝맺지 않고 덮어 둔 반창고가 들리며, 그 안에 흉측하게 문드러져 있던 과거가 드러났다. 그리고 불쑥 덮쳐 오는 해일 앞에 정인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야 말았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실수했다간 이 순간의 모든 장면이 전부 한낱 꿈이었다는 듯 무너질 것만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게 두려운 일이었다. 이 마음 하나를 어쩌지 못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상처 입히던 그때로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괜찮아졌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두가 살뜰히 보살펴 준 덕에 내게는 생채기 하나 남지 않았다. 내가 이 평온한 집에 몰고 온 파란도 이미 흔적조차 없이 가라앉은 지 오래다. 비로소 모든 것이 완벽히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러니 나만 아니면 돼. 내가 실수하지만 않으면,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지만 않으면. 그러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야.
모두가 나 때문에 마음 아파 할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만 해.
“…일요일에는 친구랑 꽃 구경도 하러 가기로 했어.”
최정인, 정신 차려. 제발 잘하자.
식은땀이 차오르는 손을 이불 아래로 숨겼다.
“맞다, 막걸리도 마셔 봤거든? 진짜 맛있었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았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차례다. 아무리 버거워도 내게는 지금을 지켜 낼 의무가 있다.
응당 감내해야 할 몫이기에 불만 따윈 없다. 이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칼을 꽂은 대가다. 그렇게 모진 말을 해 놓고, 나 살겠다고 모두를 등진 채 머나먼 바다 건너로 도망쳐 버린 순간부터 쌓이기 시작한 빚의 이자다.
이제 와 고작 이 정도가 무겁다고 징징대는 건, 가슴이 찢어진 채 6년을 흘려보낸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알고 있다.
“학교 다니는 게 생각보다 괜찮더라고.”
그럼에도 벅찼다. 스스로 빚은 지옥임을 충분히 알지만, 간사하게도 누군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그 비겁함 속에 붙들고 싶은 말 하나가 있었다.
‘그럼 따라 하세요, 최정인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
다정한 목소리가 헤집어진 가슴 위를 뒤덮었다.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정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마저도 기만이었다.
“나 재밌게 잘 지내. 그러니까….”
아니, 호진아. 네가 틀렸어.
“그러니까, 아빠들은 내 걱정 같은 거 안 해도 돼요.”
나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너무 많은 것 같아.
***
너무 피곤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몸이 아픈 게 아닌데도 상담이고 뭐고 그냥 집에 누워 쉬고 싶기만 했다.
“…퀸즈 아일랜드에 있는 귀신의 집이었어요.”
실은 퇴원을 한 후로 줄곧 그랬다. 곧 시험 기간이지만 책은 한 자도 들여다볼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다른 걸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전부 재미가 없었다. 학교와 자취방을 오가는 동안 가끔 호진에게서 문자가 오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머지 시간은 그저 멍하니 누워 있기만 했다. 마치 호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개의 방이 있었거든요. 그중의 세 번째였나, 아니면 네 번째…. 하여튼 폐건물처럼 생긴 방에 들어갔는데, 그때 갑자기 플래시백이 왔어요.”
“어떻게 대처했니?”
상담사가 물었다. 정인은 정신을 차리고 하던 말에 집중했다.
“특별히 제가 뭘 한 건 없어요. 같이 있던 사람이 거기서 저를 데리고 나왔고, 그리고 그다음은…. 잘 기억이 안 나요.”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도 기억은 마치 더러운 유리창을 씌워 놓은 것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현실과 망상이 뒤섞인 채 장면 장면이 토막 나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였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야?”
“학교에서 알게 된 사람이요.”
정인이 하는 말을 받아 적어 가던 상담사는 이윽고 마침표를 찍었다.
“기분은 어땠어?”
글쎄. 조금 놀랐나, 아니면 두려웠던가.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 상황을 벗어난 다음에는 호진에게 돌고래 인형을 선물했고, 함께 맛있는 밥을 먹었고, 밤에는 예쁜 불꽃을 구경했다.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그냥 괜찮았어요. 그런데 이상한 생각을 하긴 했어요.”
“무슨 생각?”
“그날 같이 있던 사람이랑 조금…. 아니다, 많이 가까워지는 생각이요. 너무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하지만.”
자조 섞인 웃음 뒤로 상담사의 물음이 따라붙었다.
“왜 말이 안 되는 생각이라고 느꼈어?”
“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조금씩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런데 왜 그 사람과 더는 가까워질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거니?”
깔끔한 질문 앞에, 갑자기 콱 막힌 듯 사고가 멈췄다. 정인의 머릿속은 단지 ‘유호진과 그런 사이가 되는 건 이상하다’라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싫어요, 가까워지는 거.”
“왜?”
“…왜냐면.”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정인은 구원을 찾듯 고개를 돌려 테이블 끝의 싱고니움을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개똥이는 싱싱하게 살아나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던 게 그나마 최근 가장 즐거웠던 일이다.
그리고 개똥이를 생각하자 호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애도….”
어렵게 첫 마디를 뗐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위험해.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죄송해요, 그만할래요.”
불안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더는 한 발짝도 내디뎌선 안 될 것 같았다.
“정인아.”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마음의 가장자리를 따라 쌓아 올린 벽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정인은 무릎 위로 늘어뜨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너 지금 마음이 어떠니.”
“…….”
“뭐가 그렇게 불안해.”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이건 전부 다 상담 때문이다. 상담을 받으러 오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멀쩡히 잘 누워 낮잠이나 잤겠지.
정인이 대답하지 않자 상담사는 파일을 덮었다. 그제야 한숨이 터졌다. 드디어 오늘의 세션이 끝났나 싶었지만, 정인의 바람과 달리 그녀는 재차 말문을 열었다.
“정인아. 우리가 처음으로 대면 상담을 시작한 건 6년 전이야. 하지만 네가 갑자기 여행을 떠나면서 오랫동안 상담을 쉬었지.”
정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픈 기억을 많이 잊어.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끔 기억의 흔적이 남을 때가 있어. 이번에 퀸즈 아일랜드에서 플래시백을 겪은 것처럼 말이야.”
“네, 알고 있어요.”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왠지 보면 볼수록 너를 괴롭히는 게 그런 흔적 따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이어 그녀는 집중하라는 듯 테이블을 살짝 두드렸다.
“몸을 다치면 반창고를 붙이거나 붕대를 두르지? 마음도 마찬가지야. 마음을 다치면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갑옷을 지어 입곤 하는데, 그런 걸 방어 기제라고 불러.”
“…네.”
“너는 스트레스 상황이 오면 제일 먼저 스스로를 상황에서 분리시키려 하는 것 같아. 그다음에는 괜찮아야만 하는 이유를 찾은 뒤 가능한 한 빨리 상황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
“…….”
“방어 기제의 종류 중에 ‘주지화’2)라는 게 있어. 정서적 스트레스를 컨트롤하기 위해 지적 능력을 열심히 이용하는 경우를 말하는 거야.”
정인은 한숨이 치미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저 얼른 상담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이런 방식도 정말 가끔은 도움이 될 수 있어. 너는 사고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사람이고, 사람은 누구든 타고난 기질과 가장 가까운 선택을 하니까.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네 감정을 느끼고 확인하는 건 다른 이야기야. 이해하고 치워 버리기만 하면 감정을 느낄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지.”
“…….”
“정말 너를 괴롭히는 게 뭔지를 알려면 지금보다 더 예민하게 감정을 느끼고 돌아봐야 하는데, 할 수 있겠니?”
너무 잔인한 말이었다.
내가 괜찮다는데 여기서 뭘 더 어쩌라는 건가. 없는 슬픔을 만들어서 짜내기라도 하란 말인가?
이불 속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부정적인 감정이나 들여다보는 건 이미 질리도록 해 봤다.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며 울고불고 스스로를 좀먹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그리고 이제 와서 내가 왜 또 그런 걸 겪어야 하는데?
“뭐…. 네.”
실은 반발심으로만 가득했지만, 괜히 입을 댔다간 상담이 더 길어질 것 같아 떨떠름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너는 밖에서 억지로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면 오히려 더 단단히 걸쇠를 잠가 버리는 사람이야. 너에게 계속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부탁해 온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그 문을 망가뜨리지 않고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니까. 그런데 아직 네가 그 문을 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
“하지만 정인아, 이제 정말 용기를 내야 할 때인 것 같아.”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네가 걸어 잠근 문 너머에서 어린 정인이가 아직 아프다고 울잖아.”
그 말에 갑자기 확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일부러 울리려고 저러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플래시백이 오든 말든 일언반구도 꺼내지 말걸 그랬다. 정인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감을 곱씹으며 시계를 보았다. 아무래도 상담사는 시간을 다 채울 생각인 것 같았고, 상담 종료까지는 아직도 10분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정인의 눈길이 시계로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상담사는 시계를 뒤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6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야. 그동안 많은 것이 잊혔을 테고, 정말로 나아진 부분이 있다는 것도 보여.”
듣기 싫어.
“그렇지만 우리가 같이 나눈 이야기는 여전히 네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의 시간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것 같아.”
그렇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상처받은 열여섯 살 최정인은 아직 네 안에 살고 있고, 네가 무시하면 할수록 더욱 절박하게 튀어나오려고 할 거야. 어쩌면 원하지 않을 때 갑자기 튀어나올지도 모르지.”
길 가던 선무당도 저런 소리는 안 하겠다.
상처받은 열여섯 살 최정인이라니, 그런 무형의 존재가 정말로 아직까지 나를 좀먹고 있다면 이건 상담 같은 걸 해서 해결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엑소시스트부터 불러야 할 일이다.
“진심으로 부탁할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제는 정인이가 그 애를 봐줘야 해.”
“네, 그럴게요.”
벌써부터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다리가 근질거렸다.
“그럼 기다릴게. 항상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 그 애가 보인다면 달려와 줬으면 좋겠어.”
상담사가 마침내 파일을 덮었다. 정인은 튀어 오르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녕히 계세요.”
수년째 물에만 처박혀 있는 불쌍한 식물을 한번 흘끔 바라보고 곧바로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 참고 있던 한숨이 한 번에 터졌다.
“씨발 진짜, 이거 대체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야….”
은근슬쩍 현욱에게 말을 꺼내 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언제나처럼 상담사가 종결을 말하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만둬선 된다며 단호하게 잘라 내던 것을 떠올리니 막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확 깽판을 쳐 버려야 되나.”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고, 상담실 안의 물건을 전부 깨부수고, 일부러 나쁜 말을 하고. 하여튼 할 수 있는 못된 짓을 전부 다 하면 그땐 상담사도 알아서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막연하게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늘 상냥하기만 한 사람에게 그렇게 못된 짓을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결국 원점이었다.
하여튼 지긋지긋 징그러워 죽겠다. 훌쩍 불편해진 마음을 안고 몸서리치며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뭔가 싶어 핸드폰을 꺼내 보니 화면 위에 호진에게서 날아온 문자 한 통이 반짝 떠 있었다.
형 뭐 하세요?ㅎㅎ
정말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조금도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볼일이 좀 있어서 나왔어. 너는 뭐 하는데?
정인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글자들을 적어 넣었다.
이제 오후 훈련 시작이에요.
형 그런데요
내일 우리 언제 만나는 게 좋을까요?ㅎㅎ
벌써 일요일인가 싶어 정인은 새삼 놀랐다. 멍하니 누워 흘려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꽤 길었나 보다.
몇 시에 올 거야?
일곱 시는 너무 이를까요?ㅠㅠ 빨리 가고 싶은데.
본인이 피곤하지만 않다면 안 될 것도 없다. 정인은 픽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그때 봐.
ㅎㅎ천변 따라서 꽃이 많이 피었대요
천변이 어디지?
생각해 보니 어디로 가는지는 들은 적이 없다. 그때, 호진에게서 연달아 문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ㅎㅎㅎㅎ
좋은 하루 보내세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또 날씨 얘기네.
질리지도 않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좋단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별것 없는 말끝에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히읗이 아주 많이 붙어 있었다.
콕콕 박힌 글자를 따라, 정인은 호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열네 명의 유호진이 나란히 서서 흐흐 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웃겼다.
응, 너도.
날씨가 좋다던 호진의 말과 달리, 하늘은 흐릿한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마음이 반듯하면 먹구름 낀 하늘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건가. 그럼 혹시 먹구름 낀 하늘을 미워하지 않으면 마음이 반듯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날씨 좋다.”
조금은 어색하게 내뱉어 보았다.
“…….”
딱히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
어제도 하루 종일 그렇게 흐리더니 아침이 밝자마자 기어이 비가 쏟아졌다.
충청도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며 호진은 부득부득 새벽부터 숙소를 나선 듯했다. 두어 시간 전쯤 연락이 끊겼으니 아마 지금쯤은 못 해도 양재까지 왔겠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정인은 창가의 개똥이에게 심경을 공유했다.
“진짜 이상한 애야, 안 그래?”
물론 개똥이는 입이 없는 관계로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형.”
문밖에서 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크 소리를 따라 문을 열자, 말갛고 푸르른 풍경 속에 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어깨며 머리카락에 물방울을 매단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비 맞았어?”
고작 며칠을 보지 못했을 뿐인데, 마치 1년은 만나지 못했던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요.”
그렇게 말하는 호진의 한 손에 곱게 접힌 장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 있잖아.”
“어차피 요 앞인데, 우산 접고 펴고 하느니 그냥 뛰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그럼 이건 대체 왜 들고 왔단 말인가. 정인은 아리송한 얼굴로 그를 따라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건물 입구까지 다다르자, 호진은 곧장 우산을 펼쳐 정인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뭐야, 그냥 뛰어가는 게 더 빠르다며.”
“그래도 형은 비 맞지 마세요.”
그는 마치 기사처럼 정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정인이 조수석에 탈 때까지 우산을 펼쳐 들고 있느라 제 등이 흠뻑 젖는데도 그냥 마냥 좋다며 웃기만 했다.
“그런데 우리 오늘 어디 가는 거야?”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호진은 여전히 시동이 켜져 있는 차의 기어를 바꿨다.
“공주요.”
“뭐?”
생각보다 훨씬 먼 곳이었다.
“공주까지 가서 꽃 보고, 서울에 나 내려다 주고, 다시 진천 내려간다는 거야?”
정인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충청도와 서울을 몇 번이나 차로 왔다 갔다 하면 아무리 유호진이어도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럼 그냥 적당히 여의도 가자, 거기도 꽃 많잖아.”
“아, 저 오늘은 학교에서 자요. 내일 아침에 시험 하나 있어서.”
이어 호진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거긴 여의도 같은 데랑은 비교가 안 돼요.”
은근히 거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출신지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내 학교를 오가며 운동까지 하느라 많이 바빴을 테니 한 번쯤은 고향에 가 보고 싶기도 하겠지. 정인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함께 차에 탈 때면 늘 그래 왔듯 호진과 정인은 말없이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고속 도로를 타는 건 의외로 금방이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통행량이 꽤 되는 상행선에 비해 하행선은 막힌 것 없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게다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호진의 말대로 날씨가 나아졌다. 먹구름이 전부 물러나진 않았지만 평택 언저리에 도착해서는 더 이상 와이퍼를 켤 필요조차 없었다.
정인은 열심히 바깥의 풍경을 구경했다. 호진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흐리고 멍하기만 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하늘이 하얗네요.”
호진이 말했다.
“저런 걸 먹구름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가만 보면 먹색은 아니거든요?”
그의 말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에서 저 색이 나려면 물을 무지무지 많이 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다들 먹구름이라고만 불러서 쟨 조금 억울할 것 같아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호진은 특유의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금도 창의적이지 않은 대답을 내놓았다.
“음…. 아주 조금 회색인 구름?”
“하하하, 그게 뭐야.”
“그런 것밖엔 생각이 안 나네요. 형은 뭐라고 이름 지어 주실 거예요?”
적당한 단어를 고르려 했지만 뭐라 딱히 붙일 말이 없었다. 바로 5초 전 호진을 비웃은 게 조금 후회되는 시점이었다.
“…약간 회색인 구름?”
말해 놓고 왠지 창피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호진이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형이 한 말이 더 예뻐요. ‘아주 조금 회색인 구름’보다는 ‘약간 회색인 구름’이 더 멋지고 아카데믹한 표현인 것 같아요.”
“…….”
“진짜로요.”
착즙기를 돌려 억지로 쥐어 짜낸 것 같은 칭찬이었다.
민망함에 속이 뜨거워져서, 정인은 고개를 홱 돌려 ‘아주 조금 회색인 구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스카이라인은 점점 낮아졌다. 천안을 넘어 온통 아파트로만 가득한 세종 시내까지 지나치자 그다음부터는 정말로 숲과 숲의 연속이었다.
이제 막 피어나는 연두색 이파리 사이 드문드문 벚나무가 보였다. 어떤 녀석은 외딴 섬에 떨어진 이방인처럼 혼자 덩그러니 서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녀석들은 군락을 지어 모여 있기도 했다.
그러다 조금을 더 나아가니 눈이 닿는 곳마다 온통 새하얗게 꽃나무로 뒤덮인 길이 나타났다.
“아….”
창밖으로 지나치는 그림 같은 풍경에 정인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호진의 차는 그로부터 조금을 더 굴러가 흙길 구석에 멈춰 섰다.
“다 왔어요.”
정인은 홀린 듯 차 문을 열었다.
일찍이 피어나 슬슬 지기 시작한 꽃잎이 팔랑이며 땅을 향해 내려앉는 가운데, 뒤늦게 만개한 꽃봉오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차르르 떨며 풍성한 몸집을 자랑했다. 호진의 말대로 여의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관이었다.
“예쁘네.”
꽃도 꽃이지만 그 아래 펼쳐진 실개천이 정말로 귀여웠다. 한국의 시골을 잘 모르는 정인의 눈에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개천 너머로는 드넓은 논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고, 물길을 따라 들어선 풀꽃들은 각양각색의 빛깔로 반짝였다. 흙바닥 여기저기에 남은 농기계 바퀴 자국마저도 신기하고 특별해 보였다.
심지어 지역 주민들만 아는 숨겨진 명소라도 되는지, 관광객이 득시글득시글할 것처럼 생긴 곳인데도 이 아름다운 길 위에 생명체라곤 이따금 나타나는 고양이들이 전부였다.
“어떻게 이런 데를 알아?”
물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던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습관처럼 정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사람들이 가끔 저 보고 개천에서 난 용이라고 하는 거 아시죠.”
“응?”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가벼운 꽃잎 몇 장이 뺨을 스쳤다. 정인은 가만히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가 거기예요, 형.”
봄날의 꽃보다도 고운 마음이 끊어지는 음절마다 소복하게 차올랐다.
“제가 나고 자란 개천이에요.”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호진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함께 오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아무에게도 보여 준 적이 없던 풍경이었다. 심지어 호진 자신에게마저도.
“태어나서부터 쭉 여기서 놀았어요. 서울로 떠나기 전날까지도요.”
봄에는 꽃잎이 산들거리고 여름이면 빗소리가 자박자박 울려 퍼지는. 가을에는 풀벌레가 울고 겨울에는 얇은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못 이겨 툭툭 부러지는 곳.
햇볕이 들면 바위틈으로 다슬기가 굴러다니고, 동장군이 물러날 즈음이면 녹다 만 얼음 아래로 갓 태어난 물고기들이 바삐 헤엄치는 곳.
이곳에서 보낸 모든 시간은 호진이 가진 가장 완벽한 추억이었다. 무엇으로도 덮어쓰고 싶지 않은, 평생 그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만 싶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 꼭 보여 주고 싶었어요.”
턱 밑까지 시큼한 숨이 차오르는 밤마다 이 작은 개천을 떠올렸다. 그러나 몇 번이고 이 앞을 지나치면서도 차마 들어설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랬다간 고이고이 마음 한편에 간직해 온 기억이 선명한 오늘에 짓눌리고야 말 것 같아서.
“어떠세요?”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기억으로 추억을 덮는 일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의 언젠가 막연히 꿈꿨던 소원의 내용대로, 오늘은 많이 좋아하게 된 사람과 함께 이 길 위의 봄을 걷고 싶었다.
“예뻐.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
평생을 고이 아껴 온 소중한 추억이다. 그 위를 처음으로 밟아 주는 사람이 정인이라는 게 벅차도록 영광스러웠다. 들뜬 마음을 담아 정인을 향해 물었다.
“…조금 걸을까요?”
“응.”
몰래몰래 정인을 훔쳐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달뿌리풀을 지나고, 강아지풀을 지났다. 아직 어린 억새풀과 애기부들을 지나쳐 조금을 더 걸어가자 머지않아 커다란 버드나무가 나타났다.
“버드나무가 있는 데에는 귀신이 못 온대요.”
정인이 귀신을 퍽 무서워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런 건 전혀 믿지 않을 사람 같은데,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다.
“정말? 왜?”
“양기가 강하다나…. 되게 부드럽게 생겼는데 신기하죠? 그런데 저래 봬도 저걸로 맞으면 은근히 아파요.”
“저걸로 맞는다고?”
호진은 꺾인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주워 정인에게 보여 주었다.
“어렸을 때 서당 다녔거든요. 그날그날 천자문 다 못 외면 이걸로 종아리 맞았어요.”
“미친 새끼들 아니야?”
정인이 갑자기 버럭 했다.
“고작 그까짓 것 좀 못 외운다고 애를 때려?”
머쓱해진 호진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아…. 따갑긴 해도 못 버틸 만큼 아픈 건 아니에요. 소리가 좀 살벌해서 그렇지 빠따에 비하면 뭐, 빨간 자국도 안 남아요.”
“뭐? 빠따?”
그게 역효과가 났는지, 정인은 위아래로 호진을 훑어보며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유호진. 너 혹시 운동하면서 맞아?”
“아…. 지금은 아닌데요.”
“예전엔 그랬단 소리야?”
호진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러자 정인이 아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악물었다.
“어떤 새끼한테, 언제, 어디를, 어떻게 맞았어.”
전에 없이 싸늘한 얼굴이었다.
“다들 수영 그만둬서 지금은 몰라요, 그런데 형.”
놀란 호진은 정인의 눈앞에 다짜고짜 버드나무 가지를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풀피리도 불 수 있는 거 아세요?”
정인은 호진을 노려보며 귀찮다는 듯 나뭇가지를 쳐냈다.
“딴소리하지 말고 그 새끼들 이름 대. 어떻게든 찾아내서 찢어 죽일 거니까.”
“아,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시면…. 형, 제가 이거 한번 해 볼게요? 잠깐만요.”
제발 정인의 기분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호진은 필사적으로 이파리를 쥐고 불었다.
“형, 이거…. 이거 보세요.”
피리는커녕 힘없이 푸시식거리는 소리만 났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다른 애들 불 때 좀 배워 놓을걸.
“호진아.”
닿아 오는 목소리가 조금 서글펐다. 그를 따라 천천히 눈을 들자, 언제부터였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정인의 모습이 보였다.
“형!”
호진은 들고 있던 것을 전부 내던지고 정인에게로 달려갔다.
어떡하지.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지둥 손을 떨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정말, 너는 그러지 않아도 돼.”
정인은 이윽고 온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보석 같은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푹 젖어가는 얼굴을 닦아 낼 생각도 않고, 정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마저도 연못가에 이지러진 새벽달처럼 예뻤다.
“아팠던 거, 힘들었던 거…. 없었던 일인 것처럼 묻어 버리거나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
“…….”
“아무리 오래된 일이어도, 아무리 애를 써도 있었던 일이잖아. 깨끗하게 없던 일 되는 거 아니잖아. 분명 힘들었을 거잖아….”
아, 어쩌면 이다지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울까.
가슴이 온통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꾹 참지 않아도…. 그래도 돼.”
겨우겨우 말을 이어 간 정인이 기어이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거…. 너무 힘든 일이란 말이야.”
“알았어요, 형.”
더는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 호진은 얼른 정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제 그러지 않을게요. 제가 잘못했어요.”
한 품에 들어오는 등을 온전히 감싸 안고 다독이며, 새하얗게 질린 하늘을 향해 부디 이 사람이 더는 슬프지 않게 해 달라 빌고 또 빌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된다고. 숨기거나 묻어 버리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흐윽, 흐….”
나에게는 차마 가정조차 할 수가 없던 말이, 이 사람을 향하니 이렇게나 쉽게 입에 담긴다.
“전부 다…. 흑, 죽여 버릴 거야. 한 놈도 빠트리지 말고 전부 이름 대. 흐윽, 흑.”
아마 유호진은 쥐방울만 한 땅꼬마 시절부터도 착하고 순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런 아이의 어디에 때릴 데가 있다고 때렸을까. 쟤는 또 그 미련한 성정에 매를 맞으면서 얼마나 버텼을까,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어린 호진이 고작 천자문 따위에 매를 맞고 울먹였을 것을 상상하니 너무나도 화가 나고 속상했다.
“에이, 형. 그런 말씀 마세요.”
호진은 조용히 정인을 달래 주었다.
울지 말란 말은 없었다. 그저 다 안다는 듯, 그래도 괜찮다는 듯 가만히 도닥이며 정인의 슬픔이 가시기를 기다려 주기만 했다.
그 묵묵한 위로에 더 서러워져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결국 정인은 창피함도 잊고 호진의 가슴팍에 파묻혀 펑펑 울었다.
“어, 비 온다.”
이마에 닿은 가슴을 타고 낮은 음성이 울렸다.
온 사방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제 것인 줄로만 알고 있던 정인은 빨갛게 부은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투둑투둑 떨어진 빗방울이 버드나무 이파리를 때리고 있었다.
“소나기인 것 같아요.”
코앞의 산마루까지 들이닥친 비구름을 올려다보며 호진이 말했다.
“차까지는 좀 먼데…. 곧 지나갈 것 같으니 저 앞에 원두막에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갈까요?”
뭐 아는 거라곤 하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라야 했다. 엉엉 우느라 진이 다 빠져 버린 정인은 저도 모르게 그가 내민 손을 꼭 잡고 원두막을 향해 걸었다. 그 와중에도 아직 숨이 가라앉지 않아 자꾸만 히끅 히끅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호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흐윽….”
원두막은 버스 정류장도 민가도 아닌 도롯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이런 걸 올렸는지야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점점 거세어지는 빗방울을 피할 수는 있게 되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괴이한 부지선정 센스를 가진 이름 모를 인물에게 속으로 감사를 올리며, 정인은 호진을 따라 원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이 뻥 뚫려 있는데도 처마가 길어서인지 평상에 걸터앉기만 해도 빗물이 닿지 않았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정인은 천천히 숨을 가라앉혔다.
“추우시죠. 옷 벗어 드릴까요?”
그는 맨몸에 셔츠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었다. 정인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됐거든.”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간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적잖았는지 한번 크게 울고 나니 개운했다.
“근데 너 풀피리 진짜 못 불더라.”
“…그쵸. 좀 배워 놓을 걸 그랬어요.”
괜히 민망해져서 해 본 딴소리에도 참 성실하게 대답한다.
“그런 거 배워서 뭐에다 쓰게.”
“형 공부하실 때 옆에서 불기도 하고 뭐, 그러는 거죠.”
정인은 아직 눈물이 가시지도 않은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아버지 친구분이 풀피리 마스터이신데 진짜 배워 올까요?”
“공부하는데 와서 그런 짓 하기만 해 봐, 바로 소송 걸어 버릴 거야.”
그러자 호진은 장난치듯 물웅덩이를 발끝으로 살살 차 정인의 다리께에 물방울을 튀겼다.
“안 그러실 거 다 알아요.”
“…그럴 거거든.”
이유도 없이 심통이 난 정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전관 변호사 사서 십 원 한 푼 안 남기고 다 뜯어먹을 거야.”
“헉, 풀피리 한 번 불었다고 전관 변호사까지…. 너무해요.”
농담이었는데 좀 너무 나갔나. 시무룩해진 목소리에 정인은 얼른 눈을 들어 호진을 살폈다. 그러나 시무룩하기는커녕, 그는 너무나도 예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러실 줄 알았어요.”
머리며 어깨에 작은 빗방울을 장신구처럼 매단 채, 호진이 또 한 번 구김 없이 웃었다.
“제가 시무룩해하면 돌아봐 주실 것 같았어요.”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마치 무거운 소금을 지고 바다를 건너가는 낙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내내 등에 얹혀 있던 소금으로부터, 머리 위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으로부터 도망쳐 넓은 물 안으로 첨벙 뛰어들면.
파랗게 일렁이는 바닷물에 눈치챌 새도 없이 모든 것이 녹아들고, 마침내 고개를 들어 숨을 들이마실 때쯤엔 어디로든 자유롭게 발길질을 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형은….”
끝맺지 못한 말문 뒤로 빗소리가 점차 거세어져 침묵을 뒤덮었다.
정인은 가만히 호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파도가 일지 않는 적도의 바다처럼 고요한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이쪽을 향해 있었다.
“…….”
온 세상을 가득 메운 빗소리가 점차로 멀어져 갔다.
비 내리는 풍경이 아득하게 흐려지고, 멍하니 정인을 보고만 있던 호진이 문득 손을 뻗었다. 그 하얀 손가락이 다가오는 장면마저도 마치 재생속도를 낮춘 영상처럼 느릿하게만 보였다.
이윽고 가볍게 떠오른 손이 머뭇거리며 다가와 마침내 뺨에 닿았다. 물기 어린 피부 위로 내려앉은 손가락은 곧장 떨어지지 못하고 정인의 볼 위에서 살짝 미끄러졌다.
“…흙 묻어서요.”
어색한 목소리와 함께 축축한 살갗이 꾹 눌리고, 서늘하게 식어 있던 얼굴에 온기가 번지는 순간.
하도 울어 멍해진 정신에 또 한 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의 새벽을 한입에 잡아먹은, 바로 ‘그 생각’이었다.
“…….”
키스하면.
아니, 키스해도….
“…….”
정인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고는 충동적으로 한 뼘을 나아가, 그에게 입 맞추고 말았다.
〈3권에 계속〉
[각주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