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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숨은 시다 4권-Chapter 2.-Kiss me goodnight with your sour breath (3) (5/8)

당신의 숨은 시다 4권

Chapter 2.

Kiss me goodnight with your sour breath (3)

호진은 반응이 왔던 자리를 한 번 더 찍어 눌렀고, 정인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사정을 시작했다.

“흐윽….”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강제로 터트린 히트 사이클 때문에 정인의 심신은 넝마조각이 되어 있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정신을 잃는 편이 나을 것 같았지만 마음대로 기절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는 동안 호진은 정인의 손등에 입 맞추며 달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한 번씩 쑤셔 박을 때마다 팽팽하게 부어오른 결합부를 타고 점액이 흘렀다.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 민감한 몸을 하고 여태까지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단정하게 굴었을까. 정말이지 당장 뼈까지 오독오독 씹어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를 드러내면 정인이 겁먹을 것 같아 일부러 어린애처럼 말꼬리를 늘이기도 했다.

“혀엉…. 저, 너무 좋아요.”

그는 문득 사고를 일으켜 국가 대표 자격을 박탈당한 이형질 선수들을 떠올렸다. 고작 페로몬 하나를 조절하지 못해 타인을 해한다는 건 여태까지의 호진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한낱 인간이 이성 따위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 흐, 아악, 호진… 호진아, 잠, 깐만, 흐윽.”

“그만할까요?”

다정하게 물으며 그야말로 개같이 박았다. 마치 자신의 삶 자체가 이 짓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얇은 팔을 움켜쥐고 퍽퍽 소리가 나도록 몰아붙였다.

“으응, 나 그만…. 그만할래. 흑….”

정인은 울먹이며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호진은 멈춰 주지 않았다. 아니,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길고 두꺼운 것을 쑤걱쑤걱 처박으며 이따금 쇳소리가 섞인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머지않아 주름진 육벽의 가장 깊은 곳에 호진의 성기가 처박혔다.

“어윽….”

순식간에 결장까지 뚫린 정인은 입을 크게 벌린 채 바르작거렸다. 통증과 쾌감의 사이쯤 어딘가에 걸려 있던 감각은 곧 완전히 쾌감의 편으로 기울었다.

완전히 풀린 구멍이 기둥의 뿌리를 감싸고 엉겨 붙었다. 호진은 후우, 하고 숨을 내쉬며 정인의 앞을 쥐었다. 앞뒤로 가해지는 무자비한 쾌감에 정인은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커다랗게 홉뜬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만, 나 이제 그만….”

정인의 몸은 곧 커다란 가슴팍에 가려졌다. 허공에 드러나는 것은 흰 다리뿐이었다. 넓은 등을 전부 감싸지 못한 손이 결국 미끄러져 시트를 쥐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진은 내내 여린 살을 쑤셔 댔다. 점막 안의 주름을 전부 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끝까지 빼냈다가 한 번에 처넣었다.

그렇게 한 번 안쪽을 찌를 때마다 정인은 발가락을 움찔거리며 앞뒤로 음수를 뿜었다. 울컥 하고 한 번씩 액체가 튈 때마다 내부가 조여들었다. 형, 형. 애원하듯 정인을 부르며 콱콱 쳐올렸다.

“아, 형…. 할 것 같아요.”

“흐윽. 아, 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세게 자신의 좆을 처박은 호진은 숨을 꾹 참고 몸을 일으켰다.

“히익….”

끝까지 들어차 있던 것이 쑤욱 빠져나가며 쾌감이 해일처럼 솟았다. 하지만 정인의 앞은 이미 하도 쥐어짜여 더는 내보낼 것이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토해 내지 못한 채로 벌벌 떨며 극치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호진은 그 모습을 감상하며 빠르게 제 것을 흔들었다. 윽, 낮은 신음과 함께 광배근을 조이자 사정감이 밀려오며 짙은 정액이 정인의 얼굴까지 튀었다.

“하아…. 하아.”

정인은 아직도 사정감에 못 이겨 온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호진은 내내 제 손목에 매달려 있던 커튼을 풀고 일어났다.

“…어디 가?”

“잠시만요.”

정인은 호진의 정액을 얼굴에 더덕더덕 묻힌 채 멍한 눈으로 그를 좇았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던 호진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방을 나섰다.

돌아오는 그의 손에 작은 상자 여러 개가 들려 있었다. 그는 곧 상자를 하나씩 뜯어 내용물을 침대 위로 흩뿌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정인의 눈동자가 경악에 물들었다.

“뭐부터 쓰실래요?”

그렇게 물으며, 족히 서른 개는 될 것 같은 콘돔을 모아 정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

온 집 안이 엉망이었다. 복도 끝방의 침대는 헤드가 부서진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프레임까지 망가졌다. 호진이 두 번째로 사정을 마친 뒤의 일이었다.

형편없이 내려앉은 매트리터를 보며 호진은 작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제 것을 정인의 안에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인의 두 다리가 허공에 뜨며 체중이 실렸다. 결합부가 빠듯하게 맞물리자 호진은 그 상태에서 허리를 움직였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매달린 정인은 마침내 식탁 위에 누울 때까지 걸음마다 아래를 처박히며 울었다.

차가운 유리에 등이 닿자 소름이 쭉 돋았다. 갈 곳을 잃은 손은 정신없이 테이블을 더듬다 결국 샐러드가 든 그릇과 물컵을 떨어트렸다.

쨍그랑ㅡ. 엄청난 소리를 내며 깨져 버린 그릇 사이로 온갖 색깔의 과일과 채소가 흘러나와 바닥을 굴렀다. 흘끔 눈을 돌려 정인에게 파편이 튀지 않은 것을 확인한 호진은 마치 경기를 하듯 정인의 아래를 헤집는 일에 몰두했고, 그대로 한 번 더 사정을 한 뒤에는 욕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악!”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정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달려들어 손가락부터 쑤셔 넣었다. 욕실에 비치된 물건들이 죄다 바닥으로 떨어질 때쯤엔 더 이상 누울 곳이 없어 거실로 나와야 했다. 한 번씩 장소를 옮길 때마다 다 쓴 콘돔이 하나씩 늘어 갔다. 그럼에도 열기는 식지 않았다.

“형…. 하아.”

“아, 윽…. 호진아, 나…. 흐응, 앙…!”

호진이 한 번 사정하는 동안 정인은 대여섯 번씩 가 버렸다. 언젠가부터는 세는 것마저 잊었지만 못해도 족히 스무 번은 싼 것 같았다.

“하아….”

괜히 운동선수가 아니었다. 호진은 내킬 때마다 너무나도 가볍게 정인을 뒤집었다.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정인의 엉덩이가 하늘로 향하고 머리는 푹신한 소파에 묻혔다. 목이 너무 많이 꺾이지 않도록 정인의 가슴 아래에 쿠션을 받쳐 준 호진은 게걸스럽게 뒤를 빨았다.

이제 처음 같은 아찔한 쾌감은 없고 그저 얼얼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정인의 몸은 아직 페로몬에 반응하고 있었다. 알파의 혀가 점막을 핥자마자 배 속이 뒤집혔다.

“나…. 해 줘, 흑….”

“그럴까요?”

둘 다 별 뜻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남들 다 연애하고 진도 빼는 동안 돌부처처럼 얌전을 떨며 살던 두 사람은 생전 처음 맛본 쾌감에 완전히 절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성욕을 하루아침에 풀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세우고 싸고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흣, 흐응….”

자위부터 섹스까지를 한 큐에 떼 버린 정인은 그야말로 쾌락의 막장까지 치달아 있었다. 호진의 페로몬에 이끌려 강제로 터진 히트 사이클도 그에 한몫했다. 통증이라고만 생각했던 감각 속에서 기분 좋은 지점을 찾아내는 법을 배우고 나니 더는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아래가 헐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허리를 흔들게 됐다. 타고나기를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라, 처음으로 삽입을 했던 때와 달리 이제는 정인도 어느 정도 몸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형, 하아….”

호진도 크게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정인의 히트 사이클이 정점을 향해 갈수록 고장 나 있던 페로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급격하게 러트가 터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호진이 끌어온 정인의 히트 사이클은 재차 호진의 러트를 부추기고, 러트로 인해 폭발적으로 솟은 그의 페로몬은 오메가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어당겼다. 이성이 남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 흐윽…. 하, 아으….”

또 한 번 절정이 찾아왔다. 정인은 하늘로 치켜든 엉덩이를 위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정인의 페니스에서는 아예 점성이 없는 맑은 물만이 쭉쭉 소변처럼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호진은 정인이 완전히 가 버리기를 기다렸다가, 더 이상 무엇도 나오지 않을 때쯤 되어서야 정인의 몸을 뒤집었다. 얼굴을 마주 보며 스퍼트를 올렸다. 엉덩이의 근육이 깊게 파이도록 제 것을 처박은 다음에는 가장 깊은 곳에 멈췄다. 두꺼운 기둥이 끄떡이며 내부를 휘젓는 감각에 정인은 엉엉 울었다.

“하아….”

울컥, 울컥. 기나긴 사정이 시작됐다. 콘돔 안에 갇혀 있는 정액을 빨아 먹고 싶어 안달이 난 정인의 내부는 꺼떡거릴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기둥을 짜냈다. 아무리 짜내도 안으로 그의 체액이 뿌려지지 않자 성을 내듯 꽉 움켜쥐기까지 했다. 모두 정인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본능이었다. 남들보다 몇 배는 예민한 히트 사이클에 우성 알파와 몇 번이나 몸을 섞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형.”

호진이 정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무너졌다. 몸을 겹친 채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깜빡깜빡 점멸하던 세상의 색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빈틈없이 껴안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날카로운 쾌감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정인과 호진은 쿡쿡 웃으며 입술을 붙였다. 물론 지금 자신들이 학계에 보고되어야 할 이상 현상을 겪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

세상은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기도 했고 캄캄한 어둠 속이기도 했다.

며칠 내내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반면 감각은 무섭도록 선명했다. 똑같은 과일을 먹어도 더 달았고, 똑같이 몸을 만져도 조금 더 기분이 좋았다.

다른 것은 무엇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서로를 끌어안고,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며 밤이 다 가도록 웃었다.

그렇게 페로몬에 취해 깜빡깜빡, 잠결에도 서로의 품을 찾아 파고들면 꿈 한 번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정말로 이쯤에서 모든 게 멈추고 지구가 멸망해 버려도 딱히 나쁘진 않을 것 같던 시간들이었다.

“으음….”

정인은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길게 하품했다.

도대체 얼마나 잔 걸까. 해의 기울기로 가늠하건대 정오는 한참 전에 지난 것 같았다.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호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얜 어딜 갔….”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일으켰다. 엄청난 근육통이 온몸을 강타했다.

“…헉.”

당황스러울 정도로 거센 둔통에 벌벌 떨며 도로 쓰러졌다. 과장 조금 보태 프로 복서 스무 명에게 돌아가며 한 대씩 맞아도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을 것 같았다.

“형!”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호진은 들고 있던 플라스틱 박스를 내려놓고 정인에게 다가왔다.

“어, 응…. 안녕.”

“괜찮으세요? 어디 안 좋아요?”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정인을 살폈다. 그리고 훌쩍 가까워진 거리에 정인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정신이 나가 있을 땐 그렇게 물고 빨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는데, 막상 이성이 돌아오니 그간 했던 짓들이 하나하나 머리를 스쳐 가며 견딜 수 없이 민망해졌다.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호진이 몸을 기울였다. 한껏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헐렁한 티셔츠 사이 비치는 날가슴으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온몸이 다 아파.”

애써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근육통이죠?”

“그런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플라스틱 박스를 침대 밑으로 끌고 왔다. 안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건 뭐야?”

“찜질하려고요. 근육통 있을 것 같았거든요.”

호진은 두꺼운 수건에 따뜻한 물을 푹 적셨다.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꽉 짠 다음에는 정인의 팔다리를 살살 닦아 주었다. 중간중간 뭉친 곳을 마사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육통 말고 다른 이상은 없어요?”

“음….”

실은 말하기 민망한 부위가 조금 쓰라리긴 했다.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말만큼은 할 수 없었다. 정인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는 좀 괜찮아?”

사실 정인보다 더 크게 페로몬의 영향을 받은 것은 호진일 것이다. 정인이야 시도 때도 없이 히트 사이클을 맞으며 나름의 면역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생 페로몬 민감도를 관리해 온 호진은 그야말로 억제제가 만들어 놓은 방어 시스템을 생으로 뚫린 채 폭주한 셈이었다.

“저는 이제 괜찮아요. 몸도 가뿐해진 것 같고, 정신도 평소보다 조금 더 맑아진 것 같고요.”

“아하.”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억울해졌다.

“참 좋으시겠어요.”

“…죄송해요.”

호진은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몸 약한 거 알면서 그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첫 경험을 이렇게 정신없이 한 게 너무….”

“아, 아, 잠깐만.”

정인은 아픈 허리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첫 경험’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이미 얼굴이 시뻘게진 채였다.

“네 잘못 아니잖아. 서로 좋…아서 한 건데.”

아직도 찌릿찌릿 아픈 허리를 붙든 채 호진의 손을 잡았다.

“…좋으셨어요?”

말문이 턱 막혔다. 호진은 언제 그렇게 주눅 들어 있었냐는 듯 뽀얀 얼굴로 눈웃음쳤다.

“저는 너어어어무 좋았는데.”

“그….”

정인은 제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골랐다.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좋았다. 여태까지 도대체 뭘 그렇게 꺼렸나 싶을 만큼.

“…응.”

있는 줄도 몰랐던 감각들이 다발적으로 깨어나고, 별것 아닌 접촉에도 가슴이 바삐 뛰었다. 팔다리가 달리고 살가죽이 덮여 있으니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던 시간을 전부 부정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알고 보니 이 팔다리로는 아주 대단히도 즐거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좋았어.”

“다행이에요.”

호진은 흐흐 웃으며 정인을 꼭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럼 이제 나가서 운동 좀 하시죠.”

“…뭐?”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마사지로는 한계가 있거든요. 딱히 관절에 이상 있는 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움직이셔야 통증이 덜해요.”

“…….”

“물에 들어가서 살살 움직이는 것만 해요. 네?”

호진은 무서울 만큼 해맑은 얼굴로 정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면서도, 현역 운동선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거니 싶어 일단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침실을 벗어나자마자 청소 도구가 보였다.

“청소하고 있었어?”

“일단 2층만요. 1층은 조용히 청소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형 일어나면 하려고 했어요.”

“뭐 얼마나 더럽길….”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섰다. 지옥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인은 곧바로 포기했다.

“…업체 부를 테니까 놔둬.”

아무리 봐도 이건 둘이서 어떻게 꼬물꼬물 해 볼 만한 사이즈가 아니었다. 그나마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2층과 달리 1층의 모습은 전쟁이라도 난 듯 살벌했다. 다 쓴 콘돔과 먹다 만 과일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탁자며 소파며 할 것 없이 모든 가구가 전부 정체불명의 얼룩을 묻힌 채 엎어져 있었다.

뜨악한 표정으로 실내를 훑던 정인의 눈길은 이내 식탁에 머물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위에 놓여 있는 와인병에.

“…뭐야, 우리 와인도 마셨어?!”

몸이 아픈 것도 잊고 후다닥 달려갔다.

“말도 안 돼, 이게 어디서….”

텅 비어 버린 병의 라벨을 확인하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굳이 묻지 않아도 현욱의 소유임이 분명한 최고급 와인이었다.

도대체 이걸 언제 꺼내 마셨단 말인가. 정인은 가물가물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었다. 키득거리며 코르크 마개를 뽑아내던 스스로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아, 미친. 어떡해…. 이거 삼촌 건데.”

“헉, 정말요? 그럼 삼촌께 사과드리고 다시 사서 가져다 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정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어려울 거야. 전 세계에 50병인가밖에 없댔거든.”

“네에?!”

“혹시 구할 수 있게 되더라도 경매에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빨라도 반년은 걸리겠지.”

호진은 히익 숨을 삼키며 제 입을 틀어막았고, 정인은 와인병을 톡톡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 되겠다, 일단 저걸로라도 채워 놓자.”

홈바에 놓여 있던 간장을 집어 들었다.

“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당연히 안 되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무조건 입 닦고 모르는 척해야 돼.”

와인이 문제가 아니라 호진과 단둘이 이 섬에 들어와 한 짓들이 문제였다.

학교를 며칠씩 빼먹고 애인과 난잡하게 뒹굴며 와인까지 훔쳐 먹다니. 혹시라도 가족들에게 들켰다간 정말로 호적에서 파일 것이다.

“여태까지 뜯지 않고 내버려 뒀다면 아마 앞으로도 내내 그럴 확률이 높아. 그리고 정말 아끼는 거였다면 여기가 아니라 저택에 두셨을 거야. 이 와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있어.”

정인은 와인병에 간장을 쪼르륵 따랐다. 행복 회로가 팽팽 돌다 못해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셔 버린 와인을 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절반을 간장으로 채운 뒤 나머지 반은 생수로 마무리했다. 그사이 코르크 마개를 집어 온 호진은 구멍 난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박박 긁어 내밀었다.

“흠.”

완벽하진 않지만 다른 와인들 사이에 살짝 끼워 놓으면 같은 것을 구할 때까지 발각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인은 손을 털고 돌아섰다.

“어떡하죠….”

호진은 생애 최초로 절도 및 사기를 벌인 충격에 덜덜 떨고 있었다. 물론 동공이 흔들리는 것은 정인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걸 지금 이실직고하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좆 되는 거지만, 조금 전의 임시방편으로 우리는 확률을 50퍼센트까지 낮춘 거야. 대충 세미 좆 상태라고 생각하면 돼.”

“…….”

“고민한다고 해서 답 나오는 거 아니니까 지금은 물놀이나 하자.”

“으으…. 네.”

그의 손을 잡고 터덜터덜 별장을 나섰다. 백사장까지 나오는 동안 해가 조금 더 기울어 곧 노을이 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분명 그렇게까지 맛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요?”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 정도 퀄리티를 몰라볼 수가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저거 싸구려 와인 맛이었던 것 같아.”

10달러짜리 박스 와인에서나 날 법한 향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쭈뼛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다.

“이쪽으로 오세요.”

호진은 파도가 낮은 자리로 정인을 이끌었다.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 손에 의지해 한 발짝씩 내디뎠다. 허벅지를 간질이던 수위는 금세 높아져 허리 위까지 올라왔다.

“수영할 줄 아세요?”

호진이 물었다.

“물속에서 조금 움직일 수는 있어.”

“음…. 조금만 해 보실래요?”

정인은 투명하게 바닥이 비치는 물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대로 힘을 풀자 무릎부터 꺾이며 몸이 뒤로 넘어갔다.

보글보글 거품 소리를 들으며 팔다리를 축 늘어트렸다. 아래로, 더 아래로. 손쓸 틈도 없이 등이 가라앉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렇게 가라앉다가 적당한 때에 눈을 뜨면 된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숨이 막힐 때까지 바닥을 향해 내려가면 되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진다면 가고자 하는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면 된다.

“잠깐만요.”

물속에서 눈을 뜨려는데, 갑자기 몸이 들리며 숨통이 트였다.

“왜 자꾸 물에 그렇게 들어가세요?”

“응?”

“그러고 보니 늘 그랬던 것 같아서요. 쓰러지는 것처럼 힘없이.”

소금기에 눈이 따끔거렸다. 정인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웃었다.

“이게 편해.”

호주에 도착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바닷가에서 한국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며 울다가 충동적으로 물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여기선 아무도 말리지 않을 테니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핑을 하던 베스가 우연히 그 모습을 발견했고, 정인은 곧바로 구출되고 말았다.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로만 중얼거리는 소년이 귀찮았을 법한데도 그녀는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정인을 제집으로 데려가 먹이고 씻겨 재웠다. 다시는 보호자 없이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잔소리와 함께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정인은 꾸준히 물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죽는시늉이라도 해야만 겨우 하루를 견뎌 낼 수 있던 날들이 참 많았다.

“…….”

한없이 외롭고 괴롭던 시절을 생각하니 착잡해졌다.

“그래도 이제는 그러지 마세요.”

그때였다. 호진이 손을 뻗어 엉망이 된 정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이런 곳에서는 그렇게 뛰어들면 휩쓸려 가요. 멈춰 있는 물이 아니라서요.”

맑은 눈동자 위로 황금빛 햇살이 담뿍 묻어났다. 정인은 홀린 듯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물속에서는 누구든 잠깐만 정신을 놓아도 길을 잃어요. 하지만 제대로 헤엄치는 법을 알면 높은 파도에 휩쓸리더라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어요.”

제대로 헤엄치는 법. 늘 맥없이 가라앉는 것만을 택해 온 정인에게는 까마득하게만 들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호진은 두 손으로 정인의 뺨을 감쌌다.

“천천히 알려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이런 나라도 지금부터는 제대로 헤엄칠 수 있을까, 쉴 틈 없이 움직이며 흐르는 이 삶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정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평화로운 오후였다. 대본 한 권을 들고 저택을 돌아다니던 주영의 걸음이 멈췄다.

“그래서, 아직도 안 나왔다?”

서재 너머 들려오는 현욱의 목소리에 미미한 짜증이 어려 있었다. 주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서재를 향해 다가갔다.

“일단 이쪽에 알렸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나올 때 연락 주세요.”

통화를 마친 현욱은 느린 걸음으로 책장과 테이블 앞을 오가더니 어딘가로 또 전화를 걸었다.

정인이, 실종 신고, 자미도, 선장. 띄엄띄엄 들려오는 단어를 전부 조합하자 어느 정도 각이 나왔다. 아무래도 정인이 말없이 자미도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성인인데 혼자 좀 놀러 갈 수도 있지. 애가 엇나가지 않은 게 기적…. 아, 맞다.”

자미도를 생각하니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작품이 끝나고 섬에 들어갔다가 아무 생각 없이 까먹은 최현욱의 와인 한 병이 바로 그것이었다.

단지 라벨이 예뻐서 제일 먼저 눈길이 갔을 뿐이다. 한 병에 억 소리가 나는 걸 별장에 처박아뒀을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고, 가격도 가격이지만 희소성을 알게 된 뒤 너무 놀라서 급한 대로 편의점 와인을 사다 채워 놓았었다.

“하아….”

경매 외에는 구할 길이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난다 긴다 하는 재벌들이 죄다 달려들어 가격을 올릴 경매 판에 뛰어들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아득해서 한숨부터 터졌다. 그러다 문득 현욱에게로 눈길이 갔다. 다 큰 조카가 제 손바닥 안에서 좀 돌아다녔다고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구는데….

“그렇지. 애기가 마신 거라고 말 맞추면 얘기가 달라지지.”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입이 귀까지 걸렸다. 주영은 정인이 좋아하는 음식들의 목록을 떠올리며 돌아섰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었다.

***

한편 정인은 호진에게 잠수부터 차근차근 배워 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운동선수 출신이라고 호흡에는 금세 적응했다. 호진이 몇 번쯤 시범을 보이며 가르쳐 주자 어설프게나마 팔다리를 움직여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게 되었다.

“하아, 나 아무래도 수영에 재능 있는 것 같아.”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물속에서 통제력을 갖는 건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었다. 심지어 호진이 끊임없이 칭찬해 주니 급격히 자신감이 붙기까지 했다.

“있잖아, 혹시 저기까지도 갈 수 있을까?”

정인은 물에 푹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저만치의 바위섬을 가리켰다. 호진은 정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멀지는 않은데…. 물길 좀 보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는 제 가슴팍까지 찰랑찰랑 차오른 물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몸을 숙여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노을 색으로 너울거리는 물을 가르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호진은 경기에서 보았던 것처럼 팔을 길게 뻗어 속도를 올리기도 하고, 이따금은 유연하게 방향을 틀어 멈추기도 했다. 그러다 파도가 너울거리면 힘을 빼고 하늘하늘 떠내려가다가 물살이 잠잠해지는 타이밍을 골라 앞으로 나아갔다.

“누가 선수 아니랄까 봐…. 씨, 괜히 나댔네.”

잠시나마 솟구쳤던 자신감이 힘없이 사그라졌다. 그러면서도 정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수족관을 벗어난 돌고래처럼 자유롭게 헤엄치는 호진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호진은 바위에 도착했다. 반쯤 넘어간 해가 그의 등 뒤에서 붉게 빛났다. 작고 검은 그림자가 된 호진은 멀리서 혀엉, 하고 부르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보이지 않아도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때?”

그를 향해 소리쳤다. 호진은 대답 대신 팔을 하나로 모아 풍덩 물에 빠져들더니 눈 깜짝할 새 정인의 앞에 나타났다.

“딱히 위험한 건 없었어요. 같이 가 보실래요?”

정인은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진과 함께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제대로 수영을 하는 건 힘없이 가라앉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그새 근육통을 전부 잊은 정인은 느리지만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갔고, 호진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 동작이 꼬여 가라앉겠다 싶어질 때엔 부리나케 달려와 정인을 물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는 사이 바위는 아주 가까워졌다. 정인은 온힘을 다해 헤엄쳐 작은 바위섬의 끄트머리를 짚었다.

“하아, 하아…. 진짜 이게 되네.”

“수고하셨어요.”

푹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호진과 나란히 해를 향해 앉았다.

“예쁘지?”

노을이 온 세상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가운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형이 더 예뻐요.”

“…그러시겠지, 아무렴.”

열심히 운동을 한 뒤라 그런지 노곤해서 대꾸를 할 기운조차 없었다.

“호진아, 나 있잖아….”

한참 그렇게 잔잔히 가라앉은 바다를 내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어릴 때부터 항상 여기에 한 번 와 보고 싶었어.”

“이 바위요?”

“응. 툭 튀어나와 있어서 노을 볼 때마다 거슬렸거든.”

호진이 웃었다.

“와 보니까 어떠세요?”

“…좋네.”

가장 예쁜 풍경을 담은 엽서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 앉아 노을을 보고 있으니 해변가에 우울하게 앉아 있던 열여섯의 최정인이 떠올랐다. 속에 들끓는 열을 어쩌지 못해 가만히 있는 바위까지 미워해야 했던.

“수영 좀 배워 놓을 걸 그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죄 없는 바위를 미워하지는 않아도 됐을 텐데.

“…저는 반대인데.”

호진이 정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수영 같은 건 배우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거든요.”

“왜?”

“그랬으면 평생 그냥 재미있기만 했을 것 같아서요. 기록을 재지 않는 수영은 이렇게나 재미있는데….”

담담하게 이어지던 말이 멈췄다.

호진은 별안간 고개를 들어 먼발치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형. 저 이제 더 애쓸 수 없을 것 같아요.”

한참의 침묵 뒤였다. 호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웃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저물어 가는 오늘의 태양이었지만,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다가올 한여름의 해처럼 찬란한 미소였다.

“매번 사람들이 바라는 엄청난 발전을 이뤄 내는 건 무리예요. 항상 금메달을 딸 수도 없을 거예요. 어쩌면 어깨가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다음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할지도 모르죠.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담담한 말문이 열렸다. 정인은 그의 마음이 어딘가에 기울었다는 것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저는 아직도 수영이 재미있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라는 걸 잠시 잊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말을 하는 호진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하고 가뿐해 보여서, 정인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이제부터는 마음껏 실패하고 싶어요. 설령 꼴찌가 돼서 모두를 실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부터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저의 최선만을 다하고 싶어요.”

“…….”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 물론이지.”

정인은 손을 들어 호진의 뺨을 만졌다. 사실 완벽한 정답을 알지 못하는 건 정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만큼은 그가 원하는 답 위에 서고 싶었다. 설령 그게 오답일지라도.

“호진아. 우리는 참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 거래.”

문득 회계사 선생님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당장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쥔 것 하나 없이 새 길을 떠나도, 기력이 쇠하기 전에 반드시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을 나이래.”

지혜로운 어른의 말씀답게 이번에도 틀린 것 하나 없다.

모든 것이 영영 무너진 줄로만 알았던 열여섯의 최정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해변에 앉아 바위를 미워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스물둘의 최정인은 제대로 헤엄치는 법을 배워 기어이 이 미운 바위 위에 오르고야 말았다.

영영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던 사랑을 양손에 넘치도록 쥐고, 영영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일을 차츰 잊어가며.

“적어도 내 삶은 그렇게 흘러갔던 것 같아. 모든 게 다 어그러졌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나아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살아져서 결국 너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

아무래도 내가 도착한 첫 번째 장소는 너인가 봐. 조금은 쑥스러운 고백을 토해 냈다. 이것은 호진을 향한 고백이기도 하고, 정인 자신을 향한 고백이기도 했다.

“이제는 내 길에 다음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그게 정확히 어디일진 아직 모르겠지만 말야.”

가느다랗게 부는 바람 속에서 호진과 눈을 맞췄다.

“너도 그럴 거야. 심지어 너는 주저앉지 않고 잠시 멈췄을 뿐이니 더 빨리 다음 장소에 도착할 수 있겠지.”

“…….”

“마음껏 꼴찌가 되고, 마음껏 실패해도 좋아. 그러다 모든 걸 버리고 새 길을 떠나게 되어도 내가 너를 지킬게. 그러니까 너는 그냥 그렇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이제부터는 너의 최선만을 다했으면 좋겠어.”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위로하듯 조심스러운 키스 끝에 호진이 눈을 떴다.

“형, 혹시 그거 아세요?”

“응?”

“우리 처음 만났던 날 말이에요. 생각해보니 저 그날 그 시간에 형 만나려고 수업 빼먹었던 것 같아요.”

“뭐라고? 말도 안 돼.”

그땐 서로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수업에 빠질 이유를 만들기 위해 고생도 좀 했어요. 슬럼프도 세게 겪고, 경기하다 죽을 고비도 한 번 넘겨 보고.”

“야, 너….”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부상을 두고 이런 말이 어디 있는가. 깜짝 놀란 정인은 호진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 단단히 정인을 끌어안았다.

“스무 살에는 어깨를 다쳤고, 열아홉에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어요.”

호진의 시계가 점점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국가 대표 선발전을 치를 때까진 매일매일 딱 죽지 않을 정도로 훈련했고, 열여섯 살에는 정말 훈련하다 기절한 적도 있어요.”

“…….”

“그때도 충분히 어렸지만 서울로 올라온 건 더 어렸을 때의 일이고, 상경하기 전에는 항상 냇가에서 물고기 잡느라 바빴어요. 대여섯 살 쯤에는…. 진흙 속에 진주가 있다는 얘길 듣고 동네 연못을 파헤쳤다가 어른들한테 엄청 혼나기도 했어요.”

정인은 그의 말을 따라 어린 호진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말간 뺨을 한 고등학생이었다가, 중학생이었다가, 마지막엔 아주 작은 아이가 되었다. 양손에 진흙을 잔뜩 묻히고 웃는.

“그보다 더 전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긴 한데요.”

“…….”

“22년 전의 9월 21일에는 형이 태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한테 떼를 좀 썼던 것 같아요. 나도 빨리 태어나게 해 달라고. 이왕이면 저 사람이랑 같은 나라에.”

절정에 다다른 노을 속에서 호진이 정인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저는 그때부터 준비했던 것 같아요.”

틈만 나면 주책을 떠는 것의 일환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으니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항상 이 세상 어딘가에서 형을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살았나 봐요.”

서로를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이 세상 어딘가에 서로가 있었다는 말, 우연히 마주치는 때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거란 말. 그건 이미 지나가 버린 정인의 과거마저도 전부 바꿔 놓는 말이었다.

눈치 볼 것이라곤 없는 외딴 섬, 정인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또 한번 입 맞췄다.

“기다리느라 고생했네.”

눈을 감으니 열여섯의 바닷가였다.

작고 쓸쓸한 그림자를 매달고 있는 열여섯 최정인의 모습이 한 장씩 나타날 때마다 그 곁에 열다섯 유호진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러자 더 이상 예쁠 수 없을 것 같던 기억 속의 노을이 조금 더 예뻐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우울한 얼굴로 먼 곳을 보는 어린 최정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너의 세상 어딘가에 유호진이라는 사람이 자라고 있다고. 그리하여 언젠가 너는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그때가 되면 절대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일들도 조금은 나아져서, 몇 번이고 고꾸라지는 것 같아도 결국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날 수 있게 된다고. 정말로, 다 괜찮아질 거라고.

“호진아.”

끄트머리만 간신히 남은 오늘의 해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이대로 영원히 여기에 있을까?”

호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아요. 더는 도망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도망칠 필요가 없다라. 속으로 그의 말을 곱씹으며 정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선 어떻게 뛰어내려야 돼?”

“팔을 곧게 뻗고, 손끝으로 물을 뚫는다고 생각하세요. 팔꿈치가 저릿하면 제대로 들어간 거예요.”

그는 팔을 쭉쭉 당겨 풀고, 무릎과 발목을 차례로 돌렸다. 정인에게 똑같은 동작을 시킨 다음에는 물을 한 번 노려보더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거침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뛰어내리실 수 있겠어요?”

“응.”

점차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등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호진이 했던 것처럼 손끝을 뾰족하게 모으고, 자리에서 가볍게 뛰어올랐다.

수면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마침내 물속으로 들어서자 팔꿈치가 저렸다. 맥없이 가라앉으며 절로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대신, 힘차게 팔을 저어 물을 벗어났다.

“잘하셨어요.”

물 밖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거봐, 나 재능 있다니까.”

정인은 큭큭 웃으며 제대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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