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환경이 척박하게 변했다.
무거운 짐을 이끌고 피난하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지치고 무거운 걸음으로 떠나는 이들을 뒤로하고 도착한 국경 마을은 기이할 만큼 조용했다.
고요하고 어딘가 흉흉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며칠은 씻지 못한 듯 보이는 아이들이 상점에서 먹을 것을 얻어나오는 것을 본 키릴이 걸음을 멈췄다.
“사상자가 몇 있었다고 들었는데……. 저 아이들 모두 부모를 잃은 겁니까?”
“기존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입니다. 사상자는 몇 없었지만, 부상자나 일자리를 잃은 자들이 많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마을 경제가 파탄 나기 직전이라. 보육원 지원이 제대로 될 턱이 없지요.”
“중앙에서 나오는 보조금이 있을 텐데…….”
“보육원 시설이 온전치 않은데 기존 보조금만으론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경제력을 상실한 가정이 너무 많아 보육원에 아이를 버리고 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
키릴은 생각보다 더 피폐한 마을 풍경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상황이 장기화해선 안 되었다. 다른 영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식량 지원부터 하지요. 우리가 가져온 것 먼저 오늘부터 풀고……. 추가 지원은 삼 일 뒤에 오던가요?”
“예. 삼 일 뒤부터 주 간격으로 순차적으로 옵니다. 그럼 하루 한 끼 정도는 제공 가능할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저는 부상자들을 살피고 실종된 형제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예, 호위를 붙여드릴 테니 그들과 꼭 함께하셔야 합니다. 부디, 보중하시길.”
동행한 관리의 배웅을 받으며 키릴은 먼저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멀리 주신전의 문장이 수놓아진 하얀 천막이 보였다.
이곳은 수인족을 상대로 문물 교류를 하던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같은 국경이라도 정규군이 주둔하는 변경백의 영지와는 사정이 달랐다. 자경대만으로 대응이 어려워지자 찾은 곳이 가까운 주신전이었을 것이다.
신전에서 온 신관들은 이곳에서 자신처럼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부상자들을 치유했을 터였다.
그런데 어쩌다 봉변을 당한 것일까. 걸어가며 신성력을 퍼뜨려 보았지만 느껴지는 건 없었다. 최근 삼 일간 신성력이 사용된 흔적이 없다는 뜻이다.
천막에서 자경대로 보이는 자들이 몸에 붕대를 감고 나오고 있었다. 치유술이 아닌 일반적인 처치를 받고 나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키릴은 걸음을 서둘러 천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참 뒤, 키릴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천막을 나섰다. 치료하며 실종된 이들에 관해 물었으나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벌써 해가 진 뒤였다. 쌀쌀한 바람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뒤따라 나온 병사가 이곳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다며 자신의 겉옷을 둘러 준 후 재빨리 되돌아갔다.
“감사합… 아…….”
인사할 틈도 없이 떠나간 병사를 보며 키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대충 걸쳐진 옷을 제대로 껴입었다. 키릴은 고개를 갸웃하며 익숙한 옷의 무늬를 더듬다 숙소로 돌아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받아 온 옷을 정화하여 잘 개어 놓았다. 내일 돌려줘야지. 흐릿하게 웃으며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었을 때였다.
“아……!”
갑자기 키릴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몸 안에서 대량의 신성이 빠져나갔다. 깜짝 놀란 키릴이 주위를 확인하는 중 강한 빛이 그의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앞에 반투명한 전이문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커다란 타원형의 원 안에 낯선 광경이 보였다. 어둑한 방 안.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신관 둘이 문 너머에 있었다.
“설마…….”
전이문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의 신성을 강제로 끌어다 쓸 수 있는 건 신성을 내린 신뿐.
키릴은 서둘러 눈앞에 보이는 옷을 껴입고 전이문 앞에 섰다. 이 문은 저 너머에 있는 형제를 구하라는 주신의 뜻이었다.
“제 생각이 맞습니까?”
웅- 웅-
마치 대답하듯 문이 떨렸다. 키릴은 호위를 부를까 하다가 혼자 남겨진 뒤에 전이문이 생긴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다.
그러다 곧 성수를 통해 본 환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누군가를 부를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키릴은 안도와 동시에 치밀어 오른 거북한 감정을 누르며 문을 건넜다.
전이문을 통과하자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키릴은 창문 하나 없는 석조로 된 방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식기와 가구, 그리고 오래된 담요 위에 문 너머로 보았던 신관 둘이 누워 있었다.
서둘러 다가가 확인하니 다행히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붉은 안색을 훑어보던 키릴이 중얼거렸다.
“신열?”
과도한 신성력을 사용한 뒤에 오는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장시간 방치되면 급속히 몸이 쇠약해져 자칫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키릴은 서둘러 신관의 몸 안에 신성력을 주입하여 기운을 안정시키고 치유를 시작했다.
“한 명씩 옮기면 될 것 같은데…….”
아직 전이문이 유지된 상태니 두 신관을 데리고 숙소로 갈 수 있었다. 의식을 잃어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안았을 때였다.
끼익-
문이 열렸다.
놀란 키릴이 황급히 품에 안은 이를 전이문 너머로 밀어 넣었다.
“누구세요?”
남은 한 명도 마저 데려가려 하는 순간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쟁반을 든 수인족 꼬마가 키릴을 쳐다보고 있었다.
겁먹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키릴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반사적으로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 보이려 했지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표정은 더욱 딱딱해졌다. 아이의 머리 위에 쫑긋 솟은 짐승 귀를 보자 계시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키릴은 손을 덜덜 떨면서도 다급히 남은 신관을 전이문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난 후 표정을 가다듬고 아이를 향해 물었다.
“여기 사니?”
“아저씨들을 어디로 데려간 거예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에 키릴이 안심하라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아저씨들이 온 곳으로 보냈단다. 그래야 집으로 갈 수 있거든.”
“……그럼 됐어요.”
어린 얼굴에 초연한 빛이 어렸다. 키릴은 뒤늦게 아이가 죽그릇이 든 쟁반을 가져온 것을 알았다. 키릴이 아이에게 다가가 그 앞에 허리를 숙였다.
“네가 두 사람을 도와준 거니?”
“엄마랑 언니랑 옆집 아줌마를 치료해 주고 쓰러졌어요. 심한 병이라 못 고친다고 했는데 고쳤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아저씨들을 간호해 주고 있었구나.”
키릴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여긴 제국의 영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까 아저씨들처럼 다른 치료사들도 여기에 있니?”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키릴은 아쉬운 감정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실종된 신관 네 명 중 둘만 찾았다.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을까…….
그때 아이가 이어 말했다.
“옆집 아저씨가 몰래 보내줬어요.”
놀란 키릴이 아이의 팔을 잡았다.
“몇 명이었는지, 언제 보낸 건지 혹시 아니?”
“두 명. 어젯밤이요. 아저씨는 조금 전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아파요. 혹시…… 도와줄 수 있어요?”
“당연히 도울 거란다. 너와 네 친절한 이웃들 덕분에 내 형제들이 무사할 수 있었으니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니.”
표정이 환해진 아이가 서둘러 쟁반을 탁자 위에 두고 따라오라는 듯 문 앞에 섰다. 아이를 따라 나가던 키릴이 문득 뒤를 돌았다. 전이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이리되는구나.’
환영 속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서둘러 입고 나오느라 몰랐지만, 지금 자신은 환영 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오늘, 만나게 되겠지. 한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아이와 함께 조금 멀리 떨어진 마을로 가자, 그곳에 아이가 말한 수인족 아저씨가 있었다. 짐승이 할퀸 듯한 상처를 중심으로 상체의 한쪽이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해 보여 서둘러 치유를 시작했다. 강력한 신성력에 깊은 상처가 순식간에 치료되었다. 기뻐하는 아이와 이웃들을 보며 키릴은 그들의 번영을 빌었다. 고마운 이들이었다.
무릎을 꿇고 마지막으로 환자의 안녕을 기원하며 막 허리를 세웠을 때였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누군가 키릴의 뒤에 서 있었다. 눈앞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본 순간, 키릴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계시에서 봤던 것과 같아……. 그가 온 거야.’
그림자가 한쪽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키릴은 이어질 일을 알면서도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곧 퍽 소리와 함께 머리가 깨질 듯한 충격이 키릴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