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황제의 방문이 끊겼다.
한동안 키릴과 기도실에 박혀 있던 황제였으나 나라에 중대한 행사가 코앞이라 어쩔 수 없었다. 수도의 주신전은 황궁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황실 전용 전이문도 있었다.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었음에도 들르지 못할 정도로 황제는 궁을 빠져나올 여유가 전혀 없었다.
반대로 키릴은 간만에 여유가 생겼다. 신전에서 키릴에게 휴식을 준 것이다. 신관으로 임관받기도 전에 부담스러운 일을 맡아 제국과 신전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한 것이라곤 황제와 벌거벗고 몸을 겹친 것밖에 없는데 공이라니. 키릴은 수치와 죄책감을 삼키고 얌전히 기도하며 지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키릴은 오랜만에 정원을 거닐었다. 요 얼마간은 예비 신관으로서 일할 때를 제외하면 숙소에서만 지냈다. 느긋하게 햇볕을 쬐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멍하니 산책로를 따라 걷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멀리 신전 기사들의 훈련장이 보였다.
그대로 걸음을 잇던 키릴은 마음을 바꿔 산책로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훈련장을 보니 훈련 중인 기사들이 보였다. 쉬지 않고 움직이며 땀을 쏟는 모습에서 넘쳐흐르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져와 키릴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고 보니 웃어 본 적이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황제를 만나기 전이었겠지. 얼마 전의 일인데도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나도 얼마 전까진 저랬던 것 같은데…….’
눈을 반짝이며 신관이 될 날을 기대하던 자신의 어린 모습이 떠올랐다. 어리다고 했지만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신관이 되어, 주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다.
남자인 그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게 신의 뜻이라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상대가 황제였던 걸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질문이었다. 오히려 생각할수록 가슴만 답답해질 뿐이다.
키릴은 생각을 거두고 다시 훈련장으로 눈을 돌렸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은발을 이마 위로 쓸어 넘기자 살짝 땀이 묻어났다.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키릴은 가운을 벗어들었다.
그때 눈앞에 음료가 담긴 잔이 내밀어졌다.
“괜찮으시면 드시겠어요?”
훈련복을 입은 아이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열 살 정도 되었을까. 입고 있는 옷을 보아 수련생인 듯했다.
“설마, 일부러 가져온 거니?”
투명한 잔에 살짝 물방울이 맺힌 것을 본 키릴이 묻자 아이가 수줍게 웃었다.
땀이 흥건한 아이의 이마를 보며 거절하려던 키릴은 별처럼 반짝이는 보라색 눈에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고맙구나.”
상큼한 과일 향이 시원하게 입안 가득 퍼졌다. 키릴은 몇 모금 넘긴 후 아이에게 잔을 내밀었다.
“같이 마셔 주지 않겠니?”
“예? 아, 하지만 이건 사제님께 드릴 건데…….”
“너도나도 더운 건 똑같잖아. 자, 어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 주자, 놀란 아이가 쭈뼛쭈뼛 손을 내밀어 잔을 받았다.
볼을 빨갛게 붉히고 음료수를 마시는 아이를 키릴이 다정한 눈으로 보았다.
“수련생인 것 같은데 훈련하기 힘들진 않니?”
“힘들지만 제가 원해서 하는 거라 괜찮습니다.”
“…그래?”
“네! 열심히 해서 꼭 기사가 되고 싶어요!”
활짝 웃는 얼굴이 햇살같이 환하게 빛났다. 키릴은 눈부신 듯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되뇌었다.
‘원해서 하는 일. 내가 원한 일이라…….’
내가 원해서 들어온 신전이었다. 원해서 섬긴 신이었고, 원해서 법복을 입고자 했다. 다행히 신께서 받아주셨고 과한 은혜를 받았다. 넘치는 사랑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충실한 종이 될 것이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게 아닌가 두려웠지만, 아직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그분의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던 것뿐이었다.
“나도 힘내야겠구나. 어떻게든.”
이것이 비록 자기 위안일 뿐이라도, 힘내서 제 할 일을 마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 이것도 신이 주신 고난의 일부일 뿐. 잘 이겨내어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네 덕분이야.”
키릴은 고맙다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키릴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애교부리는 작은 동물이 생각나 키릴이 웃음을 참지 못해 흘리자 아이가 따라 웃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예뻐 가슴에 남았다.
키릴은 윗분의 부름에 수련생이 돌아갈 때까지 후끈한 바람을 맞으며 그곳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