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키릴은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대신관에게 붙잡혔다. 대신관은 전날 선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란 듯했고, 선황의 전담 신관이었던 키릴을 위로하고자 했다. 키릴은 죄책감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황실에서 일주일 뒤에 장례를 치른다고 하는데 키릴 형제님도 참석하겠군요.”
“……네, 그래야지요.”
선황의 갑작스러운 부고에도 제국은 조용했다. 황실에선 이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고자 서둘러 장례를 치르려 했지만, 황실 내부 사정으로 의식은 며칠 더 뒤로 미뤄졌다.
선황의 장례식이었으나 그 자리에 진정으로 선황을 애도할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다들 선황의 완전한 끝을 지켜보며 키릴처럼 내심 안도할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불편한 자리였지만 그렇다고 빠질 수는 없었다.
“마지막이니, 참석할 생각입니다.”
“그래요. 예하를 대신하여 저도 동행할 테니, 키릴은 마음만 추슬러요. 참석하신 분들 상대는 제가 합니다.”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에 가시가 걸린 것 같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선황의 목을 벤 검의 잔영이 키릴의 심장에 남아 있었다.
키릴은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주신의 신상에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간절함을 담아 기도했다.
‘일리야는 주신께서도 눈감아 주실 거라 했었지만. 신께서 아니라고 하신다면, 내가 책임져야지. 그러니 제발, 어제 일의 여파가 일리야에게 닿지 않게 해 주시길.’
전날 그리 큰일이 있었는데도 신전은 어제와 같았다. 평온한 공기 속에서 오전 예배 시간이 지나갔다.
변하지 않은 일상에 저도 모르게 안심했고, 마음을 놓고 있을 때였다. 기도가 끝나고 잠깐 옆을 돌아본 순간, 일리야와 눈이 마주쳤다. 키릴은 바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는 기사가 일리야였구나. 그런데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계속 키릴을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아한 눈매가 곱게 휘었다. 휘황한 조명 빛에 반짝거리던 보라색 눈동자를 떠올리자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앞에 어린 소년이 어른거렸다. 땀을 흘리며 수줍게 잔을 건네던 소년의 무구한 얼굴 위로 제 성기를 핥으며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남자의 환영이 섞여들었다.
키릴은 황급히 신상으로 눈을 돌렸다. 주신의 눈이 오늘따라 매섭게 느껴졌다.
쿵, 쿵. 날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키릴은 슬쩍 가슴에 손을 대었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계속 시선이 느껴져서 괜히 초조해졌다. 키릴은 애써 생각을 떨치며 예배에 집중했다.
키릴은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을 봐선 집중에 반은 실패한 듯했다.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마지막 기도가 끝났을 때 그는 제법 지친 상태였다.
집무실로 돌아가 조금 쉰 뒤에 업무를 봐야 할 것 같았다. 키릴의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추기경이 그런 키릴을 멈춰 세웠다.
“키릴.”
“예, 예하. 부르셨습니까.”
“안색이 어두운데 괜찮은 겁니까?”
괜찮다고 말해도 심각한 표정으로 키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추기경이 힐끔 키릴의 뒤를 살폈다. 그러자 추기경의 수행 사제가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수행 사제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추기경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음, 이번에 황궁으로 갈 때 성기사가 동행할 텐데. 이제 키릴도 대신관이 되었으니 슬슬 전담 기사를 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전담 기사를 들이란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권유에 당황한 키릴이 추기경을 향해 되물었다. 추기경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키릴의 뒤를 가리켰다.
“저 기사는 어떻습니까?”
“……아.”
추기경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엔 신전 기사단의 단장과 일리야가 서 있었다.
“단장 옆에 서 있는 저 젊은 기사 말입니다. 듣자 하니 장래가 기대되는 청년이라던데. 키릴과 아는 사이라 들었습니다.”
“…….”
“기왕 곁에 둔다면 친분이 있는 자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진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예, 말씀 감사합니다. 고려해 보겠습니다.”
키릴은 망설이다 그렇게 대답하곤 자리에서 물러섰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아까부터 계속 닿는 시선을 피해 키릴은 주신의 문장을 올려다본 후 바로 발길을 돌렸다.
같은 신을 모시며 신전 안에 있는 한 일리야와는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일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그와 바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키릴은 아직 그 앞에 서기가 무서웠다. 어젯밤과 아침에 그런 일이 있었던 직후라 그런지 그 앞에서 제 의사를 제대로 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사과해야 하는데…….’
하지만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