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불효 1권
목차
#1. 재앙의 시작
#2. 두 아들의 행방
#3. 순응과 합리화
#4. 미신
#5. 본능 (1)
#1. 재앙의 시작
낡은 알람 시계가 쇳소리를 내며 침대 옆 탁자를 긁어 댔다. 선뜩한 시계 소리는 듣는 이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니콜라스는 눈도 못 뜬 채 서둘러 시계를 껐다. 그러지 않으면 알람 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나 버릴지도 몰랐다.
어두컴컴한 아침이었다.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친 노동자는 비틀거리며 눅눅한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와 주방의 불을 켰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단 두 걸음만을 뗄 수 있을 만큼 협소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곤함에 절은 중년 남성은 찐득하게 기름때가 낀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냉장고를 열었다. 낡은 냉장고는 고무 패킹이 닳아 제대로 닫히지 않는 바람에 몇 번이고 신경 써서 닫아야 했다.
미리 만들어진 음식을 꺼내 데우기만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부 맏아들인 로건 덕이었다. 로건은 볼품없는 식재료를 입에 넣을 수 있을 만한 음식으로 만들어내곤 했다. 그의 특출난 재주 중 하나였다.
니콜라스는 기특하게 자란 첫째를 속으로 칭찬하며 뜨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볶음 요리를 접시에 덜었다. 신선하지 못한 재료를 감추기 위해 간을 세게 한 음식이었지만 배를 채우기에는 딱 좋았다. 짠맛이 강한 아들의 요리는 먹다 보면 저절로 물을 많이 들이켜게 되어 적은 양만 먹어도 저절로 배가 불러왔다.
빠르게 식사를 끝마친 니콜라스는 녹슨 싱크대에 빈 접시를 넣어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싱크대와 마찬가지로 녹슬고 지저분한 샤워기는 늘 변덕스러웠다. 어디에 온도를 맞추든 뜨거운 물과 미지근한 물을 번갈아 가며 뱉어냈다.
이 나이 든 남성은 푹푹 찌는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부류였다. 그래서 난데없이 차가운 물이 뿜어져 나와도 굴하지 않고 수도를 맨 끄트머리까지 돌려놓는 편이었다.
“후….”
물때가 잔뜩 낀 거울에 인간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니콜라스는 물로 흠뻑 젖은 손으로 거울에 서린 김을 닦아내고 면도를 했다. 항상 잠이 모자란 탓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피곤에 절은 녹색 눈동자가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욕실의 어두운 주황색 조명 때문에 더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젊은 시절엔 제법 수려한 외모였을지 모르나, 이제는 세월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티가 났다.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눈썹이 진했지만 관리하지 못한 얼굴은 나이를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턱 아래로만 본다면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가슴팍은 청년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하고 봉긋했다. 그 아래로 열이 잘 잡힌 복근이나, 섬세한 등 근육은 모두 피곤에 절은 얼굴과는 달리 생동감 있어 보였다. 한마디로 그의 몸은, 나이에 비해 두툼하게 근육이 잘 붙은 뽀얗고 야들거리는 몸이었다.
세면 후 욕실에서 나온 니콜라스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대충 털다가 수건을 빨래 통에 던져 넣었다. 물기를 머금어 굽실거리는 밝은 갈색의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 그의 이마를 덮었다. 기름으로 얼룩진 안경을 주워 쓴 다음 낡고 얼룩진 출근복까지 챙겨 입은 니콜라스는 영락없는 육체노동자처럼 보였다.
“아빠 다녀올게.”
니콜라스는 냉장고 위 칸에 누런빛으로 바랜 알록달록한 그림에 대고 인사했다. 그는 출근하러 나가기 전, 둘째가 그린 그림에 인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거칠거칠한 도화지에 세 사람이 초록 정원 딸린 집 마당에 손을 잡고 서 있는 장면이 그려진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보였다. 비록 일그러진 형태였지만, 마당에 귀여운 강아지도 그려져 있었고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 있는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잊지 않고 주방의 불을 끄고서야 마침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멀리서 하늘이 밝아오는 게 보였다. 새벽 출근은 언제나 고단했다.
*
차가운 아침 공기를 들이쉬면 폐에 쐐기가 박히는 느낌이었다. 니콜라스는 쿨럭쿨럭 잔기침을 내뱉으며 출근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철 버스의 앞머리가 안개를 헤치고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버스 문이 열리자, 퀴퀴한 습기와 담배 찌든 냄새가 니콜라스를 맞이했다. 그는 새벽 통근 버스의 첫 번째 탑승자였다. 덕분에 앉아서 갈 수 있는 건 큰 행운이었다. 좌석에 앉자마자 고단한 노동자는 습관적으로 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버스가 심하게 덜덜거리는 통에 멀미가 날 법도 했는데 니콜라스는 자리에 앉는 순간 곯아떨어졌다.
차가 위아래로 들썩일 때마다 조금씩 흘러내리던 안경이 코끝에 걸쳐진 채 버스의 움직임을 따라 출렁거렸다. 니콜라스가 잠에 빠진 사이 버스는 점점 그의 동료 직원들로 가득해져 갔다. 하나같이 피로에 찌든 얼굴들이었다.
버스에 탄 노동자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버스가 내달리는 소음과 잡음 섞인 라디오만이 공백을 채우고 있었다.
[유례없이 장마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기상청에 의하면 장마가 50일 이상 지속되면, 이상 징후의 현상으로 판단하여….]
오로지 목소리만 전달되고 있는데도 아나운서는 단정한 이미지를 주었다. 선잠에서 깬 니콜라스는 보나 마나 그녀가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상급 기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아무런 재주가 없어 사회에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는 자신과는 다른, 대단한 존재.
상급 기여자가 되어 도시 안쪽으로 초대받는 꿈을 꾼다 한들, 결국은 흙먼지와 땀으로 찌든 작업복을 걸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도심으로 이주하는 건 말 그대로 백일몽에 불과했다.
작업장에 도착한 버스는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을 우르르 뱉어냈다. 전혀 개성적이지도, 활기차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연장을 들고 일하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일개미처럼 보였다.
작업장 안의 제 자리를 찾아간 니콜라스는 곡괭이를 들고 바위를 쪼개기 시작했다. 그 옆의 다른 노동자도 같은 일을 수행했다. 삽시간에 곡괭이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바위에 닿는 둔탁한 소리로 작업장이 온통 시끄러워졌다. 온 사방에 뽀얗게 흙먼지가 들어차면서 실내는 흡사 옅은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다.
흙먼지는 폐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었다. 니콜라스는 땀을 훔치며 연신 콜록거리는 기침을 토해냈다. 땀으로 젖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두꺼운 안경알 안쪽을 긁으며 더러운 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안경알을 닦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작업물은 계속해서 밀려들어 왔고, 감독이 쉬는 시간을 알리기 전까지는 쉬는 게 불가능했다.
이 작은 작업장에서는 하급 기여자들이 채굴한 암석에서 요긴한 광석을 솎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우선 큰 덩어리를 인력으로 쪼개면, 대기하고 있는 작업자들이 광물의 가치를 매겨 분류하는 단순한 과정으로 이어졌다.
진흙이 굳어져 형성된 암석은 곡괭이로 무른 부분을 찍으면 쉽게 쩍 하고 갈라졌다. 하나의 암석을 가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같은 과정이 수십 번, 수천 번씩 반복되면 피로도가 급격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감독이 쉬는 시간을 알리자마자 니콜라스는 바닥에 곡괭이를 팽개치듯 내려놓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몸 전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안경을 들어 올리고 더러운 작업복 소매로 눈가를 비벼가며 얼굴을 적신 땀부터 닦아냈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은 실컷 운 사람처럼 축축하게 젖어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허여멀겋고 얇은 피부는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거친 작업복 소매로 얼굴을 닦아냈을 뿐인데 온통 따끔거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제구실을 하는지 의심스러웠던 환풍기가 작동하긴 하는 건지, 일꾼들이 작업을 멈추자 실내의 먼지가 조금씩 가라앉고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라디오 뉴스에서 언급했던 대로 밖은 조금씩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몸에서 곰팡이가 피어난다 해도 놀라지 않겠어.”
“옷에는 이미 핀 거 아니고?”
옆에서 다른 이들이 배급된 빵을 씹으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도 여름의 장마는 길었으나, 이번 연도는 유독 비가 그칠 줄을 모르고 오래도록 내렸다. 최하급 기여도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저지대 마을에는 홍수가 일어나 대피했다는 등의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낡고 좁은 집이긴 했지만 적어도 니콜라스의 집은 최악까지는 아니었다. 그의 집은 최외곽의 빈민촌과 일반 기여도를 가진 거주민들이 사는 거주 지구 그 어느 중간쯤에 위치했다. 가끔 거실 쪽에 비가 샌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지낼 만한 편이었다.
“닉, 안 먹게? 안 먹을 거면 나 줘.”
“아냐, 먹고 있어.”
옆에서 떠들던 동료가 니콜라스가 먹던 빵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푸석푸석하고 싸구려 크림을 대충 찔러 넣어 만든 배급용 빵이었다. 빵은 오래된 빵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발효된 냄새와 함께 푸석거리는 식감이 특징이었다. 심지어 안에 든 크림은 너무 싼 재료로 만들어져서 먹는 순간 입천장에 느끼하고 꺼끌꺼끌한 감각을 남겼다. 언제 먹어도 맛이 없는 빵 조각이었지만 고되게 오전 작업을 하고 난 직후에는 입맛이 더더욱 없었다. 오후 작업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먹어야만 했기에 꾸역꾸역 먹는 중이었다.
니콜라스는 동료가 빵을 가로채기 전에 억지로 입에 크림빵을 쑤셔 넣었다. 퍽퍽하고 니글거리는 목 넘김이 유쾌하지 않아 결국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오전에 작업했던 광물들이 분류를 끝마치고 수레에 실려 작업장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본 니콜라스는 생각에 잠겼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저 돌덩이가 그렇게 값어치가 높은 광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반투명하고 탁한 돌 쪼가리에 불과했다. 혹여 돈이 될까 싶어 한두 덩이 슬쩍해봐야 무겁기만 할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수차례의 가공 과정을 거치면 보잘것없던 돌덩이는 아주 강력한 힘을 내는 에너지원으로 탈바꿈되었다. 니콜라스는 그 광석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 볼품없는 돌덩이가 나중에 가면 비싸진다는 사실과 본인이 정제된 작은 조각을 손에 넣으려면 300년간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었다.
그 복잡한 역사와 흐름, 사회적인 법과 제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니콜라스에겐 당장 내일 먹을 음식과 생계를 유지할 일급이 더 중요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어서 상급 기여자가 되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아들들과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를 포함한 모두가 알다시피 그건 그저 꿈에 불과했다. 배우지 못하고 별다른 재주가 없는 니콜라스에겐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사회 기여도가 낮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시대인 탓이었다.
니콜라스에게 먼 이야기였으나, 인류가 처한 현실을 모른 척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인류가 새 행성을 찾아 떠나 도시를 세운 지도 벌써 한 세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주 표준시로 100년이 안 되는 동안 새 행성에 무사히 정착해 사회를 재건해낸 인류의 생존력만큼은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지구에서 누리던 모든 것들에 비해 현 인류의 삶은 낙후되었다. 기술이 발전해서 일부의 삶은 편해졌을지 모르나, 평등과 인권이라는 개념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부족한 자원을 놓고 인류는 사회 공헌도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았다. 인류의 생존에 이득이 되는 일을 할수록, 기여도가 높을수록 사람의 가치를 높게 쳐 주었다. 지구에서와는 달리 기술자들이 마땅한 대우를 받았고, 사람들은 실용 학문 이외의 것들이 다소 위축된 시대를 살고 있었다. 즐거움과 향락을 생산해내는 기여자들은 크게 환대받지 못했다. 아주 일부만이 예술가로 활동했고 나머지는 전부 생존을 위한 일에 매달렸다.
어떤 식으로든 계급이 나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계급의 고저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능이었다. 능력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는 가치가 증명된 사람만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니콜라스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새 행성에서 가치를 입증하는 일에 실패했음이 틀림없었다. 그 증거로, 니콜라스의 집안은 쭉 전문적인 공학 기술을 배우는 일과는 멀었고, 단순 노동으로 먹고 살아왔다.
본인이 단순 노동자인 만큼 육체노동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니콜라스는 될 수 있으면 본인의 두 아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자식들만큼은 미래가 없는 톱니 부품 같은 삶 대신 어떻게든 기여도를 인정받아 더 좋은 세계로 갔으면 했다.
스스로 자각하진 못했으나, 아이들은 니콜라스의 콤플렉스이자 미련이었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 작업장이었다. 그 시절, 밝진 않아도 함께 미래를 꿈꿀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급속도로 폐가 안 좋아져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로 작업장의 문을 드나들 때마다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속이 울렁거리곤 했다.
가진 재산 하나 없이 결혼해서 마침내 작은 집을 마련하고 더 나은 행복을 약속하는 순간, 위태롭게 타오르던 촛불처럼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두 아들은 그녀의 유산이었다.
작업반장은 폐 건강과 작업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설파했지만, 코흘리개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몸 상태가 나빠져 갔다. 오랜 세월 작업을 반복하면서 기침이 잦아지고 눈도 꽤 침침해졌다. 이제 니콜라스는 안경을 쓰지 않으면 사물을 흐릿하게 구분만 할 수 있었다.
본인이 몸소 고생한바, 두 아이만큼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첫째와 둘째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도와 이 일에 뛰어든다는 것을 엄하게 혼내가며 말렸다. 그때부터 아이들이 도왔다면 생계가 조금은 더 나아졌겠지만, 그러다가 두 아들까지 잃게 되면 니콜라스는 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두 아이는 아버지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고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두 살 터울이 나는 형제는 건장하게 자라 어느새 제 아비보다도 큰 키를 자랑했다.
몇 밤 자면 엄마가 돌아오냐고 묻던 로건과 더스틴의 목소리가 아직도 종종 니콜라스의 심장을 찔러대곤 했다. 아이들에게 차마 엄마는 이제 돌아오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어 아빠도 모른다고 대답했었다.
아이들도 크면서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버렸는지,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일이 없었다. 죽은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집안에서 거의 금기되는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니콜라스는 오로지 사랑스러운 아이들만 보고 살아갔다. 은연중에 집착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이야말로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을 넘어, 그래야만 한다고 비합리적인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나이 들고 망가진 몸이 더는 이룩할 수 없는 꿈을 두 아들이 대신 이루어 주길 바라는지도 몰랐다. 늙고 지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노동자들은 다시 컨베이어 벨트 앞으로 모여들었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져 실내를 덥고 습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작업장 천장에서 주르륵 물줄기가 떨어지기까지 했다.
거센 빗소리는 작업장 내의 깡깡거리는 소음을 덮어주었다. 애석하게도 작업장 내부의 더위를 식혀주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빗방울이었다. 작업 라인을 교대하면서 니콜라스는 곡괭이를 놓고 광석들을 운반하는 쪽으로 건너갔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세게 폭우가 내리는 중이었다.
“하늘에 뭔, 구멍이라도 났는감…. 어쩌려고 이러는지.”
“이상 기후인가 뭐시기 아녀?”
“그럴 리가요. 구행성도 아닌데 무슨….”
작업자들은 빗속을 뚫고 걸으며 한마디씩 했다. 니콜라스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진 않아도,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는 데 동감했다.
유례없이 긴 장마는 사람을 지치게 했다. 고작 세 발자국 떼었는데도 옷이 온통 흠뻑 젖어 피부에 기분 나쁘게 들러붙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작업자들은 빗속을 뚫고 작업장 옆의 처리장으로 광물을 운반했다.
광물 운반 기구를 조작하면서 빗속에서 미끄러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비가 억세게 내렸다. 처리장 입구까지 광물을 운반한 작업자들은 윗옷을 벗어 빗물을 짜냈다. 작업복에서 구정물이 폭포처럼 흘러나와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실내의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로 작업자들의 반질거리는 벗은 몸이 드러났다. 사내들끼리 있으니, 작업자들은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푹 젖은 옷에서 물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짜냈다. 하나같이 먼지를 뒤집어써 구질구질한 모양새였으나 근육 잡힌 몸만큼은 봐줄 만했다. 햇볕을 잘 쐬지 못한 탓에 뽀얀 빛을 유지하고 있는 니콜라스의 몸은 실내등 아래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봉긋한 가슴이 흉근의 무게감 때문에 약간 묵직하게 처진 모습을 가릴 생각도 않고 옷에서 물을 짜내기 급급했다. 희멀건 피부에 비해 선홍빛이 감도는 짙은 유두는 아주 탐스러워 보였으나, 니콜라스를 포함해 먹고 살기 바쁜 작업자 중 누구도 그런 몸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건 퍽 아쉬운 일이었다.
“영 찝찝하구만. 이거 작업장 매연이랑 그런 거 비에 다 섞인 거 아닌가 몰라.”
“그러게요. 아까부터 운전하는데 팔이 간지러워서 죽는 줄 알았네.”
작업반 막내가 팔뚝을 벅벅 긁었다. 흰 피부 위로 손톱자국이 새빨갛게 날만큼 세게 긁으면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명이 긁적거리기 시작하자 간지러움이 전염되는 듯했다. 어느새 작업반 전부가 몸 여기저기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여분의 작업복이 없었으므로 빗물을 짜낸 옷을 그대로 걸쳐야 했다. 돌아갈 때는 실내 통로로 이동하여 비를 맞진 않았으나, 허벅지와 살이 접히는 부위에 축축한 옷이 쓸리자 따끔거리면서 가려운 감각이 한층 강하게 느껴졌다.
*
별다른 사건 없이 오후 작업도 정해진 대로 흘러갔다. 남은 건 축축하게 젖어 피곤한 몸뚱이뿐이었다. 늦은 밤 통근 버스에서 니콜라스는 추위에 떨며 잠들었다. 젖은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던 탓에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낀 것이다. 통근 버스는 어둠과 비를 뚫고 미끄러지듯 도로 위를 내달렸다. 마침내 니콜라스는 푹 젖은 채로 밤늦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빠 왔다.”
“오셨어요?”
현관문을 열며 인사하자 부엌에서 무언가 볶고 있던 로건이 니콜라스를 맞아 주었다. 흠뻑 젖은 니콜라스에게 말없이 수건부터 내미는 건 둘째인 더스틴이었다. 니콜라스는 아들이 건네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턱을 닦아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종일 비가 내린 탓에 집 안도 습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로건이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는 중이라 후텁지근하기까지 했다.
“그래…. 너희는 잘 있었니?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비가 오던지.”
“잘 있었죠.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우산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더라고요. 결국 흠뻑 젖어서 들어왔어요.”
“더스틴, 너는? 하던 작업은 잘 되어가나 모르겠구나.”
“할 만해요.”
로건은 성격이 아비인 니콜라스를 닮아 유했다. 사람을 살갑게 맞아 주는 걸 잘하는 데다, 가정적이어서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중이었다. 반면 동생인 더스틴은 말수가 적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했고, 언제나 자기 일에 몰두하는 타입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말주변이 있는 로건은 상업 지구의 작은 소매 식품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스틴은 자질구레한 물건을 고쳐주는 철물점에서 일했다. 둘 다 신분 사다리를 한 단계 타고 올라갈 정도로 기여도가 높지는 않아도, 니콜라스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더스틴은 니콜라스가 몸을 닦은 수건을 빨래 통에 던져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최근 예술 분야에서 작업물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작업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막내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이것저것 조형하거나 고치기를 잘했다. 예술적 감각도 출중했다. 더스틴에게 부족한 건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였다.
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보기엔 니콜라스의 심미적 안목이 썩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기여도를 높이고 더 나은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더스틴의 설명을 듣고 아들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더스틴의 성격은 니콜라스를 거의 닮지 않았지만, 체구나 목소리만큼은 판박이였다. 그 투박해 보일 만큼 커다란 손으로 작은 목재를 들고 이리저리 깎는 모습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잔업이 없으셔서 다행이네요.”
“그래. 사실, 요 며칠 비가 심하게 와서 있던 일도 줄어들 전망이거든…. 작업장 유지 보수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나.”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니콜라스는 식탁 앞에 앉았다. 아버지의 말동무를 해주던 로건이 갓 만든 따끈한 음식을 접시에 내주었다. 채 썬 감자를 여러 야채와 볶은 것뿐이었지만 고소한 냄새가 일품이었다. 니콜라스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요리를 포크로 찍어 먹으며 말했다.
“너도 조심하도록 해. 아까 비 오는데 버스를 타다가 너무 놀라서, 원…. 도로가 많이 미끄러웠나 봐.”
“이렇게 비가 오는데 도로가 미끄럽지 않은 게 더 이상하죠. 비는 언제 그칠까요? 비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라디오도 고장 난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니콜라스의 집에는 TV가 없었다. 자리도 많이 차지할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수신료가 부담되어 아예 들여놓지 않은 탓이었다. 그 대신 라디오를 통해 세상의 소식을 접하곤 했다. 구식 라디오는 철물점에서 일하는 더스틴이 손봐준 덕에 몇 년째 잘 쓰고 있었다. 하지만 로건의 말에 따르면, 요즘 들어 자꾸 라디오에서 쉭쉭거리는 잡음만이 나온다고 했다.
로건의 말을 듣고 니콜라스는 라디오를 가져다가 흔들어 보았다. 나사가 빠진 건 아니었는지, 안에서 절그럭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더스틴이 기계적 결함은 아닌 것 같다던데…. 너무 낡아서, 혹은 요즘 비가 와서 주파수를 제대로 못 잡는 문제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문제점을 설명하던 로건이 딸깍, 하고 라디오를 켜자 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연일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로건은 뒷말을 듣지 않고 채널을 돌렸다. 앵커의 목소리가 맥없이 끊어지고 곧 로건이 말했던 쉭쉭대는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쉬- 쉬이익… 치, 치익-]
기계적 결함 때문에 나는 소음으로 치부하기에는 소리가 이상했다. 그 소리는 마치 유기체, 특히 어떤 짐승이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니콜라스는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져 라디오를 꺼버렸다.
“그러니까, 주요 채널로 돌리면 저런 소리가 난다는 말이지?”
“네. 어젠가부터 그러더라고요.”
“더스틴한테 말해서 새 라디오를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걔가 철물점에서 일하는데 그 덕 좀 봐야지.”
라디오의 소름 끼치는 소음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니콜라스가 말했다. 로건도 그러는 편이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에게 답했다.
“제가 말해 둘게요.”
“그래, 고맙다.”
“얼른 주무셔야죠. 늦었는데…. 내일도 나가셔야 하잖아요. 작업복은 제가 빨아둘게요. 요즘 날씨가 이래서 마를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아빠는 아들 때문에 힘이 난다.”
“뭘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가벼운 일에도 니콜라스는 꼬박꼬박 고맙다고 말했다. 아내가 죽은 뒤로, 고맙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봐야 후회만 남는단 걸 알게 된 이후 생긴 버릇이었다. 아들의 말대로 늦은 시각이었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니콜라스는 서둘러 씻고 잘 준비를 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낡은 침대에 기어들어 가 이불로 몸을 감싸니 졸음이 밀려왔다. 잠이 들려는 그 순간, 헐벗은 몸 위로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니콜라스는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켜 이불을 털어냈다. 날이 습하니 침대에 벌레가 생긴 건지도 몰랐다.
불을 켜고 벌레를 찾아내 침대 밖으로 쫓아내기엔 몸이 너무 무거웠다. 벌써 눈이 감겨와 힘없는 노동자는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이불을 덮고 몸을 웅크렸다.
니콜라스는 잠결에 손으로 팔뚝과 가슴팍을 긁었다. 낮에 비로 흠뻑 젖었던 곳들이 잊을 만하면 간지러웠다. 물론 니콜라스는 스스로가 몸을 긁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끊이지 않고 비가 내렸다. 몇십 일째 햇볕을 쬐지 못하고 계속 축축한 상태로 작업을 하다 보니 작업자들의 사기도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쉬는 시간에 간간이 대화하던 사람들도 입을 다무는 날이 많아졌다. 다들 꼭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짧은 쉬는 시간에 사람들은 대화하는 대신 화면 앞에 모여들어 오락 채널을 구경했다. 구행성에서 유행하던 놀이라고 하는데, 니콜라스는 그 놀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놀이의 이름은 축구였다.
조그마한 빨간 점과 파란 점이 서로 흰색 점, 그러니까 공을 빼앗으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그런 식의 게임이었다. 실질적으로 이제는 놀이를 해 줄 만큼 한가한 사람도, 놀이를 할 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모든 장면은 가상으로 구현된 영상에 불과했다. 놀이를 즐기고 싶은 인류의 욕망을 그런 식으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을 텐데.’
실제 사람이 경기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예측할 수 없는 전개를 기대해 볼 수야 있겠지만. 가상으로 만들어진 영상은 결국 만드는 사람이 결말을 정해 놓은 영화나 드라마와 다르지 않은데 뭐가 재미있다고 매달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주목!”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 대신 작업반장이 작업장의 벽을 쳤다. 부실하게 지어진 가건물은 조그만 주먹으로 벽을 쳤는데도 텅텅 울리며 큰 소리를 냈다. 화면 앞에 몰려들어 패를 나눈 채 응원을 하고 있던 인부들의 눈이 일제히 작업반장을 향했다.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
“예?”
어디선가는 작게 환호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평 가득한 소리가 나왔다. 아직 점심이었는데 작업이 끝났다는 작업반장의 말에 작업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용!”
작업반장이 다시 벽을 쳤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드는가 싶더니 곧 싸한 정적이 작업장 내부를 감쌌다.
“혼란스러울 건 안다. 그렇지만 긴급한 상황이므로 어쩔 수 없어.”
“수당은 어떻게 되는 거요!”
구석에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다들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점이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는지, 어서 대답해달라는 듯 작업반장에게 눈총을 보냈다.
“애석하게도 지급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작업이 취소된 상황이니까.”
“뭐요! 그런 게 어딨어!”
다시 작업장 안이 들끓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만큼, 작업반장의 발언은 파문을 낳기 충분했다. 오전 작업 분의 수당만 받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니콜라스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루쯤 수당의 절반만 받아도 당장 큰일 나는 건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통보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정한 게 아니야! 위에서 그렇게 지침이 내려온 걸 어쩌겠나.”
작업반장도 답답했는지 언성을 높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작업반장의 말대로 그 또한 수당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에 불과했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 힘도 권한도 없는 그를 몰아세운다고 해서 상황이 더 나아지진 않았다.
“통근 버스가 이미 밖에서 대기 중이다. 차례를 기다리면 전부 안전히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니까….”
작업반장은 어째서 오후 일정이 전부 취소되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그저 속으로 비 때문에 작업장이 무너지기라도 했나, 따위의 의문을 품으며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럼 내일은 정상적으로 작업합니까?”
“그 건에 대해서는 아직 별다른 말이 없으니 아마 그런 걸로 알아야겠지. 우선 출근하도록.”
“거, 진짜 웃기는구만.”
사람들은 여전히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결국 작업반장은 노동자들을 조용히 시키는 것을 아예 포기해버렸다. 그래도 아무도 폭력적으로 행동하거나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다. 축축 처지게 만드는 이 분위기와 날씨가 사람들이 성화를 부리지 못하게 한몫한 듯했다.
통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계속해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니콜라스는 조용히 작업장 문간에 서서 바깥에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앞쪽에서 쑥덕거리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뒤에서 떠드는 말은 선명히 들렸다.
“무슨 놈의 비가 이리 많이 와…. 아주 세상 떠내려가겠어.”
“다 더러운 비라 그런가? 맞으면 얼굴이 따갑고 간지럽던데.”
“그거야 깔끔떤다고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더러운 비를 맞으면 머리 빠진댔어. 사실인지 아닌진 몰라도 안 맞는 게 좋지.”
비를 맞으면 머리털이 빠진다는 둥, 대화의 전반이 낭설뿐인 영양가 없는 대화였다. 그러나 비를 맞으면 몸이 가렵다는 말만큼은 흘려들을 수 없었다. 실제로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가슴팍이며 팔뚝이며 온통 긁어 댄 자국이 낭자해 있었다. 어떤 곳은 너무 심하게 긁어서 딱지가 앉기도 했다.
“비 때문에 작업이 다 취소된 건가?”
“몰라, 들리는 말에 의하면 중앙으로 가는 물자가 싹 다 반려됐다는 거 아녀.”
“왜? 거래처가 도산했나?”
“모르지. 아침에 물자 싣고 갔던 게 전부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 했다던데. 뭐 심각한 일이 있는가벼.”
“별일이 다 있네…. 우리 같은 말단들이야 뭐 알아봐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겠지만서도.”
새로운 소식이었다. 윗선에서 노동자들에게 자세한 사정까진 알려주지 않아도, 알음알음 왜 작업이 취소되었는지 전파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그들의 대화를 더 듣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연일 비가 내린 끝에 도로는 이미 반쯤 물에 잠겨버린 뒤였다. 배수로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버스가 앞으로 내달리면서 양옆으로 굉장한 물길을 만들어냈다. 니콜라스는 심각한 얼굴로 창밖을 보면서 아들들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
그로부터 이틀 뒤 아침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니콜라스는 냉장고에서 조리된 음식을 꺼내 데웠다. 어둠 속에 잠긴 새벽 아침은 늘 똑같았다.
[쉭… 쉬이이익….]
어디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주방 쪽 불만 켜둔 상태였기 때문에 좁은 거실은 깜깜했다. 괜스레 불쾌감을 느낀 니콜라스는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불을 켰다.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쉬잇…! 키이이이…!]
낯선 소리는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니콜라스는 마침내 고장 난 라디오를 발견했다. 더스틴이 손보려고 시도했던 것인지, 군데군데 나사가 빠져 있어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내다 버리든가 해야겠는데. 아니, 고물상에 갖다 팔면 고철값이라도 건지려나.”
싼값에 얻은 물건이니 별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았지만, 달걀 하나라도 살 수 있는 푼돈을 얻을 수 있다면 시도해 보는 게 나았다. 니콜라스는 라디오를 끄다가 치이익거리면서 무언가 타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불쾌한 소리에 신경을 쓰느라 불을 올려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이런, 제길.”
로건이 오래 데우면 맛이 없다고 신신당부했었는데, 데워지다 못해 반쯤 타버린 요리가 니콜라스를 반겼다. 니콜라스는 나이프로 들러붙은 요리를 떼어 내 접시에 얹었다.
탄 요리를 아무렇게나 입에 쑤셔 넣으니 자연히 짜증스러운 마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디 탓할 데도 없었다. 순전히 가스레인지에 불 켜놓은 것을 깜빡한 본인의 잘못이었다. 탄 프라이팬을 대충 물에 담가놓고 니콜라스는 집 밖으로 나왔다. 하마터면 통근 버스에 오르지 못할 뻔하는 등 정신없는 아침이었다.
엊그제 단체로 조기 퇴근을 한 이후, 작업장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어제는 정상적인 일정으로 작업장이 돌아갔으나, 오늘은 어떨지 모르니 우선은 나와보라는 말을 전달받고 출근한 노동자들이었다. 차라리 작업장을 닫을 것이라고 빨리 말해주면 좋으련만, 그들도 정신없는 모양인지 상황을 수습하기 급급해 보였다.
저조한 분위기는 출근 이후에도 계속됐다. 정확히 무슨 문제 때문에 작업에 차질이 생기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작업반장에게 물어봐야 그도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했으며, 단지 노동자들이 간부끼리 언쟁을 벌이는 내용을 여기저기서 훔쳐 들은 뒤 입에서 입으로 옮기는 게 다였다.
중앙으로 가는 물자가 반려되다 못해, 심지어 운송해주던 이들과도 연락이 끊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쯤 되면 정말 작업장을 닫아도 따질 수 없는 거냐는 말들이 오갔다. 아마 사업적인 문제일 것이다,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운반자들이 파업한 것일지도 모른다, 따위의 음모론도 제기되었다. 불신에 가득 찬 노동자들은 이것이 임금을 떼어먹을 징조이니 빨리 도망치는 게 낫겠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우리끼리 떠들어봐야 뭔 소용이 있겠어? 어, 그린불이 골 넣는다!”
점심시간에 TV 앞에 모여 앉아 음모론을 주장하던 이들은 곧 축구 경기에 몰입했다. 니콜라스는 동료들과 떨어져 구석에 앉아 맛없는 크림빵을 베어 무는 중이었다. 아침도 별로였는데, 점심까지 맛없는 것을 먹으려니 인상이 찌푸려졌다. 탄 프라이팬을 수습하느라고 오늘은 면도도 못 하고 나온 상태였다. 평소에도 보잘것없이 꾀죄죄한 모양새였지만, 오늘따라 더 누덕누덕한 몰골로 젖은 작업복을 입은 채 빵을 씹고 있을 때였다.
“어?”
TV를 보던 노동자들의 입에서 탄성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니콜라스는 어느 한쪽이 돈을 걸고 응원하던 팀이 참패를 당했나 싶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머리들 틈바구니로 언뜻언뜻 TV 화면이 보였다. 제법 큰 구식 TV였는데, 화질이 좋진 않아도 멀리서 무슨 영상이 나오는지는 식별 가능했다. 화면은 가상 축구 대신 다른 장면을 송출하고 있었다.
TV 화면을 본 니콜라스는 먹던 빵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꿀꺽 넘겼다. 숨이 턱 막혀서, 한참 씹던 것을 넘기는 데도 괴로움을 동반했다.
화면 속에서 피범벅이 된 뉴스 앵커가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긴급! 긴급 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1시 7분, 코딜리언의 침공으로 인해 도시가 완벽히 함락되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어서 도망을…. 아아아악!]
창백해진 얼굴로 속사포처럼 소식을 전하던 앵커는 괴물의 거대한 주둥이에 물려 말을 잇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윽고 화면은 뉴스 앵커가 사라진 빈 데스크를 송출했다. 오로지 소리를 통해서 그가 얼마나 참혹한 짓을 당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살가죽인지 옷 가죽인지 모를 것이 찢기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아무도 채널을 돌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장면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앵커를 공격한 그 ‘코딜리언’이라는 것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피 묻은 주둥이에는 살 조각 같은 게 걸려있었고, 번들거리는 금색 눈동자는 말 그대로 짐승의 것이었다.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진 동공과 화면 너머로 눈이 마주친 순간, 니콜라스는 먹고 있던 것을 뱉으며 구역질을 했다.
“으욱…!”
목이 턱 막히면서 위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니콜라스는 헐떡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방금 본 그 소름 끼치는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있을 것만 같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작업장 안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잔인한 장면을 보고 흥분한 노동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얹어댔다.
“뭐야, 저거 진짜야?”
“아! 우리 팀이 이기고 있었는데!”
비현실적으로 잔인한 장면을 본 사람 중 비위가 약한 이들은 니콜라스처럼 역겨워했다. 하지만 몇몇은 조금 전의 그 징그러운 장면이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보니 잘못 송출된 호러 영화 클립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작업 라인으로 돌아갈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도 TV 앞을 떠나지 못했다. TV 속 화면은 여전히 텅 빈 뉴스 데스크를 송출하는 중이었다. TV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파충류를 닮은 괴물도 자리를 떠났는지 잠잠했다.
“주목!”
작업반장이 작업장 벽을 두드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의 얼굴은 피가 싹 빠져나간 사람처럼 창백했다. 심지어 비를 잔뜩 맞은 뒤라 흠뻑 젖어 있기까지 했다. 폭우를 뚫고 한달음에 작업장 내부로 달려온 게 틀림없었다. 인부들을 불러놓고도 한참 동안 숨을 고르며 대답하지 못하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다들 방송을 봤겠지…?”
작업반장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작업반장의 떨리는 목소리와 공포에 물든 얼굴은 작업자들이 무언가 불길한 것을 직감하게 했다. 그의 표정을 통해 화면을 보고도 믿지 않던 이들은 방금 본 장면이 결코 잘못 송출된 공포 영화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방금 그거… 진짜란 말이요?”
“…….”
작업반장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가가 벌게진 채 씨근덕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만일 평소 같았다면 누군가 그를 진정시키며 물이라도 마시게 해줬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럴 경황이 없었다.
“우린… 다 망했어.”
그가 허망하게 말했다. 눈가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TV에 송출된 장면이 충격적이긴 했어도, 아직 크게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작업반장의 참담한 목소리가 사람들을 동요하게 하고 불안하게 했다. 니콜라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뭐라고 했더라, 방금 그….’
살해당한 앵커가 했던 말을 되짚으려니 두통이 밀려왔다. 니콜라스는 다시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굽혔다.
‘어서 도망을….’
앵커가 도망가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다음 장면을 떠올린 니콜라스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쿨럭대다가 무의식적으로 그가 했던 말을 따라 내뱉었다.
“도망, 도망가야 해….”
어디로? 따위의 구체적인 방향성 따위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한 번 확산되기 시작한 공포는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며 모두가 이성적 판단을 못 하게 만들었다. 작업반장은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말했다.
“파충류 괴물들이 중앙을 침공했다고 한다…. 이미 며칠 전에 침공이 시작되었고, 도시는 폐쇄됐다고.”
근래의 이상 징조들이 니콜라스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든 이상 현상은 전부 그 코딜인지 공룡인지 모를 괴물들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니콜라스는 떨면서 집에 있을 아들들을 생각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어서 조금이라도 먼 곳으로 도망가야 했다.
벌써 며칠 전에 도시에 괴물이 들이닥쳤는데 아직 괴물의 그림자도 못 봤지 않은가? 그들이 외곽이나 지방까지 내려오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니콜라스는 속으로 중얼대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떠들썩한 와중에 누군가 더 크게 목청을 키워 작업반장에게 질문했다. 작업반장은 무어라 대답했으나 사람들이 내는 불평과 공포에 대한 호소에 묻혀 입 모양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악에 받쳐 소리치듯, 목에 핏대를 세워 대답했다.
“몰라! 작업 해산! 알아서 집에 돌아가도록!”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작업반장은 그 말을 내뱉고 난 뒤로 몰려드는 사람들과 질문 공세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버렸다. 심지어 통근 버스도 지원되지 않았다. 그 또한 작업장의 이런 안일하고도 무책임한 대처를 믿을 수 없어 망했다는 짧은 단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작업반장은 더는 인부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고 짐을 챙기려고 아우성쳤다. 니콜라스는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 대열에 합류해 연장을 챙겼다.
과연 이걸로 사나운 짐승에 대항할 수 있을지 아주 불확실했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니콜라스의 손에는 낡은 작업용 곡괭이가 들리게 되었다. 만일 길에서 괴물을 만나면 어떻게든 때려눕히고서라도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좁은 입구로 빠져나가려고 무질서하게 굴었다. 니콜라스 역시 빨리 작업장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계속 합류해 있다가는 정말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밟혀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몸을 비틀어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절반가량의 작업자들이 비를 뚫고 작업장을 빠져나갔을 때였다. 화면이 다시 치지직거리는 잡음을 내며 노이즈를 송출하다가 비교적 선명해졌다. 또 다른 뉴스 화면이었다.
주둥이에 피를 묻힌 파충류 인간에게 붙잡힌 어느 양복 차림의 남성이 울먹이는 얼굴로 말을 쏟아냈다.
[조,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쉬이이익!]
[도시는 완전히 함락당했습니다…. 인류의, 패배입니다.]
[쉬익! 쉬이익!]
[머, 머… 멋대로 도망쳐 봐야… 소용없습니다.]
당장에라도 괴물의 날카로운 이빨이 말을 전하는 남성에게 닿을 기세였다. 남성은 그럴 때마다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코딜리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꺽꺽대며 말했다. 그는 쉭쉭거리는 소리에 불과한 짐승의 언어를 알아듣는 듯했다. 겁에 질린 눈동자는 눈물이 가득 고인 노란 빛이었다. 코딜리언과 똑같은 빛깔이었다.
필사적으로 코딜리언의 뜻을 전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니콜라스의 불안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사람들이 듣건 말건, TV를 통해 방송은 계속 송출되었다.
[우리의 터전에 함부로 집을 지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쉭쉭거리는 코딜리언은 인간 남성보다 덩치가 훨씬 큰 데다, 보통 파충류랑은 급이 다른, 거친 비늘이 돋아난 존재였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하등 보잘것없는 먹이처럼 보였다.
코딜리언의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 남성은 꼭 앞잡이처럼 느껴졌다. 방송에서는 계속 무어라 떠들어대는 동안 니콜라스는 듣지 않고 곡괭이를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공포로 흐려진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방해하는 사람들을 곡괭이로 내리칠 것처럼 흥분으로 얼룩진 상태였다.
아들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된 아버지로서, 니콜라스는 무작정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좁은 공간에 모여 있다가 흩어져 각자의 길로 향하는 인부들이 저 멀리 보였다. 그러나 억세게 내리는 비 때문에 정확한 형체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버스 없이 집까지 가려면, 쉬지 않고 뛴다 해도 두 시간도 넘게 달려야 했다. 이렇게 궂은 날씨에 건강하지 못한 폐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포기하지 못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면 아들들이 위험했다.
집에는 TV가 없었다. 라디오가 있었으나 다 낡아빠져 고장 나 버린 탓에, 괴물들이 쳐들어와서 인류가 도망가야 한다는 상황을 두 아들은 모르고 있을 게 뻔했다. 중앙으로 가는 물자가 차단되기는 로건 쪽도 마찬가지라, 내일은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불평하던 게 떠올랐다. 더스틴도 방에 틀어박혀 작업한다고 나오지 않았으니, 정말로 둘은 집에 고립되어 있을 것이다.
“얘들아, 아빠가, 지금 가고 있어…. 가고 있으니까….”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니콜라스는 쉬지 않고 질퍽대는 길을 달렸다. 안경은 온통 빗물 자국으로 지저분해졌고, 몸은 잔뜩 젖어 엉망이었다. 니콜라스의 땀과 눈물은 전부 억센 빗줄기에 씻겨 나갔다.
한참 달리다 걷기를 반복한 끝에 멀리 빈민촌으로 빠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이제야 중간 지점까지 뛰어온 것을 확인한 니콜라스는 빗속에서 멈춰서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곡괭이를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곡괭이 손잡이 모양대로 자국이 나 있었다.
집까지 뛰어가는 그 긴 시간 동안 괴물들을 포함해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넓은 도로에 니콜라스 혼자였다. 아주 멀리서 인영이 보여도 미친 듯이 내달리는 니콜라스를 보고 숨어버렸다. 그것이 인영인지조차 불확실했다. 강풍과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일지, 아니면 사냥을 하는 포식자들인지는 가까이 가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니콜라스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가며 몸을 이끌었다.
“흐으, 허, 흐억….”
폐에 들어오는 공기는 습하기 짝이 없었다. 흡사 가시가 흉부 안쪽을 여기저기 찔러대는 듯한 감각이 잇따랐다. 니콜라스는 추위로 인해 입술이 파랗게 변한 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다리 쪽에 감각이 없었다. 달아오른 체온으로 인해 안경에도 계속 뿌옇게 김이 서렸다. 그러나 곧 빗물이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안경에 서린 김은 빠르게 닦여 나갔다.
“로건! 더스틴!”
목구멍을 긁고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핏기가 어려 있었다. 겨우 집 앞에 도착한 니콜라스는 애타게 아들들을 부르면서 집 문손잡이를 사정없이 돌려댔다. 덜걱거릴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자 당황한 손이 자꾸만 빗물에 의해 미끄러져 갔다.
“얘들아! 문 열어! 아빠! 아빠야! 어서 도망가야…!”
문손잡이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챈 니콜라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잡이를 제대로 돌렸다. 그러고는 문을 부술 듯 밀고 들어갔다.
어두운 집 안은 온통 눅눅했고, 약간 매캐한 냄새도 군데군데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니콜라스는 깜깜한 집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두 형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소리가 난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니콜라스는 이글거리며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 두 쌍과 눈이 마주쳤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집 안에 서 있는 낯선 인영들, 그리고 그들의 노란빛 눈동자.
이미 코딜리언이 집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니콜라스는 절망스러운 비명을 속으로만 내뱉으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바들바들 떨었다.
“아… 아아….”
괴물과 맞닥뜨리게 되면 곡괭이로 놈의 정수리부터 내리찍자고 얼마나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했던가. 하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 올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일뿐이었다. 니콜라스는 손마디가 새하얘지도록 녹슨 곡괭이를 꽉 붙잡고 괴물들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