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습격 (6/15)

푸른 조명이 원형 탁자를 비추고 있다. 그 탁자를 내려다보는 핀레이 엑스타인의 옆에서 부관인 해리 할슈버트 대장이 속삭였다. 

“문신 놈들, 아주 제멋대로군요. 각하, 일어서시죠?”

“일어설지 말지는 내가 결정한다. 할슈버트, 다시 한 번 월권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엑스타인의 차가운 말에 할슈버트가 입을 다물었다. 핀레이 엑스타인은 자신의 옆에 놓인 빈 의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엑스타인을 비롯한 무장은 서쪽에, 베도야를 비롯한 문신들은 동쪽에 앉는 것이 관례였다. 오랜만의 황전 보고회에서 베도야는 정시에 맞춰 올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문신은 자리에 착석하고 있었고, 빈자리는 문신 수장인 키아란 베도야 수상의 것뿐이었다.

케번 우드에서의 만남 이후로 또 베도야는 밀회를 번번이 거절해왔다. 엑스타인은 느슨히 다리를 꼬고 앉아서 문신과 무신의 대립을 바라보았다. 서로 표정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사이라는 게 보인다. 엑스타인은 무표정하게 그 꼴을 바라보다 시선을 떼었다.

『수상이 입구를 통과했습니다.』

보고는 엑스타인뿐만 아니라 할슈버트에게도 오기 때문에, 할슈버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엑스타인은 그런 할슈버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냉혹한 얼굴로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1분 전, 문이 열리고 키아란 베도야가 등장했다.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정장을 입고, 뒤에는 웬만한 왕보다 더 많은 가신들을 끌고서.

키아란 베도야와 핀레이 엑스타인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엑스타인의 회색 눈과 베도야의 푸른 눈이 스쳤다. 그것이 전부였다. 어느 쪽도 인사를 건네거나 작은 미소조차 던지는 일이 없었다. 시선을 돌린 쪽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떨어졌을 뿐이었다.

베도야가 의자 앞에 서자 비서실장인 멧 테이버가 의자를 빼주었다. 그리고 능숙하고 정중하게 베도야의 엉덩이에 의자를 넣어주었다. 베도야가 착석하고 그의 스태프들이 벽에 죽 늘어섰을 때쯤 베도야와 엑스타인의 뒤에 있는 스크린이 켜졌다.

『오랜만이군, 여러분.』

헤레라 제국의 황제, 바스케즈 17세가 스크린에 나타났다. 키아란 베도야가 가장 먼저 일어서고, 그가 일어선 다음에야 다른 이들이 전부 일어섰다. 무신들 사이에 불만스러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도 차마 그들의 수장인 엑스타인 원수가 베도야 수상보다 높다고 주장할 순 없었다. 엑스타인이 태어났을 때 이미 베도야는 수상이었다. 벌써 190여년이나 수상직을 맡아온 키아란 베도야의 위치를 능가할 수 있는 자는 황제뿐이었다. 사실 황제도 정치적인 입지에선 베도야보다 약할 수밖에 없었다. 키아란 베도야는 헤레라 제국의 상징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수상 키아란 베도야의 진행 아래 하례 황전 보고회가 시작되었다.

◈ ◈ ◈

핀레이 엑스타인은 군용 헬리콥터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그는 앞으로 이틀은 자유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케번 우드로 그는 3주 만에 그의 아름답고 음탕한 노예를 만날 수 있어서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꽤 들떠 있었다. 그를 오래 모신 부관들도 상관의 기분이 좋은 것을 예민하게 눈치채고 케번 우드로 향하는 걸 서두르던 차에 엑스타인의 부관인 할슈버트가 속삭였다.

“각하, 긴급한 보고입니다.”

그 말에 엑스타인이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수상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핀레이 엑스타인은 당황하거나 놀라는 대신 입술을 올렸다.

“어디서?”

“황궁 앞에서입니다. 폭탄 테러고, 수상은 무사합니다.”

“그래? 쓸모없군.”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엑스타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엑스타인의 두뇌는 사생활 채널을 열고 있었다. 키아란 베도야가 습격을 당하는 일은 꽤 자주 있었다. 하지만 엑스타인과 관계를 맺게 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기에, 엑스타인은 그런 습격을 잊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노예는 그와의 밀회를 거절할지언정 단 한 번도 채널 연결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채널 연결 신호가 가자, 곧 채널이 열렸다. 메시지를 보낸다.

【약속은 유효한가?】

답변은 평소보다 약간 늦었다.

【유효합니다.】

엑스타인은 채널을 닫았다.

오늘이라서 다행이었다. 몇 시간 뒤면 베도야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어떤 쓸모없는 놈이 괜한 간섭을 했는지 알아봐.”

엑스타인의 말에 할슈버트가 흘끗 그의 안색을 살핀다. 전쟁 덕에 초고속 출세를 해서 더 이상은 전장에 나갈 일이 없는데도 엑스타인은 늘 사납고 극단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제에 입만으로 전쟁을 일삼는 문신 놈들을 증오하는 엑스타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놈이 설친 덕에 이쪽도 당분간은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좆도 없는 새끼가 판을 휘저어 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

좀 전까지는 분명 기분 좋은 기색이었는데 어느새 싸늘해진 얼굴이었다. 할슈버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엑스타인이 헬기에 올랐다. 기분 잡쳤다는 기색에 비서진이 하나같이 가볍게 긴장한다. 엑스타인은 대체로 무표정. 기분이 좋을 때에는 희미한 기색만 비추고 나쁜 때에는 노골적으로 사납고 난폭해진다.

『좀 전까지는 그렇게 기분이 좋으셨는데.』

비서진 하나가 다른 비서에게 채널을 연결하자 곧 답장이 왔다.

『놈이 베도야를 죽였다면 더 좋아지셨을 텐데 말이야. 아쉬운 일이지.』

『분명 그랬다면 놈은 훈장을 탔을걸.』

무표정한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웃음이 흘렀다.

케번 우드에서의 기다림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베도야가 언제 올지 기다리며 엑스타인은 늘 웃고 있었다. 비서관들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격의 없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베도야와 줄다리기를 하며 그 웃음은 싸늘하거나 도발적이거나 빈정거리는 빛을 띠었지만 만나기 전에 늘 엑스타인은 선물을 가지고 올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즐겁고 들뜬 마음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 문은 선물을 들고 돌아올 부모를 기다리는 문이 아니었다. 그 문은 긴 수술을 끝낸 의사가 나타나 결론을 말해주길 기다리게 하는 문이었다.

얼마나 다친 거냐.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수상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그 순간 심장이 정지했다. 관자놀이에 닿은 총구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하얗게 흩어졌다. 껍데기가 습관적으로 입술을 올리고 차가운 목소리를 내는 동안, 알맹이는 굳어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엑스타인은 문이 열리는 순간 숨을 멈췄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팔을 깁스로 고정한 베도야가 들어서고 있었다. 처연할 정도로 하얀 붕대를 감고서.

“늦었군.”

희미한 조명에 베도야의 얼굴이 비쳤다.

베도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엑스타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망설이는 그 자리에서 베도야는 한 번 멈추어 섰다. 등 뒤의 현관문을 느낀다.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아. 언제나 느끼던 이중적인 마음이 엷어져 있었다. 멀리서 반만 보이는 저 단단한 육체를 가진 사나운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주인을 기다리게 하다니, 벌을 주겠어.”

베도야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장소를 지나쳐 엑스타인에게로 걸어왔다. 엑스타인은 천천히 베도야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엉망인 얼굴. 마치 저 상처들조차 남 일이라는 듯한.

엑스타인이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베도야가 채널을 열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어째서 채널을? 의아해하면서도 엑스타인은 채널을 열어주었다. 베도야가 머릿속으로 말했다.

『귀가 들리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왜 귀가 들리지 않는데?”

엑스타인이 물었다. 자신이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여는 엑스타인을 보며 베도야도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엑스타인이 몇 발짝 떨어진 베도야를 잡아당겼다. 베도야가 휘청거리며 끌려오자 엑스타인이 다시 물었다. 왜, 귀가, 안, 들려?

『폭발음 때문에 당분간 청각이 돌아오지 않을 거야.』

“말로 해.”

『못 해.』

“왜?”

『목이 아파서.』

“왜 목이 아픈데?”

『토해서. 폭탄이 터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가 있었어.』

습격이라면 몇 번이나 당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운이 좋지 않을 때에는 일어나 보니 강제로 육체가 교환된 적도 있었다. 고통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지만, 고통받는 상황에는 익숙해졌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별로 큰 고통이 아닌데도 고통 하나하나에 치가 떨렸다.

베도야는 자신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고 자신을 길들이려고 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리고 카리스마 있는 남자. 아직 삶에 정열을 가지고 있는 자.

남자의 회색 눈은 눈이 내린 풍경처럼 고요하다.

“난 오늘 굉장히 화가 나 있어.”

베도야의 푸른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왜? 그 눈이 묻고 있었다. 왜 화가 났지? 그 눈을 본 엑스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 너는. 이렇게 초조해서, 걱정과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되어서, 너를 이렇게 만든 놈을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끓는 마음 따위, 너는 알 바 아니겠지. 어차피 우린 그런 사이니까. 섹스 아니면 만날 필요도 없는, 증오만이 허락된 그런 관계.

“오래 기다렸거든.”

1분이 수십 년처럼 길어서, 심장이 바싹바싹 말라서.

병신처럼 손에서 땀이 나서, 너에게 달려가고 싶은 걸 참느라 힘을 주고 있던 다리가 풀려서.

“그러니까 벗어.”

벗으라고 말했으면서도 남자는 이미 손을 뻗고 있었다.

베도야는 자신의 옷이 찢기는 걸 멍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러난 살결에 닿은 엑스타인의 손이 축축하고 차가웠다. 식은땀에 젖은 듯한 그 손은 평소와 달리 다급했다. 옷이 갈가리 찢어지는데, 여전히 귓가는 고요하다. 이질적이었다.

소파의 아래 러그에 강제로 꿇어앉혀졌다. 억지로 들게 된 고개. 마른 입술에 닿은 성난 것을 베도야는 온기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엑스타인의 성기였다. 검붉고 흉흉한 그것이 파고들던 감각이 온몸에 선명히 되살아났다. 그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혀를 내밀어 엑스타인의 성기에 댔다.

배운 대로 한다. 철저히 엑스타인에게 맞춰 길이 든 그대로다. 고양이처럼 혀를 할짝거려 성기를 맛보았다. 입술을 오므려 이를 감싸고 빨아들인다. 고환을 빨아들이고 스스로 성기 밑으로 기어들어가 뒷면까지 빠짐없이 애무하다 엑스타인에게 머리채를 잡혀 커질 대로 커진 성기를 입안에 넣었다.

목을 찔리는 것이 아프면서도 황홀했다. 숨이 막히는 나머지 부유감이 느껴졌다. 떨어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이 추락감에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듯한 기분 좋은 일탈감이 함께한다. 이 비릿하고 더러운 액체가 자신의 혈관을 지배한다.

맛있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더 쉽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한 번 나온 말은 두 번째에는 망설임조차 없어지게 된다.

맛있어. 좋아, 더 줘. 더 주세요.

엑스타인의 성기에서 나는 그 음탕한 냄새. 코를 간질이는 음모의 느낌. 마약과도 같은 감각이 머리를 휘젓는다. 말도 못 할 정도로 아픈 목을 거대한 것으로 찔리는데도 그저 달기만 하다. 이런 맛이라니, 이런 느낌이라니. 달콤한 향의 곰팡이가 전신을 썩게 만드는, 이 질척함이라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깊은 물에 빠진 것처럼. 청각을 빼앗기자 수치심 또한 더욱 엷어진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니까.

베도야는 더욱 음란해졌다. 엑스타인의 음모가 난 곳에 코를 비볐다. 여자 같지는 않아도 늘씬한 인상을 주는 팔을 들어 엑스타인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 순간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머리채를 잡아 거세게 당겼다. 코가 부딪칠 정도로 깊었다. 상처 난 목 안쪽으로 거대한 것이 들어왔다. 숨통을 막은 것이 거칠게 움직였다. 다친 곳을 뭉툭하고 뜨거운 것이 헤집었다.

아팠다. 불에 달군 것을 삼키는 것처럼 아파서 좋았다. 살아 있다.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단단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가 들은 마지막 소리는 폭발음이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렇게 시력을 빼앗겼다. 병원에 갈 때까지, 베도야는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시력은 돌아왔지만 청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목이 아파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감각들을 빼앗긴 것이 마치 강간을 당한 듯하다고 베도야는 생각했다.

거기에 비하면 지금의 이것은 어떤가. 그 습격만큼 아프고 그보다 더 수치스럽고 모든 것을 빼앗긴다. 정신도, 인권도 송두리째 흩어져간다. 그런데도 이것은 분명한 화간이다. 사랑스럽고 뜨겁고 애절하다. 스스로를 빼앗겼기 때문에, 멀어지는 스스로를 더욱 잘 볼 수 있다.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이 아찔한 기분. 몸을 가두고 있는 무거운 갑옷이 사라져가는 느낌이라니.

흣, 으응, 으으읏. 베도야의 목에서 신음이 새었다. 목이 아파 말도 못 하는 주제에 커다란 성기를 목 끝까지 물고 우는 것처럼 신음하는 베도야를 보며 엑스타인의 목이 팽팽해졌다.

“그렇게 우는 거야, 키아란.”

베도야가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엑스타인은 제멋대로 내뱉었다. 들어도, 듣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내 것을 물고 울어. 내 성기만 물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우는 거야. 잘하고 있어. 추잡하고 천박하게, 잘하고 있어.”

좀 더 거칠게 움직이자 베도야의 목에서 크억거리는 소리가 난다. 돼지 같았다.

“암퇘지.”

그렇게나 안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그러나 돼지처럼 꺽꺽거리는 베도야를 보고 엑스타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더욱 깊이, 목구멍을 뚫어버릴 것처럼 강하게 처넣는다. 그래 그러고 있어. 수상 같은 건 되지 마. 습격 같은 건 절대로 당하지 마.

그냥 내 것이 되도록 해. 이 밤에는 내 것이다. 내 노예, 내 돼지, 내…….

할 수 없는 말들을 삼킨다. 엑스타인은 화풀이처럼 베도야의 목을 범했다. 목구멍을 범해지는 건 베도야인데 어째서 자신의 목이 뻐근하게 아픈지 모를 일이었다. 할 수 없는 말이 쌓여 목구멍을 찢어버릴 것 같았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목을 조였다. 가볍게 힘을 준 것만으로도 베도야의 하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침을 질질 흘리며 눈을 부릅뜨는 베도야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힘을 뺐다. 문득 그가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게 놔두지 않아.

그들에게는 룰이 있었다. 여기에 온 이상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노예다. 이곳을 나선 다음에 엑스타인을 죽일지언정, 여기서 베도야는 엑스타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니까 결코 도망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을 정도로 긴장되었다.

베도야와 눈이 마주쳤다. 싸늘하도록 얼어붙은 푸른 눈이, 평소와는 다른 열기를 품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베도야가 웃었다. 희미하게 웃더니 스스로 엑스타인의 것을 조였다. 빨아들였다. 정액을 먹고 싶어하는 남창처럼, 돼지처럼, 노예처럼.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머릿속까지 성감이 치달았다. 아직이었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입안에 사정했다. 꿀꺽, 꿀꺽. 엑스타인의 성기를 문 채로 베도야가 정액을 삼켰다. 그 감각에 미칠 것 같았다.

올라와.

엑스타인의 입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베도야는 너덜너덜한 옷을 벗었다. 차라리 나체인 쪽이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부끄러워할 필요 따위 없는데. 엑스타인은 그의 주인이다. 그 몸을 갈가리 부수며 즐거워하는 주인.

베도야는 새삼스럽게 엑스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입안에서는 비릿한 맛이 감돌고 있었다. 거대한 성기였다. 정액이 터져 나오기 직전까지 부풀었다. 나중에는 죽을 것 같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다. 엑스타인과의 밀회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망설이게 되고, 그 중간에도 계속 도망치고 싶었다. 망설이면서도 결국 문을 열어 엑스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밀어내고 싶은 팔에 힘을 줘 순종한다. 순종은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순종하기 위해서, 거절하지 않기 위해서, 온몸에 힘을 주어 버텨야 한다. 왜 이런 걸 바라는 걸까, 나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순종 끝에는 달콤한 멸망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끝난다. 더러워진다. 부서진다. 추락해버린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 엑스타인의 건장한 몸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베도야는 자신이 엑스타인의 어떤 부분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SM 플레이의 주인으로서의 엑스타인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베도야의 인생에서 정확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베도야의 항문을 매만졌다. 그가 얼굴을 구겼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 얼굴이 선명하다. 아마도 젖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는 듯했다. 그런 얼굴을 보면 확실히 어린 남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정치가들의 평균 연령은 200세가 조금 안 된다. 그러니 이 남자는 아주 어린 남자라 할 수 있었다. 애송이다. 평소라면 상대할 가치도 없다. 그런데 애송이들과 이 남자는 분명히 달랐다. 강력한 힘을 가진 주인님. 어려서 더욱 광폭해지는 남자. 어린애들이 더욱 잔인한 법이지. 베도야는 눈을 내리깔았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귀가 들리지 않아도 엑스타인이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였다.

갑자기 엉덩이를 후려 맞았다. 아픔이 등골까지 기어오른다. 베도야가 눈을 크게 뜨자 엑스타인이 뭐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엑스타인은 채널을 연결해주지 않았다. 그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베도야의 사정이라는 듯이 굴고 있었다. 정말 노예를 대하는 느낌에 온몸이 뜨거워진다.

다시 엉덩이를 맞았다.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때렸다. 몇 번이나 맞으면서 엉덩이를 움찔거리자 엑스타인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걸린다.

암캐.

그 말만은 분명히 알아들었다.

천박해.

그 말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자신도 모르게 물고 있던 손가락에 이를 세우자 엉덩이를 강하게 얻어맞았다. 반사적으로 눈에 눈물이 걸렸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항문이 아닌 성기로 다가왔다. 성기를 움켜쥐는 그 손 때문에 자신이 매를 맞으며 발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엑스타인이 강하게 움켜쥐는 순간 베도야는 고통을 느끼며 사정했다. 등을 뻣뻣이 굳힌 채 사정하고 몸에서 힘을 풀려는 순간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항문에 닿았다. 치덕치덕 뭔가가 발라진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그것이 자신의 정액임을 알았다.

입속에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손가락에는 빨간 피가 맺혀 있었다. 사정하며 깨물었던 듯했다. 당황한 베도야가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뺨을 맞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엑스타인이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눈 떠. 그 말에 베도야가 입을 열었다.

“네…….”

쉰 목소리긴 해도 베도야가 목소리를 내었다. 말도 못 하던 남자가 목을 범해진 다음에야 겨우 말하고 있다. 그게 우스우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엑스타인은 충동적으로 베도야의 뺨에 입을 맞췄다. 베도야의 눈이 다시 커지는 걸 보았지만 모르는 체하며 베도야의 항문을 열어나갔다. 평소라면 장난감을 물고 왔을 텐데 오늘은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1년간의 경험 탓인지 베도야의 뒤는 처음보다는 더 쉽게 열렸다.

엑스타인이 끌어당겨서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꼿꼿이 선 성기 위에 자리 잡았다. 천천히 몸을 내린다. 조그맣게 열린 입구에 성기가 닿는 느낌. 그리고 억지로 열리는 압박감에 베도야가 숨을 몰아쉬었다. 스스로 삼키라고 요구하는 걸 알지만 도저히 내려앉을 수가 없었다. 그때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 안 돼. 잠깐, 만, 기다…….”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그다음은 비명이었다. 엑스타인은 무리하게 베도야의 어깨를 눌러 자신을 삼키게 만들었다. 온몸의 모공이 열리는 섬뜩한 기분에 베도야가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드는 그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크게 뜬 푸른 눈에는 눈물이 가득. 흘러내린 금발은 베도야의 흰 얼굴을 더욱 창백히 보이게 한다.

“아파요, 아파…… 요…….”

베도야가 백치처럼 울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 얼굴이 그 키아란 베도야라니. 만나면 만날수록 부정하고 싶어진다. 이 남자는 베도야가 아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에게 매달리는 이 가엾고 음란한 남자는 절대로 그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럴 텐데도 어째서 베도야의 몸에는 상처와 붕대가 자리 잡고 있는가.

엑스타인이 움직였다. 무리하게 열려 있는 곳을 헤집으며 허리를 위로 쳐올린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지만 손이 미끄러졌다. 베도야의 몸이 위험하게 휘청거렸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허리를 잡았다. 베도야를 위해서가 아니라 허리를 움직이기 위해서라는 듯 움직임이 더 거칠어졌다. 베도야가 비명을 질렀다. 연옥과 열락 사이. 고통도, 쾌락도 멈추는 어느 한순간. 깊고 뜨거운 물에 빠져서, 차라리 죽을 것 같다고 여겨지는 커다란 감각에 싸여 절정에 이르기 직전에.

청각이 회복되었다.

“아아아아읏, 응, 으으으읏, 하으으으응!”

이 천박한 비명은 누구의 것인가.

“흐으읏, 거기, 아프, 으으으으아아!”

울음으로 가득 섞인 비명에는 아픔과 함께 쾌락 또한 노골적으로 넘실거린다. 그것이 듣기 싫어 귀를 막고 싶은데, 손은 계속 단단한 어깨에 매달려야 해서 귀를 막을 수 없었다. 손톱을 세워 매달렸다. 절벽에라도 매달린 사람처럼 절박하게.

갑자기 엑스타인이 멈췄다. 절정 직전이었다. 몸속의 성기는 당장이라도 성대하게 터질 것 같았는데, 그 상태에서 멈춘 엑스타인이 키아란 하고 베도야를 불렀다.

“아프지 않잖아.”

그 목소리의 다정함에 놀랐다. 이런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어? 베도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엑스타인은 초조한 얼굴로 조금 더 명확하게 말했다.

“아프지 않아, 그렇지? 키아란.”

그는 베도야가 못 듣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베도야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지자 그의 얼굴은 더 초조해졌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뺨을 어루만졌다.

“키아란, 좋잖아. 응? 여기가, 완전히 조여대고 있다고. 울지 마. 붕대를 감고 울지 말라고. 내 말 알아듣고 있어? 여기.”

푹 찔렸다. 베도야는 뒤로 넘어갔다. 아마 엑스타인이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소파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눈앞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감각은 단 한 번. 그 이후에는 움직이지 않아서 애가 탔다. 베도야가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자 엑스타인이 “좋지?”라고 물었다. 정확한 입 모양은, 여전히 베도야가 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베도야는 굳이 들린다고 말하지 않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타인이 움직였으면 했다. 내부를 헤집으며 쾌감의 강으로 떠밀어주길 바랐다. 베도야가 뒤를 조이자 엑스타인이 웃었다.

피스톤질이 이번에는 거칠게 이어졌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매질과 매도, 비난, 그딴 건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애인처럼,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힘주어 안아주었다. 언제나처럼 거친 섹스였다. 머릿속은 뜨거웠고 심장은 널뛰었다. 베도야는 입을 벌린 채 타액을 질질 흘리며 천박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강간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칠게 날뛰었다. 평소보다 더 난폭해서 뒤가 찢어지는 듯했다. 입구는 얼얼해서 감각이 없고, 파헤쳐지는 안쪽은 마찰열로 달아올랐다.

먼저 달한 쪽은 베도야였다. 엑스타인을 쥐어짜며, 베도야가 고개를 들었다. 엑스타인의 단단한 복근에 정액을 쏘아내었다. 그런 베도야를 엑스타인이 흐릿한 눈으로 바라본다. 자신을 조이는 베도야의 몸 때문에 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절정 직전이었다. 그 고개 앞에서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얼굴을 보았다. 울음으로 일그러진 채 시선도, 정신도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충동적이었다. 하면 안 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모든 방어를 풀고 망가진 인형처럼 넋을 잃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손이 나갔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힘없는 얼굴을 잡아끌었다. 평소의 서릿발 같던 푸른 눈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눈이 엑스타인을 향했다. 그 눈에 담긴 의아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입술을 겹치고 혀도, 볼 뒤쪽도 엉망진창으로 빨았다.

좋아, 아니, 좋아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 대신에, 짐승처럼 혀를 섞고 허리를 움직였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채 입을 벌려서 고작 키스를 받기만 하는 베도야의 입안으로 더 들어가려 애를 썼다. 키스라기보다는 삽입 같았다. 위도 아래도 더 깊게 파고들었다.

몸 안에 뜨거운 것이 퍼지는 순간 혀를 강하게 빨리고 베도야가 눈을 감았다. 온몸이 뜨거웠다. 그 열은 언제나처럼 몸을 태울 듯이 타올랐는데, 이상하게 평소와는 다르게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늘어진 베도야를 부서질 듯 안고서, 엑스타인은 아직도 파고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몸을 얽고 싶었다. 공기조차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베도야의 안에 끝까지 정액을 흘려 넣고도 한동안 베도야를 놓아주지 않았다. 베도야의 몸은 엑스타인에 비하면 늘씬했지만 어디까지나 남자의 몸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남창들의 그 하늘하늘한 몸매와는 완전히 달랐다. 베도야의 몸은 적당한 운동과 관리를 한 남자의 몸이었다. 육체를 가꾸는 데 관심은 없는 게 분명했지만 건강만은 제대로 챙기고 있는 몸은 나름대로 단단했다.

어째서 이 몸에 이렇게 발정하게 되는 것일까.

엑스타인은 눈을 감았다.

왜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흥미 위주로 손을 내밀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제 와 소용없는 후회들이 몰아쳤다. 고자 운운하는 베도야의 쪽지에 웃음을 터뜨리고, 아프다는 말에 달려가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나 좋아하게 되어서, 고백할 수도 없는 마음을 가지고 전전긍긍하며 끌어안고 있다.

“키아란…….”

불러도 미동 없는 몸이 천천히 식고 있었다. 엑스타인은 천천히 베도야를 놓아주었다. 침대에 잘 눕히고 샤워하고 돌아와서 다시 베도야를 내려다보았다. 닦아주고 싶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혀를 차며 마른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베도야를 등지고 군복을 입었다. 그대로 나가버릴 생각이었는데 또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잠들어 있는 남자의 모습이 수수했다. 화려한 키아란 베도야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 모습에서는 자신의 노예 키아란의 흔적 또한 찾아낼 수 없었다.

요즘 자꾸 이상한 생각만 하게 돼.

엑스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이상한 생각만 하고 있다.

당신이 남창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내가 사버릴 텐데. 내 침실에, 내 침대에 영원히 묶어둘 텐데.

아니, 당신이 남창인 건 원하지 않아. 이런 당신의 모습은 나만 알고 있기를 원해. 이런 당신을 아는 놈이 있다니, 그런 놈을 어떻게 살려둘 수 있겠어.

이상한 데다 뒤죽박죽인 생각만이 머릿속을 차지한다. 의원 암살 계획을 짜는 그 순간에도 베도야의 음탕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뇌리에 가득하다.

어쩌면 좋지.

이제 나는 도대체 뭘 어쩌지.

엑스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베도야의 머리를 감싼 하얀 붕대가 보였다.

“다치지 마.”

엑스타인의 목소리가 울음이라도 참는 것처럼 낮게 갈라져 있었다.

“내가 지켜줄 수도 없는 곳에서 다치지 마. 제발.”

엑스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빌어먹을”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등을 돌렸다. 여기서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면 처연한 베도야의 몸을 끌어안고 해서는 안 될 소리들을 내내 늘어놓게 될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베도야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는 쓰러졌고, 정신을 잃었고, 청각도 손상되었으니까. 그래도 해서는 안 될 말은 하면 안 된다. 말로 나오는 순간, 자신의 마음은 더욱 고착될 테니까.

엑스타인은 도망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을 나섰다. 사라져야 한다. 섹스 파트너의 자리라도 잡고 있으려면 조속히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엑스타인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방 안.

천천히 베도야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 ◈

테이버 비서실장은 요양차 별장에 다녀온 베도야의 건너편에서 의아한 눈을 했다. 딱히 베도야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냉혹한 태도로 격무를 처리하고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놈들을 짓밟았다. 지금도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신진 국회의원 하나를 쓰러트릴 계획을 짜는 베도야의 얼굴은 여전했다.

하지만 베도야를 50년이나 모신 테이버의 오감은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베도야는 오늘 묘하게 섹시하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 근거 따위는 없었다. 거의 감이었고 틀릴 가능성도 높았다. 베도야의 기분은 늘 일정했으니까. 게다가 습격까지 당했던 차가 아닌가. 주말에 홀로 요양을 했다고 해서 기분 전환이 되었을 리 없을 텐데도, 어째서 베도야의 손짓이나 고개의 움직임에서 생기가 느껴지는 것일까.

아무래도 안경을 갈 때가 된 모양이라고 테이버는 생각했다.

안경을 들고 닦기 시작하는 테이버의 앞에서 베도야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오늘 아침부터 내내 그는 머릿속을 제대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켜줄 수도 없는 곳에서 다치지 마.

엑스타인은 그렇게 말했다. 분하고 속상하고 슬픈 목소리로. 당장에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목소리에 한껏 힘을 줘서는 한마디 했다.

자신의 청각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했을 테니 들으라 한 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그 남자는 그저 견딜 수가 없었을 뿐이다. 베도야가 다치는 것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을 뿐인 게 분명했다.

아아.

베도야는 흘끗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때부터 내내 이 상태다.

섹스를 할 때에는 모든 것이 부서진다. 섹스가 끝나면 가슴이 텅 비고 묘한 생기가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섹스 때 머릿속을 달아오르게 했던 열이 이제는 가슴으로 내려온 듯했다. 내내 심장이 뜨끈뜨끈했다. 열이 오른 심장이 느릿하게 뛰며 그 열을 계속 혈관으로 퍼트리고 있다. 온몸이 들떠 있었다.

“각하?”

뭔가 이상했는지 결국 테이버가 베도야를 불렀다.

베도야는 천천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깐 혼자 있고 싶군.”

베도야의 말에 테이버가 일어섰다.

종종 베도야는 혼자 있고 싶어했는데 그의 스케줄이 살인적인 수준이라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싶어할 때 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테이버는 바로 방을 나갔고, 그를 따라 다른 이들도 방을 나가면서 베도야는 혼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의 뺨이 희미하게 달아올랐다.

그 다정한 목소리라니.

등 뒤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면서 떠나지 못하던 기색.

그리고 다치지 말라던 그 목소리.

“맙소사. 이게 무슨 꼴이야.”

베도야가 중얼거렸다.

엑스타인은 이제 130세도 안 된 애송이다. 어리고 잔인한 능욕자. 남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살려두었을 뿐, 대충 즐긴 다음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지켜줄 수 없으니까 다치지 말라고…….

맙소사. 베도야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어린 남자에게 빠져서 이게 뭐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채 베도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엑스타인을 당장에라도 만나고 싶어 심장이 질주했다. 언제 만날 수 있지? 베도야는 자신의 스케줄을 떠올려보았다. 앞으로 사흘 뒤에는 황궁에서 만날 수 있다. 군대의 정례 보고를 고문의 자격으로 황제의 옆에서 듣게 될 테니까.

오늘은 종일 폭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용의자, 매스컴, 황궁, 병원. 여러 가지를 돌아보고 확인하고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폭발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은 이미 단단해져 그런 일에는 가렵지도 않았다.

베도야는 얼굴을 푹 숙였다. 심장에서 올라오는 열 때문에 얼굴이 자꾸 뜨거워서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비밀 속의 연인.

아무도 볼 수 없는 내 마음을 지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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