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었다.
평소에는 그래도 3주에 한 번은 만나는데 이번에는 두 달 만이었다. 엑스타인은 흘끗 베도야에게 시선을 주었다. 찰나였다. 마치 노려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베도야는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상대도 해주지 않는 듯한 고고한 얼굴이었다.
의미 없는 만남이었다. 베도야는 냉정한 얼굴의 엑스타인을 스쳐 지나가며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말이라도 한 마디 걸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멀어졌을 때 채널 연결 요청이 들어왔다. 최고 보안 등급의 사생활 채널. 베도야는 단 한 명에게만 이 채널 주소를 알려주었었다. 베도야가 허가하자 채널이 연결되었다. 메시지가 바로 도착했다.
【오늘은?】
간단한 메시지다.
하지만 엑스타인은 조금 심통이 난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베도야는 너무 바빠서 엑스타인을 두 달이나 홀로 두었었다. 젊은 엑스타인의 인내는 금세 바닥났을 것이다.
베도야는 잠시 망설였다. 아직도 일은 산적해 있었다. 한가롭게 밀회를 즐길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달이었다. 그는 두 달이나 엑스타인을 만나지 못했고 쾌락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의 몸도, 정신도 한계에 부딪쳐 있었다.
조금만.
베도야는 또 자신을 속인다. 엑스타인을 만나면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몰아붙여진다는 걸 알면서, 그래도 그는 엑스타인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존대가 어색했다. 하지만 엑스타인에게 늘 존대를 하는 입장이라 이제 와 반말을 한다는 것 또한 이상하게 느껴졌다.
【장소를 바꾸는 건 어때?】
【너무 먼 곳은 곤란합니다.】
【별로 안 멀어. 체우드 거리면 돼.】
곧 국회 의사당 입구였다. 건물을 나서면 채널 연결은 어렵다. 두뇌에 직접 연결하는 것은 섬세한 작업인 만큼 연결을 주관하는 서버가 없는 곳에서는 불가능했다. 베도야는 잠깐 멈춰 섰다. 어쩔 수 없이 베도야를 따르던 수많은 인원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체우드 거리? 베도야는 당황했다. 그곳은 수도의 빈민가였다. 거리상으로 먼 곳은 아니었지만 베도야에게는 그 어떤 휴양지보다 먼 곳이었다. 베도야는 태어나서 한 번도 빈민가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번에는 거절할까. 늘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망설이게 했다. 그만둘까. 이번에야말로 처리할까. 돌아설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베도야는 또 엑스타인의 손아귀를 향해 스스로 걸음을 옮긴다.
【알겠습니다.】
거기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평소의 베도야라면 결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도야는 가겠다고 답했다. 거기에는 엑스타인이 있었다. 베도야를 무장 해제시키는 어린 남자가 있는 곳이었다. 몸을 소유한 걸로 모자라 마음까지 원하는 욕심 많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베도야의 무거운 심장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다치지 말라는 소리를 들은 지 두 달 만이었다. 그동안 베도야와 엑스타인은 종종 어딘가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베도야는 지나치게 바빴고 엑스타인 또한 결코 한가롭지 않았다. 둘은 마주칠 때마다 채널을 연결하고 메시지를 교환했지만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초조해졌다. 엑스타인을 만나지 못하는 일이 베도야의 인내심을 갉아먹고 있었다. 위험한 짓이다. 케번 우드라면 모를까, 노출된 거리에서라니. 게다가 베도야에게는 정적이 많았다. 안전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가고 싶었다.
체우드 거리에는 뭐가 있는 걸까. 한 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은 궁금했다. 채널 연결이 끊기기 직전, 엑스타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체우드 거리 35번지. 705호. 9시.】
◈ ◈ ◈
생각보다 늦어버렸다.
엑스타인은 체우드 거리를 달렸다. 젠장. 하필이면 급한 보고가 올라오는 바람에 도저히 회의를 중단시킬 수가 없었다. 머리가 터져나가는 듯했다. 베도야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럼 또 언제 만날 수 있지.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베도야의 용인 아래에서만 이루어진다. 베도야가 고개를 젓는 즉시 끝날 관계. 자꾸 초조해졌다.
퍽, 소리가 나도록 부딪쳤다. 이 새끼야, 눈 똑바로 뜨고 다녀! 그 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엑스타인은 계속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달리고 있어서인지, 초조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망할 체우드 거리! 엑스타인은 익숙한 거리를 달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 거리는 늘 똑같았다. 차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작고 복잡하고 더러웠다. 괜히 오라고 했나. 후회가 되었다. 베도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이제 곧 300살이 된다는 노회한 정치가와 이만큼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파트에 다다라서도 초조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엑스타인은 계단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한 번에 두세 칸씩 계단을 뛰어올랐다. 가로등 빛이 불투명한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것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엑스타인은 난간을 잡고 뛰어올랐다. 7층은 그의 생각보다 멀었다.
아파트 문 앞에서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초조한 티는 내고 싶지 않았다. 손으로 땀을 훔치고 숨을 가다듬으려 노력한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겨우 차분해질 수 있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그는 창 밖의 어두운 하늘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차 안에 훈장이 잔뜩 달린 재킷을 벗어놓고 온 탓에 엑스타인의 모습은 군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엑스타인은 편안하게 셔츠 윗부분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붙인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원룸 형식의 작은 아파트라 베도야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거실의 소파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베도야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겨우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문소리가 들렸는지 베도야가 엑스타인을 돌아보았다.
엑스타인과는 달리 제복이 따로 없는 만큼 베도야는 평소와 같은 차림이었다. 고급 정장에 반짝이는 구두, 그리고 서늘한 얼굴까지. 베도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체우드 거리의 작고 허름한 아파트가 아니라 국회 의사당이나 황궁이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사람을 얼릴 듯한 푸른 눈이 엑스타인을 향했다.
“오래 기다렸어?”
베도야가 시간에 늦은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늘 기다리는 쪽은 엑스타인이었다. 그런데도 엑스타인은 달려온 듯 상기된 얼굴로 오래 기다렸느냐고 물어온다. 베도야는 잠시 생각 끝에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엑스타인을 30분이나 기다린 건 사실이었지만 정말 괜찮았다.
베도야는 여기에 들어오자마자 이곳이 엑스타인의 아파트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엑스타인이 언제 들어올지 몰라 소파에 앉았지만 눈으로 계속 엑스타인의 아파트를 탐색하고 있었다.
엑스타인의 아파트는 작은 원룸이었다. 안쪽은 침실로 쓰는 듯 침대가 있었고, 침대 옆으로 키 낮은 책장이 있어 나름대로 거실과 구분하는 파티션으로 사용되는 듯했다. 그리고 붙박이 책장이 있었고, 키 낮은 책장과 붙박이 책장 사이에 소파가 있었다. 주방은 현관 옆에 있었는데 그저 구색만 갖춘 작은 것이었다. 그래도 식탁까지 있을 건 전부 있었다.
엑스타인과 잘 어울리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공간이다. 만날 때 늘 군복을 입고 오는 그 남자와 닮은 데가 있었다.
엑스타인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을 때 이미 엑스타인은 베도야 앞에 서 있었다. 두 달 만에 보는 엑스타인의 얼굴은 약간 더 날이 서 있었다. 베도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바쁘셨나.”
엑스타인이 중얼거렸다.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한 듯하기도 한 목소리가 낮았다.
“너도 바빴…….”
뺨을 맞았다. 아픈 것보다도 소리에 놀라 베도야가 눈을 크게 떴다. 엑스타인의 시선은 여전히 고요했다.
베도야가 잠깐 이를 악물었다. 불쾌해서가 아니라 난처해서였다. 언제나 이런 꼴을 당하면서도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 존대를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낭패감을 느꼈다.
베도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님도 바쁘셨고, 또…….”
“자위했군?”
갑작스러운 말에 베도야가 미간을 좁혔다. 엑스타인이 발로 툭 베도야의 다리를 찼다.
“평소에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도 달달 떨면서 오더니 오늘은 꽤 멀쩡한데.”
베도야의 눈이 얼어붙었다.
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자위를 할 때에도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었다. 해도 되는 것일까. 왠지 해서는 안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기분이 더욱 성감을 고양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비밀을 들킨 듯한 수치감에 베도야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엑스타인이 피식 웃었다.
“주인님에게서 허락도 안 받고 자위라.”
베도야의 눈이 서늘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당황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그 당혹감이 엑스타인에게는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베도야, 아니, 키아란은 그의 귀여운 노예이니까.
하지만 국회 의사당에서 만난 베도야는 차가웠다. 황전 보고회에서 베도야는 거의 야차 수준이었다. 냉혹한 얼굴로 무신들을 물어뜯었다. 황전 보고회에서 엑스타인은 중요한 보고를 앞두고 있었다. 문신들에게 그럭저럭 타격을 줄 수 있는 보고였다. 그러나 그 증거를 가지고 오던 부하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엑스타인은 저도 모르게 단상 위의 베도야를 노려보았었다. 베도야는 아무런 감정도 보여주지 않았다. 추가 보고가 있으십니까? 그렇게 묻던 그 얼굴은 철벽.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베도야의 감정이 손에 잡힌다고 느끼는 것도 결국은 베도야의 허용 아래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모든 것이 그러했다. 베도야에게 이 밀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벌써 1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팔을 잡아끌었다.
베도야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엑스타인을 따라갔다. 하나밖에 없는 욕실로 끌려가는 게 분명했다. 엑스타인의 단단한 어깨에서 노여움이 읽혔다. 베도야는 난처함에 혀를 깨물었다. 역시 안 되는 거였나.
주인님이라.
베도야는 엑스타인에게 붙잡혀 욕실에 들어서며 그림 같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사실 사도마조히즘 플레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복종한다는 것. 거기에 폭력 행위가 수반된다는 것.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행위자의 쾌락과 직결된다는 것. 그 정도였다. 사도마조히즘 살롱에도 단 한 번 가보았을 뿐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허리를 떨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갑자기 따듯한 물이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졌다. 베도야가 고개를 들자 베도야보다 키가 큰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머리 위로 샤워기를 올려 물을 붓고 있었다.
“따듯해.”
베도야가 중얼거렸다. 물에 젖은 금발이 엉망으로 흘러내리는 가운데 눈을 감고서 한다는 소리가 이것이었다. 엑스타인의 눈가가 가볍게 떨렸다.
빌어먹을. 엑스타인은 낭패감을 감추려 애를 쓰며 욕설을 짓이겼다. 베도야가 눈을 감는 순간 키스해버릴 것 같았다. 키아란 베도야다. 이 유희가 끝나는 즉시 자신의 목을 칠 수 있는 인간. 이 와중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인물. 그런데도 혼자만 감정이 자라서,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에 닿을 정도로 마음이 자라서.
애인이 아니다. 엑스타인은 정장을 입은 채 고스란히 물을 맞고 있는 베도야를 보며 샤워기를 움켜쥐었다. 이 좁은 욕실에서조차 우아한 빛을 내뿜는 이 남자는 엑스타인과는 정적일 뿐. 그저 섹스 파트너일 뿐.
“벗고 넣어.”
그렇게 말하며 엑스타인은 서랍에서 작은 튜브 두 개를 꺼내 베도야에게 내밀었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이 내민 것을 받아 들었지만 곧 하얗게 질렸다. 그것은 관장 튜브였다. 관장이라고? 여기서? 베도야의 하얀 얼굴이 더욱 희게 질리는 것에 엑스타인은 가학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베도야가 자신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감정이 출렁일 때마다 그 대단한 수상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는 착각이 든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이 뭐라도 말해주길 기다렸다. 욕실을 나가겠다든가, 그게 아니라면 뒤라도 돌아봐주길. 하지만 엑스타인은 오래된 기둥처럼 뻣뻣하게 서서 베도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베도야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타인의 앞에서 관장? 배설에 관한 일을 누군가의 앞에서 한다고? 숨이 턱 막혔다. 뜨거운 물을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욕실에 김이 가득 차 숨통까지 막힌 기분이었다.
베도야가 천천히 옷을 벗었다. 재킷부터 넥타이, 벨트와 바지, 그리고 셔츠와 속옷. 베도야의 발치에 옷이 소담히 쌓였다. 젖은 옷들이 버석거리는 소리를 낸다. 엑스타인은 묵묵히 베도야의 머리 위로 물을 쏟고 있을 뿐이었다.
옷을 다 벗은 베도야가 매달리는 눈으로 엑스타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어서 해.”
“……이…… 건 벌인 겁니까?”
그 정도로 잘못한 일이냐고 베도야가 묻고 있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플레이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잘은 알지 못했다. 사디스트들과 마조히스트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저 풍문과 스쳐 지나가는 지식으로 알 뿐이었다.
엑스타인은 마조히스트보다는 사디스트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기구를 이용한 놀이를 하기도 했다. 제법 난잡한 성생활을 거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디즘에 관한 행위로만 쾌락을 얻는 사디스트는 아니었다. 그는 다정한 섹스도 좋아했고, 때로는 섹스가 없어도 만족했다.
하지만 베도야에 대해서는 종종 가학적으로 변하는 자신을 느꼈다. 다 이 남자 때문이다. 엑스타인은 딱딱하게 굳은 시선으로 베도야를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감정 한 톨 제대로 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삐뚤어지는 것이라고. 지금도 애정을 받지 못한다면 괴롭혀서라도 자신으로 인해 흔들리는 베도야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지 않은가.
베도야는 어떨까. 베도야는 왜 이런 행위를 원하는 것일까. 할 때마다 절망하면서, 정신을 놓으면서, 몇 번이나 울부짖으면서, 그래도 결국 베도야는 또 엑스타인의 초대에 응한다.
원하는 주제에.
한 번도 부르지는 않지.
빌어먹을.
엑스타인의 심장이 더 음산한 색을 띠는 것을 모른 채 베도야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나가주시는 건 안 되나요?”
“싫어.”
“뒤로 돌아서주는 건?”
“눈앞에서 해.”
베도야의 얼굴이 희게 질려 핏기도, 생기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베도야가 아무것도 못 하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자 엑스타인이 빈손으로 베도야의 턱을 들어 올렸다.
“복종해, 키아란.”
아는데. 알고 있어. 룰은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몸이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베도야는 자신의 손에 들린 튜브와 엑스타인을 번갈아 보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엑스타인은 그동안 그에게 무리한 일을 많이 요구했지만 이번만큼 당혹스러운 일은 없었다. 결국 하게 되겠지. 알고 있었다. 뛰쳐나가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의미 없이 욕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엑스타인의 뒤에 있는 그 문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다. 옷은 젖은 채 바닥에 쌓여 있고 자신은 나체로 체우드 거리로 뛰어나갈 수 없었다.
결국 매달릴 사람은 엑스타인밖에 없다. 익숙한 체념이 찾아왔다.
“하지만, 못 하겠어.”
다시 뺨을 맞았다.
“못 하겠어요…….”
이건 참으라는 문제가 아니었다. 스스로 하라니, 그것만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엑스타인이 다시 베도야의 뺨을 때리려는 듯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젖은 나신이 엑스타인의 몸에 달라붙었다.
어색한 몸짓이었다. 교태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친애의 행동이라고 하기에도 딱딱했는데도 엑스타인은 얼어붙고 말았다. 손이 허공에서 덜덜 떨렸다. 베도야가 자신에게 달라붙는다. 맨 정신으로.
그 몸은 아직 따뜻했다. 체온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말도 안 돼. 엑스타인은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이따위가, 이렇게나 좋을 수 있다니.
“주인님.”
베도야가 속삭였다. 교태를 부리는 여자가 된 기분에 손발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는 엑스타인을 끌어안으려 애썼다. 자신은 할 수 없었다. 엑스타인과의 규칙을 잊은 게 아니다. 단지 할 수 없을 뿐이었다.
“못 하겠…….”
엑스타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베도야는 더욱 엑스타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잘못 들었던 걸까? 다치지 말라는 말은 사실 다른 말이었나. 아니면 그 다정하고 우울한 음색은 사실은 청각을 다쳐서 그렇게 들렸을 뿐이었을까?
“제발.”
베도야가 애원했다. 그 젖은 목소리가 엑스타인을 후려쳤다. 엑스타인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그대로 안아버릴 것 같아서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어야 했다. 냉혈한처럼 보이는 얼굴은 여전했지만 뺨이 경련하고 있었다.
“다시는, 자위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타인은 벌을 취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도야가 전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욕조에 걸터앉아 베도야를 끌어올렸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무릎에 앉았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항문에 다가왔다. 배설 기관에 다가오는 그 손가락에 처음보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낯설게 느껴졌다. 엑스타인이 손가락으로 항문을 매만지고 킥 웃었다. 고리를 잡은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관자놀이를 입술로 비볐다.
“이미 준비해 왔으면서.”
베도야가 다시 매달린다. 혹시라도 시킬까 봐 두려움이 역력한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엑스타인은 흘끗 샤워기에 시선을 주었다. 물을 틀어놓을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베도야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좀 더 엑스타인에게 파고들었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고리에 걸렸다. 천천히 빼내는 걸 느끼고 베도야의 등이 둥글게 휜 채 뻣뻣하게 굳었다. 엑스타인이 짓궂게 베도야의 마개를 움직인다. 베도야의 등이 움찔거렸다. 결국 엑스타인이 마개를 꺼냈을 때 베도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숨이 채 다 쉬어지기도 전에 얇은 무언가가 삽입되고 미지근한 액체가 쏟아져 들어왔다.
엑스타인의 어깨를 붙잡고 숨을 헐떡이며 불쾌감을 참고 있는데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런 얼굴로 준비를 하고 오는 건가?”
엑스타인이 물었다. 베도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배가 들끓는 이상한 감각에 토기까지 올라왔다. 평소와는 달리 타이머도 울리지 않는 게 불안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걸까. 배설할 때에는 엑스타인이 나가주는 걸까? 늘 그렇듯 관장은 하고 왔지만 불안했다.
“섰는데.”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성기를 붙잡았다. 아직 완전히 단단해진 건 아니지만 분명히 서 있었다. 엑스타인의 크고 거친 손이 베도야의 성기를 붙잡고 부드럽게 움직인다. 베도야의 약점을 꿰뚫고 있는 남자의 교활한 애무에 베도야가 덜덜 떨면서 참으려 애썼다. 베도야의 손톱이 사정없이 어깨를 파고든다. 어느 순간 베도야가 어색하게 손을 떼었다. 자신의 손가락이 엑스타인의 어깨를 피가 나도록 움켜쥐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엑스타인은 웃으며 두 번째 튜브를 베도야의 항문에 대었다. 입구에 작은 실리콘 주둥이가 들어오자 베도야가 고개를 수그렸다. 도저히 엑스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삽입되고 싶지는 않았다. 엑스타인도 굳이 거기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은지 웃으면서도 베도야가 고개를 숙이도록 내버려두었다. 엑스타인이 말했다.
“그걸로 되겠어? 더 상처 입혀보라고.”
상처 입히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베도야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다시 미지근한 액체가 들어왔다. 이미 홧홧하게 달아오른 배 속을 더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베도야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하게 해주세요.”
베도야가 결국 입 밖으로 애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엑스타인은 슬그머니 웃었다. 저 고고한 성격에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베도야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참아냈다.
“여기서 해.”
엑스타인이 속삭였다. 베도야가 고개를 저었다. 싫다고 말하는 베도야의 엉덩이를 강제로 가르자 베도야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마세요, 겠지.”
엑스타인은 굳이 베도야의 뺨을 때리지 않았다. 대신 더한 일을 했다. 잔뜩 조여진 엉덩이를 강제로 벌리고 마개도 사라진 항문을 만지작거렸다. 베도야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에게 파고들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 마, 마세요. 하지 말아주세요. 아악, 싫어―.”
하지만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용서하지 않고 결국 항문을 쥐어짜 냈다. 움켜쥔 엉덩이를 움직여 항문을 오물거리게 하자 베도야는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찌익, 물줄기가 뿜어졌다. 약간 노란 빛이 도는 액체였지만 아마 장액 때문이었으리라. 관장을 하고 와서인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서운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심리적인 충격이 거센지 베도야는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입술에 엑스타인의 입술이 닿았다. 베도야가 고개를 저었다. 배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온몸의 모공이 열리는 듯한 혐오감에 미친 듯이 머리를 젓는데도 엑스타인은 억지로 입을 맞췄다. 혀가 얽히자마자 엑스타인의 키스가 탐욕스러워졌다. 모든 타액을 가져갈 것 같은 키스였다. 싫다고 아무리 움직여도 소용없었다. 타인의 눈앞에서 배설하면서 키스하고 있다.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은데 놓지 못하는 괴로움에 베도야는 눈물을 흘리며 입을 벌렸다.
별거 아닌데도 베도야는 정신을 놓은 것처럼 허물어졌다. 하지만 엑스타인은 손쉽게도 베도야를 단단히 받쳤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항문에 다가오자 베도야의 몸이 채찍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도망치려는 베도야를 붙잡고 엑스타인이 속삭였다.
“아무것도 안 나왔는데 무슨 유난이야.”
“하,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해, 키아란.”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닿았다. 베도야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 그건 이 행위가 아니라 여기까지 떨어진 자신에 대한 혐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엑스타인이 웃었다.
“아직도 부서질 것이 남았어?”
“…….”
“완전히 부서뜨려주지.”
얼마든지. 어디까지라도.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울음이 짙은 얼굴을 들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너는.”
베도야가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냈다.
“너는 이게 즐거워?”
“잔뜩 세운 주제에 무슨 말이야.”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성기를 움켜쥐며 힐난했다. 베도야가 이를 악물었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항문을 어루만졌다. 내내 관장에 삽입을 반복한 항문은 꽤 부드러워져 있었다. 평소의 행위라면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더 해야겠군.”
“무슨……!”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허리를 붙잡고 속삭였다.
“오늘 네 구멍을 개조할 생각이야. 기쁘지?”
순간 베도야는 엑스타인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엑스타인을 진심으로 밀어내고 도망쳤다. 빠른 속도였다. 교환한 육체는 제대로 단련하지 않으면 금세 퇴화된다. 그런 만큼 베도야의 육체는 필요만큼은 단련되어 있었다. 방심하고 있었던 엑스타인이 밀려나는 순간 베도야는 욕실 문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 문고리를 잡은 순간 몸이 뒤로 끌려왔다.
“하지 마!”
베도야가 비명을 질러도 엑스타인은 놓아주지 않았다.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단단히 안고 다시 욕조로 끌고 갔다. 몸부림을 쳐도 그는 묵묵히 베도야를 데려갈 뿐이었다. 엑스타인이 욕실 바닥에서 뒹굴던 옷을 들어 베도야의 팔을 뒤로 결박했다. 그대로 욕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베도야에게 엑스타인이 따듯한 물을 틀어 뿌렸다. 베도야의 새파란 눈이 엑스타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명한 눈을 보고 엑스타인이 미친놈처럼 웃었다. 광기에 절어버린 회색 눈이 번뜩이는 걸, 베도야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관장을 두세 번 더 하면 아주 연해질 거야. 의사가 오기로 한 시각이 11시이니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고.”
“……정신 상담을…… 받아봐, 엑스타인.”
베도야의 목소리에 차가운 노기가 실려 있었다. 엑스타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나간다면 말이지.”
관장을 세 번이나 더 당하고 나자 베도야의 몸은 축 늘어졌다. 관장을 받는 내내 항문이 만지작거려졌고, 항문이 앙큼하게 입을 오물거리고 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은 탓에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엑스타인은 익숙하게 베도야를 소파로 옮겼다. 오래도록 뜨거운 김으로 가득 찬 욕실에 있었던 탓인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엑스타인은 서랍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스틱형 입마개가 포함된 마스크를 베도야에게 씌웠다. 베도야가 고개를 젓자 엑스타인이 물었다.
“죽을 만큼 패서 말을 듣게 할 수도 있어.”
베도야가 서슬 퍼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당신은 날이 밝아 여기를 나가면 날 죽이려고 들겠지. 언제나 말하지만, 그래서 그게 뭐? 나는 지금 당신을 가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 그러니까 가만히 말 듣도록 해.”
몸을 개조당하는데 말을 들으라고? 베도야의 눈이 커졌다. 엑스타인이 기어코 베도야의 얼굴에 흉측한 마스크를 씌우고 입을 막았다. 그리고 베도야를 개처럼 엎드리게 해서는 항문을 만지작거리며 길들이기 시작했다. 개조 수술 때문이라는 걸 아는 베도야의 몸이 차갑게 식었지만, 엑스타인은 이미 베도야의 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식은 몸이 달아오르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흣, 흐흣. 기묘한 소리가 베도야의 입 밖으로 흘렀다. 허리가 절로 움직였다. 지나치게 길들기만 한 항문이 뻐끔거리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가지고 싶었다. 엑스타인의 두꺼운 물건을 처박고 싶었다. 안쪽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간지럽고 뜨겁게 시렸다. 엉덩이를 흔들게 된다. 하고 싶어. 이미 이성을 잃은 베도야가 엉덩이를 움직이며 엑스타인을 유혹했다.
엑스타인의 손바닥이 베도야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통증 때문에 잠시 안쪽의 감각이 멈췄다. 베도야의 등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통증의 열기가 다시 퍼져나가자 더욱 안달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엑스타인이 엉덩이를 때려주었다. 한 대, 또 한 대. 가면 갈수록 매질의 간격은 짧아졌고, 어느새 매질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게 되었다.
그때 벨이 울렸다.
엑스타인이 일어섰다. 쿠션을 받쳐 베도야의 엉덩이를 교미하는 개처럼 들게 한 채로였다. 베도야가 고개를 들려는 순간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머리를 잡아 소파에 깊이 묻었다. 질식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가뜩이나 마스크를 하고 있는 통에 숨이 막히는 것 이상의 공포가 찾아들었다.
“잘 들어, 키아란.”
엑스타인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절대로 너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어. 어떤 놈도 너의 이런 모습을 알게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얌전히 있도록 해. 놈이 만약 너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놈은 죽고 너는 죽지 않을 정도로 시달리게 될 테니까.”
그리고 엑스타인이 놓아주었다. 키아란은 입이 벌려진 상태라 제대로 기침도 못 하고 떨었다. 엑스타인의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본다. 엑스타인이 아닌 누군가가. 공포보다는 수치심이 엄습했다. 다른 인간에게 이런 자신을 보인다는 게 괴로웠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각하. 각하씩이나 되셔서 불법 시술입니까?”
남자의 목소리였다.
“빨리 부탁해. 안기고 싶어 안달하는 걸 겨우 달래놓았으니까.”
“개조 직후에 안으실 수는 없으실 텐데요.”
“입이라도 쓰고 싶거든. 지금은 재갈을 물려놔서 말이야.”
“그냥 쓰시죠.”
남자의 말에 엑스타인이 픽 웃었다.
“뒤를 억지로 개조당하고 울면서 내 거를 무는 꼴이 보고 싶으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악취미시네요.”
키들거리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아는 자는 아니었다. 베도야가 눈을 감았다. 이제 각오를 다져야 했다. 아무래도 도망칠 수 없다. 다행인 건 엑스타인이 자신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웠다는 점이었다.
미친 건가.
엑스타인은 사실 미친 건가.
자신을 협박할 때부터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싶기는 했었다. 하지만 핀레이 엑스타인이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생각에 넘어갔는데, 사실은 아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걸까. 베도야가 엑스타인이 제정신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하고 있을 때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자신의 허벅지 위로 안아 올렸다.
“각하, 그 자세는 조금 무리입니다만.”
“그래도 소중한 녀석이라 안고 있고 싶은데. 억지로 시키는 거라 떨고 있거든.”
“하긴 그래 보이네요.”
얼굴에는 마스크가 있고 팔은 뒤로 결박당해 있으니 자의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자리를 잡는다. 엑스타인에게 머리를 기댄 채 엉덩이를 쑥 내민 흉측한 모습이었다. 남자가 뒤에서 기구를 늘어놓는 기색이 느껴졌다. 베도야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베도야의 몸에서 당황한 기색이 사라졌다. 차분한 몸은 그의 노예인 어여쁜 키아란이 아니라 수상 키아란 베도야처럼 느껴졌다.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끌어안았다. 이것으로 끝인가. 이걸로? 아마 베도야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었다.
“마취를 약하게 해.”
엑스타인의 말에 안면이 있는 불법 시술의가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로 말입니까?”
“감각이 느껴지는 정도로만.”
“불쾌감이 상당할 텐데요.”
엑스타인이 알아, 라고 말하며 베도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움찔거리는 어깨가 사랑스러웠다. 자살치고는 참 흉한 방법이지? 속으로 물어본다. 스스로도 병신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이런 짓을 했더라면 그는 서슴없이 그 누군가를 비난했을 것이다.
“잘 길들어 있네요.”
의사가 베도야의 항문을 만지작거렸다. 엑스타인은 서늘한 눈으로 의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당연한 일인데도 기분이 상했다. 베도야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도, 그곳을 보여주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얼굴을 가리려는 듯 더욱 베도야를 강하게 안았다.
수술은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지속되었다. 와, 고급 육체네요. 잘나가는 분인가 봐요. 의사가 감탄하며 남자의 구멍에는 없어야 될 기능을 만든다. 남자의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액이 나오게 만드는 수술은 결코 길지 않았지만 강렬한 불쾌감을 동반했다.
베도야의 얼굴이 종종 찌푸려졌다. 엑스타인은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것이 억지로 몸을 개조당하는 베도야의 얼굴이다. 강간보다 더한 행위. 아무도, 이 세상 누구도 베도야에게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수 없겠지. 베도야는 이 모든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병신 같은 짓이야.
엑스타인은 거무스름한 만족감이 피어오르는 것에 자기혐오를 느끼며 베도야의 마스크 위로 입을 맞췄다. 베도야의 새파란 눈에 섞인 경멸을 똑바로 마주한다. 저런 시선을 받아도 싸. 하지만 아마 당신은 절대 나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당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나는 자리 잡고 있겠지.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의 엉덩이를 만지며 나를 생각하겠지.
개 같은 새끼라고, 미친놈이라고, 그렇게 나를 생각하겠지.
베도야가 악물고 있는 재갈 안쪽으로 엑스타인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물어. 내게 상처를 줘봐.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없어지지 않을 상처를. 어깨에 준 할퀸 상처 따위는 금세 나으니까, 아예 내 손가락을 잘라 먹어봐.
하지만 베도야는 혀로 엑스타인의 손가락을 밀어내었다. 명백한 거절에 엑스타인의 얼굴이 차가운 자조의 빛으로 가득해졌다.
의사가 돌아가자 엑스타인은 잠자코 베도야를 풀어주었다. 베도야의 시선에서 차가운 모멸의 빛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베도야는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엑스타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미친 건가? 우리 군은 광인을 원수로 올린 건가?
핀레이 엑스타인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는 보고가 많았다. 자신을 상대로 한 협박도 그렇지만, 그는 거칠 게 없는 듯 굴었다. 일반 병사들에게는 군신 그 자체였지만, 군 내부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 문신들 사이에서 왕보다 더 강력하게 군림하고 있는 베도야와는 여러모로 다른 인물이었다. 입지는 불안정하고 그 자신의 거침없는 행보 또한 여러 스캔들을 일으켰다. 하지만 특유의 냉혹한 성격과 시원시원한 일처리, 그리고 영웅적인 업적은 엑스타인을 결국 군부의 신으로 만들어주었다.
베도야는 팔목을 주무르며 엑스타인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웃고 있던 엑스타인이 소파에 앉았다.
“가.”
엑스타인이 중얼거렸다.
다 끝났다. 주인과 노예라고. 그딴 말도 안 되는 관계는 이미 끝나버렸다. 아마 이 방에서 나가는 즉시 베도야는 엑스타인을 제거하려 들 것이고, 엑스타인의 가당찮은 반항은 두어 번 만에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마음대로 해. 엑스타인은 우울하게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나가는 베도야의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꽤 오랫동안 애액이 나오는 뒤를 가지고 수치심에 떨겠지. 그리고 아마 영원히, 당신이 얼마나 살든 간에 영원히 나를 잊지 못할 거다.
베도야가 당장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가버리라니깐. 자신이 망쳐버린 것이 아까워 우는 모습 따위는 진짜 들키고 싶지 않은데.
“정신 상담 받아야 하는 건가?”
베도야가 물었다.
엑스타인이 눈을 떴다. 베도야는 젖은 정장을 입은 채로 심각하게 엑스타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이성이 살아난 얼굴인데도 묘하게 다정한 느낌이 들었다.
수상인 베도야도 아니고
노예인 키아란도 아닌
누군가가 거기에 서 있었다.
“무슨 뜻이야?”
“너. 곤란해, 원수가 정신 이상이면.”
“너희는 좋지 않나?”
군의 원수가 정신 이상이면 그걸 빌미로 삼아 공세를 펼칠 인간이 곤란하다고 말하는 게 우스워 무뚝뚝하게 한마디 하자 베도야가 입을 달싹거리다 한숨처럼 말했다.
“네가 정신 이상이면 내가 곤란해.”
“당신에 대해서 떠벌릴 거 같아서?”
“장애인을 죽이는 건 뒤끝이 찝찝하니까.”
어련하시겠어.
엑스타인이 웃지도 않고 시선을 돌렸다. 더럽혀진 베도야는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젖은 금발이 희게 질린 뺨에 달라붙어도,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어 있어도, 베도야는 늘 그렇듯이 서늘하고 고고했다. 패배감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더럽힐 수 없다. 그리고 아마도.
베도야는 자신을 잊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없었던 인간인 것처럼.
“널 죽일 거야.”
베도야의 목소리에 엑스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엑스타인 자신이 당했어도 분명 죽였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널 제거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
“하지만 그전에 물어보고 싶어.”
그냥 나가서 당장 죽이라고 지시하면 끝날 일인데 나가지 못하고 결국 엑스타인의 앞에 섰다. 늘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망설였지만 끝날 때에는 몹시 후련했는데 지금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너는 미쳤나? 너는 내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나? 그때의 다정한 목소리는 잘못 들은 것이었나? 베도야는 결국 엑스타인에게서 돌아설 수 없었다.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앞을 차지하고 서서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미쳤나 보지.”
“사리 분별을 정확하게 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엑스타인은 미친 걸로 보이지는 않는다. 무모하고 거칠지만 미친 사람처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까만 해도 엑스타인은 계속 자신을 끌어안아주고 있었다. 달래고 있었다. 제정신이었고, 심지어 다정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에게 미쳤나 보지.”
엑스타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순간 베도야가 주먹을 휘둘렀다. 순식간이었다. 엑스타인의 턱이 제대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베도야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젖은 옷인데도 끈질기게 정리하는 꼴이 왠지 베도야다웠다.
엑스타인의 시선이 뺨에 닿았다. 베도야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번은 이걸로 됐어.”
엑스타인의 눈이 커졌다.
“이번만은, 이걸로 됐어.”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내뱉은 베도야가 등을 돌렸다. 옷이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다. 늘씬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뒷모습에 엑스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턱이 욱신거렸다. 제법 매운 주먹이었다. 턱을 쥔 채 그 뒷모습을 핥듯이 바라본다. 뭐라도 좋으니 한 마디만 더 해줘. 소리 없는 애원을 들은 것처럼 베도야가 시선도 주지 않고 말한다.
“그럼 또 다음에.”
그리고 베도야가 사라져간다. 엑스타인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베도야가 현관으로 가는 순간 엑스타인이 뒤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마치 에스코트라도 하는 것처럼. 베도야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열리는 문을 지나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아파. 주먹 센데.”
엑스타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턱이 욱신거리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맞은 듯했다. 턱이 나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으니까 더 아픈데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창 밖에서는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미 밤은 물러가 있었다.
“좋아해. 정말 네가 너무 좋아.”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엑스타인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고백을 하면서도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했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다시 마주친 것은 황궁에서였다.
베도야가 알현실에서 나와 대기실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서는 엑스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문신과 무신을 자극하려는 듯 일부러 맞춘 타이밍이 분명했다.
엑스타인은 관심 없다는 듯 냉정하게 얼굴을 돌렸고 베도야 또한 정면만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일촉즉발의 긴장은 허무하게 사라지고 둘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각하, 원수의 턱을 보셨습니까?”
멧 테이버 비서실장이 물었다. 베도야는 무심한 얼굴로 아니, 라고 대답했다.
“턱에 깁스용 반창고를 붙였더군요. 소문이 사실인가 봅니다.”
“소문?”
“원수가 망나니처럼 밤놀이를 즐기다가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는 볼썽사나운 소문 말입니다.”
베도야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테이버는 입을 다물었다. 베도야는 가십을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정치라는 게 가십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일인 만큼 그도 귀를 열어두고 있었지만 쓸모없는 가십이라면 듣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재수 없는 원수의 코가 깨진 이야기라 무심코 입에 담았지만 언제나처럼 상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테이버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 3주에 한 번씩 만나고는 했으니 아직 만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베도야는 남들이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수술은 성감을 항진시키는 기능이라도 있는 건지 가면 갈수록 섹스가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엑스타인은 그에게 자위를 금했었다.
만나니까 정말 못 참겠군.
베도야는 약간 망설인 끝에 채널을 열었다. 사생활 채널을 열어 엑스타인에게 연결하자 거의 바로 연결이 되었다.
【만나고 싶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으면 조금 더 쉽게 말할 수 있다. 이래서 오래전부터 수많은 연인들이 편지를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언제든 좋아.】
자신만큼이나 엑스타인의 스케줄도 복잡할 텐데 그는 자신만만한 답장을 보내왔다. 베도야는 피식 웃을 뻔했지만 웃지 않았다. 고고한 얼굴을 하고 자신의 주인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케번 우드여도 좋다면 전 토요일 9시면 괜찮습니다만.】
【좋아, 그럼 토요일에.】
마치 평범한 연인들 같다고 생각하며 베도야는 채널을 끊었다. 몸 안쪽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가볍게 참으면서 베도야는 건물 밖으로 나서 환한 빛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부터 토요일 밤이 기다려졌다.
인간이 아닌 것이 되는 괴로운 밤이 어서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