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원하고 은밀한 시간 (8/15)

아름다운 정원이다. 

키아란 베도야는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 별장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것이었고, 그도 몇 번이나 이 경치를 보았었다. 하지만 한 번도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경치는 그저 경치에 불과했다. 홀로그램 엽서를 보고 아름답다며 넋을 잃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키아란에게 경치란 그런 식의 무미건조함을 가져다주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름다웠다.

그는 조금 망설인 끝에 자신의 주인님, 핀레이 엑스타인의 손을 붙잡았다. 가볍게 그 손을 쥐어본다. 어린 남자다. 육체 교환을 고작 두 번이나 했을까. 그에게는 너무나 어리고 패기 넘치는 사내였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장의 수장, 군부의 신. 하지만 그는 지금 그 강력한 육체와 치명적인 힘을 자신에게만 쏟아붓고 있었다. 마치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 하나뿐인 것처럼.

손등을 덮은 온기에 엑스타인은 자신도 모르게 옆에 앉은 베도야를 바라볼 뻔했다. 하지만 베도야는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고 엑스타인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고, 그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으면 이 온기가 무색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엑스타인은 잡힌 손 대신에 다른 손으로 베도야의 머리를 밀어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역시 뻣뻣한 베도야는 흠칫 놀라는 것 같았지만 순순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둘 다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영원을 말 따위로 깰 수는 없었다.

◈ ◈ ◈

—나는 상냥한 주인이니까 선택지를 하나 더 주지.

베도야의 흉하게 젖은 얼굴이 퍼뜩 들어 올려졌다. 엑스타인은 그 입술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약속은 사정이 안 좋으면 거절해도 좋아. 하지만…….

―올해 휴가는 나와 보내겠다고 약속해.

“주인님.”

베도야가 그렇게 엑스타인을 부르며 그 두꺼운 목에 팔을 감았다. 엑스타인이 키득키득 웃더니 베도야의 귓가에 작은 키스를 해주었다. 엑스타인에게 키스를 되돌리고 그 품에 안겨 다시 잠드는 베도야를 느끼면서, 정작 엑스타인은 자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시간이 맞을 때마다 몸을 섞었지만 정작 아침을 같이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느긋한 새소리가 들리는 방, 환한 빛이 쏟아지는 침대 위에서 보기에 베도야의 피부는 너무나 희다. 키아란 베도야라면 최고급 육체를 썼을 테니 자외선 정도가 아니라 방사능에 노출돼도 멀쩡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모를 안타까움에 엑스타인은 서둘러 베도야의 몸 위에 시트를 덮어주었다.

엑스타인과는 달리 베도야는 오랫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베도야의 머리를 안은 채로 그 자신이 알고 있는 키아란 베도야에 대해 떠올렸다. 그중 하나는 키아란 베도야가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은 수면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베도야는 열 시간째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 당신은 키아란 베도야가 아니다. 그런 검은 정치인 따위가 아니지. 그래, 당신은 분홍색이다. 그 요란하고, 촌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색. 아무 데서나 쓰이는 사랑처럼, 온 세상에 난무하는 그 색. 그 싸구려 같은 색깔. 그러나 싸구려든 고급이든, 그 색만큼 대책 없이 사랑스러운 색이 있을까. 당신은 내게 그 색과 같다. 가지기에는 너무나 눈에 띄는, 놓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이미 눈에 들어와버린 그 색.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 머리는 사람의 머리였고 그렇게 작지도, 그렇게 약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머리를 안는 순간 너무나 작고 약하게 느껴져 엑스타인은 씁쓸히 웃었다. 마음이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간사할 수 있을까.

할 이야기 따윈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없었다.

한참 뒤에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놓고 일어났다. 뭐라도 할 생각이었다. 뭐든 먹여야지. 베도야가 요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주방도 으리으리했다. 엑스타인은 주방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혀를 찼다. 아무것도 없었다. 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이 냉장고를 사용한 적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냉장고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그저 가동되고 있을 뿐이었다.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나.

냉장고에 부착되어 있는 전화기를 들고 가장 가까운 슈퍼를 찾았다. 배달이 오는 데 두 시간이 걸린다는 답변을 듣고 어이없어하면서도 재료를 주문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었다. 우유, 달걀, 밀가루, 시럽, 기름…… 말을 하면 할수록 필요한 게 늘어나고 있었다. 바로 이사 와서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필요하겠느냐고 묻자 그쪽에서도 여러 가지를 추천하고 엑스타인도 주방을 둘러보며 계속 추가하느라 주문하는 데 10분이나 소요했다. 엑스타인은 전화를 끊고 기가 막혀서 웃었다.

아침은 도대체 뭘 먹은 거지?

그는 의아해졌다. 행위 후 자신은 케번 우드를 바로 떠났지만 베도야의 경우에는 몇 시간 더 머물러 있었다. 아마 종종 케번 우드에서 바로 출근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뭘 먹었을까. 비서진이 준비해 오는 걸 먹었나. 엑스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먹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하는 거야?”

아무래도 내내 주인님이라고 해줄 생각은 없었는지 베도야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엑스타인은 고개를 돌렸다. 목욕 가운을 입은 베도야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냉혹하지도, 음탕하지도 않은 보통의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엑스타인의 옆에 섰다. 엑스타인과 똑같이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뭘 먹은 거야?”

“아무것도.”

“역시.”

엑스타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냉장고를 닫았다. 베도야가 “역시?”라고 되물었다.

“왠지 아무것도 안 먹었을 거 같아서.”

“바로 출근하니까.”

비서들이 준비해주고.

베도야가 그렇게 말하며 엑스타인에게서 조금 비켜섰다. 배려라는 걸 알면서도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조금 멀어진 것이 불만스러워 둘 사이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한 발자국 정도였다.

엑스타인이 손을 뻗어 베도야를 끌어당겼다. 바로 입술이 겹쳐졌다. 베도야가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엑스타인의 등 뒤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감각이 더 말갛게 느껴졌다.

엑스타인의 키스는 익숙하면서도 거칠었다. 타액을 삼킬 여유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여왔다. 결국은 입술을 연 채 키스를 받게 된다. 입안의 모든 곳을 빨렸다. 뺨 뒤쪽이나 혀의 뿌리까지 샅샅이 유린한 다음에야 엑스타인은 뒤로 물러났다.

“양치했군.”

너도 했잖아, 라는 말을 삼키고 베도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도야의 얼굴이 영 편해 보이지 않아서 엑스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불편해?”

“뭐가?”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베도야는 잠시간의 생각 끝에 대답했다.

“아니, 그냥 어색해.”

“평소 휴가를 누구와 보내는데?”

엑스타인이 물어보면서 베도야를 잡아끌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아직도 그와 베도야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몸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그 몸이 어떻게 하면 흥분하는지, 절정에 오르는지, 절정에 올리고선 사정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지. 벌써 만난 지 2년째, 이젠 엑스타인의 허가 없이는 사정도 못 하게 된 야한 몸의 어깨를 한 팔로 감쌌다. 평소와는 다르게 담백한 몸이지만 엑스타인의 팔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혼자 보내.”

모처럼의 휴가를 혼자 보낸다고? 엑스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라든가, 안 만나?”

베도야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는 사이 욕실에 도착했다. 엑스타인이 잡아끌었다. 베도야는 내키지 않는 얼굴이다. 이전에 강제로 관장하고 개조 수술을 한 이래 베도야는 둘이 같이 욕실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이번 휴가에는 이 버릇을 고치자고 엑스타인은 마음먹고 있었다.

미리 받아놓은 물에 먼저 들어가서 베도야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베도야는 정말 내키지 않는지 딱딱한 눈으로 찰랑이는 물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결국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안은 채 욕조에 앉았다. 베도야가 깜짝 놀라 엑스타인의 어깨를 붙잡았다가 어쩔 수 없이 물에 잠기자 몸을 움츠렸다.

“좋은 추억도 만들자고.”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욕조 옆에는 커다란 불투명 창이 있어 빛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베도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엑스타인의 몸 위에 앉아 있는 탓에 엑스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수면 아래로 엑스타인의 다리가 보일 뿐이었다. 단련을 멈추지 않아 단단해진 근육질의 다리가 자신의 희고 그럭저럭한 다리에 겹쳐져 있다.

엑스타인의 손이 베도야의 유두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베도야가 몸을 가볍게 떨자 엑스타인이 떨지 말라는 듯 베도야의 뺨을 길게 핥아 올렸다.

“늘어났네.”

엑스타인이 말했다.

“더 늘어나면 귀여워지겠군.”

추를 달아서 늘어나게 한다. 유두만으로 울게 해주겠다며 엑스타인은 요즘 유두에 추를 달고는 했다. 아프면서도 분명한 쾌감이 존재했다. 엑스타인과의 모든 행위는 그런 식이었다. 힘들고 괴롭고 아프지만 그것을 참으면 상처럼 엄청난 쾌감이 몰아닥치는 식의.

“귀엽다라.”

베도야가 중얼거렸다. 엑스타인 같은 어린애에게서 들을 소리는 아닌데도 묘하게 기뻤다. 기뻐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눈을 감고 있다가 침묵에 재촉받은 것처럼 입을 열고 말았다.

“휴가에 여자를 만나나?”

베도야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약간 더운 김이 찬 욕실에서 그 목소리가 지독히 기분 좋아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당신을 만나지 않을 때에는 그랬지.”

생각해보니 당신을 만나기 전에도 5∼6년 정도는 나도 혼자 보냈던 것 같네.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깨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엑스타인이 유두에 손톱을 세웠다. 어제 흉측하게 늘어났던 유두가 아파서 몸이 펄쩍 튀어오를 것만 같았다.

“당신의 우는 소리가 좋아.”

엑스타인이 중얼거렸다.

“야하게 울지. 늘어나요, 찢어져요, 아파요, 용서해주세요. 당신의 우는 소리가…… 좋아. 판타지랄까.”

현실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목소리가 천국으로 이끌어준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발딱 선 유두를 어루만졌다. 이 유두도 잘 따라오고 있다. 곧 야해져서 유두를 조금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눈가를 적시며 울게 될 것이다. 성기를 세우고 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스스로 수음을 하는 대신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성기를 바라볼 것이다. 배가 고픈 짐승이 고기를 보는 듯이 탐욕에 가득한 시선으로.

“구멍도 좋아. 달라붙고 쥐어짜고 애원하고.”

베도야의 구멍은 애액을 흘리며 벌름거린다. 사정하고 싶어질수록 그 구멍은 더욱 입을 오물거린다. 갖게 해달라고, 머금게 해달라고, 간청을 거듭하는 그 모습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넣으면 바로 사정할 것 같은 황홀감을 준다.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따로 없었다.

“당신은…… 내 어디가 좋지?”

엑스타인의 목소리가 낮았다. 어느새 유두를 만지는 손가락도 멈춰 있었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에게 몸을 기대었다. 우는 목소리와 항문이 좋다는 엑스타인에게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까. 베도야는 잠시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손일까.”

모르겠는데. 베도야가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좀 더 수면 아래로 내렸다.

“손…….”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유두를 만지고 있던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크고 억센 손이다. 굳은살도 많이 박인 손이 뭐가 좋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베도야의 것처럼 우아한 손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여자들은 길고 단정한 손가락을 좋아한다던데, 남자인 베도야는 이런 손이 마음에 든 것일까.

“남자다워서?”

“글쎄.”

베도야는 더 말해주지 않았다.

엑스타인은 항의라도 하듯 베도야의 유두를 잡아당겼다. 베도야가 가볍게 신음했다. 손가락이 조금 더 농후해진다. 베도야가 숨을 몰아쉬었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다리를 욕조에 걸치게 했다. 베도야의 다리가 활짝 벌려졌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조금씩 내려간다. 베도야가 눈을 감고 그 느낌을 음미했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은 거칠고 단단해서 어디에 있어도 그 존재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듯한 그 손가락이 좋았다. 군인답게 완강하면서도 묘하게 다정하고 어린 남자답게 난폭한 손가락이 마음에 들었다.

“또 젖네…….”

앞도 뒤도 흠뻑 적셔서, 어떡할 거야? 이래서는 씻을 수가 없다고.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놀렸다. 베도야는 욕조에 빠지는 게 두려운지 엑스타인의 팔을 붙잡은 채 숨을 헐떡였다.

엑스타인의 성기가 천천히 들어왔다. 물과 같이 들어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잘 모르겠다. 따뜻한 것에 휘감겨 있는데도 몸 안쪽으로 파고드는 성기의 뜨거움만은 확연히 느껴졌다.

베도야가 머리를 젖혔다. 엑스타인의 어깨에 뒤통수를 대고 물고기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모닝 섹스는 처음이네, 키아란.”

키아란.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이제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이름은, 엑스타인의 노예를 부르는 이름이다. 베도야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엑스타인의 팔을 잡고 허리를 움직였다.

“너무, 밝아요…….”

“그래. 너무 조이는군.”

그렇게 말하면서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가슴을 짓이겼다.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뒤를 조이자 엑스타인이 쿡쿡 웃었다.

엑스타인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가 완전히 들어온 상태로 몸을 들썩이는 정도였는데도 몸이 크게 달아올랐다. 베도야가 엑스타인과 닿은 뒤통수를 움직이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엑스타인이 웃었다.

“빨리 해주세요. 으응, 아, 거기가 좋아.”

“여기도 좋아하잖아?”

엑스타인이 다른 곳을 찌르자 베도야가 교성을 지르며 더욱 엑스타인을 깊게 머금으려고 애썼다. 느릿하고 길던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베도야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 엑스타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다리를 더 벌려봐. 그 말에 베도야가 더 다리를 벌렸다. 손 한 번 대지 않은 성기는 꼿꼿이 서서 끝이 벌렁거렸다.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뒤로만 도달하게 된 이후부터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달하는 걸 지켜보는 데 재미를 붙인 듯했다. 종종 그는 베도야의 다리를 벌리게 해서 그 부분을 빤히 바라보았다.

폭발하기 직전 베도야가 울면서 해달라고 외쳤다. 엑스타인이 가르친 대로 외치는 베도야의 뒤에서 엑스타인이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엑스타인이 사정했을 때 베도야도 뿜어내고 있었다. 욕조의 물이 뿌옇게 물드는 순간, 수치심과 쾌락이 베도야를 관통했다.

어차피 더러워졌으니까.

그렇게 달래면서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뒤를 열었다.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주입된 정액이 느른하게 흘러나왔다. 욕조에서 나온 다음에도 미온수로 가볍게 관장해야 했다. 베도야는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엑스타인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지친 탓인지, 엑스타인의 품 안에 안긴 채 조심스럽게 물을 배설했다. 물과 정액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베도야로서는 커다란 발전이라는 걸 엑스타인은 알고 있었다.

베도야의 몸을 가볍게 닦아 소파 위에 눕히자 베도야가 눈을 감았다. 다시 피곤해졌는지 아무래도 잠이 들려는 듯했다. 가만히 베도야를 안고 있던 엑스타인이 귓가에 속삭였다.

“잘 거야?”

베도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엑스타인도 굳이 다시 묻지 않았다. 베도야의 몸 위에 가벼운 담요를 덮어주었을 뿐이었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머리칼을 꼬았다가 풀기를 반복한다. 베도야는 그것을 느끼며 정말로 잠들고 말았다.

베도야의 숨소리가 가만가만해졌을 때 벨이 울렸다. 엑스타인이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안녕하시냐며 배달원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해 보였다. 케번 우드의 상점에서만 유행하는 19세기 인사법이었지만 엑스타인은 웃기는커녕 본 체도 안 하고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처음 뵙네요.”

배달원이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엑스타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달원이 엑스타인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서 이 얼굴을 본 것 같다, 아는 사람인가. 그런 표정이었다. 보기야 했을 것이다. 뉴스에 종종 나오니까. 베도야가 나왔더라면 바로 알아봤을 테지만 엑스타인은 그렇게 자주 노출되는 인물은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게다가 평소와는 달리 머리가 단정하지도 않았고 상체는 다 벗은 채 바지만 하나 입고 있었으니 더욱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혹시 어디서……?”

결국 배달원이 물었다.

엑스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배달원은 서둘러 가봐야겠다며 몸을 돌렸다. 거구에 차가운 얼굴을 한 남자의 기색이 별로 안 좋자 마주하기 싫어진 것이다. 배달원이 자신의 오토바이로 사라지는 동안 엑스타인도 실내로 들어왔다.

냉장고에 음식을 정리하고 돌아왔더니 베도야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키아란?”

그 말에 잠든 적이 없었던 것처럼 베도야가 눈을 떴다. 잠기운이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잠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엑스타인은 생각했다.

“뭘 먹고 싶지?”

“아무거나 괜찮아.”

무심한 어조는 언제나 이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식사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일만 했을까.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일상을 상상해보며 권했다.

“그래도 골라봐. 쉬운 걸로.”

“네가 할 건가?”

“너는 못 할 거 같은걸.”

베도야는 엑스타인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의 엑스타인은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남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다정한 미남자. 그것이 엑스타인의 모든 것처럼 보여서 베도야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계속 꿈을 꾸고 싶어하는 자신에게 질릴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꾸어도 되겠지.

베도야는 한숨을 삼키듯 웃었다. 아직은 휴가잖아.

“그럼…… 오믈렛.”

“오믈렛? 그걸로 아침이 되겠어?”

“커피는 내가 끓일게.”

베도야가 일어났다. 엑스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얼굴에서 노골적으로 의심스러운 티가 나자 베도야가 웃었다.

“커피는 끓일 수 있어.”

커피만은 끓일 수 있었다.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아도 커피를 계속 달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느새 잘 끓이게 되었다. 이 집에서도 커피만은 언제나 떨어지지 않았다.

베도야는 웃고 있었다. 엑스타인은 그 얼굴을 몹시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노골적으로 신기해하는 순간 베도야의 얼굴은 다시 무심하고 차가워질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는 베도야의 웃는 얼굴을 눈동자 안에 새기려는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른한 눈이다. 휴가 때에는 내내 저런 눈을 하고 있었을까. 혼자서? 여기서 도대체 베도야는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오로지 혼자서.

베도야의 팔이 움직였다. 우아한 느낌으로 움직이는 팔이 커피를 갈고 드리퍼에 넣고 물을 부었다. 포트의 가느다란 주둥이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정확하게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그 물줄기가 마법 같았다.

“잘하네.”

기계적으로 오믈렛을 만들며 커피가 만들어지는 것을 곁눈질하고 있는데 갑자기 베도야가 말했다. 맛있어 보여. 그 말은 담담했다.

“아, 뭐, 어릴 때부터 요리는 내가 했으니까.”

“그래도 요즘 세상에 이렇게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니 의외인데.”

“빈민가에선 아직도 스스로 하지.”

그런가…….

베도야가 중얼거리며 커피를 두 개의 잔에 따랐다. 한쪽 잔을 엑스타인에게 살짝 밀어주고 스스로의 잔은 입에 댄다. 엑스타인은 그제야 베도야의 오래된 인터뷰를 기억해냈다.

*커피를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거의 중독이죠.

엑스타인은 그 인터뷰 이야기를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최근 시간이 날 때마다 베도야에 대해서 찾아보고 있었지만 베도야가 괜히 뒤로 물러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신에게 미쳤지.

그 말에 대해서 베도야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마치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던 것처럼.

엑스타인이 오믈렛을 만드는 모습을 베도야는 커피 잔에 입을 댄 채 지켜보았다. 노랗고 동그란 오믈렛이었다. 엑스타인의 손을 알고 있다. 단단하고 강압적이면서 결코 자신을 놓지 않는 그 손. 그 손이 귀여운 오믈렛을 만들고 있다. 어울리지 않아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오믈렛을 해주셨어.”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말하며 엑스타인이 접시에 오믈렛을 담고 새로운 오믈렛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직 계시나?”

“아니. 나이 마흔에 돌아가셨지. 요즘 같은 세상에 마흔에 죽다니. 참 복 없는 사람이지?”

요즘 세상에 마흔이면 어린 나이지만 육체 교환을 못 하는 빈민층에서는 아직도 그 나이에 종종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계층 간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헤레라는 제법 그 격차를 줄이고 복지에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육체 교환같이 거대한 격차는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 나라가 국민에게 육체 교환을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영양 실조였어.”

“……어째서?”

보급식의 영양은 완벽한 균형을 맞추고 있을 텐데. 의아한 눈의 베도야에게 엑스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존심이 있으셨던 분이라 보급식을 먹지 않으셨거든.”

“저런.”

“알약을 먹이는 게 개, 돼지 같은 가축에게 하는 짓과 뭐가 다르냐고 생각하시는 분이었지.”

그런 비난은 언제나 있어왔다. 알약 하나면 필요 영양소를 전부 채울 수 있지만 그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인간 이하의 대우라는 비평은 언제나 받았다. 하지만 그만큼 저렴하면서 가격 대비 훌륭한 수단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국가는 국민의 생존을 위해 영양 공급을 유지할 뿐 국민의 식도락을 책임지지는 않는다. 언젠가 국민의 행복권에 대해서 소송이 들어왔을 때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유감이야.”

베도야가 조용히 말했다.

“뭐 어차피 옛날이야기인걸. 얼굴도 사진을 봐야 기억이 나는 정도고. ……당신 부모님은 어때?”

엑스타인이 두 번째로 만든 오믈렛을 담고서 접시 두 개를 들었다. 베도야가 엑스타인 쪽으로 내밀었던 컵을 들었고, 둘은 자리를 식탁으로 옮겼다.

“우리 부모님 이야기는 사실 뉴스가 가장 정확한데. 나도 반 정도는 뉴스를 통해 알았으니까.”

“응? 어떤 이야기?”

“나한테 이복동생이 있다든가, 어머니가 연하의 남자에게 섬을 사주었다든가, 그 섬이 개인 재산이 아니라 재단 재산이었다든가. 너무 옛날이야기군. 두 분 다 돌아가셨으니까.”

“육체 교환을 하셨는데도 돌아가신 건가?”

“어머니는 자살이셨고 아버지는 사고셨지. 육체 교환을 한다고 해도 평균 나이는 200세 정도니까. 내가 굉장히 오래 산 축이지.”

베도야가 담담히 말하며 포크로 오믈렛을 잘랐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와의 나이 차이를 실감했고, 베도야는 엑스타인과의 계급 차이를 실감했다. 그사이 창 밖은 오후의 밝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당신은 자살 같은 건 하지 않겠지?”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그렇지, 라고 담백하게 응수했다.

“사고만 피하면 되겠네.”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그래, 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베도야는 자신이 언젠가 살해당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그 사고가 정말 사고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아버지 또한 명망 있는 정치가였고 그만큼 적도 많았다. 자신은 아버지보다 몇 배나 되는 적이 있으니 좋게 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베도야는 자신이 만약 죽는다면 엑스타인에게는 사고라고 알려지길 바랐다. 살해당했다고는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요즘 그는 바라고 있었다.

“당신은 사고 같은 건 당하지 않을 거야.”

엑스타인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어조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키아란 베도야 아닌가. 어떻게든 살아남게 될 거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 너도 나도, 결국은 죽게 되어 있다. 인간은 육체를 교환하는 방식을 통해 노화를 극복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죽지 않는가. 자연사만을 피할 수 있었을 뿐이다.

베도야는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에 엑스타인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밝은 빛 아래에서,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주인님을 부르는 베도야에게 놀라 엑스타인의 회색 눈이 조금 커졌다.

“빨고 싶어요.”

베도야는 익숙한 색기를 흘리며 엑스타인의 바지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는 커다란 성기가 있다. 입으로 다 머금을 수도 없는 성기. 음탕한 냄새가 나고 혈관이 튀어나와 있는 검붉은 물건. 목구멍을 헤집고 엉덩이를 찢어발기는 무기를 가지고 싶었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인간이 아닌 암컷이 되고, 매를 맞고 모멸을 당하며 울고 싶었다.

키아란 베도야의 이야기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삶과 죽음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도 그만두고 싶었다.

꿈을 꾸게 해줘.

베도야는 입술을 올렸다. 엑스타인의 성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뒤가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욕실에서 추잡스러운 꼴을 내보였던 항문이 더 탐욕스러워진 듯했다.

엑스타인이 손을 까딱거렸다. 베도야는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엑스타인에게 다가갔다. 손을 뒤로 돌리고 입술만으로 엑스타인의 성기를 빼내었다.

“혀만 내밀어.”

그 말에 베도야가 혀를 힘껏 내밀었다. 침이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며 엑스타인이 웃었다.

“추잡하긴.”

응, 으응. 혀를 내밀고 있어 말도 할 수 없는 베도야가 들뜬 눈으로 엑스타인을 올려다보았다. 빨갛게 물든 눈가가 색정적이었다.

엑스타인이 약을 올리듯 귀두를 베도야의 내민 혀에 문지른다. 베도야의 혀가 엑스타인의 귀두에 달라붙었다. 요도를 헤집으며 할짝거린다. 목이 말라서 견딜 수 없는 듯한 얼굴을 하고 남자의 성기에 달라붙은 베도야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가학적인 만족감이 또다시 엑스타인의 마음속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 마음을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그래서 나는 자꾸 잔인해져가.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뺨을 살짝 쳤다. 거의 힘을 주지 않았지만 베도야의 뺨은 붉어졌다.

“엉덩이, 흔들어봐.”

베도야가 어색하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더 흔들어.”

남자의 성기를 물고 엉덩이를 흔드는 것에 어느새 익숙해졌다. 달라붙었다. 몇 번이나 혀로 얽으면서 엉덩이를 흔들어 재롱을 피웠다. 엑스타인이 좀 더 안쪽으로 성기를 들이밀어주었다. 베도야는 성큼 엑스타인의 것을 물었다. 음탕하고 즐거운 맛이 현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제대로 하는 건 섹스밖에 없군.

엑스타인은 다시 잠든 베도야를 침실에 눕히고 주방으로 나왔다. 아까 먹던 음식들이 식탁 위에 널려 있었다. 커피와 오믈렛. 자신의 접시에는 오믈렛이 남아 있지 않았다. 커피는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베도야의 커피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믈렛은 단 한입 먹은 것이 전부였다. 맛이 이상했나.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포크를 들어 오믈렛을 한 번 더 입에 넣었다. 식기는 했어도 맛에는 이상이 없었다.

몇 번이나 베도야에게 쏟아부은 탓에 이제 섹스는 하려고 해도 못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베도야는 섹스를 요구할 듯했다. 엑스타인은 희미하게나마 베도야가 섹스를 요구하는 타이밍을 알 것 같았다. 베도야는 도피하고 싶을 때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개인사를 말하는 게 싫었던 걸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차갑다. 둘은 결코 현실에서 같이 걸을 수 없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다. 여기는 어느 조용한 꿈 속. 길게 이어진다 하더라도 꿈은 꿈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듣고 싶은 말이 있어.

엑스타인은 접시와 잔을 싱크대로 옮겼다.

베도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원하면 손 따위는 잘라줘도 좋아. 마취를 안 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이런 말을 하면 베도야는 도망칠 것 같았다. 베도야가 물러나는 순간 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다시는 베도야의 몸을 안을 수 없다. 키아란. 그렇게도 부를 수 없다.

그 몸에는 이미 자신을 새겼다. 베도야는 아마 자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초조한 나머지 반쯤 미쳤었지만 진정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그런 패배주의적인 연애가 아니었다. 손을 붙잡고 환한 곳을 돌아다니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일을 걱정하고. 너무 꿈같은 소리라서 스스로도 웃음이 날 지경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둘이서 같은 마음이 되었으면 했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손은 붙잡지 않아도, 어두운 곳에서 남 몰래 만나야만 한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도.

나를 어떻게 생각해.

그 말을 하면 베도야가 도망칠까, 도망치지 않을까. 이 휴가가 끝나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데.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싱크대를 두드렸다. 초조함이 다시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가학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라도 침대에서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잠든 베도야의 뺨을 때려 깨우고 싶었다. 그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해서 수치를 주며 능욕하고 싶었다. 너에게 이러는 남자는 나 하나뿐이지. 그 말 대신에. 엑스타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날 밤, 베도야는 가볍게 열이 났다.

욕실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인지, 여름이라고 해도 추운 산속에서 옷을 벗긴 채 난방이 되지 않은 거실에서 섹스를 했던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베도야는 괜찮다고 했지만 엑스타인은 그 옆에 내내 머물러 있었다. 베도야 자신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구급상자를 찾느라 30분이나 헤매서, 결국 찾아낸 냉각 시트를 베도야의 이마에 붙여주었다.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만이 감도는 침실에서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몸을 이불로 감싼 채 끌어안았다.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많이 아파?”

“아니.”

“그럼 그냥 내 이야기를 해도 될까.”

베도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더 엑스타인 쪽으로 몸을 붙였다. 엑스타인의 이야기라면 듣고 싶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현실을 자각하게 해서 싫었다. 그렇지만 엑스타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육군에 들어갔어. 육군 사관학교에 추가 입학했어. 아슬아슬했지. 최하 소득 계층 특별 입학이었어. 사관학교는 월급을 줘서 선택한 거라 아무 생각 없이 지냈는데 제법 나와 맞더군. 전쟁이 터지고 가장 먼저 전쟁터로 보내졌어. 원래 빈민 출신이 가장 먼저 가게 되어 있었고, 삶에 그렇게 미련도 없었어.

가보니 거기야말로 내 주특기를 발휘할 곳이더군. 삶과 죽음이 너무나 붙어 있어서 계층 따위는 들이밀 틈도 없었어. 마구 쏘아댔지. 총도 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했어. 계속 진급했지. 신났어.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 나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만난 기분이었어.”

엑스타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자장가라도 불러주는 것처럼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이 이어졌다.

“정치에 입문하게 됐지. 솔직히 문신 새끼들이 물정 모르는 소리나 해대는 건 짜증 났지만.”

베도야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쨌든 재밌었어. 거칠게 놀 수 있어서 좋았어. 정치는 또 다른 전쟁터였고 내 주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곳이었어. 진급, 또 진급. 어느 순간 원수가 되어 있었지.

여자도 마구 안았어. 즐거웠어. 육군 사관학교에 다닐 때에는 여자들과는 그저 자기만 했어. 여자들은 나와 자는 걸 좋아했지. 나와 같이 다니는 건 부끄러워했지만. 전쟁터에 나가서는 더욱 스릴이 넘쳤지. 매일 사생의 기로에서 살아와서는 여자와 자고, 여자가 없으면 남자와 잤어. 섹스 또한 거칠어졌지. 사실 SM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 없어. 살롱에 가거나 한 적도 없어. 그저 그때 이런 게 있다는 걸 들어서 알 뿐이야. 기구든 채찍이든, 여하간 모든 행위가 계속 심해졌지. 즐거웠어. 미친놈처럼 사람을 죽이고 섹스를 하다 보니 어느 날 꽤 괜찮은 위치가 되어 있더군.

남들이 결혼을 하라고 했어. 나와 같이 잤던 여자들이 이제 데이트를 하자고 했어. 결혼하자며 유혹해왔지. 그래서 좀 질렸어. 예전에는 나와 같이 있는 걸 부끄러워하던 여자들이 결혼을 하자는 데 질려서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괜찮은 여자들도 만났어. 하지만 괜찮은 여자와는 내가 같이 있을 수 없더군. 나는 안정적인 사랑을 할 수 없었어. 타고나길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나 봐.

여자에게 질리고 나서는 한동안 남자를 안았어. 좋더군. 가장 좋았던 건 남자들과의 섹스는 좀 더 거칠 수 있다는 거였어. 난폭하게 해도 괜찮았지. 남자들은 여자들과는 달리 심리적으로 단순했으니까. 서로 즐겁게 지내던 남자도 두엇 있었어. 그러다가 어느 날 시들해졌어. 모든 게 귀찮았어. 그때쯤이었어. 당신의 영상을 받아 들게 된 건.

부하들은 당신의 영상을 보며 혀를 내둘렀지. 당신답다고 했어. 석상처럼 꼿꼿이 앉아서 무심한 시선으로 보는 게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댔지.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어. 당신이 허리를 떨고 있는 게. 한동안 당신만 생각했지. 당신을 안는 것만 계속 상상했어. 어떻게 울까. 구멍은 어떨까. 허리를 어떻게 휠까. 자위를 시키면? 당신이 저런 걸 원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나 자신이 난잡하게 살아온 게 좋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원하는 걸 난 줄 수 있으니까.”

엑스타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빗소리와 섞여 나지막하게 들렸다. 잠의 물결에 정신이 잔잔히 흔들렸다. 잠귀가 예민하다고 생각했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수 있어. 그게 내 손목이든, 섹스든. 그러니까 말해봐. 당신은 뭘 원하고 있어? 우리는 무슨 관계지?”

잠이 무거웠다. 정신이 계속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엑스타인과 있으면 늘 느끼는 이 추락의 감각. 하지만 엑스타인의 체온이 단단히 닿아 있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베도야는 웃었다. 어린애라서 그런지 귀여웠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강하게 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베도야도 남자의 팔이다. 엑스타인은 가볍게 숨이 막혔을 텐데도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반응이 있기는 했었다. 그는 베도야를 마주 안았다. 베도야와는 달리 부드럽게 안은 그 팔은 마치 베도야가 부서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내 주인님…… 이잖아.”

베도야의 목소리가 잠에 취해 있었다.

“지금 여기에 모든 게 다 있으니까…… 괜찮아. 자도록 해, 레이.”

무슨 관계인지.

뭘 원하는지.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엑스타인은 당장에라도 고백을 할 듯이 굴고 있었지만 베도야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확언 같은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관계가 진지해지는 건 곤란했다. 이 관계는 그저 놀이일 뿐이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자신에게, 자신의 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가벼운 관계다. 그러니까. 언제든 그만둘 수 있으니까.

지금은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

언제까지라도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으니까.

“꿈의 꿈에서 보자고.”

베도야가 그렇게 말하고 속삭였다. 잘 자, 레이. 엑스타인이 눈을 크게 떴다. 레이. 그 말은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베도야는 늘 그러했다. 아무것도 맹세해주지 않는다. 감정도 알려주지 않고, 언제나 애절한 건 엑스타인 쪽이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엑스타인이었다. 초조하고 아슬아슬한 것도 엑스타인 쪽이었다. 하지만.

잘 자, 레이.

하지만 베도야는 모든 것을 준다. 아무런 형태도 없지만, 그만큼 완벽한 것을.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베도야의 체향이 난다. 됐어. 엑스타인은 어떤 관계인지, 베도야가 자신에게 뭘 원하는 것인지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아, 말할 수 없어.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것들은 말로는 할 수 없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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