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타인은 그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겨울 휴가를 베도야와 맞추는 게 거의 불가능해졌다. 베도야의 시간에 맞출 수 없다고 하자 베도야는 그러냐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심술이 나서 평소보다 더 강압적인 섹스를 했다. 베도야는 흠뻑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스스로 엉덩이를 벌리고 교태를 부리고 나중에는 엑스타인의 성기에 스스로 삽입했다. 완전히 조교된 유두를 괴롭히며 페니스에 구멍을 뚫을 거라고 협박하자 그 말에 더욱 흥분하며 젖다 못해 질질 흐르는 구멍으로 엑스타인을 쥐어짰다.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베도야는 그 뒤에도 휴가에 대한 아무 이야기도 없었다. 늘 서운한 건 이쪽이지. 엑스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노예인 키아란이 보고 싶었다. 수상인 베도야는 지금은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의 파티였다.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 베도야와 자신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베도야의 옆에서 음부만 겨우 가린 여자가 술을 따라주고 춤을 추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 또한 그러했는데도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주시하고 있었다. 질투가 꼬리를 세운 고양이처럼 심장을 할퀴어대고 있었다.
갑자기 베도야가 일어섰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지만 파티장 입구에서 그의 비서실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뭔가 긴급히 보고받을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스트리퍼와 질척한 키스를 나누는 황제의 옆을 조심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각하, 연쇄 살인범 소식입니다.』
연쇄 살인범? 엑스타인은 냉혹한 얼굴로 그게 뭐지, 라고 생각했다. 연쇄 살인범 따위가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할슈버트가 황궁 파티에서 채널을 연결해 보고할 정도면 중요한 내용이겠지만 자꾸 사라져가는 베도야가 눈에 밟혀 보고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쇄 살인범이 왜?』
『수상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수상이 연쇄 살인범이라고?』
순간 엑스타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알리바이였다. 저번 주말에도 베도야는 엑스타인과 함께 있었다. 만약에 알리바이를 댈 수 없는 상황이면 베도야가 어떻게 행동할까 생각하자 손발이 차가워졌다. 베도야는 알리바이를 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닙니다. 수상과 똑같이 성형한 살인범입니다.』
베도야와 똑같이?
엑스타인은 기가 막혔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할슈버트는 들뜬 목소리로 『영상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대기실로 와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제야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나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 철벽의 사내라니까. 엑스타인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내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자가 연쇄 살인을 저질렀다는 보고를 받은 자의 태도는 결코 아니었다.
대기실로 배정된 방에 가자 할슈버트는 활짝 웃고 있었다. 베도야의 고난이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듯했다. 엑스타인이 자리에 앉자 곧 방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이 내려왔다.
키아란.
엑스타인은 속으로 신음했다. 그 화면 속에는 베도야가 있었다. 심지어 한 명도 아니었다.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늘씬한 정장에 금발, 새하얀 손발, 새파란 눈, 그리고 베도야 특유의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종 미친놈들이군.”
엑스타인의 차가운 한마디에 부관들이 와 하고 웃었다. 베도야의 얼굴을 한 놈들이 추잡한 짓을 하는 걸 보는 게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엑스타인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베도야, 베도야, 베도야. 그렇게 소리 지르며 멀쩡한 민간인 하나를 죽이는 모습은 사실 엑스타인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베도야가 여전히 자신의 정적일 뿐이라면 어느 정도는 즐거웠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베도야는 자신의 하나뿐인 연인이니 즐겁기는커녕 불쾌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불쾌감도 꽤나 희미해서, 사실 남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이것을 본 베도야의 심리적 충격이 걱정되기는 했다. 아무리 베도야가 냉혹한 인물이라고 해도 이걸 보면 아무래도 쇼크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한 놈들이 떼거지로 길 가는 사람을 마구 찔러 죽이는 모습이다. 심지어 자신이 무슨 이단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외치고 있는 모습은 섬뜩하지 않을까. 의외로 남의 일이라며 그냥 넘길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지. 심지어 이 미친놈들은 한 명만 죽인 게 아닌 모양이다. 베도야, 베도야, 베도야. 그렇게 외치면서 여러 명을 죽였다. 저렇게나 눈길을 끄는 놈들이 사람을 여럿 죽이는 동안 어째서 잡히지도 않았지? 생각나는 대로 묻자 할슈버트가 대답했다.
“저런 놈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엑스타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죽거리고 그 부관들이 웃고 있을 때, 베도야는 대단히 심각한 얼굴을 한 비서진과 함께 똑같은 영상을 보고 있었다. 비서진들이 베도야의 눈치를 보는 동안 베도야는 바른 자세로 앉아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감거나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고 지켜보았다.
“각하, 그만 보시는 편이…….”
몇 번이나 말했지만 베도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영상을 여러 번 돌려서 본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기자들에게 가볍게 언질은 줘야겠군. 나는 그들의 방식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도면 됐어. 성명을 내는 건 너무 진지한 대응이야.”
성명을 내자고 했던 테이버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각하.”
베도야는 손짓 한 번으로 테이버의 입을 다물게 하고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되는 영상에 시선을 준 채 물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지? 그냥 일반인이 나와 똑같이 전신 성형을 하고 다니는 건가?”
“베도야교 신자들입니다.”
“베도야교?”
베도야가 테이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테이버는 이럴 때 새삼 상관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묻는 모습에서 소름이 끼쳤다. 베도야교. 유명한 이단 중 하나이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키아란 베도야, 즉 테이버의 상관인 눈앞의 이 미남자였다. 그들은 유명했지만 베도야는 지금까지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비서들이 쉬쉬했던 까닭이다.
조심스럽게 설명하자 베도야가 달라지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섬기는 교도가 어째서 저런 짓을 한 거지?”
테이버가 흘끗 시선을 주자 비서진 중 한 사람이 서둘러 대답했다.
“각하의 영생을 위해서였답니다.”
베도야는 다시 시선을 영상으로 돌렸다.
제대로 된 영상은 아니었다. 대체로는 감시 카메라 영상들이라 그저 뭘 하는지 대략적인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끔찍했다. 그런데 저게 자신의 영생을 위해서였다니.
“그럼 저건 일종의 제사이군. 희생자는 산 제물이고.”
“그렇습니다.”
자신과 같은 얼굴들이 하는 끔찍한 모습. 그 얼굴들이 가지는 하나하나의 표정에 소름이 끼친다. 마치 자신의 어두운 모습이 까발려지는 듯한 불쾌함에 등골이 오싹했다. 베도야는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자신의 표정을 감추면서 화면 속의 자신을 주시했다. 광기에 찬 저 추잡한 모습. 문득 엑스타인이 떠올랐다. 그의 앞에서 쾌락에 탐닉하며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은 저것과 얼마나 다를까.
갑자기 사생활 쪽 채널에 불이 들어왔다. 연결하자 엑스타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 주말에는?】
베도야는 여전히 영상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사람을 찔렀다. 도망가는 사람을 한 번, 두 번, 세 번. 자신의 파란 눈이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광인처럼 번질거리는 눈을 보던 베도야가 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도저히 만날 수 없을 듯했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저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을까 생각하자 온몸의 피가 다 식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몇 번이나 생각해봐도 눈앞의 영상은 지나치게 강렬했다.
언제나처럼 베도야는 아무런 변명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엑스타인이 【그럼, 다음에】라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베도야는 채널을 서둘러 끊어버렸다.
◈ ◈ ◈
베도야를 못 만난 지 4주째였다.
예전에는 두 달을 못 만난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매주 만났었다. 3주간 못 만났을 때에도 갑자기 나라에 자연 재해가 터졌기 때문이었고 그 외에는 서로 시간을 내서 반드시 만났었는데. 겨울 휴가도 스케줄을 맞춰주지 않았으면서 이제는 만나주지도 않는다.
끝난 건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엑스타인은 냉정한 얼굴로 부하들의 보고를 들으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베도야교의 연쇄 살인 사건. 그 이후로 베도야는 자신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스캔들은 상당히 컸다. 베도야교가 베도야의 사집단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저 기자들에게 언급만 하는 수준으로 물러나려던 베도야는 결국 국민들에게 적극적인 해명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베도야교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들의 구성원 누구와도 만난 적이 없다. 추종자에 대해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므로 아무런 감정도 없다. 단지 살인에 대해서는 일반 국민이 가지는 감정과 똑같은 충격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런 말이었다. 베도야답게 흠잡을 데 없는 대답들이었다.
스크린 속의 베도야는 아름답고 우아하다. 베도야교의 놈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차갑고 무심한 얼굴이 갑옷처럼 빈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도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베도야의 입에서는 어떤 어려운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 무심한데도 그 얼굴에는 각각의 표정이 들어 있었다. 유감과 분노, 진지함과 부드러움. 그 모든 것이 흘러나왔다. 냉정해 보인다는 건 키아란 베도야의 최대 단점이다. 하지만 베도야는 냉정해도 솔직하고 차분하고 긍정적이고 친밀하고 정중하고 배려심이 넘쳐 보였다. 물론 그것은 베도야 밑에 있는 비서진들의 작업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베도야라는 남자가 인간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이 연민과 애정이 넘치는 것이라는 걸 뜻하기도 했다. 실제의 베도야도 다감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여름휴가 때 베도야는 내내 조용하고 사랑스러웠다. 말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연인이 되었다고 믿었었는데.
차인 건가.
못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섹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서 하는 거라고는 섹스밖에 없는데 차였다면 분명 그쪽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경우 너무 난폭해서 차인 건지, 너무 부드러워서 차인 건지 알 수 없으니 참 괴로운 일이었다.
만나야겠다고 엑스타인은 마음을 굳혔다. 왜 차인 건지 알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문득 옛날에 헤어졌던 여자들이 생각났다. 우리가 헤어진 거냐. 왜 매너 없이 구냐. 우리가 왜 헤어지는 거냐. 내 어디가 싫으냐. 이런 걸 물어보는 여자들이 정말 짜증스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되다니. 입맛이 썼다.
“장례식에 나도 참석하지.”
엑스타인의 말에 보좌관들의 만면에 미소가 어렸다.
희생자들의 합동 장례식이었다. 수상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얼굴을 한 자들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베도야가 직접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장례식은 국장이 아닌데도 국장을 방불케 하는 규모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 모든 돈은 베도야의 개인 재산에서 지출되었다. 보좌관들은 그 장례식에 참여해줄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문신들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엑스타인은 키아란 베도야를 싫어했다. 그는 자신의 애인이자 사랑스러운 암컷인 키아란을 사랑하다 못해 종종 일희일비하는 수준이었지만 수상에 대해서는 늘 비슷한 감정이었다. 종종 그는 베도야와 키아란이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냉혹한 정치가, 정적을 암살해대며 사람 목숨을 아무렇게나 갖다 버리는 문신들의 수장.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며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수상을 혐오했다. 그러니 엑스타인은 수상을 엿 먹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었다. 이건 베도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 덕분에 초고속 출세를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난폭한 짓을 일삼는 애송이를 경멸했다. 둘은 공식적으로 그런 사이였다. 만나는 동안,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엑스타인은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 수상을 비난했고, 수상은 무신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서로는 서로에게 화살을 퍼붓고, 암살자를 보내고, 뒤통수를 치고, 여론을 조작하고, 권모술수를 화려하게 펼쳐 보였다. 그러니 엑스타인이 베도야가 한 방 먹은 장례식에 가서 심리적으로 압박을 펼치는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엑스타인이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베도야는 멀리 단상 위에서 장례식의 리허설을 마치는 중이었다. 그는 베도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구라고 하기에는 몸매가 잘 다듬어져 있는 편이지만 워낙 장신인지라 위협이 되는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그저 노려보고만 있자 주변에서 움츠러들 정도였다. 둘의 사이가 최악이라는 건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나 엑스타인은 사실 베도야를 노려보는 중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수상인 키아란 베도야의 행보를 싫어했지만, 베도야는 엄연히 그의 연인이었다. 종종 베도야가 자신의 연인 키아란과 동일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긴 해도 그건 착각일 뿐이었다. 정치가가 아닌 개인 베도야는 사랑스럽기만 했고, 엑스타인은 계속 자신을 피하는 애인의 직장 앞에서 기다리는 스토커의 심정으로 베도야를 살피고 있었다.
말랐잖아.
엑스타인은 희미하게 입술을 올렸다. 그건 마치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경멸해 마지않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엑스타인의 마음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베도야는 상당히 여위어 있었다. 휘청거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할슈버트가 엑스타인의 옆에서 베도야를 보더니 나직하게 한마디 했다.
『유족들의 동정표를 받기 위해 일부러 안색을 어둡게 만든 모양입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얼굴을 보며 할슈버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베도야는 태생적으로 고고한 남자다. 단순히 쇼맨십으로 스스로의 안색을 나쁘게 만들 인간이 아니었다. 그건 베도야의 도도한 자존심과 어울리지 않았다.
베도야는 정말 여윈 것이다. 엑스타인의 머릿속에 베도야 교도들이 민간인을 찔러 죽이던 영상이 떠올랐다. 냉혹한 정치가로서의 베도야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 베도야는 괴로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저기에 있는 건 인간 베도야인 모양이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두뇌에 채널을 연결했다. 마른 거냐고, 어디 아픈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자신을 만나지 않느냐고도.
그런데 채널 연결을 거부당했다.
베도야와 밀회를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엑스타인의 눈이 소리 없이 커졌다.
버림받았어?
버려진 거냐고 생각하면서도 설마하고 넘겼었는데.
이런 방식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었다. 베도야가 이 강압적인 관계에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자신을 제거해버릴 수는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도 어느새 사라지고, 한동안은 그저 행복뿐이었다. 주말마다 베도야를 만나서 그와 음탕한 섹스를 하고 아침에 둘이 토스트와 커피를 먹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저 즐거웠다. 평생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 할 정도였다. 아무도 몰래, 주말에 잠깐,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그저 만족스럽다고.
그런데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이런 식으로 버려져? 엑스타인은 충격을 받았다가 곧 베도야를 노려보았다.
이딴 식으로 나를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엑스타인은 냉혹한 눈을 돌렸다. 베도야를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게다가 감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무자비한 군인 정치가로서의 자신이 무너지고 사랑에 빠져 날뛰는 흔한 남자만 남을 것 같았다. 곧 그렇게 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었다.
네가 날 제거한다는 결말은 있어도 그냥 헤어진다는 결말 따위는 없어. 우리에게 그런 평화로운 결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엑스타인이 어금니를 악물었을 때였다. 할슈버트가 갑자기 더욱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엑스타인에게 채널을 연결했다.
『각하, 베도야 교도들이 장례식장을 에워쌌다고 합니다.』
심술궂은 어조였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베도야가 장례식장 입구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늘 그렇듯 차갑고 단정한 얼굴.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핏기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위기감이 들었다. 베도야는 지금이 한계일지도 모른다. 근거는 아무것도 없는데 문득 든 생각이었다.
엑스타인의 시선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베도야는 연설문을 한 번 더 읽어보면서 엑스타인의 시선을 무시하려 애썼다. 엑스타인은 채널 연결을 두 번 시도하고는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엑스타인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져가고 있었으니 결코 납득한 것은 아닐 게 분명했다.
조금만 더.
마음을 조금만 더 정리하고 엑스타인을 만나자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맴도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추잡한 표정이 잊히질 않았다. 불면증이 심해졌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입맛도 없어서 식사를 억지로 하는 탓에 체중은 줄었고 커피 섭취량은 더 늘었다.
‘커피 너무 마시지 마.’
엑스타인과 같이 보내는 휴일의 아침. 엑스타인은 둘이 먹을 간단한 아침을 차리고 베도야는 커피를 끓인다. 커피를 두 잔째 마시면서도 소시지와 스크램블드에그를 한입 먹는 게 전부인 베도야에게 엑스타인이 한마디 했었다. 베도야가 웃자 엑스타인이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며 한 번 더 말했다. 커피 너무 마시지 마. 중독된다. 그때에는 웃어넘겼는데 정말 중독일지도 모른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각하, 안 좋은 소식입니다. 베도야 교도가 장례식장 앞에 집결해 있다고 합니다. 경찰과 대치 중인데 정작 손님들이 장례식장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구 사항은 뭐지?』
『각하를 뵙고 싶어합니다.』
베도야는 가만히 연설문을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고인을 추모하느라 추모객에 누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유족 대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각 유족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자신의 존재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었다. 고개를 들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누군가는 소리치고, 누군가는 도리어 그를 위로하고, 누군가는 차라리 사라져달라고 하고, 누군가는 고맙다고 했다. 긴 길이었다. 불타는 자갈밭을 맨발로 걷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헝클어졌다. 문득, 한계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 정치를 했나. 조금 쉬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몇 년 휴양하면 조금 힘이 날 것이다.
베도야는 사죄를 끝낸 뒤 장례식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계점에 가까운 게 아니라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정치에서 발을 뺐을 때에도 이런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망가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엄습해서 뒤로 물러났었는데.
『내가 나가지.』
“각하!”
테이버가 깜짝 놀라 육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먼 곳에 있는 무신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상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베도야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런 무도한 무리와 만나러 나가겠다니. 가뜩이나 안전을 위협받는 위치에 있으면서. 폭탄 테러를 당한 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차를 준비해.”
그렇게 말하며 베도야가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베도야의 비서진이 황망히 그의 뒤를 따랐다. 도착한 리무진에 올라탄 베도야가 먼저 빠져나갔다.
엑스타인은 의아한 기색을 감추면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인 테이버 비서실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비명처럼 베도야를 불렀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 실수를 할 인간이 아니었는데. 게다가 그런 실수를 하고도 아무런 수습책도 없이 베도야만 바라보고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할슈버트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각하, 수상이 나갈 거랍니다.』
『나가? 어디를?』
『베도야 교도 앞에 나갈 거라고 합니다. 혼자 나서겠다고 하는 바람에 지금 비서진이 패닉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엑스타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그대로 멎는 듯했다.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 오한이 났다. 머릿속에서 베도야의 얼굴을 한 미친놈이 사람을 찌르던 것이 떠올랐다. 수십 번, 수백 번 찔리던 희생자의 얼굴 또한 베도야의 것으로 바뀐다. 공포로 눈앞이 흔들렸다.
엑스타인을 패닉으로 밀어 넣은 베도야는 차 안에 있었다. 베도야 교도들 사이로 느리게 차를 몰아 자신을 노출시키자 베도야 교도가 리무진을 따라 쫓아왔다. 광기의 손들이 수없이 창을 두드렸다. 아무리 방탄유리라고 해도 위험했다. 심지어 교도들이 보닛 위로 뛰어오르고 리무진 지붕 위에서 뛰기 시작했다. 베도야, 베도야. 소리 높여 베도야의 이름을 부른다.
“각하, 안 되십니다.”
테이버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어떻게든 베도야를 말리려고 기를 썼다. 저런 광적인 무리 속으로 베도야를 보내다니.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베도야는 테이버를 스쳐 지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비명과 함성과 열광.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도야가 나오자 비명을 지르며 교도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모두가 금발에 파란 눈에 똑같은 얼굴을 한 자들이었다. 똑같은 손이 뻗어왔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각하, 던집니다!』
머릿속으로 테이버가 외쳤다. 그와 동시에 베도야는 눈을 감고 팔로 자신의 눈을 감쌌다. 피이이익.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펑 소리와 함께 섬광이 퍼졌다. 테이버가 던진 섬광탄이 터진 것이었다.
섬광탄이 터지는 것을 멀리서 보며 엑스타인은 달리고 있었다. 그런 구경거리를 놓칠 수 있겠느냐며 보좌관들을 뿌리치고 달려온 엑스타인은 섬광이 터지는 걸 보자마자 그쪽으로 달렸다. 베도야 교도들이 베도야의 유도로 다른 곳으로 옮기자 그제야 경찰과 기자와 추모객들이 북적거렸다. 이미 장례식장 주변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승이 열리는 윔블던의 메인 스타디움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보좌관을 따돌리기란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 간단했다. 엑스타인은 사람들을 헤치며 섬광탄이 터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베도야의 리무진이 겨우 교도들 사이를 빠져나왔는지 엑스타인의 옆을 스쳤다. 테이버 비서실장의 얼굴도, 익숙한 비서진의 얼굴도 보이는데 정작 베도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는 좀 더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달렸다. 베도야 교도는 대충 보기에도 300∼400명은 되어 보였다. 베도야와 똑같이 전신 성형을 한 사람도 있었고, 얼굴만 성형한 사람도 있었고,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파란 콘택트렌즈만 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뭉뚱그려서 보자면 전부 키아란 베도야였다. 종종 인종이 다른 이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부 베도야를 흉내 낸 것이 분명했다.
키아란. 그렇게 외치려는 입을 꾹 다물고 엑스타인은 베도야 교도 무리로 뛰어들었다. 뛰어들기 직전 한 남자의 모자를 낚아채 깊숙이 쓰고 교도 무리로 뛰어드는데 뒤에서 “내 모자!”하는 비명이 들렸다. 물론 무시하고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동서남북이 모두 베도야였다. 소름 돋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엑스타인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무지 베도야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너무나 비슷해서 찾기가 어려웠다. 엑스타인은 혀를 차며 베도야를 떠올렸다. 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는 주변을 관찰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작은 골목들을 하나씩 수색해나가기 시작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피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것일까. 포기하고 저 무리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들여다봐야 하나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마지막 골목,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돌아서려던 그의 눈에 그늘 쪽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베도야를 찾아!
베도야, 베도야, 베도야.
인파의 광기 어린 고함과는 조금 단절된 곳에 서 있는 남자는 지쳐 보였다. 몇 주 전보다 여위었고 안색도 좋지 못했다. 엑스타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베도야가 벽에 기댄 채 생각했다. 장례식장에서 다른 쪽으로 유도하는 데는 성공했다.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저 무리 사이를 당당히 가르고 사라지는 게 좋을까. 어느 쪽일지 알 수가 없었다. 베도야, 베도야. 고함은 계속 커졌다. 속이 뒤집어졌다. 여기에 계속 숨어 있는 것보다 차라리 나가는 게 좋을까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잠깐 어깨를 굳힌 베도야는 천천히 남자를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엄청난 장신에 단단해 보이는 육체. 재킷이 없는 군복 차림. 익숙한 모습이었다.
“엑스타인.”
베도야의 중얼거림에 엑스타인이 고개를 들었다.
엑스타인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가 장례식장에 온 이유는 뻔했다.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처지를 바꿔 엑스타인이 자신과 같은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자신 또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엑스타인이 장례식장에 온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왜? 게다가 보좌관도 보이지 않고 이상한 모자를 쓴 데다 일부러인 듯 재킷까지 벗어 던진 모습이었다. 베도야가 의아한 눈을 하고 물었다.
“여긴 웬일이야?”
그 말에 기가 막혀서 엑스타인은 순간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웬일이냐고?
“웬일이냐니. 내가 여기에 놀러 온 것처럼 보여?”
엑스타인이 빈정거렸다. 화가 나서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은데 간신히 참고 있는 듯 이를 악문 어조였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을 그늘 안쪽으로 잡아끌면서 서늘하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내가 여기에 왜 온 것 같아, 당신은?”
“몰라서 묻는 거잖아.”
베도야의 모른다는 대답이 무정하면서도 어이가 없어 엑스타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사이 베도야는 엑스타인을 그늘 안쪽에 세우고 한숨을 쉬었다. 한 사람이 숨기도 빠듯한 공간에 둘이나 숨었으니 아무래도 달라붙을 수밖에 없다. 엑스타인의 낯익은 체향이 폐에 들이차는 착각이 들었다. 몸 안쪽이 뜨거워진다. 미쳤군. 베도야는 담백하게 자신에게 일갈했다.
“나도 모르겠군.”
엑스타인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를 피하고, 연락도 받지 않고, 심지어 미친놈들 속에 제 발로 들어온 당신을 쫓아왔더니 왜 왔냐고 하고.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엑스타인이 걱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도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멱살을 붙들었다.
“말 좀 해봐.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
“나와 그만두고 싶어?”
엑스타인의 목소리가 음울해졌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어두운 목소리에 베도야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엑스타인의 표정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당신은 죽고 싶은 거야?”
베도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는 베도야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 얼굴에서 놓친 단어 한 조각이라도 있는지 찾아보는 사람처럼.
“그동안 바…….”
베도야가 바빴다는 무난한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 순간이었다.
“바빴다는 핑계 대면 죽을 줄 알아.”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의 입이 다물어졌다. 하. 엑스타인이 기가 차 웃었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분노의 기색이 가득할지언정 걱정과 안도의 빛도 넘실거리고 있어서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베도야는 난처해졌다. 자신의 얼굴을 한 남자에게 자신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부서져서 짐승이 되는 자신이 갑자기 혐오스러워졌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들과 자신은 분명 다른 사람인데도 그들로 인해 스스로의 행동에 예민해졌고, 그 예민해진 신경이 가라앉을 때까지만 보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들을, 어떻게 하면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잘 전할 수 있을까.
“나는…….”
골목 너머에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움직인다. 베도야는 시선을 돌려 엑스타인과 눈을 맞췄다.
“좀 피곤했어.”
더 말해보라는 듯 엑스타인이 말없이 재촉했다.
“안 좋은 일이 있었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어.”
똑같은 얼굴들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수치가 온 세상에 까발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짐승 같은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조금 쉬고 싶었을 뿐이야.”
결국 길게 말하지 못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가 나 미치겠는데도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한심한 기분에 스스로에게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는 베도야의 멱살을 풀어주고 대신 손목을 붙잡았다. 초조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는 나와 있으면서 쉬는 줄 알았는데.”
“그건 쉬는 게 아니지. 시달리는 거라고.”
베도야의 말에 엑스타인이 픽 웃었다.
“너는 쉬는 거잖아. 너는 학대받고 부서지면서 자신을 해방시키잖아. 그게 쉬는 게 아니면 뭐가 쉬는 거라는 거야?”
“…….”
“내 앞에서 넌 부서지니 추락하니 하지만, 사실 너는 부서지지도, 추락하지도 않아. 언제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잖아. 휘둘리는 건 늘 내 쪽이지. 지금만 봐도 그렇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베도야가 엑스타인이 잡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엑스타인의 손은 차갑고 축축했다. 식은땀이라도 난 사람처럼. ……찾아 헤맸던 걸까. 저 엉망인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밀리고 또 사람들을 밀치면서. 필사적으로 헤맸던 걸까.
“나는 네 앞에서 짐승이 되고는 해.”
생각보다 더 쉽게 그 말이 나왔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에게 잡힌 손목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너와 자는 게 마음에 들어. 하지만 가끔 짐승이 된 나 자신을 참을 수가 없어. 지금이 그때일 뿐이야.”
무슨 개소리야. 엑스타인이 픽 웃었다. 베도야의 하얀 얼굴은 언제나처럼 어여뻤고 그 붉은 입술은 탐스러웠다. 하지만 나오는 소리는 완전한 개소리였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웃기지 마.”
엑스타인이 으르렁거렸다.
“당신은 나와 자서 짐승인 게 아니야. 당신은 그냥 놈들의 얼굴에서 당신 자신을 발견한 것뿐이잖아. 나와 잘 때의 당신이 아니라 당신 자신. 정적을 물어뜯을 때의 식인귀 같은 당신 말이야!”
순간 베도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정치가로서의 냉혹한 얼굴이 나타난다. 그 모습을 엑스타인도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개인인 키아란 베도야는 조용하고 소탈하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게 마치 사라져버릴 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공인인 키아란 베도야는 냉혹하고 무시무시하다. 정적을 용서하지 않는 섬뜩함까지 있어 거의 전제 군주에 가깝다.
어쩌면 엑스타인만큼 베도야 스스로도 자신을 분리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가로서의 자신은 그저 직업일 뿐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엑스타인은 오랜만에 보는 베도야의 차가운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식인귀? 내가?”
베도야의 목소리에 차가운 날이 섰다.
“식인귀보다 더하지.”
엑스타인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베도야의 파란 눈에 노기가 서렸다. 그는 엑스타인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검의 자루를 잡은 채 적을 노려보는 사무라이 같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엑스타인.”
“죽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건 틀린 말이 아니야.”
그동안의 울분이 좀 쌓여서 말이 막 나오기는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 교도의 살인 영상을 보며, 정확히는 사람을 죽이며 웃는 베도야의 얼굴을 보고서 제법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울렸다.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건 베도야에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식인귀 같은 그 모습은 베도야와 잘 어울렸다. 남들은 1년 있으면 5년은 늙는다는 정치판에서 베도야는 종신 수상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아무리 육체 교환을 했다지만 종종 요괴처럼 느껴질 정도로 변하지 않는 그 분위기라니.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정적들을 죽이고 그 피를 마셔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것도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배 속이 홧홧해질 정도로 감정이 들끓었다. 베도야는 입을 다문 채 엑스타인을 노려보았다. 이렇게까지 강렬한 감정은 엑스타인과 잘 때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나 오래도록 몸을 겹쳐왔는데, 사랑스러운 연하의 주인님이라고 여겼는데, 순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살의에 현기증이 일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아무리 노예니 주인이니 하며 밀회를 거듭해도 자신은 언제든지 이 관계를 끊을 수 있다. 얼마든지 이 냉혹한 척하는 어수룩한 군인 정치가를 고꾸라트릴 수 있었다. 베도야의 입술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오싹하고 소름 끼치는 빛이 베도야의 파란 눈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목을 잡았다. 순식간에 그는 베도야를 벽으로 처박았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팔목을 잡아 비틀려고 했다. 완력으로는 엑스타인에게 대적할 수 없겠지만 나중 일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머리가 차갑게 식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유리 속의 자신이 보였다.
유리 속의 자신은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 영상 속에서 본 그 얼굴이다. 사람을 죽이면서 즐거워하던 그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어두운 즐거움을 만끽하는 듯한.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는걸.”
엑스타인이 피식거렸다. 그의 두툼한 혀가 베도야의 얇은 귀를 질척하게 핥았다.
“이것 봐. 네가 참을 수 없다던 짐승이 된 너를.”
“엑스…… 타인!”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즐겁지? 나를 죽일 생각? 나를 제거할 생각? 이러고도 식인귀가 아니라고?”
베도야는 할 말을 잃고 유리 속의 자신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충격을 받은 얼굴은 마음속이 까발려진 사람처럼 보였다.
“……나…… 는.”
베도야가 뭔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을 달싹이고 그냥 다물어버렸다.
수상직에서 물러났을 때, 자신은 한계를 느꼈었다. 무엇에 대한? 일에 대해서? ……아니, 아니었다. 그는 중독자처럼 일했지만 벅차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도리어…… 조금, 한가했었던가. 수상직을 그만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건, 분명히.
지루하다고.
베도야는 검은 유리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즐거워? ……그래, 즐거워. 요즘 삶이 즐거웠다. 엑스타인과 있어서 즐거웠다. 그가 주는 달콤한 학대와 그와 자신 사이에 있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자신을 즐겁게 해줬다. 살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수상직에 돌아왔을 때, 헤레라는 전쟁 중이었다. 즐거웠다.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동안,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모면하면서, 그의 피는 뜨겁게 달아올랐었다.
그랬나.
영상 속의 남자를 보며 불편했던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가진 그 모습이 자신이 부정하고 숨겨왔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나.
“놔!”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놓아주기는커녕 그를 더 거세게 끌어안았다. 베도야가 반항했고 엑스타인이 그를 잡는 사이 둘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결국 벗겨진 옷으로 팔이 묶인 베도야가 더러운 흙바닥에 눕혀진 채 엑스타인을 노려보았다. 금발이 엉망이었다. 평소 사람 같지 않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생채기마저 드문드문 보였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몸 위에서 베도야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소탈하고 조용한 베도야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엑스타인의 마음을 가져간 건 지금의 베도야였다. 엉망이 된 얼굴과 차갑게 불타오르는 눈. 부서지는 남자.
우린 둘 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지.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옷을 벗겼다. 반항은 더욱 거칠어졌지만, 엑스타인은 웃으며 힘으로 내리눌렀다. 구겨진 옷을 던져버리고 다리를 벌렸다. 어느새 선 성기로 입구를 눌렀다. 이미 젖어 있는 곳을 난폭하게 갈랐다. 베도야가 크게 펄떡였다.
“이 얼굴이야.”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의 단호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에 베도야가 눈을 치켜떴다.
“이 얼굴이 자꾸 날 미친놈으로 만들어.”
골목 밖에서는 여전히 베도야, 베도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엑스타인이 난폭하게 허리를 박아 넣었다. 등이 바닥에 쓸렸다. 베도야가 눈을 크게 뜬 채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달콤하게 뺨을 핥으며 엑스타인이 무도한 움직임으로 베도야의 내부를 헤집었다. 파헤쳤다. 분노로 가득한 베도야의 얼굴이 강제적인 쾌락에 물드는 걸 보며 엑스타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숨 막히는 정염에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엑스타인은 마구잡이로 베도야의 내부를 할퀴고 긁어내고 몇 번이나 정액을 쏘아냈다. 어느 순간 베도야가 신음을 삼키며 달라붙었다.
들키면 끝장이다. 골목 바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베도야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파멸의 직전, 벼랑 끝에서의 섹스는 지독하게 달아서 독약을 마시는 것 같았다.
강간인지 화간인지, 버림받는 것인지 버리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달라붙었다. 다리가 얽혔다. 베도야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쾌락은 강했다. 개조된 구멍은 여성의 것처럼 질척해져 엑스타인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고통은 상당했지만 상처는 나지 않았다. 엑스타인의 끔찍하게 큰 성기가 내부를 두들겼다. 아픔은 곧 쾌락으로 변했다. 자신을 신으로 삼는다는 교도들이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리는데, 더러운 땅바닥에 누워 강간당하고 있다. 이딴 것에 흥분하는 자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엑스타인 또한 미쳐 있었다. 여기서 위험을 감당하고 있는 건 베도야 자신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베도야는 피해자였지만 엑스타인은 완전한 가해자였다. 인생의 몰락을, 고작 한 번의 섹스에 걸고 있었다.
어느새 팔이 풀려 있었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을 밀어내는 대신 끌어당겼다. 언제든 끝낼 수 있다. 늘 읊조리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엑스타인의 몸에 사지를 칭칭 감았다. 죽을 만큼 좋았다. 신경에 이상이라도 있는 것처럼 온몸에서 전류가 흘렀다.
“키아란, 키아란.”
뺨을 가볍게 맞은 다음에야 베도야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을 잃고 되찾기를 반복하다 길게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이미 행위는 끝나 있었다. 구겨지긴 했어도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엑스타인이 입힌 게 분명했다.
“일어나. 당신이 다쳤다고 연락했으니 곧 당신 비서진도 쫓아올 거야.”
베도야의 푸른 눈이 몇 번 깜빡였다. 넋을 잃은 듯하던 그 눈이 순식간에 이지를 되찾았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차분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엑스타인이 딱딱한 얼굴로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의 얼굴이었다.
베도야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히 엑스타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도대체 왜 엑스타인이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식인귀든 아니든 엑스타인이 이런 일을 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식인귀라고 말하면서 잘도 이런 짓을 하는군.”
베도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각하, 어디 계십니까!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잡아 벽에 기대게 해주었다. 베도야는 그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등도 따끔거렸다. 엑스타인과의 섹스 때문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간신히 허리를 세웠다.
“네가 식인귀니까.”
엑스타인이 중얼거렸다.
“위험은 당연히 존재하지. 내일 죽는다고 해도 미련은 없어.”
엑스타인의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늘이 반 이상을 가린 옆모습은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식인귀 주제에 헤어지자 같은 인간다운 말은 하지 마. 식인귀면 식인귀답게 굴라고.”
베도야는 잠시 엑스타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피식, 실소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엑스타인. 베도야가 불렀지만 엑스타인은 고집스럽게 돌아보지 않았다.
“레이.”
각하, 어디에 계십니까! 각하! 그 목소리가 이미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베도야가 다시 한 번 엑스타인을 불렀다. 엑스타인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그는 베도야를 돌아봐주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왜”라고 대답했다. 냉혹한 얼굴의 강간범을 앞에 두고 베도야는 피식피식 웃었다. 자신이 잘 웃는 편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연하의 주인님은 종종 자신을 웃겼다. 지금 이 순간처럼.
본인이 의도한 바는 결코 아니겠지만.
식인귀. 한 번도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무례한 말을 베도야의 면전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에게 대고 식인귀 운운한 남자는 바닥에서 나뒹굴던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베도야의 비서진이 애타게 베도야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갈 타이밍을 재는 듯 골목 입구를 노려보고 있다.
“오늘.”
엑스타인의 모습을 보며 베도야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몸이 피곤했다. 오늘은 스케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야 할 듯싶었다. 엉덩이 사이로 정액이 흘러나오려 하는 걸 막고 있자니 희미하게 성감이 다시 피어오른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엑스타인은 끝까지 베도야를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베도야는 고고한 인간이다. 이런 취급을 견딜 리가 없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겠다. 아니, 죽이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데 전문가라면 베도야는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데 전문가였다.
마음대로 하라지.
어차피 이런 사이였다. 연정으로 가득 찬 마음이 욱신거리지만, 어차피 혼자만의 마음이었으니까.
“오늘, 즐거웠어.”
베도야의 말에 엑스타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벽에 기대어 있었다.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굴이지만 꽤 재밌었다는 듯 입술이 올라가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상당히 남자다운 얼굴이 서늘한 미소를 띤 게 몹시 어울렸다.
엑스타인이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베도야가 피식 웃었다. 자꾸 재밌는 농담이라도 생각난 것처럼.
“데이트라도 한 것처럼 말하지 마.”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베도야, 베도야.
각하, 어디 계십니까.
수많은 목소리가 흐려지고 있었다.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제법 즐거웠다. 생각지도 못한 자신을 만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이 역겨운 경험이든 더러운 경험이든 간에. 그리고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역겹지도, 더럽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로 풍부한 감정을 타고나지 못한 탓이다.
베도야가 눈을 뜨고 엑스타인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냉혹한 표정의 군인 정치가. 너무나 난폭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야수 같은 사내.
그의 얼굴에서 조각조각 가면이 떨어져 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남은 건 크게 자란 순정을 어떻게 가누지 못해 애쓰는 소년뿐이다. 피식, 베도야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