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도야의 푸른 눈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이미 흐려진 시야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주인님. 베도야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의 손가락이 엑스타인의 어깨를 잡았다가, 손톱이 단단한 피부에 박혔고, 결국 붉은 줄을 만들며 미끄러진다. 땀에 젖은 피부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받고 반짝였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허리를 조이며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쾌락이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낯익은 혀를 빨면서 베도야가 울었다. 뜨거운 나신이 자신의 피부처럼 익숙하면서도 생각 이상의 황홀감을 선사한다.
베도야가 젖은 입술로 속삭였다. 주인님. 이 주인님이라는 단어가 엑스타인의 귀를 감미롭게 녹였다. 베도야의 담백한 몸이 음란하게 흐트러진다. 욕망이라고는 한 톨 찾아볼 수 없을 듯한 몸이 음탕한 춤을 췄다.
3주 만의 정사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키아란 베도야는 핀레이 엑스타인을 세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부른다.
엑스타인. 이것이 베도야가 부르는 공식적인 명칭이다. 그리고 주인님. 마조히스트로서의 베도야가 엑스타인을 부를 때의 명칭이었다. 엑스타인이라고 부르는 목소리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완전히 달랐다. 태도도 전혀 딴판이라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레이’가 있다.
베도야는 가끔 엑스타인을 레이라고 불렀다. 둘의 밀회가 이어진 지 4년째인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평소에는 거의 들을 수 없었고, 대체로는 휴가 때에나 두어 번 듣는 것이 전부였다.
휴가는 늘 같이 보냈다. 베도야와 엑스타인은 공식적으로 동시에 휴가를 진행했다. 그것은 곧 무신과 문신의 기나긴 전쟁에 일시적인 휴전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둘의 휴가는 여름휴가 일주일, 겨울휴가 일주일이었다. 둘은 휴가 스케줄을 극비리에 부쳤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스케줄을 알지 못했다. 공식적으로는.
둘은 휴가 중에 조심스럽게 만나서 케번 우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조용하고 안락한 시간과 음탕한 시간들이 교차했다. 아침에는 담백한 얼굴로 커피를 끓여준 베도야가 정작 식탁에서는 아래로 기어 들어와 엑스타인의 성기를 물고는 했다. 난잡한 애무를 하며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야하게 울었다. 커피를 줄 때에는 ‘엑스타인, 너는 뭘 마실 거지?’라고 묻던 서늘한 목소리였는데, 고작 5분 뒤에는 ‘주인님, 읏, 마시고, 싶……. 엉덩이, 너무 저려요……. 정액……, 으읏, 벌, 벌 나중에 받을 테니까 정액…… 먹고 싶……’ 하고 퇴폐적으로 굴었다. 때로 엑스타인은 자신이 두 명의 남자와 만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핀레이 엑스타인은 키아란 베도야를 두 가지 명칭으로 나눠 불렀다. 서늘한 목소리의 남자를 베도야라고 불렀고, 음탕한 울음소리를 내는 노예를 키아란이라고 불렀다. 엑스타인의 마음속에서는 그 둘이 거의 다른 사람 같았다. 엑스타인이 둘을 대하는 태도 또한 완전히 달랐다.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대할 때의 태도는 이성적이었다. 공식 장소에서처럼 냉혹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딱히 친근하게 굴지도 않았다. 종종 신경을 긁으며 심술궂게 구는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차가웠다. 그러나 엑스타인이 ‘키아란’을 대할 때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친근했다. 다정하고 사나웠다. 잔인한 명령들을 내뱉고 모든 것을 끌어안아주었다.
‘쉿, 울지 마. 아직 많이 확장되지 않았다고. 네 구멍은 천박할 정도로 질척거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모세 혈관이 조금 터진 것뿐이야. 피도 나지 않았어. 위로 솟아오른 항문이 귀엽네. 자, 조금만 더 확장해보자. 언젠가는 내 팔도 넣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지금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울지 말고. 그래, 힘을 빼. 고무 풍선을 조금 더 부풀리는 것뿐이야. 엉덩이 안에서 터지진 않을 테니까. 그래.’
침을 질질 흘리며 항문이 찢어지는 공포에 덜덜 떠는 키아란을 안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그러면서도 엉덩이 안에 삽입한 고무 풍선의 펌프를 눌러 부풀린다. 키아란이 아우성을 치며 도망치려 하면 쉿, 괜찮아, 라고 말하며 또 다정히 안아준다. 평소 베도야에게 차갑게 툭툭 끊기는 말투로 내뱉는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이다.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 둘은 여전히 서로가 어떤 관계인지 명확히 하지 못한 채 밀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 ◈ ◈
다음 주에는 비가 내렸다.
드물게도 체우드 거리의 아파트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베도야는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일단 자택에 돌아갔다가 경호원을 동행하지 않은 채 무인 택시를 불러 체우드 거리에 왔다.
가을비는 차가웠다. 베도야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단정한 차림으로 검은 우산을 쓴 채 체우드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종종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참아야 했다.
이미 관장을 해서 깨끗한 내부에서는 질척한 액체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남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애액이 베도야의 항문을 적시고 있었다. 질척거리며 속옷이 젖는 느낌에 베도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펌프를 만지작거렸다. 엑스타인, 아니, 그의 어린 주인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만들어 오라고 했다. 고무 풍선 딜도의 펌프를 결국 누르고 이를 악물었다. 내부가 억지로 벌려지는 느낌에 온몸의 모공이 열리는 듯했다. 비명을 삼키며 또 한 걸음을 걸었다. 아팠다. 아무리 거기를 개조했어도 통증을 줄여주진 못했다. 게다가 찢어지는 듯한 공포 때문에 손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아파트의 계단을 오르며 베도야는 몇 번이나 난간을 움켜쥐었다.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잡아도 배 속을 괴롭히는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펌프를 잡고 또 망설인다. 눌러야 될까. 한계치란 어디일까. 엑스타인이 화를 낼까. 베도야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펌프를 눌렀다. 안쪽에 있던 것이 늘어난다. 배가 찢어질 것 같았다. 베도야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젠 걸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다리를 질질 끌었다. 다리가 너무나 무거웠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다. 여기에 그냥 주저앉아서 어떻게든 배 속의 것을 빼고 싶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익숙한 눈물이었다. 엑스타인의 노예가 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은 이제 매일 마시는 커피만큼이나 익숙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7층에 도착했을 때 베도야는 기기 시작했다. 네발로 기는 자신이 짐승 같았지만 더 이상은 걸을 수도 없었다. 발끝이 시렸다. 마치 절벽에라도 선 것처럼. 다리가 딱딱했다. 온몸에 너무 힘을 주고 걸은 탓이었다. 차갑고 더러운 복도를 기어간다. 이미 검은 우산은 어딘가에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베도야는 705호의 문에 달라붙어 그 문고리를 힘겹게 눌렀다. 겨우 안으로 들어온 그가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였다.
“그렇게 좋아?”
엑스타인이 피식 웃었다. 맥주 캔을 입술에 대고 있던 엑스타인이 다가와 자비로운 척하며 현관문을 닫아주었다.
“일어나. 그 정도로 허리가 빠진 척하지 마.”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일어나려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나지 못해서 벽을 붙잡고 일어나야 했다. 비지땀이 배어나오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 했지만 다시 흔들렸다.
엑스타인에 비해 작다고는 해도 베도야는 작은 키가 아니다. 제법 어깨가 있는 편으로 살짝 마른 편이라 형태가 드러나는 뼈대 또한 단정하고 곧았다. 평소의 고고한 태도에 어울리는 깨끗한 육체인데, 그 몸이 지금 흐느적거리는 꼴이 마음에 들었다. 엑스타인은 익숙한 턱을 잡고 멋대로 입을 맞췄다. 어떻게든 몸에 힘을 주고 서려는 베도야의 몸에서 더욱 힘이 빠져나갔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혀를 빨았다. 아아. 단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이 달콤했다.
“얼마나 걸렸지?”
“아, 모르겠, 모르겠어요.”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입술을 핥았다. 깨무는 것보다는 핥고 빠는 것을 더 좋아하는 엑스타인의 취향에 최대한 맞춰서. 이미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것들은 다 날아갔다. 4년간 엑스타인과 몸을 섞으면서, 이제 베도야는 엑스타인과 있을 때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어왔어? 거리에서도?”
“아니, 아니. 이, 앞에서…….”
“키아란, 벌써부터 엉덩이를 흔들고 있잖아.”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엉덩이를 때렸다. 아읏. 베도야가 몸을 뒤로 젖혔다. 내장을 가득 메운 벌룬이 흔들릴 때마다 눈앞이 흔들렸다.
“아, 아파. 죄, 죄송, 흐읏!”
베도야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신음했다. 눈물이 대리석같이 매끈한 뺨을 타고 흘렀다. 엑스타인의 손길이 좀 더 억세게 변했다. 배 속을 두들겨 맞는 듯한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베도야가 자신의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어떻게든 참아보려는 베도야가 흐느끼듯 신음했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트렌치코트와 정장을 하나씩 벗기며 엉덩이를 흔든다고 몇 번이나 때렸다. 베도야가 나신이 되었을 때에는 엉덩이만 붉게 부풀어 있었다. 아니, 엉덩이 앞의 성기도 붉게 달아올라 꼿꼿이 서 있었다.
“매를 맞으며 세우고. 좀 차분해질 때가 되었을 텐데.”
하악, 베도야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엑스타인의 눈길이 베도야의 유두에 머물렀다. 갈색의 유두는 이미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많이 도드라졌다. 엑스타인은 강제로 베도야의 몸을 개조했던 이래 다시는 그런 적이 없었다. 저 유두는 4년의 밀회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도드라진 유두를 비틀자 베도야가 좋다면서 울었다. 어떻게든 사정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4년이나 조교된 몸은 유두만으로도 절정 근처까지 올라간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유두에 고리를 달았다. 쇠붙이가 구멍을 스치는 느낌에 베도야가 비명을 삼킨다. 추가 아닌 사슬을 달아 잡아당긴다. 유두가 뜯길 듯한 아픔에 베도야가 서둘러 엑스타인을 따라 움직였다. 그가 휘청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그의 성기와 항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엑스타인이 사슬을 잡은 이상, 넘어지면 정말 유두가 찢어질지도 모른다.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침실의 침대에 내팽개쳤다. 침대에 거칠게 넘어진 베도야가 다시 배를 감싸고 끙끙거렸다. 엉덩이를 가득 메운 것 때문에 이젠 한계였다. 온몸에서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질린 것을 본 엑스타인이 흘끗 베도야의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베도야는 모르는 일이지만, 사실 베도야가 넣은 고무 풍선형 딜도, 즉 벌룬의 공기관에는 얼마나 부풀었는지 알려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평소의 한계에 거의 가까운 수준의 공기가 들어가 있었다. 베도야의 항문과 딜도 사이의 틈에서 물이 배어 나와 흐르고 있었다.
“주인님, 싸, 싸고 싶어요…… 제발…….”
베도야가 임신부처럼 배를 감싼 채 일어났다. 몸이 뜨거운 쾌락과 차가운 통증 사이를 지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 도달했다. 감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벌려진 안이 다시는 오므라들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걸 빼내고 싶었다. 물론 공기를 빼고 작게 만들어 꺼내면 좋겠지만 베도야는 자신의 주인이 그렇게 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안 돼.”
엑스타인이 피식 웃었다. 베도야의 엉덩이에 매달린 펌프를 쥐고 한 번 더 눌렀다. 베도야가 비명도 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엑스타인이 그 등에 가만히 입술을 눌렀다. 다정한 키스였다.
“이리 와.”
목소리는 그다지 다정하지 않았지만.
심술기가 섞인 목소리에 베도야의 눈이 엑스타인을 향했다. 절절한 애원이 그 눈에 매달려 있었다. 엑스타인이 그 눈을 보고 움찔하더니 갑자기 사납게 베도야를 끌어당겼다. 베도야의 얼굴에 성기를 문지르며 입을 열라고 윽박질렀다. 베도야가 입을 열자 그대로 처박는다. 평소와는 달리 입술을 적실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엑스타인 때문에 베도야는 입술이 찢어진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아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마약처럼 엑스타인의 것이 베도야의 통각을 막아버렸다. 비릿한 액체, 미끈거리는 성기. 그것들이 하나로 뭉쳐서 주는 추잡한 쾌감이 아픔을 쾌락으로 바꿔버린다. 베도야가 츱츱 소리를 내며 엑스타인의 것을 빨았다. 엉덩이를 흔들고 목구멍을 열고 눈가를 적시며 구음을 했다. 아니, 그건 구음이라기보다는 거의 섹스였다. 가랑이를 벌린 것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엑스타인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젠장…… 더럽게 잘 빠는군.”
그 말에 베도야가 더 적극적이 된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입에 불이 나도록 박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박을 때에는 일그러지는 얼굴과 목구멍의 점막을 즐기고, 멈추어서는 베도야의 봉사를 즐겼다. 창녀보다 더 잘 빨고, 직업에 불과한 그녀들과는 달리 황홀해한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완벽한 기술. 엑스타인이 좋아하는 대로 엉덩이까지 흔들고 있다. 천박하고 비천한 모습이다.
“하면서 싸봐.”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쌀 때까지 못 싸면 오늘 아주 괴로워질 줄 알아.”
엑스타인이 경고했다.
베도야가 깜짝 놀라 머리를 조금 뒤로 물리려는 순간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하악, 하악. 엑스타인의 거대한 성기를 물고 있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면서 베도야는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드디어 싸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당장 꺼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줘도 항문 마개처럼 끝이 가느다란 고무 풍선은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퍽. 엑스타인에게 머리를 맞고 베도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입이 놀고 있다는 뜻이었다. 베도야가 다시 엑스타인의 것을 핥기 시작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음모도, 젖은 성기도 달콤하기 그지없었지만 배 속의 것을 내놓고 싶었다. 흣, 흐으읏. 몇 번이나 힘을 주는 사이에 얻어맞고 다시 빨기를 반복하다 엑스타인이 사정했을 때, 베도야의 항문에 걸려 있던 딜도가 툭 하고 떨어졌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세게.
그날의 섹스는 평소와는 분명 달랐다.
온몸을 학대당하고 중간에 기절할 정도로 몸을 섞었다. 기절하고 눈을 떠도 엑스타인이 삽입한 채 허리를 흔드는 게 보였다. 엑스타인의 손에 몇 번이고 뺨을 맞고, 욱신거리는 몸이 힘겹게 달아오르고, 다시 그와 몸을 섞기를 반복했다. 새벽까지 섹스가 계속되었으니 처음 겪는 마라톤 섹스였다. 정신이 깜빡거리다가 어느 순간 어둠으로 가득 물들었을 때, 베도야는 차라리 다행스럽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잤던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게 시간이 흐르고 베도야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자지 않았던 것 같지만 아마도 잤었는지 머리가 생각보다 맑았다. 베도야는 흘끗 눈을 들어 창 밖을 확인했다. 붉게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건대 아마 지금은 일요일 저녁일 게 분명했다. 비서들이 난리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안해.”
자신을 깨웠던 목소리가 사과해왔다. 베도야는 고개를 움직여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의 등에 시선을 주었다. 이미 옷을 다 입은 그 등은 넓고 단단해 보였다. 언제나 자신에게 쾌락을 주는 어리고 흉포한 주인님의 등을 만져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베도야는 팔을 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귀찮았다.
“비서들이 당황하겠군.”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써줬다고. 베도야는 말없이 엑스타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침대에 걸터앉은 엑스타인의 뒷모습에서 우울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베도야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몸이 묘하게 상쾌했다. 베도야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은 완벽했다. 너무 완벽했다. 깨끗하게 닦는 걸로 모자라 엑스타인은 옷까지 입혀둔 뒤였다. 셔츠와 넥타이, 바지와 조끼, 하다못해 트렌치코트까지 완벽하게 입혀져 있었다. 마치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위화감을 느낀 베도야가 엑스타인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엑스타인이 어느새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유감이야.”
그렇게 말한 엑스타인이 자조했다. 그의 회색 눈이 베도야를 살폈다. 금발과 푸른 눈, 흰 피부, 붉은 입술, 약간 튀어나온 광대, 깨끗한 턱선. 그 모든 것을 한 번씩 바라보고 엑스타인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좋아.”
알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엑스타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베도야는 당황했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그의 시선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마음의 동요가 커서 손이 떨릴 것 같았다. 분명 엑스타인의 감정은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아무 말도 없었고 그래서 그 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이 관계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엑스타인 또한 그러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니, 거짓말이다. 엑스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나직한 목소리는 엑스타인의 감정을 실체화하고 있었다. 귀로 듣는 것과 그냥 추측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알아.”
베도야의 말에 엑스타인이 “네가 안다는 걸, 나도 알아”라고 말했다.
베도야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엑스타인을 살펴보았다. 강력한 육체. 냉혹한 표정. 사나운 태도. 빈정거리는 목소리. 원수 핀레이 엑스타인을 이루는 것들이다. 그러나 자신과 만나는 엑스타인은 심술궂으면서도 다정했다. 때리고 아픔을 주면서도 언제나 세심하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엑스타인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베도야는 노예 역할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다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하지 않고, 그저 즐기기만 했다.
엑스타인도 즐거워했다. 그는 베도야의 몸을 자신의 뜻대로 길들이는 걸 아주 좋아했다. 둘은 잘 맞았다. 섹스뿐만이 아니었다. 둘은 성격적으로도 잘 맞았다. 둘 다 말이 없었고,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했고, 이성적이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몰라도 이 밀회는 이상적이었다.
“그만두자.”
엑스타인이 그렇게 말했다. 베도야와 엑스타인의 눈이 마주쳤다. 엑스타인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뭘 그만두자는 거야? 베도야의 미간이 좁아졌다.
“당신도, 나도 이제 정신 차려야지. 이렇게 만나는 거, 그만두자고.”
베도야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그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보며 엑스타인은 피식 웃었다.
이 남자를 놓아주는 건 아쉬웠다.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가슴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지금이라도 이 남자를 깔고 섹스를 하고 싶었다. 엉망진창으로 섹스에만 매진하면서, 그렇게 또다시 이 고민을 잊고 싶었다. 베도야를 앙앙 울릴 자신이 있었다. 유두로도, 항문으로도, 입에 성기를 넣어주는 것만으로도 질질 싸는 베도야였다. 어디를 건드리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베도야 자신보다 엑스타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또 시간이 흐를 것이다.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엑스타인은 또 베도야가 뭘 하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할지, 저번 섹스는 마음에 들었을지, 그래서 다음 약속에도 베도야가 나타날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혼자 또 마음이 저리도록 사랑에 허우적거리면서 초조해하고.
“엑스타인,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잘 모르겠어.”
왜 갑자기? 그렇게나 끈질기게 섹스를 하고선 갑자기 그만두자니. 베도야는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몸을 섞어놓고 헤어지자니. 이건 마치 몸 바치고 버림받는 여자 같았다.
베도야의 손이 엑스타인의 팔을 붙들었다. 하얀 손가락이 자신의 갈색 팔을 붙잡는 걸 보며 엑스타인은 씁쓸히 웃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베도야의 태도는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새삼스럽게 기분이 울적해졌다. 엑스타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울적함을 떨쳐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이 좋아.”
엑스타인이 웃었다. 힘이 빠져서 밍밍하기만 한 웃음이었다.
“당신의 몸도 좋고, 당신과 하는 SM 플레이도 좋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당신이 좋아. 그래서 안 되겠어.”
“뭐가?”
“당신의 정부 노릇은 못 하겠다고.”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부라니.”
정부는 무슨 정부. 둘이 좋아서 만나 몸을 섞었는데 어째서 정부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베도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정부라면 노예 역을 맡았던 자신이 더 정부에 가깝지 않았던가. 심지어 몸을 강제로 개조당하기까지 했었는데 어째서 엑스타인의 입에서 정부 운운이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정부야, 베도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하려던 베도야가 입을 다문 것은, 그 자신이 정부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부를 둔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래전 헤어진 아내뿐이었다. 사랑은 고사하고 아예 감정 자체가 없었던 그녀를 제외하면 베도야는 엑스타인 외에는 만나본 사람이 없었다. 그는 바빴고, 아무도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뭔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것은 인간관계이고, 인간관계란 열이면 열 전부 다른 기준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감정에 따라서 모든 것이 변하는 게 인간관계가 아니던가.
베도야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엑스타인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던 베도야의 손을 떼어냈다.
“나는 당신과 좀 더 깊게 사귀고 싶어.”
베도야의 눈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네가 좋아. 이 간단한 말. 그러나 수없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자신이 담은 의미까지 본 것인지. 하긴, 그럼 어떻고 아니면 어떨까. 이미 이 관계의 끝은 정해져 있었는데.
엑스타인이 입을 열었다.
“예를 들자면, 당신과의 관계를 공표해도 좋아.”
“미쳤군.”
베도야가 어이가 없다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사실 엑스타인이 바라는 것도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그건 현재 시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과 데이트를 해보면 좋겠지. 밤의 어둠 속에 숨어서가 아니라 환한 대낮에, 식인귀 운운하며 반쯤 강간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 평범하게 걸어보면 어떨까. 휴가 스케줄을 같이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측근만 아는 정도라면.
그러나 둘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그런 평범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각오가 필요했다. 그리고 엑스타인은 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베도야는 아니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나중에라도 그러고 싶어. 아니, 공개적인 사이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측근 두엇만 알아도 좋아. 당신과 좀 더 미래를 바라보는 사이가 되고 싶은 거야, 나는.”
미래라니.
베도야는 한 번도 엑스타인과의 사이에서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현재만으로 충분한 게 아니었나. 기분이 상했다. 베도야는 현재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것만으로도 완벽하다고 느꼈는데.
엑스타인은 아니었다. 엑스타인은 더 필요했던 것이다.
베도야가 혀를 찼다. 철없다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엑스타인을 스쳐 지나가는 베도야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베도야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기 시작했다. 곧 가겠다는 의미였다. 하. 엑스타인은 자신의 예상과 다를 바 없는 베도야의 반응에 식어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고 하면 베도야가 관두자고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가슴에는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심장이 욱신거렸다.
“측근 두엇이 알면 우리 미래에 뭐가 바뀐다는 거지?”
베도야가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빌어먹을. 엑스타인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어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우리 관계는 뭐야? 그렇게 묻던 여자에게 이런 어조로 자신이 말했었다. 뭐면 어때. 그리고 지금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생각보다 더 쓰렸다.
베도야에게는 바뀌는 것이 없다. 엑스타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그만두자는 거야? 베도야는 끈질기게 느껴질 정도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또 가다듬으며 엑스타인의 분위기를 살폈다. 진심인 모양이었다. 미래라. 문득 베도야는 자신이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나 눈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일찌감치 사생활이 말살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그만두자는 건가?”
베도야가 결국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물었다.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 채였다. 거울 속의 베도야가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데, 베도야의 마음은 거울 속에 있는 것처럼 멀었다. 엑스타인은 웃었다.
“그래.”
지금이 아니면 진짜 멍청한 짓을 해버릴 것 같단 말이야. 엑스타인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는 자신의 흥미가 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냥 흥미. 그리고 호감. 연애 감정. 점차 발전하는 감정들이 어느 순간 정상을 지나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제 엑스타인은 이 관계를 까발려서라도 베도야를 가지고 싶어졌다. 위험한 충동이었다.
아직 놓아줄 수 있을 때 놓아주겠다는 마음을 모르는 베도야가 한숨을 쉬었다.
“철부지 같은 말을 하다니. 답지 않아, 엑스타인.”
“그러게.”
엑스타인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렇게나 가지고 싶은데, 결국 놓아준다.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한 번 드러내놓고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고, 미친놈처럼 내달리는 게 자신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이라면 포기할 수는 없어도 놓아줄 수는 있다며 밀어내주다니. 이런 배려를 가진 자신은 스스로도 어색했다. 엑스타인이 입을 열었다.
“나답지 않은 일이지만 사람이 언제나 자기 식대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베도야가 한동안 엑스타인에게 시선을 주다 조용히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가 등을 돌려 현관으로 걷기 시작했다.
잡을까. 저 팔을 낚아채서 침대에 던져버릴까. 고민과 망설임이 초 단위로 흔들린다. 그사이에도 베도야는 현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엑스타인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잡아챌까. 지금 반드시 헤어질 필요가 있는 건 아니잖아. 한 번만 더 저 몸을 가지고 싶어. 내게 미치는 모습을 한 번만 더. 엑스타인이 고민하고 있을 때 베도야가 물었다.
“언제부터 모자랐어?”
“응?”
“너는 결국 나와의 관계가 모자랐던 거잖아. 언제부터였어?”
이제는 거울조차 없었다. 눈이 마주치려면 베도야가 엑스타인을 돌아봐주어야 했다. 그러나 베도야는 엑스타인을 돌아보지 않았다. 엑스타인이 허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왜 말하지 않았지?”
이렇게 끝나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네가 다시는 돌아봐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엑스타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베도야의 어깨선을 눈으로 더듬으며 친절한 남자인 양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
“이대로 괜찮다고, 혹은 이대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대로 괜찮다는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마음이 식기를 기다려보았다. 하지만 마음은 더욱 뜨거워져서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부푼 감정이 터질 것 같았다. 감정이 터지면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
여기서 헤어져야 한다.
“이대로 괜찮다는 건…… 결국 거짓말이었나?”
베도야가 물었다. 엑스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에는 침묵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도야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동안 즐거웠어, 엑스타인.”
단지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힌다. 엑스타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서둘러 내렸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베도야를 게걸스럽게 바라보았다.
베도야는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돌아보거나 멈춰 서지 않았다.
체우드 거리의 아파트를 나서며 전화를 들었다. 전화를 걸자 비서실장 멧 테이버가 숨을 헐떡이며 어디냐고 물어왔다. 알아서 가겠다고 대답하고 끊었을 때에는 이미 아파트에서 상당히 벗어난 뒤였다. 큰길로 걸어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다.
언젠가는 끝날 일이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베도야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한 번도 엑스타인이 먼저 끝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당황한 상태였다. 마지막에는 엑스타인과 시선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당혹감을 들키리라고 생각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관계를 끊은 것은 결국 엑스타인이었다. 그의 말에 동요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왜, 왜 이제 와서 그만두자는 거야?
끝없는 시간 동안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척하면서 베도야는 그 한마디를 삼키느라 괴로워했다. 어차피 끝난 사이에 왜냐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만남이란 그런 것이다. 만날 때에는 둘이 좋아야 하지만 이별에는 한 사람만 싫어도 된다.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온갖 원망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풍부하다는 걸 처음 느낄 정도였다.
네가 시작했잖아. 내 몸을 자신에게 맞춰놓고 이제 와 그만두겠다고? 이렇게 한마디로? 언제 한 번 모자라다 한 적이 있긴 했었나? 멋대로 굴지 마. 혼자 결정하지 마. 시작은 네가 했으니 끝은…….
베도야는 입술을 깨물며 아파트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을 듯했다.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도저히 자신은 납득할 수 없었다. 미래라니. 무슨 미래를 말하는 건가? 측근? 측근 두엇에게 이 관계를 흘리면 된다는 건가? 그러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엑스타인이 바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닐 테다. 그러나 미래라는 말은 추상적이라 베도야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미래는 눈앞이었다. 먼 미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엑스타인에게 미래가 보였다면, 그가 베도야에게 미래를 설명해주어도 되지 않은가.
베도야는 천천히 아파트로 걸음을 옮겼다.
난생처음이었다. 이미 끝났다고 여겨지는 일을 되돌려보겠다며 돌아서다니. 어제 아파트로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색했다. 엉덩이 안에 든 것도 없는데 다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나른했다. 섹스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몸이 나른하고 가슴이 욱신거리고 손끝에서 식은땀이 나는 게 분명했다. 섹스가 너무 과해서.
헤레라의 평균 수명은 고작 110세. 자신은 평균 수명의 두 배가 넘게 살아온 셈이었다. 그 기나긴 시간의 대부분을 정치가로서 보냈다. 사람과 마주하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런데도 긴장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엑스타인은 그렇게 말했다. 무엇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는 건가. ‘좋아하는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좋아하지 않게 되기를 기다리며 엑스타인은 자신과 몸을 섞었단 말인가.
베도야는 아파트 입구에서 멈춰 섰다. 자신이 버렸던 검은 우산이 뒹굴고 있었다. 그는 우산을 집어 들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좋아하는 감정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고? 좋아한다는 게 싫었어? 베도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 가슴이 욱신거렸다.
미래.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베도야는 고개를 들어 아파트 건물 위쪽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심장이 아프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손을 들어 손바닥을 폈다. 식은땀에 젖은 손이 낯설었다. 베도야는 남의 손을 보는 것처럼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파란 눈을 크게 떴다.
이 감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이 감정을 뭐라고 말하는지 기억이 났다.
하지만 너무 낯설었다. 원시림의 멸종 동물들보다 더.
들어가자.
감정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감정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 자신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분명 엑스타인에게 감정이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이 감정을 말해보자. 그래도 안 된다면 돌아서야겠지. 아니,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일단은 눈앞만 바라보자. 언제나 그래왔는데 왜 갑자기 알 수 없는 미래가 초조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래서 너도 미래를 운운한 것인가.
알 수 없는 미래가 초조해서, 뭐라도 확언을 받고 싶어서?
아파트로 들어섰다. 그래도 다시 만나자고 결심하자 몸에 열기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비서진들이 분명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엑스타인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만나자고 생각하자 초조하고 불안하면서도 희망이 생겼다. 무엇에 대한 희망인지는 몰라도.
6층에 다다라 베도야가 잠시 숨을 가다듬고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머리를 감싸자마자 무언가가 튀어 올라 몸을 때렸다. 건물이 흔들렸다. 베도야는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7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끊긴 채였다. 베도야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무너진 석벽에 계단이 가려져 올라갈 수 없을 듯했다. 돌을 치워보려던 베도야는 포기하고 밑으로 달리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각하, 지금 어디 계…….’
“체우드 거리 35번지 아파트가 일부 무너졌다. 구급차 바로 보내.”
‘……예? 예, 예. 바로 보내겠습니다. 저도 지금 거기로 가겠습니다, 각하.’
베도야는 뚝 전화를 끊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대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보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들자 연기가 나는 층이 보였다.
7층이었다.
화악 하고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베도야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으로 705호의 위치를 찾아본다. 그 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엑스타인이 나타나길 기도하면서. 하지만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데리러 온 테이버가 도착할 때까지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테이버가 몇 번이나 불러도 베도야는 시리도록 파란 눈으로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