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백 下 (11/15)

엑스타인이 실종되었다. 

군부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엑스타인과 사흘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연락 없이 움직이는 일이 드문 편은 아니었지만 휴가를 제외하면 사흘이나 연락이 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엑스타인의 보좌관들이 은밀히 엑스타인을 찾는 동안.

베도야는 적극적으로 찾고 있었다. 엑스타인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비서진에 알리고 모든 선을 동원했다. 근방의 모든 병원에 확인했고, 경찰서에 들어오는 신고까지 챙기고 있었다. 베도야의 비서들은 어떻게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실종 소식을 알고 있는지 의아히 여기면서도 지시에 따라 엑스타인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엑스타인의 목소리가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각하,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평소보다 많이 잤어.”

베도야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테이버가 입을 다물었다. 상사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많이 잔 얼굴이 아니었다. 평소와 표정은 똑같이 서늘했지만 그 안색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럼 식사라도 조금 더…….”

“테이버, 내 식사도, 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으니 신경 그만 쓰고 보고나 시작하도록 해.”

테이버가 베도야의 눈치를 보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보고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베도야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엑스타인을 떠올렸다.

당연히 베도야는 괜찮지 않았고 식사도, 잠도 엉망이었다. 먹을 수도 없었고 잘 수도 없었다. 머릿속은 이미 폐허, 귓가에는 자꾸 엑스타인의 목소리만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비서실장이 자신의 상태를 흘끔거리길 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엄연한 자신의 사생활이다. 엑스타인과 얽히기 전에는 아예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었다. 일이 바빠서가 아니라 사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이 베도야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연인, 가족, 비밀, 무엇 하나 가진 게 없이 그저 일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엑스타인과 만나면서 베도야에게도 사생활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의 상태는 사생활의 영역에 속했다.

그런 식으로 치자면 어지간히 공사를 혼동하고 있는 거지만.

그러나 이럴 때가 아니면 평생 쓸 일 없는 권력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찾아내.”

다른 보고를 하고 있던 테이버가 말을 멈췄다. 분명 그의 상사는 듣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무슨 보고를 하든 확실히 듣고서 정확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다. 그러니 베도야는 지금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지금 우선순위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엑스타인을 찾아내는 걸 더 우선시하라는 뜻이었다.

“예, 각하, 찾아내겠습니다.”

아파트의 입구는 한 군데뿐이었다. 엑스타인은 분명히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시신은 없었다. 엑스타인은 어딘가에 가 있다. 그 어딘가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범인은?”

“보고에 의하면 폭탄은 군수용 제품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군부 내부 소행으로 보입니다.”

내부라.

베도야의 머릿속에 고위 인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엑스타인을 죽이고 싶어할 인사들뿐이었다.

테이버가 그런 베도야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체우드 거리 같은 빈민가에 갔던 건지, 어째서 엑스타인에게 닥친 악재를 알고 있는지, 무슨 사정이 있다고 냉정한 성격답지 않게 집착하는 건지. 50년이 넘게 함께해왔는데 모르는 사람을 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건 역시나 자신의 상관이 맞았다.

“보좌관 중에 협력자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베도야는 늘 무인 택시를 이용했지만 엑스타인의 경우에는 종종 군용 헬기를 타고 움직였었다. 그러니 체우드 거리의 아파트에 가는 데도 업무용 이동 수단을 이용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보좌관들이 그의 스케줄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런 것치고 엑스타인 진영은 조용한 편이지만.

이미 아파트는 잔해까지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시신은 없었다. 즉, 엑스타인은 죽지 않았다. 일단 최악의 가정은 넘어섰다. 그러나 엑스타인이 없다는 것은 그가 자의로, 혹은 타의로 장소에서 이동했음을 의미했다.

타의겠지.

자의로 나섰다면 아파트 입구에 있었을 베도야와 마주쳐야 했다. 그러나 마주치지 않았다는 건 타의로 출입구가 아닌 곳으로 움직였다는 뜻이고, 즉 출입구를 사용할 수 없는 무리에 의해 이동한 것이다.

엑스타인은 전쟁 영웅이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제압에 어려움이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폭발이라면 제아무리 엑스타인이라 하더라도…….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건 엑스타인을 죽일 예정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놈들은 엑스타인을 죽이지 못한 채 데리고 움직였다. 당황한 것일까, 아니면 죽일 수 없었던 것일까.

“각하.”

테이버가 불러 고개를 들자 그가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어둠이 각하께 드릴 보고가 있다고 합니다.”

어둠이라는 건 몹시 완곡한 표현이다. 헤레라 정계에서는 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무리를 통틀어 어둠이라고 칭하는 습관이 있었다. 베도야가 전화기를 받아 들고 손짓을 했다. 테이버가 불안한 눈으로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문소리가 나자마자 베도야는 도청 방지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각하, 다시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목소리가 다른데.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유감인가?”

베도야의 질문에 전화 건너편에서 픽 웃는 소리가 났다.

‘적당한 때였습니다.’

그는 이 젊은 목소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둠 세력의 주인이 되었다는 걸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흔한 일이었다. 암흑가와 정계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베도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인간의 수명이 연장된 만큼 권력은 이양의 대상이 아니라 쟁취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 베도야 자신도 아버지가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도전했을 것이다. 베도야의 아버지도 베도야를 경계했다. 그는 베도야에게 모든 걸 다 해주면서도 또한 어떤 것도 해주지 않았다. 훌륭한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자유도 용납되지 않았다. 베도야는 어릴 때 아버지의 인형으로 살았다. 마흔이 넘으면서부터는 점차 인형에서 인간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인형인 척 살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건 베도야에게는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리어 행운에 가까웠다.

“축하하네.”

베도야의 말에 상대가 키득 웃었다.

‘감사합니다. 각하께서 찾던 군인에 대해서입니다만.’

상대는 눈치가 빨랐다. 결코 엑스타인이라는 이름 따위는 부르지 않고 마치 하급 병사라도 되는 양 호칭했다.

‘항구에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베도야의 입술이 차가운 선을 그렸다.

◈ ◈ ◈

정신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엑스타인은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부드러운 진동을 느끼며 바다 위라고 생각했다. 먼바다는 아니었다. 이 잔잔한 진동은 분명 항구다. 바다 위. 배 안인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두뇌 채널이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겁고 둔탁한 소리다. 두꺼운 철문이다. 엑스타인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배다. 여객용이 아니라 화물용이다. 문을 여는 순간 확 느껴지는 소금기 섞인 무거운 바람이 바다임을 더욱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어이, 엑스타인.”

익숙한 목소리였다. 사흘째 만나던 인간의 목소리보다 더 익숙한 목소리였다. 엑스타인이 고개를 들었다. 과연, 너였나.

“할슈버트.”

눈앞에 있는 남자는 엑스타인의 보좌관 할슈버트였다.

누구와 손을 잡은 것일까. 엑스타인의 머릿속에 유력 후보의 얼굴이 지나갔다. 엑스타인이 원수가 되기 전 원수였던 남자였다. 그가 원수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엑스타인은 승전이라는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이지만, 그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여러 루트를 통해 들었다.

전 원수는 재작년에 200세가 되었다. 인간이 육체 교환을 통해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수 있게 되자 세상은 무한 경쟁 시대가 되었다. 언제까지라도 은퇴하지 않을 수 있다. 늙는다는 건 무능의 증거일 뿐이다. 그 시대의 증거가 바로 키아란 베도야였다. 300세에 가까우면서도 20대 초반 미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고 경쟁자는 가차 없이 제거하는 그야말로 이 시대 그 자체였다.

모두가 키아란 베도야를 꿈꾼다. 그 남자처럼 영원불멸의 아름다움과 권좌를 가지고 싶어한다. 전 원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베도야도 아닌 엑스타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에게 밀려났다. 어제까지는 상대도 하지 않았던 애송이가 자신의 상관이 된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죽이겠다. 전 원수는 엑스타인의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했고, 다른 곳에서도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엑스타인은 그가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늙은이 노망에 현실주의자인 할슈버트가 붙을 줄이야. 엑스타인이 피식 웃었다.

“뭐가 웃겨?”

할슈버트의 말에 엑스타인이 의아하다는 시선을 들었다.

“이게 안 웃기면 뭐가 웃기지?”

“내가 장군의 협력자가 된 게 웃긴다고?”

엑스타인이 한 번 더 웃었다.

“최근 10년간 있었던 일 중에서는 가장 웃기는군.”

엑스타인의 말에 할슈버트의 뺨이 움찔거렸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는 엑스타인의 보좌관으로 살아왔고 엑스타인의 잔혹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위험천만한 사내. 순간의 호기심을 위해서 인생을 불구덩이에 처넣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핀레이 엑스타인이었다.

측근을 완전히 속인 베도야와는 달리 엑스타인은 되는대로 행동했고 할슈버트는 최근 엑스타인의 밀회 대상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엑스타인 진영에서도 할슈버트밖에 모르는 일이긴 했다. 할슈버트마저도 다소의 우연과 명령 불복종 끝에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날 케번 우드에서 물러나던 할슈버트는 엑스타인의 지갑이 헬기 안에 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 헬기에서 내렸다. 엑스타인은 늘 긴급한 보고가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에 내리지 않았던가. 지갑을 가져다주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그는 엑스타인이 주구장창 누구를 만나기 위해 케번 우드에 오는지 궁금했다. 몇 년이나 쌓인 의아함을 풀고 싶었던 그에게 마침 그럴싸한 변명거리 하나가 생겼고, 그는 무작정 그 변명거리를 붙잡았다.

케번 우드의 별장은 아주 화려하진 않았지만 고상했다. 그는 옥상에서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엘리베이터가 원래 머물러 있던 2층으로 가서 발소리를 죽여 엑스타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신음이 들렸다.

‘흐윽, 앗, 으응—.’

‘엉덩이를 더 흔들어. 그래. 아, 그래……. 요즘은 거기가 좋은가 보지? 맛있어? 혀를 더 내밀면서 핥아……. 잘하는군.’

당연히 밀회일 거라고는 생각했다. 어떤 여자가 엑스타인을 4년이나 붙잡고 안 놓아주나 궁금했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섹스가 꽤 거친 종류일 거라는 게 분명해졌다. 의외인데. 할슈버트는 발소리를 죽이며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엑스타인이라면 이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녀노소도 안 가리는 남자였으니 SM 플레이 정도 뭐가 문제일까.

‘맛있, 맛있어요……. 아읏!’

‘말은 허락받고 해야지, 키아란.’

키아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아주 낯익은 이름이면서도 한없이 낯선 이름이었다. 흔한 이름은 아닌데, 여기서 나와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이름. 누구의 이름이더라? 고위 장성의 마나님이라도 되시나?

그나저나 섹스 취향이 이제 막 나가시는군. 하긴 원수가 되고 나서는 시들해졌는지 한동안 여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었다. 슬슬 금욕에 질릴 때도 되었지.

‘읏! 으읏!’

방으로 다가갈수록 찰싹거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매인가. 본격적이시군. 할슈버트가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매질을 당하는 여자는 어떤 여자이려나. 엑스타인의 취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엑스타인의 취향은 글래머 미인으로, 사실 몸매만 된다면 나머지는 다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남자도 육체파. 근육이 있고, 그것도 꽤나 훌륭한 남자를 만나곤 했었다. 보좌관 중에도 엑스타인과 육체관계를 맺은 인물이 있었다. 하룻밤만의 관계였지만 보좌관이 너무 엑스타인을 뜨겁게 쳐다보곤 해서 결국 보직을 옮겨줘야 했다.

‘꼬리를 더 흔들어. 더 탱탱하게 흔들어야지.’

찰싹, 찰싹.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키아란, 엉덩이를 흔들란 말이야. 개답게.’

키아란, 키아란. 이 이름이 왜 이렇게 익숙하지?

할슈버트가 슬쩍 방 안을 훔쳐보았다. 엑스타인은 침대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있었고 나신의 남자가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엑스타인의 유두를 핥으면서 어깨를 떠는 모습이 우는 게 분명했다. 남자였단 말이지. 남자. 키아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엉덩이를 얼마나 맞았는지 빨갛다 못해 파랗게 부풀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어린애 팔뚝만 한 모조 성기가 꽂혀 있었다. 엉덩이를 움직이는 그 허리놀림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엑스타인은 다시 매를 들었다. 가느다란 나무 끝에는 네모난 고무 조각이 달려 있었는데 저 매는 소리에 비해서 타격이 크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남자의 엉덩이는 엉망이었다.

남자가 엉덩이를 좀 더 흔들었다. 엑스타인의 다리 사이에서 유두를 핥는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불안한.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여는 듯한 이 초조한 기분이라니.

키아란……. 잠깐, 키아란?!

그때 엑스타인이 발을 들어 남자를 차버렸다. 남자가 힘없이 뒤로 넘어지면서 할슈버트의 눈에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키아란 베도야. 헤레라 그 자체라는 수상이 검은 딜도를 뒤에 꽂고 매를 맞으며 황홀한 얼굴로 울고 있었다.

할슈버트는 재빨리 벽으로 몸을 숨겼다. 눈을 크게 뜬 채 당장에라도 비명이 터져 나올 듯한 입을 막았다. 키아란…… 베도야! 베도야였다. 적들에게서 전제 군주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강력한 정치가. 문신의 수장. 종신 수상. 그가 저기서 엑스타인과 저러고 있다니.

“그건 배신이었어.”

할슈버트의 긴 이야기를 들은 엑스타인이 픽 웃으며 바닥에 핏덩이를 뱉었다.

“어지간히 재밌었나 보지? 수상과 자다니 배신이다, 한마디로 못 끝내는 걸 보면?”

엑스타인의 조롱에 할슈버트가 주먹으로 엑스타인의 턱을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났다. 맞는 와중에도 엑스타인은 예전에 베도야가 자신을 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제법 손길이 매웠었지. 엑스타인이 피식거렸다.

“정곡을 찔렀나?”

세웠어? 엑스타인이 비웃었다.

이런 남자였다. 할슈버트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엑스타인은 웃을 뿐이었다. 사흘 내내 고문을 당해 온몸이 걸레처럼 너덜거려도 그 잿빛 눈만은 짐승의 것처럼 번들거렸다. 마치 이 모든 일들이 유희라도 되는 것처럼.

“너 같은 놈은 나라에 방해만 돼.”

할슈버트가 중얼거렸다. 엑스타인의 눈만큼이나 자신의 눈도 번들거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할슈버트가 녹음기를 들이밀었다.

“자백하도록 해. 그럼 그동안의 정리를 생각해 편안히 죽여주지.”

웃기고 자빠졌네. 엑스타인이 침을 뱉었다.

“뭘 말이야?”

할슈버트가 바닥에 떨어진 침에 시선을 주었다. 타액과 피가 섞여 있었다. 지금은 멀쩡한 얼굴로 능글거리고 있어도 엑스타인도 결국 사람이다. 분명히 대미지를 입었다. 단지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키아란 베도야와의 더러운 관계 말이다!”

푸하하하, 엑스타인이 박장대소했다. 커다란 공간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것도 없는 컨테이너 창고에 사내다운 웃음만이 가득했다. 할슈버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엑스타인을 바라보았다. 엑스타인은 지금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 자신은 결코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한참을 웃은 엑스타인이 아직도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자는 그 남창 놈이 베도야일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

“놈은 그저 남창일 뿐이야. 베도야 교도인지 직업 정신인지는 몰라도 그 얼굴로 좆을 빨기에 종종 이용할 뿐이지.”

“이미 늦었어.”

할슈버트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그가 품에서 사진을 꺼내 엑스타인의 앞 책상에 던졌다. 엑스타인의 시선이 흘끗 거기로 향했다.

케번 우드에서 나오는 베도야. 무인 택시를 타는 베도야. 무인 택시에서 내리는 베도야.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차를 타는 베도야와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는 테이버 비서실장.

“세상에 그 얼굴이 아무리 여럿이라 해도 멧 테이버는 한 명뿐이지.”

할슈버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내 운이 끝일까?

엑스타인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할슈버트는 신중한 남자다. 오래도록 자신의 보좌관직을 맡았던 만큼 그는 엑스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엑스타인을 살려둘 생각이 있었다면, 아니, 엑스타인을 죽일 수 없을 거라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두었다면, 할슈버트는 결코 엑스타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엑스타인은 할슈버트보다 몇 배 더 잔인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러니 할슈버트는 엑스타인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엑스타인이 절대 살아 나갈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니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사진 속의 베도야는 차가운 얼굴이다. 하지만 저 얼굴은 분명 밤새도록 자신에게 시달린 뒤의 얼굴일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군.

엑스타인은 피식 웃었다.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몸을 질리도록 맛보았었다. 그러니 엑스타인 자신은 운이 좋은 남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심을 전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베도야는 자신과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베도야가 자신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는 뜻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이 더 좋았을 텐데.

엑스타인은 고개를 들어 할슈버트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키아란 베도야가 남창이라고?”

엑스타인의 말에 할슈버트가 주먹을 휘둘렀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주먹과 얼굴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유독 크게 들렸다. 통증으로 뇌가 흔들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지독한 통증에 신음이 나왔다. 그래도 엑스타인은 눈을 감고 이를 악문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후려치던 할슈버트가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설 때까지 엑스타인은 그저 맞고 있을 뿐이었다. 할슈버트가 물러나자 엑스타인이 웃었다. 평소의 사나운 얼굴이 얻어맞아 울긋불긋하고 코뼈가 무너져 부어오르고 있는데도 엑스타인의 회색 눈은 여전히 짐승처럼 사나웠다.

“나한테 똥구멍을 박혀 헐떡이던 게 키아란 베도야라고? 놈이 스트레스에 미쳐서 남창질이라도 하고 다닌다 이거야? 이 소리가 하고 싶어?”

“모르는 척하지 마!”

“모르는 걸 아는 척하라는 쪽이 너무한 거 아닌가? 수상과 내가 잤다고? 역겨운 소리 하지 마.”

엑스타인의 빈정거림에 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져도 엑스타인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할슈버트는 더욱더 분노해 총을 꺼내 들었다. 여기서 끝인가. 엑스타인이 할슈버트를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거 내려.”

어떤 남자가 말했다.

할슈버트와 엑스타인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슈버트가 열어둔 커다란 문 너머에 웬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웃는 얼굴인데도 몹시 비열해 보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체구의 남자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이 엉망으로 부어오른 엑스타인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이런” 하고 아쉬운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전혀 아쉽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할슈버트가 든 총을 남자에게로 뻗었다.

“경비병들은 어떻게 했지?”

이 창고 앞에는 여섯 명의 경비병이 서 있었다. 버나드 장군 휘하에 있는 놈들이었다. 엄연히 나라의 녹을 받는 군인을 어떻게 했냐고 묻는 얼굴은 싸늘했다.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글쎄. 지금 궁금해하셔야 할 건 경비병들의 운명이 아닌 것 같은데요.”

“엑스타인의 부하인가?”

할슈버트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는 엑스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엑스타인의 부하라니 그런 자가 있을 리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순순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지?”

남자가 히죽 웃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비열한 웃음이었다. 남자는 평범한 얼굴이었는데 히죽 웃자 추하게 보였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총을 움켜쥔 할슈버트의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볼일이 있는 건 제가 아닙니다.”

“그럼?”

“저는 대리인일 뿐이죠. 높은 분이 원하셔서 해결하러 온 해결사일 뿐입니다.”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핥았다. 히죽거리는 얼굴이 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남자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더욱 그를 추해 보이게 했다. 할슈버트는 남자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남자는 암흑가의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부하들 앞에서 그 시체를 태연히 먹었다는 남자가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미 인간이 아닌 자. 야차가 되어버린 귀신같은 남자가 웃으면서 손가락을 들어 엑스타인을 가리켰다.

“그분이 원하시는 분만 데려갈 수 있다면 불미스러운 일 없이 끝날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비병을 죽였잖아. 이미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났어!”

할슈버트가 고함을 지르자 남자가 또 히죽 웃었다.

“그건 그들의 불미스러운 일이지, 당신의 불미스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오자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콰지모도 같은 얼굴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평범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할슈버트는 뒤로 물러섰다.

뒤에는 엑스타인이,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콰지모도가. 절벽 앞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그러나 절벽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다. 할슈버트는 엑스타인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어느 쪽이 먼저 불미스러워지는지 한번 볼까?”

“최악의 선택인데요, 그건.”

남자가 조용히 경고했다. 할슈버트의 총이 철컥 소리를 냈다.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에 남자가 후 하고 한숨을 뱉었다.

“하여간 버러지라는 것들은.”

남자가 총을 들었다. 정확히 할슈버트를 겨누고 웃었다. 쏴보라는 얼굴이다. 남자의 입술이 소리 없이 도발했다. 어서. 남자의 얼굴에 할슈버트의 총이 떨렸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힘을 주어서.

“인질이라는 게 말이야, 이게 참 지랄 맞은 거야.”

남자의 말투가 어느새 상스러워졌다.

“인질이 없으면 넌 당연히 죽겠지. 그러나 인질이 있으니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거지. 하지만 인질이 적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면?”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살려서 가면 좋겠지만 못 살리면 어쩔 수 없지. 그 남자는 내 식구도 아니고 말이야.”

할슈버트의 총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엑스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암흑가의 제왕을 누가 끌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저 남자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없었는데. 아니, 아예 그를 구하려는 사람 자체가 있을 리 없었다. 엑스타인은 군부에서 혼자였으니까. 문득 베도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엑스타인은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없다. 베도야는 이 일을 알지도 못할 것이고, 그 고고한 성격에 암흑가의 제왕과 아는 사이일 리가 없다. 고작 몇 년간 몸을 섞은 남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었다.

할슈버트의 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너무 힘을 주어서 떨리던 것이 어느새 공포로 바뀌고 있었다. 군인이라고 해도 다 똑같은 인간이다. 죽음 앞에서는 동등해진다.

“너의 높은 사람이라는 게 누구지?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할슈버트의 말에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분은 너 같은 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니 그럴 수는 없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뿐이다. 그를 죽이고 너도 죽든가. 그를 살리고 너도 살든가.”

할슈버트가 남자와 엑스타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뱀 같은 남자가 소름 끼쳤다. 그러나 엑스타인이 무섭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엑스타인이 더 무서웠다. 할슈버트는 엑스타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산 채로 제 아버지를 뜯어 먹었다 하더라도 엑스타인보다는 덜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엑스타인은 결박되어 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면 된다. 그리고 도망치자. 해외로.

할슈버트는 마음을 정했다. 할슈버트의 손이 사진을 챙겼다. 이 사진이 있으면 자신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군부를 적으로 돌려도 약점을 잡힌 베도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목숨을 구하는 것이다.

할슈버트가 사진을 품에 넣는 걸 보고 엑스타인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그 사진을 가져가 그에게 의탁할 생각인가?”

엑스타인의 말에 할슈버트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엑스타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게 배신자라고 하더니, 정말 웃기는군. 코미디언을 하지그래?”

냉혹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난폭한 성격이군. 남자가 웃는 얼굴 너머로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을 때 할슈버트가 팔을 들어 올렸다. 권총으로 엑스타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빠각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딘가 부러졌겠군. 남자가 소리만으로 엑스타인의 대미지를 계산했을 때, 엑스타인이 피를 뚝뚝 흘리며 웃었다. 이목구비가 전부 심하게 부어올라 물에 불어 터진 익사체처럼 보이는 엑스타인이 키들거렸다.

“나도 그동안의 정리로 충고하지. 멀리 가도록 해, 할슈버트.”

키득키득. 그 웃음소리는 산 사람의 뼈를 갉아내는 듯했다. 기묘한 냉기가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엑스타인이 말했다.

“아주 멀리 가. 오래 살아남으라고.”

인간 사냥꾼의 눈이었다.

하여간 권력자라는 인간들이란. 남자는 피식 웃었다.

콰지모도에서 다시 평범한 얼굴로 돌아온 남자는 불구경을 하듯 할슈버트와 엑스타인을 지켜보았다. 할슈버트는 떨고 있었다. 아까 남자의 협박에도 이성적으로 대처하던 군인이었다. 오랜 시간 훈련된 좋은 군인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을 상대로도 꼿꼿이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군인이 엑스타인의 앞에서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 엑스타인은 지금 결박된 데다 고문으로 온몸이 너덜거리고 얼굴은 이미 부어 이목구비가 판별되지 않는 상태인데도. 할슈버트는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

엑스타인의 목에서 끓는 듯한 웃음소리가 났다. 즐거운 웃음이었다. 놈을 어떻게 사냥할까. 어떻게 죽일까. 즐거워서 웃는 웃음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할슈버트가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미친 걸로는 누구 못지않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자신보다 더한 인간이 여기 있었던 모양이다.

“옛 상관 말씀대로 멀리 가십시오.”

너무 시시하면 네 옛 상관은 다른 데다 화풀이를 할 것 같은걸. 멀리멀리 가도록 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었다. 키가 작은 남자가 천천히 다가오자 할슈버트는 가까워지는 남자와 킬킬대는 엑스타인의 사이에서 어깨를 떨다가 문으로 걷기 시작했다. 남자를 지나치는 할슈버트의 얼굴이 새파랬다. 빠른 걸음이 곧 질주로 바뀐다. 슈베르트의 마왕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할슈버트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는 입술을 올렸고, 엑스타인은 인간 백정처럼 눈을 빛냈다.

그때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슈버트가 달리다 말고 쓰러졌다.

여자의 하이힐보다는 무겁고 워커보다는 날카로운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상대를 보고는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하, 차에 계시…….”

엑스타인이 설마 하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금발이었다. 자국이 잘 남는 하얀 피부가, 단정한 옷차림이, 바른 자세가 눈에 띄었다. 마지막에야 얼굴이 보였다. 서늘하고 무표정한 미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나?”

베도야의 말에 퉁퉁 부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엑스타인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도야가 마피아 보스를 움직여 자신을 구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베도야가 고갯짓을 했다. 그 희미한 고갯짓에 남자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어이!”라고 소리쳤다.

수갑이 풀리고 몸이 자유로워지자 베도야가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

베도야의 말에 남자가 “잊지만 말아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며 싱글거렸다. 아까와는 달리 그 웃음이 꼴 보기 싫었지만 엑스타인은 꾹 참았다. 베도야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고 엑스타인은 그 뒤를 따랐다.

“베도야.”

“일단, 병원 먼저 가지.”

“여기에는 왜…….”

너는 우리 사이에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었나?

그때 헤어지자는 말에 한 마디 만류도 없이 나가버렸으면서 왜 구하러 온 거지? 심지어 저런 남자의 힘까지 동원하면서?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뒤를 따르며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 뒷모습을 몇 번이고 살폈다. 단정한 모습이다. 자신의 품에서 무너질 때의 모습은 조금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모습이다.

베도야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몸을 섞다 보니 생긴 일종의 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닌 걸까? 베도야는 고작 정부를 구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할 남자가 아니었다. 약점이 잡힐 것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하다니, 이건 베도야답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목이 그저 멘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서.

엑스타인은 길을 잃었다가 어머니를 만난 아이처럼 베도야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놓칠까 무서웠다. 헤어지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다. 정부든 뭐든 좋았다. 놓아줄 수 없었다.

“베도.”

“돌아갔었어.”

베도야가 한잠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로 돌아갔다는 건지 의아해하던 엑스타인이 아 하고 중얼거렸다. 헤어지자던 말에 집을 나섰던 베도야는 그때 돌아오려고 했었던 모양이다.

“왜?”

너는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었잖아.

자신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지는 것을 귀로 들으면서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베도야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걷기만 했다.

그를 따라 걷던 엑스타인은 불안해져 베도야를 잡으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시 미래 같은 걸 생각해보기로 했는지. 아니, 사실 미래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딴 걸 말하자는 게 아니었다. 엑스타인이 원하는 건 그보다 더 단순한 것이었다.

엑스타인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베도야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무슨 관계야?”

엑스타인이 물었다.

한 마디면 돼. 단 한 마디만 해줘. 이 관계가 최소한 둘 사이에서는 약속과 신뢰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줘.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말 한 마디면 돼.

베도야는 흘끗 고개를 들었다.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리에는 자신을 태우고 온 차가 있다. 그 차에는 테이버를 비롯한 몇 명의 측근이 타고 있었다.

“나는 너를 내 차에 태워 병원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야.”

베도야가 나직이 말했다.

아니,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엑스타인이 손을 뻗었다. 베도야를 돌아보게 하려 했다. 지금 내 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나를 봐줘.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말해줘. 엑스타인의 손이 베도야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베도야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 차에는 테이버가 타고 있어. ……그 외에 몇 명도.”

엑스타인의 놀란 눈에 대고 베도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병원에서는 내 주치의가 기다리고 있고.”

베도야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딱딱했다. 그런데도 묘하게 그 눈가만은 붉었다. 마치 섹스할 때처럼 조금 젖은 기분마저 들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베도야가 아픈지 미간을 좁혔지만 그래도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이야.”

엑스타인의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고문이라고 엑스타인은 생각했다. 희망의 손끝이 보일 듯 말 듯한 이 상태야말로 고문이 따로 없었다.

“키아란!”

“측근에게 알리고 싶다고 했잖아.”

그 순간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당겨 안았다. 와락 안고 그 팔에 힘을 주었다. 영원히 놓지 않을 것처럼.

베도야는 엑스타인에게 안긴 채 가만히 있다가 엉망인 등에 조심스럽게 팔을 둘렀다. 엑스타인이 속삭여 물었다.

“나를 좋아해?”

베도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엑스타인이 한 번 더 조급하게 물었다.

“키아란, 내가 좋아? 조금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말해봐. 내가 좋아?”

베도야는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엑스타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진정하라는 듯한 그 손놀림이 더욱 심장을 들뜨게 했다. 엑스타인은 자신보다 작을 베도야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대답을 기다렸다. 이렇게 날이 샌다 하더라도 놓아줄 수 없었다. 대답을 들어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베도야의 숨소리가 가깝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문 후유증인지, 뼈가 부러져서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베도야 때문이었다. 베도야가 말도 안 되게 달콤한 소리를 하니까 머리가 맛이 가서.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좋아?”

엑스타인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대답을 듣지 못하면 죽어도 한이 맺힐 사람처럼 절박하게.

곤란한 일이었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을 토닥거렸다. 이 어린 남자는 곤란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부어올라 있었고 핏자국도 선명했다. 정상이 아닐 게 분명했다. 당장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일 텐데도 자신의 목숨보다 말 한 마디가 더 중요한 것처럼 자신을 꽉 붙들어 안고 있었다. 베도야를 안고 있는 건장한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선고를 기다리는 시한부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 곤란했다. 그의 열정이 옮겨 붙었는지 자신의 심장도 뜨거워지고 있었다. 목이 메고 눈이 뜨거워졌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남자가 절박하게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이 기꺼워서, 들끓는 감정들이 어색하면서도 황홀해서. 섹스가 아닌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절정에 오를 것처럼 도취되는 게 미친 것처럼 느껴져서.

그래도 네가 좋아서.

“그래.”

베도야가 중얼거렸다.

엑스타인의 어깨가 굳는 것을 보며 베도야가 한 번 더 대답했다.

“네가 좋아.”

베도야가 앞을 바라보았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만 더 걸으면 리무진이 나타난다. 그리고 측근들이 리무진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손에는 할슈버트를 죽인 총이 들려 있다.

곤란한 일뿐인데 기분이 가볍게 들떴다. 베도야가 손을 들어 엑스타인의 머리를 안았다.

“가자, 병원에.”

엑스타인이 눈을 감았다. 뜨거운 감정에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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