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실에서 (12/15)

테이버는 초조하게 베도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베도야의 곁에 있게 된 지 50년,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다. 오늘 아침 베도야는 전화를 받고 일어섰다. 그는 테이버의 앞에서 태연히 서랍을 열었다. 총이 가지런히 놓인 서랍이 존재한다는 걸 테이버는 처음 알았다. 테이버가 멍하니 서 있는데, 베도야는 무심하게 총을 한 번씩 들어보고는 한 자루를 빼낸 뒤 서랍을 잠갔다.

‘가, 각하. 총은 왜…….’

‘필요할 것 같아서.’

어디에 필요한 거냐고 묻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베도야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테이버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가는데도 베도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리무진에 올랐다. 총을 곁에 둔 채 베도야는 태연히 오늘의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리고 연락이 왔을 때 그는 말했다.

‘항구로 간다.’

스케줄이 남아 있다는 말 한 마디 해보지 못하고 테이버는 스케줄을 조정했다. 그사이에도 그는 베도야를 흘끔거렸다. 베도야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테이버의 시야 끝에 베도야가 가지고 온 총이 잡혔다. 설마 저 총을 들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제발 그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 차가 멈춰 섰다. 테이버가 먼저 내려 문을 열자 베도야가 총을 들었다.

‘총도 가지고 가시렵니까?’

‘그래.’

총은 왜 가지고 가려는 거냐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는데도 테이버는 간신히 참았다.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허리를 숙였다 펴자 이미 베도야의 뒷모습은 멀어진 뒤였다. 도대체 그 총으로 뭘 하려는 거냐고 테이버는 입만 달싹거렸다.

베도야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옥이었다.

중간에 총소리가 났다. 달려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테이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관은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했으니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베도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자신의 인생도 흔들다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테이버는 리무진 앞에 서서 뚫어져라 앞을 노려보았다. 주먹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손만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혹시 상관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그때 베도야가 나타났다. 아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단정하고 서늘한 모습. 단지 총이 없을 뿐이었다.

“각하, 볼일은 다 마치셨습니까?”

테이버가 베도야에게 물으며 그 뒤를 흘끔거렸다. 며칠간 전력을 다해 엑스타인의 행방을 찾던 베도야였다. 결국 찾아내서 왔는데 왜 엑스타인은 보이지 않는가. 혹시 아까의 그 총소리는 엑스타인을 향해 쏜 것이었나?

테이버의 질문에 베도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리무진에 올라탔다.

“각하, 원수는…….”

“엑스타인? 그가 왜?”

“아닙니다.”

그렇게 열심히 찾아내서 스케줄도 다 미루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데려오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테이버가 말은 안 했지만 당황한 내색을 하자 베도야가 입을 열었다.

“그에게 용건이 있었어.”

자신이 모르는 용건이라는 게 베도야에게 있었단 말인가. 테이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베도야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용건은 끝났다.”

“개인적인 용건이셨습니까?”

테이버의 말에 베도야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테이버는 베도야의 입술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이 상태가 신기할 정도였다. 베도야에게 개인적인 용건이라니. 베도야에게 사생활이라니. 그런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최근에는 이상한 일뿐이었다.

베도야가 휴일을 챙기기 시작한 지 벌써 4년째. 그가 휴일에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마피아 보스와 사적으로 연락하는 사이인 줄도 처음 알았다. 그는 도대체 엑스타인의 사정을 어떻게 안 것일까. 그는 엑스타인에게 무슨 용건이 있었던 것인가.

“빚을 지웠다. 나중에 분명 쓸모가 있겠지.”

베도야의 말에 테이버가 “예?” 하고 되물었다.

“그는 납치당했었어, 테이버.”

베도야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내렸다.

“그를 납치한 건 네가 예상했던 대로 군부의 반대파였고, 보좌관 중에 협력자가 있었다. 할슈버트가 배신했더군.”

“할슈버트였습니까.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었군요.”

“그래. 그는 죽기 직전이었고 나는 그를 구했다. 빚을 지운 셈이지.”

베도야의 말에 테이버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물었다.

“상대는 누구였습니까?”

“버나드.”

“버나드가 차라리 낫지 않겠습니까? 엑스타인은 오만한 인물입니다. 냉혹한 데다 잔인무도한 인물이라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베도야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버나드는 왕의 혈육이지.”

베도야의 말에 테이버가 입을 다물었다.

말 그대로 버나드는 왕의 혈육이었다. 왕의 사촌인 버나드 장군은 군부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자였다. 엑스타인이 원수가 되기 전 버나드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동했었다. 문신들은 그런 버나드를 껄끄러워하고 있었다. 종종 버나드는 베도야한테 무례한 정도는 아니어도 꽤 편안한 태도를 보였고 문신들은 그 점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핀레이 엑스타인이 있었다. 장군이면서 다른 장군과는 달리 진두에서 지휘하며 적군을 휩쓸고 있는 무도한 사내가.

엑스타인이 원수가 된 데에는 베도야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베도야는 왕의 혈육인 버나드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엑스타인을 눈여겨보았다. 배경 따위는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장군이 된 남자를 눈여겨보며 조금씩 그의 입지를 넓히다 버나드의 스캔들을 터뜨리며 엑스타인을 원수의 자리로 이끌었다.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다루기는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만, 오산이었다. 엑스타인은 지독하게 다루기 어려운 사내였다. 성격은 냉혹하고 리스크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잔인한 데다 두려워하는 것도 없으니 그를 어떻게 다룰 수 있단 말인가. 계산 착오였다. 차라리 버나드가 다루긴 더 쉬웠다.

“핏줄은 불변이다. 바꿀 수 없어.”

베도야가 창 밖으로 손끝을 내밀었다.

“그러니 버나드는 안 돼. 그보다는 엑스타인이 낫다. 이제 버나드가 엑스타인을 쳤으니 엑스타인도 그 성격에 가만있지는 않을 터.”

베도야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테이버는 알아들었다. 베도야는 군부의 실력자 두 사람이서 치고받으며 군부의 세력이 약화되길 기다릴 생각인 게 분명했다.

그제야 테이버는 상관에게 진심으로 웃어 보일 수가 있었다.

“재미있어지겠습니다.”

상관은 제정신이었다. 그렇다면 총의 행방 따위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게 어디 있든, 상관은 아무런 문제를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키아란 베도야는 그런 남자였다.

◈ ◈ ◈

엑스타인에게 지난 한 달은 숨이 막히도록 바쁜 일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베도야와 만날 시간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럴 만했다. 엑스타인 진영에서 모든 실무를 맡아 하던 할슈버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은 계속 꼬여만 갔다. 보좌관들이 유능하기에 한 달 만에 업무가 정상화된 것이지, 아니었다면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루에 세 시간씩 자는 강행군 끝에 드디어 이번 주말에는 베도야를 만날 수 있을 듯했다. 그날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다. 오래 못 만나면 어디서 마주칠 건수라도 생기고는 했었는데 이번만은 도무지 그림자라도 스쳐볼 기회조차 생기지를 않았다. 덕분에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네가 좋아.

그 말이 자꾸 귓가에서 맴돌았다. 몇 번이고 베도야에게 달려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 몸을 안고 싶었다. 다정하게, 그리고 심술궂게. 평소보다 더 흠뻑 젖은 눈으로 애원하게 만들고, 행위가 끝나면 상냥하게 안고 같이 잠들었으면 했다.

그러려면 이 모든 걸 끝내야겠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일들을 노려보던 엑스타인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각하.”

의욕적인 태도를 보이는 엑스타인의 옆에서 같이 일하고 있던 그레이엄이 무슨 보고를 받았는지 엑스타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엑스타인은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며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그레이엄이 헛기침을 했다. 이쪽을 봐달라는 제스처에 엑스타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오랜만입니다, 원수.”

베도야가 거기에 서 있었다.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헛것이 보이나? 꽤나 그럴싸한 생각이었다. 엑스타인은 차가운 얼굴로 신기루를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신기루가 옷을 빈틈없이 입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왕이면 옷을 벗고 울어보라고. 이렇게 애달픈 마음에 위로나 되게.

엑스타인이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그레이엄이 또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제멋대로인 상사가 괜히 수상에게 난폭한 소리라도 해버릴까 두려웠다. 할슈버트가 있었다면 상사의 분위기를 맞춰 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까지 했다.

“엑스타인 원수.”

베도야가 한 번 더 부르자 그제야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실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

엑스타인이 가만히 그를 불러보자 베도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에 연락도 없이 죄송합니다만 저번 일에 대해서 긴밀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저번 일?”

베도야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미소라 엑스타인의 새 보좌관이 된 그레이엄의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였다.

“항구에서 약속한 협조에 대해서입니다만.”

항구……! 그레이엄은 그제야 엑스타인을 항구에서 구한 이가 베도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구했다는 말은 옳지 않다. 엑스타인에게 빚을 지우고 그 약점을 잡았다는 쪽이 훨씬 옳은 표현이다. 그레이엄이 숨도 쉬지 못하고 있자 엑스타인이 입술을 올렸다.

“아아, 그거 말입니까? 그거 때문에 오밤중에 관저까지?”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베도야의 뒤에 있던 테이버가 발끈했다. 물론 테이버의 얼굴에는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제 이쪽이 요구할 차례입니다, 원수.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베도야의 말에 엑스타인이 흘끗 그레이엄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뱀과 호랑이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엄이 한 박자 늦게 “아, 예.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테이버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베도야의 뒤를 따랐다. 베도야의 앞에서 엑스타인이 걷고 있었고 그들을 안내하는 그레이엄이 가장 앞에서 걸었다.

도청도, 교신도 되지 않는 밀실의 앞에 선 그레이엄이 문을 열었다. 엑스타인이 먼저, 그리고 베도야가 그 뒤를 따라 밀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버가 그 뒤에서 내키지 않는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밀실 안의 베도야를 바라본다. 베도야가 흘끗 시선을 주었다.

“좀 이따 보지.”

베도야의 말에 테이버가 허리를 숙였다. 그 정중한 태도에 그제야 생각난 것처럼 그레이엄도 허리를 숙였다.

두 명의 부하가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서 시선을 돌린 베도야가 엑스타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엑스타인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베도야에게 박자를 맞춰주긴 했지만 무슨 일인지 영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항구에서 베도야와 한 이야기는 몹시 개인적인 것이었고 베도야가 관저까지 올 정도로 공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에 취해서 잊고 있던 거라도 있었나. 엑스타인이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을 때 문이 닫혔다.

문이 닫혔는데도 베도야는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엑스타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엑스타인이 한 번 더 어깨를 으쓱였다.

“키아란, 무슨 일이야?”

밀담이라니, 그럴 만한 일이 도대체 뭐가 있었지? 사적인 용건인지 공적인 용건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번 주에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내내 들떠왔는데 정작 이렇게 만나자 의아한 걱정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베도야가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키아란?”

엑스타인이 한 번 더 불렀을 때 베도야가 고꾸라졌다. 엑스타인은 놀란 와중에도 재빨리 팔을 내밀었다. 베도야의 몸을 지탱하고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안았을 때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언제나 안던 몸의 무게가 눈에 띄게 가벼워져 있자 신경질이 났다.

“테이버는 뭐하고 있는 거야. 네가 이렇게 야위어가고 있는데.”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피식 웃었다.

“키아란?”

말이 없는 베도야를 한 번 더 재촉하자 베도야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이 젖어 있었다.

엑스타인은 잠시 놀랐다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웃음에 베도야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베도야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엑스타인은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너는, 아직도, 주인님인가……?”

아직도 우리는 역할놀이 중이냐고, 베도야가 묻고 있었다. 엑스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대로 불러도 좋아. 주인님이든 레이든 원하는 대로 불러봐.”

허락해주었는데도 베도야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인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엑스타인이 키득거렸다.

“구멍이 괴로워?”

“…….”

“고고하신 수상께서 젖은 구멍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오신 거야? 잘도 참았군그래. 단둘이 되자마자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으면서.”

베도야는 아무 말도 없이 엑스타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엑스타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엑스타인이 바빠 상대해주지 않았던 한 달 동안 베도야는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일 밤 망설였다. 엑스타인이 금한 자위를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다 결국 포기하고 뒤척였다. 매일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매일 몽정이었다. 다리를 벌리고 엑스타인의 것을 받아들이는 꿈을 꾸며 헐떡였다.

“……네가…… 그렇게 만들…….”

“그러니까 이렇게 책임을 지려고 하고 있잖아. 이렇게 발정 나서 달려왔다는 건 이미 구멍은 준비가 끝난 건가?”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엉덩이 사이를 더듬고 입술을 올렸다. 엉덩이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항문 마개의 손잡이였다. 옷 위에서 잡아 살짝 당겨 빼자 베도야가 비명처럼 숨을 삼켰다.

“여기에 넣으면서 자위하지 않았어?”

“않…… 았어.”

“이런 엉덩이를 가지고도 자위를 안 했다는 말을 믿으라고?”

마개를 다시 밀어 넣자 베도야가 엑스타인에게 매달렸다. 엉덩이 사이를 가르는 고무의 느낌이 섬뜩할 정도로 강하게 다가왔다. 긴장하고 있는 안쪽 살이 짓눌린다. 난폭하게 눌려 허리가 울렸다. 흐으…… 으으읏……. 베도야의 조각 같은 입술 사이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나를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안 쌌다고?”

엑스타인이 다시 마개의 손잡이를 잡았다. 베도야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하지 마. 강한 염원이 베도야의 몸에서 풍겨 나왔지만 엑스타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손잡이를 잡고 다시 끌어내려 하자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손목을 잡았다.

“하, 하지 마.”

늘 그랬던 것처럼 ‘행위가 끝나면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지금은 네가 복종할 때야’라는 말을 하려던 엑스타인이 멈칫했다. 이제 그들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더는 그런 위악은 떨 필요가 없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여유롭게 마개를 잡아당겼다. 바지 위로도 베도야의 엉덩이가 움찔거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열려 있던 내벽이 다물리고 달라붙기 직전에 다시 갈라지는 것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달이나 금욕했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바지를 벗기고 팬티를 내렸다. 힘을 준 채 꽉 조여 있는 엉덩이를 억지로 열자 베도야가 이를 악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방음 처리가 되어 있다고 해도 소리를 내는 게 탐탁지 않은 듯했다.

“빨게 해줄까?”

엑스타인의 말에 덜덜 떨던 베도야가 고개를 들었다. 상기된 뺨과 기대에 일렁이는 시선을 보며 엑스타인이 웃었다. 이제 연인 사이니까 좀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분명히 다정하게 안을 생각이었다.

몇 년이나 좋아했고 지금 더 좋아하는 연인이었다. 질리도록 상냥하게 대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데리고 침대로 가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흘리면 안 돼.’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벌렸다. 말이 없다 보니 베도야는 거의 입을 여는 법이 없었고, 함박웃음을 짓는다든가 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베도야가 이렇게 입을 크게 벌리는 모습은 이럴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입술을 축인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것을 머금었다. 능숙하게 목 안쪽까지 넣고 머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절묘한 애무다.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아는 만큼 베도야도 엑스타인을 알았다. 어디를 어떻게 하면 엑스타인이 더 빨리 흥분하는지 아는 베도야가 평소보다 더 몰아붙이고 있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까지도 머금고 있던 마개를 스스로 빼게 했다. 힘을 주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못 빼겠다고 하는 베도야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볼기 맞는 거 좋아하지? 때려줄 테니 힘내봐.’

매를 맞을 때마다 나오던 게 들어가고 있었지만 엑스타인은 봐주지 않았다. 손에 닿는 감촉이 감질났다. 더 때리고 싶었다. 어차피 베도야는 이런 것에 흥분하는 몸이니까 거리낄 게 없었다. 힘을 주어 겨우 빼내면 다시 맞아서 들어가고를 반복한다. 모조 성기로 하는 항문 섹스에 베도야가 숨을 헐떡이며 그만해달라고 애원했다. 이미 엉덩이는 맞아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도야의 얼굴이 어느새 눈물범벅이었다. 성감이 치솟았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엉덩이에 반쯤 걸려 있는 채 덜렁거리는 마개를 거칠게 빼 던져버리고 쑤셔 넣었다.

단숨에 삽입되자 베도야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하고 싶었어도 엑스타인의 커다란 걸 단숨에 넣는 것은 괴로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유두도, 성기도 바짝 세우고 있었다.

‘좋아하잖아. 잘라 먹을 것처럼 조이고 있으면서.’

‘그…… 만……!’

‘그만은 무슨. 내숭떨지 마. 여기 완전 뜨겁다고. 엉덩이 움직여. 허리도. 그래, 잘하네. 읏……. 너 진짜 잘하는 거 알고 있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엑스타인은 멋대로 말하며 박기 시작했다.

베도야가 울부짖었다. 팔을 허우적거리는 게 귀여웠다. 안 돼, 찢어져. 그렇게 소리치는 게 가당찮게 깜찍했다. 찢어지기는.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항문을 만지며 웃었다.

‘여기를 찢으려면 손이라도 넣어야 할 것 같은데.’

베도야가 놀란 눈으로 엑스타인을 돌아보았다. 그는 엑스타인과 교제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엑스타인이 좋은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엑스타인은 미친놈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엑스타인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지난 4년간의 경험으로 베도야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흣.’

‘왜? 넌 좋아할 거 같은데.’

‘엑스…… 헉, 흐윽.’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허리를 조이며 허리를 움직였다. 베도야가 헐떡거렸다. 엑스타인의 손이 허리를 너무 조이고 있어 아팠다. 개조당하고 길이 든 항문은 엑스타인의 성기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한 달이나 안 했던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마개로 이용하는 모조 성기를 품고 왔었는데도 달아오른 내부가 잘 벌어지지 않았다.

‘힘 풀어. 안 그러면 억지로 풀게 해줄 테니까.’

엑스타인이 으르렁거린다.

애인이 되어서도 섹스 방식은 여전하군. 베도야는 입술을 깨물며 심호흡을 했다. 엑스타인은 너무 조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베도야는 엑스타인에게 올 때마다 안쪽에 뭔가를 넣고 오고는 했다. 섹스에 있어서는 상당히 강압적인 구석이 있는 엑스타인이다. 언젠가는 오랜만에 하는데 잘 벌어지지 않는다고 억지로 관장을 시켰던 적도 있다. 몇 번이고 물을 집어넣고 억지로 참게 만들어서 기어코 흐물흐물하게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들어왔다. 그때에는 울다 못해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관장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엑스타인은 종종 베도야를 욕실로 끌고 갔다. 이게 싫으면 구멍을 넓혀서 오라고 말하고는 했었다.

‘이제, 좀, 낫군. 엉덩이, 더 들어.’

베도야가 어떻게든 엉덩이를 들려고 했다. 그래봐야 허리가 비틀거리기만 했지만. 자세 제대로 잡으라며 다시 매질이 떨어졌다.

부은 엉덩이를 맞으며 베도야는 울었다. 그가 또 기어가려고 하자 엑스타인이 붙잡아 끌어당겼다. 기어가도록 두었다가 다시 끌어당기며 허리를 처박길 몇 번. 베도야가 침을 질질 흘리며 울었다.

베도야의 항문은 이미 익숙해져서 찢어지려면 정말 팔이라도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았지만, 지나치게 조이는 데가 있었다. 아마 베도야 자신이 굉장히 흥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조여서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그때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엉덩이를 때렸고, 베도야는 더욱 세게 조였다가 의식적으로 풀려 노력했다. 조이고 싶은데 조이지 못해서 안달 내는 얼굴이 또 일품이었다. 유두를 꼬집자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목에 매달린 채 비명을 질렀다. 찢어버릴 듯이 꼬집는 게 아픈 듯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베도야의 성기는 여전히 바짝 서 있었다. 유두도.

이렇게 되어 현재 엑스타인은 베도야에게 박고 또 박는 중이었다. 한 달 만에 하는지라 몸은 달아올랐을지언정 태도가 어색하고 힘을 빼지 못하는 베도야를 계속 윽박질렀다. 결국 그는 베도야를 욕실로 끌고 갔다. 싫다고 반항하는 베도야를 욕조에 묶어놓고 엉덩이에 물을 집어넣었다.

“뜨거워, 하지 마……!”

“이 정도는 가끔 했잖아. 제대로 조여.”

“흑, 레이, 아으읏!”

싫다고 머리를 젓고 묶인 팔을 잡아당기려 애쓰면서도 베도야는 또 중심을 세우고 있었다.

“조이라고 할 때 조여야지. 키아란, 제대로 조여. 그래야 거기가 더 이상 조일 힘도 없이 풀어지지. 어서.”

이미 한 차례 섹스를 한 뒤였다. 제대로 조여질 리가 없는데도 엑스타인이 또 강요해왔다. 결국 베도야는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물이 샐 때마다 매를 맞으며 힘을 주고, 결국 흘려버리고, 다시 관장을 당하고.

그리고 더 이상 조일 수도 없을 때 다시 넣어졌다.

“딱, 좋아. 입구가 풀어져서, 응? 너도 느껴? 흐물거려서, 제대로 오므리지도 못하고, 흣…… 그래도 안쪽은 쫀득거려. 이제, 뭔지, 알겠어?”

“그만……, 이제 정말 그…… 헉.”

“여기지, 네가 좋아하는, 곳. 여길, 누르면, 키아란, 넌, 자꾸 조여온단 말이야. 하지만, 지금, 못, 조이는군. 역시, 관장이야.”

그만해달라는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울면서 헐떡이는 베도야를 안고 엑스타인이 몇 번이고 처넣었다. 세우지도 못하는 베도야의 다리를 벌리고 엉망으로 범하던 엑스타인이 어 하고 신음했다. 그러고 보니, 라고 말하던 그가 베도야를 내려다보았다. 몸이 반으로 접히다시피 한 상태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눈물이 고인 눈은 초점이 약했다. 쾌락과 학대에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얼굴에는 흰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는데 중간에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얼굴에 정액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유두는 부어 있었고 엉덩이는 붉으락푸르락했다. 허리에도 멍이 들어 있었는데 아까 엑스타인이 허리를 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팔이 덜덜 떨리는 건 관장할 때 도망치겠다고 해서 팔에 힘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 외에 온몸을 덮고 있는 멍들은 엑스타인이 남긴 키스 자국이었다. 아무도 그 자국을 키스 자국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두들겨 맞았다고 생각한다면 또 모를까.

“이번 주말에 만나면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게 안아주려 했는데.”

베도야가 울어서 부은 눈을 찡그렸다. 엑스타인은 낭패라는 표정으로 평소보다 더 엉망이 된 베도야를 내려다보았다. 싫어하는 관장을 시킨 탓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엑스타인이 씩 웃었다.

“주말에는 다정하게 안아줄게.”

“그만, 하라고.”

베도야가 중얼거렸다.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고 애원을 하다 목소리는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엑스타인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가볍게 움직였다. 내벽에 스치는 감각만으로도 베도야가 질끈 눈을 감는다.

“아직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뭘 그만두라는 거야.”

“……밖에서…… 테이버가…….”

“다른 사람 이름 입에 올리지 마. 기분 잡치게.”

엑스타인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아픈데도 또다시 쾌락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결국 베도야는 다시 성기를 세웠고, 울면서 엑스타인을 끌어안았다. 늘씬한 사지로 칭칭 감아오는 베도야를 안고, 엑스타인은 몇 번이고 허리를 움직였다. 베도야의 엉덩이에서 정액이 새어나올 때까지, 그는 자신의 정액을 쏟아부었다.

베도야는 중간에 정신을 잃었다.

엑스타인은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집요했고, 베도야는 도저히 거기에 따라가줄 수가 없었다. 원래 엑스타인에 비해 베도야의 체력이 떨어지기도 했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쪽이 주는 쪽보다 훨씬 괴로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엑스타인이면 더욱 그러했다.

엑스타인은 잔인하게도 정신이 깜빡거리는 베도야를 기필코 깨워 자신을 보게 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게 한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너무 오랫동안 괴롭혀진 항문은 이미 짓물러 있었고 엉덩이에는 감각도 없었는데 그래도 엑스타인은 베도야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봐. 나를 똑바로 봐.

엑스타인이 몇 번이나 요구했다.

그러나 엑스타인이 아무리 흔들어도, 약하게 뺨을 때려도, 굉장히 느끼는 곳을 헤집어도 베도야가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베도야에게 혀를 차며 그는 마지막으로 베도야의 몸 안에 사정하고 떨어져 나왔다.

베도야의 뒤처리를 해주고 시간을 보자 의외로 네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엑스타인은 앞으로 두세 시간 정도는 더 재워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베도야의 뒤에 누워 그를 끌어안았다.

귀여워.

엑스타인이 눈을 감았다. 베도야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나른하게 풀려 있는 그 몸을 안고 한 번 더 생각한다. 귀엽다고.

한 달이나 내버려두자 찾아왔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은 없었지만 바로 그 뜻이었다. 엉덩이를 들썩거릴 정도로 몸이 달아오른 채 찾아오다니. 생각하자 또 하고 싶어졌지만 이젠 엑스타인도 쥐어짜 낼 정액이 없었다.

그나저나 애인 사이가 되면 다정하고 상냥하게 안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에게도 조금은 사디스트 기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엑스타인이 가만히 졸기 시작했을 때, 품 안의 몸이 움직였다.

“키아란?”

“몇 시지?”

베도야의 질문에 엑스타인이 시각을 확인했다.

“네가 여기에 들어온 지 다섯 시간이 지났네.”

그 말에 베도야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다섯 시간밖에 안 지났다고?”

그럴 리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지간히 시달린 터라 안색이 창백했다. 엑스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이야. 뭐하면 시간을 보든가.”

엑스타인이 리모컨을 들었다. 조명에 포함된 시계가 천장에 시간을 쏘아준다. 다섯 시간이 채 안 된 시각이었다. 베도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엑스타인이 순순히 베도야를 놔주었다.

“몸은 괜찮아?”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괜찮은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기절하고 나서 보니 베도야의 항문은 찢어지진 않았지만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오랜만에 해서인지 너무 가감 없이 해버린 모양이다.

엑스타인의 생각보다 베도야의 컨디션은 더 나쁜 편이었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팠고 항문도 쓰라렸다. 아직도 안쪽이 벌려져 있는 듯했다. 엉덩이는 당연히 아팠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욕실 좀.”

베도야가 그렇게 말하고 엑스타인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욕실로 사라졌다.

그가 걸어가는 사이 그의 다리로 정액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뒤처리가 완벽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엑스타인은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베도야가 나와서 다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엑스타인은 심술궂은 눈으로 베도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단정하게 옷을 입는 그 뒷모습이 꽤나 섹시했다. 벗겨버리고 싶어진다니까.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밀담을 핑계 대더라도 이제는 보내줘야 할 시간이었다.

어느새 완벽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베도야가 엑스타인을 불렀다.

“레이.”

저 입에서 나오는 ‘레이’는 자신의 애칭 같지가 않다.

엑스타인이 일어서서 베도야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엑스타인을 레이라고 부른 사람은 어머니뿐이었지만 그녀도 언제나 지치고 괴로운 얼굴을 하고 불렀었다. 아무도 베도야처럼 단정한 얼굴로 다정하게 불러주지 않았다. 아마 베도야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레이’가 얼마나 상냥하게 들리는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베도야의 ‘레이’는 부드럽고 달콤해서, 어린아이나 사랑하는 여인을 부르는 것같이 느껴졌다. 뭐, 절반은 맞는 소리였다. 베도야에게 엑스타인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으며 여인은 아니지만 연인이기는 했으니까.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뒤에 섰다. 거울 앞에 선 베도야의 뒤에서 그를 가볍게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정중한 입맞춤이었다. 베도야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말에 또.”

엑스타인의 말에 아아 하고 베도야가 중얼거렸다.

“주말에는 스케줄이 있어서 이번 주에는 못 만나.”

“무슨 스케줄?”

엑스타인이 불쾌한 빛을 띠며 물었다. 베도야가 담담히 대답했다.

“황궁.”

그렇다면 스케줄을 조정하라고 할 수가 없다. 엑스타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베도야가 피곤한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 주엔 출장.”

“…….”

“그다음 주에는 너도 알다시피 황녀의 결혼식이 있지.”

엑스타인의 얼굴을 흘끗 본 베도야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몸은 엉망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황녀의 결혼식 다음은 군사 작전이 있어.”

“그럼 그다음 주에.”

베도야의 말에 엑스타인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라고 짓이기듯 물었다. 베도야가 흘끗 거울에 비친 엑스타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인데도 왠지 모르게 소년같이 귀여운 건 아마 자신이 지금 그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소년 같은 귀여운 단어는 도저히 갖다 붙일 수 없는 얼굴이니까.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멱살을 붙잡았다. 부지불식간에 끌려오는 얼굴이 사납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마치 아가씨들에게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다음 달에 봐, 레이.”

◈ ◈ ◈

베도야가 나온 것은 다섯 시간이 지나서였다.

밀실에서 나온 베도야의 표정은 상당히 나른했다. 밀실 앞에서 기다리던 테이버가 벌떡 일어났다. 엑스타인이 설마 밀폐된 공간에서 무슨 짓이라도 했을까 봐 가슴을 졸였던 테이버였다.

무슨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지 몰라도 베도야의 안색은 창백했다. 베도야의 얼굴을 본 테이버가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그 뒤를 따라 나오는 엑스타인의 표정이 이상했다. 좋은 것도 같고 싫은 것도 같은,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평소의 무표정에 비하면 분명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는데 그 표정이 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레이엄 또한 테이버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신을 증오하는 것으로 이름 높은 엑스타인이었다. 베도야가 자신을 구해주었다며 빚이라도 갚으라고 하면 도리어 날뛸 수도 있는 인간이었다. 원수 관저의 밀실에서 수상이 죽어 나왔다? 그레이엄의 목숨이 단숨에 날아갈 일이었다. 사실 테이버보다는 그레이엄이 더 초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엑스타인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보다 더 불쾌한 듯도 하고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듯도 한 오묘한 표정으로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뒤에 서 있었다.

베도야가 테이버를 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엑스타인을 돌아보았다. 심상한 얼굴이다.

“원수, 그럼 다음에 뵙죠.”

“……아.”

노예 키아란은 수백 번 엑스타인과 혀를 섞었다. 개인인 키아란 베도야는 엑스타인에게 가벼운 모닝 키스를 몇 번 해주었었다. 그러나 오늘 엑스타인에게 입을 맞춘 건 베도야였다. 헤레라의 상징. 헤레라의 국가 신용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수상 베도야. 가장 베도야다운, 싫어하면서도 결코 눈길을 뗄 수 없었던 그 남자가 엑스타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수상에게 애인이 있다면 이렇게 입을 맞췄으리라 싶은 그런 키스였다. 머리가 멍했다. 베도야가 정말 자신을 연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원수?”

베도야가 다시 불렀다. 정신을 차리자 베도야의 푸른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늘한 눈이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다음에.”

엑스타인이 겨우 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베도야가 망설이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테이버가 엑스타인을 흘끔거리고선 베도야의 뒤에 따라붙었다.

엑스타인은 멍하니 베도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애인이 되자고 했지만 달라지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저 매번 ‘이번 만남이 마지막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단발성 유희가 아니라는 약속만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하지만 베도야는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을 쪼개서 만나러 오고, 헤어질 때 입을 맞춘다. 이제는 주인과 노예 따위의 플레이가 아니라며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은밀한 다정함을 품고 있다. 너무 달콤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각하, 무슨 일이셨습니까?”

그레이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엑스타인이 베도야가 사라진 곳을 보며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비밀이다.”

그레이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어이없어하는 그레이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엑스타인은 못 박힌 듯 거기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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