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캔들 (13/15)

베도야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셨다. 케번 우드에 오는 유일한 신문을 뒤적이는 그의 앞에서 엑스타인은 문틀에 매달려 운동을 하고 있었다. 베도야가 흘끗 시선을 주었다. 멀쩡한 기구들이 늘어져 있는 체력 단련실을 두고 엑스타인은 늘 저 문틀에 매달려 운동을 했다. 팔로 매달린 채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리길 반복하더니 이제는 거꾸로 매달려서 상체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체력 단련실에 가라고 했지만 이제는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두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본인이 저 문틀이 좋다는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신문을 넘기자 땀 냄새를 풍기며 엑스타인이 다가왔다. 씻자.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에서 사내다운 매력이 넘쳐흘렀다. 평소의 그 냉랭한 얼굴이 사라지자 꽤나 호남형이었다. 베도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엑스타인은 베도야가 반항한다며 다리와 팔을 연결해 묶었다. 평소처럼 엉덩이를 때리며 피스톤질을 했고, 깨끗하게 하라며 입에 성기를 억지로 넣기도 했다. 물론 베도야는 그런 섹스를 좋아했다. 엑스타인이 성기를 입에 강제로 넣으면 침을 흘리며 그 성기를 빨다가 다시 발기할 정도로 좋아했다. 엑스타인의 성기를 애무하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온몸엔 엑스타인의 흔적이 가득했다. 여자의 것도 아닌데 도톰해진 유두, 개조해서 약간만 흥분해도 물이 나오는 항문, 아무리 문질러도 스스로는 사정할 수 없는 성기, 전염병 환자처럼 키스 마크가 새겨진 육체, 오래도록 매를 맞아 민감한 엉덩이와 가슴…….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섹스에 길들어 있었으니 상관없지만, 때로 베도야는 생각했다.

엑스타인은 다른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안았을까?

엑스타인은 자신과 어울리느라 이런 섹스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베도야가 보기에 엑스타인은 타고난 사디스트였다. 그 증거로 본인이 종종 ‘오늘 밤은 다정하게 안아도 될까?’라고 물었지만 한 번도 다정하게 안지는 않았다는 걸 들 수 있다. 엑스타인 본인이 다정하게 안아야겠다고 결심하고 행위를 시작해도, 곧 강압적인 것으로 변해가곤 했다. 보기와는 달리 베도야는 꽤 단련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신도 울면서 빌 정도로 거친 섹스를 하는 엑스타인을, 어떤 여자가 상대할 수 있었을까.

엑스타인이 몸을 씻는 사이에 먼저 씻고 욕조에 들어간 베도야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빠졌다. 질투가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 궁금했다. 정말 엑스타인은 사디스트가 아니라 자신을 능욕하기 위해 어울리다 보니 이런 성 취향이 된 것일까? 아니면 예전에도 사디스트였을까?

엑스타인이 욕조로 들어왔다. 베도야의 건너편에 앉아서 흘끗 베도야를 바라보았다. 욕조라고는 해도 거의 욕탕에 가까울 정도로 커서 비좁기는커녕 베도야와 발끝도 겹치지 않을 정도로 큰 욕조였다. 그 건너편에서 베도야가 나른한 얼굴로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

“아니.”

베도야의 말에 엑스타인이 흠 하고 신음했다. 그는 가는 눈으로 베도야의 몸을 훑었다. 그 몸에 찍힌 자국들을 볼 때마다 어젯밤 일이 선명해졌다. 뒤에서 베도야를 끌어안고 허릿짓을 했던 일, 베도야의 몸을 묶었던 일, 베도야에게 자신의 위로 올라타고 스스로 삽입하게 했던 일. 베도야가 목을 젖혔을 때 그 목을 깨물려다 참고 가슴을 물어뜯었던 일까지 모든 게 떠올랐다. 그러자 다리 사이가 묵직해졌다.

뭔가가 다가온 느낌에 베도야가 눈을 뜨자 엑스타인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검붉은 성기가 거대하게 일어서 있었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앞에서 느릿하게 용두질을 치며 말했다.

“물이 더러워질까 봐.”

베도야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눈이 젖어가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성기를 보면 눈가를 적시는 베도야가 흘끗 엑스타인을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엑스타인의 성기를 물었다.

베도야의 오럴은 봉사라는 느낌이 아니다. 베도야는 엑스타인을 애무하면서 또한 스스로도 즐기고 있다. 엑스타인의 성기로 입안의 성감대를 문지르며 헐떡거리는 그 모습은 세상 어떤 창녀도 보여주기 어려운 치태다. 결국 사정하자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정액을 부드럽게 삼키고 그 성기를 핥았다. 정액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헐떡이는 오럴 섹스 뒤에 베도야가 다시 뒤로 물러나 몸을 기댔다. 엑스타인은 흘끗 건너편을 보았지만, 잠시 망설이다 베도야의 옆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옆에 난 창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엑스타인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물속에 있는 베도야의 손을 붙잡았다. 베도야의 눈 감은 얼굴이 흠칫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손을 잡아주었다. 물속에서 손을 마주 잡고 엑스타인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일요일 오전, 케번 우드의 욕실에서는 물소리와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 ◈ ◈

핀레이 엑스타인은 올해 131세가 되었다.

전쟁 중에 승승장구하던 젊은 영웅은 이제 군부의 신이 되었다. 냉혹하고 무도한 성미지만 의외로 스캔들은 없었다. 여자와 시간을 보내는 일도 없이 휴일에는 근교의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전부라는 엑스타인은 상류층이 탐내는 신랑감이었다. 아직 미혼인 만큼 재산 분배나 후계자에 대해서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엑스타인 원수, 결혼 초읽기」

베도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흘 전 일요일에도 자신과 같이 케번 우드에 있었던 엑스타인이 무슨 결혼을 한단 말인가. 베도야가 기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옆에 있던 테이버가 무슨 기사인지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헛소문 같습니다. 좀 알아봤는데 원수와 그 여자는 아예 아는 사이도 아니더군요. 아무래도 여자의 부친인 드레이크가 자신을 알리기 위해 한 짓이 아닌가 싶습니다.”

“드레이크?”

“하원 의원인데 초선 의원이고 딱히 눈에 띄는 점은 없습니다.”

초선 의원이라서 그런지 낯선 이름이었다. 베도야는 흘끗 시선을 내렸다. 사진 속의 여자와 엑스타인은 잘 어울렸다. 엑스타인은 특유의 무표정이었지만 여자는 엑스타인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원수가 결혼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란 말씀입니까?”

엑스타인이 결혼을 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로 테이버가 물었다.

상관과 엑스타인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의심이 종종 들고는 했다. 엑스타인이 위기에 빠졌을 때 베도야는 마피아를 움직여 엑스타인을 구했다. 둘은 가끔씩 밀실에서 밀담을 나누었는데 그게 어떤 내용인지는 둘의 보좌 누구도 알지 못했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을 후원하고 있는 것일까?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그러기에는 베도야를(비롯한 문신 전부를) 경멸하는 엑스타인의 태도가 너무 두드러졌다.

테이버의 의심에 찬 시선을 받으며 베도야가 말했다.

“난 문신인 국회의원이 무신의 수장과 사돈을 맺으려 하는데 무슨 의도인지 알아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베도야의 말에 그제야 테이버가 아 하고 중얼거렸다.

“아둔하게 굴지 마라, 테이버.”

베도야의 경고에 테이버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테이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베도야는 엑스타인의 옆에 선 청초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145세. 의외로 엑스타인보다 연상이었다. 외모는 고작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부모가 꽤나 자산가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엄청난 돈이 드는 육체 교환을 저렇게 어린 나이에 해줬을 리가 없다.

결혼설이라.

엑스타인이 결혼을 진행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제멋대로인 남자가 한쪽으로 결혼을 진행하면서 다른 한쪽으로 사랑에 빠진 척하는 게 가능했을 리가 없다. 그런 음험한 짓은 성격상 못 할 인물이었다. 음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성질머리로는 그런 음험한 짓을 할 만한 인내심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원수로서의 직무에 임할 때에는 엑스타인의 행보도 구렁이가 따로 없었지만, 개인으로서의 엑스타인은 인내심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애송이였다.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엑스타인이 일에 있어 능구렁이라면 베도야는 하와에게 사과를 먹인 뱀보다 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베도야 자신도 엑스타인과 있을 때에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늘 입을 다물었다. 섹스를 할 때에는 미친 것처럼 빠졌다가 섹스가 끝나면 언제나 조용해졌다. 언제나 둘은 조용히 있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한 공간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결국 베도야도 마찬가지였다. 공인으로서의 능력을 개인으로서 발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베도야가 신문을 넘겼다. 다른 기사를 보려는 것처럼.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엑스타인의 기사로 꽉 차 있었다.

그 여자가 엑스타인의 약혼녀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엑스타인이 전도유망한 미혼남이라는 사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물론 헤레라에서 가장 강력한 미혼남이라면 베도야 본인이다. 그러나 베도야에게는 누구도 결혼을 운운하지 않는다. 베도야는 이미 결혼 경력이 있고, 전처에게 얼마나 차가웠는지도 이미 다들 알고 있다. 물론 이혼할 당시 베도야는 법적인 절차대로 위자료를 지불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이혼하려는 아내에게 법에서 선고한 만큼의 위자료를 지불한 베도야는 그 이후 다시는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받아낸 배우자가 사기를 당하고 도박에 빠지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그 자식이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베도야는 그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베도야는 단 한 번의 결혼 이후 결혼에 흥미가 없다는 뜻을 공고히 해왔고 그의 행동 자체도 가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베도야에게 결혼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엑스타인은 사정이 다르다. 그는 베도야와는 달리 결혼 경력이 없는 미혼남이다. 정계에서는 제법 어린 축에 들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 최근에는 여성과의 스캔들도 없고, 몇 년 전에 비하면 입지도 나름대로 탄탄해졌다. 엑스타인의 유일한 단점은 배경이 전무하다는 것. 배경만 근사하고 별 볼일 없는 가문들이 몹시 탐을 내고 있을 것이다. 정략결혼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바로 이런 커플의 결합이다. 배경이 없는 유능한 자와 무능하지만 배경이 있는 자.

베도야는 기계적으로 신문을 한 장 넘겼다. 눈으로 훑으면서 머릿속으로 다시 생각에 빠졌다.

엑스타인이 결혼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면 이 일을 염두에 둘 가치가 없다. 머리로는 아는데 계속 관심이 갔다. 새삼 자신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어 베도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픽.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왜 웃으시지?

테이버가 눈을 두꺼비처럼 끔뻑거렸다.

뭘 보면서 웃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테이버는 조심스럽게 베도야가 보고 있던 신문을 확인했다. 황궁, 수상을 겨냥하다. 도발적인 제목이지만 늘 있는 헛소리다. 베도야가 왜 갑자기 웃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요즘 정말 이상하시다니까.

테이버는 한숨처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베도야가 이렇게 역전 노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때 엑스타인은 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은 만난 적도 없는 여자가 자신의 앞에서 청순한 척 웃고 있었다. 합성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합성을 버젓이 일간지에 실어? 이것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들을 했나? 엑스타인은 눈이 뜨거워질 정도로 화가 나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각하, 별거 아닙니다. 고정하십시오.”

그레이엄이 엑스타인을 달래려고 했지만 엑스타인의 턱에서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나고 말았다.

“드레이크? 뭐 하는 놈이지?”

“하원 의원입니다. 재벌가 출신이고 본인도 재산이 대단합니다.”

“재산이 있으면 내 이름을 팔아먹어도 된다?”

아니요,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그레이엄은 한숨을 꾹 삼키며 엑스타인이 집어던진 신문에 시선을 주었다. 돈이 있으면 거의 다 되는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뇌가 터지면 별수 없이 죽을 수밖에. 아무래도 드레이크 의원은 엑스타인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이 정도는 곤란하신 수준도 아니잖습니까.”

그레이엄이 아닌 다른 보좌관이 말했다. 엑스타인이 흘끗 시선을 돌리자 그가 움찔하면서도 말을 계속 이었다.

“아마 밑밥 좀 까는 거겠죠. 곧 혼담이 정식으로 들어올 겁니다. 각하께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유일한 약점인 배경을 보완하게 되실 거고, 또 지금 미혼이시고, 딱히 만나시는 분도 안 계신데 혼담 정도는…….”

“있어.”

“예?”

“만나는 사람 있다고.”

……왜 저희는 몰랐을까요?

상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하는 보좌관들이 일제히 얼굴을 굳혔을 때 엑스타인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입맛이 썼다. 베도야도 분명 저 기사를 보았을 텐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기사로 불쾌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저 기사를 보고도 아무 감정이 안 드는 건 또 원치 않는다. 그 고고한 얼굴로 눈길 한 번 휙 주고 넘겨버렸을 거라고 생각하면 울컥한다.

이게 다 이 분수 모르는 자식 때문이야. 드레이크? 문신 놈이 왜 나한테 딸을 보내겠다고 이 지랄이야?

“이번 주에 무슨 스케줄이 있지?”

“예?”

“스케줄. 말해보라고.”

평소에는 전혀 관심 없어하는 스케줄을 왜 갑자기 알고 싶어하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레이엄은 스케줄을 읊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만.”

엑스타인이 말을 끊자 그레이엄이 더듬거리며 중요 스케줄만 읽는다. 엑스타인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주말에 베도야를 만날 수 있을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엑스타인 자신도 바빴고 베도야는 더 바빴다. 종종 주말에도 예정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만남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주말이 아니면 스쳐 지나가듯 만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마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모르는 여자고 결혼할 생각도 전혀 없다고, 한마디만이라도.

그래도 꽤 귀여운 남자니까 속상해할지도…….

엑스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애인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깜찍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일에 속상해할 인물은 못 되었다. 도리어 속상한 쪽은 자신이었다. 사귀는 데 4년이나 걸린 귀한 애인과의 관계에 손톱만 한 장애물도 남기고 싶지 않은데 일간지에 실릴 정도로 큰 스캔들이 터지다니. 분통이 터졌다.

심지어 이번 주 스케줄에서는 베도야를 만날 틈이 없어 보였다. 황궁, 국회 의사당, 장관 회의 등의 예정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평소에도 자주 만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

찾아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자주 만나서 좋을 건 없었다. 엑스타인이 혀를 찼을 때였다. 채널로 보고를 받았는지 그레이엄이 엑스타인을 바라보았다.

“드레이크 의원의 전화입니다.”

엑스타인의 잿빛 눈이 싸늘하게 빛나는 걸 보며 그레이엄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거절할까요?”

엑스타인이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수 엑스타인, 결혼 초읽기.

한 번도 결혼 같은 걸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결혼하자던 상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 여자였지만 남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엑스타인은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결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문득 엑스타인은 자신 쪽에서 애달아 사귄 첫 상대, 베도야를 떠올렸다. 베도야와의 결혼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상상이 안 갔다. 둘 다 결혼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렇게 생각하며 엑스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베도야와도 상상이 안 가는 결혼을 얼굴도 한 번 못 본 여자와 할 리가 있는가.

엑스타인이 손을 내젓는 걸 보고 그레이엄이 채널로 연결된 직원에게 거절하라고 지시했다. 다행이었다. 엑스타인이 괜히 저 전화를 받겠다고 말하면 그때부터는 또 얼마나 가슴을 졸여야 했을까. 분명 엑스타인은 전화에 대고 고운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원 의원에게 괜한 원한을 살 필요는 없다. 비록 그 하원 의원이 엑스타인을 이용해먹었다 해도.

이왕이면 결혼을 해도 괜찮을 텐데. 결혼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몇 년 살다가 보기 좋게 헤어지면 서로서로 좋은 거 아니겠는가. 아까운 기회를 놓치게 생겼다고 그레이엄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엑스타인의 면전에 대고 말할 용기는 당연히 없었다.

『아쉽네.』

다른 보좌관이 채널을 연결해왔다.

『그러게.』

『한 번 더 말씀드려볼까? 혹시나…….』

『아서. 괜한 불똥 맞지 마.』

잠시 말이 없던 보좌관이 다시 말을 걸었다.

『애인을 챙길 정도로 살뜰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원망조인 걸 보니 빈약한 배경을 강력하게 만들 기회가 어지간히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 마음은 마찬가지인 그레이엄이 엑스타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한 번 엑스타인에게 거절당한 드레이크가 이대로 마음을 접었더라면,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비위가 좀 상한 상태로 이 일은 마무리되었을 텐데, 야심만만한 초선 의원 드레이크는 그렇게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엑스타인의 보좌관 그레이엄은 자신이 드레이크라는 남자를 얕보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 드레이크입니다.”

스캔들이 수그러들기 직전 본인이 자기소개를 하며 나타났다. 벌 떼처럼 모여든 기자들이 수만 방의 플래시를 터트렸고, 엑스타인은 차가운 눈으로 드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베도야보다 훨씬 작은 드레이크가 배짱 좋게 웃고 있었다.

엑스타인은 그를 지나쳤다. 그레이엄이 『각하, 기자들 앞입니다』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기자들 앞이라면 더욱 싫었다. 이 문신 놈과 악수를 하면 그 사진이 또 일간지에 실릴 테니까.

“차가운 분이시죠?”

드레이크가 유들유들한 태도로 기자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꼴 보기 싫었다. 엑스타인이 얼음 같은 얼굴로 홀 안에 들어섰다.

부마가 주최하는 파티였다. 최근 황녀와 결혼한 남자는 작위는 보잘것없었지만 엄청난 자산가였다. 이제 부마가 됨으로써 작위도 손에 넣은 남자의 생일 파티. 부마가 되고 나서 그 영향력을 보여주는 첫 번째 행사인지라 황제의 은밀한 요청으로 몇몇 권력자들이 참석했다. 그 요청을 받은 사람 중에는 엑스타인도 있었고, 베도야도 있었다.

『드레이크가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보좌관들이 일제히 그레이엄에게 채널을 연결했다. 그레이엄은 채널을 두 개까지밖에 연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두 명하고만 연결되었다.

『재계 인사로서 온 모양인데.』

『각하께서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으시겠지?』

『설마.』

엑스타인이 아무리 난폭한 성격이라고 해도 공인이다. 실제로 공중의 면전에서 난폭한 행동을 한 적은 드물었다. 난폭한 데에 비해 성격이 다혈질이라기보다는 냉혈 쪽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보좌관들의 걱정을 뒤로한 채 홀에 들어선 엑스타인이 흘끗 고개를 돌렸다.

엑스타인은 종종 황제의 요청을 거절해왔다. 황족들의 사사로운 행사에 신료들을 동원하는 건 꼴사나운 짓이라고 일갈한 적도 있었다. 그런 엑스타인이 이 행사에 얌전히 참석한 건 예상외의 일이었고, 사람들은 엑스타인이 미래에 장인이 될 드레이크와 함께 기반 다지기를 위해 나오는 것이라고 수군거렸었다. 그런데 그가 정작 드레이크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홀로 들어가자 다들 당혹한 티가 역력했다.

어디 있지?

엑스타인은 홀 안을 둘러보았다. 눈에 워낙 띄는 인물이니 찾기 어렵지 않을 텐데 보이지 않는다. 아직 안 왔군.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허탈해진 엑스타인이 웨이터의 쟁반에서 잔을 하나 집어 들었다.

베도야와 또 시간이 맞지 않아서 벌써 한 달째 못 만나고 있었다.

케번 우드에 가서 멍하니 베도야를 기다리다 자고 왔다. 2주 내내 오지 않는 베도야를 기다리며 다녀갔다는 메모를 남겨두었는데 딱 한 주 못 갔다가 그다음 주에 갔더니 베도야의 메모가 남아 있었다. 미안, 나는 다음 주에 못 와. 푹 쉬도록 해. 하지만 엑스타인은 케번 우드에 머물러 있었다. 못 온다고 했으니 베도야가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적막만이 가득한 별장에서 주말을 보냈다.

엑스타인은 종종 케번 우드의 별장이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베도야와 함께 있을 때에는 그곳이 우울한 곳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섹스를 할 때에는 물론이고 섹스를 한 다음 날 아침에도 그곳은 부드러운 소리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아무 말이 없어도. 그러나 베도야가 없을 때의 케번 우드는 버려진 오두막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감도는 고급 별장에서 엑스타인은 움직일 기력을 잃을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더는 안 되겠어.

그 주, 엑스타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베도야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시작하며 조울증에 빠져 허덕거리는 놈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그렇게 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이런 파티까지 쫓아온 것이다. 베도야를 만나기 위해서.

그런데 정작 만나고 싶은 베도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보이는 거라고는.

“각하, 인사라도 좀 받아주십시오. 이리 차가우셔서야.”

겁을 상실한 파리 한 마리뿐이었다.

드레이크는 엑스타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가 움찔 굳었지만 안 그런 척 웃음을 터뜨렸다. 엑스타인을 한참 올려다본 그가 한숨을 삼켰다. 실제로 보는 엑스타인은 생각보다 더 장신이었고 더 위협적이었다. 말을 거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지만 드레이크는 특유의 넉살을 발휘했다.

“제이슨 드레이크입니다.”

드레이크는 올해 185세였으니 엑스타인보다 상당한 연상이었다. 아무리 육체 교환이 이루어지는 세계라 할지라도 결국 연상은 연하에게 권위를 세우고 싶어하고 드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올해로 185세가 되었습니다.”

드레이크는 재벌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육체 교환을 이룬 뒤였다. 그 이후에는 내내 스무 살의 얼굴이었다. 엑스타인의 경우에는 서른이 넘어 나라의 돈으로 육체를 교환했기 때문에 액면가로는 엑스타인 쪽이 좀 더 위였다.

드레이크가 내민 손을 엑스타인이 온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이를 알게 되면 연장자로서 상대를 예우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매너였고, 그런 예우는 하면 좋고 안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엑스타인은 당연히 안 하는 쪽이었다. 185세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자기 나이의 두 배가 넘는 베도야를 협박해서 반강간을 일삼았던 엑스타인에게 나이 운운은 불쾌감을 더욱 증폭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의원님과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것은 싫으니까 말입니다.”

엑스타인이 꺼지라는 말을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언어로 바꿔 전했다.

“오해가 아니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난 교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해는 풀릴 수 없습니다.”

“이런, 각하.”

드레이크가 웃었다.

“상류 사회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으셨군요.”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드레이크는 엑스타인의 기분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상류 사회에서 기혼자에게 애인이 있는 건 흠이 아니며 흔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이 엑스타인을 모욕했다는 걸 아예 인식도 하지 못했다.

엑스타인이 희미한 냉소를 지었다. 드레이크와 마주친 뒤 처음으로 짓는 웃음이었지만 등골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 드레이크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뒤로 물러섰을 때 엑스타인은 드레이크의 사지를 부러뜨릴까 생각하고 있었다. 베도야가 ‘커피 뭐 마실래?’라고 물을 때마다 무슨 커피라고 말할까 고민할 때만큼이나 진지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엑스타인은 결론을 내리고 바로 행동에 옮겼겠지만, 드레이크에게는 행운의 수호천사가 존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호천사의 정체는 베도야였다. 베도야가 홀에 도착한 것이다.

“각하!”

물론 엑스타인이 왔을 때에도 부마는 꽤나 반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고 와줘서 고맙다는 립 서비스를 잊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부마는 홀의 끝에서 입구까지 전력 경보를 해서는 베도야의 손을 잡았다. 신도가 교주의 손을 잡아도 저보다 반갑고 기쁘게 잡지는 못할 듯했다.

“대공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달 만에 보는 베도야는 여전했다. 늘씬하고 단정했다. 엑스타인은 입술을 비죽 올렸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거 완전히 냉기가 풀풀 날리는걸.

드레이크가 흘끗 엑스타인을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엑스타인의 시원스러운 입매가 뒤틀린 미소를 짓는 게 영 불안했다. 문신과 무신의 사이는 늘 좋지 않았지만 특히 수상과 원수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가뜩이나 자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엑스타인이 사고라도 칠까 봐 드레이크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슬슬 엑스타인의 옆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부마와 베도야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부마의 소개에 몇 사람과 베도야가 또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나누는 사람마다 감격에 찬 얼굴들이다. 사슴을 노리는 늑대 떼처럼,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베도야에게 인사를 건넬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슴은 무슨. 엑스타인은 자신이 베도야에게 댄 비유가 우스워 피식 웃었다. 저기에 있는 건 사자다. 배가 부르면 느긋하게 누워 있지만 언제든지 날카로운 이로 누군가를 물어 죽일 수 있는 육식 동물.

사생활 채널로 연결 요청이 들어왔다. 엑스타인은 채널을 열었다.

【잠깐 볼 수 있을까?】

【난 볼 수 있지만 너는 무리 아닌가?】

베도야가 멀리서 엑스타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인영 사이로 베도야와 시선이 마주쳤다. 푸른 눈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하지만 순간뿐이었다. 베도야는 바로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향했다.

【알아서 할게.】

난폭한 냉혈한으로 소문난 엑스타인은 베도야에 비해 인기가 없었다. 그를 잘 조련해 정계에서 이름을 떨치려는 가당찮은 야심가조차도 뒷걸음질을 치자, 더 이상은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엑스타인은 편하게 약속 장소로 움직일 수 있었다.

엑스타인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흘끗 그레이엄을 보자 그는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엑스타인은 자연스럽게 그레이엄의 뒤를 스쳐 홀을 나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복도로 나오자 조금씩 걸음이 더 빨라졌다. 복도에서 정원의 회랑으로 나오자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다.

값비싼 차들 사이에 베도야가 세워둔 차가 있었다. 엑스타인은 그 차를 타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베도야와의 약속 장소는 저택 옆에 있는 고속도로를 10분쯤 달리면 나오는 장소였다. 고속도로 옆 숲 속에 있는 작은 호숫가였는데, 거기까지 도착하자 갑자기 입술이 마르는 듯했다.

보고 싶었다. 그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실 할 이야기 따위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저 그 옆에 있고 싶었다. 베도야와 마주치기 전까지, 엑스타인은 꽤나 건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정욕이 끓어올랐다. 곤란할 정도로. 차를 탈 때쯤에는 다리 사이가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렸다.

“엑스타인.”

운전석에서 내리는 베도야가 생소했다.

엑스타인이 차에 기댄 채 가만히 서 있자 베도야가 곧 다가왔다. 홀에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단정한 얼굴이었다. 만나서 반갑다는 기색 따위는 일절 없는 고고한 얼굴에 엑스타인의 심사가 뒤틀렸다.

베도야의 표정은 한 달이나 만나지 못한 애인을 드디어 만나게 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사이 그 애인은 결혼설까지 돌았는데도, 베도야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국회 의사당에서 보는 베도야와 어두운 숲 속에서 전조등만 켜고 만나는 베도야의 얼굴이 똑같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오랜만이야, 레이.”

등이라고는 두 대의 자동차의 전조등뿐이었다.

기분이 상한 채로 베도야에게 못된 소리나 하려던 엑스타인은 가까이에서 본 베도야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베도야는 평소와 똑같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뺨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엑스타인이 손을 뻗어 베도야의 뺨을 감쌌다.

“키아란, 해골이 됐잖아.”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수상이 식사도 못 할 정도로 일에 시달리는 거야?”

“바쁘긴 해.”

“이런 식으로 건강을 해치면 나중에 육체를 교환할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제대로 몸을 단련하도록 해.”

육체를 일곱 번이나 바꾼 자신에게 엑스타인이 진지한 얼굴로 잔소리를 하고 있다. 그게 우스웠지만 베도야는 웃지 않았다. 그는 난폭한 연하 애인의 비위를 건드리는 대신 눈을 내리깔고 그 손길을 음미했다.

엑스타인의 손길이 부드러운 것에서 천천히 다른 것으로 변해갔다.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던 손가락이 턱을 쓸고 목으로 내려갔다. 셔츠 위로 내려간 손가락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 가슴을 더듬었다.

“섰군.”

도톰하게 올라온 가슴을 보고 엑스타인이 웃었다. 베도야가 눈을 감았다. 익숙한 쾌감이 심장을 간질인다.

엑스타인의 손이 베도야의 턱을 잡았다. 베도야가 당연한 듯 입을 벌렸고, 엑스타인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겹쳤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키스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농후하게 시작된 키스가 게걸스럽게 변해갔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혀를 깨물었다. 아프지 않았다. 엑스타인이 덜 아프게 깨문 건지, 벌써 아편보다 더 강한 쾌감이 도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엑스타인의 손이 유두를 짓눌렀다. 흑. 베도야가 작게 신음했다.

“한 달이나 못 만났으니 발정할 때가 됐지.”

엑스타인이 비웃듯 말했다.

“……발정하지 않…….”

베도야가 헐떡이며 부정했다. 실제로 엑스타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발정할 틈도 없었다. 잠을 자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으니까. 요즘처럼 평안한 때가 아니면 진행할 수 없는 몇 가지의 은밀한 계획을 동시 진행하는 바람에 평소보다 더 바빠졌다. 그래서 성욕도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엑스타인의 손이 닿는 순간 쾌감이 손끝까지 퍼졌다.

“젖은 눈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까지 불러내놓고 발정하지 않았다?”

“정말, 아니, ……아!”

엑스타인의 손이 베도야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머리에 피가 몰렸다. 아니, 온몸의 피가 사타구니로 몰려가고 있었다. 엉덩이 안쪽이 뜨겁고 가려웠다. 움찔거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참아지지가 않았다.

엑스타인이 베도야를 보닛에 엎드리게 했다. 바지를 벗기자 베도야의 등이 매라도 맞은 듯 움찔거렸다.

“때려줄까?”

엑스타인의 제안에 베도야가 헐떡였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맞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졌다. 특히 엑스타인이 만지작거린 유두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결국 참지 못하고 베도야는 보닛에 유두를 누르기 시작했다. 엑스타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금씩 누르자 간지러움이 조금 사라졌다가 더 강해졌다. 허리가 벌벌 떨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베도야는 어느새 보닛에 유두를 밀어붙이다시피 하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스스로 유두를 보닛에 문지르며 헐떡이는 베도야의 치태는 대단했다. 이미 단단해진 성기가 아플 정도였다. 엑스타인이 지퍼를 열어 성기를 꺼내고는 베도야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벌렸다.

“빌어먹을.”

엑스타인이 중얼거렸다.

베도야의 항문은 너무 작아서 아무리 봐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개조 덕에 그 항문은 번질거리고 질척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관장을 하고 한참을 괴롭혀도 처음 삼킬 때에는 괴로워하는데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하는 게 가능할까. 엑스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빨리면 바로 쌀 거 같은데.”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다. 읏……! 엑스타인의 몸 아래에서 베도야가 바르작거렸다.

“빨게 해주고 싶지만 나도 여유가 없어서 말이야.”

엑스타인의 마른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가락 끝이 가볍게 입구를 눌렀다. 몇 번이나 누르자 항문이 더 젖어왔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귀와 뺨과 목을 마구잡이로 깨물었다. 베도야가 이를 악물었다. 엑스타인의 ‘빨게 해준다’는 말에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더욱 몸이 달아올라 조금만 잘못해도 한밤중의 숲에서 교성을 질러댈 것 같았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는 동안 베도야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보닛에 달라붙어서 엉덩이를 내민 채 유두를 보닛에 비비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리고 그 한심한 자신의 치태가 너무 좋았다. 엑스타인의 손가락이 네 개가 되었을 때 베도야가 몸을 들었다. 더는 몸이 달아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넣어, 넣어줘.”

엑스타인이 키들거렸다.

“손으로 문질러서 하면 되잖아? 응?”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문질러서는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엑스타인은 심술궂게 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손을 잡아 기어코 스스로 문지르게 만들었다. 빠르게 문지를수록 더 숨이 가빠졌다. 성기의 구멍이 뻐끔거리는 착각마저 드는데도 사정이 되지 않자 베도야가 숨이 넘어갈 것 같이 하악, 하악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겨우 네 개군.”

“레, 이……. 나, 이제, 정말, 안…….”

“그럼 네 구멍을 탓해. 한 달이나 굶겼는데도 제대로 못 먹는 구멍 말이야.”

엑스타인이 사나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다. 엑스타인이 그렇게 말하며 베도야의 항문에서 손가락을 빼고 엉덩이를 벌렸다. 뻐끔거리는 입구가 아까보다는 좀 더 벌려져 있었다. 검은 동공을 보고 엑스타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베도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엑스타인이 단숨에 치고 들어왔다. 그의 성기로 심장까지 찔리는 듯했다. 베도야가 보닛에 손톱을 세웠다. 끼이익. 귀를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밑으로 미끄러졌다.

“아파……!”

베도야가 등 뒤로 한 손을 허우적거렸다. 엑스타인이 그 손을 잡아 보닛 위로 짓눌렀다. 아파, 아파. 베도야가 이마를 보닛에 대고 문질렀다. 아파서 참을 수가 없어하는 베도야의 목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다정한 키스를 받으며 숨을 헐떡이던 베도야가 허리를 휘었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가뜩이나 괴로운 내부가 엉덩이를 맞으며 더욱 흔들렸다. 아프다고 도망치려고 해도 보닛에 엎드려 있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베도야의 울음이 점차 달뜨는 것을 느끼는 순간 엑스타인은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엉덩이를 때리며 사납게 박아 올렸다.

“뜨거워. 키아란, 어서, 힘을, 빼, 어서……!”

매를 맞으며 겨우 힘을 뺐다. 그 순간 엑스타인의 것이 쑥 들어왔다. 끝까지 들어오지 못했던 것이 내부 끝까지 찌르는 순간 베도야의 눈앞이 일그러졌다.

절정은 죽음처럼 새카맸다.

읏. 엑스타인이 등 뒤에서 신음하는 것을 들으며 베도야는 사정과 함께 엑스타인의 것을 조였고, 안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들어왔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손톱을 세웠다. 그 고통이 달큼하기만 했다. 아아, 드디어 고통이 쾌락으로 변했는데. 하지만 더는 할 수 없었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목을 깨물었다. 안 돼, 라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더 안쪽으로, 끝의 끝까지 찌르며 정액을 쏟아 넣었다. 온몸의 나사가 풀리는 듯한 배설의 쾌락에 눈을 감았다. 단둘이서 추락하고 있었다. 발끝을 괴롭히는 낙하감이 영원히 계속될 듯했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의 엉덩이에서 정액을 긁어내고 그의 속옷에 손수건을 대주었다.

“기저귀를 차고 고고한 얼굴을 할 널 생각하니 다시 설 거 같은걸.”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넌 기저귀를 상시 휴대하며 손을 닦는 모양이지.”

베도야의 말에 엑스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음부터는 그러려고.”

베도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는 건지, 관두자는 건지. 아마 후자일 것이다. 엑스타인이 손을 뻗어 베도야의 옷을 대충 입혀주며 입을 열었다.

“나와 단둘이 되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번에는 파티 중간에 나온 거니까.”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이다.

엑스타인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럴 줄을 몰라? 이제껏 만나서 안 한 적이 있긴 했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도야의 저 무심하고 고고한 성격이 어지간히 비위를 건드려서, 엑스타인은 한 번 더 할까 싶었다. 앉지도 못할 정도로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엑스타인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베도야를 바라보았다. 차의 뒷문을 연 채, 좌석에 모로 기대앉고 다리를 차 밖으로 빼고 있던 베도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이슨 드레이크와 어떤 사이지?”

엑스타인의 잿빛 눈이 조금 커졌다.

베도야는 그런 엑스타인의 얼굴을 가느다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얼굴인데도 종종 그 표정은 흔들리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베도야는 기분이 좋아졌다. 저 잔혹한 남자가 자신에게만은 마음이 흔들려 가누지 못하고 있다.

“제이슨 드레이크?”

누구를 말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가끔 정말 연하답다니까. 베도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엑스타인이 당혹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야.”

“잘 대답하는 게 좋아, 레이.”

친한 사이라면 지금의 대답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 베도야가 경고했다. 그러자 엑스타인이 얼굴을 구겼다.

“오늘 처음 만났고, 관심 없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

엑스타인의 얼굴에서 이미 대답을 읽었으면서도 베도야는 굳이 대답을 받아냈다. 그래. 베도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자 엑스타인이 손을 내밀었다. 아까 뒷좌석에 가면서도 휘청거리던 베도야를 부축했었기 때문이다. 베도야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엑스타인의 팔을 밀어냈다.

“그래, 그거면 됐어.”

베도야가 운전석으로 걸어가는 것을 엑스타인은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 닫히는 운전석 문을 힘으로 막았다.

“그게 다야?”

베도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라고? 여기까지 나를 불러내서 묻고 싶었던 게 고작 그거란 말이야? 제이슨 드레이크와 무슨 사이냐고?”

베도야가 오지 않는 케번 우드의 별장에 홀로 남았을 때, 엑스타인은 몇 번이고 생각해보았었다. 베도야의 결혼설이 터지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알 수 없었다.

베도야와 그의 배우자가 될 누군가를 자신이 어떻게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기분이었다. 둘 다 죽일지도 모르고, 배우자가 될 누군가만 죽일지도 모르고, 베도야에게 같이 죽자고 할지도 모른다. 베도야를 납치해서 감금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베도야의 발밑에 꿇어앉아 그러지 말라고 빌지도 몰랐다. 엑스타인은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었다. 난생처음 좋아해본 남자의 결혼설에 자신이 얼마나 미칠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베도야는 멀쩡했다. 아무런 대미지도 없는 게 분명했다. 연상이라서가 아니었다. 인간의 수명이 아무리 늘어나도, 더 이상 인간이 노화로 죽지 않는 시대가 왔어도, 인간은 결국 똑같았다. 나이가 많든 적든 비열한 사람은 비열하고 잔인한 사람은 잔인했다. 베도야는 미치지 않을 게 뻔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식에 찾아와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 수도 있을 남자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울컥 화가 났다. 엑스타인은 베도야에게 자신의 이런 감정을 내뱉으며 화를 내는 대신 입을 다물고 무표정하게 노려보는 쪽을 택했다.

문을 잡은 채 베도야를 노려보고 있자 그가 난처한 얼굴로 엑스타인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어떤 일이 있었어.”

어떤 일인지는 말해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베도야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보기를 보일 생각이야. 하나나 둘 정도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데.”

“그런데?”

“그 일을 저지른 인간들 중에 드레이크가 있어.”

엑스타인의 시선이 탈 것처럼 뜨겁다. 베도야는 희미하게 웃었다.

“겸사겸사, 랄까.”

“드레이크를 본보기로 칠 생각이야?”

엑스타인의 말에 베도야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베도야에게 엑스타인이 웃어 보였다.

“키아란.”

“여기까지만.”

베도야가 고개를 저었다. 엑스타인이 차 문을 잡은 채 놓아주질 않아 어쩔 수 없이 베도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문득 베도야의 그림 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엉덩이에서 정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엑스타인이 기저귀라고 놀린 손수건에 스며드는 느낌이 선뜩했다.

“나와?”

엑스타인이 의아한 듯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야 돼. 늦었어.”

베도야가 문을 닫으려 했다. 엑스타인이 놓아주지 않는 문을 거세게 당겼고 갑작스러운 힘에 엑스타인이 뒤로 휘청거렸다. 눈앞에서 문이 닫히려 한 걸 엑스타인이 손을 집어넣어 막았다. 베도야는 아예 그 손을 부러뜨리려 한 것 같았지만 엑스타인은 교묘하게 손을 넣고 힘을 주어 기어코 다시 문을 열었다.

“엑스타인, 늦었다니까.”

베도야가 차갑게 말했다.

엑스타인이 두 팔로 차를 짚고서 몸을 들이밀었다. 베도야가 고개를 돌려 용건이 뭐냐고, 표정만으로 물었다.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약에 쓸 만큼도 없다니까. 엑스타인이 입술을 올렸다.

“너 때문에 또 선 거 같아.”

“엑스타인.”

“내 걸 찍찍 싸고 내 냄새를 풍기며 저 고루한 파티장을 돌아다니겠다고? 드레이크를 어떻게 족칠까 생각하면서?”

겸사겸사라고 말했는데도 마치 질투에 미친 자신이 드레이크를 치겠다는 것처럼 말하는 엑스타인에게 질린 베도야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두툼해진 사타구니에 문질렀다. 베도야가 고개를 떼려고 하고 엑스타인이 힘으로 막는 실랑이를 몇 번 한 끝에, 베도야가 고개를 들었다.

“가야 한다니까.”

“아까 빨고 싶었지?”

빨게 해주겠다고 하잖아. 응? 엑스타인이 은근히 베도야를 달랬다. 하늘을 보건대 아직 초저녁이었다. 300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여전히 베도야는 하늘의 시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엑스타인은 전쟁 영웅이었기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하늘의 색만으로 시간을 확인해야만 하는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베도야가 흘끗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엑스타인의 억센 손이 베도야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여기, 젖었다고.”

“…….”

엑스타인이 딱딱해진 살덩이를 꺼냈다. 베도야가 시선을 주자 피식 웃었다. 천천히 엑스타인이 스스로 용두질을 하자 베도야가 조금 더 바라보고 있다 결국 입술을 핥았다. 입술을 가득 적시고, 베도야가 엑스타인의 것을 물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엑스타인이 속삭였다.

“예쁘다.”

베도야가 눈을 감은 채 살짝 찡그렸다. 엑스타인의 손이 베도야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아플 정도로 강하게.

아까부터 빨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베도야가 강하게 빨기 시작했다. 흐읏, 흣. 목소리로 애달픈 신음을 내면서. 엑스타인이 베도야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예뻐. 한 번 더 그가 속삭였다.

엑스타인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다정한 목소리에 흉포한 짓거리. 고통과 쾌락만큼이나 극단적이다. 엑스타인은 봐주지 않는다. 베도야의 목구멍 끝까지 집어넣으려고 하고 중간에 구역질이 나도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난폭한 짓에 베도야는 흥분한다. 항문이 뻐끔거리고 내벽이 덜덜 떨렸다. 안쪽에 있던 정액이 또 흘러내리고, 베도야의 달아오른 뺨을 무의미한 눈물이 가로질렀다.

◈ ◈ ◈

『엑스타인과 협의했다. 드레이크와 시노단으로 결정한다.』

시노단은 유명한 국회의원이었고 일벌백계에 어울릴 상대였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본보기로 치기엔 약했다. 재계에서의 명성조차 드레이크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아직도 살아 있는 그의 아버지 것이었다. 재계를 경계함인가? 테이버는 의아해하면서도 『준비하겠습니다, 각하』라고 대답했다.

굳이 엑스타인에게 드레이크와의 결혼설에 대해 진위 여부를 확인할 정도로 눈에 거슬렸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테이버가 베도야를 흘끗거렸다.

어느새 돌아온 베도야는 다시 부마와 이야기 중이었다. 그 얼굴에는 예의 바른 미소가 아주 희미하게 배어 있을 뿐인데도 부마는 베도야가 열심히 맞장구라도 쳐준 것처럼 신이 나서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뒤로 유령처럼 나타난 엑스타인이 스쳐 지나가다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테이버를 똑바로 마주했다. 차가운 잿빛 눈이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테이버를 한 번 훑고 사라졌다.

베도야가 부마의 이야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다 고갯짓으로 구석을 가리켰고 부마가 반가운 얼굴로 베도야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구석에 있는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부마가 우아하게 둥글린 소파에 앉자 베도야가 그 옆에 앉았고, 부마가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친구의 손을 잡듯 반갑게 손을 잡으며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폐하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전하.”

베도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마가 의아한 표정을 띠었다. 베도야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폐하의 위명에 누를 끼치실 의도는 없으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저 주변에서 반가이 오니 받아주신 거라고, 폐하께서도 안타까워하시고 계십니다.”

부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 얼굴을 보면서도 베도야의 미소 띤 얼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정한 얼굴로 부마의 손을 잡으며 베도야가 말했다.

“전하께서 기관에 압박을 가하시거나 군수 업체를 선정하시는 일 등은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몇몇은 폐하의 사각 지대에서 전하의 빛나야 할 명성에 흠집을 낸 대가를 치러야 하겠습니다만 그 정도로 이 일은 조용히 끝나게 될 것입니다.”

부마가 되자마자 수많은 청탁이 들어왔다. 대공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듯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국책 사업에 간섭하고 몇몇 공무원과 결탁했다. 그리고 그 사업에 선정될 기업들에서 미리 뇌물을 받았다. 흔한 일이었다. 갑자기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이렇게 흔들린다.

“그러나 이 배려는 한 번뿐임을 명심해주십시오. 전하, 초대 감사했습니다.”

베도야가 일어섰다. 부마는 일어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덜덜 떨었다. 그러자 베도야가 말했다.

“전하, 일어서주십시오. 주변에 눈이 많습니다.”

그제야 부마가 일어났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어떻게든 움직였다.

“저, 절대로 그럴 생각은 아니었음을 폐하께…….”

“알고 계십니다.”

베도야가 미소 지었다.

“누가, 누가 이 책임을 지게 됩니까?”

부마가 물었다. 무섭고 걱정이 돼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베도야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 눈이 많습니다.”

베도야의 말에 부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주치는 시선은 하나도 없었지만 눈이 많은 건 사실이다. 샹들리에의 빛이 가득한 밀림에서 육식수들이 고상한 태도로 번들거리는 눈을 감추고 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엑스타인의 냄새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베도야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부마에게 등을 돌렸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입을 헹궜었다. 입에서는 향긋한 민트 향만이 날 텐데도 배 속 깊은 곳에서 엑스타인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음탕하고 비릿한 그 냄새에 허리가 가늘게 떨렸다.

멀리서 잔을 들어 술을 마시는 척하던 엑스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엑스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베도야는 그 웃음을 못 본 체하며 홀을 나섰다. 그의 속옷 안에 댄 엑스타인의 손수건이 젖어서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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