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일요일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얕은 오르막인데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둘은 너무 피곤했다.
“정말 영업 시간이 7시까지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게. 정말 징글징글하긴 했어.”
“아니, 이 후미진 곳에 있는 커피 가게가 뭐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꾸역꾸역 몰려드는 거람?”
“이봐, 다원. 내 커피를 무시하지 말라고.”
“방금 커피콩 바다에다 다 뿌려 버리겠다고 소리치던 사람 혹시 못 봤어요?”
“하, 정말. 내가 말로 널 어떻게 당해.”
딜런은 다원의 얼굴에 입술을 들이밀었다.
“으아악, 침 묻어. 저리 가!”
그때였다. 저 멀리 남자 둘의 인영이 딜런과 다원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심각한 말소리를 듣자마자 오솔길을 옥신각신하며 걸어 올라가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무 뒤로 숨었다. 나무 하나에 한 명씩. 서로 왜 그리 숨었냐며 이리로 오라고 눈짓을 주고받았지만 곧 숨을 죽였다.
타박타박. 부스럭부스럭. 흙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지막이 퍼져 나갔다. 나무들 사이로 금세 어둑어둑하게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어느 나무를 사이에 두고 왔다 갔다 하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하나는 다원의 귀에도 익은 목소리였다. 바로 케빈이었다.
“난 할 말 없어. 돌아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같이 가.”
“너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돌아가.”
“잘못했어.”
“……사과하지 마.”
케빈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나왔다.
“하…… 울지 마, 제발. 네가 우는 모습은 정말…….”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덩치가 큰 남자가 케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 남자는 덩치와 어울리게 참 험악한 인상이었다. 케빈이 그의 손을 피하자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조금 인상을 쓴 것뿐인데도 그의 얼굴은 상당히 험악해졌다.
‘어쩐다……. 조금 무섭긴 한데.’
다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첫인상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케빈이라는 남자가 저 덩치에게 맞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신고를 하는 게 낫겠지? 괜히 나섰다가는……. 어?’
뒷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내려던 차에 정신없이 흔들리는 하얀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딜런이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쉿!’ 하고 필사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으라는 것 같았다.
‘설마…… 쫄았나?’
치사함은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다원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내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있나?’
풀썩! 그 순간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아주 시원하게 두 무릎 전부 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아, 세상에. 저건 아니야. 내가 다 오글거려.’
“정말이야. 정말 미안해. 내가 비겁했어. 내가 나쁜 놈이야.”
남자는 상당히 비장했다. 크고 두툼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푹 숙인 남자는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남자를 케빈은 시선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케빈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미친다, 정말. 저 케빈이라는 남자 정말 정체가 뭐야?’
그는 눈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고 있었다. 다원의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 갔다. 그때 시선을 들어 올리던 케빈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케빈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때 무릎을 꿇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케빈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원도 나무 뒤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딜런은 웃음을 참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난리도 아니었다.
인상이 험악한 남자는 이젠 아주 절박하기까지 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
케빈의 늘씬한 다리를 부여잡고 매달렸다. 조금만 더하면 눈물 콧물까지 질질 짤 판이었다. 다원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두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으윽, 제발.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내 귀가 썩어 들어 갈 것 같아요!’
“알았어. 일어나. 동네 창피하게 이게 뭐야!”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고 SNS도 비공개로 돌려 버리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하필 왜 여기냐고. 여긴 딜런 그 빌어먹을 자식이 있는 곳인데.”
그 말에 이번에는 케빈도 당황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험악한 얼굴의 남자는 육중한 몸으로도 단박에 일어났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케빈이라는 남자를 가두듯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달빛에 훤히 드러난 남자는 다원의 예상보다도 키가 컸고 근육질이었다. 꼭 체이스처럼.
“헨리.”
‘아.’
다원은 갑자기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빡이 돌겠냐, 안 돌겠냐. 더구나 엄마가 네가 딜런 카페에 찾아갔다는데, 너희 둘이 만났다고 말하는데! 나 정말 눈 회까닥 돌아가는 줄 알았다고!”
카페에서 케빈을 달래며 허니 브레드를 권했던 할머니가 남자, 헨리의 어머니였다는 걸 알고 이번엔 다원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전혀 안 닮아 보였는데.
“언제 적 이야긴데 그래.”
“언제 적? 난 아직도 그 자식한테 걷어차인 한쪽 불알에 공을 끼워 넣고 산다고!”
“풋!”
결국 다원은 웃음 참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딜런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떡하지?’
다원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딜런을 바라봤다. 딜런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때 헨리가 크게 소리쳤다.
“뭐야! 어느 쥐새끼가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거야! 당장 안 튀어나와?”
케빈에게 말할 때도 그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고 결코 상냥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둘의 대화를 방해한 사람에게 소리치는 목소리는 더 크고 거칠어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았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했다.
‘완전 무식한 사람이네. 어쩌지? 상황이 더 커지기 전에 차라리 나가자.’
다원이 숨어 있던 나무 옆으로 한 발 내디뎠다. 하지만 익숙한 형체가 다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딜런은 다원이 숨어 있던 나무에 한 팔을 올리며 기대섰다. 그의 길고 넓은 그림자가 다원의 몸을 덮었다.
“누구더러 쥐새끼라고 짖는 거지? 헨리 멍멍이야.”
‘헉! 딜런?’
질 나쁘게 건들거리는 말투와 행동은 상당히 낯설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딜런과 헨리는 각자의 연인을 등 뒤에 세워 두고 깜깜한 오솔길 위에서 으르렁거렸다.
“하! 비린내 나는 딜런이 많이 컸네.”
“도대체가 이 고기 썩은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 지독해서 코가 마비된 것 같아.”
딜런은 코를 틀어막고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헨리는 금방이라도 딜런에게 달려들 기세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헨리, 하지 마. 애한테 무슨 짓이야.”
“하! 애 좋아하네.”
“왜, 한쪽도 마저 터트려 줘? 지금 끼워 넣은 알이 어디 출신인지 알고는 있지? 같은 공장 알로 끼워 넣어야 균형이 맞지 않겠어?”
“뭐? 이 자식이!”
딜런은 일부러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이번엔 다원이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엔 케빈도 더 이상 헨리를 막을 생각이 없는지 한 발 물러났다. 그러자 헨리는 더 의기양양해졌다.
헨리는 인상을 사납게 구기면서 정말 딜런에게 달려들려고 들었다. 딜런도 이번엔 제대로 헨리의 사타구니를 차 줄 요량으로 적당한 거리와 적절한 타격점을 재고 있었다. 헨리 역시 지난날의 복수를 위해 딜런의 반질반질한 얼굴을 제대로 주저앉혀 줄 요량이었다.
“그만!”
눈앞으로 불쑥 끼어드는 검은 머리에 헨리와 딜런은 삐끗하면서 휘청거렸다.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막 날리던 헨리는 급제동을 거느라 등 근육과 허리 근육마저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딜런 역시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뭐야!”
“다원!”
다원의 당찬 목소리가 얕은 숲에 퍼져 나갔다.
“알도 하나뿐인 허당 주제에 그만하시지!”
다원도 스스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꽉 말아 쥔 주먹과 금방이라도 발차기를 할 것 같은 다리 동작은 제법 격투기를 배운 폼이 났다. 헨리와 딜런은 두어 발 주춤거렸다. 다원의 기세가 매서웠다. 딜런은 다원을 와락 껴안았다.
“다원, 하지 마! 그러다 예쁜 얼굴에 스크래치 나! 헨리 저 새끼가 얼마나 무식한데.”
“뭐!”
딜런의 말에 발끈한 것은 케빈이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다원에게 향했다. 케빈은 키는 컸지만 마른 체형이었다. 그가 약이 잔뜩 올라 내려오는 모습은 손톱을 세운 암고양이 같은 느낌이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서 다원은 방심했다.
“윽.”
그 순간 그의 긴 손이 다원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딜런이 그의 팔을 쳐 냈다. 헨리 역시 얼른 케빈의 팔을 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딜런은 얼굴을 감싸고 있는 다원의 손을 치웠다.
“쯧!”
다원의 얼굴을 살핀 딜런은 혀를 찼다.
“자기, 그만해! 성질 좀 죽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러다 자기만 다쳐.”
“헨리, 이거 안 놔? 이 쪼그만 녀석, 어디서 건방지게. 뭐? 너 방금 뭐라 했어!”
다원은 딜런의 손을 뿌리치곤 지지 않고 응수했다.
“또 하라면 누가 못 할 줄 알고? 알도 하나뿐인 허당 주제에 어디서 까부냐고 그랬다! 왜!”
“이 자식이!”
“왜 내가 네 자식이야!”
“이게 정말! 가만 안 둬. 너 오늘 내 손에 아작 날 줄 알아!”
“자기! 나 허당 아닌 거 자기만 알면 됐지. 그만해! 이러다 정말 다쳐. 저 꼬맹이 자식한테 자기는 상대가 안 돼.”
사납게 발버둥 치던 케빈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헨리를 돌아봤다. 딜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눈동자도 그랬다. 어디를 봐도 케빈이 다원보다 키도 컸고, 말랐지만 덩치는 밀리지 않았다. 심지어 팔다리도 길었다. 다원에게 케빈이 질 거라는 헨리의 말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저 꼬맹이 새끼, 자세 제대로라고. 게다가 저 새끼는 아까 정확하게 자기 목을 보고 팔을 뻗었단 말이야.”
지금까지 다원이 싸울 줄 안다는 것을 알아본 이는 없었기에 다원도 당황했다. 격투기 선수인 헨리의 눈썰미는 태권도 유단자인 다원의 동작을 허투루 보지 않았던 것이다.
“뭐라는 거야? 저 꼬맹이가 때리면 얼마나 아프다고 그래. 하여튼 자기 호들갑은 알아줘야 해.”
케빈이 어깨로 헨리를 슬쩍 밀었다. 뭔가 눈치를 챈 헨리가 케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뒤돌아섰다.
“당연하지. 나한테는 자기 하나뿐인데. 저런 애송이 때문에 속상해하는 건 못 본다고.”
“그 애송이한테 스크래치 낸 건 나야.”
“알았어. 조용히 해.”
헨리는 그대로 걸음을 옮기며 등 뒤에 있는 딜런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자식이 끝까지.”
딜런은 발끈했지만 참았다. 동네 한중간에서 일이 커져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다원이 껴 있어서 더 그랬다. 딜런은 똑같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주는 것으로 끝냈다.
싸움이 흐지부지 끝나자 어둠에 섞여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동네 주민들과 개들도 하나둘씩 돌아갔다.
“자기 아들 아니야?”
“왜 아니야! 하여튼 동네 창피해서.”
“왜 안 말렸어?”
“저 작은 다원이 총각한테 맞고 들어오면 집에서 쫓아내야지, 말리긴 뭘 말려.”
“그나저나 헨리, 오랜만에 보니까 인상이 더 더러워졌네.”
“뭐라는 거야. 나이가 들면서 얼마나 유순해졌는데.”
“케빈도 이젠 제법 앙칼지고. 전엔 숙맥이 따로 없더니.”
“숙맥은 무슨……. 내숭덩어리였지.”
“아무튼 다원 군도 보통은 아니구먼.”
“이 영감탱이는 가게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그걸 이제 알았어?”
“하여간에 눈치가 없어.”
주민들의 수다가 오솔길에 도란도란 울려 퍼졌다.
* * *
“어떡해. 예쁜 얼굴에 이게 무슨 일이야. 케빈 그 새끼, 일부러 손톱을 세운 거야.”
다원의 왼쪽 턱과 귀 근처에 2센티 남짓 되는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딜런은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정말 속상해했다.
“나 분명히 봤어. 그 자식이 씩 웃는 거. 너도 같이 할퀴지 그랬어. 하여튼 착해 빠져서는.”
정작 당사자인 다원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딜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달래려 다원은 맞장구라도 쳐 주기로 했다.
“아니, 사내자식이 어떻게 손톱으로 할퀼 생각을 다 하지? 설마 손톱을 세울 줄 몰랐지. 나도 정말 무서웠다고. 정말 한 대 칠 걸 그랬어.”
다원은 열 손가락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치지 그랬어.”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딜런의 대꾸에 다원은 기가 찼다. 유단자인 제가 함부로 쳤다가는 케빈은 비명도 못 지르고 나가떨어질 터였다.
“어떻게 남의 애인보다 내 애인이 내 실력을 더 몰라봐?”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할 타이밍인데 잠잠했다. 머쓱해진 다원이 딜런을 살폈다. 그는 꽤 심각해 보였다.
“헨리는 전에 케빈을 덮치려 했던 놈들 중에 하나야. 그때 내가 그 새끼 불알 한쪽을 박살 내는 바람에 일이 커져 버렸지.”
“저런.”
“그 새끼가 진심으로 덤비는 바람에 내가 힘 조절을 못 했거든. 그때도 그 새끼 힘이 장난 아니었어. 그런 새끼가 이젠 격투기 선수라는데 지금은 더 어마어마하겠지. 그 앞을 가로막는 널 보는 내 마음이 어땠겠어.”
‘아고, 우리 애인. 그래서 그랬구나. 어쩌면 좋아. 귀여운 것.’
다원은 딜런의 품에 파고들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난 똑같이 행동할 거야.”
딜런 역시 더 이상은 그를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다원보다 더 힘을 줘서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때 여기저기 불려 다닌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 아주 정신이 없었지.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새끼가 케빈을 좋아하고 있었어.”
“헐.”
“그런데 그 무식한 새끼가 제 마음도 모르고 케빈이 나랑 사귀니까 그냥 발끈했던 거지.”
“아하. 그래서 아까 케빈한테 찍소리도 못 했던 거구나. 네가 우는 모습이 어쩌고 하면서.”
“그런 말도 했어? 아무튼 어머니 말로는 케빈이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는 내내 그 집 주변을 똥 마려운 똥개 새끼처럼 돌아다녔대.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갔다더라고. 헨리 어머니 말씀이, 나중에 알고 보니 케빈이 사라진 걸 알고 그를 찾아간 거래.”
“오. 나름 순정파였구나.”
“그리고 저렇게 코가 꿰였나 봐.”
“지금도 순정파고.”
“무식한 거지.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애를 괴롭혔으니.”
“……그걸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여기 있잖아. 난 정확하게 알아.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다원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딜런은 흔들림 없이 다원이 눈을 맞춰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눈동자를 마주치는 다원을 보며 활짝 웃었다.
* * *
뜨거운 여름이 다 지나가고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이었다. 이젠 긴 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해 겉옷을 입지 않으면 나갈 수 없었다. 새벽 일찍 바다로 나가는 딜런은 거의 중무장을 하고 다녔다. 그의 몸에는 짙은 바다 냄새가 배어들었다.
항구의 가게 영업도 한창 물이 올랐다. 선선한 계절을 맞아 여름 관광객은 아주 우스웠다는 듯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도대체 누가 이곳을 한적한 시골 항구 마을이라고 한 건지. 다원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퇴근하세요?”
다원은 피곤해 보이는 딜런의 공장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누가 통조림을 이렇게 많이 사는 거야? 이해가 안 돼.”
공장 직원들이자 가게 단골손님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심기를 건들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원이 살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하. 실력들이 워낙 좋으시니까요.”
“쓸데없는 소리!”
“약값이 더 들 판이야. 월급을 올려 달라 해야지, 원.”
어깨를 주무르며 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다원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비질을 서둘렀다.
‘나도 후딱 정리하고 얼른 집에 가자. 피곤하다.’
커피와 통조림을 팔면서 양심까지 같이 팔아 버린 사장님, 딜런은 연일 바다로 나갔다. 한여름이 지나자 생선이며 갖가지 해산물이 신기할 정도로 잘 잡혔다.
그 탓에 공장 직원들은 늘어난 일거리에 끙끙거렸지만 사장님, 딜런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다원은 가게 일과 장부 속 숫자에 몸과 영혼이 얽매여 꼼짝달싹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어! 아직 안 잤네.”
“아. 네에, 네에.”
식탁에 앉아 있던 다원은 딜런의 인사에 그를 보지도 않고 입으로만 인사했다. 이 집에서 일요일 저녁이란 그랬다. 한 주의 바쁨과 피곤이 정점을 찍는 시간.
이번 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이었다. 다원은 목구멍까지 할 말이 올라왔지만 기력이 달렸다.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대화를 나눌 힘도 없었다.
‘아주 제대로 불살라 버릴 기세네, 우리 다원이. 이달까지만 봐주세요.’
딜런이 미안한 마음에 눈썹을 늘어뜨렸다. 같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딜런과 다원은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입장이 달랐다. 더구나 딜런에게 고기잡이는 일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피곤한 건 절대로 티를 내면 안 되는 일이었다.
좁은 집 안에서 딜런은 날 선 다원을 최선을 다해 피해 다녔다. 다원이 잠자리에 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조심 그의 옆으로 기어 들어갔다.
“미안해요, 다원. 나도 어쩔 수 없어. 바다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걸. 이번 달이 지나면 시간이 좀 날 거야.”
다원을 꼭 끌어안고 딜런은 잠들었다.
* * *
그리고 월요일 아침, 캐서린에게서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다.
-‘어젯밤에 아버지가 호흡이 불규칙했단다. 지금은 응급실이야. 괜찮으면 올 수 있겠니?’
기어이 흐느낀 캐서린의 울음소리가 딜런과 다원의 가슴을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급하게 집을 나섰다.
딜런은 그저 묵묵히 도로를 달렸다.
“지난밤 내내 어머니는 우리에게 전화하기를 망설이셨을 거야.”
“…….”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혼자서…….”
보스턴으로 향하는 내내 눈시울이 붉은 다원이었다. 조금 열어 놓은 차창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딜런의 금빛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흩날렸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둘은 정신없이 중환자실로 달렸다.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캐서린은 딜런과 다원을 보자마자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다원은 캐서린을 안으며 마음을 쓸어내렸고 딜런은 둘 모두를 다독였다.
‘어머님 모시고 나갈게.’
‘부탁해.’
캐서린이 조금 진정이 되자 다원은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밤새 마음 졸였을 캐서린 역시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딜런은 그동안 중환자실 담당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의사와 면담을 예약했다.
“어머니는?”
“차에……. 힘드신 것 같아. 쉬셔야겠어.”
“나는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해. 그…….”
딜런이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망설이는지 다원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주저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어머니는 내가 모시고 집으로 갈게. 나중에 점심때쯤 다시 오고.”
“그래. 고마워.”
딜런이 다원을 안으며 이마에 키스를 했다. 다원도 딜런을 힘주어 안으며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많이 놀랐지?”
“네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다원은 중환자실 앞 보호자 대기실로 들어가는 딜런의 모습을 확인하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캐서린이 혼자 있어서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 그녀는 눈을 감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다원은 조용히 운전석에 올라탔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시동을 켜고 부드럽게 액셀을 밟아 차를 출발시켜 집으로 향했다.
* * *
딜런의 차가 주차장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병원 입구를 급하게 빠져나오는 건장한 남자의 모습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혹시나 하고 병원 안전 요원이 남자의 근처로 다가갔지만 남자는 그에게 별일 아니라며 손짓을 했다. 남자의 차림도 멀쩡하고 태도에도 문제는 없어 보여 안전 요원은 일단 한발 물러서 그를 지켜보았다.
남자는 멀어지는 차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원…….’
남자, 체이스는 익숙한 목소리에 충동적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등 뒤에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데미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에게 신경을 쓸 여력은 없었다. 아주 잠깐 들린 목소리와 급하게 어디론가 가는 뒷모습의 주인은 분명 다원이었다.
지난겨울의 그밤, 체이스는 다원을 그렇게 내보내고 곧 뒤쫓아 내려갔다. 딴엔 바로 뒤따라 내려갔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체이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당직 경비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같이 사시던 분을 찾으십니까? 방금 큰 짐을 가지고 택시를 타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리킨 쪽엔 아무것도 없었다. 체이스는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흰 눈이 내리는 추운 날이었다. 체이스는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경비원은 혼자 나름의 짐작을 한 것인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있는 거라면 대신 신고를 해 드리겠습니다.’
‘……?’
‘하시겠습니까?’
체이스는 그 경비원이 무전기를 빼 드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똑바로 직시할 수 있었다. 다원은 정말 떠나간 것이다.
‘아닙니다.’
그 후로 체이스는 백방으로 다원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시작은 다원이 탔다던 택시부터였다. 체이스는 알고 있는, 또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뒤졌지만 실패였다. 다원은 그 어느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체이스에게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비자 기간?’
‘비자? 어디 가게?’
‘아니.’
데미안은 뒤늦게 그가 말하는 비자가 누구의 비자를 말하는 것인지 눈치챘다.
‘아직도 걜 생각하는 거야?’
‘…….’
‘체이스, 그만 미련을…….’
‘아직 학생 비자 기간이 넉넉히 남아 있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면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 그러면…….’
체이스는 더는 다원을 만날 수 없게 될 거라는 말을 삼켰다.
그 후로도 모든 것이 허탕이었다. 체이스는 다원이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다.
데미안의 손에 거의 끌려오다시피 한 보스턴이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이 낯선 곳에서 거짓말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다원?’
목소리를 따라간 곳에 정말 그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손만 뻗으면 그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다원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난 1년 내내 다원을 만나면 할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그가 나타나자 체이스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그냥 다 용서할 테니, 없었던 일로 할 테니……. 다시 돌아오라고 해야겠다.’
손이 거의 다원의 어깨에 닿을 것 같았다.
‘다워나…….’
하지만 체이스의 발걸음은 이상하게 점점 느려졌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사이, 다원은 방향을 바꿔 코너를 돌았다.
‘왜 저기로 가는 걸까?’
다원이 향한 곳은 중환자실 중에서도 중증인 환자 전용이었다.
‘미국에서 중환자실에 면회를 가야 할 만큼 가까이 지낸 이가 있었던가? 혹시 새로 구한 직장 때문에 그러는 걸까?’
체이스는 천천히 코너를 돌았다.
‘어!’
하지만 그는 코너 앞에서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누구야?’
다원이 웬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그 남자는, 아니 그들은 서로를 다정히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서로 의지하듯이, 위로하듯이.
곧 돌아선 다원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몇 번을 뒤돌아보며 남자를 확인했고, 그가 보호자실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어렵게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가 보호자 휴게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다원을 애틋하게 바라봤다.
‘젠장!’
체이스는 다원을 실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그대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얼핏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다원을 잡아야만 했다.
구두를 신은 발에 전해지는 충격이 온몸을 울릴 만큼 급하게 내려갔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체이스는 다원이 운전하는 차가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옆에 탄 사람은 여자? 노인이었어. 설마 그 남자의……?’
체이스가 아는 다원은 언제나 자신 한 사람에게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에 대해서라면 아주 작은 변화마저도 알아차렸다. 그의 컨디션이 어떤지, 기분이 괜찮은지, 왜 불편해하는지. 체이스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하아.”
체이스는 아직도 거친 숨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숨이 찰 정도로 뒤따르는데도 다원은 체이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어.’
체이스는 다원이 몰고 간 차 번호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되뇌었다.
* * *
데미안은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직전 급하게 내리는 체이스를 몇 번이나 불렀다. 그는 정신없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뭔가에 홀리듯 서두르는 그의 모습에 데미안도 얼떨결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곧바로 그를 따라갔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었다.
체이스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데 급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옆 계단 쪽이었다. 그리고 그쪽을 주시하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 남자의 눈빛이 데미안에게 이제 막 계단으로 사라진 이의 일행이냐고 묻는 듯했다.
데미안은 그 남자가 필요 이상으로 집요하게 쳐다본다고 생각했다. 남자도 데미안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적대감이 가득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남자가 먼저 뒤돌아섰고 데미안도 그 복도를 빠져나왔다. 데미안은 체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전화를 받은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의 몰아쉬는 숨소리에 데미안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
“체이스!”
뚜, 뚜, 뚜.
요즘 체이스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꽤 성실했던 체이스는 더 이상 성실한 친구도, 그렇다고 데미안이 원하는 다정한 연인도 되어 주지 않았다. 그저 남인 것만 같았다.
데미안은 체이스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먼저 가 있을게. 빨리 올라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데미안은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이 병원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데미안은 체이스의 비서에게서 들은 여사와 그의 아들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설마…….”
데미안은 언제 올지 모를 체이스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일단 그들이 있을 법한 곳으로 향했다. 중환자실 앞, 보호자 대기실로.
똑똑, 정중하게 노크하고 문을 연 데미안은 노려보던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캐서린 씨의…….”
“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남자, 딜런은 왜 낯선 이의 입에서 캐서린의 이름이 나오는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데미안은 눈앞에 선 남자가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일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제기랄. 하필…….’
당황했지만 데미안은 곧 표정을 가다듬고 자기소개부터 했다.
“데미안이라고 합니다. 저는 OOO의 패션, 인테리어 디자인 편집 숍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신데요.”
돌아오는 딱딱한 반응에 데미안의 얼굴엔 난처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일만은 확실히 하던 체이스의 돌발 행동과 남자의 태도까지 더해져 데미안은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었다.
“저희가 이번에 이곳에서 매장을 오픈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그러다 어머님의 갤러리를 우연히 알게 되었답니다.”
딜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장사꾼들이란…….”
‘장사꾼?’
이번엔 데미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것을 본 딜런이 이죽거렸다.
“설마 사업가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댁들의 그 대단한 회사에 대해 아주 작은 유감도…… 아니, 아무 관심조차 없었던 사람이지만 오늘부터 조금 생각이 달라질 것 같은데. 물론 내 생각 따위야 당신들에게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휴지 조각보다 못하겠지만 말이야.”
“말이 심한 것 같군요.”
“내 말이 심했나? 그렇게 느껴졌다면 심한 거겠지. 내가 당신들의 행동이 무례하다고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난 말이야, 그래도 어머니의 사람 보는 안목을 높이 사고 있었는데…….”
캐서린에 관한 말이 나오자 데미안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그 표정을 보는 딜런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무리 그녀라도 나이는 무시 못 하나 봐. 어머니는 당신들을 열정이 대단한 젊은 사업가라고 설명했거든? 그들의 뜻을 들어주지 못해 참 안타깝다고. 그런데 어머니에게 괜한 감정 낭비하지 말라고 해야겠어. 보다시피 우리가 지금 그럴 여력이 없는 상황이라.”
아무리 데미안이라고 해도 딜런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저와 체이스가 중환자실까지 쫓아와 첫인상부터 망쳐 놓았기 때문이리라. 사실 인사를 건넬 때부터 이건 아니다 싶었다.
‘체이스 때문에…… 순간 실수를 해 버렸어.’
이번 프로젝트는 체이스뿐 아니라 데미안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체이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성공한다면 계속 그의 곁에 남을 수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콘셉트와 완벽하게 꼭 맞아떨어지는 사이트를 우연히 발견한 데미안은 그 사이트에 올라온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일부러 준비된 것만 같았다. 하나하나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오래되고 귀한 수제품들이었다. 옷, 신발, 가구, 그릇, 기타 작은 소품들까지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다.
‘새로 장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마저 다 유니크하고 다채로웠어.’
데미안은 그 사이트의 모든 것이 다 탐났다. 사이트의 운영자는 놀랍게도 80대의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어마어마하게 까다롭고 확고한 소신이 있었다.
‘그녀의 집을 그냥 통째로 콘셉트 숍으로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데미안은 그녀의 건물 역시 마음에 들었다. 위치도 적당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딱 적합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체이스의 상태가 영 이상한 데다 이러다 일을 완전히 망쳐 버릴 것만 같아 데미안은 입 안의 침이 모조리 말라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 집의 실질적인 주인은 이 남자였어. 일단은 이 남자의 마음을 달래 놔야만 해. 어쩌지?’
그때였다. 체이스가 데미안을 뒤로 물리며 딜런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대신 대답했다.
“네. 안 그래도 오늘 아침 도시를 떠나려던 차에 댁의 아버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니…….”
그는 어느새 원래의 기업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저희가 큰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다음번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거절하지 마시고 캐서린 씨와 함께 만납시다.”
딜런의 시선이 데미안에게서 체이스에게로 옮겨 갔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 * *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어제…… 아니, 병원에 들어서기 전까지도 안 이랬잖아!”
데미안이 보기 드물게 체이스에게 소리를 높였다. 그는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느라 편두통이 날 지경이었다. 결국 진통제를 하나 먹고는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하나 뜯고 있는 데미안의 손을 커다란 손이 막았다.
“너무 급해.”
“하! 지금 그게 네가 나한테 할 말이야? 어?”
데미안이 눈을 치켜뜨고 으르렁거렸다.
체이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데미안의 손에서 약을 통째로 빼내 갔다. 운동선수 출신인 그는 약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철저한 사람이었다. 진통제를 비상약통에 다시 넣는 것으로 부족해 아예 트렁크에 넣어 지퍼까지 잠가 버리고는 씩씩거리는 데미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체이스는 창가로 가 이미 어둑해진 도시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그사이 데미안은 제풀에 지쳐 버렸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하아……. 이건 나답지 않아. 너무 초조하게 굴었어.’
지난 몇 달간 데미안은 평소답지 않긴 했었다. 누가 봐도 너무 생소한 모습이었다.
‘그 자식은 도대체 체이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데미안은 체이스에게서 그 지긋지긋한 녀석이 떨어져 나갔으니 모든 것이 순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체이스는 그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녀석이 훼방만 놓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린 연인이 되었을 거야.’
데미안은 연애 감정이란 걸 아는 순간부터 체이스를 가지고 싶었지만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체이스는 어려서부터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쳤고 또 그만큼 자극에도 약했다. 그는 쉽게 흥분하고 빨리 싫증을 냈다.
그래서 데미안은 기다렸다. 마지막 순간 평생토록 체이스를 차지하는 이가 진정한 승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얼마나 제게 필요한 존재인지 스스로 깨달아야만 해. 그래야 절대로 못 떠나가지. 잘되고 있었는데 이게 뭐야!’
다원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간 데미안이 긴장해야 할 정도로 체이스에게 의미 있는 만남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렸다.
‘데미안, 우리 데이트하자.’
어느 날 갑작스럽게 건네진 체이스의 그 한마디에 데미안은 12살 아이처럼 설렜다. 하긴, 그동안 그렇게 놀았으면 질려도 벌써 질렸을 것이고 철이 들어도 벌써 들었어야 했다.
데미안은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기특하게 정신을 차린 그에게 시원하게 허락의 말을 할까, 조금 애를 태울까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지며 한껏 기대를 하고 자리에 나갔다. 그리고 다른 날과 달리 약간 상기되어 있는 체이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가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기대 이상의 날이었지.’
데미안은 그날 느낀 배신감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체이스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기다린 것은 데미안이 아니었다.
‘아직도 그 뻔뻔한 얼굴에 얼음물을 끼얹어 주지 못한 게 분해 죽겠어.’
그런데 오늘의 체이스는 그날만큼이나 이상했다. 데미안은 다시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무시했다.
* * *
캐서린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힘들어했다. 다원은 딜런에게 병원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전화를 했다.
“응. 피곤해하시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셔. 아무래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아. 힘들지? 그래도…….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야? 아니, 목소리가……. 그래, 뭐라도 챙겨 먹어. 나야 뭐. 어머님이랑 간단하게 해결할까 해. 응. 다시 전화해. 수고해. 별말을 다 한다. 응.”
딜런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전화 끊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다원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까맣게 변한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나 때문에 그러니? 미안하구나.”
캐서린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다원은 최대한 의연해지려 노력했다.
“어머니……. 미안하다뇨.”
“딜런이 많이 보고 싶지?”
“……네.”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려던 것이 왜 덥석 그렇다는 말이 나왔는지 다원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펴지는 것을 보니 오히려 잘된 건가 싶기도 했다.
다원은 그녀를 부축해 소파로 가 나란히 앉았다. 이번엔 다원의 표정이 안타까워지려 했다. 그녀는 늘 볼륨을 빵빵하게 넣은 우아한 머리를 고수했다. 화사하게 화장하고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 차림을 한 모습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새벽, 여느 80대 노부인과 다를 것 없는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며 울고 있었다. 원래부터 흰머리와 회색 머리가 섞인 색이었지만 볼륨 없이 축 처진 머리는 왠지 더 초라해 보였다. 짠한 마음에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도 나이에 비해선 아주 고운 모습이었지만 너무 창백했다. 더구나 파자마 바람에 급하게 껴입은 큰 패딩은 그녀를 더 왜소하게 보이게 했다.
딜런과 다원을 보자마자 안겨 울던 그녀는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안간힘을 다해 버틴 듯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는 딜런의 표정을 다원은 잊을 수가 없었다.
‘난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을 거야.’
약해지고 아파하는 부모를 봐야 하는 심정은 다원으로서는 절대로 알 길이 없었다. 아픈 와중에도, 어쩌면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 역시 받아 볼 수 없었다. 다원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내가 이러면 안 돼.’
얼른 정신을 차린 그가 캐서린을 달랬다.
“어머니, 많이 놀라셨죠?”
“……아니라고 할 수가 없구나.”
그녀는 다원의 손을 잡았다.
“다원아……. 딜런을 부탁한다.”
“……!”
다원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담담했다. 그래서 더 슬퍼 보였다. 다원의 품에 안긴 그녀는 표정만큼이나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이는 열정이 대단한 이였단다. 그야말로 바다 사나이였지. 그래서 내가 욕심을 냈어. 뜨거운 태양 아래 빛나던 금발의 멋진 청년을 어느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이해해요, 어머니.”
“호호호. 그래, 그래. 우린 어떻게 보면 동지구나. 이 집안 남자에게 영혼을 사로잡힌 동지. 다원아. 딜런을 많이 사랑해 주렴.”
부모의 마음은 다 이런 걸까. 그녀를 안고 있는 다원의 손에 힘이 실렸다.
“자유로운 그를 준비가 되기도 전에 낚아챈 죄로 난 많이 아팠단다. 아이도 둘이나 잃었지. 또 하나는 지금도 아프고……. 딜런의 동생 이야기는 알지?”
앤서니는 딜런의 동생, 네이선에 대해 언젠가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는 지금 시설에 가 있었다.
“네…….”
“우린 딜런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단다.”
그녀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다원은 그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숨소리는 편안했다. 곧 그녀는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아마 그이는 이달을 넘기지 못할 거야. 나는 슬퍼하지 않을 거란다. 그이는 바다로 돌아가는 거야. 그는 드디어 영원히 자유로워지는 거지. 그이는 나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버틴 거란다. 난 남은 인생 동안 최선을 다할 예정이야. 물론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치?”
“네…….”
“다원아. 네가 우리 딜런에게 와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아마 그이도 그래서 지금 떠나는 걸 거야. 얘야…….”
“……네.”
“사랑한다. 내가 오래오래 네 곁에 남아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매일 밤 기도한단다. 딜런과 그 애 동생을 낳으면서 늘 하던 기도지. 너도 내 아들이야.”
“…….”
“허락해 주겠니?”
그녀의 품에 안긴 다원의 울음소리가 거실 안에 조용히 퍼져 나갔다.
* * *
다음 날, 캐서린은 정말 본인의 말대로 기운을 차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화장을 곱게 하고 머리를 다듬은 뒤 단정한 원피스를 입었다. 게다가 단화지만 구두까지 신었다. 그리고 간단한 아침을 준비한 후 다원을 깨웠다.
다원은 다정한 캐서린의 손길에 한동안 침대에서 행복에 겨운 잠투정을 부렸다. 겨우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침을 먹고는 간단히 씻고 캐서린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저런.”
딜런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눈도 퀭하고 머리엔 까치집을 지은 데다 얼굴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많이 피곤하지. 한숨도 못 잔 거야?”
“바다에 뜬 배 안보다 더 불편한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
“집에 가서 좀 씻어. 좀 더 쉬고 오라고 하고 싶지만…….”
점심때쯤 동네 사람들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중환자실이라 면회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평생을 함께한 그들은 한 형제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캐서린의 얼굴이라도 봐야겠다는 입장이었다.
“아, 이대로 자고 싶어.”
다원에게 안긴 딜런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으으으. 정말 싫다. 싫어. 흐으음. 그래도 네 냄새 맡으니까 조금 마음이 안정된 것 같아.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씻고 올게.”
“말이라도 못 하면. 운전 조심해.”
다원은 딜런을 배웅했다.
점심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난 1시 40분경, 중환자실 앞 보호자 대기실은 작은 항구 마을에서 딜런의 카페를 옮겨 놓은 듯했다.
“캐서린……. 얼마나 놀랐어. 나는 아직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노환인걸…….”
“그래도 어디 저 양반이 저리 누워 있을 양반인가.”
“저 사람은 인간 아닌가? 다 때 되면 가는 거지.”
“아이고! 이 영감탱이는 주책없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캐서린, 오해는 하지 말아줘.”
“오해는 무슨……. 이렇게 찾아 줘서 고마워.”
“그런데 아들은 어디 가고 다원이 지키고 있누.”
“다 같은 아들인걸.”
“하긴, 뭐.”
“그럼. 부모 곁을 지키면 아들이지.”
“그나저나 이놈은 온다는 게 아직도 안 와.”
“누구 또 올 사람이 있어?”
“올 사람은 다 왔는데…….”
“아니, 그래도 제가 인간이면 가까이 살면서 얼굴을 비쳐야지. 제가 저 양반 덕에 인간이 됐는데.”
“아, 헨리?”
다원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다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귀가 쫑긋거렸다.
“헨리 그 자식이 아비도 없이 빌빌거리고 싸돌아다닐 때 저 양반이 얼마나 야단도 많이 치고 애를 썼어. 제 자식한테도 그렇게 안 했는데.”
“제 자식은 곁에 없었으니 그렇게 못 한 거지.”
“나는 아직도 헨리가 우리 딜런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
“어차피 그 새끼한테는 필요도 없는 건데 뭘…….”
“풋!”
다원은 최선을 다해 입을 틀어막고 최대한 슬픈 생각을 하려 노력했지만…… 이번에도 장렬히 실패했다.
“크크. 아…… 죄송해요. 큿.”
집중되는 시선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고 있는데 익숙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딜런 왔니?”
“네. 로비에서 헨리랑 케빈 만났어요. 저기 오네요.”
“아들! 빨랑빨랑 다녀.”
그렇게 동네 사랑방이 된 병원 대기실에서는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가 되풀이되었다.
캐서린은 그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어 했다. 동네 사람들은 캐서린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대기실엔 딜런과 다원, 헨리와 케빈 넷만 남았다.
“아버지는 어떠셔? 아깐 어른들 계셔서 못 물어봤어.”
“……아마 오래 버티시지 못할 거야.”
“…….”
헨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원은 너무 놀랐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그 표정 그대로 굵은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
다원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다 아실 거야. 너무 자책하지 마.”
“……아니야. 그때 내가…….”
“헨리, 아버지는 너 때문에 사고가 나신 게 아니야.”
딜런의 단호한 말에 헨리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그리고 입술을 짓씹으며 나직하게 울먹였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아버지 곁에 제대로 있지도 않은 주제에. 뭘 잘했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그의 말에 가시가 잔뜩 돋아나 있었다. 케빈이 딜런과 헨리의 눈치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헨리. 아버지는 너를 많이 사랑하시고 의지하셨어. 너에게 배를 맡길 정도면 말 다한 거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하아. 아버지는 지병이셨던 거야. 네가 그날 배를 타지 않은 거랑은 아무 상관 없어. 너무 자책하지 마.”
“…….”
헨리는 여전히 뭔가 분한 듯했고 딜런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아!’
그 순간 다원은 잊고 있었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모두가 다원을 바라보았다. 다원은 딜런을 한 번 바라보며 미안한 듯 살포시 웃어 보이고 다시 헨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앤서니의 말을 전했다.
“‘내 아들이 나에게 배워서 배를 기똥차게 잘 몰았지. 내가 한번 알려 준 포인트는 절대로 잊는 법이 없었어. 힘도 얼마나 좋은지 내가 당해 낼 재간이 없었지. 나중에 가서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척척 알아서 했다고. 기똥찬 녀석이었지. 그때가 가장 재밌었어. 바다란 그런 맛에 나가는 거야. 죽기 전에 딱 하나만 더 알려 주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 녀석이 요즘 통 보이지 않아.’”
다원은 흔들림 없이 헨리를 똑바로 보고 말을 이었다.
“‘내 아들…… 헨리를 만나면 좀 전해 줘. 그 배는 네 것이니깐 네 마음대로 하라고. 그 포인트도 내가 평생 지켜 온 것이니 이젠 네 것이라고.’”
붉어진 눈가를 슬쩍 훔친 다원은 헨리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그 헨리가 당신인지 그동안 미처 연결 짓지 못했어요.”
헨리는 소리 죽여 오래오래 울었고, 케빈도 같이 울었다.
다원은 헨리 역시 앤서니와 함께 배를 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딜런이 마을을 떠나자 어떤 때는 학교도 빼먹고 배를 탔다고 했다. 졸업을 하고는 매일매일 둘은 함께 배를 탔고 마을에선 앤서니를 ‘헨리 아버지’로 불렀다고 했다.
헨리마저 케빈을 찾아 떠나자 앤서니는 혼자 배를 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배를 정박하다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쓰려진 것이었다. 헨리는 앤서니가 저리된 것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케빈도 덩달아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오늘 다원은 헨리가 딜런에게 보이는 뿌리 깊은 반감이 케빈의 일보다 앤서니와 더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딜런과 헨리는 여전히 으르렁거렸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다원의 마음은 조금 편했다. 왠지 그 모습이 철없는 형제들이 티격태격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내 말은 없었어?”
“어……?”
케빈의 물음은 정말 뜻밖이라 당황한 다원은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다원에게 케빈은 짜증을 퍼부었다. 그러다 딜런에게 모진 소리를 듣고 또 눈시울을 붉혔다. 그 꼴을 본 헨리와 딜런이 다시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원은 앤서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헨리가 별 쓸모도 없는 거에 정신이 팔린 게 걱정이야.’
그 ‘쓸모없는 것’은 케빈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다원은 픽 웃었다.
‘여차하면 확 말해 버릴까 보다.’
* * *
당분간 마을 카페는 다원 혼자서 보기로 했다. 물론 바쁜 시간대에는 아르바이트를 쓰기로 했다. 기꺼이 시급을 주겠다는 당연한 소리를 하고선 칭찬해 달라는 듯 고개를 쳐들고 꼬리를 흔드는 딜런을 다원은 못 본 척했다.
“이건 무슨 주말부부도 아니고…….”
다원은 카페 일에 회계 일에 공장 일까지 사장보다 더 바빠졌다. 사장님인 딜런은 하나뿐인 회계 직원이자 사랑하는 애인, 다원을 위해 틈틈이 장부 정리를 했다. 물론 캐서린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딜런의 카페에서 다원의 카페로 간판을 바꿔 달자는 말이 나올 때쯤 시즌이 마무리되었다. 항구 마을 전체가 휴업기에 들어갔다. 그래도 간간이 문을 연 가게도 있고 매일매일 출항을 하는 배들도 있었다. 다만 딜런이 소유한 것들만이 불이 꺼진 채였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이 생활도 끝이다.”
다원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간단한 짐을 꾸려 보스턴의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 딜런!”
“아가.”
“다원아.”
다원이 보스턴의 캐서린 집으로 들어서자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캐서린은 저녁 준비를 위해 부엌에 들어갔다. 다원과 딜런은 거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거실은 이내 정적에 감싸였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들려오던 아버지의 끊이지 않는 이야기는 없었다.
딜런은 부엌으로 가 캐서린을 도왔다. 다원은 식탁을 닦고 식기를 세팅했다. 그리고 각자의 식사에 집중할 뿐이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 갈 무렵 캐서린은 잊고 있었던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
“그런데 딜런. 전부터 너에게 의논을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일 때문에 잊고 있었구나.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란다.”
딜런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말을 하던 캐서린도, 보고 있던 다원도 그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딜런 역시 스스로 놀란 듯 손으로 미간을 살살 펴며 계면쩍어했다.
“아,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슨 성가신 일요?”
어머니는 아들의 낯을 살피며 물을 조금 마셨다.
“괜히 널 귀찮게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어머니 일인데 제가 알아야죠.”
그녀는 난처해했지만 괜찮다는 딜런의 말에 곧 그간의 일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엄마가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 있잖니. 엄마한테는 즐거운 취미였는데, 얼마 전에 조금 곤란한 일이 생겼단다. 너에게 말했을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캐서린은 그녀의 컬렉션에 대해 그저 호감을 표하는 정도인 줄 알았던 대기업에서 너무 집요하게 나오자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원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회사명에 그만 몸이 굳어 버렸다. 캐서린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오는 듯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매만지느라 다원을 살피지 못했다. 딜런 역시 그녀의 말을 경청하느라 다원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딜런. 이건 아니지 않니? 내가 싫다는데…….”
캐서린은 귀를 기울이는 아들의 모습에 그간 속상하고 힘들었던 일을 정신없이 풀어놓았다.
그녀의 말을 듣던 딜런이 답답했던지 물을 마셨다. 옆에 놓여 있던 물컵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내려놓은 일련의 행동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동시에 식탁보 아래 다원의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는 손을 다정히 다독거리는 행동 역시도.
아들의 깜찍한 이중 플레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캐서린의 하소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편 다원의 눈은 동그래졌다. 단순히 손을 다독이는 가벼운 터치인데도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이라 그는 정말 놀랐다. 딜런은 맘 편히 식사하라는 듯 손등을 두어 번 더 부드럽게 두드리고 손을 물렸다. 다정한 딜런의 손길에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다원은 딜런의 손길이 사라진 손을 몇 차례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식사 내내 손이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원이는 자세히 모르겠구나.”
그때 캐서린의 목소리가 다원의 귀를 불쑥 파고들었다.
“몇 해 전부터 취미 삼아 내가 가진 녀석들을 사이트에 올리고 있단다. 그 녀석들의 사연도 올리고 소소한 내 일상을 나누고 있지. 즐겁기도 하고 대화가 통하는 이들도 생각보다 많아 욕심을 부렸더니……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구나.”
“녀석들…… 이라기엔 너무 귀하신 분들 아니세요?”
“어머나, 우리 다원이도 농담을 다 할 줄 아네.”
“큭!”
딜런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사이트가 유명해지면서 캐서린은 다양한 사람들과 인맥을 늘려 갔다.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 사이에서 그녀는 나름대로 영향력 있는 셀럽이었다. 평생을 작은 항구 도시에서 일과 가정에 치이던 캐서린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고 소소한 행복이었을 것이다.
“특별하고 좋은 취미를 두셨어요. 부러워요.”
다원의 뜻밖의 칭찬에 캐서린의 이야기는 더 디테일해지고 길어졌다.
“……그리고 그 포크도 그렇단다.”
다원은 소스가 잔뜩 묻은 포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이런 걸 감히 내 입에 넣었다니…….’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마시려다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다.
“켁! 쿨럭. 쿨럭.”
“어머, 다원아. 왜 그러니? 사레들린 거야? 얌전하게 잘 먹던 애가 왜 이런다니?”
딜런은 다원의 등을 살살 쓸어 주며 캐서린을 탓했다.
“갑자기 100년 된 포크네, 세상에 딱 다섯 잔 남은 크리스털 잔이네 하시니까 당연히 애가 놀라죠.”
“세상에…… 그게 그리 놀랄 일이니? 지금 네가 앉아 있는 의자는 빅토리아 시대 것이란다. 이 식탁도 그렇지.”
다원은 의자에서 조심조심 일어났다.
“어머니…….”
“그러지 않아도 돼. 이 집에서 그런 걸 의식하기 시작했다가는 숨 쉬기도 힘들어진단다.”
“어머니, 그렇게 귀한 걸……. 제가 뭐 묻힌 건 아니죠?”
“괜찮아. 물건들은 사용될 때 제 값어치를 하는 거란다. 사용하는 사람이 늘 사랑해 주고 만져 줘야 잊히지 않지. 그래야 이 녀석들도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할 수 있지 않겠니? 편하게 앉으렴.”
캐서린은 의자 방석을 톡톡 가볍게 두드리며 다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어머니. 그 웃음 너무 무서워요. 으으윽.’
다원 빼고 모두에게 편안한 저녁 식사였다.
식사 후에 다원은 싱크대 앞에서 한숨만 폭폭 내쉴 뿐이었다.
‘딜런에게 부탁하려고 했더니…….’
식사 자리에서 그녀가 풀어놓은 이야기는 일종의 애피타이저일 뿐이었다. 식사 후 티타임을 하며 그녀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길어진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다원의 얼굴이 눈에 띄게 핼쑥해 보였다.
“어머나. 우리 아가, 오늘 많이 피곤했니? 그냥 놔둬도 되는 것을. 어서 들어가서 쉬렴. 우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구나.”
“안 그러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딜런은 다원을 얼른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 혹시 침대도…….”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쉬어. 침대는 아니야. 나한테 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침대니까 맘 편히 누워.”
다원은 방문 앞에서 딜런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고 버텼다. 그는 지금 딜런의 말에 대한 그녀의 동의가 절실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원의 눈을 피하며 연신 차를 들이켤 뿐이었다.
“으윽.”
딜런은 다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침대에 눕혔다. 그러곤 이불을 덮어 주고 다원의 이마에 꾹 입맞춤을 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냐. 자.”
문을 닫기 직전까지 딜런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파로 돌아와 앉은 딜런은 다시 심각한 표정이었다. 마주 앉은 두 모자는 그간 끈질기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온 체이스의 회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그들이 무슨 취지를 가지고 패션 문화 사업을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괴롭힌다니? 안 그래도 네 아버지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데 하나 남은 취미마저 못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 속상해.”
“어머니가 싫으시면 그만인 거죠.”
“도대체가…… 차라리 내가 벽을 보고 이야기하고 생고무를 씹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심정이란다.”
딜런은 다른 사람에 대해 캐서린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나이 많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생각한 건지,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가져다 설득을 하는데 말은 정말 그럴싸하더구나. 하지만 내 컬렉션이 박물관에 진열될 수준이 아니라면 내 의견을 존중해야지. 게다가 내가 꽁꽁 숨겨 두고 혼자만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하.’
딜런은 캐서린이 어느 포인트에서 완전히 마음이 돌아섰는지 감을 잡았다.
캐서린은 언제나 사람이 북적거리는 분위기를 좋아했다. 원래 성격도 그랬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우울증을 앓게 된 후로는 일부러라도 더 사람들 속에 있기 위해 노력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취미가 같은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모임도 가지고 있었는데 장소는 언제나 이곳이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는 알잖니. 저기 진열된 차며 부엌 장 한쪽을 가득 채운 레시피 카드하며.”
“알죠. 어머님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컬렉션은 바로 그것들이라는 것도.”
“역시 내 아들이구나. 그들의 말은 정말…… 모욕이고 수치였어.”
딜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머니를 수집광쯤으로 취급한 모양이네. 쯧쯧쯧. 완전 텄다, 텄어.’
“나중에는 이 건물까지 넘보지 뭐니. 내가 기도 안 차서는.”
이 대목에서는 딜런도 심각해졌다.
캐서린은 원래가 독립심이 강했다. 그만큼 그녀의 영역을 누군가가 허락 없이 침범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딜런은 그런 이유로 그녀의 일에는 언제나 물러나 있던 거였다. 그런데 이번 일은 아무래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보낸 명함이 이거란 말이죠?”
“응. 덩치가 큰 남자는 한 번 봤는데 이쪽 일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여기 이 남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란다. 감각이나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두 눈에 욕심이 그득해서는 아주 집요하더구나.”
딜런이 두 개의 명함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만일 또 연락이 오면 저랑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어머니는 걱정 마시고 하던 취미 생활 꾸준히 하시고요.”
“그래 주겠니? 이젠 영 힘에 부치는구나. 고맙다.”
캐서린의 뜻밖의 말에 딜런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도리를 지키지 않아 지쳤을 뿐이었다.
“네이선에게는 언제 가 보셨어요?”
“이제 가 봐야지.”
“같이 가요. 저도 안 본 지 오래됐잖아요.”
“그러자꾸나.”
두 사람은 화제를 돌려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한편 다원은 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식사 시간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에 속이 울렁거려 멀미가 다 날 지경이었다.
체이스는 본인의 일을 다원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다원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누구누구 덕에 훤히 다 알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그 회사가 맞아. 하지만 그건 체이스의 형을 위한 거라고 들었는데…….’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일종의 문화 사업을 하는 회사였다. 체이스의 아버지는 그의 큰아들이 관심 있는 분야에서 능력을 펼쳤으면 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체이스는 그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들어간 회사도 문화 사업이나 패션, 인테리어 쪽과는 전혀 무관한 무역 회사였다.
‘그런데 어째서…….’
캐서린의 설명이 맞는다면 그녀를 찾아 이곳에 온 이들은 체이스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 때문에? 그래, 그라면 그걸 욕심낼 만도 해.’
그래도 데미안을 위해 움직이는 체이스는 상상할 수 없었다. 체이스는 그런 남자였다. 적어도 다원이 알기에는…….
‘아, 호텔…….’
그때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고 애를 썼던 일이 떠올랐다. 호텔에 나란히 들어가던 다정한 모습. 너무 익숙해 보이던 둘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다원은 이제야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나와 4년을 지내면서는 그렇게 철통 방어벽을 치더니만.’
체이스와 4년 가까이 연인으로 지냈지만 그는 언제나 선을 그었다. 어쩌면 그 덕분에 다원은 그의 집안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땐 그게 사랑이고 배려라고 생각했어. 고마워하기까지 했는데……. 데미안은 모든 걸 함께해도 되는 사람이란 말이야?’
다원은 갑자기 명치끝이 사르르 아파 오는 것 같아 몸을 웅크렸다.
‘하긴…….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나와 어린 시절부터 같이한 데미안은 다르겠지.’
입맛이 씁쓸했다. 다원은 눈을 꼭 감고 다시 한번 잠을 청했다.
딸까닥.
딜런은 다원이 깰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잘 수도 있지만 다원을 한집에 두고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설사 그를 깨우는 한이 있더라도 딜런은 필사적으로 그의 곁에 파고들 작정이었다.
“왜 또 웅크리고 자는 거야. 추워? 안 좋은 꿈을 꾸는 거야?”
딜런은 잠에 취한 다원을 돌려 눕혀 기어이 품에 안았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 지켜 줄게. 숨지 마.”
잠결이지만 다원은 따뜻하게 안아 오는 딜런의 품에 파고들었다. 등을 쓸어 주는 그의 손길이 되풀이될 때마다 점점 다원의 몸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점점 느려지던 딜런의 손이 이내 멈추고 고른 숨을 내쉬는 둘의 숨소리만 사이좋게 들려왔다.
* * *
얼마 후, 캐서린은 결국 그들과 약속을 잡았다. 딜런의 의견이었다.
‘어머니의 뜻이 확고하다면 정면 돌파를 해요.’
‘그럴까?’
‘아버지 일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기 싫어요.’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캐서린은 고민 끝에 딜런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젊은 기업가들과 만나는 자리에는 캐서린과 딜런만 참석하고, 다원은 병원에 있기로 했다.
“이봐요, 총각들. 이건 단순한 취미고 동시에 내 삶이에요. 그런 거 난 몰라요. 그러니 정말 그만합시다.”
체이스는 그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데미안은 눈가를 미세하게 찌푸렸지만 곧 그럴싸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여사님.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컬렉션을 취미로만 남기기엔 너무 아까운 일이예요. 저희가 이번에 하는 사업은 단순히 물건을 팔기 위한 게 아니에요. 문화를 나누는 것이죠. 흐음.”
데미안이 입을 다물고 체이스에게 집중하도록 신호하기 위해 아주 작은 콧바람을 내쉬었다. 그건 그냥 콧바람이었다. 소리를 낸 것도 아니고 표정을 바꾼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체이스는 여전히 커피 잔만 보고 있었다.
둘의 모습을 민감하게 알아챈 딜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은 신호를 못 들었나? 아님 데미안이라는 자의 단순한 버릇인가?’
딜런이 옆에 앉은 캐서린의 기척을 살폈다.
그사이 체이스의 반응을 기다리던 데미안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데미안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또다시 이상한 콧소리와 함께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흐음. 좋은 기회를…….”
“닥치지.”
곧바로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말이 딜런에게서 나왔다.
딜런은 근본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생의 반을 바다에서 보냈고, 나머지 반의반도 세계를 떠돌면서 대부분 노숙하며 지냈다. 그 외의 시간 역시 결코 집에 편히 머물지만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직접 경험으로 배운 것이었다. 마음을 써서 배려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는 거칠고 무식한 사내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딜런 앞에 앉은 데미안은 자존심이 셌고 욕심도 많았다. 그것은 밟을수록 고개를 드는 기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딜런의 말에 데미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여사님. 그 아름답고 귀한 걸 여사님 혼자만 누린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몇몇 지인들과 소소한 다과 파티에 선보일 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건 여사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물론 여사님의 각고의 노력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어요.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아…… 아니.”
캐서린은 그만 말문이 딱 막혀 버렸다. 그녀의 취미는 캐서린을 지탱하고 있는 큰 버팀목이자 삶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그것을 단순히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끝내려는 장사치의 언사가 말문을 막아 버린 것이다.
“여사님의 컬렉션은 정말 제가 추구하는 것과 너무 흡사하거든요. 그걸…….”
“그럼 네가 만들어.”
“네?”
“그러면 되겠네. 네가 추구하는 건 네가 발로 뛰어서 구해. 그래야 되는 거 아냐?”
이 자리에 앉은 후 데미안은 처음으로 딜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실 데미안은 그를 마주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그가 풍기는 거친 분위기나 행동도 그러했지만 병원에서의 일이 그를 껄끄럽게 만든 것이다. 데미안의 시선이 다시 캐서린에게 옮겨 갔다.
“하지만 이렇게 있는데 굳이……. 그리고 여사님에게도 결코.”
딜런은 여기서 정말 화가 났다.
“당신들이 한다는 게 말이야.”
다시 한번 말이 끊기자 데미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문화 사업이라며. 그 사업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지금 네가 여태껏 떠들어 댄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인간성을 잃어버린 시대가 어쩌고, 물질 만능이 어쩌고, 대기업의 일률적인 어쩌고, 획일화가 어쩌고. 다 집어치우고 인간을 위한 거라며. 휴머니즘. 아…… 열받네. 문화 사업을 한다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어떻게 제 손톱 때만큼도 없지? 이건 우리 엄마 거야, 새끼야! 넘보지 마!”
데미안은 무식해 보이는 남자의 폭언에 가까운 거친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렀다. 체이스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쉽게 따라 하려고 하지 말고 진짜를 해 보라고. 편집 숍인가 뭔가, 당신이 만들어. 네가 발로 뛰어서 만들란 말이야.”
“하……. 아니…… 어, 어떻게.”
“…….”
“딜런……. 곱게 자란 총각들 많이 놀랐겠다.”
캐서린은 아주 살짝 딜런의 옷을 잡아당겼다. 딜런은 더 말을 보태려다 말았다. 해 본들 입만 아플 것 같아서였다.
* * *
이번 만남으로 체이스는 딜런이란 남자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졌다.
처음 병원에서 잠시 본 남자의 인상은 가히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방금 가진 만남에서도 여지없이 그의 거친 면이 드러났다. 보통의 경우라면 어떤 대단한 메리트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부류에 대해 체이스가 재고해 보는 일 따위는 없었다. 사적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딜런이라…….’
딜런이라는 남자는 생긴 걸로 놓고 본다면 얼굴도 꽤 준수하게 잘생긴 미남이었다. 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피부 톤과 결도 나쁘지 않았다. 웨이브가 굵은 금발도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키도 체이스보다는 작았지만 상당히 큰 편이었고 체격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무엇보다 떡 벌어진 어깨와 날렵한 허리, 단단한 팔뚝과 거칠고 큰 손은 그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아마 오랜 시간 상당한 양의 육체 노동을 꾸준히 했을 거야. 그게 아니면 헬스장에서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야 했겠지만 그는 절대로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야.’
그의 표정이나 행동, 작은 손짓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모든 정보를 고려해 보건대 그것은 아마도 상당히 거칠고 고된 육체 노동이었을 것이다.
‘그을린 피부…… 희미한 바다 냄새…….’
그에게서는 정제되지 않은 야성이 넘실거렸다.
‘배를 타나? 어부?’
부모님이 닦아 놓은 화려하고 안락한 환경 속에서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체이스였다. 딜런의 그런 점이 어떤 이에게는 아주 매력적일 수도 있겠지만 체이스에게는 그가 가진 매력을 깎아 먹는 마이너스였지 결코 플러스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 남자와 다원이 같이 있다니……. 그것도 아주 다정하게. 마치 연인처럼.’
믿어지지도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만남에서 어쩌면 그에게 다원이 끌릴 만도 하겠다는 이해인지 납득인지 모를 것을 느끼고 말았다. 아무튼 체이스는 뭔가가 울컥하고 속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은 조잡했지만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넋을 놓고 있었어.’
체이스는 그동안 안일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데미안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고 형에게 형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가라고 해야겠어. 나도 내 것을 다시 찾아오고……. 딜런이라……. 그 남자가 매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다원이 그 남자와 같이 있는 걸 이해한다는 건 결코 아니야. 인정할 수 없어.’
체이스는 다원과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만나 보면 알겠지.’
돌아오는 차 안 체이스와 데미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둘은 각자가 앉은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데미안은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쌩하니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화가 나 있으니 자신을 봐 달라는 일종의 제스처였다.
그러나 체이스는 데미안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일부터 할 일은 체이스를 아주 피곤하고 성가시게 만들게 뻔했다. 입 안에 넣어 주는 것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는 실속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씁쓸하네.’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도 모자라 한참을 걸어온 것을 되돌리기 위한 대가였다. 체이스는 지금 당장 이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서 늘 하던 대로 핸드폰을 들었지만 멈칫했다.
‘데미안 때문인가? 그건 아니고……. 장소 때문인가?’
장소와 데미안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다워나, 너 때문인 거야? 하하하. 설마…….”
얼마 전 본 다원의 얼굴이 마음에 걸려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 건 내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잠을 청하기 위해선 뭔가 필요했다.
약은 싫고 사람은 안 되니 체이스는 미니바에서 마시던 술과 술잔을 하나 꺼내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일단은 딱 한 잔만 할 생각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곯아떨어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체이스의 중얼거림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피곤하군.”
* * *
데미안은 욕실에 들어가 한동안은 세면대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체이스의 기척이 문 너머로 들려오지만 알은척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들어 데미안은 매 순간 체이스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아니,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화가 났다.
‘도대체 그 녀석이 뭐라고 우리 둘 다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해야 하는 거야!’
다원이 떠난 뒤 처음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아무렇지 않았지.’
지켜보기만 했던 4년이라는 시간이 억울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체이스에게 그 녀석의 자리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뿌리를 내리기 전에 뽑아 버렸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아무리 아무것도 아닌 거지새끼였지만 함께한 시간이 4년이었으니까.’
데미안은 그간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체이스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 감정의 찌꺼기를 깨끗하게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데미안은 체이스가 긴 방황을 끝내고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서 아량 넓은 친구 역할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애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상상을 했다.
‘웃기지도 않았지. 내가 정말 그때 한 헛짓거리를 생각하면.’
데미안은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때 한 생각이, 아니 착각이 어이가 없었다.
체이스도 데미안도 나이도 있고 양쪽 집안 모두 그들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척 살아가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제 할 일만 똑바로 한다면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데미안이 보기에 둘에게 파트너로서 서로보다 더 좋은 짝은 없어 보였다. 체이스가 다원을 잊고 이제 데미안만 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착각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원을 위해 유지했던 집을 정리하고 그는 집안 소유의 회사 근처 호텔에 정착했다. 그리 높은 등급의 호텔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즈니스호텔치고는 깔끔하고 지낼 만했다.
데미안도 거처를 옮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차,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체이스의 방에 갔지만 그는 없었다.
‘어라, 퇴근했는데? 호텔에 들어온 것도 확인했고…….’
그 어디에도 체이스는 없었다. 전화도 되지 않아 그의 개인 비서에게 연락한 데미안은 들려오는 수화기 너머의 대답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체이스는 다른 룸에서 이미 다른 인간과 뒹굴고 있었다.
체이스의 개인 비서는 언제나 비슷한 상황에서는 비슷한 대답을 했다. 그때 들은 대답은 근 4년 만에 들어 보는 대답이었다. 그 후로 데미안은 같은 대답을 거의 매일 듣고 있었다.
만일 연인에게 다정하고 성실했던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실망이 덜했을까. 데미안은 체이스가 원망스러웠다.
‘그 녀석은 되고 나는 왜 안 되는 건데.’
체이스는 데미안에게 결코 연인으로서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속마음을 훤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저를 봐 주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데미안은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 그가 유일하게 부모님께 감사하는 부분이었다. 데미안의 시선이 단단한 가슴과 복근으로 향했다.
“얼마나 노력했는데…….”
개인 트레이너와 꼼꼼히 상의해서 만든 몸은 괜찮아 보였다. 아니, 훌륭했다. 와이셔츠를 완전히 다 벗어 버린 그가 살짝 뒤돌아섰다.
등 관리에 신경 쓴 보람이 있는지 목에서 떨어지는 척추 라인이 매끈했다. 바지 위로 보이는 등허리의 골도 섹시해 보였다.
바지 지퍼를 내리자 양복바지가 저항 없이 스르륵 떨어졌다. 긴 바지에 숨겨진 다리도 미끈했다. 팬티를 장골 아래까지 내렸다. 왁싱해서 깔끔하게 정리된 아래쪽을 데미안이 손바닥으로 쓰윽 쓸었다.
‘오늘 정도면 관계를 가져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의 고개가 욕실 문 쪽으로 향했다.
‘아까 그 남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데미안은 불현듯 오늘 그 늙은 여자와 만나는 자리에 나온 무지렁이 남자가 눈에 아른거렸다.
대여섯 살쯤 어린 듯한 그는 아직 덜 익은 과일과 같은 남자였다. 딜런이라고 했던가. 말투처럼 잠자리에서도 거칠고 요령 없이 파고들기만 할까? 힘으로 아픔조차 압도하는 타입일지도 모르겠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옷 아래 감추어진 몸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그 남자가 걸어 들어오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하아.”
데미안의 손이 어느새 흥분해 일어난 것을 만지고 있었다.
‘허전해.’
세면대 선반에 엉덩이를 기대며 다리를 올렸다. 자연히 허리가 휘어지고 엉덩이 골이 벌어졌다. 다른 손이 뒤를 파고들어 갔다. 이미 조금 젖어 있는 그곳은 쉽게 열렸다. 거울에 비친 뒷모습에 데미안은 더 달아올랐다. 몸 안과 밖으로 열기가 조금씩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흐으응.”
데미안은 고등학교 시절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필드를 누비며 숨을 헐떡이던 체이스에게 흥분을 하는 것인지, 방금 본 거칠고 무례한 어린 남자에게 흥분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아. 부족해…….’
결국 욕실 문을 열고 거실을 지나 체이스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에서 희미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테이블에 놓인 술은 독주였다. 그가 잠이 오지 않으면 한두 잔 하고 잠이 드는.
‘어쩌면 기회일지도.’
독주라지만 술 한두 잔에 서지 않을 그는 아니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좋겠어. 이제 기다리는 거 따위는 안 할래. 네가 주지 않으면 내가 뺏으면 되지. 안 그래?’
하지만 데미안의 발걸음은 여전히 테이블 곁에 묶여 있었다.
“쳇!”
아주 짧은 순간 망설였지만 그는 당장 활활 불타오르는 욕망 앞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체이스……. 제발 나도 다정하게 안아 줘.”
데미안은 그의 침대로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그가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니 깨어나 자신을 안아 주길 바라면서. 그의 굵은 다리 사이에 무릎 꿇고 그의 위에 손을 올렸다. 숨소리는 여전히 고르게 들려왔다. 데미안의 손이 그의 굵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다.
“하아. 체이스.”
그것만으로도 데미안은 몸 안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팬티 위로 손을 올려 그의 것을 덧그렸다. 묵직하고 두툼한 것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얌전한 그의 것을 팬티 위로 조금 만져 주자 그것은 점점 힘을 더해 가며 모양을 갖추어 갔다.
“체이스. 사랑해.”
속옷 안에서 그의 것을 조심스럽게 꺼내 두어 번 훑었다. 데미안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그를 확인하고 혀를 가져다 댔다. 샤워를 하지 않고 잠든 그에게서는 시큼한 냄새와 땀 냄새가 동시에 올라왔지만 그의 체취는 오히려 데미안을 더 흥분시켰다.
“체이스, 너 정말 너무했어.”
언제나 보기만 하던 것을 조금 핥았다. 순간 짜릿한 전율이 몸을 타고 흐는 것 같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맛볼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잔인해.”
체이스의 것을 고쳐 쥐고 귀두를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데미안은 제 팬티 안에 손을 집어넣어 구멍을 넓혀 나갔다. 그때 체이스가 뒤척였다. 데미안의 모든 행동이 그대로 멈췄다.
조금 뒤척이던 체이스의 숨소리가 다시 일정해졌다.
‘후우. 깨기 전에 빨리 해 버려야겠어.’
그의 것이 점점 힘을 받아 가며 완전히 모양을 갖추고 일어서자 데미안이 팬티를 벗어 버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쭈그리고 앉아 그의 것을 잡고 구멍에 맞춰 천천히 몸을 내렸다. 두툼한 머리 부분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만 정말 잘 안 들어가네. 젤을 챙겨 오는 건데…….’
손에 침을 뱉어 그의 것과 제 구멍을 조금 적시고는 최대한 몸에서 힘을 풀어 밀어 넣었다.
“흐으으…… 윽.”
데미안은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입술에 힘을 주고 참았다. 그 와중에도 입술에 상처가 나지 않게 노력하는 모습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으윽.”
푸욱 하며 굵은 머리가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론 조금 수월하게 들어갔다. 아래가 한 치의 빈틈없이 꽉 찬 느낌이었다. 데미안은 체이스의 사타구니 위에 앉아 조금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하아아. 이런 걸 그 녀석은 4년이나 물고 있었단 말이야? 체이스…… 나한테도 허락해 줘. 응? 제발.”
골반을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며 체이스의 것을 느꼈다.
조금만 움직여 줬으면, 힘을 다해 쳐 올려 줬으면 싶었다. 데미안은 구멍 안 깊숙한 그 어딘가가 너무 안타까웠다.
“으아악!”
그때 갑자기 허리를 잡아 오는 손길에 놀란 데미안의 몸이 펄쩍 튀어 올랐다.
“으윽!”
뒤쪽에도 힘이 들어갔는지 체이스는 눈을 찡그렸다. 그는 일어나며 몸을 빼려 했다.
“체이스…….”
데미안은 그를 제지하며 매달렸다. 그래도 몸을 물리려 하자 데미안은 그의 얼굴에 키스를 하려 했다. 체이스의 큰 손이 데미안의 턱을 잡았다.
“윽.”
순간 턱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데미안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체이스의 손아귀 힘은 풀리지 않았다.
‘젠장!’
그렇게 노력했건만 데미안의 입술이 터져 버렸다. 비릿한 피 맛에 침을 삼키지 못하자 피 섞인 침이 데미안의 턱과 체이스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아무리 난잡하게 놀아나도 친구끼리 붙어먹는 취미는 없는데.”
체이스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데미안은 체이스를 뚫어 버릴 듯 째려봤다.
“아니면…… 이제부터 친구 하지 말자는 말이야?”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어 데미안의 눈이 커졌다.
“선택해. 선을 넘으면 이제부터 너와 난 단순한 파트너야. 섹스 파트너.”
둘은 잠시 그대로 대치했다.
“흐윽.”
데미안의 턱을 잡고 있던 체이스의 손에 힘이 풀렸다. 아래를 강하게 조여 오며 빙글빙글 움직이는 데미안의 몸짓이 무슨 뜻인지 뻔했으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봐. 넌 평생 나와 함께할 수 있어.”
“친구 따위 이제 지긋지긋해.”
“싫증 나면 언제 끝나도 끝날 관계야. 난 섹스 파트너한테 일말의 배려도, 관심도 없어.”
데미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냥 꼴리면 쑤시고 흔드는 거지. 풀릴 때까지. 다정하지도, 일반적이지도 않아.”
그러자 데미안이 멈췄던 허리를 다시 살살 돌렸다. 그러곤 체이스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래.”
체이스는 데미안의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대로 몸을 돌려 그를 침대에 찌그러트리듯이 눕혀 누르며 으르렁거렸다.
“네가 선택한 거야. 그러니 각오해. 요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거든. 안 그래도 여기서 풀었다가는 누구 하나 아작 날 것 같아서 참았는데 잘됐네.”
“으윽. 너만 스트레스가…….”
“시끄러워. 엉덩이나 벌려.”
“아아악! 으읍. 흐으윽.”
체이스는 큰 손으로 데미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한쪽 허벅지를 힘껏 쥐고 내리누르며 그대로 박아 넣었다. 젤도 없이 처음부터 거칠게 박아 대는 움직임은 그의 말처럼 딱 스트레스 해소일 뿐이었다.
퍽! 퍽! 퍽! 그는 같은 속도로 일직선으로 박기만 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데미안의 얼굴이 터질 것같이 달아올랐다. 체이스는 데미안을 거칠게 돌려 눕혔다.
“크하악. 하악. 윽. 숨 막…… 으윽.”
체이스는 데미안의 등을 발로 내리누르고 엉덩이만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곤 다물어지지 못하고 빠끔하게 뚫린 데미안의 구멍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다시 단숨에 그의 안에 박아 넣자 투둑, 기어이 어딘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화풀이에 가까운 그의 행동은 계속 반복되었다.
* * *
저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끊어지다가 다시 들리기를 반복했다. 멍멍하게 들리다가 선명하게 들리기도 했다.
‘물소리……? 샤워? ……체이스!’
“윽!”
같이 준비하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이는 순간 어마어마한 통증이 데미안을 덮쳤다. 몸은커녕 눈꺼풀조차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말을 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짧은 신음에도 갈라진 목구멍은 불이라도 난 듯 화끈거렸다. 데미안은 한참을 그의 샤워 소리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체이스…… 꿈이 아니었네.’
온몸의 통증이 점점 선명해질수록 어젯밤의 일도 뚜렷해졌다. 그러나 의식은 자꾸만 멀어지려고 했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체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기하고 있다가 일어나면…… 준비……. 혼자…… 그렇게……. 나중에 다시…….”
“네. 알겠습니다.”
띄엄띄엄 들리는 그의 말소리 중에 결국 바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감겨 있던 데미안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햇빛?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다시 잠들었나? 기절했나?’
데미안은 몸을 조금 움직여 보려 했다.
“으으윽!”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온몸이 조각조각 나눠진 것 같은 고통이었다. 얕은 숨에도 갈비뼈부터 시작해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는 잠시 그대로 누워 숨을 골라야 했다.
‘젠장.’
주변이 조용해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침대 근처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체이스는 아니었다.
‘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