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9)

6장.

“하아…… 딜런. 누가 오면 어떡해.”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딜런은 다원을 밀어붙였다. 다원의 가슴을 더듬는 딜런의 손이 더 집요해졌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피해 보지만 용케도 그의 손은 다원의 작은 젖꼭지를 찾아냈다. 그 젖꼭지를 비틀어 댈 때마다 다원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흐으응.”

“다원아. 정말 못 참겠어.”

딜런의 손이 다원의 속옷 안을 파고들었다. 그와의 섹스에 익숙해진 몸은 그가 주는 쾌락에 이미 한껏 흥분해 있었다.

“너도 좋잖아. 어? 안 돼? 하자. 응?”

“그래도…… 이런 곳에서는 무섭다고. 들키면 어떡해.”

“괜찮아. 내가 문 잠갔어. 걱정 마.”

딜런이 다원의 입술에 키스를 하며 그의 것을 쓸어 올렸다. 딜런의 두툼한 혀가 입천장을 꾹 눌러 비볐다. 살짝 젖어 있는 작은 구멍을 엄지로 살살 굴릴 때마다 다원은 척추를 타고 찡하고 전기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으응.”

다원에게서 나른한 신음이 흘러나오자 딜런은 그의 입술을 놓아주고 그의 상의를 들어 올렸다. 젖꼭지를 이로 살살 깨물고 핥아 주자 다원의 등이 뒤로 휘어지며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음, 딜런. 하아.”

딜런의 손가락이 다원의 엉덩이 쪽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다원에게서 흘러나온 프리컴만으로는 메마른 채 꽉 다물린 뒤쪽 구멍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너 아프게 하는 건 싫은데…….”

젖은 가슴에 딜런의 입김이 닿을 때마다 싸늘한 간지러움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럴 때면 다원은 몸에 소름이 돋으며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다원의 배에 얼굴을 비비며 끙끙 앓던 딜런이 무릎을 꿇고 다원의 아래로 내려갔다.

“딜런…… 하아. 흐윽.”

다원의 것을 덥석 삼킨 딜런은 처음부터 강하게 빨아 당겼다. 그의 의도는 명백했다. 다원도 한 번에 몰려오는 쾌락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다원이 딜런의 손을 잡아 가슴 위에 올려 주자 딜런이 그의 젖꼭지를 잡고 비틀어 댔다.

“아아.”

딜런의 머리를 잡고 허리를 들썩이던 다원의 상체가 앞으로 무너졌다.

“하아…… 하악. 딜런, 어떡해. 으윽.”

딜런은 다원의 것이 꿀렁거리며 정액을 토하는 것에 맞춰 빨아 당겼다.

“하아.”

퉤. 그의 손바닥 위에 뱉어진 하얀 정액을 보자 다원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딜런의 입술엔 아직 다원의 정액이 남아 있었다.

‘윽, 어떡해. 생각했던 거보다 더 야해. 부끄러워.’

“잘 물고 있어.”

딜런은 다원의 입에 그의 티셔츠 자락을 물려 주었다. 다원은 차가운 타일 벽에 두 손을 포개어 얹고 가슴과 얼굴을 기댔다. 딜런의 손이 다원의 골반을 잡고 뒤로 당겼다. 그러곤 엉덩이 골 사이에 방금 그가 토해 낸 정액으로 범벅이 된 손을 비볐다. 곧 꿀쩍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딜런의 손가락 하나가 다원의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흐으윽.”

좀 전보다야 훨씬 나았지만 젤보다는 뻑뻑했다. 딜런의 손가락이 늘수록 다원의 억눌린 신음이 입에 물린 티셔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딜런은 얼른 손가락을 크게 돌려 그가 느끼는 곳을 찾았다. 동시에 그의 가슴을 쓸어 주며 등에 입을 맞추었다.

“다원아, 느껴져? 응?”

“으으응. 응.”

다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딜런이 조금 더 깊이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다원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입이 벌어지고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딜런은 손 위로 내려온 티셔츠 자락을 다시 다원의 입에 물려 주고 반쯤 일어선 그의 것을 잡아 천천히 흔들었다.

“이제 들어간다.”

다원의 입과 볼에 가볍게 키스한 그는 조금 젖어 든 구멍 안으로 머리를 밀어 올렸다. 벽을 짚고 있던 손등에 다원은 이마를 비볐다. 그 모습을 보며 딜런은 느리게 하지만 쉬지 않고 그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 딜런. 빡빡해. 흐윽.”

다원의 손이 딜런의 장골을 밀어 냈다. 정말 아픈지 다원의 안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의 안에 반쯤 들어간 딜런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딜런은 다원의 손목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당겨 올리며 다시 밀고 들어갔다.

“아파. 천천히……. 딜런. 흐윽.”

“미안해. 멈출 수가 없어. 힘을 빼 봐, 다원아.”

딜런은 달래 주듯 다원의 것을 앞뒤로 살살 흔들었다. 그의 안쪽이 다시 움찔거리며 길을 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둘의 아랫도리가 빈틈없이 딱 맞물렸다. 딜런은 아무 말 없이 다원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만지작거렸다. 마치 잘했다는 듯이.

그는 다원의 양쪽 골반을 힘주어 잡고는 엉덩이에 제 아랫도리를 비볐다. 말랑하던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딜런의 입술이 다원의 목덜미부터 가지런한 척추를 따라 쭉 쓰다듬어 내려왔다.

“으으음.”

다원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안쪽이 쫀득하게 조여 왔다.

“하아. 너무 좋아. 짜릿해, 다원아.”

다원의 엉덩이에 손을 올리고 딜런이 앞뒤로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뻑뻑하던 다원의 안이 젖어 들었다. 움직임이 수월해지자 딜런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흐음.”

흥분한 딜런이 다원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다원을 벽으로 눌렀다.

“으윽.”

벽에 닿을 듯 말 듯 버티던 다원은 온몸에 힘을 주어 딜런의 아랫도리에 엉덩이를 바짝 밀어 비볐다. 안쪽에 힘을 꽉 주고서.

“하아. 으으으. 다원아, 너무해……. 쌀 뻔했어.”

상체를 살짝 틀어 딜런의 목에 팔을 두른 다원이 아래위로 엉덩이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너 오늘 너무 거칠어.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은 싫어.”

잠시 멈칫한 딜런이 다원의 배와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고는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미안해. 내가 너무 서둘렀어. 너를 빨리 느끼고 싶어서 그랬어.”

다원은 딜런의 아랫도리를 엉덩이로 밀며 크게 원을 돌려 비볐다. 그의 것을 빼내고 돌아선 다원이 딜런의 가슴을 밀어 변기 위에 앉혔다. 다원은 바지를 마저 벗어 걸어 두고 그의 위에 걸터앉았다.

“그럼 미안할 짓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해 보라구. 내 공공장소에서의 첫 경험을 망치면 앞으로 얄짤없어.”

다원은 단단하게 선 딜런의 것을 깔고 앉아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딜런은 여유를 찾은 듯 다원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젖꼭지를 할짝할짝 핥으며 올려다보는 딜런을 다원도 꽉 끌어안았다.

“하아, 딜런. 너무 좋아.”

딜런의 것이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자 다원에게서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으음. 넌 내 거야. 내 곁에만 있어, 다원아.”

딜런은 진심을 전하며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 * *

결국 딜런과 다원은 아버지의 저녁 식사까지 다 챙겨 본 뒤 해가 지고 나서야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운전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렇게 너랑 드라이브하는 건 좋은 거 같아. 신기하다. 그치?”

“나도 그래. 함께하니까 좋아.”

신호가 바뀌고서야 서로의 얼굴에서 눈을 떼는 두 사람이었다.

“비 오네.”

“매운 거 당긴다.”

다원은 비가 오는 날이면 매운 쫄면이나 닭볶음탕, 국물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먹고 들어갈까? 문을 연 한식당이 있으려나?”

다원은 딜런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딜런은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그를 게슴츠레하게 바라봤다.

“우리 장 보자! 내가 전에 해 준다던 거 오늘 해 줄게.”

“라, 라보?”

“응. 라볶이.”

“오 예! 다원이 해 주는 라보다.”

“크크크. 아, 완전 귀여워.”

고개를 잠시 갸웃한 딜런이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이며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마트에 들른 두 사람은 장을 보기 시작했다. 물론 딜런은 카트를 운전할 뿐 오늘 장을 보는 건 다원 하나였다.

“떡이랑 고추장, 간장 사고. 파도 사고……. 냉장고에 양파가 있던가?”

“어머니는 지하 창고에 보관하시는 거 같던데…….”

“전에 내가 마지막 남은 거 꺼냈는데 다시 산 거 같지 않아. 이런 덴 적은 양을 팔지 않으니 고민이네.”

다원은 양파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제일 작게 포장된 녀석으로 하나만 집어 들었다.

“그게 그렇게 고르기 어려운 일이었어?”

다원이 ‘뭘 모르시네.’ 하는 눈으로 딜런을 바라봤다.

“오늘 우리 배 속으로 사라질 아이만 고르느라 그런 거야. 어머니의 취향에 부합하는 녀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그게 뭔데?”

딜런은 도대체 어머니의 취향에 부합하는 양파란 무엇일까 생각해 봤지만 머릿속에는 똑같이 생긴 양파만 떠오를 뿐이었다.

“나야 모르지. 아무튼 쟤네들 중엔 없었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딜런은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 요 녀석 디저트로 먹자. 매운 거 다음은 단 게 진리야.”

다원은 초콜릿 과자를 하나 담았다.

이어서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소포장된 어묵을 세 봉지 집어 든 그는 라면 코너 앞에 서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아이처럼 웃고 있는 다원을 보며 딜런도 따라 웃었다.

“넌 많이 먹을 것 같으니까 많이 사자. 남은 건 방에 숨겨 놓으면 어머니께 들키지 않을 거야.”

“그렇게 중요한 건 차에 숨겨야지.”

“오. 모처럼 똑똑한 사장님의 모습이군요.”

“하! 이제 알았어? 그럼 다 산 거야?”

“응. 어디 보자, 빠진 게……. 헉! 뭐가 이렇게 많아?”

다원은 생각보다 꽉 찬 카트를 보며 놀랐지만 아무리 봐도 뺄 것이 없어 계산대로 향했다.

물건을 바코드에 찍는 동안 다원이 지갑에서 카드를 빼려는데 딜런이 얼른 핸드폰을 들이밀어 버렸다. 뜬금없이 핸드폰을 들이미는 딜런의 행태를 빤히 바라보던 다원은 ‘띠릭!’ 하며 결제가 되는 소리에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딜런이 칭찬은 필요 없다는 듯 씩 웃었다.

하지만 다원이 누군가. 딜런 컴퍼니의 하나뿐인 회계 직원 아닌가.

“여기 적립 카드요!”

다원의 지갑에서 나오는 마트 전용 적립 카드에 딜런이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다원이 비닐봉지 하나를 들려 하자 잽싸게 두 개 다 낚아챈 딜런이 차 뒷자리에 장 본 것을 실었다. 둘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먹고 씻을까? 씻고 먹을까?”

“오호. 이러나저러나 완전 멋질 것 같은데.”

다원은 나름 심각한 질문에 동문서답을 내어 놓는 딜런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주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 말뜻을 알아차린 다원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정말 이럴 때 보면 아주 짐승이 따로 없어.”

“하하하하!”

차 안에는 딜런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미리 전화를 해서인지 캐서린은 이미 잠든 후였다. 둘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일찌감치 방에 들어간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신호를 보내오는 배꼽시계 때문에 둘은 일단 부엌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다원의 진두지휘하에 오늘의 요리, 라볶이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달걀을 삶아야 해. 전에 어머니가 달걀은 이만큼만 삶아야 한다고 했어.”

다원이 작은 냄비에 달걀을 세 개 넣고 타이머를 신중하게 맞췄다. 장 본 것들을 대충 싱크대 위에 늘어놓고 떡을 꺼내 볼에 물을 받아 담갔다. 그사이 타이머가 울리자 다원은 얼른 냄비를 싱크대 안에 내려 두고 찬물을 틀었다.

“자! 얼른 와.”

종종거리던 다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딜런은 다원의 부름에 냉큼 그의 곁에 섰다.

“달걀은 떡볶이의 제2의 심장과 같지. 그러니 신중하게 까. 깐 건 이 그릇에 예쁘게 담아 줘.”

딜런은 아직도 뜨거운 삶은 달걀을 흐르는 차가운 물 아래에서 조심조심 까기 시작했다. 이제 막 삶아진 달걀은 뜨겁고 연약해서 다루기가 힘들었다.

‘완전 다원이랑 비슷하잖아? 최선을 다하자.’

옆에서는 미리 씻어 둔 파 하나를 도마에 올려놓은 다원이 칼을 집어 들었다.

“파는 내가 손질할게. 이 하얀 놈은 단맛을 내 주니까 오래 익혀야 한대.”

“파란 꽁다리는?”

“그냥 예쁘라고 넣는 거지.”

술술 나오던 말과는 달리 칼을 잡은 다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설픈 칼질을 지켜보는 딜런의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다원이 못하는 게 있다니 색다른데…….’

다원은 캐서린이 가장 아끼는 파스타 접시에 다 썬 파를 옮겨 담고는 고추 세 개를 아주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내려놓았다.

“고추는 너한테 너무 매우니까 패스하자.”

딜런은 발끈했다.

“뭐지? 이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은. 넣어! 세 개 다 넣어!”

“안 돼. 그럼 오늘 배가 터질 때까지 물을 마셔 댈 거야.”

“넣어!”

“안 돼! 정말 맵다고. 이건 나한테도 옵션이야.”

딜런의 표정을 보아하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다원은 꾀를 냈다.

“그럼 양파를 까서 썰어 봐. 고추보다 덜 매우니까. 이걸 울지 않고 손질한다면 고추도 넣어 주지.”

다원은 딜런이 곱게 깐 달걀을 가져가는 대신 흙투성이 양파를 손에 쥐여 주며 조건을 걸었다. 피할 이유가 없는 딜런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이까짓 양파가 뭔 대수라고. 다 까 주겠어.”

잠시 뒤 다원은 고추를 잘 챙겨 냉장고에 넣었다. 딜런은 정말 억울했다. 양파 까기는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양파는 써는 것이 더 고역이라는 걸 몰랐다.

‘뭔가 억울해. 당한 기분이야.’

처음 시작이 무엇인지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딜런이 다원에게 따지고 들었다.

“이건 너무 희한한 기준이잖아. 편파적이라고!”

“지금은 내가 요리사니까 상관없어. 헤헤.”

다원은 딜런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른 딜런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물에 고추장을 세 번 넣고, 마늘도 넣고, 간장도 두 번 넣고. 원래는 설탕이나 올리고당을 넣는데 나중에 꿀을 넣자. 그게 더 맛있어.”

양념을 고루 저어 주고 잠시 기다리자 부글부글 붉은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오. 빨간 거품이 부글거리는데. 용암 같아.”

역시 단순한 딜런이 아주 좋아했다.

“귀여워.”

쪽! 다원이 정말 귀엽다는 얼굴로 딜런의 뺨에 뽀뽀를 했다.

“정말 귀여운 게 누군데 자꾸 귀엽대?”

꾸욱! 딜런은 아예 다원의 뺨에 입술을 붙여 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방심하지 않고 있던 다원은 얼른 불을 줄였다. 가스레인지를 더럽히는 것은 캐서린에게는 거의 반란이나 마찬가지이니까.

“휴우. 캐서린 화산이 폭발할 뻔했네.”

“딜런, 다 이른다?”

“안 돼요. 제발 봐주세요.”

딜런이 너스레를 떨었다.

“근데 딜런, 너 떡은 먹어 봤어? 이거 안 먹어 본 사람들은 고무 씹는 기분이라던데.”

“전에 한국에 갔을 때 한 번 먹어 봤어. 떠구.”

“떠구? 아, 떡국. 그럼 떡도 많이 넣어야겠다. 야채랑 어묵도……. 넌 많이 먹을 거니까 다 넣어. 고춧가루는 조금.”

이제 제법 모양을 갖추어 가는 모습에 둘의 손이 바빠졌다.

“이게 바로 라볶이의 ‘라’를 담당하는 라면이야. 그리고 이 스프가 바로 진리지.”

다원은 라면을 두 개 뜯어 넣고 스프는 반 개만 넣었다.

“제2의 심장도 넣어 주고.”

“우와. 비주얼 죽인다.”

붉은 라볶이 위에 하얀 달걀 세 개가 놓이자 딜런은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흥분한 딜런이 달려들까 봐 다원은 얼른 그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다.

“이제 거의 다 됐어. 이때 해야 할 일이 바로!”

다원은 만두를 꺼내 기름을 낙낙하게 두른 프라이팬에 하나씩 넣었다.

“으아아아. 기름 튄다. 잔소리 어쩔 거야.”

딜런이 소리 죽여 울부짖자 다원이 픽 웃었다.

“뚜껑을 덮으면 되지. 이렇게.”

“아, 그런 거였어?”

사실 다원도 생각보다 격렬하게 튀는 기름에 조금 움찔했지만 애써 담담한 척했다.

“아! 맥주랑 맥주 잔 얼려 놨어?”

“걔네는 얼리면 터질 텐데.”

“적당히 해야지. 얼른 넣어 놔, 지금 당장.”

“넵, 선장님!”

한 번씩 다원은 생각지도 못한 면에서 터프한 모습을 보였다. 딜런은 다원의 맥주 취향을 잘 기억해 두며 냉동실에 맥주와 맥주 잔 두 개를 넣어 두었다. 돌아서자마자 딜런은 눈이 동그래졌다. 다원이 탄 만두 하나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만두가 좀 탔어. 어쩌지? 괜찮아?”

“응, 괜찮아. 전혀 문제없어.”

딜런이 보기에도 그 만두의 한쪽 면은 새까맸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요리를 뚝딱 완성하고는 고작 그거 하나에 쩔쩔매는 다원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으니까. 어느새 다원은 피클 병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가 담근 피클도 같이 먹자.”

그렇게 천년 같은 10여 분을 보내고 둘은 다시 식탁에 마주 앉았다.

“라면부터 먹어. 라면은 불면 버려야 해.”

“음식은 버리면 안 돼.”

“안 돼. 불은 라면은 맛없어.”

“그렇다면 불기 전에 다 먹어 주지.”

딜런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로록 소리를 냈다. 거의 라면 한 개의 3/4에 가까운 양을 한 번에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의 양 볼이 햄스터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다. 피클까지 야무지게 구겨 넣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다원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라볶이가 입맛에 맞았던지 딜런은 다원이 놀려도 끄떡도 없이 입 안으로 모조리 다 쓸어 넣고 있었다. 딜런의 기세에 다원도 핸드폰을 내려 두고 얼른 떡 하나를 집어 먹었다.

“와. 나 완전 요리 천잰데.”

“「초온좨」?”

“응. 천재!”

양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는 다원이었다. 딜런도 얼른 다원을 따라 해 보였지만 그의 시선은 라볶이에 꽂혀 있었다. 더 이상 다원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는 이젠 어묵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다원과 딜런은 별다른 말 없이 게 눈 감추듯 떡볶이 떡 한 봉지, 어묵 소포장 세 봉지, 삶은 달걀 세 개, 라면 두 봉지, 맥주 네 캔, 피클 두 접시, 군만두 열 개를 먹어 치웠다. 물론 그중 3/4은 딜런의 위 속에 들어갔다.

배불리 먹은 후 뒷정리를 한 둘은 욕조에 물을 받고 씻을 준비를 했다. 초록색 카모마일 입욕제와 분홍색 장미 입욕제를 든 다원이 무엇을 쓰겠냐고 묻자 딜런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남자는 역시 분홍이지.”

“뭐?”

그의 해괴한 논리에 다원이 입욕제를 든 채 굳어 버렸다. 딜런의 손이 다원의 손등을 살짝 치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장미 향이 욕실에 가득 퍼졌다.

* * *

공식적인 휴일인 월요일이면 딜런과 다원은 어김없이 보스턴의 어머니 집을 찾았다.

얼마 전까지 딜런과 다원이 지내던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벽지도 단순한 색상으로 바뀌었고 침대도 침구도 심플한 것으로 교체되었다. 화려한 조각이 인상적이던 화장대가 있던 자리엔 책이 가득 꽂힌 책상이 자리 잡았다. 이 방의 주인이 된 네이선의 교재였다.

그는 딜런의 쌍둥이 동생으로 원래 그 방의 주인이었다고 했다. 발달 장애로 시설에 들어가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제 딜런과 다원은 이 집에 오는 날이면 사무실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 서로의 몸을 딱 붙이고 잠들었다. 그것은 다원에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딜런의 곁에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으니까. 일부러 다가가지 않아도 그를 위로할 수 있으니까. 어떤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 없이 그저 옆에 누워만 있으면 되니까.

딜런이 어머니와 동생, 자신과 함께라는 걸 조금이라도 위안으로 느끼기를 다원은 바랐다.

* *

얼마 전. 그날은 아침부터 조금 이상한 날이었다. 딱히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랬다. 딜런과 다원은 번갈아 샤워를 하고 노란색에 가까운 초록색 카모마일 향 입욕제를 푼 물에 함께 몸을 담갔다. 다원은 느긋하게 반신욕을 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피곤하고 나른했다.

‘자고 싶은 건 아닌데 눕고 싶어. 딜런도 그런가?’

그는 다른 날과 달리 말이 없었고 다원을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다원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와 따뜻한 체온이 좋아 그렇게 계속 안겨 있고 싶었지만 잠시 후, 물에서 그를 끌어내야만 했다. 딜런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마 내일 아침이 되어도 계속 그렇게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기분 그대로 침대로 직행하고 싶은데……. 제발 얌전히 일어나…….’

다원의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딜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물에서 나와 주었다. 나란히 침대에 누웠지만 둘 다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뭘 하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그건 마치 그 전화를 기다리기 위한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과정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새벽의 고요함을 뚫고 전화벨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놀란 다원과 딜런이 거실로 나왔을 때 캐서린은 이미 방문을 열고 나와 있었다. 셋은 말없이 각자의 방문 앞에 섰다. 화려한 장식이 잔뜩 들어간 옛날 아날로그식 전화기만 거실 소파 옆 테이블 위에서 요란하게 울었다. 길어지는 벨 소리에 움직인 것은 딜런이었다.

“……네. 곧 가죠.”

딜런은 수화기를 내려 두고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캐서린은 그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 말없이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다원도 딜런의 옷을 침대에 올려 두고 옷을 챙겨 입을 때였다. 딜런이 다원을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딜런이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원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하지만 다원은 이미 딜런을 마주 안고 울고 있었다. 집 안엔 다원의 낮은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여러 가지 장치들을 다 뗀 앤서니의 모습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딜런은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 보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손을 얹고 한참을 서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딜런의 손끝을 보자 다원은 왈칵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딜런도 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딜런은 다원에게 캐서린을 부탁한다는 짧은 말만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하아. 하아. 후우.”

딜런은 차가운 새벽바람이 폐 속으로 들어오자 그나마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서너 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그는 병원 중앙현관 근처 벤치에 앉았다. 나란히 놓인 것 중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작은 벤치였다.

중앙 현관 주변은 불빛에 낮처럼 환했지만 그 벤치만은 희한하게도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그곳에 앉아 방금 앤서니가 숨을 거둔 병원을 바라보자 그곳은 마치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보였다.

“하아. 아버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죽음이었다. 앤서니가 바다 위에서 늘 하던 말대로 그저 이곳에서의 짧은 인생이 막을 내린 것뿐이었다. 앤서니는 오랜 시간 버텨 주었다. 본인이 떠난 뒤 남겨진 가족들과 친구들이 아쉬워하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을 만큼이었다.

사실 다원을 만나기 전, 앤서니와 네이선 둘 모두 돌봐야 했던 캐서린은 조금 힘들어했다. 처음에는 딜런도 그녀를 도왔다. 하지만 네이선은 물론이고 오랜 시간 치매를 앓던 앤서니 역시 딜런을 불편해했다. 특히 앤서니는 기억의 대부분이 희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딜런에게만은 병들고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했다.

그렇게 딜런은 지쳐 갔고 둘을 혼자서 돌보게 된 캐서린도 지쳤다. 결국 그녀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네이선을 시설에 보낼 때 캐서린은 어머니로서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아마 그때 캐서린이 무심코 한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너희 아버지가 시설에 가는 게 맞는데…….’

하지만 캐서린은 그러지 않았다. 둘 다 똑같이 소중했지만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훨씬 짧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과 보살핌을 받은 네이선은 잘 적응했고 많은 변화를 보여 주었다.

딜런은 그제야 동생을 데리고 와야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앤서니 역시 막내아들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할 게 뻔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한 거지? 돌아가시기 전에 네이선을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그가 정말 떠나갈 줄 몰랐다고, 뜬금없이 나타난 인간들 때문에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다 비겁한 변명일 뿐이야.’

딜런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는 라이터를 손에 쥐고 굴렸다.

‘정말 오랜만에 울고 싶네. 아, 이미 다원을 안고 실컷 울었지.’

그래도 딜런은 울고 싶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죽음을 듣는 순간부터 그랬다. 바다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갑판에 앉아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싶었다. 파도가 울음소리를 감춰 줄 테니 그 위에서라면 정말 가슴이 뻥 뚫릴 때까지 마음 놓고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조용한 거실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딜런은 속으로 울음을 삼켰지만 다원을 보는 순간 어쩐지 눈물이 흘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냥 다원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어떤 말로 너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 사실 위로의 말을 떠올려 본 적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그래서…… 그래서……. 지금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미안해. 흑.’

딜런은 아직도 가슴에 다원의 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여 잔뜩 몸을 웅크렸다. 하늘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를 안고 있던 그 순간, 악마의 속삭임이 떠오른 것이다.

‘누가 그래요? 그 녀석이 당신 옆에 있다고.’

분명 곁에서 같이 울어 준 그인데, 지금도 자기 대신 캐서린을 위로해 주고 앤서니 곁을 지키고 있는 그인데 딜런은 제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 저 정말 사이렌에 홀렸나 봐요. 이러다 정말 배가 좌초되겠어요. 어떡해요.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길을 잃었어요. 아버지. 아버지.’

* * *

앤서니의 장례는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치러졌다. 익숙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교회에서의 장례식은 가족을 보내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었다. 캐서린도 딜런도, 앤서니의 친구들도 모두들 조금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의 유골은 작은 함에 담겼다. 캐서린은 그것을 보스턴의 집으로 가져갔다.

“나중에 내가 세상을 떠나면 같이 묻어 줘.”

본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캐서린의 모습에 다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장례식 후 딜런은 많이 바빴다. 사람은 그냥 왔다가 가는 게 아니었다. 우선 앤서니의 사망 신고와 그와 관련된 서류 정리를 해야 했다. 그 후 딜런은 네이선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왔다.

캐서린과 약간의 의견 조율도 필요했다. 처음 딜런의 계획은 1층이나 2층 세입자 중 한 집을 내보내고 자신들이 입주하는 것이었다. 항구 마을의 집은 관광 용도로 돌려도 되고 작은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강했다.

“절대로 안 돼!”

“왜요?”

“우선 이 건물에서 내보낼 세입자는 없어. 그들은 이 건물의 우아함을 누릴 자격이 충분한 이들이야.”

“어머니.”

캐서린의 이유는 다원에게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너무 당당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다원은 물론이고 딜런도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집은 우리 가족의 역사가 깃든 곳이잖니. 남의 손길이 타는 게 싫어.”

네이선의 방을 단장할 때도 애를 먹었다. 다원은 몰랐지만 캐서린은 네이선과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장식은 그리 좋지 않다고 했다.

“어머니. 혹시 그건 어머니 의견 아니에요?”

딜런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의 말에 열심히 끄덕이던 다원의 고개가 점점 느려졌다.

“내가 반은 의사야. 아니, 웬만한 젊은 의사보다 나아.”

결국 캐서린의 컬렉션을 재배치하기 위해 딜런은 항구 마을의 집과 이곳을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보스턴 집엔 그 방의 물건을 놔둘 곳이 없었다. 항구 마을 집 방 하나를 정리하고 짐을 옮겨야 했다.

딜런이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다원도 바빴다. 보스턴 집에 올 때마다 자신들이 지낼 사무실 옆 창고 방을 정리해야 했다. 캐서린도 앤서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온 집을 들쑤셨다. 세 명은 각자 아무 말 없이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집과 함께 모두의 마음이 나름대로 정리되어 가던 날, 딜런은 네이선을 데리고 왔다. 둘은 일란성 쌍둥이로 모든 것이 같았지만 네이선은 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달랐다.

네이선은 7살의 나이에 멈춰 있다고 했다. 다원은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굳이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관심이 없거나 알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그냥 그라는 존재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안녕, 다원.”

첫 만남에 그는 먼저 다원에게 인사를 해 왔다. 정확히 눈을 마주 보고서. 다원은 그의 어디에서도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그냥 딜런의 동생, 네이선이었다. 다원은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네이선.”

집으로 돌아온 네이선은 사회 복지 센터에서 소개한 직업 전문 학교에 다니며 건물 시설 보수 기능사와 관련된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다른 것들에도 관심을 보였다.

“어머니. 이곳에는 다양한 수업이 있어요. 왜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저 내년에는 요리반에도 등록할래요.”

“네이선,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제가 요리를 하면 어머니와 반반 나눠서 할 수 있고 좋잖아요. 아예 처음부터 자격증반을 등록할 거예요.”

캐서린은 행여나 좋지 않은 결과에 그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이 대단했다. 하지만 다원이 보기에 캐서린은 네이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눈에는 네이선이 정말 7살로 보이나 봐.’

소소한 집안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오래되고 까다로운 가전제품의 수리와 더 나아가 건물의 크고 작은 하자 보수까지 네이선의 손이 가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도 캐서린은 그를 늘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걱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한동안 기운이 없던 캐서린은 네이선을 걱정하느라 무척이나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은 다원에게 네이선이 물었다.

“다원, 왜 웃어?”

“어머니가 행복해 보이셔서.”

네이선은 하얀 테이블보 여러 장을 다림질하고 있는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늘 그래.”

“넌 몰라.”

네이선이 의아한 눈으로 다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캐서린은 딜런과 다원이 오는 날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 앞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다가 딜런을 데리고 건물 곳곳을 활보했다.

“어머니와 딜런의 모습은 좀 아슬아슬했어. 둘은 뭔가 집중할 게 필요한 것 같았어. 아니면 피할 곳이거나. 그게 건물 보수였던 것 같아.”

“고집이 세, 둘 다.”

“그건 인정.”

다원은 오래된 건물이 잘 유지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정성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 정성과 노력이 별 탈 없이 한데 모였으면 좋으련만 캐서린과 딜런은 늘 티격태격하며 부딪쳤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정도였다니까.”

“풋!”

“웃지 마. 나도 내 수준을 잘 알아.”

다원이 한국에서 살았던 오피스텔은 한 번도 세면대나 싱크대 배수관이 고장 나지 않았다. 갑자기 수도에서 녹물이 나오거나 한겨울 보일러가 고장 난 일도 없었다. 더구나 페인트칠을 하거나 개인적으로 방역을 한 적도 없었다.

체이스와 살았던 집도 그저 입주민 공지란에 적힌 사항을 확인하고 때맞춰 문을 열어 주면 되었다. 그마저도 다원이 집에 머무는 시간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다원에게 집을 관리하거나 건물을 보수하는 것은 글로만 보던 일이었는데, 캐서린이 딜런에게 요구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들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기준은 아주 깐깐하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기준이 너무 높아. 딜런이니까 반이나마 채우는 거야.”

“남은 반을 단념시키는 것도 지금은 형뿐이지.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를 만족시켰어. 어떻게든.”

“역시 아버지야.”

“보고 싶다.”

“아…….”

네이선의 말에 센티해진 다원이 탄성을 내뱉자 그가 씩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보일러를 설치한 건 아버지니까. 보수도 끝까지 책임지셨으면 좀 좋아?”

“윽, 네이선.”

다원이 팔을 툭 치자 네이선이 말했다.

“다원은 착해.”

“갑자기? 넌 멋져.”

“갑자기?”

“네이선 넌 모르지? 난 아직도 그날 네 맹활약을 잊을 수가 없어.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맹활약? 좋아해?”

“부엌 바닥이 물바다가 된 날, 기억나지?”

“그날? 응.”

네이선과 다원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월요일 아침, 네 식구가 먹은 설거지가 고스란히 쌓인 싱크대가 온 가족을 고문하고 있었다. 딜런은 싱크대 아래 마룻바닥에 물이 고이는 원인을 찾기 위해 신경이 바짝 예민해져 있었다.

오전 11시가 넘어가면서 다원은 숨도 크게 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거실로 대피했다. 캐서린과 딜런이 정면으로 맞부딪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때 네가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지하실에 내려갔잖아.”

캐서린은 마룻바닥에 고인 물을 닦느라, 딜런은 일만 벌이고 원인은 찾지 못해서 지친 상태였다. 네이선의 행방을 놓친 둘과 달리 다원은 그가 지하실로 내려가는 걸 똑똑히 보았다. 더 이상 소파에 편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그는 네이선이 내려간 지하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네이선이 지하실에서 나온 후, 캐서린은 모처럼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네이선. 그런 건 어떻게 안 거니? 엄마는 정말 놀랐단다.’

부엌의 마룻바닥에 물이 고이는 것은 싱크대 문제가 아니었다. 보일러 문제라는 것을 네이선은 어떤 원리로 미루어 짐작해 낸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자리에서 간단한 공구와 그동안 모아 둔 중고 부품만으로 뚝딱 보일러를 수리해 냈다. 거짓말처럼.

그런 아들에게 캐서린은 자신의 자랑, 수제 블루베리 막대 아이스크림을 선사했다. 마치 뜻밖의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돌아온 어린 아들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듯이.

그날 의문의 1패를 당한 딜런에게 다원은 캐서린의 수제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대신 정성을 다해 내린 아주 진하고 쌉싸름한 커피를 한 잔 건네주었다. 네이선은 달고 찬 아이스크림을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베어 먹었고 딜런은 뜨거운 커피를 소리도 없이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같은 체격과 같은 머리 색과 똑같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은 정말 달랐다.

“너희들은 정말 달라. 딜런은 어머니를 닮았고, 넌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우린 일란성인데?”

“그래도 내 눈엔 그렇게 보여.”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난 네이선이고 형은 딜런이야.”

네이선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

다원과 딜런은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마다 보스턴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다원은 거의 사무실에 머물렀고, 딜런은 관공서 일과 은행 업무를 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화요일 저녁, 전날 캐서린이 싸 준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뒷정리를 하다 보니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만있어 봐. 가게에 커피랑 우유 그리고…….”

다원은 곰곰이 가게 냉장고 안을 그려 보았다.

“허니 브레드 만들 빵 몇 개가 전부네. 윽.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다.”

비수기이기는 하지만 소품 파는 가게들처럼 아예 문을 열지 않을 수는 없어 딜런의 카페는 영업을 하고 있었다. 성실한 아르바이트생 다원은 비록 오전 늦게 열고 저녁 식사 전에 마치기는 해도 꾸준히 영업을 했다.

평소 다원은 카페 일을 하면서 회계 일도 하고, 간단한 빵과 커피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아니면 퇴근하고 오는 길에 근처 식당에서 먹거나 간단한 레토르트 식품으로 때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물 말고는 냉장고가 텅 빌 때가 있었다.

그것이 딜런과 다원에게 크게 문제 된 적은 없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빈속으로 일을 하러 나가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나만 너무 편한 것 같아. 딜런은 새벽부터 바다에 나가는데…….’

따뜻한 카페에는 손님이 뜸했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하루 종일 추운 바다에서 일하는 사장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안 그래도 기운이 없어 보이는 딜런이었다. 다원은 냉장고를 채울 겸 내일은 카페 출근 전에 마트에 들러 장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나마 캐서린의 식탁에서는 조금 활기를 띠는 딜런이었다. 다원은 둘만의 식탁에도 변화가 찾아오기를 기대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딜런은 늦게 들어오려나?’

다원은 아침잠이 많았다. 새벽에 바다로 나가는 딜런을 배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평소엔 잠자리에 들기 전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했지만 요즘 들어 딜런은 늦게 들어오기 일쑤였다. 지금까지 안 들어오는 걸 보면 오늘도 아마…….

‘오늘도 호프집에 간 건가?’

오전에는 딜런의 카페가, 밤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정 넘어서까지 하는 호프집이 동네 수다방 역할을 했다. 할 수 없이 다원은 식탁 위에 쪽지를 올려 두고 2층 침실로 향했다.

[딜런, 내일 잘 다녀와.

그리고 집에 먹을 게 똑 떨어졌지 뭐야.

카페에서 원두를 조금 가져다 놨어.

아침엔 따뜻한 커피라도 많이 들고 나가.

내일 저녁에 봐.]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다원은 아차 싶었다. 장을 봐야 하니 차를 쓰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트에 못 가면 꼼짝없이 굶어야 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에 내려온 다원은 곧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식탁 위에 딜런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

[미안해. 내가 요즘 너무 바다에만 나가 있지?

집에 정말 먹을 게 하나도 없더라.

같이 가야 하는데. 혼자라도 마트 갔다 와.

또 그 맛없고 달기만 한 빵 쪼가리 먹지 말고.

차 두고 갈게.]

“하여간 은근히 꼼꼼해. 눈치도 빠르고.”

제멋대로 날려서 쓴 글은 악필이었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다원은 암호 같은 딜런의 글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간 스스로가 대견해 쪽지를 팔랑팔랑 흔들며 몸을 흔들어 댔다. 만족감에서 나온 흥겨움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상체와 하체가 따로 움직이며 팔다리가 각자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풍선 인형 같은 몸짓은 우습게만 보일 뿐이었다.

“하아. 이놈의 몸뚱이는 정말 답이 없어.”

한동안 몸을 흔들어 대던 다원은 갑자기 뚝 하고 멈춰 서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간만에 몸을 흔들었더니 배가 고파 왔다. 싱크대로 다가가자 선반에는 새벽에 딜런이 사용하고 씻어 놓은 모카 포트가 놓여 있었다. 아침부터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딜런과 달리 다원이 빈속에 마실 수 있는 커피는 그가 모카 포트로 만들어 준 커피에 우유를 넣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집에는 우유조차 없었다.

“얼른 씻고 마트부터 갔다 오자.”

아침부터 따뜻한 쪽지를 받아 기분이 좋은 다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쳤다. 그러곤 옷을 입고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며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 딜런의 차 키를 들고 차고로 향했다.

* * *

다원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딸기의 제철을 알 수 없었다. 여름에도 딸기를 먹은 기억이 있는데, 겨울인 지금 눈앞에 큼직하고 싱싱한 딸기가 빛나고 있었다.

“여름보다 더 싱싱하고 큰데. 겨울이 제철인가?”

투명한 일회용 팩 안에 든 딸기는 정말 컸다. 서너 개면 손바닥이 다 찰 것 같았다. 얼른 딸기 철을 검색해 본 다원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우스. 그러니까 이렇게 실하구만.”

의문이 풀리자 다원의 표정도 시원하게 풀렸다. 제일 싱싱해 보이는 놈으로 두 팩을 카트에 넣었다.

고개를 들자 사람들의 고개가 사사삭 돌아갔다. 개중에는 타이밍을 못 맞춘 사람들도 있었다. 다원과 눈이 마주치자 결국 한두 명이 키득거렸다.

‘뭐야? 왜 그래? 기분 나쁘게.’

다원은 몰랐다. 딸기 팩 앞에서 시시때때로 얼굴 표정이 변하며 심각한 제 모습이 얼마나 웃겼는지.

시선을 돌린 다원은 이어서 제 팔뚝만 한 바나나를 보고 헛숨을 삼켰다.

‘이것이 기술 농업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순수하게 현대 농업의 기술 발전에 감탄한 다원은 그중 제일 큰 바나나 송이를 하나 집어 들어 카트에 넣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메이플 시럽도 샀다. 단 거 마니아 할아버지 탓에 가게에 단맛이 나는 것은 남아나지를 않았다.

“적립 카드 여기 있어요.”

적립까지 꼼꼼하게 한 다원은 기분 좋게 카페로 향했다. 가게 환기부터 시키고 2층도 창문을 열어 대충 먼지만 털어 냈다. 지금도 가끔 딜런은 이곳에서 자기도 했다. 물론 다원은 그러지 말았으면 했다.

‘차라리 그때처럼 같이 자자고 하든지. 혼자 청승이야.’

딜런은 다원의 생각보다 더 독립적이고 혼자 있기를 즐기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을 시작했다.

졸졸졸졸졸.

“으으으, 손 시려.”

딸기를 씻는 일은 고문과도 같았다. 뭉개지기 쉬운 딸기는 하나하나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씻어야 했다. 얼음보다 찬 물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다원은 시린 손을 호호 불어 가며 간신히 딸기 씻기를 마쳤다. 그리고 딸기를 담아 둘 채반을 찾다가 아차 싶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채반에 담아 씻으면 될 일을 사서 고생한 것이다. 딸기를 채반에 담아 괜히 한 번 더 씻어 보는 다원이었다.

이어서 수플레 레시피를 확인한 그는 눈높이 정도 되는 위치에 레시피를 적어 둔 포스트잇을 붙였다.

달랑 두 개가 전부인 달걀을 꺼내 흰자와 노른자를 잘 분리했다. 그다음 거품기를 꺼내 머랭을 만들기 시작한 다원은 연신 거친 숨을 내뱉었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21세기에 이런 무식한 방법이라니. 다음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투덜거리며 따로 놔둔 노른자에 박력분 두 숟갈을 넣고 베이킹파우더를 조금 넣었다. 모두 잘 섞어 준 다음 머랭이 꺼지지 않도록 살살 넣은 다원은 잠시 숨을 돌린 후 달구어진 팬에 버터를 잘라 넣었다.

곧 지지지지직, 맛있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기가 가게 가득 퍼져 나갔다.

“오, 대박이다. 불은 약하게 하라고 했지?”

포스트잇에 빨간색으로 밑줄을 그은 ‘불! 약하게’ 부분을 확인하고 가스 불을 조절한 그는 반죽을 한 주걱 퍼서 팬에 올렸다.

이윽고 완성된 수플레는 영 찌그러진 모양이었다. 다원은 못난이 수플레를 접시에 올리고는 무식하게 큰 바나나도 대충 썰어 그 위에 올렸다. 딸기도 반으로 잘라 올린 후 방금 사 온 메이플 시럽을 듬뿍 뿌렸다. 마지막으로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레인지에 돌릴 때였다.

“뭐가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거야?”

“신메뉴 개발했어?”

“그럼 우리가 시식을 해 봐야지.”

“암, 암. 그렇고말고.”

단골손님들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찾아왔다.

“앉으세요. 이제 막 만들었어요.”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온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한 접시씩 다 돌린 다원은 그들이 돌아간 후 겨우 수플레 한 귀퉁이와 우유 한 모금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디저트 메뉴가 딜런의 카페에 만들어졌다.

* * *

너무 지친 다원은 5시가 되기 전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딜런이 항구에 도착했겠지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쳇.”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건 십중팔구는 늦게 온다는 거였다. 역시나 예상했던 내용의 메시지에 다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으로 들어가 아침에 세탁을 마치고 건조기에 넣고 간 세탁물을 꺼내 침대에 올려 두었을 때였다.

꼬르르륵. 다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제 배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제가 수플레 한 조각밖에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해물 스파게티를 해 먹으려 했지만 다 귀찮았다. 어차피 혼자 먹을 거, 대충 때우기로 했다.

다원은 식빵 하나를 토스트기에 넣고 달걀을 하나 구웠다. 커피는 이제 냄새도 맡기 싫어 탄산수를 땄다.

“캬아.”

강력한 탄산에 목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식탁 의자에 앉아 싱크대 쪽에 난 작은 창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저 기계적으로 빵 한 입 베어 물고 우걱우걱 씹었다. 목이 막힌다 싶으면 탄산수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없었다.

다원은 반도 먹지 않은 빵과 반 정도 남은 달걀 흰자를 버리고 2층으로 향했다. 다원은 그러곤 씻고 나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건조기에서 꺼내 둔 마른 수건을 하나하나 갰다.

‘아, 정말 빨래 개는 일은 왜 이렇게 힘들어? 귀찮아 죽겠네, 정말.’

간신히 수건을 다 개고 침대 옆의 협탁 위에 놓인 위드윅 캔들에 불을 붙였다.

‘잠 잘 온다고 해서 샀는데 순 뻥인 것 같아.’

캔들 옆에 놓아둔 작은 가습기도 켠 다원은 옆으로 누웠다. 그러다 다시 똑바로 누웠다가 또 반대로 누우며 뒤척거렸다. 결국 그나마 제일 편한 위치로 돌아누운 그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쓸쓸해.’

이번 주 내내 딜런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왜 피하는 것 같지?’

분명히 주변을 맴돌고 있는데 그가 멀게 느껴졌다. 다원은 빈 옆자리를 쓰윽 쓸었다.

‘늘 떠돌아다녔다더니……. 할매, 할배들도 불안해서 그럴 거야.’

그들에게도 딜런은 자식이었다. 다시 뒤척이던 다원이 천장을 보고 누웠다. 모두가 딜런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원은…….

‘불안해.’

다원은 갑자기 1년 전, 체이스에게 밀어내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다원의 손바닥 위엔 취업 비자가 올려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취업 비자였다. 손을 오므려 잡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한순간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고, 미국을 떠나려던 다원은 딜런을 만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있어야 할 이유는 있고?’

다원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이렇게 딜런과의 거리가 벌어지다 또다시 밀어내진다면.

다원은 딜런의 자리로 가 웅크리고 누웠다.

‘딜런……. 왜 혼자 힘들어하는 건데. 같이하면 안 돼?’

깊어지는 밤과 함께 다원의 고민도 깊어졌다.

* * *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든 다원이지만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잤다기보다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던 정도였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딜런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모카 포트에서 커피가 추출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응.”

딜런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등지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다가오지 말라는 것 같아 다원은 울컥했다.

“왜 그래?”

원래 무슨 일이든지 새벽 감성일 때는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아마 그 말은 진리일 것이다.

돌아서는 딜런의 모습에 다원은 바로 후회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가 너무 낯설었다. 그를 닮은 사람이 집을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딜런은 청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서 있었다. 그는 고개만 조금 옆으로 기울여 입만 움직여 되물었다.

“뭐가.”

너무 차가운 모습에 다원은 가슴이 시렸다.

‘정말 날 밀어내려는 걸까.’

마른 입술을 축인 다원은 감정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 며칠 동안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뭔가 착각하거나 잘못 느끼는 걸 수도 있었다.

다원은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지금 딜런은 많이 혼란스럽고 지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까지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힘들면 곁을 줘. 같이 나누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딜런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눈은 슬픈 주제에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불쑥 겁이 난 다원은 그만 소리치고 말았다.

“말을 해! 말을 해야 알지, 딜런!”

그러자 딜런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넌 안 그랬잖아.”

“뭐?”

“넌 나한테 말하지 않았잖아.”

“뭘……?”

다원은 딜런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목구멍에 뭔가 커다란 것이 막힌 것 같았다. 침이 잘 삼켜지지 않았다.

방금까지 들려왔던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곗바늘 소리도, 커피가 추출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만 심장 소리만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괴로웠다. 귀를 닫고 듣고 싶지 않았지만, 다원은 그럴 수 없었다. 딜런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넌 그 남자를 만난 이야기, 나한테 하지 않았잖아. 왜 그랬어?”

“뭐……?”

다원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제야 그는 딜런의 변화가 앤서니의 죽음이 아닌 자기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체이스와 만난 건 어떻게 알았는지, 왜 그런 걸 묻는지 다원이 먼저 묻기 전에 딜런이 중얼거렸다.

“곁을 달라며. 말을 해야 안다며, 다원아.”

‘뭐라도,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해.’

다원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문밖으로 밀려 나가기 전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게…….”

하지만 쾅 하고 거칠게 닫히는 부엌문 소리에 다원은 다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얼마나 멍해 있었을까. 타는 냄새가 났다.

‘딜런이 알면 엄청 싫어할 텐데…….’

커피 맛에 유독 민감한 딜런이었다.

‘타? 커피가 탄다고?’

다원은 그제야 가스레인지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다원은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모카 포트에 몸이 굳어 버렸다. 가스레인지 주변에 더 이상 탈 재료는 없었지만 위험했다.

다행히 딜런이 이 집을 수리할 때 달아 놓은 가스 자동 잠금장치가 작동했다. 가스레인지 중간 밸브가 자동으로 잠기면서 불은 자연스럽게 꺼졌다. 하지만 다원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치워야 하는데…… 무서워.’

그 근처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은 나가자.’

샤워도 하지 않고 옷을 꺼내 입은 다원은 서둘러 방을 나왔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그렇게 집을 빠져나와 습관처럼 오솔길을 따라 딜런의 카페로 걸어갔다.

“어!”

오솔길 중간쯤 이르렀을 때 다원은 멈춰 섰다.

“하필 왜 이 옷이야.”

1년 전 이곳에 왔을 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물론 그때와 같은 계절인 겨울이었고, 쇼핑을 할 여유도 없어서 지금 다원의 옷은 처음 가지고 왔던 옷이 대부분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제 모습은 그날과 너무 똑같았다. 심지어 신발까지.

‘옷은 그렇다 치고…… 워커까지 같을 건 또 뭔데?’

하지만 다원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손님들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어이, 다원. 오늘 어디 가는 거야? 나 커피 마시러 왔는데.”

“아니에요.”

오늘도 딜런의 카페는 오전부터 단골손님들로 꽉 찼다.

* * *

배에 올라타서야 딜런은 뒤돌아보았다. 당연히 배가 정박되어 있는 곳에서는 집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 그랬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볼까?’

딜런은 잠시 갑판 위를 서성였다.

사실 딜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마치 뇌 안에 물이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으면서도 왜 서 있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이제 바다 위는 그만 떠돌고 네 품에 안겨 쉬고 싶어.’

등 뒤에서 다원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든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다원에게 안겨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갑판 위에서 담배 하나를 다 피우도록 망설였지만 딜런은 결국 시동을 켰다.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기를 잡기도 애매한 시기의 추운 겨울 새벽이었다. 움직이는 배는 딜런의 배 한 척뿐이었다. 항구에서 제법 멀어지자 딜런은 배의 시동을 끄고 갑판에 나왔다.

일출이었다. 바다 위에서 뜨는 해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여러 일출을 봤지만 그중 최고는 마을 앞바다였다. 그러나 지금 딜런의 표정은 씁쓸했다.

‘너무 추워지기 전에 한번 데리고 올 생각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신이 없었다. 남은 가족들은 무척 바빠졌다. 처음일 수밖에 없는 일이라 더 그랬다. 딜런은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어머니와 네이선도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러나 곧 새로운 틀은 잡혔고 조금씩 안정되었다.

그러자 딜런을 찾아온 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일을 잘 마무리 지었다는 안도도 아니었다. 바로 의심이었다.

해는 금세 떠올라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이대로 파도를 타고 흘러가 버리고 싶어.”

* * *

다원은 단골들 취향에 맞추어 커피와 빵을 서빙하고 한숨 돌렸다. 그들의 대화는 늘 같은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나눌 말이 많았고 즐거웠다. 다원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제 할 일을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헛손질이 많았고 한숨을 자주 삼켰지만. 그리고 드디어 손님들 중 한 명이 다원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다원의 컵 정리가 필요 이상으로 길었던 것이다.

“저기, 다원…….”

“네? 부르셨어요?”

그때 그 사이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추운 날 어느 정신 나간 놈이 놀러 오는 거야?”

“그런 정신 나간 놈들이 있어야 우리가 먹고살지.”

“아무리 그래도 이 날씨에? 이상하잖아.”

“뭐가?”

“저기 웬 영화배우같이 생긴 놈이 이리로 휘청거리며 걸어오는데?”

그제야 모두들 ‘그놈’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게. 관광객은 아닌 것 같은데…….”

다원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분위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손님들이 일제히 한곳을 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원의 고개도 돌아갔다. 창밖엔 아무도 없었다.

딸랑.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달려 있던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기가 딜런 씨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정말 영화배우 같았다. 좁고 어두운 카페가 환해질 만큼 눈부셨다. 훤칠한 키에 곱게 생긴 남자는 카페를 쭉 돌아봤다. 그리고 곧 다원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오랜만이야, 자기.”

다원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데미안이었다.

카페 손님들은 이 기묘한 장면을 숨죽여 지켜봤다.

“가게가 정말 좁아터졌네. 앉을 곳도 없고.”

좁아터진 가게에 앉아 있는 손님들을 깔끔하게 무시한 데미안은 다원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원은 이대로 그를 무시하고 싶었다.

‘…….’

모두들 다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원은 눈앞이 아찔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더 이상은 안 돼. 단단히 일러둬야겠어. 여기가 어디라고…….’

다원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나 데미안은 다원이 나오자마자 작정한 듯 몰아붙였다.

“예의를 차릴 것도 없겠지.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니까. 자기 정말 대단해. 어떻게 체이스한테서 떨어져 나가자마자 바로 남자를 낚아챈 거야? 엉큼하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데미안의 말이었다. 다원의 눈이 경악으로 물었다. 카페 안도 조용했다. 데미안의 시선을 카페를 훑었다.

“그거 알아? 보스턴에서 체이스와 내가 큰 사업을 할 계획이었다는 거. 딜런 씨의 어머니도 함께 말이야. 잘되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의 태도가 바뀐 거야. 어찌나 완강하시던지. 결국 없던 일이 되고 말았어. 혹시 말이야, 자기가 그들에게 손을 쓴 거야?”

“뭐?”

금시초문이었다. 또 너무 황당했다. 너무 놀란 다원에게선 그저 멍한 되물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잖아. 이건 누가 봐도 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었어. 별다른 이유 없이 거절한다면 다른 이유가 있겠어? 네가 또 체이스한테 그랬던 것처럼 딜런 씨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지.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버리려는 네 못된 속셈 아니냐고!”

다원은 너무 기가 막혀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데미안은 바로 쏘아붙였다.

“아니, 멀쩡한 애 하나 병신 만들어 놓고 양심도 없지. 몸 팔아 번 돈으로 얌전히 네 나라 돌아가서 살면 되지, 뭐가 그렇게 또 욕심이 났을까? 다른 남자한테 다리나 벌리고. 너도 정말 뻔뻔하다. 내가 처음부터 네 그 시커먼 속을 알아봤지만 정말 대단해, ‘우리 다워니’.”

“!”

“햐! 뭘 놀란 척이야. 맞는 말이잖아. 취업 비자 안 나올 것 같으니까 체이스 버리고 튄 거 아냐? 타미한테 다리 벌리고 구멍 대 줘도 안 써 준다디? 아, 이제 알겠다. 너 그래서 딜런 씨한테 접근한 거구나? 너 투자 이민이라며! 부모한테도 버림받은 게 돈이 어디서 나서 그 많은 돈을 우리나라에 투자했겠어?”

데미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비웃음을 머금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투자한 회사가 딜런 씨가 이번에 새로 시작한다는 리조트 회사라며. 투자금은 딜런 씨가 대 줬지? 네 구멍값은 참 비싸기도 하다. 딜런 씨 단물 다 빨아먹고 나거든 나한테도 한번 와 보든가. 얼마나 맛있나 맛 좀 보게. 물론 이미 다 썩어 문드러졌겠지만.”

다원은 데미안이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저열하게 몰아세운 일은 처음이었다.

“너 나한테 왜 이래?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 이런 인간 이하의 짓은 한 적 없잖아.”

데미안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조롱하는 것 같아 다원은 더 화가 났다.

“내가 떠난 뒤에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졌을 텐데, 대체 왜 여기 와서 이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정말 너를 알다가도 모르겠어.”

“제발, 다워나. 네가 인간이라면 딜런 씨 곁에 더 이상 알짱거리지 말고 떠나. 너 때문에 그가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지 알아? 우리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하기로 한 사업이 얼마나 큰 사업이었는 줄은 알고?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너 때문에 새로 시작한 딜런 씨의 리조트 사업이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는 정말 의문이야. 이제라도 좀 제대로 살아 봐.”

데미안은 정말 가슴 아픈 표정을 지으며 다원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다원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마 오늘 저녁쯤이면 이 마을에 네 더러운 구멍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거야. 정말 재밌겠다. 큭! 수고해.”

데미안은 왔던 길을 여유롭게 걸어갔다. 이상하게 그 뒷모습은 아주 후련해 보였다. 그의 모습이 건물 너머로 사라졌다.

‘경고는커녕 제대로 따지지도 못했어. 정말 징글징글해.’

다원은 돌아서다 말고 멈칫했다.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참담했다.

‘아, 손님들…….’

아마 데미안의 말을 다 들었을 것이다. 다원은 홀딱 벗겨져 서 있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맨살에 그대로 와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속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그 불이 꺼지지 않아 다원은 괴로웠다.

그 후 영업을 마친 딜런의 카페에서 조명이 꺼졌다. 그러곤 조금 있다가 그의 집 2층에 불이 켜졌다가 금세 꺼져 버렸다.

* * *

다원은 보스턴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올라탔다. 그저 캐서린이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면서 걱정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서서히 해가 저무는 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어느덧 보스턴 시내에 접어들었다.

‘그녀를 만나 본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잖아.’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우산을 펼쳐 들었다. 다원은 버스 정류장에서 비가 잦아들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저히 멈출 비가 아닌 것 같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캐서린의 집으로 가려면 길을 건너 다시 버스를 탄 다음 내려서도 조금 걸어 들어가야 했다.

다원은 1년 전 기억을 더듬고는 잠시 고민하다 정류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 오는 거리를 뛰어가는 그의 등 뒤로 큰 배낭이 흔들거렸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예전에 봐 둔 가게가 보였다. 가게에 도착할 때쯤엔 이미 홀딱 젖었지만 그래도 우산을 팔아서 다행이었다.

‘아직 정리해야 할 장부도 있고……. 일단 가 보자.’

캐서린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캐서린을 봐야 했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다원은 옷을 털었다. 차가운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 번 숨을 고른 그가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캐서린이 문을 열었다.

“어머나, 다원아. 비도 오는데 갑자기 웬일이니? 어서 들어와. 감기 걸리겠다.”

“어머니랑 네이선이 갑자기 보고 싶었어요.”

“어쩜, 말도 예쁘게도 하지. 엄마도 다원이가 보고 싶었단다.”

“어…….”

다원의 시야가 하얗게 가려졌다. 수건이었다. 네이선의 목소리가 수건 너머로 들려왔다.

“물 떨어져.”

‘다행이야. 안 들켰겠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캐서린의 행동에 다원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 울컥했다.

‘정말 엄마 같잖아. 꼴사납게 울 뻔했어.’

다행히 네이선이 덮어 준 수건이 모든 것을 가려 주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저녁이 늦어지더라니, 네가 오려고 그랬나 보구나. 아들들, 조금만 기다리렴. 엄마가 오늘 특별한 것을 준비했단다.”

그렇게 멀어지는 캐서린의 목소리 위로 네이선의 목소리가 겹쳤다. 딱딱 끊어지는 아이 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다정했다.

“울지 마. 울면 머리 아파.”

“응.”

‘아이의 눈은 속일 수 없다더니 네이선에겐 들켜 버렸네.’

“다 젖었어. 여기다 내려놔. 엄마는 카펫에 물 떨어지는 거 싫어해.”

어느새 가방도 내려 주는 네이선에게 다원은 인사를 건넸다.

“네이선, 정말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다원은 착하니까 울면 안 돼.”

“풋. 그건 또 무슨 논리야.”

다원은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거봐. 웃는 게 훨씬 예뻐.”

“고마워. 예쁘다고 해 줘서.”

“난 거짓말은 안 해. 못 해.”

다원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네이선이 수건을 챙겨 돌아섰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다원도 움직였다.

사무실 옆방에 챙겨 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젖은 옷은 세탁기에 넣어 일단 탈수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따뜻한 식사를 했다. 캐서린의 호언장담은 빈말이 아니었다. 식탁 위의 모든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어머! 다원 네가 웬일이라니? 이렇게 많이 먹고. 갑자기 많이 먹으면 탈 난다.”

“헤헤헤.”

“엄마가 앞으로 맛있는 음식 많이 해 줄게. 자주 오렴.”

“……네.”

“나도 해 줄게.”

네이선의 대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다원은 그가 요리 수업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할게.”

“자, 우리 모두 과식했으니 이제 소화에 좋은 차를 마시자꾸나.”

캐서린의 티타임은 길지 않았다. 네이선은 자러 들어갔고 다원은 사무실로 나왔다.

똑똑.

사무실 문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다원은 보고 있던 장부에서 시선을 올려 문을 바라보았다.

“다원아, 엄마야. 들어가도 되겠니?”

“네, 어머니.”

캐서린은 다원이 좋아하는 유자차를 내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잔을 쟁반에 곱게 받친 모습이 괜히 뭉클했다.

“마시렴. 그러다 감기 든다.”

상큼하게 올라오는 유자 향이 좋았다. 다원은 또다시 눈가가 시큰거렸다.

“어머니…….”

이번엔 숨길 수 없었다. 다원의 목소리엔 이미 물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문 앞에 선 다원의 얼굴엔 불안과 서러움이 가득했다.

‘오늘따라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라니…….’

캐서린은 그가 오기 전,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헛손질을 몇 번이나 했다. 사고가 날 것 같아 결국 손을 놓고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다.

차라리 뭐라도 시켜먹는 게 나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초인종이 울렸다. 비를 뚫고 온 아이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비를 쫄딱 맞고 온 아들에게 우선 뭘 좀 먹여야 했다.

‘불쌍한 것. 혼자서…….’

“어때? 몸이 좀 풀리지?”

“네. 어머니 유자차는 정말 맛있어요.”

“고맙구나. 그런데 뭘 그렇게 열심히니? 들어가서 쉬지 않고.”

그녀는 다원이 정리하던 장부를 들여다봤다.

‘저런…….’

그녀도 회계사였다. 다원은 캐서린이 회계 장부를 보고 제 결심을 눈치챘음을 알았다.

“어머니…….”

그녀는 대답 없이 다원을 안아 주었다.

“다원아, 괜찮다. 다 괜찮아.”

결국 다원은 울음을 터트렸다. 한 번도 제 일이 서러워 운 적은 없었다. 혼자 있을 때도 그랬다. 울어 봐야 눈물을 닦아 줄 사람도, 왜 우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그냥 눈물이 났다. 다원은 한동안 그녀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었다. 조금 진정이 되자 훌쩍이며 품에서 빠져나온 다원에게 캐서린은 휴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 전 어딘가 잘못됐나 봐요.”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다원은 태어날 때부터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미국에 온 이야기, 체이스와의 이야기, 데미안과의 이야기, 한국에서 딜런을 만났던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제게 딜런은 그저 잘생기고 조금 위험해 보이는 서양 남자였어요.”

“맞아, 맞아. 아주 적절한 표현이야.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캐서린은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다원은 이어서 바닷가에서 딜런과 재회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풀었다.

“……그래서 전 자신이 없어요. 전 정말 잘못됐나 봐요. 이런 제가 딜런 옆에 있으면…….”

“다원아.”

다원의 말을 가로막은 그녀는 웃고 있었다.

“세상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이래서 이렇고, 저래서 저렇고……. 그러다가는 평생 이도 저도 아닌 게 된단다. 네가 딜런의 곁을 떠나는 건…….”

캐서린은 책상 위의 장부를 봤다.

“후우. 네 선택이지만, 딜런을 위해 떠난다는 못난 생각은 버리렴. 넌 네 삶을 열심히 살면 돼. 남을 무시하고 살아서는 안 되겠지만 남에게 휘둘릴 필요는 없단다.”

캐서린의 말은 다원에게 ‘많이 아프지? 아프지 말렴.’ 하고 다친 상처를 호호 불어 주는 엄마의 마음 같았다.

“정말 그래도 돼요?”

“엄마는 너를 믿어.”

그날 밤, 다원은 밤새 장부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늘 쓰던 노트를 펼쳤다. 나무 창 너머로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다원은 다시 펜을 들었다. 한동안 사무실엔 종이 위를 스치는 펜 소리만 들려왔다.

딸깍거리며 사무실의 나무 문이 조용히 열렸다가 닫혔다. 백팩을 멘 다원은 건물 앞 한적한 도로로 접어들었다. 곧 그는 아침 출근 인파에 묻혀 사라졌다.

* * *

새벽, 캐서린은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문소리를 듣고도 일어나 내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밤새 고민했다. 당장 딜런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의 문제였다. 다원이 원하지 않으니 캐서린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돌아올 집이 있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니까. 딜런도 그 심정을 알 필요가 있어.”

캐서린은 한숨 같은 혼잣말을 하며 사무실로 향했다.

“깔끔하기도 하지.”

다원의 책상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정갈했다. 그가 온 뒤로 사무실은 항상 깔끔했고 효율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었다. 캐서린의 손이 한 번 더 갈 일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곳은 완벽한 다원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낯설다니. 어디 보자.”

그녀의 예상대로 책상 위에 얌전히 편지가 놓여 있었다.

“이건 이대로 두는 게 좋겠다. 딜런 그 멍청한 녀석이 눈물 쏟는 꼴을 보면 속이 다 후련할 것 같아. 후후후.”

그녀는 아주 상큼하게 뒤돌아 사무실을 나갔다. 열쇠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이제 우리 막내를 깨워 볼까. 선, 서니!”

* * *

지난밤, 바다에도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딜런은 모처럼 거친 파도와 한판 대결을 벌였다.

딜런이 주로 타는 배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부터 사용한 낡고 작은 배였다. 아무리 관리를 잘했다고는 해도 먼 바다에 나가는 건 무리였다. 더구나 좋지 않은 날씨에 나간다는 건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딜런에게 다른 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고기잡이배들처럼 최신식 배도 여러 척 있었고 요트까지 있었다. 그런데 어젠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도 이 배를 탔다. 다원과의 일을 생각하다 습관처럼 아버지의 배를 탄 것이다. 심지어 예보도 놓쳤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뭔 짓을 하는 거야? 돌아가자.’

해가 떠오를 때만큼 지는 해도 뜨거웠다. 새벽 바다를 황금색으로 물들였던 해는 저녁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사실 딜런의 마음은 벌써 마을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새벽에 본 다원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었다.

‘다원의 화가 풀릴 때까지 사과할 거야. 무릎을 꿇고서라도. 그리고……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어. 다원의 목소리가 기억나질 않아.’

딜런은 뱃머리를 돌렸다. 바다는 잔잔했다. 마음이 정리되자 긴장이 풀렸다. 오래도록 쌓여 있던 피곤이 한순간 몰려왔다.

‘아버지,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예? 아…… 지금 가서 사과할 거예요. 삭삭 빌어야죠. 아버지도 어머니 혼자 두고 나가셨잖아요. 아니요, 잘못한 거 알아요. 예?’

앤서니가 좀 이상했다. 딜런은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점점 짜증이 났다. 앤서니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자꾸 손을 내젓는 모습이 기분 나빴다.

‘거참, 알아들었다는데 왜 저래? 다원한테 간다니까 왜 자꾸 손을 흔들어?’

그 순간 딜런은 크고 부드럽게 울렁거림을 느꼈다. 등골이 써늘해졌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바다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검은 파도가 너울지는 데다 비까지 오고 있었다.

딜런의 눈이 깊어졌다. 아직은 잔잔했지만 너울성 파도는 위험했다. 파도와 파도 사이에 갇히면 배가 전복될 가능성이 높았다. 해안가로 가도 문제였다. 파도는 해안가로 갈수록 몇 배로 커졌다.

딜런은 당장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육지와 교신했다. 다행히 이대로만 간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다만 딜런은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 다원을 걱정하신 거지?”

* * *

“아이고, 이 사람아. 사람 목숨이 뭐 몇 개나 되나? 자넨 목숨 서너 개는 은행에 맡겨 놓고 다니는가? 이 날씨에!”

“그러게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마침 우리가 여길 지나가지 않았으면 자넨 꼼짝없이…….”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술 한잔하시죠.”

딜런은 항구 근처까지 와서 결국 높은 파도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이 배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경력이 길지 않았다면, 이 큰 배가 항구에 비상 정박하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무슨 일이 나도 났을 것이다.

“나는 자네 아버지가 설마 그 연세에 배를 몰고 나오신 줄 알았지 뭔가. 하긴, 그렇게 경험 많은 양반이 이런 실수를 할 리는 없지. 결국 자네에게 배를 넘기셨나?”

“네……. 아버지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저런, 편찮으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미안하구만. 그런 줄도 모르고.”

“별말씀을요.”

“하지만 그건 꼭 자네 아버지였는데 말이야.”

“네?”

“아니, 됐네. 어서 들어가 쉬어. 옷도 다 젖었는데 그러다 큰일 나. 어차피 오늘은 육지에 못 가. 자네 배는 단단히 맨다고 매두었네만 장담은 못 하고……. 쉬어.”

“네, 감사합니다.”

선장은 돌아서면서 ‘틀림없었는데 이상하네……. 이상해.’ 하고 혼잣말을 반복했다. 그러곤 선장실로 들어갈 때까지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 날, 날씨는 거짓말처럼 개었다.

“자네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한가? 아버지보다 더하구만. 집에 꿀 발라 놨나?”

“죄송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으니 배를 좀…….”

“하, 거참. 배 내리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그래, 항구 근처니 괜찮겠지. 조심해서 가. 여기저기 상처가 많아. 낡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웬만하면 그 배는 그만 은퇴시켜 줘.”

“네.”

딜런은 자신의 배를 타고 직접 항구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성급했다. 결국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힘을 주고 버틴 무릎이 시큰거렸지만 무시했다.

“젠장. 오늘따라 왜 이래.”

저 멀리 카페 지붕이 보이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아픈 무릎도 잊고 성큼성큼 뛰어가 카페 문을 열었다. 당연히 다원은 없었다.

‘아…… 정말 왜 이래. 집에 간다는 게.’

“음?”

그런데 좀 이상했다. 카운터 위에 구겨진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손님이 지불한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도 커피 잔이며 접시, 포크 등이 그대로였다. 딜런은 카페를 자세히 돌아봤다.

개수대에도 설거지거리가 가득했다. 비우지 않은 쓰레기통, 코드가 꽂혀 있는 난로, 청소가 안 된 커피 머신까지. 다원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언제나 처음과 같은 상태로 정리한 후 퇴근했다.

딜런은 곧바로 카페를 나와 오솔길을 뛰어올랐다.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전력 질주를 해 뛰어가는데 너무 멀게 느껴졌다.

“헉! 헉! 헉!”

딜런은 거친 숨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급하게 문을 열었다. 쾅!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문이 벽에 세게 부딪쳤다. 캐서린이 알면 난리가 나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원아!”

집 안은 너무 조용했고 차가웠다. 그리고…….

“이게 무슨 냄새야?”

딜런은 냄새를 쫓아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가스레인지 주변이 온통 그을음으로 새까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한 발 한 발 다가갈 때마다 참혹한 모습이 자세히 드러났다. 불에 달궈져 색이 변한 모카 포트가 보였다.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딜런은 곧 탄성을 흘렸다. 제가 모카 포트의 불도 끄지 않고 집에서 나가 버렸던 게 떠오른 것이다.

“아…… 미쳤어. 설마?”

딜런은 급하게 다원을 찾아 1층을 뒤졌다. 그러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물론 화재는 크지 않은 것 같았다. 탄 것은 모카 포트가 다였으니까. 하지만.

‘다원이 많이 놀랐을 거야.’

배에선 다 조심해야 했다. 그중 특히 불은 경계 대상 1호였다. 딜런이 유난히 불을 다루는 것에 민감한 이유였다. 그런데 제 손으로 불을 낼 뻔했다. 딜런은 빨리 다원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다원! 다원!”

2층 구석구석 모든 문을 다 열었다. 심지어 창고까지 다 뒤졌지만 다원은 없었다. 집 안 곳곳을 다 살피고 지하실부터 다락까지 모조리 돌아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딜런이 방을 어지럽게 오갔다.

혹시나 해서 옷장을 살피자 몇 없던 다원의 옷이 듬성듬성했다. 그의 가방도 같이. 딜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카페로 가 다시 한번 안을 뒤진 딜런은 터덜터덜 나와 카페 앞 벤치에 주저앉았다. 벤치에 앉으니 오솔길과 그 길을 따라 이어진 나무가 그림 같았다. 한가할 때나 지칠 때면 다원은 이곳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딜런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원아…….”

요즘 들어서 그는 저답지 않게 감정적이었다. 하지만 눈물이 흘러내리는 않았다. 다원이 안아 줬을 땐 그렇게 쉽게 나왔는데. 그 생각에 딜런은 그만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아…….”

작은 화분들이 벤치 다리 아래와 카페 벽을 따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름 있는 꽃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땅에 핀 잡초 주변으로 하얀 돌을 쌓아 화분처럼 만든 것도 있었다.

“다 쓴 커피 가루를 그렇게 열심히 볶고 말리더니 이걸 키우려고 그랬구나.”

마침내 딜런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젠장.”

딜런은 손으로 대충 눈물을 훔쳐 내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에는 다원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었다. 작은 화분과 커피 가루가 든 주머니는 창틀이며 선반, 테이블 곳곳은 물론 냉장고와 생활 공간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텁텁한 냄새가 나지 않도록 늘 신경 쓰던 다원이 떠올랐다.

‘여긴 다 좋은데 공기가 너무 탁해요. 환기 안 시켜요?’

‘창문 경첩이 너무 뻑뻑해.’

‘아이고, 대단하십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다원은 버릇처럼 ‘아이고’라고 하면서 딜런의 볼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2층에 올라와 생각에 잠긴 사이 아래층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단골손님들의 목소리였다.

“다원!”

“오늘은 문을 연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래, 그래. 그런 시답잖은 소리는 잊는 게 상책이야.”

“난 오늘 신메뉴를 두 접시 주문해야지. 하나는 마누라 가져다주게.”

“그래서 그릇을 가지고 온 거야?”

“응. 괜히 다원을 귀찮게 하면 안 되지.”

표정을 정리한 딜런이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래도 그들이 하는 말을 자세히 들어 봐야 할 것 같았다. 다원이 떠난 이유가 저와 싸웠기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니.

“오늘 다원은 못 나옵니다. 저 없을 때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렇게 카페의 단골손님들과 주인이 마주 앉았다.

“아니, 도대체 어디를 그렇게 쏘다닌 거야?”

“네 얼굴 보기가 대통령 얼굴 보는 것보다 더 힘들어.”

“다원 총각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

“하여간에 남자들이란 자기 힘든 줄만 알지.”

“아니, 왜 나를 봐?”

“찔리긴 하나 보네.”

쾅! 갑자기 들려오는 큰 소리에 카페 안은 조용해졌다.

“그만!”

단골손님들이 화가 난 딜런의 눈치를 보면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 총대를 떠넘기는 꼴에 딜런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결국 헨리의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랬지? 차라리 애를 달래 주고 가자고. 괜히 점잔빼다가 애만 상처 입었잖아.”

딜런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옆의 할아버지가 헨리의 어머니를 툭 쳤지만 이미 시동이 걸린 그녀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

“아니, 내가 어디 없는 말 했어? 그 탤런트 뺨치게 생긴 백여우 같은 놈이 다원이한테 주둥이를 털 때 자기들이 그랬잖아! 애 무안해하니까 지금은 모른 척하자고 한 게 누구야? 누구냐고! 이제 어떡할 거야?”

“제발!”

딜런의 고성에 그녀도 하던 말을 멈췄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를 쳐다봤다.

“알아듣게 좀 말해 봐요. 저 미치는 꼴 보기 싫으면!”

그제야 한숨을 내쉰 할아버지가 그날의 일에 대해 딜런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간간이 자신들이 나서지 못한 이유도 덧붙이면서. 딜런은 중간중간 폭발할 뻔했지만 참았다. 다 알아야 했다. 모조리 다. 다원이 그날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손님들은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살금살금 카페를 빠져나갔다. 딜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숨죽였다. 이 동네의 미친놈, 딜런이 이성을 잃고 폭발하면 이제는 정말 답도 없었다.

미친 딜런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앤서니는 이미 딴 세상 사람이었다. 그나마 약발이 조금 먹히는 것 같던 다원 총각도 사라지고 없으니 이제 자신들의 목숨은 자신이 지켜야 했다.

모두가 나간 뒤 딜런은 카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다원이 만든 화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손님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더럽고 잔인했으며 무자비했다. 제 눈치를 보며 걸러서 말했을 테니 데미안이라는 놈은 다원에게 그보다 더 심한 모욕을 주었으리라.

‘그 뱀 같은 놈의 아가리를 진작에 찢어 놨어야 했는데.’

딜런은 예전 데미안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체이스라는 개자식이 다원을 찾아왔고, 다원은 옳다구나 하고 그 자식에게 꼬리를 쳤다는 개소리였다.

‘그 개소리에 넘어간 내가 제일 병신 같은 새끼지.’

쿵!

딜런은 그대로 벽에 이마를 박고는 다시 한번 쿵, 내리찍었다.

“네가 제일 문제야. 정신 차려, 새끼야.”

스스로에게 중얼거린 딜런은 마음을 추스렸다. 다원을 찾으면 다원에게 맞기로 하고, 우선은 보스턴에 가 볼 생각이었다. 데미안이 캐서린을 들먹였다는 이야기를 딜런은 흘려듣지 않았다. 다원 역시 그 말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 * *

“엄마, 딜런 왔어.”

마치 올 줄 알았다는 네이선의 태도에 딜런은 확신했다.

‘역시 여기 있어.’

순간 얼굴이 헤실 풀린 딜런이 바로 다원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덜커덩덜커덩! 사무실 문손잡이가 돌아가지 않았다. 당황한 딜런이 손잡이를 잡고 아예 문을 흔들어 댔다.

“그런다고 문이 부서지니?”

캐서린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딜런은 열리지 않는 사무실 문에 대해 물었다.

“문이 왜 이래요? 고장 났으면 고쳐야지. 이러다 다원이 갇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씩씩거리는 아들의 꼴이 우습지도 않았다. 아들이지만 아주 통쾌했다.

“잠가 뒀으니까 그렇지.”

“왜요?”

“주인이 없는 사무실인데 문을 잠가 둬야지. 혹시 나쁜 놈이 마음대로 드나들면 어쩌니?”

그녀의 말은 알 듯 말 듯 애매했다.

“어머니!”

딜런은 그런 그녀와 느긋하게 스무고개를 하고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다원은요?”

“아니, 네 짝을 여기 와서 찾고 그러니? 참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딜런은 더 이상 그녀를 상대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다른 상대를 찾았다.

“네이선! 네이선!”

딜런은 서둘러 생활 공간으로 향했다. 그녀가 보기에 아들은 여전히 성급했다.

“아직 멀었다, 이놈아.”

그녀의 표정이 착잡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