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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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2주간 진행될 훈련은 보다 실전에 가까운 ‘근접전투 훈련’입니다. 아카데미에서는 지속적으로 해왔던 훈련과 거의 같은 형태라 생소하지는 않을 겁니다.”

신경원의 앞에는 완전 무장을 한 신입 요원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신경원의 섹션에 속한 신입 9명과 다른 섹션에 속한 신입 8명을 한자리에 모아 수가 꽤 됐다.

“오늘과 내일은 여러분 모두가 필수적으로 참가해야 하고 이후부터는 근무일에만 참석해도 됩니다. 원한다면 매일 참가해도 좋습니다. 훈련 장소는 이곳, 지하 6층 주차장입니다.”

평소에는 가볍게 말하는 신경원이지만 오늘은 다른 섹션의 신입도 있기에 정중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어 그는 간단히 훈련방법을 설명했다. 길게 서면으로 설명할 것도 없이 정말 간단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무기는 단검만 지급됩니다. 자신 이외의 모든 에이전트는 ‘적’입니다. 유효타격은 당연하지만 목과 심장에만 해당됩니다. 훈련 중 ‘사망’으로 처리되는 타격을 입은 경우 지급한 레드카드를 상대방에게 건넨 후, 비상계단을 통해 사무실로 올라가 복도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사망 시각을 적은 다음 내려와서 다시 훈련에 참여합니다. 원한다면 중간에 휴식을 취해도 좋습니다만, 5분 이내로 제한하겠습니다. 전체 훈련 시간은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2시간입니다. 질문 있습니까?”

“비번 일에 불참할 경우 페널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음.”

“사망 횟수가 많을 경우엔 어떻게 됩니까?”

“각자의 파트너에게 보충 훈련을 부탁드렸습니다만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다음.”

“훈련은 저희들끼리만 하는 겁니까?”

그 질문을 한 사람은 다른 아닌 신경원의 파트너, 키이스였다. 언제 봐도 참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눈빛과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다. 신경원은 슬쩍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파트너 중 2명이 함께 훈련에 참가할 겁니다. 누가 언제 투입될지는 알려드리지 않습니다.”

신경원의 대답에 키이스가 조금 전보다 더 번쩍! 파란 눈을 빛내는 것이 보였다. 눈빛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랑 붙어보고 싶다 이거겠지.

아카데미의 최종 테스트를 받을 때 당했던 것이 어지간히도 싫었던 모양이다. 잘나신 도련님인지라 제가 최고인 줄 알았을 텐데, 난데없이 등장한 놈한테 얻어맞고 뻗었으니 오죽 자존심이 상했을까. 

신경원은 턱을 긁으며 키이스만큼이나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신입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되든 선임과 붙어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모양이다. 혹은 드디어 제대로 된 훈련을 받게 되는 모양이라며 흥분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신입들에게 심드렁한 태도를 보인 것은 신경원이 속한 섹션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또 없습니까?”

신경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질문은 그게 끝인 모양이었다.

“공격을 당했는데 아닌 척하고 바로 훈련에 참가하는 일은 없으면 합니다. 또한 공격당하지 않으려고 숨어 다니는 일도 없었으면 합니다. 그럼 바로 훈련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원하는 위치에 몸을 은폐해주십시오.”

우르르, 9명의 신입들이 넓은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일반 차량은 없었지만 훈련을 위해 백업팀이며 처리팀의 차량을 지원받아 여기저기 늘어놓았기에 몸을 숨길 곳은 꽤 많았다. 

9명의 신입들이 전부 흩어져 사라지자마자 주차장을 환히 밝히고 있던 조명이 훅 꺼졌다. 신경원은 칠흑처럼 어두워진 공간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본부의 CCTV 상황실이었다. 보안용의 카메라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9명의 모습을 속속들이 잡아내고 있었다. 온통 녹색이었지만 얼마 전에 장비를 교체해서인지 화면이 제법 선명했다. 

“어때?”

“아직은 다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어.”

“오, 붙었다, 붙었어.”

캐리는 손뼉을 치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만 해도 심드렁해하더니만 시작하고 나니 재미가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뿐 아니라 비번임에도 출근을 한 다른 섹션의 에이전트들도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냈어, 퍼스트.”

선임 중에 선임인지라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알렌이 의자를 돌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제안을 받았을 때는 다른 놈이 낸 아이디어인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이런 일을 나서서 하게 된 거지?”

“어… 그냥. 신입들 퇴사율 좀 낮춰볼까 하고요.”

뭘 어떻게 해야 키이스의 아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정말 열심히 고민했었다. 처음에는 그냥 매일 한두 시간씩 대련이나 해줄까 했지만 그건 품만 들고 효과는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처음 기관에 들어왔을 때 무엇을 가장 하고 싶었나를 떠올려봤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의 훈련이다.

“그런 거 언제 신경 썼다고.”

“항상 신경 썼거든요? 반년도 못 가고 그만두는 놈들 때문에 얼마나 귀찮았는데.”

“그래서 이번 파트너는 제대로 교육시켜보자, 그런 건가?”

“대충요.”

“덕분에 우리 신입들도 혜택을 보게 되었으니 좋구먼. 신입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훈련이지만 맡아서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리 지부에서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귀차니스트가 총괄을 맡겠다고 나설 줄이야, 하하하.”

신경원은 비어 있는 의자를 찾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으며 뺨을 긁었다. 멋쩍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살짝 얼굴이 붉어지고 있다. 

알렌의 말대로 지금 하고 있는 훈련은 신입들에게 가장 필요한 훈련이다. 아카데미에서는 반복적으로 시행했던 훈련이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식 에이전트가 된 후에는 좀처럼 하기 힘든 훈련이기도 하다. 

이유는 알렌이 말한 그대로다. 다들 자기 일만으로도 바쁘고 시간이 남아도 제 몸을 단련하는 데 투자하기에도 모자란 상황인지라 총괄을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던 탓이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이 했겠어.”

“좀 했죠.”

얼핏 보면 별것 아닌 단순한 훈련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현직 에이전트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 이외 자발적으로 ‘과외’의 일을 한다는 건 정말로 쉽지 않다. 체력도 체력이거니와 그 체력을 보충할 귀한 시간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훈련 장소인 지하 주차장 사용허가며 보안팀의 아지트인 CCTV 상황실 사용허가, 다른 팀의 차량 협조 그리고 비번인 날에는 본부 근처에는 얼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에이전트들의 협조를 구하는 것도 정말 만만치 않았다. 

지금 신경원이 바라는 건 하나다. 없는 시간을 쪼개 고생해서 준비한 것이니 부디, 망할 놈의 새 파트너가 이 정도 선에서 아부를 한 보람을 왕창왕창 느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이쿠, 벌써 사망자가 나오네?”

“어느 놈이야?”

“B 섹션 놈인 거 같은데.”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 하나가 쏜살같이 비상구를 향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목을 맞았는지 기침을 해서 연신 상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내일은 헬멧에 야광 펜으로 숫자라도 써놓을까 봐. 언놈이 언놈인지 구분이 안 간다.”

신경원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어째서 자기 파트너도 못 알아보는 거야.

방금 전 비상구를 향해 뛰어간 신입은 섹션 B의 신입으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간다고 말한 에이전트의 파트너였다. 얼굴도 가리고 나이트 스코프까지 착용하고 있으나 신경원의 눈에는 누가 누군지 확연히 보였다. 키와 체격, 움직임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마주친 적이 없는 신입도 있지만 움직이는 것을 조금 보다 보면 눈에 익기 때문에 곧 구분이 가능해질 터였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자신에겐 당연한 것이 남에게도 무조건 당연하지는 않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0분쯤 있다가 가면 되지?”

“지금 가도 돼. 언제 투입할 거라는 이야기는 안 했으니까.”

캐리가 몸이 근질근질한지 문가로 가며 말했다.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섹션 A의 치프인 예들린이 다른 섹션의 치프와 함께 들어왔다. 

“훈련은 잘돼가나?”

“일단은요. 벌써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흐음.”

예들린이 수십 개의 모니터 중 지하 주차장을 감시하는 모니터를 찾아 움직였다. 에이전트들이 길을 터주지 않아도 룸이 넓은 터라 그가 움직이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백업팀 치프가 자기들도 좀 참여하면 안 되냐고 묻던데.”

섹션 B의 치프 코빌렌이 모니터를 살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툭, 말을 던졌다. 신경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대답했다. 

“백업팀 전부는 곤란한데요.”

“아카데미 출신들도 좀 있고 하니, 크게 무리가 안 되면 몇 받아주지? 쓸 만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나.”

“것도 그렇죠.”

코빌렌의 말대로 가끔이긴 하지만 백업팀에서 이동해 오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신경원은 이름도 모르는 86번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 하루에 5~6명까지는 괜찮을 거 같습니다. 선별해서 보내달라고 해주시면 좋겠어요.”

뱀파이어들이 한자리에 잔뜩 몰려 있는 일은 많지는 않지만 가끔 있다. 지난번 브루클린의 빌딩 지하 같은 경우다. 하지만 아무리 많아도 20을 넘기는 경우는 없다. 신입의 수가 아홉이고 비번 날에는 빠질 사람도 있으니 인원수를 좀 채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의 대답에 코빌렌이 곧장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분명 백업팀 치프일 것이다―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난 내려 가볼게.”

캐리가 대화가 끊어진 참을 타 밖으로 사라졌다. 비번 날인데도 출근한 섹션 B의 에이전트 하나도 같은 말을 하며 뒤를 따랐다. 신경원은 모니터 하나를 주시하며 피식 웃었다. 그 모니터에는 여러 신입들 중에서도 발군의 체격을 갖춘 에이전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기관의 에이전트들은 대부분 체격이 좋다. 그렇다고 터질 듯한 근육을 자랑하는 에이전트는 없다. 온몸을 꽁꽁 싸매고 무거운 장비를 착용한 채 어둠 속에서 날쌔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몸이 날렵한 편이 좋기 때문이다. 

덩치가 아니라 체격이 좋은 문제의 에이전트는 다른 신입들보다 최소 1인치 정도는 키가 컸다. 그래서 다른 놈들과 구분하기가 아주 쉽다. 

키만 큰 게 아니라 완전 어깨 깡패라서 더 눈에 띄는 거지만.

장비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넓고 각진 어깨가 두드러지는 놈이 자기보다 2인치 정도 작은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로스였다. 타고난 신체적 조건은 조금 불리했으나 로스는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 깡패 놈이 아주 조금 더 빠르고 아주 조금 더 날렵했다. 둘은 몇 차례의 공방을 펼쳤다. 승리자는 어깨 깡패, 키이스였다.

저렇게 움직이면 금방 지칠 텐데….

아카데미에서 본 것처럼 실력은 꽤 괜찮지만 움직임이 세밀한 만큼 군더더기가 많다. 신경원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캐리랑 테런트다.”

누군가 구석의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래도 오래본 동료라고 신입들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알아본다. 다른 놈들과 섞여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일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은 거침없이 지하 주차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신입들을 적당히 봐주며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귀찮으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넘어뜨리기도 했다. 키이스도 그들 중 하나, 테런트와 마주쳤고 다른 놈들보다는 꽤 버텼지만 결국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차지한 실력자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르칠 게 너무 많다. 많아서 탈이다. 

신경원은 부리나케 비상구를 향해 달리는 키이스를 보며 혀를 찼다. 

“젠장. 입에서 단내가 나네.”

“단내만 나냐. 난 쓴물이 넘어와.”

“그리고 몸에서는 땀에 쩐내가 나지. 머리에서는 열나고.”

“제길. 토할 거 같아.”

“토할 것 같으면 다행이게? 난 죽을 것 같아.”

“그러면서도 하루도 안 빠지고 계속 오더라?”

“집에서 혼자 스쿼트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은데 어떻게 안 와.”

“맞아. 아침에 일어나서 근육통으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기어서라도 오게 되지.”

“제 발로 묏자리를 찾아오는 심정으로.”

누군가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웃음은 곧 샤워실에 들어선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서로의 몸에 난 푸르딩딩한 멍을 쿡쿡 찌르며 장난질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신경원이 주도하는 훈련이 시작된 지 열흘째. 섹션을 가리지 않고 시행 중인 훈련에는 비번일이어도 빠지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참여하고 있었다. 9시가 넘어도 퇴근하지 않고 숙직실에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자마자 곧장 달려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훈련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빠질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이번 기수의 신입들은 이전과는 달리 서로 얼굴을 트고 스스럼없이 지내게 되었다. 특히 백업팀 인원이 참여하고부터는 동기애까지 소록소록 피어오르는 중이다.

“오늘 8번 새끼, 백업팀의 그놈 맞지?”

“어.”

“그 새끼 또 오기만 해봐. 내가 최소 3번은 죽여준다.”

“3번을 그놈한테 죽었다는 소리구먼. 나가 죽어라.”

“다른 놈들도 아니고 백업팀에게 3번씩이나 죽어? 굴욕이야, 굴욕.”

“그러는 너도 열댓 번은 죽었잖아!”

“난 그놈한테는 한 번밖에 안 죽었어.”

“백업팀한테 몇 번 죽든 무슨 상관이야.”

“맞아. 다 거기서 거기 도토리 키 재기지. 잘난 척을 하고 싶으면 최소한 퍼스트를 상대로 10초쯤 버틴 다음에 해. 그럼 내가 인정해준다.”

누군가 한 말에 여기저기서 크엑―. 그엑―. 으억―! 하며 요상한 소리가 작렬했다. 개중에는 ‘그건 인간이 아니라 유령이야! 악마야!’ 하며 괴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간 서로에게 익숙해졌기에 목소리를 들으면 누가 누군지 금방 알아채기 시작한 그들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신체적으로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의 경우 완전 무장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구분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말없이 움직이는 사람 중 누가 동기고 누가 선임인지 즉각적으로 구분해내는 건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신입 전원이 신경원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훈련에 참가하는 선임들 중 오직 하나, 신경원만이 나이트 스코프를 착용하지 않은 채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진짜 어둠 속에 사는 악마 같아.”

“응. 맨눈으로도 그 캄캄한 데서 어떻게 그렇게 잘 움직이는지 모르겠어.”

“눈알에 나이트 스코프가 장착되어 있나? 무슨 초 고성능 콘택트렌즈라도 낀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라. 파트너에게 들었는데, 작전 시에도 종종 나이트 스코프를 안 쓰고 다니는 사람이라더라.”

“젠장. 도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아, 그거도 그거지만, 그 사람 진짜 아프게 패지 않아?”

섹션 B의 신입 하나가 퍼렇다 못해 피멍이 들 지경인 제 가슴을 찌르며 맞은 자리를 또 맞고 맞다 보니 결국 멍이 생겼다고 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제각각 신경원에게 당한 부위를 보이며 멍 자랑을 시작했다. 

“유효 타격은 목이랑 심장만 인정한다면서 아무데나 막 패. 원, 투, 스리~하면 끝!”

“난 지금까지도 뒤통수가 얼얼해. 맞는 순간 진짜 머리가 핑 도는데 죽겠더라.”

“완전 유령이라니까. 다른 선임들도 좀 그렇지만 퍼스트는 움직이는 데 진짜 소리도 하나 안 나고 기척도 거의 안 느껴지더라.”

“유령처럼 슥 뒤에 나타나서 뒤통수를 갈기는데, 어으―. 소름 돋아.”

동기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키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훈련 중의 신경원은 정말 신출귀몰했다. 앗―하는 사이에 얻어맞고 헉―소리를 내기도 전에 쓰러지기 일쑤다. 

“어이, 클리퍼드. 넌 어때?”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제 목과 가슴, 그리고 팔다리를 가리켜 보였다. 신입들 전부가 멍투성이였지만 키이스의 몸은 그야말로 가관 중의 가관이었다. 

“으어. 완전 얼룩덜룩. 넝마 수준이네.”

“파트너니까 좀 봐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너도 예외는 아니구나.”

키이스는 욱신거리는 팔 관절 부위를 보여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예외는 아니라고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예외’가 되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 중이다.

온몸을 방어구로 뒤덮고 있음에도 신경원에게 맞으면 백이면 백 시퍼렇게 멍이 든다. 저 멀리서 멍을 자랑하던 사람처럼 처음 2~3일은 괜찮았다. 하지만 연일 계속 같은 자리를 맞다보니 방어구가 채 막아내지 못한 대미지가 신체에 축적돼 흔적이 남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관절은 안 노렸는데, 오늘은 일부러 그러는 건지, 관절만 노리더군요.”

“맞아. 나도 맞는 순간 팔꿈치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 날이 휘지 않았다면 고무라는 걸 의심할 뻔했다고.”

누가 한마디 하자 다른 사람들도 죄다 팔이며 손목, 그리고 무릎관절을 얻어맞았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빌어먹을. 왜 관절을 노리는 거야.”

“좀 물어봐! 클리퍼드. 아니다. 다 좋은데 관절만은 좀 봐달라고 말 좀―.”

누군가 키이스를 향해 아우성을 치다 말고 헙―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리가 나던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키이스는 상대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신들. 관절을 안 노리면 어딜 노려. 도대체 연수받을 때 뭘 배운 거야?”

고개를 돌리자 허리에 하얀 타월을 감은 신경원이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목이나 팔꿈치 같은 델 노려야 날이 들어가지. 니들이 헐크가 아닌 이상 단검으로 뼈를 자를 수 있겠어?”

신경원은 하품을 쩌억 하며 비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떠들썩하던 샤워장은 어느새 고요해졌고 지친 지색이 역력한 신경원은 멍 하나 없는 가슴과 등판을 자랑하며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는 제일 안쪽의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곧 하얀 타월이 샤워부스 벽에 턱하니 걸렸다. 

“저기요, 퍼스트, 잠깐만요―.”

신경원이 샤워기를 틀기 직전 누군가 그를 불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뭐.”

“나이트 스코프도 안 쓰신 채로 그 지하에서 저희들을 어떻게 그리 잘 찾아내나 궁금합니다.”

“안 써도 보여서.”

“보인다고요?”

“어둠에 익숙해지면 보여. 전부는 아니겠지만 너희들 중에도 익숙해지면 나이트 스코프 없이도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다. 또 있어?”

키이스는 얼른 손을 들어 올렸다. 신경원이 미간에 주름을 잡는다. 

“혹시 저희들, 누가 누군지 전부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그 어둠 속에서?”

“그건 왜 물어봐.”

키이스는 주변의 동료들을 가리켰다가 제 몸을 보라는 듯 가슴을 폈다. 신경원에게 야멸치게 두들겨 맞아 다른 사람보다 배는 더 알록달록 빨갛고 누렇고 퍼런 몸을.

“제가 두세 배쯤은 더 맞고 있는 것 같아서요.”

신경원은 대답 대신 혀를 차고 샤워기를 틀었다. 어째선지 물줄기가 내는 쏴아―하는 소리가 ‘그걸 이제 알았냐?’라는 소리로 들렸다.

역시 신경원은 그 어둠 속에서 누가 누군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9명의 신입들 중에 자신만 콕 찍어서 더 팬 게 맞았다. 하지만 더 맞았다고 해서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좀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자신만’ 더 때렸다는 거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진짜 유령이었어.”

“익숙해지면 보인다니, 그게 말이 돼?”

“시력이 좋은 거 아닐까? 평균 이상으로 시력이 좋으면 어두워도 다 보인다잖아. 대낮에 별도 보이고.”

키이스는 알면 알수록 더 경이로운 신경원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는 동기들과 함께 샤워실을 나왔다. 그들은 계속 나불나불 입을 다물지 않고 떠들어댔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젠장. 오늘부터 특훈이다! 집에서도 불 안 켤 거야!”

“나도.”

키이스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도’라고 속으로만 덧붙였다. 그러곤 로커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신경원이 오길 기다렸다. 신경원은 10분쯤 후에야 샤워실에서 나왔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피곤해 보였고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신경원은 훈련 전과 비교하면 얼굴이 꽤 상해 있었다. 처음 이틀은 괜찮았는데 그다음 날부터는 살이 내리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다른 선임은 번갈아가며 훈련에 참여하는데 신경원은 매일같이 훈련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훈련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신입들도 마찬가진데 다른 동기나 키이스 자신에 비해 확연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2시간 동안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않고 거의 풀로 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괜찮으십니까?”

키이스는 마른 타월을 내밀며 물었다. 신경원은 타월을 받아 물이 뚝뚝 흐르고 있는 머리에 뒤집어썼다. 워낙 짧은 머리인지라 대충 몇 번만 문지르면 말끔해질 텐데 신경원은 타월을 뒤집어쓴 채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기가 좀 남아 있는 몸에 그대로 반팔 티셔츠를 꿰입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보다 못한 키이스는 신경원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신경원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했다.

“뭐야.”

“그냥… 지치신 것 같아 닦아드리려고요.”

“됐거든?”

타박은 아니나 쌀쌀맞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키이스는 뒤로 반 보 물러났다. 

“질문해도 됩니까?”

“네가 무슨 학생이냐? 질문이 있으면 그냥 해. 일일이 허락 구하지 말고. 뭔데? 빨리 말해. 피곤하고 졸려서 머리가 다 어질어질하니까.”

“지금 받고 있는 훈련. 혹시 제 아부에 대한 반대급부입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겠어.”

“…….”

“모자라?”

“그것보다는… 조금 억울해서요.”

“뭐가?”

“아부는 저 혼자 했는데 혜택은 모두가 받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너는 특별히 신경 써서 패주고 있었는데.”

쿨럭―. 저도 모르게 기침이 나왔다. 

“그게 특별 취급이었습니까?”

타월 밑에서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반들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말투가 사나워서 화를 내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진지한, 뭘 더 해주면 되겠냐는, 그런 표정이다.

“기왕 특별 취급해주시는 거, 조금 다른 식으로 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뭘 어떻게.”

“예를 든다면 훈련실에서 1:1로 대련을 해서 기본적인 스킬을….”

“클리퍼드.”

“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네 개인 훈련 교관이 아니야. 거기에 나는, 굳이 스킬이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전부 실전에서 몸으로 익힌 스킬이라 남에게 뭘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 게 힘들어. 제대로 된 무술은 거의 배운 게 없으니까.”

“……!”

“실전형 근접전투 훈련이라고 하니까 너도 그렇고 다들 전투술 향상 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신경원은 머리에 쓰고 있던 타월을 두어 번 문지른 후 끌어당겼다. 물기를 머금은 새카맣고 짧은 머리카락과 미처 닦아내지 못해 그대로 흘러내린 물방울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언젠가, 정확히는 브루클린의 어느 지하 빌딩에서 근 4시간을 뛴 후 완전히 지쳤을 때 본 얼굴과 비슷했다. 다가가서 부드럽게 쓸어주며 감싸 안아주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얼굴이다.

“내가 원하는 건 너희들이 ‘어둠’과 ‘긴장감’에 익숙해지는 거야. 그래서 철저하게 홀로 어둠 속에 내팽개쳐졌을 때, 탄창이 비어 권총이 무용지물이 되었을 때, 손에 남은 무기라고는 단검 하나밖에 없는데 적들은 사방에 우글우글한 극한 상황을 만든 거지. 그런 상황과 감각에 익숙해지라고.”

그것으로 설명은 끝이라는 듯 신경원은 끄응차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로커에서 거의 매일 입고 다니는 체크 남방을 꺼내 손에 들고 발을 질질 끌며 로커 룸을 나섰다. 그러다 문을 잡고 대뜸 욕설을 내뱉었다.

“에이 씨발―.”

신경원은 욕설 끝에 쯧―하고 혀까지 찬 다음 키이스를 바라봤다. 

“남은 나흘간 더 빡세게 굴려줄 테니까 그 정도로 끝내자. 알았어?”

키이스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신경원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원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빡세질 수 있는 건지 의아해하는 키이스를 두고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키이스는 신경원이 남기고 간 하얀 타월을 집어 올리며 뺨을 긁적였다. 기분이 묘했다.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들다.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그러다 사람 잡는다.”

키이스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어깨를 굳혔다. 로커 룸과 연결된 샤워실 입구에 맥스가 서 있었다. 도대체 언제 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신경원이 좀 특출하게 기척을 내지 않는 타입이지만 맥스도 만만치 않다.

“듣자하니 지금 퍼스트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다 너 때문인 모양인데….”

맥스는 아랫도리도 가리지 않은 채 맨몸으로 나와서 타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신경원과는 달리 터프하게 머리를 닦고 몸도 닦아냈다.

“다른 놈들과는 달리 퍼스트가 매일같이 너희들 상대하고 있다는 건 알지?”

“압니다.”

“지난 열흘간 퍼스트가 세 번 출동했던 건?”

“…알죠.”

“작전 시간 자체는 별로 길지 않았지만 어쨌든, 퍼스트는 세 번이나 작전에 임했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매일같이 너희들을 상대하고 있어.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해? 2~3시간 뛰면 나만 해도 1~2kg은 훅 내린다고 한 거.”

“아, 네.”

“실전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퍼스트는 열흘째 하루도 쉬지 않고 너희들을 상대하고 있는 거다. 네놈이 한 아부 때문에. 아부든 뭐든, 퍼스트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맥스의 말을 듣는 사이 키이스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놈에게 뭐가 되든 더 해달라고 하면 안 돼, 신참. 펄펄 날뛸 때야 녀석이 지쳐 있을 거라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그 얼굴 봤으니 알지? 퍼스트는 지금 완전 그로기 상태야. 저녁때 슬쩍 끌고 나가서 고기나 좀 사 먹여. 제 입으로 하겠다고 한 이상 누가 뭐래도 내일부터 진짜 더 빡세게 너희들을 굴리고 너는 특히 각별히 신경을 써서 ‘특별 취급’을 할 놈이니까 최소한 몸보신이라도 시켜라.”

어느새 맥스는 말쑥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른 거 말고 고기, 소고기 사줘. 고기에 환장하는 놈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 아참, 도대체 아부를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앞으로도 아부를 하려면 적당히 해라.”

홀로 로커 룸에 남겨진 키이스는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묘했던 기분이 더더욱 묘해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옳은 길인 줄 알고 신나게 뛰었는데,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문제가 산재해 있는 어려운 길을 고른 그런 기분이랄까. 혹은 목표지점은 저기다! 하면서 신나게 달렸는데 달리기만 잘했을 뿐, 중간에 챙겨야 할 것들은 완전히 까먹고 경주마처럼 달려 1등으로 들어가고도 억울하다고 주장도 못할 깨끗한 반칙패를 당한 그런 기분과 비슷하다. 나름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꽤 머리가 좋다는 평이었는데 신경원을 만난 이후로는 멍청이가 돼버린 느낌이다. 

“젠장.”

키이스는 어느새 바싹 마른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사무실로 올라갔다. 반의 확률로 사무실 의자를 침대로 쓰는 신경원은 피곤한 안색임에도 데스크에 바싹 다가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 시간 반쯤, 신경원은 검토하던 서류철을 덮곤 곧장 의자를 침대 삼아 잠을 청했다. 

그는 제게 할당된 서류들을 살피며 가능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평소보다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불편한 자세로 목을 꺾은 채 사정없이 졸고 있는 신경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로커 룸에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으나 파트너로서 바로 옆자리에 있다 보니 파악해버린 게 있다. 신경원은 마냥 나태하게 아무 때나 마음껏 늘어져 조는 게 아니다. 그날 맡은 일을 완벽하게 마친 후나, 일을 할 시간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그 시간을 제외한 남은 시간에만 잤다. 전투 때만 전광석화 같은 게 아니라 데스크 업무 능력도 발군이었다. 최단 시간 내에 할당된 일을 해치웠다. 치프인 예들린을 필두로 달리 사람들이 신경원이 아무 때나 졸아대는 걸 그냥 두는 게 아니었다. 

더불어 신경원은 저렇게 정신없이 졸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주변에서 하는 말을 죄다 주워들으며 잔다. 갑작스러운 출동 요청이 떨어지거나 볼일이 있는 사람이 오면 즉시 눈을 뜨고 졸고 있는 와중에도 옆에서 떠든 말도 전부 기억해 상황에 알맞은 언행을 보였다. 

그 말은 즉, 의자에서 잘 때는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 사무실에 있는 사람은 전부 그걸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저렇게 피곤해 보일 때는 가능한 조용히 움직이는 거였다. 

진짜 겉보기와는 달라. 첫인상과도 아주 많이… 다르고.

키이스는 핸드폰을 들고 조용히 일어났다. 뒤꿈치를 들고 발가락 끝에까지 힘을 주었다. 반은 무의식, 반은 의식적으로 소리 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가는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대체 얘는 왜 이런다냐.

신경원은 눈앞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고 있는 불고기와 테이블 반대편 좌석에 앉아 있는 키이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쪼글쪼글해지는 고기와 맨질맨질한 키이스의 얼굴은 극과 극이다. 그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멋들어진 슈트를 입고 있는 키이스와 면 셔츠에 검은 면바지, 스니커즈를 신은 자신도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더불어 전통 양식으로 꾸며진 가게의 인테리어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인 얼굴의 키이스도 참 극과 극이다.

「이제 드셔도 돼요. 맛있게 드세요.」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에 신경원은 얼른 감사하다며 은젓가락을 들었다. 그러곤 반듯하고 긴 손가락이 젓가락을 향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젓가락 쓸 줄 알아?”

“이런 얇고 무거운 젓가락은 처음이지만 중국음식을 좋아해서 꽤 쓸 줄 압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은색의 얇은 젓가락은 속절없이 키이스의 손가락 관절 사이를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쩔쩔매는 정도는 아니라 해도 난처해하는 표정을 본 신경원은 두 테이블 건너쯤 대기하고 있던 고깃집 종업원을 불러 나무젓가락을 부탁했다. 고급 한식당이라 그런지 허여멀건 싸구려가 아니라 고급스럽게 마무리된 전통식 나무젓가락이 왔다. 

“아, 이거라면 충분히 쓸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만들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등 뒤편 어디에선가 감탄사와 함께 ‘진짜 잘생겼다’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잘생기긴 뭐가 잘생겼다고.

“불고기 먹어본 적 있어?”

“두 번 정도 있습니다. 비빔밥인가 하는 건 입에 안 맞았지만 이건 괜찮았어요.”

“다행이네.”

신경원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어째 대화가 자신이 키이스를 끌고 한식당에 온 느낌이다. 

체력 단련에 소홀한 적도 없고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라 자부하고 있지만 매일 2시간을 풀로 달리다 보니 체력이 달려 틈만 나면 휴식을 취했다. 지쳐서 잠드는 거라 평소보다 조금 더 넋을 놓고 자버리곤 했다. 오늘도 그랬는데, 저녁시간 무렵이 되어 슬그머니 눈을 뜨자마자 키이스에게 반 강제로 끌려 나왔다. 그는 본부를 벗어나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중국, 일본, 한국 어느 쪽입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더니 ‘신’이라는 성으로 짐작해볼 때 동남아시아 쪽은 아닌 거 같았단다. 남은 것은 중국과 일본과 한국인데 셋 중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에 별 생각 없이 한국계라고 대답했더니 끌고 온 곳이 이곳이었다. 눈치로 봐서는 본부 근처에 있는 세 나라 식당을 전부 하나씩 찜해놓은 듯했다.

“여기 와본 적 있어?”

“아니요.”

방긋―, 웃음기계가 웃음을 흘렸다. 또 여기저기서 소곤소곤, 잘생겼다는 소리가 들려와 귓가를 간질였다.

에라, 모르겠다. 지금은 배고프니까 일단 먹자. 그렇지 않아도 체력이 달려 없던 살도 팍팍 내리는 중이다. 게다가 무려 고기! 그중에서도 가끔 생각이 나면 32번가에 있는 가게까지 꾸역꾸역 기어가 혼자 4인분 정도는 훌쩍 해치울 정도로 좋아하는 불고기다. 

신경원은 잘 익은 불고기를 키이스에게 권하고 그가 한 점을 집자 얼른 야들야들한 고기를 입에 넣었다. 취향보다는 조금 달았지만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이 끝내줬다. 배가 고팠던데다가 생각보다 훨씬 맛있어서 그냥도 집어먹고 쌈도 싸먹고 김치와 먹고 추가로 주문한 당면을 말아 정신없이 먹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신경원은 자신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걸신들린 놈처럼 고기를 위장에 쓸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쓱한 기분이 든 신경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그… 입에는 맞아?”

“괜찮네요. 더 드시겠어요?”

“음….”

딱 1인분만 더 먹고 냉면으로 입가심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키이스가 얼른 고기2인분을 추가로 주문했다. 신경원은 키이스를 보며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어린 아가씨에게 맥주가 있냐고 물었다.

「가게 방침상 한국 맥주만 취급하고 있는데요.」

「괜찮습니다. 아무거나 하나 주세요. 아―.」

신경원은 갑작스러운 한국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키이스에게 물었다.

“맥주 한 잔 하려고 하는데, 한국 맥주밖에 없다고 하거든? 마실래?”

“근무시간 중인데 괜찮은 겁니까?”

“맥주가 술이냐? 어쩔래?”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원은 고개를 끄덕이곤 얼른 추가 주문을 했다. 

「맥주 한 병이랑 물냉면 하나 주세요.」

「준비되는 대로 드릴까요, 아니면 식사 후에 드릴까요?」

「바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대학생 아르바이트로 보이는 아가씨는 신경원에게 주문을 받으면서도 키이스를 바라보며 대답하곤 끝까지 힐끔 힐끔 얼굴을 훔쳐보며 물러났다. 

“괜찮은 가게네요. 급히 알아본 건데. 앞으로 자주 와야겠습니다.”

“맛있었어?”

“퍼스트가 굉장히 맛있게 드셔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맛있었냐고 묻는데 웬 헛소리야.”

“저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럼 됐―이 아니라. 너 갑자기 왜 이래?”

“무슨 말씀이신지?”

“저녁이야 회사 식당에서 먹으면 되는데 왜 갑자기 날 끌고 나왔냐고.”

본부에서 두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긴 해도 일하다 말고 먹는 저녁, 일반인이라면 점심에 해당하는 식사를 이렇게 거나한 한식당에서 먹는 건 처음이다. 자다 말고 손목을 잡혀 끌려나오지만 않았다면, 운전사 딸린 벤츠가 아니라 걸어서 질질, 목적지도 듣지 못한 채 끌려온 게 아니라면, 아시안이라고 하면 중국과 일본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게 기본인데 한국을 알고 있던 게 아니라면, 불고기 전문의 한식당이 아니었다면 돌아가버렸을 거다.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데 맛있는 거라도 대접해서 체력 보충 좀 시켜드려야겠다 싶어서요.”

키이스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신경원은 갑자기 먹은 게 목구멍을 기어오르며 얹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얼른 불고기판 위에 남아 있던 양파와 버섯을 긁어 입에 넣어 올라오던 걸 꾹꾹 내리눌렀다.

“고생은 하고 있는 건 맞지만, 접대는 필요 없어. 네가 한 아부에 대한 보상이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다른 분들과 달리 퍼스트는 매일 저희들을 상대하고 계시잖습니까.”

“내가 벌인 일인데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당연한 거야.”

“고생해서 얼굴이 반쪽이 된 파트너에게 밥 한 끼 사는 것도 파트너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그거 그만 드시고 고기 오면 고기를 드세요.”

키이스는 신경원의 젓가락이 양파와 국물만 남은 불판 위를 헤집는 걸 보고 말렸다. 신경원은 입술을 비틀며 젓가락을 내려놨다. 곧바로 불고기 2인분이 올려진 새 판이 식탁 가운데에 올라왔다. 냉면도 곧 서빙되었다. 

“냉면이라는 건데. 먹어볼래?”

“조금만 주십시오.”

냉면과 함께 같이 서빙된 작은 그릇에 면을 나눠 담고 조그만 국자로 국물도 담은 신경원은 부루퉁한 얼굴로 그릇을 내밀었다. 키이스는 조심스럽게 면을 입에 넣었다. 곧바로 짙은 황금색 눈썹이 꿈틀하는 게 보였다. 신경원은 속으로 웃으면서 맛이 없냐고 물었다. 사실은 겨자를 좋아하는 터라 좀 많이 넣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맛이네요. 좀 단단한 젤리로 된 면을 씹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만 톡―하고 매운 맛이 코를 쏴서 이 차가운 수프 맛을 모르겠습니다. 수프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머스터드소스를 조금 적게 넣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키이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먹었다. 그 폼을 보고 있자니 어째 오래된 파트너와 실없는 농담을 하며 밥을 먹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직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냉면은 고기만큼 맛있으니 일단 먹고 보자. 먹거리에는 원래 죄가 없는 법이다.

“잘 드시네요.”

“원래 좋아하는 거라서. 소화가 잘 안 돼서 자주 먹지는 않아.”

후식용의 냉면이라 양이 적은 탓에 고기가 익는 사이 다 먹어버렸다. 신경원은 키이스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해버렸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고기를 입에 쑤셔 넣었다. 기분이 구리구리해서 맛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천만의 말씀. 불고기는 꿀떡꿀떡 잘도 목구멍을 넘어갔다.

식사를 마친 신경원은 테이블 밑에 달린 선반에서 계산서를 뽑아들었다. 키이스도 손을 뻗었지만 선반이 신경원 쪽에 더 가깝게 달려 있어 빼앗기지 않았다. 

“내가 계산할게.”

자신만만하게 계산서를 계산대 위에 내려놓던 신경원은 뒷주머니를 더듬다 그만 그대로 굳어버렸다. 뒷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출입증뿐인 탓이었다. 키이스는 이겼다는 표정으로 안주머니에서 반지갑을 꺼내 신용카드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씨발―.”

작지만 분명한 욕설에 머리를 전통방식으로 곱게 빗어 비녀까지 꼽고 있던 중년의 여성이 어깨를 흠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신경원은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랑 누가 밥값을 내느냐로 좀 실랑이를 해서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네네.」

쪽팔려서 얼굴까지 붉어진 신경원은 거칠게 키이스의 옷자락을 잡고 식당을 나왔다. 그러곤 밖으로 나오자마자 성질을 냈다.

“아씨! 진짜, 맛있어서 나중에 또 오려고 했는데!”

“또 오시면 되죠.”

“너랑은 안 와!”

자신만만하게 계산하려다가 실패한 것은 둘째다. 밥을 먹는 내내, 식당에 있던 거의 모든 여성 손님과 종업원들이 키이스의 얼굴을 훔쳐보고 또 훔쳐봤다. 모르긴 몰라도 뇌리에 각인이 될 만큼 쳐다봤다. 그와 함께 오면 분명 잘 처먹은 주제에 계산대에서 대뜸 욕을 한 이상한 손님으로 자신을 기억해낼 거다. 

신경원은 잡고 있던 키이스의 옷자락을 뿌리치곤 자신보다 13센티가 더 큰, 어깨 깡패 녀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봤다. 얼굴이 잘생긴 건진 전혀~ 모르겠지만 체격 하나는 진짜 끝내준다. 얼굴은 작고 팔다리는 길쭉길쭉. 골격이 모델들보다 더 좋은 거 같다. 

콧대는 오뚝하고 턱선은 날렵하다. 아이홀은 깊이 패어 있고 이마도 반듯하다. 입술색도 얼굴색에 잘 어울린다. 나열한 거만 따지면 미남의 조건을 충분히 갖췄으나 불행히도 신경원의 눈에는 절대 미남으로 안 보였다. 얼굴의 굴곡이 들쑥날쑥 너무 다이내믹해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 모양의 조각같이 보일 뿐이다.

신경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키이스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신경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에서 누군가가 저 얼굴을 보고는 ‘정말 눈매가 스윗~하다’고 했었다.

스윗은 무슨. 하늘색 유리알 같아서 정면에서 들여다보면 무섭기만 하구먼.

옛날부터 그랬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부모님과 친척들의 얼굴은 잘생김과 못생김을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었는데 노랑 빨강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놈의 흐리멍덩한 색의 눈동자가 당최 사람 눈 같지 않아서 정면으로 보는 걸 싫어했었다.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다. 하지만 상대방이 동양인이 아니면, 특히 옅은 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면 무서워서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낯을 가리는 면도 좀 있어서 학교에 다닐 때는 노란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놈들로부터 재수 없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나이가 들며 흐린 색 눈동자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동양인과 원주민들을 제외한 모든 인종의 미추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할아버지와 같은 이민 1세 어른들로부터 미국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놈이 왜 그 모양이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구제불능이었다.

“출입증 내놔봐.”

“……?”

키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재킷 안주머니에서 출입증을 꺼내줬다. 주변에 통행인이 있었기에 손바닥 안에 넣고 사진을 살폈다. 시도 때도 없이 웃어대는 잘생긴, 아주 잘생긴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맨 얼굴은 굴곡이 너무 많아서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사진을 찍어놓으면 얼굴의 굴곡이 비교적 평평하게 보이기에 미추를 판단할 수 있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라도 사진을 보기 전에는 잘생겼는지 판단이 안 가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런 얼굴이면 배우를 하지 뭐하러 기관에 들어왔냐.”

“네?”

네 상판 잘났다고.

신경원은 입술을 삐죽이며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본부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키이스가 곧바로 그를 따라잡아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출입증 사진은 왜 보여달라고 하신 겁니까?”

“몰라도 돼.”

키이스는, 정정. 사진 속의 키이스는 가끔 휴게실에서 다른 여성 에이전트들이 들춰보던 영화며 패션 잡지에서 보던 모델과 배우의 얼굴만큼이나 잘생겼다.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조금 더. 출입증 사진이 그 정도니 제대로 된 사진을 보면―.

“……. 좀 떨어져 걸어.”

“왜요.”

“네 옆에 있으면 내가 오징어가 돼.”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그런 말이 있어.”

이민 3세인 신경원은 어릴 때야 한국 방송 프로그램을 꽤 봤지만 중학교 무렵부터는 공부에 전력을 쏟느라 거의 등한시하고 살았다. 볼 시간도 없었고 부모님도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쌍둥이 사촌 동생들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 문화를 다방면으로 접하고 즐겼고 한국말도 신경원보다 훨씬 잘했다. 잘생긴 놈 옆에 있으면 보통 남자들은 오징어가 된다는 말을 가르쳐준 게 바로 사촌 동생들이다.

“좀 떨어져 걸으라니까!”

성질을 내봤지만 키이스는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는데 무슨 게이 커플처럼 바짝 옆에 붙어서 반쯤 호위하는 느낌을 주며 걸었다. 

에이, 시팔―.

“제발 떨어져 걸어.”

신경원은 키이스가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고기 얻어먹은 값은 할 테니까.”

* * *

이건 불고기 값. 

퍼억―.

이건 냉면 값.

퍼벅! 

그리고 이건 오징어로 만든 값.

신경원은 비틀거리는 키이스의 다리를 오른발로 보기에만 가볍게 퍼억! 걷어찼다. 힘이 가득 실린 발길질이 급소를 정확하게 파고드니 194cm의 단단한 체구도 쉽게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이걸로 비싼 밥값 4일 할부로 마지막 납부 완료했다. 짜식아.

키이스는 지하 주차장 바닥에 대자로 뻗은 채 쿨럭거렸다. 그는 욱신거리는 목을 부여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젠…, 쿨럭―. 장.”

참아보려고 해도 연거푸 터지는 기침을 막을 길이 없는지 키이스는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신경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심한 게 아니냐며 항의한다면 대답할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어’라든가 ‘특별 취급해달라고 해서 그대로 해주고 있는데 싫으냐?’라든가. 사실은 온몸의 힘을 실어서 걷어찼지만 알 게 뭐람.

어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잠깐 시간을 지체하여 내려다보고 있자 기어코 한마디를 한다. 

“고기 몇 번 더 사드리면 확실히 골로 갈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신경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키이스가 그 손을 마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 말고 카드 내놔.”

어둠 속에서 멋쩍어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빨간색의 카드가 건네졌다. 바지 주머니에 카드를 챙겨 넣은 신경원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다음 먹이가 될 놈은 이미 찍어놨다. 등 뒤에서 탁탁 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발소리는 며칠 전과 다름없이 경쾌했다. 

진짜 신경 써서 두드려 팼는데, 어째 그대로냐.

“크억―! 윽!”

퍽퍽 소리에 맞춰 다음 먹이가 괴성을 지르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신경원은 무심한 발짓으로 놈의 몸을 뒤집은 다음 목을 세게 쳐버렸다. 

“카드.”

“아우우우―.”

신음을 흘린 신입, 로스는 카드를 건넨 뒤 상체를 구부정하게 수그린 채로 왼쪽 발꿈치를 살짝 끌며 비상구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신경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정상인데….”

그는 자신의 파트너, 키이스의 발걸음 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관절이란 관절은 죄다 꺾어버릴 기세로 공격했는데도 그놈은 멀쩡했다. 애써 멀쩡한 척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정말 신경 써서 팼기 때문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팔다리 중 어느 하나는 구부렸다 펴는 것도 고통스러워해야 맞다. 

참 신기한 놈이다. 더불어 예상보다 훨씬 실력이 월등하고 잠재력도 상당해 보인다. 적응도 상당히 빠르다. 아직까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적’을 인식하는 수준이지만 그만하면 나쁘지 않다.

신경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 주차장에는 현재 훈련 초기와는 달리 여기저기 ‘광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키이스에게 얼결에 끌려가 고기를 얻어먹은 다음 날 훈련의 난이도와 조건을 조정했기 때문이다. 

꺼놓았던 비상구 표시등을 켜고 라이트 스틱 열 개를 여기저기 주차되어 있는 차량 밑에 던져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라이트 스틱을 대여섯 개로 줄이고 싶었지만 동료들이 말렸다. 

아무튼 광원을 설치해 사물을 어렴풋이나마 구분할 수 있게 해준 다음 나이트 스코프 사용을 금지했다. 혹시나 원성을 듣지 않을까 싶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물론 훨씬 더 어려워진 훈련 조건에 머리를 뜯으며 괴로워하고 괴성을 질러대는 놈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훈련을 포기하거나 비번일이라고 빠지는 사람은 없었다. 죄다 투기를 피워 올리며 반드시 클리어하겠다고 도전 정신을 불태웠다. 

힘들고 피곤했지만 신입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라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번 기수의 신입들이 실력이 좋아서 그런 건지, 함께 훈련을 하면서 서로 경쟁심이 생겨 그런 건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현재 상황은 정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흐흐―.”

다음 목표를 향해 걸으며 신경원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팔팔하게 뛰어나가던 키이스의 뒷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실력 좋은 파트너가 아니라면 필요 없고 신참은 질색이다. 하지만 키이스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얼른 와라. 빨리 와라. 내가 또 특별히 신경 써서 패줄 테니까. 

파트너의 실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생존확률은 높아진다. 그건 기관의 모든 에이전트들이 입을 모아 하는 소리요 진리 중의 진리다. 패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패줄 수 있다.

몸이 축나면 고기 사라고 해야지. 돈 많은 녀석이니 고기 값으로 쩨쩨하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 흐흐흐.

신경원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다음 희생양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끝까지 무사히 훈련을 마쳐주어 고맙습니다. 백업팀 여러분들도 모두 수고했습니다.”

예들린의 말에 훤해진 주차장 한가운데 모인 신입 에이전트들과 백업팀 인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각 신입들의 파트너도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쳐줬다. 섹션 B의 치프와 백업팀 치프도 그들과 함께 무사히 훈련을 마친 신입들을 축하해주었다. 

“2주간 매일같이 훈련에 참여하느라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배운 것도 많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예들린은 말을 하다 말고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벌써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지막 훈련에 참여했던 맥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뭐?”

“할 일 끝났으니 가서 쉬겠다고 하던데요.”

“하아. 녀석답군. 어쨌든 이 자리에는 없지만 이번 훈련을 기획하고 진행한 시니어 스페셜 에이전트 신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예들린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신경원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를 치하했다. 개인적으로 마주치게 되면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해주라면서 말이다. 

“오늘까지의 경험이 앞으로의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보다는 조금 빠르지만 다음 주부터 여러분들도 실전에 투입할 예정이니 모두 각오 단단히 해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말에 신입들은 더더욱 큰 소리로 환호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옆에 있는 동기들을 끌어안고 제 파트너를 찾아가 덥석 끌어안는 사람도 있었다. 신입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예들린을 포함한 치프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키이스는 잠시 그곳에 있다 제일 먼저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각 섹션별로 갈라져 뭉쳤다. 섹션 B 쪽은 오늘이 근무 날이기 때문인지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비번일인 섹션 A쪽의 인원은 자연스레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단을 오르며 미리 약속했던 뒤풀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꼭 오셔야 합니다~. 도망가시면 안 돼요.”

“알았다니까. 걱정 마. 도망은 무슨.”

“클리퍼드. 퍼스트 찾아서 꼭! 참석해.”

다른 사무실을 사용하는 신입 하나가 키이스를 콕 찍으며 말했다. 밝은 성격에 붙임성도 좋은 그는 어느새 섹션 A의 신입들 사이에서 총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뒤풀이를 제안한 것도 그였고 장소를 섭외해놓은 것도 그였다. 

“이미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늦어도 좋으니 책임지고 모셔와. 섹션 B 녀석들에게 퍼스트 접대비로 회비를 좀 받았거든.”

“알겠습니다. 아, 혹시 주소 아십니까?”

키이스는 바로 옆에 있는 맥스에게 물었다. 

“알긴 아는데 아마도 필요 없을 거다.”

어째서 필요 없는지는 금방 알게 되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먼저 왔던 다른 섹션의 사람들이 로커 룸에서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샤워실로 가려면 로커 룸을 통과해야 하는데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들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쉬~하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왜들 그러는지 의아해하던 섹션 A의 사람들은 곧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내 말이 맞지?”

맥스는 로커 룸 한가운데 있는 나무 벤치 위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신경원을 가리키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신경원은 샤워를 마치고 힘이 다했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커다란 타월로 몸을 감싼 채 곯아떨어져 작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키이스를 뺀 나머지 인원들은 조심조심 샤워실로 들어갔다. 키이스는 잠든 신경원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다 서두르는 것이 낫겠다 싶어 동기들의 뒤를 따랐다. 

“퍼스트.”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키이스는 조심스럽게 신경원을 깨웠다. 

“퍼스트. 일어나세요.”

혹시 지난번처럼 반쯤 기절해 잠든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신경원은 곧바로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반쯤 뜬 채 부스스 일어났다.

“왜.”

“뒤풀이 가셔야죠.”

“안 가.”

“안 됩니다. 가셔야 해요. 섹션 B 친구들이 퍼스트 접대하라고 회비도 모아 줬는걸요.”

총무를 맡고 있는 신입이 얼른 다가와 신경원을 설득했다. 맥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인마, 네가 빠지면 의미가 없잖아. 낯가리는 거 알지만 때는 좀 가려서 정도껏 해라. 응?”

“…에이씨.”

신경원은 머리를 긁으며 일어섰다. 그러곤 몸도 제대로 가리지 않은 채 자신의 로커로 가서 옷을 꺼내 입었다. 잠깐이었지만 신입들은 신경원의 등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왼쪽 허리께까지 긴 흉터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언제 봐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흉터였다. 

몸에 흉터가 있는 사람은 많았다. 맥스도 팔다리에 흉터가 있었고 다른 선임들도 최소 한두 개 정도는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원처럼 큰 흉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등판에 시선이 모인 줄도 모른 채 신경원은 여느 때처럼 반팔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었다. 그러곤 얇은 천으로 된 머플러 하나를 목에 둘둘 맸다. 반팔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멋으로 둘렀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무늬는 그렇다 쳐도 색이 완전 혼자 튀었다. 

“추우세요?”

키이스는 제 로커 안에 여분의 재킷이 있는지 보고 신경원에게 물었다. 신경원은 고개를 저으며 어깨만 으쓱했다.

“가시죠.”

어느새 로커 룸에는 단둘만이 남아 있었다. 키이스는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신경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목을 잡아채는 시늉을 하자 신경원은 재빨리 문 쪽으로 몸을 뺐다. 키이스는 고양이를 몰아가는 기분으로 뒤를 따랐다. 

뒤풀이 겸 회식 장소는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펍pub으로 식당도 겸하는 곳이었다. 평소에도 기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인지라 주인 이외 몇몇 종업원들이 인사를 해왔다.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밤낮을 거꾸로 사는 그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다. 특히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서는 한바탕 거하게 뛰고 난 후였기에 테이블이 그득할 정도로 시킨 음식은 금세 동이 나기 시작했다. 구석 자리를 차지한 그들의 테이블 위엔 곧장 안주와 함께 하우스 맥주를 가득 채운 잔이 자리를 잡았다. 

신경원은 식사를 하기 전에도, 하는 중에도 감사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표정은 내내 부루퉁했다. 때문에 분위기가 조금 식을 뻔했지만 맥스와 캐리가 가볍게 구박을 하며 원래 저런 성격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줬다.

“더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키이스는 벽 쪽 자리에 앉은 신경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지런히 그를 챙겼다. 신경원은 고개를 젓고 거품이 얹힌 맥주잔으로 손을 뻗었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마세요. 피곤하신데.”

“내버려둬. 술이라도 좀 들어가야 느슨해지는 놈이니까.”

오른쪽에 앉아 있던 캐리가 작은 소리로 키이스에게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반년만 버텨. 원래 좀 까칠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 지나면 알아서 먼저 말도 걸고 꽤 살갑게 대해줄 거다.”

“다 들리거든?”

캐리는 자신을 노려보는 신경원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내 말에 뭐 틀린 거라도 있냐? 억울하면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말고 좀 웃든가.”

“내 얼굴 근육 내가 맘대로 쓰겠다는데 왜 그래? 보태준 거라도 있어?”

“있지.”

“없거든?”

“멋대로 세운 훈련 계획에 반대 안 하고 참여까지 해줬는데 왜 이러셔?”

“네놈 도움 없었어도 문제없었을 거다.”

“안 했으면 우는 소리 했을 거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누가 우는 소리를 해? 누가!”

“됐으니까 술이나 마시셔.”

“흥이다!”

누가 이긴 건지 진 건지 알 수 없는 장난 섞인 말다툼이다. 느낌상 캐리 쪽의 승리로 보이지만 캐리도 흥흥거리며 맥주잔을 비우는 걸 보니 이겼다는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친한 동료라는 티가 팍팍 나는 대화다. 그런데 가운데 끼어 듣고 있자니 어째선지 기분이 나빠진다. 이상하게도. 이유를 알 수 없었던 키이스는 죄 없는 맥주잔을 노려본 다음 재빨리 비워버렸다. 

다들 근무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훈련을 받았던 터라 피곤할 텐데도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셨다. 개중에는 자신들처럼 술 한 잔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근무를 하고 있을 동기들을 언급하며 그들을 대신해 2배로 즐겁게 놀자며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이 키이스는 옆자리에 앉은 신경원을 계속 살폈다. 신경원은 두 번째 잔까지는 깨끗하게 비웠지만 서서히 모닥불이 꺼지듯 안색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 맥주잔을 잡고 있던 신경원의 손이 스르륵,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키이스는 내색하지 않고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는 손을 가볍게 캐치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릎 위에 얹어놓았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남아 있으면 손을 빼리라 생각했는데 신경원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반 기절 상태로 잠이 든 건가 하는데 새카만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머리가 스르륵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키이스의 어깨에 닿았다. 머리가 닿는 순간 키이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퍼스트?”

작게 이름을 불러봤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어깨가 묵직해지고 머리가 닿은 부분이 온기로 가득 찬다. 그러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키이스는 허리를 조금 더 반듯하게 세웠다. 맥스가 그랬던 것처럼 팔짱을 끼어 어깨를 고정해주려 했지만 허벅지 위에 잡아둔 신경원의 손이 떨어질까 하지 못했다. 뭔가 어정쩡한 자세라 한쪽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어깨를 치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경원의 몸에서 힘이 빠져 점점 더 묵직하게 기대올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어라, 자냐?”

“아, 네. 좀 깊이 잠든 것 같은데요.”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하고 고개를 들었다. 맥스가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야, 캐리. 저놈 봐라.”

맥스의 말에 캐리가 “응?”하며 고개를 옆으로 빼 신경원을 살폈다. 곧 그의 표정도 묘하게 구겨졌다. 

“원래 머리 댈 곳만 있으면 아무데서나 잘 자는 놈이긴 하지만….”

두 남자는 키이스를 희한하다는 듯 쳐다봤다.

“클리퍼드, 혹시 그 놈에게 고기 사 먹였냐? 돼지고기 말고 소고기.”

“네, 한 번. 더 사드리려고 했는데, 거절하시더군요.”

“이야~. 클리퍼드. 너 대단하구나. 들었지, 캐리? 클리퍼드가 저놈에게 고기를 사 먹였대.”

“허어~.”

“뭐, 문제 있습니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

맥스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 감탄사를 연발했다. 캐리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키이스와 신경원을 번갈아 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평소보다 더 까칠하게 굴더니만.”

“그러게나 말이야.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나봐.”

“예?”

“그놈이 파트너 운이 좀 없거든.”

“……?”

키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맥스는 남아 있던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는 탁 소리를 내며 맥주잔을 내려놓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 이전에 그놈 파트너가 된 녀석들이 죄다 반년도 못 버티고 그만뒀어.”

“딱히 퍼스트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이런 자리에서 말하긴 뭐하지만 오래 버티는 신입이 별로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그놈은 특히 운이 없었지.”

맥스는 턱짓으로 신경원을 가리킨 후 맥주를 더 시켰다. 큰 목소리인지라 혹 신경원이 깨지 않을까 했지만 어깨에 얹힌 머리는 미동도 안 했다. 

신경원의 파트너 운에 대한 이야기는 곧 신입들의 잔류 퍼센트 쪽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어째서 선임들이 자신의 새 파트너들에게 데면데면하게 굴고 성의 없는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당연히 앞으로 잘하라는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술자리는 신경원이 잠든 상황에서도 꽤 길게, 하지만 적당한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일반인들의 퇴근 시간을 좀 넘긴 시간이 되자 알아서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몇몇은 자리를 옮겨 한잔 더 하자는 이야기를 했고 남은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집에 데려다드려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주소 아시는 분 계십니까?”

“주소는 무슨. 어이, 퍼스트.”

키이스의 옆에 앉아 있던 캐리가 손을 뻗었다. 그는 키이스가 말릴 새도 없이 신경원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인마, 일어나. 집에 가야지.”

맥스가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뻗어 신경원의 다리를 가볍게 걷어찼다. 순간 키이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좀, 살살―,”

“살살은 무슨. 얌마!”

맥스가 다시 한 번 걷어차자 미동도 안 하고 잠들어 있던 신경원이 퍼뜩 눈을 떴다. 

“―어?”

“집에 가. 끝났어.”

“…아. 어.”

신경원은 눈을 비비며 몸을 세웠다. 묵직하던 어깨가 가벼워졌다. 하지만 키이스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더더욱 깊어졌다. 

“으, 졸려.”

신경원은 꾸물럭거리며 일어섰다. 키이스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부드럽게 말했다.

“많이 피곤하시죠?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너도 꽤 마셨잖아. 택시 타고 가게 내버려둬.”

“운전사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퍼스트, 가시죠.”

키이스는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 신경원은 여전히 눈을 비비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혹여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신경원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아무 데도 부딪히지 않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며 차를 부른 키이스는 계속 신경원의 옆에 바싹 붙어서 괜찮냐고 물었다. 신경원은 대답 없이 곧장 차도 쪽으로 이동했다. 

“곧 차가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반개한 눈이 키이스 쪽으로 향했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신경원에게 키이스는 재차 말했다.

“금방 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신경원은 잠에 취한 상태임에도 쌀쌀맞은 눈빛으로 키이스를 노려봤다.

“그게 네 차지 내 차냐?”

졸음이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한 신경원은 차도 쪽으로 나아가 타이밍 좋게 굴러오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말없이 택시에 타는 신경원을 붙잡으려던 키이스는 누군가 어깨를 턱 하고 잡아채는 바람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왜 이러십니까.”

키이스는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고 제 어깨를 잡아챈 맥스를 바라보았다. 

“도와주려는 거다, 인마.”

맥스는 키이스가 제 손을 털어내는데도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녀석 낯가리는 게 보통을 넘거든. 겨우 녀석이 마음을 좀 열어가는 판에 괜히 신경 긁지 말라고 말린 거다.”

“저는 단순히 집에―,”

“그래.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겠지. 하지만 퍼스트는 어지간해서는 남한테 신세 안 져. 제 발로 집에 못 갈 정도면 차라리 숙소에서 퍼지는 쪽을 택하는 놈이거든. 잘해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좀 더 네게 익숙해져서 마음 열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제일 좋은 방법은 6개월을 채우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고 싶다는 소리를 안 하는 거지. 그 이상 가면 더 좋고. 아무튼 앞으로 반년… 이 아니라 5개월만 잘 버텨봐.”

귀가를 선택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택시를 타고 사라지던 중 차례를 기다리던 캐리가 맥스를 거들었다. 

“이거도 다 네가 퍼스트 녀석 마음에 든 것 같아서 해주는 말이니까 새겨들어라.”

캐리는 그 말을 마치고 택시에 탑승했다. 방향이 같은지 맥스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같은 차에 올랐다. 그는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알았지? 앞으로 5개월이다.”

두 사람을 태운 택시는 바람처럼 쌩~하고 키이스의 앞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그는 멀리서 자신의 차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퍼억―!

키이스는 정확하게 제 앞에 주차한 벤츠의 타이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문을 열어주기 위해 차에서 내려 보닛 앞을 돌아오던 운전사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이스는 타이어를 한 번 더 걷어찼다.

불쾌했다.

이유를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불쾌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키이스는 재차 타이어를 걷어차고는 차에 올랐다.

갸름하고 반듯한 손가락이 허전한 어깨 언저리를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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