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1부) (1/21)

  1.

졸업식 날에 집을 나왔다. 꽃다발을 품에 안고 더플코트에 체크무늬 목도리를 한 채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울었다. 대학에 떨어져서도 아니고 졸업식을 홀로 보내서도 아니었다.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가져온 녀석이 있어서 사진 몇 장도 얻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담임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올 테니 다녀와서 중국집에 가자고 했다. 예약이 힘든 곳을 삼 개월 전부터 연락해 예약해 두었다고 하셨다. 자신이 사라진 걸 알고도 그곳에 갔을까, 안 갔을까….

정류장에서 서럽게 울다 보니 볼이 발긋하게 텄다. 대부분 이렇게 아프게 성인이 되진 않을 거다. 아마도 얼떨떨하게 해를 넘겨 성인이 되어버리겠지. 그러길 바란 건 윤오도 마찬가지였다.

시내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표를 끊었다. 어디로 갈지도 정하지 않았다. 무서워서 돈을 내미는 손이 덜덜 떨렸다. 현금을 내밀고 표를 받은 다음, 교과서가 아니라 짐으로 무거운 가방을 추슬렀다.

버스 대기소에는 터미널 이전을 바라는 사람들과 이전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담긴 현수막이 퍼덕였다. 바람에 날리지 말라고 뚫어놓은 구멍이 무색했다. 한파 경보가 내린 매서운 날씨에 윤오는 몸을 한없이 웅크렸다.

후회한다. 하지만 떠나지 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자신의 삶은 송두리째 없어질 예정이었다.

얼마든지 구색에 맞추어 보기 좋게 포장할 수 있었다. 그럴싸한 운명론을 들먹이며 체념할 수도 있었다. 혹은 바보처럼 눈과 귀를 가리고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오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요령이 없고 멍청했다.

부모님께는 죄송했다. 하지만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그들은 윤오의 운명을 가장 기뻐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윤오야. 이제 성인이 되는데, 떨리지 않니?’

그 떨리는 미래에는 자신의 의사가 없었다. 도리어 자신보다 가족들이 더 기대하고 있던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들은 윤오의 뒤에 있는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안개처럼 흐무러진 시선이 몽롱하게 몸을 통과하여 윤오 뒤에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작 자신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존재를.

‘…제가 싫다고 하면요? 제가 다른 게 하고 싶다고 하면요?’

어머니는 할머니가 윤오의 되바라진 말을 들을까 봐 놀라 다급히 쉿, 쉿 소리를 냈다. 하지만 언제나 정정하신 할머니는 이미 윤오의 말을 들은 뒤였다. 여느 때와 달리 모질게 혼내시는 대신 당신께선 이러셨다.

‘네가 아무리 거부해도 정작 네 짝을 앞에 두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게다. 이게 운명이란 걸 깨닫고 순응하겠지.’

그게 뭐예요. 짝이 뭐고 순응은 뭔데요. 징그러워요. 그게 정말 운명이라면, 나는 왜 그 미래가 무섭고 오지 않았으면 하는 건데요…?

알지도 못하는 그 짝이란 것을 처음 들었을 때, 윤오는 어린 나이에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침을 느꼈다. 조모의 말대로라면 짝을 떠올리는 게 그립거나 설레거나 기대되어야 할 텐데, 그럴 때마다 윤오는 도저히 이해할 수조차 없던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이가 좀 더 먹어서야 그게 미움, 원망, 공포라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런 걸 느낀 걸까?

그러나 확실한 건, 김윤오에게 짝이란 너무 이른 나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움, 원망, 공포를 깨닫게 한 존재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배꼽에 심어진 씨앗처럼 그를 좀먹으며 함께 자랐다.

밉다…. 얼굴도 모르는 짝을 이유도 모른 채 원망하고 있다. 만나고 싶지 않다. 짝이 되기보다 차라리 영영 모르는 남으로 평생 지내고 싶다.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마른 태풍처럼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감정 끄트머리에는 아주 가끔씩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떠올랐지만, 그걸 발견하고 이해하기도 전에 윤오는 번번이 회피했다.

그의 상념을 찢듯이 윤오가 타야 하는 버스의 문이 열렸다. 목적지로 향하는 승객들은 이만 탑승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그나마 있는 이들도 느릿느릿 굼떴다. 윤오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표가 덜덜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삶이 무서워서였다. 윤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생.”

고작 세 걸음 걸었을 때 누군가가 그를 잡았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 까딱하다간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려 이대로 포기할 뻔했으니까.

“꽃다발, 두고 갔어요. 학생 거 아니에요? 예쁜데 두고 가면 어쩌누. 아까워서.”

윤오는 꽃다발을 받았다. 같은 꽃다발, 두 번째로 받는. 감회는 달랐다.

“감사합니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니 그분이 손으로 윤오의 팔뚝을 다독였다.

“축하해요.”

졸업인 걸 눈치챈 말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안 그래도 헐거운 윤오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기엔 충분했다. 윤오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색소 옅은 속눈썹이 끈끈하게 깜빡였다.

“…….”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까딱이고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탔다.

버스는 미리 틀어둔 히터로 훈훈했다. 얼었다 녹는 손끝이며 볼이 간지러웠다.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 뻔했던 윤오는 다음 순간 황급히 일어났다.

“잠시만요.”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후, 지금도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끄고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떨리는 숨이 서리처럼 보얗다. 흉골이 아래로 무겁게 꺼지도록 깊은숨을 내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숨이 막힐 만큼 강하게 튼 히터 때문에 몸은 더운데 마음은 춥다. 눈조차 내리지 않은 가문 겨울은 눈물까지 마르도록 건조했다. 윤오는 간지러운 손으로 강하게 깍지를 끼었다. 품에 안은 가방에는 졸업장, 옷가지,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인출해 챙겨온 그의 전 재산, 친구들과 찍은 사진. 예매되지 않은 옆좌석에는 꽃다발.

오롯한 성인이 되었으나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수렁 같은 운명이 족쇄로 당기고 그것에서 도망치고 싶어 자꾸만 허우적대는데, 과연 얼마나 나갈 수 있을까.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래야만 할까.

“출발하겠습니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기사님이 빠르게 인사말을 뱉었다. 이어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바퀴가 구르는 순간 윤오는 악몽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하고 밭은 숨을 쉬고 창문에 손을 짚었다. 멈춰주세요, 하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으나 억눌렀다.

처음으로 부리는 오기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알아서 찬 바닥으로 내쳐지는 일이라 할지라도 제 나름의 발악이었다. 오기가 몸짓을 부풀린다. 그 짝이란 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디 한번 찾아내 보라고. 찾아내서 잡아 보라고. 잡혔을 때 정말 내가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무력해질지, 나도 궁금하니까….

* * *

한때는 이곳도 논과 밭밖에 없었다고 했다.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해 봐야 19층짜리 아파트가 전부였다는 곳에, 이제 25층 정도는 아담하게 느껴질 고층 아파트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고층 아파트 옆에는 그보다 높은 고층 아파트가, 그 옆에는 그보다 높은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윤오는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윤오야. 제육볶음 내가라.”

“네.”

윤오는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처음엔 컨테이너에서 시작했다는 박 사장의 함바 사업은 이제 이동식 컨테이너에서 그럴싸한 가게로 바뀌어 영업하는 한식 뷔페 사업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쉼 없이 유입되는 건축 현장 직원들과 박 사장 부부의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솜씨, 그리고 MSG가 더해져 사업은 날로 커졌다. 벌써 박 사장이 가진 한식 뷔페 집이 네 개였다.

그중 하나, 박 사장이 직접 운영하는 이곳에서 윤오가 일하게 된 지도 어느덧 2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꽉 채워서 1년 반, 햇수로만 따지면 2년. 그사이 윤오도 젖살이 빠졌다.

조숙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은 윤오에게 형언키 어려운 분위기를 가져왔다. 박 사장은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윤오를 밖으로 내돌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전 열한 시 반부터 오전 두 시 반까지 조를 나누어 들이닥치는 인파를 피해 윤오가 하는 일이라곤 부엌 안에서 재료를 손질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것뿐. 홀을 누비는 건 사람들이 밀려들기 전까지만이었다.

“얼른 그거 옮기고 너도 안에서 밥 먹어라.”

박 사장이 양파 껍질이 묻은 손을 훌훌 털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는 벌써부터 입이 마르는지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담배를 찾아 뒤적이는 솥뚜껑 같은 손에는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었다.

‘새끼손가락이 없다고 삼시 세끼를 못 만들겠냐?’

되도 않는 농담. 썰렁하다 못해 자못 징그럽기까지 한, 본인만 웃을 수 있는 장난. 그걸 처음 들었을 때 윤오는 눈썹을 찌푸렸고 박 사장은 ‘새끼, 거참 웃지도 않는다.’ 하며 투덜거렸다.

큰집에 다녀온 이후로 손가락 하나를 잃었고, 덕분에 손을 씻어 밥장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만이 윤오가 아는 박 사장의 과거사였다. 윤오도 박 사장의 과거를 묻지 않았고 박 사장도 윤오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윤오는 이곳이 좋았다.

“윤오야. 이리 와. 잡채밥 했어.”

박 사장의 부인은 손이 컸다. 속이 작은지 입이 짧은 윤오를 보며 늘 더 먹어야지, 밥심이 제일 중요해,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아침에 오자마자 채 썬 당근을 달달 볶아 기름을 낸 뒤 데친 시금치를 함께 볶았다. 조금 단단한 식감이 취향이라 일찍 빼낸 당면을 볶은 채소와 함께 특제 간장에 무친 뒤 참깨를 솔솔 뿌리자 윤기가 자르르한 잡채가 완성되었다. 주방 가위로 석둑석둑 썬 잡채와 갓 지은 밥을 버무려 참기름을 좀 더 뿌리니 고소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운다.

박 사장의 처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덕분에 늘 좋은 참깨와 고춧가루를 얻을 수 있지만 그건 우리만 먹자며 몰래 속닥거리던 기억이 났다. 그 ‘우리’에 윤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오랜만에 그를 웃게 해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윤오가 수저를 들기 무섭게 주방 너머로 식당 문이 벌컥 열리고 온갖 언어가 들려왔다. 이집트, 인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윤오는 비행기 한 번 타 본 적 없어도 이곳에만 있으면 전 세계를 누빈 것만 같았다.

“맛있지? 여기 총각김치도 먹어. 잘 익었어.”

때를 놓쳐 아이를 못 낳았다는 박 사장 부부는 윤오를 아들처럼 대했다. 윤오가 학대를 받으며 큰 건 아니지만, 부모와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던 만큼 이런 평범한 분위기가 그를 자꾸만 이곳에 머물게 했다.

너무 오래 머물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처음 반년을 호되게 고생한 터라 떠나야지 마음 먹을 때마다 하루만 더, 일주일만 더, 하게 된다. 윤오는 우물거리며 웃었다.

“맛있어요.”

“그렇지? 참깨 더 뿌려줄까?”

“괜찮아요, 사모님.”

“사모님은 무슨. 엄마라고 불러도 돼.”

따뜻한 눈빛에 윤오는 배시시 웃었다. 마침 담배를 다 피우고 들어온 박 사장이 그 모습을 보았다.

“하이고. 저 예쁘장하게 생겨 가지고 어디 장가나 갈랑가 모르겠다. 머스마가.”

“잘생기기만 했구만, 우리 윤오이. 당신이 우락부락 백정처럼 생겨서 질투하는갑지?”

“질투는 무슨. 윤오야. 너 몸 좀 키워라. 그렇게 희멀거이해선 안 돼. 그리고 잘생기긴. 예쁜 거지.”

“요즘은 예쁜 머스마들이 잘생긴 거라네요. 알지도 못함서.”

코웃음 한번 대차게 친 박 사장 부인이 윤오에게 보리차를 내밀었다. 윤오는 서둘러 수저질을 했다.

그러던 중, 항상 틀어놓는 홀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가 윤오의 귀를 쫑긋거리게 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선 금인과 치인으로, 유럽을 비롯한 서양 문화권에서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이형질인들의 유래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합니다. 유럽의 경우 로마를 건국했다고 하는 로물루스 형제를 최초의 알파로 보지요. 늑대의 피를 마시고 자랐기에 늑대들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알파에서 따왔다고 하니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중국은 여와라는 하체가 뱀인 여신이 최초의 알파, 즉 금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러고 보니 다음 주에 금인하구 치인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나온다고 하던데.”

“그게 뭐가 재미있어?”

“보지도 않고 재미없다고 하는 당신보단 낫지.”

“…나는 말이야, 금인을 본 적이 있어. 큰집에서.”

큰집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던 박 사장이 갑자기 그곳 이야기를 꺼냈다. 아닌 척하려고 해도 윤오의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안 그래도 바깥에서 금인 치인, 알파 오메가 이야기가 들릴 때부터 수저질이 영 신통치 못하던 참이었다.

“모든 금인이 짝이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고. 그 금인은 자기 치인을 죽여서 왔더라구.”

바짝 다가오는 공포심에 윤오가 바르르 떨었다.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이 치솟았다.

“왜, 왜 치인을 죽였대요…?”

“분명 자기 짝이어야 하는데 다른 놈 곁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대. 금인은 그냥 미친놈이야.”

여간한 꼴은 다 봤을 박 사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발정기인지 번식기인지가 왔을 때는…. 짐승한테 쓰는 마취제를 써도 얌전해지지를 않더라고. 그냥 짐승 새끼들이야.”

윤오는 결국 수저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금인(禽人), 치인(治人), 안인(安人).

먼 옛날 신선이 내려와 짐승들에게 말하길, 햇빛을 보지 않고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로만 100일을 버티면 사람이 되게 해준다 약속했다. 곰과 호랑이가 나섰다. 호랑이는 50일을 버티고 나갔고 곰은 100일을 버텼다. 곰은 사람이 되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아서 그들이 우리가 아는 평범한 이들인 안인이 되었다.

도중에 나간 호랑이는 다시 산속에서 짐승들과 살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짐승이 아니었다. 곰의 아이들과 달리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들이 어떻게 새끼를 치고 끝내 사람의 형상을 한 새끼까지 낳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법을 호랑이만 안 것 같지는 않다. 호랑이, 여우, 늑대 등 아주 적은 짐승의 새끼들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곰의 아이들보다 멀리 보고 잘 듣고 더 튼튼하며 더 컸으나,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 주기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이성을 잃고 새끼를 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발정기처럼 나타났다. 그 발정열이 너무나 높아 죽거나 미쳐버리기도 십상이었다.

짐승이라서 금인이라고 불렀다. 반쪽짜리 금수.

그러나 이렇게 대를 이어 태어나는 아이들은 오직 금인뿐으로, 치인은 태어나지 않았다.

짐승을 길들이는 이들, 치인.

금인은 치인과 함께 지내면 발정기가 다스려지고 흉폭한 통증도 사라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 특징은 대물림되지 않았고, 발생 원인도 알 수 없었다.

몇몇은 이 사실을 두고 샤머니즘에 대한 은유가 아니냐고 했다. 무당과 신의 관계처럼 신화가 현실이 되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그럴싸하고 재미없는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치인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했다.

즉, 무당들이 진짜로 대를 이은 게 아니라 무구(巫具)와 지식을 물려주는 신딸과 신아들을 두는 것처럼, 치인도 피가 아니라 다른 특징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게 아니냐 하는 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다른 특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진 설득력 있는 주장이랄 게 없었다.

그리고 윤오가 바로 그런 치인이었다. 가족 중에 금인도 치인도 없는데, 그만 태어날 때부터 달랐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겨울 방학에 병원에서 형질 검사를 했다. 그러나 그 결과지를 받기도 전에, 조모는 윤오가 밤에 꿈을 꾸며 우는 것을 보고 치인인 걸 알았다. 치인이 모두 꿈을 꾸는 건 아니라는데 윤오는 꿨다. 제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걸 알리듯.

세상이 바뀌는 와중에도 이형질인들은 예외 취급되곤 했다. 서로가 없으면 완전하지 못한 존재라는 관념은 일종의 특이체질이자, 어떤 공고한 불변의 법칙처럼 여겨졌다.

사실 윤오는 치인이라는 결과를 받은 이후에도 불편한 건 크게 없었다. 악몽과 까닭 모를 짝에 대한 원망을 빼면. 아마도 치인은 안인처럼 평범하게 살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금인은 아니었다. 금인들은 현대에 와서도 포식자의 자리에 섰고, 상대에 대한 절박함은 금인이 훨씬 컸다. 상대가 없으면 불완전하다는 것은 그들에겐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써먹기 좋은 법칙이기도 했다.

대신 원하는 걸 준다. 바라는 걸 안겨준다. 금인과 치인이 만나는 게 당연한 운명이라는 게 불편하다면, 적어도 아름답게 보일 수는 있게 해 줄게. 치인은 금인을 길들인다고 하지만, 진짜 길들여지는 건 오직 치인인 것 같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적잖은 집안에서 이런 아이들이 태어나면 복권 당첨이라 하기도 했다. 윤오의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했다. 악의는 없었다. 자신이 운이 없었을 뿐이다. 백 년 전쯤의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할머니와 아버지가 있다는 게 악의는 아닐 테니까. 그냥 운이 없었을 뿐.

…생각에 빠지는 건 좋지 않았다. 뒤에서부터 누군가 쫓아오는 기분에 윤오는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밥솥하구 반찬 확인하고 올게요.”

좋은 핑계였다. 내내 먼지 속에서 고되게 몸을 움직이고 온 인부들의 식성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사장님, 드세요. 전 다 먹었어요.”

“됐다. 됐어. 나가지 마.”

“괜찮아요. 천천히 드세요.”

위생 마스크를 쓰고 홀에 나가려 하니 아닌 게 아니라 바로 ‘여기 국 좀 더 주세요!’ 하는 요구가 들렸다. 윤오는 식지 않게 약불로 끓이고 있던 커다란 국 통을 들고 부엌을 나섰다. 조금 헐겁게 걸어둔 마스크가 내려갈 듯 아슬아슬했다. 코를 찡긋거리며 마스크를 올렸다.

국 통을 바꾸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국자로 건더기부터 슬슬 덜어냈다. 그사이 하마터면 벗겨질 뻔한 마스크를 잡는데, 갑자기 그의 앞으로 식판이 불쑥 나왔다.

“총각김치는 없습니까?”

키가 무척이나 큰 남자였다. 눈의 가로 길이는 긴데 위아래는 좁았고 광대가 도드라져 서늘하면서도 조금 무서운 인상이었다. 특히 광대부터 입술 옆까지 그어진 옅은 흉터 자국 때문에 그 인상이 더욱 선명했다. 큰집에서 갓 나온 사람인가? 윤오는 잠시 기다리시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사모님. 총각김치 있냐 하시는데요.”

“아유 우리 먹을 거밖에 없는데. 떨어졌다 그래. 주말에 담글 거라구.”

윤오는 다시 나와 말을 그대로 전했다. 무어라 짜증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고는 가장 가까운 식탁에 앉아서 묵묵히 식사를 했다.

으레 동향 사람들끼리 앉거나 같은 조끼리 앉게 마련인데 남자는 혼자였다. 더 이상한 건 그의 주변에 앉는 사람들도 그에게서 의자를 하나씩 띄어 앉았다는 거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가끔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유튜브를 보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문자를 보내는 게 전부였다.

“윤오야. 또 뭐 내가야 하냐?”

“제육 떨어졌어요. 어묵볶음도요.”

“맛있는 건 하여튼 잘 안다니까.”

투덜거리면서도 박 사장의 목소리는 즐거워 보였다. 이번 달도 대금이 톡톡히 들어올 것이다. 적어도 내년, 내후년까지도 무리 없다.

새로 대단지가 들어온다며 현수막을 걸어두고 간 게 어제였다. 골이 아프도록 시끄러운 공사 소음도 박 사장에게는 돈 들어오는 절그렁절그렁 소리로만 들렸다. 손을 씻었다고는 하지만, 알고 지내던 동생들이 이 주변에 다른 한식 뷔페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경쟁자가 생길 일도 없었다.

박 사장은 그저 즐거웠고, 윤오도 저 소음에 기대어 내일 걱정을 또 슬며시 밀어냈다.

* * *

윤오는 컨테이너에서 잤다. 박 사장 내외가 임시로 살던 곳을 청소하고 새로 장판을 깔아 구색을 갖춘 숙소였다. 문풍지를 붙이지 않으면 외풍이 심하고 여름에는 몹시 더웠지만 윤오는 충분히 만족했고, 사실 이곳을 제법 좋아했다. 조용한 데다 방값이 나가는 것도 아닌지라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돈을 모으면 가장 먼저 방을 구하긴 해야 할 것이다. 윤오는 수첩을 들여다보며 숫자를 셌다. 옆에는 노란색 고무줄로 묶은 돈다발이 있었다. 백만 원씩 묶은 게 이제 겨우 다섯 묶음이 되었다. 목표한 금액을 채운 거다.

“보증금 거의 다 모았다.”

그래도 불안감에 월세의 여유분을 더 모으자는 싶어 박 사장 내외의 친절에 기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좀 뻔뻔스럽고 민망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가출한 이후로 깨닫게 된 건 조금 뻔뻔하게 굴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알면서도 매번 힘들지만.

윤오는 사모님이 주신 핫핑크의 극세사 이불을 턱 밑까지 여미고 몸을 옆으로 굴렸다. 소중한 돈다발은 집을 나올 때 챙겨 온 가방 안에 숨겨두고.

바람이 살벌하게 분다. 이럴 때면 추위보다 끽끽대는 크레인이 더 무서웠다. 거대한 크레인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상상이 꿈으로도 이루어져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깰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윤오는 팔을 뻗어 창문을 재차 닫고 다시 몸을 웅크렸다. 몸이 피곤하니 심산한 마음과 별개로 잠이 잘 왔다.

잠이 들려는 차면 윤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오래전부터 윤오에겐 태몽처럼 선명한 꿈이 현실과 수면 사이에서 불청객처럼 나타나는 게 일상이었다. 요즘에는 특히 더 심했다. 그럴 때면 윤오는 노오란 눈빛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밤에도 번쩍이는 노란 눈이 나를 노려본다. 뒤돌아보면 바로 덮쳐 등을 찢고 목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렇게 얼어붙어 있자면 뒤이어 검은색 줄무늬와 주홍빛 털, 푸르스름한 노란빛, 모든 색채에 얽매였다.

‘네 짝지 꿈을 꾼 거야.’

이 꿈을 꾸고 무서워서 매일 밤 깨어나 우는 윤오에게 모두가 하는 말이라곤 고작 이것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호되게 꼬집은 것처럼 자지러지게 우는 애를 보면서도 다들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단 미소를 지었다. 그 꿈 이야기를 더 해 보라 재촉하기도 했다. 떠올리기도 싫은데. 나는 도망치고 싶은데. 죽을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하는데. 어른들이 원망스러웠다.

어른들은 윤오를 대견하게 여겼고.

‘네 짝지는 대단한 분인 게 틀림없다. 윤오야. 앞으로 그 꿈을 항시 떠올리며 몸가짐을 잘해야 한다. 공부도 잘하구, 성실하게.’

할머니는 엄하게 당부까지 했다.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그것이 왜 내가 착하게, 성실하게,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짝지라는 짐승은 나쁘고 불성실하고 악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하여 도망쳐 나온 오늘도 윤오는 그 꿈을 꾼다. 얼음장 같은 외풍보다 무서운 것은 저 위의 크레인이요, 크레인보다 무서운 것은 윤오와 마주한 짐승이다.

최근… 꿈속에서 짐승이 점점 다가온다. 윤오는 그것이 무섭다.

* * *

이제는 잠을 설쳐도 어떻게든 수면욕을 채우는 요령이 생긴 윤오는 조금 부은 얼굴로 수도꼭지를 열었다. 동파를 막기 위해 신문지로 감싸고, 그 위를 담요로 감싸고, 또 스티로폼으로 겹겹이 감싸고도 부족해서 밤마다 물을 쫄쫄 틀어놔야 했다. 그래도 아침이 되면 호스 안에 살얼음이 껴 있었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오는 땅땅 언 발그스름한 볼이 볼록해지도록 야무지게 양치를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멸치볶음을 메뉴로 내놓으시겠다 했다. 커다란 멸치가 아니라 잔멸치에 땅콩 같은 견과류를 조금 부려 넣고 달달하게 졸인 멸치볶음은 언제나 인기가 많았다. 윤오 역시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제가 손질해야 하는 재료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윤오는 마저 입을 헹구었다.

이른 아침부터 커다란 화물 차량들과 콘크리트 차량 등이 줄지어 들어왔다. 겨울 공사는 어려움이 많았다. 콘크리트, 소위 말해 공구리도 쉽게 얼고 해도 늦게 뜬다. 작업 시간도 마땅히 줄었다. 윤오는 차량 뒤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인부들을 보며 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윤오가 지내는 컨테이너는 한식 뷔페 건물 뒤편에 숨어 있어서 저들은 이쪽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오늘은 좀 따뜻하네.”

중얼거린 윤오가 몸을 돌린 차였다. 저 멀리 고급 세단이 보였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미리 공사 현장을 보겠다며 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윤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기 전에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싸구려 로션을 발랐다. 윤오의 피부가 얇아선지 쉽게 건조해져 트는 것을 보고 박 사장이 목욕탕을 운영하는 친구 놈에게서 빼앗아 온 거라고 했다. 윤오는 홧홧한 스킨은 바르지 못하고 로션만 겨우 발랐다. 아버지 냄새가 났다. 조금 우습고 조금 슬펐다.

“윤오 왔냐.”

가게 문을 열고 히터를 켜는 건 윤오의 일이었다.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수도를 틀어놓는 것 역시. 온수가 나올 때쯤이면 믹스커피 석 잔을 탔다. 세 번째 잔을 다 젓고 내려놓으면 바로 그때 박 사장 부부가 출근했다.

야무진 아이였다. 박 사장은 윤오를 아꼈다. 오늘도 어김없이 “커피 드세요.”하고 내미는 얼굴이 말갛고 예뻤다. 성실하고 뒷구녕으로 헛생각하지 않는단 점도 좋았다.

다만, 자랑은 아니나 이런저런 일을 다 보고 겪은 박 사장이라서, 그는 이처럼 예쁜데 욕심 없고 봐줄 뒷배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잘 알고 있었다. 키는 제법 큰데. 차라리 근육이라도 이빠이 키우지. 박 사장은 오늘도 아내에게 타박이나 들을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땅콩 미리 볶아 놓을게요.”

“우리 윤오가 복이야, 복.”

사람을 잘 믿지 않는 박 사장 부인의 예쁨까지 받으니 윤오의 행실이 어떠한지는 굳이 지리멸렬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부부는 다정한 눈빛으로 윤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이 많지 않은 것도 장점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아쉬울 지경이었다.

나이트클럽 뒷문에서 얻어터지고 있는 걸 주워온 건 박 사장이었다. 윤오를 처음 본 박 사장 부인은 이 녀석도 여느 양아치 녀석들과 다를 게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낼수록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히 궁금해진다. 왜 그곳에 있었는지, 왜 반항도 하나 않고 맞고 있었는지.

“잘 잤어, 윤오?”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윤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사실 하나도 잘 자지 못했다. 하지만 윤오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상인지라 잘 잤다고 답해도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는 물엿 좀 가져와요. 달달하게 볶으려니까.”

박 사장이 군말 없이 식료품 창고로 향했다.

남은 믹스 커피를 들이켜던 윤오는 문득 창밖 너머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어제 본 남자였다. 총각김치가 더 있냐고 묻던.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통화 중이었고, 조끼와 헬멧 등 요구되는 복장을 전혀 갖추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당장 상갓집에 가도 될 복장이었다. 흰 셔츠에 검은색 재킷과 트라우저. 춥지도 않은가.

그 때 눈이 마주쳤다. 윤오는 고개를 까딱이고 말았다. 남자는 물끄러미 이쪽을 보다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노골적인 무시에도 윤오는 개의치 않았다.

“윤오야. 준비하자.”

안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돌아서는 윤오의 뒷모습을 창밖의 남자가 시선으로 쫓았다.

* * *

“윤오는.”

총각김치를 찾는 사람이 많아서 오늘 짬짬이 담그자며 김칫소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무청을 아낌없이 넣어서 속만 먹어도 맛있었다. 윤오는 사모님이 손으로 내미는 무청을 받아먹으며 눈을 깜빡였다.

“혹시 부모님은 안 계시니?”

“어….”

“이런 질문 해서 미안한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 말을 하려면 이걸 꼭 묻지 않을 수가 없네.”

부모님은 살아 계신다. 그리고 살아 계실 거다. 곤란하실 수는 있다. 모두 윤오의 도망 때문에.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낯에 박 사장 부인은 어림짐작했다.

“혹시 안 계시거나 인연이 끊어졌으면 말이야.”

반년 전부터 부부 사이에 조심스럽게 오가던 이야기였다. 당사자에게 말로 하려니 혀가 바싹바싹 말랐다. 괜히 매콤한 무청을 씹으며 그는 시간을 끌었다. 윤오 역시 나름 고심에 빠져서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어색한 침묵이 한참 흐른 뒤에 박 사장 부인이 말했다.

“너, 우리 아들 할래?”

“네?”

윤오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1년 반이 넘는 시간을 보면서 윤오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고 눈을 크게 뜬 건 처음인지라, 말을 꺼내기 위해 무던히 쌓았던 긴장이 허무하게 녹아버렸다.

“어머. 너 그러니까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인다. 무슨 여든 세월 산 사람처럼 초연하게 굴더니.”

“사, 사모님. 왜 그런 말씀을… 그러니까….”

“진짜야. 우리가 너 좋아해서 그래. 너 아끼는 건 알고 있었지?”

그야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끽해야 자신을 성실한 직원 정도로 여긴다 생각했다. 윤오는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여유가 없었다. 여유가 없으니 주변을 돌아보기도 어려웠다.

놀란 머리와 간질간질해진 가슴과 달리 입은 밀랍으로 봉한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제안은 감사하다. 그러나 사실은 가족이 있다…. 비록 연락도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도망친 건 자신이지만.

“천천히 대답해도 돼. 정말이야.”

이미 대답을 충분히 눈치챘으면서도 끝까지 다정하게 구신다. 윤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함에 입술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손은 더욱 빨리 움직였다. 지금 당장 보답할 수 있는 게 배춧잎 사이사이 꼼꼼히 속을 채우는 것밖에 없으니 그걸 할 뿐이다.

“어이구. 우리 윤오때문에 이번 김치 짜겠다.”

윤오가 뚝뚝 흘리는 눈물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윤오는 울다가 웃었다.

* * *

“멍청이.”

수첩을 쥐고 있던 윤오가 씹어 뱉었다.

“이것도 모르고. 바보 아냐? 아니, 진짜 바보지….”

감사하나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질질 끌 수 없단 생각에 이만 여기를 떠나 새로 집을 구하려던 참이었다. 월세가 빠듯하지만 어떻게든 벌 수 있겠지 했다.

그런데, 그제야 깨달았다. 집을 구하려면 당연히 신분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걸.

성인은 실종 신고를 하더라도 가출로 분류된다. 만약 사람을 풀어 자신을 찾고 있다면 윤오의 신분증은 노출되는 순간 즉시 제 위치가 발각될 거다. 그렇다고 돈을 써서 가짜 신분증을 만들 생각도 배포도, 돈도 없었다.

윤오는 자신의 턱없는 낙천주의에 그만 질리고 말았다. 스스로를 벌주듯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파묻었다.

학교 성적은 늘 좋았다. 등수도 꾸준히 한 자릿수였고. 그러나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다. 고전 문학과 비문학은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배구와 농구는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쏟아지는 폭력을 막지 못했다. 미분과 적분은 월급에서 어떤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얼마가 떼이는지 분별하지 못했고, 윤리와 사상은 윤오가 사회의 일원에서 툭 떨어진 존재라는 걸 포장하지 못했다.

‘차라리 계약서를 어떻게 쓰는지, 뭐가 필요한지 그런 거나 가르쳐 주지. 갑자기 사회에 내던져져도 사람 구실 할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학교 아니야?’

자괴감에 빠진 윤오는 터덜터덜 컨테이너 바깥으로 나왔다. 오늘도 몹시 바빴고 그런 와중에 김장도 하느라 등이며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그때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돈다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만 원권 백 장 중 한 장을 꺼내고 나머지는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미친 행동도 그만큼 실망해서 할 수 있는 짓이리라.

보증금으로 쓸 수도 없는데. 당장 쓸 수도 없는 돈 중 일부를 꺼내 담배나 피우자 싶었다. 술은 마셔 본 적이 있지만, 나이트에서 억지로 먹인 역겨운 술이 첫 경험이었던 만큼 다시는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남은 일탈 중 만만한 거라곤 흡연밖에 없는 거다.

한순간 목표를 잃은 듯 막막했다. 불안하기도 했다. 빌려 쓰고 있는 컨테이너는 원래 팔아버리려고 했던 거라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지금이야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히 사용할 수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만 컨테이너에서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윤오는 다시는 나이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선 숙식은 제공해 주지만 밤만 되면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오는 손 때문에 제대로 잠든 적이 없다. 먹으라고 준 것들은 대부분 먹고 남은 안주였다. 원래 막내는 기강 좀 잡아 줘야 한다며 부러 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윤오가 팁을 받아 오면 얼굴 반반한 거 믿고 나대냐며 흠씬 팼다. 그곳은 끔찍했다.

차라리 정말로, 내가 고아였다면…. 윤오는 곧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지금 한 끔찍한 생각에 지레 질린 것이다. 아예 밑바닥까지 가려고 하는구나, 김윤오.

윤오는 비틀비틀 새로 생긴 편의점으로 향했다. 날씨가 몹시 추운데도 후드집업만 입고 나온 채였다. 그런데도 춥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머리는 취한 것처럼 멍했다.

“어서 오세요.”

지루함에 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윤오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고개를 까딱이곤 괜히 편의점을 돌았다. 천천히 두 번쯤 돌았는데도 구미에 당기는 게 없었다.

과자코너에서 몽쉘을 물끄러미 보다가 목이 메어 고개를 돌렸다. 친구 중에 꼭 이것만 먹는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군대에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윤오를 잊었을지도 모른다.

윤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카운터로 다가갔다.

“담배… 하나 주세요.”

핸드폰을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흘끗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떤 거요?”

어떤 거?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새로 나왔다며 온갖 색과 홀로그램 코팅으로 장식된 작은 판넬이 보였다. 대충 그걸 가리켰다.

“이, 이거로 주세요.”

아르바이트생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신분증 확인하겠습니다.” 했다. 스물셋이 된 윤오는 설마 신분증 확인을 받을 줄 몰라 거푸 당황하고 말았다. 우물쭈물 망설이는 윤오를 미성년자로 확신한 야간 담당 아르바이트생이 대놓고 짜증스러운 말투로 응대했다.

“미성년자한테는 안 팔아요.”

“저 미성년자 아니….”

“이거 하나 주십시오.”

그 때 뒤에서 손이 나왔다. 카운터에 카드를 내려놓고 슥 미는 손이 무척 컸다. 초승달처럼 생긴 흉터가 드문드문 손마디에 박혀 있었고 시계는 반짝였다. 윤오는 멍하니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얼빠진 멍청한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알바생은 당연하게도 신분증은 묻지 않고 바로 담배를 내밀었다. 윤오가 달라고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정장 재킷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제야 윤오를 흘끗 내려다봤다.

윤오는 작은 키가 아니었다.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늘어선 줄 맨 뒤에 서 왔다. 하지만 남자는 그보다 훨씬 컸다. 눈높이도 눈높이였지만 풍기는 위압감이 윤오를 위축시켰다.

“아….”

자신이 나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윤오는 서둘러 옆으로 비켜섰다.

꼴이 우스웠다. 누가 보아도 완벽한 사회의 일원일 게 분명한 남자와 자신의 처지가 비교되어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결국 도망치듯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문 앞에 서서 뛰지도 않아 놓고 헐떡였다.

조금 뒤, 문이 열렸다. 윤오의 옆에 선 남자가 담배를 물었다.

“그것만 입고 나왔어? 추위도 많이 타면서.”

마치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목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에게 묻는 게 아닌 줄 알았다. 내용이 자신을 가리켰는데도 의심했다.

“어려 보이기는 하네. 스물셋 아닌가.”

“…네?”

윤오가 멍하니 되물었다. 어림짐작도 아니고 너무나 구체적이고 정확한 숫자였다.

남자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다시 곽 안에 넣었다.

가무잡잡한 피부는 그을린 것처럼 건강해 보였다. 눈썹이 짙고 머리숱도 무척 많았다. 조명 아래에서 눈빛이 반드르르 빛이 났다. 어쩐지 기시감을 주었다. 윤오는 매끈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응시했다. 남자의 턱에 미세한 흉터가 있었다. 턱 아래쪽이라 이렇게 올려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래로 내려갔던 시선을 다시 올리니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내내 윤오를 보고 있었던 거다. 분명 입술은 호선을 그리는데도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냉정하게 보였다.

“구경 다 했어?”

무척 낮은 목소리였다. 남자는 시계를 확인했다. 태연한 그 모습에 분명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윤오는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벼랑 끝에 선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도망치고 싶다… 그런 숨 막히는 충동이 든다.

“그럼 이만 가지.”

“네?”

“지금까지 한 말이라곤 ‘네?’ 밖에 없는 건 아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급 세단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사람이 내렸다. 오늘 아침에 윤오가 본, 얼굴에 흉터 자국이 있는 그 남자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혼란스러우면서도 윤오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어리석은 걸 알면서도 충동에 따라 냅다 몸을 돌려 달렸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폐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허우적대듯 달렸다. 그러다 숨이 차 입을 크게 벌렸다.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켜는 순간 허리가 잡혀 뒤로 끌려갔다.

“잡았다…!”

남자는 놀이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윤오는 죽도록 무서웠는데 그는 즐거워 보였다. 아니, 짜증이 난 걸까? 윤오의 양옆으로 남자의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남자의 품 안으로 들어가면서 윤오는 버둥거렸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와 닿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 그런데 얼음장 같은 소름이 아니라 불티가 튄 것 같은 소름이었다. 분명히 처음 만났는데 익숙한 미움과 원망이 마구 솟았다.

“노, 놔! 신고할 거야. 신고할 거예요!”

“신고해. 신고하라고. 그래야 네 부모님도 올 테니. 널 찾았다고 말하긴 해야 하니까.”

“누구세요.”

윤오가 헐떡이며 물었다.

“저희 부모님이 보냈어요…?”

그 말에 남자는 크게 웃었다.

“네 눈에는 내가 선생님처럼 보이기라도 하나. 질문이 많네?”

흥분한 숨결이 느껴졌다. 이곳이 한창 개발 중인 도심이 아니라 사냥터처럼 느껴졌다.

“그래, 김윤오. 나들이는 즐거웠어?”

“놔, 놓으라니… 놔요!”

남자는 윤오를 끌었다. 그러나 계속 몸부림을 치자 결국 들어 올렸다. 윤오는 자신이 이렇게 거뜬히 들렸단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남자는 윤오를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업고는 허리와 허벅지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문 열어.”

어느새 차 앞이었다. 본능적으로 여기서 들어가면 정말 끝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윤오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고, 윤오는 포기하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 문틀을 잡았다.

남자는 그런 윤오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단번에 뒤로 눕혀지고 짓눌렸다. 숨이 막혔다. 성인 남자를 마치 장난감을 다루듯 가지고 논다. 엄청난 힘이었다.

여전히 윤오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남자가 문을 닫았다. 그러곤 운전석에 대고 흘려 말했다.

“출발해.”

“이거, 이거 놔…!”

“너 내가 누군지 알잖아.”

남자가 고개를 기울여선 속삭인다. 그러다 갑자기 귀라도 물어뜯을 것 같아서 윤오는 한껏 긴장했다. 읏, 소리가 나게 어깨를 움츠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상대가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아니까 이렇게 반항하는 거겠지.”

“허억, 헉….”

“네가 어떻든, 나는 좀 반갑네.”

“…….”

“오래 기다렸거든.”

그 가벼운 어투는 얼핏 한숨처럼 들리기도 했다.

* * *

20분 거리였다. 남자의 거처는 고작 20분 거리에 있었다. 윤오도 아는 건물이었다. 작년 말에 입주가 시작되었고, 각 동마다 오직 한 세대씩 있는 펜트하우스 층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애초에 매물이 풀리지도 않고 프라이빗하게 분양되었다고 했는데 남자는 그곳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조차 아예 따로 있어서 윤오는 지레 질리고 말았다.

“김윤오.”

남자는 시계를 풀며 윤오를 불렀다. 시선은 손목을 보면서 남의 이름을 막 부르는 태도에 다소 모멸감이 들었다.

“허튼 생각 하지 마. 여기까지 와서 네가 뭘 더 어떻게 하겠니.”

윤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 이름은 어떻게 아세요. 모든 질문은 이미 차 안에서 무시당한 이후였다. 더 무슨 말을 해야 먹힐지.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윤오는 상황에 맞지 않게 놀라고 말았다. 열자마자 있는 건 복도가 아니라 홀이었다. 복도라면 복도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현관 바깥에 있는 것과는 바닥 재질부터 달랐다.

“내려가 있어.”

“너무 무섭게 굴지 마세요, 대표님.”

지금까지 윤오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한마디 했다. 여기까지 운전해 데려온 이였다.

“그건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고.”

수행원인 듯한 그는 신조의 말에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았다. 윤오는 그를 흘겼다. 수더분하게 총각김치 더 있냐고 하더니, 그마저도 감시가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때 보았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다가가기 쉬운 호감상은 여전히 아니지만 말투가 한결 가벼웠다. 애초에 알던 사이도 아니니 그가 마음먹고 자신을 속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속았다는 분함이 끓었다. 다시 탈 겨를도 없이 문이 닫히자 윤오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

남자는 윤오를 데려와 놓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군다. 복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그를 보다가 인영이 작아진 틈을 타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버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김윤오. 카드 없으면 못 나가니까 안으로 들어와.”

꼴에 자존심이 있어서 저 말에 순순히 따르기도 싫었다. 하지만 윤오는 아직 어렸다. 게다가 밑바닥에서 잠시 구른 경험이 오히려 윤오를 위축시켰다.

나이트에는 질 나쁜 사람들도 많이 왔다. 같잖게 거들먹거리는 이들을 여럿 봤지만, 그들을 모두 합쳐도 이 남자 하나에 댈 수 없을 것 같았다.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남자가 지금까지 주먹질을 하거나 폭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차분할수록 무서웠다. 수틀리면 언제든 때릴 수 있을 거다. 그 악력을 이미 체험했으니, 윤오는 남자가 자신을 혹독하게 다룬다면 저는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을 것임을 눈치챘다.

복도는 길었다. 쭈뼛대며 들어가니 긴 복도를 순식간에 오솔길로 보이게 할 정도의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윤오는 아파트인데도 집 안에 계단이 있는 곳을 처음 봤다. 천장이 높아 소리를 내면 메아리가 울릴 것만 같았다.

벽 전체를 채운 통창을 통해 야경이 보였다. 개발이 진행 중인 터라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운치 있었다.

“편히 앉아 있으라고.”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만 들렸다. 윤오는 먼지 하나 없는 소파를 보고도 그냥 서 있었다. 어디든 앉고 싶지 않았고 무엇이든 먹고 마시고 싶지 않았다.

오 분가량이 지나도 남자가 나오지 않자 윤오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말고 나갈 구석이 있나 뒤지는 모습이 제법 신중했다. 하지만 문을 여는 곳마다 나오는 건 오로지 방. 심지어 두어 개를 빼고는 살풍경하게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가구가 있는 곳 역시 모델하우스처럼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곳은 이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뿐이었다. 윤오는 정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가 그대로 굳었다. 저 끝, 아마도 안방 구역으로 이어지는 문에 남자가 기대서 있었다. 그것도 나체로.

“구경 다 했어? 따로 구경시켜 줄 필요는 없겠군.”

윤오는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조각처럼 굴곡진 남자의 몸과, 어쩔 수 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다리 사이의 살덩이 때문에 숨도 쉬기 어려웠다. 둔한 느낌 하나 없이 허리와 배는 판판한데 그 와중에도 복사근부터 복근까지 공간의 낭비 없이 근육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사람의 몸이라기보다 짐승의 몸 같았다. 모든 것을 사냥과 생존을 위해 쏟아부은 것처럼….

“앉아. 내가 앉히는 게 싫다면.”

남자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 위압감에 윤오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해, 그토록 앉고 싶어 하지 않았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씻고 나왔는지 머리카락 끝이 약간 젖어 있는 남자가 바 스툴에 던져둔 코트로 다가갔다. 코트 밑의 재킷을 뒤적여 꺼낸 건 편의점에서 샀던 담배였다. 담배를 물고 바 위에 있는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져 너른 어깨와 산맥처럼 분명하게 영역을 그리는 등, 그리고 탄탄한 둔부에 궤적을 그렸다. 저도 모르게 허벅지까지 쫓으려다가 윤오는 다리 사이로 보이는 것에 불에 덴 듯 시선을 내렸다.

“김윤오.”

나체로 담배를 피우면서도 사람이 우습지 않고 틈이 없어 보였다. 윤오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못 들어서 그런데. 도망은 즐거웠어?”

“…….”

“인생 경험을 좀 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그냥 두었더니. 왜 멋대가리 없이 지내고 있어.”

“멋대가리 없지 않은데요.”

“그러면. 화장실도 없는 컨테이너에서 지내면서 무슨 멋이 있었는데? 낭만이라도 있었나?”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윤오는 조용히 바지를 움켜쥐었다. 남자는 나른하게 뜬 시선을 천천히 내려 윤오의 주먹을 응시했다. 머금었던 연기를 뱉어내자 서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는데도 그것이 서서히 자신을 옭아매는 것 같아 윤오는 입술을 꾹 닫았다.

“김윤오….”

“…….”

“네가 알아서 잘살았으면 좀 더 기다려도 봤을 거야. 이번에는 포기했을 수도 있지.”

남자의 말은 주어와 목적어가 없는 것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대화가 성립되려면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다.

“누군지도 모를 초면이라, 하시는 말씀도 이해가 안 되네요.”

실은 이미 눈치를 챘으면서 윤오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보자마자 알 거라는 말. 벼락처럼 깨닫지는 못해도 추위가 뼛골까지 스며들듯 윤오는 깨달았다. 그것은 예감에 더 가까웠다.

“왜 모르는 척해?”

남자도 윤오가 이미 눈치챘음을 알았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남자의 옆선은 의외로 수려했다. 투박하지 않고.

그렇게 잠시, 윤오는 모를 상념에 빠졌던 남자가 툭 중얼거렸다. 여전히 엄지는 입술에 붙어 있고 그 말아쥔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조용히 타들어 갔다.

“네가 태어나자마자 널 가지기로 한 사람.”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껐다. 윤오는 차갑게 굳었고, 남자는 그런 윤오를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왔을 때 그는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격식 없이 헐렁한 차림이나 윤오는 안다. 아무런 틈도 없으리란 걸. 한껏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남자는 윤오가 등을 보이는 순간 바로 덮쳐 찍어 누를 것이다.

“네 반응을 보니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 같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절 납치하셨잖아요. 갑자기.”

“네가 도망쳤잖아. 난 도망치려는 건 잡아야 성미가 풀려. 함부로 뒷모습 보이지 마.”

그리 말하며 남자는 뒤로 뻗은 손을 들어 윤오의 뒤통수를 쿡 눌렀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목이 앞으로 톡 밀렸다. 남자가 마음먹고 힘을 썼다면 숨이 막혀서 기절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 나쁜 짓 해 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니 남자가 물었다. 대체 누가 나쁜 짓을 해 달라고 하겠어. 윤오는 상대의 사고방식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좀 괴팍한 것 같다….

“나쁜 짓… 하세요?”

남자는 흥미롭단 미소를 짓고 다리를 꼬았다.

“어떤 종류가 궁금한데?”

어떤 짓을 할 것 같은데, 도 아니고 어떤 종류가 궁금하냐고 한다. 커피 믹스 브랜드라도 묻는 것 같다. 약을 말하면 온갖 약을, 폭력을 물으면 온갖 폭력을 보여 줄 것 같았다.

윤오는 박 사장이 아주 잠깐 말했던 큰집의 금인을 떠올렸다. 금인들은 다 이런가? 모럴의 기준이 고장 난 것 같다. 자연히 드는 무서운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윤오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거 버릇이면 고쳐.”

“뭘요…?”

“입술 깨무는 거. 빨고 싶어지잖아.”

“…….”

도저히 이 남자를 쫓아가기 힘들다. 태어날 때부터 19세 빨간 딱지를 붙이고 태어난 것 같다. 어쩐지 어휘도 조금, 적나라하고.

그래도 일단 계약 아닌 계약을 무시하고 도망친 자신에게 주먹질을 하진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니 멋대로 공포가 자라도록 두지 않고 묻는 게 좋겠다. 윤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 부모님은요…?”

혹시라도 남자가 자신이 사라진 것에 대한 보복으로 부모님에게 해코지라도 했을까 봐 무서웠다. 알면서도 도망친 자기 자신이 가장 끔찍하긴 했지만.

“잘 계시지.”

“정말로요?”

“당장 통화도 시켜 줄 수 있어.”

남자는 다리를 바꿔 꼬고 등받이에 팔을 얹었다. 한껏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니 둘의 처지가 확연히 비교되었다. 윤오는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풀었다. 이미 아가리 속에 다 들어온 먹이 신세였다.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 날이 갈수록 심해졌거든. 오래 참았는데, 네가 사라졌다고 했을 땐 어이가 없긴 했어.”

남자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쿡쿡 찔렀다.

금인은 치인과 맺어진 후부터 발정기를 겪기 시작하고, 치인이 성인이 된 후부터는 발정기를 넘기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짝을 맺은 치인을 일찍부터 집에 들여 같이 키우는 곳도 있을 정도였다. 윤오가 처음으로 짝의 꿈을 꾼 게 다섯 살부터인 걸로 치면, 그는 사회 통념상으로 아주 많이 참은 너그러운 짝인 거다.

하지만 윤오에게는 그런 건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다니. 다른 건 꿈도 꿀 수 없다니. 끔찍하고 무서웠다.

“부모가 싫어? 난 좀 마음에 안 들던데.”

싫다고 하면 당장에 어떻게 해 주겠다고 할 것 같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핑계 삼아서.

그런데 좋다는 말도 선뜻 나오지 않았다. 싫은 것도 아닌데…. 너무 오래 안 뵌 탓일까. 윤오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안 싫어해요.”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가 나직이 웃었다.

“자식이 없어졌는데도 나한테 숨기고 싶단 이유로 쉬쉬하고 변변히 찾지도 않은 채 차일피일 날짜만 미루고 있던 가족도 가족이라고 안 싫어해?”

얼굴이 홧홧하게 붉어진다. 찾지 않았구나….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닐 거다. 저 남자가 직접 찾아올 정도면 보내주기로 한 날짜가 있었던 거다. 마치 예약된 물건처럼. 그래, 마치… 납기 날짜가 있는 납품처럼.

“그럼 나는.”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뒤로 충분히 빠질 공간이 있는데 윤오는 사방이 막힌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어떤데.”

이 남자 진짜 이상하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대뜸 자신은 어떠냐고 묻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나이도 모르고. 호불호가 정해지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첫인상을 떠올리면… 좋진 않지.

“이렇게 데려와 놓고 첫인상을 물으시는 거예요?”

“어. 궁금해. 무척.”

태연한 낯짝과 대꾸에 순간 욱하며 싫은 감정이 치받고 올라왔다.

“…저도 담배 하나 주세요.”

대답 대신 윤오가 눈을 치켜들고 요구했다. 남자는 눈썹을 삐죽 올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조금 전 자신을 쫓을 때와 분명 달랐다. 남자는 보나 마나 호랑이의 피일 것이다. 태몽 같은 꿈을 이미 옛날부터 꿔 왔으니까.

몇 걸음 물러선 남자는 나직하게 웃었다.

“싫은데. 담배 피워? 끊어. 안 좋아.”

하는 말의 앞뒤가 도통 맞지 않다. 행동하고도 일치하지 않았다. 자신은 피우면서 끊으라고 하고, 사람을 멋대로 끌고 와놓고 첫인상을 묻는다. 윤오는 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새빨갛게 익어 이미 붓기 시작한 자신의 입술을 흥미롭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윤오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꽉 쥐며 태연한 척했다.

“저 담배도 많이 피우고 매일 술도 두 병씩 마시고 자요. 속은 썩어 문드러졌고 별로 건강하지도 않아요.”

“그래.”

할머니가 짝 앞에서는 늘 얌전히 굴라고 당부해서 당연히 가부장적인 꼴통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윤오는 7, 80살 먹은 할아버지들이 못마땅해하는 걸 하나씩 시도하고 있었다. 앞에서 담배 피우기, 되바라지게 노려보기.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흥미롭단 태도였다.

“골골대느라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고요. 제가 그쪽을 어떻게 생각하기보다, 그쪽이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할 거 같은데요.”

“넌 내가 너 장기 필요해서 데려온 것 같니.”

남자는 찌푸리듯 웃었다. 사람 속을 긁는 화법에 휘말려 침착하려는 윤오의 의지가 자꾸만 부러졌다. 남자가 고개를 느리게 옆으로 기울였다. 그저 근육을 풀려는 듯한 행동인데도 체구가 커서 움찔하게 된다.

“속이 썩었든 아니든 상관없어. 내 곁에 데리고 있는 게 중요하지.”

“…….”

“게다가… 되바라지잖아. 나는 네가 아주… 마음에 드는데.”

그는 정말로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이 내려와 목을 가볍게 쥐었다. 윤오가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대로 힘을 주면 부러질 게 분명했다. 남자의 무척 뜨거운 손이 맥을 가늠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안은 정말 썩었다고요.”

“그래? 내가 지금까지 본 김윤오 씨의 건강 기록은 아주 깨끗하던데. 사실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흥미를 잃고 손을 뗀 남자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대체 본인이 아니면 열람할 수 없는 진료 기록을 남자가 어떻게 알고 있나 싶었다. 얼굴을 찌푸린 윤오의 눈빛에서 그 뜻을 읽었는지 남자가 가벼이 대꾸했다.

“요즘엔 돈이 아니면 안 되는 게 없어. 나는 돈이 아주 많고,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지.”

그는 손마디로 입술을 가볍게 비볐다. 고개를 돌린 옆모습이 수려했다. 허투루 쓴 선 하나 없이 깔끔하고 단호하게 그은 얼굴. 하지만 윤오는 그 모습이 좋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남자의 성기나 목젖 같은 걸 보고 흥분한 적도 없었다. 도리어 저 우위를 점한 듯한 당연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막 만난 사이다. 남자가 고압적이고 거만하긴 해도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 정도는 아닌데.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뜨거웠다.

“이름은 안 물어보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딴 게 궁금할 리가. 윤오는 그저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곳도 없으면서.

“물어보면 답해 주시려고요?”

“물어보면.”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갑자기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꽤 커서, 윤오는 자신이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확 붉혔다. 그게 아니라며 허공에 젓는 손이 컸다.

“이 와중에도 예의를 차리고 싶어? 역시 너는 순해 빠졌구나.”

왠지 말미에 여전히, 라는 속삭임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말투다. 자존심이 상한 윤오가 짧게 툭 던졌다.

“…이름요.”

웃음이 사라질 때쯤 남자가 다리를 바꿔 꼬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턱을 치켜들고 낮게 읊조렸다.

“범.”

“…….”

“범… 신조.”

범신조. 윤오가 속으로만 따라 중얼거렸다. 신조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아니 통성명의 과정은 더는 필요 없게 되었다. 뭔가를 바라는 듯한 시선을 피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곤함이 물씬 몰려왔다.

“도망갈 구석이라도 찾나 보지.”

신조가 물었다. 조금 찔리긴 했지만 지금은 정말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한 번 도망 좀 쳤다고 신뢰가 바닥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도망을 쳐요. 엘리베이터도 제 마음대로 못 타는데….”

“맞아. 그래서 샀어.”

단추가 마음에 들어서 코트를 샀다는 말도 저것보다는 어렵게 할 거다.

윤오의 인생에 3년은 길었다. 그 시간 동안 워낙 여유 없이 힘들게 살아서 그런지 신조가 얄미웠다. 그가 지금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가지고 노는구나 싶다.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협조하면요?”

“우리 김윤오가 그렇게 순순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

“그리고 협조라는 말은 좀 그렇네. 우리 사이에.”

무슨 사이일까.

신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신조 역시 자신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뒷조사로 얻어낸 지면상 정보밖에 없을 거다. 그런데 대면하니 확실히 느껴진다. 남남이라고 하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인력이 있다는 걸.

불쾌했다. 그 무섭던 할머니가 찍어누르듯 내뱉던 말이 윤오의 자아를 재차 엄지로 짓누르고 있었다. 네 짝 앞에선 결국 순응하게 될 거라고. 그건 싫었다. 윤오는 힘을 주어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이 틀렸단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거다. 다 하다가 남자가 아예 정이라도 떨어지면 좋겠다. 윤오는 일부러 욕심은 많고 머리는 빈 것처럼 말했다.

“부모님은 제 짝이 저를 대학도 보내주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 거라고 했어요. 사고 싶은 것도 사 주고, 가고 싶은 곳도 가게 해 준다고.”

등받이에 걸친 팔로 턱을 괸 신조가 더 해 보라는 양 고개를 까딱였다.

“진짜예요? 다 해 주실 거죠?”

“네 부모가 동화를 잘 쓰는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윤오는 여전히 뭘 몰랐다. 딱 그 나이 또래처럼 제가 다 아는 줄 알지만, 사실 아주 일부만 아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그가 사람들이 보통 싫어하는 인간상을 연기한다 한들 그게 신조에게는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단 걸 몰랐다.

“나는 너를 만나면 묶어서 내 침실에만 두게 할까 했었어. 널 묶은 끈은 아슬아슬하게 화장실 문턱까지만 닿아서, 내가 아니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게.”

윤오는 이를 꽉 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름 끼치는 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농담이겠지. 그러나 천천히 높아진 얼굴을 쫓아 온 시선에는 농담의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윤오는 남자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런 적이 있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치 그런 일을 직접 겪은 것처럼, 저 남자에게 가둬진 자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찰나의 환각 같은 것에 빠졌다 나온 듯이 윤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펜트하우스다. 게다가 현대 사회고. 발목을 묶어 그 줄 끝을 거대한 바위로 짓누르듯이 사람을 가둘 수 없다. 윤오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길들여질 순 있어.”

그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바로 조금 전까지 사람을 어쩌고 어쩐다 했으면서.

“네가 도망친다면 묶어두겠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겠다면 개처럼 배라도 까 보이지. 혼자는 아니더라도 가고 싶은 곳은 가게 해 줄 테고, 갖고 싶은 건 전부 가져다줄 테고. 설령 그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남의 소유라 한들, 그를 죽여서라도 네게 줄게.”

“…….”

“김윤오. 사실은 아주 쉬운 문제야. 너한테만은 쉬운데… 그럴래? 그렇게 할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는 조금은 지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윤오도 피곤이 몰려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자정을 막 넘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폭풍 같은 일을 겪었다. 소파는 푹신했고 실내는 따뜻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눈꺼풀이 무겁다는 게 조금 우스워 윤오는 입꼬리만 까딱이며 웃었다. 자조하며 속삭였다.

“이만 돌아가고 싶어요.”

윤오의 목소리는 졸음에 겨워 몽롱했다. 시간이 어느새 깊어졌고, 윤오는 오늘도 분주히 일하느라 피로했다. 남자는 철옹성 같았고, 힘으로든 말로든 지금 상태로 남자를 이길 리 만무했다. 그래서 힘없이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긴. 늦었는데 자고 가.”

마치 친구와 놀다가 돌아갈 때를 놓친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윤오는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이 걱정하실 거예요.”

“나는 걱정 안 할 것 같고?”

“네.”

윤오의 대답이 칼같이 빨라 신조는 어이없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옷가지를 들고나왔다.

“욕실은 저기 있어. 두 개 중 쓰고 싶은 거 써. 침대 있는 방 아무 데서든 자도 좋고.”

“…….”

평범한 디자인의 잠옷이지만 정말로 평범하진 않다. 만져지는 촉감이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그사이 신조는 담뱃갑과 성냥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지는 않아서 인기척이 여리게 느껴지다가 종내에 사라졌다.

윤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생각보단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보니 미쳤다 싶을 정도로 까불었단 자각만 들었다.

맥이 풀린 그는 잠깐만 누워도 바로 잠들 것 같은 편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지친 와중에 명치가 조금 가벼웠다. 낯익은 가뿐함이었다. 그래, 미리 매를 맞은 기분이다. 아주 조금 속이 시원했다.

차라리 이렇게 잡히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스스로가 실망스러워졌다.

* * *

호텔 같은 집이다. 욕실도 어메니티를 갖춘 호텔 그 자체였다. 윤오는 포장도 뜯어져 있지 않은 샴푸를 뜯어 손에 덜어내며 눈을 깜빡였다. 씻는 중에도 잠이 와서 샤워를 하다가 넘어질 뻔했다.

잠옷을 입고는 기가 차서 웃었다. 남자의 것인지 기장이 모두 길었다. 셔츠는 둘둘 접어 입었지만 바지는 허리 때문에 입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속옷이나마 간신히 걸친 윤오는 그조차 헐렁한 허리 밴드를 붙잡은 채 신조가 사라졌던 방으로 향했다.

“저기요.”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바깥에서 부르니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느긋하게 나오던 신조는 윤오의 꼴을 보곤 우뚝 서서 눈썹을 삐죽 올렸다.

“다 커서 못 입겠어요.”

“그럼 벗고 자.”

“…….”

“같은 사내새끼들끼리 뭐 어때.”

“…….”

같은 사내새끼들을 운운하는 것치고 이쪽을 보는 눈빛이 여간 뜨거운 게 아니었다. 윤오는 정말로 같은 사내새끼라 생각하고 나온 건데, 신조의 눈빛을 보니 위기감이 느껴졌다.

“대충 입고 잘게요.”

“고집은.”

“안녕히 주무세요.”

“그놈의 예의는.”

범신조의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다. 긴장하고 있는 건 당연히 자신이었고 범신조는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우위가 분명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차피 제 건 내세우더라도 저 남자에겐 아무런 가치 없는 값싼 자존심에 불과했다. 윤오는 돌아서려다가 멈칫하고 물었다.

“우리가 정말 짝이 맞아요?”

윤오의 물음이 정말로 예상치 못한 것이었는지 범신조의 표정에 처음으로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보면 느껴지지 않아? 딱 보면 알잖아.”

별다른 설명도 없이 범신조는 추상적인 소리를 지껄였다. 하지만 윤오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묻고 싶은 건 알아보는지 아닌지로 짝이 맞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게 아니었다.

“옛날부터 얼굴도 모르는데도 제 짝이라는 게 미웠어요.”

“…….”

“누군지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데. 그냥 떠올리면 보고 싶지 않고 도망치고 싶고, 밉고 원망스럽고… 무섭고 아팠다고요.”

윤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랜 시간 제 몸의 일부처럼 함께 자란 감정이 버거웠다. 파자마 가슴팍을 부여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바라보던 범신조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런데, 만나니까 그 정도로 밉진 않아?”

“…….”

모르겠다.

처음 편의점에서 봤을 땐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다. 갑자기 알은 척을 하고 쫓아와서가 아니라, 잡히면 안 된단 거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잡히고 마주하니… 혼란스럽다. 매우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온 것처럼 피로하고 멍했다. 미운지 아닌지, 날 내내 괴롭히던 얼굴을 결국 보게 되어 후련한 건지 싫은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건, 남자가 낯설지 않다는 거다.

만난 기억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무서울 만큼 강렬한 인상이고 풍기는 분위기만 아니라면 아름다운 사람이라 한 번이라도 보면 잊을 리가 없으니 확실했다. 게다가 내가 오래도록 꿈으로 만나온 건 남자가 아니라 짐승이었는데.

“우리… 초면 맞죠?”

혹시라도 언젠가 날 보러 왔다거나 그런 적이 있냔 물음이었다.

한참 만에 범신조가 답했다.

“초면이야.”

“…….”

“김윤오 너는.”

역시. 괜한 생각이었다. 피곤에 겨워 이상한 질문을 한 거다.

“아, 혹시 지금 작업 건 건가? 내가 몰라봤나? 미안해서 어쩌지.”

곧이어 놀려먹는 목소리에 진짜로 멍청한 짓을 했구나 싶어 후회가 막급했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든다. 왜 그딴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윤오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할지 고민할 여력도 없는데 시간 낭비였다.

“김윤오.”

이 자리를 피하려는 발걸음이 우뚝 섰다.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잘 자라.”

생각 외로 다정하고 평범한 인사다. 윤오는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남자가 있는 곳에서 멀어질수록 숨통이 트이듯 몸이 점점 가벼워진다. 아니, 몸이 아니라 마음인가.

* * *

침대는 푹신하고 이불에서는 향기가 났다. 윤오는 캄캄한 방구석을 응시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루틴과도 같은 언제나의 꿈을 각오했는데, 눈을 감았다가 뜨니 아침이었다.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든 거다. 왜… 왜 안 꿨지?

당황해서 이마를 짚고 일어났다. 이렇게 깊이 잠든 건 처음이라 현실이 오히려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허겁지겁 침대에서 나와 발을 디뎠는데 무릎이 풀려 휘청댔다. 뒤척이지도 않고 자다가 쥐가 난 것 같았다. 윤오는 구색으로만 둔 협탁을 잡고 제대로 선 다음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여는 순간 향긋한 커피 향이 물씬 느껴졌다. 꿈만 같다.

“여기야.”

저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오는 비틀대며 걸었다. 머리가 개운하고 어깨도 가벼웠다. 낯설어 얼떨떨한 상태로 거실까지 나오니 스툴에 앉은 범신조가 보였다.

“잘 잤나 보네.”

그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성냥에다 종이 신문이라니. 클래식을 좋아하는 건지 고지식한 건지. 윤오가 나오자 신문을 접어 밀어낸 남자가 턱을 까딱였다. 옆에 앉으라는 거다. 윤오는 멍하니 그가 가리킨 스툴에 앉았다.

“커피?”

“……네.”

“따뜻하게 드릴까요?”

뒤늦게 안쪽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았다. 어제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던 그 남자였다. 윤오가 저 사람을 기억하는 눈치자 신조는 “아.”하고 소개했다.

“길다온 실장.”

“길… 다온?”

다온이라니. 사람에 대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길석대, 길욱환, 뭐 그런 이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서 김윤오. 따뜻하게 마실래, 차갑게 마실래.”

“따뜻…한 거로요.”

의외로 평온한 아침이었다. 윤오가 시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무심코 신조의 손목을 보았다가 놀라고 말았다. 어느덧 출근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나는 윤오를 신조가 눈썹을 찌푸리며 올려다봤다.

“저, 저 출근해야 해요.”

“어딜.”

“저 일하던 곳이요….”

“아하. 그곳.”

“제육이 괜찮더군요.”

길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필요 없는 말을 덧붙였다.

“가야 해요.”

허둥지둥 나가려는 윤오의 손목이 가볍게 잡혔다. 윤오는 그 순간 조금 당황했다. 뼈대가 종잇장처럼 얇은 것도 아닌데 신조의 손은 제 손목을 다 감고도 남았다. 그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그만두게 해 줄까, 네가 그만둘래.”

그것도 물은 거라고 할 수 있다면.

“…….”

“대답하기 싫은 모양이네.”

박 사장 내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잘해주신 분들이었다. 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기색도 없이 갑자기 그만둘 수 없었다. 게다가 하필 어제는… 아들이 되지 않겠냐고 묻기까지 해 주셨는데.

신조는 윤오의 표정 변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본인이 지금 어떤 표정인지 알고는 있을까. 그는 가만히 보다가 손목을 놓아 줬다.

“옷 갈아입고 와. 데려다줄 테니까. 길 실장, 컵에 담아 줘.”

윤오는 고개를 꾸벅이는 둥 마는 둥 하며 방으로 향했다. 그를 향해 시린 미소를 띠며 신조가 손가락을 들었다.

“두 잔 더. 김윤오 고용주 가져다드려야지.”

“네. 두 잔은 달달하게 하겠습니다.”

윤오가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둘의 대화는 여상히 이어졌다.

“평소에 믹스 드시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 길 실장이 관찰력이 좋아. 그럼 더 달달하게 타. 곧 유능한 직원을 잃어서 낙심하실 테니까.”

* * *

윤오는 불편함과 어색함에 숨을 쉬는 것조차 의식이 되었다.

당연히 저 혼자 나올 줄 알았는데 신조는 엘리베이터뿐만 아니라 차에도 함께 탔다. 그는 태연하게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두드렸고, 길 실장 역시 평상시와 다를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이에 낀 자신만 우스운 꼴이었다. 누가 보아도 값비쌀 게 분명한 차의 뒷좌석에 타서 출근하는 모습이라니. 게다가 말 한마디 없는 침묵이 불편한 건 저만 그런 것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길 실장이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익숙한 장소가 눈에 보이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일단 오늘 일을 하면서 다음 궁리를 할 생각이었다. 지금 계획으로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부모님 댁에 돌아가서 협상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부모님에게 독립을 허락받고 금인의 발정기 때만 함께하겠다 딜을 하면 먹히지 않을까. 보아하니 신조는 자신을 쫓아왔던 아주 짧은 추격전 외에는 그렇게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이게 최선이었다. 짝이라고 하는, 설명키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감정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서는 짝 같은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래서 윤오는 지금껏 안인처럼 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금인과 치인에 대해서는 일부러 더 기피하고 외면했다. 관련해선 고작해야 몇 마디 학교에서 주워듣는 게 고작이었다. 금인과 치인을 다루는 드라마가 유행하며 신드롬을 일으켰을 때는 아예 TV도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신이 짠 계획이 금인에게 있어선 퍽 엉성하리란 것쯤은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타협을 감안해야겠지.

“감사합니다.”

서둘러 벨트를 풀며 내렸다. 그러나 이대로 자리를 뜰 줄 알았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윤오는 모른 척 뒤를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아마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계획대로 덤덤함을 가장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신조가 쫓아오고 있다.

그가 뒤에 서 있으면 어쩐지 무섭다. 사람이 아니라 다른 게 쫓아오는 것처럼 위압감이 대답했다. 윤오는 온 신경이 등 쪽으로 곤두선 걸 애써 무시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불을 켜고 돌아보니 예상과 달리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과민한 착각이었나? 차도, 신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른 작업을 위해 일찍부터 나온 인부 몇몇만 보였을 뿐이다. 인부들의 발소리를 헷갈렸던 건가.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이 있었는데….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는 와중에도 윤오는 평소 습관대로 움직였다. 믹스 커피를 석 잔 타고 히터를 돌렸다. 열려 있는 밥솥 뒤쪽으로 전선을 모두 연결하고 내솥을 꺼냈다.

“윤오 왔니?”

“내가 말했던 차가 저거라니까. 햐, 누구길래 저런 차를 타고 왔지? 큰 손인가?”

평소보다 들뜬 듯한 박 사장과 평소와 다름없는 박 사장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오는 몸을 돌려 꾸벅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야, 윤오야. 바깥에 차 봤냐?”

“어, 어떤 차요?”

“그게 있지. 내 드림 카가 있는데….”

“아유. 주책은. 윤오야. 됐어. 들어주고 있으면 끝도 없어. 밥이나 안치자.”

손을 내저으며 질색하는 부인과 열의에 찬 박 사장의 모습이 여느 때와 같았다. 윤오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꿈 하나 없이 푹 잠들었다가 깼던 게 오히려 악몽이고 지금이 드디어 깨어난 것만 같았다.

윤오도 말하고 싶었다. 사장님, 제가 피하려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었어요. 그 집에도 가 봤는데 집 안에 계단이 있었구요. 차도 되게 좋았어요…. 그렇게 조잘조잘 떠들고 한바탕 웃고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사모님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윤오를 짤랑, 하는 종소리가 잡아챘다.

“아직 장사 안 합니다.”

“식사하러 온 것 아닙니다.”

정중한 말투 너머로 조소를 띤,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태생적으로 당연하단 듯한 목소리. 윤오는 데인 듯 돌아보았다. 그곳에 범신조가 서 있었다.

“그러면은…?”

박 사장은 거친 밑바닥에서 구른 경험이 있다. 그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그저 좀 뻔뻔하고 시건방진 여느 부동산 업자나 사장 수준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대답하는 어투가 조심스러웠다.

남자는 어울리지 않는 텀블러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앉으라는 말도 없었는데 마치 그가 주인 같았다. 비스듬하게 다리를 꼬고 손으로 앞자리에 앉으라 권하는 태도도 거만했다. 그런데 거부할 수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남편의 경직된 목소리에 안에 들어갔던 부인도 나왔다. 신조는 희게 질린 채 이쪽을 보는 윤오를 보곤 엷게 웃었다.

“여기 직원이 일을 그토록 야무지게 한다고 해서 좀 데려갈까 합니다.”

데려가도 됩니까, 좀 보고 싶습니다, 도 아니고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박 사장은 얼떨떨했다. 여기가 기업체도 아니고 고작 밥집인데. 밥집 직원이 일을 잘한다고 데려가기까지 한단 말인가. 돌아보니 바짝 굳은 윤오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박 사장이 한껏 몸을 부풀리며 물었다. 그의 덩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펴도 남자보다 못했다.

“김윤오의 짝인 금인입니다.”

“짝이요?”

“금인이라고?!”

부부는 거의 동시에 외쳤다. 금인이라는 말에 더 놀란 건 부인이었다. 있다는 건 알지만, 평생 보기도 힘들 정도가 아니라 삼 대에 걸쳐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다는 그 금인이라니. 7년 전에 방영했는데도 아직까지 회자되는 전설의 드라마 주인공이 금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큰집에서 금인을 본 적이 있는 박 사장의 눈빛은 떨떠름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금인이란 아주 짐승 같은 놈들이었다. 발정기가 왔을 때 구속복을 입고도 막기가 힘들어 마취제를 쓰는 걸 그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심지어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양보다 세 배가 들었다.

“김윤오 씨는 치인이죠. 이게 고용을 망설이거나 해고를 할 이유는 절대 아니지만, 그 치인의 가족들이 소식을 기다리며 찾고 있는 데다 그 가족이 될 짝까지 나타난 경우면 말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짝 같은 건…!”

윤오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지금까지 알지도 못했던 타인이 하나 나타났다고 자신의 삶이 달라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자신은 가출한 상태고, 범신조는 얼마든지 가족을 대리해 찾으러 왔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버틸 경우 피해를 입는 건 박 사장 내외일 거라는 건 분명했다….

신조는 주먹까지 움켜쥐고 외치는 윤오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비닐을 덮어둔 식탁을 두드렸다.

“김윤오 씨는 제 것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점지된. 나는 내 짝이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는 건 원하지 않네요.”

태어나기 전부터 남의 것으로 점지되는 게 어디 있나. 그렇다면 태어나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윤오는 부정하고 싶었고 아주 오랜만에 화가 났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내용은 사장님 내외는 물론, 자신이 그나마 마음 붙이고 살던 곳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박 사장에게는 잘 먹혔다. 원초적이고 무식하며 단순한 설명. 그가 살아온 방식에 적합한 설명법이었다.

아무리 인권이라는 게 보편적 가치가 된 현대 사회라 할지라도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게 빈번히 일어나는 일인지 가장 잘 아는 이 중 하나가 바로 박 사장이었다. 그 역시 저 윗대가리의 소유였다. 큰집에 들어가고 나서는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고, 그 안에서도 원초적인 서열 안에 속해 있었다. 손가락을 자르고 나온 이후에도 그는 그 사회를 이해하고 심지어 이용하고 있었다.

소유란 본능의 영역이다. 그리고 사회적 제도가 제재할 수 없는 그늘이라는 건 어디에고 존재했다.

그래도… 아들처럼 아낀, 거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윤오의 일이다. 박 사장은 왜인지 자꾸만 젖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눌러 닦으며 물었다. 내심 윤오가 여기서 내내 있기보단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소유라는 삶의 방식과 별개로,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들었던 발정기 때의 금인의 괴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윤오의 짝이란 것을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확인할 방법이 있는 겁니까, 그런 게?”

“그야 김윤오 씨가 가장 잘 알겠지.”

어느덧 하대를 하고 있는데도 이질감이 없었다. 신조는 윤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마치 이곳에 둘만 있는 것처럼 묻는다.

“넌 알고 있잖아, 김윤오.”

“…….”

부정해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커다란 앞발에 어깨가 눌린 것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알았습니까? 김윤오를.”

“…1년 반, 이제 2년 됩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알았습니다.”

거짓말. 우리 한 번도 만난 적 없잖아. 윤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부터 서둘러 준비해야 점심 장사를 망치지 않는다. 당장 저 사람을 내쫓고 싶었다.

“돌잔치에서 무엇을 잡았는지, 언제 걸음마를 떼고 언제 넘어졌는지. 다 알아요. 우리는 꿈을 꾸거든.”

꿈이라는 건 허무맹랑한 수단이다. 증거도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윤오는 손에 힘이 빠졌다. 저 사람이 이겼다. 그 역시 거의 일평생 신조의 꿈을 꾸었으니까.

‘하늘이 점지해 주시는 인연이야.’

할머니가 하던 말처럼 어처구니없는 로맨틱한 이야기일 때가 차라리 나았다. 윤오는 평생 감시를 당한 기분에 무서웠다.

박 사장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일단은, 우리가 윤오가 없으면 장사가 힘듭니다.”

“지금 당장 데려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모르겠군요. 아, 일에는 차질이 없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시고.”

신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앉을 때 풀었던 재킷 단추를 천천히 여몄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던 순간, 오싹할 정도로 낮은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

“다만 빼돌리려 하거나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고.”

“…….”

“아, 이거는 길 실장이 탄 건데, 달달하니 맛있게 탔다고 합니다. 믹스 좋아한다고 했는데 드시죠.”

협박하는 말과 여상한 말을 능수능란하게 가지고 논다. 휙휙 바뀌는 어조에 박 사장은 이리 회 쳐지고 저리 회 쳐지는 것처럼 얼떨떨했다.

그런 박 사장을 두고 신조가 윤오에게 다가왔다. 바짝 굳은 윤오의 볼을 톡톡 치고는 근사한 연인인 양 인사를 건넨다.

“끝나고 데리러 올게.”

그는 식당 안을 재난처럼 휩쓸고 올 때처럼 제멋대로 나갔다. 윤오는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고, 박 사장은 그 나름대로 심각한 마음이 되어 식탁 한구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멈춰 있었다.

“이리 와. 윤오야, 좀 앉아. 먹어.”

두 남자의 침묵을 깨고 박 사장 부인이 식탁에 자리 잡았다. 고추, 다시마, 연근 등을 직접 튀겨낸 부각을 내놓으며 종이컵에 텀블러의 커피를 따르는 몸짓에 망설임이란 없었다.

당황한 윤오가 밥을 안쳐야 한다고 하니 손사래를 친다. 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박 사장 부인으로선 평생 한 번 보기조차 힘들고, 보더라도 겉으로는 안인과 다를 게 없어서 구별도 못 한다는 금인과 치인을 동시에 만났다는 충격보다 당장 오늘, 그리고 당장 지금이 중요했다.

“지금 그럴 때니. 그리고 삼십 분 잠깐을 못 쉴 짬조차 없는 정도는 아냐. 일단 먹어야 정신을 차릴 거 아냐. 당신도 앉아요.”

그는 여전히 머뭇거리는 윤오를 끌고 와 옆자리에 앉힌 뒤 입에 부각을 쏙, 쏙 넣어줬다. 매운 고추를 튀긴 거라 무심코 한 번 씹었다가 코가 얼얼해졌다.

“당신 지금 이런 거 먹을 때야?”

역정을 내려는 박 사장을 시선 한 번으로 입 다물게 한 박 사장 부인은 제 남편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이래서 남자들이란, 하는 말버릇도 빼놓지 않았다.

“그럼 어쩌겠어. 당장 오늘 문 닫을까요? 보아하니 둘 다 넋이 나갔는데. 윤오야, 일단 먹어. 배가 불러야 머리도 잘 돌아가고 손도 빠릿빠릿 움직이는 거야.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일단 네 하루가 중요하지.”

박 사장은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으니 당연했다. 우물쭈물하던 그는 자신도 하나 먹여달라 했다가 호되게 타박을 들었다. 당신은 손이 없냐, 발이 없냐면서도 윤오에게는 하나하나 먹여주는 손맛이 살뜰했다.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편드는 게 아니라, 말을 해야 그렇게 이루어지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박 사장도 아내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제껏 온갖 사람을 다 만났지만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감이 대단한 이였다. 위험하다는 촉이 마구 발동했다. 손찌검을 한다든가 입이 더럽다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런 찌질하고 못난 새끼들과 달랐다.

박 사장은 심란한 마음으로 연거푸 부각을 입에 넣다가 매운 고추만 여러 개 먹어 캑캑거렸다. 그 탓에 결국 입에도 대지 않겠다 내심 다짐했던 믹스 커피를 들이켰다. 대체 무슨 커피인지 아주 맛이 있었다. 약이 오를 정도로.

* * *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윤오는 종소리가 날 때마다 놀랐다. 박 사장도 마찬가지였는데, 결국 그가 돈 들어오는 소리 같아서 듣기 좋다던 종을 뗀 것은 점심 타임이 끝난 두 시가 다 되어서였다.

반장들부터 일용직까지 모두 식사를 끝내고 나니 밥은 동이 났고, 손 큰 부부가 한 반찬도 모두 끝났다. 바로 저녁을 준비해야 하지만 재료는 미리 손질을 끝낸 상태고, 저녁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숙식 제공 조건으로 고용된 몇몇뿐이라 여유가 있어 남는 시간이 좀 생겼다.

세 사람은 모여 앉았다.

“그래서 아들이 되라는 말을 거절했구나.”

박 사장은 뒤늦은 깨달음에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헛다리였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게.”

윤오는 입술을 씹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나름 신중하게 계획하고 큰 욕심과 무거운 아픔을 겪으며 내린 결정인데도, 말로 뱉으려니 그저 치기 어렸던 어린애가 일을 저지른 짓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장님 부부에게 말하자니 무척 부끄럽지만 오해를 풀려면 수치스러운 진실을 까발리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집을 나왔어요.”

고개를 떨군 윤오의 손이 떨렸다.

“성인이 되면 짝한테 보낸다고 했어요. 그게 싫어서… 제 인생이 거기서 바뀌는 게 싫어서, 아니, 바뀐 것도 아니고 정해진 거였지만. 정해졌단 것도 싫어서 집을 나온 거예요. 부모님은 살아 계세요. 두 분 모두요….”

“…….”

“거짓말을 해서 죄송해요….”

부끄러웠다. 들 낯이 없었다.

하지만 박 사장 부부는 이런저런 풍파를 모두 겪은 이들이었다. 윤오의 결정 정도는 그들이 듣기엔 귀여운 수준이었다. 물론 귀엽다고 그게 우스운 결정이란 건 아니었다.

“윤오야. 너는 어리잖아. 그 사람이 싫을 수 있지만, 오로지 그 이유 하나로 네 인생을 포기하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야.”

“…….”

“영리하게 굴어. 네가 취할 수 있는 이득만 빼먹고, 손해 볼 일은 최소로 할 수 있게 머리를 굴리라는 뜻이야. 너 똑똑하잖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범신조. 그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궤를 같이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철옹성 같았고 감히 자신이 이윤을 뽑아먹을 말랑한 구석이 있기나 할까 싶었다. 흔들리는 시선을 들자 부부가 나란히 윤오의 손을 잡았다.

“운이 좋아서 우리를 만났지만, 앞으로는 운이 좋은 날보다 운이 나빴다 싶은 날이 더 많을 거야. 때로는 없는 게 나을 가족이고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우리는 잘 알아. 하지만 저 남자는 적어도 빼먹을 건 많아 보이잖아. 운이 나쁜 날보단 그럭저럭 괜찮았던 날이 되게 지내 봐. 그래도 안 되면 찾아오고. 또 잡채밥 해 먹자.”

어떻게 보면 당사자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그저 낙관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박 사장 부부기 때문에 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 걸 알았다.

박 사장 부부는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 굴곡진 삶의 중턱에 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일 거다. 그리고 사실, 도망치자는 윤오의 계획도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잖은가.

그래. 발정기 때만 함께하자고 말해 봐야겠다. 윤오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럼 일단 오늘 저녁까지 힘내 보자. 오늘 저녁에 몇 명 온다고 했지, 여보?”

“일곱 명 온다고 하네.”

“껌이지. 그렇지, 윤오야? 수십 명, 아니, 백 명가량 치르고 나면 일곱 명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지?”

윤오는 치받고 올라오는 울음을 참고 끄덕였다.

피할 수 없다는 건 사실 윤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도망치더라도 언젠가 잡힐 거라는 어렴풋한 확신이 있었다. 범신조의 말대로 그들은 서로의 꿈을 꾸니 오히려 남보다 더 잘 알았다. 다만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다. 괜찮다고. 할 수 있을 거라고.

가장 필요로 하던 말을 어떻게 가족도 아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서 듣게 된 것일까.

외로웠다. 언제나처럼.

* * *

박 사장 부부는 퇴근하기 전 윤오를 세게 껴안았다. 그들은 당장 내일부터 윤오가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정작 윤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일도 이곳에 나올 것 같아서 오히려 민망하기만 했다. 제가 남자에 대해 아는 건 범신조라는 이름 석 자와 얼굴뿐인 만큼 남자가 제게 어떻게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모르니 용감한 짝이었다.

윤오는 고등학교 입학식 때부터 입어 온 낡은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그사이 자란 탓에 손목이 드러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익숙한 컨테이너 숙소로 향했다.

칼바람이 부는 늦저녁이었다. 아직 뼈대만 올라온 건물 골조들에서는 그악스러운 바람 소리가 들렸고 크레인의 녹슨 부분은 느릿하게 우짖었다. 윤오는 에이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러니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구두 끝부터 발견하는 건 당연했다.

“늦었네.”

신조는 귀가가 늦은 동거인을 맞이하듯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든 윤오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 속의 신조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안녕하세요.”

왜 오셨어요? 라고 물을 뻔했다.

듬성듬성 잡풀이 난 게 고작인 흙밭 위에 덩그러니 놓인 컨테이너 앞에 있으니 신조는 무시무시한 조폭처럼 보였다. 조폭치고는 너무나 잘생기고 멀끔한 게 옥의 티였지만.

“챙길 거 있으면 챙겨.”

남자가 자신의 의사는 묻지 않고 당연하게 함께 가려 하는 게 싫었다. 이것 또한 어린 치기겠지. 윤오는 스스로에게 새기듯 되뇌었다. 이익만 취하고 손해는 줄이기.

이윽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지나쳐 숙소로 향했다.

“아니다. 그냥 두고 가.”

나무 합판으로 만든 계단을 오르는 윤오의 손목이 잡아채였다. 신조는 눈살을 찌푸리며 잡힌 손목을 보고 있었다.

“버리고 가는 게 낫겠어.”

“…제 물건인데요.”

“물건이라고 하기에는 쓰레기에 가깝지 않나.”

“그럼 제 쓰레기인데요.”

신조가 비긋이 입술을 올렸다. 맹랑한 하룻강아지.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리는 것만 같다.

“우리 김윤오는 쓰레기를 좋아하나?”

“쓰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제 거니까 좋아하죠.”

아, 이익을 취하기에는 글렀다. 적어도 오늘은. 윤오는 얼어서 발음도 뭉개지는 주제에 나불대는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나도 내 거라서 내 거가 쓰레기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건데.”

‘당연하게 자기 거 취급하네.’

윤오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닫힌 문을 보았다가 신조를 봤다. 번갈아 보고는 천천히 손목에 힘을 뺐다.

“안에 제가 모은 돈이 있어요. 그것만 가져갈게요.”

“…….”

“돈은 쓰레기 아니잖아요. 그렇죠?”

고개를 숙인 채 눈만 들어 빤히 보는 시선이 맹랑하다. 신조는 칼바람에 마른 입술을 혀로 가볍게 쓸었다. 건조하여 톡 터진다. 금세 빨간색 실선이 그어진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어서 가져오라는 태도다.

안에서 확 몇 시간이고 미적거려 버릴까. 윤오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계획을 속으로만 종알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보다 약간 따뜻할 뿐이지 신조의 집처럼 후끈한 온기가 돌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곳이 더 좋았다.

정말 좋았나…?

깊은 물음은 씨앗부터 뽑아 버린다. 윤오는 고개를 내저으며 가방을 챙겼다. 가방 안의 돈다발은 비록 신조가 보기에는 쓰레기에 불과할 금액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가진 전부였다. 이 전부가 얼마나 되는지는 신조에게 절대 말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다시 나오니 신조가 가죽 장갑을 당겨 끼고 있었다. 추위 하나 타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인데 의외였다.

“가자.”

그런데 남자는 갑자기 끼고 있던 장갑을 벗더니 윤오의 손을 대신 집어넣었다. 아주 따뜻했다. 보온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남자의 체온이 옮아서였다.

“열나세요?”

“뭐?”

“장갑이 뜨거워서요. 열나시면 기다리지 말지 그랬어요.”

신조는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난 지극히 정상이야. 체온도, 몸도.”

“너무 뜨거운데….”

“금인은 원래 뱀 새끼를 빼고는 체온이 높아. 넌 이런 것도 모르나?”

“네. 금인 치인에 대해서는 안 배웠어요.”

“왜 안 배워. 요즘엔 학교에서 안 가르쳐?”

“듣기 싫어서 졸았어요.”

하하, 하는 너털웃음 끝에 맹랑한, 하는 소리가 스러졌다. 그런데도 윤오는 남자가 맹랑한 자신을 아니꼽거나 괘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그는 조금 즐거워 보였다. 어쩌면 이익을 취할 수도 있겠다.

우선은 이 장갑이 현재 윤오가 가질 수 있는 이익이었다. 손이 따뜻했다. 고작 손을 가린 것만으로도 몸이 훈훈해지니 신기했다.

“좋으시겠어요.”

장갑을 보던 윤오가 톡 중얼거렸다. 신조는 흘끗 윤오를 내려다봤다. 이 머릿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고가 돌아가는지 정말로 궁금해지는 참인 듯했다.

“체온이 높으시면 감기도 잘 안 걸리시겠네요.”

건강 기록이 깨끗하다고 감기도 한 번 안 걸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윤오는 대체로 건강한 데 비해 은근히 감기만은 잘 걸렸다. 차라리 하룻밤 호되게 앓고 털어내면 모르겠는데 미적지근하게 질질 끌곤 해 더 성가셨다. 반쯤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나는 아프지 않아.”

자칫 거만하게 들릴 말을 신조는 당연하게 했다. 어느덧 주차한 차 앞이었다. 윤오에게 차 문을 열어주며 차체 위에 팔을 얹은 신조가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마주했다.

“날 아프게 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드라마 대사처럼 감미롭게 들릴 말이었다. 하지만 윤오에게는 아니었다. 윤오는 고양이가 쥐새끼 생각하는 꼴이라고 느꼈다. 퍽이나. 제가 대놓고 주먹으로 때려도 남자는 코웃음이나 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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